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3권, 현종 1년 1660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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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임자

윤비경(尹飛卿)을 정언으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황장목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전 목사 김경항은 목재상과 결탁, 제멋대로 나무를 베도록 허락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죄를 논하자면 실로 극히 놀라운데 어찌 도배(徒配)에 그치겠습니까. 해부(該府)로 하여금 율을 고쳐서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2일 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3일 갑인

형조 참의 오정위가 상언에 대해 회계한 것으로 인해 엄한 분부가 있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자핵(自劾)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근래 아무리 기강이 해이해졌기로서니 이러한 소장을 어찌 봉납(捧納)하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처음 회계한 내용에 본의가 다 상달되지 못하여 엄한 분부가 내렸으니, 또다시 태연히 회계할 수 없어 소를 올려 자핵한 것은 부득이한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상의하고 봉납했던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해조의 회계는 송사의 체모를 잃지 않은 것인데도 상의 진노가 급박하니 내수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식견 있는 자들은 우려하였다.

 

11월 4일 을묘

평안도 순천(順川)에 암탉이 목에서 꼬리까지 수탉 깃털로 변하고 발에는 두 개의 며느리발톱이 났다. 감사가 아뢰었다.

 

서원 현감(西原縣監)        신속(申洬)이 도신을 통해 《구황촬요(救荒撮要)》 1 책을 올리니, 상이 인쇄하여 팔도에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5일 병진

이수인(李壽仁)을 응교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정치화(鄭致和)를 공조 판서로, 조귀석(趙龜錫)을 사간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하여 ‘전 단천 군수(端川郡守) 이지천(李志賤)이 재임 중에 수리(水利)에 힘을 써서 산으로 물길을 뚫어 개간한 농토에 물을 대게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 공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상이 특별히 가선 대부로 가자했다.

 

11월 6일 정사

심광수(沈光洙)를 승지로, 유혁연(柳赫然)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증광시(增廣試)의 복시(覆試) 때에 고시관에 합당한 사람이 많은데도 해조에서 거자(擧子)의 상피를 이유로 진계(陳啓)까지 하며 마치 공적인 사유로 제외하는 것같이 하였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한두 명의 거자가 상피로 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무슨 큰일이기에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의망을 갖출 때에 구차한 거조를 합니까.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정원이 대관(臺官)의 체차를 아뢰는 것은 쉽사리 할 일이 아닌데 지난번 헌관(憲官)과 거자가 모두 상피의 연고가 있자 급급히 해조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체가 중함을 헤아리지 않은 것으로 경솔한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시관이 패(牌)를 받고 오지 않으면 법에 있어서 당연히 파직하게 한 것은 대개 사체를 중히 여겨서입니다. 지난번 시관중에서 패를 받고 오지 않은 사람을 특별히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는데도 파직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상규에 어긋나고 또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홍처량(洪處亮) 등을 파직하지 말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상이 승지 등을 불러 편전(便殿)에 입시하게 해 문서를 판결하였다.

 

11월 7일 무오

간원이 아뢰기를,
"형옥은 나라의 큰 정사이니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평안도 죄인 김수천(金守天)은 부녀자를 겁탈한 죄로 계복 중에 포함되었습니다. 전년 사유(赦宥)를 반포할 때에 본도에서 가벼운 죄를 범한 것으로 오인하여 방면자 명단에 넣었고, 해조에서도 흐리멍덩하게 방면을 청하였는데, 해가 바뀐 지금에야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이러한데도 죄를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형정이 느슨해짐을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본도 감사와 형조의 당상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감사는 김여옥(金汝鈺), 형조 당상은 이시방(李時昉)·유심(柳淰)·채충원(蔡忠元)이었다.

