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오
강원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영월(寧越)에 거주하는 내수사 노비 약간명을 노산군(魯山君)의 묘지기로 차출해 정하자고 청하였는데 일이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내수사 노비를 다른 역에 옮겨 정하는 것은 본조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여,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호남의 임피(臨陂)·옥구(沃溝)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12월 4일 을유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삼았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사직하며 아뢰기를,
"근래 옥후가 편치 않아 경연에서 강독하는 것을 정지한 지 오래되어 식자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거룩했던 제왕들은 전전긍긍 두려워하여 편안히 있을 때나 정무를 볼 때에도 각각 경계하는 말을 일러 주는 규례가 있었으니, 마음을 지키고 자신을 단속함이 이렇게 지극했습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이처럼 엄격하지 못하여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오직 경연에만 맡기고 있는데 경연을 폐하면 다시 무슨 기대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인정이란 남을 대하게 되면 엄숙해지나 혼자 있을 때면 해이해지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존경심이 생기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교만심이 생기는 것이라 곁에서 강하게 보도하지 않으면 잘못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하(子夏)와 같은 훌륭한 사람도 많은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가 아직 어려서 혈기가 아직 강건하지 못하시니, 깊은 궁궐에 혼자 계시면서 어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처럼 몸가짐을 해이함이 없이 엄숙하게 갖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는 상을 당한 슬픔에 조용히 조섭 중이신데 또 엄동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비록 경연에는 자주 나가지 못하시더라도 아침이나 낮 사이 정사를 보시는 여가에 예절을 간소하게 하고 내전에서 유신을 접견, 경전이나 역사를 강독하게 하여 전하께서 편안한 자세로 들으시면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치란을 논하소서. 그러면 답답한 것을 열어 주고 기운을 조절하여 펴게 하는 도리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군신 사이는 부자 사이와 같은 것이니 부자 사이에 어찌 혐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해서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을 빠트리지 않듯, 병을 고치는 데 복약(服藥)을 중지하지 않듯 끊임없이 계속하여 점차로 재미가 생기고 이성이 개발되어 그만두려고 해도 할 수 없게 한다면 날로 헤아려 부족함이 있더라도 달이 쌓이면 넉넉함이 있을 것입니다. 천명의 돌보심이 이제 막 새로워졌고 인심의 기대가 한창 간절하니 전하께서 오늘이 어찌 큰일을 할 때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고식적으로 지내면서 점차 편히 쉬는 것을 즐겨 뜻은 날마다 게을러지고 기운은 날로 쭈그러들어 세월이 가는 대로 망연히 만사를 처리한다면 어리석은 신이 전하를 애석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전하 또한 반드시 스스로 슬퍼하시어 신의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건대, 신이 정유년 겨울 경연에 입시했을 때,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해당 관원에게 분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힘껏 진달하니, 선대왕께서 그런 일이 없다고 답변하셨습니다. 신이 물러나 말하기를 ‘외간에서 전하는 말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있었던 일이나 지금은 없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요즈음 저보(邸報)를 보니 바로 이 일을 논했는데 오래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인데 신은 멀리 외방에 있어 직접 성상의 하교를 듣지 못하니 매우 답답합니다. 그 곡절이 어떤지는 논할 것 없이 이치에 맞는 논의를 어찌하여 즉시 윤허하고 흔쾌히 받아들여 과감히 고치는 의리를 보이지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상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만포(滿浦) 사람 김성원(金成元)이 벌등포(伐登浦) 사졸 13인과 폐군(廢郡)된 자성(慈城)을 거쳐 몰래 호(胡)의 경내에 건너가 삼(蔘)을 캐다가 호인에게 발각되어 쫓기다가 서로 싸워 세 사람이 피살되고 성원은 화살 두 대를 맞고 집에 돌아와 역시 죽었다. 만포 첨사(滿浦僉使) 한휴(韓休)가 이를 덮어 두고 아뢰지 않다가 40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성원 등에게 우리 경내에서 삼을 캐도록 허락했더니 눈을 만나 얼어 죽었다.’고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 김휘(金徽)는 조정에 아뢰었는데, 상이 한휴를 잡아다 심문하라 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한휴가 이르러 심문에 응하여 말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성이성(成以性)이 나에게 지시하기를 「변방에 관계된 일은 누설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머지않아 사행(使行)이 있을 것이니 우선 버려두고 아뢰지 않는 것이 가하다.」고 했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다시 이성을 잡아다 대질시키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탄핵하기를 "평안 병사 김휘는 한휴의 거짓 보고를 살피지 못하고 단지 벌등포 권관 김재형(金再亨)을 파출시키라고 청하였습니다. 일 처리가 매우 어그러졌으니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12월 7일 무자
박세모(朴世模)를 승지로, 정지화(鄭知和)를 도승지로, 허동립(許東岦)을 평안 병사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삼았다.
