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갑인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 등이 상차하기를,
"정원의 신하들이 아뢴 내용은 보통으로 규계(規戒)를 올린 뜻에 불과한데 무서운 천노(天怒)가 걷잡을 수 없이 생각 밖에 터지고 있고, 그 말의 억양 사이에는 마치 분에 못이겨 바르게 표현하지 못한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뭇 신하들이 전하께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왕명을 출납(出納)하는 중요한 곳이 거의 모두 비어 있고, 약방 의관들도 감히 문후를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걱정하는 바가 오로지 그 한 가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둘러 천위(天威)를 거두시고 어제 내린 두 건의 비답도 도로 거두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그 곡절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사실 모르고 있는 것이다. 경들은 안심하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제 준엄한 비답을 거듭 내리셨는데 이는 사실 대성인의 중화 평정(中和平正)한 기상에 어긋난 일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성상께서 화가 그렇게 격발되었는지 신들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으기 공론을 듣건대 의관 관직 제수에 대하여 승전을 미처 봉행하지 못한 데 대한 것이라고 의심들을 하고 있는데, 신들로서는 감히 모를 일입니다만 참으로 그런 것입니까? 일개 의관의 수령 제수가 그 얼마나 자질구레한 일인데, 어찌 그 때문에 성색(聲色)을 가볍게 움직여 세인의 귀와 눈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마음속 깊이 다시 살펴보시고 교지를 분명하게 내려 성상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환히 보일 것이며, 앞서 내린 준엄한 전지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이연년(李延年)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정원이 소회를 아뢴 것이 대체로 충성을 바치려는 구구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준엄한 전지가 갑자기 내려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후설(喉舌)의 신하들이 모두 불안을 느끼고 승정원이 거의 텅 비게 만들었으며, 약방은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곳으로서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므로 절선(節宣)의 방법을 조금도 소홀해서는 안 되는데, 입진(入診)·의약(議藥)을 정폐한 지 지금 벌써 때를 넘기고 있으니 신하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겠습니까? 바라건대 하늘 같은 도량으로 이미 내린 전지를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들에게 유지를 내렸노라."
하였다.
승지 윤집(尹鏶)·이진(李𥘼)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준엄한 비답을 받고부터 가슴과 뼈가 모두 싸늘하고 밤새도록 겁에 질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시고부터 대소 신료들이 너나없이 걱정하고 애를 태우며 날로 바라는 것이 정상을 회복하시는 일인데 하물며 신들처럼 근밀(近密)의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 자들이겠습니까. 아뢰었던 두 가지 일이 하나는 뒤탈을 염려해서였고, 하나는 그 일을 중히 여겨서였는데 그 모두가 구구한 충애(忠愛)의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일 때문에 성상이 마음의 충격을 받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들로서는 개연한 심정을 저으기 느끼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여러 신료들이 전혀 다른 뜻이 없음을 굽어 살피시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들어와 일을 살피도록 할 것이며 의관을 내보내라는 명령도 도로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곽지흠(郭之欽)이 상소하여, 대죄(待罪) 중인 승지들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일을 살피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안진(安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정관(政官)에 대하여 화를 내시고 또 근신(近臣)에 대하여도 준엄한 전지를 내려 말의 억양이 과격하고 취한 조처가 온당치 못한데, 신이 한 마디 광구(匡救)하는 말이 없었으니, 죄를 면키 어렵습니다."
하고, 또 월과(月課)를 미쳐 지어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당연히 추문을 받아야 할 입장이라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곽지흠이 처치하여, 안진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약방 제조 이경석·윤강·윤집 등이 아뢰기를,
"세월이 물 흐르듯 하여 때는 다시 가을이 되었는데 자전의 기후가 지금 어떠하시며, 성상의 체후도 어떠하신지요? 그리고 윤후익(尹後益)이 입직했던 것은 오로지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셨기 때문인데, 비록 준엄한 하교가 있었더라도 어떻게 자리를 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엎드려 듣건대 간밤에 유문(留門)043) 으로 나갔다는데도 약방에서 봉직하고 있는 신들로서 몰라라 하고 있었으니, 너무나 황공한 일입니다. 이어 엎드려 바라건대, 심기를 평이하게 하고 허물 고치기를 꺼려 말아 일식 월식이 지나간 후 그 밝음이 변동 없는 것처럼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전의 기후는 정상이나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답답한 증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약방이 다시 문안을 말도록 어제 하교하였는데, 지금 왜 문안을 하는 것인가?"
하였다. 약방이 다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특히 정원의 아룀으로 인하여 그러한 하교를 하셨는데, 이는 을(乙)에게서 난 화를 갑(甲)에게 옮긴 것으로서 정당성을 잃은 것입니다. 신들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성상이 그렇게까지 심기를 불평하게 가지신 이유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문안하지 말라는 하교를 빨리 거두시고 입진하고 약을 올리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른바 을에게서 난 화를 갑에게 옮겼다고 한 말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경들은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약방이 또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신들은 기어코 들어주시도록 의견을 아뢰고 싶었는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하교를 그렇게 하시니 더욱 황공하옵니다. 또 문자로 아뢰면 수응에 번거로울까 하여 감히 구전으로 청하오니 입진하고 약 올리고 하는 일을 청허하여 주시기 원하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심이 그렇게도 아름답지 못하니 의관에게 묻고 약 올리고 하는 일도 모두 소용 없는 일이고, 문안 역시 형식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교한 것이다. 도제조가 오래도록 나가지 않으니, 비록 형식이기는 하나 문안은 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구전으로 아뢰기를,
"하교가 그러하시니 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문안이 어찌하여 형식입니까? 다만 문안에 그치고 입진을 않으면 그것이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미 늦어서 내일 아침에 입진할 것이니, 약물 올리는 일까지 허락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제조가 그렇게까지 누차 아뢰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7월 2일 을묘
상이 편전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 등이 상차하여, 준엄한 전지를 도로 거두고 정원의 신료들을 특별히 용서할 것을 다시 청하니, 답하였다.
"경들의 간청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갈수록 간절한데 내가 어찌 끝까지 거역만 하겠는가. 마땅히 차자 내용대로 따르리라."
이조 판서 홍명하가, 자기의 직책이 경연에 있다 하여 상소하기를,
"정원의 신료들이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니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쾌히 보이고 특별히 불러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신에게 내린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좌부승지 윤집, 동부승지 이진이 아뢰기를,
"본원 동료들이 궐문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대죄하면서 나오지도 물러가지도 못한 지가 이미 사흘이 되었는데도 성상께서 아직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지 않고 입직만 하라고 하는데, 본원의 사무는 잠시도 비울 수 없는 일이니, 밖에서 대죄하고 있는 제신들을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명하소서."
하여, 상이 윤허하였으나, 수항 등이 패초에 응하지 않아 정원이 추고 전지(推考傳旨)를 받았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일 아침에 다시 패초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좌승지 오정위, 우승지 남용익, 우부승지 조윤석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근밀의 자리에서 봉직하고 있으면서 다만 일이 있을 때마다 할 말을 다하여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곳에다 두려고 하였을 뿐, 오늘 갑자기 차마 듣지 못할 준엄한 하교를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들로서는 넋이 놀라고 머리털이 주뼛하여 금방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궐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성상의 도량이 하늘 같아 당장 베임을 가하지 아니하고 뜻 밖에 또 패초가 내렸으니, 신들로서는 황공 감읍하여 즉시 달려가기에 겨를이 없어야 옳겠으나, 죄명을 생각해 보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운데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척의 곳으로 들어갈 것입니까? 바라건대, 빨리 삭직을 명하시고 이어 신들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
하였다.
7월 3일 병진
이은상(李殷相)을 병조 참의로, 이민서(李敏叙)를 교리로, 정박(鄭樸)을 정언으로 삼았다.
충홍도(忠洪道) 목천(木川) 등지에 폭우가 연일 쏟아져, 산이 무너지고 전야가 덮혔으며 압사한 사람도 많았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사간 곽지흠 등이 아뢰기를,
"일찍이, 흥정당으로 거처를 옮기시라는 뜻으로 아뢰어 윤허를 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 듣기에 아직도 처소를 옮긴 일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더위가 전에 비해 더욱 심하여 비좁은 엄려(嚴廬)에서는 조섭하기에도 방해가 있을 뿐 아니라 제조들도 그 때문에 입시를 못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즉시 흥정당으로 옮겨 조섭에 편리하도록 하시고, 이어 약방 제조들도, 진찰을 받거나 침을 맞을 때 입참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허락은 하였으나, 그쪽 거실이 아무래도 지금 있는 거실만 못하기 때문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7월 4일 정사
상이 침을 맞았다.
