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0권, 현종 6년 1665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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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전》 가운데 폐지된 조항을 일찍이 본원에서 고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살펴보니, 현재 서울과 외방에서 준행하는 것은 비록 착실한 성과는 없으나 옛것을 형식적이나마 보존한다는 뜻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 제도가 변경되어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거나 예전과 지금의 상황이 달라져 꽉 막혀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선 그 가운데에서, 거행할 만한데 전혀 폐기한 것 몇 조항을 별도로 뽑아내어 여쭙니다."
하니, 상이 서울과 외방으로 하여금 준행하게 하였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각사 노비의 신공중 징수할 곳이 없는 것을 조사해 아뢰면서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조사해 아뢴 가운데 이른바 현재 살아있는 거렁뱅이 등에 대해서 모두 뒤섞어 탕척한다면 도망하거나 속임수를 부리는 폐습을 막기가 어려울 것이어서 결단코 가볍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다시 상세히 조사해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일 무자

해에 겹햇무리가 졌는데, 안쪽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이산군(理山郡) 산양회진(山羊會鎭)에 크게 우레가 쳤으며 눈보라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난 뒤에 개였는데, 성문이 어디론가 날라갔으며 문루(門樓)와 기둥은 5리 가량되는 곳에 날라가 떨어져 있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 문관으로 변방의 수령이 된 자 중에 임기가 다 차서 체직되는 자는 어쩌다가도 없습니다. 종성 부사 목래선(睦來善)은 부임한 지 겨우 반 년이 지나 갑자기 병이 중하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병이 대단하지는 않다고 하니, 공의로 헤아려 볼 때 몹시 놀랍습니다. 감사 역시 경솔하게 계문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목래선은 잉임시키고 감사 민정중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6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조한영(曹漢英)을 호조 참의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유망(流亡)하고 절호(絶戶)되어 거두지 못한 외방의 각종 신역과, 여러 해 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환상(還上)을 모두 탕감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안하소서."
하고,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는데도 백성들의 원망이 이처럼 심하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하는 일이 백성들의 마음과 부합된다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이처럼 심하겠습니까. 좌상이 진달한 말이 참으로 옳으나, 만약 견감하기만 한다면 백성들이 은혜를 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널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크게 탕감하는 일을 하소서."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완악한 백성들이 성실히 납부하지 않아 포흠(逋欠)이 있게 되었는 바, 그 습관이 가증스러우므로 전에 탕감할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하늘의 재변이 몹시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가는데, 계속해서 이런다면 나라가 무너질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어찌 재화(財貨)가 아깝겠습니까. 나라가 있은 다음에 재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각도로 하여금 정밀하게 조사하여 모두 탕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예조 판서 정치화에게 이르기를,
"경이 저들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무슨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오랑캐 지역에 혜성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천변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한인(漢人)들은 모두들 ‘변괴가 참혹스러움이 한결같이 무오년과 같으니 머지않아 반드시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몽고(蒙古)의 여인이 일찍이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황후가 되었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어서 본국으로 쫓겨났는데, 그 뒤에 낳은 아들이 나이가 지금 12세입니다. 청나라에서 몽고에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보내지 않으므로 조만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들 하고 있습니다. 대개 몽고는 서북 방면에 있는데 지역이 끝없이 넓고 부락이 많아 강함을 믿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다가 또 순치 황제의 아들이 인재여서 몽고 사람들이 왕으로 삼고 와서 다툰다면 반드시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몹시 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제는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나이가 이제 12세인데 무슨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듣건대, 보정(輔政)이 자못 일을 잘 처리하여 섭정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다만 스스로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군사 훈련을 하지 않고 번인(蕃人)과 한인(漢人)들로 하여금 칼을 차지 못하게 합니다. 오로지 놀기만을 일삼아 사치스럽기 한량없고 크고 작은 관직의 제수를 모두 뇌물에 따라 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머지않아 패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난 달 심리할 때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도년(徒年) 등에 대해서는 모두 죄를 씻어주었는데, 이것은 몹시 아름다운 뜻입니다. 지금 이 포흠 역시 심리한 예에 의거해서 오래되고 안 되고를 따지지 말고 모두 탕감해 준다고 팔도에 유시하여 온 백성들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완악한 백성이 전혀 납부하지 않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고 한결같이 탕감한다면 균등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10년을 한도로 하거나 5년을 한도로 하여 견감하였으니, 이번에도 갑진년 이상을 전부 탕감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을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도망갔거나 사망한 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탕감해야 합니다."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정치화의 말을 들으니, 저들의 형세를 알 수 있습니다. 상께서는 모름지기 저들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저들이 사치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저들이 무비(武備)를 하지 않는다고 들으면 매번 평상시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마음을 가지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더구나 신이 일찍이 짤막한 내용의 글[小說]을 보니, 우리 나라의 분야(分野)가 연(燕)과 같아서 매번 하늘의 변고가 있을 적마다 문득 서로 부합되었습니다. 지금 이 혜성의 변 역시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전 판서 여이재(呂爾載)가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여이재는 본디 행실을 삼가지 않고 재능도 없어 선비들에게 버림받았다. 처신함에 있어서는 오로지 옷을 잘 입기만 일삼았고, 고을살이 하면서는 오로지 탐학만을 일삼았으며, 평생 동안 이끗을 좇기를 시정배보다 더하였다. 그런데도 눈치를 살피면서 아부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55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여이재는 본디 행실을 삼가지 않고 재능도 없어 선비들에게 버림받았다. 처신함에 있어서는 오로지 옷을 잘 입기만 일삼았고, 고을살이 하면서는 오로지 탐학만을 일삼았으며, 평생 동안 이끗을 좇기를 시정배보다 더하였다. 그런데도 눈치를 살피면서 아부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3월 7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행 대사헌 박장원 등이 긴 글로 상차하여 백성들이 곤궁하고 국가의 형세가 쇠약함에 대해 극언하면서 또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좁고 공이 사를 이기지 못하는 폐해에 대해 말하고, 또 아뢰기를,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혹 대상과 맞지 않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간간이 사적으로 치우친 데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아첨하는 말을 날로 아뢰고 꼿꼿한 기풍이 날로 쇠약해져 나라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거듭 일어나는 재변을 늦추기 어렵고 위태로운 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그러나 끝내 채택해 시행한 것은 없었다.

