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신
홍명하(洪命夏)를 수어사(守禦使)로, 송시열(宋時烈)을 병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형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오정일(吳挺一)을 도승지로,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이원정(李元禎)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심황(沈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 송씨(宋氏)가 졸하였다. 중전이 마침 중한 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는데 또 큰 상(喪)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예조가 상의 거애(擧哀) 절차에 대해 아뢰기를,
"인조 조에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046) 과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047) 의 서거 때 권정례(權停禮)로 거애하였으며 백관의 진위(進慰) 절차는 대내에서 편한 대로 예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효종조에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상례에도 이와 같이 했습니다. 이번의 거애 절목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전에 거행한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문에 ‘대체로 중한 복[重喪]을 입고 있을 때 가벼운 복[輕服]을 입어야 할 경우를 당하면 상복은 가벼운 복을 입고 곡하고, 곡을 마친 뒤에 다시 중한 복을 입는다. 중한 복을 벗게 됨에 또한 가벼운 복을 입는다.’ 하였습니다. 복제(服制)의 예법은 이러합니다마는 제왕의 복은 사대부의 복과는 다르고, 상께서 지금 참최(斬衰) 중이십니다. 이번의 복제는 변례(變禮)이니, 대신과 의논하여 품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수어사의 직을 간절히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일 을유
상이, 병조 판서 송시열이 지금 회덕(懷德)에 있으니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정원에 하교하여 글을 지어 하유하게 하였다.
예조가 부부인(府夫人)의 복제 문제를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오례의》에 거애하는 절차는 있지만 복제는 실려 있지 않은데, ‘기년복 이하 복은 제후는 그만 둔다.’는 뜻을 취할 것입니까? 이후로 어찌 선왕의 예가 아닌 것을 거울 삼겠습니까. 유사가 그 예를 상고함이 가합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제왕의 복제는 사서인(士庶人)과는 다르니, 예문에 있는 이른바 ‘중한 상례’니 ‘가벼운 상례’니 하는 것을 오늘날에 비견하여 의논하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
하고, 다른 대신들의 의논 역시 모두 이와 같았다. 상이 의논대로 할 것을 명하니, 정원이 복계(覆啓)하기를,
"《오례의》에는, 전하가 왕비의 부모를 위하여 거애하는 조항 아래에 ‘최복(衰服)을 3일 동안 입고 벗는다.’는 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종조에서 시행한 관례이니, 이번에도 《오례의》에 의거하여 거행함이 마땅할 듯하나 상께서 지금 참최 중이시니 가벼운 복을 입는 복제는 변례가 될 듯합니다. 그래서 예관이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한 것으로, 그 뜻이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들의 의견을 수합한 것을 보면 원래 《오례의》에는 복제가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해조의 계사가 상세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인 듯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명백하게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3일 병술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 중에 과연 ‘최복을 3일 동안 입고 벗는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조조에는 단지 거친 베로 만든 띠[麤布帶]를 띠고 대내에서 성복(成服)했으며, 효종조에도 이와 같이 했습니다. 베띠[布帶]의 제도는 예문에 실려 있지 않고, 3일 만에 복을 벗는다는 말은 있지만 성복하는 절목 역시 실려 있지 않습니다. 두 선왕조의 사실이 여러 가지를 참작한 결과에서 나온 것인 듯하나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 대신들의 헌의는 아마도 제후는 기년복 이하의 복은 입지 않는다는 의미를 취한 듯한데 정원의 계사가 지금 또 이러하니, 막중한 예제를 얕은 소견으로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두 선왕조에서 시행한 규례가 있으니 이를 참작해서 거행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상께서 지금 참최 중이어서 가벼운 복을 입는 제도를 경솔히 논의할 수 없을 듯하니,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 미진한 점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홍문관이, 기쁨과 노여움을 삼가서 원기(元氣)를 기르고, 사무를 줄여 조용히 조섭하며,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여 답답함을 펴도록 청하고, 이어 각 아문의 무역(貿易) 행위 및 여러 궁가가 둔전(屯田)을 설치한 폐단에 대해 말하면서 더욱 금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8월 4일 정해
진시(辰時)에 중전이 성복하였다.
