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8권, 현종 5년 1664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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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사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에 가 죄수를 상세히 조사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게 하였다.

 

대사간 김수흥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5년이 되었는데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정사를 보시는 데 있어 점점 권태의 빛을 보이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점점 태만하여, 민생은 점점 곤궁해지고, 인재는 점점 부족해지며, 조정은 점점 법도를 이탈하고 금지법은 점점 밀도를 더하며, 기강은 점점 무너지고, 풍속은 점점 투박하여, 나라가 위태롭기가 점점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면서, 이상 8개의 ‘점점’ 조항[八漸之目]을 다시 하나하나 조목 별로 설명을 가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나라가 믿는 것이라곤 재상과 장수이며 연하(輦下)의 친병(親兵)은 다른 군대에 비하여 더욱 중한 것입니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몸에 중한 병이 있어 작년 겨울부터 임무를 살피지 못했고 지금은 또 휴가를 얻고 온천욕을 떠나 돌아올 기약이 아득합니다. 1만에 가까운 군대가 장수 없이 반년을 보내면서 훈련도 전혀 폐지하고 통령자(統領者)도 없으니, 그것이 어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도리이겠습니까. 비록 대신이 총괄적으로 살피고 제조(提調)가 대행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시기에 그러한 임무를 어떻게 끝까지 대리로만 살피게 할 것입니까. 당연히 대신에게 물어 되도록 빨리 변통을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문에 열거한 일들을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수흥이 시정(時政)을 눈으로 보고 8개 항의 ‘점점’ 조항을 하나하나 들어 논했는데, 그 내용이 근간(懃懇)하고, 성상의 비답을 보니 이미 가납할 뜻을 밝혔습니다. 정사와 간언에 있어서는 오직 성상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실 일이고, 민생이 점점 곤궁한 것은 사실 차역(差役)이 고르지 못한이 연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수사 및 여러 궁가 또는 각아문의 둔전민에 대하여 모두 똑같이 차역하도록 종전부터 재가를 내려 거듭 강조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바깥에서 착실히 거행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세 궁가 소속의 장노(庄奴)에 대해서도 차역을 고루 하도록 대간이 일찍이 논집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허락을 받지 못하여 그것을 보고 중외에서는 실망하고 개탄했습니다. 만약 먼저 내수사·궁가부터 그 편파적인 정책을 타파해버리면 그 나머지 각아문을 위시하여 세력가의 장호(庄戶)와 호우(豪右)의 보호 밑에 있는 것들은 그냥 두어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특별한 하교를 내리고 각별히 거듭 천명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소서.
요즘 들어 인재가 점점 부족하고 의원과 역관, 기타 여러 기능직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참으로 오늘의 절실하고 급박한 걱정거리입니다. 문무재예(文武才藝)와 잡기 등의 무리를 배양하여 만들어내는 제도가 모두 국전(國典)에 기록 되어 있으니 각기 해당 관아들이 착실하게 모든 것을 법전에 의거하여 거듭 밝히고 권장하도록 하소서.
문망이 점점 밀도를 더한 것은 그게 바로 쇠세(衰世)의 현상입니다. 국가가 난리를 겪은 후로 해야할 일들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법조문을 번거롭게 자꾸 만들어 그것이 많은 폐단을 부르고 있는데, 그것을 비록 한꺼번에 다 없앨 수는 없지만 해조로 하여금 옛 제도 이외의 새로 만든 법조항을 추려내어 신들과 서로 의논하여 그 중에서 없어도 될 것들은 우선 기록하였다가 계품하여 결정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밝히지 않고서는 세상을 격려할 길이 없습니다. 충효와 절의에 대하여 외지에서 상문(上聞)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멀고 막다른 곳에서야 어찌 누락된 사람이 없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다시 묻고 찾게 하여 무릇 격려에 해당한 은전이면 그것을 확실히 거행하소서. 70세가 되면 치사하는 것은 예전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 법례에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경중(輕重)이 좌우될 만한 비중을 가진 자가 아니면 자기 소원을 이루도록 허락하고 봉조청(奉朝請) 녹봉을 먹게 함으로써 노인을 우대하고 염우를 장려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청렴 근신자를 골라 뽑는 일은 종전부터 별로 없었던 일이어서 비록 갑자기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겠으나 권장 격려와 관계되는 일이기도 하므로 조용히 구례를 상고해 보고 원숙히 강론한 후 계품하여 정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상소문 말미에 제시된 문제는 후일 등대 때 면품(面稟)하여 처리할까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권령(權坽)을 우승지로, 이경휘(李慶徽)를 동부승지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충청도에서 전염병 때문에 현재 앓는 자가 5백 86명, 사망자가 78명이었다.

 

