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1권, 현종 6년 1665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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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계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상참을 받았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앞으로 나아와 아뢰기를,
"근래 예방(禮防)이 날로 무너져 상제(喪制)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창평(昌平)에 사는 전 현감 고두흥(高斗興)은 자기 어미의 상여가 발인(發靷)할 적에 병을 핑계대고 집에 있으면서 따라가지 않았는데 손님을 접대하는 언동(言動)에 병든 정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남평(南平)의 사인(士人) 홍종발(洪鍾發)은 자기 아내의 병을 간호하느라 부모의 산소를 천장(遷葬)할 적에 가지 않았으므로 본도의 물정이 놀라고 분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불효한 죄를 다스려 풍속을 바루지 않을 수 없으니, 본도로 하여금 사문(査聞)하게 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부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유가 아뢰기를,
"이번 정후계(鄭後啓)에게 시상(施賞)할 적에 특별히 자제에게 관직을 제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대저 보국(輔國)의 품계도 참람스러워 감히 경솔하게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도리어 대신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는 것이 또한 참람스럽지 않습니까. 이들에게 작은 공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후한 상을 내려 그 공에 보답하는 데 불과할 뿐인데 어찌 외람되이 잡류(雜流)들에게 벼슬을 주어 한결같이 조정의 명기(名器)를 문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아뢰니 이에 따랐다. 도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어제 소대를 파한 뒤에 송준길이 신들에게 말하기를 ‘위에서 지성으로 면려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아직껏 지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세가 결코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배사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갈 마음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준길이 당초 올라올 적에는 오로지 경연의 진강(進講)을 위해서였는데 올라온 뒤에는 이미 경연을 열지 않았고 소대도 또한 드물게 하기 때문에 준길이 스스로 머물러 있어도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 불안스런 일이 많기 때문에 떠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주 사대(賜對)하고 날마다 연방(延訪)한다면 만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불안해 한단 말인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근래 외간에 잡다한 말이 많습니다. 그의 소장에서 이른바 중외의 비방이 사방에서 이르고 있다는 것은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경상도의 경시관(京試官) 오시수(吳始壽)가 책제(策題)를 내어 선비들을 시험보일 적에 인재(人才)에 대해 물으면서 임하(林下)에서 경술(經術)을 연마한 인사를 조정에서 기용했었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말을 하여 드러내어 조롱하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이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쳤다.

 

10월 2일 갑인

약방이 문안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제 비바람이 불면서 천둥 번개가 쳤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뼛골이 함께 놀라게 하였다. 아, 천지(天地)와 삼강(三綱)의 변이 잇따라 거듭 발생하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항상 가슴에 절실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 이런 변이(變異)를 만나니 너무도 송구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삼사가 천둥친 변괴 때문에 청대하였으나 상이 마침 감기를 앓아 두통이 있었던 탓으로 인접하지 못하고 하교하기를,
"겨울에 천둥친 변이 발생하니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청대하는 거조가 있었으나 병 때문에 접견할 수가 없으니 소회가 있으면 즉시 써서 아뢰고, 면대하여 진달하려거든 1, 2일쯤 기다리라."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갑자기 천둥치는 변을 당하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대하여 우려(愚慮)를 극진히 진달함으로써 성상께서 수성하시는 데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되게 하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교를 받으니 걱정스런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소 일이 많아서 창졸간에 모두 상세히 써서 아뢸 수가 없으니, 의당 성교에 따라 성후가 평복(平復)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우선 급히 진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이 돌아갈 계획을 이미 결정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근일 떠도는 이야기에 불안스러운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만 근거없는 뜬소문은 본래 입에 올릴 것이 못 됩니다. 성상께서 만일 지난번 불러올 때의 하교를 잘 실천하여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학문에 힘쓰시면서 전적으로 보도(輔導)를 책임지우는 동시에 이에 의거 분명한 지휘를 내리시고 지성으로 머물도록 하유하신다면 어찌 마음을 고쳐 먹기를 바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마음의 걱정스러움은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는 경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정원이 지난밤 겨울에 천둥친 변괴 때문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혜성(彗星)의 변이 발생한 처음에는 척연히 경동하시어 조정에서 걱정하시는 것이 사색(辭色)에 나타나고 도와주기를 요구하는 뜻이 신서(臣庶)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마음이 계속되지 못하고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져 일이 없는 때처럼 으레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령(政令)을 미루어 보아도 한결같이 구투(舊套)를 따르는 것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진기되지 못하는 경상(景象)이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지고 위태로운 형세가 물이 더욱 빨리 흐르는 것과 같아서 온갖 일이 방만하고 전도되어 뭇폐단이 마구 생겨나고 있는 탓으로 백성의 걱정과 군대의 원망이 오늘날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러니 인애하는 하늘이 어찌 다시 재이를 내려 크게 경계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역(周易)》 진괘(震卦) 전(傳)에 ‘군자는 거듭 천둥이 쳐 위압적인 진동이 일어나는 상(象)을 살펴 공구 수성한다.’고 했으니, 전하께서는 삼가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시고 진동하는 상(象)을 살피시어 마음을 다져먹고 진작하시어 통렬한 성괄(省括)을 가함으로써 구습을 고치소서. 그리하여 선단(善端)을 개발하고 자주 강연을 열어 더욱 언로(言路)를 넓히시며 신공(臣工)을 책려하여 상하가 서로 수성하게 하소서. 청명(淸明)한 마음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령스러워지는 것이니 시종 한결같은 자세를 지녀 전일처럼 간단(間斷)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릴 수 있고 나라를 아름답게 안정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종사와 신민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놀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깊은 연못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이제 계사를 살펴보건대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마음에 새겨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3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이 차자를 올려 자신들을 책면시킴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천재 지이(天災地異)의 참담함과 삼강 오상(三綱五常)의 변괴가 잇따라 나타나고 있었는데 더구나 이번에 비바람이 불면서 천둥 번개가 친 변이 다시 순음월(純陰月)인 10월에 발생하였으니, 걱정스러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마치 깊은 연못에 떨어진 것 같은 심정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고요히 그 이유를 생각하여 보건대 오로지 내가 과매(寡昧)한 탓이니 다시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경들은 더욱 힘써 덕을 연마하여 신하들을 책려하는 한편 힘껏 화합하여 과인의 부족한 점을 보좌하고 위태로운 국가를 부지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10월 4일 병진