우승지 남용익을 명하여, 전옥서를 살펴보고 죄가 경한 죄수는 석방하도록 하였는데, 용익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전부터 근신(近臣)을 보내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했던 것이 사실은 죄수들을 불쌍히 여기는 성대한 뜻으로 하신 일인데, 겨우 옥문을 나오자마자 여러 상사(上司)들이 금방 도로 가두어버려 사리나 체면으로 볼 때 자못 온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명령을 받고 석방된 사람은 다시 수감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이조 참의 이경휘가 사표를 내자마자 바로 체직되었다. 상이, 의관 양제신을 경기 근읍의 수령으로 제수하려고 하였는데, 경휘가 혼자 정사를 하면서 그를 후보자로 추천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특지(特旨)로 그를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제수하고는 정청(政廳)의 하직(下直)을 묵살하고 경휘로 하여금 정청에서 밤을 새게 만들어 은근히 불평의 뜻을 보였으므로, 경휘 자신이 불안을 느끼고 병을 내세웠다가 체직이 된 것이다.
사간 곽지흠 등이 아뢰기를,
"옥체 진찰이 그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것을 의관에게만 맡기고 약방 제조의 입시를 불허하는 것입니까? 사리로 보아 너무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계신 곳이 비록 비좁더라도 제조 한 사람 입시할 곳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진찰을 받거나 침을 맞으실 때 제조가 입시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5일 무오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의로, 홍처윤(洪處尹)을 승지로, 심세정(沈世鼎)을 응교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의관을 명하여 여차(廬次)로 입진하라고 하였다.
해서(海西)의 황주(黃州)·봉산(鳳山)·장연(長淵)·옹진(瓮津)·해주(海州) 등지에 황충(蝗虫)이 날로 번져 벼를 해쳤으므로, 수령이 직접 들에 나가 전답 주인들을 독려하여 잡아 묻었는데, 한 두둑에서 거의 몇 말씩 잡혔다.
헌납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분노하신 일이 절도에 맞지 않게 터져나와 뭇 백성들이 놀라 흉흉하고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상의 덕에 얼마나 많은 누를 끼칩니까. 성상의 마음이 중심을 잃은 경우를 가만히 보면 언제나 ‘성냄’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는 민광소(閔光熽)에게 그리하였고, 두 번째는 박세성(朴世城)에게 그리하였으며 지금까지 이미 세 번째인데 그렇다면 후일에도 또 다시 오늘과 같은 지나친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세 번 사의를 표한 후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통상적 규례인데, 이번에는 전관(銓官)이 단 한번 정고(呈告)하자 그를 즉시 체직하였으니, 성상께서 아직도 석연찮은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저으기 염려스럽습니다. 지난번에도 신들이 듣기에는, 승지가 시장(柴場) 문제로 탑전에서 의견을 아뢰자, 전하께서 ‘승지는 대간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하교를 하였다는데 아, 그것은 전하께서 실언하신 것입니다. 옛 철후(哲后)들은 악공과 소경을 시켜 시를 외우고 좋은 말을 올리게도 하였는데 하물며 승지라면 위치로는 근밀(近密)이요 직책으로는 후설(喉舌)이어서 그들이 만약 일에 따라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는 직책 수행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의견을 아뢰면 너무 심하게 꺾어버렸으며, 또 옥당의 장관에게 답하면서도 ‘원래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는 하교를 하였는데, 그 역시 알맞은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가 되는 법인데, 지금 그 일의 잘되고 못된 것, 사리에 맞고 안맞는 것은 따지지 않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핑계로 간언을 따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리면 일에 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역시 전하께서 마땅히 반성하시고 고쳐 시도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 말이 내 병통을 깊이 깨우쳐준 말로서 내 매우 가상이 여기는 바이다. 내 깊이 생각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전 수원 부사 한진기(韓震琦)를 장배(杖配)하였다. 진기가 수원에 있으면서 치적이 좋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군무(軍務)에 관하여 곧바로 아뢰었던 일로 하여 총융사 구인기에게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인기가 아뢰기를,
"진기가 새로 한정(閑丁)을 모집했다는 것이 모두 실속없이 수만 불려놓은 것으로, 조총을 지급할 만한 자가 없는데도 속여서 아뢴 것입니다."
하여, 비국이 파추(罷推)하자고 회계하자, 상은 그가 속여 조정에 보고하였다고 성을 내고 진기를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명하는 한편 총융청과 함께 일제 점열(點閱)을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감사 조형(趙珩)이 부평 부사 유창(兪瑒)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지정하여 총융청의 중군(中軍)과 합동으로 점열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유창은 그 중에서 약한 자 13명만 거론하여 보고하였고, 중군은 본청에 보고하기를, ‘차사원이 자기 소견만 고집하고 용잔(庸殘)과 아약(兒弱)을 상세히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인기가 그대로 아뢰니, 상이 대노하여 조형을 추고하고, 유창은 의금부 신문에 내렸으며, 진기는 곤장을 쳐 도배(徒配)하였는데 유창 역시 도배를 받았다.
고양(高陽)의 수촌(水村)에 사는 백성이 사복시(司僕寺) 마초(馬草) 베는 자 두명을 때려죽여 물속에다 쳐넣었다. 본시(本寺)에서 아뢰자, 상이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찾아내게 하였으나 그 자를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다. 사복시 내구(內廐)·외구(外廐)의 마초 풀밭이 물 가에 있어 위아래 마을 사람들이 날마다 풀을 베어 배로 본시에까지 운반하였는데, 궁가와 세도가에서 입안(立案)이 된 것이라고 하면서 각기 저들 멋대로 점거하여 도리어 금지와 억제를 가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세력을 믿고 날뛰는 무리들에게 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보게 만들었으니, 나라에 기강이 없기가 이 모양이었다.
7월 6일 기미
상이 의관을 명하여 입진하게 하였다. 이때 상의 머리와 얼굴의 열기가 점점 가시었고 안질과 발 부위의 부스럼도 날이 갈수록 차도가 있었다.
청주(淸州) 사람 전 찰방 박정린(朴廷麟)이 집이 매우 부자였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살해되어 감사가 그 사실을 아뢰고, 승지가 또 탑전에서 아뢰니, 상이 본도 감사·병사로 하여금 비밀리 조사하여 체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병사 유여량(柳汝糧)이, 도내에 귀양살이 와있는 김지건(金之鍵)과 자기 군관 장량(蔣諒)을 시켜 충주(忠州)에서 적 14명을 체포하여 승복을 받고는 정린을 살해한 적이라고 아뢰었는데, 옥정(獄情)이 분명하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받은 인상이 있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여량이 조정을 속인 것이라고 하였다.
7월 7일 경신
충청도 보은(報恩) 땅에 크기가 새알만한 우박이 쏟아져 벼와 곡식들이 피해를 입었다.
