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묘
초저녁에 황백색 구름이 동북간에서 일어 곧바로 서쪽을 가리키다가 한참 만에야 사라졌다.
홍주삼(洪柱三)을 정언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가주서 유명윤(兪命胤)이 서계하기를,
"신이 명령을 받고 가 송시열을 타일렀더니, 그의 주장은 ‘신이 윤선도 상소 내용을 보았더니 예문을 논의한 것에 대하여 배척을 하였는데, 그 배척이 옳은지 틀린지는 신 같이 어두운 자로서 감히 알 수 없으나, 심지어 송준길도 함께 수사(收司)의 율(律)을 당해야 한다고까지 하였으니, 신의 죄 이에 이르러 더욱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한의 문제(文帝)가 남월왕(南越王)에게 준 서한을 신이 언젠가 보았는데 거기서 이르기를, ‘짐은 고황제(高皇帝) 측실(側室) 자식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때문에 문제를 작게 보지 않았으며, 그 후로 국가에 변고는 많았지만 대통을 이은 사람들이 모두 문제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백 년 후에 소열(昭烈)이 한나라 정통을 잡았는데, 사마광(司馬光)은 그를 남당(南唐)의 열조(烈祖)가 오왕(吳王) 각(恪)의 후손이라고 자칭한 것에다 비유하면서 계통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그 그릇됨을 쓸어버리고 다시 그가 정통임을 대서 특필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측실 자식이라도 정통의 전수에는 하등의 해로움이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선대왕의 차적자(次嫡子)임이오리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 이러하기 때문에 짐작할 줄도 모르고 선뜻 망발을 했던 것입니다. 예를 논한 그 일로만 말하더라도 참람되이 법을 범하고 사리에 어긋난 일들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선도가 신에게 죄를 준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신이 이미 막중한 죄를 졌고, 또 천한 병까지 시름시름 하여 앞으로 나갈래야 꾀가 없어 북을 향하여 천문(天門)만 바라보면서 혼자 흐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 등이 상차하기를,
"전 승지 박세성이 그날 명령 내리신 일을 즉시 거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죄가 됩니다. 그러나 잡아들이라는 전지 내의 ‘모군 역명지적(侮君逆命之賊)’ 그 여섯 글자는 세성이 죽어서도 억울함을 품을 일일 뿐만 아니라, 성상의 인자하고 남을 포용하는 정사에도 손상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는 일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역명적(逆命賊)’ 세 글자는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상 원두표가 상차하기를,
"지난번 대왕 대비전 복제에 관하여 물으셨을 때 신이 대략 의견을 개진하고 뒤이어 차자 한 장을 다시 올려 말을 마치려고 했던 것인데, 불행히도 윤선도 상소가 그 때마침 올라와서 겉으로는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속으로는 실상 사람을 모함하기 위하여 음흉하고 교활한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듣는 이의 귀를 놀라게 했으며 신 역시 놀라고 기가 질려 감히 혀를 내두르면서 무어라 다시 논열(論列)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두고 생각해 볼 때 이에 징계되어 말하지 않고 결국 대례를 그르치게 되면, 이는 목이 멘다고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일로서, 신이 어찌 감히 생각을 두고서도 끝까지 입을 다물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기겠습니까. 그리하여 감히 이미 찢어버렸던 내용을 다시 모아 존엄한 신청(宸聽)을 더럽히기로 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신이 저으기 생각건대, 장자(長子)를 중자(衆子)와 구별하여 반드시 3년복을 입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장차 할아버지 뒤를 이을 것이고, 장차 전중(傳重)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할아버지 뒤를 잇고 전중이 될 자를 위하여 3년을 입는다면, 더구나 이미 뒤를 이었고 이미 전중이 된 자이겠습니까. 대부(大夫)도 사(士)도 그러하다면 더구나 제왕(帝王)의 집이겠습니까. 제왕의 집은 오직 종통(宗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제후(諸侯)는 탈종(奪宗)을 하고 성서(聖庶)는 탈적(奪嫡) 한다는 것이 바로 옛 교훈입니다. 이미 세대를 잇고 전중을 받아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으면 종(宗)이 거기에 있고 적(嫡)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 문제(漢文帝), 당 태종(唐太宗)이 비록 방손으로서 정통을 이어받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섰으면 그가 곧 한의 고조(高祖)의 적(嫡)이며 당의 고조(高祖)의 장(長)인 것으로, 한과 당의 서로 전수된 정통이 그를 두고 어디로 갈 것입니까? 역대 승계된 정통이 그러한 유가 매우 많아 이루 다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이 삼가 《의례(儀禮)》 참최(斬衰) 조항의 위장자(爲長子) 주소를 보았더니, 이르기를,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대왕은 바로 인조 대왕의 둘째입니다. 그게 바로 주소에서 말한 적처가 낳은 둘째가 아니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만약 적자라고 말할 때는 첫째 아들만이 해당되지만, 장자라고 말할 때는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말과 통한다.’ 하였는데, 의미는 바로 적자라고만 말할 경우, 첫째 아들 외에는 차장자로서 전중이 된 자라도 해당이 되지 않고, 반드시 장자라고 해야지만 둘째 이하 정통을 이은 자와 통하여 그들 모두를 다 3년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야지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소설(疏說)이 단연 오늘에 논해야 할 예의 정확한 증거가 되고 있는데, 왜 꼭 억지로 ‘서자(庶子)는 뒤를 이어도 3년을 입지 않는다.’ 하는 예를 인용하여 스스로 의혹을 사는 것입니까? 위아래의 소설이 분명 두 항목으로 갈라져 있는데, 꼭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하려고 하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참최는 두 번 않는다.[不貳斬]’ 한 그 항목은 더더욱 여기에다 끌어댈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참최를 두 번 않는다고 한 것은 원래 양자 간 자를 위하여 한 말입니다. 즉 이미 양부(養父)를 위하여 참최를 입고 또 생부(生父)를 위하여 참최를 입는다면 이는 뿌리가 둘인 것으로 인도(人道)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며, 이는 시집 간 여자도 마찬가지로, 그가 중히 여기는 쪽이 이쪽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가 장자를 위하는 이유가 원래 조상을 존중하고 적통을 중히 여겨서라면, 둘째이건 셋째이건 승중(承重)을 했으면 다 조상을 존중하고 적통을 중히 여기는 의의가 있으니, 비록 두 번 세 번 참최를 입더라도 뿌리가 둘일 혐의가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실록(實錄)》에 없다 하여 난색이라면 그에 대해 할 말이 또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아조(我朝)의 상례(喪禮)가 전고에 없이 잘 갖추어져 있으나 그러나 그 의장(儀章) 도수(度數)에 있어서는 열성조에서 손질이 없지 않았습니다. 3년상에 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를 시사복(視事服)으로 정한 규정은 선조조에 처음으로 개정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전에 미처 못했던 것을 오늘에 와서 하라고 한 것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금 예에 대한 강론도 이미 끝났고 연일(練日)도 다가와서 신의 어줍잖은 설이 이미 때늦은 것은 알지마는, 단안을 내려 행하는 것은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연일이 되어 대왕 대비께서 최복(衰服)을 그대로 입고 즉길(卽吉)의 복을 입지 않으면, 그것으로 예가 행해지는 것이어서 절문(節文)을 바꾸고 고치고 하는 번거로움도 없는 것이니, 지금 계획을 정하면 그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례여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선왕조부터 예우를 받던 이유태(李惟泰)·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선거(尹宣擧)·윤휴 같은 자들을 참여시켜 듣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시골에 있는 신하들이야 형세상 잘 안 되겠지만, 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꼭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빨리 한 차례 모두 순방(詢訪)하시어 널리 중지를 모으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였다. 이 차자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아뢰기를,
"윤선거는 현재 시골에 있고 이유태·심광수·허후·윤휴 등에게는 차자 내용대로 모두 물어서 아뢰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윤휴가 허목에게 서신을 전하여 이르기를,
"이번 장자(長者)의 논설을 살펴보니 질서가 정연하고 근거가 있는 말이어서 오늘의 논의를 판가름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주소 내의,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말은 그 뜻이 매우 분명한데, 부부(夫婦)가 함께 낳아 조종(祖宗)의 전중을 받은 자를 일러 정(正)이 아니라고 하면 의의가 없는 일이요, 첩의 자식과 같다고 한다면 매우 틀린 말이지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가소(賈疏)에서 말한 것은 다만 사대부 집의 예를 말한 것이며 또 왕후(王侯)의 집이라도 전중을 받지 못하여 사대부와 같은 자를 이른 것이지, 위로 천자·제후에까지 미루어 올라갈 성질의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제후는 탈종을 하고 성서는 탈적을 했다.’ 했는데, 이미 계통을 이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었으면 종(宗)도 거기에 있고 장(長)도 거기에 있어, 계체(繼體)의 복이 되기도 하고 지존(至尊)의 복이 되기도 할 것인데, 또 무슨 장소(長少)와 적서(嫡庶)를 따질 것입니까?
