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3권, 현종 1년 1660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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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신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병조 참지로, 오시수(吳始壽)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정언 최관(崔寬)이 고묘(告廟) 건에 대하여 아뢰고, 또 아뢰기를,
"외임(外任)으로서 하던 일을 끝마치지 못했으면 계속 유임하는 규례가 혹간 있기는 하나, 새로 대간을 제수하고서 본도의 치계로 인하여 다시 외임을 계속하게 한 경우는 전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정언 이동로(李東老)가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서 기간도 이미 만기가 되었고 또 하던 일도 다 마쳤는데, 비록 일시적 사세로 인하여 다소 완급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국가 체통이나 규례로 보아 경중의 구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바라건대 정언 이동로를 도사로 계속 유임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열 번째 정사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상차하여, 고묘(告廟)의 예를 서둘러 행할 것을 청하고, 또 가뭄을 걱정하는 뜻을 말하면서 성탕(成湯)의 육책(六責)으로 자신을 꾸짖을 것을 청했으며, 또 사치를 금하여 청백한 풍속을 조성하고, 기강을 확립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현준(賢俊)을 초빙하여 천위(天位)를 함께 다스리고, 간쟁을 받아들여 언로를 열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윤비경(尹飛卿)·심재(沈梓) 등을 처치하면서 처치 결과가 정당성을 잃었음을 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계한 말은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할 것이다."
하고, 고묘 건은 따르지 않았으며, 채유후는 그 일로 소를 올려 자신을 탄핵하고 이어 체직되었다.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기를,
"본도가 겨울부터 진구(賑救)를 시작하여 5월까지는 가까스로 사망자는 없었으나, 지금은 본도의 진곡(賑穀)이 동나 사망자가 꽤 많게 되었는데도 영남으로부터 곡식이 아직 도착되지 않고 있으니, 만약 10여 일만 더 지나면 사망자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하여,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비국에 묻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영남 곡식 1천 섬을 영남에서 영동(嶺東)까지 운반하고, 영동에서는 안변(安邊)까지 운반할 것을 지난 3월에 복계(覆啓)하도록 분부한 바 있는데, 그 후 경상 감사 보고에 의하여 쌀 1천 섬 중 5백 섬은 강원도에서 배를 보내 실어가고 5백 섬은 본도에서 강원으로 운반하되 한 시각도 지체 말라는 뜻으로 경상 감사에게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뒤 이어 강원 감사 박장원(朴長遠)의 보고를 들으니, 북으로 가는 쌀은 이미 발송하였다는 것인데 아마 바닷길이 험하고 멀어 배가 가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지연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지금 박장원의 보고를 보면 지금쯤은 이미 안변에 도착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알겠다고 답하였다.

 

6월 3일 병술

영의정 정태화가 열두 번째 사직서를 올렸는데, 상이 다시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조 판서 홍명하가 강원도 시장(柴場)의 떼어받는 폐단에 관하여 탑전에서 아뢴바 있었고, 영상 정태화도 멀리 있는 도의 시장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강원도 시장의 여러 궁가(宮家) 또는 각 아문이 떼어받은 곳을 모두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감사 박장원이, 춘천(春川)·홍천(洪川)·강릉(江陵) 등 지역에 공주(公主)의 집 시장들이 있는데 강릉의 것은 이제 겨우 혁파하였다고 아뢰자, 호조가 점계(粘啓)하여, 춘천·홍천 두 읍의 시장도 강릉과 똑같이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탑전에서 지정하기는 다만 강릉 1개 읍을 두고 한 말이었지 강원도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 회계는 그 근본 취지를 모르고 한 말이다. 강릉 이외에는 혁파하지 말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거행조(擧行條) 건을 살펴보면 홍명하가 아뢴 내용도, 강원도 시장을 통틀어 혁파해야 당연하다는 것이었고, 영상 역시 멀리 있는 도의 시장은 당연히 우선적으로 혁파해야 한다고 아뢰었지 단지 강릉 1개 읍만 거론한 일은 별로 없으며, 상께서도 강원도 시장의 여러 궁가 또는 각 아문이 떼어받은 곳을 본도에서 명백히 조사하여 아뢴 후 그 모두를 혁파하도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기에, 이미 그렇게 본도에다 공문으로 알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소식을 들은 중외가 모두 감격하여 기뻐하고 있는데, 지금 또 강릉 이외에는 혁파하지 말라는 하교를 하신다면, 이는 당초 제신들이 건백(建白)한 뜻과는 다름이 있을 뿐 아니라 혜택이 한 도내에 고루 베풀어지지 못할 염려도 있어, 도리어 백성들의 실망을 초래할 것이므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연신(筵臣)이 아뢸 때 강원도 강릉이라는 말이 있었고 나도 강릉이라고 말하였었는데, 강릉이라는 두 글자가 거행 문서 속에는 탈락이 되고 없으니, 사실 내 본의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어 그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소 할 말이 있으나 너무 피곤하니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당시 여러 공주 집에서 시장을 떼어받은 데 대한 폐단이 한도 끝도 없었고, 제신들이 전후 그 사실을 아뢰기도 하여 상 역시 혁파하고는 싶었으나, 여러 공주들이 자전(慈殿)에게 눈물로 호소하였기 때문에 상으로서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함경 감사가, 도배자(徒配者)로서 탈옥한 죄인 조영록(趙永祿)을 체포하여 5차에 걸쳐 형을 가하고 불한년 충군(不限年充軍)으로 처리할 것을 치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형조가 복주(覆奏)하니, 상이, 도배자로서 도망간 사람을 경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 하여 경옥(京獄)으로 잡아들여 법에 비추어 처단하도록 명하고, 또 해조가 놓아두고 살피지 않았다 하여 당상과 낭천을 모두 추고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정원에 나와 청대하였는데, 상이 몸이 좀 불편하여,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법전을 상고하였더니 배소에서 도망간 자는 본죄에다 1등급을 가중하고 곤장 1백에 배소로 다시 보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인데, 지금 이 죄인 조영록은 처음에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된 자여서 감사자(減死者)가 도망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무작정 일죄(一罪)로 논해서는 불가한 일이고, 또 5차나 엄형을 가했으면 그 죄에 대한 응징으로는 충분합니다. 불한년 충군으로 처리하는 것이 본죄에다 1등급 가중한다는 법과 합치하기 때문에, 장계대로 시행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복계한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과조(科條)가 있어 마음대로 이리저리 해서는 안 될 일이기에 구구한 소회를 이렇게 와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장1백과 불한년 변원기신 충군(不限年邊遠己身充軍)으로 처단하라."
하였다.