장령 이광재(李光載)가 아뢰기를,
"이달 2일에 동성 사촌손(同姓四寸孫) 이준평(李浚平)이, 함께 공부하는 사람 이보(李堡) 등에게 맞아 죽어 소장을 올리려던 참에 전 현감 민충량(閔忠亮)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으로서 이보 등을 위하여 세객(說客) 노릇을 할 양으로 시신 앞에 들어가 곡(哭)을 하고 시신을 살펴볼 것을 자청하고는, 상처가 확실치 않다고 하면서 소장 올리는 일을 저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도 역시 시친(屍親)의 한 사람으로서 치미는 화를 억제하기 어려워 그 시체를 다시 함께 살피려다가 서로 붙들고 다투게 되어 옷소매를 움켜잡고 찢기까지 하였으니, 대직(臺職)에 있는 몸으로서 너무나 많은 체면 손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형조의 자리에서 이보의 아비 봉성령(蓬城令) 이형중(李炯仲)이 소장을 올려 신을 무함하고 옥사(獄事)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성명이 법사(法司)의 문안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이대로 눌러있을 수는 결코 어렵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사헌부가 처치하여 광재의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인(士人) 이준평이 그의 친구 김상형(金尙炯)과 상형의 처남인 이보 그리고 유태번(柳泰蕃)·유태성(柳泰成) 4인과 함께 공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상형이 날이 저문 뒤에 와서 준평의 아우 이준형(李浚亨)에게 말하기를,
"너의 형이 어제 술을 마시더니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준형이 달려가 보았더니 준평이 온 몸에 낭자한 타박상을 입고 죽어 있었다. 그리하여 형조에다 소장을 올렸는데, 상형 등 4인을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4인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준평이 일찍이 자기 비첩(婢妾)을 상형의 집에다 붙여 두었었는데 상형이 그를 간통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여자를 두고 다투다가 그리된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준평의 비첩까지 신문하여, 둘에게서 서로 간통을 하였다는 자복을 받고 상형 등 4명에 대하여 모두 몇 차례씩 형신을 가했으며, 상형은 7차까지 형신하였지만 끝까지 승복하지 않아, 형조에서는 옥정(獄情)이 의심스럽다 하여 대신과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상 정태화는,
"시장(屍帳)에 의하면 준평의 죽음이 타살임은 분명하나 지켜본 증인이 없으니만큼 4인이 공모했다는 정상도 뚜렷하게 알기 어려우며 상형이 정범(正犯)이라는 것 역시 현저한 자취가 없어 이야말로 의옥(疑獄) 중에도 더욱 의심이 가는 옥사입니다. 신이 지난번에, 차라리 실형(失刑)이 낫다는 뜻으로 의견을 아뢴바 있거니와 이미 죽은 목숨을 이제와서 갚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전혀 혐의가 없는 것으로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니,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고, 영중추 이경석, 판중추 정유성은,
"이야말로 밝히기 어려운 의옥입니다. 상형의 아비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이미 곤장 아래서 죽었는데 상형에게 줄곧 형신(刑訊)을 가하다가는 억울하게 화를 당하는 탄식이 또 있을 수 있으니, 차라리 실형을 하자는 논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여, 상이 4인 모두를 사형을 감하고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7월 8일 신유
헌납 김만기(金萬基) 등이 아뢰기를,
"장령 이광재가 법관(法官)의 몸으로 남과 다투면서 옷소매를 잡고 찢고 하여 마치 미천한 하인배들이 싸우듯이 하였으니 자기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그보다 더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를 파직시키소서. 이준평이 살해당한 곡절에 대하여는 비록 알 수가 없기는 하나 이미 살인이라고 하면 그게 얼마나 중대한 사건입니까. 민충량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으로서 직접 시신을 살펴보고 화해를 위한 말을 많이 하면서 심지어 대관과 맞붙어 욕을 하며 다투었으니, 사부(士夫)가 하는 짓이 어디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풍천(豊川) 사람 김팔립(金八立)의 형 김육립(金六立)이 장련(長連)의 수군 박진(朴進)에게 살해당했는데, 박진은 도망을 갔다. 팔립은 거짓으로 그와 화해하자고 꾀어 박진을 나오게 한 후 찔러 죽이고는 즉시 풍천부(豊川府)에 자수하였다. 이에 감사가 직접 묻기를,
"너의 형제가 셋인데 너 혼자서 네 형 원수를 갚았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자기도 죽는 것이 정해진 법인데 너는 응당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인 것이냐? 아니면 형을 위해 원수를 갚았다 하여 요행히 살아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한 짓이냐?"
하자, 대답하기를,
"4세 때 어머니가 죽고 5세에 아버지도 죽어 형 육립의 집에서 자랐으므로 이름은 형제이나 은혜는 부모와 같습니다. 몸을 던져 원수는 갚았으나 응당 죽으리라는 것이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여, 감사가 아뢰기를,
"팔립이 형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거짓 화해론을 꺼내 원수를 꾀어 내어 손수 칼질을 하고는 즉시 관으로 달려와 그 사실을 고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는데, 그가 복수를 위한 것임이 이렇게도 명백하니, 까닭없이 사람을 죽인 자와 똑같은 예로 논죄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사건이 형조에 내려지자, 형조에서는,
"담당 아문으로서는 법대로 집행할 뿐 법 이외의 문제로 하여 변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팔립에게 참대시(斬待時)를 적용할 것을 아룁니다."
하고, 3차에 걸쳐 복주(覆奏)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정상으로 보아 용서할 만한 점이 있으니 특별히 사형을 감하고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팔립의 이때 나이 23세였었다.
7월 9일 임술
의관에게 명하여 여차(廬次)에서 입진하게 하였다. 대계(臺啓)에 대하여 윤허한 후 제조는 오히려 입시하지 못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장례 때, 지나가는 길마다 각각 제(祭)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전에는 대신(大臣)과 훈척(勳戚)의 장례 때면 지나가는 각읍마다 으레 제전(祭奠)을 올리다가 정유년 이후로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모두 금지시켰었는데, 지금 와서 상이 시백에게 특별히 내린 것은, 남다른 대우인 것이다.
헌납 김만기(金萬基) 등이 아뢰기를,
"옥체가 진찰을 받거나 침을 맞을 때 약방 제조가 입시하도록 윤허를 받았는데도 작금의 진찰 때 제조 입시의 명령이 없었습니다.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왕의 말씀에 성신(誠信)이 부족하지 않은가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걱정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이미 허락을 하고서 실상이 없으면 앞으로의 폐단이 끝날 날이 있겠습니까? 이 모두가 못난 신들이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 소치입니다."
하고,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형조가, 죄인 양영남(梁穎南)에게는 도장(徒杖)을 적용하고 하효달(河孝達)은 분간(分揀)을 할 것을 품의하자, 상이 특명으로 영남은 불한년 변원 충군(不限年邊遠充軍)을, 효달에게는 원도 도배(遠道徒配)를 각각 적용하고, 또 해조 당상들의 아뢴 내용이 흐리터분하다 하여 모두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용산(龍山)의 뱃사람 변응립(邊應立)이 우수영의 퇴물이 된 배를 사기위하여 초봄에 청탁 서간을 얻어내어 수사(水使) 이동현(李東顯)에게 보냈고, 동현은 즉시 답을 써서 보냈는데 그 답이 잘못 이응시(李應蓍) 집으로 전달된 것이다. 응립의 청탁 서간은 원래 이일상(李一相) 집에서 쓴 것인데, 일상이 이조 참판에서 체직되자마자 응시가 대신 그 자리에 있었고 보통 호칭을 이조 이참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외방 하인배가 자세히 몰라서 그리된 것이었다. 응시는, 자기 집에 보내온 것이 아니라하여 받지 않았고, 일상도,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물리쳤는데 소문은 떠들썩하여, 동현이 쌀 실은 배를 일상에게 보냈는데 그 서간이 잘못 응시의 집으로 전달되었으므로, 일상이 그 사실이 누설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겨 핑계를 대고 받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고, 최후에는 대론(臺論)이 터지기 시작하여,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윤허가 내린 후 실록청이 아뢰기를,
"사사(史事)가 현재 시급한데 만약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하게 되면 그 사건이 끝나기 전에는 일을 살피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돌아다니는 말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니, 쌀 실은 배가 정박하고 있다는 곳을 조사하여 사실 여부를 밝히소서."
하여, 공조 낭관을 파견하여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아와 아뢰기를,
"강을 따라 10리 거리에는 남쪽에서 온 배가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강 가의 사람들 말이 봄부터 여름까지 그러한 배는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때는, 대계가 사실을 잘못 알고 한 것이라 하여 동현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중지해 버렸고, 사람들은 다 비웃었다.
