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심유(沈攸)가 추감에 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병조 참판 임유후(任有後)를 체직시키라고 한 간원의 논계에, ‘그가 처리한 일이 그의 몸에 큰 누(累)가 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집안의 변고를 처리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임유후에게 형편없는 아우가 하나 있는데, 그 숙부(叔父)를 무고(誣告)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또 음증(淫蒸)을 했다고까지 뒤집어씌워, 마침내 그 숙부를 곤장을 맞다가 죽게 하였습니다. 임유후가 자기 동생이 숙부를 무함해 죽인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어미의 명으로 글을 지어 사당에 고하고 그 동생과 의리를 끊고 종신토록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미를 모시고 멀리 영해(嶺海) 밖에 나가서 지낸 지가 20여 년입니다. 사람들이 실로 그의 불행을 딱하게 여기며 그의 지조를 고결하게 여깁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임유후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어야 바야흐로 잘 처리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효성과 우애에 있어서는 실로 남보다 뛰어나 6년 동안 죽만 먹고 지내어, 보는 사람들이 감동을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등용한 것과 공론이 모두 그를 허여하는 것이 어찌 다만 글재주 때문만이겠습니까. 행실도 있고 글도 잘하는 사람이 머리가 허연 나이에 겨우 등용이 되었는데, 간관이 경솔하게 논핵하여, 무고한 재신으로 하여금 그릇 ‘몸에 누(累)가 있다.’는 누명을 쓰게 하였으니, 물정이 모두들 놀랍게 여깁니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일 정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아,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와 시변이 달마다 생기고 가뭄과 수해가 서로 잇달아 없는 해가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며 편안할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더욱 참혹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 보리가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미칠 것같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백성은 양식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법인데, 백성들이 곤궁을 당하고 있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마음이 급하다. 넓은 대궐이 무엇이 편안하겠으며 먹는 것이 무엇이 맛있겠는가.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도리에 더욱 힘쓸 것이며, 자신을 꾸짖고 허물을 반성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려 한다.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지어서 널리 바른말을 구해서, 나의 부족한 바를 돕게 하라. 내가 덕이 없어 하늘에 죄를 얻었는데 여러 신료를 면려시키자니 실로 마음이 부끄럽다. 오늘날 인재가 비록 없다고는 하나 어찌 모두 쓸모없는 사람이겠는가.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도를 따르며,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함께 공경하고 화합하라. 위아래가 서로 덕을 닦고 바로잡아 주면 어찌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겠는가. 반찬 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즉시 거행케 하고, 또한 천관(天官)으로 하여금 인재를 발탁하게 하여 낮은 직위에 침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5월 3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이, 성상의 하교를 그대로 중외에 반포하여 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5일 경신
상이 하교하였다.
"가뭄의 재앙이 여기에 이르렀다. 서울의 죄수들은 이제 소결을 하였다만, 외방에도 필시 억울함을 품고 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을 터이니, 심리하는 일을 즉시 시행하라."
김만기(金萬基)를 승지로,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이옥(李沃)·박지(朴贄)를 정언으로, 이정영(李正英)을 호조 참판으로, 신익상(申翼相)을 봉교로 삼았다.
중일(中日) 유엽전(柳葉箭) 쏘기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킨 차용업(車龍業)을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정미년에 본조가 ‘왕세자 책례(冊禮) 후, 삼명일(三名日) 및 내전(內殿) 탄일(誕日)에 진하를 할 때에 왕세자가 행할 진전(進箋), 치사(致詞), 진표리(進表裏) 등의 일을 마련하여 거행할 것’으로 진달하여 여쭈었더니, 상께서 ‘관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분부하여, 권정(權停)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관례를 이미 행하였으니, 이번 중궁전 탄일 진하시에 왕세자의 치사와 진표리를 전례대로 마련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소결청(疏決廳)이 아뢰기를,
"심리하라는 명이 있어서 소결 문서를 여러 당상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비록 모두 수정(修整)이 끝나지는 않았으나 그 가운데 형조 참판 이원정(李元禎), 판윤 민희(閔熙),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에게 준 것은 모두 수정을 마쳤습니다. 만약 여러 당상들이 수정을 끝마치기를 기다려 거행을 한다면 점점 지연될 것입니다. 더구나 죄인을 소결하는 것은 가뭄을 구제하는 하나의 방도입니다. 내일이 비록 기우제 재계를 하는 날이기는 하나 그 수정한 자부터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내일 소결하라고 명하였다.
전에 중외의 죄수가 적체되어 오래도록 판결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죄를 지어 오래도록 판결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관청을 설치하고 여러 당상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대신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관청을 소결청(疏決廳)이라고 하였다.