무왕이 이미 천자가 되었으면 백읍고가 비록 상속자가 있어도 태왕(太王)·왕계(王季)의 적손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한 고조(漢高祖)가 이미 왕(王)이 되고 제(帝)가 되었으면 유중(劉中)이 비록 맏이라도 풍패(豊沛)의 종팽(宗祊) 제사를 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왕이 죽고 태사(太似)029) 가 아직 살아 있으면 당연히 계체의 복을 입었지 백읍고에다 귀중(歸重)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한의 고조가 죽었는데 태공(太公)030) 이 건재했다거나 광무(光武)가 죽었을 때 번후(樊后)031) 가 건재했었다면, 당연히 천하와 함께 지존의 복을 입었지 유중이나 백승(伯升)032) 이 적자라 하여 고조·광무의 복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래도 적처 소생을 두고 한 말이지만 한의 문제(文帝)·무제(武帝) 같은 이는 다 측실 자식이었는데도 이미 황제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그들을 서자로 쳐서 계체의 복, 지존의 복을 입지 않을 것입니까? 계체·지존은 참최인 것이 상경(常經)이요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서민의 집 장자도 참최를 입는 것은 자기 아버지·할아버지의 세대를 이을 자라 하여 그러는 것인데, 하물며 종묘와 사직을 받고 천하 사해(四海)의 주인이 되었으면 장으로서는 큰 장이며, 종으로서는 높은 종인데, 그가 장이 되지 못하면 누구를 장이라고 할 것이며, 그가 종이 못 되면 그 종이 어디로 갈 것입니까?
전대에 이미 행했던 전례들도 상고할 것들이 있습니다. 《통전(通典)》에 보면,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를 이태후(李太后)033) 가 사군(嗣君)이라 하여 중복(重服)을 입었는데, 효무제는 바로 간문제(簡文帝)와 정비(鄭妃)와의 사이의 자식입니다. 우리 명종 상사 때도 기명언(奇明言)034) 이, 공의전(恭懿殿) 복제를 계체(繼體)의 복으로 정해야 옳다고 하여 퇴계(退溪)도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따랐습니다. 이를 일러 탈종(奪宗)·탈적(奪嫡)이라고 한 것이며, 일이 보통의 윤리 질서와는 월등히 달라 왕조(王朝)의 예가 사대부의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예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 장차 전중(傳重)할 것을 이른 것인데, 이미 전중이 되어 천지 종팽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그래도 강복(降服)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종(宗)을 둘로 치는 것이며 주인을 낮게 보는 일인데, 그것이 될 일입니까? 예에 ‘장자는 참최를 입어 아버지와 같은 높이로 입는다.’ 한 것은 그가 조종(祖宗)의 중함을 전수받을 것임을 이른 것이고, ‘후계자가 아닌 자는 서자(庶子)와 동등으로 본다.’ 한 것은 장자이면서 중함을 전수받지 않은 자를 이른 것이며, ‘서자를 위하여 가복(加服)한다’고 한 것은 그가 대부(大夫)가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자인데도 가복을 하는 것은 그가 중함을 전수받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가 지존(至尊)이기 때문인 것으로 그 또한 표본으로 삼을 만한 의의가 있는 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를 논하는 자들은, 둘째 아들에게 하는 예대로 강복을 해야 하고 서자에게 하는 예를 따라야 한다고 하니, 왜 그러는 것입니까? 예가 잘못되면 혼(昏)이 되고, 명분이 잘못되면 건(愆)이 되어 작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또 예문을 살펴보면, 제후와 오속(五屬)035) 의 친족인 자는 모두 참최를 입는다고 했으니, 천자·제후의 상은 모두 참최를 입고 기복(期服)은 없는 것입니다. 진(晉)의 말기에 와서도 모후(母后)가 사군(嗣君)을 위하여는 참최를 입었는데, 그것은 이미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면 그는 천하의 아버지인 것으로 태후(太后)가 비록 천하의 어머니일지라도 마땅히 지존의 복을 입어 먼저 임금과 같은 높이로 보아야지, 그대로 자최를 입어 사서(士庶)가 강복하듯이 해서는 안 되어서였습니다. 이것이 예문에 이른바 ‘감히 친복(親服)으로 지존의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 한 것이 아닐런지요. 이를 또한 어떻게 여기십니까.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자최·참최 등 오복의 차등을 둔 것은 장차 인륜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오늘 논의되고 있는 일은 국가 윤강(倫綱)에 관계가 큰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장씨께서 앞장서서 할 말씀을 다하여 후세에 참고될 바가 있게 하시면 도움이 적잖은 것입니다. 우리 장씨가 논하신 것이 오늘의 기복 제도를 두고 하신 말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강구해보셨으면 하는 뜻에서 이 구구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5월 2일 병진
오시에서 유시까지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밤에는 유성이 규성(奎星) 위에 나타났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은 백색이었다.
이경억(李慶億)을 우부승지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우찬성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먹을 것을 보내주게 하고 모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하나 돌보아 주도록 유지를 내리라."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죽었다. 시백이 별다른 재능도 없고 또 재상으로서의 업적도 없었으나, 청백하고 충의롭고 근신한 절의만은 당시 재상 지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지성으로 하는 말들이 모두 나라 걱정하는 말이었고, 임종시에는 입으로 몇 줄의 유소(遺疏)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유소에,
"신이 두 조정에 걸쳐 지우(知遇)를 받고 은총은 분에 넘쳤으나 보답은 티끌만큼도 한바 없고, 다만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다가 죽은 뒤에야 말려고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성명을 만났으나 죽음이 이미 임박하여 대궐을 우러러 보아도 천안(天顔)은 영원히 뵈올 수가 없습니다. 구구한 생각은 다만 성상께서 덕을 힘쓰고 업을 닦을 것이며, 정형(政刑)을 신중히 하여 비록 대벽(大辟)을 집행할 죄인이라도 쾌하게만 여기지 말고 반드시 더 어렵고 더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후로도 많은 말을 하였으나 끝맺음을 못하였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정서하여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이 유소를 보니 슬픈 마음 더욱 간절하다. 비록 끝맺음을 못한 글월이지만 그 꾸밈없는 충절과 못잊어하는 성의에 대하여 이를 띠에다 쓰고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까보냐."