그 후 일상이 동현에게 서간을 보내 그간의 곡절을 캐묻고 또 전일의 청탁 서찰을 달라고 하여 비국 자리에서 내 보였는데, 짧은 내용에 글씨도 졸필이고 말도 연속이 되지 않아 위조임이 분명하였으므로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캤더니, 응립은, 그것을 맹인인 하효달에게서 얻었고, 효달은 그것을 사노(私奴)인 묵석(墨石)에게서 얻었으며, 묵석은 일상의 집과 가까이 지내는 초관(哨官) 양영남에게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효달이 처음에는 바로 불지 않고, 이미 죽고 없는 박세문(朴世𣐀)에게 핑계를 댔다가 효달 처의 말에 따라 영남을 체포하여 승복을 받아낸 후에야 효달이 비로소 실토를 하면서, 과연 영남이 시킨대로 죽은 사람을 끌어들였다고 하였다. 묵석은 다만 효달에게 그것을 전해주었을 뿐 애당초 영남에게 청탁한 일이 없었고, 응립은, 잡으러 다닐 때 집에서 나가고 없었는데 그의 처는 그가 도피한 곳을 몰랐으나 효달이, 일상이 시킨 곳으로 지정하여 보내 그의 집 전사(田舍)에다 숨겨두었다는 말이 포도청에서 추문할 때 나왔다. 그리고 쌀 실은 배에 대한 비방은 가면 갈수록 더 심했으나 일상은 한 번도 자신을 해명하는 소를 올린 일이 없어,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괴이하게 여기면서 모두 생각하기를, 영남이 일상의 집을 종과 다름없이 드나들고 있어서 청탁 서간 한 장쯤이야 얻어내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이 위조인지의 여부는 사실 측량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며, 영남이, 자기가 한 것으로 승복한 것은 그 자신 그것이 죽을 죄는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자기가 죄를 대신 받음으로써 후일 그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는 말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형조에서는 형을 1차만 시행하였고 적용 법률도 가볍게 정하였다. 뭇 입들이 왁자지껄하기를, 영남이 위조한 일은 사람들이 공분을 느끼는 바로서 일상의 입장에서는 그 때문에 억울하게 무함과 더럽힘을 당했으니 바로 죽이고 싶었을 것인데도,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일상의 친구이면서 그렇게 헐하게 처리한 것은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는 일이다 하였으니,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일상을 더욱 의심하였다.
7월 10일 계해
집의 이연년(李延年), 지평 윤지미(尹趾美)가, 이광재(李光載)를 처치함에 있어 말구사가 정당성을 잃었다 하여 인피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양사(兩司)를 처치하면서, 연년·지미는 체직시키고 사간원 관원들은 나오도록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광재가 소장을 올리려 할 때, 충량이 그를 저해하려 하는 것을 분히 여겨 서로 붙들고 다투다가 옷소매를 찢기까지 하고는 곧바로 체면 깎이는 일을 했다 하여 인피하였다. 연년이 그를 처치하면서 그 사건을 들먹이지 않고 다만 공무 수행상의 일상적인 말만을 들어 광재의 체직을 청했다가 급기야 사간원이, 광재는 파직시키고 충량은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한 후에야 비로소 인피하였고, 이어 체직을 당한 것이다.
7월 11일 갑자
전남 산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는데 그 절목은 연해 각읍의 예에 준하였다.
흥해 군수(興海郡守) 조석구(趙碩耉)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영남 일대가 연거푸 기근이 들고 토적(土賊)들이 들고 일어나, 경주부(慶州府)에서는 자물쇠를 부수고 창고에 저장된 것을 겁탈해간 변고가 있었다. 흥해는 경주와 접경 지역으로 석구가 많은 정보원을 두고 비밀리에 사찰하여 그 적당들을 체포하고 하나하나 자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가 사유를 갖추어 아뢰자, 형조가, 그 도둑들은 목을 베어 그 고장에다 효시하고 석구에게는 상을 내릴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세도가의 종들이 백주에 사산(四山)의 소나무를 마구 베고 산지기가 잡으면 도리어 패거리들을 데리고 와 몽둥이를 들고 겁을 주었으므로,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는 국가 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리는 종이 금령을 범한 것을 그 상전이 모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고, 그 상전까지 모두 잡아가두고 엄중히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형조가 그 범인을 잡아 신문하였더니 바로 영양군(嶺陽君)·인평위(寅平尉)·동평위(東平尉) 집 종들이었다. 형조가 그 사실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범인들의 상전에 대하여는 비록 먼저의 명령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선 파직한 후에 추고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2일 을축
평안도에 6월부터 이후로 한 달 내내 장마가 져서 황충이 곡식을 해치고 강계(江界) 등지는 유난히 심하여 감사가 장계로 보고하였다.
7월 13일 병인
김수항(金壽恒)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후(李垕)를 집의로,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지평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사인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수찬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병조 참의로 각각 삼았다. 정기가 일찍이 간장(諫長)으로서 이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하자는 아룀에 참여하였다가 크게 시휘(時諱)에 저촉되어, 다시는 청선(淸選)에 뽑히지 못하였고 심지어 은대(銀臺) 물망에도 추천이 되지 않았으므로, 정기로서는 뜻을 얻지 못하여 침울한 빛이 말과 얼굴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정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일경(一卿)이 피곤해 보이는군. 벼슬자리 하나 줘야겠네."
하였는데, 일경은 정기의 자(字)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끄트머리 후보자로 낙점(落點)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일상을 두둔하는 자들은 쌀 실은 배 문제를 놓고, 사간원이 망녕스레 한 말이라고 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경기 감사 조형이 일상의 집에다 술자리를 차려두고 정기의 집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초청하여 함께 마시면서 화해하는 자리라 하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이때 정기가 술잔을 들어 일상에게 넘기자 일상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도 정기 술을 마신다던가?"
하였는데, 정기는 다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산 산성(架山山城)을 수축할 것을 명하였다. 창고와 공해(公廨)·망루까지 한꺼번에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역정(役丁)은 본성에 소속된 각읍의 군정을 가을 조련을 안 시키는 조건으로 그 날짜만큼 부역에 임하게 하였다. 이는 감사 홍처후(洪處厚)의 말을 따른 것이다.
7월 15일 무진
회양(淮陽) 땅의 산이 무너져내려 3인이 압사하였다.
해서(海西) 지방에 황충이 크게 번져 도내 전역에 만연하여 밭곡식을 다 먹어 치우고 논으로 옮겨왔으며, 마을에도 가득하고 길거리에도 가득하여 관리들이 나서서 잡아 묻도록 엄하게 독촉하였으나 당할 수가 없었고, 평산(平山)·서흥(瑞興) 지방은 유난히 심하였다.
7월 16일 기사
약방 도제도 이경석 등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편히 앉아서 인접하여 기후를 살필 수 있도록 하시고 이어 신료들을 인대하여 아래의 뜻이 통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속 걱정거리가 생겨서 오래도록 진찰하는 일을 폐지하였다. 머지 않아 날씨가 조금 시원해져 머리 부위나 안면·귀의 병이 없어지게 되면 어찌 입진을 피하여 불신(不信)의 비방을 초래하겠는가?"
하여, 경석 등이 다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비록 대계(臺啓)가 있었으나 사세가 난편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의관이 진찰하는 일까지 아울러 폐지하게 되어 참으로 민망스럽고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비방이라는 하교에 있어서는 자못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뭇 신하들의 심정이 답답했던 것은 사실 성상의 기후를 자세히 살필 수 없어서였지 어찌 감히 불신의 뜻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더욱이 비방이라는 것은 신하들로서 감히 마음도 먹어보지 않은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방이라고 말한 것은 꼭 뜻을 두고 한 말이 아닌데, 그렇게까지 아뢸 것이야 뭐 있겠는가."
하면서 역시 입진은 허락하지 않았다.
헌납 김만기(金萬基) 등이 아뢰기를,
"엎드려 약방에 내리신 비답을 보오니 너무도 놀랍고 두렵습니다. 남의 신하 되어 임금에게 감히 불신의 비방을 가했다고 하면 그 죄는 더 이상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한 시각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 없으니, 모두들 파척(罷斥)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교리 이민서(李敏敍)가 상소하여 직을 사하고, 이어 《주역》의 비(否)와 태(泰) 두 괘(卦)의 뜻을 풀이하면서, 신하들을 소외하여 인접을 너무 드물게 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얼마 전 정원에 대하여 성을 낸 것도 결코 중화(中和)의 기상이 아니라는 것, 자질구레한 시장(柴場) 문제를 달을 넘겨가며 서로 맞서 지금까지도 간원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 약방 문제도 이미 윤허하고서는 그대로 하지 않아 차라리 간언을 거절하고 아예 받아들이지 않은 것보다 그 해가 더 크다는 것, 간신(諫臣)들로 하여금 자기 직무에 불안을 느끼게 하여 본관(本館)이 한 번 두 번 차자를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번거롭게 말라.’는 한 마디로 상대의 말을 거역하는 빛을 현저히 보여, 직려(直廬)에서 숙직을 하면서도 날마다 하는 일이 없게 만들고 있으니 대접하는 것이 너무 박하지 않느냐는 것을 말하고, 또 지성을 다해 초야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아뢴 말들이 실지 내 병에 맞는 말이라는 좋은 뜻으로 비답하였다.