 

3월 8일 갑오

정치화(鄭致和)를 호조 판서로, 심재(沈梓)를 교리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행 대사헌 박장원, 집의 오시수, 장령 강호(姜鎬), 지평 이경과(李慶果)가, 당해 관원을 죄주기를 청하지 않은 것이 성상소(城上所)와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자, 체차하였다.

 

3월 10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윤변을 장령으로, 어진익(魚震翼)·장건(張鍵)을 지평으로, 김휘(金徽)를 우윤으로 삼았다.

 

영천군(永川郡)의 못물이 붉기가 피빛과 같았고, 울산(蔚山)의 증성(甑城) 앞 들과 경주성(慶州城) 안팎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들판을 뒤덮고 오갔는데 그 숫자를 알 수 없었으며, 하양현(河陽縣)의 문앞 큰 들판에 지렁이가 땅을 뒤덮어 땅 색깔이 보이지 않았는데 하루 뒤에 없어졌다.

 

3월 12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은 서울 가까운 중한 지역이어서 참으로 어루만져 주고 다독거릴 수 있는 재주를 겸비하여 군민(軍民)들의 바람에 흡족한 자가 아니면 진압하여 복종케 하기 어렵습니다. 부사(府使) 이두진(李斗鎭)은 역임한 곳이 많지 않은데 갑자기 중한 지역을 맡기므로, 제목(除目)이 내리자 물의가 시끄럽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따랐다.

 

