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0권, 현종 6년 1665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0. 16:05
반응형

4월 1일 정사

정언 이익상(李翊相)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2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삼았다.

 

관리를 보내어 한강·목멱산·삼각산에 기우제를 지냈다.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치계하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노비 신공(身貢)의 수량을 합하면 모두 1천 7백 40여 동(同)인데, 깨끗이 면제를 받게 되었으니 매우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 중에는 한 가구 내에서 혹 40∼50필의 면포를 내기도 하고 혹 1인당 10여 필의 면포를 내기도 하는데 지금 유망(流亡)한 노비만 면제해주고 이들 생존자들에게는 면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현존하는 빈곤한 유들도 그 중에 추가로 넣어 일체로 조사하여 면제해 주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해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일을 비국에 하달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생존해 있으면서 공물을 받치지 않는 자까지 면제해 준다면 간교한 거짓이 생겨 막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자, 시행하지 않았다.

 

4월 3일 기미

해에 겹무리가 졌다.

 

강유후(姜裕後)를 황해 감사로, 이유(李秞)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大臣)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아 일기가 가을같고 팔도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많은 백성이 죽었으니, 금년의 민사(民事)가 참으로 걱정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혜성이 이미 소멸했으니, 정전으로 환궁하시는 일을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성변(星變)은 사라졌으나 한재가 이와 같으니 환궁하지 마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재뿐 아니라 혜성도 완전히 소멸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급급하게 환궁하겠는가."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심리(審理) 문서의 수정은 이제 이미 마쳤습니다."
하니, 상이 형세를 보아가며 하라고 답하였다.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혜성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전하께서도 일찍이 측은히 여기는 유지를 내리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수성(修省)의 방법이 결국 예전과 다름없어, 무너져 가는 기강을 진작시키고 묵은 폐단을 제거할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으셨으니, 나라가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으며 재난을 어떻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심리를 하며 죄인을 크게 방면하고 포흠(逋欠)을 면제해 주는 등의 일들은 전에 비해 다르므로 재난을 그치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드시 전하께서 줄이기 어려운 것을 줄여야만 비로소 재앙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줄이기 어려운 것은 내사(內司)·궁가(宮家)에 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줄이기 어려운 것을 먼저 줄여서 재난을 그치게 하는 최우선책으로 삼으소서.
백성들의 곤궁함이 날로 달로 더해가는 데 있어서는 실로 군사를 관리하는 기관이 많고 세금을 걷어들이는 곳도 여러 곳인데다가 흉년을 고려하지 않고 제각기 독촉해 걷어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곡식이 심한 풍재를 입어 논에서 수확한 양의 3분의 2가 감소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풍년든 때와 같이 취급하여 여러모로 세금을 독촉하고 밀린 세금도 아울러 독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에는 백성들이 대부분 굶주리고 있으며 거리에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매일 속출하고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재물은 아까워하면서도 백성들은 아끼지 않고 있으니, 그 역시 어진 마음이 없다고 하겠으며 그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생각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상진이 내사·궁가에서 줄이기 어려운 것을 먼저 줄이는 것이 재난을 그치게 하는 최우선책이라고 하였는데 상은 칭찬하고 장려하는 비답만을 내렸지 끝내 받아들인 실상이 없었고, 묘당에서도 진달하여 실행한 자가 없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4월 4일 경신

재차 기우제를 지내려 하는데 이조에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늙고 병든 이를 헌관으로 차출하였다. 상이 이를 미워하여 특별히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에게 명하여 제관을 차출하라고 하였다.

 

계묘002)  ·갑진003)   양 년에 상이 대신 이하에게 명하여 특별히 인재를 추천하라 했는데 사정에 따라 추천하여 난잡스러운 자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등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상의하여 엄격하게 뽑아 등급을 구별하게 하였는데, 승직(陞職)·탁용(擢用)·승 주목(陞州牧)·직출 육품(直出六品)·승 육품(陞六品)·제직(除職)·수재 수용(隨才收用)·문견 제직(聞見除職) 등이었다. 여기에 추천된 자가 80여 명이었는데, 상이 이에 따라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동래 부사 안진(安縝)이 치계하기를,
"왜인(倭人)이 쌀을 바꿔가고자 일부러 공무역의 면포를 도로 예전 급대로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서로 3개월을 버티었지만 아직껏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여름을 맞아 쌀이 귀하여 민사가 걱정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하달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면포를 쌀과 바꾸는 데 있어서 말[斗]의 수를 줄여줄 경우 연도를 한정하지 않고 바꿔주겠다는 뜻을 그들에게 여러번 일깨워 주었지만 끝내 듣지 않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올해와 내년 두 해 동안은 우선 예전대로 쌀을 바꿔주되, 다시 쌀의 양을 줄여주는가의 여부를 보아가면서 별도로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6일 임술

이 때에 상이 가슴과 등 그리고 머리 부위에 부스럼이 났는데, 전날 생긴 응어리도 완전히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상이 진찰하러 들어온 의관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습창(濕瘡)이 이미 심하게 번질 조짐이 있는데 앞으로 날씨가 점차로 더워져 눈병이 재발한다면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약방(藥房)에 말해 보아라."
하니, 약방에서 아뢰기를,
"여러 의원들의 생각은 모두 습창이 심해져 배와 등, 머리 부위까지 발생할 경우 앞으로 응어리가 재발하고 눈병이 더 더치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닥칠 것인데 습열(濕熱)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온천에 목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날씨가 더워지고 있으나 그래도 이 때에 하셔야 하는데 다만 중대한 일이어서 신중을 기해야 하니, 다시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증세를 의관에게 말한 것은 온천가는 문제를 다시 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일전에 대신들과 이미 탑전에서 의논한 바 있는데 이제 다시 의논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계사의 뜻이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관리를 보내어 재차 기우제를 지냈다.

 