7월 17일 경오
대사간 정지화(鄭知和)의 처치로 김만기 등을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는데, 만기 등이 패초에 불응하였다.
집의 이후(李垕),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아뢰기를,
"성상의 체후가 비록 점점 나아가고는 있으나 아직도 정상 회복은 되지 않아 진찰하는 일을 그만 둬서는 안 되는데, 약방 제조가 입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관의 진찰마저도 받지 않으니, 뭇 신하들이 얼마나 민망스럽고 답답하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성과 믿음이 제일인데 성상께서는 뭇 신하들의 지극한 심정은 이해를 못하고 도리어 불신의 비방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약방 제조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간원의 관원들이 엎치락 뒤치락 불안을 느끼게 만들어, 성의가 미덥지 못하고 위아래가 서로 막혀 있으니, 이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름철이 물러가고 가을의 기운이 이미 생겼으니, 다소 차도가 있다 하여 절선(節宣)의 방법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빨리 약방 제조와 의관들로 하여금 입시하고 진찰하게 하여 보호의 방법에 빈틈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이 있어 인접을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조금 나았으니 내일 진찰을 하게 하리라."
하였다. 이때 성상의 기후가 편찮아서 치료를 잠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는데, 진찰을 받지 않기 이미 여러 날이 되어 제조 이경석이 누차 청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심정이 답답한 뭇 신하들은 도리어 간원이 아뢴 것을 탓하였었는데, 상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이렇게 쾌히 따라주어 사람들은 사헌부의 이 말이 하늘을 돌리는 힘이 있었다고 하였다.
전 금산 군수(金山郡守) 원궤(元簋)를 장 일백(杖一百)에 영불서용(永不叙用)으로 치죄하였다. 처음에 거창(居昌) 사람 김경신(金景信)이, 자기 조상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고 칭하고 금산 장암(壯巖)의 민전(民田)을 궁가(宮家)에다 몰래 팔아먹었다. 감사가 그 백성이 올린 소장으로 인하여 그 사실을 조사 보고하게 하였다. 원궤는 경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공문을 보내 그로 하여금 와서 변명하도록 하였으나, 경신이 오지 않고 있다가 급기야 감사에게 보고하고 누차 독촉을 한 후에야 비로소 송사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에 감사가, 전지(田地)를 조사 보고한 문장(文狀) 내에다, 경신을 형추(刑推)하여 기피해온 죄를 다스리도록 결정을 내렸는데, 평소 경신이 한 짓을 미워하던 원궤가 형을 가하기 2차만에 그를 죽게 만들었다. 경신의 처는 자기 지아비가 억울하게 죽었다 하여 서울로 올라와 법사(法司)에다 소지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대관(臺官)이 왕래하는 길에서 울부짖으며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논계(論啓) 청사(請査) 등 전후 6차나 행문(行文)이 오고 갔으며, 최후에는 대론(臺論)이, 조사를 제때에 못한 것은 모두 원궤가 중간에서 가로막고 시일을 끈 소치라고 하여 원궤를 잡아들여 국문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원궤는 사실 진술에서,
"한창 조사를 받고 있는 때에는 아무리 가로막으려고 하더라도 상사(上司)나 추관(推官)이 그를 봐주느라 할 일을 아니할 이치는 만무하지 않소? 이렇게 지체된 것은 모두 경신의 처가 와서 대변(對辨)을 않았기 때문이오."
하여, 금부에서는 그의 진술 내용이 옳다고 보고, 다만 상이 재량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크게 화를 내며, 회계(回啓)가 너무 늦은 것은 법을 지키는 뜻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교하고, 이어 원궤를 형추하여 사실을 밝히라고 명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사가 지연된 책임은 감사에게 있는데 원궤를 형추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 같습니다."
하여, 상이 감사를 추고하도록 명했는데, 감사의 함답(緘答) 역시 원궤의 말과 같았으나, 원궤는 형(刑)을 함부로 썼다 하여 이렇게 죄를 받았던 것이다. 원궤가 경신을 죽인 일을 사람들은 모두 통쾌하다고 하였는데, 다만 사건이 궁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원궤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수상(首相)이 구제해주어 중한 죄는 면할 수 있었다고들 하였다.
7월 18일 신미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집안에 질환이 있다 하여 차자를 올리고 내국(內局) 및 찬수(纂修) 직임을 사하였는데, 차자가 해조에 내려지자 이조에서는, 대신의 차자를 본조가 논의하여 아뢸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여 다만 상이 재량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은, 내국 직임만을 체개할 것을 허락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앞 합문을 닫고 의관만 들어와 진찰하게 한 후 침을 맞았으며, 제조 등은 합문 밖에서 부복하고 있었다. 침이 끝나자 제조 윤강(尹絳)이 내시를 통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오랜 기간 입시를 못하였으니 천광(天光)을 우러러 뵙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물론 보고 싶으나 침 맞은 곳에 흐르는 피를 미처 닦아내지도 못했으니 후일에 기회를 만들자."
하였다. 이때 뭇 신하들이 임금 얼굴을 못 본 지가 한 달이 넘었다. 비록 사헌부의 청에 의하여 제조가 합문 밖까지 입시할 수는 있었으나, 끝내 임금 얼굴은 보지 못하였다.
정태화를 어영 도제조에 겸임케 하고,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임한백(任翰伯)을 헌납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각각 삼았다. 만기가, 대각(臺閣)에서나 경악(經幄)에서 당론이 날카롭다 하여 또래들로부터 추중을 받았다. 그러나 다만 눈이 하나 애꾸여서 처음 괴원(槐院)에 출사하였을 때 원리(院吏)들이 깜짝 놀라면서 2백 년 이래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고, 급기야 빠른 시일 내에 요로(要路)에 오르자 사람들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만기가 그 병이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더 높은 관작(官爵)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가뭄이 갈수록 심하여 바닷가 땅은 짠내가 물씬하였고, 산군(山郡)의 수원이 있는 곳도 모두 말라붙어 벼들이 누렇게 시들고 이삭이 나올 가망이 없었다. 장단(長湍)·삭녕(朔寧)·마전(麻田)·적성(積城) 등지는 또 6월에 폭우가 쏟아져 강가의 전답은 곡식들이 많이 썩고 게다가 황충까지 일어, 경기 감사가 알려 왔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고 왼쪽 발에 산침(散鍼)을 맞았다. 상이 이르기를,
"앓던 두통이 가을이 되자 배나 더 하여 천천히 날씨를 보아가며 뜸을 떠야겠으니, 제조에게 말하여 날짜를 미리 정하라고 하라."
하여, 제조가 합문 밖에 엎드려 있으면서 의관에게 내린 하교를 듣고는 입시를 청하려다가 머뭇머뭇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물러갔다.
함경 감사가, 가뭄과 황충의 피해가 작년보다 심하다고 알려와, 예조가 함경도 중앙에다 포제(酺祭)를 올려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향과 축문과 예폐를 내려보낼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재앙을 멎게 하는 방법은 덕정(德政)을 잘 닦는데 있는 것인데 구구한 푸닥거리로 멎게 하려 하니, 역시 옳은 방법이 아니다.
행 대사헌 송준길이 회덕(懷德)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직을 사하고 또 아뢰기를,
"4월 초경에 신이 청대 입시하여, 여러 궁가에서 산과 바다를 떼어받은 일, 영당(影堂)에 장(庄)을 둔 일, 그리고 충훈부(忠勳府)의 조세 면세 등의 일에 대하여 그 폐단을 논하고, 이어 조종조에서 행하던 왕자(王子)·부마(駙馬)에 있어서의 직전(職田) 제도를 다시 시행할 것을 청하면서, 제신(諸臣)들이 말한 의견들을 성상께 아뢰어 신화(新化)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었는데, 그때 성상의 안색이 따스하고 맑았으며 주고받은 말도 메아리처럼 합치되었었습니다. 이어 이튿날 아침 대신들을 모이도록 명하여 신이 아뢰었던 것을 탑전에서 서로 의논하게 하였는데, 제신들이 똑같은 말로 되풀이하여 아뢰자 그 모두를 윤허하였습니다. 산과 바다의 폐단 같은 것들은 지금부터 영구히 금하기로 하였고 우선 강원도 시장(柴場)부터 혁파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직전 제도도 탁지(度支)로 하여금 물러가서 계획을 세워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여, 제신들이 물러나와 서로 우쭐대면서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시골로 돌아온지 몇 달이 되도록 아직 감안하여 아뢴 일이 없어 저으기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뒤이어 저보(邸報)를 보았더니, 강원도 시장도 강릉(江陵)의 것만 혁파하라고 하여 대신(臺臣)들이 논집(論執)하고 있어도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한 가지 일이 그렇고 내일 한 가지 일이 또 그렇고 하면 끝에 가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를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사 의리(公私義理)의 구분과 대소 경중의 차이에 대하여 길이 살피시고, 빨리 혁파할 것은 혁파하고 실시할 것은 실시하여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시고 그리하여 중외(中外)에서 바라고 있는 마음에 위안을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작은 일을 가지고 서로 버티는 것이 옳지 않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애당초 내 뜻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시행을 않았던 것인데,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어찌 결정을 않고 끌기만 하겠는가.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시행하리라. 그리고 지면을 메운 글월은 서로 만나서 나누는 한 마디 말만 못하다. 이제 장마 더위는 이미 개었고 가을 기운이 감돌아 경이 행동할 때가 바로 온 것이니, 이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여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속히 고쳐 먹기를 내 날마다 바라고 있다."
