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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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진

집의 신명규, 사간 박증휘, 지평 신정·임상원, 정언 어진익 등이 합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신덕 왕후를 부묘하라는 논의를 삼사가 번갈아가며 계청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전하께서는 들은 체하시지도 않고 계십니다. 인자하시고 효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망설이고 신중히 여기십니까.
삼가 생걱건대, 신덕 왕후께서 생존시에 이미 한 나라의 국모로 계셨다면 승하하신 뒤에 백세토록 종묘에 모시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정론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 의논 드린 신하들의 잘못된 식견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돈독히 생각하였던 태조(太祖)께서는 성대한 예를 갖추어 보책(寶冊)을 바치도록 하고 능침을 높이 봉축하게 하였는가 하면, 효성이 지극하신 태종(太宗)께서는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습니다. 아, 생존시에 사랑하시고 승하하신 뒤에 받드시기를 시종 이와 같이 하였으니, 유독 제때에 부묘하지 못했던 이 일이 어찌 조종들의 본뜻이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 성상께서 조종을 받드는 성의가 깊으시므로 송구스러운 감회를 느끼시어 왕후의 산릉을 옛모습 그대로 복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태묘에 배향하는 의식만은 아직 하지 않고 계시는데 이것이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 논의가 선묘조(宣廟朝) 때에 처음 제기되었는데 지금은 선묘께서 망설이던 것을 이미 모두 윤허하셨습니다. 부묘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 이처럼 고집하시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전하께서 진정 결단을 내리시어 부묘하는 성대한 의식을 속히 거행하신다면, 지하에 계신 모후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속히 예조로 하여금 부묘하는 예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정언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심재(沈梓)·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장선징(張善澂)을 병조 참판으로, 김징(金澄)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7월 2일 계사

승지 김우형을 전옥서에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고, 형조 당상을 명초하여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여 혹심한 더위에 옥에 갇혀 있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 수찬 이선(李選)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3일 갑오

태학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새로 사관(史官)에 천거된 자들 가운데 수망(首望), 부망(副望)으로 뽑힌 자가 사고가 있을 경우 말망(末望)으로 뽑힌 사람이 응강(應講)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신들 내부의 천거 차례는 조정이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도 새로 천거된 자들 중에 수망, 부망으로 뽑힌 사람이 파산(罷散)되거나 향리에 내려갔을 경우 말망으로 뽑힌 사람을 취재하여 응강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멋대로 행동하여 습관화가 되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후로는 수망, 부망으로 뽑힌 사람이 파산되거나 외지에 있을 경우 말망으로 뽑힌 사람을 응강하게 하고, 이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에 혹심한 수재가 났다고 하는데, 매우 놀랍고 우려된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안동의 수재는 참으로 큰 변고입니다. 읍내의 수십 리 땅에 퍼붓듯이 비가 내렸는데 강물은 넘치지 않았으나 북문 밖에 있는 작은 시냇물이 잠깐 사이에 큰 강으로 변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흘러 들어와 객사(客舍)가 무너졌는가 하면, 판관(判官)이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고 영장(營將)도 화를 입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괴변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세자의 회강(會講)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행하지 않자 연일 번거롭게 아뢰고 있으니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품지하지 말고 열한 살이 된 뒤 취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감사와 수령 사이의 상피법을 개정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상에게 건의하기를,
"동성의 삼촌이 조카 사위에 대하여 상피한다는 내용이 《대전》 상피 조항의 원문에는 없지만 작은 글씨로 된 주석에는 있습니다. 이전부터 과거(科擧)의 상피법에 있어서는 원문의 내용을 적용했는데, 지난번 영의정의 진달로 인해 지금은 작은 글씨로 된 주석 내용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수령 사이는 일의 체모가 극히 엄하니, 상피법을 어떻게 도리어 가벼운 쪽으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부터 감사와 수령 사이의 상피는 작은 글씨로 된 주석을 적용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7월 5일 병신

태학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세 번째 상소를 올려 부묘하자는 청을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6일 정유

대사헌 윤집이, 추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7일 무술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정륜(鄭錀)·민점(閔點)을 승지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충청 병사로, 신류(申瀏)를 경상좌병사로, 홍만종(洪萬鍾)을 봉교로, 신익상(申翼相)을 검열로, 김만기(金萬基)을 부제학으로 삼고, 이관징(李觀徵)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승진 제수하고, 이훤(李藼)을 문학으로 삼았다.

 

7월 8일 기해

양사의 여러 관원이 대궐에 나아와 뵙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상의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의견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여러 관원들이 "성상의 옥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다시 와서 뵈옵기를 청하겠습니다."라고 아뢰고 물러갔다.