5월 6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심리(審理)를 행하였다. 대신, 금부·형조·소결청의 당상, 삼사의 장관이 모두 입시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사면(赦免)이 있으면 도년(徒年) 죄인들은 모두 사면 대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도신이 감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품질(稟秩)에 올려두면 해조가 혹 석방하기도 하고 혹은 그대로 두기도 하니, 고례(故例)가 아닙니다. 이번 심리에서는 죄가 무겁거나 가볍거나 간에 모두 석방을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년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석방된 자가 모두 4백 76명이었다. 판중추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이 가뭄의 재앙에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심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다만, 외방에는 옥송(獄訟)이 지연되는 폐단이 더욱 심하여 혹 10여 년씩 지체되기도 하니, 원통한 기운이 꼭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습니다. 어저께 소결할 때에 이미 외방에 명령을 내려, 속히 평번(平反)을 하고 옥사가 의심스러워 판결하기 어려운 자는 서울로 계송(啓送)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북관(北關)에 갔을 때에 들으니, ‘유배된 자들이 너무 많아 주객이 함께 곤궁을 겪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관(南關)으로 이배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을 기한으로 옮겨 배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나아가 소결청 문안(文案)을 읽자, 상이 조목조목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많은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심리를 마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양주(楊州)는 남편을 죽인 죄인이 태어난 곳으로서 장차 그 수령을 파직해야 하겠는데, 변고는 지난해에 일어났고 목사는 올봄에 부임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고가 일어난 당시의 수령을 파직하라. 앞으로는 이것을 영구히 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상이 ‘사헌부의 금조(禁條) 계초(啓草)’를 가지고 허적에게 이르기를,
"금군(禁軍)의 기마(騎馬)를 금지하지 않는 일은 어찌 선조(先朝)의 수교(受敎)가 없겠느냐?"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군관(軍官) 출신(出身)이 혹 양반이면 금지하지 않아도 되겠으나 상한(常漢)은 말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색(白色)과 회색(灰色) 모자(帽子)를 금지하는 것도 수교가 있으니, 금조(禁條)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그리고 백색 표의(表衣)도 금지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홍중보가 아뢰기를,
"저포(苧布)를 청색(靑色)으로 물들여 옷을 만들어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어찌 굳이 백색으로 옷을 만든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족(士族)들이 순백(純白)으로 옷을 해 입는 것도 역시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7일 임술
상이 또 희정당에 나아가 죄수를 심리하였다.
평안도 영변(寧邊) 등 다섯 고을에 연일 우박이 내렸다.
5월 9일 갑자
헌납 이훤이, 추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10일 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추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일렀다.
"가뭄의 재앙이 이토록 혹심하니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다. 8차 기우제를 대신을 보내어 거행하라."
5월 11일 병인
왕세자 관례 때의 빈(賓), 찬(贊), 집사(執事)들을 논상(論賞)하였다. 주인(主人)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과 빈 좌의정 허적에게는 모두 안구마 1필씩을 내리고, 찬 판서 박장원에게는 말을 내리고, 전교관(傳敎官) 좌승지 정익과 작례관(酌醴官) 사옹원 부제조 창성 도정(昌城都正) 필(珌)에게는 모두 자급을 더해주고, 세자사(世子師) 영의정 정태화에게는 말을 내렸다. 그 나머지 여러 집사들에게는 각각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5월 12일 정묘
정언 이옥(李沃)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우윤 조한영(曺漢英)은 품질이 높은 재신으로서 거상(居喪) 중인 여자를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예속(禮俗)을 무너뜨리고 진신들에게 욕을 끼친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장관(長官)과 더불어 회좌(會坐)하여 이것을 논계하고자 하였는데, 오랫동안 의논을 하였으나 의견이 끝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이 가볍게 보여서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도 인피하기를,
"조한영에 대한 일이 갑자기 석상에서 발론되어, 일찍이 듣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더욱 상의해서 결정하려고 한 것인데, 동료가 먼저 인피하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장령 정중휘(鄭重徽)와 경최도 ‘일찍이 송자(訟者)의 정장(呈狀)을 인하여 조한영이 상중의 여자를 취한 일에 대해서 들었는데, 즉시 논계하지 않았으니, 감히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역시 인피하였다.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아뢰어,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정재숭(鄭載嵩)을 호조 참의로, 권유(權愈)를 주서로, 이규령(李奎齡)을 부교리로, 이익(李翊)을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헌납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참지로 삼았다.
장령 정중휘 등이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내사(內司)가 사사로이 창고를 채우는 폐단과 세속에서 사치를 숭상하는 폐습’에 대해서 말하고, ‘궁금에서부터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내기를 독실히 실천하여 먼저 본원을 닦고 하늘과 덕이 합치되게 하여 재변을 해소할 방도를 극진히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상이 따뜻한 말로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황해도 풍천(豊川)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경기 마전(麻田)에 이달 9일에 우박이 내렸다. 교하(交河) 등 아홉 고을에 황충이 크게 번졌다.
좌참찬 송준길이 중로(中路)에서 상소를 올려, 본직 및 겸대한 직책을 해면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밝으신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전후로 올린 경계의 말씀을 유념하시어, 건강을 돌보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시고 하늘을 대하는 정성을 더욱 돈독히 하셔서, 세자에게는 본보기가 되게 하시고 우러러보고 있는 신민들에게 위로가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허전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오직 경이 가을을 넘기지 않기를 바란다. 상소의 끝에 말한 일은 내가 마땅히 더욱 유념하겠다. 경은 마음을 편안히 갖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3일 무진
밤에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모양이 병(甁)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5, 6척이었는데, 꼬리 흔적이 흩어져 없어졌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응교 홍주삼(洪柱三) 등이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고, 또 경연을 오래 폐지한 것과 금원(禁苑)에 놀이를 나가는 잘못에 대해서 진달하고, 청하기를,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하여 몸을 기울여 치도를 도모하고 불쌍한 자들을 돌보고 폐단을 혁파해서, 공경한 자세로 하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끊이지 않게 하소서."
