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임오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한 두 칙사가 온다는 패문(牌文)이 왔다.
2월 4일 갑신
부음(訃音)을 전한 칙사가 돌아갔다.
2월 6일 병술
이일상(李一相)을 행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김우석(金禹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납 김우형(金宇亨)이 수백 마디의 상소를 하였다. 첫번째에는 비국의 공식 석상에 연포(軟泡)를 베푸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논하였으며, 다음으로 영릉(寧陵) 상석(裳石)이 기울어졌는데도 오래도록 개축 여부를 논의하지 않았다고 진달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호남과 영남의 인사를 거두어 쓸 것을 청하고, 마지막으로 경기 백성들의 굶주림이 극심한데 방출할 양곡이 많지 않으니 그냥 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떻게 혜택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묘당에 신칙해서 도둑을 방지할 계책을 강구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2월 7일 정해
영광(靈光)의 유학 변극휴(卞克休)가 상소하여 시사를 진술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2월 9일 기축
영의정 정태화, 선공감 제조 허적, 관상감 제조 이정영(李正英), 예조 참의 이진(李𥘼)이 아뢰기를,
"신들이 영릉에 나아가 봉심한 뒤 형세를 그려서 들였습니다. 종전에는 원릉(園陵)의 이지러진 석물은 으레 유회(油灰)로 발라 보수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잡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헌납 김우형의 상소 중에 ‘고쳐 쌓을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문의하라.’는 말이 있으니 수의(收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의 이 한 조목은 의논해서 조처할 것이 없으니 우선 수의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오시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팥알만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유생 변극휴의 소장 중에, 증광시(增廣試)의 복시(覆試)에서 1등을 한 박수현(朴守玄)의 대책(對策) 가운데 인용한 시구(詩句)에 요즈음 상황을 풍자하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그 두 구절을 뽑아내어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는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일은 바르지 않다는 것이고, 하나는 장후(張后)와 이보국(李輔國)이 조정을 어지럽혔다014) 는 것으로, 끌어다 붙인 것이 교묘하고 말이 극히 흉악하여 신은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날의 대책문 제목은 시로써 질문하였는데 수현이 두보(杜甫)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범범히 고시(古詩)를 논하면서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했을 뿐입니다. 영무의 일이나 이보국의 일이 오늘날과 무슨 비슷한 점이 있기에 그 은미한 뜻을 빌어서 풍자하겠습니까. 비록 풍병(風病)이 든 자일지라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이렇게 위험하니 신은 회시의 참시관으로서 대각의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여 수백 마디 말을 진술하였는데, 호남의 배[船]를 매입한 사실과 자기 편지가 남에 의해 위조된 곡절을 힘껏 발명하니, 답하였다.
"지나간 일은 허물을 따질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2월 11일 신묘
곽지흠(郭之欽)을 집의로, 남천택(南天澤)을 지평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병조 참판으로, 여이재(呂爾載)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12일 임진
우참찬 송준길이 고향에서 입경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고 매우 지극하게 위로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판중추015) 는 올라올 생각인가?"
하니, 준길이 대답하기를,
"그가 올라올지는 실로 기필할 수 없으나 상께서 부르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민간이 굶주리고 있는 정상을 물으니, 준길이 대답하기를,
"도신이 청하는 일들은 거의 다 저지당하는데, 귀로 듣는 말은 직접 보는 것만 못합니다. 도신이 청하는 일은 조정에서 한결같이 들어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또 중종조 고사에 따라 어사를 파견하여 진구를 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필 것을 청하고, 양 이원(尼院)을 혁파한 것을 하례하였으며, 자수원(慈壽院)의 옛터에 북학(北學)을 창건하고, 헐어낸 목재와 기와는 봉은사(奉恩寺)에 주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예조가 아뢰기를,
"북학을 신설하는 데는 학관(學官)을 차출하는 외에 노복을 나누어 주고 유생을 먹여 주어야 하는 등의 일을 미리 헤아려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해당되는 각 관아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구애되는 일이 많아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2월 14일 갑오
가주서 강석규(姜錫圭)를 판중추 송시열에게 보내 유시를 전했으나 병이 심하다고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2월 15일 을미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는 조천(祧遷)하는 의식이 있게 마련인데 조천해야 할 신위를 따져 올라가 보니 인종 대왕을 조천함이 마땅할 듯합니다만 오묘(五廟)의 예법으로 논한다면 명종대왕 역시 조천에 해당됩니다. 중대한 일이니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번의 조천은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에게 자문하는 것이 일을 신중히 처리하는 방도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신 등이 일찍이 듣건대, 오묘(五廟)·칠묘(七廟)의 제도는 모두 태조로부터 헤아렸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묘(仁廟)와 명묘(明廟)를 한 세대로 치니 이번 부묘할 때에 모두 조천함이 합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감히 자신할 수 없으니, 예를 아는 신하에게 널리 물어 강정해야 합니다."