 

호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7월 11일 임인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본부가 개좌(開坐)했을 때 상제로서 주진기(朱震機)란 사람이 자기 친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서장을 올렸는데, 그 서장 내용을 살펴보니 정상이 매우 애처로웠습니다. 그래서 형조의 전후 작성해 놓은 문서를 가져다가 살펴보았는데 이 옥사를 조사해온 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께서 ‘이 옥사는 보통 살인 사건에 비할 수 없으니 철저히 조사하여 속히 자복을 받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관(推官)들이 유념하지 않을 뿐더러 끝까지 조사하여 결말을 지으려는 조처가 전혀 없었는 데다가, 또 죄수로 하여금 옥에서 공공연히 나와 멋대로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그 태만하고 소홀히 여겨 옥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엄하게 하지 않은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전후 추관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당시 감사는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으니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고, 본도로 하여금 강직하고 영명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이 옥사를 속히 처결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다섯 번째 사직소를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는데, 장원이 전에 본직에 있을 때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경억(李慶億)을 이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선(李選)을 북평사로 삼았다.

 

종실 하양령(河陽令) 이재(李材)가 효묘(孝廟)의 어필을 올렸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준직을 제수하라고 명했다.

 

7월 12일 계묘

봉산(鳳山)·안악(安岳)·신천(信川)·재령(載寧)·문화(文化)·연안(延安) 등 16고을의 세선(稅船)이 3월 20일 바다 가운데서 모두 난파되어 죽은 자가 47명이었고, 상한 쌀이 3천 1백 24석이었는데, 호조의 계사로 인하여 모두 탕감해 주었다.

 

문학 이훤(李藼)이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계(啓)자를 찍어 내렸다.
이훤은 간원으로 있을 때 공주의 집 문제로 엄한 교지를 누차 입으면서도 성상의 교지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진달하는 한편 또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啓)자를 찍어 체직시켰다. 정원이 복역(覆逆)하고 간원이 굳게 간쟁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르러 이훤이 이 직임에 제배되자 상소를 진달하여 이전 일을 대략 언급하고 체직시켜 달라고 청했는데, 상이 또 계자를 찍어 내려 싫어하는 뜻을 공공연히 나타냈으므로, 아랫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탄식했다.

 

7월 13일 갑진

이조 판서 이경억이 상소를 진달하여 사직했는데, 일찍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의 일로 논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삼사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은 요즘 삼사가 논계한 일을 상께서 필시 윤허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미처 아뢰지 않았습니다.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은 선묘조 때에 수년간 논계하여 비록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사세가 이전과 다릅니다. 이미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였는데 부묘하는 한 가지 일만 여전히 망설이고 계시니 여러 사람이 간절히 기대하고 조야(朝野)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양사가 이미 합계했으니 빈청의 계달과 백관의 정청(庭請)이 잇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상께서는 하필 이런 일이 있은 뒤에야 따르려 하십니까."
하고, 좌상 허적은 아뢰기를,
"신이 당초 의논드릴 때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는 것은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는 곤란하게 여겼으므로 상께서 이처럼 망설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따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일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논집하는 것이나 내가 망설이는 것이나 모두 각기 소견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모든 의논에 있어서 온 나라가 일치한 적은 없었는데 이 일에 있어서만 중외가 일치하고 있으니,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조종조 때 처치한 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말할 것 없이 속히 따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지난번 삼사가 청대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
하니, 집의 신명규가 아뢰기를,
"신들이 청대한 것도 역시 이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은 선조조 때와는 다릅니다. 이미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한 이상 신주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신주를 만든 이상 부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예를 의논한 신하들은 ‘한 임금에게는 한 왕비를 배위로 한다.’는 말 때문에 이러한 잘못이 있게 된 듯합니다. 지금 원릉(園陵)의 여러 가지 의식을 차례로 거행하고서 유독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만 망설이며 미루시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촉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런 듯싶습니다."
하고, 지평 신정(申晸)은 아뢰기를,
"이 일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삼사가 이처럼 쟁집하는데 아직도 한 마디 윤허를 내리지 아니하시니, 전하의 뜻이 아무리 신중을 기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망설이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하고, 교리 이규령은 아뢰기를,
"이번 이 부묘례는 순서상 당연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망설이고 계시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신중히 여기시는 것인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신들이 아뢴 것에 대해서 모두 알았다. 그러나 나의 의견을 갑자기 고치는 것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규령이 아뢰기를,
"조종들이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어럽게 여기시는 것이지만 만일 따르신다면 실로 조종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명규가 아뢰기를,
"그 당시 별묘(別廟)를 설치해야 된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의논이 갈라진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별묘라는 것이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교리 김석주가 아뢰기를,
"별묘에 관한 말은 지금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그 당시 유신(儒臣)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는 매우 알지 못한 말입니다."
하였다. 명규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께서 일국의 국모로 계신 지 5년이었으니 참으로 부묘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임금에게 한 왕비를 배위로 한다.’는 옛날 예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 신하들이 들은 말에 집착하여 이 예를 인용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조(桓祖) 이상은 배위가 각각 한 분이었으니, 아마 그 당시 예가 그러했던 것같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의견을 진달한 뒤, 상이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삼사의 관원 1명씩만 남아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게 하였다. 명규가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 합계로 아뢰자 따르지 않았고, 또 공주들의 집에 대해 논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정언 어진익(魚震翼)이 공주의 집에 대해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명규가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 양사가 쟁집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상께서 반드시 지루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공의(公議)가 제기된 이상 중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다. 관아의 집을 철거하여 옮기려고 하는 것은 실로 민가를 철거해야 하는 폐단 때문이다. 대간이 다시 지어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그러한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에 공주의 집을 철거하여 옮기는 일은 어쩔 수가 없어서 하시는 것입니다. 선왕께서 지어주신 집에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상께서 다른 집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재력을 적당히 대주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간의 계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력을 대주는 것은 부조해주는 것뿐이다. 어찌 지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철곶 첨사(鐵串僉使)와 정포 만호(井浦萬戶)를 농삿일이 끝난 뒤 본진에 도로 이속시켜야 하는데 일이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하니,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승천부(昇天府)에 예로부터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철곶으로 진을 옮긴 뒤에 또 별도로 철곶에 별장을 두었습니다. 승천부와 철곶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첨사를 본진에 다시 이속시킬 경우 별장을 그대로 둘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별장을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4일 을사