 

11월 8일 기미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친견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유심은 간원의 아룀에 따라 당연히 파직되는 대상 속에 들게 되었는데 유심은 맡고 있는 일이 있어 그 일을 미숙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 다른 벌을 시행하고 전의 직무를 그대로 보게 했으면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전에도 일찍이 그렇게 한 예가 있으니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유심은 한 자급을 깎고 그대로 직에 있게 함이 가하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형조에서 올린 회계에 대해 온당치 않은 하교의 말씀이 많으니 성덕에 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애당초 공천(公賤)을 아낄 생각이 없었는데 ‘차라리 공천을 잃을지언정 공평무사함을 보이라.’는 등의 말을 회계 중에 넣어 스스로 잘난 체하는 기색을 현저히 드러내었으니, 이것은 매우 그르다. 또 내가 한번 하교하면 반드시 글에 올려 해명할 계책을 삼으니 사리가 어찌 이러한가."
하자, 경억이 아뢰기를,
"위에서 비록 이렇게 하교하시나 육조와 각사가 만약 이것을 보고 경계를 삼는다면 복역(覆逆)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니, 매우 염려가 됩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강도 유수(江都留守) 유심이 정족 산성(鼎足山城)의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치계하자, 실록(實錄)을 성내의 사고(史庫)로 옮겨 봉안하여 별장을 시켜 지키게 하도록 명하고, 전 군수 황유(黃塯)에게 당상의 자급을 주고, 도사(都事) 신한주(申翰周)는 벼슬을 올려 주라고 명하였는데, 역사를 감독한 데 대한 위로였다. 정족 산성은 강화부 서쪽 10 리에 있는데 험조하기가 믿을 것이 못 되어 강도를 지키지 못하면 비록 성을 열 길의 높이로 쌓더라도 절대로 지킬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서원리(徐元履)가 유수가 되었을 때 성을 쌓도록 건의했으나 쌀과 베만 많이 허비하고 쌓은 것은 몇 보에 불과했다. 유심이 어전에서 또 성쌓기를 아뢰었는데 그의 의도는 대개 자기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성쌓는 일을 감독한 사람이 상으로 자급까지 받았으니 지나치다고 하겠다.

 

11월 9일 경신

김중일(金重鎰)을 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참판으로, 유계(兪棨)를 부제학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부교리로, 임의백(任義伯)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옥당의 신하들을 소대하였다. 시강관 심세정(沈世鼎)이 《통감(通鑑)》 수기(隋紀)를 진강하였다. 시독관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수 문제(隋文帝)가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관이 기롱하였습니다. 임금이 학문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국가가 다스려지느냐 다스려지지 않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병으로 인해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못하다가 마침 조금 나은 틈을 타서 소대한 것이다."
하였다.

 

진사 박이도(朴以燾)가 소를 올려 시폐를 진달하고 또 조종이 훈계한 말을 하나하나 열거하였다. 상이 특별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옥당으로 하여금 그 성훈(聖訓)과 격언을 기록해 올리도록 하였다.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이 소를 올려 욕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신과 호조 판서 허적의 무리와는 연배가 서로 달라 서울에 있을 때는 평소 한번도 왕래한 교분이 없었고, 남쪽으로 오고 나서는 세향(歲餉)068)  ·절선(節扇)069)   및 으레 하는 편지 외에는 한번도 편지를 보내 문안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허적이 어떻게 신이 연분(年分)을 직접 살피러 가려고 하는지를 들었으며, 조복양은 또 어떻게 이런 맹랑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비방을 듣는 이유는 금년 초봄 광주(光州)로 순찰을 나갔을 때, 마침 15, 16명의 유생들이 역참(驛站)에 몰려 와 죄없이 이름이 삭제되었다고 호소하기에 신이 광주에 들어가 유생안(儒生案)을 가져다 보니 이름자를 도려낸 사람이 52인이었습니다. 신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향교 유안(鄕校儒案)은 본디 사사로운 장부가 아니다. 만약 내부에서 벌을 논할 일이 있다면 죄명을 써서 벽에 게시하는 것이 서울과 지방에서 통행하는 규정이다. 관가의 문서를 이렇게 함부로 도려내는 일은 보지 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주창한 재임(齋任) 5, 6인을 가두고, 처음에는 형추한 뒤에 정배하여 뒤폐단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장성(長城)에 와서 들어보니 수금된 자들 중 1인은 바로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 고경명의 자손은 마땅히 대대로 사유(赦宥)의 은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었는데, 같은 죄를 지은 자를 혼자만 석방할 수 없어 본읍에 관문(關文)을 보내 모두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본의는 국가를 위하여 명예를 보존해 주기 위한 것이긴 하나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지 못했으니 신이 실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것을 가지고 신이 많은 선비들을 욕보였다고 하면서 드디어 남의 지탄을 받게 하고 비방하는 논의가 더욱 쌓이게 하였습니다. 공청(公廳)의 모임이나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괴상 망측하다고 배척하고 간사하다고도 지목하여 갖은 욕을 다하였으니, 신이 아무리 염치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태연히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찌 깊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시진이 재임을 가둔 것은 애당초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론 때문이 아니었는데, 복양은 일생 동안 당론에 고질이 되었기 때문에 분을 틈타 소를 올리니 말이 전혀 조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위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이것을 허물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시의 조정 논의가 실로 한탄스러울 뿐, 복양이야 무슨 책할 것이 있겠는가.