4월 7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약방이 아뢰기를,
"삼가 계사의 비답을 받고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당황한 나머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상의 안질 증세는 전적으로 습열이 오르내린 데에 달려 있는데, 열기가 오르면 안질의 증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이 점이 매우 걱정됩니다. 침은 많이 맞더라도 일시의 급한 것만을 구제할 뿐이며, 탕제(湯劑)를 쓰게 되면 위의 기운을 먼저 상하게 되며, 환약은 열을 치료하는 데 제일 더디므로 효과를 거두기가 반드시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습열을 치료하는 데는 온천만한 것이 없으므로 꼭 제때에 온천의 목욕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여러 의원들의 소견을 진달한 것인데 구구한 신의 지나친 염려도 말단에 아울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일찍이 탑전에서 신들에게 묻고 의논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일의 형편이 전과 다르므로 반드시 변통의 방법을 생각해야 할 처지인데 더구나 일의 중대성으로 보아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계사의 본뜻은 대체로 이런 데서 나온 것이니 이런 뜻을 갖추어 다시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침을 맞은 후에 도제조 허적(許積)이 들어와 아뢰기를,
"온천이 습창을 치료하는 데 신통한 효험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비로소 물어보았더니 안질에도 효험이 많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의 구구한 생각에는 도중에 피로로 더치실까 싶어서 감히 청하지 못했습니다만, 어제 여러 의원들의 말을 들으니 지금의 증세는 온천말고는 다른 치료 방도가 없으므로 이때 온천에 목욕하러 가는 일이 하루가 시급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꼭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이미 대신들과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처음 의견과 다르겠는가. 나 역시 온천 가는 데 폐단이 있음을 알면서도 꼭 가서 목욕했으면 하는 것은 정말 부득이해서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홍명하(洪命夏)가 뜻밖에 부름을 받고 와서 상의 병세 경중을 몰랐고 평소 말을 더듬는데다 일이 급박히 생겼기 때문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이었는데 그가 물러나와서는 실언을 했다고 몹시 후회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이 이 때문에 인피하고 들어갔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듣건대 그의 병이 꽤 중하다고는 하는데, 전에 진달했던 유후성(柳後聖)과 박군(朴頵)의 말이 실제 상황과 틀렸기 때문에 미안해 했던 것입니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도 온천욕이 안질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을 듣고, 당초에 자신이 진달한 내용이 마치 거짓으로 꾸민 것 같아 몹시 후회된다고 매양 신으로 하여금 말씀을 드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의정 정태화가 오늘 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온천의 거둥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며 의론을 수렴한다 하더라도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니 반드시 빨리 품의해 결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약방에 비답을 내리시되, 빨리 의견을 수렴하게 하여 중대한 뜻을 보이시고 오늘 결정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마침내 거둥할 것을 결심하고 약방의 계사를 옳게 여겨 정원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과 비국 당상 홍중보(洪重普) 등이 뵙기를 청하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시는 일을 이미 정하였으니, 거둥 시의 행사를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뵙기를 청했습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호위 군병 중 마병은 멀리 갈 수 있으나, 보병의 경우, 훈련 도감의 군병은 한강 가에서 교대해 주고, 수원군은 충청도 경계에서 교대해 주면 충청도군이 온양까지 호위해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는 4백 명으로 교대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陵)에 거둥할 때는 으레 4백 명을 사용하였으니, 이번 행차에는 8백 명을 이용해 어가를 번갈아 호위해야 할 것이다. 또 내 마음은 외방의 군병을 징발하고 싶지 않다."
하자, 태화 등이 도감군 중에서 건장한 자를 가려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각사(各司)는 한 명만 수행하되 긴요하지 않은 각사는 수행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리고 파발을 세워 궁궐내의 안부를 전하도록 하고 승지와 내관(內官)이 문안드리는 예는 폐지하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은 남아서 약방의 당직을 서게 하고, 부관(副官)이 수행하도록 하였고, 예관은 종묘에 거둥하는 것을 고하게 하였으며, 훈련 도감의 병사는 남아 서울을 지키도록 하였다. 바야흐로 농사철이 닥쳐서 각영에서 병사를 징발할 수 없다고 하여, 수원 군사 6천 명을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한강 가에서 기다리고 한 부대는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번갈아 호위하게 하였고, 충청의 군사도 병사(兵使)로 하여금 한 군영의 병사만을 징발하여 충청도 경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온양에 도착한 뒤에 형세를 보아 다른 군영의 병사를 다시 징발하게 하였으며, 마병은 도감군과 금군의 군대를 이용하게 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을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도총관 김우명(金佑明)을 호위 대장으로 삼아 입직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 안을 호위하도록 하고, 좌상 홍명하와 영부사 이경석을 유도 대신으로 삼았다. 군병이 온천에 도착한 뒤에 본도에 있는 호조의 쌀을 급료로 주고, 수행한 백관도 온천에 도착한 후 급료를 나누어 주게 하였다.

 

밤에 달이 헌원(軒轅) 성좌의 큰 별을 침범하였다.

 

부령(富寧)·청엄진(靑嚴津)·굴포진(屈浦津)의 바닷물이 이틀 동안 피빛같이 붉었다.

 

4월 8일 갑자

상이 침을 맞은 후에 도제조 허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사를 한 군영에서만 징발하려니 미리 분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온양은 어느 군영과 제일 가까운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청주 군영이 제일 가깝습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난 임인년004)   여름에 서울 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기에 유신(儒臣)들이 차자를 올리고 대신들이 의견을 드려 먼저 남쪽 교외에서 발고제(發告祭)를 지내고 다시 중신(重臣)들을 파견해 북쪽 교외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청컨대 지금도 이 예에 따라 택일하지 말고 이달 12일에 먼저 성황에 발고제를 지내고 15일에 중신들을 보내 북쪽 교외에 제사를 지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을축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정랑으로, 성후설(成後卨)을 헌납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정륜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는데, 도제조 허적 등도 입시하였다. 상이 홍중보와 이일상에게 의주(儀註)의 절목들을 읽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수원 군사는 총융사로 하여금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그때 다다라 병부(兵符)를 총융사에게 내려 보내고, 충청도의 군병도 병사에게 병부를 보내어 병부를 서로 대조해 본 후에 징발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어영군은 대장이 맡아 거느리겠지만, 금군 및 도감 포수(砲手)와 마병은 대장이 없습니다. 병조 판서가 원래 본 군사들의 우두머리이니 그를 대장으로 삼아 모두 거느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이 행군할 때는 중군(中軍)에게 어영군 한 부대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어영 대장은 충청도 군병을 아울러 거느려 전후 부대를 총괄해 지휘하도록 하고, 협련군(夾輦軍)은 병조 판서를 대장으로 삼되, 내게 품하여 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궁궐 내에 혹시 유문(留門)을 실시해야 할 경우 내전에 여쭈어 그 명령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호(軍號)를 미리 날에 따라 써서 들이면 내전에서 계(啓)자를 찍어 봉한 다음 내전에 둘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매일 여쭈어 하달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순장(巡將)과 감군(監軍)은 거둥 시에 으레 계속하여 숙직을 섰으나 요번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므로 계속하여 숙직을 서기가 어려울 듯한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군호의 예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이름을 나열해 써서 들이면 날에 따라 낙점(落點)을 해두어 그때 맞추어 돌아가며 숙직을 설 수 있도록 하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승지는 모두 가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 두 명은 승정원에 남아 돌아가면서 숙직을 서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도 한 사람을 시켜 숙직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총관(摠管)의 수 또한 줄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6인이 수행하면 오위장(五衛將)들은 통솔할 것이 없게 되니 모두 수행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경영고(京營庫)에서 진상하는 물품을 행재소까지 가서 바친다면 그 폐가 반드시 배가 될 터이니 직접 궁궐 내에 바치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총융사(摠戎使)가 임시로 수원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면 장수와 병졸이 친숙치 못할 터이니 어찌 보조가 서로 맞겠는가. 병조가 총융사를 미리 내려 보내 사열하고 훈련하게 했다가 그때 맞추어 마중나오고, 이어서 계속 수원에 진을 치고 머물러 있다가 환궁할 때에 직산(稷山)으로 마중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징발한 군사가 갔다 돌아온 후에 요역을 줄여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다. 그래서 한 군영의 군사만 쓴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온천에 도착한 후 외방의 군사들은 모두 돌려 보낼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이 충분히 호위할 수 있으면 외방의 군사들은 돌려 보내겠다."
하였다.