하고, 이어 근시를 보내 조의를 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시백은 배우지도 못하고 술업도 없으면서 송시열·송준길 등을 추켜세워 심지어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으로까지 소차에서 칭하였고, 능소를 수원(水原)으로 정하려 할 때에도 그곳은 안 된다는 쪽으로 강력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시열에게 붙어 그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뜻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흠으로 여기었다.
동부승지 정익이 상소하여 체임을 빌었는데, 그대로 따랐다.
5월 3일 정사
미시에 햇무리가 이중으로 지고, 백홍(白虹)이 햇무리를 꿰뚫고 해를 가리키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는데 속은 적색 겉은 청색이었다.
예조가, 우상 원두표 차자를 놓고 이유태(李惟泰)·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휴(尹鑴)에게 물으니, 유태는,
"신처럼 깜깜한 무식으로서는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안다고 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 예에 관하여는 송시열·송준길과 이미 오래 전부터 논했던 것으로 처음부터 소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 두 신이 현재 망령된 논의를 했다 하여 대죄하고 있는 중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말을 다시 하겠습니까?"
하였고, 허후는,
"예를 의논했던 제신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자세한 논변을 다하여 다시 미진한 부분이 없으니, 두 쪽 논의를 참작하여 지극히 정당한 길을 정하는 것은 오직 성상께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였으며, 윤휴는,
"그것은 국가 대례로서 대소 제신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저마다 논설이 있었으니, 오직 성상께서 신총(宸聰)으로 가리시어 정할 일입니다. 다만 그게 인심과 관계가 밀접하고 대경(大經)과도 관계되는 일이니, 선왕의 예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골라 행하면 되겠습니다."
하였고, 광수는,
"제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한 것들을 보면 모두가 《예경(禮經)》에 기록된 것들이나, 종통(宗統)을 중히 여긴 쪽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경중을 살펴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유태 등 제신들 논의가 명백하지 못한 것 같다 하여, 상께 아뢰어 다시 대신들 의견을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이경석·정태화·심지원·정유성 등 모두의 주장이,
"당초 의논하여 정할 때도 국제(國制)만을 의거하였고, 급기야 《실록》의 기록을 참고하여도 3년을 행했던 예를 찾아볼 수 없어 지난번 탑전에서 이미, 상제는 선조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답한바 있으므로 지금 감히 다시 입을 놀릴 수 없습니다."
하여, 예조가 아뢰니, 상이 다수의 논의에 따라 이미 정했던 기년제(期年制)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원두표 차자는 그것이 윤휴의 뜻을 전폭 수용한 것으로 그 당당한 논리가 일시의 편파적 궤변을 깨기에 족했다. 이렇게 다시 의논하게 된 날을 당하여, 만약 윤휴가 허후·심광수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같은 내용으로 합의하여 명백하게 사실을 개진하여 성상의 마음으로 하여금 아무 막힘없이 크게 깨닫게 했더라면, 예의(禮意)를 현란시키고 천총(天聰)을 속여왔던 시열·준길의 정상이 그 자리에서 탄로가 나 다시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무서운 생각에 감히 할 말을 다 못하고 어물어물 몇 구절 문자(文字)로 대충 책임이나 면하고 말았을 뿐, 조금도 임금 마음을 열어준바 없어 결국 잘못된 기년제로 귀결이 되어버리고 개정을 못했으니, 광수와 허후는 그만두고라도 윤휴 만큼은 그 꼴이 뭐란 말인가.
5월 4일 무오
어제 밤 2경에 연주(練主)036) 를 의식대로 쓰고 【제주관(題主官)은 공조 판서 오준(吳竣)이었다.】 상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옷을 갈아입었으며 백관들도 모두 자리에 나아가 옷을 갈아입고, 4경에 상이 친히 연제를 행하였다. 상이 다시 단오절제(端午節祭)를 친히 행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상이 연일 비를 무릅쓰고 힘들게 예를 행하다가 병환이라도 날까를 염려하여 빈청(賓廳)에 이르러 세 번이나 대신 행하게 하도록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고, 정원(政院)·약방이 다시 세 번을 아뢰어 청하자, 그제서야 상이 그를 허락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연제 때 상께서 신으시던 관구(菅屨)를 바꿔 신는 절목에 있어서, 《가례(家禮)》에 의하면 참최 복제에 관구가 있는데 3년 내에는 그것을 바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상의원이, 경인년 등록(謄錄) 내에 백비혜(白皮鞋)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고서 어젯밤 연복을 올릴 때 백비혜까지 잘못 올린 모양인데, 예문으로 보아서는 3년 내에 바꾼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니, 상이 상의원 관리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정기(李廷夔)가 아뢰기를,
"대각은 체통이나 규례로 보아 무릇 공적이고 중대한 발론이 있을 때는 쉽게 정지를 못하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하물며 동료끼리 상회례(相會禮)도 행하기 전이라면 더구나 어떻게 한 사람의 소견으로 하여 그 발론을 금방 정지시킬 수 있는 일입니까. 지난번 선도 상소가 너무나도 흉측했었는데 게다가 또 권시의 상소까지 뜻 밖에 나와, 그 간사한 편을 들기 위하여 정도를 해치고 위아래를 현혹시킨 몰골에 대하여는 나라 전체가 공분을 느끼는 일로서, 본원이 파직만을 청했던 것은 사실은 말감(末減)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벼운 벌마저도 청한 대로 되지 않았는데 여러 날 책임만 때우다가 결국 정지하고 말았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공론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신이 어제 아침에 나와 신명(新命)에 숙배했고 본원 내에 다른 동료도 있으니, 미처 상회례를 갖지 못했다면 아직 그대로 두고 회의가 있기를 기다려야 옳았을 것인데도, 정언 권격이 자기 혼자 멋대로 중대한 발론을 정지시켰으니, 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이 수석을 더럽히고 있으면서 동료로부터 경시를 당한 것이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권격이 아뢰기를,
"이정기 인피 내용을 보니 너무나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사정 시비가 이미 판명이 되었으면 파직을 청하는 아룀을 오래 끌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또 대각은 전례가, 수석이거나 누구이거나 상회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통문(通問)하거나 기다리는 일이 없으므로 전례에 따라 정지시켰던 것인데, 이미 장관으로부터 준엄한 물리침을 당했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5일 기미
춘추관이 아뢰기를,
"선왕의 《실록》을 국(局)을 설치하고 찬수해야 할 것인데, 총재 이하 관원들 차출 건에 대하여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간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을 거두라는 청이 본원에서 나왔는데, 신이 세성과 비록 상피할 사이는 아니지만 그와 일가인 혐의가 있는 이상, 인정 사세가 남보다는 한 단계 더 불안스럽습니다. 또 장관이 인피한 내용을 보면 동료가 단독으로 중대한 발론을 정지시킨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눌러있기도 어려운 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처치를 할 것입니까. 바라건대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아뢰기를,
"신은 원래 못나고 어리석어 남의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인데, 언젠가 들으니 전석(銓席)에서 인망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색을 보인 자가 있었다고 하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신이 무슨 면목으로 꼭 대각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슴앓이가 갑자기 더하여 배제(陪祭)도 하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장령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지난번 윤선도 안율(按律)에 관하여 그를 정계했을 때 마침 연거푸 재계(齋戒)가 있어 장관과 서로 모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부(可否) 알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정지시켰던 것인데, 지금 이정기 인피 내용을 보니 신은 자신을 탄핵하기에 겨를이 없겠습니다. 어떻게 감히 태연히 앉아 처치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정박(鄭樸), 지평 경최(慶㝡)가 양사(兩司)를 처치하기를,