하고, 이어 청하기를,
"내사(內司)의 죄인으로서 정배된 자들을 해조로 이송하여 일체 소결하소서. 각도 수군(水軍)으로서 신역(身役)이 무거운 자들에 대해서도 병조로 하여금 물어서 변통하게 하소서. 대동미(大同米)의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 및 각색 보미(各色保米)와 노비 공포(奴婢貢布) 가운데 아직 납부하지 않은 것을 모두 물려서 받아들일 것을 허락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재변을 해소시키는 데에 하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가뭄의 참혹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일을 말하자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같다. 지금 차자의 글을 보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경계하여 깨우친 말을 내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의논해 처리할 일들도 여쭈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과 마주 앉아 가뭄을 걱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의 저축이 거의 바닥이 나서 진구하는 정책도 두루 베풀 수가 없으니, 더욱 염려스럽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안민창(安民倉)은 백성들이 매우 고역으로 여긴다. 명령을 어긴 자들을 모두 정배하게 하였는데도 여전히 때맞춰 배를 띄우지 않으니, 대개 안민창에 일나가는 것을 죽음의 길로 나가듯이 여겨 피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태안(泰安)과 서산(瑞山) 등의 고을의 옥(獄)이 모두 가득찼습니다."
하였다.
살피건대, 안민창은, 태안포(泰安浦)의 남쪽과 북쪽에 설치하여 남쪽에서 오는 세선(稅船)은 남창(南倉)으로 수송을 하고 남창에서 북창(北倉)까지는 말로 실어나르고 다시 배에 실어서 서울에 이르게 한 것인데, 대개 태안의 산 모퉁이가 바다 쪽으로 들어가서 암초를 이룬 곳의 험난함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의논은 판중추 송시열이 처음으로 내서 건의하여 설치한 것이다. 그의 말에 ‘수만 곡(斛)의 쌀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물에 빠져 죽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람이 잔잔할 때에 배를 띄워서 뱃길에 조심스럽게 암초를 피하면 된다. 공사간에 배로 운송을 하면서 패선시키지 않고 잘 운송한 자들은 예로부터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만에 하나, 파선이 되어 곡식이 상할까 염려하여, 크게 백성들을 사역시켜 창고를 짓고 육로로 운반을 하여 짐을 내렸다가 다시 실어서 나르니, 공력과 낭비가 배나 심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대신에게서 발론된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오직 감사 민유중(閔維重)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이 편리하지 않다는 것을 말했으나, 또한 즉시 혁파하지 못하였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형세가 궁해지고 폐단이 극에 달하여 끝내 시행할 수가 없게 되고 나서야 혁파하였다. 조정에서 일을 하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어기고 억지로 이해를 따져서, 그 행할 수 없는 것을 반드시 행하고자 하였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경상도 유군포(留軍布)는 모두 감사가 사사로이 보관을 하는데, 조정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에게 일임하여 사사로이 사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국에서 먼저 그 숫자를 알아본 뒤에 가져다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사 유혁연이 아뢰기를,
"관향(管餉)의 여러 둔전(屯田)에 투입한 백성들은 이미 군오(軍伍)에 편성을 하였습니다만, 아마 빠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다시 신칙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서북(西北)의 내노비(內奴婢)들이 모두 산골로 들어가 유민(流民)이 되어 스스로 한량(閑良)이라고 칭하는데, 사실은 공천(公賤)입니다."
하고, 유혁연이 아뢰기를,
"또한 각 아문의 군관 및 보인이라고 거짓 칭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조사해 내서 정역(定役)하고 있는데, 군관은 신역이 있는 자라고 해도 겸하여 소속시킬 수가 있으니, 불가불 한쪽으로 정탈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인이라고 하거나 각 아문의 군관이라고 거짓 칭하는 자들은 모두 일체로 정역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사명을 받들고 북로(北路)에 갔을 때에, 와서 호소하는 백성들이 모두들 상정법(常定法)이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민정중이 감사로 있을 때에 양전(量田)을 실시한 뒤 상정법을 만들었는데, 그 제도가 대략 대동법을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혹 막히고 불편한 곳이 있었고 역졸과 내노비들이 더욱 원망이 많아 자못 흩어져버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 뒤의 감사는, 그것이 계문한 일이었기 때문에 변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폐단이니,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감사로 하여금 잘 헤아려 변통하고 조목별로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정평(定平) 갑사(甲士) 박대유(朴大有)와 문천(文川) 향리(鄕吏) 전무적(全茂績)이 단지(斷指)하여 그 부모를 살렸으니, 포상하여 장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정표(旌表)하는 일을 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4일 기사