 

경기·충청 양 도의 감사들에게 하유하였다.
"절대로 도로를 닦거나 수리하지 말라. 혹시 부득이한 곳이 있을 경우에는 약간 손질을 하되, 백성의 전답을 침범치 말며, 모든 일을 최대한 절약시켜 민폐가 없게끔 하라."

 

거둥 시에 횃불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4월 10일 병인

햇무리가 교차되고 하얀 무지개가 햇무리를 꿰었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을 주어 보내 충청 감사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청주 군영의 군사를 동원하여 충청도 경계로 마중 나오도록 유시하게 하였다.

 

4월 11일 정묘

상이 침을 맞은 후,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충청 감사가 지금 어실(御室)을 아직 다 만들지 못했고 그밖의 일들도 미처 하지 못했다 하니, 형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을 먼저 보내어 그와 함께 서로 의논해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서로 상의하여 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매사를 최대한 절약하여 한다 하더라도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는 작은 폐단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관(內官)이 의대를 관장해 왔으나 음식물만은 반감(飯監)에게 전적으로 맡겨선 안 됩니다. 일찍이 비빈(妃嬪)이 따라 갈 때도 있었다는 고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대개 이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청컨대 서너 내인(內人)을 데리고 가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감이 찬을 맡아하면 반드시 정결하지 않을 것이다마는 내인을 데리고 가면 반드시 큰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자, 허적 등이 반복해 진달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각 고을이 사신을 접대하는 데도 다과상을 차렸으니 이번 어가가 지나가는 곳에 차리지 않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차리지 말게 하라고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을 정리사(整理使)로 삼아 온양에 먼저 가서 제반 일들을 정리하게 하였다.

 

우승지·우부승지는 궁을 지키고 사관(史官) 상하번과 주서(注書) 2명도 남아서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4월 12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으며,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은 후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우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내대장(內大將)의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총부(摠府)가 외진 곳에 있어 구애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빈청(賓廳)은 궁궐 내에서 매우 가깝고 또 비어 있으니 이곳에서 숙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우명이 아뢰기를,
"여러 호위청에 10명의 군관을 배정하였는데 신의 군관을 합하면 80명이 됩니다. 40명이 서로 번갈아 숙직을 서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혁연이 아뢰기를,
"어가가 유숙하는 곳에는 엄격하게 장막을 치고 군사를 줄지어 주둔시켜야 하는데, 과천(果川) 같은 곳은 매우 비좁아 마을의 집들이 많이 철거될 것이니 이 점이 매우 걱정됩니다. 만일 장막을 조금 떨어진 빈 터에 치고 수십 인이나 백여 인으로 간간이 진을 치게 한다면 허술하지 않고 민가를 철거시키는 근심도 없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혁연이 아뢰기를,
"군중(軍中)의 큰 일들은 품달하겠습니다만 행진하고 멈추는 일들은 일일이 모두 품달할 수가 없으니 군중에서 편의대로 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어가를 수행하는 백관을 이미 뽑아서 재가받았는데 그 중에 사헌부 감찰은 수행원을 규찰하는 임무를 전적으로 맡고 있으니 2명이 어가를 수행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복시(司僕寺)의 관원은 2인이 어가를 수행하고, 사도시(司䆃寺)의 관원은 1인이 어가를 수행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시(庭試)를 베풀어 선비를 뽑았는데 김만중(金萬重) 등 11인에게는 문과 출신을, 김효청(金孝淸) 등 4백 26인에게는 무과 출신을 하사하였다.

 

4월 13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송시철(宋時喆)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민주면(閔周冕)을 길주 목사로 삼았다. 시철은 용렬하고 주면은 어리석어 모두 명망이 없었고, 다만 순차에 의해 승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어 정시의 문·무과 합격자 발표를 늦추어 환궁한 후에 하기로 하였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장계하기를,
"신이 《대전(大典)》을 취해 살펴보니 무릇 거둥 뒤에 지방관들이 문안드리는 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둥은 본시 옥체가 불편해 만부득이해서 한 것인데,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 묵묵히 뒷전에 물러앉아 성상의 안부를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문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인정으로나 예의로나 실로 크게 결여된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서 정해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비국에 하달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번 거둥 시에 폐단을 줄인 것이 한둘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종조의 고사로 말하자면, 여러 도의 감사들에게 경계를 넘어서 문안드리지 못하게 했으며 별도로 선물도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검소하고자 노력했던 뜻은 바로 오늘날 본받아 행해야 하니 이로써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4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부사 이경석이 뵙기를 청하니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경석이 먼저 머리를 감고 나서 쉰 후에 몸을 씻어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방지하도록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들이 지금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또 성상의 거둥을 맞게 됐으니 비록 폐단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어찌 백성들에게 폐가 미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각읍의 원곡(元穀)을 방출하여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부(節婦)·효자를 각도에서 매년 예조에 보고하여 정부로 보고되고 있는데, 정부에 일이 많아 거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른 도는 비록 모두 시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청도만은 거둥 시에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사실대로 보고하게 한 다음 정문을 세워주거나 관직을 제수하고, 청백리와 전쟁에서 순절한 자의 자손에게도 모두 똑같이 포상을 시행한다면 어찌 한 도의 인심을 고무시키지 않겠습니까. 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 역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조(仁祖) 때의 구신(舊臣)이 연로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지금 충청에 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신계영(辛啓榮)이 일찍이 삼사(三司)를 거치고 전직 참판에서 물러나 예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나이 80세가 되면 가자(加資)하여 가의(嘉義)로 올랐는데 특명이 있어야만 비로소 품계를 올려 가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또 조종조에서는 특별히 과거를 베풀어서 인심을 고무시켰다는 고사를 들었는데, 지금 어가가 머무를 때 특별히 시행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조그만 종이에 써서 올리라 명했다. 경석이 물러나 짧은 차자를 올리면서 조그만 종이에다 그가 말한 것을 죽 쓴 다음 승지에게 주어 전달하게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영부사 이경석에게 무과 시험 장소에 가서 시험을 보여 인재를 뽑으라고 명했다. 상이 거둥 전에 무과를 마치지 못할까 봐서 무과의 과정을 줄이고 싶어 대신들에게 의론할 것을 명했는데, 대신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자 상이 그만두었다.

