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1권, 현종 7년 1666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1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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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임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형조 좌랑 정시형(鄭時亨)은 자신의 전반비(傳飯婢)를 시켜 본조에 정장(呈狀)하여 쟁송한 일이 있는 데다 또 담당한 동료에 대해 직접 촉탁을 넣으려 했으니 비열하고 좀스럽기가 심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이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올렸는데, 처음에는 조심하여 수행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힘쓰라는 등의 이야기를 진계하였고 중간에는 연신(筵臣)을 자주 인접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라는 등의 말로 권면하였고 끝에는 궁금(宮禁)을 단속하여 내외를 엄숙하게 하고 언로를 열어 직간(直諫)이 오게 하라는 등의 이야기로 매우 간절하게 진계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일상은 고상(故相)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요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열 일곱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조정에 벼슬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그런데 본디 학술(學術)이 없는 데다가 이재(吏才)도 부족하였으며 오직 술마시기만을 좋아하여 병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미선(米船)의 일 때문에 거듭 이지익(李之翼)의 탄핵을 받았었는데 동료들이 신구한 도움으로 다행히 죄벌을 면하였으나 결국 여기에 좌죄되어 중하게 쓰여지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술병으로 졸하니 청의가 비루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4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일상은 고상(故相)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요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열 일곱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며 조정에 벼슬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그런데 본디 학술(學術)이 없는 데다가 이재(吏才)도 부족하였으며 오직 술마시기만을 좋아하여 병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미선(米船)의 일 때문에 거듭 이지익(李之翼)의 탄핵을 받았었는데 동료들이 신구한 도움으로 다행히 죄벌을 면하였으나 결국 여기에 좌죄되어 중하게 쓰여지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술병으로 졸하니 청의가 비루하게 여겼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방물(方物)인 표피욕(豹皮褥)을 진상할 때 승전색(承傳色) 전윤정(全胤鄭)이 감히 퇴송시키라는 내용으로 재삼 계달했는데, 그 외람스런 습관은 실로 뒤 폐단에 관계되니 은미한 조짐이 있을 때 방지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하라."

 