4월 2일 갑오

대사간 김수흥이 함경 감사 서필원의 상소 내에서 파란을 조장하고 있다고 한 말이 양사를 침척했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사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4월 3일 을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인견 때 대사성 민정중이 그 직을 간곡히 사양했기 때문에 신이 그것은 으레 겸임하는 직이 아니라고 아뢰었던 것인데, 뭇사람들 논의가 모두 정중이 그 동안에 한 일이 많은데 그것을 중간에 그만두게 되어 선비들이 실망의 빛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대사성 일을 그대로 살피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를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전염병이 심하게 번지고 있으니 활인서(活人署)에서는 병자들에게 먹을 것을 제급하고, 약물(藥物)도 두 의사(醫司)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이 흉년이기 때문에 대신이 도신(道臣)의 장계에 따라 대동청(大同廳)이 징수할 쌀을 6백여 섬이나 견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영남(嶺南)은 견감한 잡역의 삯을 모두 진청(賑廳)에서 주었습니다. 강원도도 그 견감한 잡역 삯을 영남에서 한 예대로 처리해야 합니까?"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일의 모양으로 말하자면 견감한 잡역의 삯을 어찌하여 진청이 대신 갚아야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똑같은 나라 일인데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2백 섬을 돌려주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양호의 선혜청에 남아 있는 쌀이 매우 부족하여 지용(支用)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재생(裁省) 때 양호의 각읍 관수미(官需米)를 떼두어 진구(賑救)에 이용하게 하되, 호서는 당장 진구할 일이 없으므로 그 떼어둔 쌀을 가져다가 쓰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은 사리상으로 보아 미안한 일입니다. 당초 각관에서 자봉(自俸)의 쌀을 떼어둔 것은 기민 진구를 위해서인데 지금 만약 그것을 진구용으로 쓰지 않으려면 당연히 본관(本官)에게로 되돌려줘야지 어떻게 그것을 선혜청으로 옮겨다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그 쌀을 옮겨다 쓰지 않으면 공물값 지급할 쌀을 충당할 길이 없는데, 공물 주인들은 값을 주지 않는다 하여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만약 부득이한 경우라면 절반 정도는 이용해도 되겠지만 전량을 다 쓴다는 것은 사리상으로 보아 부당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절반은 본관에게로 되돌려주고 절반은 선혜청에서 이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별해 첨사(別害僉使) 장문규(張文奎)가 삭시사(朔試射)에서 연거푸 수석을 하여 첨사에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상격(賞格)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듣자니 그의 부모 나이가 모두 80이어서 뭇사람들 논의가 정리상으로 보아 애처롭다 합니다. 달리 변통의 길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은 싫어서 기피하는 유가 아닙니다. 정리가 그러한데도 체차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상직(賞職)이라는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체차를 허락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국가는 마땅히 효리(孝理)를 숭상해야만 합니다. 옛날 선조조에서 어느 한 무인이 집이 원주(原州)인데, 연이어 육진의 고을원을 역임하고 갈리어 돌아온 후 또 변방 고을원에 임명되자 그가 상소하여 자기 노모를 뵙겠다고 빌었습니다. 이에 선조께서는 그를 측은히 여겨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특별 제수하여 자기 어머니를 봉양하게 하였으므로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만약 효로 다스린다면 사람들이 어찌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작년에 호남 세입(稅入)은 너무 많은 수량이 줄어 쌀이 4백여 섬, 대두(大豆)가 1백여 섬이었습니다. 이렇게 경비가 부족한 날 많은 군대까지 양성하고 있기 때문에 1개월 방료(放料)가 너무나 많습니다. 진휼청이 써야 할 양호의 공물 값을 호조에서 옮겨다 쓰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민정중이 대사성에 도로 임명한 일은 사리와 체통이 전도된 것이라 하여, 이어 본직까지 사직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본직에 대하여는 조용하게 처리하리라."
하였다. 대사간 김수흥이 아뢰기를,
"번신과 조정과는 사리나 체통으로 보아 사이가 엄격한데 요즘 와서 체통이 크게 무너져 번신으로서 조금만 책벌을 당하면 감히 금방 사연을 늘어놓으며 사직하곤 하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조귀석만 하더라도 이미 파직이 된 뒤인데도 불구하고 재실(災實) 그 한 문제로 인하여 장황하게 치계를 하였으니 사리나 체면으로 보아 너무나 부당한 일입니다. 그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부교리 이단하의 상소도 귀석의 장계와 전후하여 입계(入啓)가 되었는데 귀석이 함답(緘答)에서는 자기변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장계까지 한다는 것은 실로 외람된 일이다."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탑전에서 사직하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당상(堂上) 이하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인데 이조 참의 민정중이 한 번도 아니게 탑전에서 번독하게 사직하였으니 그도 추고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경기 지역에 전염병이 성하게 퍼져 현재 앓는 이가 1천 43명, 사망이 52명이나 되었다.

 

4월 5일 정유

민정중을 이조 참판으로, 이정영(李正英)을 평안 감사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각각 삼았다.

 

강원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현재 앓는 이가 1만 5백 84명, 사망이 87명이었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 자리로 들어갔다.

 

4월 6일 무술

밤에 흰구름 한 줄기가 기운[氣] 같이 서쪽에서 일어 곧바로 동북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길이가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였고 넓이는 두 자 정도였으며 점점 동남방으로 이동하다가 한참 만에 없어졌다.

 

4월 8일 경자

함경 감사 서필원이 전후 상소에서 송시열을 헐뜯어 시배(時輩)들이 크게 놀랐으나 필원 역시 시배들 축에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대각에 있는 자들이 역시 그를 호되게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규령이 지평이 되고는 자기 자신 시열에게 깊이 의탁하고 싶은 생각에서, 송창이 그 당시 대관이었으면서 필원을 탄핵하지 않았다 하여 그를 논핵하려고 장관에게만 상회례(相會禮)를 청하고 송창에게는 청하지 않았다. 송창은 옥당에 있는 자기 친구를 통하여 그가 자기를 탄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먼저 인피하고 규령을 공척하였으므로 규령도 인피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사간 김수흥, 정언 홍만용, 사간 송시철이 모두, 이규령이 피사에서,
"지난 번에 양사가 이미 필원을 논핵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고 난 후 끝까지 말 한마디 없었다."
하고 심지어 헌관의 체직을 논한 일까지 있었다 하면서
"신들이 끝까지 말 한 마디 없었던 것은 헌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고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에 대하여, 장령 박증휘가 처치하기를,
"송창·이규령·홍만용은 체직시키고 송시철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신축

김수흥을 동부승지로, 이경휘를 대사간으로, 이경억을 이조 참의로, 윤우정(尹遇丁)을 장령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지평으로, 조성보(趙聖輔)·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강원도 삼척부(三陟府)·정선군(旌善郡)에 눈이 내렸다.

 

사간 송시철이 부소(赴召)하지 않았다 하여 두 번째 인피하고, 장령 박증휘도 처치를 옳지 못하게 했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리 박세당 등이 상차하여,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1일 계묘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행차하여 장전(帳殿)의 관무재(觀武才)에 임어하였다.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과 기추(騎蒭)·편추(鞭蒭) 등의 기예를 시험 보였는데 훈국(訓局) 장관(將官)의 말 달리는 솜씨가 익숙하지 못하고 또 허수아비도 맞추지 못하자, 상이 이르기를,
"훈국 초관(哨官)에게 초시(初試)를 제수한 것은 사습(私習)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 말 달리는 꼴이 형편없는 것을 보니, 징계와 격려의 뜻에서 의당 벌을 내려야겠다."
하고, 이어 병방 승지(兵房承旨) 권대운(權大運)에게 명하여, 초관 오협(吳悏)에게 곤장을 치게 하고, 유시(酉時)말에 상이 파하고 환궁하였다.

 

4월 12일 갑진

상이 춘당대에 행차하여 관무재를 실시하였다.