집의 신명규, 지평 신정이 입계하는 공문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병의 정상을 아뢰면서 겸임하고 있는 성균 좨주, 선공·전의감 제조를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한번 헤어진 뒤 그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다만 더위가 한참 심하고 습도도 높으니, 모름지기 면유한 뜻을 유념하여 가을이 되거든 올라오라. 이것이 내 날로 바라던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근력으로 핑계를 대는가. 전의감 제조에 대해서는 이미 경의 뜻에 부응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황해도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사학 유생 성지선(成至善) 등 2백여 명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거행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5일 병오

이유(李秞)를 집의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이민채(李敏采)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문학으로 삼았다.

 

호조의 홍산(鴻山) 세선(稅船) 3척이 원산(元山)에서 점검을 받지 않고 떠나왔는데, 상이 사공·격군(格軍)의 정죄 계목(定罪啓目)에 대하여 판부(判付)하였다.
"원산에서 점검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지나왔으니, 파선시킨 감관(監官)과 사공·격군들은 주모자를 가려내어 사목(事目)에 의해 처단하고, 파선시키지 않은 감관·사공·격군들은 주모자만 형추한 뒤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도록 하고, 그밖의 사공·격군들은 유배시키되, 전례로 삼지는 말라."

 

경상도 안동(安東)에 홍수가 져서 19명이 익사하였는데,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하였다.

 

7월 17일 무신

어의를 보내어 판중추 송시열의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이때 시열이 청주에 있으면서 이질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7월 18일 기유

이조 판서 이경억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지금은 태평 시대가 아니니, 신하들이 자신의 염치와 지조만을 지키기 위하여 물러가 있을 때가 아니다. 나의 뜻을 생각해서 속히 나와 직무를 수행하라."

 