대사간 강백년이 패소(牌召)에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부제학 이민적이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임어하신 지 10년 동안에 덕을 잃은 일이 없는데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치는 오류를 답습하는 데에서 폐단이 생겼고 세속은 구차히 동조하는 데에서 무너져서 공리(功利)를 위한다는 의논이 성행하여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아, 원망이 쌓이고 쌓여 하늘의 마음을 흔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일을 하실 때에 매양 ‘고사(故事)’라는 이유로 중난하게 여깁니다. 이른바 고사라는 것은 혹 여러 대 동안 내려온 폐습에서 나왔거나 혹 혼조(昏朝) 때의 어지럽던 정치에서 유래된 것인데, 궁금(宮禁)의 용도는 줄일 만한데도 매양 고사라고 하시고 제궁(諸宮)의 제산(制産)은 줄일 만한데도 또한 매양 고사라고 하시고 백사(百司)가 침탈하는 것을 줄일 만한데도 또한 매양 고사라고 하시고 심지어는 감장(監掌)이 까탈을 부려 뇌물을 받고 서리(胥吏)들이 뇌물을 요구하며 긁어 들이는 것이 원봉(元俸)의 몇 배가 되는데도 또한 고사라고 핑계대며 괴이하게 여길 줄을 모릅니다. 재화는 백성들의 마음인데, 설만하기가 이러하니,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어린애를 돌보듯이 한다.’는 정치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소 신료들이 모두들 구차한 생각을 품고, 말하고 의논하는 일을 맡은 신하들은 늘 상격(常格)에 구애되어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신하들이 성상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용납될 수 있는 것은 단지 공리(功利)로 나가는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또한 둔전(屯田)이 온 나라에 널려 있고 부곡(部曲)이 사가(私家)에 가득합니다. 재물도 있고 사람도 있어서 이미 그 이익을 누리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나라 일을 돌보겠습니까. 각 아문과 여러 궁가는 참으로 나라를 망하게 할 근원입니다. 땅을 나눠서 봉해 주던 진(晉)나라 때에도 어찌 오늘날과 같았겠습니까. 아, 참으로 아주 심합니다. 양민(良民)은 늘어나지 않는데 군적은 날로 증가하고, 군미(軍米)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백성들의 생산은 하나도 남은 게 없습니다. 공사간에 수레는 서울로만 모여들어 시장의 쌀값이 흙만큼이나 헐한데, 외방의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하늘에 대고 울부짖습니다. 경기 지방 강가의 백성들은 시장(柴場)에서 고생을 하고 있으며, 고기잡이를 하거나 소금을 구울 만한 땅은 빠짐없이 특별 세금을 내는 땅으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며 상인들은 장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갈 방도를 잃은 백성들의 원성이 온 나라에 가득합니다. 호적에 빠진 사람들을 변방으로 이사를 시키는 일은 참으로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수천 명의 노인과 어린 것들이 길을 헤매며 변방에서 통곡을 하고 있는데, 일찍이 살아갈 길을 하나도 열어주지 않으니, 이것이 또한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참으로 검소하고 절약할 마음을 지니신다면 모든 줄일 만한 것들을 필시 한 번에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진작시켜서 가슴을 열고 말을 받아들이실 수 있는 마음을 지니신다면 대신 및 여러 신하들이 필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백성을 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듯이 하는 마음을 지니신다면 지난날의 세금을 많이 거두고 이익을 많게 해야 한다는 공리(功利)의 말들이 자애롭고 선량한 의논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 크게 뉘우치며 자신을 반성하고 크게 변혁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서 늘상 하던 대로의 법전으로 이 큰 재변을 막으려 하신다면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그대로 사직하였다. 상이 따뜻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5월 15일 경오
헌납 이익상(李翊相)이, 일찍이 전랑(銓郞)으로 있었기에 추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집의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조한영(曺漢英)이 첩으로 삼은 상중의 여인은, 천한 서얼로서 두 번이나 시집을 간 사람인데다가 그 어미의 소상(小祥)을 지난 뒤였으니, 사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송사에 진 자가 흘린 말을 가지고 바로 탄핵을 가하게 되면 장래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언 이옥(李沃)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또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처치를 잘못한 것’을 논핵하여 아뢰기를,
"일에 따라 논핵한 이옥이 옳았다면 신중을 기하면서 논핵하지 않은 강백년·경최 등이 어찌 옳을 수 있겠으며, 강백년 등을 옳다고 하였으면 또 어떻게 이옥을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장하는 바가 모호하여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였는데, 처치의 규례가 어찌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리기를,
"왕옥(王獄)의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여 아뢰는 데에는 그 법이 있는데, 유사(有司)의 신하가 마음대로 법을 운용하였으니, 이목이 있는 자라면 그 누가 한심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김징(金澄)의 공초 내용은 오로지 엄폐하기를 일삼아 사본(査本)을 보니 크게 틀리는 점이 있었는데도, 두루 가리고 엄호하면서 관대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런 의금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대로 이번 옥사를 결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의금부가 죄를 잘못 논의한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들이 끝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 살펴보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경의 말이 사체와 규례에 참으로 합당하다. 의금부의 해당 당상을 모두 체직시키고 추고하라."
하였다. 당시에 지의금(知義禁) 이경억(李慶億)이 김징과 인척간이어서, 허적이 경억을 사사로움을 따랐으리라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차자를 올려 논핵한 것이다.