"회의가 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았는데 먼저 정론을 하였으니,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고, 정론할 만하여 했다면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서로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것은 너무 경솔하였습니다. 명령을 거두시라는 청은 혹 난편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처치에 관한 논의야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인피를 하는 것은 자못 구차한 점이 있습니다. 배제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실 질병 때문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간원의 인피가 헌부의 정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바라건대 대사간 이정기, 정언 홍주삼, 지평 이지익, 장령 오두인은 출사하도록 하고, 정언 권격, 사간 박세모는 체차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상이 호군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군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왠가?"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이 노모가 있어 심정이 절박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의 흉측한 상소 때문에 우참찬이 허둥지둥 돌아가버리고 우찬성도 고향을 떠나 대죄하고 있어 그 불행이 어떠한데, 호군이 또 내려가려고 하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내일 이상(李翔)을 인견하고 머물러 있도록 권하려고 하는데, 호군도 열흘 가량만 더 머물러 주면 지금 당장 떠나는 것보다는 낫겠다."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이 가는 것은 사실 어미의 병 때문이지 윤선도 문제와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선도는 원래 버린 사람으로 나무랄 것도 없겠으나 이어 권시의 상소가 있어 사기가 어떻게 돌아갈지 매우 심각했었는데, 다행히도 성상께서 통촉하시고 처치를 옳게 하였기 때문에 보고 듣는 사람치고 기뻐 심복하지 않는 자 누구이겠습니까. 송준길이 비록 물러갔으나 틀림없이 올라올 것이고, 송시열 역시 어찌 감히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도의 상소는 내 이미 통촉하고 있는 터이지만 권시의 상소가 또 그 시기에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가 오랜 기간 시강(侍講)을 했었기 때문에 내 더욱 애석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이번은 사기가 매우 심각하여, 상께서 비록 선처를 하였지만 뒷걱정이 꼭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만약 선도를 엄중히 처치하지 않았다가는 혹시 간사한 무리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별개의 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니, 반드시 그에게 가율(加律)을 해야지만 시시 비비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가 종통(宗統)을 말하였지만 그것은 예문(禮文) 이외의 것으로, 그가 자기 화심(禍心)을 부려보기 위해서 그것을 기화로 여겨 후일 구실을 만들 밑천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 사람에게 가율을 않는 것은 차마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자,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유태가 전일에 소문을 구초하여 선왕께 올리려다가 못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도록 신료들 접견을 못하여 내일 사이로 인견하려고 하는데, 그 소문을 그때 강론했으면 좋겠다."
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李翔)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송시열·송준길은 모두 산림의 숙덕(宿德)으로서 참소자의 입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신 같은 위인이야 일단 물러가는 것 외에는 다시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선도 같은 자로 말한다면 마음의 자취가 드러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지만 그 마음에 간직한 것이 불측하여 다른사람과 가정과 국가에 화를 끼치려는 뜻이 오늘에 와서 더욱 현저해졌으니, 그의 죄 어찌 유찬(流竄)으로 끝날 죄이겠습니까? 그런데 권시가 명색이 유자이고 선왕으로부터 받은 권우(眷遇)의 은총 역시 지극했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그가 두 신하에 대하여 자기 자신 평생지교라고 했으면 당연히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가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치우쳐 흉물스런 인간을 두둔하기 위하여 장황한 말을 늘어놓아 저 스스로 당악 추정(黨惡醜正)의 무리가 되고 말았으니, 아,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바로 그것을 분명히 구별하여 호되게 물리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대하기를 엄히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용서하려는 빛을 보이면 사림의 화가 꼭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신이 또 듣기에 요즘 박세성 일로 하여 누차 준엄한 전지를 내리시고 그리하여 뭇 심정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데, 혹시 전하의 성내심이 중용지도를 잃으신 것은 아닐런지오. 전하의 한 말씀의 실수가 정사의 하자가 될까 염려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 모두가 교회(敎誨)의 뜻이 담기 말이었다. 내 한가한 날을 기하여 면유(面諭)로써 위아래가 서로 의사의 막힘이 없도록 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꼭 그리도 서둘러 물러가려고만 하는 것인가?"
하였다.
5월 6일 경신
영상 정태화가 첫 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이 다시 권시의 파직 문제로 논계(論啓)하였으나, 【이미 정론하였다가 다시 발론한 것임.】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부호군 이유태, 공조 좌랑 이상이 나왔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인견하리니 승지 한 명만 본원에 남아있고 다른 승지들은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라."
하여, 도승지 김수항, 우승지 이은상, 좌부승지 남용익, 우부승지 이경억 그리고 사관 등이 입시하였다. 이상이 아뢰기를,
"지난날 선도 상소에 ‘임금 세력이 아래로 옮겨지고 있다.’ 한 말이 있었고, 권시의 상소에도 그 말을 뒷받침한 내용이 있었는데, 상께서는 갑자기 박세성을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령을 하였으니, 혹시 그가 임금을 업신여기고 명령을 거역하는 뜻이 있는가 의심이 되어 그러신 것은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도 상소가 너무나도 분량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겠는가. 급기야 좌랑의 상소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두 소문의 내용과 우연히 합치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였다. 수항 등이 나와 여러 공문을 읽었다. 재결(裁決)을 마치고 나서, 상이 이르기를,
"호군 상소문을 미처 두루 보지 못했으므로 내일 다시 인견하고 상의해야겠으니 좌랑도 함께 들어오라."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옛 사람 말에 ‘어두운 임금을 원망 말고 현명한 임금 원망하라.’ 하였는데, 전하께서 만약 무엇인가 하시려면 송시열·송준길·이유태를 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용익이 아뢰기를,
"요즈음 소장에 대한 비답이 혹 오래도록 내려지지 않기도 하는데, 비록 수많은 기무가 번다하기 때문이겠으나 그래도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이 없었다.
유태는 공주(公州)에 살고, 이상은 전의(全義)에 살면서 다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고 남의 전토(田土)를 빼앗기도 하였으나, 백성들이 그들 기세가 무서워서 감히 따지는 자가 없었다. 송시열 등이 끌어올렸던 까닭으로 하여 외람스레 주상의 사랑을 받고 한결같이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예조 참판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여 문형(文衡)을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상은 원래 문한(文翰)의 재간이 없는 사람으로서 다만 자기 부형과 가세 때문에 외람되이 문형을 더럽히고 있었는데, 공론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굳이 사양한 것이다.
5월 7일 신유
상이 오늘 다시 이유태를 인견하려다가 연일 수작으로 기운이 불평하다 하여 정원에 하교하여, 모레 나오게 하도록 하였다.
5월 9일 계해
영의정 정태화가 두 번째 정사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의 종실(宗室) 이하, 원역(員役) 이하 그리고 제주관(題主官) 이하 모든 집사는 모두 써서 아뢰라."