3월 14일 경자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박세성(朴世城)을 판 결사로, 남노성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상이 의관을 시켜 약방에 말을 전하기를,
"요즈음 부스럼이 온 몸에 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온천에 목욕하는 것이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민폐가 염려되어 할 생각을 못하였다. 지금 눈병과 부스럼이 한꺼번에 발하여 여러 차례 침을 맞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약은 오래 복용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은 겨우 당장 위급한 것만 치료할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온천이 습열(濕熱)을 배설시키고 또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기회에 가서 목욕하였으면 한다. 여러 의원들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약방 제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몸을 돌보는 자리에 있으면서 보익한 바는 없이 마음 조이며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는 즉시 여러 의관들을 불러 물어보니, 여러 의관들이 모두 ‘성상의 눈병과 부스럼은 모두 습열 탓에 생긴 것이다. 이런 때에는 온정(溫井)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유후성(柳後聖)만은 ‘성상의 병환은 비위(脾胃)에 습열이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심간(心肝)에 화기가 자못 성해서이다. 그러니 온정에 거둥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으나, 화기가 자못 성한 때 열을 오르게 해 더칠까봐 걱정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의원들이 말한 것의 주된 뜻은 차이가 없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온정의 효험이 과연 여러 의원들이 말한 바와 같다면 신하가 걱정하는 정성에 있어서 어찌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모름지기 널리 묻고 충분히 강구한 다음에야 미진한 점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여러 의관들의 말이 대략 서로 같고 유후성이 더칠 걱정이 있다고 한 말도 혹시 그럴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의관들의 뜻은 이미 귀일된 것이니 다시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라."
하였다.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장계하기를,
"요즈음 각도의 군역자(軍役者) 중 죄를 지어 충군(充軍)되거나 유도(流徒)된 자는 각 고을에서 임의대로 대신 정하지 못하고 또 먼 곳에서 번포(番布)를 징수하지 못하여 인족(隣族)을 침해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신역(身役)으로 정배(定配)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정배된 고을의 군역으로 옮겨 정하고, 원적(原籍)이 있는 고을에서는 다른 한정(閑丁)으로 대신 정하게 하여, 인족이 피해를 당하는 폐단을 제거하소서. 그리고 똑같이 변방 진보(鎭堡)에 소속된 군병인데 이곳에서 저곳으로 정배되었을 경우에는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장계대로 다른 도에도 똑같이 분부하여 정식으로 삼아 준행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5일 신축

정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대로 온천에 행행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물으니,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가 모두 어렵게 여겼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여러 의원들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맥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 침침하여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가 습창(濕瘡)이 한꺼번에 발하여 온 몸에 퍼져 있다. 대개 습창과 눈병은 모두 습열(濕熱)에서 나온 것으로 온천에서 목욕하면 효험을 볼 수 있다. 이에 경들과 서로 의논하고 또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대신들이 나의 병이 이 지경인지 모르고서 모두 어렵게 여기고 있다. 하늘의 재변과 백성들의 고통을 나 역시 어찌 모르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눈병의 치료에 단지 침만 놓고 있는데, 침을 40여 차례나 놓았으나 효험은 없고 침을 놓은 혈(穴)이 부스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혹 온천에 목욕하면 효험이 있을까 하여 감히 정지하기를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대신들이야 어떻게 증상이 이 지경인 줄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유후성 등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상이 묻기를,
"온정에 목욕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유후성이 대답하기를,
"온정에 목욕하면 효험을 볼 것임을 신 역시 알고 있으나 혹 더칠지도 모릅니다."
하자, 여러 의원들에게 차례로 물으니 여러 의원들이 모두 아뢰기를,
"온정에 목욕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묘방이 없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온천에 행행하는 것은 일이 몹시 중대하여 감히 곧바로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신들이 이런 마음을 먹어온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현재 천재와 시변(時變)이 비록 이와 같으나 이 달 동안에 어찌 다른 걱정거리가 생기겠습니까. 다만 임금의 거둥은 쉽게 할 수가 없으니, 사세를 짐작하여 성상께서 결단하소서."
하니, 상이 여러 대신들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상이 묻자, 이경석·정태화·홍명하가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병을 우상이 자세히 알고 있다. 지금처럼 천재와 시변이 극심할 때 내가 어찌 좋아서 행행하겠는가.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명하게 될 것 같아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 보고 싶은 것뿐이다."
하니, 이경석 등이 반복하여 진달하자, 상 역시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의 말이야 성상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정승의 말이 이와 같이 간절하니 평상심을 가지고 따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불쾌해 하며 이르기를,
"병이 몹시 심하므로 경들과 상의하였을 뿐이다. 평상심을 가지지 않을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3월 16일 임인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장선징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장선징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달리 칭할 만한 점이 없었다. 다만 상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발탁되어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집의 오두인이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신이 잇따라 언관으로 있으면서도 논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우러러 받들고자 해서였다. 오늘 본부의 좌기(坐起)에서 동료가 도로 중지시키자는 논의를 석상에서 발론하였으니, 신이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은 잘못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장계하기를,
"함종(咸從)의 군사 한효상(韓孝祥)이 병이 든 지 10여 일 만에 간들간들 숨이 끊어져갔습니다. 13세된 그의 아들 한택건(韓擇建)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속으로 흘려넣자 이에 다시 살아나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만약 포상을 베풀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감동시킬 방법이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지를 만들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정부에 알려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17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았으니 전혀 대각의 풍채가 없습니다. 집의 오두인을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윤선도가 화심(禍心)을 품고 흉악한 말을 해 사림(士林)을 모해한 죄에 대해서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북쪽 변방에 유배보내셨었으니, 심리하는 때 거론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심리란 정상을 살펴 억울함을 펴주는 것입니다. 윤선도의 용서할 수 없는 죄와 같은 것을 어떻게 심리하는 속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의 심리는 재변을 만난 탓에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혜성을 음사한 상으로 여겼으니,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은 양기를 부추기고 음기를 억누르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거조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상반되었습니까. 지금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이 비록 나이 많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옛 정의를 생각하는 데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성조(聖朝)에서 형정(刑政)을 잘못하는 것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단지 남북을 바꾸어 먼 변방에서 죽지 않게 한 것은 선조에서 사부로 있었던 정의를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음기를 부추기고 양기를 억누르는 것이겠는가, 지금 너는 이런 괴상한 논의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몹시 형편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오두인은 별로 체차할 만한 일이 없으니 출사시키라."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역시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환수하는 일에 대해 즉시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답하기를,
"괴상한 말을 혐의할 필요가 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니, 이경억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8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성상의 비답이 준엄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이, 이미 체차되었다가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있는 이치는 결단코 없다는 이유로 다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9일 을사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금부에 있을 적에 추고를 받아 아직 끝이 나지 않았고, 또 심리할 때에도 여러 신하들의 뒤를 좇아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물러나 뒷말을 하면서 구차스럽게 동료들과 의견을 같이 하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지화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니, 상이 추고를 탕척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심재, 부수찬 윤심·김석주가 차자를 올리기를,
"윤선도에 대해 남쪽으로 유배하라고 특별히 명한 것은 대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은혜와 옛정을 생각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며, 돌아가서 죽게 한다는 분부는 실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니, 위엄과 덕에 있어서 양쪽 다 유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번에 분부를 그대로 따른 것은 본디 악을 미워하는 의리에 잘못된 것이 아니니, 뒤에 논핵하는 것은 전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체차하기를 청한 문제는 염치에 관계된 것이니, 또한 억지로 출사하게 할 수 없습니다. 대사간 이경억과 대사헌 정지화는 출사하게 하고 장령 이동명과 집의 오두인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에 여역이 치성하였다.