 

상이 편전에서 소대하여 《통감》의 수기(隋紀)를 강하였다. 상이 일렀다.
"수 문제(隋文帝)가 이미 평온한 세상을 이룩했으니 만약 태자 양용(楊勇)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했더라면 어찌 양제(煬帝)와 같이 그렇게 멸망을 재촉했겠는가. 개황(開皇)070)  ·인수(仁壽)071)   연간에 천하가 교화되고 의식이 윤택해진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안 부사(延安府使) 이만웅(李萬雄)이 상소하여 나진 포구(那津浦口)의 언덕 위에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창고를 지어 식량을 비축해 한편으로는 교동(喬桐)·강화(江華)를 성원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거두어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는 잘못된 계책을 없애라고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바닷길은 사세가 어려운 점이 있고 또 흉년을 만나 공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방계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11월 11일 임술

상이 편전에 나아가 경연을 열었다. 시독관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인재가 어찌 중앙과 지방이 다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향천(鄕薦)은 전조가 전혀 쓰지 않고, 태학(太學)의 공천(公薦)도 수망(首望)만을 쓰니 매우 마땅치 않습니다. 앞으로 대정(大政)이 멀지 않았으니 미리 분부하여 기한 안에 인재를 추천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것도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향천이란 것도 한결같이 공의만을 따른 것이 아니어서 천거된 자가 적격자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원(李厚源)이 전조의 장이 되었을 때 계품하여 등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선조조에는 호남과 영남 인물들이 조정에 늘어섰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호남을 인재의 부고(府庫)라고들 하였는데 지금은 영호남 사람들로 조정에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이렇게 매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 단독으로 추천할 것은 없고 감사가 각각 5인씩 추천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1월 12일 계해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문서의 판결을 마친 뒤에 승지에게 이르기를,
"옥당의 당직자는 누구인가?"
하니,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과 김만기(金萬基)입니다."
하자, 상이 주서(注書)를 시켜 수흥 등을 불러들여 《송감(宋鑑)》의 첫권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 태조가 만약 끝까지 신하의 절개를 지키려고 했다면 아무리 황제의 자리가 자기에게 왔다고 하더라도 어찌 사양할 방도가 없었겠는가."
하고, 이어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정치는 문제(文帝)·경제(景帝)에 이르러 가장 부유하게 되었는데 이렇지 못했다면 무제(武帝)가 국력을 낭비한 뒤에 비록 윤대(輪對)의 조서072)  를 내렸다고 하더라도 어찌 망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또 송 태조가 그 동생에게 전위한 사실 및 조보(趙普)가 이랬다저랬다한 정상을 논하였다. 한창 논란하는 즈음에 시각이 삼고(三鼓)를 알리자 파하고 나왔다.