하였다. 【연제(練祭) 후에는 으레 상전(賞典)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57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자전의 병후가 회복되었다 하여 약방 도제조 이경석 등을 차등 있게 상사(賞賜)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호군 이유태, 공조 좌랑 이상을 인견하였는데, 좌부승지 남용익 및 사관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유태의 상소문을 내놓고 용익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는데, 읽다가 ‘뭇 신하들이 책임지고 일에 나서는 이가 적다.’ 한 구절에 이르러, 상이 무엇을 이름이냐고 묻자, 유태가 아뢰기를,
"선왕께서는 크게 무엇인가 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신하들이 그 뜻을 받들어 맡아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읽다가 ‘관직을 자주 가는 폐단이 있다.’ 한 구절에 이르러 유태가 아뢰기를,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들이 조금만 불안한 일이 있으면 곧 인피를 하고, 패초를 하면 반드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는다. 아침에는 나오지 않았다가 저녁에는 또 와서 인피하고, 게다가 또 전례를 따라 체직을 청하는데, 무슨 병이 한 시각 내에 드는 병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또 읽다가 서리(書吏)의 폐단에 관한 대목에 이르러 유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서리의 폐단이 너무 많습니다. 관원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르고 오로지 서리에게 온통 맡겨버리기 때문에, 서리들이 그것을 기화로 농간을 부려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 조식(曺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서리 때문에 망한다.’ 하였는데, 이이(李珥)도 그 말에 대하여, 좀 지나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염분(鹽盆)·어전(漁箭) 조항에 이르러 유태가 아뢰기를,
"각 아문과 여러 궁가의 염분·어전에 대하여, 그 세금을 국가가 받아들이면 국가 용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왕조에서 어사를 내보내 그러한 동등의 일을 탐문 규찰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단서가 잡히기도 전에 갑자기 국상을 당했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때 그 어사를 다시 보내 상세히 탐문 규찰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軍兵) 등의 문제는 모름지기 선왕의 마음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고, 전정(田政) 등의 문제에 이르러 유태가 아뢰기를,
"경기도는 토지가 척박하니 전토의 등수(等數)를 감해주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용익이 다 읽고 나자, 상이 이르기를,
"상소 내에 한 말들이 모두 시행할 만한 일들이니 다시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듣건대 선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전혀 술을 가까이 않으셨기 때문에 전하께서도 술맛을 모르신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이다. 선왕께서는 조정 신료 중에 혹시 마시기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나 술 끊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고 경계하셨다."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저으기 듣건대, 일찍이 예를 잘못 논의했다 하여 물의가 매우 일고 심지어 소를 올려 내용을 분석 변명하면서 이어 신의 죄를 논한 자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신이 그 원소(原疏)를 보지 못해 내용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강 줄거리를 보자면, 신이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한 사람인 양했다는 것 같은데, 신이 지은 죄가 어쩌면 거기까지 갔습니까. 남의 신하가 되어 그러한 죄명을 받았으면 즉시 몸이 죽고 겨레붙이가 다 죽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감히 머리와 얼굴을 들고 다른 사람들마냥 있을 것입니까. 신은 감히 집에서 쉬고 있을 수도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또 감히 무릅쓰고 국문(國門)에 들어가 사패(司敗)에다 몸을 맡길 수도 없으니, 미혹과 착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길가에 나와 엎드려 삼가 조정 명령을 기다리기로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우선 신의 직명부터 삭탈하시고 신을 법대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를 보고 나니 너무 놀랍고 의아스러운 마음이다. 아, 임금 신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제일인데, 경이 만약 내 마음을 안다면 어찌 그렇게 당찮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경의 거취가 국가와 관계가 있으니, 빨리 멀어진 마음을 돌리기를 내 날로 바라고 있다."
하였다. 【소가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래인데 이제야 비로소 비답이 내려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5월 11일 을축
이경석(李景奭)을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최관(崔寬)을 정언으로, 윤집(尹鏶)을 대사성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각각 삼고, 고 영의정 김육(金堉)에게는 시호 문정(文貞)을, 고 좌의정 조익(趙翼)에게는 시호 문효(文孝)를 추증하였으며,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그리고 수릉관(守陵官)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에게는 가덕(嘉德)을, 시릉관(侍陵官) 오이공(吳以恭)에게는 숭정(崇政)을, 오준(吳竣)에게는 숭록(崇祿)을 【제주관(題主官)이라 하여 가자(加資)하였음.】 각각 가자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세 번째 정사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상의 병후가 회복된 후 약방 도제조 이하를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가가, 길사 흉사 간에 으레 종묘에 고하여왔는데, 지난날 성상 체후가 편찮으셨을 때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걱정했다가 다행히 천지 신명과 종묘 사직의 도움으로 금방 나으셨으니, 종묘에 고하는 일을 말 수는 결코 없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이, 권시의 파직 건을 놓고 연거푸 아뢰고, 또 아뢰기를,
"성상 체후가 정상 회복이 되었으니 전에 없던 경사입니다. 종묘에 고하는 전례가 있으니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종묘에 고하는 예를 서둘러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 등의 죄악에 대하여는 신인(神人)이 함께 분히 여기는 바이며, 나라 전체가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 끝까지 형장(刑章)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름이 편배(編配)이지 그마저도 사실과 다르게 지금까지도 연곡(輦轂) 아래서 편안히 쉬게 하고 있어, 공론이 불평에 잠겨 있기 오래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평상인과 똑같이 노고를 보답하는 은전으로 대우할 것입니까. 바라건대 후성 등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다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불허하고, 권시 만을 파직하였다.
부사직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돌아갈 것을 빌고, 또 새로 승진된 자급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경을 다그치지도 않는데 왜 꼭 영원히 가버리려고만 하는가? 사양 말고 서울에 있으면서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부응교 이시술(李時術),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부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윤선도는 원래가 일개 흉물스런 인간으로서 다소 문변(文辯)은 있으나 음탕과 사치 때문에 공론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는, 원한을 기르고 독기를 품어 암암리에 틈을 노리면서 조정을 상대로 일을 내려고 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급기야 오늘에 와서 위태로운 말로 상대의 죄를 만들고 선량한 사람들을 모함하려고 한, 그 깊이 간직했던 참혹한 뜻을 가릴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태양이 위에 계셔서 즉시 유배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사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 독염(毒焰)이 미치는 곳에 유현(儒賢)이 흩어지고 사설(邪說)이 맞장구치게 만들었으니, 그로 인한 화의 조짐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권시로 말하면 양조(兩朝)의 예우를 받고 총애로 발탁된 신하로서 역시 이렇게 그릇된 논리를 전개하여 그 자신 참적(讒賊)을 두둔하고 있다는 이름을 달게 받고 있으니,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그가 선도를 논하면서 처음에는, 남을 헐뜯고 현자를 시기하고 미워한다고 했다가 금방,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허여했으며, 송시열을 논하면서는 역시 처음에는, 그의 충직하고 진실된 마음이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비는 터전을 만드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가 다시, 언자(言者)에게 죄를 씌우고 선비를 죽이는 사람이라고 지목하고 있어, 한 사람 말이면서 마치 두 입에서 나온 것 같으니, 천하에 그러한 논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릇 선도를 위하여 기치를 세우는 자들은 모두가 예를 논한다는 것을 빙자하여 종통이라는 말로 한 세상을 공갈 협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을 못하게 하는데, 신들이 이에 대하여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3년을 입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어쩌다 있는 일인데, 4세(世) 적장(嫡長)이라야지만 그를 위해 3년을 입습니다. 차적자(次嫡子)로서 승중(承重)을 하였으면 그도 장자(長子)와 다를 것이 없지마는, 그의 형이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거나 연고가 있어 폐기된 자가 아니면 다시 이중으로 입는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승중을 하고도 3년을 입지 않는 경우에 관한 설들이 매우 많은데, 만약 꼭 적자 적자끼리 서로 이어, 부모가 자식을 위해 꼭 3년을 입는 경우에 한해서만 정통이 전해진다면 고금 천하에 정통이 끊기지 않는 국가가 드물 것입니다. 어찌 복의 강쇄(降殺)로 하여 종(宗)이 둘이 되고 정통이 끊기는 혐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왕의 제도는 시대마다 연혁이 있어 명(明)나라 및 아조(我朝)에 와서는 애당초 장자를 위해 3년을 입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 정통이 그 때문에 끊길까를 의심했다고 들은 바는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은,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는다.’ 한 그 기록만을 보고, 둘째부터서는 통틀어 서자라고 하는 뜻은 밀쳐버리고,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는다고 한 그 ‘서(庶)’를 첩의 자식인 서자 호칭으로 단정을 내리고는, 그로 하여 성상의 귀를 성나게 만들고 한 시대를 의혹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이 이미 그러한 바에야 그 논의인들 어떻겠습니까?