정만화(鄭萬和)를 좌승지로, 이시매(李時楳)를 좌윤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우윤으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울에 천둥친 변은 하늘이 경고한 것이라고 경계하였는데,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따라가서 중로(中路)에서 들어와 서로 만나보자는 뜻으로 효유하게 하였다. 가주서 신정(申晸)이 따라가 과천(果川)에서 준길을 만나 성비를 전하고 효유하니 준길이 이미 한강(漢江)을 건넜으므로 참으로 감히 다시 들어가서 거듭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영의정 정태화가 열 여덟 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서민(西民) 가운데 북지(北地)로 옮겨가 살고 있는 사람들을 우선 쇄환하지 말게 하였다. 이에 앞서 관서(關西)의 백성으로 북쪽 땅에 들어가 살고 북쪽 땅 백성으로 관서에 옮겨 와서 살고 있는 자들을 서로 본토(本土)로 쇄환시키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조 참판 유혁연(柳赫然)이 소대(召對) 때에 아뢰기를,
"북쪽 땅은 춥고 고통스러워 사람들이 모두들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민호(民戶)가 점점 공허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서민 가운데 함경북도와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변보(邊堡)에 이접(移接)하고 있는 자들을 당분간 쇄환하지 말아서 북쪽 땅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관서와 북지의 백성들 가운데 서로 유리되어 있는 자들을 반드시 원적(元籍)으로 쇄환시키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어서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근래 함경북도의 육진(六鎭)과 함경남도의 삼수·갑산에는 거처하는 백성은 적고 유리된 사람은 매우 많으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혁연의 말에 따라 10년을 기한으로 쇄환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정사

헌부가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점점 투박해져 조정이 안정되지 않고 국체(國體)가 존엄해지지 않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과거 선조(先朝) 때부터 제우(際遇)의 융숭함이 천고에 뛰어났었으며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처음과 다름없이 은총을 베푼 것이 더욱 깊었습니다. 온천에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禮)를 갖추어 초치했는데 성학(聖學)을 계도(啓導)하고 원자를 보도(輔導)함에 있어 그를 의지하는 중함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영남(嶺南)의 고시관(考試官)이 시험을 빙자하여 책제(策題)를 내어 시사(試士)할 적에 드러내어 공척함으로써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마음으로 하여금 끝내 구차스럽게 머물지 못하게 하였으니, 조야(朝野)의 실망은 말할 수 없는 정도이고, 성심의 서운함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힘써 성의를 극진히 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는 것은 진실로 성명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시관(試官)의 처심(處心)·용의(用意)가 부박스럽고 위험스러워 참으로 통분하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경상좌도의 별시(別試) 시관(試官)은 아울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약방(藥房)이 춘당대(春塘臺)에서의 관무재(觀武才)를 물려서 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훈련원에서 설행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병 때문에 휴가중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자신을 책면시킴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좌참찬이 떠난 것은 참으로 뜻밖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매우 서운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번에 떠나는 것은 정지할 수 없고 멀어진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추운 계절을 당하여 노쇠하고 병든 사람이 서리를 밟고 찬바람을 쏘였으니, 질병이 발생할까 참으로 우려스럽다. 어의(御醫) 최성임(崔聖任)을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중로에 뒤따라 가게 하고 또 양도의 감사에게 말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 이기상(李箕相) 등이 소장을 올려 송준길이 떠나가는 것을 중지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한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서부터 좌우의 손을 잃은 것만 같은 심정이다. 이제 그대들의 소장을 보니 나의 성례(誠禮)가 부족한 것이 부끄럽다."
하였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치계하기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오례의(五禮儀)》·《대명률(大明律)》·《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책과 《사서삼경(四書三經)》, 《주자대전(朱子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통감(通鑑)》, 선유(先儒)의 문집(文集)을 다수 인출하여 보내주시면 이를 본도에 반포하여 본도의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국조(國朝)의 고실(故實)과 전례(典禮)를 익혀 알게 하는 것은 물론 경전(經傳)을 읽어 본받을 줄 알게 함으로써 흥기시킬 발판을 마련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장령 김익렴(金益廉)도 송준길이 떠난 데 대해 소장을 올리기를,
"유현(儒賢)으로서 물러가 있는 자가 나아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과 이미 나아온 사람마저도 물러간 것은 모두 전하의 성례(誠禮)가 부족한 소치입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효자인 영천(榮川)의 사인(士人) 정도창(鄭道昌)에게 정려하였다.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어전에서 진달하였고 송준길이 또 찬조한 소치이다.

 

열부 윤씨(尹氏)·이씨(李氏)·임씨(任氏)의 문(門)에 정표하였다.
윤씨는 승지 오정원(吳挺垣)의 양모(養母)인데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자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다음해 스스로 유서(遺書)를 써서 질자(姪子)인 정원(挺垣)을 양자(養子)로 정할 것을 청하여 구고(舅姑)에게 고하고 나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 이씨는 장령 정식(鄭植)의 자부(子婦)인데 남편이 병을 앓자 성심을 다하여 구호하였으며 남편이 죽기에 이르러서는 즉시 자결하여 따랐다. 임씨는 학생(學生) 이준평(李浚平)의 아내인데 준평이 친구에게 살해당하자 임씨도 즉시 스스로 자결하여 따라 죽었다. 송준길이 상의 앞에서 아울러 정표하여 그 절행(節行)을 드러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예조에 명하여 여문(閭門)에 정표하게 하였다.