예조 판서 박장원이 금천(衿川)에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굳이 사양하는 것이 너무 잦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경은 올라와서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장원이 이미 전형(銓衡)의 직임을 사직하고 또 이 직임을 사양하였으므로 상의 비답이 이러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집의 이유(李秞), 사간 박증휘(朴增輝), 지평 이민채(李敏采), 정언 어진익(魚震翼)·정화제(鄭華齊)가 합사하여 아뢰기를,
"합계로 반 달 이상이나 굳게 간쟁했지만,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정성이 엷어서 성상의 뜻을 감동시키지 못한 결과입니다만, 여론이 더욱 답답해하고 공의가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신들이 합사로 간쟁하면서 반드시 청을 얻어 내고야 말겠다고 기필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덕 왕후의 정당했던 명위(名位)와 성대하게 갖추었던 의전(儀典)에 대해서는 전후 말을 올린 사람들이 이미 다 논했으므로, 신들은 감히 다시 이전의 설을 거론하지는 않겠고,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천리와 속이기 어려운 인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달하겠습니다.
아, 마땅히 그래야 하는 천리가 일분이라도 어그러진다면 이는 일분의 천리를 파괴한 것이며, 누구나 똑같은 인정이 일시라도 잘못된다면 이는 일시의 인정을 거스른 것입니다. 모후께서 태묘에 배향되는 것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떳떳한 법인데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는 지가 이미 3백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되었으니, 그 어그러짐과 잘못됨이 어찌 일분의 천리를 파괴하고 일시의 인정을 거스른 데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모후를 존봉해야 할 의전으로 말해 본다면, 이미 고명(誥命)을 받아 임금의 짝이 되었다면 후세 왕위를 이어받은 왕들은 어머니의 도로 섬기는 것이 예이고, 후세 왕위를 이어받은 왕들이 어머니의 도로 섬겼다면 온 나라의 신민들은 모후로 모시는 것이 또한 예입니다. 살아 생전 한 나라의 어머니였는데 죽어서 태묘에 배향되지 못했다는 것을 신들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임금이 선조를 받들어야 하는 의리로 말해 본다면, 원릉(園陵)이 있으면 반드시 침각(寢閣)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침각이 있으면 반드시 태묘에 함께 모시는 것이 또한 예입니다. 원릉은 있는데 침각이 없으면 진실로 예가 아닌 예이며, 침각은 있는데 태묘의 배향이 없다면 실례 가운데서도 더욱 실례인 것입니다. 이렇다면 그 슬픔과 영화, 융성과 쇠퇴에 있어서 생전과 사후가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나는 것이고, 능의 제도와 태묘의 의논이 구별이 있는 것이니, 이를 천리에 부합되고 인정에 따르는 것이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정자각을 세우라는 의논을 기꺼이 윤허하셨는데, 지금 태묘에 들여야 한다는 의논에 대해서는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순차적으로 거행되어야 할 예전을 반은 옳고 반은 옳지 않은 즈음에 두어, 천리로 하여금 거의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게 하고 인정으로 하여금 처음에는 상쾌하다가 도로 답답해지게 하셨으니, 이것이 여러 신하들이 의혹하면서 위대한 천지에 대해서 유감이 없을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게다가 타고난 천성은 귀천의 구별이 없고 느껴 통하는 이치는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법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시원스럽지 못하게 여긴다면 전하의 마음에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며, 전하의 마음에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넘실넘실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도 반드시 석연치 못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다면 깨끗한 제물을 올리고서 흠향하시길 바란다 하더라도 아마 돌아보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흠전이 조종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빨리 고쳐 지극히 당연한 곳으로 귀결되게 해야 하는데, 이미 그것이 의논하는 신하들의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면서도 뒤늦게 의논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겨 반드시 인습하면서 고치지 않고자 하신다면, 구천 지하에 계신 분의 억울함은 풀어질 때가 없을 것이며 한 가닥 공론도 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천리와 인정으로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오늘 간쟁하고 있는 것은 온 나라 공공의 의논입니다. 청컨대 재삼 생각하시어 더이상 망설이지 마시고 빨리 부묘하는 예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9일 경술

헌부가, 충청 병사 이동현(李東顯)이 전에 부정을 저지른 죄가 있으므로 곤수의 직임을 다시 맡길 수 없다고 논핵하며 파직시킬 것을 청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 남이성 등이 여덟 번째 차자를 올려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에 이달 4일부터 10일까지 세찬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렸으므로 목화와 여러 가지 곡식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7월 20일 신해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부수찬으로,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삼았다.

 