 

4월 15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북쪽 교외에 여제를 지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들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각 도에서 올라오는 공사(公事)들을 으레 행재소로 보냈는데, 급하지 않은 공사들은 승정원에 잠시 놔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온천과 지나가시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서 거행하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목욕하실 날을 21일로 잡았으니 온천의 제사는 그날 아침에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도성을 지키는 백관들이 조회가 있는 아일(衙日)에 조방(朝房)에 모두 모여 내전께 문안드려야 진실로 인정과 도리에 맞습니다."
하자, 명하가, 삼전(三殿)005)                  께 5일 간격으로 문안드리게끔 정하자고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도 각사(各司)에서 사무 보는 일이나 소송을 판결하는 등의 일들을 모두 해야 합니다. 정원으로 하여금 이를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내의원(內醫院) 제조가 내의원에 들어가 숙직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조 한 사람이 혼자 숙직하기는 어려우니 승지를 임시 제조로 삼아 그로 하여금 겸하여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외각사(外各司)는 당상·당하관 각 1인으로 숙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사의 관원들은 낮에는 다같이 모이고 숙직을 할 때는 평상시의 관례와 같이 낭청 1인이 숙직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사의 출근부를 승정원에 들여 정원으로 하여금 행재소에 보내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온양에 도착한 후 병사들의 질병이 염려되니 전의(典醫)와 제조(提調)는 의약품을 맡은 관사에 분부해 넉넉하게 약품을 싸가지고 가서 구호할 수 있게 하라. 듣자니 충청 감사가 지은 집이 꽤 많아 어실(御室) 세 군데에 담장을 둘렀고, 담장 밖에는 임시로 지은 집이 1백 50여 칸이 된다 하니, 그 폐단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과거를 실시하게 되면 충청도에만 실시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도 모두 과거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인조조(仁祖朝)갑자년006)                  에 공산(公山)에서 과거를 실시했을 때는 그 도의 사람들만 과거를 보게 했고 수행한 사람들도 시험을 보도록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규정을 어기고 과거를 봐 합격된 서울 사람은 마땅히 빼버리되, 거듭 주의시키고 엄히 금하여 현재 충청도에 거주하는 자만 과거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파발을 하루 내에 왕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은 하루 시각이 9시(時)이니 9시 안에 왕복하도록 하라. 그리고 떠나보낸 시간을 적어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온양은 지세가 비좁아 마병과 금군(禁軍)이 진을 치고 꼴을 먹일 곳이 없습니다. 만일 온양에서 조금 떨어진 물과 풀이 있는 널찍한 곳을 택하여, 그들을 나누어 보내 여기저기 진을 치고 있게 하면 별도로 복병을 둘 필요가 없으니 두 가지가 다 편리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충청도 내의 부로들과 시골 사대부들이 행차 깃발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모두 온양에 모인다고 하니, 행차를 빨리 달리지 말고 천천히 여유있게 하여 위의를 보이시고 간혹 어가를 멈추어 이들을 위로하시고 아울러 백성들의 실정을 물어보시는 게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옥당 관원은 모두 수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하번이 가므로 2인이 더 가 보았자 불필요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이 영부사가 차자로 진술한 세 가지 일이 무엇인가?"
하자, 선징이 그의 차자를 올렸다. 상이 보고 나서 이르기를,
"만약 송상현(宋象賢)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그 나머지 드러난 이들에게도 모두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인가?"
하니, 선징이 아뢰기를,
"충청도 내에 송상현보다 더 충절이 있는 이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온양군향교에 제사지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지내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경과하는 도로와 백성들의 전답 중 손상된 곳은 모두 그 손해를 따져 주인에게 변상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과한 곳은 환궁 후에 거행하고 머물렀던 곳은 올 때에 거행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완에게 이르기를,
"외방에서 병사를 징발하지 않았기에 도성이 텅 비어 있으니 도둑이 생길까 걱정된다. 순라 도는 일을 각별히 잘해야 할 것이다."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거둥 후에 잠시 군사 훈련을 중단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마병 5백으로 어가를 호위해야 할 것인데 각 초(哨)에 인원이 많이 빈데다 또 병든 말이 많아서 할 수 없이 쓸 만한 마병 4백 70명을 가려 어가를 호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하교하였다.
"이번 거둥할 때 군병이 상당히 많으므로 통괄해 거느릴 장수가 없으면 어지러이 흐트러져 대오를 잃게 되는 염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를 제외하고 총융사 이하 각종 군병들을 어영 대장 유혁연으로 하여금 모두 거느려 지휘하도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향실(香室) 문서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가져다 참고해 보니 이번 거둥 시에 경유할 각읍 중에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명산 대천(名山大川)으로는 한강과 과천(果川)·관악산 밖에 없는데 이곳들은 항시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그리고 직산(稷山)의 성거산(聖居山)은 고려 태조께서 직산현의 서쪽에 어가를 멈추고 제사를 지내신 곳이고, 우리 태조 대왕·세종 대왕께서 온천에 행차하실 때 역시 제사를 지냈습니다. 비록 사전(祀典)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모두 전일에 탑전에서 여쭈어 정한 대로 각기 어가가 머무는 날에 제사지내소서. 관악산에는 17일 새벽에 제사지내되, 향과 축(祝)·폐백·제관(祭官)·제사 음식 등은 서울에서 미리 내려보내고, 희생(犧牲)은 해당 도에서 마련해 보내도록 하고, 한강은 해당 관서에게 전례대로 수송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6일 임신

민종도(閔宗道)를 지평으로, 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삼았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어가가 궁궐을 떠난 후 사관(史官) 1인이 승정원에 남아야 하는데 1인이 춘추관 숙직을 서게 되므로 사관이 모자랍니다. 겸춘추 1인을 계하(啓下)하여 춘추관에서 숙직을 서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7일 계유

상이 온양 온천에 거둥하였다. 상은 군복을 입고 칼과 활·화살통을 차고 떠났는데,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행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 한성부 판윤 오정일(吳挺一), 지사(知事) 정지화(鄭知和), 예조 참판 남용익(南龍翼),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행 도승지 박세모(朴世模), 좌승지 이성징(李星徵), 우승지 장선징(張善瀓), 동부승지 송시철(宋時喆), 교리 심재(沈梓), 부수찬 윤심(尹深), 집의 오두인(吳斗寅), 지평 이섬(李暹), 정언 이규령(李奎齡) 등이 각사의 관원과 종반(宗班) 숭선군(崇善君) 등 8인, 의빈(儀賓)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등 5인, 침의(鍼醫) 윤후익(尹後益) 등 4인, 약의(藥醫) 이동형(李東馨) 등과 더불어 따라 갔으며, 영풍군(靈豐君) 이식(李湜) 등 형제 4인도 자원하여 어가를 수행하였다. 무예 별감(武藝別監) 30인, 어영군 1천 2백 명, 기병(騎兵) 50명, 군뢰(軍牢)와 잡색(雜色)이 합해 4백 명이었는데, 대장 유혁연과 중군(中軍) 유정(兪綻)이 이끌고, 금군(禁軍) 5백 명은 별장(別將) 이지원(李枝遠)이 이끌고, 마병 4백 70명과 포수 8백 명은 별장 유비연(柳斐然)·한여윤(韓汝尹)이 이끌었다.

 

어영 대장 유혁연에게 군사를 이끌고 금군·마병·훈국 포수와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를 선도하고, 훈련 대장 이완에게는 그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뒤를 보호하여 강가까지 가서는 뒤에 쳐졌다가 돌아와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총융사 구인기(具仁墍)에게는 수원 군병 5천을 거느리되,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강의 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뒤를 보호하여 수원까지 가고, 다른 한 부대는 수원에서부터 뒤를 보호하여 충청도 경계에까지 가도록 명하였다. 충청 병사 민진익(閔震益), 청주 영장 이간(李旰)에게는 그들의 군사 5천을 이끌고 충청도 경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뒤를 보호하여 온천까지 가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홍명하에게는 남아서 서울을 지키면서 비국에 숙직하게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석으로 하여금 그를 보필하게 하였는데, 군사 일 외의 모든 일을 그와 더불어 상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풍 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은 궁궐 내를 지키면서 종사관(從事官) 이민서(李敏叙)와 함께 빈청에서 숙직을 하되 군관 80인을 거느려 호위하게 하고, 훈련 대장 이완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군영에 진을 쳐서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관리를 보내어 한강과 관악산에 제사를 지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서울에서 온양의 행궁에 이르기까지 30리마다 파발 하나를 설치하였다. 군사와 말을 각기 다섯씩 대기시켜 그들로 하여금 문서를 교대로 전달하며 왕복하게 하였는데 9시(時) 안으로 하게 정하였다.

