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권, 현종 1년 1660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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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유

대사간 이경억, 사간 곽지흠, 헌납 목내선, 정언 권격·이무가 아뢰기를,
"금년 기근은 팔도가 일반인데 국가가 그 진구책을 요리하는 데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즘 들으면 영남도 기근이 동북(東北) 두 곳 못지않아 가는 곳마다 풀과 나뭇잎을 먹고 가끔 사망자까지 생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세(收稅) 시기가 이미 다가왔는데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여유가 없는 백성들로서는 마련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다급함을 조금이나마 늦추어주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국가가 만일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저장해 둔 것으로는 다만 강도(江都)의 쌀이 있을 뿐이므로, 일만분 절박하고 다급한 일이 아니면 그를 가져다 쓸 것을 함부로 논의해서 안 될 일이지만, 백성들 목숨이 다해가고 있으며 일에는 경중이 있는 것이고 보면 굶주린 백성들 입 속에 있는 것을 꺼내오기만 하고 어떻게 변통의 방법은 생각지 않을 것입니까. 백성들 시체가 구렁을 메우게 내버려두고 끝까지 돌보아줌이 없다면 그 어찌 경중 완급에 있어 순서가 뒤바뀐 일이 아니겠습니까.
듣건대 강도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정조가 아직은 10만여 섬이 있다니, 지금 그것을 적당량 갈라내어 해당 아문의 경비에 쓰게 하고 가을이 되면 영남의 전세(田稅)를 받아들여 그 수를 충당하게 하면, 궁한 백성들이 눈앞의 다급함은 풀 수 있어 매우 편리하고 옳은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빨리 서둘러 조처가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황해도에 우박이 쏟아지고 서리와 눈이 내렸으며, 황주(黃州)에는 불이 나서 인가 60여 채가 연소되고 사람이 타죽고 마소들도 많이 타죽었다.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알려왔는데, 상이 휼전(恤典)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집이 북도(北道)를 오가는 길가에 있어 보노라면, 북도의 굶주린 백성들이 경기 근교로 떠돌아 오는데, 늙은이 어린이가 한데 엉겨 혹 5, 6명, 8, 9명이 무리를 짓기도 하고 혹은 10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모두 쑥대머리에 귀신 형상으로 낯에 사람 기색이라곤 없고, 어느 행인이 길 옆에서 밥을 들고 있는 것을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파리모기 떼처럼 모여들어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면서 인사고 체면이고 없습니다. 또 길손들 말을 들으면, 북에서 온 떠돌이 걸객들은 업거나 안고 온 자식들을 전사(傳舍)에다 놔두고 내일 와서 데려간다고 약속하고서는 끝까지 데려가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아예 길가에다 버리고 간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모르긴 해도 그 뿌리가 끊기고 쑥대모양으로 굴러다니는 백성들이 몸에는 해진 갈포 한 자락을 걸치고 손에다는 빈 바가지 한 쪽을 든 채 말라붙은 혀에 허기진 배를 쥐고 지쳐 쓰러져 가면서 가본들, 장차 어디까지 갈 것입니까? 앞으로 열흘이 넘지 않아 굶어 죽은 시체가 경기 근교에 널려있을 것이 뻔합니다.
경기 도신(道臣)이 각읍에 시달한 공문을 보면, 지부(地部)가 성상의 전지를 받들어 실시하고 있는 구황 정책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백성의 부모이신 전하께서야 어떻게 차마 늙고 어린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골짜기를 메우게 할 것입니까. 그들 진구에 있어 당연히 모든 정책을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다만 물정에 어두운 늙은 신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것은 경기 각읍에도 창고의 저장이 한계가 있고 본토 백성들도 채색(菜色)을 띤 자가 많은데, 비록 창고를 다 털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다급한 북녘 백성들까지 어떻게 다 구제할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왜 빨리 담당관에게 명하여 강화도와 남한 산성의 해묵은 곡식을 꺼내어 좀더 여유있게 구제하도록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작년의 기근은 팔도가 일반이었지만 관북(關北)은 더하여 천리가 벌거숭이 땅이었고 10호에 9호는 비어 있어, 후일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오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을 안집시키자면 비록 슬기있는 자가 맡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지 않을까 신으로서는 염려입니다.
아, 관북이라면 바로 성조(聖祖)께서 왕의 터전을 다지신 곳이며 국가로서는 뿌리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지금 국가가 해야 할 급선무가 북녘 백성들을 진구하는 일 외에 더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 명(明)나라 신하 도융(屠隆)이 쓴 《황정고(荒政考)》 1책을 올리면서, 예로부터 황정(荒政)에 대하여 논한 것들이 많지만, 예를 원용하고 현실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빼놓은 것 없이 완전을 기한 책자로는 이만한 책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옛 사람들이 구황 정책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언급했던 것이 용관(冗官)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용관도 없애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초야에 있으면서 국록을 먹는 신이겠습니까. 신이 먹고 있는 녹봉만 줄여도 몇십 명의 굶주린 백성을 살릴 정도 이상일 것이니, 바라건대 담당관을 명하여 신에게 급여되는 월봉을 거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말이나 책자가 참으로 구황의 격언이라고 하겠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니 경도 안심하고 녹봉을 사양 말라."
하였다.

 

경상도 칠곡(漆谷) 땅에 눈이 내려 초목들이 얼어죽었다.

 

4월 2일 병술

좌참찬 송준길이 정원에 이르러 청대하여,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고, 도승지 김수항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을 말하려는 것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여탑(旅榻)에 있으면서 심사가 불안하고 잠이 오지 않아 나랏일 전반에 걸쳐 생각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요즘 듣자니 이조의 초기(草記)로 하여 자주 정원에 물으시는 일이 있다기에 신이 아뢰고 싶은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지난 기축년 사헌부를 더럽히고 있을 때 언젠가 그 일로 하여 탑전에 아뢴바 있었고, 작년에도 언젠가 직접 선왕으로부터 하교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 사항을 자세히 말해 보라."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근래 무슨 일이든지 내수사(內需司)에 관계된 것이면 돌보고 아끼는 뜻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은 인심의 거취가 결정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시험 삼아 한 가지 사실을 들어 말해 보자면, 지난해 내포(內浦)의 고변(告變) 때 무고당했다가 풀려난 자들에 대하여 선왕께서 식량을 주어 보내도록 명하셨고, 지난번 해서(海西)에서 체포당하여 온 사람들도 무죄가 밝혀진 후에는 역시 식량을 주게 했으며, 심지어 나졸들이 수탈한 가산까지도 모두 돌려주게 하여, 두 도의 인심들이 모두 기뻐 환영하였습니다. 그로 미루어 본다면 정령(政令) 하나가 이렇고 저렇고에 인심의 향배가 달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수사 문제는 계해년010)   초기만 하여도 유신(儒臣)들 모두가 그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고쳐야 할 고질적 폐단이 비록 있어도 감히 곧바로 혁파를 청하지는 못하고 다만 어쩌다가 조금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정도이니,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내수사 공사는 크거나 작거나 그것을 반드시 이조를 거치게 한 것이 조종조의 옛 법이었고, 신이 기축년 논계 때는 먼저 정원을 거치고 그 후 다시 이조의 검사를 받도록 하자고 말하였더니, 선왕께서 너무 번거롭다 하시어 다만 이조로 하여금 그때그때 복계를 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판서 홍명하가 아뢰었을 때 종이 한 장에다 표지를 열세 곳이나 붙였으니, 판서가 복계한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인데도 성상께서 살피지 않으시고 현저히 불평의 빛을 보였으니,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주(尙州)의 대승사(大乘寺)는 어사의 서계로 인하여 원당(願堂)을 혁파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 이조의 초기에 또, 담양(潭陽)의 사찰도 원당으로는 불가하다는 뜻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정원에 물어 조사하여 아뢰게 했던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그 문제가 참으로 신이 말하고 싶으면서도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선왕조의 경연에서 오고간 말들을 전하께서 어떻게 낱낱이 기억하실 것입니까. 선왕께서 송시열에게 하교하시기를, ‘모든 신하들이 제각기 부귀를 노릴 뿐이어서 국가로서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을 기다려 정사를 하려는 것이다. 경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면 내 마땅히 마음을 다해 들어주리라.’ 하시자,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그러하시니 참으로 국가의 다행입니다. 지금 국가 정령이 백성들 여망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공주(公主)의 저택은 왜 그리도 높기만 하며 떼어받는 전장(田庄)들은 왜 그리도 많이들 점유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이르시기를, ‘여러 신하들은 다 자기 자손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 나라고 그냥 있을 수가 있는가 싶어 한 것이지, 그 일이 꼭 옳다고 생각되어 한 것은 아닌데, 경이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내 어찌 깊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후 어사를 내보낼 때도 시열을 시켜 염문(廉問)의 조항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 조항 중에는 사찰 원당의 폐단에 대하여 들은 대로 아뢰라는 조항이 있었지만, 각도 어사들이 성상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봉행하지 않았고, 다만경상도 어사 민유중(閔維重)만이 꽤 상세하게 그 일을 아뢰어 왔습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각도에 똑같이 시행해야 한다고 한 명하의 방계(防啓)는 사실 선왕의 뜻을 넓혀 전하의 덕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러한 곡절은 모르고 다만 담양은 영남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물었던 것이다."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모든 정책이나 명령에 있어 그를 조명 석개(朝命夕改)한다면 그도 미안한 일인데, 하물며 선왕조 때부터 해오던 일을 해당 아문의 초기로 인하여 그것을 따져 묻는다면, 그것이 어찌 뭇 신하가 전하께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직전(職田) 제도가 있어 대군(大君)·공주(公主)는 1백 80결(結)이고 왕자(王子)·옹주(翁主)는 그 다음이었는데, 그 제도가 폐지되고 나서 떼어받는 폐단이 일어났던 것이니, 대신 및 호조의 의견을 물어 다시 옛 제도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복제(服制)에 관하여 수의(收議)한 공문서를 내놓아, 수항(壽恒)이 읽어갔는데, 송시열이 의논드린 내용 중에 ‘이황(李滉)이 수숙(嫂叔)의 복제를 잘못 정하였다.’ 한 대목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공의전(恭懿殿)011)   복제를 이황이 처음에는 명종 대왕이 수숙 사이의 복을 입어야 맞다고 했다가, 기대승(奇大升)으로부터 ‘계체(繼體)의 뜻으로 보아 신하뻘이 되기도 하고 자식뻘이 되기도 한데 어떻게 수숙 사이의 복을 입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힐난을 당하고는 눈을 휘둥리며 깜짝 놀라 깨닫고, 하마터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고 하였다는데, 여기서는 그 일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이 헌의한 후에 허목이 또 상소를 하였는데 그 소문을 보았는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하자, 우승지 이은상이 아뢰기를,
"허목 상소문부터 먼저 아뢸까요."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여, 은상이 허목의 소문을 아뢰고, 이내 그가 올린 상복도(喪服圖)를 아뢰었다. 준길이 상복도를 보고 나서 아뢰기를,
"서자(庶子)는 첩자(妾子)의 호칭이라고 한 것은 그게 바로 주소(註疏)의 말이고, 정체(正體)로서 승중(承重)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장자(長子)이면서 혹 아비에게 죄를 얻었거나 또는 혹 몹쓸 병이 있어 후사(後嗣)가 될 수 없는 자의 경우입니다. 신 등의 주장은 비록 적처(嫡妻) 소생이라도 둘째부터서는 ‘서자’라는 것이고, 허목의 주장은 서자는 ‘첩자’라고 하기 때문에 말이 그렇게 서로 상반되고 있는데, 신과 시열은, 둘째아들은 비록 왕통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의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소의 문의(文義)를 보는 견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말도 그렇게 틀리다는 것인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옛날 예는 아비가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었으나, 우리 나라 예문으로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다만 옛 예를 그대로 준행하는 것인데, 주자(朱子)도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었습니다. 지금 허목이 그의 소문에서 항목을 조목조목 다 나열해 놓았는데, 정체이면서 승중을 못하는[正體不得承重] 것은 비록 장자일지라도 혹 성년 전에 죽었거나 몹쓸 병이 들고 후사가 없는 경우를 이름이고, 체이면서 정이 아닌[體而不正] 것은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이름이며, 정이면서 체가 아닌[正而不體] 것은 비록 적손(嫡孫)이기는 해도 체는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례(儀禮)》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대부 사이의 일뿐만이 아니고 제왕의 집까지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장자가 일찍 죽었거나 혹 몹쓸 병으로 죽었을 경우, 그는 3년을 입지 않기 때문에 둘째 아들 초상에 3년을 입는다는 것이로군."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비록 장자를 위하여 복을 입지 않았더라도 첩자에 있어서는 3년을 입지 않습니다. 소현(昭顯) 상사 때 이경석(李景奭)·이무(李堥) 등이 3년복으로 할 것을 청했는데, 그때 인조 대왕이 답하기를, ‘우리 조가에서는 3년제를 행한 이가 없었으니 기년(朞年)의 복으로 하라.’ 하셨지만, 신의 생각에는 소현상때는3년복을입었어야했고효고(孝考)의상때에는3년복을입어서는안된다고여겨집니다. 대왕 대비로서는 어찌 인조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초상 때는 다만 우리 조가에서 이미 행했던 예를 따라 그대로 하였지만, 지금 논의들은 옛 예를 따르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록(實錄)》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제출한 복제 건에 있어서는 사관(史官)이 온 뒤에 답하겠다."
하였다.

 

4월 3일 정해

우의정 정유성이 면직되었다. 유성이 10차나 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상은 그때마다 사관을 보내 상의 뜻에 부응하도록 노력해 달라는 뜻으로 유시를 하였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작년에 비국이 경상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조사하여 아뢴 내용에 의하여, 도내 각읍의 사찰로서 여러 궁가 또는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정파하고, 다시 그 읍에다 소속시켜 지지(紙地) 등의 역(役)을 제공하도록 할 것에 대한 복계를 하고, 이미 윤허까지 받아 자세한 내용을 공문으로 알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수사 공문을 보니 상주 대승사(大乘寺), 담양 옥천사(玉泉寺)는 동평위(東平尉)·흥평위(興平尉)의 원당이라 하여, 혹은 잡역(雜役)으로 귀찮게 말라고 하고, 혹은 이제 비로소 원당으로 받아 재가까지 났다고 하는데, 각처의 사찰에 있어 한 쪽에서는 정파하고 한 쪽에서는 복설한다면 국가 체제로 보아 그러한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주인 없이 묵어있는 땅을 떼어받는 곳도 강제로 점유하여 원성을 불러 일으키는 폐단이 아직도 많은데, 하물며 망망대해까지 떼어받아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측량을 하라고 한다니, 더욱 터무니가 없는 일입니다. 인평위(寅平尉) 집에서 거제(巨濟) 땅에 앞바다를 떼어받은 것들을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鄭太和) 등에게 이르기를,
"어제 좌참찬 송준길의 말이, 옛날에는 여러 궁가가 떼어받는 법규는 없었고 직전(職田)을 나누어 준 제도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게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 말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대군(大君)은 2백 25결이고, 왕자(王子) 이하는 그의 직질(職秩)에 따라 등급을 매겼는데, 다만 공주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패(賜牌)의 전지도 전지를 그대로 준 것이 아니라 군자감(軍資監)이 가을이면 조세를 징수하여 그것을 여러 궁가에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판의 뜻은 어떠한가. 호조로서는 난감한 폐단이 없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신들로서야 조금도 난감할 게 없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좌참찬 송준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2백 25결에서 일년에 징수하는 조세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일 결에 네 말[斗]을 징수하므로 그 수를 통계하면 역시 많지는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한 쪽만 좋아서는 안 되고 둘 다 유리한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호판이 차분히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시절에 송시열이 면세전(免稅田)과 원당의 폐단에 관하여 의견을 아뢰고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왔습니다. 지금 대신 이하 제신들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즉석에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경솔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아뢰기를,
"강원도에는 큰 재를 넘어서까지 시장(柴場)을 두고 목재와 벌·삼 등을 수취하여 오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은 아뢰기를,
"면세전 문제는 경솔하게 변통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원당이나 시장 또는 해량(海梁)을 떼어받은 곳들은 그 모두를 혁파하여 민생의 폐단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원도 시장은 조사하여 물은 다음에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경억이 각 아문에서 떼어받은 것까지 모두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원당도 똑같이 정파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난색을 보여, 태화가 아뢰기를,
"이 신화(新化) 초기에 사방이 눈을 닦고 기다리고 있는데, 원당이래야 그것은 기껏 한 궁가의 지지(紙地)를 받아들이는 곳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제신들 청원을 쾌히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궁가들 원당은 모두 정파해도 되지만 명례궁(明禮宮) 원당만은 경솔하게 정파해서 안 된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명례궁 원당 외에는 그 모두를 혁파한다는 것을 이번에 거행할 조항 속에다 넣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4월 5일 기축

밤에 서리가 내렸다.

