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0권, 현종 6년 1665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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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진

지평 조성보(趙聖輔) 등이 아뢰기를,
"좌승지 이성징(李星徵)은 전에 온양 행조(行朝)에 있을 때에 옷을 벗고 청(廳)에 누워서 떠들석하게 농지거리하고 웃는 등 조금도 공경하고 삼가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대관(臺官)이 탄핵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는데도 태연하게 출사한 채 끝내 스스로 처신함이 없었습니다. 체면도 염치도 없는 그러한 행동을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니 이성징을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2일 정사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예조 참판으로, 김휘(金徽)를 동지의금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좌승지로 삼았다.

 

상이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동래 부사 안진(安縝)이 올려보낸 왜(倭)의 서계(書啓)와 장계(狀啓)를 읽고 이어 아뢰기를,
"왜서(倭書)의 내용이 전규(前規)를 어긴 것이 많고 또 ‘망설인다’는 말을 쓰는 등 극도로 패만하니, 변방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거절하여 받지 않고 의리로 꾸짖음으로써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로 올려보내어 국가를 욕되게 하였으니, 안진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일을 다 아뢴 뒤에 상이 옥당 관원에게 명하여 《심경》을 강하게 하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글뜻을 강하였다. 준길이 함양(涵養)의 뜻을 강하고, 또 이(理)와 의(義)의 체용(體用)과 현미(顯微)한 뜻에 대하여 강하고, 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뜻에 대하여 강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하셨을 때에 촌락의 초라함과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의 불쌍함을 성상께서 직접 보셨으니, 이후로 넓은 집에 거처하실 때면 촌락의 초라함을 생각하시고, 잘 차려진 수라상을 대할 때면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늘 염두에 두고 잊지 않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항상 나에게 괴로움이 있는 듯한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도로의 백성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셨으니, 이 마음을 미루어 전국에 두루 미치게 하여 나라 안 백성이 다 그렇게 되도록 한다면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용익이 또 아뢰기를,
"공사가 나날이 지체되고 있는데, 특히 승지방(承旨房)의 단자(單子)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아 승지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이게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방의 서책이 많이 올라왔는데 반사 단자(頒賜單子)를 입계(入啓)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명이 내려지지 않아 심지어 책이 썩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지체하는 한 예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충청도에 염병이 극성하였다.

 

6월 3일 무오

정언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강원 감사 이만영(李晩榮)과 수원 부사 박경지(朴敬祉) 역시 다 제멋대로 과례(科例)를 어기고 봉진(封進)하였으니, 적발하여 추궁하는 일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이, 성균관에 나졸이 들어간 일로 인하여 공조 판서 이완(李浣)과 다투었습니다. 이완은 이를 여론에 부쳐야 했을 것인데 감히 방자하게 상소하여 마치 스스로 해명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였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적발하여 추궁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만영은 체차한 뒤에 추고하고 경지는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삶은 전복을 내국(內局)에 보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이미 체직된 상황이었다. 강원 감사 이만영도 문보(文報)를 보내는 편에 몇 가지 어산물을 보내어 약용(藥用)으로 쓰게 하였고, 대가가 수원을 지날 때에 부사 박경지가 특별히 약과를 만들어 내국에 진봉하자 제조 허적(許積)이 온양으로 가지고 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臺諫)이 만영 등을 탄핵하자 허적도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였는데, 상이 안심하고 사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예조가 상의 병환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기를 청한 것에 대한 비답이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좌상 홍명하(洪命夏)와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함께 아뢰기를,
"예조가 아뢴 내용은 실로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니 속히 윤허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명하가 아뢰기를,
"송준길의 차자에서 원자를 보양할 것을 청한 말은 매우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차자에 대신과 의논하여 행할 것을 청하였다."
하자, 명하가 조종조(祖宗朝)처럼 별도로 사부(師傅)를 두어 보필하고 인도하기를 청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항상 조정의 신하들과 접하게 하면 매우 좋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차자에 대한 결정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늘 나오게 하여 신하들을 만나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광조(趙光祖)도 경연을 열 때에 원자로 하여금 옆에 앉아 조정의 옳고 그름과 민생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함께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거둥하셨을 때에 성상께서 비로소 지방을 보시고 시골집과 전야(田野) 및 농민의 의식에 대해 상세히 아시게 되었으니, 이후로 염려하는 마음이 반드시 전보다 배는 더 커질 것입니다. 원자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났으니 어떻게 민간의 고통을 알겠습니까. 성상께서 항상 이러한 실정을 일러주어 수시로 가르치시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과연 그의 말이 옳습니다. 평야 지대의 고을에는 논이 많고 산악 지대의 고을에는 밭이 많기 때문에 세두(稅豆)의 견감이 공평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밭을 가진 자는 혜택을 받고 논을 가진 자는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니, 당초에 정한 대로 수미(收米) 2말을 견감하고, 경기도 그와 같이 견감하라."
하였다.