 

6월 4일 정해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등이 고묘(告廟) 건을 연계하면서 아뢰기를,
"신들이 엎드려,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았을 때 너무나 개탄스러웠습니다. 여러 궁가의 입안(立案)이 오늘날 국가의 큰 폐단이 되고 있고, 먼 도에까지 시장을 광범위하게 점유하는 일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조사하여 아뢰라는 명령이 즉위 초기에 나와, 깊은 산속 가난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희망을 걸었는데, 도신(道臣)이 조사하여 아뢴 후 그같은 뜻 밖의 하교가 있을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경연 내에서 건의했던 것과 그에 대한 자상하고도 분명한 성상의 하교가 이미 거행할 기사(記事) 내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정 신료들이 보고 알고 있는 것이 그렇고 원근에서도 그렇게들 듣고 있는데, 지금 와서 처음에 명령했던 것을 바꾼다면 백성에게 그보다 더한 실신이 없을 것입니다. 궁가가 잃은 것이 얼마인지, 관계된 것은 얼마인지 신들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국가가 백성을 병들게 하고 신의를 잃게 되는 손해에다 비교한다면 그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 바라건대 강원도가 조사하여 아뢴 것 중의 각처 시장 건은 그를 모두 혁파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상 정태화가 상소하여 병이 중함을 아뢰고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6월 5일 무자

전남 감사가 장계하기를,
"도내의 각 영장(營將)이 병부(兵符)가 있기는 하나 각관의 병부 왼편 짝이 감영과 병영 두 영에만 있고 영장은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가령 급한 일을 당하여 조발할 일이 있더라도 열읍을 호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각 영장의 병부 왼편 짝을 정원으로 하여금 서둘러 만들어서 삼도(三道)로 나누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6일 기축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집의로, 목겸선(睦兼善)을 사인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경상 병사 민응건(閔應鶱)을 체임하였다. 처음에, 응건의 아버지 민함(閔涵)이 조씨(趙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조씨에게는 다른 형제 자매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딸을 따라와 민함의 집에서 의지하고 있다가 딸이 죽고 민함이 후처를 얻자 조씨 어머니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그 후처와 함께 살았는데, 그 후처가 처음으로 딸 하나를 낳아 조씨 어머니는 그 딸을 자기가 기르면서 자기가 가진 재산을 다 그 딸에게 주었다. 그 후 민함은 아들 셋을 두어 이름이 유건(有鶱)·중건(重鶱) 그리고 응건이었는데, 유건은 힘이 장사였고 중건도 힘이 세었으나 성격이 모두 고약하고 사나웠다. 유건이 자라자 조씨 어머니가 양녀(養女)에게 주었던 재산 절반을 도로 가져다가 유건에게 주었는데, 유건의 누이는 그 때문에 유건을 원망하게 되었고 중건은 중건대로 재산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유건을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누이 아들 이무선(李茂先)과 함께 유건의 생일을 기하여 술을 질탕하게 마신 후 취기를 이용하여 유건의 집 종과 마을에 사는 포수(砲手) 몇 명을 동원, 밤에 명화적(明和賊)을 가장하고 유건 부처(夫妻)를 죽인 후 칼로 음경(陰莖)을 잘랐다. 그때 유건의 두 아들은 절에서 독서하고 있었는데, 중건이 자기 무리 두 명을 다시 그 절로 보내 그 아들에게 부음을 전하는 것처럼 하려 하였다. 그때 허의(許儀)라는 자가 절 가까이서 살고 있다가, 그 집 종이 오지 않고 포수가 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절의 중 및 많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시켜 그 자식들을 호위하여 보냈기 때문에 중건이 그 자식들은 죽이지 못했다.
유건이 죽던 날 도둑들이 그 집 재산은 가져가지 않고 문기(文記)를 넣어둔 상자만을 가져갔기 때문에, 이웃 마을에서는 그것이 모두 중건이 한 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유건의 아들들이 감히 고발을 못하였다. 응건은 그때 북도(北道)의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는데, 그 후 중건이 죽고 응건이 경상 병사로 있을 때 무선이 종을 찾기 위하여 응건의 병영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찾는 종이 바로 유건을 죽일 때 함께 거들었던 종이어서, 그 종은 자기를 잡으로 오자 응건에게 중건·무선의 사주를 받고 유건을 죽였던 사실을 상세하게 이실 직고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응건이 즉시 무선을 체포하여 함양(咸陽)의 옥에다 가두고는 가변(家變)을 당한 몸으로 재직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그 사실을 장계로 알려왔기 때문에 병조가 아뢰어 응건을 체직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무선은 매를 참고 승복하지 않은 채 죽어갔다.
세상이 내려올수록 말세여서 백성들 풍기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재물을 다투다가 상대를 죽이는 이변이 동기간 사이에서까지 일어나니 이는 참으로 사대부 집에서 일찍이 없었던 이변이었는데, 중건이 방안에서 제명에 죽고 무선도 곤장 아래서 죽어 끝내 그들을 법에 의해 처단하지 못했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잘못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하여 소를 올리고 체직을 빌었다. 그때 영천 군수(榮川郡守) 홍주세(洪柱世)가 오랜 기간 공론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었는데, 명하가 그를 청로(淸路)로 틔워 주려고 누차 대망(臺望)에 추천하였는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물의가 일었으므로, 명하 자신이 불안을 느끼고 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던 것이다. 참판 이응시(李應蓍), 참의 이경휘(李慶徽)도 소를 올리고 직을 사하였다.

 

6월 8일 신묘

영의정 정태화가 출사하였다. 태화가 십여 차례에 걸쳐 정사(呈辭)하고 여러 차례 상소도 하여 체직을 빌었으나, 상이 허락치 않고 세번이나 승지를 보내 정중하고 따뜻하게 타일렀는데, 이제 와서 출사한 것이다.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전후 5차에 걸쳐 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으나, 상이 허락치 않았다.

 

6월 9일 임진

상의 왼발 엄지발가락과 네 번째 발가락 사이에 가려움증으로 부스럼이 생겨 약방 제조가 의관들을 거느리고 입진하였는데, 상이 침을 맞았다.