예조가 상의 복제에 관한 문제를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돈녕 이경석이 아뢰기를,
"고례(古禮)에는 기년 이하의 복은 입지 않았는데 《오례의》에 ‘3일 만에 복을 벗는다.’는 글이 있으니, 이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왕비의 부모상은 외조부모의 상과 같아 지존(至尊)이라고 해서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으니, 중한 복을 입고 있는 중이라고 해서 가벼운 복을 완전히 폐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선왕조에 거친 베로 만든 띠를 맨 복제는 후한 쪽을 따른다는 뜻에도 어그러지지 않고 예의 본의도 어기지 않으면서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실린 ‘왕비의 부모를 위하여 최복을 3일간 입고 벗는다.’는 것과 앞서의 복제인 ‘거친 베로 만든 띠를 띠고 들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의 경우를 말한 것으로 지금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신이 일찍이 들으니, 임금이 상중에 있을 때는 감히 사사로운 상의 복을 입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가벼이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예를 아는 사람이 아니니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옳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원두표(元斗杓)와 정유성(鄭維城)의 의견은 모두 정태화와 같았다. 예조가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가지고 상의 결단을 청하니, 상이 태화의 의견을 따랐다.
행 대사헌 송준길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말하는 것마다 채용해 주시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시니 어찌 나아가서는 안 되고 물러나 있어야 하는 의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오래 된 병이 전신을 휘감아 여름 이후로 한결같이 기운이 없습니다. 풍헌(風憲)의 장관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 둘 수 없으니 속히 체직을 허락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세 차례 사직하니, 불윤 비답하였다.
8월 5일 무자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성으로, 윤지미(尹趾美)를 정언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장령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삼았으며, 사복시 첨정 유정(柳頲)을 특별히 본시의 정으로 제수했다. 유정이 첨정이 되어 직무를 잘 보았는데, 상이 언젠가 말들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이를 가상히 여겨 이 명이 있었다.
유학(幼學) 윤속(尹涑)이 전지(傳旨)에 따라 소장을 올렸는데, 8개 조목 중 한 조목에 이르기를 ‘공허하다는 탄식이 불행하게도 있습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유신(儒臣)이 잇달아 멀리 숨어 버리니 가뭄과 황충의 재해가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했는데, 이때 송시열·송준길이 모두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당시에 아첨하는 말들 중에 윤속의 말과 같은 것이 많았는데도 상하가 덤덤히 생각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한쪽으로 깊이 빠져버린 인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산릉(山陵)의 석물이 기울어지고 능의 봉분에도 자주 틈이 생기니 의논하는 자들이 다시 배설(排設)하자고도 하고, 그대로 수리하자고도 하였다. 예조 낭관 이유명(李惟明)을 보내 송시열과 송준길의 의견을 수합해 오도록 하니, 시열이 의논드리기를,
"어느 정도 기울어지고 허물어졌는지를 보아야 하겠지만, 결국 고쳐야 한다면 달구질을 추가로 하기가 미안하다 하더라도 간단히 수리하였다가 장구히 안전하게 하지 못하여 결국에 가서 크게 미안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또 석병(石屛)의 제도는 높아서 튼튼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에는 허물어지고 맙니다. 신이 듣건대 영릉(英陵)에서는 이 제도를 쓰지 않고 흙으로 된 봉분만 쌓았다고 하는데, 어찌 후대의 임금이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석병을 철거하고 모든 형식을 한결같이 영릉의 법제대로 한다면 능침이 영구히 튼튼할 뿐만 아니라 선왕의 자애롭고 검소한 덕을 밝힐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직 성명께서 살펴 결단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준길은 의논드리기를,