 

정유성(鄭維城)을 판중추로, 윤경(尹絅)을 판돈령으로, 이완(李浣)을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이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자기 어미 병으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불허하였다.

 

4월 6일 경인

밤에 서리가 내렸다.

 

4월 8일 임진

식년의 생원·진사 방(榜)을 명정전(明政殿) 뜰에다 내걸었는데, 생원은 이희택(李喜澤) 등 1백 명이고, 진사는 김하진(金夏振) 등 1백 명이었다. 희택은 이정(李程)의 아들이고 하진은 김시진(金始振)의 아우였다.

 

종실로서 밖에 거주하는 자에게 주던 녹봉을 정지하였다. 당시 종실이 밖에 거주하는 것을 나라에서 법으로 금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서울에 있어봐야 살아갈 길이 없어, 시골로 내려가 사는 자들이 39명이나 되었다. 그러면서도 녹봉은 꼬박꼬박 먹고 있었기 때문에 호조가 아뢰기를,
"사대부가 비록 직책을 가진 몸이라도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으면 녹봉을 주지 않는 것이 규례입니다. 지금 종실들도 밖에 거주하고 있으면 녹봉을 무작정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4월 회계부터 위시하여 녹봉을 주지 마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오래 가물어 기우제를 모셨다.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물었고 비록 조금 내릴 때가 있어도 흡족하지 못하여 농사철을 이미 넘겼으며, 늦벼까지도 아직 흙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조가 아뢰기를,
"풍운(風雲) 뇌우(雷雨) 산천에 우사(雨祀)를 모시고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 등처에다 제를 차리고 정성껏 빌어야 하겠습니다."
하여, 상이 윤허했던 것이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선비들 습속이 아름답지 못하기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가고 있습니다. 유적(儒籍)에서의 이름 삭제는 바로 학궁(學宮)의 중한 벌로서 삭제가 풀리기 전에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규례인데, 지금 신방(新榜)의 생원 홍석범(洪錫範)은 자기 숙부 장례도 치르기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 하여 사학(四學)을 통해 삭적(削籍)당한 자인데, 그것이 풀리기도 전에 공공연히 복시(覆試)에 응하여 참방(叅榜)까지 하였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그렇게 예절을 무시하고 조행이 없는 사람을 그대로 두어 일후 폐단의 길을 열어두어서는 안 될 일이고, 그의 부형된 자도 교훈을 잘못시킨 죄를 면하기 어렵겠으니, 바라건대 생원 홍석범은 방목(榜目)에서 빼버리고, 그의 아비 전 찰방 홍흥지(洪興祉)는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9일 계사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병이 심하여, 정원이 그 사실을 알리자, 상이 서둘러 어의 유후성(柳後聖)을 보내 가보게 하고, 또 내국으로 하여금 약물을 내리게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일 아침에 영의정 정태화를 명초하여 복상(卜相)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0일 갑오

장령 허목이 상소하였다.
"신이 좌참찬 송준길이 올린 차자를 보았는데, 상복(喪服) 절차에 대하여 논한 것이 신이 논한 것과는 크게 거리가 있었습니다. 모두 예경에 의거하여 쟁론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예라고들 하고 있지만, 이 예는 대례(大禮)입니다. 이 예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면 앞으로 예의 기준을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신이 말한 것은 ‘적통은 장자로 세운다(立嫡以長)’ 하는 그 뜻입니다. 그리고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는 까닭은 위로 쳐서 정체(正體)이기 때문이고 또 전중(傳重)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인 둘째를 후사로 정하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하며 그의 복이 참최 삼년(斬衰三年) 조항에 있지만, 그가 말한 ‘첫째 아들을 위하여 참최복을 이미 입었으면 둘째 장자를 위해서는 3년을 입지 않는다.’ 한 기록은 경전(經傳)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첫째부터의 다섯째 여섯째까지도 모두 3년은 입어야 할 것인가?’ 한 그 말은, 신으로서는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 그것이지, 꼭 첫째이기 때문에 참최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상복(喪服)장 전(傳)의 주소에 이르기를,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적처 소생인 둘째는 그것이 중자(衆子)인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서자(庶子)는 첩자(妾子)를 호칭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중자를 들어 말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오복도(五服圖)에서 ‘장자를 위하여는 참최 3년을 입고, 중자를 위하여는 부장기(不杖期)를 한다’ 한 것이 그것으로, 중자를 들면 서자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자란 장자의 아우, 또는 첩자, 또는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딸까지 포함되는데, ‘중자’라고 했을 경우 장자와 크게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또 서자를 들어 말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서자는 장자가 되어도 3년을 입을 수 없다.’ 한 것이 그것으로, 서자를 들면 중자는 그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장자와 확실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첩자와 같은 호칭을 쓴 것입니다. 이상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적자·서자를 동격으로 호칭한 예가 없는데, 가령 상복장의 전으로 말하더라도 대부(大夫)의 적자는 대부의 복을 입지만 대부의 서자는 자기가 대부가 되어야만 자기 부모를 위하여 대부의 복을 입을 수 있고, 대부가 서자에게는 강복(降服)을 합니다. 적자와 서자는 그 신분이 이렇게 뚜렷한 구분이 있으며, 또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다.[雖承重不得三年]’ 한 주소에도 적자(嫡子)와 서손(庶孫), 서자(庶子)와 적손(嫡孫)의 구별이 있어 하나는 적(嫡), 하나는 서(庶)가 명명 백백합니다. 그렇다면 적처 소생의 경우 모두 적자라고 명명하지 않았습니까? 서자라는 호칭은 첩자를 이름이 아닙니까? 적자·서자는 따질 것 없이 첫째 아들이 아니면 3년을 입을 수 없다고 한다면, 《예경(禮經)》에 이른바, ‘장자(長子)를 위하여 참최 3년을 한다.’ 한 것은 첫째 아들이기 때문이겠습니까, 정체(正體) 전중(傳重)이기 때문이겠습니까?
효종은 인조 계체(繼體)의 적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어받고 일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지금 그의 상에 3년의 복제를 쓰지 않고 복을 내려 기년(期年)으로 한다면, 그 기년이라는 것이 체이면서 정은 아니기[體而不正] 때문입니까, 정이지만 체가 아니기[正而不體]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중이되 정체가 아니기[傳重非正體] 때문입니까?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논한 것과는 대지(大旨)가 이미 틀리고 마디마디가 상반되고 있습니다.
예가(禮家)가 너무 많고 내용도 분분하여 예로부터 예를 이름하여 취송(聚訟)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복 같은 대례에 있어서는 조리가 엄격하고 분명하여 어지럽혀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삼가 상복장의, 장자를 위하여 참최 3년 또는 기년을 하는 제도와, 적자·서자의 구별을 조목조목 도표로 작성하여 올립니다. 경전(經傳)을 근본으로 하고 주소(註疏)를 참작하여 경중 상하를 한 눈에 알기쉽게 꾸민 것이니, 성상의 재택 있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상복도(喪服圖)」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父爲長子]
주(註),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아래를 통칭해서이다.
해석, 적자라는 호칭은 사대부에게만 해당되지 천자·제후에게는 통하지 않으며, ‘태자(太子)’라고 하여도 위아래로 통하지 않는다.
또한 ‘장자로 적통을 세운 것[立嫡以長]’을 말한다.
주,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로 명명한다.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인 둘째 장자를 세운다.
전(傳), 왜 3년으로 정했는가?[何以三年也]
위로 보아 정체이기 때문이다.[正體於上]
소(疏), 아버지 할아버지가 맏이맏이로 이어왔고 자신도 맏이로서 후사를 이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장차 전중(傳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 종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정체(正體)·전중(傳重) 이 두 가지 일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3년을 입는다.
서자(庶子)
소, 서자는 아버지 후계자의 아우를 말한다. ‘서(庶)’라고 한 것은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해석,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다. 적처 소생인 둘째는 중자(衆子)인데,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한 것은 장자와 확실한 구별을 하기 위하여 첩자와 같은 호칭을 쓴 것이다.
장자를 위하여 3년을 입을 수 없는 것은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아서이다.[不得爲長子三年不繼祖也]
소기(小記)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지 않아서이다.’고 하였다.
주, 비록 승중(承重)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4종이 있다.
1. 정체(正體)이되 전중(傳重)을 할 수 없는 경우이다.
주, 적자로서 몹쓸 병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죽고 자식이 없어 전중을 받지 못한 자이다.
신이 살피건대, 부자 관계가 체(體)이니, 적자·적손은 정(正)이고 서자·서손은 부정(不正)인 것입니다.
2. 전중이 정체가 아닌 경우인데, 서손을 후사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3. 체이되 정이 아닌 경우인데, 서자를 후사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신이 살피건대 소주(疏註)에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인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하고, 그의 복도 이미 참최 3년 조항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또 다시 체이되 정이 아니라[體而不正] 하여 꼭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는’ 그 서열에다 둘 것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는다.’의 그 서자는 적처 소생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4. 정이되 체가 아닌 경우인데, 적손을 세워 후사를 삼는 것이 그것이다.
신이 살피건대, 이상 4종에 있어 적자와 적손, 서자와 서손 등으로 상호 대거하면서 따로따로 말하였는데, 적자·서손의 구별이 그와 같아서, 장자이면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를 원 장자와 확실한 구별을 두기 위하여 첩자와 같은 호칭으로 서자라고 한 것과는 경위가 같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母爲長子]
소,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자최(齊衰)를 입는 것은, 자식이 어머니를 위하여는 자최를 입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도 자식이 자기를 위하여 입은 그 이상으로 입을 수는 없어 자최로 한 것이다. 부모가 장자를 위하여는 그가 원래 선조의 정체로서 압강(壓降)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아있다 하여 기년복으로 강굴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서도 아버지가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놓은 것이다.
전, 왜 3년으로 정했는가?
아버지가 강복하지 않는 대상은 어머니도 감히 강복을 못하는 것이다.
주, 자기가 높다 하여 감히 할아버지·아버지의 정체인 자를 강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복(期服)
소, 천자·제후가 정통인 친후(親后)를 위하여 입는다. 부인(夫人)과 장자 그리고 장자의 처 등은 강복을 않고 그 나머지는 복이 없다.
신이 살피건대, 예경에 이르기를, ‘장자를 위하여는 3년을 입는다.’ 하였고, 기복 조항의 소에서 또 이르기를, ‘천자·제후가 정통의 친후(親后)와 부인과 장자, 장자의 처 등을 위해서는 강복을 않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할 장자가 기복 조항에는 들어있지 않아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장자로서 기년복에 해당하는 자는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는 바로 그 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기를, ‘장자인 것은 같으나 적자를 장자로 세우면 3년이고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으면 기년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의 상소가 들어온 후 10여 일이 되어서야 상이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관하여는 《실록(實錄)》을 상고한 뒤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그때 뭇 신하들은 모두 허목의 말을 바꿀 수 없는 정당한 논리라고 하면서도 시의(時議)에 저촉될까 두려워서 한 사람도 변론하는 자가 없었고, 그리하여 그의 말이 끝내 실현되지 않아 식자들 모두가 통한해 하였다.

 

4월 11일 을미

종친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엎드려 호조가 아뢴 내용을 보았더니, 하향한 종실들에 대하여 4월 회계부터 녹봉을 주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종실들이 법을 어기고 하향한 것이 죄는 죄이나, 다만 그 아문이 말한 대로 빈한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였다면 정상으로도 가여운 데가 있고 죄라도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종부시 거안(擧案)을 상고하였더니, 외방에 나가 살고 있는 이들이 직무를 폐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국상 이후로만 말하더라도 문안 때나 거둥 때 와서 참여한 자들이 많게는 50, 60차례를 참여하였고 적어도 10차례는 넘고 있어, 시골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는 사대부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신화(新化) 초기에 비록 일반 백성들이라도 자기 생업을 잃는 한탄이 없는데 유독 여러 종실들이 혜택을 입지 못한다면, 전하께서 친족을 사랑했던 조종들 마음을 체득해야 할 입장으로 보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아뢴 내용과 같이 직무를 폐기 않고 있다면 녹봉을 주지 않는 것이 부당할 것 같다."
하였다.

 

형방 승지 박세성(朴世城)을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 죄수들을 검열하여 경범자는 석방하도록 하고, 이어 각 관아에 경계를 내려 서둘러 처결하도록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제사 모시는 일은 나라의 대사로서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삼가야 하고 감히 조금도 태만하거나 소홀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종묘의 금년 하향(夏享) 대제 때 시간을 너무 늦잡아 예가 끝날 쯤에는 아침 해가 이미 늦어 거의 밥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전고에 없었던 일로서 해당 감찰(監察) 및 주시관(奏時官)을 모두 잡아들여 추고하고 헌관도 선파직 후추고 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상의 명령에 의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흥정당(興政堂)에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가 올 듯하다가 오지 않고 가뭄이 너무 심하니 참으로 민망할 일이다."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한재만 혹독한 것이 아니라 바람과 눈의 이변까지 겹쳤습니다. 바야흐로 장양(長養)의 계절인데, 이렇게 보통이 아닌 재변이 있어 팔도가 기근에 빠지고 변괴는 겹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인심들은 재변을 보통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데, 신으로서는 아마 상께서도 재변을 보통으로 알아 수성(修省)의 마음이 혹시 간단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염려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매우 좋은 말을 하였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라."
하였다. 상이 여러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좌찬성 상소문 내에, 비난하는 평이 일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은 무엇을 이른 것인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으나 혹시 전일 떠돌던 말들이 아직도 멎지 않고 있는가 염려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불안을 느껴 상소 내에다 언급한 것이 아닐까요?"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소문에 답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만약 그 일을 거론하면 그 일을 제기할 것이 없다고 할 것이고 그 일을 말하지 않으면 자평이 아직 일고 있다고 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려간 지가 5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올라올 뜻이 없는 것인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그리 오래도록 올라오지 않고 있는가.’ 하는 뜻으로 내용을 꾸며 답하시면 되겠습니다."
하자, 윤석(胤錫)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익평위 홍득기의 상소 내용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그의 상소문에 서로 계교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을 미루어보면 전한 자가 잘못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4월 13일 정유

좌상 심지원(沈之源),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다시 정승이 되었는데 둘 다 차자를 올려 사의를 표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병환 중에 있으면서 송시열에게 특별 소명을 내렸으나 병을 이유로 오지 않자, 상이 다시 액정 별감(掖庭別監)을 보내 병을 묻고 약물과 식물을 하사했다. 이때 와서 찬성 제수 명령이 또 내리자, 시열이 상소하여 사의를 표하기를,
"신이 융숭한 은총을 받으면 받을수록 죄는 더욱 깊어만 가고 있고, 성상의 용서와 보살핌이 더하면 더할수록 헐뜯는 물의는 자꾸 일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에서 오히려 벼슬이 올라가고, 물러갔음으로 하여 다시 나올 수 있게 되니, 사리로 따져보아도 그보다 더 어그러진 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보면 다분히 떠도는 말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경이 어찌하여 나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는가? 내 성의가 상대에게 미쁨을 보이지 못하여 오래도록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경을 생각하는 심회를 어찌 이루 다 말하랴."
하였다.