 

묘시에 상이 서빙고 나룻터에 이르자 도성에 남는 백관들 및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강가에서 공손히 배웅하였다.

 

상이 선소(船所)에 나아가 호위하는 여러 장수들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을 앞으로 불러 음식을 하사한 다음, 수행 관원과 군병들은 모두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금군과 연을 호위하는 포수는 배에 타고 좌우로 나뉘어 어선(御船)을 호위하며 건너라고 명하였는데, 승지 장선징이 재가받았다. 축포를 쏜 다음 상이 배에서 내려 가마에 올랐다. 먼저 출발한 총융사 구인기가 수원군을 이끌고 모래 사장에서 진을 치고 길 한편에서 무릎을 꿇고 알현하고는 뒤를 보호하면서 따라갔다.

 

오시 말에 과천 숙소에 묵었다.

 

이성징(李星徵)에게 하교하였다.
"진상하는 음식물의 가짓수가 너무 많으니 경기도와 사옹원(司饔院)에게 분부하여 적당한 물품만 간소하게 올리고 폐가 되는 물품은 진상하지 말도록 하라."

 

우부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군호(軍號)를 밖에서 써서 들일까요?"
하니, 상이 밖에서 써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저녁 때 크게 천둥을 치며 소낙비와 우박이 내리고 용이 강 속에서 솟아 올랐다.

 

4월 18일 갑술

상이 인시(寅時)에 과천을 출발하여 광주(廣州) 사근천(沙斤川)의 주정소(晝停所)에서 머물렀다. 상이 막사에 나아가 병조 판서 홍중보와 어영 대장 유혁연을 인견하고는 혁연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어영군이 뒤에 있게 하라. 내가 수원 군대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어제는 조금 떨어진 모래 사장에서 진을 쳐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만일 좌우에 진을 치도록 하여 그 사이를 통과하면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총융사에게 분부하여, 앞의 들판에 진을 치고 좌우로 나뉘어 기다리다가 어가가 군문에 도착하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꿇어 엎드린 후에 그대로 앞서 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사시에 상이 사근천(沙斤川)을 출발하였다. 어영군에게는 길 왼편 산 기슭에 진을 치고 있다가 뒤를 따르고, 총융사 구인기는 수원군을 이끌고 먼저 떠나 앞의 들판에 진을 치되 길을 끼고 좌우로 나뉘어 머무르도록 명하였다. 금군 마병에게는 선봉이 되어 수원 군문에 이르러 좌우로 나뉘어 서 있다가 상이 천천히 행하여 진영 앞에서 어가를 멈추면 군사들이 군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상이 진(陣) 중에 들어가면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치며 꿇어 엎드리고 난 다음 그대로 선두가 되어 가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애초 군사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앞에 가는 의장(儀仗)과 마병이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치달려 먼지가 가득 일어났으며, 수원군 역시 연습이 안 되어 있어 먼저 일어나는 데 급해 빨리 앞지르려다 흩어져 대오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미시 말에 수원 숙소에 머물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두 자전(慈殿)에게 문안하였다.

 

정원·옥당·약방이 각전(各殿)에 문안하고 유도 대신(留都大臣)이 3품 이상을 거느리고 각 전에 문안하였는데, 대개 세종조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상이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을 들고 땀을 빼었다. 약방이, 어가를 머물러 병세를 보아가며 떠나기를 여러번 청하였으나 상이 폐를 끼친다고 듣지 않자, 약방이 또 군령(軍令) 시각을 조금 늦추어 진위(振威)에서 묵다가 느즈막하게 출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장계하기를,
"방금 진상하는 음식 물품을 간소하게 받아들이라는 성상의 분부를 보았는데 이는 폐단을 덜려는 지극하신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대전께 진헌하는 도리는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하물며 이 봉진하는 물품들은 산해(山海)의 토산품에 불과한 것들로 원래 얻기 어려운 물품들이 아니어서 반드시 폐단을 끼치지 않을 것이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마련한 것이니 그대로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은 우선 받아들이고 환궁할 때는 다시 간소하게 받아들일 것을 엄히 밝히고 거듭 주의시키라."
하였다.

 

평산(平山)과 면산(免山) 등지에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는데 큰 우박은 달걀만하였고 어떤 것은 콩알만하였다. 보리 줄기가 꺾이고 목화 싹이 온통 절단나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었다.

 

4월 19일 을해

상이 수원 행궁에 있었다.

 

병조 판서 홍중보를 불러 표신(標信)을 가지고 가 어영 대장 유혁연과 총융사 구인기를 부르라 명하여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묻기를,
"앞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진을 칠 만한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여기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산성(山城)이 있고 산성을 지나면 평야가 나오는데 좌우에 모두 백성의 전답이 있으나 도로가 약간 넓은 편입니다."
하자, 혁연이 아뢰기를,
"한 줄로 서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로 하여금 길에 열을 지어 서게 하되, 곡식을 밟지 않게 하라."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앞에서 인도하는 의장도 아울러 먼저 보낼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진문을 열어서 내보낸 다음 도로 진문을 닫고 기다리다가 어가가 도착한 후에 다시 진문을 열어 맞이하도록 하라."
하였다. 혁연이 아뢰기를,
"수원 군병은 본래 훈국 군병과 차이가 없었는데 최근에 계속 흉년을 만나서 훈련을 못 시킨 지가 벌써 10여 년이나 됩니다. 어제 하교를 받잡고 가서 그 군대를 살펴보니 예전에 일을 할 줄 알았던 장수들은 거의 다 죽었고 새로 부임한 이들은 모두 일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장수와 병졸이 서로 익숙치 않아 두려운 마음만 갖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상께서 백성의 일을 걱정하시어 백성들의 전답을 밟지 말도록 경계하셨으니 진실로 뜻을 받들어 이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밭 곡식은 밟더라도 별 손상이 없을 것이니, 이곳 도로가 비좁으므로 군사들을 길 한편으로 조금 물러나게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더라도 손상 입히는 짓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어제는 대신들이 내작문(內作門)에 들어와 있었는데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라는 하교를 듣고는 다시 외작문(外作門)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신들이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미안할 뿐 아니라 또 병부(兵符)를 지니고 있으니 멀리 있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늦은 밤이라도 반드시 상의할 일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내작문(內作門) 밖에 들어와 있도록 하라."
하였다.