합사하여 부묘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하루에 두 번씩 아뢰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입진했다. 영부사 이경석이 청대하여 입시했다. 입진이 끝나자 경석이 아뢰기를,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지 않아서 임금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험삼아 정사(政事)하는 일로 말해 보겠습니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예전에도 비록 물려 행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다음 달 초순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와 같이 미루고만 있는데,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신이 바라는 바는 오직 전하께서 몸소 떨쳐 일어나시는 데 있습니다. 명령을 내리고 직접 정사하여 정관(政官)에게 날짜를 정해 시행하라고 분부한다면 누가 감히 편의대로 물러나 있겠습니까.
작질이 높은 중신은 한결같이 사퇴만 해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는 염우(廉隅)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 인조조 때에는 말미를 주라고 명하면 감히 사직소를 진달하지 못했으며, 비록 죄를 받았다가 서용을 입는다 하더라도 역시 감히 사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염우를 지나치게 요구하여, 탄핵을 받은 뒤 즉시 출사해서 공무를 집행하면 사람들이 모두 염우를 손상시킨다고 꾸짖으니, 시속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경억이 논핵을 당한 일에 있어서 신들은 그것이 논핵할 만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정계한 뒤에는 마땅히 출사해야 하는데 아직도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패초하여 나아오지 않으면 추고하고 다시 불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목 정사가 점점 미루어지니 한결같이 인피만 해서는 안 된다. 이경억을 패초하여 직무를 보게 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이은상(李殷相)이 논핵당한 일을 신은 항상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장선징에게 물어보니, 선징이 ‘당시 들은 바가 있어서 논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처음에는 보궤(簠簋)를 잘 정돈하지 않았다는 말031)  로 범범하게 논계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혹 조어가 자세하지 못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뒤에 그가 범한 바를 논열했다.’고 하였습니다. 은상은 가정의 교훈을 잘 받은 사람이니,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그 사람과 같은 문재(文才)는 쉽게 얻을 수 없는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오정위(吳挺緯)의 일에 있어서도 어찌 그와 같은 데 이르렀겠습니까. 요즈음 떠도는 말은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어떻게 애매한 일로 영원히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탑전에서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대략 진달드렸더니, 장선징이 도승지로서 입시하고 있다가 ‘대각의 논계를 조사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우기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지금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열었으니, 신이 청컨대 그 일의 곡절을 진달하겠습니다.
애초 대간의 계사에서는 단지 파직만 청했고 그 조어도 단지 ‘보궤를 정돈하지 않았다.’고만 했으니, 이는 옛날 재상의 체면을 대접해 주던 것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뜻으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두 신하가 범한 바가 과연 대간의 논계와 같다면 적용해야 하는 율이 파직에 그칠 게 아니고, 만약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라면 하찮은 일반인의 억울함도 풀어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두 신하는 재상의 반열에 있는 데다가 또 상이 일찍부터 중용할 뜻을 두었던 사람인 경우이겠는가.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두어 분변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정위의 일에 있어서는 분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대간의 논계에서 뇌물을 받고 옥사를 봐주었다고 말했는데, 이른바 죄인 네 명은 정위가 곤장을 쳐 죽인 사람이 둘이고, 똑같이 엄형을 가했지만 미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사람이 둘인데, 정위가 갑자기 먼저 체직되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만약 그 문서를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銀)을 빌려주어 장원을 사들인 일에 있어서는 송도(松都)의 문서는 관향(管餉)의 문서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은으로 이자를 놓은 것을 일일이 치부하니, 지금 만약 가져다 상고한다면 역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송시열과 이 일을 언급했더니 그의 뜻도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시열은 나추하여 조사해야 체모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만, 신의 뜻으로는 애초에 단지 파직만 했는데 이미 서용하라는 명이 내린 뒤 이제 와서 나문하는 것은 도리어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지난번 선징을 만나 또 이 일을 말했더니, 선징이 ‘내가 애초에 소문을 가지고 논계한 것이니, 조정이 다시 수용한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신이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나추된 사람에 대해서는 으레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 이번 일을 조사하여 분변하는 것이 어찌 대간에 손상이 가는 일이겠는가. 조사하기 전에 어떻게 다시 수용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문답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은 비록 무거운 죄를 입었다 하더라도 만약 그 사람이 아까우면 과거의 허물을 씻어주었습니다. 반드시 조사한 뒤에 수용하는 것은 옛날의 도가 아닙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은상의 일에 있어서, 죄수를 내보내주고 속(贖)을 받아들여 대부분을 자기 집으로 보냈다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듣건대 받아들인 속전의 원래 액수 및 쓰고 남은 수가 분명하게 문서에 있다고 하니, 조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방납했다는 일에 이르러서는 추적할 수 있는 자취가 없어 조사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에게 질문서를 보내면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방납했다고 하는 것도 표피(豹皮)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설사 참으로 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죽을 때까지 금고되어야 하는 죄이겠습니까. 정위의 재주가 수용할 만하고 은상의 문재(文才)도 아깝습니다. 만약 조사하여 실상을 밝혀낸다면 대간의 계사는 실상이 아닌 소문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은상과 오정위의 일을 아울러 조사하라고 명했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예조 참판 정두경(鄭斗卿)은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으로서 국가에서 추대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시 세상일에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인 데다가 나이가 70세가 넘어 병이 있으므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북관(北關)에 봉심할 일이 있으니, 지금 우선 개차시키고 사고가 없는 사람을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패초하였는데 출사하지 않고 이어 상소하여 벌을 내리고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2일 계축

예조 정랑 조치중(曺致中)을 보내어 지릉(智陵)의 사초를 갈게 하였다.

 

대사헌 이상진(李尙眞)이 사직하고 오지 않자, 체직시켰다.

 

평안도에 홍수가 져서 많은 사람이 익사하였는데, 상이 본도에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전 대장 이완(李浣)을 특별히 서용하였다.