 

6월 4일 기미

승지에게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일 처리를 끝마치고 옥당 관원에게 《심경》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고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이 참으로 좋기는 하지만, 공사를 가지고 입시한 뒤에 강하는 것은 강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듯한 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여 유신(儒臣)과 함께 강론하신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대사성은 사유(師儒)의 우두머리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책인데, 근래에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두고 있으니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그전에는 조정에서 합당한 사람을 뽑아 겸임하도록 하여 책임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본부하여 겸임할 자를 뽑도록 하라."
하였다.

 

6월 5일 경신

처음에 상이 온천에 거둥하면서 훈련 대장 이완에게 도성 안의 도적을 겸하여 살펴 통행 금지를 엄하게 하도록 명하였었다. 4월 23일 밤에 기병과 보병 나졸이 성균관 식당으로 달려들어가 다리 안쪽의 하련대(下輦臺) 가에서 관노(館奴) 1명을 체포하는 바람에 재(齋)를 지키던 노복이 모두 놀라는 소동이 있었다. 유생들이 이완에게 말을 전하기를,
"지극히 존엄한 곳에 이렇게 함부로 달려들어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니 다시는 나졸을 성균관 안에 보내지 마시오."
하였으나, 이완이 듣지 않았다. 상이 환궁한 뒤에 유생들이 이완이 데리고 있는 하인을 잡아들여 매질을 하자, 이완이 사람에게 모욕당했다고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은 ‘나이 어린 부랑배들의 소행을 마음에 둘 것이 있느냐.’고 답하였다. 유생 이적길(李迪吉) 등도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지극히 엄한 분부가 내려짐에 유생들이 아연실색 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자연히 조정에서 시비를 가릴 것인데, 너희들이 상소하여 스스로 해명한단 말인가. 너희들은 더욱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신유

간원이 전에 아뢰었던 임의백·이만영·박경지 등의 일을 이때에 와서 정지하였다.

 

6월 7일 임술

오시수(吳始壽)를 사인으로, 이선(李選)을 봉교로, 최후상(崔後尙)을 대교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이상일(李尙逸)을 경상 감사로, 이준구(李俊耉)를 강원 감사로, 이시술(李時術)을 동부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6월 8일 계해

상이 소대하였다. 교리 박세당(朴世堂)이 심경찬(心經贊)과 심학도(心學圖)를 강하고,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였다.

 

6월 9일 갑자

강원도 삼척(三陟) 등 7개 고을에 봄 이후로 가뭄이 극심하여 5월이 지나도록 모내기를 하지 못하였고, 근전(根田)도 봄갈이와 파종을 하지 못하였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6월 10일 을축

대사헌 정지화(鄭知和) 등이 아뢰기를,
"수령의 집이 근무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에 종전에 집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경질하였으니, 뜻하는 바가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대정 현감 유옥(柳沃)과 정의 현감 김여한(金汝翰)은 모두 집이 본도(本道)의 해안 고을에 있는 자들로 동시에 같은 섬에 임명되었으므로 여론이 다 부당하게 여깁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옥당 관원을 소대하여 《심경》을 강하였다.