 

사시 말에 상이 수원을 떠났다. 총융사 구인기, 수원 부사 박경지(朴敬祉)에게 명하여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산성의 남쪽 광활한 곳에 가서 진을 치게 하였다. 어가가 진문에 다다르자 군사들이 문을 열고 일제히 고함치며 나팔을 불고 북을 쳤다. 상이 어가를 멈추고 군대의 모습을 보고 난 다음 인기 등으로 하여금 뒤를 보호하며 따르도록 하였다. 오시 말에 진위 숙소에 머물렀다.

 

정리사 김좌명이 온천에서 마중나왔는데,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쓸 침실을 잘 쓸고 닦지 않아서 흙냄새가 상당히 났으므로 중사(中使)에게 다른 곳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듣고는 대죄(待罪)하고 진위현의 현령 이관하(李觀夏)를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농사철에 수령이 바뀌면 폐가 생긴다 하여 파직시키지 말고 감사로 하여금 관하를 군문에서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

 

행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다가 도중에서 병이 심해져 나아갈 수 없다며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4월 20일 병자

상이 묘시에 진위를 떠나 진시 말에 소사(素沙)의 주정소에 머물렀다.

 

신전(信箭)으로 어영 대장 유혁연을 불러 묻기를,
"충청도 군사는 어디에 진을 쳤느냐?"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들 한가운데다 진을 쳤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보병 4천여 인과 마병 4백여 인입니다. 어가가 진문에 도착한 후 군문에서 대포를 쏘아 중군(中軍)에 알리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대장은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마중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이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니 충청 군사로 하여금 어영군과 앞에서 인도하는 의장대를 내보낸 후에 다시 진문을 닫고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뵙기를 청하니, 막사에서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호위 군병은 처음에 각기 5일 양식을 지참케 했으니 온양에 도착한 후에는 급료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충청도의 군사는 동원한 지 벌써 오래되어 싸가지고 온 양식이 이미 바닥나 굶주리게 될 걱정에 놓여 있다 하니 필요한 물품들은 마련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군사 6천 7백여 인의 하루 식량이 80여 석인데, 직산(稷山)에도 회부(會付)한 곡식이 있으니, 이것으로 나누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막사를 떠나 소사(素沙) 다리 근처에 이르러서, 금군·선전관 3인으로 하여금 다리 위에서 말을 타고 달려 보게 하고는 어가를 멈추고 구경하였다.

 

충청 병사 민진익(閔震益)과 영장 이간(李旰)이 마병과 보병 5천을 이끌고 충청도 지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상이 진문에 이르자 민진익이 대장기를 세우고 군악(軍樂)을 울리며 마중나왔다. 상이 어가를 세우고 군대의 모습을 사열하다가 병조 판서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는 수원의 군대보다 나은 듯하다."
하고, 이어 진익과 이간 등을 앞으로 불러 하유하기를,
"이 군대는 대열이 꽤 정연하고 깃발들이 활기에 차 있는데, 그대들이 맡은 일에 근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이어 말을 하사하라 명하고 그 군사들을 이끌고 뒤 대열에 서도록 하였다.

 

미시에 직산 숙소에 머물렀다.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그의 도내 각 고을의 수령들을 이끌고 홍살문 밖에서 경건히 맞이하였다.

 

관리를 보내어 성거산(聖居山)에 제사지냈다.

 

어가가 작문(作門)에 들어갈 때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 마구 작문으로 들어갔다. 상이 행궁에 들어간 후 병방 승지에게 작문의 초관(哨官)을 문초하게 했는데 초관이 두려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주아부(周亞夫)의 진중에 들어갈 때 진문을 지키는 졸병이,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며 문제에게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가라고 하였다. 이번 작문의 초관이 만약 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비록 수행하는 여러 장수·승지·각 차비(差備)라도 결박지어 두었다가 막사에 들어간 후에 보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사 군인이 크게 다치더라도 돌아볼 틈이 없을 것인데 법대로 금지하지도 못한 데다가 또 제멋대로 말을 둘러대니 매우 괘씸하다."
하고, 병방 승지 장선징으로 하여금 초관 2인에게 장형을 줄 때 감독하되, 각각 곤장 20대씩 치도록 하고, 승지·사관(史官)·각 차비와 수행한 여러 장수들은 모두 엄중히 추고하라고 하였는데, 추고를 받은 자가 40여 인에 달하였다. 선징이 결박이라는 두 글자가 미안하다고 진달하자, 상이 후회하여 즉시 부집(扶執)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와 형조 판서 김좌명을 인견하였다. 좌명이 먼저 가서 어실(御室)을 청소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하직 인사는 하지 말고 떠나라 명하였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과 정언 이규령(李奎齡)이 뵙기를 청하니,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삼가 듣자니 초관을 곤장 칠 때 승지 등을 결박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하는데 너무나 그지없이 미안합니다. 어가가 작문에 도착할 즈음에는 모시는 신하들이 호위하는 일에 급하여 제대로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으레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상께서 금지하신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만, 결박이라는 말을 제왕이 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고치는 게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미 고쳤다고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외작문의 일은 대장(大將)이 주관해야 하고, 내작문의 일은 병조 판서가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관에게 벌을 줄 때 승지에게 장형(杖刑)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사체로 보아 역시 미안한 듯합니다. 차후에 만일 죄를 다스릴 일이 생기면 마땅히 내외 대장에게 다스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경억이 또 아뢰기를,
"초관은 군졸의 우두머리에 불과한데 어찌 지존의 제왕으로서 작은 일을 친히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또 요즈음 충청도에 기근이 들어 백성의 일이 바야흐로 시급하니, 반드시 감사를 접견하여 구제할 방안을 물어서 속히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충청도의 민심이 반드시 화합하여 모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환궁하신 후에 거행하려고 하면 백성들의 기대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행궁에 도착하면 감사를 인견하겠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세금을 감해주는 일은 일찍이 명하였으니 비록 환도하신 후에 거행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으나, 백성을 구휼하는 일은 즉시 시행해야만 백성이 은혜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을 우대하는 예와 상을 주어 권장하는 은전에 있어서는 병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의 연로한 사람들과 효자·절부(節婦)들을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아뢰게 하소서. 고 충신 조헌(趙憲)·송상현(宋象賢)과 유현(儒賢) 김장생(金長生)의 묘소가 모두 도내에 있으니 역시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령이 아뢰기를,
"지금 가뭄의 재해가 매우 혹독한데 충청도를 볼 때 그 나머지의 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팔도에 하교하시어 모두 부역을 감해주시면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 중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경억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세금을 충청도만 감해주면 은혜를 베푸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합니다만, 신의 생각은 팔도에 두루 거행하기는 형세로 보아 어려움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은 요·순도 못할까 걱정한 일이다. 나라의 비용이 몇 년만 지탱할 수 있다면 이 일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선징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비용이 부족하여 널리 베풀기가 어려우니 충청도에만 실시해야 됩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비록 충청도라도 온양과 경유하신 각읍을 제외한 그 나머지의 읍들은 차등을 두어 구별하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오늘 소사 다리 위에서 금군에게 말을 달려보라고까지 하셨는데 이 일은 비록 적은 것이나, 경기·충청 양도의 백성들이 보는 사이에 반드시 구경하려고 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성상의 덕에 적지 않게 흠이 될 것이니 환궁하실 때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파발을 18시간으로 제한한 것이 너무 급박하여 한정한 시간 내에 왕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좌상 홍명하 역시 이 일을 신에게 알려 품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24시간으로 개정하라. 급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파발에 넘기어 24시간 내에 왕복하게 하고 긴급한 공사는 별도로 금군을 정하여 빨리 왕복하게 하라고 비국에 분부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외방의 미결수들을 본도로 하여금 빨리 관대하게 처결한 다음 보고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일을 도내에 분부하여 현재 죄수 중에 본 도에서 의결하여 처리할 수 있는 죄수들은 석방하기도 하고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유배를 정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보고했던 죄인들과 인륜을 범한 자 및 사람을 죽인 유들은 신문관을 신칙하여 즉시 사실 조사를 실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금년부터 3월까지 심리(審理)할 때 그 사이 도배(徒配) 죄인들은 춘등(春等)의 도류안(徒流案)이 미처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형조의 초계(抄啓) 중에 넣지 못했는데, 일례로 균등하게 은택을 베푸는 도리가 못 될까 걱정됩니다. 그러니 본도로 하여금 참작하여 관대하게 석방시키게 하거나 형조에서 전의 초계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형조에 하달하였다. 형조에서 회계하기를,
"각 도의 죄인들이 이미 귀양간 후에 재가를 받은 자가 또한 많아 애초부터 심리 명단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신의 조에서 우선 그들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가 심리가 끝난 뒤에 한꺼번에 품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21일 정축