 

장생전(長生殿)이, 본전에 저장된 황장판(黃膓板)이 거의 동났다 하여 경차관을 강원도로 보내 겨울이 오기 전에 베어서 운반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황장나무를 훔쳐 베어가는 폐단이 근래에 더욱 심하여 국용(國用)에 맞을 만한 재목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는 지방관들이 조심성있게 보살피지 않은 소치라 하여, 경차관이 두루 돌면서 살펴보아 그들 범법의 경중을 조사한 후 아뢰어 죄를 논하도록 경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0일 계사

오준(吳竣)을 좌참찬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실록 겸춘추(實錄兼春秋)로, 성태구(成台耉)를 사간으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약방이 입진했을 때 실록 총재관(實錄總裁官)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실록을 찬수하는 일은 대제학이 전담해야 하는데,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이 비국 제조를 겸임하고 있어 사사(史事)에 방해가 되니, 그로 하여금 비국의 자리에는 참석하지 말고 찬수의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의 세 당상이 서로 잇따라 인입(引入)하고 있는데 무슨 일인가?"
하니, 승지 김수항이 아뢰기를,
"홍주세를 청망에 추천했던 까닭으로 하여 잘못이라는 물의가 일고 있으므로 그 때문에 인입한 것입니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옛 말에, 왕부(王符)040)  는 외가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명인이 되었다고 하며 심지어 개가한 사람의 자손들도 공경이 된 이가 매우 많은데, 요즘 와서는 문벌 지벌을 내세워 서로 높다고 하기 때문에 공론이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졸 중에서 선발하여 경상(卿相)을 삼기도 하는데 지금이라고 왜 그리 못할까."
하였다. 주세는 풍령군(豐嶺君) 홍보(洪靌)의 아들로서 문장력은 남달랐으나 자기 누이가 음행(淫行)이 있었기 때문에 공론으로부터 물리침을 당했던 것인데, 홍명하가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여러 번 청선에 추천하였으므로 공론이 떠들썩하게 명하를 나무랐고, 명하는 그리하여 인입을 하였으며, 이응시·이경휘는 다 좌이(佐貳)로서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서로 이어 소를 올렸기 때문에, 상이 이상히 여겨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석이 아뢴, 왕부는 외가도 없었다느니, 개가한 사람의 자손도 공경이 된다느니 한 말들은 비유치고는 맞지 않은 비유라고 하겠다. 주세가, 항상 송시열 등이 유자의 이름을 빌어 조권(朝權)을 멋대로 한다고 미워하여 상소문을 썼는데, 미처 올리기 전에 김익렴(金益廉)이 훔쳐보고서는 사람들에게 누설했기 때문에 대관들이 주세를 탄핵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시열을 위하여 원한을 갚은 것이다.

 

6월 11일 갑오

교리 이익(李翊)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대각이 쟁집하고 있는 시장(柴場) 떼어받는 폐단은 바로 백성을 병들게 한 큰 폐단으로서 일찍이 연신(筵臣)의 아룀에 따라 본도가 사실을 조사하여 밝힌 일이 있었고, 그리하여 깊은 산속 가난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반기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제 하교가 처음 명령했던 것과는 내용이 달라 자못 신서(臣庶)들이 성상께 기대했던 뜻이 아니었습니다. 전하의 귀와 눈인 자들로서는 그를 광구(匡救)하는 방법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는 처지인데,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고집만 하고 기꺼이 따르려는 뜻이 없으니, 만약 그렇게 계속하다가는 비록 사(私)를 없애려 하여도 사가 없어지지 않고 공(公)을 넓히려 하여도 공이 넓어지지 않아, 전철을 답습하면서 게으름만 피우다가 끝에 가서는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을까 신으로서는 염려가 되므로, 저으기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은 했으면서도 그 말을 채용하지는 않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갔다. 약방 도제도 이경석 등이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입진하였고, 상은 침을 맞았다.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헌납 최일(崔逸), 정언 이지익(李之翼), 최관(崔寬)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약방이 아뢴 내용을 보았더니, 의관 최유태(崔有泰)가 입시하였다가 나온 후에야 제조 이하가 비로소 옥후가 편찮으심을 들었다고 하였는데, 신들로서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약방을 둔 목적은 오로지 보호를 위해서이며 대신이 반드시 제조를 겸한 것도 그 소임이 얼마나 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성상의 체후가 혹시라도 편찮으시면 제조가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입진한 이후에 약을 의논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규례인데, 지금 일개 의관으로 하여금 먼저 입시하게 하고 제조는 까마득히 듣지도 못했다면, 사리와 체모에 크게 손상되는 일이며 뒤폐단과도 관계되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다시 그렇게 말도록 하소서.
전남우수사 이동현(李東顯)이 쌀과 베를 배 1척에다 가득 싣고 그 배까지 싸잡아서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이조 참판 이응시가 그 서간을 받지 않고 전임자에게 떠넘겼고, 전임 참판 이일상(李一相)은,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쌀 실은 배를 오래도록 강 가에 정박하고 있게 했다고 소문이 몹시 자자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보낸 그 물건이 결국 어느 곳으로 갈 것인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동현이 터놓고 뇌물질을 그렇게까지 하고 있으니, 그를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탐독(貪黷)의 습관을 막을 것입니까. 바라건대 잡아들여 국문한 후 죄를 내리소서.
태학의 원점(圓點) 때 으레 순제(旬製)로 권과(勸課)하는 규정이 있는데, 음관(蔭官)으로서 반궁(泮宮)에 있는 자가 제생들과 함께 제술을 않는 것은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대사성 조복양(趙復陽)이 그릇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음관들도 함께 제술에 임하게 하였는데, 그중 한두 음관이, 복양더러 전에 없던 일을 시작한다 하여 이름을 부르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본관으로 하여금 그들을 적발하여 벌을 주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불허하고, 동현 문제와 태학의 건만 그대로 따랐다. 복양이, 그대로 국자(國子)의 장을 지키면서 다사(多士)들의 수치거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상은,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를 진압하라고 답하였다.

 

술시에 약방 도제도 이경석 등이 의관을 거느리고 다시 흥정당에 입진하여 상이 침을 맞았다.

 

6월 12일 을미

채유후(蔡𥙿後)를 공조 참판으로, 이원로(李元老)를 경상우병사로, 노정(盧錠)을 전남우수사로 삼았다.

 