 

10월 6일 무오

명관(命官)을 보내어 모화관에서 관무재를 설행하게 하였다. 이때 상이 병이 있어 친림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온천에서 재회(再會)함으로부터 4, 5년간 막혀있던 마음이 일체 풀렸으니, 경이 나의 회포를 묵묵히 양지(諒知)했을 줄 내가 진실로 알고 있다. 경이 병이 나서 성환(成歡)에 머물러 있었는데 진실로 지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장마 더위를 무릅쓰고 서울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경이 서울로 들어온 뒤부터 사고(事故)와 질병(疾病)이 불행하게도 잇따르게 되어 경과 자주 접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또 보양하는 임무를 경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찌 깊고도 중하지 않겠는가마는 추운 날씨에 출입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했었는데 오늘날 떠나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상망(喪亡)되어가고 있으니 근거없는 망령된 말을 개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홀연히 감기를 만나 경과 서로 만나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갑자기 경의 유소(留疏)를 보게 되었다. 나의 생각에는 경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어서 오히려 중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곧이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강 나루를 건넜다고 하니, 이 마음의 놀라움이 오래되어도 안정되지 않는다. 이는 실로 국가의 불행인 것이어서 그저 나의 성의가 미진함을 한할 뿐이다.
어제 사관(史官)이 돌아왔으나 내가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므로 다시 사관을 보내어 거듭 나의 뜻을 고하게 한다. 경이 영영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전일 다시 만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을 경은 잊지 말라. 아, 국세가 위태로운데 하늘의 노여움은 더욱 중첩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어떤 때인가. 재야(在野)의 인사라 하더라도 모두 예(禮)를 갖추어 초치하려 하는데 더구나 이미 초치한 경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날씨는 춥고 눈바람이 몰아치는데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할 것이니, 이번 길에 잘 보존하여 가서 겨울 석 달 동안 조용히 조섭한 다음 조속히 영영 떠나려는 마음을 돌려 봄에 만나자는 기약을 어기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준길에게 전유하게 했는데 가주서 조사석(趙師錫)이 따라가 광주(廣州)의 사근천(沙斤川)에서 만나 유시(諭示)를 전하고 돌아왔다.

 

10월 7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박세성(朴世城)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열 아홉 번째 정사(呈辭)하기에 이르니, 상이 답하기를,
"천재(天災)가 매우 극심하니 경은 한가하게 지내고자 해서는 안 되고, 국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경은 상관없는 일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아, 경은 두 조정을 두루 섬겼고 은우(恩遇)가 가장 융숭했으니 보답하려는 정성스러움이 없을 수 있는가. 내가 의지하는 것이 깊고도 중하니 결단코 윤허할 수가 없다. 의당 정사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도(道)를 논하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감기가 든 것이 이제 5, 6일이 지났는데도 출입할 기약을 할 수 없는 정도이다. 이렇게 재변을 만난 때를 당하여 삼사가 여러 날 청대했는데도 아직도 가부를 말할 수 없으니 참으로 미안하다. 삼사로 하여금 각기 소회를 써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겨울에 천둥친 변 때문에 소장을 올리기를,
"위에서 두려워하여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이 놀라고 면려하는 것이 간절하고도 지극하니, 《주역(周易)》 진괘(震卦) 단사(彖辭)에 이른바 천둥의 진동이 오면 무서움이 이는 것은 두렵게 하여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미더운 말입니다. 장차 소스라치듯이 분발하고 진동하듯이 나아가고 두렵게 여겨 수성하고 주관을 지니어 큰 것을 보존하기를 정전(程傳)의 말처럼 하시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서방(西方)에 폭풍과 폭우가 발생하고 큰 얼음 덩이의 우박이 내린 극심한 변이와, 기타 명충(螟虫)과 모충(蟊虫)의 피해 때문에 남아 있는 곡식이 없어지고 한재(旱災)에 손상되거나 수재(水災)에 손상되기도 하여 태풍이 분 뒤에는 이삭은 패었어도 여물지 않은 것은, 모두 백성들이 하늘로 여기는 곡식을 잃게 된 것이니 장차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무릇 천지의 온갖 큰 변이는 모두 군대와 백성들의 누적된 원망에 연유된 것입니다. 원망이 누적되면 여기(戾氣)가 응하게 되고 여기가 응하면 풍기(風氣)가 나빠집니다. 여역(癘疫)과 괴질(怪疾)이 중외(中外)에 잇따라 발생하여 도처에서 요절(夭折)하여 사망하는 것이 근년(近年)처럼 극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는 것은 신이 청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본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침학하여 각 고을에서 모곡(耗穀)을 걷는 숫자가 점점 증가되는 추세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밖에 제도의 모곡은 모두 탁지(度支)에서 관장하고 있는데 이는 송곳 끝만한 이끗[利]도 남기지 않고 거두어 들인다는 폐해에 가까운 것이 아닙니까. 상평의 모곡은 파기하고 거두어 들이지 말 것이며 각도의 모곡은 각 고을의 수령에게 맡겨 쇠잔한 고을을 돕게 하고 민역(民役)에 보충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구례를 회복시키고 왕정(王政)의 대체를 밝히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에는 송준길이 갑자기 떠난 것을 애석히 여기는 내용이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국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하늘의 노여움까지 덩달아 발생하고 있으니, 나의 마음에 걱정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경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늙어갈수록 깊고도 독실하니 진실로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차자에서 계회(戒誨)한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유념할 것이고 또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겠다."
하였다.

 