 

함경도 갑산부(甲山府)에 눈이 내렸다.

 

4월 13일 을사

5경에 서리가 내렸다. 상이 춘당대에 행차하여 유생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이고, 대내에 있는 센 활을 내오게 하여 멀리 쏠 수 있는 자면 당겨보도록 했는데, 혹 당기기도 하였고 혹은 못하기도 하였다. 이상식(李尙植)이라는 자가 있어 그것 당기기를 약한 활을 다루듯 손쉽게 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활 하나를 덧대어도 틀림없이 당기겠습니다."
하니 한 장 더 주라고 명하였다. 상식이 그 포갠 두 활시위를 잔뜩 당기니, 상이 웃으면서 장히 여겼다. 그리고 문신(文臣) 민시중(閔蓍重) 등 8명과 무신(武臣) 구영망(具英望) 등 28명을 뽑아 모두에게 급제를 내리고 그 밖의 무예에 입격한 자들에게도 혹은 가자(加資), 혹은 부직(付職)을 하고, 혹은 말, 혹은 활과 화살, 혹은 무명베를 주어 차등을 두었다.

 

오정위(吳挺緯)를 개성 유수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장령으로 삼았다.

 

경상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현재 앓는 이가 5천 2백 7명이었다.

 

4월 14일 병오

장령 맹주서가,
"서필원의 전후 상소가 공론으로부터 비난을 당했는데도 신이 그 당시 본부(本府)를 더럽히고 있으면서 즉시 박정(駁正)을 못했는데, 지금 양사 관원 모두가 논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당했으면 신도 어떻게 감히 혼자 태연히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강원도 홍천(洪川)·철원(鐵原)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4월 16일 무신

조형(趙珩)을 판윤으로, 곽성귀(郭聖龜)·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민시중을 전적으로 삼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성하게 퍼져 현재 앓는 이가 6백 36명, 죽은 이가 32명이었다.

 

예관(禮官)을 보내 참판 유계(兪棨)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서필원(徐必遠)을 탄핵하여 송시열에게 아부하려고 동료와 상회례(相會禮)를 가져 발론을 하였다. 대사간 이경휘(李慶徽)가 말하기를,
"지난 상란(喪亂) 시절에 형제를 잃은 슬픔이 있었으나 조정에 선 이후로는 혹 사신을 응접(應接)할 일을 당하면 부득이 공의(公議)를 생각하여 사정(私情)을 나타내지 못하고 참아오기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필원의 상소문도 오로지 공사 경중(公私輕重)만을 가지고 한 말인데, 청죄(請罪)의 논이 나올 때마다 격렬해지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서 가타부타하겠습니까."
하고, 정언 조원기도 말하기를,
"필원의 상소는 조정 체례(體例)를 높이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학술(學術)이 거칠고 견식(見識)이 정확치 못하다고는 할지라도 그의 당초 마음이야 어찌 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자들의 말과 같겠습니까."
하며, 모두 따르지 않았다. 성보는 드디어 경시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경휘·원기도 역시 다 인피하였다. 그리하여 교리 >박세당 등이 상차하여, 성보·원기는 체직시키고 경휘는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8일 경술