입진 때 영돈녕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현재 총재 직임을 더럽히고 있지만 사국(史局) 일이 염려스러운 게 많습니다. 도청 당상이 사사(史事)를 도맡아 관리해야 하는데, 지사 채유후(蔡𥙿後)는 교외에 나가 있고 대제학 이일상, 이방 당상(二房堂上) 이응시(李應蓍)는 모두 대계(臺啓) 속에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하여 감히 공무 집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대론(臺論)이 터져나왔으니 그것이 결말이 나기를 기다려야 옳겠으나, 만약 동현(東顯)이 올라와서 판가름이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면 사사가 점점 늦어져서 참으로 민망할 일입니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그 사건은 곡절이 있습니다. 당초에 동현이 일상(一相)에게 서간을 보냈는데 그 서간에, 성이 변(邊)씨인 자가, 해묵어 퇴물이 된 배를 매매한 일이 씌여 있었고, 겉면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뜯어서 보기는 하였으나, 일상으로서는 애당초 그러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현직 참판인 이응시에게로 보내었고, 응시 역시 그러한 일이 없어 두 사람 모두 서신을 보내 동현에게 물었는데, 동현이 과연 위조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그 위조 편지 내용에는 해묵어 퇴물이 된 배를 매매한 일이 씌여 있었고, 그 끝에다는 일상의 이름을 써 놓았는데, 글자 획이나 문장 짜임새가 전혀 없어서 결코 사대부가 쓴 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국 재신들이 다 눈으로 보고 놀라고 분개했던 일로, 그 사건 곡절은 그러한 것에 불과하고, 쌀과 베를 실은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말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하였다.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신이 듣기에는 동현의 서간이 일상에게로 먼저 왔다가 응시에게로 보내졌는데, 대간은 응시에게로 먼저 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먼저 그 서간을 보고서 응시에게로 보냈다면 일상은 원래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을 알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상이 만약 참으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으면 마땅히 남이 알까 두려울 것인데, 어찌 응시에게로 보낼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두 사람 성명이 모두 대계에 들어 있으니 비록 공무 수행을 하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께서 여러 대신에게 물어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계 속에 이미, 쌀과 베를 가득 실은 배 한 척이 오래도록 강 가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그를 만약 적간(摘奸)하게 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것을 옳게 여겨, 호조·공조가 낭관을 보내 동현이 보냈다는 쌀 실은 배를 강 가에서 적간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발견된 것이 없었다.

 

6월 13일 병신

대사간 이정기, 헌납 최일, 정언 최관이 아뢰기를,
"그제 본원의 자리에서, 동료가 이동현의 쌀 실은 배 문제를 석상에서 꺼내기에, 신들이 주장하기를, ‘그 말을 전파한 자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다시 더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하였더니, 동료의 대답이 ‘대각은 풍문만으로도 일을 논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미 들었으면 어떻게 논하지 않을 것인가?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하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응시·이일상 등은 당대의 명류(名流)로서 청근(淸謹)으로 자신을 지키는 자들인데 비록 뜬소문이 있을지라도 그 두 사람을 누가 의심하겠습니다? 다만 동현이 쌀을 보냈다는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미 전파된 이상 논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동료의 뜻도 이에 불과하였고, 신들도 그렇다고 생각이 되어 서로 의논하여 논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쌀 실은 배가 서강(西江)에 정박하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그 즉시 서강의 이임(里任)을 불러 그간 상황을 물었더니, 모두 다 수영(水營) 선박이 온 사실이 원래 없다는 것이었고 반복하여 캐물어도 전혀 단서가 없어 신들도 이미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입진 때 대신 근신이 아뢴 내용이, 신들이 논계했던 뜻과는 크게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듣고서는 신들은 무척 놀랐습니다. 이른바 일상이 동현에게 청탁을 한 서간이라는 것이, 바로 남을 위해 퇴물이 된 배를 사달라는 내용인데, 그것이 분명한 위조라는 것은 비국의 재신들도 눈으로 보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으며, 쌀이니 베니 하는 말도 원래 와전된 것으로 서간 내에는 있지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더구나 동현의 서간이 일상에게로 먼저 전해졌는데, 신들은 응시에게로 먼저 전해졌다고 하여 그 역시 사실과 달랐으니, 사건을 논하면서 살피지 않고 한 잘못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신들의 직임을 체직하여 바꾸소서."
하였고, 정언 이지익은 아뢰기를,
"이동현이 배에다 쌀과 베를 적재하고 그 배까지 싸잡아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전임 참판과 후임 참판이 서로 미루고 있다는 말은 4월 중에 나돈 말이니, 그 말을 누가 듣지 않았겠습니까? 당초에 보낸 물건이 잘못 이응시에게로 갔는데, 응시가 서간을 뜯어보고는 물건을 받지 않자 그것을 다시 이일상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상 역시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기 때문에 색리(色吏)와 곁꾼들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즉시 도망갔고, 뭇사람들은 똑같이 이를 자자하게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말들이 있었으면 그 두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놀라고 두려워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구별(區別)이 있기를 기다려야 도리인데, 끝까지 내용을 밝히는 일이 없이 덮어두고 있다는 혐의를 아랑곳 하지 않고 있으니, 그간의 정적(情跡)이야 추측할 수 없다 치더라도 쌀과 베가 한 배이면 그것이 보통 선물에 비할 바가 아닌데, 두 사람이 당대 명재상으로서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행여 저절로 가라앉기를 바라다가 끝에 가서는 어물어물하면서 분명히 밝히려 들지 않으니, 국가 기강이 엄정하지 못하고 세상 꼴이 한심스러운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전번에 동현을 잡아들일 것을 아뢸 때 신이 혼미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관계로 그 두 사람을 함께 논하지 않아 공론이 다 잘못이라고 하고 있는데다, 어제 입진 때 대신 근신이 아뢴 말들이 또 신이 논했던 것과는 서로 반대되고 있어 동료도 그 때문에 인피를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동현에 대한 논의를 앞장서서 꺼냈었으니 신의 잘못이 지금 와서 더욱 현저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처치하기를,
"대각은 비록 풍문만으로도 사건을 논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으나 터무니없는 논에 굳이 동조하였으니, 전도 착란한 잘못을 면키 어렵습니다. 쌀 실은 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이미 알고서도 오히려 장황하게 허물을 얼버무리려고 하였으니, 거짓을 날조한 셈입니다. 이정기·최일·최관·이지익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6일 기해

이진(李𥘼)을 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경최(慶㝡)·안진(安縝)을 정언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각각 삼았다.

 

함릉군(咸凌君) 이해가 다시 상소하기를,
"70세가 되면 치사(致仕)하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옛 사람들의 대절(大節)이었는데, 신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면서 옛 분들이 하던 일을 하려고 하니 해조가 방색(防塞)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다만 신 때문에 그 길이 묵어 없어져버리면 그 어찌 성조(聖朝)의 큰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소년 시절에 병이 많아 중년이 되면서 귀가 막혔습니다. 하물며 지금 상유(桑楡)의 나이에 정신과 근력은 이미 다 없어졌고 단지 명맥(命脉)만이 끊기지 않았을 뿐이니, 이 간곡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기 엎드려 비는 바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치 않았다.