 

6월 11일 병인

권령(權坽)을 형조 참의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6월 12일 정묘

사간 김만기(金萬基), 정언 이익상(李翊相)·권두추(權斗樞)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대사간 이연년(李延年)과 상견례를 한 다음 조경(趙絅)의 월봉을 환수하도록 연계(連啓)하자는 뜻으로 서로 의논하였는데, 연년이 강경하게 편견을 고집하며 공의(公議)를 막는 바람에 반복하여 논란을 벌였으나 끝내 의견을 합치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직책은 언론을 주관하는 것인데, 조정의 부당한 조처를 바로잡으려 하다가 장관에게 저지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연년이 아뢰기를,
"오늘 동료들과 상견례를 했을 때에 동료들이 조경의 일을 가지고 연계하고자 하였는데, 어리석은 신의 소견과는 어긋나는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조경이 전에 파면되었던 직책이 바로 지금 그가 맡고 있는 군직이고 보면 월봉을 지급하는 데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를 올린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반드시 논하고자 한다면 신은 삼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조경은 문학과 행실이 모두 뛰어나 평소 사대부 사이에서 존경을 받아왔는데, 얼마 전 문자와 언어에 관계되는 실수를 범해 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러해 동안 등용하지 않고 버려둔 것은 대개 옳고 그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다시 서용하고 난 후에는 전과 다름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도량에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어찌 한 번의 실수로 그를 평생 동안 버릴 수 있겠습니까.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 일찍이 뭇 신하들과는 다른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이 80이고 노모도 살아 있으며 집안이 너무나도 가난하여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형편인데, 이는 실로 조야(朝野)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성상께서 옛정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선왕이 행하셨던 은전(恩典)을 미루어 베풀어줌으로써 굶어죽지 않게 해주는 것이 과연 훌륭한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신이 의논을 정지하고자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동료에게 배척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였다.

 

예조가, 종묘에 고하는 등의 일을 다시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훌륭한 스승을 택하여 원자를 보양하라는 뜻을 간곡하게 아뢰고, 아울러 선대(先代)의 훌륭한 신하였던 조광조가 경연에서 아뢰었던 말과 이언적(李彦迪)이 올렸던 8조목의 법규를 베껴 올렸는데, 상이 깊이 받아들였다.

 

6월 13일 무진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 겸 대사성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부교리로, 김휘(金徽)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 집의 오두인(吳斗寅), 지평 어진익(魚震翼)·조성보(趙聖輔)가 아뢰기를,
"간원의 관원 여러 명이 인피하고 물러가 기다리고 있으니 본부(本府)가 마땅히 처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상의하여 초본을 작성한 다음 집에 있는 동료들에게 간통을 보냈더니 소견에 차이가 있어 끝내 결론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태연히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남천택(南天澤)이 아뢰기를,
"행 호군(行護軍) 조경은 세 조정을 섬겨온 구신(舊臣)이니, 거두어 서용한 후에 월봉을 환급하는 것은 실로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사간 이연년이 환수하자는 의논을 정지하려 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간통에다 이런 내용을 써서 보냈었는데, 동료들과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인피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융통성 없고 고루한 소견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끝내 소란스러운 일을 만들고 말았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역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와 함께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병환이 쾌차하셨는데, 종기의 병환을 앓던 작년과 비교해 보면 매우 큰 효험을 보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중외(中外) 사람들이 모두 종묘에 고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마음은 거역하기 어려운 것인데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당초 안질이 한창 위중하던 때에 사람들이 모두 애태우며 근심하였는데, 이제 쾌차하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럽겠습니까. 뭇 신하들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양 자전의 마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위로는 양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답해야 할 것인데, 어찌 단지 겸양만 지킨 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여러 재신들도 뒤를 이어 극력 청하였지만 상은 여전히 난색을 보였다. 세 정승과 신하들이 반복하여 진달하자 한낮이 되어서야 상이 허락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차자를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차자에서 말한 일을 의논하여 정하고자 한다. 원자와 원손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직책을 보양관이라고 부르는가?"
하니, 태화가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종(仁宗)이 동궁에 계신 것이 몇 년이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거의 30년 가량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는 보양관과 만날 때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고사(故事)를 살펴보았더니 ‘6세에 예를 갖추지 않고 대신을 볼 수 없으므로 관을 쓰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6세에 관을 쓰고 7세에 책봉하였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 당시의 복색에 대해 일찍이 《실록》에서 베껴왔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육(金堉)이 소현(昭顯)의 세손 보양관이 되었던 때는 몇 품(品)으로 하였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정2품으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의 보양관인 정엽(鄭曄)·정경세(鄭經世)·이정귀(李廷龜)·오윤겸(吳允謙) 등의 신하들은 모두 1품으로 하였습니다. 이번에 송시열과 송준길 두 사람을 보양관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고가 있을 수도 있으니 두 사람만을 뽑아서는 안 된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항(金壽恒)과 김좌명(金佐明)도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6월 14일 기사