정태화를 내의원 제조로, 정지화를 형조 참판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병조 참의로 삼았는데 망통(望筒)으로 입계한 것이다.
정관(政官)이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조성보를 지평으로, 조원기와 윤형성을 수령으로 의망(擬望)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전 지평 이규령은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제수하고, 전 정언 조성보는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제수하고, 조원기는 지평을 제수하고, 윤형성은 정언을 제수하고, 북청·이성 두 고을 전관(前官)은 다 경직(京職)을 주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요즘 정체(政體)를 보면 전관(銓官)이 사(私)를 쓰는 것이 풍속이 되어버렸는데, 형성·성보의 일을 놓고 보니 더욱 당색을 두둔하는 태도를 보겠구나. 아, 전관이 방자하여 기탄하는 바 없으니 위세와 권한을 멋대로 쓰기 오늘보다 더한 때는 없었다. 이조의 당해 당상·낭청을 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새로 제수된 북청·이성 두 고을 수령은 오늘 안으로 다 서경(署經)을 면제해 주고 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 좌승지 홍처대, 우승지 권령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에 나와 입시를 명하였다. 권령이 병비 정청(兵批政廳)에서 오느라 입시가 조금 늦어졌는데 상이 사람을 보내 묻기를,
"인견 명령이 내려졌는데도 즉시 들어오지 않으니 미처 상의하지 못한 일이라도 있는가?"
하니, 용익이 답하기를,
"우승지 권령이 정청에 있어서 즉시 입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사람을 시켜 꾸짖기를,
"청대를 하면서 멀리 있는 동료까지 함께 청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우부승지 김익경, 동부승지 김수흥은 모두 혐의 때문에 입시를 못한 것이고, 권령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청에 있다가 일을 막 끝내고 현재 궐내에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조금 후 상이 인견하고 급히 묻기를,
"오늘 청대한 것은 무슨 좋은 생각이 있어서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연이어 내리시는데 온당치 못한 일이 있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청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인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서필원의 문제도 처음에는 별것도 아니었는데 점점 확대되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당초 필원이 계사(啓辭)를 올렸을 때 신도 이 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그 일의 수말(首末)은 나도 알고 있다. 이른바 온당치 못하다고 한 그 말을 하라는 것이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조성보 등이 나이 젊고 기가 팔팔한 사람들로서 설사 논변이 과격하였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본디 온당치 못한 일이고, 조원기·윤형성을 대간에 특별히 제수한 것도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보·이규령을 도로 대간 후보로 추천한 일은 무슨 일이며, 원기·형성을 외직에 보임한 것은 또 무슨 일인가? 정관이 정언·지평을 제수하는데 정관이 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인가? 나는 정관이 한 짓과 서로 반대 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대간에 특별 제수한 것이다. 뭐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인가?"
하여, 용익이 아뢰기를,
"정조(政曹)의 인재 등용하는 규정이 으레 준론(峻論)의 사람을 취택하기 때문에 성보·규령을 대직(臺職)에 의망했던 것인데, 그를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한다는 것은 사실 뒤 폐단과 관계되는 일이며, 대간을 특별 제수한 일에 있어서는 더더욱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보 등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면 계사(啓辭)로 할 것이지 청대까지 할 게 뭔가. 틀림없이 무슨 다른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승지 말을 들으니 별로 신기한 게 없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어찌 딴 생각이야 있겠습니까. 대간을 특별 제수하는 일 그게 바로 지나친 처분이기 때문에 면달(面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관(政官) 그가 무슨 멋대로 농간을 부린 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기에는 정관을 위해서 온 것이다."
하니, 용익·처대가 한 목소리로 답하기를,
"신들이 어찌 정관을 위하여 청했겠습니까. 대간을 특별 제수한 일, 또는 외직에 보임한 일만으로도 매우 거북한데, 하루 동안에 준엄한 전지가 계속 내리고 있으니, 그 소문이 멀리 전파되었을 때 어찌 청문(聽聞)을 놀라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성보 등의 은밀한 뜻이 빤한 것이다.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데 정관이 한 일이 만약 그르다면 어떻게 청문을 염려하여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교리 박세당, 수찬 윤심이 청대하고 입시하였다. 세당이 아뢰기를,
"필원의 상소 내용이 미치광스럽고 너무 솔직하여 거치른 점은 있으나 성보가 그를 ‘협제(脅制) 종자(縱恣)’라는 이름으로 몰아 죄를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신들이 처치하면서도 성보를 체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원래 심정이야 역시 딴 뜻은 없는 것인데 그를 머나먼 국경 지대로 보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정관으로 말하면 출척(黜陟) 과정에 비록 사소한 실수가 있을지라도 만약 위권(威權)을 제멋대로 쓴다는 죄목으로 단박에 죄를 내린다면 그 역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관이 제멋대로 한 흔적이 있는데도 그를 일러 그의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되겠는가."
하여, 세당이 아뢰기를,
"만약에 위권을 제멋대로 쓴 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목을 베더라도 되겠지만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위권을 제멋대로 쓴 일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치고 싶거든 그대들이 고치라."
하였다. 세당이 아뢰기를,
"대관이라면 그 주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야 마땅한데, 조원기는 그 피사(避辭)에 있어 앞 뒤가 각기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조가 그를 외직에 보임한 것이 무슨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기의 일은 나도 알고 있었는데 특별 제수 때 깜박 잊고 혼동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망단자(望單子)를 도로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용익이 전지 내에서 ‘권위를 제멋대로 쓴다.[擅用權威]’의 네 글자를 삭제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군(護軍) 이유가 양주(楊州)의 목사(牧使)로 있다가 대직(臺職)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 체직된 뒤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에서 경기 관내의 민사(民事)를 특별 진념하여 대동법을 새로 시행한 후 막히고 장애된 것은 변통하도록 이미 명령을 내렸고, 양주(楊州) 고을에 있어서도 그 전결(田結)을 가을에 가서 다시 측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기뻐하고 감대(感戴)하여 마치 다시 생을 얻은 듯이 반기고 있으니 이로부터 대동법이 중도에 맞게 시행되고 다시 실시한 전지 측량이 균등을 유지할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양주 한 고을이 서울과 가장 가까이 있고 능(陵)이 일곱, 묘(墓)가 넷이 있으며, 동서의 요충 지대여서 이미 다른 고을에 비할 바 아닌데다 봄 가을 봉심(奉審) 때나 사명(使命)이 오갈 때 각종 잡역(雜役)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므로 한 고을의 편중된 고통의 형세가 본디 그러합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성상께서 묘당에 물어 혹 조세를 견감하던지 혹은 부역을 덜어주면 조금이나마 백성들이 힘을 펴고 마음에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본읍의 측량 이전에 통행하던 결수는 8백 92결이었고 징수하던 쌀은 3백 60섬이었는데, 측량 이후에는 통용 전결 수가 3천 3백 40여 결에 이르고 징수하는 쌀도 1천 5백 16섬에 달하여 측량 이전에 비하면 그 수치가 네 배도 더 됩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양안(量案)이 완료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듬해에 와서 비로소 전세(田稅) 1천 2백 24섬이 보태졌습니다. 그래서 같이 내야 할 두 종류의 쌀이 도합 2천 7백 40여 섬이나 되어 그것을 일시에 다 징수할래야 백성들이 이미 바닥이 나 결코 다 받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바라건대 금년 봄에 징수할 쌀은 원수(元數) 내에서 절반만 징수하고 나머지 절반은 가을에 가서 받을 것이며, 해당 청(廳)의 경비가 만약 부족하면 우선 상평청(常平廳)에 저장된 것을 끌어다 빌어쓰고 징수할 쌀의 그 절반을 가을걷이 뒤에 상환해 주면, 나라로서는 실지 혜택을 주는 일이고 백성들은 남아도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보건대, 1년 내에 2개월간 서울에 상번하는 군대도 역시 속오(束伍) 부대에다 충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원액(元額)은 매우 많고 군정(軍政) 또한 극히 중대한 문제이므로 우선 숫자 채우기에 바빠 동에서 옮겨 서에다 보충하여 궐액(闕額)의 책임이나 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군정(軍丁) 명부가 빈 껍데기가 되고 양역(兩役)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사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바라기를, 지금부터는 원 호수의 다과를 헤아려 각종 신역 이외에서 군정의 액수를 정하고 1년에 2개월 상번하는 군대에 한하여는 속오의 역(役)을 제감해주면 군정들도 양역의 고통이 없을 것이고 명부가 허구적으로 꾸며질 염려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두 근신을 내보내 시골 마을을 드나들면서 민간의 질고를 염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를 내려보내자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양주 고을이 서울과는 가장 가까워서 평상시 역(役)에 응하는 일이 다른데 비하면 더욱 무거운데, 선혜청을 설치한 이후로는 모든 책응(責應)에 있어 다 가미(價米)를 주고 있으므로 지금 변통하는 일이 없습니다. 새로 측량한 전결 수가 종전 수치에 비하여 여러 갑절인데 작년 가을에 징수할 쌀을 지금 와서 비로소 받는다면 이어 징수할 춘미(春米)는 백성들 힘이 과연 닿지 못할 것입니다. 금년 봄에 받아들여야 할 수량 내에서 절반은 일찍 상납하고, 절반은 추등미(秋等米)와 같이 상납하게 하소서. 그리고 외방 속오군 중에서 기병(騎兵)·보병(步兵)이 겸역(兼役)하는 것은 각도가 통용하고 있는 규정이고, 그가 만약 상번할 시기이면 보인(保人)을 보충으로 보내는 것 역시 삼남(三南)에서 이미 정한 제도여서 그것은 다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 질고 염탐의 일에 있어서는 아래에서 감히 곧바로 청할 수 없는 일이니 상께서 재량하여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를 차출해야 했는데, 본 아문에 현존 당상관이 없어, 대신과 의논하여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4월 19일 신해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은 서필원을 논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들로부터 물리침을 당했으니 참으로 대각에 얼굴을 들고 서서 다시 무어라 논열(論列)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필원의 상소가 오로지 분에 못이겨 한 것이라면 사체로 보아 한번쯤 서로 경계하는 말이 없어서도 안되었지만 또 한편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전일 양사(兩司) 관원들이 시비(是非)만을 밝히고 경솔하게 논박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물의가 갈수록 과격하여 결국 성상께서 그렇게 지나친 일을 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언관을 외직에 보임하고 전관(銓官)은 텅비었으며 성상의 위엄이 가실 줄 모르고 사기(辭氣)가 너무 준엄하여 중외가 풀이 꺾이고 보고 듣는 이가 다 놀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천노(天怒)를 돌리고 공의(公義)를 붙들어야 할 책임이 대신(臺臣)에게 있는 것인데 신같이 못난 인물로서야 어떻게 군상(君上)에게 미더움을 보이고 중망(衆望)을 눌러 복종시키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고,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후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령을 보았는데, 방자하고 멋대로 한다는 하교까지 있어 신으로서는 너무나 놀라고 당혹했습니다. 남의 신하가 되어 자기 당여를 두둔하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죄목인데 실정을 외면한 하교가 그렇게 뜻밖에 내리어, 조정 신료들은 기가 죽고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게다가 정원, 옥당의 청대까지 일체 거절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뭇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위엄을 조금 누그러뜨리시고 이조의 당상·낭청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이규령·조성보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령을 보았는데, 삼가 미안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전후 소를 올려 강변한 것이 번거롭고 수다스럽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원래 뜻을 살펴보면 소견이 고루하고 막혀서 그런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협제(脅制)니 종자(縱恣)니 하는 말로 죄안을 만들어 꼭 추론하려고 한 것도 그것이 비록 아주 타당한 일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대관을 멀리 내쫓는 것도 사실 청명한 조정에 있어 썩 좋은 일이 못되고 대간을 여유있게 포용해야 하는 도리에도 해가 되는 일이니, 북청 판관 이규령, 이성 현감 조성보에 대한 특별 제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으로서 소소한 벌도 내릴 수 없다면 이는 그대가 임금 보기를 한낱 조사(朝士)보다도 못하게 본 것이니 나는 매우 부끄럽다."
하여, 이후는 그 비답 내용이 너무 준엄하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황해도에 전염병이 더욱 번져 현재 앓는 이가 1천 6백 29명, 사망이 1백 77명이었다.