"우선 기울어진 곳만 대략 수리하여 비뚤어진 곳을 바르게 하고 허물어진 틈을 메운 다음 다시 후일에 형세가 어떠한가를 살펴 천천히 크게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의논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다시 대신들에게 의견을 수합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수리하고 개축하는 조치는 3년 뒤를 기다려야 하고, 이미 설치한 의물(儀物)을 지금 와서 가벼이 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고 하니, 상이 수리와 개축 여부는 이번 가을 산릉을 배알한 뒤에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옥체가 아직 완전히 쾌차하지 않아 뜸을 뜨려고 하시면서 갑자기 능침을 참배하겠다는 하교를 내리시어 해조에서 이미 날짜까지 잡았는데, 혹시라도 옥후가 더치지나 않을까 하여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례(拜禮)만 할 뿐인데 어찌 병이 더치기야 하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근래 외간에서 전하는 말들을 들으니, 정자각(丁字閣) 기와의 붉은 빛이 지난번 폭우를 맞은 뒤로 전과 달라졌다고 하니, 혹 기와를 얹을 때 진흙이 묻어서 그렇지 실제로 기와를 잘못 구워서 적색이 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강(尹絳)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판이 가서 살펴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강이 드디어 참판 채유후(蔡𥙿後)와 함께 가서 살펴보았다. 태화가 옥당의 차자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이 차자를 비국에 계하하셨는데 뭇 의논이 모두들 변통하기 어렵겠다고 하니, 오늘 다시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자기의 소견을 진술하게 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沈之源) 및 원두표(元斗杓)가 모두 병조의 군포를 감하고 훈련 도감의 둔전을 혁파하는 일은 어렵다고 하니, 김만기(金萬基)가 이에 맞서 쟁론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태화가 전에 혁파한 호위청(扈衛廳) 군관의 예에 따라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함을 따라 다시 의논하여 조처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홍명하가 탑전에서 다시 수어사(守禦使)의 직을 사양하고, 이완 역시 한성 판윤(漢城判尹)의 직임을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윤강·채유후 등이 산릉으로부터 돌아와 서계하였는데, 요즈음 잇달아 폭우가 내려 진흙이 모두 씻겨 내려가 기와에 별로 황색이 없었다고 하였다.
승지들에게 정원에 있는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니, 해당 방(房)이 각자 차례에 따라 아뢰었다.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기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으므로 사도시의 멥쌀 방납이 민간에 큰 폐단이 된다는 것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어공(御供)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배수(倍數)를 봉납(捧納)했는데 날마다 값이 뛰어 많은 경우에는 10배에 이르기도 하고 적은 경우에도 6, 7 배를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근이 극심해서 쌀이 황금처럼 귀한 때를 당하여 결단코 그릇된 관습을 되풀이하여 백성들의 곤궁함을 가중시킬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각 고을로 하여금 직접 쌀을 가지고 와서 본시와 수량을 대조, 납부토록 해서 방납의 폐단을 영구히 제거함으로써 기내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혜택이 돌아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세히 분부하여 영구한 규정으로 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하찮은 일이지만 민폐에 관계되므로 감히 아룁니다. 신이 광주(廣州)에 있을 때 보니, 내농포(內農圃)의 하인들이 강외(江外) 지방을 떼 지어 돌아다니면서 공상(供上)이라고 핑계대고 밭에 있는 채소를 함부로 탈취하며, 심지어는 추수 후에 저장해 둔 무우를 캐가기까지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뿐 아니라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아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청컨대 담당 내관을 추고하고 농포의 하인들을 적발해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헌부가, 호남 경시관(湖南京試官) 경최(慶㝡)가 선비들을 시험 보이고 합격자를 발표할 때 피봉(皮封)을 다른 답안지에 잘못 붙여 잘못 처리하였음을 면치 못하였다는 이유로 참시관(參試官)과 차비관(差備官)을 아울러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 의주(義州)·선천(宣川) 등지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했다. 용강(龍岡)에 내린 우박은 모두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였는데 형체가 아주 분명하였으며, 눈이 온 것처럼 많이 쌓여 얼마 동안 녹지 않았고, 우박이 내린 곳에는 초목이 모두 말라 죽어 마치 된서리가 내린 것 같았다. 도신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8월 13일 병신
우승지 남용익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용익이 일찍이 어전에서 사도시 멥쌀을 방납하는 폐단을 진달하고, 윤집 역시 농포 하인들이 멋대로 약탈하는 행위를 말하여 모두 기꺼이 윤허한다는 허락을 얻었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용익 등이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한 것이다.