부제학 조복양(趙復陽) 등이 차자를 올려, 재이를 만나 수성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다.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않고 성학(聖學)을 강(講)하지 않고 상하의 정지(情志)가 통하지 않고 언로(言路)와 헌체(獻替)가 넓지 않고 폐정(弊政)과 해법(害法)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반복하여 진계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지금 차자의 내용이 격절한 것을 보니 내가 매우 가상스럽게 여긴다. 감히 띠에 써서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월 3일 갑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대신에게 명하여 공조 판서 이완(李浣), 강화 유수(江華留守)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주사(舟師)와 진(鎭)을 옮기는 일의 이해를 논하게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이 아울러 잘 수거(修擧)되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단지 군병의 숫자가 적어서 수군·육군을 둘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수군은 파하고 오로지 육군으로만 하려는 것인데 이완이 진을 옮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는 성명께서 참작하여 헤아리시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또한 대신과 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일들도 모두 주사를 파기하느냐 않느냐는 데 관계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하문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이완이 이미 선조(先朝)께 품하여 강정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경솔히 개정하는 것이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상 허적은 아뢰기를,
"신은 이미 가슴속에 아무런 요량이 없었으므로 필원의 말을 듣고 처음에 옳게 여겼었는데 이완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또한 편리하고 온당한 것 같았습니다. 국가에서 할 수 있는 형세가 있으면 둘 다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군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중군에게 소속(所屬)을 모두 거느리게 하면 유수(留守)가 거느린 것은 4백, 5백 명에 불과하게 되고 유수가 다 거느리게 하면 중군의 설치는 무익한 데에 관계되는 것 같기 때문에 파기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수의 친병(親兵)은 2초(哨)로 정하고 중군은 그대로 두게 하라."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군향(軍餉)의 정수(定數)에 대해서 이완이 불가하다고 했습니다만, 군향은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을 신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존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쌀이 12만 석(石), 콩이 2만 석, 벼가 1만여 석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필원의 말은 민폐를 위한 것이고 이완의 말은 먼 훗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경솔하게 숫자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필원은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의 요미(料米)가 단지 1백 석이기 때문에 용도를 잇댈 수가 없습니다. 군관을 돌려보내는 사태까지 발생하니,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의당 1백 석을 더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진연을 물려서 정한 것은 재이의 발생 때문인데 신의 의견에는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이미 해가 바뀌었으니 날짜를 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의당 2월 그믐께로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진연에 관한 제반 일을 지금 거행해야 됩니다. 외방의 기악(妓樂)도 올라오게 하고 예관(禮官)에게 먼저 날짜를 가리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양전(兩殿)에 각기 따로 진연해야 하니 이렇게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대신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소장의 한 조항은, 김좌명(金佐明)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삼는 것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좌명이 이 직임에 합당하다 해도 체개(遞改)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고, 상이 따랐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집에서 행한 지극한 행실은 남이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종척(宗戚) 가운데 가장 훌륭합니다. 청검한 절의가 환히 알려져 있는데 시장(諡狀)이 없는 탓으로 아직껏 시호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조(國朝)의 대신들에게 행장이 없이도 시호를 내린 규례가 있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유명(遺命)했기 때문에 본가에서 시장을 짓지 않았습니다만 신들이 진달하여 시호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능원 대군에게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대사간 정만화가 아뢰기를,
"필원(必遠)의 말을 듣건대 본부의 중군(中軍)이 군병을 침학한 일이 있다고 하니, 본부로 하여금 사계(査啓)하게 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오두인(吳斗寅)이 선천 부사(宣川府使) 정호신(鄭好信)에게 청북(淸北) 중진(重鎭)의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탄핵하고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진연청(進宴廳)을 다시 설치하고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1월 4일 을유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안군(慶安君)의 상사(喪事)에 청평군(淸平君) 이전(李佺)이 유복친(有服親)으로서 성복(成服)하기 전에 멋대로 기녀(妓女)를 부르고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으니, 예법을 무시하고 식견이 없는 것이 너무 심했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복창군을 파직시키라는 일은 따랐다.

 

1월 7일 무자

집의 오두인(吳斗寅),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재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보은(報恩) 사람 이환(李)의 집에 명화적(明火賊)이 돌입하여 이환을 죽이려 하니, 그의 아들 이창경(李昌慶)은 23세이고 차자(次子) 이원경(李元慶)은 17세이고 말자(末子) 이명경(李鳴慶)은 15세인데, 세 아들이 칼날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가 몸으로 아버지가 누워있는 이불 위에 엎드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다. 차라리 나를 죽이고 아버지는 죽이지 말라."
하니, 화적이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도 형제가 서로 다투어 죽으려 하면서 형이 말하기를,
"내가 죽겠다."
하니, 두 아우도 말하기를,
"내가 죽겠다."
하면서 서로 애걸하니, 화적이 의롭게 여겨 모두 살려줬는데 세 아들이 모두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아버지는 끝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아울러 정표하게 하고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재능에 따라 녹용하게 하였다.

 

1월 8일 기축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판서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9일 경인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구문치(具文治)가 형장(刑杖)을 남용한 것과 전 목사 이인(李𡐔)이 외람되이 역말을 탄 것은 모두 불법에 관계가 되는데 본도에서 파출시키는 데 그쳤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양도(兩道)의 장계를 가져다 조사하여 율법에 의거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지 춘추(同知春秋) 이상진(李尙眞) 등이 등서(謄書)한 실록(實錄)을 강도(江都)의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했는데, 실록의 낙권(落卷)과 낙장(落張)의 숫자가 도합 3백여 권(卷)이었다. 강도의 실록이 비로소 약간이나마 갖춰지게 되었는데 문종조(文宗朝)의 실록 1권은 여러 곳의 사고에 모두 결본(缺本)된 까닭에 등서하여 보결(補缺)하지 못하였고, 기타 낙자(落字)와 오자(誤字)가 매우 많아 바로잡긴 했으나 그래도 미진하니, 아쉬운 일이다.