상이 승지 이경휘·박세모 등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옥당의 이민서(李敏叙)·안후열(安後說)이 이어 들어와 《송감(宋鑑)》의 인종기(仁宗紀)를 진강하였다. 경휘가 간원의 계사를 진달하니 상이 간관을 들라 하여 직접 아뢰게 하였다.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갑산 부사(甲山府使) 김익후(金益厚)가 군기를 특별히 마련한 공로에 대해 가자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또 충청 병사 유여량(柳汝𣛀)이 일찍이 영변(寧邊)에 성을 쌓은 공로로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렸는데 그 뒤에 성이 모두 허물어졌으니 여량에게 준 자급을 빼앗으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민서가 ‘내포(內浦) 지방에 기근이 더욱 심한데, 들으니, 방출한 호조의 원곡(元穀)을 감하여 받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상평청과 통제사영·감영·병영 등 여러 곳에서 각자 담당하여 잡곡을 독촉해 징수하므로 굶주린 백성들을 더욱 곤궁하게 한다.’고 하니, 상이 삼남 지방의 모든 영(營)에서 관할하는 것은 일체 감하여 거두어들이라고 명하였다.
12월 9일 경인
영릉(寧陵) 석물이 또 허물어지는 걱정이 생기자 좌의정 심지원이 예관을 거느리고 봉심하고 왔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이 배리(陪吏)의 방역(坊役)을 면하려고 마을 백성들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는데 한성부에서 그 사유를 아뢰자 상이 유사에게 명하여 징의 집 하인을 가두고 엄하게 다스려서 다른 궁가(宮家)에 경계가 되게 하였다.
12월 10일 신묘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재차 계복하였는데 사형해야 할 자가 18인, 사형을 감할 자가 3인이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몇 사람이나 살릴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이름을 들어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사형해야 할 자가 실로 많구나."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계복한 죄인은 처단할 것이지만 지금 혹한기가 되었고 신년도 멀지 않았으니 전옥(典獄)의 여러 죄수들도 탑전에서 소결(疏決)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실로 옳다."
하였다. 형조 판서 정치화가 을미년 추쇄 때에 녹안(錄案)된 노비는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상언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더라도 일체 송사를 심리하지 말 것을 청하였고, 정태화 역시 ‘계해년 이후에 관에서 몰수한 죄인의 노비를 지금 와서 도로 추쇄할 생각을 하니 매우 놀랍다.’고 하니,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잘 살펴서 이미 복계(覆啓)를 거친 것도 허락하지 말게 하였다.