 

임의백(任義伯)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4월 16일 경자

박세모(朴世模)를 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홍처윤(洪處尹)을 형조 참의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심유(沈攸)·정수(鄭脩)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처음 기우제를 행하는 날 감찰 권도경(權道經)이, 승전(承傳)012)  이 적간하고 지나간 후 의막(依幕)에 들어가 관대(冠帶)를 벗고 벌렁 누워있었고, 제가 끝난 후에는 또 평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서 헌관인 형조 참판 이정영(李正英)이 앉아있는 곳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정영이 하인을 시켜 사헌부에다 그 사실을 말하게 하였는데, 장령 오두인(吳斗寅)은 지평 정석(鄭晳)·경최(慶㝡)와 함께 도경의 직을 갈도록만 아뢰었던 것이다. 이에 정영이 드디어 자신을 탄핵하기를,
"제사라면 나라의 큰 일입니다. 이렇게 경황이 없을 정도로 가뭄을 걱정하고 있는 이때 재계를 삼가지 않은 것을 보통으로 보아넘긴다면, 그 나머지야 말하잘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모두가 신이 직접 아뢰어 그 죄를 분명히 밝히지 못한 소치입니다."
하여, 상이 도경을 잡아들여 죄를 묻도록 명하였다. 이에 두인 등은 자신들이 법률 적용을 잘못했다 하여 모두 인피하였는데, 대사간 이경억 등이 처치하기를,
"바라건대 두인 등을 체직시키고 또 정영도, 그를 즉시 아뢰지 아니하고 다만 하인을 시켜 법부(法府)에다 말을 전하게 하므로써 사리와 체면에 손상을 주었으니, 그도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봉교 송창(宋昌)이 왕명으로 적상 산성(赤裳山城)의 사고(史庫)에 가 양조(兩朝)의 《실록》 상하 책 10여 권을 고찰하여 왔는데,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인종 대왕에 대하여 입은 복제가 모두 뚜렷하게 나와있는 곳은 없고, 다만 ‘소상(小祥) 후에 즉길(卽吉) 하였다.’ 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제(喪制)에 관하여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을 모조리 등초하고 또 세조 대왕이 덕종 대왕을 위해서와, 명종 대왕이 순회 세자(順懷世子)를 위하여 입은 복제도 등초하여 한 권의 책으로 꾸며서 올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 복제에 관하여 대신들과 논의하였더니, 영돈녕 이경석의 주장은, ‘신은 당초 의논드릴 때 이미 선왕의 복제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는데, 지금 와서 장령 허목이 고례(古禮)가 아니라고 한다니, 신으로서는 다시 의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는 주장하기를, ‘당초에 예관이 대왕 대비 복제에 관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어왔을 때 신은 원래 예문에 어두워 어느 것이 정론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국제(國制)를 들어 대답했던 것이고, 그 당시는 여러 대신과 두 유신의 뜻도 다 다를바 없었는데, 지금 허목의 상소문을 보면 많은 고례를 인용하면서 기년 복제를 잘못이라고 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자신의 것을 옳다 하여 다시 의논을 올리겠습니다. 예를 아는 신하에게 다시 물어 처리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그때는 창황 급거한 시기라서 미처 《실록》을 상고하지 못했지만, 정희 왕후가 예종 대왕에 대해서와 문정 왕후가 인종 대왕에 대하여 이미 행한 복제까지도 모두 자세히 상고하여 참작 결정하소서.’ 하고, 영중추 심지원은, ‘당초 대왕 대비 복제를 의정할 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 여러 대신들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지금 감히 다시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예를 아는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처리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하고, 판중추 원두표는, ‘처음 상사 때 예를 논의하면서는, 신이 원래 예경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신이 내국(內局)에 있다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슬픔을 당하고는 정신과 넋을 잃었기 때문에, 엉겁결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대왕 대비전 복제에 관하여 물어왔을 때 여러 대신들과 함께 규례에 따라 의논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허목의 상소 내용을 보니 그의 논리 근거가 모두 경전(經傳)에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다시 다른 논의를 하겠습니까. 신이 지금 와서야 불학 무식의 폐해가 이렇다는 것을 더욱 깨닫고 너무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경에 이른바 4종의 설이란, 대체로 부왕(父王)이 서자(庶子) 상을 당했을 때의 이름이지, 모후(母后)가 왕릉을 이어받고 사직을 맡은 적자(嫡子)에 대하여 기년으로 강복(降服)한다는 것을 이름이 아닙니다. 신으로서는 당초에 잘못 알았던 실수를 계속 고집하여 막중한 전례(典禮)를 또다시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우찬성 송시열의 주장은, ‘신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 정신이 혼미하여 일상생활의 것들도 거의 다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하는데, 하물며 지금 논의되고 있는 막중한 제왕의 종통(宗統)과 더없이 정미한 전례의 의의이겠습니까. 당초에 망령된 논의를 했다가 지금 대신(大臣)·대신(臺臣)들이 창을 들고 거실로 쳐들어오는 화를 당하고 있으므로, 다시는 입을 놀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기왕 대례(大禮)를 함부로 논했던 잘못이 있는 이상 그에 대한 곡절을 다시 아뢰어 이를 그르친 죄를 스스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처음 해당 낭관이 대왕 대비 복제 개정 문제를 논의차 왔다고 듣고서는 신으로서는, 아마 틀림없이 특별한 근거가 될 만한 예율이 발견되어 전일에 의심스러웠던 예설을 확실하게 규정지을 수 있으려나보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대신·대신의 논을 보았더니 위징(魏徵)의 소릉(昭陵) 문제013)  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당초 의논드렸을 때도 《의례(儀禮)》에 그 주소(註疏)가 있음을 신도 물론 알았으나, 그 주소의 설이 의심할 것이 전혀 없는 설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의심스러운 주소의 설에 의거하여 막중한 변례(變禮)를 경솔하게 단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까운 명(明)나라 제도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허목의 상소는, 거기에 비록 많은 인증을 하고 있으나 중요한 점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가 죽고 둘째를 세워도 역시 장자로 명명하여 참최를 입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는 그를 세워 후사를 삼더라도 3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첩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늘 의심스러워 알고 싶어한 대목이 바로 그 대목이고, 허목이 분명한 인증을 한 것도 역시 그 대목인데, 이야말로 어리석은 신이 의심과 의혹을 풀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른바 ‘장자가 죽고’ 했는데, 대체 언제 죽었다는 것입니까? 그가 이미 성인이 되어 죽어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참최 3년을 입었는데, 그 후 또 차적자(次嫡子)를 세워 그를 장자라 명명하고, 그가 죽으면 또 그를 위해 참최 3년을 입는다는 것입니까? 그리한다면 ‘이통(二統)은 없다.’ ‘이참(貳斬)은 않는다.’ 한 그 의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죽어 함(含)도 증(贈)도 하지 않고, 신주도 만들지 않고, 자기 아버지가 복도 입지 않고 그리하여 적자 구실을 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차적자를 후사로 세우고 그를 일러 차장자(次長子)라 하며 그가 죽으면 3년을 입는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허목의 설이 아마 정론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른바 서자는 그를 세워 후사를 삼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는데, 첩자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물론 주소의 말이기는 하지만, ‘첩자고(妾子故)’ 이 세 글자는 허목 자신이 만든 말이지 주소의 설이 아닙니다. 이른바 서자라는 것이 첩의 자식임은 물론이나 그러나 차적자부터 그 이하는 비록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역시 서자라고 이르기 때문에, 주소에서 이르기를,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나 둘째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 서자가 되어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서(庶)’란 천하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중(衆)’의 뜻인 것입니다. 예경을 상고해보면 그러한 유들이 매우 많습니다. 모르겠지만 그 주소에 이른바 서자라는 것이 과연 첩자만을 지칭한 것이고 차적자 이하는 거기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주소를 쓴 사람의 본뜻을 이미 분명하게 알 수 없고 또 고증이 될 만한 다른 서적도 없어, 신은 의심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 두 가지에 대하여 신으로서는 사실 의심스러워 감히 결정을 못 내렸던 것인데, 지금 허목은 조금도 의심없이 단안을 내렸으니, 그것이 다만 그 주소에 의거하여 꼭 그렇다고 아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서적에 확실한 고증 자료가 있어 그러는 것인지? 허목에게 다시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의 집은 사직(社稷)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예로부터 장자를 두고도 서자를 세운 경우가 있어왔는데, 그게 참으로 성인의 의를 만들어낸 크나큰 권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만들고 법을 만든 근본 취지만은 무엇보다도 윤리 질서를 존중했기 때문에 문왕(文王)이 나라를 전하기는 장자인 백읍고(伯邑考)를 두고 무왕(武王)을 세웠지만, 주공(周公)이 예를 만들면서는 반드시 장서(長庶)를 구별하기에 부단한 힘을 썼던 것입니다.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이 예문(禮文) 그것일진댄 마땅히 상고해야 할 것이 주공이 만들었던 그 근본 취지인 것입니다. 주공이 경(經)을 만들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쓰고, 정현(鄭玄)이 주석을 하였지만 모두 차자(次子)를 장자(長子)로 삼는다는 설은 없었고, 가공언(賈公彦)이 의소(義疏)에서 비로서 그 설을 썼는데, 가씨 그는 이름있는 유학자였고 또 황면재(黃勉齋)014)  가 《통해(通解)》 속록(續錄)에다 싣기도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정(程)·주(朱)의 감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학설이 과연 허목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단연코 그렇게 한다는 것은 미안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또 소설(疏說)에 이미 ‘차장자를 세우고도 3년을 입는다.’ 하고서, 그 아래에서 또 이르기를, ‘서자는 승중(承重)을 하여도 3년을 입지 않는다.’ 하여, 그 두 설이 서로 모순이 되고 있기 때문에 허목이 꼭 서자를 첩자로 단정하고 차장자는 넣지 않았는데,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내야만 허목의 상소대로 따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시적 소견만으로 경솔하게 단정하기엔 너무 중대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씨의 소설에는 ‘첫째 아들이 죽으면’이라고만 말하였지 ‘첫째 아들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마 성년이 되기 이전에 죽은 것을 말한 것으로 그게 바로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허목은, 기록을 그렇게 한 그 근본 취지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쓴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遊)의 최(衰)는 과연 모두 거들떠 볼 것도 없다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인정 사세로 미루어 보더라도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었는데도 차장자를 모두 장자라 명명하고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서는 몸 하나에다 너무나 많은 참최복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라면 지존의 존재이지만 딸이 출가한 후에는 감히 참최를 입지 못하는 것이니, 참최를 이중으로 하지 않는[不貳斬] 뜻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런데 하물며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서겠습니까. 첫째 아들을 위하여 이미 참최를 입었는데 어떻게 또 둘째부터 그 이하로 모두 참최를 입어 한계와 절제가 없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허목은 ‘둘째 아들은 승중을 하여도 기년을 입는다.’ 한 기록이 예경에 나와 있는 곳이 없는 것만 알고, ‘첫째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 죽었어도 승중한 둘째 아들을 위하여 역시 참최를 입는다.’ 한 기록도 예경에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 어찌하여 하나는 고집을 하고 하나는 버리는 것입니까? 가령 세종 대왕을 두고 말하더라도 그 수명이 끝이 없어 불행하게도 문종 대왕이 먼저 승하하였다면, 세종 대왕께서 당연히 참최를 입고 이어 한 대군을 적자로 세울 것인데, 그 대군이 또 불행하게 되면 또 참최를 입고 또 그 다음 대군을 세우고, 그리하여 여덟 대군을 모두 참최 3년을 입는다면 이는 문종 세조 두 대왕까지 합하여 3년짜리가 9명이며, 따라서 곱하여 27년이니 비록 사서인(士庶人)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통이 지엄한 제왕으로서야 틀림없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제왕은 즉위자가 당연히 정통이 되어야 하는데 효종 대왕이 이미 종묘 사직을 맡았었으니 3년으로 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렇게 친다면야 꼭 차적자뿐이겠습니까. 비록 첩잉(妾媵)의 소생이라도 모두 3년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령 광해가 초년에 죽었더라면 인목 대비(仁穆大妃)가 3년을 입었어야 옳습니까? 또 만약에, 대왕의 상에는 비록 시마(緦麻)를 입어야 할 아낙네라도 반드시 참최를 입어야 하기 때문에 그를 보아 대왕 대비도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할 것으로 안다고 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 신하 위치에 있는 자가 감히 공시(功緦)015)  의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겠으나, 지금 효종 대왕은 대왕 대비에 있어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는데, 대왕 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 복을 입는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것인지, 그 모두가 다 의심이 가는 설입니다.
그리고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이른바, 그것은 부왕(父王)이 서자의 상을 당했을 때를 말한 것이지, 모후(母后)가 이미 대통을 이어받아 사직의 주인이 된 적자를 위하여 기년으로 강복하는 것을 이른 말은 아니라고 한 것은, 더욱 알 수 없는 말입니다. 오늘 다투고 있는 것은 다만 차적자도 통틀어 서자라고 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이미 서자라고 했을 경우 당연히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뿐입니다. 부왕이 이미 서자로 쳐서 3년을 입지 않았으면 비록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후 혼자서 어떻게 감히 3년을 입을 것입니까. 더구나 대왕 대비가 소현 세자 상에 인조 대왕과 함께 이미 장자의 복을 입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오늘에 와서 바꿀 것입니까?
신이 예를 논의할 때의 잘못이라면, 그는 주소의 뜻이 과연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냥 명나라 예제를 따르자는 그것이었습니다. 명나라 예제가 과연 옛 성인의 뜻에도 맞는 예제일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공자(孔子)도 말씀하기를, ‘지금 쓰게 되면 나는 주(周)의 것을 따르리라.’ 하였듯이, 오늘 그렇게 정한 것이 망령된 생각으로는 그리 크게 어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했는데, 지금 허목의 설이 이러하니, 만약 이를 계기로 더 강론하고 밝혀 십분 지당한 결론을 얻어낸다면 이 어찌 일시적 다행뿐이겠습니까. 옛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군신(君臣) 복제를 수숙(嫂叔) 복제로 잘못 정했다가, 기대승(奇大升)이 공박하여 바로잡은 설을 듣고서는, 눈이 휘둥그렇게 되어 자기의 종전 견해를 바꾸고 이르기를, ‘만약 기 아무개가 아니었더라면 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뻔하였다.’ 했는데, 오늘 신이 허목에게 바라는 바도 그와 같습니다.
대체로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면서 피차 의견이 엇갈릴 때는 정(程)·주(朱)와 같은 큰 안목, 큰 역량이 없고서는 일시적 의견만으로 여러 학자들이 결정을 보지 못한 의문처를 금방 단안 내리기는 어려운 것이고, 당연히 의문처는 의문처대로 둬두는 방법으로 처리하여 후세를 기다려야 할 것이며, 우선은 명백하고 의심이 없는 것만 따르는 것이 바로 궐의(闕疑) 궐태(闕殆)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 방법이 비록 졸렬하고 떱떨하여 유쾌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관중역문(關中役文)016)  의 폐단보다는 나을 것이므로 감히 다시 다른 설을 내세우지 못하고, 이어 전일에 고집불통이었던 그릇되고 망령된 죄를 청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으로 수의(收議)를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신들 및 우찬성 송시열의 의논을 모두 써서 아뢰오며, 좌참찬 송준길 차자본은 비록 이미 보신 것이지만 참고될 일이 있을 듯하여 역시 입계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록(實錄)》을 이미 상고하여 뽑아놓았으니 대신·유관과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4월 17일 신축