전라도 전주(全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려 목화 열매가 모두 떨어졌고, 익어가는 올벼도 피해를 입었다. 도내 50여 고을이 한결같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우도(右道) 연해 지방이 가장 심했다. 도신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8월 14일 정유
좌의정 심지원이 여덟 번째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8월 15일 무술
헌부가 아뢰기를,
"산릉의 역사(役事)를 끝마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석물과 봉분이 갑자기 허물어져 역사를 감독했던 여러 신하들이 이미 이 때문에 죄를 받았으니 당초에 상을 내린 것은 모두 헛되이 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국론이 더욱 격렬해지고 조정 논의가 펴지지를 못합니다. 산릉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준 가자를 모두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7일 경자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사인으로, 이광직(李光稷)을 검열로,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참판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우부승지 윤집(尹鏶)이 패(牌)를 보내 불렀는데도 오지 않은 것으로 자책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이 분부에 따라 차자를 올렸는데, 각 아문에서 재물을 거두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된 폐단을 빠짐없이 진달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8월 19일 임인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송도(松都) 유생 양우석(梁禹錫)이 자기 형 양몽석(梁夢錫)이 본부에 수금되자 징을 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형조가 회계하기를,
"송도 유생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서로 헐뜯었으니 송사를 맡은 관원은 분명히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고 조정에 아뢰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유수(留守) 남노성(南老星)은 경솔히 고문하였으니 일 처리가 매우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조사하여 분별할 일을 그대로 본부에 맡길 수 없으니, 경기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송도 유생 김영(金泳)과 임부양(林敷陽) 등이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서로 헐뜯은 사건이 있었다. 그 뒤 본부의 문묘(文廟) 대문에 화재가 발생하자 김영은 그것이 임부양의 짓이라고 지목하고 소장을 올려 다투었는데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 뒤 서원의 위판(位版)을 훔쳐 훼손한 사건이 발생하자 김영이 또 임부양의 무리가 한 짓이라고 지목하여 서로 헐뜯어 드디어는 큰 옥사로 발전했다. 그런데 남노성은 김영의 무리가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부양을 무함한다고 판단하고 경솔히 고문을 가하니, 당시 의논이 노성을 허물하기도 하였다.
개성부 유수 남노성이 치계하여 사직장을 올리면서 본부의 악습을 그득히 진술하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8월 22일 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능을 참배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택일하게 하라."
하였다. 당초 영릉(寧陵)의 석물에 허물어진 곳이 있었는데, 여러 신하가 가서 살펴보았으나 모두 불명확하므로 상이 직접 살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뜸을 뜨느라고 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와서 이러한 명이 있었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승지 이은상(李殷相)·남용익(南龍翼)·유계(兪棨) 등을 소견하며 정원에 놓아 둔 문서를 판결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당초 권관(權管)의 병부(兵符)를 만들어 보내 달라고 청했다가 곧바로 권관은 본디 병부가 없는데 만들어 보내달라고 잘못 청하였다는 이유로 치계하여 대죄하였습니다. 그런데 병부를 넣어 두는 가죽 주머니를 보니 권관 병부의 왼편쪽이 모두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본디 병부가 없었다면 어찌 왼편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평안도에는 권관이 가장 많으니 구례(舊例)에 병부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물은 뒤에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후 관서에는 본디 병부가 없다고 치계하자 구례대로 만들지 말라고 명하였다. 용익이 또 한성부의 문서를 올리면서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노복이 금송(禁松)을 벤 죄를 범했는데 성상께서는 전혀 거리끼시지 않고 그 주인인 부마를 파직하시니 중외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복이 이미 여러 차례의 형신을 받았으므로 지금 또 형신한다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초목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되면 아마도 법률을 제정한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판하(判下)하였으니 형신함이 옳다."
하였다.
충홍 감사(忠洪監司) 오정원(吳挺垣)이 치계하여 훈련 도감·충훈부·내수사 노비의 신공(身貢)과 어영청(御營廳) 보미(保米) 및 기타 각사 노비의 신공을 모두 쌀로 바꾸어 도내에 저장해 두어 명년 봄에 진휼하는 밑천으로 삼도록 하기를 청하고, 또 노직(老職)의 공명첩(空名帖)을 더 주어 양곡 모으는 길을 넓힐 것과 노비 추쇄하는 일을 멈추어 소요하는 폐단을 없앨 것을 청하니, 비국에서 거의 대부분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회계하였다.