집의 이만기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근년 이래 성궁(聖躬)의 미령하심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날마다 연석을 열고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고는 싶어도 억지로 힘쓸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번 황천(皇天)이 굽어 살피시고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주신 덕분에 온천에서 목욕한 효험이 발생하여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경사가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서 춤을 추었으며 성명께서 분발하여 진작시키는 거조가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난가(鸞駕)가 돌아온 뒤에 여러 달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으나 한 가지 일도 군정(群情)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강연에 드물게 나아가는 것도 전과 같았고 재결(裁決)이 밀려 쌓이는 것도 전과 같아서 지체되고 답답한 것이 한결같이 전일의 구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하(群下)가 기대하는 소망이 공허한 것으로 귀결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오늘날 내폐(內嬖)가 마음을 좀먹게 하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들이 특별히 우려하는 점이 있는 것은 또한 어찌 걱정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여항(閭巷)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듣건대 후원(後苑)의 별당(別堂)에 아름다운 곳이 많아서 만기(萬機)를 보살핀 여가에 때때로 궁첩(宮妾)·환시(宦寺)들과 자주 가서 노니는 거조가 있다고 합니다. 내전(內殿)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전하는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고 또 전하의 성명하심으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한번이라도 혹 그런 마음을 지니셨다면 완물(玩物)로 인한 상심(喪心)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본원(本原)인 심지(心地)에 이미 굳건히 확립하고 정쇄(整刷)시키는 공부가 없다면 백료(百僚)들이 해체되고 서사(庶事)가 퇴폐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고 하늘이 노하는 것도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초야에 묻혀 있는 현인의 경우 그 진퇴를 의(義)에 입각하여 하는 법인데 근일 송준길이 조정으로 나아와서 몇 달 동안 저사(邸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연석에 입시한 것은 대여섯 번에 불과했으니 상께서 학업을 연마하는 날은 적고 그렇지 않은 날이 많은 걱정에 대해 어떤 효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 어진 이를 높이고 도(道)를 즐거워하는 마음에 실상이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올라온 사람도 오히려 머물게 할 수 없다면 재야의 어진이들이 서둘러 올라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의당 통렬히 스스로 극책(剋責)하여 더욱 힘써야 될 점인 것입니다."
하고, 또 두 자전에게 올리는 진연을 정지함으로써 하늘에 응하는 실상을 극진히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호남 산군(山郡)에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과 여러 궁가에서 절수(折受)받은 것과 각 아문의 둔전(屯田)이 여러 대 동안 백성이 전해 오던 세업을 빼앗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면서 이를 일체 변통시켜 백성들의 원망을 풀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원의 심지에 유의하여 경외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성실하게 하기를 힘써 현사(賢士)들을 초청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곤궁한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일마다 면려하고 생각마다 제철(提掇)하여 항상 번쩍이는 번갯불과 천둥치는 소리를 귀와 눈에 접한 것처럼 한다면 오늘날의 재변이 이에 우리 전하를 훌륭하게 완성시키는 계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전에 천둥 번개가 치는 변이 순음월(純陰月)에 발생했으므로 나의 마음이 놀라고 당황하여 마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았는데 불행히도 병을 앓게 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아직 사대(賜對)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병을 앓는 가운데도 걱정스런 마음에 더욱 다시 불안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차자의 내용은 은근하고도 간절하여 과궁(寡躬)을 경계시키고 시정(時政)을 논한 것이 상세하기 그지없었으니, 내가 마땅히 체념할 것은 물론 묘당과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8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을 체직시켰다. 이때 제신들의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의논이 양사에서 함께 발론되었는데, 상진이 소장을 올리기를,
"제신들의 상가에 대해서는 의당 구별을 두어야 합니다."
하여, 그 의견이 간원의 계사와 같지 않았는데도 사간 이유, 헌납 윤변, 정언 홍만형이 장관(長官)과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지 않았다.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기자 이유 등이 모두 인혐했는데 상진이 동료들의 인혐은 자신의 상소에 연유된 것이라는 이유로 또한 인피하였다. 응교 이민서(李敏叙) 등이 처치하기를,
"공의가 바야흐로 확장되고 있는데 억지로 구별하는 것은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 없으니, 상진은 체직시키고 이유 등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淸)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태황태후(太皇太后)·황태후(皇太后)를 존숭한 것과 후(后)를 책봉한 일로 와서 고하였다.

 

사간 이유 등이 차자를 올려, 공사(公事)가 지체되고 상전(賞典)이 참람했다는 것을 아뢰었고 또 호남의 산군에서 작포(作布)하는 것과 공천(公賤)을 추쇄한 것이 허위라는 등의 폐단에 대해 누누이 아뢰었으며, 또 아뢰기를,
"훈국의 군병은 놀기만을 일삼고 있고 늙고 잔약한 자들이 상당히 많으니 한결같이 어영군(御營軍)의 예(例)에 따라 번을 나누어 서로 교체하게 하소서."
하고, 또 온천의 행궁(行宮)을 수치(修治)하는 일은 외람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의 비답은 헌부에 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10월 10일 임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장선징(張善瀓)을 병조 참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사인(舍人)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부제학 조복양 등이 차자를 올려 학문을 힘쓰고 덕정을 힘써 닦을 것을 청하였으며 또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고 유현(儒賢)을 나오게 하고 민역(民役)을 견감시키고 공안(貢案)을 고치고 양사의 계사를 따르고 이무(李堥)의 죄를 풀어주고 옥송(獄訟)을 잘 다스리고 교화를 밝히고 진연을 정지하는 등의 일에 대해 누누이 진달하였으며, 끝에 아뢰기를,
"진실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진작하여 통렬히 스스로 극책(剋責)하시고 기왕의 잘못을 깊이 징계하여 전일과 같은 행동을 하지 마소서. 그리고 천도(天道)를 높고도 멀다고 여겨 경외하는 마음을 늦추지 말고, 민사(民事)를 완만히 해도 된다고 여겨 보호하고 구휼하는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유신이 이미 떠났다고 하여 학문에 힘쓰는 정성을 태만히 하지 말고, 국세가 돌이키기 어렵다고 여겨 큰일을 하려는 뜻을 포기하지 마소서. 이것으로 신공(臣工)들을 책려하고 이것으로 사물에 수응(酬應)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덕이 연마되어 민심이 기뻐하고 천의(天意)를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의 답이 양사에 내린 것과 같았다.

 

10월 13일 을축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삼았다.

 

우의정 허적이 병 때문에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고 조리하라고 답하고 내의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10월 14일 병인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관무재(觀武才)의 입격자(入格者)를 모두 가자하였고 그 나머지 합격된 사람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10월 18일 경오

장령 민여로(閔汝老)가 재이(災異) 때문에 상소하여 성궁(聖躬)의 궐실(闕失), 시정(時政)의 하자, 관사(官司)에서 심각하고 급박하게 하는 폐해, 백성들이 굶주리는 걱정, 군사들이 부역에 응하는 고통, 수령이 적격자가 아닌 데서 생기는 폐단을 지적하여 진달하고 나서 호남 대동미(大同米)의 두수(斗數)를 감하여 부역(賦役)을 고르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그 소장을 비국에 내렸으나 시행된 것이 없었다.