 

4월 20일 임자

대사간 이경휘가 인피하고 아뢰기를,
"어제 본원이 전관 파직 추고 건에 대하여 그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논청(論請)했는데, 신은 전 참판 민정중과 서로 혼인한 집안으로서 당연히 피혐해야 했기 때문에 그 논의에 대하여 감히 왈가왈부를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이 그 때문에 인피했는데 또 감히 태연한 자세로 처치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신이 어떻게 일각인들 그대로 앉아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도제조 정태화가 청대하고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요 며칠 사이에 조정 분위기가 좋지 못하여 신하들로서 죄를 받은 자가 많습니다. 신이 차자로 소회를 아뢰고 싶었으나 시끄러운 시기여서 감히 그렇게 못했던 것인데, 대신을 외직에 보임하는가 하면 전석(銓席)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새로 임명된 판서가 비록 서울 안에 있을지라도 대간이 현재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논청하고 있어 공무 집행을 못할 형편이므로, 지금 밖에 나가 있고, 참의 역시 밖에 있어 올라올 기약조차 없습니다. 대간의 빈자리를 차출하여 메울 길이 없어 나라 일이 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바깥 논의들은 다 벌을 너무 과하게 내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보면 하는 짓들이 너무 속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벌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인조 조에서도 전랑(銓郞)을 벌한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위권(威權)을 제멋대로 쓴다는 하교를 하였으니, 만약 그 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파직 추고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조원기의 피사가 위아래의 말이 다른 것은 일이야 옳건 그르건 바깥에서도 역시 잘못이라는 논의들이고, 이조가 외직에 보임한 것을 옳게 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사헌은 작년부터 함께 공무를 수행할 관원이 없습니다. 집의 남구만(南九萬)이 어사로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고 장령·지평도 다 밖에 나가 있어 사헌부나 전조(銓曹)에 모두 관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고서야 나라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날 김수흥의 상소에서 훈련 대장 이완의 체직을 청한 건에 대해, 등대 때 여쭈어 보려고 신이 저번에 좌상을 만나서 상의하였더니, 좌상이 말하기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으니 체직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연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다."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이완의 사직소가 들어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서둘러 비답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아 신이 비록 아뢰어도 틀림없이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제신들의 죄가 그렇게까지야 되겠습니까. 상께서 짐작을 하셔야 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조의 당상·낭청을 체직하고 추고만 하게 하라."
하였다.

 

교리 이유상·박세당, 수찬 윤심, 부수찬 심재가 상차하기를,
"어제 등대 때 비록 구구한 지성을 품고 갔었으나 끝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하였으니 신들의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그 서필원 상소 내용이 물론 미치광스럽고 거친 데가 많지만, 논자들도 공격을 너무 과격하게 하여 그 역시 온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공격을 너무 심하게 했다 하여 도리어 매우 준엄하게 그들을 다스리시니 이번 일은 위아래가 서로 잘못입니다. 언관을 멀리 쫓아버리고 전석은 텅 비어 있어 보고 듣는 이가 다 놀라고 중외의 눈들이 휘둥그렇습니다. 이 무슨 모양입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기존의 하명을 빨리 거두어 뭇의혹을 푸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교리 박세당 등이 또 상차하여, 정언 맹주서, 사간 이후, 대사간 이경휘를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1일 계축