 

11월 13일 갑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편전에서 인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유심을 잉임시키는 일을 하문하셨을 때 신이 경주(慶州)에 관한 것도 아울러 진달하려고 했으나 사체에 관계되어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영송(迎送)하는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채충원(蔡忠元)도 특별히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그대로 머물러 있게 했다가 보리걷이를 기다려서 논죄하는 것이 옳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당연히 죄를 받아야 할 사람더러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추고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즉위 증광과(卽位增廣科)를 설행하여 박세당(朴世堂) 등 34인을 뽑았다. 1인은 전시(殿試)에 직부한 자이다.

 

오준(吳竣)을 판의금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정언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형조 판서로, 이단상(李端相)·이수인(李壽仁)을 사인으로, 이민적(李敏迪)을 교리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삼았다.

 

전남도 광양현(光陽縣)에 전패(殿牌)를 도둑질해 간 변이 발생했는데, 조정에서 이것은 간악한 백성이 수령을 쫓아내기 위한 계책이라고 여겨 그 고을만 혁파하고 수령은 죄주지 않았다.

 

11월 15일 병인

이조 판서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는데, 윤선도(尹善道)의 상소 내용을 길게 인용하여 피혐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불허하였다. 이때 시열이 사직소를 여러 차례 올렸는데 당시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필시 충실히 기록했을 것인데도 이때에 이르러 기록하지 않았으니, 너무 거칠고 포악하여 일부러 덮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11월 16일 정묘

상이 아침에 편전에 나가 경연을 열었다. 참찬관 유계가 《통감》의 수기(隋紀)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제는 가혹하고 각박했으며, 당 고조(唐高祖)는 관대하고 대범했으니, 그가 민심을 얻은 것은 당연했다."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당나라의 건국은 옛사람들이 ‘공제(恭帝)를 세우지 않고 직접 죄를 따졌더라면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의 행위와 같았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나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원래 광명정대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고서 탕왕이나 무왕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석강을 열었다. 유계가 《통감》을 진강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문정(劉文靜)073)  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세민(世民)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에 딱 들어맞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그의 평소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니,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천하의 호걸들이 이렇게 경영하는데도 그 임금은 막연히 알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경계삼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임금이란 양제(煬帝)를 가리키는가?"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강이 끝나고 예조 판서 윤강이 아뢰기를,
"왕태조의 능묘 근처에 몰래 묘를 쓴 실상을 낭관이 조사해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처치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2백 보 내에 있는 것은 모두 파내고 혹시 그 숫자가 많으면 다시 해조에 보고하여 조처하라. 지금부터는 3년에 한 번씩 예조 낭관을 보내 조사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여 거행하라. 7 능(陵) 경내에 몰래 쓴 묘는 오래된 것이면 옮기기 어려울 것이니 평토(平土)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영부사 이경석이 송도의 옥사 때문에 불안하여 강상(江上)으로 나갔으니 특별히 위로하여 의구심을 풀어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가서 내가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김경항(金慶恒)에 대한 조율은 위에서 정원에 하문하셨으니 마땅히 율문을 가져다 고찰한 뒤 상세히 아뢰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주(小註)에 있는 계장률(計贓律)074)  을 생략하고 범연히 회계했으니, 근실히 하려고 노력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고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11월 17일 무진