사설(邪說)을 비록 물리쳐도 정사(正士)는 오지 않고, 현자를 좋아하면서도 현자 등용의 실효가 없어, 조정이 도를 믿지 아니하고 나라에 긍식(矜式)이 없으며,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어버리고 끝에 가서 쇠란의 길로 함께 가는 것을 면치 못한다면, 이 어찌 천고의 지극한 한스러움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정의 구별을 더욱 분명히 하고 참적의 입을 영원히 막아 유현들을 빨리 돌아오게 함으로써 나라 기반을 공고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들의 정성이 가상하다. 경계한 내용에 대하여 어찌 깊이 생각지 아니하겠느냐."
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가 치사(致仕)를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2일 병인
사헌부가 아뢰기를,
"의관 양제신(梁濟臣)이 의약(議藥)의 노고가 있었다 하여 수령을 제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 처음으로 정사에 임하여 상을 신중히 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의 재능은 묻지도 않고 다만 일시적으로 어느 기술에 능하다 하여 그에게 곧 자목(字牧)의 임무를 맡긴다면, 후일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실원(曹實遠)이 양조(兩朝)의 어필(御筆)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6품직을 제수하라는 명령도 하였는데, 상을 너무 헤프게 내리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 명령들을 다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르지 않았다.
5월 13일 정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종묘에 고하는 문제를 전번에 이미 아뢰었고 대간이 지금 또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아, 뭇사람들이 너무 민망하고 답답한 마음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따라야 할 일이었다면 처음에 왜 따르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심이 아뢰기를,
"강화도에는 의원이 없어서 급한 병이 있거나 혹 군사들이 병이 있어도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송도(松都)에 하는 예대로 월령 의관(月令醫官) 한 사람을 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유심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조 시절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으면서 1천여 섬의 미수곡을 탕척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강화도에 조곡(糶穀) 미수조가 3백여 섬이 있는데, 모두가 유망(流亡) 아니면 절호(絶戶)로 그 인족이 부담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를 만약 탕척하도록 허락해주시면 백성들 마음에 위안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백성들에게 위안이 될 일이라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지금 그를 탕척하도록 하라. 그러나 후일에 이를 전례로 삼지는 말라."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중용(中庸)》을 써서 들여오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앞으로 만약 경연을 열 일이 있으면 시강으로는 부제학 유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인조조에서 정경세(鄭經世)에게 했던 예대로 오래도록 본직을 맡기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15일 기사
상이 친히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이날 새벽 제사 때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비가 쏟아져, 정원이, 대신 행하게 하거나 아니면 시각을 잠시 물릴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날씨를 살펴 잠시 시각을 물리되 만약 개지 않을 경우 마냥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윤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의주 부윤으로 각각 삼았다.
5월 16일 경오
부교리 김만기가 상차하여, 유후성(柳後聖) 등을 석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고 또, 정원이란 그 직책이 임금 명령을 미덥게 출납하는 곳인데, 지금 이렇게 불합리한 명령에 대하여도 그것을 제때에 복역(覆逆)을 못했으니, 이는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곳으로 모시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등이, 옥당의 논척이 너무 심하다 하여 소를 올리기를,
"후성 등은 죄명이 비록 중하기는 했지만 당초에 이미 그 죽음을 면제하였고, 또 자후(慈候)가 편찮으셨던 까닭에 그를 귀양살이로부터 소환하여 의약(議藥)의 대열에 드나들게 했는데, 그것은 사세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지금 와서 자후가 정상을 회복한 후 그가 은유(恩宥)를 받은 것은 그 역시 성상께서 형상(刑賞)을 참작하는 한 방법으로 하신 일이었으므로 어리석은 신들의 소견으로 애당초 복역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결국 임금을 허물없게 모시지 못한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고, 이어 체직을 빌었다. 상이 답하기를,
"삼사(三司)가 논한 것이 비록 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겠으나, 남의 자식된 지극한 정으로 말하자면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데, 무엇이 아까워 그가 의약한 노고를 보답하지 않을 것인가. 옥당의 차자 내용에 대하여 나로서는 그 뜻을 이해 못하겠다. 경들은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직을 살피라."
하였다. 만기 등이 다시, 정원 상소의 비답에 미안한 하교가 있었다 하여 소를 올리고 전척(鐫斥)을 내릴 것을 빌었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5월 19일 계유
비국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한성부로 하여금 각부(各部)에 신칙하여 성 안의 전염병 환자를 낱낱이 찾아내어 동서 활인서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고, 약물은 의사(醫司)에서 공급하게 하며, 그 중의 식량이 떨어진 자에게는 상평청에서 제급하여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0일 갑술
예로부터 있어오기를,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한 뒤에는 한림(翰林) 한 명이 날마다 나와서 근무하게 되어 있는데, 이때는 한림으로 송창(宋昌)·유명윤(兪命胤)만이 상하번(上下番)으로 되어 있어 타인에게 미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명윤의 아버지인 유계가 현재 부제학으로서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임하고 있어, 유계가 만약 수찬관에서 체임이 되면 계속 옥당(玉堂)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총재관인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춘추관 임무만을 줄이고 경악(經幄)의 장 자리는 갈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으니, 본관(本館) 및 정조(政曹)037) 로 하여금 전례를 고찰하여 변통을 하게 하소서."
하니, 춘추관 및 이조가 아뢰기를,
"춘추관이 상피 때문에 그 겸대(兼帶)를 줄였던 옛 규정은 비록 없지만, 을미 연간에 부제학 김익희(金益熙)가 지춘추 이후원(李厚源)과 상피가 되어 겸대를 줄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비슷한 전례가 되겠으니, 바라건대 유계의 수찬관 임무를 줄이고 실록청 겸춘추로 재가를 내리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1일 을해
윤집(尹鏶)·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이유태(李惟泰)를 공조 참의로, 유명윤(兪命胤)을 대교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응교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집의로, 허적(許積)·홍명하(洪命夏)·김남중(金南重)·채유후(蔡𥙿後)를 실록청 지춘추로, 윤순지(尹順之)·이일상(李一相)·이응시(李應蓍)·오정일(吳挺一)·정지화(鄭知和)·김수항(金壽恒)을 겸 동지춘추로, 남용익(南龍翼)·오정위(吳挺緯)·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이은상(李殷相)·조귀석(趙龜錫)·목겸선·곽지흠·이후(李垕)·오두인(吳斗寅)·심황(沈榥)·정박(鄭樸)·김수흥(金壽興)·박세모·최일(崔逸)·권격(權格)·김만기(金萬基)·이무(李堥)·경최(慶㝡)·여성제(呂聖齊)·민광소(閔光熽)·심세정(沈世鼎)·이익(李翊)·홍주삼(洪柱三)을 겸춘추로 삼았다.