정언 맹주서가 아뢰기를,
"이번의 전관 파직 추고 명령에 대하여 대신이 아뢰어 그 벌을 즉시 감하였습니다. 보고 듣는 모든 이 누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전일의 비망기는 말의 억양이 너무 지나쳐서 성상의 덕화에 큰 누를 끼쳤으니, 일하는 과정에서 생긴 작은 실수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기왕 제신들의 근본 취지를 이해하고 깊이 죄 주려고 않으시는 바에야 비록 하찮은 벌이라 하더라도 꼭 내릴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조의 당상과 낭청에 대한 체직 추고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이규령·조성보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령도 도로 거둘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장황한 내용이 오로지 자기 당류를 두둔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려고만 하였고 일이 어떨지는 돌아보지 않아 자기 본태를 내고 있다. 내 매우 통석히 여기는 바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맹주서는 준엄한 비답을 받고서는 일각도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평안도 강계(江界)에는 눈이 내리고 삭주(朔州)·귀성(龜城)에는 서리가 내렸다.

 

부수찬 남이성(南二星)이 상소하기를,
"지난날 윤형성(尹衡聖)이 인피하여 그의 처치 문제가 본관에 돌아왔을 때 그의 체직을 청했던 논은 사실 신이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형성을 간관으로 특별 제수하였으니 이는 형성이 체직당할 만한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체직당할 만한 잘못이 없는데 망령되이 체직을 논했다면 그 죄가 어떻겠습니까. 신이 두렵고 조심이 되어 감히 많은 사람을 따라 청대도 못하고, 또 감히 차자 말미에다 이름도 적지 못하고, 사실(私室)에서 짚자리를 깔고 부월(斧鉞)을 기다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신의 직을 삭탈하고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고, 이어 극언하기를,
"대관이 나라를 떠나고 전석이 텅 비어 조정 전체가 떨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남을 이해하는 성상의 인(仁)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가라앉혀 옳고 그름을 천천히 살펴보면 틀림없이 금방 깨닫고 속시원히 풀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4월 22일 갑인

사간 이후가 아뢰기를,
"신이 준엄한 전지를 받고 물러가 사사로운 방에 엎드려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출사를 청한 처치로 하여 소패가 갑자기 왔으나,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이미 받은 이상 결코 얼굴을 들고 다시 대각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성균관 생원 윤헌 등이 상소하여 서필원을 공척하기를,
"필원이 《예경(禮經)》을 어기고서도 개의치 않으며, 인륜 질서를 어지럽히고도 개의치 않으며, 지친(至親)과의 사랑을 끊어버리고도 개의치 않으며, 선왕(先王)의 정당한 법을 폐기하고서도 개의치 않으면서, 바로 그것을 사람을 공격하는 효시(嚆矢) 또는 세상을 인도하는 준적(準的)으로 삼아, 현자를 업신여기고 정인을 해치며, 경솔하고 방자하게 남을 헐뜯는 등 그의 거친 기질과 어긋난 말은 기탄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이 만약 행해진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임금도 버리고 어버이도 뒤로 하자는 논이 이를 계기로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진대 이적과 금수가 되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 사실 세상을 염려하여 한 말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국가의 시비란 오직 조정에서 하는 것이지 어찌 사람마다 자임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윤헌 등의 상소 내용이 결과적으로는 저들 멋대로 조정을 제어하자는 것이어서 그 태도가 얄미운 것이다. 지난 번 조해(趙楷)의 상소가 사실은 매우 괴이하고 망령스러웠으나 조정에서 그대로 처리하여 넘긴 까닭은 괜한 것이 아니었는데, 윤헌 등이 조금도 거리낀 바 없이 방자하기 너무 심하여 자못 통탄스럽고 놀라운 것이다. 주동자와 소두(疏頭) 등을 다 부황(付黃)하여 장래의 일을 징계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권대운, 동부승지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망기를 보니 주동자와 소두를 부황하라는 명령이 있어 신들로서는 너무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관학(館學)의 많은 선비들에게 비록 지나친 행동이 있을지라도 조정에서의 대우는 당연히 여유있게 포용하여야지 꺾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번에 부황의 명령이 뜻밖에 나와 성상께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비록 일만 번 시끄럽게 굴어도 끝내 이익될 게 없을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운 등이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상이 허락치 않았다.

 

황주(黃州) 성 안에 불이 나 64호의 집이 타고, 군기고(軍器庫)도 탔다.

 