 

1월 10일 신묘

박형(朴泂)·이온(李溫)·유호(柳濠)·송계종(宋繼宗)·유정식(劉廷式)·맹호업(孟豪業) 등을 도로 가두라고 명했는데 양사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일찍이 계묘년001)  에 누적되었다가 발각된 자들은 죄범의 대소를 막론하고 매양 1등을 더 가할 것으로 법식을 정하였습니다만 사세가 구애되는 점이 있습니다. 죄가 도배(徒配)에 해당되는데 이에서 더 가한다면 반년을 가중하는 데 해당되어 너무 가볍게 되고, 죄가 전가 사변에 해당되는데 이에서 더 가한다면 사율(死律)에 해당되어 너무 무겁게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누적된 죄에 대해서는 원래 일정한 죄율이 없게 되고 단지 본범(本犯)의 경중에만 달려 있게 되므로 법을 적용하는 뜻이 매우 구차스럽게 됩니다. 가등법(加等法)은 거행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변통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뒷날 등대할 때 품처하라."
하였다.

 

정언 이세장(李世長)이 소장을 올리기를,
"임금이 하늘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그 이치가 같습니다. 진실로 어버이 섬기는 일에만 힘쓰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양전(兩殿)의 진연(進宴)은 당초 지난 겨울로 복정(卜定)했다가 10월에 천둥친 변이 있었기 때문에 금년 봄으로 물려서 하라고 명하였으니, 군하(群下)들 그 누가 우리 성상께서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을 흠앙(欽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재변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흰무지개가 있었던 변은 지난 겨울의 천둥보다 더 참담한 것이었으니, 생각건대 전하께서 공구하고 경척하는 정성을 의당 배가하셔야 될 터인데, 이런 때에 성대한 거조를 행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날을 아끼는 정성이 무한함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지난 겨울 물리라고 명한 뜻에 견주면 과연 어떠합니까.
신이 듣건대 진연(進宴)이 2월에 있고 온천의 행행이 또 3월에 있다고 하니, 이달에 기악(妓樂)을 선발하여 올려보내고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의문(儀文)을 사치스럽게 꾸며야 하며, 내달에는 도로(道路)를 수치하고 공돈(供頓)을 설치하느라 군민(軍民)이 수고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평상시에도 일시에 아울러 행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재이를 당하여 수성하는 때인 지금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양전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시어 속히 우선 파하라는 명을 내리고 오는 가을을 기다린다면 하늘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둘 다 온전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또 듣건대, 세 공주(公主)가 온천에 수행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자전(慈殿)께서 가시는 것은 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의 어려움을 계교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공주의 수행에 이르러서도 부득이한 데 연유된 것입니까? 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백성들이 망령되이 스스로 헤아려 혹 유관(遊觀)하러 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전하께서는 또한 어떻게 백성들에게 해명하시겠습니까. 이는 의당 성명께서 살펴야 될 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진언(進言)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소장 끝의 일은 뜬소문을 들은 데에서 나온 것 같다."

 