 

실록청(實錄廳)이 아뢴 내용에, 이응시·이일상 건에 대하여 대신에게 물을 것을 청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가 주장하기를,
"이동현의 당초 서간 내용 및 이일상이 위조 서찰을 찾아서 본 일은 신들이 자세히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탑전에서 대신들이 남김없이 사실을 해명하였고, 헌부의 처치도 매우 명백하여 일상·응시로서는 다시 인입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하자는 청을 이미 윤허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이 종결되기 이전에는 국가 체통으로 보나 두 신하의 인정 사세로 보아 공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만약 별도의 처분이 있지 않고서는 억지로 출사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영중추 정유성(鄭維城)도, 많은 간관들이 사실을 잘못 알았던 이유로 이미 인피하여 체직을 당했으니, 일상·응시로서는 다시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할 것을 명하면서 이르기를,
"오늘의 인견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영상이 출사한 후로 아직 인접(引接)을 못하였고 또 상의할 일이 있어서이니, 다만 오늘 빈청(賓廳)에 나온 인원만을 입시토록 하고 양사(兩司)의 장관은 명초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니,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 호조 판서 허적, 이조 판서 홍명하, 병조 판서 정치화, 판윤 이완, 형조 판서 홍중보, 좌윤 유혁연, 좌부승지 윤집, 부제학 유계가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년에도 비가 알맞게 오지 않아 백성들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에는 가물어서 걱정이더니 지금은 물이 많아 걱정이다. 앞으로 우양(雨暘)이 이렇게 고르지 못하면 농사가 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이르기를,
"호남 지방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안건에 있어, 이시방(李時昉)이 봄철에 본도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가을 이후에 시행해 보자고 하였는데, 이를 만약 시행하려면 반드시 미리 본도와 왕복하면서 의논하여 정해야만 시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군에의 대동법 시행 건은 이미 완전 결정이 된 것이니 그대로 거행만 하게 하면 된다."
하여, 태화가, 해당 관할 당상관으로 하여금 본도에 공문을 보내 절목을 강정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산군에의 대동법 시행 절목은 일찍이 선왕조 때 이미 강구하여, 매 결(結)에 목면 2필(匹)로 환산하고 가미(價米)는 7두(斗)로 정했는데, 당초에 시방의 뜻은 꼭 6두로 내려 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말도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오늘 강정할 것은 말[斗]의 수를 더하든지 감하든지 어느 것이 편리한가만 정하면 됩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시방의 뜻은 어찌하여 그러는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호서 지방의 산군은 목면 환산 규정이, 다섯 말을 한 필로 환산하는데 호남은 쌀값이 호서에 비하여 꽤 낮기 때문에 일곱 말로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방의 생각은, 1결에 대한 열세 말을 그대로 다 받아서는 안 되고 당연히 한두 말쯤은 감해주어야 하는데, 원미(元米)는 그렇게 감해주면서도 목면과 환산한 쌀의 수를 일곱 말이나 되게 책정하면 원수(元數)가 많이 줄기 때문에 여섯 말로 정하려고 한 것이지만, 신의 생각에는 만약 백성에게 편리한 방법으로 말하자면 일곱 말을 한 필로 환산하여도 안 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꼭 백성들의 사정을 곡진하게 따르기로 하면 비록 일곱 말로 정하더라도 백성들이 어찌 만족하다고 하겠습니까. 호서 사정으로 논한다면 쌀 다섯 말로 목면 한 필을 사기란 과연 어려운 실정이고, 산군에서 따지고 드는 부분도 이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쌀로 상납하는 해읍(海邑)의 경우 명목은 비록 다섯 말이라도 실지 들어가는 양은 여섯 일곱 말이 밑돌지 않습니다. 따라서 산군이 해읍에 비하여 꼭 더 고될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田稅) 한 섬을 목면 세 필로 환산하는데, 쌀로 상납하는 읍들이 모두 목면으로 환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목면으로 환산하는 고을이 더 고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호남도 여섯 말로 정하여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 1결에 쌀 열세 말을 징수하여 그 원수(元數)를 여유있게 하여 남는 것이 많은지 적은지를 다시 살펴 보고 나서 말 수는 감하는 것이, 바로 선왕조에서 참작 결정한 제도이다. 그 제도는 결코 고쳐서는 안 되고 목면으로 환산하는 말 수에 있어서는 1결에서 징수하는 쌀 열세 말에 대하여 목면 두 필로 환산하면 어떠할지 모르겠다."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여섯 말 일곱 말 사이에서 절충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내시를 시켜 이유태(李惟泰)의 상소문을 꺼내보이며 이르기를,
"이 상소 내에는 실행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조항이 매우 많으니 물러가서 자세히 살펴본 후라야 그 편의 여부를 아뢸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향약(鄕約) 책자를 꺼내보이며 이르기를,
"이것은 승지를 시켜 추려 베껴서 들여온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향약이 어찌 아름다운 법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를 실행함에 있어서는 예와 지금의 시대적 차이가 없을 수 없기에 선조조에서도 실행을 하려다가 못했던 것입니다. 오위(五衛)를 옛 제도대로 복고하는 일이나,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일 등은 모두 실현할 수 없는 일이고, 전정(田政) 문제 같은 것은 국전(國典)에도 20년마다 반드시 한 번씩 전지 측량을 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은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강정(講定)하여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정하여 전지 측량을 실시해야 되겠다."
하였다.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해야 되는 조항에 이르러, 태화가 아뢰기를,
"유태가 태거하고 싶어한 용관이라는 것이 어느 관을 지칭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전(大典)》에 기록된 것으로 말하자면, 지금 그 줄어든 수가 거의 절반에 이르고 있어 더이상 태거해야 할 관이 없을 것 같고, 또 그가 말한 ‘구임(久任)’이 어찌 좋은 제도가 아니겠습니까마는, 다만 적임자를 얻은 뒤에 구임을 시켜야지 만약 적당한 인물이 아닌 자를 구임시켰다가는 그 피해가 도리어 자주 가는 것보다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 문제는 해당 아문과 신들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또 이른바, 사치를 금해야 한다고 한 조항은 역시 상께서 어떻게 도솔(導率)하느냐에 달렸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뭇 신하를 상대로 이르기를,
"이동현 건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한다면 일상·응시가 감히 출사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현으로 말하면 잡아들여 국문해야 할 일이 원래 없습니다. 그러나 감히 곧바로 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난번 하교하였을 때 ‘별도의 처리’라는 말로 의논드렸던 것입니다. 대체로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 신료가 분명히 다 아는 일인데도 대론(臺論)이 갑자기 일어 모두가 의아했었으나, 지금 와서는 이미 사실을 잘못 안 것으로 귀결이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동현을 잡아들여 국문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실록청이 수의(收議)하여 아뢴 내용에 대해서 답하기를,
"이미 등대(登對) 때 결정을 본 일이고, 그 두 사람에게 지금 인혐할 일이 없으니 그들로 하여금 빨리 나와 임무를 살피게 하여 사사(史事)가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근래에 어느 별군직(別軍職)이 차비(差備)041)  에서 하소연하면서 자기 자식의 속신(贖身)을 원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사실이 있었습니까? 듣기에 참으로 놀랄 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효성(吳孝誠)이라는 자가 선왕께서 심양(瀋陽)에 계실 때 군관(軍官)이었기 때문에 불러서 본 일은 과연 있었으나, 하소연한 일은 별도로 없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가 어찌 감히 차비에서 곧바로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그의 자식을 속신해 주시려면 정원에 말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사사로이 직접 하교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그 일이 비록 경미한 일이지만 폐단의 씨알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후일 군사들의 교만 불손한 폐단이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조짐을 통렬히 막아버리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이시백(李時白)의 병이 위독했을 때 신이 가보았더니, 시백이 말하기를, ‘병자년 난리에 남한 산성 성가퀴를 지키고 있을 때 어느 한 군사가 와서는 적병이 성을 오르고 있다고 말하기에, 놀라 일어나서 보았더니 한 적병이 갑주(甲胄)를 갖추고 성 위에 서 있었는데, 군관 송의영(宋儀英)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그를 쳐서 성 밖으로 떨어뜨리고 이어 사다리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적병이 올라오지 못했었다. 인조 대왕께서 즉시 불러 보시고 상으로 금은(金銀)을 내렸는데, 그 군사는 그 일로 하여 가자(加資)까지 하였지만 의영은 첨사(僉使)를 얻고 말았다.’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아뢰었으면 하는 태도였습니다. 이는 대신이 임종시에 한 말이기 때문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당시 종사관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군사 이름은 난복(難福)이었는데, 그날 적장(賊將)이 성을 올라왔는데도 성 안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어 만약 난복이 그를 살펴보지 않았거나 의영이 쳐죽이지 않았더라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서성(西城)의 공로에 있어서는 의영이 제일인자였는데, 겨우 첨사를 얻고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곤궁하였기 때문에, 시백이 그를 가엾게 여겨 요(料)를 조금 붙여주었던 것입니다. 시백이 죽은 후 의영이 신을 찾아와 울면서 하는 말이 ‘이제 또 얼마 안되는 요마져도 잃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하겠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가 유공자에게 상을 내리는 정상적인 법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으로 특별 승급을 해야겠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이경석이, 이시만(李時萬)의 일로 인해 신의 이름까지 거론했다는데 감히 그 곡절을 아뢰겠습니다. 그때 신이 마침 헌장(憲長)으로 있으면서 김자점(金自點)의 당여(黨與)인 이시만, 이지항(李之恒) 등을 논핵하여, 그들 모두가 죄를 입었는데 그것이 비록 일시적 공론에서 나온 일이었으나 해가 오래된 후까지 영원히 폐인이 되어서는 부당하겠기에, 일찍이 선왕조 때 사실을 아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명(成命)이 있기 전에 갑자기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말았는데, 경석이 한 말은 틀림없이 거기에서 연유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라."
하였다. 자점의 역옥(逆獄)이 있은 후로 시배(時輩)들이 이유태(李惟泰)를 사주하여 상소하게 하면서 이시만·이지항·이이존(李以存)·엄정구(嚴鼎耉)·황감(黃㦿) 등 여러 사람을 자점의 당여로 만들었고, 지원은 헌장으로서 그들을 따라 논핵하여 지항 등이 모두 죄폐(罪廢)되었었다. 시만·이존은 원래 자점에게 붙은 자들이었지만 지항은 김익희(金益熙)에게 미움을 사고, 황감은 문망(文望) 때문에 시배들로부터 시기를 당했으며, 정구는 시배들을 그르다고 했기 때문에 모두 무함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다 그들을 억울하게 여기었다.

