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3권, 현종 1년 166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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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계미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병이 중하여 계사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한 뒤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자,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만기가 허적의 소장에 대한 비답을 보고 비록 범범하게 논한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으나 내심 불안한 생각을 하다가 끝내 체직된 것이다.

 

10월 2일 갑신

상이 여차(廬次)에서 뜸을 떴다. 도승지 오정일이 ‘옥체가 뜸을 뜨시느라 생긴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앞으로 거행할 동향 대제(冬享大祭)는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니 섭행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불허하였다. 정일이 정원에 물러나와 또 섭행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병으로 오래도록 친제의 예를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목숨이 끊어지기 전이라면 어찌 번번이 섭행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약방(藥房)이 두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원두표가 빈청에 나와 두 번째 아뢰기를,
"친히 재전(齋殿)에 임어하여 공경히 제사를 받드는 것은 소소한 효도이고, 옥체를 조섭하여 위로 종묘와 자성(慈聖)을 받드는 것은 큰 효도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니 그제야 섭행을 허락하였다.

 

10월 4일 병술

태백성이 신지(申地)에 나타났다.

 

호조 판서        허적이 세 차례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고, 또 병으로 직무를 보기 어렵다는 정상을 진달하자 비국에 계하하였다. 비국에서 ‘허적의 병세는 대단치 않고, 이런 흉년을 당하여 상하가 모두 경황이 없는 때에 굶주리는 자를 진휼하고 공부(貢賦)를 덜어주는 일이 하루가 급하고 전후로 내린 상소에 대한 비답은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결같이 인피하여 물러나려고 하는 것 또한 너무 지나친 듯하니 속히 출사하게 하라.’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정해

황준구(黃儁耉)를 헌납으로, 이익(李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6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금부가 아뢴 금부의 평의(評議) 결과에 따라 무과 일소(一所)의 시관 조필달(趙必達)·이연년(李延年) 등이 차비관이 사정을 부리는 것을 금하지 못한 책임으로 모두 그 직을 삭탈하고, 차비관 등은 충군하거나 정배하였다.

 

10월 7일 기축

진시(辰時)부터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사방이 침침했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본부에서 개좌(開坐)했는데 충주(忠州)에 사는 백성 80여 명이 정장(呈狀)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수년 전 옹주의 집 도장(導掌)이라고 하는 자가 본면의 황무지에 농장을 설치하고 민전(民田)을 침탈하여 차지할 뿐만 아니라 날로 증가시켜 온 면내의 산천을 모두 옹주 집안 소유라고 하면서 꼴베고 물대는 것도 일체 금지하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매질을 가하며, 심지어는 강제로 세금을 거두는데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자에게까지 모두 세금을 내어야만 허락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멋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산골의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가 없도록 하였으니, 해당 도의 감사로 하여금 명백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그리고 이른바 도장이란 자는 해당 조(曹)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치죄하게 하소서.
전남도(全南道) 낙안(樂安)에 사는 상주(喪主) 김치일(金致鎰) 역시 정장하기를 ‘전년 6월에 아비가 도적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상해를 입었으나 죽지 않은 종이 도둑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형인 김상일(金尙鎰)이 사유를 갖추어 관에 고발하였다. 그러자 군수가 처음에는 적당을 잡아왔다가 청탁을 받고는 일부러 그 옥사를 늦추므로 감사에게 호소하여 추관(推官)을 옮겨 배정해 주도록 청했다. 그랬더니 군수가 자기를 헐뜯는다고 노하여 도리어 우리를 가두어 강제로 무고(誣告)했다는 공초를 받아내고, 또 겸관(兼官)을 사주하여 감사에게 거짓 보고를 한 뒤 갑자기 옥사를 뒤집고 적도를 석방하였다. 이에 또 계문하자 해조가 회이(回移)하면서 원고를 형추하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감사가 다섯 차례의 형신을 시행하고, 끝내 곤장을 쳐서 창성(昌城)에 유배했으니 매우 원통하다’고 했습니다. 이 옥사는 이미 살인과 관계되었고 방면한 3인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는 듯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억울한 점이 있다면 모든 옥사를 분명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는 성조(聖朝)의 법도가 아닙니다.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전후의 문안과 소장 중에 고발된 사람들을 동시에 경옥(京獄)에 올려보내게 해 명백하게 심의하여 처결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전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경항(金慶恒)은 판상(板商)과 결탁, 황장목(黃腸木)058)  을 몰래 벤 것이 아주 많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경항은 지난 겨울 취리(就理)하여 조사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그 당시 조사관이 눈이 많이 왔다고 핑계대고 끝내 직접 조사하지 않고 범범히 산지기 등에게 공초를 받아 탐관오리로 하여금 형별을 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실상이 다 드러났으니 조사관이 사정(私情)을 따라 공도(公道)를 무시한 죄가 매우 무겁습니다. 그 당시의 조사관을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도신(道臣)이 조사관의 부실한 보고에만 의거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한 것 또한 매우 해괴한 일이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경기 감사가 조사해 아뢰기를, 숭의전(崇義殿) 근처에 몰래 묘를 쓴 것이 두 기이고, 송도(松都)의 왕태조릉 근처에 몰래 쓴 묘가 무려 170총(冢)이나 된다고 하였다. 예조가, 거리의 원근에 따라 평평하게 만들거나 그대로 두거나 혹은 이장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판하하였다.
"몰래 묘를 쓰는 것은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니 모두 파내어 국법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해조의 의견 역시 한가지 방도이니 능묘에서 아주 가까운 것은 있는 대로 적발하여 파내고 기타는 원근을 논하지 말고 모두 평토를 만들며, 이후에 함부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해당 관리는 엄한 율을 면하기 어렵다는 뜻을 본도에 신칙하라."