하였다.
영릉(寧陵) 전면 난간의 지대석(地臺石)과 상석(裳石) 연결 부위가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부터 조금씩 꺼지고 틈이 생겼다. 이번 장마를 거치고 난 후에는 전면의 병풍석(屛風石)·가석(駕石) 등의 연결 부위까지 날이 갈수록 점점 틈이 생기고, 정자각(丁字閣) 기와 위에 바른 석회도 벗겨져 떨어진 곳이 많아 수릉관(守陵官)이 알려왔다. 일이 예조에 내려지자, 예조가, 대신을 보내 봉심한 후 수리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1일 갑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앞의 합문을 닫고 의관만 입진하도록 하고 왼편 발등의 부스럼이 난 곳에 산침을 맞았다.
황해도 시소(試所)에서 불이 났는데, 그 곁에 화약고(火藥庫)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시관(試官)이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피해 도망갔고, 거자(擧子)들 역시 많이 장옥(場屋)을 빠져나갔으며, 서책·시지(試紙)도 잃어버린 게 태반이었다. 그리하여 불을 끈 후 비록 다시 모이기는 하였으나 걷힌 시권(試券)이 겨우 4백여 장에 불과했다.
7월 22일 을해
정태화를 내의 도제조로, 이연년을 사간으로, 경최를 전언으로, 이익을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이익이 전번 옥당에 있을 때 동료를 모아, 전조(銓曹)가 후보 추천을 잘못한 것을 차론(箚論)하였는데, 그것은 영천 군수(榮川郡守) 홍주세(洪柱世)가 청로(淸路)에 오르는 것을 미워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차론 때문에 모인 날이 바로 자기 어머니 제삿날이었으므로, 주세를 두둔하는 자들은 그 일을 들어 꽤나 조롱과 배척을 가하였고, 전랑(銓郞) 추천에 있어서도 진작 타당한 것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곧바로 비의(備擬)를 하지 않아, 이익이 분에 못이겨 시골로 내려갔다가 지금 와서 다시 옥당에 제배된 것이다.
7월 23일 병자
약방이 입진할 것을 청하여, 상이 흥정당에 나아갔는데 의관만 입진하도록 하였다. 입진이 끝나자 도제조 정태화가 중관(中官)을 시켜 전계(傳啓)하기를,
"상께서 오래도록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아 뭇 신하들이 민망스럽고 답답한 심정입니다. 바라건대 천안(天顔)을 한 번 뵙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여, 태화가 상의 앞에 가 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얼굴에 부스럼이 아직도 많아 머리 빗고 세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서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뭄이 이렇게 심하여 백성들 일이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면 비록 가을이 된 후라도 기우(祈雨)를 할 수 있는 것인가?"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겨울에 기설(祈雪)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비록 가을 절기로 접어든 후라도 이렇게 가무니 꼭 상규(常規)에 구애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급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계사·을미·계묘·경인년에 모두 입추 이후에 기우한 일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수일 내로 정성스러운 기도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종묘와 사직단부터 먼저 행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원두표가 영릉을 봉심한 후 병으로 복명을 못하고 차자를 올려 대죄하면서, 석물(石物)이 꺼졌거나 틈이 생긴 곳이 모두 26군데이고, 정자각에 바른 석회도 일곱 군데가 벗겨졌으며, 기와도 거의 절반은 색이 붉고 또 깨진 곳도 있었다고 써서 아뢰고 도형까지 곁들여서 들여왔다.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 경천군(慶川君) 김남중(金南重),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모두 그 당시 감독을 맡았던 사람들로서 정원에 나와 연명으로 대죄하였고,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도 당시의 도청 낭청으로서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상은 그게 얼어서 터진 소치이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고, 좌의정 심지원도 그 당시 총호사였던 까닭에 역시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상이 역시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정축
영릉 수개도감 당상(寧陵修改都監堂上) 여이재(呂爾載)·이만(李曼) 등이 아뢰기를,
"수개하는 일이 하루가 급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날을 잡게 하고 되도록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나, 대신이 아뢴 내용을 보면 틈이 생긴 곳이 거의 30군데나 된다고 하였는데, 그 중의 병풍석·가석·지대석은 바로 능을 봉축한 석물(石物)로서 먼저 것을 그대로 두고 보수만 하여도 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으나, 만일 부득이 새로 갈기라도 해야 한다면 일도 중대한 일이며 공역(功役) 또한 클 것이어서, 다시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결과를 여쭈어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신들이 도청 낭청 곽지흠(郭之欽), 예조 정랑 최문활(崔文活)과 함께 석공(石工)을 대동하고 내일 달려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5일 무인
남소(南所)의 부장(部將)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남산의 봉화가 원래 다섯 자루[柄]인데, 아차산(峩嵯山) 봉화는 북로(北路)에서 나온 것으로 구름이 끼어 깜깜할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후망(候望)을 할 수 없으면 그때는 네 자루만 거화(擧火)하여 왔던 것인데, 어제는 날씨가 청명하여 사실 다섯 자루를 다 거화했는데도 남소의 부장이 그것을 살피지 못하고 네 자루만 거화한 것으로 병조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봉수 단자(烽燧單子)가 들어왔는데 상이 때마침, 다섯 자루가 모두 거화됐음을 보고는 하교하였다.
"봉수를 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관계됨이 매우 중한데 태만하여 직무를 살피지 않기 그 모양이니, 지금 그것을 엄중히 다스리지 아니하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그 부장을 잡아들여 국문한 후 적당한 조처를 가하여 후일의 본보기가 되게 하라."
병조 판서 정치화, 경천군 김남중, 형조 판서 홍중보, 우부승지 조윤석, 그리고 전 금성 현령(錦城縣令) 이만영(李晩榮) 등 11명이 죄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영릉의 도감 당상, 도청 낭청, 감조관(監造官) 등이었다. 집의 이후(李垕) 등이 치화 등을 탄핵하면서 주장하기를,
"산릉 일을 감독하여 끝낸 지 겨우 1년이 지났는데 능 위의 석물들이 내려앉거나 혹은 틈이 벌어졌고, 정자각 기와도 색이 붉어진 것이 태반이며, 바른 석회가 깨지고 떨어진 곳이 많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관계된 바 중대하여 그 죄를 면키 어려우니, 모두를 잡아들여 추고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후 등이 또 아뢰기를,
"지금 감시(監試) 시험장에 함부로 들어왔다가 붙잡힌 김경진(金慶振) 등 네 명과 그들을 데리고 들어온 유생(儒生) 그리고 자칭 조흘첩(照訖帖)044) 을 샀다고 하는 송지봉(宋之鳳) 등은 담당자로 하여금 잡아 가두었다가 법에 의하여 죄를 과하게 하시고, 조흘첩은 있으나 이름이 등록되지 않은 유명(柳溟) 등 여섯 명에 대하여는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죄를 과하게 하소서. 조흘 고강(考講)을 맡은 곳의 서리(書吏)가, 이름이 적히지 않은 조흘첩을 만들어서 유생들에게 몰래 팔고 있다는 설이 자자하게 퍼져있는데다 지봉이 또 분명하게 불었으니, 몰래 판 사실이 이제 와서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인만큼 고관(考官)이라는 자들도 방간(防奸)을 못한 잘못이 있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조흘을 맡은 두 곳의 시관을 모두 파직시키고 서리들은 담당자로 하여금 잡아 가두었다가 법에 의하여 죄를 과하게 하소서.