1월 12일 계사

이민적(李敏迪)을 사인(舍人)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부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수찬으로 삼았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기읍(畿邑)에 대동미(大同米)를 설행하는 법을 세운 뒤에 과외(科外)로 침탈하는 일이 없게 했는데 근래 수령들이 법령을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연호(烟戶)라고 일컫기도 하고 무역(貿易)을 칭탁하기도 하는 등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만들어 민간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객사(客使)의 사행(使行)이 있을 때 부마가(夫馬價)의 숫자를 감하여 지급하는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이 점점 만연되고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계(査啓)하게 하여 치죄하소서.
본부의 금리(禁吏)가 금법을 범한 상한(常漢) 하나를 잡았는데 이에 도리어 금리를 구타하고 금법을 범한 사람을 빼앗아서 숨겼습니다. 신들이 차인(差人)을 보내어 잡게 하니 금법을 범한 자는 곧 부상(富商)인 박성후(朴成後)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법금을 범한 사람과 구타하고 탈취해간 자는 본부에서 당연히 잡아 가두고 다스리겠습니다만, 성후는 곧 출신(出身)이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수금(囚禁)하고 엄히 다스려 징계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성후는 잡아다가 추문하여 정죄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소장을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명하는 본디 시망(時望)이 있어 동료들이 중히 여겼었다. 그러나 대배(大拜)됨에 이르러서는 재지(才智)가 부족하여 별로 건백(建白)하는 것이 없는 채 시세에 따라 부침했으므로 연소배들이 부족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명하는 본디 시망(時望)이 있어 동료들이 중히 여겼었다. 그러나 대배(大拜)됨에 이르러서는 재지(才智)가 부족하여 별로 건백(建白)하는 것이 없는 채 시세에 따라 부침했으므로 연소배들이 부족하게 여겼다.

 

1월 15일 병신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삼았다.

 

간원이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만매(李萬枚)는 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직임에 합당치 않다고 탄핵하고서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체직시킬 것만 허락하였다.

 

풍덕(豊德) 사람 안추원(安秋元)은 병자 호란 때 사로잡혀 갔다가 몰래 도망하여 돌아왔는데 조정에서 본토(本土)로 돌아가게 하였다. 추원이 돌아와보니 부모와 형제가 모두 죽었고 장차 살아갈 길이 없어 도로 청국(淸國)으로 들어가다가 봉성(鳳城)의 수장(守將)에게 잡혔다. 그리하여 심양(瀋陽)에 보고가 되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걱정하였다.

 

1월 16일 정유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재이 때문에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의 총명이 지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감히 황녕(荒寧)하지 말라는 경계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은 점이 있기도 하며, 수성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아가서 유연(遊衍)하지 말라는 훈계를 몸받지 않은 점이 있기도 합니다. 성학이 고명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중간에 끊기는 걱정이 있고, 백성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드넓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으며, 조정에 옹용한 화기가 넘치는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솔(導率)하는 방도에 혹 미진한 점이 있는 탓이고, 중외의 습속(習俗)이 날로 괴려(乖戾)되는 상태가 되는 것은 교화의 근본에 혹 강구하지 못한 점이 있는 탓입니다."
하고, 또 기전(畿甸)의 폐단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상이 총애하여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그 소장을 주사(籌司)에 내렸으나 일이 정지되고 행해지지 않았다.

 

1월 17일 무술

한량(閑良) 유예일(柳禮一)이 어영(御營)의 중일(中日)002)   시사(試射) 때 조총(鳥銃)을 쏘아 과녁을 세 번 맞추었기 때문에 특명을 내려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음산한 흰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괴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데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하여 보면 진실로 내가 부덕한 데에 연유된 것이었다.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에 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고 부끄러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수성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전교를 지어 널리 직언을 구하도록 하라. 그리고 백사(百司)가 직무에 태만하고 신료(臣僚)들이 화협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니, 군공(群工)을 책려하여 직사에 부지런하고 서로 도와 화협함에 힘쓰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조항을 전교의 초고에 첨입시키라."
하였다. 정원이 재차 아뢰기를,
"비망기로 곧바로 중외에 반포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대신 지어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재이를 만나 수성하는 방도 때문에 고사(故事)를 계달(啓達)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1월 18일 기해

공주(公州) 사람 안국(安國)의 아내 의향(義香)이 자기의 종 승세(承世)와 간음하고서 몰래 안국을 시해한 뒤 승세와 도주했는데 안국의 족인(族人)이 그들을 잡아서 관(官)에 고발하였다. 감사가 옥사(獄事)를 갖추어 장문(狀聞)하니 왕옥(王獄)으로 잡아다가 삼성 추국했는데, 모두 자복을 받아 처형하였다.