우부승지 이경휘(李慶徽)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영부사 이경석에게 가서 하유했더니 ‘저번에 사관을 보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고, 이번에는 또 근시가 왔으니 마땅히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생각을 다 펴지 못하니 우러러 뵙기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김경항의 죄를 조율한 율문이 너무 가벼운 잘못을 범하였는데도 성상의 하문에 대한 정원의 대답은 중요한 계장률을 상고하지 않고 헌부에서 조율한 것만 가지고 흐리멍덩하게 회계했으니, 담당 승지를 파직시키소서. 김경항을 의율할 때에 율관의 말에만 의거하여 대수롭지 않게 조율함으로써 처벌이 가볍게 되도록 만들었으니, 일처리가 너무나 치밀하지 못합니다. 이미 율관을 추문하여 다스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담당 당상이 어찌 잘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공사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공사의 판결을 끝내자 이어 옥당의 입직관을 불러 《송감(宋鑑)》의 태조기(太祖紀)를 강하였다. 강독이 "실로 나의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오직 칼이 있을 뿐이다.[苟犯吾法惟有劍]"란 말에 이르자, 유계가 아뢰기를,
"비록 도성 안이라고 하더라도 군사들이 교만하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한가지 사건으로 40여 인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참하였는데 이는 폐단을 없애겠다는 의지였습니다."
하고,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지금 훈련 도감 군병들도 교만하고 사나워서 엄하게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강독이 ‘영녕 공주(永寧公主)가 수놓은 겹옷을 입고 취유(翠襦)를 펴는 것을 태조가 금지하고 경계하였다.’는 말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좋은 말이다. 공주의 복식(服飾)에 무엇인들 어려우랴마는 이와 같이 금지하였으니 어찌 성덕(盛德)이 아닌가."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공주의 가옥이나 절수(折受) 등에 관한 것은 비록 단번에 줄일 수는 없으나 이러한 말들로 경계한다면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강독이 촛불 그림자[燭影] 사건에 이르자, 유계가 아뢰기를,
"휘종(徽宗)·흠종(欽宗)이 북쪽으로 옮겨 갈 때에 사관이 기록하기를 ‘태종의 행위가 이와 같았으니 이런 화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점잖게 전수(傳授)했다면 어찌 주부(柱斧)로 땅을 치기까지 했겠는가."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천리(天理)를 헤아려 보면 역시 말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송조(宋朝)에는 종실이 너무 많아 늠료(廩料)를 줄 수 없자 태조의 자손들을 나누어 남쪽으로 옮기고 이를 남내(南內)라 했습니다. 태종의 자손들만 변경(汴京)에 남겨 두었는데, 정강(靖康)의 난에 한 사람도 남은 사람이 없었고, 남도(南渡)하여 제사를 받든 이들은 태조의 자손들이었으니 순환하는 이치가 있는 듯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촛불 그림자 사건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였다. 2경 말에 파하고 나오자, 향온(香醞)을 나누어 주었다.

 

11월 18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낮에 편전에 나아가 경연을 열고 《통감》을 강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른바 ‘앉아서 세월을 허비하니 민심이 이반하고 기가 꺾인다.’고 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쳐서 빼앗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국사에도 그러합니다. 지금은 즉위하신 처음이라 사방에서 눈을 씻고 태평을 보리라 기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때에 미쳐서 다스리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척연(李惕然)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동지경연으로, 허적(許積)을 판의금으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동지의금으로, 조수익(趙壽益)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개성 유수 남노성(南老星)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처음에 영부사 이경석이 노성의 옥사 처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어전에서 서둘러 진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는데, 노성이 듣고 노하여 죄를 받은 자들이 많은 재물로 경석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경석이 매우 노하여 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자, 상이 노성을 추고하라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헌부가 이와 같이 의율하였다. 송도의 이른바 유생이란 자들은 거개가 시정 상인의 자제들이고, 그들이 서로 싸운 것도 어두운 밤중에 생긴 일이라 각기 개인적인 친분을 따라 전하는 말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노성의 처결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 자못 실상을 얻었으니, 전해 듣고서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자들과는 그 곡직에 있어 실로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저들 대간의 무리들은 이미 상세히 듣지도 못하고 심사 또한 공정하지 못하여 앞에서 논박하기도 하고 뒤에서 조율하기도 한 것이 모두 사심을 따라 나온 것이다. 아, 저런 대간은 있어도 없느니만 못하다. 상이 대간의 아룀을 윤허하지 않은 것은 실로 옥사의 실정을 밝게 살핀 것이다. 그런데 끝내 노성의 고신을 빼앗음으로써 대신을 위로하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애석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11월 20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초저녁에 상이 입직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여 문서의 판결을 끝낸 뒤에 이어 옥당의 입직관을 불러 《송감(宋鑑)》의 태종기(太宗紀)를 강하였다. 강독이 덕소(德昭)075)  가 자결한 사건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사기(史記)의 글자 구성은 매우 엄격하여 이른바 고의적으로 오랫동안 상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 의미가 깊다."
하고, 강독이 덕방(德芳)076)  이 졸한 데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어떻게 죽은 것인가?"
하니, 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아마 천수를 다하고 죽은 듯합니다."
하고, 교리 이민서(李敏叙)는 아뢰기를,
"역사에서 잇달아 요절한 것으로 단정한 것은 역시 의심스러운 말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11월 21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편전에 나가 경연을 열고 《통감》의 당기(唐紀)를 강하였다. 시독관 김우형(金宇亨)이 아뢰기를,
"당나라가 창업한 초기에 즉시 국자학(國子學)과 태학(太學)을 설치한 것은 한 고조가 노(魯)를 지나다가 공자에게 제사지낸 것과 같은 법도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손복가(孫伏伽)는 하현(下縣)의 법조(法曹)로서 상소했는데도 고조가 겸허하게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태종(太宗)이 치세를 열게 된 까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복가의 말은 역시 본디 좋은 말이다."
하였다. 강을 마친 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여 각사(各司)의 폐단을 묻고 그것들을 변통하게 하였다.