 

6월 17일 경자

사간원이 종전부터 고묘(告廟) 건을 아뢰면서 여러 날을 쟁집(爭執)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와서 정지하였다.

 

6월 18일 신축

예조 참판 이일상, 이조 참판 이응시가 상소하고 사직하였는데, 상이 다 불허하였다.

 

6월 19일 임인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곽지흠(郭之欽)을 사간으로, 신상(申恦)·이광재(李光載)를 장령으로, 윤지미(尹趾美)·이동로(李東老)를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민서(李敏叙)를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간원이 종래에, 의관 단독으로는 입진하지 말도록 아뢰었던 일을 오늘 와서 정지하였다.

 

6월 20일 계묘

주서 맹주서(孟胄瑞)가 송시열·송준길에게 유지를 전하였는데, 시열·준길이 다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6월 21일 갑진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이연년(李延年)을 응교로, 이수인(李壽仁)을 부응교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정치화(鄭致和)를 동지사로, 강백년(姜栢年)을 부사로, 권격(權格)을 서장관으로 각각 삼았다.

 

6월 23일 병오

양사가 종전에 아뢰어오던, 유후성(柳後聖), 조징규(趙徵奎)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다시 거두도록 했던 일을 오늘 와서 정지하였다.

 

6월 24일 정미

실록청이 아뢰기를,
"대제학 이일상이 무함당했던 일이 이제 이미 분명히 밝혀졌는데, 도청(都廳)과 찬수(纂修)의 직임을 대제학이 전적으로 맡아 해야 할 것인데도 지금까지 퇴복(退伏)하여 사사(史事)를 지연시키고 있으니, 대제학 이일상을 추고하여 즉시 사진(仕進)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충홍도(忠洪道) 보은(報恩)·청안(淸安)·서천(舒川) 등지에 폭우가 계속 쏟아져 사람과 가축이, 무너져내린 비탈에 깔리거나 벼락을 맞아 죽은 일이 많았으므로, 휼전(恤典)을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 호조 판서 허적, 예조 판서 윤강, 한성 판윤 이완, 형조 판서 홍중보, 이조 참판 이응시, 좌윤 유혁연, 부제학 유계, 집의 목겸선, 사간 곽지흠, 좌부승지 윤집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비록 덥지만 경들과 상의할 일이 있어 이렇게 인견한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성상께서 하교하신 이유태 상소 건에 관하여, 그 속에 조항별로 진계한 일들을 신들이 이미 서로 강론하였으므로 지금 탑전에서 그를 여쭈어 결정할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도 회의에 함께 참여하였는가?"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유태도 참여하였습니다. 유태의 상소는 그 대지가 민수(民數)를 파악하고 전결(田結)을 파악하자는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조건들은 모두가 절목에 불과한 일들입니다. 유태가 말하고 있는 향약(鄕約)이라는 것도 사실은 바로 호패(號牌)인데, 뭇 논의들이 다 향약을 시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패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호패법은 갑자기 거행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나, 전지 측량만은 더욱 오늘의 급무가 되고 있어 뭇 논의가, 우선 곡식이 다소 여문 곳부터라도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가통(五家統)을 하면 민수를 파악할 수 있으니 호패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오가통이 좋기는 하지만 누락될 염려가 없지 않고, 만약 향약의 법을 시행하면 누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국가 기강이 해이하여 그 법이 시행될 수 있을 것인지 그 역시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연거푸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지 못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바로 백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 좋은 정책이 있더라도 갑자기 시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상이 입시한 제신들에게 직접 하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소회를 진계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각기 의견을 진계하라."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호패법은 그 절목이 매우 번다하여 엄중한 법을 정해 두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좌상이 말한, 백성과 함께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한 때가 바로 지금인데, 민수를 파악하려면 도리어 폐단이 없는 오가통이 나을 것입니다."
하였고, 허적·이완·이응시·유혁연·유계는 다 호패법을 시행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지원은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이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형편인데 또 새 법을 시행하여 그들을 놀라고 흔들리게 만들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비록 강론하여 결정하더라도 어찌 꼭 금년에 시행하자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지 측량 문제는 조정 논의가 이미 일치되었는데, 그를 꼭 팔로(八路)가 다 풍년이 든 뒤에 시행하려고 하면 아마 시행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우선 조금 나은 도부터 골라서 실시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은 금년이라도 실시할 수가 있겠는가?"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미리 예상하기는 어렵고 각도로부터 보고를 받아본 뒤라야 비로소 조금 나은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서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니, 호조가 미리 그 뜻을 알아두었다가 7월에 가서 각도로부터 농사에 관한 장계가 올라온 뒤에 조금 나은 도를 찾아 여쭙고 나서 실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자고 하였다.