 

진연을 가을로 물리라고 명하였다. 한 달 안에 잇따라 흰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이 있자 상이 크게 경동하여 하교하였다.
"아, 지금 이 진연을 어찌 시절이 태평하다고 해서 하려던 것이겠는가. 참으로 남의 아들된 도리에 날이 가는 것을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극심하여 변이가 이렇게 발생하니, 이런 때에 행례(行禮)하는 것은 실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데 어긋나는 점이 있다. 진연하는 예를 정지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품하도록 하라."

 

1월 19일 경자

부제학 조복양, 응교 이정, 교리 심재, 부교리 남이성, 수찬 오두인, 부수찬 박세당, 대사간 정만화, 사간 정계주, 헌납 최일, 정언 이세장, 장령 성후설 등이 재이 때문에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이 수순(數旬) 사이에 잇따라 발생하자 성상께서 크게 경구하여 특별히 진연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군신(群臣)들이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에 응하는 것은 실답게 한 연후에야 하늘의 마음에 답할 수 있고 백성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듣건대 오늘 또 경연을 열겠다는 명이 내려졌다고 하니, 이는 실로 근래에 없던 거조이어서 하정(下情)의 흡족함이 더욱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이런 마음을 지니고 거두어 치우는 일이 없게 된다면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오늘날 재이가 이러한데도 온천에 행행하는 거조를 중지한다는 명이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전하께서 자전의 병환을 위하여 이 거조를 하려 하시므로 군신들이 감히 극력 간쟁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런 때를 당하여 궁궐을 멀리 떠나 야차(野次)에 머무시는 것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어찌 이런 우려가 없겠는가. 단지 자전의 환후가 습열(濕熱)에 연유된 것이어서 한여름 장마가 들면 매양 고통이 더해지는 게 걱정이니,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여 습열을 내리게 하면 긴 여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이런 때 이런 행행을 내가 어찌 좋아서 하는 것이겠는가. 나도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정·심재·세당·이성·두인 등이 서로 잇따라 진계하니, 상이 또한 누누이 개유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복양이 아뢰기를,
"제왕이 지치(至治)를 이루는 방도는 학문만한 것이 없습니다. 불행히도 성후(聖候)가 여러 해 동안 미령하신 탓으로 오래도록 법연(法筵)을 정지했으므로 신민들의 걱정이 항상 여기에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경연을 연다고 명하시니, 군하의 기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항상 이런 뜻을 보존하여 철폐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어찌 하늘에 실답게 응하는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또 의당 재야(在野)의 유신들을 불러서 보도의 책임을 맡겨야 하는데 더구나 재이를 당한 때에는 더욱 불러 수용하여 조정에 포열(布列)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부르라고 명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근래 조정의 체면이 엄하지 않아서 한번 서로 규계(規戒)하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마구 떠들면서 쟁변하고 있습니다. 대사헌 이상진(李尙眞)이 지난 가을 상가(賞加)의 일 때문에 소장을 진달했는데 그 내용에 구별하여 차등을 두라는 말이 물의에 비난을 받았으며, 이번에 상진이 소장에서, 옥당 사람들이 갑자기 한 마디 창도하여 홀로 멋대로 처치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실로 조정의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고 또 뒤 폐단을 열게 됩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상진의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재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에게는 본디 사재(私財)가 없었습니다. 중고(中古) 이후에 비로소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는 정대(正大)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위에서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신다면 민심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면 하늘도 반드시 따라주는 것이니, 민심이 기뻐하게 된다면 천재(天災)는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세당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재이를 만난 처음에는 상당히 경동하는 뜻이 있었는데 시일이 점점 오래되자 문득 다시 평시와 같아졌습니다. 국세가 날로 위축되고 있는 것이 실은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하고, 두인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두 자전께서 궁인(宮人)을 초선(抄選)하는 거조가 있어 여항(閭巷)이 소란스럽다고 합니다. 옛날의 제왕은 천재와 흉년을 만나게 되면 이미 들여온 궁녀도 오히려 내보냈는데 더구나 지금 초선하는 것은 어찌 미안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옳다."
하였다. 만화가 아뢰기를,
"만일 끝내 부득이해서 온천에 행행하게 된다면 모든 일에 있어 십분 폐단을 줄여야 합니다. 이런 뜻으로 도신(道臣)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세장이 아뢰기를,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다는 말은 옥당이 이미 진달했습니다만 신도 들은 것이 있습니다. 대내(大內)에서 자주 왕자와 왕손을 불러 무시로 출입하기 때문에 외인들은 간혹 전하께서 매양 함께 후원(後苑)에서 노닐면서 앞에다 잡기(雜技)를 진설해 놓고 관람하기까지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다면 이는 매우 전하께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였다. 후설이 아뢰기를,
"원옥(冤獄)을 소결(疏決)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급선무입니다. 외방의 멀리 있는 백성이 오래도록 감옥에 적체되어 억울함이 가슴에 맺힌 채 고할 데가 없는 형편이니, 반드시 위로 하늘의 화기를 간범하게 될 것입니다. 의당 제도(諸道)에 분부하여 조속히 소결하게 하소서."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은 원옥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문서를 사출(査出)하여 삼사와 조당(朝堂)에서 회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 2인을 더 차출하여 속히 문서를 조사한 다음 탑전에서 소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재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수성하고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공가(公家)의 무역(貿易)과 대소(大小) 영건(營建)에 대한 폐단과 조정과 팔방에서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걱정에 대해 특히 간곡하게 아뢰었으며, 또 아뢰기를,
"의당 재야(在野)의 유신(儒臣)들을 불러서 전적으로 계옥(啓沃)에 대한 책임을 맡겨 근본을 단정하게 하고 정치를 시행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1월 20일 신축