 

10월 19일 신미

예조 좌랑을 보내어 여조(麗朝)의 왕릉(王陵)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여조의 여러 왕릉들이 투장(偸葬)당하고 집터가 되고 전지(田地)로 경작되는 걱정이 많이 있었으므로 3년에 한 차례씩 순심(巡審)하기로 정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관원을 보내어 적간하기를 청한 것이다.

 

이에 앞서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할 때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북도에 있는 각릉의 봉심을 근년에 폐각하였으므로 일이 매우 미안스럽게 되었으니, 금년부터는 항식(恒式)을 정하소서."
하니, 상이 5년에 한 번씩 두루 봉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에는 추운 계절이 이미 이르렀으니 내년부터 시작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예문(禮文)에 삭망 전에 별제(別祭)를 만나게 될 경우에는 별제만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는 11월 15일은 중종 공희 대왕(中宗恭僖大王)의 기신제(忌辰祭)인데 동지(冬至)와 서로 겹쳤습니다. 기제와 절제는 그 경중에 차이가 있는 것이니 기신제만 행하게 하소서."

 

진연(進宴)을 내년 봄으로 물리고 진연청을 우선 파하게 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온 기녀(妓女)들을 파견(罷遣)하게 하였다. 재이 때문에 삼사의 말을 따른 것이다.

 

10월 20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홍만형(洪萬衡)이 아뢰기를,
"지난번 본원의 차자에 대략 훈국의 대장이 오래도록 중임(重任)을 비우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언급했었습니다. 늦게야 듣건대 대신이, 말을 만드는 사이에 글자를 놓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공좌(公坐)에서 발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신의 말이 이미 이러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만형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김익렴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오정일(吳挺一)은 일찍이 본직에 제배되었을 적에 옥송(獄訟)을 결단하는 재능이 부족했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도 또한 많았습니다. 때문에 이제 다시 임용됨에 이르러서는 물의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 본원의 회좌(會坐)에서 체직을 논하자고 발언했더니 장관이 곤란하게 여기면서 버티었습니다. 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는 않았으므로 신 또한 장관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즉시 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으니 또한 그대로 무릅쓰고 있음으로써 스스로 줏대 없이 나약하다는 데로 귀결됨을 달게 여기기는 곤란합니다."
하고, 인피한 다음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정재희(鄭載禧)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동료가 인피한 것을 살펴보건대 본원에서 올린 차자의 내용에 글자를 놓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이유를 삼았는데 신도 연명(聯名)했으니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인피한 다음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화성(火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강변에 있는 각 진보(鎭堡)의 토졸(土卒) 수효가 적으니, 본도에 정배된 죄인을 각 진보에 나누어 배정하게 하고 형조와 제도의 죄인도 반을 나누어 정배시킴으로써 변지(邊地)를 채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21일 계유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어제 본부의 회좌 때 동료가 형조 판서 오정일에 대해 논하려고 했습니다만 신의 의견은 정일이 일찍이 본직에 차임되어 거의 1년 가까이 있었고 오래도록 사송(詞訟)을 처리하는 자리에 있노라면 어찌 실정을 벗어난 비난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정경(正卿)을 논핵하는 것은 일반 관리들과는 자연히 구분이 있는 것이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반복하여 헤아리다가 끝내 구차스럽게 동조하지 않았는데 동료도 주장을 고수하지 않은 채 마치 전계(前啓) 때문에 먼저 일어나서 예궐(詣闕)하는 사람처럼 하였습니다. 이보(吏報)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인피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에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유를 삼았으니 신은 삼가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잘못된 의견을 돌리지 않고 고집함으로써 이런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켰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인피한 다음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오정일에게 사랑하는 기첩(妓妾)이 있었는데 전에 형조 판서에 제배되었을 적에 그 기첩이 뇌물을 받아들이고 재물을 요구했다는 비방이 있었기 때문에 익렴이 탄핵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어제 장령 김익렴의 피사를 살펴보건대 오로지 사의(私意)에 의거한 것으로 그 태도가 아름답지 못했으나, 그 내용에 장관이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헌장(憲長)이 인피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헌장의 피사를 살펴보건대 익렴의 말과 크게 상반되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아, 오늘날의 인심은 공심(公心)이 사심(私心)을 이겨내지 못하여 은혜와 원망에 있어 피차의 간격이 있고 비호하고 공척함에 있어 동이(同異)의 구별이 있는 탓으로 은연중 사의(私意)를 쓰고 몰래 간사한 일을 행하니, 이는 자못 정인(正人)의 태도가 아닌 것이어서 진실로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다. 익렴을 체차시키라."

 

정원이 아뢰기를,
"김익렴이 형관(刑官)을 탄핵하려 한 것은 들은 얘기에 따라 서로 규계(規戒)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몰래 간사한 일을 행한다는 등의 하교로 지척하였으니, 이는 성조에서 대관을 예(禮)로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의 피사는 의당 공의(公議)에 부쳐 처치가 어떠한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요, 곧바로 호오(好惡)를 보여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조처입니다. 신들은 근밀한 자리에 대죄하고 있으면서 성상의 지나친 거조를 목견하였기 때문에 삼가 옛사람이 복역(覆逆)한 의의에 부쳐 아룁니다. 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계사를 살펴보건대 극력 두둔하는 정상이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습속이 변하기 어려운 것이 이에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에서 양사를 처치하여 홍만형·정재희는 출사하게 하고 정지화는 체직시키라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은 한 때 규핵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므로 모든 자거(刺擧)047)  에 대해서는 그 시비(是非)와 종위(從違)를 일체 공의에 부치는 법이고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진실로 공심(公心)으로 듣고 순리로 응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 형적(形迹)을 의심하여 느닷없이 최절을 가한다면 언로가 막히고 대직(臺職)이 광폐(曠廢)될 것이니, 이는 성조의 복이 아닙니다.
형조 판서 오정일은 전에 본직에 차임되었을 적에 이미 물의가 있었으니, 대신(臺臣)이 논집하려 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장관이 범연한 말로 어렵게 여기면서 버틴 것은 끝내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 없는 처사이니, 그 시비는 실로 분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성명께서 이에 피차(彼此)와 동이(同異)로 의심하시어 아름답지 못하다느니 몰래 간사한 짓을 한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로 하교하시고 특별히 체직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께서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각의 기상이 꺾이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처치한 일은 따랐다.