5월 22일 병자
총재관 이경석이 아뢰기를,
"실록 찬수의 일이 하루가 급하기 때문에 신이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자리를 열어 당상(堂上)·도청(都廳)·낭청(郞廳) 등 관원을 차출하고, 겸춘추에 있어서는 해당 아문이 되도록 빨리 재가를 받도록 했던 것은, 사사(史事)를 중히 여겨서였던 것인데, 오늘 나와 숙사(肅謝)한 자가 한 명도 없으니 앞으로 얼마나 늦어질지 조짐을 알 만합니다. 바라건대 이조·병조로 하여금 독촉을 하여 내일 중으로는 빠짐없이 숙사하고 회동(懷同)의 자리가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 태만한 꼴이 너무 해괴하다. 모두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여 내일 어떤가를 보아야겠다."
하였는데, 이 일로 하여 장령 오두인·곽지흠, 지평 이무·경최, 집의 박세모, 정언 홍주삼이 실록청 겸춘추로서 숙사하지 못했다 하여 모두 인피하고 체직되었다.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이때 훈련 도감 도제조였는데 언젠가, 훈련 도감의 장관은 오래 맡겨야 한다고 아뢴바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치화가 천총 이박(李璞)을 영장으로 삼았는데, 이에 지원이 화를 내어 경연 석상에서 자신을 탓하며 체임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남에게 무게 있게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체통이 깎이게 만들었으니 사실은 신의 죄이지만, 치화의 도리로서야 어디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하였는데, 이번에 치화가 병을 내세운 것은 그 일 때문에 그런 것이다.
5월 23일 정축
영의정 정태화가 아홉 번째 정사하니, 상이 동부승지 조윤석을 보내 친절히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 나오지 않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 심지원, 예조 판서 윤강, 이조 판서 홍명하, 한성 판윤 이완(李浣),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 예조 참판 이일상, 이조 참판 이응시, 대사간 이정기, 좌부승지 윤집이 입시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상의 안질이 겨우 차도가 있는데 요즘 친히 제사를 모시면서 곡읍(哭泣)을 과도히 하였으니 틀림없이 더칠 것입니다. 지금부터 완전 회복될 때까지는 제사를 모두 대신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까닭없이 대신 행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병세를 보아가며 할 것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신은 사무에는 전연 어두워 일을 대하면 아득하기만 합니다. 영상이 나랏일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근간에 인입(引入)한 지가 오래 되어 서류가 적체되고 많은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상께서 만약 자주 유지를 내려 속히 출사하도록 하시면 어떻게 감히 한결같이 인입만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혹시 불안한 일이 있어 인질(引疾)한 것은 아닌가?"
하여, 지원이 아뢰기를,
"무슨 불안한 일이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흥덕(興德)의 파선 건으로 감색(監色)038) 과 사공 그리고 그 곁꾼들에게 이미 누차에 걸쳐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아직도 직고를 않고 있습니다. 색리나 사공이야 비록 고의로 파선할 수도 있겠으나, 수많은 그 곁꾼들이야 함께 모사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데, 그 모두가 곤장 아래서 죽게 된다면 그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무언가 변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앞장섰던 자와 비록 차이가 있겠으나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숨까지 잃게 되면 그 역시 애처로운 일이니, 곁꾼들은 법에 비추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국가 기강이 날로 퇴패하여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송자(訟者)들이 지고 난 후에는 고약한 말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니,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한 일입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옥송(獄訟)뿐 아닙니다. 모든 일에 청탁을 앞세웠다가 혹 그대로 시행이 안 되면 헐뜯는 말이 뒤따르는데, 국가 기강이 어떻게 설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법관들이 자기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고, 또 혹시 원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직책 수행을 충실히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헐뜯는 자가 있으며, 훼담이 한 번 있었다 하여 금방 사면을 하는데, 그 사면이 비록 염우(廉隅)를 핑계로 한 것이지만 전철을 답습하면서 지지부진한 원인은 참으로 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큰 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청탁이 분분하니 관절(關節)039) 을 엄히 금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관절 금지에 있어서는 선왕조에서도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고 발각되어 정배된 자까지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금억(禁抑)의 뜻을 다시 신명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발각되어 정배된 자가 누구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비록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이원진(李元鎭)·김좌명(金佐明) 등이 일찍이 그 때문에 유배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관절은 현장을 적발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송희업(宋希業)이 일찍이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있으면서 맨 처음 그 일을 폭로하여 그 당시 이름있는 재상들이 많이 죄를 당했는데, 그 때문에 그 후 희업은 다시 벼슬길이 트이지 않고 말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문에 주의(注擬)를 않았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희업이 나이가 늙었기 때문에 임명을 다시 아니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연로자를 과연 다 임명하지 않고 있는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관절은 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양사가 입시하였으니 상께서 하교하여 엄히 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유후가 아뢰기를,
"관절을 절대 못하게 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낱낱이 금할 것입니까. 오늘 입시한 제신들이 이것을 계기로 서로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 그 폐단이 자연 없어질 것인데, 왜 꼭 금령을 두어야만 합니까?"
하였다. 정기가 아뢰기를,
"관절은 야무지게 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금령이 있으면 사부(士夫)가 어떻게 감히 가벼이 범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관아에 말하여 만약 관절 금령을 범한 자가 있으면 즉시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요즘 여러 궁가에서 사사로이 무역을 하고 있는데, 그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호피(虎皮)·표피(豹皮) 같은 물건을 공공연히 억지 배정하고는 시장의 가게를 수색하므로,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일찍이 선왕조에서는, 현장을 발견하는 대로 법사에 알리어 금지하도록 해야겠다는 뜻으로 아뢴바 있었는데, 그때 상께서는 ‘왜 그리도 약해빠진 말을 하는가? 법사의 권위를 빌릴 필요없이 직접 나에게 적발 보고하면 내가 엄중히 다룰 것이다.’ 하여, 그러한 승전(承傳)을 받고 난 후로는 그 폐단이 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일이 오래되어 금령이 느슨해지자 그릇된 습속을 다시 답습하여 억압적인 매매로 원성을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고, 이완은 아뢰기를,
"시장에서 값이 비싼 물건을 궁가가 억압적으로 염가 매입을 하면, 시장 상인들은 각기 값을 보태서 원금 지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 시대에 승전을 받은 사실이 있으면 지금도 그것을 거듭 밝혀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그밖에 시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받은 승전에 대하여 똑같이 신명하여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전조(銓曹)에 봉직하고 있는데, 수령들을 제배할 때 현감·군수는 그런대로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 메울 수가 있으나, 목사·부사는 그 후보 추천 때 인재가 없는 걱정이 절실합니다. 선왕조 전례에 따라 주목(州牧)을 맡길 만한 인물을 대신들이 의논 추천케 하여 조용(調用)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5월 24일 무인
상이, 숙휘 공주(淑徽公主) 집에 흙을 파고 메우고 할 일이 있다 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해조에 분부하여, 2일 한정으로 도방군(到防軍) 5백 명을 조발하여 부역을 하게 하라고 명하여, 좌부승지 윤집이 아뢰기를,