 

3월 20일 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최일(崔逸)·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정륜을 발탁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추고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셨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감격스럽습니다만, 신과 같은 죄를 진 사람을 조사하는 것은 껄끄러운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의 오늘날의 논의가 타당하냐 아니냐를 따질 것 없이 이미 준엄하게 발론되었으니 정계(停啓)하느냐 연계(連啓)하느냐는 공의에 부쳐야 하는 것입니다. 신은 감히 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 못하겠고 이런 처지에 이르러서는 낭패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진퇴는 대사간과는 같지 않은데 똑같이 출사시키라고 처치하였으니, 잠시라도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사헌부의 관원이 이미 논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끝내 체차되었으니 당초에 대간으로 있었던 신으로서는 태연히 있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지금 사헌부의 장관에 대해 어떻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3월 21일 정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대사헌 정지화와 대사간 이경억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수안군(遂安郡)에 눈이 내렸으며, 밤에 된서리가 내려 온갖 풀이 모두 손상되었다.

 

3월 22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이 아뢰기를,
"저번에 금부 당상이 죄인을 정배할 즈음에 상세히 살피지 못하여 특별히 추고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신들은 바로 그 당시의 죄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감히 하루라도 무릅쓰고 있으면서 그 일을 조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정언 정재희가 아뢰기를,
"양사가, 윤선도를 옮겨 유배한 일에 대해 당연히 논해야 함에도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기까지 하였으며, 사헌부의 관원은 이미 체차되었습니다. 신은 대간으로 무릅쓰고 있는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말하지 않은 책임을 신 역시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면서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장계하기를,
"강도(江都)에서 옮겨오는 쌀 수천 석을 얻어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강도의 쌀 3천 석을 내어 감사로 하여금 균일하게 나누어주게 하고 가을이 되어 모곡(耗穀)과 함께 징수하게 하소서."
하였다.