5월 16일 신미
상이 하교하기를,
"이경억 등의 소행은 전례를 따르다가 저지른 작은 허물이 아니다. 그들이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론을 업신여긴 죄는 체직 추고만 하고 그쳐서 될 일이 아니니, 모두 파직하여 뒷날 사사로움을 따르려는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니, 금부의 여러 신료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셨는데,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하였다는 것으로 그들의 죄안을 삼기까지 한 것은, 아마 벌은 반드시 합당한 죄를 주어야 한다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김징을 조사하여 아뢴 계사 가운데 ‘은을 남용하고 공장(工匠)을 부린 일이 전혀 없었다.’라고 한 것은, 대개 숟가락 젓가락이나 장도(粧刀) 같은 물건들은 수연(壽宴)이나 생일(生日)에 으레 올리는 것들인데, 이것을 가지고 무거운 법으로 단죄를 한다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루 보호해주고 너그럽게 봐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말을 잘 가려서 하지 못하여 본의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체직 추고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으나,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론을 업신여겼다는 것은 신하로서 가장 큰 죄인데, 지금 말솜씨가 없어서 일어난 작은 실수를 트집잡아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에게 이 죄를 가하는 것은 실로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이경억 등을 파직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원양도 원주(原州) 등의 고을과황해도 황주(黃州)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5월 17일 임신
대사헌 이정기(李廷夔)가,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김수흥(金壽興)을 판윤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우참찬 겸 우부빈객 으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상(李翔)·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최상익(崔商翼)을 정언으로, 유연(柳㝚)을 지평으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승지로, 이훤(李藼)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평안도 평양(平壤)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리알만하였고 땅에 반 자나 쌓였으며, 네 살 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즉사하고, 꿩·토끼·까마귀·까치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강서(江西)·중화(中和)·선천(宣川)·곽산(郭山)·증산(甑山) 등의 고을에 같은 날 우박이 내려 벼곡식이 모두 손상을 당하여 남은 것이 없었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어, 의금부 당상을 특별히 파직하게 한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8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유헌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대간은 말을 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임금의 허물이나 정치의 잘잘못에서부터 모든 신료와 여러 아랫관리들의 충성스러움과 훌륭함 여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길이 통하느냐 막히느냐 하는 것은 실로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임금은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유도하여 바른말을 하면 상을 주고 말을 하지 않으면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또한 의심을 하고 화를 내시기까지 합니다. 거실(巨室)을 논핵하면 곧다는 이름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배척하고, 무신(武臣)을 논핵하면 능멸 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를 하고, 궁궐이나 친척·인척이나 환관들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번번이 대간의 말을 무시하고 실정에 맞지 않는 분부를 내리십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 가운데, 참으로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사람이거나 분수에 안 맞는 관직을 차지하고 앉아서 구차스럽게 봉록이나 받아 먹으려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기꺼이 전하의 대간이 되어서 염치도 없이 있다가 스스로 큰 화를 당하는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단지 전하께서 싫어하고 박대하며 기를 꺾으실 뿐만 아니라, 논계하는 것이 조정의 신하에게 관계되는 것이면 그 화가 더욱 큽니다. 당대에 드러내놓고 공격을 하거나, 아니면 뒷날 중상모략을 하려고 몰래 계획을 하여,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떼거리로 떠들고 나서서 밀어뜨리고 또 돌을 던집니다. 그러니, 오늘날 대간 노릇 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무릇 대각의 논계가 발론되고 나면,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이더라도, 감히 하던 대로 계속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대간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근래 공주의 집짓는 일에 대한 논계는 지금 이미 해를 넘겼는데, 양사는 연계하는 것으로 책임을 떼우고 전하께서는 윤허하지 않는다고 거절하시어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대각의 논계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체모가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으로서, 조종조의 법제에 대해서 따를 것이 없다고 여기고 한 나라의 공론에 대해서 돌아볼 것이 없다고 여기며 비록 사람들의 말이 있더라도 모기가 지나가는 소리로 여기고서도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임금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으면 비록 강직한 신하가 있어서 바른말을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대간을 설치하고서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차라리 대간을 혁파해버려서 뒷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오랜 뒤에 오늘날 이러한 일이 있었던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근래의 김징에 대한 일은 논란이 분분한데, 신이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그는 그 스스로 바른말 잘한다고 자부하고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발론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김징에게 비록 수연을 너무 사치스럽게 한 잘못이 있기는 하나, 물의가 이처럼 격발하는 것은, 김징이 일찍이 대각에 있을 때에 탄핵을 너무나 많이 하여 원한을 가진 자가 조정에 가득차서 반드시 기회를 틈타 모함을 하려고 해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합니다. 신이 본도의 사계(査啓)와 의금부의 복계(覆啓)에 대해서는 비록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사람들이 하는 말과 같이 원한을 보복하려는 데에 관계가 있다면, 앞으로 일을 말하려는 자들의 경계가 되어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김징이야 비록 애석할 것이 없으나, 국맥을 손상시키는 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뜻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유헌은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아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19일 갑술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예조 참판으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박세당(朴世堂)과 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좌랑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삼았다.
5월 20일 을해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어저께 대신이, 의금부가 옥사를 의논하여 아뢴 데에 대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차자에서 ‘금오(金吾)의 회계는 법을 받들어 시행하는 의리를 크게 잃은 것인데도 양사가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엄한 말로 공척을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두려워 몸이 떨렸습니다. 신은 이제 겨우 본직에 사은을 하여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형세로 보아 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신은 이 일에 대해서 의견이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그 전에 오래도록 대각에 있었더라도 이 일이 서둘러 논계할 일인 줄은 모르겠습니다. 김징의 공사(供辭)가 사계(査啓)와 크게 다른 것이 있어 추측해서 단정지을 수가 없다면, 잡아다 추문하기를 다시 청하는 것은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에 합당한 것입니다. 비록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한 잘못이 있더라도, 어찌 이것으로 일을 맡은 사람을 먼저 죄주어서 그 일을 끝까지 밝히지 못하게 할 수가 있겠으며, 그 일을 끝까지 밝히기 전에 대신이 어찌 덮어 보호해 주려는 뜻을 미리 짐작하고 결단하여 죄안을 삼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그 말이 너무 일찍 나왔다고 여겨지며, 각박하게 법을 따지는 데에서 발론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은 식견이 어두워 의금부가 법을 잘못 시행한 것을 알지 못하겠고, 보고 듣는 것이 넓지 못하여 여론이 한심해 한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논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을 다시 거두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또 대신의 배척을 받았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엄한 비답을 내려,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5월 21일 병자
강백년(姜栢年)을 병조 참판으로, 이하(李夏)를 부수찬으로, 송시철(宋時喆)을 병조 참지로,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삼았다.