이무를 지평으로, 홍주삼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8일 임인

호군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였다.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으로 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하신 일이겠습니까. 집에서 쓰면 부자의 천륜이 밝아지고, 나라에서 쓰면 군신의 신분이 엄절해지며, 천지의 존비와 종묘 사직의 존망도 모두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그야말로 막중하고 막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틀려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적통을 이어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데,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복제를 꼭 참최 3년으로 한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조종(祖宗) 적통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사가(私家)에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 태평 시절에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말세 위의(危疑)스러운 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신하와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함부로 날뛰는 무리들이 넘보는 것을 막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국가를 둔 이라면 그 예에 있어 삼가지 않으면 되겠으며 엄격하게 않으면 되겠습니까? 잠시라도 소홀히 여겨 내버려둘 수 있는 일입니까?
신이 선왕이신 효종 대왕 상사를 듣고 대왕 대비 복제에 대하여 《예경(禮經)》을 상고하였더니, 성인이 위하신 뜻이 사실은 할어버지와 체(體)가 되고 있음에 있고, 또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도 사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宗統)을 정하자는 뜻이어서, 당연히 자최(齊衰) 3년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요,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예관이 《의례(儀禮)》 주에 의하여 기년의 복으로 정했을 때, 조야를 막론하고 지식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국가 종통도 그로 인하여 약간 흐릿한 느낌이 있으며 어쩌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할 예가 되겠습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뼈가 놀라고 가슴이 써늘합니다. 그야말로 즉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인데, 연기(練期)가 다가오도록 뉘 하나 국가를 위하여 그 말을 올린 자가 없이 고요하기만 하여, 신이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생각할 때 너무나 종묘 사직을 위하여 걱정이 되었는데, 지난번 전 장령 허목이 예경을 상고하여 한 장의 소문을 올렸다고 듣고는 신이 참으로 국가에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이 말한 것은 예의 정대한 원리를 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나라 다스리는 빈틈없는 계책이기도 한데, 만약 천리의 절문(節文)에 밝지 아니하고 신하로서 진실한 충성심이 아니라면 그 말을 어떻게 하겠으며 또 어떻게 감히 그 말을 올리겠습니까? 그를 듣지 않았다가는 후회 막급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선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시고 즉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했는데, 그것을 다시 송시열에게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으로 하신 것이니, 시열로서는 마땅히 문순공 이황이 기대승의 공박한 설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는 ‘만약 기 아무개가 아니었더라면 천고의 죄인이 되는 길을 면치 못할 뻔하였다.’ 했듯이 하여야 했는데, 시열은 도리어 자기 잘못을 꾸미기 위하여 예경의 문자들을 주워모으고 게다가 자기 소견까지 붙여서 너무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열은, ‘정작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참최를 입는 이유가 오로지 할아버지와 체가 되고 있음에 있다.’ 한 것과, ‘성인이 그 예를 엄절하게 한 이유가 오로지 대통과 종묘 사직을 이어받음에 있다는 예경의 주된 뜻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못했고 말하지도 못하여, 신으로서는 그의 말에 승복할 수도 없고 또 그의 뜻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학문에 어둡고 지식이 얕아 예경에는 원래 깜깜하지만 그러나 천리가 있는 곳, 성인이 예를 만든 주지만은 일찍이 알아도 보았으며 대의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시열이 잘못 인용한 설에 대하여 신이 그 중요한 부분을 추려 하나하나 논변하겠습니다.
시열이,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우고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내야지만 허목의 설을 비로소 따를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 대왕은 바로 인조 대왕의 차장자입니다. 소설에 이미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하는 분명한 기록이 있으면, 대왕 대비의 복이 자최 3년일 것은 털끝만큼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고, 그대로 딱 잘라 행하면 그뿐이지 왜 꼭 다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을 허목에게 지우는 것입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문왕이 나라를 전하면서는 백읍고를 두고 무왕에게 전했으나, 주공이 예를 만들면서는 장서(長庶)를 구별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했는데, 신이 생각기는, 문왕이 한 일은 성인이 당시 사정에 맞도록 규정한 큰 권도이고, 주공이 만든 예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든 정상적인 법으로서 그것은 그 두 성인이 각기 시기 적절하게 한 일이지, 주공이 어찌 백읍고를 위하여 그 예를 만들었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꼭 그 예를 고집하여 효종 대왕이 적장자가 아니라 하고 대왕 대비가 3년을 입지 않아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의 논의에,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은 것을 두 번 세 번 말했는데, 그가 가장 요점을 두고 단정한 말은 ‘장자가 비록 성인이 되어 죽었더라도 그 다음들을 모두 장자로 명명하고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하지 못하다.’ 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꼭 성인이 되어 죽은 것에 비중을 두는 뜻은, 성인이 되어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고, 비록 이미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고, 비록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적(嫡)’이라는 것은 형제 중에서 적우(嫡耦)할 사람이 없다는 칭호이고, ‘통(統)’이라는 것은 물려받은 사업을 잘 꾸려가고, 서물(庶物)의 으뜸이 되며, 위에서 이어받아 후대로 전한다는 말인데, 차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적통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로서 살림을 맡은 뒤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차장자로서 왕위에 선 이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 대하여 감히 임금으로 군림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차장자로 왕위에 오른 이에게는 신하 노릇을 않는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만약 자기 실언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둔사(遁辭)로 해명하기를, ‘적통불엄(嫡統不嚴) 이 네 글자는 다만 만세를 두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엄히 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글자는 위아래 문세(文勢)로 볼 때 그렇지가 않으니, 누가 그의 뜻이 그렇다고 믿겠습니까? 또 더구나 장유의 차례만 엄히 하고 군신(君臣)의 신분은 엄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고금 천하에 그러한 의리가 어디 있으며, 하늘의 이치와 선인의 법도가 과연 그렇겠습니까? 아, 고공(古公)017)  이 비록 계력(季歷)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태백(泰伯)018)  이 자손이 있으면 고공의 적통은 그래도 태백의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 안 백성들 마음이 일정치 못할 것인데 계력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나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으나 백읍고가 후사가 있었으면 문왕의 적통이 그래도 백읍고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그리되면 천하의 마음들이 헷갈려서 무왕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날 것입니까?
시열은, 종통(宗統)은 종묘 사직을 맡은 임금에게로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종통이 둘로 갈리게 되는데 그러한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시열 자신도 이통(二統)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열의 식견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지마는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깜깜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세 번씩이나 ‘성인’을 들먹이면서 또 적통이 존엄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뜻을 신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시열은 망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국가 대례를 어찌하여 꼭 그 사람 논의에 따라 정할 것입니까?
시열이 또 이르기를, ‘아비 된 자 한 몸에다 너무나 많은 참최복을 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서, 심지어 세종조의 여덟 대군을 들어 변증을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종의 수명이 비록 짧고 여덟 대군 모두가 비록 단명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덟 대군 모두가 각기 3년복이 되게 불행해질 이치가 있으며, 게다가 문종·세조 두 대왕까지 합쳐 3년짜리가 아홉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비록 소진(蘇秦)의 궤변으로도 틀림없이 그러한 말로 감히 남을 꺾으려고는 않을 것입니다. 송준길이 차자에서 말한 ‘가령 사대부 집의 적처 소생이 10여 명 되는데, 맏이가 죽어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해 3년을 입고 둘째가 죽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가 죽고 다섯째가 죽으면 모두 3년씩 입을 것인가?’ 한 그 말과 함께 모두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 말이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 사람 견해야말로 진짜 형제지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열이 논의에서 이르기를, ‘대왕 대비가 소현의 상에 인조 대왕과 함께 이미 장자를 위한 복을 입었는데, 그 의리가 어떻게 오늘에 와서 바꿔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가 말한 장자의 복이란 어느 복입니까? 그때 과연 참최 3년을 입었던가요? 그리하였으면 지금도 당연히 소설의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정의에 따라 3년으로 정해야 할 것이고, 그때 만약 혹시라도 기년으로 정했다면 그것은 예관이 실례를 하여 그리되었던지 아니면 혹시 인조 대왕께서 무슨 은미한 딴 뜻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신으로서는 모두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는 비록 기년으로 정하였더라도 오늘 효종의 복은 대왕 대비가 자최 3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열의 말에, ‘부왕(父王)이 서자(庶子)를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으면 비록 이미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후(母后) 혼자서 어떻게 감히 3년을 입을 것인가?’ 한 그 말은 더욱 무리한 말이고 더욱 알쏭달쏭한 말입니다. 대체로 태자(太子)의 ‘태(太)’는 바로 ‘적(嫡)’ 또는 ‘장(長)’과 글자 뜻이 같은 자인데,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이고, 세자(世子)의 ‘세’도 적·장과 뜻이 같은 글자이나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태자’ ‘세자’라고 했으면 그가 바로 살림을 맡고 승중(承重)을 하고,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서 ‘적’ ‘장’ 두 글자보다 오히려 더 돋보이는데, 이미 세자가 되고서도 장자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한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에 그래서 차장자를 세운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세울 당시에 가리켜 차장자이지 이미 세워진 후에는 당연히 곧바로 장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자가 되었으면 장자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그가 죽었을 때는 참최를 입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을 이어받아 군림을 한 그 후에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를 위해 참최를 입지 않을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도 3년으로 한다 하고, 그 아래 또 서자는 승중하여도 3년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두 설이 서로 모순이 되고 있다.’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거기에서 말한 그 서자라는 것이 과연 정실(正室)이 낳은 중자(衆子)를 지칭한 것이라면 과연 윗 글월과 모순이 되지만, 만약 첩잉(妾媵)의 소생을 가리켜 말한 것이면 윗 글월과 모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열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것이 분명 첩잉의 자식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바로 중자를 지칭한 것임을 알아 모순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또 시열 예문(禮文)에서 말하고 있는 서자라는 것이 모두 중자를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하여도 그것쯤은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인조 대왕이 하늘의 섭리를 따르시고 문무의 도를 지키면서 효종 대왕을 세자로 삼으셨는데, 효종 대왕이 이미 세자가 되신 후에도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적자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나라의 어른이 되어 군림한 그 후까지도 장자·적자라 하지 않고 끝까지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효종 대왕을 끝까지 서자에다 비기려고 한 그 뜻을 신은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시열은 또 불이참(不貳斬)을 증거로 내세우는데, 예경의 불이참이라는 말은 그것을 이름이 아니라, 그것은 같은 때에 존자(尊者)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상(前喪)·후상(後喪)이면 같은 때도 아니고 높음 역시 차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전상만을 참최로 하고 후상을 참최로 않는다는 것입니까?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또 그 말은 천리(天理)·성경(聖經)과도 모든 면이 꼭 맞는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 효종 대왕은 세자가 되었을 당시로 논하자면 그 장(長)이나 존(尊)이 소현과 대등하지만, 군림한 이후로 논하자면 그 장과 존이 소현에 비할 바 아닌데, 소현에게는 참최를 입었으면서 효종에게는 참최를 입지 않아 될 일입니까? 시열의 그 말은 소설과 어긋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성경과도 배치되는 말이고, 성경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천리에 어그러진 말입니다.
시열이 또 말하기를, ‘효종 대왕이 대왕 대비에 대하여는 군신(君臣)의 뜻이 있는데, 대왕 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것인가?’ 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며, 임금이 세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랍니까? 어쩌면 그의 말이 이렇게도 사리에 당찮습니까.
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두 송(宋)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제(齊)의 환공(桓公)이 이오(夷吾)019)  에 대하여, 하나도 중부(仲父)요 둘도 중부였으며, 한(漢)의 소열(昭烈)은 공명(孔明)과의 사이가 마치 물고기와 물이었지만 어찌 이보다야 더했겠습니까. 하물며 늠인(廩人)이 계속 식량을 대고 포인(庖人)이 계속 고기를 댔으니, 바로 옛날 대현을 대우했던 예였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을 유현(儒賢)으로 쳐주었고, 그 두 사람 역시 그 이름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야의 공론은 그들을 현자로 여기지 않으며,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도 그들을 현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그 나라에 있을 경우 임금이 써주면 그만큼 안부 존영(安富尊榮)을 누린다.’ 하였는데, 이들 두 사람이야말로 임금의 신임을 그렇게 독차지했었고 그리고 또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리하였으나, 자기 자신들 안부 존영은 최고를 누렸다 할 수 있지만 임금을 안부 존영하게 만들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미 유현 대우를 받았으면 사부로서의 책임을 사피할 수는 없을 것인데, 선왕을 잘못 보도하여 함궐(銜橛)의 걱정020)  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간하여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것은 되지만 그 직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맡았을 때는 부(傅)는 덕의(德義)를 펴야 하고, 보(保)는 신체(身體)를 보호해야 하는데, 그 의리가 어디 있습니까? 재궁(梓宮)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일 같은 것은 국가를 가진 이로서는 만고에 없었던 이변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볼 때 편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의관(衣冠)을 영원히 간직하는 일은 바로 마지막을 보내는 대사(大事)인데, 주자(朱子)도 종묘 혈식(血食)을 오래 가게 하는 길이라 하여 소를 올려 강력히 말했던 것을 보면, 그 자리의 길흉(吉凶)에 따라 관계된바 막중함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도 최고 길지를 버리고 흠결이 있는 곳으로 옮겨 잡은 것은 자못 그 택조(宅兆)를 골라 정하여 영원한 편안함을 도모하는 도리가 아닌 것으로, 일만세 유택(幽宅)이 그럴 바에야 그것이 어찌 일시적 불안에 그치고 말 일입니까? 재해가 함께 닥치고 기근이 거듭거듭 이어져 공사(公私) 모두가 곤경에 빠져있고, 나라는 가난하고 백성은 유리되어, ‘임금이 뉘와 함께 흡족을 누릴 것입니까?’ 하고, 또는 ‘내가 누가 있어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 했던 그러한 걱정들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렇고서 부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복(福)과 위(威)를 아래서는 만들어내는데 위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높다고 할 수 없겠으나, 심지어 왕위에 계시기 10년이 된 뒤에도 아직껏 적(嫡)과 장(長)이 되지 못하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예가 중자의 그것과 대등하다는 것은 천리 성경에 크게 어긋난 일일 뿐만 아니라 높지 않기로도 너무 심한 게 아니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고, 부유하지 못하고, 높지 못하고, 영화롭지 못함이 모두 그 속에 있어 논하잘 것이 없습니다. 현자를 등용하여 효과가 그렇다면 고금 천하의 국가에 어느 누가 현자 등용하는 것을 귀히 여기겠습니까?
아, 그 두 사람들 학식과 심술에 있어서는 신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한 행위를 살펴보면 인후하지 못한 자 아니면 슬기롭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설에만은 밝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일생 갈고닦은 것이 예학(禮學)이라고 하기 때문에 남들도 예학이라면 그들을 추대하고, 자기 자신들도 담당해 왔는데, 그런데 국가 대례에 있어 견해가 틀리기 거의 그 모양이니, 하물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나라를 굳건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는 대계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애석한 일입니다.
송시열이 논의를 끝맺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로 하여 더 강론하고 더 밝혀 십분 정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어찌 다만 일시적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했는데, 시열이 참으로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남이 박정(駁正)한 말을 틀림없이 거역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열의 그 말은 취택할 만한 말이 됩니다. 그리고 송준길도 논의의 말단에서, ‘천하의 의리는 끝이 없고 문의(文義)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단정할 것입니까?’ 했는데, 그 말도, 자기 입에서 나온 것 이상으로 남의 옳은 의견을 존중하여 한 말이면 역시 취택할 만한 말입니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대에는 자기 아랫사람 복에 대하여는 많이 간편을 취하여 강복을 하고 3년을 입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옛날 예대로 할 것인가?’ 한다는데, 그렇다면 등(滕)나라 대부(大夫)가 자기 조상들 단상(短喪) 제도를 따르자던 주장이 예이고, 맹자(孟子)가 문공(文公)에게 3년을 입도록 권한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옛날처럼 나라가 공고할 때라면 강복을 하더라도 그것이 실례가 되어 부끄러울 뿐이지 종묘의 제사에 있어서는 해가 없겠지만, 이렇게 백성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위아래가 위태위태한 대통(大統)을 밝혀야 하는 이러한 대례를 어떻게 조금이나마 소홀히 다룰 것입니까?
또 혹자는, 당초에 이미 잘못 정한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추복(追服)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는가 보나, 옛날 송(宋)나라 임금 상에 옅은 색만으로 상복을 만들었는데, 유신(儒臣) 주희(朱熹)가 추개(追改)를 건의한바 있었습니다. 지금 기년으로 강복한 것이 송의 옅은 색 상복과 다를바 없으므로, 주자가 건의했던 대로 추복을 하는 것이 바로 불원복(不遠復)021)  입니다. 그게 오히려 끓는 물을 만지고도 찬물에 씻지 않고, 서리를 밟고서도 얼음을 대비하지 않았다가 결국 뭇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 종통(宗統)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 의아하게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아낙들 복 입는 것은 남자와 달라 복제를 3년으로 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그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효자가 거상(居喪)하는 예에 있어서도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는 기록이 있으니, 지금 이 대왕 대비 복제도 3년으로 의주(儀注)를 고치고 팔방(八方)에 알리어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조정 공론이 다른 뜻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 그리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그리하여 나라를 안정된 태산 위에다 올려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 밖의 내전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예경에서 말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고 한 교훈대로 따르면 불가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소설을 쓴 이가 성인이 아닌 바에야 한 마디쯤은 성경에 맞지 않는 경우도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지 않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야 하지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으면 왜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소설에 이른바,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말은, 천리와 성경에 딱 들어맞는 말로서 명명 백백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예에 대하여 의논하려면 마땅히 그 설을 취용할 것이지 달리 찾을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기년 제복(除服)은 결코 해서 안 될 일이고 3년상으로 정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신의 이 말은 모두가 신이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 옛 성인의 예경의 뜻이며 천리에 근원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서둘러 바로잡도록 하소서.
신이 견묘의 충정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군부와 종묘 사직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람으로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는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않느냐와, 이 말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主勢)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와, 국조(國祚)가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
이 상소가 정원에 올려지자, 승지 김수항(金壽恒)·이은상(李殷相)·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박세성(朴世城)이 아뢰기를,
"금방 부호군 윤선도 상소가 정원에 도달하였는데 그 상소 내용을 보았더니,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였고, 어지러울 정도로 남을 속이고 허풍을 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말의 출납에 있어 오직 진실을 요하는 도리로서는 이러한 소문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오나 다만 생각기에, 성상께서 보시면 시비와 사정이 판가름날 것이므로 소문이 들어간 후 성상께서 그의 정상을 통촉하시고 분명히 가려서 호되게 물리칠 일이지, 신들이 지레 퇴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 소문을 받아들인 뜻을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소문을 알면서 왜 받아들였는가? 도로 내주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하였다.