 

전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귀석은 조계원(趙啓遠)의 아들이다. 일찍이 전라 감사가 되어 탐학스럽기가 그지없어 그의 아비와 똑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면서 비루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청망(淸望)에 통하지 못하여 조귀석이 평소에 앙앙불락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병들어 죽자 상이 직첩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56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사신은 논한다. 조귀석은 조계원(趙啓遠)의 아들이다. 일찍이 전라 감사가 되어 탐학스럽기가 그지없어 그의 아비와 똑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면서 비루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청망(淸望)에 통하지 못하여 조귀석이 평소에 앙앙불락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병들어 죽자 상이 직첩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3월 23일 기유

서리가 내렸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신은 본부의 의논에 대해서 구차스럽게 의견을 같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같은 죄를 추고하는 일은 역시 조율하여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옥당이 처치하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하여 신으로 하여금 가는 곳마다 장애물이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하면서 다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정(李程)이 처치하여 집의 송시철·정재희, 지평 어진익, 대사헌 정지화를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도에 여역이 치성하였다.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박경지(朴敬祉)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3월 27일 계축

지평 장건(張鍵)이, 본부의 전계(前啓)와는 의견이 달라서 구차하게 같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사헌부가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일로 연계(連啓)하고, 또 전혀 자신의 견해가 없다는 이유로 장건을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무슨 괴상한 논의를 이와 같이 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처치한 일은 따랐다.

 

3월 28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준구(李俊耉)를 우승지로, 이섬(李暹)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본부에서 현재 윤선도의 일에 대해 연계하고 있는데, 신은 당초에 본부에 따른 사람이어서 구차스럽게 그 의논에 같이할 수 없음이 전과 다름없습니다."
하면서, 다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 등이, 성상의 엄한 비답을 받았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아 배척받는 속에 들어 있으므로 감히 헌부의 관원들을 처치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정이 아뢰기를,
"한 가지 일로 인피하기를 네 차례나 하였으니, 대각의 체모로 헤아려볼 때 번요스러움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미 발한 논의를 전례에 따라 연계하였는데 거북한 전교가 뜻밖에 나왔습니다. 전의 일로 방금 인피하면서 자책하였으니 혐의가 있어 처치하기 곤란한 것은 형세가 그런 것입니다. 정지화는 체차시키고, 송시철·어진익·이익상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고 하여 체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혹 그럴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바가 있으면 계속해서 번거롭게 구는 것이 참으로 요즈음 대각에서 숭상하는 바이어서 이미 괴이한 일도 아닌데 ‘대각의 체모로 헤아려볼 때 번요스러움을 면치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처치가 모호한 듯하다. 정지화 역시 출사시키라."
하였다.

 

3월 29일 을묘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심리할 때 조사(朝士)들 가운데 도년(徒年)에 처한 자는 모두 탕척해 주었습니다. 형조의 도년에 처한 죄수도 똑같이 탕척해 주도록 하며 그 나머지 죄가 중한 자를 그대로 유배하거나 감등하도록 하는 것은 문안(文案)이 적어 쉽게 판결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영상 정태화가 문안하는 반열에 나와 있었는데, 상이 불러서 들어오도록 하고는 이르기를,
"근래에 형조 판서가 시장(試場)에 간 탓으로 인하여 심리하는 일을 아직 끝마치지 못하였다. 우상이, 조사(朝士)로서 도년(徒年)된 자를 이미 모두 풀어주었으니 형조의 죄인을 이 예에 의거하여 모두 풀어준다면 쉽게 판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한다면 일을 쉽게 처리하여 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가뭄 기운이 이와 같은데 널리 탕척해 주는 법을 시행한다면 어찌 감응할 리가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형조에 분부하여 도년에 처한 부류들을 모두 풀어주고 그 나머지 죄인은 문서를 수정하여 며칠 뒤 나의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이 아뢰기를,
"요즈음 가뭄 징조가 있으나 아주 심하지는 않으므로 기우제를 품의하여 지내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우제를 어찌 가뭄이 극심하기를 기다려서 지내겠는가, 속히 지내라."
하였다.

 

대사헌 정지화가, 이미 체차되었다가 그대로 재직하는 이치는 없다는 이유로 다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정이, 정지화에게 출사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으니 처치가 마땅치 않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송시철이 정지화를 체차하기를 청하고, 정언 이익상이 이정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의 집에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3월 30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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