5월 22일 정축
김덕원(金德遠)을 사서로, 이동직(李東稷)을 승지로, 맹주서(孟胄瑞)를 공조 참의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김수흥(金壽興)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평안도 이산(理山) 땅에 이달 5일에 우박이 내렸다.
공조 참판 정두경(鄭斗卿)이 노병을 이유로 진소하여 본직 및 겸대한 홍문관 제학의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두경은 어릴 적부터 고(故) 정승 장유(張維)를 종유(從游)하였는데, 장유가 크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기기(奇氣)가 있고 시사(詩詞)에 가장 뛰어나 국조의 여러 시인들 가운데 그를 능가하는 자가 드물었다. 당시의 공론이 마땅히 문병(文柄)을 잡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다만 사람됨이 소탈하고 예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분방하여 세상의 쓰임에 합당치 않았으며 그가 짓는 시문도 또한 관각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제학(提學)의 직위에서 그쳤다.
5월 23일 무인
당시에 큰 가뭄이 시절을 넘겼는데, 이날에 비로소 큰 비가 내렸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결국 큰 흉년이 들었다.
5월 25일 경진
대사간 심재(沈梓) 등이 아뢰기를,
"안흥창(安興倉)은 군량미가 근래에 더욱 줄어들어, 혹 10두가 채 못 되는 곳도 있고 많아야 10여 두에 지나지 않는데, 연해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해마다 개색(改色)을 하여, 봄 가을로 꾸어주었다가 받아들였다가 하느라 민폐가 적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원망을 하고 있으며 장차 지탱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강도(江都)의 예에 의거하여 별도로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다시 헤아려 나누어 주어서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모자라고 축나게 한 죄는 주관한 자가 받아야 할 것이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적발해서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서 처리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노비는 신공(身貢)이 편중된 고통을 겪고 있어 특별히 줄여서 받아들이게 하였으니, 매우 큰 혜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사들이 간혹 은혜로운 뜻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지나치게 받아들인다고 하니,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게 하여 해당 관리를 중하게 죄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유민(流民)을 단속하는 일에 대해서 사목을 마련하여 입계하였는데, 북도의 유민들도 그 속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신이 이완(李浣)에게 물어보니, 이완이 ‘북도의 유민들에 대해서는, 역(役)에 배정하여 쇄환할 길을 끊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북도의 백성들은 평상시에도 추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내도(內道)의 산골로 흘러 들어오는 자가 많은데, 지금 만약 그것을 인하여 역에 배정하게 되면 저들이 필시 잇달아 나오게 되어 나라의 법이 크게 해이해져서 본토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하고, 유혁연이 아뢰기를,
"북도의 백성들의 신역이 가장 고달픈데, 지금 별대(別隊)의 좋은 점을 보면 모두 투속을 할 것이니, 폐단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비록 별대에 들어 있더라도 만약 본토의 원역(元役)이 있으면 본역(本役)으로 환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창평(昌平) 사람 우유일(禹惟一)은 일찍이 관관(館官)으로 종사하였는데, 아비의 병환을 듣고 돌아가다가 중도에서 부음(訃音)을 듣자 다다라 아버지의 죽음을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어미를 모시고 고향에 살면서 벼슬에 뜻을 끊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급제한 지 30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참하(參下)에 있습니다. 효행과 겸손한 마음이 모두 숭상받을 만하니 6품에 승진시켜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이 요전에 김덕함(金德諴)과 정홍익(鄭弘翼)의 일을 진달하여 시호(諡號)를 내리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고 참판 이신의(李愼儀)도 혼조(昏朝)에서 모후(母后)를 폐하던 날 논핵하여 절조를 세운 점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역시 시호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마찬가지로 시호를 내리라고 일렀다.
지평 유연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김징이 비록 잔치를 지나치도록 사치스럽게 벌인 잘못은 있으나 이미 어버이를 위한 회갑 잔치였고 보면, 이것으로 심하게 죄주어서 세교(世敎)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니, 상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5월 26일 신사
장령 오상(吳尙)이 아뢰기를,
"금오(金吾) 당상을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은 실로 성상께서 중도에 지나친 거조를 하신 것이니, 도로 거두라는 계청은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지평 정적이 동료들이 모두 나오지 않은 날에 혼자서 정계를 하였습니다. 대각의 체모를 손상시켰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저 사람이 이미 혼자서 정계를 하였는데, 이 사람이 또 혼자서 계청을 하니, 나는 실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남편을 죽인 죄인 율옥(栗玉)이 자복을 하고 사형을 당했다. 그가 태어난 안주목(安州牧)을 강등하여 부(府)로 삼고, 판관 유성삼(柳星三)을 파직하였다.