12월 12일 계사
송준길을 이조 판서로, 홍처윤(洪處尹)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14일 을미
전 판관 남궁집(南宮鏶)이 상소하여 붕당설을 진달하였다. 그 설에,
"붕당설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군자들 사이에는 군자의 붕(朋)이 있고, 소인들 사이에는 소인의 당(黨)이 있다고 구양수(歐陽修)가 이미 논했습니다. 당나라우이(牛李)의 당080) 이나 송나라낙촉(洛蜀)의 당081) 같은 것은 비록 당대의 명류(名流)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표방(標榜)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에 불과하였고, 서로 반목한 기간도 한 세대를 넘지 못하고 그쳤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처럼 군자 소인 할 것 없이 온 조정이 당을 만들어, 사분오열되어 대대로 전해가면서 90년 가까이 심하게 그치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당초 동인 서인의 분열은 대개 전랑(銓郞)의 천거로 부터 나왔는데082) , 선후배 사류들 간에 서로 좋아하지 않아 약간의 색목(色目)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083) 에 송응개(宋應漑) 등이 이이(李珥)를 심하게 공격하여 당론이 더욱 격렬해졌으며, 을유년 이후부터 동인이 뜻을 얻자 갈라져서 남인과 북인이 되었으며, 계해년 이후 서인이 정권을 담당하자 두세 개로 나뉘어졌습니다. 대개 정권을 잡으면 붙는 자들이 자연히 많아져서 당류가 번창하게 되어 하나로 화합하기가 매우 어려워 형편상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당이 같은 자는 악을 숨겨 주고 선을 드날리기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자기와 당이 다른 자는 털을 불고 흉터를 찾아내듯 결점을 찾기에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한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하면 ‘이 사람은 무슨 당이며 누가 추천한 사람이니 사심이요 공심이 아니다.’고 하며, 한 사람을 논박하면 ‘이 사람은 어떤 당인데 누가 논박하였으니 사심이요 공심이 아니다.’고 합니다. 이에 비방과 칭찬이 뒤섞이고 시비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간혹 꼿꼿하다는 이름을 얻기 좋아하는 자가 주위에 괘념하지 않고 숨김 없이 과감히 말하면 뭇 의논이 시끄러울 뿐 아니라 임금 또한 그가 당에 치우쳤다고 의심하고서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바른말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낮은 지위에 침체되고 묵묵히 따르는 자는 끝내 높은 관직에 이르며, 바른 선비는 배척되고 비루한 자는 등용됩니다.
임금이 참으로 여러 신하들 가운데서 마음이 공정하고 견해가 밝으며 학식과 국량이 있는 자를 가려 삼공의 지위에 두고는, 그로 하여금 명성과 공적이 드러나서 명망과 실제가 다같이 뛰어난 자를 엄선하게 해서 육조와 삼사의 장으로 삼아 오래도록 맡기고서 결과를 책임지우며, 아관(亞官) 이하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가리게 해서 그 이름에 실제가 합당하게 하고 재능이 그 관직에 맞도록 하게 하면, 전조(銓曹)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고, 재능 있는 사람이 저절로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어 나라가 편안히 다스려지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하였다. 낭궁집은 자못 문장 솜씨가 있었는데 혹리로 죄를 받아 파직당해 오래도록 등용되지 못하여 속으로 매우 불평하고 있으면서 이런 내용을 상달하였는데, 그 말이 다시 당시의 기휘에 크게 저촉되었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놓아 두고 내리지 않았다.
간원이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상일(李尙逸), 단천 군수(端川郡守) 홍남립(洪南立), 수성 찰방(輸城察訪) 김광진(金光瑨) 등을 논박하니, 모두 파직시켰다. 원세흠(元世欽)이란 자가 강도(江都)의 관곡 1백여 석을 오래도록 갚지 않아 못된 토호(土豪)로 지목되어 길주로 이주(移住)되었는데, 유배지에 도착해서도 잘못을 고치지 않고 외람되게 역마를 타고 도내를 횡행하며 남의 재물이나 가축을 빼앗았다. 그런데도 상일과 광진은 모두 겁이 나서 누구냐고 따지지도 못하였다. 세흠이 또 단천에 이르러서도 남의 비복을 빼앗았는데 남립이 감히 금하지 못하였다.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붙잡아 다스리고 조정에 아뢰었다. 뒤에 상이 세흠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경자
송시열을 판중추부사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최관(崔寬)을 지평으로, 성초객(成楚客)을 길주 목사로 삼았다.
절의 여비로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자가 상언하여 신역을 면제받기를 바라니, 상이 하교하였다.
"이단의 교는 매우 허망하다. 절을 헐고 환속시키는 일은 비록 갑자기 거행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무리들이 멋대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도록 버려 두어서 되겠는가.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민정은 날로 줄어들고 승니는 날로 증가할 것이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경외(京外)의 양민으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키고,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리나 환속 대상자를 막론하고 모두 특별히 죄를 준다는 뜻을 분명히 알려 거행하도록 하라."