 

10월 22일 갑술

정언 홍만형이 아뢰기를,
"지금 김익렴은 이미 말해야 할 지위에 있으므로 들은 대로 논핵한 것은 본디 직책상 당연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갑자기 의심하시고 너무 지나치게 공척하여 오로지 사의(私意)를 썼다고 단정하고 보호하고 공척함에 있어 이동(異同)이 있었다고 지목하면서 몰래 간사한 짓을 했다는 등등의 말을 가하였으니, 예(禮)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리에 부족한 흠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대관에 대한 처치는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맡기는 것이 본래 해오던 고사(故事)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처치가 어떠한가를 기다리지도 않고서 곧바로 먼저 특별히 체직시켰으니, 중도(中道)를 어긴 데로 귀결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지사 김좌명(金佐明), 부사 홍처후(洪處厚), 서장관 이경과(李慶果)가 청나라에 가서 동지(冬至)와 정조(正朝)의 하례를 하였다.

 

헌납 최일(崔逸)이 소장을 올려 변이(變異) 때문에 경계하는 말을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현사(賢士)를 구하는 것은 천위(天位)를 함께하여 천직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번 이유태가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올린 소장의 내용은 모두 시행해야 될 것들이었는데 반년을 머물러 있는 동안 마침내 하나도 시행한 것이 없어 결국은 그만두고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금년 송준길이 조정으로 나왔을 적에 접대한 예는 매우 융중(隆重)하였다고는 하지만 겸허한 자세로 마음을 기울여 그의 간곡한 진언을 들어주고 지성으로 자문(諮問)하여 주획(籌畵)을 구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저사(邸舍)에 머문 지 5개월만에 호연(浩然)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비록 현사(賢士)들을 뒤를 이어 잇따라 이르게 하더라도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도 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니 시골에서 학덕(學德)을 쌓은 현사들이 그 누가 허례를 위하여 달려오려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원대한 마음을 지니시어 참으로 제요(帝堯)가 큰 덕을 잘 밝혀 백성들의 덕도 고루 밝아진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자신의 덕을 연마하는 도리에 있어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새롭게 진작시키는 것도 오늘날처럼 고식적인 것이 없게 될 것이며, 문왕(文王)이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하고 주공(周公)이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출치(出治)의 근본에 대해 조금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은 물론 만기(萬機)에 수응(酬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당요(唐堯)가 흙으로 계단을 만들고 띠풀로 지붕을 덮은 것과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짓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궁실(宮室)을 웅장하게 짓는 일과 대사(臺榭)를 꾸며 다듬는 일에 대해 반드시 성념(聖念)이 미치지 않게 될 것이며, 하우(夏禹)가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상방(尙方)의 진기한 완호품과 팔로(八路)의 공헌(貢獻)을 참작하여 감손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문왕이 강공(康功)048)  과 전공(田功)049)  을 성취시킨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방도와 백성을 무양(撫養)하는 정치에 대해 조금도 완만히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왕자(王者)는 사사로이 하는 것이 없어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똑같게 여긴다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의당 내탕(內帑)의 물품을 해부(該部)로 귀속시키게 하고 내옥(內獄)의 죄수를 유사(有司)에게 맡길 것입니다. 인의(仁義)가 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이(利)를 말하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각 아문에서 재화(財貨)를 증식시키고 이(利)를 추구하는 일을 의당 즉시 금단시켜야 하고 각도의 둔전도 일체 아울러 혁파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따르며 간하는 말을 어기지 않고 잘 따르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대각에서 논한 것에 대해 의당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신이 아뢴 것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만 진실로 잘 행한다면 경성(警省)하는 방도에 있어 반드시 크게 유익할 것은 물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요점도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계(進戒)함에 있어 은근하고 간절한 뜻이 글 밖에 넘쳐 흐르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알 수 있다. 내가 마땅히 잊지 않고 유념하여 행하겠다."
하였다.

 