 

정언 경최, 헌납 오두인 등이, 김경신(金景信) 사건에 있어, 그 추관(推官)은 논하지 않고 조사당한 관원만 죄를 청한 데 대하여 공론이 비난한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25일 무신

상의 머리 오른쪽 부분에 조그마한 종기가 나 편전(便殿)에서 뜸을 떴는데, 약방의 제조 등이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있었다.

 

공조 참의 이유태가 어머니 병환을 이유로 정사(呈辭)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만나보고 싶은데 오늘 마침 몸이 편치 못하여 인접할 수가 없으니, 그 뜻을 유태에게 말하라."
하였다. 유태가 시정(時政)에 대하여 상소로 의견을 진계하였으나 대신과 재신들이 저지하여 실시가 안 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정사하고 가버린 것이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곽지흠, 정언 권격 등이 아뢰기를,
"성균관 장무관(掌務官)과 유생들과의 사이는, 비록 사장(師長)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예의를 갖추고 존경해야 할 사이인데, 지난날 어느 한 음관(蔭官)이 술에 취한 채 식당에 들어와서 장무관을 대놓고 욕설을 하였는데도 그 장무관은 단속을 하지 않고 도리어 서로 실없는 농지거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음관에 대하여는 사관(四館)에서 이미 벌을 내렸으나, 장무관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단속 못하고 체면을 손상시킨 잘못에 대하여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그때 장무관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장례원(掌隷院)이 아뢰기를,
"사송(詞訟)의 즈음에 조사(朝士)가 아닌 사람들도 모두 종을 대신 시켜 정송(呈訟)하고 있어 매우 놀랄 일입니다. 송관(訟官)이, 정송을 직접 하라고 하여도 조금만 형세가 있는 자이면 들은 체도 않습니다. 국가 기강이 이러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로서, 앞으로는 《대전(大典)》의 형전(刑典)에 의하여 사족(士族)의 부녀자 또는 조사 외에 종이 대신 정송하는 사건은 일체 들어주지 말도록 승전(承傳)을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해괴한 일이다. 법식을 정하여 그대로 시행하고 만약 그 법식을 어기면 절대 들어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6일 기유

이유태가 어머니 병을 이유로 소를 올리고 도성을 나갔다. 국기(國忌)였기 때문에 상소가 들어가지 못하고 우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유태가 떠나려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상이 예조의 낭관 심재(沈梓)를 보내 유지를 전하고 만류하였고, 재차 심재를 나루터까지 뒤쫓아 보내 또 유지를 전하고 만류하도록 하였으나, 유태는 끝까지 어머니 병구완을 위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구실로 거절하고서 가버렸다. 상이 다시 예조의 낭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였다.
"지금 어떻게 강제로 핍박하여 모자의 정을 상하게 하겠는가. 그대의 갈길이 하루가 급할 것이기게 지금 그대에게 역마를 내리니, 모친 병환이 조금 나아지거든 되도록 빨리 올라오라."

 

술시에 상이 의관 등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여, 정후계(鄭後啓)·윤후익(尹後益) 등이 들어가 진찰을 마치고 나와서 말하기를,
"상의 두부 좌편에 조그마한 종기가 났는데 손으로 만지면 꽤 땅김을 느끼고 얼굴 부위도 부은 기가 있다."
고 하였다. 제조 이하를 불러, 뜸을 뜨는게 어떠할지 속히 의논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도제조 이경석이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신은 지금 막 왔는데 유후성이 미처 도착을 못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후성이 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한 후 입진하되, 제조는 어제 예대로 입시하지 말라."
하여, 다시 아뢰기를,
"사체(事體)가 막중하여 신들이 입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나아가 있을 곳이 두 칸짜리 집이어서 제조가 입시하면 의관들이 앉을 자리가 없으니, 결코 입시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세 번이나 입시할 것을 되풀이하여 청하니, 상이, 제조만 건너편 행랑채에 들어와 있고, 사관도 한 명만 입시할 것이며, 도제조는 들어올 것이 없다고 하교 하였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유후성 등으로 하여금 진찰하게 한 다음 이어 뜸을 떴는데, 도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중관(中官)을 통하여 아뢰기를,
"상께서 이 밤에 뜸을 뜨시니 신들이 약방에서 숙직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제조는 나가고 승지와 제조만 숙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각읍의 기민(飢民)이 젊은이와 노약자 모두 합하여 1만 2천 2백 10여명이고 북도(北道)의 유민이 7백 93명이었는데, 3월부터 진구를 시작하여 보릿가을이 될 때까지 소요된 곡물이 6천 2십여 섬이었다.

 

개성부(開城府) 기민 4백 10명을 4월 초부터 진구하기 시작하여 6월 초에 와서 정지하였다.

 

6월 27일 경술

약방이 아뢰기를,
"엄려(嚴廬)042)  가 너무 좁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 혹독한 더위에다 두상 및 손과 발에 환부까지 있어 신민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흥정당(興政堂)이 원래 사치스럽거나 규모가 큰 집이 아니니, 처소를 그리로 옮겨 몸 조섭을 하여도 전혀 잘못됨이 없는 일입니다. 구구한 심정을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는 이곳이 편안하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데 경들이 그렇게까지 염려하니, 형세를 보아가며 조처하리라."
하였다.