 

4월 19일 계묘

송준길이 윤선도 상소 소식을 듣고 즉시 성 밖으로 나갔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엎드려 비망기(備忘記)를 보았더니, 윤선도를 삭탈 관작하고 내쫓으라는 명령을 특별히 내리셨는데, 사특한 말을 호되게 물리친 말씀 내용이 엄절하여 그야말로 일월의 밝음으로 도깨비 같은 몰골을 훤히 꿰뚫어보시는 것을 알겠으니, 이를 보고 듣는 이 그 누가 통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만 좌참찬 송준길이 선도의 상소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이미 성문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의지하고 신임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가 있을 뿐인데 뜻 밖의 흉측한 모함을 당하고는 허겁지겁 성을 빠져나갔으니, 유현(儒賢)의 진퇴는 그 관계가 매우 중한 것으로 조금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상께서 지성으로 위로하시고 머물러있도록 유지를 내리시면 준길인들 어찌 차마 조정을 꼭 떠나려고 하겠습니까. 신들이 외람되이 가까이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감히 구구한 생각을 여쭙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말하지 않았던들 내 어떻게 알았겠는가. 우찬성이 떠난 후로 심정이 좋지 않고 바라는 것이라곤 좌찬성 뿐인데, 지금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지는 것이다. 즉시 사관을 보내 유지(諭旨)를 전하라."
하였다.

 

가주서 유명윤(兪命胤)이 명을 받고 강상(江上)에 가 말을 하고 유지를 전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의 후한 은총을 받고서도 티끌만큼도 도움을 준 게 없어 마음으로 항상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기, 마치 깊은 골짜기로 떨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신을 말하는 사람들이 만약, 분수 넘친 짓을 한다거나 아니면 미쳤다고 꾸짖고 죄를 주면 신으로서야 달게 받아들일 뿐, 감히 무슨 꺼림칙한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제 윤선도의 상소 내용을 들었더니, 그의 마음이나 쓰여진 말들이 참으로 보통이 아니어서 남의 신하된 자로서는 차마 읽을 수 없는 것이었고 또 차마 들을 수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비록 전가족이 주륙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이므로 금오문(金吾門) 밖에 짚자리를 깔고 조정의 최분을 기다려야 할 것이나, 조금 후 성상께서 이미 지휘가 있으셨다는 말을 듣고는 감히 다시 그러지도 못하고 성상의 심회만 거듭 괴롭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신의 몸이 어떻게 감히 일 없다는 듯 성안에 앉아서 조정 전신들을 다시 욕되게 할 것입니까. 그리하여 강 밖에서 숨 죽이고 엎드려 조심조심 두려움에 싸여 있었는데, 생각잖게 성상께서 자상하신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시고 멀리 사관을 보내 위로와 함께 정성이 담긴 유지를 보내셨습니다. 신이 받들어 두 번 세 번 읽을 때 눈물이 쏟아지고 참으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비록 어둡고 비루하나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 나라 걱정하는 생각이야 어찌 없을 것이며, 또 어찌 성상의 마음이 여기 표현된 것 이상으로 절박하심을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이 이미 그러한 비방을 들었는데 또 다시 아무 거리낌없이 재신(宰臣)들 틈에 의기양양하게 끼어 있다면, 사방에서 들었을 때 거리에서 그 헐뜯음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사대부의 몸가짐은 염우(廉隅)가 무엇보다 중한 것인데, 그 염우를 잃고서야 어떻게 임금을 섬길 것입니까? 전하께서 신을 가엾게 여겨 신에게 죄를 가하려고 아니하신 것이나, 신의 직명을 갈고 신을 물러가도록 허락하여, 신으로 하여금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하면서 남들이 하는 말에 사의를 표함으로써 늘그막에나마 지절을 보전하게 하시는 것이, 참으로 천지 부모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성해주시는 은덕일 것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 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청대하여,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김수항도 입시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어제 윤선도 상소를 받아들인 후 상께서 취하신 처치는 참으로 지당한 것이어서 뭇사람들이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그 상소 내용의 말 꾸밈새가 너무 흉측하고 참혹하여 마치 고변(告變)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대체로 남을 악역(惡逆)으로 몰아넣은 자가 끝에 가서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 반좌(反坐)를 당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시열·준길이, 과연 선도가 말한 대로라면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도는 당연히 반좌의 죄를 받아야지 시골로 내쫓는 것으로 그쳐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였고, 세정·후열은 아뢰기를,
"그의 ‘백성들 마음이 들떠 있다.’느니, ‘국가 안위(安危)가 매여 있다.’ 하는 말들은, 더욱 흉측하고 참혹한 말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 끝부분에 이른바, ‘이 소가 받아들여지고 않고에 국조(國祚)의 연장 여부가 달여 있습니다.’ 하는 등의 말이 더욱 흉물스러워 나로서도 그의 죄가 거기에 그쳐서는 맞지 않음을 알지마는, 나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선도가 일찍이 효종 잠저(潛邸) 시절의 사부였기 때문이다. 수항이 아뢰기를,
"그 사람에게 비록 최고의 법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준길이 이미 허겁지겁 성을 빠져나갔고, 시열 역시 조정에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그의 흉계(凶計)는 이미 실현을 본 셈입니다. 시열이 내려갈 때 이른바, 유언(流言)이라는 것도 틀림없이 그들에게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상소 내의 말들이 흉측하지 않은 말이 없지만 위로 선왕까지 범한 말에 있어서는 더욱더 가슴 아프고 뼈에 사무치는 말이었습니다. 살리기 좋아하시는 성상의 덕으로써 비록 차마 극형은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를 먼 데로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의 상소문 역시 일반 예대로 도로 내줄 것이 아니라 가져다 조정에 보여 그의 죄상을 밝힌 후 불태워버려야 옳습니다."
하여, 수항이 아뢰기를,
"예부터 흉소(凶疏)는 그것을 불태운 예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상을 캐보면 국문(鞫問)도 할 만한 죄로서 시골로 내쫓는 정도로는 그의 죄악을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먼 데로 몰아내는 것으로 전지(傳旨)를 다시 받고, 그 소문은 대신들에게 돌려보인 후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선도가 원래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시대의 버림을 받고 울분이 쌓여 폭발한 것입니다."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몇 해 전에도 선도가 대소(大疏)를 올렸다가 목적 달성을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상소였는가?"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호남(湖南)에 정개청(鄭介淸)이라는 자가 있어 정여립(鄭汝立) 옥사 때 죽었는데, 후인들이 그를 위해 사우(祠宇)를 세웠으므로 송준길이 경연 석상에서 그 사실을 아뢰고 헐어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도가 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장황한 소를 올렸는데, 그때 상의 체후가 편찮으셨기 때문에 정원이 그 사실을 아뢰고 내주었습니다."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신이 어제 준길을 만났더니 그의 말이 ‘상께서 자꾸 간곡히 머물러 있기를 권하시고 또 선왕의 연기(練期)가 이미 다가왔기 때문에 차마 바로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머뭇거렸으나, 지금은 이렇게 망극한 참소를 당했으니 연제일(練祭日)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겠네.’ 하였습니다. 흉측한 말이 비록 그러하더라도 오직 상께서 머물러 있도록 만류하시기 여하에 달려 있으니, 지금 만약 지성으로 붙잡으시거나 혹 수찰(手札)로 유시하신다면 준길이 어떻게 차마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이 있어 글을 쓸 수가 없으니, ‘한 번 들어오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뜻으로 승지가 내용을 꾸며 유지를 전하라."
하여, 도승지 김수항이 명을 받고 나가 준길에게 유지를 전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생각해 보면 신이 당한 것은 사실 보통으로 비방을 당한 정도에 비할 바 아닙니다. 성상께서는 비록 모든 것을 통촉하시고 신에게 중한 죄를 가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이지만, 신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전간(田間)에 자취를 묻고 문 닫고 앉아 허물을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은총과 영화만을 탐하고 그리워하여 수문(脩門)에 다시 들어가 남을 더 성나게 만들 것입니까."
하였다.

 

4월 20일 갑진

상이 도승지 김수항을 다시 보내며 이르기를,
"좌참찬이 비록 내려가려고 하여도 그를 머물도록 권유하는 도리에 있어 이대로 말 수는 없는 일이니, 그대가 다시 가서 꼭 한 번 와서 서로 만났으면 싶다는 뜻으로 말을 잘 꾸며 타이르라."
하니, 수항이 답하기를,
"어제 신이 준길에게 묻기를, ‘서계(書啓) 이외의 것을 만약 상께서 물어오시면 대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더니 준길이 대답하기를, ‘다시 들어가 하직 인사라도 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상께서 현재 상소한 사람을 다스리고 있는 중인데 이러한 시기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들어간다는 것은 염우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심정을 아뢰는 상소만으로 성상의 하교를 기다리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등이 아뢰기를,
"윤선도 소본은 그 말이나 뜻이 너무 흉측하고 참혹하여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상복(喪服)에 관한 논만 하더라도 서로 옳다 그르다 하고 있는 것은 그 목적이 《예경(禮經)》에 맞도록 하여 되도록이면 지당한 결과를 얻자는 것뿐이지, 종묘 사직이 편안하고 않고의 여부와 국조(國祚)의 연장 불연장이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선도가 예를 논한답시고 자기 흉계를 실현시켜 보려고 감히 이르기를, ‘대통(大統)이 분명하지 못하다. 백성들 마음이 들떠 있다. 종묘 사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하는 식으로 장황하고 어지럽게 하늘의 귀를 놀라 움직이게 하여,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를 꼭 유현(儒賢)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상소야말로 사람을 무고하는 상변(上變)의 글월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선류(善類)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기회만 오면 해치려고 노렸던 소인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습니까마는, 흉물스럽고 방자하고 음흉하고 간특하기가 이렇게 심한 자야 언제 있었습니까?
아, 두 신하022)   문제는 말하잘 것 없다 치더라도, 재궁(梓宮)·산릉(山陵) 문제를 들고 나와 앞장서서 떠들면서 상대를 의혹되고 어지럽게 만들고, 심지어는 ‘함궐(銜橛)’ 등의 말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어디 오늘에 와서 신하로서 할 말입니까. 그런데 그는 감히 다시 선왕을 범하면서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이 더욱 놀라 뼈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도의 죄가 위로 종묘 사직과 선왕에까지 연관되고 있는 것으로서, 꼭 죽여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왕법(王法)으로 논할 때 결코 귀양 보내는데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니, 바라건대 서둘러 방형(邦刑)을 바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어찌 그대들 청이 있기를 기다려 따를 것인가. 마음에 차마 못할바 있어서이니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좌찬성 송준길이 상소하여 직을 사하고 또 아뢰기를,
"신으로 하여금 이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서 조용히 고향에 돌아가 문 닫고 허물을 반성함으로써 만절을 보전하여, 남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해주시면 비록 죽더라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생각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참소하는 말들이 끝이 없기 이 모양이니 이것이 어찌 경 혼자만의 불행이겠는가. 사실은 국가의 불행인 것이다. 경이 이미 돌아갈 뜻을 굳혔으니 내 감히 다그치지는 못하겠으나, 잠시 서로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뭄에 비를 바라듯 간절한 것이다."
하고, 이어 사관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다.

 

4월 21일 을사

충홍도(忠洪道) 홍주(洪州)의 상전리(上田里)에, 길이가 두 발 두께가 넉 자인 큰 바위가 있는데, 지척 사이에 거꾸로 서 있어서 길 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구경하였고, 목사 김우형(金宇亨)이 가보았더니 바위 머리 부분에 한 자쯤 흙이 묻어 있어 땅에 박혀 있었던 흔적이 선명하였다. 감사 오정원(吳挺垣)이 알려왔다.

 