 

10월 8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9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0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1일 계사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사면하였다. 처음에 치화가 공조 판서로서 산릉 석물의 역사를 오로지 관장했었는데, 틈이 발생하자 대간이 탄핵하여 다른 당상들과 함께 취리(就理)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한가히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명으로 서용하니, 대간이 그만을 홀로 서용함은 온당치 않다고 오래도록 논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또 이조 판서에 임명하니, 치화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소를 올려 사면한 것이다.

 

처음에 목조(穆祖) 황고(皇考)의 능이 삼척(三陟) 땅에 있었는데 조종조부터 그 정확한 곳을 알지 못했다. 이침(李郴)이란 자가 상소하여 제말로 찾았다고 하면서 관원을 보내 봉심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강원 감사 이후산(李後山)으로 하여금 봉심하고 계문하게 하였다. 후산이 치계하기를,
"이침의 상소는 애당초 공에 따른 상을 바란 것으로 실로 근거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옛날 조종조에 연대가 멀지 않은 때에도 다방면으로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는데, 지금 와서 어찌 갑자기 상고할 수 없는 소문에 따라 수백 년 뒤에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황당하므로 영원히 이 폐단을 막아버리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일을 예조에 내리자 예조가 회계하여 본도로 하여금 이침을 죄주도록 청하니, 상이 판하하기를,
"지금 바로 죄주는 것은 본뜻에 맞지 않는 듯하다. 앞으로 이런 무리가 있을 경우 무거운 율로 다스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삼가 《여지지(輿地志)》를 상고하건대, 목조(穆祖) 황고(皇考)의 묘가 부(府)의 서쪽에 있다는 글이 있다. 《여지지》는 성묘조에 만들어져 국초와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 혹시 알고서 책에 실은 것인가? 이미 알았다면 봉식(封植)하고 수묘(守墓)하는 조치를 취했을 터인데 지금까지 적막하니 무슨 까닭인가?

 

10월 12일 갑오

송시열을 이조 판서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윤집(允鏶)을 병조 참지로, 이민서(李敏叙)를 부교리로 삼았다.

 

사복 정(司僕正) 유정이 병으로 사직한 지 30일이 되니, 해조가 관례에 따라 체직시키기를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는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되니, 체직시키지 말고 재촉하여 직임을 보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유정이 사복시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직무를 잘 보아 특별히 본시(本寺)의 정에 제수되었다. 대간이 내시와 결탁, 재능을 팔아 이 자리를 얻었다고 탄핵하여 달이 넘도록 논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에 유정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병으로 정사(呈辭)하고 사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것을 알고 이런 하교가 있었다.

 

예조 판서 윤강 등이 영릉(寧陵)의 석물을 고쳤다.