대사간 정만화가 아뢰기를,
"어제 등대할 때 온천의 행행을 중지할 것을 극력 청하였습니다만 상께서 간측(懇惻)하게 하교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기에 신이 삼가 안타깝고 우려스러워 감히 십분 간략하게 할 뜻으로 앙달했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굳게 간쟁하지 못하고 지레 이런 말을 한 것을 그르다고 하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부제학 조복양, 수찬 오두인이 《심경(心經)》을 진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김수항이 아뢰기를,
"품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특명으로 경연을 열었으므로 신료들이 기뻐서 용동하며 흡족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로부터 매일 법연에 나아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항상 유신을 접견하여 성학(聖學)을 유념하신다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재이를 없앨 수 있음은 물론 나라도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고, 승지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앞으로는 잇따라 시사(視事)할 것을 품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정언 이세장(李世長)이 만화에 대해 처치하여 아뢰기를,
"경솔히 진달한 것을 물의가 그르게 여기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을 파한 뒤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접견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진연(進宴)하는 일을 특명으로 정지시킨 것은 매우 성대한 거조입니다. 삼가 비망기를 살펴보건대 날이 가는 것을 아낀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상의 효성이 이러한데도 오히려 진연을 정지하였는데 어제 삼사가 합사로 온천의 행행을 정지하라고 청한 것에 대해서는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환후가 본디 습열(濕熱)에 연유된 것이므로 뜨거운 온천 물로 목욕하면 효험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기필코 여름이 오기 전에 모시고 가려는 것이다. 어제 삼사가 정지할 것을 청하기도 하고 내년으로 물려서 정할 것을 청하기도 했는데 내년을 기다리도록 편안히 보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기필코 급급히 서두르겠는가."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결청(疏決廳)의 당상 4인을 더 차출해서 조속히 사출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기내가 더욱 극심하니, 거두어들일 대동미(大同米)를 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태화와 허적도 감해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춘등(春等)은 6두(斗)에서 1두씩을 감하게 하라."
하였다. 대신과 제재들의 진달에 따라 원자(元子)의 책례(冊禮)를 5월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임인