4월 23일 을묘

상이 정원에 묻기를,
"어젯밤 유생들 부황 건으로 비망기를 내린 바 있는데 왜 지금까지 전지를 받들지 않는가."
하니, 정원이 답하기를,
"유생 부황은 전에 없던 일이라서 오늘 침 맞으실 때 도승지가 입시하여 아뢴다고 하기 때문에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어젯밤에 비망기를 2경(更) 3점(點)에 내렸는데 밖에 있는 도승지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하니, 정원이 답하기를,
"원내의 모든 일을 하리(下吏)가 반드시 밖에 있는 승지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는데 도제조 정태화, 제조 홍중보, 도승지 남용익이 입시하였다. 태화가 상의 안질이 어떠냐고 묻고, 또 아뢰기를,
"바람과 해가 이러하여 비가 올 생각을 않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잠깐 내리다가 금방 개었는데 그 역시 가물 징조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비가 올 듯하다가 끝에 가서 바람이 부니 틀림없이 비가 안 올 징조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듣기에 전남도는 비가 꽤 흡족하여 보리 농사가 괜찮은 모양이나 평안도는 경기 관내와 같아서 목화가 더욱 염려됩니다. 기우제 건을 해조가 여쭈어 행하려다가 일단 이 달이나 보고 나서 거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를 빌어도 쉽게 비가 오지 않아 그게 참 민망스런 일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석(銓席)과 대각(臺閣)이 텅텅 비어 있고 사람이 없어 별도의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조 참의 이경억이 현재 밖에 나가 있는데 올라오기가 쉽잖을 뿐만 아니라 판서 박장원과 상피가 있어 체직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피가 있으면 체직시키고 대임자를 내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소한 태학 유생들에 대하여 부황하라는 명령을 하였는데 부황이 저들에게는 대단한 형벌이어서 일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남용익이 아뢰기를,
"부황은 윤기(倫紀)에 관한 죄를 지었거나, 사림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라야 그 벌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소한 유생들에게 그 벌을 내린다는 것이 어찌 과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 송시열(宋時烈)에게는 원래 미안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미안하다는 것인가. 내가 무슨 잘못 처리한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 일은 청국(淸國)과 관계된 것인데 당초 송시열이 그 소를 보류해두자고 했던 것이 옳았습니다. 신은 그것이 어찌해서 그렇게 번거롭게 전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유생들의 일도 매우 통탄스럽다. 대신이 죄를 당한 뒤에 저들이 어떻게 감히 방자하게 소를 올릴 것인가. 또 유생들이 조정 시비에 끼어들 것이 뭐란 말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시열은 바로 유림들이 추앙하는 사람인데 유생들로서는 시열이 필원으로부터 공척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을 꼭 확실히 밝히려고 그 소를 올렸던 것이지 대신이 죄를 받은 뒤에 그것을 소론(疏論)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른바 부황이란 유생 저들끼리 내리는 벌이지 국가에서 내리는 벌은 아닌 것입니다. 국가가 벌을 내리려면 나름대로 정거(停擧) 제도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부황을 말고 정거를 해야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국 당상을 인견하리라."
하여, 우참찬 허적, 호조 판서 정치화, 병조 판서 김좌명이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남도 기민 수가 전 방백(方伯) 때에 비하면 절반 이상이 감소되었지만 지금도 1만 5천이나 되어 진구 물자가 부족할 염려가 있으니 관수(官需)를 또 떼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웃으며 태화에게 이르기를,
"듣자니 우참찬도 물러가려고 한다는데 경이 그렇게 물어보라."
하여, 태화가 상의 하교대로 허적에게 말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부모 무덤에 지금 섬돌 쌓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신의 걸가(乞暇) 이유입니다. 신의 심정과 사세로 말하면 통박(痛迫) 정도가 아닌데 어떻게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약 그 일 때문에 내려가려면 그 일이 시작된 지 오래인데 신이 벌써 사정을 아뢰고 체직을 빌었지 왜 꼭 지금 와서 가려고 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신의 상황을 대략 아뢰었지만 신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나 알게 하자는 것이고 모르는 자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으니, 소문이 번거로울까 염려되어서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 일이 만약 혹시라도 저들에게 누설되면 말 못할 일이 있을 것이 당연하기에 신이 늘 그것을 깊이 염려하여 왔습니다."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그 사건이 그렇게 시끄러워 곁에서 보는 사람도 마음이 불안할 정도인데 하물며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건과 관계가 있는 자의 심정이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사년 그 무렵에 신이 평안 감사로 있었는데 그 때 금주위(錦州衛)로 양곡을 운송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세가 오늘과 달라 만약 양곡 운송을 못할 경우 국가로서는 병화(兵禍)를 입을 염려가 있었는데, 허적이 도사(都事)로서 나라 일이 어렵게 된 것을 눈으로 보고는 자기가 직접 그 일을 맡으려고 하였고 신 역시 권하여 보냈었습니다. 허적은 그때 혹 곡식을 팔기도 하고 혹은 모집하기도 하여 결국 무사히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논의한 사람들 말을 들으면 그 때 그 일을 두고 허적의 잘못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이 사람을 예(禮)로 대우하지 못한 소치이겠으나 신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몸둘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일은 오늘과는 판이하게 다르지 않았는가."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선처의 방법이라면 되도록 빨리 진정시키는 것이 제일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상소한 유생에게 벌을 내리면 일은 점점 더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임금을 쉽게 보고 한 짓인데 이미 내리기로 한 벌을 어떻게 풀어버릴 것인가."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만약 소두(疏頭)가 벌을 받으면 그 소하(疏下)들이 관학(館學)에 남아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지금의 급선무는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정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진정시키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어제 내린 비망기를 아직 분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선비들이 아직까지 대궐밖에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정거(停擧)의 명령을 거두신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선비들이 아직까지 대궐 밖에 있는 것은 비망기 소식을 못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소식을 들었다면 흩어진 지가 이미 오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대신·중신들이 그렇게 아뢰니, 상께서 벌을 내리지 말도록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어찌 그렇게 구차하게 만드는가."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그것은 구차한 것이 아니라 실은 진정시키는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부수찬 심재가 상차하여 정언 맹주서는 출사하도록 하고, 사간 이후는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삼아 패초하여 정사를 하게 하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집의로, 남구만(南九萬)을 사간으로, 윤심(尹深)·심재(沈梓)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4월 24일 병진

지평 심재가 아뢰기를,
"소두와 주동한 유생에 대한 정거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또 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령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준엄한 전지를 받은 몸으로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한 유생 윤헌 등이 정거를 당했다 하여 공관(空館)을 하였다. 동지관사 김좌명이 그 사실을 아뢰어, 도승지 남용익 등이 구례대로 먼저 예관(禮官)을 보내고 다음으로 승지를 보내 선유(宣諭)하고 들어오도록 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홍중보가 태학으로 달려가 전교로 유생들을 초치하여 도로 들어오도록 타일렀으나, 유생들이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물러갔다. 상이 관관(館官)에게 명하여 상소에 불참한 유생들을 초치하여 재(齋)를 지키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유철, 지평 윤심이 현재 추감 중에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상이 추감을 파기하라고 특명하였다.

 