8월 23일 병오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금년의 흉작이 이처럼 극심하니 내년에 진구할 방도를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서(兩西) 지방에는 방출한 환곡 외에 창고에 보관된 곡식이 양호(兩湖) 지방보다는 제법 많으니 관례를 깨고 서울로 가져다가 선혜청에 주어 양호 지방의 금년도 상납 수량에 충당하게 하소서. 그리고 양호 지방에서 상납하지 않고 그대로 유치해 둔 쌀로 명년 봄에 진구하는 밑천을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이 이어 관서 지방의 쌀과 좁쌀 2만 석과 겉곡식 1만 석, 해서 지방의 쌀과 좁쌀 2만 석과 겉곡식 5천 석을 배로 서울에 운반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듬해인 신축년에 도성 백성들이 이것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었고, 양호 역시 그 혜택을 입어 굶어 죽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8월 24일 정미
충홍 감사 오정원이 ‘도사 김왕(金迋)은 본도의 동당 감시(東堂監試)를 맡았을 때 과장(科場)을 엄숙하게 정리하지 못하여 거자들이 공공연히 떠들어 대기를 ‘누구는 장원이 되어야 하고, 누구는 몇째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투며 선동하여 시험장을 어지럽혔다. 그런데도 김왕은 위축되어 체면을 떨어뜨렸으므로 원근의 비웃음만 샀다.’고 치계하니, 파출하였다.
병조 판서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심지원이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산릉의 석물이 무너져 역사를 감독한 여러 신하들이 각각 경중에 따라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7일 경술
상이 영릉에 거둥하였다. 오경(五更)에 어가가 출발하여 진시(辰時)에 능의 막차(幕次)에 도착하였다. 진시말에 상이 최복(衰服)을 갖춘 뒤 작은 가마를 타고 막차를 나와 홍살문 밖으로 나가 문 안에서 능에 배례하였다. 곡하면서 걸어 능 위로 올라가 돌난간 밑에 이르자 손으로 돌난간을 부여잡고 돌기둥에 머리를 조아리며 통곡하니, 주위 사람들까지 슬픔에 휩싸였다. 도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앞으로 나아가 지나치게 슬퍼하지 마시라고 청하였으나, 상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우승지 유계가 나아가 대신과 예관을 불러 속히 봉심을 거행하도록 청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가주서(假注書) 이숙달(李叔達)이 여러 신하가 차례대로 서 있는 곳에 가서 대신 및 예관들을 부르니, 영의정 정태화, 예조 판서 윤강, 참판 김수항, 참의 강백년이 나왔다. 상이 능 위를 둘러 보다가 진방(辰方)의 상석(裳石)에 틈이 벌어진 것을 보고 이르기를,
"여기가 이른바 틈이 벌어진 곳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여기가 그곳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음새를 따라 틈이 생겼고, 또 바르지도 못한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죽석(竹石)이 짧아 이었다는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묘지(卯地)의 죽석의 틈이 가장 크게 벌어졌는데 과연 돌조각으로 채우고 회를 발랐습니다. 상석의 틈은 실로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만, 땅이 패인 곳에 있으니 아마도 해동하면서 땅이 꺼져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겨울철에 흙을 쌓는 공사는 이런 걱정이 없을 수 없다. 돌의 빛깔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야 큰 결함이 되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죽석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고, 가석(駕石)과 병풍석에 틈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으니 메울 수 있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상석은 그대로 보수할 수 있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현궁(玄宮)을 내린 뒤에 설치한 돌이니 그대로 보수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으로는 능을 다시 쌓는 일은 사체가 중대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이번의 봉심은 사체가 지극히 중합니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는 도성에 머물러 있고,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과 정유성(鄭維城)은 다른 능의 제관으로 차견되었으니, 육경 및 삼사를 명소(命召)하여 널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서 박신규(朴信圭)가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 형조 판서 조형(趙珩),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지평 곽제화(郭齊華), 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을 불러오니, 상이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봄에 제관으로 여기에 왔다가 목격하고서 경연에서 진달했었습니다. 지금 또 봉심해보니 과연 온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예관으로 장릉(長陵)을 봉심했을 적에도 약간 틈이 난 곳은 있었고, 지난번 기유년048) 에도 목릉(穆陵)의 병풍석이 기울어져 개축한 규례까지 있습니다. 지금 이 상석(裳石)과 죽석(竹石) 및 병풍석에 있는 틈도 반드시 능을 고쳐 쌓을 것은 없으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고, 조형은 아뢰기를,
"지금 본 바가 과연 온당치 않습니다. 신이 전에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여러 능을 봉심할 때도 간혹 석물에 틈이 벌어진 곳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능을 고쳐 쌓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윤강·이정영 역시 고쳐 쌓는 일이 어렵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능을 고쳐 쌓는 일은 실로 중난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오지(午地)의 죽석은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곽제화는 아뢰기를,
"석회로 바른 틈을 보니 당초에 틈이 있었던 것 같고 지금 와서 생긴 틈은 아닌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능을 고쳐 쌓지 않기로 지금 품의하여 상전에서 결정했으니 진지(辰地)의 상석과 묘지(卯地)의 죽석을 수리하는 외에 기타 수리할 곳은 도감에서 아뢰어 조처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을 고쳐 쌓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였다."