주강(晝講)에 부제학 조복양, 수찬 오두인이 진강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궐문 밖에서 차자를 올려 온천의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선조(先朝)의 대신으로는 경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어찌 자주 만나보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경이 늙고 병들었는데야 어찌 하겠는가. 지금 듣건대 궐문 밖에 와 있다고 하기에 서로 만나보기 위해 부른 것이다. 올린 차자에 대해서는 내가 비답을 내리려 했으나 문자는 면대해서 하유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어 자전의 병환이 온천에 가서 목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개유했는데 사의(辭意)가 매우 간절하여 하정(下情)을 감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경석이 그래도 굳이 가을로 미루어 행행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또 부득이한 까닭을 개유하자, 경석이 이에 물러나갔다.

 

1월 22일 계묘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집의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재이가 비상하여 사람마다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대소 군정이 온천의 행행을 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지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지난해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민간에 식량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는 자도 있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기전(圻甸)과 호읍(湖邑)이 더욱 극심하여 참담하고 급박하기 그지없다고 하니, 해청과 제도로 하여금 재분(災分)을 상세히 헤아려 조속히 진정(賑政)을 시작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 산군(山郡)의 대동미는 이미 정파하고 일체 구례를 따르게 했는데 구례에는 공물(貢物)의 유무(有無)가 고르지 않고 관수(官需)의 다과(多寡) 또한 다릅니다. 산군의 전결(田結)을 통틀어 합산하여 공물을 고르게 정하게 하고 각 고을의 관수도 의당 참작해서 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해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상의 안질(眼疾)이 다시 재발하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고 이어 침을 맞았다.

 

경상 감사 김휘(金徽)가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일전에 여러 가지 신역(身役) 가운데 징수할 데가 없는 것들을 책자(冊子)로 만들어 올려보낼 적에 대략 소견을 진달하였는데, 전하는 말을 들으니 대신이 신을 어리석다고 지척하면서 비국에서 멋대로 떠들었는가 하면 탑전에서도 진달했다고 합니다. ‘우(愚)’라는 한 글자는 신의 본성으로서 형세를 헤아려 시류(時流)에 따라 부앙하는 것이 이미 남에게 미치지 못했으니 신의 어리석음이 심하다는 것을 신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어찌 대신의 말을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니 이는 신이 감수하는 것입니다만 대신이 위세를 믿고 조신(朝臣)을 능욕할 경우 조신 또한 반드시 우기(愚氣)에 사역되어 대신을 침모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김휘가 자기의 일로 대신을 침모했으니 사체에 손상이 됩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휘가 사기(辭氣)를 성대히 하여 억양과 침모를 가하였다. 대신은 체면이 자별한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징계하고 체면을 보존시키게 하라."
하였다.

 

황해 감사 강유후(姜裕後)가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후는 정사(政事)를 강명(剛明)하게 하고 몸가짐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세상에서 양리(良吏)로 일컬었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하고 마음이 좁아 은혜를 베푼 것이 적고 또 여색을 탐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부족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96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유후는 정사(政事)를 강명(剛明)하게 하고 몸가짐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세상에서 양리(良吏)로 일컬었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하고 마음이 좁아 은혜를 베푼 것이 적고 또 여색을 탐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부족하게 여겼다.

 

1월 23일 갑진

민점(閔點)을 경상 감사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이민서(李敏叙)를 응교로, 정태화(鄭太和)를 책례 도감 도제조로, 윤강(尹絳)·이완(李浣)·정치화(鄭致和)를 제조로, 이민서(李敏叙)·이정(李程)·권세경(權世經)·이수항(李守恒)·김방걸(金邦杰)·권완(權俒)·윤이제(尹以濟)·유명기(兪命夔)를 낭청(郞廳)으로, 민희(閔熙)를 승지로 삼았다.