상이 묘시에 직산(稷山)을 출발하여 진시 말에 천안(天安)의 주정소에 머물렀다.

 

관리를 먼저 보내어 온천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오시 말에 어가가 온천에 도착하였다. 수원 이남부터 어가가 경유하는 각읍마다 유생·부로(父老)들이 수십 인이나 백여 인씩 곳곳에서 마중 나와 절하였으며, 온양에 이르자 십 리쯤 길 양쪽으로 인파의 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상이 가끔 어가를 멈추고 위문하였다.

 

6칸 8작의 어실은 온천 서쪽에 있고, 온천 방은 8칸이었는데, 나머지 초사(草舍)를 합하면 1백여 칸이었다.

 

상이 행궁에 나아갔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여러 의원들을 데리고 들어와 진찰한 후 영의정 정태화와 충정 감사 김시진(金始振)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내외 장막 사이를 보니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만일 유혁연과 홍중보 등으로 하여금 서로 의론하여 포장을 붙여서 치게 한다면 비록 군사의 수를 늘리지 않아도 도감의 병사만으로도 호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내외 포장을 붙여서 치고 충청도 병사들은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상이 시진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곳에 오면서 일을 많이 벌여 폐해가 많으리라 생각하는데, 부역에 동윈된 백성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시진이 대답하기를,
"토목 공사는 승군(僧軍)을 조달하여 쓰고 농민은 부리지 않았습니다만, 가건물에 있어서는 각읍에 나누어 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각읍에서 모두 백성의 토지 결수에 따라 의무로 내보냈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군(僧軍)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못 되어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과거 보는 일에 대해 여쭙자,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만일 시행하지 아니하면 이것 역시 인심을 잃는 하나의 일이다. 무과는 초시(初試)를 보이지 말되, 그 기준을 높여야 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만일 금령을 엄히 밝혀 다른 도의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한다면 반드시 문란하고 혼잡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원주민이라도 호적에 들어 있지 않으면 역시 과거를 보게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나의 이번 행차는 만부득이해서 한 것이지만 도내의 민폐를 생각할 때마다 상당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조로 하여금 과거를 시행해 인재를 선발하여 위로하고 보답하게 하되, 다만 본 도의 주민으로 호적에 들어 있는 자만을 허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가뭄이 들어 예조에 급히 기우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청주진(淸州鎭)의 병사들을 돌려보내고 병사 민진익은 남아 같이 행궁을 지키게 하였으며, 훈국과 어영군으로만 호위하게 하였다. 외포장은 둘레가 5백 보로 도성문을 모방하였는데 정원·옥당·병조·총부(摠府) 및 수행하는 여러 장수들이 들어와 숙직하였으며, 그 나머지 각사(各司)는 모두 외작문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수령들이 차사원(差使員)으로 와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으니, 지금 농사철을 맞아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차사원을 수령들에게 겸임시키고 나머지 수령들은 본 읍으로 돌려보내라. 음식물을 담당하는 차사원들이 들락거리면 역시 폐해가 있을 것이니 1인만 정하되, 각읍에서 음식물을 진상할 때 배지리(陪持吏)가 도착하면 차사원이 사옹원의 관례에 따라 살핀 다음 올리게 하라."

 

상이 처음으로 온천에서 손을 씻었는데 이날 택일하기 위해서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 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연로하여 물러나 보령(保寧)에 살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와서 알현하였다.

 

정원에 하교하여, 농사철이어서 민폐가 염려되니 수랏간에 배정되어 보내진 급수군(汲水軍)들과 여러 곳에 배정되어 보내진 자들을 아울러 모두 돌려 보내라고 하였다.

 

수행한 백관들의 급료를 하사하고 아울러 각사 하인들의 급료를 주었다.

 

유도 대신들이 궁성과 도성 각처의 숙위소에 무사하다는 것과 봉화(烽火)의 상황을 기록하여 날마다 아뢰었다.

 

4월 22일 무인

상이 온천의 행궁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감았다.

 

정원·옥당·약방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아침에 문안하고 목욕한 후에도 문안하였다. 정원·옥당·약방은 다시 저녁 문안을 하였는데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청하기를,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들로 하여금 낮에는 돌아가며 교대로 내보내고 밤에는 모두 숙직하게 함으로써 번갈아 가며 쉴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어제 포장 밖에 모인 부로(父老)들의 수를 세어서 아뢰라는 명이 있었는데, 반드시 성상의 뜻이 있어서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원은 단지 본 읍에서 보고한 대로 대충 7인이라고 서계하여 물으신 뜻을 끝내 매몰시켜 버렸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이 아뢴 7인이 너무 적다고 하여 다시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 아뢰라 하니, 감사 김시진이 다시 1백 70인으로 서계하였다. 상이 나이 90 이상된 자에게는 쌀 5말과 조기 20마리를 하사하고 80된 자에게는 쌀 3말과 조기 10마리를 하사하고 70된 자에게는 쌀 1말을 하사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궁궐 안의 비리를 적발하게 하였다.