하고, 이어 윤강에게 묻기를,
"이른바 통망처(通望處)란 어느 방향이며, 흙을 보충한 곳이란 어디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산세가 앞이 탁 트였으므로 통망이라고 하나 건너편 산맥이 보이지는 않고, 동쪽편 지세가 다소 약한 듯하므로 흙을 보충했습니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상이 능에서 내려와 정자각 동편에 이르러 기와가 물에 씻긴 곳이 어디냐고 묻자, 오정일이 물에 씻긴 뒤에는 황색이 없어진 정상을 상세히 말하니, 상이 그러냐고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비가 온 뒤에는 사초(莎草)가 으레 손상을 입을 우려가 있으니 예판과 도승지는 뒤에 남아서 자세히 봉심함이 가하다."
하였다. 이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예가 끝나자 도로 소차로 돌아갔다. 조금 지나 또 홍살문 안에 나아가 능을 하직하는 예를 행하고 작은 가마를 타고 막차로 돌아왔다. 경기 감사 유철에게는 표피(豹皮) 1령(令)을, 양주 목사(楊州牧使) 권대운(權大運)에게는 궁전(弓箭) 1부(部)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오시에 어가를 출발시켜, 주정소(晝停所)에 들렀다가 신시에 환궁하였다.
사신이 상고하건대, 영릉 석물에 틈이 생긴 것은 실로 당초 책임 맡은 신하가 정성을 다 쏟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 죄가 어찌 적겠는가. 그런데 조정 대소 신하들이 덮어버리기만 일삼았으며 주상이 친히 봉심하는 날에도 오래 된 여러 능의 석물에 작은 틈이 있는 것을 거론하여 혼란시킬 계책으로 삼았으니, 또한 심하다. 만약 익수(翼秀)의 계축소(癸丑疏)로 성상을 깨우치지 않았다면 만세토록 선왕의 의관을 둔 곳이 끝내 편안하지 못했을 것이니, 통탄스럽다.
8월 28일 신해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등이 아뢰기를,
"충홍우도(忠洪右道)의 감시(監試)를 베풀었을 때 본도의 도사 김왕은 자신이 시관이면서 과장을 열기도 전에 수령들에게 거자(擧子)들 중 문명(文名)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물었고, 과장을 열고 차례를 매길 때에는 차비관(差備官)을 시켜 글의 머리 부분을 베껴 오도록 해서 취사(取捨)했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거리낌없이 함부로 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김왕과 차비관을 잡아다 죄를 주고, 함께 참여했던 시관들은 모두 파직시키며, 그 도의 방목은 없애버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송도 유수(松都留守) 남노성(南老星)이 처사를 잘못하고서도 쓸데없는 말로 치계하여 공론을 무시한 죄를 논박하려 하였는데 동료들이 미적거린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상피가 되기 때문에 감히 가부를 논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정언 윤비경(尹飛卿)이 ‘전에 사실을 조사한 뒤에 논열(論列)하겠다는 뜻을 차자 내에 언급했는데, 즉시 논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장령 정박(鄭樸), 지평 홍주삼(洪柱三)은 ‘간원이 이미 차자로 송도 사건을 진달했으니 남노성은 스스로 조처할 도리가 없을 수 없고, 들은 바가 마침 또 달라 대략 머뭇거리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 동료가 갑자기 경시당하였다고 하면서 끝내 소란을 일으켰으니, 신들도 편안히 있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박세모(朴世模) 역시 인피하였는데, 의견이 정박과 같았다. 교리 김만기(金萬基)와 이민서(李敏叙)가 처치하여, 정박·홍주삼·박세모는 체직시키고, 곽제화·윤지미·윤비경은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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