 

7월 23일 갑인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판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참의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이민서(李敏叙)를 사인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이조 정랑 겸 사서로,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좌랑으로, 이윤조(李潤朝)를 검열로, 이완(李浣)을 포도 대장으로, 민응건(閔應蹇)을 경상 병사로, 구문치(具文治)를 통제사로, 노정(盧錠)을 제주 목사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통제사 이도빈(李道彬)이 풍토병이 매우 위중하다고 합니다. 마땅히 바꾸어 차임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훈련 신군(訓鍊新軍)은 자원하여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많으니, 대체로 그 무리들이 훈련 신군의 제도가 어영군과 같다고 들었기 때문에 기꺼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훈련 도감의 이름만 들어도 사지로 나아가는 것처럼 여기니, 훈련 도감은 다른 이름으로 고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초 별대(新抄別隊)’라고 이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훈련 대장 유혁연이 아뢰기를,
"‘훈련’ 두 자를 덧붙여서 ‘훈련 별대(訓鍊別隊)’라고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정초 대장을 따로 차출할 일을 이전에 이미 하교하셨습니다. 병조가 정초청을 구관(句管)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간섭받는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작질이 높은 무장을 중군(中軍)으로 차출하여 금군(禁軍) 별장의 예와 같이 그로 하여금 조련하게 하고 병조는 검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문(軍門)의 체모와 관례로 말한다면 중군은 대장의 일을 행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작질이 높고 재망이 있는 자를 별장으로 차출하여 금군(禁軍) 별장의 예와 같이 그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정초청이 공문서를 보낼 때 도장이 없을 수 없어 본조 군색(軍色) 낭청의 도장을 빌려 쓰고 있는데,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초청 별장 및 낭청의 도장 두 개를 만들어 지급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수어청과 총융청도 도장이 없어서 예조의 봉사인(奉使印)을 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와 총융 두 청의 도장도 마찬가지로 만들어 지급하라."
하였다. 혁연이 아뢰기를,
"훈국의 재정은 모두 양향색(粮餉色)으로부터 지급되는데, 지금 향청의 물력이 앞으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어떤 자는 향청이 관장하고 있는 둔전을 각고을로 하여금 수습하게 했는데 허술한 점이 많으니, 별장을 예전처럼 도감에서 뽑아 보낸다면 수습해서 재정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별장을 혁파한 뒤로 둔전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백성들이 소장을 올려 별장을 차출하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혁파한 것이라 비록 다시 설치할 수 없지만 군사들에게 상을 줄 때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주관하는 신하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니, 호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향청은 본래 각처의 둔전에서 해마다 수세(收稅)한 것으로 기본을 삼고 있는데, 한번 각고을로 하여금 구관하게 한 뒤로는 수세하는 수가 점점 감축되었습니다. 본청으로 하여금 별장을 가려 보내게 한다면 착실하게 수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장을 혁파한 뒤 도로 다시 차출해서 보낸다는 것은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으니, 그들 고을 중 전결(田結)이 가장 많은 곳에만 우선 별장을 보낸다면 거의 실질적인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사포서(司圃署)의 공물을 혁파한 뒤 사옹원에 공상되는 서과(西果) 등의 물품을 정밀하게 가리지 못하여 때때로 점검하여 툇자를 놓고 있습니다. 한 전(殿)의 공상미(供上米)가 17석인데 본조에서 5석을 더 지급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산삼과 도라지 등의 공물을 회복한 뒤라야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서 편의에 따라 하라."
하고, 좌참찬 조복양을 돌아다 보았다.
복양이 일찍이 홍산(鴻山) 세선(稅船)의 사공과 격군, 감색을 모두 효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하여 진달했고, 또 해서의 수군을 조련할 때 강령(康翎)에서 합동 조련하는 잘못에 대하여 말했는데, 상이 며칠 동안을 답하지 않았었다.
이때 이르러 복양이 입시하여 상소 내용을 언급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이와 같았기 때문에 지금 이미 고쳤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지금 호조의 초기를 보건대 죽어야 할 자들이 살게 되었으니, 살리기 좋아하는 성상의 덕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수군의 조련 문제를 가지고 이전 상소의 내용을 다시 거듭하여 아뢰기를,
"조련받는 군사들이 험한 섬을 지나다 보면 뜻밖의 근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감히 진달한 것인데 지금은 기한이 이미 박두했으니 어쩔 수 없는 형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것은 인명이 많이 죽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니, 그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이때 둔전이 각읍의 큰 폐단이 되고 있었고 별장은 피해만 있고 이로움은 없었는데, 주관하는 신하가 사적인 관계의 사람들을 별장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이미 혁파한 뒤에 성상을 속이면서 도로 설치하자고 청하였으니, 그 말이 바르지 못했다. 그러나 상은 깨닫지 못하고 드디어 그 말을 윤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을 내며 안타까워하였다.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봄 가을로 하사하는 미곡을 사양하였다. 애초에 이해가 여러 번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이해는 정상으로 주는 녹도 받지 아니하여 기어이 치사할 뜻을 보이자 대신이 상에게 아뢰어 봄 가을로 쌀 10석과 콩 5석을 주도록 하였다. 이해가 치사한 뒤 봉조하(奉朝賀)의 정3품 녹이 있었기 때문에 봄 가을로 특별히 하사하는 것을 사양한 것이다.