 

교리 홍주삼(洪柱三), 수찬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렸다. 먼저 재변이 극심하여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이 참혹한데도 문무 관원들은 태만해 진작시키지 못한 폐단을 진술하고, 경연이 오래도록 폐지되어 상하의 정의가 막혔으니 여러 가지 번거로운 형식을 버리고 자주 소대하라는 것과, 조종조에서는 진신으로 체포된 이들이 가벼운 형신도 받은 일이 없었는데 근일의 죄수는 정상이 조금 긴요한 것이면 문득 엄한 형벌을 가하는데 대체로 중형으로 범죄를 그치게 만든다면 어찌 한번 쾌하지 않겠는가마는 3백 년 동안 인후함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던 기품이 지금부터는 쇠퇴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남노성(南老星)이 감히 순간적인 분을 뿜어 터무니없는 말을 나이 많은 대신에게 가했는데도 조정에서는 추고만 하고 양사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잘못과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상에 장막을 만들라는 명이 계셨는데 이는 흉년으로 굶주리는 경기 백성들을 더욱 곤궁하게 하는 것이니 선혜청으로 하여금 그 비용을 주도록 해서 백성들에게 역사(役事)시키지 말라는 것을 진달하고, 또 간원이 청한 차비문(差備門)에 하교하는 일을 중지하라는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인데도 오래도록 재가를 머뭇거리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아뢰었다. 상이, 차자의 내용이 진정으로 깨우치는 말이니, 체념하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실천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집의 심세정(沈世鼎) 등이 아뢰기를,
"남노성이 원로 대신을 모욕한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었으나, 위에서 이미 추고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신들은 그 함서(緘書)의 답변을 보고 조처하려고 하였는데, 옥당에서 올린 차자의 초안을 보니 그 내용에 신들의 불성실한 직무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0월 13일 을미

이조 판서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있으므로 특별히 유지를 내려 불렀다. 일찍이 육경에게는 유지를 내리는 일이 없었는데 정원이 품계(稟啓)하여 이명이 있었다.

 

대사헌 송준길이 회덕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정원에 하교하여 조리하고 올라오라는 뜻을 특별히 유시하게 하였다.

 

헌납 황준구(黃儁耉), 정언 정륜(鄭錀)이, 즉시 남노성(南老星)을 논핵하지 않아 옥당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이, 남노성의 일은 자신의 숙부와 관계된 일이어서 그 사이에서 시비를 논할 수도 없고 편안히 있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의 홍주삼(洪柱三) 등이 처치하기를,
"터무니없는 말이 말할 수 없이 놀라우니 사체로 보아 즉시 논변했어야 했는데도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었으니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일이 집안과 관계되면 시비를 논하기 어려우니 말을 하지 않았다는 책임으로 꼭 피혐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심세정·정박·이동로·이민징·황준구·정륜은 체직시키고, 이정영은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부호군 김응조(金應祖)가 영천(榮川)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다. 영릉(寧陵)의 석물 사건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소장 중의 목릉(穆陵) 등의 말은 무슨 뜻인가? 여러 승지들은 살펴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원중(院中)의 일기를 고찰해 보니 을해년059)   3월 14일에 풍우가 크게 일어나 목릉(穆陵)의 사초(莎草)가 4곳이나 허물어졌는데, 그때 빗물로 그렇게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재변에 관계된 것이라고도 하여 논의가 분분했습니다. 지금 이 상소는 필시 당사자가 먼 외방에 있어 영릉(寧陵)의 석물이 허물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곡절을 잘 모른 채 자기 딴에는 놀라서 전일의 사건을 거론하여 떠들어댄 것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또 하교하기를,
"자세하지 않은데 소장에 쓰는 것은 매우 괴이한 듯하다."
하였다. 응조의 소장에, 대개 목릉의 사실을 인용하면서 ‘그 당시 원릉(園陵)의 변이 이와 같았는데 이듬해에 병화가 있었으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응조가 모르고서 잘못 인용한 실수는 있으나 성상의 전교에서 이렇게까지 꺾어버리니 매우 애석하다.

 

10월 15일 정유

오시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팥만하였다.