교리 이유상, 부수찬 남이성이 상차하기를,
"지난날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서필원의 상소를 미치광스러운 것이라고 물리쳤는데, 그렇다면 조정이 이미 그에 대한 시비는 판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비가 이미 판정되었는데도 분명한 지휘를 내리려 하지 않는 점에 대하여는 성상의 마음을 외인들이 사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이 젊고 기가 팔팔한 광간(狂簡)의 무리들이 때가 어느 때라는 것도 불고하고 사리나 체모로 보아 불가하다는 것도 살피지 않고서 소를 올려 부르짖으면서 거리낌 없었으니, 성상께서 그들을 징치(懲治)하려고 하심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다만 제왕(帝王)이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로서는 반드시 여유있게 포용하고 너그럽게 보아주어 비록 미치광스럽고 과격한 말을 하더라도 그를 죄로 삼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기(士氣)의 성쇠(盛衰)가 사실은 세도(世道)의 융체(隆替)와 관계되고 있어 배양을 해야지 꺾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제대로 배양도 못하면서 뒤쫓아 꺾기만 하고 심지어 소두에게 정거의 명령까지 내리니, 세도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옛날 인종 대왕은 태학 유생에게 내린 비답에서 ‘태학은 공론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시비를 다투는 것은 좋으나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제생들이 할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아, 그야말로 성인의 말이었습니다.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조정이 할 일이지만 시비를 다투는 일은 분명 태학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제생들을, 멋대로 군다고 호되게 몰아 감히 시시비비를 못하게 하는데, 그것이 인종의 교훈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바라건대 뇌정같은 위엄을 누그러뜨리고 소두에 대한 정거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지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성상의 하교를 듣고는 즉시 흩어져 가버렸고, 상소에 불참한 유생들을 불러 재를 지키라고 한 것도 그러한 전례가 없어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신들로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날이 이미 저물어 설사 밖에 있는 유생들이 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가 없겠으니 신들이 그냥 유숙(留宿)하겠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좋은 방향으로 아뢰어 처리하여서 적절하게 결말을 내도록 힘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비망기로 일렀다.
"대동법을 새로 실시하면서 변통해야 할 일들이 꽤 많은데, 이 시기에 선혜청의 임무를 잠시라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본청의 당상 허적이 지금 막 소분(掃墳)으로 말미를 받았지만 가고 오는 사이에 틀림없이 많은 날짜가 소비될 것이어서 공무상 작은 문제가 아니니 비록 이미 말미를 주었더라도 그 길을 멈추게 하라."

 

4월 26일 무오

안후열(安後說)을 좌부승지로, 우창적(禹昌績)을 정언으로, 장선징을 부교리로 삼았다.

 

정언 우창적이 패초에 응하여 숙사(肅謝)한 후 아뢰기를,
"신이 전번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있을 때 도내의 제언(堤堰)에 대한 적간을 다 못했던 일 때문에 현재 대죄하고 있는 중이어서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로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7일 기미

행 대사헌 이일상이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예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유생들이 관을 비운 것은 실로 막대한 이변입니다.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당연히 여유있게 포용하여야지 위압으로 견제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전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온화한 전지를 특별히 내려 도로 들어오도록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유생들이 대신 지키게 한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일 뿐만 아니라 뒤 폐단이 있을 염려도 있으니, 상께서 다시 근시(近侍)를 보내 별도로 따뜻하게 유시하는 것 말고는 아마 선처의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똑같은 한 나라 성묘(聖廟)이고, 똑같은 한 나라 유생인데 저쪽 이쪽이 다를게 무엇인가? 들어오도록 타일렀는데 끝까지 들어와 지키지 않고 성묘를 비운지도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사체로 보아 매우 미안한 일이다. 비록 외방의 유생이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유생으로 참가하지 않은 자가 어찌 없겠는가. 본관이 즉시 불러들이지 않고 장황하게 아뢰고만 있으니 매우 타당치 못한 일이다. 즉시 본관으로 하여금 오늘 중으로 유생들을 불러들여 재를 지키게 하고 성묘가 여러날 비어 있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또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펴 선비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28일 경신

이규령(李奎齡) 등의 사건을 정계하였다.

 

동지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 하교가 준엄할 뿐만 아니라 초하루 분향(焚香) 날짜도 이미 임박하였습니다. 만약 상소한 유생들이 다시 모이도록 기다리자면 일이 장차 반재(泮齋)가 비는 정도에 그칠 뿐이 아니어서, 삼가 성상 하교대로 서울에 있는 생원 진사로서 상소에 불참한 자 1백 90여 명을 각기 그들 주인(主人)으로 하여금 초청하게 하였더니, 저녁에 식당 앞에 입재(入齋)한 사람이 이미 열 명이나 되어 신들은 그 즉시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유생들은 본관의 장무관(掌務官)으로 하여금 계속 입재를 권유하도록 할 뜻으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4월 29일 신유

유철을 대사헌으로, 이홍연을 대사간으로, 민정중을 대사성으로, 오시수를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도제조 정태화가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의관(醫官)의 말을 들으니 왼쪽 눈은 정상이고 바른쪽 눈이 아직 흐릿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물건을 보기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물건 보기가 정상과 같지는 않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가뭄 끝에 비가 내려도 흡족하지 못했는데 지금 또 비가 와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고, 태화가 또 한성 판윤 유혁연의 팔 아픈 증상을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의 본직을 체임하라."
하고, 어의 윤후익을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금방 예조에 내려진 동래부의 장계를 보았더니, 공무목(公貿木) 건에 대하여 왜인들이 빨리 결정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 문제는 지난 해 김근행(金謹行)이 섬안에 갔을 때 왜인들이 말했던 것인데, 경상 감사 보장(報狀)을 보면, 각읍마다 혹은 면포를 원하고 혹은 쌀을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왜인들이 바라는 것은 원래가 쌀이어서 면포는 아무리 좋아도 틀림없이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쌀 수량이 너무 많아 덜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면포 한 필 값이 쌀 12말이어서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었는데 지금 그 쌀 수량을 감하면 저들이 틀림없이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 감한 수를 바꾸지 않고 영구히 그대로 적용할 것이라고 말하면 저들이 틀림없이 좋아하며 따를 것이다."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그건 그렇습니다."
하였다. 제조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산(星山)을 맡고 있을 때는 가포(價布) 한 필로 벼 60말을 바꾸었는데 그것을 작미한다면 12말 뿐이겠습니까. 그것은 영남에는 곡식이 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곡식이 아무리 흔해도 농가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년 내내 고생해도 수확이라곤 고작 가포 몇 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장사꾼으로 변신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인들 베짜는 노고도 매우 가엾을 정도입니다. 목화로 베를 짜보아야 겨우 자기 지아비나 입히고 여인 자신은 추워도 여윈 몸조차 가릴 옷이 없습니다. 상께서야 어떻게 그 사정을 다 아시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농가가 고생은 가장 많은데 소득은 가장 적어 가련할 뿐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봄여름 농사 때면 백성들 모두가 귀신 형용이었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기가 도는데 그 민간 질고를 참으로 가엾게 여기고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농사 때는 더위마저 한창이어서, 넓은 집에 홑옷을 입고 부채를 흔들며 앉았어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데, 농부들은 그 더위를 무릅쓰고 밭 갈고 김 매고 하니 그 노고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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