 

11월 22일 계유

상이 편전에 나가 경연을 열고 이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입시하라 하였다. 유계가 《통감》의 당기를 강하다가 이소립(李素立)이 고조(高祖)에게 간하는 사실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하는 법을 지키고, 임금은 간언을 따를 수 있는 것이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징조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기(史記) 중에는 본받을 만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당 고조가 소립을 발탁한 것 같은 것은 더욱 훌륭한 조치입니다. 과거 참지(參知) 윤집(尹鏶)이 선왕조에서 사간으로 독계하고 나자 선왕께서 특별히 승지로 제수하시고서 시신(侍臣)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윤집이 직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승지로 제수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선왕께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아랫사람을 격려한 이런 일들은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통감》이나 《송감》은 단지 역사 기록물일 뿐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조강이나 주강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고, 석강이나 야대나 소대 때에는 사기를 강했으면 합니다."
하니, 이에 따라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판서 홍중보(洪重普)에게 관작을 주라는 명이 계셨는데, 중보는 일찍이 가선(嘉善)으로서 산릉(山陵)의 역사를 마친 뒤에 가의(嘉義)에 올랐는데, 또 특명으로 자헌(資憲)으로 올렸습니다. 지난번 대간이 개정하라고 논박한 것은 상가(賞加)였는데, 혹자는 자헌은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강등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니 자헌은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진(李𥘼)을 승지로, 윤비경(尹飛卿)을 헌납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오정일(吳挺一)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심세정(沈世鼎)을 응교로 삼았다.

 