 

10월 16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7일 기해

이경억(李敬億)을 대사간으로, 권우(權堣)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이연년(李延年)이 지난번 무과 시관(武科試官)이 되었을 때 자기 외삼촌 목존선(睦存善)이 거자(擧子)였는데 목전(木箭)의 보수(步數)를 거짓으로 기록했다는 비방이 있자 연년이 스스로 불안하여 병을 핑계대어 체직을 꾀하였으며, 방방(放榜)할 때에 존선의 분수(分數)는 당연히 방에 참여될 것인데도 참여되지 못하자 자취가 이상하여 괴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은 그때 마침 본원에 있으면서 동료와 함께 논박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연년은 이미 시관에서 체직되었고, 존선 역시 방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정을 따른 율로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여겨져 가벼운 쪽으로 논박했습니다. 마침 연년의 함답(緘答) 내용을 보니 거기에 이른바 ‘명관(命官)060)  이 문형(文衡)061)  의 생질이다.’라는 등의 말이 있는데 바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 및 전시(殿試)에는 부자나 형제간이라도 상피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우리 나라가 3백 년 동안 준행해 온 확고한 제도입니다. 연년이 감히 이것을 가지고 신을 공격할 계책을 삼아 명관과 시관 및 신의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슬쩍 말하여 뜻을 교묘히 만들었으니, 아! 괴이합니다.
또 그가 함답한 말 중 한 조목에 ‘고 상신(相臣) 정창연(鄭昌衍)과 김상헌(金尙憲)이 당연히 피혐해야 될 아문에서 피혐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창연은 바로 신의 외증조로서 상피법을 굳게 지킨 사실은 신이 일찍이 외가집의 선배들로부터 익히 들어서 아는 바이고, 관가의 기록에도 실려 있어 증거할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년은 근거없는 말을 지어냈으니 신은 그와 더불어 많은 말로 변론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또 본직에 있게 되었으니 결단코 체면을 무릅쓰고 편안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영상 정태화, 공조 판서 채유후(蔡𥙿後), 형조 참의 오정위(吳挺緯), 좌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잇달아 소를 올려 과장(科場) 때의 일을 발명하여 몹시 시끄러웠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사간 이수인(李壽仁)이 강진(康津)에서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수백 마디 말로 시폐를 논했는데 거의가 진부하고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또 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하였다.

 

전 감사 홍위(洪葳)가 졸하였다. 홍위는 문명(文名)은 약간 있었으나 행정 능력은 없었는데 갑자기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자 문서 처리에 골몰하여 정신이 다 소진되었다. 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서거했다.

 

10월 19일 신축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사관이 구황하는 일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가서 수의해 왔는데, 시열은 《주자대전》 속의 구황 절목을 말했으니 이것을 옥당으로 하여금 초록해 올리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준길이 헌의 속에 조목조목 아뢴 것은 자기 스스로 헤아린 것이 많은데, 강화도와 남한 산성, 양서(兩西)062)   지방의 곡물을 옮겨 다 활용하는 조치는 지금 시행 중이니, 오직 토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감사와 수령들로 하여금 특별히 진휼하는 일을 각도에 분부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흔쾌히 승낙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준길의 의견은 영장(營將)을 도로 불러 올리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사안이 매우 중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영장(營將)을 영구히 없앤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경관(京官)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흉년을 만났더라도 병정(兵政)을 포기하기는 어려우니 이 한 조항은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교양관(敎養官)만 혁파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서북 지방과 제주는 없앨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수인이 상소 중에서 언급한 병영(兵營)과 수영에서 거두는 포(布)에 관한 일은, 이는 병사와 수사가 쓸뿐 아니라 객사(客使)가 오갈 때와 호표피(虎豹皮)를 병영과 수영에 분담시킬 때도 쓰는데, 수인이 여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나치게 거두지 못하게 함이 옳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수인은 또 호남의 대동미를 1결당 13두를 거두는 것은 너무 많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미 선왕조에서 정한 법이니 변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예조 판서 윤강이 아뢰기를,
"《선원록(璿源錄)》 중에 효종 대왕의 시호를 써야 하는지의 여부를 종부시 관원이 신에게 물어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063)  의 예(例)대로 하라."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기축년에는 지석(誌石)과 축사(祝辭)에는 모두 쓰지 않았고, 《선원록》 중에도 두자만 썼는데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와서 뒤늦게 개정하자면 소문이 번거로울 것 같으니 이번에는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왕태조묘 근처에 투장한 자를 발굴해내는 일에 대해 품의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자세히 알고 있다. 사대부의 분산(墳山)064)  에도 보수(步數)가 있는데 어찌 여기에만 보수법을 쓰지 않겠는가. 고려 태조는 삼한을 통합한 공이 있으니 그 무덤 곁에 투장한 자를 내버려두고 불문에 부칠 수 없다."
하고, 윤강이 아뢰기를,
"몇 보로 기준을 삼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낭관을 보내 그 사면의 둘레 몇 보 내에 투장한 것이 몇 기쯤 되는지를 보고 와서 아뢰게 하면 자연 규정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계가 실직(實職)으로 곡식을 모집할 것을 청하고, 홍명하는 대신들에게 물어볼 것을 청하였다. 정태화와 심지원이 아뢰기를,
"임시 방편도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시행하더라도 폐단이 불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외방에서는 시행해도 되겠지만 서울에서는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李景億)은 아뢰기를,
"실직을 제수하게 되면 명기(名器)가 너무 가볍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대간의 말은 당연히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과거는 국가의 중대사라 김왕이 잡혀와 심문을 받은 것도 애초에 감시(監試)를 볼 때에 사정을 쓴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당(東堂)의 경우는 사람들의 말이 많아 참시관 등이 이미 파직까지 되었는데도 방목을 삭제하라는 논의를 곧바로 중지했으니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대신 및 예조 판서에게 물어서 조치하소서."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호우(湖右)의 동당 방목을 삭제함이 가하다."
하였다.