경상도 대구(大丘)·경주(慶州) 등 9개 읍에 금년 4월 5, 6, 7일에 밤마다 연거푸 서리가 내렸고, 진주(晋州) 지리산(智異山)에는 5일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알려왔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정수(鄭脩)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엎드려 윤선도 소본을 보았더니 첫머리에는 ‘지금 국가 안위가 아침이냐 저녁이냐로 절박하다.’고 하였고, 끝에다는 ‘주세(主勢)가 탄탄한가 그렇지 않은가, 국조(國祚)가 연장될 것인가 아닌가.’ 하고 말하여, 그 흉측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어 마치 급급히 상변(上變)이라도 하는 양 하늘의 귀를 놀라 움직이게 하고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켰는데, 그 마음 씀씀이의 흉물스럽고 간특한 꼴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지금 예를 논의하고 있는 일이 종묘 사직의 안위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감히 종통(宗統)이 분명하지 못하다느니, 백성들 마음이 들떠 있다느니 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재궁(梓宮)·산릉(山陵) 두 문제까지 들고 나와 두 신하를 모함하는 발판으로 삼아, 심지어 ‘보도(輔導)를 잘못하여 함궐의 변까지 있게 만들었다.’ 하여 위로 선왕까지 들먹였으니, 그는 더더욱 흉측한 일로서 원근이 들었을 때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치지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예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선류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니, 아, 참으로 처참한 일입니다. 지난날 송시열이 떠날 때 이른바 유언이라는 것도 사실은 성상의 하교처럼 그 사람이 지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남을 악역(惡逆)으로 모함한 자는 반좌(反坐)의 법이 있는데, 하물며 말이 선왕을 연계시키고 종묘 사직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어찌 보통의 귀양살이 정도로 끝날 일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윤선도를 빨리 국문하여 법이 정한 대로 처단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대간(臺諫)이 논한 것은, 동료간에 서로 의논한 후에는 다시 변경을 못하는 것이 체통이나 규례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어젯밤 신들이 장령 강호(姜鎬)와 대청(臺廳)에서 상회례(相會禮)를 갖고 이어 윤선도 사건을 발론하여 소초를 작성하려는 즈음에 궐문 닫을 시간이 임박하여 곧 파하고 나오면서 내일 아침에 일찍 모여 의논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신들이 다 모인 후에 강호는 병을 핑계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병이 가벼운지 중한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공론이 바야흐로 일고 있는 이때 이미 정한 논제에 대하여 뚜렷이 기피하는 태도가 보이니, 대각으로서 사리와 체통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바라건대 장령 강호를 갈아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어찌 경들이 청한 뒤에 따르려고 했던 것이겠는가. 마음에 차마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번거롭게 말고, 갈아내는 건은 아뢴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사간원이, 전번의 서계를 고쳐 꾸미고, 아뢰기를,
"윤선도를 법에 의하여 처리하시도록 청했던 것은, 사실 법을 밝히고 죄를 다스리라는 뜻으로 한 것인데,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내 어찌 그대들 청이 있기를 기다려서 따르려고 했던 것이겠는가. 마음에 차마 못하는 바가 있어 그러는 것이다.’ 한 하교가 있었습니다. 신들이라고 어찌 성상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겠습니까만 선도의 죄상은 꼭 베임을 받아야지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뭇 감정이 똑같이 울분을 느끼고 있고, 나라의 법은 지엄한 것이어서 성상께서 비록 법을 어기고 용서해 주시고 싶어도 그렇게 사사로이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선도의 상소는, 겉으로는 예를 논하고 내심으로는 자기 심통을 부리기 위하여 장황하고 현란하기가 한도 끝도 없어, 그 글자 하나 문구 하나도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과 음흉한 계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가 말한, 대통(大統)이 분명하지 못하고, 백성들 마음이 들떠 있고, 종묘 사직이 불안하다고 한 것은 바로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를 송시열 등에게 씌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궁·산릉 문제를 들추어내어 암암리에 상대를 미혹하게 만들어서 올가잡는 덫을 만들고 있으며, 그 밖의 위복(威福)을 아랫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느니, 주세(主勢)가 흔들린다느니 하는 말들도 모두가 남의 신하된 자로서는 극죄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천하의 대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열 등에게 그러한 죄상이 없는 바에야 선도가 어떻게 남을 모함한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까?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고한 자에게 반드시 반좌율을 적용하는 것은 그 무고죄를 악역과 똑같이 보는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선류를 해치고 그리하여 국가를 패망시킬 간흉한 무리들이 있을 때 항상 걱정되는 것은, 임금이 그들 미혹에 빠져 화란을 불러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다행히 태양이 중천에 떠있듯이 성상께서 위에 계시면서 모든 정상을 털끝만큼도 놓치지 않고 다 통촉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토(誅討)의 법을 엄히 시행하여 참소하는 적이 오는 지름길을 막는 일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위로 선왕을 들먹인 그 말도 신하가 되어 오늘에 와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선도는 감히 아무 거리낌없이 말을 늘어놓았으니, 그는 사실 선왕에 대한 죄인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를 보통 귀양살이 정도로 처리하여 그로 하여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쉬게 만들 것입니까. 바라건대 윤선도를 법이 정한 대로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관학(館學)의 유생 이재(李㘽) 등 1백 34명이 상소하기를,
"귀신 같은 간악한 무리가 감히 사영(射影)023)  의 꾀를 내어 유현(儒賢)으로 하여금 아무 미련없이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바라건대 정성을 다해 만류하여 다사(多士)들 희망에 위안을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성과 예가 부족하여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마땅히 다시 정성을 들여 만류하리라."
하였다.

 

4월 22일 병오

도승지 김수항을 다시 보내 가서 송준길을 타이르게 하였다. 수항이 돌아와 아뢰기를,
"준길 일행이 지금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더욱 정성과 예를 가하시어 특별 수찰(手札)로,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는 유지를 내리시면 준길인들 어찌 감히 끝내 돌아오지 않기야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경기(京畿)·충홍(忠洪) 두 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말을 주어 호송하게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준길이 상소하기를,
"신도 천안을 뵙고 하직하고 싶은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신의 사정이 너무 위험 천만입니다. 신이 이러한 때 아무 거리낌없이 얼굴을 들고 등대한다면, 이는 신으로서도 감히 하지 못할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 체통으로 보아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빨리 신의 직을 체면하여 마음 편히 내려 갈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이미 돌아갈 뜻을 굳혔다니 내 마음이 허전하기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렵다. 지금은 비록 떠나더라도 되도록 빨리 마음을 돌려 돌아오기를 내 날로 바라리라."
하였다.

 

헌납 목내선(睦來善)이, 일소(一所)의 강경 감시관(講經監試官)이었는데, 일소 강경에 응시한 거자(擧子)의 수가 이소(二所)보다는 갑절이나 많았는데도 고시(考試)를 신중히 못하고 출방(出榜)을 너무 서둘러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거자들이 있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지평 정수(鄭脩), 대사헌 김남중(金南重)도 일소의 시관으로서 다 인피하였다. 양사(兩司)가 출사하게 하도록 처치를 하였는데, 내선은 패부진(牌不進)으로 인해 체직이 되었다. 이는 대개 윤선도 안율(按律) 논의에 자기는 끼이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으로, 그 때문에 당시 공론의 저촉을 받고 전랑(銓郞)으로 추천되는 길까지 막혔다가 경상 도사(慶尙都事)로 나가고 말았다.

 

4월 23일 정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선도 상소 내의 속뜻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이나, 그 중의 재궁에 관한 문제는 바로 소신이 맡았던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를 의논할 때도 신은 예로써 단정하지 못하고 다만 이미 행했던 규례만을 들어 아뢰었으니, 만약 죄를 말하기로 들면 사실은 신이 수죄(首罪)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찬이 내려가고 없어 그렇잖아도 매우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데, 경까지 왜 또 이런 말을 하는가. 예를 논의하는 문제에 있어 대신이 아니면 뉘에게 물을 것인가? 그런데 경들이 감히 분명한 말을 못한다면 나더러 어떻게 정하라는 것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허목의 상소는 예에 의거하여 사실을 아뢴 것이고, 송시열 등이 한 말 역시 예에 의거하여 논변한 것이어서 예에 밝은 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단정을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신과 같이 일찍이 예가(禮家)에 종사한 일이 없는 사람이 무슨 소견이 있어 감히 대례를 정할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 예제는 자식을 위해 3년복을 입는 법은 없기 때문에 신이 그렇게 의논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제신들이 다 입시하였으니 의견들을 물어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기 생각을 말해 보라."
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답하기를,
"상사와 제사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른다고 하는데, 조종(祖宗)이 하시지 않던 일을 오늘 와서 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일지 신으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였고, 부제학        유계는 아뢰기를,
"허목의 예설은 모순이 많고 송시열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으며, 대사간        이경억은 아뢰기를,
"예론(禮論)을 마치 떼 지어 송사라도 하는 것 같은데, 만약 절충이 어려우면 차라리 선왕께서 이미 행했던 대로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장령        윤비경은 아뢰기를,
"조종께서 이미 하셨던 대로 따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호조 판서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원래 예학에 어둡지만 장자(長子)니 서자(庶子)니 하는 말은 더욱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더라도 어찌 소견이야 없겠는가."
하여, 허적도 아뢰기를,
"기왕 뚜렷한 의견이 없는 바에야 국제(國制)를 따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판윤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신이야 어떻게 감히 논의에 끼겠습니까."
하여 상이 이르기를,
"나쁠 것 없다. 각기 소견을 말하는 것이니까."
하니, 이완이 대답하기를,
"대신과 제신들 모두가 국제를 따라야 한다고 하니, 그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하였고,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아뢰기를,
"말하면서 뇌동(雷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예란 사람사람이 가벼이 논의할 것이 아닌데, 시열 등이 말한 것을 대신들도 옳다고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지원 등이, 상의 안질이 완쾌했다 하여 종묘에 고할 것을 청하자, 상이 불허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새 능소의 전석(磚石)이 혹 무너지고 떨어진 곳도 있으며, 혹은 2중 색상으로 된 곳도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봉심을 하고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땅이 풀리기를 기다리느라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매우(霾雨)가 지나간 뒤에 봉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게 좋겠다고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요즘 듣기에 궁금(宮禁)이 근엄하지 못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 입궐을 자주하고 때로는 자기도 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면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장자(年長者) 말인가? 연장자는 드나들며 자고 한 일이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연장자가 아니더라도 지금은 선왕조 때와 달라 금중(禁中)에다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친친(親親)의 도리로서는 더할 데 없는 일이나, 사가와는 일이 달라 전하께서도 그 점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달 지난 후 탈상을 하고 나면 별도의 조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윤선도 상소로 인해 송준길이 이번에 또 내려간 것도 극히 불행한 일이지만, 송시열은 그 입장이 준길보다 더 난처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유지를 전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명하여, 말을 꾸며서 유지를 내려보내게 하였다.

 