그리고 과장에 함부로 난입하는 폐단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금난관(禁亂官)에게 있는데, 지금 두 곳 금난관이 진위도 구별 못하고 몹시 피폐한 시골 유생들까지 싸잡아서 잡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 조흘첩을 보고 이름을 대조하고, 또 그들의 사조(四祖)를 묻고, 또 자기가 지은 시부(詩賦)를 외우게 하여 하나에서 열까지 틀림이 없는 자를 가려내어 돌려보낸 수가 10여명이나 됩니다. 과장에서의 금난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데 그것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잡아 보낸 폐단이 있게 만들었으니, 두 곳 금난관도 파직시키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르고, 또 붉은 색의 돌을 캐낸 부석소(浮石所)045) 의 감역관(監役官)과 석공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연년(李延年),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아뢰기를,
"요즘 선비들의 습성이 아름답지 못하여 과장에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사목(事目)을 거듭 밝혀 법부(法府)로 하여금 일체 엄금하게 한 것이 뜻이 있어 한 일인데, 이번 감시 때 현장에서 붙잡힌 자가 20여명 정도로 많았는데도 정작 형조로 이송된 자는 5명뿐이어서, 그를 분석(分釋)하는 사이에 사람들 말도 많았고 다분히 의혹이 섞였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집의 이후, 장령 성후설을 둘 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늘이 마음이 좋지 않아서인지 재난과 이변이 거듭 닥치고 올해는 흉년도 장차 작년보다 더 심할 모양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재난이 무단히 생기는 게 아니고 재앙도 사람 하기에 따라 일어난다.’ 하였거니와, 오늘날은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하늘로부터 죄를 받는 것입니까? 지난날 성상께서 비록 중도를 벗어난 일이 있었지만 금방 뉘우치고 깨달아 정원의 신하들에 대해 끝까지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고 간관들에게도 특별한 우대를 보여, 성상이 허물을 고치자 사람들 모두가 우러러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뇌정(雷霆) 아래서는 꺾이지 않을 것이 적은 법이어서, 오늘날의 언로가 지금으로부터 삭막해지는 것이 아닐까 저으기 염려됩니다.
또 전일에 대신의 차자를 곧바로 해조에다 내렸는데, 이는 사실 전에 없던 일로서 자못 대신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며 출납을 맡은 신하 또한 즉시 되짚어 여쭙지 못했으니, 그것만 보아도 뭇 신하들이 감히 말을 못하는 조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사헌 송준길의 상소도 입계된지 여러 날만에야 성상께서 비로소 비답을 내렸고, 우찬성 송시열의 상소에 대해서도 역시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준길이 말한 시장(柴場) 문제도 윤종할 뜻만 있었지 실지 채용을 하지 않았으며, 사간원이 논했던 약방 제조 입시 문제도 허락만 하고서 시행하지 않아, 옛 사람이 말했던 ‘말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고 그 말대로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라는 경계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기강이 탄탄하지 못하고 일백 가지 법도가 모두 해이한데, 신이 그 중의 한두 가지를 들어보겠습니다. 호적법(戶籍法)은 백성의 수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서 국가가 전일과는 판이하게 강조를 하고 있는 일임에도 지금 들어보면 수령들이 민원이 두려워서 옛날에 하던 투대로 질질 끌고 있다고 하고, 거자(擧子)의 조흘(照訖)을 전부 다시 하라고 한 것도 우연히 시킨 것이 아닌데 지금 듣기에 강관(講官)이라는 자들이 그것을 보통으로 보아 심지어는 공문(公文)인 조흘첩이 아랫것들이 몰래 팔아먹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장옥(場屋)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엄금하는 목적은 그것이 선비들 습관을 바로잡고 시험 장소를 엄숙하게 하기 위함인데 거자로서 금령을 범하는 자가 꽤 많다는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일만 보더라도 조정 명령이 행해지지 않고 있음을 알 만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답하고, 또 이르기를,
"시장(柴場) 건에 대하여는 대사헌 상소로 하여 이미 윤허가 된 것인데 어찌 허락만 하고 시행을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것은 각 담당 관아가 거행을 않고 있는 것이지 내가 허락치 않은 것이 아니다."
하니, 좌부승지 윤집(尹鏶)이, 대신(大臣)의 차자가 해조에 내려졌을 때 되짚어 아뢰지 못했기 때문에, 송준길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간 후까지 시장 혁파 건에 관하여 즉시 분부를 못했다는 이유로 대죄하고 소를 올렸는데,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이연년, 정언 윤지미 등이, 경기·호남·영남·관동 등지에 가뭄이 극심하고 양서(兩西)에는 충해까지 심하다는 내용으로 차자를 올려, 자신을 닦아 반성할 것과 백성 돌보는 방법을 아뢰자, 상이 좋은 뜻으로 답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사직하고 오지 않은 채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의관 양제신(梁濟臣)을 수령으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가 정관(政官)이 즉시 봉행을 않자, 그 때문에 크게 화를 내어 정관의 퇴청을 불허하고 그로 하여금 정청에서 밤을 지새게 하여 마치 구금이라도 하듯이 하였고, 이어 그 화를 정원으로 옮기더니 또 이어 약방 대신에게로 옮겨 전후 윤음이 너무도 과중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나라를 일으키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면서, 이어 정자(程子)가 말했던, 성냄을 잊고 사리를 관찰하라고 한 설을 인용하여 경계를 가하고, 또 아뢰기를,
"작년 초여름에 어사를 내보내려고 할 때 선왕께서 친히 소신에게 염문(廉問)할 절목을 주시면서 신으로 하여금 나가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을 지어 올리라고 하시고, 그리고 또 다시 직접 손질을 하신 후 나누어주면서 내보냈는데, 여러 궁가들이 폐단을 일으키는 등의 건에 있어서는 그것을 두드러지게 표시하여 봉서(封書) 속에다 특서(特書)를 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명령을 받은 자가 8명이었는데, 그들에게 준 염문 절목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 없어 역시 일체로 염문을 하자는 내용이었음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저으기 듣건대 지난번 성상께서는 선왕조에서 염문하라고 한 곳이 영남 한 도에 한하고 다른 도는 염문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가 급기야 연신(筵臣)이 말을 올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서둘러 덕음(德音)을 발하여 선왕께서 미치지 못했던 일을 매듭지어야 옳을 것인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핑계만 대어 중외를 실망시키고 있으니, 그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봉서가 아마 지금도 다 있을 것이어서 속일래야 속일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사리로 미루어보더라도 각도의 백성들이 궁가로부터 피해를 받는 자이면 당연히 다 돌보아야지, 왜 차별을 두어 저쪽은 인후하게, 이쪽은 잔인하게 할 것입니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이치인데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끌고 어려워하는 것입니까? 그는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정사에 있어 크게 해가 되는 일이며, 선왕의 뜻을 이어받고 사업을 이어가는 도리에 있어서도 역시 유감된 일이어서, 신으로서는 저으기 전하를 위해 개탄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이성을 되찾아 선왕의 마지막 유명을 그대로 따르시고, 비록 평상시의 사목(事目) 이외의 것이라도 모두를 부류별로 미루어 짐작하여 바로잡고 개혁함으로써 사방 민심에 큰 위안을 주소서."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체직은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심지원이 상소하기를,
"도감 당상을 잡아들여 추국하라는 명령이 이미 내렸는데, 신이 수석에 있는 사람으로서 요행히 면할 수가 있는 일입니까? 법사에 내려 똑같이 죄를 논하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평안도에 황충이 더욱 번져 심한 곳은 빈 줄기만 남아 있었고 산골은 더욱 심했으며, 안주(安州)·태천(泰川) 등지에는 홍수가 져서 사람이 떠내려가고 벼와 곡식도 손실이 많아 도신(道臣)이 치계하여 알려왔다.