 

10월 20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박세모(朴世模)가 개성 유수 남노성(南老星)을 탄핵하였다. 그 대략에,
"천금(千金)을 뇌물로 받았다는 거짓말을 하여 원로 대신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세도(世道)가 한심합니다. 지금의 뜬소문이 비록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사체로 헤아려 보면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수인(李壽仁)의 소장 중에서 전선(銓選)이 불공정하고 사의(私意)가 크게 유행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21일 계묘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김시진(金始振)의 소장 중에 신의 전일 소장 내용을 거론하면서 막된 말로 마구 헐뜯었으니 매우 괴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번에 들으니 시진이 호조 판서 허적(許積)에게 글을 보내 자기가 직접 연분(年分)065)  을 다시 조사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보(朝報)를 보니 허적이 이것을 진달하여 제도 감사로 하여금 일체 그렇게 하도록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해 지금처럼 백성의 곤궁이 극도에 달한 때를 당하여 어찌 예전에 하지 않던 짓을 해서 거듭 열읍에 폐를 끼치는가라는 말로 그 불가한 뜻을 대략 진술하고 정지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어찌 순행 나가는 것을 그르다고 했겠습니까. 또 시진을 공격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시진은 순행 나가는 것을 해명하면서 소를 올려 공격했다고 마구 꾸짖으며 욕을 합니다. 이른바 ‘남의 말[人之爲言]’이란 네 글자는 주(周)나라 시대의 시에 나온 것으로 참소하는 사람을 지적해서 한 말입니다. 시진이 이 네 글자로 은연 중 공격하고, 또 ‘청의(淸議)’ 두 자로 조롱하는 뜻을 현저히 드러내 보였으니 그 또한 참혹합니다. 신이 한번 어리석은 말을 하였다가 곧바로 이들로부터 욕을 먹어 청명한 조정에 수치를 끼쳤으니 신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이 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그 대략에,
"이민서의 소를 보니 은연중에 신을 공격하였는데, 신은 연소배들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신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더니 지금은 신이 수용하지 못한다고 책망합니다. 만약 신이 한 마디 말도 없이 공손히 따른다면 신을 다시 무어라고 지목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신으로 하여금 한편으로 욕을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직무를 보게 하시는 것은 염치없는 신에게야 돌아볼 것이 없더라도 어찌 세도(世道)만은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로서 내가 잘 알고 있다. 경은 조금도 불안해 할 일이 아닌데 어찌 이렇게 굳이 사양하는가. 경은 속히 출사하여 공무를 봄으로써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갑진

밤에 우레와 번개가 쳤으며 안개가 끼었다.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와 예조 참판 정지화(鄭知和)가 소를 올려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소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회계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전에 득기 등이 사신의 임무를 띠고 연경에 갔었는데 돌아올 때에 일행 중에 말 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범한 자가 있었다. 청나라가 자문을 보내 힐문하고 비변사의 회계 중에도 사신을 죄주어야 한다는 말을 아울러 언급했기 때문에 소를 올려 자핵(自劾)한 것이다.