홍문관 부제학 유계 등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즉위하신 첫해에 음이 다하고 양이 소생하는 절기를 만나, 신 등은 눈을 씻고 청명한 교화를 바라보며, 성덕이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하고, 또,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 것과 왕도 정치를 하고 패도 정치를 하는 것은 다만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한번 분발하여 이 뜻을 높이 세우면 난세를 치세로 바꿀 수 있고 약함을 강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11월 23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금부가 김경항(金慶恒)의 죄를 다시 감정(勘定)하여 장 일백 유 삼천리로 하였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경연을 열었다. 유계가 《대학연의》의 첫째 권을 진강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대학》이란 책은 체(體)로부터 용(用)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각기 차서가 있어 문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깊이 유념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송 이황(宋理皇)077)  은 종실의 먼 일가붙이로서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기까지 했고, 대통(大統)을 이은 뒤에는 이학(理學)을 장려했습니다. 묘호를 이황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황은 어떤 임금인가?"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젊어서는 인망이 없지 않았으나 인재 등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어진이와 간사한 자가 함께 진출하였고 밖에는 큰 적(敵)이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덕망을 잃어 재위 40년 동안 송나라가 떨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뜻을 세운 것은 이미 저와 같았는데도 끝내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것은 처음에는 부지런했다가 끝에 가서 게으른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고,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사미원(史彌遠)이 이황을 세우는 데 후원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초년에는 권세를 휘둘러 여러 어진이들을 쫓아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비로소 진덕수(眞德秀)·위요옹(魏了翁) 등 여러 어진이들이 등용되어 단평(端平) 6년078)  에 가서야 겨우 규모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또 가사도(賈似道)에게 농락되었는 바, 이것이 실로 송나라 멸망의 징조가 되었습니다. 비록 유학을 숭상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 자취가 이와 같았던 것은 제왕의 학문에 공효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어짐과 간사함은 분별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니 이는 실로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24일 을해

상이 편전에 나아가 경연을 열었다. 시독관 김우형(金宇亨)이 《대학연의》를 진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평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전년의 도감(都監)079)   제조들의 자급을 내리라는 명이 있었고 지금 이미 서용되어 올렸던 자급을 모두 내렸습니다. 그런데 익흥군(益興君) 홍중보(洪重普)는 전 자급을 그대로 제수했습니다. 자헌으로 오른 것이 상으로 가자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의의 자급이 그 중간에 있는데 자급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면 벌을 시행하는 본의가 전혀 없어지게 되어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똑같이 자급을 강등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의로 자급을 내림이 가하다."
하였다. 뒤에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탑전에서 진계함으로 인하여 똑같이 자급을 강등하게 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을 공조 판서로, 홍중보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전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졸하였다. 응시는 인조조에 감히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했다가 오랫동안 먼 변방에 유배되니 곧다는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효종 초년에 가장 먼저 방환의 명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좋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신중하니 사람들이 이것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훌륭한 인재를 진출시키지 못하고 오직 세태에 따라 용납되기만을 일삼으니 식자들 사이에서 완전하기를 기대하는 꾸짖음이 없지도 않았다.

 

11월 25일 병자

비국이 각 아문이나 각 군영에 비축된 은화와 쌀·베를 가져다 진휼하는 밑천에 보탤 것을 청하고, 또 상평청에서 매년 시행하는 가설직(加設職)·노직(老職)·증직(贈職) 및 서얼허통첩(庶孽許通帖)의 납부가액을 적절히 줄여서 곡식 모으는 길을 넓히도록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가 입궐하여 아뢰기를,
"꺼리는 질병이 온 성안에 두루 퍼졌는데 계복(啓覆)할 때 입참하는 관원이 30여 인이나 될 정도로 많습니다. 비록 재계한다고는 하나 어찌 다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추운 곳에서 많은 사람을 접견하는 것은 질병을 삼가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들이 이러한 뜻을 속히 진달하려 했으나 늦겨울에 죄수를 논하는 것은 국가의 큰 정사라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인데,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끝내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속히 내일의 계복을 정지하시어 아랫사람들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 어리석은 백성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다가 계복해야 하는 죄에까지 이르렀는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는 것은 비록 죽일 죄라고는 하더라도 정상은 역시 불쌍하다. 또 어찌 늦추기만 하다가 혹 살 수 있는 자까지 모두 감옥의 원혼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경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태화 등이 재차 아뢰고, 정원 또한 정지하도록 두 번이나 진계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26일 정축

사시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1차 계복을 시행하였다.

 

11월 27일 무인

어제와 같이 계복을 실시하였다. 문안이 많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의 여비(女婢)로 진고한 자가 있었는데, 장례원이 입계하자, 상이 일렀다.
"이것 또한 백성을 동요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이니 흉년에 시행할 일이 아니다. 내년 가을까지는 시행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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