4월 24일 무신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소상(小祥) 때의 연관(練冠) 및 중의(中衣)에 대하여, 그것을 기축년에 이미 행했던 전례대로만 하라는 재가를 내리신 바 있습니다. 처음에 바깥 논의를 들었을 때 혹은 최복(衰服)을 마전하지 아니하고 요질(腰絰)을 고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나, 신들의 처음 생각에는 시왕(時王) 예제에 최복을 마전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단궁편(檀弓篇) 주소(註疏)의 ‘정복(正服)은 고칠 수 없다.’라고 한 그 설에 의거한 것이라고 여겨졌고, 또 근세 사대부 집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일찍이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운운하고 있는 말들을 보면 그도 틀림없이 근거가 있어 한 말일 것이고, 또 예문을 상고하여도 공포024)  는 마전한 피륙을 쓴다고 하였으며, 단궁편에도, 칡으로 요질을 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것을 보면 최복과 요질을 모두 바꾸고 고치는 절목이 있는 모양입니다. 막중한 전례에 있어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제때에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 바라건대 대신·유신으로 하여금 참고하고 상량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윤허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조(國朝)의 정해진 제도를 준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고친다는 것은 역시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고, 좌참찬 송준길은 주장하기를,
"신이 삼가 《의례통해(儀禮通解)》의 상복 도식(喪服圖式) 연제 수복도(練祭受服圖)를 보았더니, 중의(中衣)와 관(冠)은 마전한 피륙으로 만들고, 최상(衰裳)은 졸곡(卒哭) 후에 관을 쓰고 입는다고 되어 있는데, ‘졸곡 후의 관’이란 바로 대공(大功)의 칠승포(七升布)를 말한 것입니다. 그 대공 칠승포에 관하여 《의례(儀禮)》에는 원래 마전한 것을 쓴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마땅히 마전한 피륙으로 관과 중의를 만들고, 최상은 대공 칠승포로 다시 만들되 마전은 않는 것이 고례(古禮)에 맞는 일이며, 소(疏)에서 말한 정복(正服)은 바꾸지 않는다고 한 기록과도 위배되지 않는 일입니다. 횡거(橫渠)025)  의 연포(練布)를 쓴다는 논은 일종의 별개 학설로서 비록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례를 따르는 것이 더 바른 길입니다.
또 《의례》의 졸곡 탈질대(卒哭脫絰帶) 주(註)에 의하면, ‘마(麻)를 바꾸어 갈(葛)로 대체한다.’ 하였고, 상복 도식에도 그러한 기록이 있으며, 《가례(家禮)》에는 졸곡에서 소상까지 띠를 바꾼다는 절목이 여기도 저기도 없습니다. 그리고 명(明)의 유학자 구준(丘濬)이 《가례의절(家禮儀節)》을 만들면서도 고례의 뜻을 수용하여 ‘소상(小祥)의 요질(腰絰)을 칡덩굴로 만들되 세 겹으로 네 번을 꼰다.[三重四絞]’ 하였으니,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게 없습니다. 또 도식에 의하면 ‘참최의 교대(絞帶)를 우제(虞祭) 이후에는 마(麻)를 바꾸어 피륙으로 하는데 칠승포로 한다.’ 하였는데, 지금 《가례》를 따르려면 우제 이후 바꾸는 절차는 비록 없지마는, 연제(練祭) 때의 요질을 이미 고례에 따라 칡덩굴을 쓰기로 하면 교대(絞帶)도 당연히 연포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도식이라는 게 바로 면재 황씨(勉齋黃氏)026)  가 직접 주자(朱子)의 지결(旨訣)을 이어받아 만든 것인데, 그가 정한 연복 제도는 그러하였습니다. 대체로 예란 절문(節文)이 있는 것이어서 옛날 제도를 보면 초상에서 복을 다 벗을 때까지 최복도 점차 바뀌고 곡절도 다양하여 매우 구체적이었지만, 온공(溫公)027)  의 《서의(書儀)》는 바로 속례(俗禮)를 따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소략한 점이 너무 많고, 주자의 《가례》도 많이 《서의》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초년에 초록(草綠)한 것은 아동 무리들이 훔쳐가 버리고 미처 다시 수정을 못했으므로 사실은 미완성 서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가 병이 위독했을 때 문인들이 묻기를, ‘서의를 그대로 쓸 것입니까?’ 하자, 선생은 소략하다고 대답하였고, 그러면 《의례》를 준용할 것이냐고 또 묻자,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랐는가를 상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례》는 당연히 미완성 서적이고, 연제복 절목에 있어서는 더욱 분명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러나 만약에 다만 구복(舊服)을 그대로 입고서 최(衰)와 부판(負版)만 떼어버리고 별도의 신복(新服)을 만들지 않으면, 이른바 ‘수질(首絰)·부판·벽령(辟領)·최 등을 뗀다.’ 한 말이 당연히 역복(易服) 조항 아래 있어야지, ‘하루 전에 연제복을 챙겨 놓는다.’ 한 그 아래 있어서는 맞지 않습니다.
시골 마을 가난한 선비들이 예의 뜻을 인식하지 못하고 구복을 그대로 입는자가 있어, 신이 늘 그 야만스러움을 민망히 여겨왔는데, 당당한 국가에서 행하는 예가 도리어 시골 마을 가난한 자들이 하는 짓과 같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고례에 질정하여 보아도, 《가례》를 들어 참작하여 보아도, 이리로나 저리로나 모두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예가 소소한 것이거나 약간 의심스러운 것일 경우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연제복 변제(變除)는 참으로 대단한 절목일 뿐더러 도식에서도 너무나 명백하고 의심할 것이 없이 논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전례가 있다는 핑계로 고례를 따르고 정도를 따르도록 변통을 않을 것입니까.
《오례의(五禮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열성조 이래로 그때그때 시의에 맞게 고친 것들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왜 또 옛것만 고집하고 고치려 들지 않습니까? 그 밖의 제신들 복제야 원래 예로부터 있던 제도가 아니어서 참으로 이른바 띠풀로 얽고 종이로 싼[芧纏紙裏] 것들이므로 신으로서 논할 겨를도 없지마는, 유독 성상께서 입으실 최복(衰服)에 대하여 권권하는 것은, 꼭 올바른 예대로 하여 전일의 잘못된 것을 개혁하고 그리하여 한 시대의 제도를 마련하시기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신이 일찍이 시골에 있으면서 들은 바로는, 지난 경인년 연제 때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려 그 뜻을 개진하였으나, 연제가 하룻밤 사이로 다가와 미처 자세한 의논을 못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신이 항상 개탄하면서 바야흐로 차자를 올려 소회를 개진하려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물으심을 받았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논의를, 대신 및 우윤 권시, 호군 이유태, 좌랑 이상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여, 정태화·심지원·권시·이유태가 다 준길의 논의가 옳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논의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허목이 올린 상복도(喪服圖)와 연제복에 관한 제신들 수의(收議)를 가지고, 사관을 보내 우찬성 송시열에게 가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시열의 연제복에 대한 논의도 준길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허목의 상복도 논설에 관한 변론을 각기 그 원도(原圖) 본 조항 아래다 붙여 놓았습니다."
하였는데, 그 변론은 이러하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대부(大夫) 아들이거나 사(士)의 아들이거나 가문을 이어받고 제사를 맡았으면, 천자(天子)·제후(諸侯)가 대통을 전수받고 국가를 이어받은 것과 다를바 없다고 한 이 조항이 바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에 대하여 주소(註疏)에서 이렇게 분명히 밝혀놓았는데도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가정과 국가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어, 신으로서는 감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는 것이 그것이다.’ 한 이 한 조항이 바로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인데, 위아래의 소설(疏說)을 볼 양이면 부위장자(父爲長子) 조항에 이미 ‘둘째 장자(長者)를 세워도 역시 장자(長子)로 명명한다.’ 하고서, 그 아래다는 또 이르기를, ‘둘째 장자는 똑같이 서자(庶子)라고 명명한다.’ 하였으며, 또 그 아래다는 ‘체(體)이면서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로서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상 세 개 설은 한 사람이 쓴 것이고 같은 시기에 쓴 말로서 똑같은 문제를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달리한 것이므로 이것을 주장하고 저것은 공격한다거나, 저쪽이 옳고 이쪽은 틀렸다고 해서는 안될 일 같고, 마땅히 반복해서 참고하여 위아래가 서로 의의를 지니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은 소견으로 다시 조목별로 열거를 해보겠습니다. 이른바 둘째 장자도 그를 다 장자라고 명명하고 그를 위해 3년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아마도 맏아들이 상년(殤年)에 죽었거나 혹 몹쓸 병이 있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3년복을 입지 않았을 경우, 그 둘째를 세우면 역시 장자라고 명명하고 3년을 입는다는 것일 겁니다. 만약, 그 맏아들이 전중(傳重)의 위치에 있다가 죽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이미 3년을 입었다면, 비록 둘째 적자(嫡子)가 계통을 이어받았더라도 역시 그는 서자이고 3년을 입을 수는 없다는 뜻으로 볼 경우, 위아래의 소설이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둘째 장자는 똑같이 서자로 명명한다고 한 것은, 둘째 적자를 두고 볼 때 첩의 자식과 구별하기 위하여는 ‘적(嫡)’, 맏아들과 구별하기 위하여는 ‘서(庶)’인 것으로, 사항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그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서자’라는 칭호가 첩의 자식과 차적자에 대한 공동 호칭이라면, 아래 이른바 체이면서 정이 아니라고 하는 그 서자가 다만 첩의 자식을 가리킨 것이지 차적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의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체이면서 정이 아닌 것은 서자로서 후자가 된 경우이다.’ 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서자’가 위에서 말한 서자와 같은 맥락의 호칭인 것이지, 만약 그것이 첩의 자식만을 지칭한 것이고 차적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면, 가씨(賈氏)028)  가 틀림없이 말을 바꾸어 구별을 하였지, 위의 것과 혼동되게 같은 항목을 만들어 후인의 의혹을 야기시키지는 않았을 것으로, 이 문제를 신이 깊이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기복(期服) 조의 소문을 살펴보면 이르기를, ‘임금의 적부인(適夫人) 둘째 아들로부터 그 이하 및 첩의 자식을 모두 명명하여 서자라고 한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무릇 정체(正體)가 위에 있는 자는 ‘하정(下正)’이라고 하는데, 그도 오히려 ‘서(庶)’라고 한다. 정체란 할아버지에 대한 맏이임을 말한 것이고, ‘하정’이란 아버지에 대한 맏이임을 말하는데, 비록 아버지에 대한 맏이로 정(正)이긴 하지만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오히려 서(庶)가 되기 때문에 그를 일러 서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주자의 설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이른바 윗대에 정체라는 것은 적자로서 아버지 뒤를 이은 자이고, 이른바 하정이란 차적자의 적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정’이라고 하고서 또 그를 ‘서’라고도 하는 것입니까. 그는 적(嫡)이기 때문에 정이라고 하고, 차(次)이기 때문에 서라고 하는 것으로 비록 적은 적이지만 그 때문에 심지어 그의 아들까지도 서라고 칭하는데, 하물며 그 자신을 서라고 칭하지 못할 것입니까. 지금 기복 조의 소문 그리고 주자의 설로 본다면, 여기에서 이른바 ‘서자로서 후자가 되었다고 한 것은 틀림없이 첩의 자식만을 지칭한 것이지 차적자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 그 말은 신이 사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확실하고 정확한 증원(證援)도 없이 함부로 논리를 전개했다가 혹 소설을 쓴 사람의 본의가 아닌 해석을 한다면 일의 처리를 옳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의심은 의심으로 전하고 위태로운 것은 그대로 접어둔다[傳疑關殆]는 가르침으로 보았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으로서는 감히 확실한 말을 못하겠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널리 의견을 수렴하여 잘 취택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조가 연제 날 변제(變除) 절차를 올렸는데, 《오례의(五禮儀)》에 따른 것이었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기를,
"지금 윤선도 상소문을 보면 식은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모를 정도입니다. 송시열·송준길을 일러 국가를 쇠망으로부터 부흥시키고 난리를 평정할 수 있는 재목으로서 선왕의 뜻을 이어 무엇인가 해내려는 성상의 마음에 틀림없이 부응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신이 감히 믿지 못하겠지만, 요컨대 내리잡더라도 누구나 친근하고 싶어하는 선인(善人)임에는 틀림없고, 또 옛 사람들 학문하는 요령을 이미 터득하였으며, 인자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럽고 알찬 마음씨는 이미 조야(朝野)의 미쁨을 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고 선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하여 날마다 조금씩 세월을 두고 계속 공을 쌓게 하면, 쇠망으로부터 부흥시키고 난리를 평정해야 할 전하의 사업에 어찌 작은 도움만 되겠습니까. 국가가 하늘에다 영원한 명을 비는 터전이 그것을 계기로 이루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이 항상 말하지만, 남의 신하로서 임금의 신임을 얻어 무엇인가 세상에 남길 자라면,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미쁨 속에서 조정 책임을 맡았을, 때 모름지기 잘못을 지적하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임금 앞에서 그 사실을 개진하게 하여야 임금과 신하가 서로서로 경계하고 조심하여,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노력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과실을 말하는 자가 한 번이라도 있으면 금방 몸을 빼 물러가버리고 뒤이어 말한 자를 죄주면, 이는 백성의 입을 막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문제점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으시고 신린(臣隣)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다그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시열·준길이 서로 이어 서울을 떠남으로써 어려움을 책임지우고 선으로 인도하는 일이 앞으로 해이해지게 되면, 신도 무엇을 믿고 백료(百寮)들 말석에 구구하게 매달려 있을 것입니까?
신은 까닭없이 백성을 죽이면 사(士)가 떠나야 하고, 까닭없이 사를 죽이면 대부(大夫)가 떠나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시골 마을에서도 시열·준길의 잘못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서도 감히 못하고, 속으로는 틀렸다고 비방하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말을 못하는데, 그것이 태평의 기상이겠습니까?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그것을 걱정하고 그 두 사람을 위하여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이 언젠가도 말하였듯이, 오늘의 상사에 있어 대왕 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지금 비록 사리를 내세워 새로 정하더라도 1백 세를 두고 질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담당관으로 하여금 여러 기록을 널리 고찰해 보도록 하시면 그 허실을 아실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시열·준길·유계가 그렇게 현자이면서도 당연히 3년으로 해야 한다는 그 사리를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거리에서도 말들을 하고 시골 마을에서도 논의가 분분하여 마음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지 이미 오래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그 논의가 이미 조정 위에서 발발하였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시열이 말한 ‘선왕이 서자가 되어 해로울 것 없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말하는 자 없어, 그게 바로 선도의 참소를 부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선도가 현자를 헐뜯고 시기한 점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신상에 틀림없이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한 점으로는, 역시 할말은 하는 선비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성조(聖朝)에서 그의 할말은 하는 장점을 취하고 현자를 헐뜯은 그의 죄악은 덮어줌으로써 천하의 말 길을 열어놓을 것으로 여겼는데, 조정 논의가 너무 과격하여 이 극한 상황까지 오게 되어 권세가 아래로 옮겨갔다는 참소를 사실화하고 말았으니, 까닭없이 선비를 죽인다는 그 말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선도는 일찍이 선왕의 용잠(龍潛) 시절 사부(師傅)였던 옛 은의가 있어, 비록 그가 착하지 못함을 아시고서도 그의 장점만을 취하여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여 작위도 중대부(中大夫)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볍게 죽여서 안 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정이 만약 선도의 말에 대하여 용서를 하고 신의 죄까지도 아울러 용서해 준다면 신이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선도를 중죄로 논한다면 신인들 떠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조정이 만약 선도의 죄부터 용서하고 그리고 전하께서 특명으로 준길에게 유지를 내려 ‘임금·신하 사이에 성의가 서로 미더우면 결코 남의 말로 하여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신다면, 준길이 성상의 마음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이 없이 할말을 다한 셈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살펴주소서."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등대 때 면대하여 유시하겠다는 유지를 내렸다.
삼가 살피건대 권시가 초야의 신하로서 불세의 대우를 받았으니 상소를 않으면 말지라도 기왕 상소를 할 바에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말하여, 임금의 사랑과 자기를 발탁한 뜻을 저버림이 없어야 옳았을 것인데, 머리 사리고 꼬리 사리고 흐리터분 어물쩍한 태도로 시열 무리들로부터 씹힘을 면할까 했다가 결국 곤경에 처하여 죽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맹자(孟子)가 말했던, 잘해보려고 하다가 훼담만 자초한 바로 그것이었다.

 

승지 김수항(金壽恒)·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박세성(朴世城) 등이 아뢰기를,
"권시의 상소로 하여 사관을 보내 송준길에게 유지를 전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엎드려 그의 상소를 보니 그의 뜻은 대체로 우선 선도의 죄부터 용서하고 뒤이어 준길에게 유지를 전하여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였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도의 죄악에 대하여는 여정(輿情)이 공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며 양사(兩司)가 함께 나서서 극률(極律)로 논하고 있는 터인데, 어떻게 그 한 사람 말 때문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선도의 죄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고, 선도를 용서하지 않고서 곧바로 준길에게 유지를 전하는 것은 또 권시의 본의가 아니어서, 상소 내용에 의하여 유지를 전하라고 하신 명령은 봉행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소 내용을 보면, 선도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극구 말하였고 심지어 그를 일러 할말을 하는 선비라고까지 하였는데, 대체로 할말을 한다는 것은 충성스럽고 우직하여 거침없이 간(諫)하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선도는 그의 상소에서 두 신하를 무함한 일은 그만두고라도 위로 선왕을 범한 패역의 말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할말을 한 것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사람의 견해란 그다지 서로 멀지는 않은 것인데, 그가 그렇게까지 뒤틀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이겠으나 시비를 가리는 데 있어 분명하게 않으면 안 되겠기에 아울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 임금과 신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제일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선도의 죄가 용서할 수 없는 죄이기는 하나, 차마 못할 바가 있기 때문에 죽임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던 것이다. 내 어찌 권시의 말 한 마디로 하여 선도의 큰 죄를 가볍게 용서하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공론을 막을까보냐. 내 생각은 선도는 비록 사면하지 않더라도 다만 그 상소문 내의 ‘흉측한 말에 동요될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한 그 뜻을 취하여 유지를 전하면 혹시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바람이었는데,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유지 전하는 길을 멈추게 하라."
하였다.

 

윤선도의 상소를 불태웠다. 승지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옥당이 청대했던 날 부제학 유계가, 윤선도의 상소를 조정에 돌려보이고 불태울 것을 청하자 상께서 대신이 함께 모여 돌려보고 나서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상소문을 이미 삼공(三公)에게 돌려보였는데 어떻게 하오리까?"
하여, 상이 불태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4월 25일 기유

오정위(吳挺緯)를 좌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승지로, 정석(鄭晳)을 장령으로, 김옥현(金玉鉉)을 헌납으로 각각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가 인피하고 주장하기를,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흉측한 계책을 부려 위로 성상을 속이고 아래로 한 시대를 미혹케 하여 선류를 해치고 국가에 화가 미치게 하려고 하는데, 예로부터 참소 잘하고 간특한 흉물스런 인간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렇게 방자하고 기탄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신들이 안율(按律)의 청을 어떻게 않겠습니까? 그런데 권시의 상소를 볼 양이면 그 대의(大意)를 추려 볼 때, 마치 자기 자신이 두 신의 쪽에 서서 서로의 사이에 화해를 붙이려는 듯이 보이나, 사실은 허물을 두 신에게로 돌리고 선도를 신원 구제하여 그를 꼭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니, 그 취지가 엉뚱하고 언론이 질서가 없어 신들은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로 사람을 악역 부도(惡逆不道)로 모함했으면 이는 남의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도 없는 말인데, 그의 뜻은 오히려 두 신으로 하여금 그를 허물로 받아들이고 그 사실이 있으면 고치라고 하였으니, 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령 권시 자신이 그러한 경우를 당했다면 그렇게 자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가 이르기를, ‘선도가 현자를 헐뜯고 시기한 짓은 참으로 너무 악독한 일이다.’ 하고서, 또 이르기를,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하였으니 역시 할 말은 하는 선비다.’ 하였습니다. 과연 할 말을 하는 선비라고 할 바에는 현자를 헐뜯고 시기했다고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과연 헐뜯고 시기했다면 당연히 호되게 물리치고 남이 알게 끊어야 옳지, 어찌하여 두 쪽을 절충하여 중도를 쓴답시고 그를 용서해 줄 것을 서둘러 청하는 것입니까? 위아래의 말이 모순이 되어 영락없이 두 사람이 한 말 같이 되었는데, 이는 주의(主意)가 뚜렷하지 못하고 호오(好惡)가 정상을 잃은 것으로, 다만 언어상의 실수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의 병원을 찾아보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로서야 당연히 선도를 착한 선비로 오인하고 그에게 죄 내리는 것을 까닭없이 선비를 죽이는 일이라고 하겠지요.
신들이 흉측한 인간의 죄를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전에 없는 헐뜯음을 당했으니, 어떻게 감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대로 눌러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들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문자(文字)로 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깊이 생각지 않고 쓰다가 그리된 것에 불과한데, 무슨 억양이 그렇게까지 지나친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 역시 권시로부터 물리침을 당했다 하여 인피하고, 권시가 선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위아래로 태도를 바꾼 정상에 대하여 강력히 말하니, 상이 간원에 내린 비답과 같은 내용으로 답하였다. 대사헌 김남중도, 그제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고 또 권시로부터 물리침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경억·세모·비경·이무는 출사하고, 남중은 소패의 불응을 이유로 체면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부수찬 심세정(沈世鼎) 등도 차자를 올려 권시와 윤선도를 호되게 배척하고 또 아뢰기를,
"권시의 융통성 없이 꽉 막힌 말로 하여 흔들리지 마시고 빨리 공론에 따라 선도의 간교하고 흉물스런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이미 훤히 알고 있다. 나름대로 처치의 방법이 서 있는데 어찌 한 장의 상소로 하여 갑자기 내 생각을 바꿀 것인가."
하였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윤선도를 구제하자 공론이 떠들석하였으므로, 권시가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정원이 사실을 알리자, 상이 하교하기를,
"그 사람이 또 떠나다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즉시 사관을 보내, 지금은 비록 떠나더라도 서둘러 마음을 고쳐 돌아오라는 뜻으로 유지를 전하고, 또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말을 내주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날 여러 승지들은 다 기우제(祈雨祭) 제관으로 차출되고 우부승지 정익(鄭榏), 동부승지 박세성(朴世城)만이 정원에 있었다. 세성이 내용을 꾸며 아뢰려던 참이었는데 초안을 엮는 동안에 날이 이미 저물었다. 상이 정원에 묻기를,
"유지를 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후 사관이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본원이 지금까지 거행을 않고 있으니 웬일인가?"
하여, 세성이 바야흐로 여쭐 일이 있어 즉시 봉행을 못했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아뢰어야 할 일이 없는데 아침에 내려진 명령을 어찌하여 본원 내에다 유치해두고 있는 것인가?"
하였다. 세성이 아뢰기를,
"권시의 상소 내에 윤선도를 옹호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양사(兩司) 관원들이 인피하고서 매서운 공척을 하였습니다. 대체로 대관(臺官)의 피사(避辭)도 역시 하나의 탄론(彈論)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가 비록 그를 우대하는 뜻에서 내려진 것이지만, 일반 규례대로 봉행하고 보면 성상께서 대각을 대우하고 공론을 중히 여기는 뜻에 흠결이 있을 것같기 때문에 그 즉시 소회를 개진하여 여쭈려던 참이었는데, 시기가 너무 급박하여 금방 초안을 엮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누차 성상의 하교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황공하여 대죄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비록 부당한 명령을 내렸더라도 어찌 감히 이렇게 방자할 수가 있는가. 박세성이 감히 소인의 태도로 명예를 낚으려는 계책에서, 이른 아침에 내린 명령을 한낮이 다 되도록 끝내 여쭈어온 일도 없이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으니, 무엇을 믿는 데가 있어 여쭙지도, 말 한 마디도 않고 까닭없이 봉행을 않았다는 말인가? 지금 사관을 보내는 일은 사리에 해가 되는 일도 아니요, 또 대각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다. 이는 다만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이쪽 인정을 보이는 하나의 인사상으로 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가 비록 물리침을 당하여 떠나더라도 몇 해를 두고 서로 가까웠던 정으로 볼 때, 어찌 대간이 무서워서 그가 가는 길에 한 마디 위로마저 끝까지 없을 것이란 말인가. 세성은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모르는 자이니, 이야말로 임금을 업신여기고 명령을 거역한 적인 것이다. 그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임금일래야 임금이 될 수 없고, 신하도 신하가 아닌 것이다. 잡아들여 국문한 후 죄를 과하여 다른 사람들의 경종이 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우부승지 정익은 세성이 아뢸 때 동참했다 하여 불안을 느끼고 물러가 있었고,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하교를 보니 내용이 너무도 준엄하여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받들어 다 읽기도 전에 가슴이 시리고 뼈속이 아려,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렇게 과중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지금 유지를 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후 즉시 여쭙지 못하고 해가 저물도록 있었다는 것은, 늑장을 부린 죄는 물론 있겠으나, 그 근본 취지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명령을 태만히 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뜻은, 권시가 바야흐로 물의(物議) 때문에 성을 나간 처지여서 똑같이 현자를 대우하는 예로 대할 수는 없을 것같기 때문에, 마음에 생각되는바 있어 아뢰고 싶어도 아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해가 저물어진 것입니다. 준엄한 성지가 내릴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다만 성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마음껏 아래를 대하시고 성의가 넘쳐 흘러, 의심스러운 일로 사람을 죄주는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유독 오늘 따라 천위(天威)가 진동하여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를 성급하게 사패(司敗)에 내리고, 심지어, 임금이 있는 것도 모르고 명령을 거역한 적이라고까지 하교를 하시니, 그를 보고 듣는 사람치고 놀라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장을 바꾸어 살피어, 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기 소회를 개진하고 나서 명령을 받들지 않았으면 내 무슨 말을 했겠는가? 여쭈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명령을 받들지 않고서는 감히 말하기를, ‘대간의 피사(避辭)도, 준엄히 물리치는 것과 그 성질이 다를바 없어서 감히 봉행하지 못했습니다.’ 한 것이, 바로 임금이 있음을 모르고 명령을 거역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가 아뢰기를,
"말씀 내용이 너무 지나친 비답을 어제 받고서는 그렇잖아도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 또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니 내용이 너무나 준엄하고, 심지어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 있는 것은 모른다고까지 하였으니, 신들로서는 놀라고 떨려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간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결코 없으니, 바라건대 신들의 직을 빨리 개체하소서."
하고, 장령 윤비경, 지평 이무도 그 일로 하여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권격(權格), 지평 정수(鄭脩)도 시소(試所)에서 돌아와, 윤선도 안율(按律) 논의에 참가해서 권시로부터 물리침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그들에게도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부승지 정익이 상소하기를,
"세성이 아뢸 당시 신도 본원에 참여하여 있으면서 함께 들었으니, 곧바로 봉행하지 않은 죄 그와 다를바 없습니다. 신을 빨리 사패에 내려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해당자가 있고, 또 그를 주장한 자도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 후 굳이 사직하여 체직이 되었다.