 

10월 23일 을사

묘시와 진시(辰時)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우상 원두표 등이 우레와 번개가 친 변을 인하여 차자를 올려 자핵하였으나,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4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금부가 김왕을 삭탈 관직하여 충군해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전일 충청 도사로 있을 때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따른 죄이다.

 

10월 26일 무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정언 윤지미(尹趾美) 등이 아뢰기를,
"명기(名器)066)  는 국가의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구렁텅이에 떨어져 죽으려 하니 실로 진휼할 모든 방도를 다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직(實職)을 주고 곡식을 모으는 일은 전에 없던 일이라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명기가 크게 허물어질 것입니다. 당나라 신하 육지(陸贄)는 봉천(奉天)이 위급할 때를 당해서도 오히려 명기를 아끼라고 임금 앞에서 진달했는데, 어찌 임시적인 편의에 어두워서 짐짓 큰소리를 친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많이 모집하게 되면 불어나는 폐단이 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난잡해질 것이고, 적게 모집하면 얻은 곡식이 진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져보면 너무나도 분명한데 어찌 경솔히 시험하여 사방의 기롱을 받겠습니까. 내린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금년에만 시행하려 한다고 답했다가 여러 번 아뢰니 따랐다.

 

금부가, 김경항(金慶恒)이 황장목(黃腸木) 벌채를 허가한 죄에 대해 도년(徒年)에 처하여 정배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황장목을 벤 죄에 대한 율이 이렇게 가벼운가?"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율관(律官)에게 물었더니 ‘율문에는 황장목 벌채에 관한 조항이 없어 이번 조율은 「원(園)이나 능(陵)의 수목을 도벌하면 장 일백 도 삼년(杖一百徒三年)에 처한다.」는 것에 비추어 정한 것이다. 이 밖에 다른 근사한 율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이어서 율문을 상고해 보았더니 실제로 해당되는 율문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부응교 심세정(沈世鼎) 등이 재변을 만나 몸을 닦고 반성하라는 뜻으로 차자를 올리고 여러 해 밀린 주군의 조세를 덜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구황하는 방책을 유현들에게 하문하신 의도는 매우 훌륭하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 아뢴 것들은 모두 시의에 맞고 시행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인데도 영장(營將)을 소환하는 일과 상세(常稅)를 반으로 줄이는 일 같은 것도 모두 채택하지 않았고, 시행한 것이란 단지 교양관을 폐지하는 한가지 일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그만 둔다면 애당초 무엇 때문에 하문하셨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김경항이 황장목을 베어 판 일은 범죄 사실이 매우 중한데도 급급히 조율하고 또 도년(徒年)이란 가벼운 법에 따라 조처했습니다. 영남 유생들이 과장(科場)을 철거하며 난동을 부린 것은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격렬하게 만든 책임은 시관에게도 있습니다. 구금된 무리들 중 수창자가 아닌데도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한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유사가 율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0월 27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8일 경술

지평 윤원거(尹元擧)가 이산(尼山)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원거는 정축년067)   이후 과거를 보지 않고 또 조정에 나오지도 않아 자못 명망이 있었으며, 권시·윤휴와 친했다. 두 사람이 윤선도(尹善道)를 두둔하여 송시열의 비위에 거슬렸는데, 원거가 매번 두 사람을 구원하는 말을 하여 크게 동배(同輩)들의 배척을 받았다.

 

10월 29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시 내수사와 송사한 자가 있었는데 두 번 신리(伸理)했으나 한결같이 꺾이게 되자 상언하여 변별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형조가 회계하여 차라리 몇 명의 공천(公賤)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공평무사함을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하자, 상이 갑자기 엄한 분부를 내려 고쳐서 회계하게 하였다. 정원이 온당치 못하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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