 

7월 24일 을묘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행 판중추부사 정치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라고 계청하는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공론입니다. 삼사의 신하들이 전례를 인용하여 쟁집하고 선비들이 경전에 의거하여 진언하는 것은, 생존시에 일국의 국모로 계셨으니 승하하신 뒤에 백세토록 종묘에 모시는 것이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일 뿐더러 종묘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치는 태양과 별처럼 환한 것으로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일지라도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명하신 전하께서 천리(天理)의 타당함과 인정(人情)의 소재를 통촉하시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만, 지금까지 미루어 오신 것은 관계되는 것이 중대하여 경솔히 거행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나 신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중대한 일일수록 더욱 속히 거행해야 하는 것이지 시일을 끌면서 천리를 어기고 인정을 거슬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태화와 허적이 지난번 어전에서 이 일에 대해 모두 아뢰었고, 삼사가 합사하여 연계한 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윤허를 내려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신들은 이에 대해 더욱 민망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여러 대신들과 함께 빈청에 나와 일제히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의 말을 시원스럽게 따라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경들의 소청이 이러할지라도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사학 유생 성지선(成至善) 등이 재차 상소하여 부묘하자는 청을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관학의 유생이 분소(分疏)했다는 이유로 대사성 이민적(李敏迪)을 특별히 추고하라고 했다. 호조 판서 김좌명이 이어 입시해서 진달하기를,
"유생이 상소하였는데 며칠째 머물려 두고서 아직도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시는데,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공상할 물품을 호조에 책임지웠기 때문에 시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전부터 관학의 유생은 분소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 유학(幼學)이 특별히 상소를 진달했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온당하지 못하다. 정원은 어째서 받아들였는가. 대사성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라."
하였다.

 

개성부(開城府) 생원 이익겸(李益謙) 등 24명이 상소하여 부묘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홍산현(鴻山縣) 세선(稅船)의 감관·색리·사공·격군들을 논죄하는 일에 있어서는 마땅히 판부대로 거행해야 합니다만, 감관·사공·격군 가운데 주동자는 이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고 따라 행동한 자들은 모두 차율(次律)을 적용해야 합니까? 배마다 각각 색리가 있는데, 색리는 판부 안에 들어 있지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한 배 안에서는 사공이 주인이고 격군은 그 수하로 배의 운행과 정지를 모두 사공의 말을 따라 하는 만큼 배를 난파시키지도 않은 격군들이 모두 차율을 적용받는 것은 역시 너무 무거울 듯합니다. 이번에 판하한 내용은 나중에 법이 될 것이니, 하나하나 확실하게 내용을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동자를 사목에 따라 처단할 경우에 감관 이하 사공들에게는 모두 전가 사변의 율을 적용하고, 주동자에게 전가 사변의 율을 적용할 경우에 이하 사람들에게는 모두 정배시키는 율을 적용하라. 격군들은 간악한 짓을 한 자 외에는 모두 도년의 율을 적용하고, 색리들은 감관들과 똑같이 논죄하라."
하였다.

 

금부가,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 등에 관한 조사 건을 형조에 이송하여 거행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장령 송창(宋昌)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전 참판 이은상과 오정위의 일에 대해서 대신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사실을 조사하라는 분부가 막 있었다고 하는데, 신은 이에 대해 온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초 논핵한 것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이상 진실로 사실을 변핵할 만한 단서가 있다면 그 일을 논핵한 신하들도 소문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풍문을 가지고 일을 논핵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이상 소문을 듣는 대로 논핵하는 것은 바로 대간의 직책인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데에는 자연 공론이 있을 것인데, 지금 와서 조사하게 하는 것은 또한 나라의 체모를 손상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당시 논계에 참여했던 사람인데, 논계한 일이 조사를 받게 되었으니 지금 대간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서 다시 논열할 수 없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상이 시강원에 하교하기를,
"조종조에서 세자가 어린 나이로 입학할 때에는 《소학》의 제사(題辭)를 강하게 했는데 매우 온당한 일이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니, 강원이 상의 분부를 사·부·빈객들에게 물어보자고 청했다.