10월 23일 을해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판윤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삼공(三公)이 모두 겨울에 천둥친 것 때문에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삼사의 차자에 대해 오늘 품달하여 논의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차례로 나아와서 아뢰게 하였다. 태화가 먼저 옥당의 차자에 대해 주달하고 조목에 따라 부첨(付籤)하여 아뢰기를,
"이 한 조항은 송조(宋朝)의 고사에 의거 시정(時政)에 대해 외방에 있는 유신들에게 물어보아야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금년의 전곡(田穀)이 풍년이 들지 않았으니 재해를 입은 논밭의 전세를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한 조항에 이르러 태화가 청하기를,
"평안도와 경기의 콩세는 모두 반을 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환자(還上) 대두(大豆)는 대봉(代捧)하게 해 줄 것을 청한 일에 이르러 조복양이 아뢰기를,
"경기는 이미 대봉하게 했으니 제도도 일체로 대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의 관조(官糶)를 연한을 물리고 감하여 받아들이게 하라는 일에 이르러서 태화가 청하기를,
"처음에는 독봉(督捧)하다가 백성의 힘이 고갈된 뒤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계문하게 해서 감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지금 연한을 물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사세가 결단코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앞으로 더 살펴보고서 조처해도 된다."
하였다. 호서 산군(山郡)의 쌀을 더 작목(作木)하지 말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홍명하가 청하기를,
"지난해 물려서 받아들이기로 한 쌀을 전수(全數) 상납하게 하고 금년에 더 작목하는 것을 파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남 좌도(左道)의 대동미 작목에 대해 두수(斗數)를 늘려 줄 것을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감사에게 문의하여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각종 군포(軍布)를 감하고 각 아문에 저축되어 있는 것을 옮겨다 쓸 것을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이르기를,
"1년이라면 혹 행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또 금년만도 못하게 되면 장차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응당 상납해야 할 3필(疋)의 유(類)에 대해서도 1필을 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포보(砲保)가 응당 상납해야 할 3필 가운데 1필을 감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갖추어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의 대동미를 호서에 의거 10두(斗)로 하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결단코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각사 노비의 신공은 담양(潭陽)뿐만이 아니라 다른 고을도 똑같이 탕척시키자는 일에 이르러 정치화가 아뢰기를,
"만일 헛되이 기록한 것이라고 핑계대어 전수(全數) 탕척시킨다면 팔도의 공천(公賤)을 사세상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실로 변통시키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전라 감영의 아병(牙兵)에게 군포를 거두지 말고 항상 연습을 하게 하자는 일에 이르러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전라도 한 도(道)뿐만이 아니라 제도에 분부하여 일체 똑같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공안(貢案)을 고치자는 일에 이르러는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이미 선조(先朝) 때 강정(講定)한 것인데 아직까지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의(外議)는 모두들 말하기를 ‘공안을 고치면 민역(民役)이 반드시 가벼워질 것이라.’고 하니, 참작하여 개정하게 하소서."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이는 결단코 개정하기 곤란합니다."
하였다. 이무(李堥)의 일에 이르러서는 허적이 매우 간절하게 관대히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영상과 좌상도 아뢰니, 상이 감률하여 문외 출송시키라고 명하였다. 형옥(刑獄)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은 상규(常規)에 구애없이 원정(原情)하여 신리(伸理)시키라는 일과 외방 감옥의 죄수를 소결(疏決)시키고 남형(濫刑)을 금단시키라는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모두 따랐다. 향약(鄕約)을 시행할 것을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태화가 곤란하게 여겼고, 명하는 아뢰기를,
"이는 의당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바야흐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진연(進宴)을 파하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이미 정파(停罷)했으니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헌부의 차자를 주달하게 하면서 같은 일이 겹쳐 거론된 것은 주달하지 말게 하였다. 태화가 주인이 없는 땅을 개간한 곳은 일체 입안(立案)의 선후에 따라 절급(折給)하자는 일에 대해 아뢰기를,
"이는 이미 민전(民田)인 것이니 출급(出給)해 주어야 하며, 먼저 입안하고 개간한 곳도 의당 출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원도에 있는 궁가에서 개간한 곳도 갑술년050)  에 양안(量案)에 의거 출급했는데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사간원의 차자에 대해 아뢰기를,
"이 한 조항은 훈국의 군병을 변통시키기를 청한 것인데 이 군병에 대한 것은 중대한 일이어서 갑자기 고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고, 또 이경석(李景奭)의 차자에 대해 아뢰기를,
"이 차자의 내용은 이미 품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른바 한 집에서 4인이 군역(軍役)에 응한 경우에 급여하는 시정법(侍丁法)을 신명(申明)시켜 일체 법전(法典)대로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청하기를,
"어리고 약한 사람도 초출하여 탈감시키게 하소서."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이는 왕정(王政)에 있어 중대한 일입니다."
하였다. 명하 등이 청하기를,
"10세 이하는 감면시키도록 정하소서."
하고, 태화는 청하기를,
"10세가 되지 않은 사람을 초출하여 먼저 군포를 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북로(北路)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 와서 소장을 올려 민간의 폐단을 진달하면서 대신으로 하여금 북로의 일을 주관하게 할 것을 청해 이미 윤허를 받았으나, 대신이 자청하기를 어렵게 여겨 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우상에게 주관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국가의 대소 영선(營繕)에 대한 공역(工役)은 해마다 증가되고 있습니다. 삼가 호판(戶判)의 말을 듣건대 이번 가을 석 달 동안에 소용되는 포목(布木)의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실로 절약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 쓰이는 것인가?"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석 달 동안 소용되는 것이 8백 80여 동(同)이나 되는데 별로 어공에 소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병들의 중순(中旬)051)  과 갖가지 비용이 매우 번다합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민력(民力)은 한정되어 있는데 용도에 절제가 없으니, 이렇게 하고도 비용을 절약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하고, 홍명하는 아뢰기를,
"내사(內司)의 재화(財貨)라 할지라도 또한 마땅히 준절(撙節)해야 합니다. 이는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절약해서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원자의 책봉례(冊封禮)는 속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대례(大禮)를 반드시 세수(歲首)에 행하는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의당 초봄에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봄까지는 겨우 두어 달밖에 여유가 없어서 행례(行禮)하기가 진실로 곤란하다. 한창 자라는 아이는 반년 사이에도 성취되는 것이 자별한 것이다."
하였다. 명하 등이 아뢰기를,