12월 22일 계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삼공 및 형관(刑官), 양사의 장관을 불러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논단하여 율문을 대조하기도 하고 완전히 석방하기도 하였으며, 옥사가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지평 윤원거(尹元擧)가 이산(尼山)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우리 나라의 정치를 보건대, 오로지 유술(儒術)을 숭상한 것은 중종·선조 두 성조(聖朝)처럼 융성한 때가 없었으며, 우리 선왕께서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했던 정성은 두 성조의 부지런함 이상이어서 초빙해다 중용한 인물들은 모두 학술이 뛰어난 선비들로 도덕에 뜻을 두었으므로 훌륭했던 주나라의 교화를 우리 동방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뜻을 잘 계승하기 위해 선왕의 뜻을 바꾸지 않고 옛사람들에게 그대로 맡기려 하십니다. 그런데도 여러 유신들의 진퇴와 거취는 도리어 전하의 뜻을 따르지 않으니, 전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시겠습니까.
대체로 훌륭한 정치에 뜻을 둔 선비들은 일을 하지 못할 때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예를 다하여 공경하면 옛날 성현들은 모두 직접 도를 구하여 온 천하를 감화시켜 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선비가 조정에서 불안해 하는 것은 곧 임금이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오직 저 여러 유신들은 시행하는 규모가 일마다 모두 훌륭할 수는 없고 가부를 논할 때에 혹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모두들 부귀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큰일을 하실 뜻이 있으시다면 여러 유신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협력하게 해서 영영 가버릴 뜻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당시 송시열 등이 윤휴(尹鑴)·권시(權諰)와 예론(禮論)이 일치되지 않아 서로 헐뜯고 배척하였다. 원거(元擧)는 바로 윤선거(尹宣擧)의 재종형으로 권시·윤휴 등과 본디 친밀했는데 또 시열 등 여러 사람들과도 감히 모나게 틀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소가 이러했던 것이다.
12월 25일 병오
민응협(閔應協)을 대사성으로, 심세정(沈世鼎)을 부응교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치계하여 각 고을의 재해에 따른 손실을 진달하였다. 호조가 복주(覆奏)하여 재해가 매우 심한 옹진(甕津) 등 여섯 고을은 매결당 쌀 1두(斗) 씩을 감하고, 그 다음으로 재해를 입은 해주(海州) 등 열 고을은 매결당 쌀 닷되 씩을 감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12월 26일 정미
집의 목겸선(睦兼善)과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에 신설한 해량(蟹梁)084) 2개 소는 수진궁(壽進宮)이 해조로부터 절수(折受)받은 일이 없는데, 궁노가 또 불법으로 차지하고 멋대로 침탈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많습니다. 해조에서 복계(覆啓)한 대로 속히 새로 설치한 해량을 혁파하고 폐단을 일으킨 궁노를 법에 따라 다스리소서. 신들이 들으니,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선척은 4척을 규정 숫자로 하여 이 이상은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계하하여 이미 전교가 있었는데, 내수사에서 여러 달 덮어 두고 즉시 공조에 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내수사 관원은 파직시키고 선척 수는 전일의 전교에 따라 정한 숫자대로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해량에 대한 일은 특명으로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헌부가 또
"황해 병사 이인하(李仁夏)가 군사를 뽑아 숯을 구우면서 수량을 부족하게 운반해 오는 자에게 정포(正布)를 징수해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라고 논계하니,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오래 지나서야 따랐다.
전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졸하였다. 유후는 성품이 깨끗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글 솜씨가 변려문(駢儷文)을 잘 지었다. 인조조에 강씨(姜氏)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 교서를 지어야 할 사신(詞臣)들이 모두 회피하여 마지막으로 유후에게 떨어졌다. 유후가 부득이하여 짓기는 했지만 집에 돌아간 즉시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불태워버렸으니, 대개 후회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술을 너무 좋아하여 위엄이 없었고, 또 스스로 재능이 미약하다고 하여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효묘조에 두 번 문형을 맡았고, 인조·효종 양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으며 《선조실록》을 개수하는 데 참여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까지 역임하고 졸하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다시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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