 

7월 25일 병진

대신이 2품 이상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이전의 청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미 어제의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8월 24일에 왕세자의 입학례를 거행하기로 정했다.

 

7월 26일 정사

대신이 2품 이상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이전의 청을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조 판서 김좌명, 예조 판서 박장원이 정릉(靖陵) 정자각 중건청의 당상이 되었는데, 정릉(貞陵) 중건청의 전례대로 각읍으로 하여금 접대를 내게 하지 말고 선혜청으로부터 양찬 가미(粮饌價米)를 지급하게 했다.

 

7월 27일 무오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고, 삼사가 연계하여 더욱 간절하게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대신이 진달한 것에 따라 전 참판 이은상·오정위 등에 대해서 다시 사핵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대체로 대간이 논계한 것이 간혹 사실과 틀린 것이 있을 경우 그 진실은 여러 사람의 의논에서 자연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사핵하게까지 하는 것은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또한 훗날의 무궁한 폐단이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국조(國朝)에 없었던 일입니다. 더구나 대각의 신하들이 일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들은 소문에 따라 논할 수 있게 허락하였는데, 만약 논한 것을 일일이 조사하게 한다면 이것은 송사하는 자리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공론을 엄하게 여기고 대각을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정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니, 사핵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달 쟁집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어진익이 영해 부사(寧海府使) 정승명(鄭承明)을 논핵한 일에 있어서 사실과 틀리게 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였고, 대사간 강백년, 사간 박증휘, 정언 정화제 등이 일을 논함에 있어 사실과 틀리게 했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물러났다.

 

중화(中和)의 교생(校生) 김애격(金愛格)의 아내 봉생(奉生)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애격이 남의 무함을 입어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살해되었다는 그 사람은 실제로 죽지 않았었다. 봉생이 자기 남편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여 기어이 복수하려고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산사(山寺)와 들과 마을을 찾아다닌 지 14년 만에 끝내 원수를 찾아내어 관아에 고발하여 죽이게 함으로써 남편의 원한을 깨끗이 씻었다.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전고에 드문 일이라고 하였는데,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이 사실을 아뢰자 이 명을 내렸다.

 

7월 28일 기미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유, 장령 이광적, 지평 신정·이민채 등이, 이동현(李東顯)이 청탁을 도모한 정상을 논핵했다가 곧바로 정계하여 물론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때 동현에 대한 논계가 이미 며칠째였는데, 동현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청탁하고 다녀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유 등이 청탁을 도모한 정상을 논계 안에 언급했다가 얼마 안 되어 정계해서 물의가 있었던 것이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입학할 때 《소학》의 제사(題辭)를 진강하는 일에 대해서 사(師)·부(傅)·빈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 영의정 정태화의 의논은 ‘근래에 왕세자가 입학할 때 으레 《대학(大學)》의 경 1장(經一章)을 진강하였지만, 《소학》의 제사도 조종조 때 진강한 사례가 있으니 지금 그대로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고 하였고, 좌빈객 박장원, 우빈객 조복양도 사의 의견과 같았습니다. 우부빈객 민정중의 의논은 ‘옛날 예법에 소학과 대학을 가르치는 것이 각각 달랐다. 대학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궁리(窮理)·정심(正心)·수기(修己)·치인(治人)의 도리를 교육시켰는데, 천자의 원자(元子) 이하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맡을 사람들에게 모두 이러한 도리를 교육시켰다. 지금 왕세자가 입학하는 의식에 있어서 역시 이 고례를 준행해야 할 것이다. 이미 대학에 들어갔는데 소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진강하는 것은 옛 사람이 수기 치인하는 도리를 교육시킨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더구나 왕세자는 나이가 비록 어리긴 해도 학업이 이미 진보된 상황에 있으니, 입학하는 날 《대학》의 경 1장을 수강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고 하였습니다. 부 송시열은 외지에 가 있는데, 사와 빈객의 의논이 이러하므로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도목정이 있었다. 윤문거(尹文擧)를 우부빈객으로, 이익을 대사간으로, 이정기를 대사성으로, 민정중을 공조 판서로, 이원정(李元禎)을 공조 참판으로, 조성보를 사간으로, 오정창을 설서로, 조사석(趙師錫)을 겸설서로, 이규령을 수찬으로, 정재숭을 승지로, 민점을 병조 참의로, 오시수(吳始壽)를 참지로, 신명규를 집의로, 경최를 장령으로, 정중휘·이후징을 지평으로, 이단하를 응교로, 나이준(羅以俊)을 교리로, 김덕원(金德遠)·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정륜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평안도·황해도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9일 경신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고, 옥당이 열한 번째 차자를 올려 청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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