교리 심재(沈梓)가 상소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삼가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조경의 월봉을 환수하는 일을 아뢰면서 몹시 미워하고 헐뜯었습니다. 아, 조경이 어찌 간특한 마음을 품고 바른 자를 미워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양사(兩司)를 처치할 때에 말을 잘못 만든 잘못을 밝히고자 하였지만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언론에 관계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이미 진정시키는 방도를 잃었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부수찬 윤심(尹深)이 상소하기를,
"조경은 문장의 전아함과 깔끔한 지조로 인해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여러 조정을 섬겨오면서 남다른 우대를 받아왔습니다. 비록 일을 논하다 죄를 지어 벌을 받고 몇 년 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거두어 서용한 후에 다시 선조(先朝) 때와 같은 은전을 베푸셨으니, 잘못을 덮어주고 옛정을 생각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어찌 한 가지 일의 잘못을 이유로 그의 일생까지 다 덮어씌워 간특한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선조의 옛 은혜까지 다 폐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자와 체직할 자를 결정함에 있어 신의 그릇된 소견이 이와 같았으므로 억지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내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의논하는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고, 부수찬 김석주(金錫胄)는 상소하기를,
"신은 이 일에 스스로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조경은 신의 돌아가신 조부와 50년 동안 교제한 친구로서 칭찬하고 허여한 말이 시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모두 조부의 유문(遺文)에 실려 있으며, 조경도 신의 조부를 위하여 묘지명을 지었습니다. 조경이 근래에 비록 한 장의 소로 인하여 공의(公議)에 죄를 얻었지만, 신은 감히 돌아가신 조부의 벗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구차하게 동료들의 의논을 좇아서 조부의 벗을 간특하다고 욕한다면, 이는 단지 신의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리로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관(本館)이 처치하는 데에는 신 한 사람이 없더라도 여러 동료들이 그 시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니, 신은 결코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은 또한 반드시 인피한 것으로 신을 탓하고 공적인 일을 뒤로 미루었다고 신을 나무랄 것입니다만, 신은 달게 받아들이고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부교리 박세당(朴世堂)과 이정(李程)도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상소하여 사면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심재 등은 다 참석하지 않고 나가고 이정이 혼자서 양사를 처치하기를,
"아울러 인혐하고 물러갔는데, 월봉을 환수하라는 논의는 실로 여론을 따른 것이므로 편견을 가진 자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인혐할 것이 못되며, 반드시 정계하려는 의도는 무척 구차한 것이어서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그야말로 체통에 맞게 가렸으니,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것은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습니다. 이리저리 고집만 부리고 의사를 돌이키지 않은 채 억지로 소요를 일으켜 결국 불분명하게 되고 말았으니 과실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 대사헌 정지화, 집의 오두인, 지평 어진익·조성보는 출사하게 하고, 대사간 이연년과 장령 남천택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월식이 있었다.