하고,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의 의견도 같아, 모두 상이 결단하기를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판중추와 우참찬에게 가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예조가, 우참찬 송준길은 이미 올라 왔으나 판중추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있으니 낭관을 보내 수의해 와서 양 유신의 수의를 동시에 서계하겠다고 아뢰니, 상이 윤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할 때 조천하는 문제를 판중추 송시열과 우참찬 송준길에게 의논하니, 시열은 ‘삼가 묘제(廟制)의 대수(代數)를 상고해 보면 태조로부터 4대친(四代親)까지 포함하면 이미 5대가 되니 인종·명종 2묘는 모두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금 모두 조천한다고 해도 무슨 의아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일설이 있으니,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대를 잇는 것을 중히 여기므로 비록 형이 동생을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어도 오히려 부자관계와 같이 소목(昭穆)이 된다. 《춘추(春秋)》로 말한다면 노(魯)나라 민공(閔公)은 동생이고, 희공(僖公)은 형인데 공자가 「희공을 민공보다 올려 합사했다.[躋僖公]」고 써서 거꾸로 향사한 것을 나무랐다. 전(傳)에 「아들이 비록 어질다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 받지 못한다.」 하였고, 「아버지 사당에 먼저 한 후에 할아버지에게 한다.」 하였고, 또 「소와 목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형제간이 부자의 사이로 된 것이다. 송나라 태묘(太廟)에서는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한 세대로 만들었고, 철종(哲宗)과 휘종(徽宗)을 한 세대로 만들었으며, 흠종(欽宗)과 고종(高宗)을 한 세대로 하였는데, 주자가 그르게 여겨 형제를 각각 한 세대로 하여 부자간과 같이 하기를 청하였는바, 지금 그 의장(議狀)과 도자(圖子)가 모두 있어서 상고하여 알 수가 있다. 지금 우리 인묘와 명묘는 혈연관계로는 형제간이지만 의리상으로는 부자간이다. 합하여 한세대로 한 것이 비록 전례가 있는 일이지만, 공자나 주자의 가르침으로 헤아려서 그 의리를 처리한다면, 인조 대왕을 부묘할 때 예에 있어서 먼저 인묘를 조천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 올바른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말하지 않는 법이나, 앞으로 영녕전(永寧殿)에 옮겨 봉안할 때 소(昭)와 목(穆)을 둘로 하여 온당치 못했던 이전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오히려 이전 잘못을 그대로 따라서 사기(事機)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하고, 송준길은 ‘묘에 대한 의논은 사체가 몹시 중하고 또 신과 같이 몽매하고 비루한 자가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오늘날의 제도를 고례(古禮)와 주자의 의논에 견주어보면 실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으니 더욱더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현행의 규례에 의해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예를 준행할 경우라면 또한 많은 논의가 필요치 않을 듯하다. 오로지 널리 물어서 알맞게 조처하기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할 때 배향(配享)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정원으로 하여금 예전 규례대로 대신과 정부, 육경, 삼사 장관을 부르도록 명하여 빈청에서 회의한 다음 뽑아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등이 아뢰기를,
"만 석의 쌀을 방출해 도성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몹시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많은데 쌀은 적어 난잡하게 발매(發賣)하여 포목을 가지고도 쌀을 사지 못한 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쌀을 시장 사람들에게 주어 값을 매겨 매매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움을 따르거나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관청에서 규찰하여 죄를 주소서."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쌀을 내어 시장 백성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 매매하게 하면 반드시 관가에서 발매하는 것보다 더 어지럽고 소란스럽게 될 것이니, 그것은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호적의 원수(元數)를 살펴 각동(各洞)과 각방(各坊)의 호구의 다소에 따라 쌀의 수량을 참작해 정하고 표문(標文) 을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매매하게 해 겹쳐 받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한 달에 세 차례 발매하되, 그 가운데 녹봉을 받는 집이나 요미(料米)를 받는 집 및 살림살이가 부유한 자들은 표문을 받지 못하게 하며, 정포(正布)와 상포(常布) 역시 많고 적음이 고르지 않은 폐단이 있으니 모두 참작해서 발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7일 정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우참찬이 올라온 지 오래되었으니 쌀과 고기를 잇대어 주라고 해조에 분부하라."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木星)을 휘감았다.