7월 26일 기묘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한재가 이렇게 참혹한 것은 하늘이 나를 깨우치기 위함인데, 나의 부덕한 소치로 인하여 죄 없는 백성들이 모두 장차 구렁에 굴러 떨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자신을 꾸짖은 하교는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족할 것입니다. 오늘의 재이가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요즘들어 성상께서 화를 자주 내시고 사기(辭氣)가 지나친 데가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규간을 많이 올리고 있고 성상께서도 뉘우치고 깨닫고는 있지만, 그런 마음을 계속 지니는 공부가 아마 혹 전일보다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알고 있다. 나 자신 어찌 잘못이 없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강화 유수 유심이 아뢰기를,
"본도 연해변에 당초 7개 보(堡)를 설치한 뜻은 이유가 있어서일 것인데, 거기에 소속된 군대가 없어 유사시 힘을 얻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건대 본부의 속오군(束伍軍)을 갈라내어 매 보마다 각기 1초(一哨) 씩을 주고 부근 사람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평상시에는 본부에서 훈련하다가 유사시는 각보에서 옮겨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유계(兪綮)를 승지로, 조귀석(趙龜錫)을 집의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내국 제조로 각각 삼았다.
산릉 수개도감 당상(山陵修改都監堂上) 여이재(呂爾載) 등이 능소로부터 들어와 아뢰기를,
"신들이 갖가지 석물을 봉심하였더니 대신이 써서 아뢴 것과 별 차이는 없었습니다. 수개(修改)하는 일이 하루가 급하기는 하지만 혹시 다시 배열하고 다시 쌓고 할 곳이라도 있으면 능 안이 동요될 염려가 없지 않아 너무 미안한 일이고, 병풍석·가석·지대석 같은 것은 모두가 능을 봉축한 석물이어서 만약 배열을 다시하려면 반드시 능 위에 있는 흙과 돌을 모두 거두어내야지만 일을 할 수 있고, 종전에 배열한 대로 두고 보수만 하면 그저 메우고 괴고 하는 정도에 불과하여 신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그것이 선처의 방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자각 기와를 바꾸는 일도 삼시(三時) 제사를 모시는 지금에 하기에는 역시 어려운 점이 있으니, 바라건대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도감의 근본 취지는 일시적 고식을 취할 것이 아니고 영구적 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으로 거기에 바로 미안한 점이 있어 그렇게 아뢴 것이겠으나, 고식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은 그 득실에 있어 차이가 현격하고 또 그 미안한 점으로 말하더라도 역시 대소의 차이가 크게 있습니다. 다시 배열하는 것이 비록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더 큰 고식의 미안보다는 차라리 나은 것입니다. 공자(孔子) 이전에는 분묘를 보수하는 예가 없었는데, 주자(朱子)가 정한 경경(輕輕)의 뜻에 대하여 강론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의논드리기를,
"다시 쌓고 다시 배열하는 과정에서 만약 능 안이 진동을 받게 된다면 차라리 꺼지고 틈이 생긴 곳이나 메우고 괴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으며, 우의정 원두표는 의논드리기를,
"병풍석 등 틈이 생긴 곳을 지금 만약 헐어버리고 다시 배열하기로 하면 능 안이 진동하여 사실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고, 그렇다고 메우는 정도로 끝나면 만년토록 의관(衣冠)을 간직할 곳이니만큼 역시 조금이라도 구차하거나 소략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다만 일을 시작하고 나면 크고 작은 전사(典祀)에 방해되는 일이 많을 것이므로, 3년 후에 개수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영중추부사 정유성은 의논드리기를,
"석물을 다시 배열하자면 그 과정에 능침(陵寢)이 진동을 받게 될 미안한 점이 있을 것이야 물론 알지만, 그렇다고 종전대로 두고 메우는 정도로 끝난다면 오래지 않아 또 종전같이 기울고 꺼지는 폐단 등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니, 막중 막대한 일을 그렇게 일시적으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튼튼하게 다시 수축 배열하는 것이 영원한 계책일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심지원은 현재 대죄 중이어서 감히 의논드리지 못하였다. 상은, 예관을 다시 보내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에게 가 의논한 후 아뢰라고 명하였다.
내관 윤완(尹完)을 금부에 하옥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산릉(山陵) 역사에 간여했던 관원들이 지금 모두 나추(拿推)를 당했는데, 윤완은 바로 그때 차지 중사(次知中使)였던 것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덕이 적고 우매한 사람이 외람되이 큰 업을 이어받은 후로 천재 시변이 거의 없는 날이 없으며, 해마다 가뭄과 황충으로 기근이 거듭 닥쳐 밤낮 걱정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도 이삭이 나올 절기인데 20여일이 다되도록 비 한방울 내리지 않고 있으니, 그 허물을 살펴보자면 죄가 내게 있는 것이지 고단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얘기하다보니 내 몸이 아픈 것만 같다. 승지는 나 대신 교서를 초안하여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여 대소 신민들이 조금도 숨기지 말고 나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게 하라."
7월 27일 경진
조흘 시관(照訖試官) 손필대(孫必大) 등을 금부에 하옥하였는데, 이유는 하리(下吏) 단속을 잘못하여 조흘첩을 몰래 팔아먹게 한 죄 때문이었다.
7월 28일 신사
의금부가 정치화(鄭致和) 등의 죄에 대하여 장 팔십 탈고신(杖八十奪告身) 율을 적용하였는데,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등(等)을 감하고 파직만 시켰다.
이때 가뭄이 너무 심하여 비록 대신을 보내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올렸으나, 역시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또 근시(近侍)를 보내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 등지에 가 비를 빌게 하였는데, 향(香)을 받은 날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연일 계속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기뻐 손뼉을 쳤다.
북도 경흥부(慶興府)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7월 29일 임오
좌상 심지원이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 여증제(呂曾齊)가 응지소(應旨疏)를 올렸는데 대의는 폭노(暴怒)를 경계한 것이고, 전일 있었던 민광소(閔光熽)·박세성(朴世城)·양제신(梁濟臣) 등의 일을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화를 세 번 내셨습니다. 앞으로의 일에서는 어찌 다만 기왕의 세 번 화내신 것에 그치겠습니까? 즉위하신 지 겨우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놀랄 만한 이변이 춘추(春秋) 시대보다도 갑절이나 더하니, 그것을 어떻게 혹 그럴 수도 있다고 핑계대고서 수성(修省)을 가하지 않을 것입니까. 지금 전하가 전후 세 번 성내신 것이 점점 악화되어 이렇게 위아래가 꽉 막힌 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너무 심한 가뭄으로 가을 이삭이 다 마르고 충재까지 또 번져서 남아 있는 줄기까지 거의 먹어치웠습니다. 그리하여 불쌍한 우리 민생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몇 줄 자신을 탓하는 말만으로 하늘의 성냄을 멎게 하여 단비가 쏟아져 내리기를 바란다면, 전하의 재이에 대한 경외심이 과연 정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가상히 받아들였으며, 이어 호피(虎皮) 한 장을 내려 갸륵히 여기는 뜻을 표하였다.
7월 30일 계미
의관 양제신을 3품(品)으로 부록(付祿)할 것을 명하였다. 제신이 비록 금천 현감에 특별 제수되었으나 제자신이 불안히 여겨 오래도록 부임을 못했는데,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면서 그에 대해 논열(論列)이 있었다. 그러나 상은 그를 채택하지 않았다가 지금 와서 여증제의 상소 내에, 시열의 거취가 그 일에 달려 있다고 말하자 상이 이에 정원에 하교하여, 당초 시열의 상소에 대한 비답 내용이 통창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명백한 하교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여, 양제신의 상격(賞格) 전지(傳旨)에다 3품 실직(實職)을 제수하도록 부표(付標)를 고쳐 들여오게 하였다. 이에 승지 홍처윤(洪處尹)이, 각시(各寺)의 정(正) 이외에는 다른 관직이 없고 종전부터 잡직인(雜職人)을 제수한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3품으로 부록할 것을 청하여 전지를 받아왔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이후(李垕)로부터 헐뜯음을 당한데다 또 여증제(呂曾齊)의 상소 내에, 양제신을 논열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있었음을 듣고는 인피하였고, 장령 정박(鄭樸), 지평 여성제(呂聖齊), 집의 조귀석(趙龜錫)도 모두 양제신을 논열하지 않은 잘못으로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홍문관이 처치하기를,
"당연히 논열해야 할 것을 논하지 않아 잘못이라는 물의가 일게 하였으니, 이는 언책(言責)을 잃은 것으로서 재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평안 감사 김여옥(金汝鈺)이, 본도가 흉년이라서 증광시(增廣試)의 동당(東堂) 초시(初試)를 두 곳에서 치르게 되면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본도의 중앙에다 도회소(都會所)를 정하고 청천강(淸川江) 이남 이북의 응시 유생들을 한 장소에서 시험 보일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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