 

지난 가을 자전께서 미령할 때의 시약청 도제조 이하에게 논상(論賞)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에게는 안마(鞍馬)를 지급하고 제조인 고 판서 이일상(李一相)과 도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의관(醫官) 이동형(李東馨)·권유(權愉) 등에게도 가자하였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부제학 조복양과 우의정 허적을 인견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형옥(刑獄)의 문서(文書)는 조사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당상(堂上)이 매우 적기 때문인데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결(疏決)시킬 당상을 누구로 삼아야 하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당상 가운데 민점·정만화가 적격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하하게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이런 재이를 만난 때를 당하여서는 인재를 수습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혹 세초(歲抄)의 규례처럼 수서하기도 하고 혹 대신에게 하문하기도 하여 변통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하였다. 대답하여 아뢰기를,
"김우형(金宇亨) 같은 자는 쓸 만한데도 오랫동안 서용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이은상(李殷相)의 재주도 쓸 만한데 천신(薦新)한 일에 좌죄되어 죄를 받았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1월 24일 을사

사간 정계주 등이 온천의 행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입격자(入格者)인 권국형(權國衡)·김명주(金命胄)·김한걸(金漢傑)·김서(金瑞)가 입적(入籍)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모두 발방(拔榜)하고 해조로 하여금 죄를 매기게 하였다.

 

원자(元子)가 보양관 박장원(朴長遠)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1월 25일 병오

지평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김휘(金徽)가 자신의 일로 대신을 타매했는데 세변(世變)이 여기에 이르러 체통도 따라서 무너졌으므로 보고 들은 사람은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파직 추고하게 했습니다만 그가 범한 것은 해당되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뜻으로 간통(簡通)을 발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끝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이민적(李敏迪), 장령 성후설(成後卨), 지평 소두산(蘇斗山)이 아뢰기를,
"신들은 김휘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잡아다 추문한다는 것은 너무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한(西漢)에서 가장 대신의 예모(禮貌)를 높였었는데 적방진(翟方進)이, 연훈(涓勳)이 대신에게 비난과 모욕을 가했다는 것으로 탄핵하였으나 관직에서 파면되었을 뿐이었으며, 수년전 번신(藩臣)이 또한 대신(大臣)에게 비난과 모욕을 가한 자가 있었는데 체직시키는 데에서 끝났습니다. 신들의 소견이 이와 같아서 구차스럽게 함께 할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의정 정태화가 김휘에게 공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장계를 올리기를,
"부안현(扶安縣)의 패선미(敗船米) 수백 석(石)을 탕감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6일 정미

부응교 이정(李程) 등이 처치하기를,
"이민적 등은 옳으니 출사하게 하고 최관은 그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에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14인이었다.

 

금산(錦山)의 민가에서 소가 몸통은 하나에 머리가 둘인 송아지를 낳았다.

 

전라 감사 민유중이 장계를 올리기를,
"도내(道內)의 민전(民田)과 양안(量案)에 주인이 없는 것과 양안에 기재된 이외에 가경(加耕)한 곳이 모두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받은 전지로 빼앗겨 버렸습니다. 대저 송사(訟事)를 청리하는 방법은 전토(田土)를 다투는 것일 경우 하나는 일찍이 입안(立案)을 받았고 하나는 그 자신 스스로 개간(開墾)했다면 입안받은 자를 척퇴(斥退)시키고 개간한 자에게 결급(決給)하는 것이 바로 법례인 것입니다. 만일 궁가에 대해 개간한 것의 오램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주인이 없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아울러 빼앗아 점유하게 한다면 백성들의 원통함이 딱할 뿐만이 아니라 국체(國體)에 있어서도 부당할 것 같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호조가 회계하기를,
"절수받기 전에 경작하고 있던 것은 문권(文券)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울러 환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안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권이 있으면 내어 주고 문권이 없으면 내어 줄 수 없다. 일체 문권(文券)의 유무에 따라 결정하라."
하였다.

 

1월 28일 기유

이유(李秞)를 집의로, 맹주서(孟胄瑞)를 장령으로, 유헌(兪櫶)·어진익(魚震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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