 

6월 29일 임자

대사간 이경억이 체면(遞免)되었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간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좌승지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김만기(金萬基)를 헌납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정청(政廳)에 하교하기를,
"의관 양제신(梁濟臣)을 수령에 제수하는 안건에 대하여 이미 승전(承傳)도 받았고 대간도 이미 정계(停啓)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번 정사(政事)에서 의망(擬望)을 않은 것인가?"
하여, 이조 참의        이경휘(李慶徽)가 구전으로 아뢰기를,
"그것이 조례에 따라 제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데다 소신이 혼자서 정사를 하였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의망을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사시에 들어간 망통(望筒)이 신시까지도 내려오지 않다가, 상이 정청에 하교하여, 제신을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특별 제수하였다. 이어 경휘가 하직(下直)을 청했는데, 대궐 문을 닫을 무렵까지도 하직 승락이 내려오지 않아, 좌부승지        윤집(尹鏶)은 정청에서, 우부승지        조윤석(趙胤錫)은 본원에서 각기 넌지시 여쭈었으나 상이 다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관(政官)들이 대궐 안에서 밤을 지새웠고 모든 신하들은 의혹을 품었다.

 

평안도 용강(龍岡) 등 18개 읍이 모두 수해를 입었고, 안주(安州)·가산(嘉山)·태천(泰川)은 더욱 심하여 인가가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죽거나 압사당한 사람과 가축들이 매우 많았으며,황해도 장연(長淵) 등 8개 읍에도 수해가 있었다.

 

정원에서도 흥정당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계청하기를 약방의 계청처럼 하니, 날씨를 보아가며 하겠다고 답하였고, 영의정 정태화 등도 상차하여 거처를 옮길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그렇게까지 청하니 마땅히 차자 내용대로 하리라."
하고, 옮길 것을 허락은 하였으나 실지로 옮기지는 않았다.

 

6월 30일 계축

상의 발 부위에 가려움증이 심하여 의관 윤후익(尹後益)이 산침(散鍼)을 놓을 것을 청했는데, 약방이, 제조가 입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아뢰자, 침을 이미 맞았다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정관이 하직을 청한 후로도 끝까지 결정이 없어 대궐 안에서 밤을 새게 만들었는데,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정관이 잘못한 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처음부터 터놓고 말하지 않으시고 은연중에 불평한 뜻을 보이며 정사를 파한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돌아갈 것을 허락하지 않아, 심지어 생기(省記)하는 관원도 없는 채 정청에서 밤을 지새게 하였으니, 그 일이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입진을 하거나 침을 맞을 때면 제조가 입시하는 것이 사리로나 체면으로나 당연한 일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난색을 보이며 쾌히 허락을 않기 때문에, 뭇 신하들의 심정이 그렇찮아도 민망스럽고 답답한 처지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제조가 입시를 청하자마자 침을 이미 맞았다는 하교를 금새 내렸습니다. 옥체에 침을 맞는 일이 그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것을 의관 무리들에게만 맡기고 제조는 참여도 못하게 하니, 그 어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근밀(近密)의 자리에서 봉직하고 있으므로 감히 소회를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 뜻은 비록 내 마음에 울화가 치미도록 충격을 주어 병의 뿌리를 더 더치게 하고 싶은 모양이나, 나의 생사 안위는 하늘에 매여 있는데 어찌 이 계사로 인하여 더칠 이치가 있겠는가. 그대들 계책이 너무 졸렬하여 개탄스럽노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의관도 대령시키지 말고 모두 내보내도록 하고, 약방 제조도 내일부터는 문안을 말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좌승지 오정위, 우승지 남용익, 우부승지 조윤석 등은 궐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고, 좌부승지 윤집만이 병으로 전계(傳啓) 때 참여를 못했기 때문에 본원 내에 머물러 있었는데, 상이 정원에 묻기를,
"의관을 내보내고 약방 제조도 문안하지 말라고 한 것을 분부하였는가?"
하여, 윤집이 아뢰기를,
"그는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입니다. 동료들은 이미 다 나갔고 신만이 심한 이질 때문에 기동을 못하고 혼자 본원 안에 있습니다. 감히 분부를 못하고 이렇게 아뢰자니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교한 것이니, 속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세 번이나 아뢰었으나 상은 또 분부하도록 재촉하니, 윤집이 아뢰기를,
"신이 차라리 중한 벌을 당할지언정 결코 명령을 받들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은 다시, 번거롭게 말라는 하교를 내렸다. 윤집이 아뢰기를,
"만약 여러 동료들이 즉시 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결국 궐직(闕直)을 하게 되면 국가 체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의관을 내보내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본원 신료들도 속히 도로 들어와 직무를 살피게 하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말고, 승지들은 입직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 제조 윤강이 아뢰기를,
"정원에 답하신 준엄한 전지를 엎드려 보오니 모골이 송연합니다. 그것은 사실 신들이 직책 수행을 형편없이 하고 성의마저 너무 부족하여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이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경황이 없어 허겁지겁 달려와서 땅에 엎드려 대죄하고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병든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병 중에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제일인데, 지금 정원이 병자의 마음에 충격을 주고 있으니,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것인지 너무나 해괴하다. 차라리 의관들을 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기 때문에 약방으로 하여금 절대 문안을 말라고 했던 것인데, 어찌하여 대죄한다는 말을 꺼내 나의 병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인가?"
하였다. 세 번이나 아뢰면서, 이미 내린 전지를 거두고 의관의 입직을 다시 허락하여 불시의 물음에 대비하도록 할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전번 계사에 대한 비답에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상차하기를,
"약방이 문안을 말라는 하교를 거두시고 대죄 중에 있는 근신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그들로 하여금 직임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히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날 의관 윤후익 등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내국(內局)에 머물러 있었는데, 상이 밤에 사람을 시켜 대문을 열고 내보내게 하였다.

 

포도청이 아뢰기를,
"이름이 변응립(邊應立)이라는 사람이 지난날 이일상(李一相)의 서간을 위조하여 전라도 우수영을 찾아와 배를 사려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해괴한 일이어서 군관을 별도 지정하여 그로 하여금 추적하여 체포하게 한 후 그의 처자 및 각 사람들을 상대로 서간 위조에 관한 곡절을 캐물었더니, 양영남(梁穎南)이라는 자는, 제 자신이 서간을 위조하여 주었다 하고, 묵석(墨石)은, 하효달(河孝達)에게 전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변응립의 처자와 묵석은 별로 물어 볼 것이 없어서 모두 놔보냈고, 하효달은, 처음에는 바로 불지 않고 박세문(朴世𣐀)에게 핑계를 댔는데, 그 꼴이 너무 통탄스럽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영남이 자복한 뒤에야 비로소 사실을 토로하고 있으니, 더욱 간교하다고 하겠습니다. 영남이 비록 사실 토로를 하긴 했으나 만약 엄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앞으로 후인들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엄한 형으로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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