5월 27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보다 앞서 사인(舍人) 이단하(李端夏)가 상소를 올려 김징을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상소 안에 ‘은수저를 받은 일이 없다.’는 말이 있자 김징이 듣고서 중지시켰다. 대개 수저는 완부(完府)의 오래된 전례이기 때문에 김징이 받았던 것이다. 이 때에 김징이 두 번째로 옥리에게 가서 공술한 말에, 단하의 상소를 중지시킨 일을 끌어다, 실상을 숨기는 일이 없음을 증명하였다. 상이 단하를 죄인과 서로 내통했다고 하여, 마침내 옥리에게 내렸다. 그런데 단하가 공술한 말에 또, 이경억이 두 사람 사이에 글을 전하였다고 하자, 상이 또 이경억을 옥리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김징이 공술한 말이 기세를 돋구어 큰 소리를 치고 말이 매우 패만하였다고 하여 형추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어제 장령 오상이 지평 정적의 체직을 청하기에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지금 이단하가 공술한 말을 보니, 이경억이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론을 무시한 죄상이 환히 드러났는데, 오상이, 이미 정계한 논의를 혼자서 발론하여, 정계한 동료를 체직시키라고 청하였으니, 자신의 견해만 망령되이 믿고 몸을 던져 이러쿵저러쿵 한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장령 오상을 체차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금부가 김징의 원정 공사(原情公事) 말단에 이단하도 아울러 넣어 일체로 형추를 청하지 않고 감히 상의 재결을 청하였으니, 금부 당상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정언 최상익(崔尙翼), 대사간 심재(沈梓), 도승지 장선징 등이 모두 김징과 서로 물어본 일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인피하고 혹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5월 28일 계미
우의정 홍중보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삼가 전후로 금부에 내린 전교를 보고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습니다. 근래에 조정의 기강이 풀어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옥(王獄)까지 엄하지 않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이런 엄한 분부를 내리는 것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단하가 진소한 것은, 김징을 신구하기 위하여 사사로이 글을 주고받으며 첨삭을 한 데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김석주(金錫胄)가 그를 끌어대었기 때문에 글을 올려 변론을 하려던 참에 사람이 와서 묻기에 상소의 초고를 내보였던 것인데, 그것이 김징의 귀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어찌 이단하가 일찍이 헤아렸던 바이겠습니까. 이미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들었으면 즉시 삭제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경억은 김징과 친척간입니다. 김징의 아들이 왔을 때에 그 상소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이 서로 오고간 것과는 다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피신다면 죄가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김징이 과연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죄주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지금 말을 잘못한 실수를 가지고 형추를 가하기까지 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합당하게 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이 또한 한심하지 않은가. 옥문(獄門)을 큰길과 같이 보고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가 있으니, 나는 실로 이해할 수가 없다. 단하의 일은 전후의 곡절이 같지 않다. 이경억은 남의 말을 통해주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주선한 바가 있게 하였으니, 비록 친척이라고는 하나, 조정의 처치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김징의 일에 있어서는 경의 말이 상세하지 않다. 다시 공초한 뒤에 형추하여 실상을 밝히는 것은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말의 잘못을 트집잡는 것이겠는가. 경은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홍주삼(洪柱三)이, ‘김징을 형추하고, 이경억을 잡아다 국문하고, 이단하를 그대로 잡아가두고, 장령 오상을 특별히 체직한 등의 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왕옥의 체모는 본디 중한 것입니다만, 사대부로서 갇힌 자가 사형수가 아니면 친구가 서찰로 안부를 묻는 것은 인정으로 보아 흔히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이경억은 김징에 대해서 이미 일가의 의리가 있고 또한 의금부의 관직을 겸대한 것이 이단하가 진소한 뒤의 일이었으니, 지금 평소 서로 안부를 물은 일을 가지고 옥사를 다룰 때의 일이라고 하여 방자하게 공론을 무시한 죄를 가한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김징이 범한 죄는 애초에 어버이를 위해 잔치를 베푼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두 번째 공술을 받은 뒤에 이미 형추를 정지하고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공술한 말의 잘못을 트집잡아 또 형추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무엇 때문에 노하시어 이런 거조를 하셨습니까? 이단하가 진소한 것은, 다른 사람이 끌어대었기 때문에 일이 부득이해서였지, 구원해 주기 위해서 발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령 오상을 특별히 체직시킨 것은 더욱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이미 발론된 논계를 경솔하게 정지하면서 동료들이 출사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마땅히 서로 바로잡아 주는 거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전계를 다시 거론하여 아뢴 것이 무슨 몸을 던져 이러쿵저러쿵 한 죄가 있겠습니까. 내리신 명을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차자의 글을 보니, 아주 해괴하다. 이단하를 그대로 가두어 둔 것은 이것이 바로 옥사의 체모인데, 감히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니 실로 괴이하다. 옥에 갇힌 죄수들이 서로 내통을 한 것에 대해서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처럼 말하니, 말이 전도되고 망령되기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오상의 일은 해괴한 일이 아닌가. 정적이 이미 혼자서 정계한 일을 오상이 또 혼자서 논계하였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귀찮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심재, 정언 최상익이 아뢰기를,