 

4월 23일 기묘

저녁에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오로지 충청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인데, 만일 수행관들과 어가를 모시고 온 무사들에게 과거를 보라고 허락해 준다면 충청도의 사람들이 합격할 수 없게 될 터인데 이게 어찌 과거를 실시한 본뜻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은 따로 기록해 놓았다가 환도하신 후에 따로 시험을 보여 선발한 다음 정시(庭試)에 추가로 넣어주고, 수행관들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한다면 무사들 또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무과의 기준을 높이자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만약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환궁하시기 전에 반드시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1백 명을 선발하되 기준은 유엽전(柳葉箭)을 1회에 두 번 명중시키는 것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의 시종신으로 물러나 예산(禮山)에 사는데, 나이가 90에 가깝고 병으로 행궁에 나와 알현하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베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연로한 사람들도 일일이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금 감사로 하여금 부로들을 초계(抄啓)하라고 하였는데, 음식물을 넉넉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연로한 이들에게 관직의 유무를 묻지 말고 모두 노직첩(老職帖)을 주시면 그들의 감동과 기쁨은 반드시 음식물을 받는 것보다 배나 더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신계영은 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자(加資)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사간 이경억이 충신과 유현(儒賢)들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했다는데 이순신(李舜臣)만 빠졌습니다. 그의 사당이 아산(牙山)에 있으니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와 허적이 아뢰기를,
"호적의 금령은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거나 문·무에 합격했더라도 한성부의 호적을 조사하여 발견되면 방(榜)에서 빼고 벌을 주어 징계의 본보기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는 환도하신 후에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에도 직부(直赴)할 수 있는 자들이 많은데 식년과(式年科)가 아직 멀어 저들이 매우 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별시(別試)나 정시(庭試) 때에 직부했던 적이 있었으니, 이번 무사들을 따로 기록해서 환도하신 후에 별도로 시험을 보여 선발하면서 이 무리들도 직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선징에게 이르기를,
"송시열은 공주에 머물러 있고 송준길은 병 때문에 도로 돌아갔다.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가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니 병이 조금 나아지길 기다렸다 와서 보라는 뜻으로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중사(中史)를 보내어 두 자전에게 문안하였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가 이처럼 오니 호위 군병들이 어떻게 비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각 군영에 물어보니, 군사들이 모두 좋은 목면 포장을 갖고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파주(坡州)·여주(驪州)·이천(利川)·장단(長湍) 등지에서 우박이 크게 내렸는데, 혹은 밤톨만하고 혹은 콩알만하여 보리·밀·목화가 모두 손상을 입었다.

 

용안(龍安)의 13세 여아와 평택현의 한 여인이 모두 벼락을 맞아 죽었다.

 

4월 24일 경진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 시에 외방의 폐해를 염려하여 어가를 수행하는 여러 관아에서 각기 알아서 일용품을 준비하도록 하였는데 정원의 사령(使令)이 차사원(差使員)에게 깔자리를 요구하며 마구 능욕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징벌하여 다른 관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그의 죄를 처벌하게 하소서. 그리고 관원도 단속을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에게 명하여, 진중을 순시하며 무기를 점검하고 병사들의 질고(疾苦)를 묻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행궁에 오다 공주의 산사(山寺)에 이르러 병 때문에 오지 못하고 소를 올려 직임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질병 때문에 이처럼 만부득이한 행차를 하였다. 오직 경과 서로 대면하여 나의 회포를 풀기를 바랐었는데 그대가 또 질병으로 상소하니 내 몹시 섭섭하다.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 뜻을 알리니,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빨리 멀어진 마음을 돌리기 바란다."
하였다. 송준길 역시 상소를 하였는데, 똑같이 답하였다.

 

경기 감사가 치계하여, 수원과 진위 두 읍 객사(客舍)에 시원한 방을 추가로 지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5일 신사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기력을 헤아려 천천히 온천에 목욕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겠다. 그리고 충청도에서 매일 바치는 음식물의 가짓수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많은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모두가 제때에 나는 토산물이지 구득하기 어려운 물품들이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거의 30종에 가까웠다. 간소하게 하라는 뜻을 충청 감사에게 분부하고 산 노루는 경기의 전례대로 3일 간격으로 봉진하게 하라."
하였다.

 

백관들에게 북쪽 탕에서 목욕하라고 하였다.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이, 노병(老病) 때문에 나아가 뵙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대죄(待罪)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남양(南陽)에 우박이 내렸는데 더러 비둘기 알이나 참새 알만하였다.

 

4월 26일 임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뵙기를 청하고 입시하여 아뢰기를,
"엊그제 심리 때에 도년형(徒年刑)은 모두 풀어 주었고 그 나머지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유들은 모두 다 관대히 판결을 내리거나 풀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 문서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충청도 내의 죄인은 거둥하시는 날 여기에서 너그러이 판결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문서를 써서 들이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거주민의 전토가 행궁의 담 안에 들어간 것이 무려 6결에 이릅니다. 이 밖에 사람과 말에 의해 짓밟힌 것 역시 9결쯤 되며, 포장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 또한 10여 호가 있는데 모두 생업을 잃었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추후에 돌봐 주겠습니다만, 대동미 수백 석이 지금 이 군에 있으니 만일 특별히 분부를 내리어 나누어 주게 하시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호위하는 여러 군사들이 종일 일이 없어 심지어는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으니 중일(中日)의 관례에 따라 활쏘기와 말타기 시험을 보인 다음에 병조에서 수송해온 목면을 그들에게 상주어 격려, 권장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것을 허적에게 물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좋은 이야기입니다. 사복시에도 수송해 온 목면이 있으니, 만일 병조의 목면이 부족하면 이것을 쓰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좌명이 아뢰기를,
"호위 군사들에게 분부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도록 하고 환궁할 때도 호조로 하여금 강가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 중 어떤 이는 그들의 집이 철거되었고 어떤 이는 그들의 집을 비워주고 한데서 지내고 있으며 또 포장 안팎의 전토를 많이 경작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몹시 딱하게 여기고 있다.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먼저 쌀과 콩을 지급해 주어 당장 호구할 수 있도록 하라."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과 대사헌 송준길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전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병 때문에 나와 뵙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대죄(大罪)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4월 27일 계미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릉(獻陵)의 화소(火巢) 안에 있는 소나무에 벼락이 쳤다.

 

내포장에 있는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 2인이 병으로 죽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나라를 위하다 객지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가엾다. 해당 부서에서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의관(醫官)은 주의하여 구제하지 못했으니 엄중히 추고하고 이 다음부터는 잘 치료하여 사망하는 걱정이 없도록 하라."

 

4월 28일 갑신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문·무과의 정시(庭試)를 행궁 밖에서 시행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대제학 김수항은 문과를 맡고, 병조 판서 홍중보는 무과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호적에 들어 있지 않은 자와 어가를 수행한 백관과 도내의 수령들에게는 모두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에게는 환도한 후에 따로 시험봐서 선발하라고 명하였다. 문과에서 홍우기(洪宇紀) 등 6인을 선발하였다.

 

4월 29일 을유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상이, 당초 과거를 시행한 뜻은 본디 본군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인데 본군에서는 한 사람도 과거에 합격한 이가 없어 일이 완전히 허사가 되었다 하여, 차점으로 낙방한 자들의 시험지를 들여오라고 하였다. 차점으로 낙방된 자가 5인이었는데 모두 온양 사람이었다. 상이 이들에게 모두 급제를 하사할 것을 명하자, 영의정 정태화와 대제학 김수항 등이 규정을 벗어나 5인이나 급제를 하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며 다시 그 중에서 1, 2인을 가려내 급제를 하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조이병(趙爾炳)·선약봉(宣若奉)·임유(林濡) 등 3인에게만 급제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임유는 결성(結城)의 거주인으로 온양의 군적(郡籍)을 꾸며 응시했다는 것으로 본군 유생 조명한(趙鳴漢)에게 고발당하여 제외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