"도방군을 사가(私家)에 일을 시킨다는 것이 이미 법례(法例)가 아니며, 더구나 이 무더위에 먼 곳으로부터 새로 온 군대들을 뜻하지 않게 과외의 토역(土役)을 하게 하면 원성도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전에도 연신(筵臣)·대관(臺官)들이 그러한 말들을 많이 하여왔는데, 신도 해방(該房)에 봉직하고 있는 몸이기에 구구한 소회를 감히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할 곳이 대단히 많은데 5백 명을 2일 동안만 시키자고 한 것도 사실은 많이 참작하여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뢴 내용이 이러하니 그러면 1백 명을 감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본직 및 겸직을 체임할 것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아 지금이 어느 때인가? 어렵고 위태로운 일들이 매우 많고 나랏일도 날이 갈수록 글러만 가는데, 이러한 시기에 경이 그 재능을 가지고 서서 보기만 하고 불고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경을 만나 의논하여 결정하고 싶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뜻을 깊이 생각하여 지극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5월 25일 기묘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이원정(李元禎)·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윤원거(尹元擧)·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실록청이 아뢰기를,
"실록 찬수가 끝나면 인출(印出)할 종이를 양남(兩南)에다 나누어 배정해야 할 것인데, 다만 시기가 시기라서 백성들 힘을 조금이라도 펴줄 수 있으면 펴주는 것이 좋겠기에 호조 판서 허적(許積)과 상의하였더니, 본조에 저장되어 있는 종이를 당겨다가 이어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외방에다 나누어 배정시키지 말아 단 일분이나마 백성들 폐단을 덜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전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소를 남겨두고 가버렸다. 문거는 고 대사간 윤황(尹煌)의 아들인데, 윤황은 조정에 있을 때 강직하기로 소문이 있었다. 병자년 이전에는 누차 강경한 상소로 척화(斥和)하여 오다가 남한 산성의 포위가 풀린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벼슬을 않고 세상을 마쳤던 것이다. 문거도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래 부사를 그만두고 돌아간 후부터서는 비록 제수 명령이 있어도 나오지 않았다. 평온하고 조용하게 자신을 지켜 주위로부터 칭송이 있었으며, 송시열·송준길 등이 꼭 그를 불러다 함께 일하고 싶어하였지만 문거는 발의 병을 핑계하고 끝까지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 국상이 있은 후 들것에 실려 궐하에 왔었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 머물러 있도록 권고하였으므로 감히 금방 물러가지 못하고 연기(練期)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누차 소를 올려 돌아갈 것을 청하였지만, 상은 위로의 유지만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때 와서 소를 남겨두고 시골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 세리(勢利)에 담박하고 끝까지 염치를 지켰던 점은 높이 살 만한 것이었는데, 예를 논의함에 있어서도 시열 무리와 의견을 달리한 것들이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다시 열 번째 정사하였는데, 상은 다시 우부승지 이경억을 보내 돈후히 타일렀다.
5월 26일 경진
영의정 정태화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상이 불허하였다.
5월 27일 신사
이 해에는 각처 유민들로 성중에서 구걸하고 있는 자들이 많아 상평청이 3월 10일부터 5일 간격으로 건량(乾粮)을 주어 진구하여 왔었는데, 이때 와서 보릿가을이 이미 닥쳤다 하여 드디어 진구를 정지하고 각자에게 15일간의 식량을 주어 제고장으로 보냈다.
의금부가, 자씨(姊氏)를 시해한 죄인 막립(莫立) 추국 문제로 삼성(三省) 회좌를 청하였는데, 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막립이 범한 죄는 강상(綱常)의 죄와는 차이가 있으니, 삼성이 회자하는 예를 쓸 것이 아닙니다.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니, 영돈녕 이경석이 주장하기를,
"누님을 살해한 것이나 형을 살해한 것이나 윤기(倫紀)의 큰 이변인 것은 똑같습니다. 선왕조에서도 형제간에 서로 죽인 자가 있었는데, 그때 안국(按鞫)했던 것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의 주장은,
"윤기의 이변이 비록 중대한 문제이나 강상과는 이미 차이가 있으니, 본부가 추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여, 상이 금부로 하여금 전례를 찾아보도록 하였는데, 금부가 아뢰기를,
"본부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지난 무자년에 형을 시해한 죄인 김응철(金應哲)이 본부로 끌려왔는데 즉시 전례에 의하여 삼성이 회좌하여 추국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고, 그 밖에도 윤기에 관계된 죄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종전부터 삼성이 회좌하여 안옥하였습니다. 대체로 강상이란 바로 삼강 오상(三綱五常)을 말한 것으로 윤기를 범한 죄이면 그것이 오상 중에 포함되어야 할 것 같고, 따라서 윤기를 범한 죄인은 삼성이 회좌하여 추국하는 것이 잘못된 예는 아닐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경석의 논의대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막립은 정주(定州)에 살면서 도둑질을 하는 자로서 자기 누님이 자기 어머니 소유의 전토를 팔고는 자기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을 항상 원망하여 오다가, 자기 누님과 원수 사이인 해봉(海奉) 등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면서 나무방망이로 자기 누님 부처(夫妻) 및 그 자녀 등 모두 8명의 식구를 때려죽였는데, 지금 와서 그 사실이 발각되어 능지 처참을 당한 것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등지에 5월 7일부터 13일까지 큰 비가 쏟아지고 바람에 뇌성까지 겹쳤으며, 비가 갠 후에는 된서리가 연거푸 내려 초목이 모두 마르고 목화·기장 등이 모두 동해를 입었다.
5월 28일 임오
장령 윤비경이 남원 부사 홍주일(洪柱一)을 탄핵하기 위하여 지평 심재(沈梓)에게 간통(簡通)을 하였는데, 심재는 여러 동료가 서로 모여 논의할 때를 기다리자고 답하여, 두세 번 왕복하다가 비경이 드디어 경시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심재도 따라 인피하였다. 그리하여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처치하기를,
"홍주일이 비록 청로(淸路)는 막혀 있으나 그의 이재(吏才)가 아까운데, 이미 부임한 뒤에 논하려고 하는 것은 자못 타당치 못한 일이며, 남을 논하는 도리가 비록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료가 간통을 했는데 억지로 지연시키려 한 것도 명백한 태도가 아니니, 모두들 체차해야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좌찬성 송시열이 전일 하사한 음식물을 사양했다 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본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다시 실어보내게 하라고 명하고, 좌참찬 송준길도 시골로 간 지 이미 오래여서 끼니 해결이 어려울 것이니, 그에게도 똑같이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승지 네 사람에게 명하여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니 도승지 김수항, 좌승지 이은상, 우부승지 이경억, 동부승지 조윤석이 입시하여, 수항이 예조의 기우제에 관한 건을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가뭄이 이렇게 심하여 며칠만 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가 가망이 없겠습니다. 그전부터 이러한 때면 혹 친제(親祭)를 한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성상 체후가 편치 못하시니, 대신(大臣)을 보내 대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우제를 모셔도 비 내릴 생각은 막연하니, 민사(民事)가 참으로 민망하다. 하늘을 감동시키고 재이를 타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할 것이나, 내 병이 낫지 않아 친행할 수 없으니 종묘·사직에 대신을 보내 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또, 비가 내렸다는 강원도 장계를 가지고 주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인데 이렇게 고르지 못하니 괴이한 일이다."
하였고, 수항이 또 상의 체후가 편치 못하다 하여 앞으로의 삭제(朔祭)도 대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편을 보아가며 할 일이다."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옥당이 상차하여 송시열을 소환하라는 뜻을 아뢴바 있는데, 상께서 별도의 유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안질이 있어 손수 쓸 수가 없으니,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경들이 상의하여 내용을 꾸며 유지를 내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5월 29일 계미
이보다 앞서, 공조 참의 이유태가 두 번 사직소를 올렸으나 상이 불허하였는데, 지금 와서 음식물을 내리자, 유태가 다시 상소하여 체직을 빌고 또 음식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말을 실행하고 싶은데 그대가 직에 있어야지만 서로 의논할 수가 있겠으니, 마음 편히 직을 살피고 내린 하찮은 물건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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