"이단하가 진소한 것이 애당초 죄수와 사사로이 내통하며 의논한 자취가 없는 사실은 지금 이경억이 글을 보낸 일에서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범한 죄도 없는데 어찌 그대로 가두어 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경억은, 김징의 아들을 통해서 그 말을 듣고 글을 보낸 것은 실로 친척간의 상정이고, 또한 그 당시에는 의금부의 직책을 겸대하기 전이었으니, 이것으로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하였다는 죄안을 삼는 것은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단하를 그대로 가두어두라는 명과 이경억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대부가 옥에 갇혔을 경우, 만약 악역죄를 범한 것이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 서로들 문안을 하는 것은 내려오는 전례입니다. 김징이 아들을 통하여 말을 전한 것도 세속의 관습을 따른 것에 불과하고, 부자간의 정리상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드나들며 서로 만나본 일은 없었으니, 형추하여 끝까지 조사를 하는 것은 어찌 너무 심하게 중도에 지나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김징이 범한 것은 어버이의 회갑 잔치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가 죄를 얻은 뒤로는 또 그 아들의 문안을 금지시켰으니, 이륜의 도리를 붙들어 세운 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리고 엄한 성상의 하문을 받고 경황없이 우러러 대답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말을 잘못하게 된 것이니, 어찌 임금의 명을 패만하게 한 죄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친척의 정분을 헤아리시고 금방 형추를 정지하라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곧바로 말을 잘못한 실수를 가지고 또다시 형신 문초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명백하고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며, 형벌이 대부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비록 힘껏 신구하며 해명하려고 하나, 그 말이 근거가 없고 전도된 것을 어찌 덮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오상을 특별히 체직시킨 명을 다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심재와 최상익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납 정화제(鄭華齊)가 출사시키기를 계청하고, 이어, 오상을 특별히 체직한 명을 환수하라고 아뢰던 논계를 정지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일은 애초에는 일개 탐관오리의 죄를 논의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전후로 여러 신하들이 구원하며 해명하는 데에 급급하여 일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대각의 논계도 또한 법을 쟁집하는 뜻을 크게 잃었습니다. 성상께서 격노하신 것도 필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일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성왕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반드시 탕탕평평하여 격노하는 바가 없어야 하고, 죄를 밝히고 법을 삼가는 도리에 있어서도 반드시 정상을 참작하여 법을 써서 경중이 알맞게 된 연후에야 징계되어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김징의 죄목이 아직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지금 또한 용서해주자는 의논을 따라 이미 형추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단지 친구 사이에 전한 말과 공술한 말 가운데에 말을 실수한 것을 가지고 선뜻 형추를 가한다면, 옥사의 체모로 살피건대, 선후 경중의 순서를 이미 잃은 것입니다.
이경억이 의금부 당상으로서 회계를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말씀을 드렸고 전하께서도 이미 견책을 하고 파직을 시켰으니, 벌이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죄안은 바로 양쪽에 글을 내통시켜 주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의금부의 직책을 띤 이후의 일이라면 그가 방자하게 법을 무시한 것이 참으로 성상의 전교와 같겠습니다만, 그 시기를 고찰해 보건대 제수되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깊이 죄를 주어야 할 일이겠습니까.
이단하는, 그 상소의 초고를 이경억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꼭 김징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며, 실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삭제하고 고쳤을 뿐입니다. 단지 남에게 상소의 초고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왕옥에 가두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허적은 이미 김징이 회갑 잔치를 지나치게 했다는 것을 들어 탐관오리라고 해놓고는 형추를 정지하기를 청하였고, 이미 이경억이 회계를 잘못한 것을 들어 사사로움을 따랐다고 지칭해 놓고는 또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조종하며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기탄이 없으니, 아, 참으로 괴이하다.
5월 29일 갑신
헌납 정화제가, ‘김징을 형추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과 ‘이경억을 석방하라는 명을 속히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형추하는 일은 마땅히 다시 형추 판부를 기다린 뒤에 쟁론하는 것이 바로 체례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감히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니, 전도되고 무상함이 막심하다. 이경억에 대해서는,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것은 혹 가하겠으나, 석방하라는 명을 속히 내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무슨 말이며, 이것이 무슨 대각의 체모인가. 참으로 매우 해괴하다."
하였다. 대개 김징을 형추하는 일은 이미 지났고, 가형하는 일은 아직 판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의 전교가 이와 같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김징이 서찰을 주고받은 일로 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 신들도 일찍이 범한 일이 있어 지금 매우 황송스럽습니다. 신이 들으니, 임진년 이전에는 비록 부자간이라도 서로 만날 수 없었는데, 중간에는 출입하는 데에 장애가 없다가, 선조(先朝) 때로부터 금령을 거듭 밝혔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이상익(李商翼)의 일로 인해서 더욱 신칙하여, 지금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데, 서찰에 있어서는 금지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김징의 아들은 참으로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징의 아들을 가두고 치죄하지 않는 것은 부자간에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이경억에 있어서는 비록 친척이지만 이미 죄가 드러났으니, 만약 죄주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형추하라는 명이 일단 내려진 뒤에 대간이 쟁론하여 고집하는 일이 없으면 의금부는 즉시 거행해야 한다. 그런데 늑장을 부려 저녁에 이르러 재촉한 뒤에야 비로소 개좌(開坐)했으니, 일의 체모가 어찌 이같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김징을 구원하는 것은 사론(士論)이기 때문에 금부가 물의를 두려워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김징을 형추하는 일을 판하한 뒤에도 금부가 즉시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부 당상을 추고하였다.
헌납 정화제가, ‘최상익의 출사를 청하고 오상의 논계를 경솔하게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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