 

6월 16일 신미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어제 장관과 논의가 맞지 않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헌부와 옥당이 처치할 때에 한층 더 사단(事端)이 많아져 제각기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신들은 결코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할 수 없습니다.
아, 조경의 상소가 음흉하고 부정하다는 것이 성상의 감식에 숨길 수 없게 되었으니, 조경이 간특한 마음을 품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라고 한 신들의 논의가 과연 그릇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대해선 여러 말로 변명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만, 신들이 언론에 관계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직임에 나아가 논열(論列)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에 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는 날을 이달 19일로 정하였으니, 19일 새벽에 대신을 보내어 먼저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고하게 한 뒤에 교서를 반포하고 백관이 사전(四殿)에 전(箋)을 올리고 하례를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미 하례를 받는 의식을 행하게 되면 상례로 보아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봉진(封進)해야 합니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봉진할 방물과 물선을 모두 동지 방물(冬至方物)의 수대로 봉진하라는 뜻으로 각도에 공문을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지금 한창 농삿일이 바쁠 때이므로 그 폐단이 극심할 것이라고 하여 특별히 봉진하지 말게 하였다.

 

귀성(龜城) 등 12개 고을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리때와 쟁반만한 우박이 내렸다. 우박에 맞아 사람과 가축이 죽고 온갖 곡식과 초목이 꺾이고 부러져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6월 17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조형(趙珩)을 지의금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우윤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수항(金壽恒)·김좌명(金佐明)을 원자 보양관으로, 서필원(徐必遠)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관원은, 시비와 가부를 논함에 있어 일가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법전(法典)에 상피하도록 규정된 경우가 아니면 감히 ‘개인적인 정리상 편치 않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벼슬하는 자가 지켜야 할 예절입니다. 그런데 부수찬 김석주는 조부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소를 올려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외람된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정원은 마땅히 받지 않고 되돌려보내야 했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들여보냈으니 그 또한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부수찬 김석주를 체차하고 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하자는 일만을 따랐다.

 

6월 18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곽산(郭山) 사람 한경립(韓京立)의 처가 죽은 태아 하나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코가 둘, 입이 둘, 팔이 둘, 귀가 셋, 눈이 넷, 다리가 넷이었다.

 

6월 19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신을 보내어 상의 안질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대궐 내정(內庭)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전국에 교서를 반포하고, 사죄(死罪) 이하의 각종 죄인을 사면하고, 백관을 가자하였다.

 

6월 20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민서(李敏敍)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사간 김만기 등이 배천 군수 주목(朱楘)을 탄핵하기를,
"배천(白川) 군수 주목은 명망도 지체도 낮은 데다가 재간도 없으므로 절대로 백성을 바로잡아 제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다가 반복하여 아뢰자 따랐다.

 

6월 21일 병자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정배(定配)된 죄인이 군읍을 지나갈 때에는 단지 타고갈 말과 먹을 음식만을 주는 것이 상규(常規)입니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가 삼수(三水)로부터 유배지를 옮겨 가던 때에는 함경도 수령이 40여 명의 노비와 20여 필의 말을 제공하고, 또 가마꾼을 각 접경 지역에 대기시켜 두고 기다리도록 연로(沿路)에 통지하기를 마치 중앙 관원이 지방으로 출장갈 때에 미리 공문을 띄우는 것처럼 한 자가 있었습니다. 국법을 무시하고 민폐를 끼친 그 정상이 진실로 놀라우니, 맨먼저 통지를 보냈던 수령과 연로의 수령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소서."
하니, 따랐다.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옮겨갔는데, 집들이 다 흔들렸다.