 

4월 27일 신해

좌승지 오정위, 좌부승지 조윤석 등이 청대하여,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면서 두 번 세 번 사정을 아뢰었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장령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박세성을 잡아들여 추문하라는 비망기(備忘記) 내용이 너무 준엄하다 하여 모두 인피 중이고, 신의 형 익(榏)도 이미 세성과 벌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소를 올렸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동료들을 처치하겠습니까. 그리고 윤선도 죄상은 그를 북변 지대에다 내버린다면 그것은 조금도 아까울 게 없겠지만, 만약 그를 사율(死律)로 다룬다면 그는 성세(聖世)의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으니, 그 논의가 다시 일고 있는 이 시기에 더욱 감히 언지(言地)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교리 김만기, 부수찬 심세정 등이 상차하여 처치하기를,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 정언 권격, 지평 정수·이무, 장령 윤비경은 출사하도록 하고, 장령 정석은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지를 어제 이미 내렸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봉입(捧入)을 않고 있는가?"
하여,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삼계(三棨)에 대한 비답이 오늘에야 내려왔는데 오늘은 또 청대가 이제 겨우 끝났기 때문에, 지금 막 봉입하려는 참입니다. 그런데 역명지적(逆命之賊) 이 네 글자는 아무래도 누가 보거나 온당치 못한 점이 있으니 지우소서."
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부제학 유계(兪啓), 교리 심유행(沈儒行),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부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상차하기를,
"요즈음 윤선도가 흉측 참혹한 상소문을 올림으로 하여 조종에 일이 생기고 세상 인정이 흉흉하여 안정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불행히도 권시의 상소가 또 뜻 밖에 나온 바람에 기상이 더욱 아릅답지 못합니다. 어제 승지 박세성이 전지를 체류시키고 즉시 여쭙지 않았던 까닭으로 인해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는데, 온 조정이 깜짝 놀라 모두 세성을 탓하여 하는 말이 ‘왜 성상을 화나게 하여 이렇게 과중한 일이 있게 만들었을까.’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다면 세성이 죄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그러나 세성의 죄를 생각할 때 성상의 하교와 같은 그러한 정도는 아니고, 그의 실정으로 보아 용서할 수도 있는 처지인데, 대성인이면 중화 평정(中和平正)해야 할 것을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나라 열성조께서 대각이라면 모두 우대하여, 대각의 논쟁이 일고 있을 때면 아무리 중대한 일이 있어도 정원이 으레 곧바로 전지를 봉입하지 않았던 것이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근시(近侍)를 한 번 보내 구은(舊恩)의 신하에게 유지를 전하는 일이 사리와 체통에 손상을 주면 얼마나 크게 준다고 꼭 복역(覆逆)을 했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했던 뜻은 그냥 보고 들은 데에 습관이 되어 ‘권시가 현재 삼사로부터 논죄를 받고 있어 탄핵을 당한 것과 다를바 없으니, 우대하는 예를 논죄당한 사람에게 쓴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고 여기고, 그리하여 혹시 고사(故事)와 어긋난 점이 있지나 않을까 싶어 그랬던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그의 본심을 살펴보면 대체로 임금을 허물 없는 곳에 두고 싶었던 것이지만 머뭇거리고 더듬다가 체류가 된 것이지, 무슨 믿는 데가 있어 감히 임금 명령에 태만을 부렸겠습니까.
지금 간흉한 무리가 참적(讒賊)한 죄도 아직 마무리를 못했으면서 실수로 저지른 과오로 하여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부터 먼저 국문한다면, 성상께서는 비록 절대 딴 곳에다 화풀이를 하실 뜻이 아닐지라도, 준엄한 하교가 한 번 전파되면 세상 인정이 놀라 의혹할 것이며, 모르는 자들은 혹시 성상께서 세성에게 많은 화를 내는 이유가 바로 요즘 논의되고 있는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할 것이니, 그 어찌 성상의 덕화에 큰 상처를 주며 그 피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세성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어 중외로 하여금 성상의 뜻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꾸 시끄럽게 말라."
하였다.

 

정언 권격이, 윤선도를 법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지를 보았는데, 천위가 진동하고 내용이 너무 준엄하여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성명의 세상에 그러한 거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세성이 여쭙고 싶은 바가 있어 명령 전달을 늦게 한 죄는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어찌 임금을 업신여기고 명령을 거역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무엇을 믿고서’라는 하교, 또는 ‘명예를 낚기 위하여’라는 등의 하교는 그 모두가 실정 밖의 말씀들로서 그를 보고 듣는 이가 놀라 떨지 않은 자 없으니, 화평해야 할 대성인의 기상으로서는 흠결이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라건대 세 번 생각하시어 세성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윤선도 상소는,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선류를 해칠 음모를 꾸민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선왕까지 들먹이면서 제멋대로 패만한 짓을 하였으니, 그의 죄악이 어디 크게 불경(不敬)한 정도만 되겠습니까. 무릇 신자(臣子)라면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쳐, 그에게 꼭 방형(邦刑)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니, 인정으로는 당연한 일이요, 왕법(王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윤 권시가, 대각 논쟁이 바야흐로 일고 있는 이때 앞장서서 소를 올려 흉측한 사람을 두둔하고 나섰으니, 조정 공론을 아랑곳 않고 거리낀 바가 없는 그의 죄를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바라건대 권시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할 수 없다. 윤선도를 왜 꼭 죽이고야 말 것인가? 극변 안치(極邊安置)면 족하다. 아, 세성이 까닭없이 임금 명령을 봉행하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명령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 무슨 마음인가? 뿐만 아니라 대각 논쟁이 비록 오늘보다 10배나 더 날카롭더라도 감히 여쭈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대각의 논쟁을 의세하여 임금 명령이 중하다는 것을 모른 것에 불과한 일이니, 그게 임금 있음을 모른체 한게 하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한 것을 만약 호되게 응징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할 것이며, 그대들이 어떻게 신하 노릇을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권세는 아래로 가버리고 임금은 위에서 약해질 것이다. 세성의 죄는 법대로 논하자면 죽여도 애석할 게 없는 것이다. 국문 같은 것이야 죄가 세성만 못한 자에게도 때로는 하는데, 하물며 세성 같이 임금을 업신여긴 무도한 자이겠는가. 그대들은 세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명령 전달에 늑장을 부렸다고 하는데, 명령 전달에 늑장부린 것이 해석하자면 임금 명령을 업신여긴 것이다. 그것을 죄주려는 것인데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환수하라고 청하는 것이 뭔가? 장황한 말들을 해대지만 모두 윤리(倫理)만 손상할 뿐 그 간악한 태도는 끝내 숨길 수 없는 것이니, 진실로 서글픈 일이다."
하였다.

 

4월 28일 임자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영중추로 삼았다.

 

지평 정수(鄭脩)는 패초에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언 권격은 준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울러 인피하였으며, 헌납 김옥현(金玉鉉)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에 대하여 성상께서 관대한 처분으로 이미 안치(安置)를 명하였으니, 만약 그에게 또 사율(死律)을 가한다면 이는 성세에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박세성 사건으로 하여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 떨고 있어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권격(權格)에 대한 처치를 신이 홀로 담당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나, 대간이 있는 것 밖에 모른다는 준엄한 하교를 이미 받은 이상 신 역시 대간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태연하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여, 장령 오두인이 처치하면서, 정수·김옥현은 체임하고 권격은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29일 계축

이시술(李時術)을 부응교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경최(慶㝡)를 지평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이익(李翊)을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우승지로 각각 삼았다.

 

장령 오두인이 아뢰기를,
"요즘 박세성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환수하시라는 일 때문에 정원·옥당이 갖추 논열하였고 대각 신료들도 계속 쟁집하고 있으나, 하늘의 귀는 멀기만 하여 굳게 거절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벌을 내리면서 반드시 그 정상과 죄를 참작하여 경중을 맞게 해야만, 거조가 옳아 인심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성이 때맞추어 여쭙지 못하고 그리하여 유지 전달이 체류되게 한 사실은 죄가 되기는 되지마는, 그렇다고 임금을 업신여기고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그 어찌 성조의 지나친 거동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우레의 위엄을 조금 멈추시고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고, 도승지 김수항도 소를 올려 매우 간곡하게 세성을 신구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항이 또 우승지 남용익과 함께 본원에 유치되어 있던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여 품결(稟決)을 마치고 나서, 세성이 죄가 없음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 근밀(近密)의 곳을 오래 비워둘 수 없다 하여, 이번 정사(政事)에서 세성을 대신할 자를 차출하도록 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상소하기를,
"근자에 윤선도의 상소가 너무도 흉측 참혹하였는데 권시의 상소가 또 뒤를 이어 어지럽게 만들어 사류(士類)들이 마음 아파 하고 기상이 으스스한데, 이 모두가 전하께서 마음으로는 사정(邪正)의 구분을 아시면서도 처단의 방법을 제대로 못하여, 이미 선도를 죽을 죄라고 하면서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권시의 말이 질서가 없음을 알면서도 호되게 물리치려 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선도가 예를 논의한답시고 흉측한 꾀를 부려 방자하고 기탄이 없었으니, 사람 마음을 가진 자면 분히 여기지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신들이 안율(按律)의 청을 어떻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권시가 감히 그를 구제하기 위하여 편파적이고 꾸며대는 말을 마구 썼으니, 성상의 귀를 속이고 공론을 멸시한 그의 정상이야말로 더욱 놀랄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선류를 모함하고 국시(國是)를 전도시킨 무리들을 아끼면서, 도리어 잊지 못해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고 현사(賢邪)를 구별할 수 없게 하여, 음흉하고 간사한 참적(讒賊)의 무리들로 하여금 더욱 기탄할바 없게 만드는 것입니까? 선도를 다스리는 일을 미루었기 때문에 권시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인데, 그의 상소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 호되게 물리치지 않으면, 음사(陰邪)한 세력이 앞으로 점점 불어나 사림의 화가 꼭 없다는 보장을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이 걱정스럽고 통탄한 나머지 인피하는 글월에다 뜻을 대략 밝혔던 것인데, 어제 정원에 내리신 하교를 보니, 내용이 너무 준엄하여 놀라고 두렵고 질려서 감히 얼굴을 들고 대각에 있을 수가 결코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직을 전삭하도록 명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다만 계(啓)자를 찍어 체직시켰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를 올려, 누차 사관을 교외로 보내고 승지도 세 번씩이나 보내 들어오도록 타이르게 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이어 자기의 본직과 겸임하고 있던 성균좨주(成均祭酒)를 갈아줄 것을 청했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4월 30일 갑인

윤선도를함경도 삼수군(三水郡)에다 안치하였다. 당초에 선도의 죄목이 투저사예(投諸四裔)로 재가가 나, 의금부가 배소(配所)를 삼수로 정하고 이미 발송을 하였던 것인데, 이때 와서 상이 다시 극변 안치(極邊安置)를 명하였으므로 의금부가, 삼수가 바로 극변이라고 아뢰고, 이어 종전 배소에다 안치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양사(兩司)가 이날에야 비로소 안율(按律)의 논을 정지하였다.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의 방(榜)이 나왔는데 소두산(蘇斗山) 등 35명이 뽑혔고, 무과(武科)에서는 전 만호 유정준(劉廷俊) 등 42명을 뽑았다.

 

진사 이혜 등 1백 42명이 상소하여, 윤선도 죄상을 극구 말하면서 심지어 남곤(南袞)·심정(沈貞)·유자광(柳子光)에다 비하기까지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미 양사에다 일렀으니, 너희들은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사간 박세모 등이 상소하기를,
"권시의 상소 내용이 뒤틀린 점에 대하여는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할 것도 없으니, 선도를 보아 거취를 정하고 선도와 표리가 되어 하늘의 귀를 현혹시키고 공론을 막으려고 했던 그의 마음씀씀이는 다만 일개 형편없는 소인일 뿐입니다. 신들이 당연히 그를 탄핵했어야 했는데 지금 박세성 사건으로 하여 본원이 그 명령을 거두시라는 논을 하고 있어, 신들로서는 나와서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고, 물러나 꾸지람을 당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빨리 전면(鐫免)을 내리시어 공사가 다 편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지평 이무 또한 인피하고 아뢰기를,
"우윤 권시가 공론도 아랑곳없이 터놓고 헐뜯고 배척하고 하였는데, 그 말이 뒤틀리고 시비가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제 피사(避辭)에서 대강 의견을 개진하였던 바,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니 내용이 너무 준엄하여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빨리 신의 직을 전삭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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