2월 18일 무술
실록청이 아뢰기를,
"실록을 완성한 후에는 춘추관에 봉안하는데 네 곳에 나누어 보관할 것도 함께 춘추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적당한 시기에 옮겨가는 것이 전례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3년 안에 실록을 완성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어서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는데, 세초(洗草)하는 일 등을 부묘(祔廟)하기 전에 갑자기 시행하는 것은 인정과 예에 있어서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실록청의 계사를 가지고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부사 정유성이 ‘실록 편찬이 비록 끝났으나 세초 등의 예를 부묘하기 전에 거행할 수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그때 가서 다시 품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실록을 봉안(奉安)할 때에는 완전히 길복(吉服)을 착용하고서 전도(前導)하고 고취(鼓吹)하는 것이 예전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3년이 지나지 않아서 배종(陪從)하는 관원이 착용하는 복색(服色)에 대해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이에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 없어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들 ‘실록의 편찬을 마치는 것이 매번 3년이 지난 뒤에 있어서 전도와 고취 등의 일에 완전히 길의(吉儀)를 썼다. 그런데 지금은 3년 안에 실록의 편찬이 끝났으므로 인정과 예로 헤아려 볼때 전례를 그대로 쓸 수가 없다. 그러니 고취와 전도에 쓰이는 여러 도구를 임시로 제하고 여러 신하들이 시복(時服)에 백모(白帽)·백포(白袍) 차림으로 춘추관에다 봉안하고서 가을이 되어 네 곳에 나누어 봉안할 때 평상시의 예를 갖추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경자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부사인 호조 참판 이정영(李正英), 서장관 이동로(李東老)와, 황후 진향 정사(皇后進香正使)인 좌윤 심지명(沈之溟), 예조 참의 이진(李𥘼)이 연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2월 22일 임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 부제조 정지화가 입시하여 진달하기를,
"칙사가 머지 않아 서울에 들어올 것인데 성상의 몸이 이와 같이 미령하니 아마도 칙서를 맞이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미리 강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칙사는 전과 다르며, 또 듣건대 상사(上使)의 사람됨이 몹시 험하다고 하니 차라리 나가서 맞이하고 싶다."
하였다.
2월 26일 병오
우참찬 송준길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송준길이 먼저 기근이 든 가운데 여역이 몹시 성함을 진달하면서 근시(近侍)를 보내어 특별히 여제(癘祭)를 지내거나 혹 향촉(香燭)을 내려보내 도신(道臣)을 시켜 경건하게 제사지내기를 청하고, 또 ‘의관을 시켜 약을 싸가지고 내려가 마음을 다해 구료하게 하면 두루 다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몹시 좋다. 삼남과 북관(北關)에 모두 제사지내되, 근시가 왕래하는 것은 폐단이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경건하게 제사지내게 하겠다. 의관 역시 의술을 잘 익힌 자를 가려뽑아 약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속히 어사를 내려보내 구휼정책을 살펴보기를 청하고, 또 유신들을 자주 접견하여 게으르고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숙(李䎘)은 당초에 잘못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연한 사대부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뒷날 크게 쓸 만한 자이니, ‘득명사류(得名士類)’라고 한 네 자의 전교는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네 자를 부표(付標)하여 고치게 하겠다."
하였다.
2월 27일 정미
영의정 정태화가 홍제원(弘濟院)에서 돌아와 청대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대사헌 이일상, 대사간 이경억 역시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홍제원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어첩(御帖)을 바치니 그가 전례대로 치사하였는데, 그의 기색을 살펴보니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교외에서 영접하는 일을 끝내 결정짓지 못하였으니 몹시 답답합니다."
하고, 이경억이 아뢰기를,
"밤새워 간청한다면 혹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좋아하지 않는데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화를 낼 것이다."
하였다. 이일상이 아뢰기를,
"만약 교외에서 맞이하면 관소(館所)에 행차하는 것도 그만 둘 수 없으니, 이것이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혹 주선할 수 있겠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홍제원에 있을 때 좌상과 우상이 신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의외의 걱정이 야기될까 염려되어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저들의 기색을 살펴보니 전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아주 옳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면 그가 어찌 내가 모른다고 여기겠는가?"
하였다.
2월 28일 무신
진시에 상이 모화관에 행차하여 칙서를 맞이하였다. 돌아와 숭정전(崇政殿) 뜨락에 이르러 칙서를 선포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정전(正殿)에서 칙사를 접견하였다.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2월 29일 기유
상이 흥정당에서 호조 판서 허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도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역관들이 이 영부사 및 김추립(金秋立)의 일을 제기하려고 한다 하니 걱정이 없지 않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영부사에 대해서는 한 차례 말하고 다시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추립의 일도 칙사가 아는 바가 아닌 듯하니, 이는 필시 통역관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김추립은 마침 청나라에서 사면령을 반포하여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니, 설령 제기한다 하더라도 답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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