 

6월 22일 정축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효릉(孝陵) 참봉 조명한(趙鳴漢)은 온양 유생이 상소하던 때에 음흉한 마음을 품고 부정한 처사를 하였으니 파면하소서. 의빈 도사(儀賓都事) 이인실(李仁實)은 전에 한성 판관을 맡았을 때 정원이 패(牌)를 내는 날에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룸으로써 동료가 죄없이 벌을 받게 해 놓고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태연히 공무를 보고 있습니다. 관료들이 너나없이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파면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한이 앞장서서 소를 올려 임유(林濡)의 죄를 들추어 내어 과방(科榜)에서 삭제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면되었다.

 

권대운(權大運)을 도승지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상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는 지금 이미 그 예를 거행하였으니, 과거를 시행하여 인재를 뽑는 일을 응당 해야 하겠습니다. 경과(慶科)를 시행하여 초시에서 6백 명을 뽑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에 평안도 어사 민유중(閔維重)이 서계를 올리자, 조정이 함경 감사로 하여금 설한령(薛罕嶺)에 별도로 파수하는 초소를 두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장계로 아뢰기를,
"설한령은 함흥에서 서북쪽으로 3백 리 떨어진 큰 산의 인적없는 곳에 있으므로 비록 방어하고자 하여도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 함흥은 강계(江界)·삼수(三水)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 압록강 상류의 요충지를 도맡고 있으므로 긴급한 때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영(本營)에서 장진강(長津江)에 별장(別將)을 두고 사졸을 모집하여 설한령 서쪽과 별해령(別害嶺) 북쪽의 불시 사태에 대비해 오다가 근래에는 폐지하고 사졸에게 포를 거두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올 가을부터 다시 별장을 두어 파수를 보고 삼을 캐어 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등의 일을 겸하여 살피게 하소서."
하였다. 이를 비변사에 내렸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설한령을 파수하는 일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정중이 장진강에 별장을 두어 겸하여 살피게 하기를 청한 데에는 필시 소견이 있을 것이니,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24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조성보가 아뢰기를,
"사인 오시수가 여론이 일고 있는데도 스스로 처신할 방도를 생각지 않고 태연히 공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은 언론에 관계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즉시 바로잡지 못하여 거듭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감히 태연히 있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 장령 이유·이섬, 지평 어진익도 이 일 때문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도 아뢰기를,
"오시수의 죄를 즉시 바로잡지 못한 잘못은 신들도 헌부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고,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6월 27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부수찬 윤심(尹深)이 양사(兩司)를 처치하기를,
"오시수가 사직소를 내고 출사하지 않은 지 벌써 10일이 넘었으니, 담당 관원으로서 자처함에 있어 이밖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태연히 있다는 것으로 죄를 삼고는 부당한 인혐을 하고 있으니, 너무 지나치다고 하겠습니다. 처음에 아울러 논하지 않은 것이 실로 생각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보면, 헌부의 인피는 비록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서 한 것이겠지만 달리 체직할 만한 잘못은 없습니다. 집의 오두인, 장령 이유·이섬, 지평 조성보·어진익은 체차하고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가 출사한 후에 다시 ‘같은 일로 모두 인피하여 헌부가 이미 체직을 청했는데, 구차하게 혼자 출사하는 것은 도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이정이 차자를 올리기를,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를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갑신

간원이 아뢰기를,
"사인 오시수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에 진달한 내용은 대단히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환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면 마땅히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자처할 방도를 찾기에 여가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관직에 취임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여러날 동안 근무하고 있었으니, 바로잡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며칠 전 부수찬 윤심이 올린 상소에 ‘조경이 일에 대해 논하였다가 죄를 얻었다.’고 하여 마치 조경이 직언(直言)을 하다가 뜻을 거슬러 부당한 벌을 받은 것처럼 말하였으니, 시비가 전도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체직을 청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헌부가 의도적으로 말을 만들어 그를 감싸려 하였으니,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원자 보양관에 관한 일을 이미 재가하셨으니 아문(衙門)의 호칭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례대로 강학청(講學廳)이라 부르고, 그 밖에 응당 행하여야 할 절목들은 예조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하여 여쭈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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