"행례하지 못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반드시 명위(名位)를 일찍 정한 뒤에야 군신(群臣)들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겨울에 천둥친 변에 대해 놀랍고 두려운 마음 어떻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외정의 의논을 듣건대 모두들 전하께서 진발(振發)하려는 의지가 적은 것을 걱정했는데 이것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편안함[逸]이란 임금이 크게 경계해야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임금으로서 당연히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위에서 무일편(無逸篇)052)  을 병풍에 써서 항상 좌석 오른쪽에 두고 있다고 했는데 늘 스스로 경성(警省)하면서 마음속에 잊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무익한 일을 벌려 유익한 일을 해치게 하지 말라.’고 했으니, 위에서 공장(工匠) 등의 일에 유의하게 되면 어찌 유익한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총행(寵幸)의 길을 열어 모만하는 일을 초래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른바 총행의 길을 열어 모만하는 일을 초래한다는 것은 유독 신하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좌우의 편폐(便嬖)에 이르러서도 총행을 여는 단서가 있게 되면 반드시 모만하게 되는 환란을 초래하기 마련이니, 다시 더욱 척념하소서."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영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신들의 소회는 이미 차자에서 진달했습니다만 삼가 여항(閭巷)의 비난하는 말을 듣건대, 모두들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하여 조종조(祖宗朝) 때와 아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궁가에 이르러서도 임의대로 출입해도 금제(禁制)가 없는 탓으로 궁중의 말이 외간에 전파된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한번 사경(私逕)이 열리게 되면 그 폐단이 끝이 없기 때문에 군정(群情)이 모두 이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시고 없으면 더욱 면려하시는 일은 성상께서 스스로 반성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에는 의관(醫官)이 출입할 적에 매양 승지와 사관이 함께 입시했었는데 지금은 의관이 홀로 입시하고 있으니, 이 또한 총행을 열어 모만을 초래하는 한 가지 길인 것입니다. 한두 명의 의관이 오래도록 내관(內官)과 같이 거처하고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약(藥)에 대해 의논하는 일을 약방이 참여하여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외간에서는 ‘위에서 사사로이 약에 대해 의논하게 하여 올리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말이 참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는 실로 우려스러운 점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행의 길을 열어 모만을 초래하지 말라는 것과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라는 것은 모두가 아름다운 말이다. 의관에 관한 말은 내가 아는바 없다."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의관이 출입할 적에 접견하는 예절을 한결같이 조종조의 고사에 의거하여 외조(外朝)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해야 합니다. 당(唐)나라 때의 이훈(李訓)·정주(鄭注)는 당초 의술(醫術)로 진출한 사람들인데 결국에는 난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니, 이 일은 오늘날에 경계해야 될 것일 뿐만이 아니라 의당 뒷날 성헌(成憲)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덕의 치우친 곳을 살피건대 항상 안일에 지나쳐 스스로 진작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본관(本館)의 차자에서 진달한 큰일은 모두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신의 소위를 보면 신들은 진실로 이러할 줄 알고 있습니다만 국가에서 법제를 소상하게 하여 잘 변동시키지 않고 단지 소소한 부역만 감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치도에 유익하겠습니까. 공안(貢案) 같은 한 가지 일을 변통시키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경장(更張)을 꺼리기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명하가 거친 목소리로 아뢰기를,
"삼사의 의논이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공안을 고친다고 해서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옥당의 관원은 단지 임금의 덕을 보도하여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필코 국사를 참여하여 알고 법제를 변경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변통하게 한다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양 탑전에서 일을 논할 적마다 오로지 대신을 공척하기만을 힘쓰니 대신이 된 사람이 또한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고 참판 이응시(李應蓍)의 딸이 사인(士人) 이진면(李震冕)의 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어미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씨(李氏)가 이에 장사를 치른 뒤에 글을 써서 부모에게 영결(永訣)을 고하고 나서 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죽음을 택한 것은 옛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정식(鄭植)의 자부(子婦)의 전례에 따라 똑같이 포정(褒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만용(萬容)과 민서(敏叙)가 김익렴(金益廉)의 일에 대해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김석주(金錫胄)가 겨울철에 천둥이 치는 변이 거듭 발생한 것 때문에 소장을 올려 경계할 것을 진달하고서 청하기를,
"하늘의 마음을 몸받아 하늘의 견책에 답함으로써 수성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시며,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공(臣工)들을 면려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소서. 그리하여 줏대 없이 사심에 끌리는 누습(陋習)을 일변시켜 깨끗이 씻고 진작 쇄신하는 굉규(宏規)를 세우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법을 심각하게 하여 독책하려는 의도를 조금도 너그럽게 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누적된 포흠을 징수하고 물린 부세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것이 과연 무슨 계책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누적된 포흠의 폐단에 대해서는 전후 제신들이 누차 논하였습니다. 탕감시키자는 의논이 일찍이 금년 봄에 한 번 발론되었고 일이 거의 시행되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다시 조절(操切)하는 말 때문에 중도에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아, 그 문서를 남겨 두어도 국가에서 곡식을 얻어 내기에 부족하지만 없애버리면 민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헛된 장부를 견감시켜 실제적인 혜택을 베푸는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지난 가을에 병랑(兵郞)으로 있을 적에 마침 군포(軍布)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복심(腹心)인 경부(京府)의 저장 또한 헛군데로 흘러나가는 것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집을 지을 적에 토목 공사의 공역(功役)이 3년 만에 끝이 났는데 신이 삼가 공장(工匠)과 모역(募役)의 역가(役價)를 계산하여 보니 2백 14동(同) 남짓 되어 금(金)으로 환산하여도 7천, 8천 냥을 밑돌지 않는 숫자였고, 거기다가 다시 탁지(度支)의 양료(糧料)와 내사(內司)의 비용까지를 계산하여 본다면 반드시 1만 냥이 차고도 남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의 궁(宮)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을 한 해 민역(民役)의 대신으로 옮겨 충당시킨다면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더욱 전일 간신(諫臣)의 소장 내용을 당초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진언이 성실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포흠에 관한 한 조항은 의당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포흠에 관한 한 조항은 이미 제도에 행회(行會)하여 조사해서 신보(伸報)하게 했으니, 완성된 책자가 모두 도착한 뒤에 일시에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주(楊州)의 전부(田賦)를 다시 측량하였다. 이에 앞서 양전(量田)할 때 양주의 관리가 적격자가 아니어서 전결(田結)의 경중이 균일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들 국가에다 원망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양전하라고 명하고, 호조 판서와 경기 감사가 구관(句管)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전을 끝마쳤는데 줄어든 전결의 수량이 거의 1천여 결(結)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비로소 조금 소생될 수 있게 되었다.

 

10월 24일 병자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박장원·조복양을 원자 보양관으로, 이유태를 강학관으로, 윤선거를 요속으로 삼았다. 송준길이 일찍이 더 차출할 것을 청했었기 때문에 이조와 대신(大臣)이 상의하여 노성인(老成人)으로 차출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네 사람을 차하(差下)할 것을 청하였다.

 

전 감사 김시진을 특별히 서용하여 형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시진이 충청 감사로 부임하여 있을 적에 온천의 행행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평 어진익이 아뢰기를,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종일(金宗一)은 연로하고 병이 깊어 아문의 좌기(坐起)를 전혀 폐기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외방에 있는 유신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윤선거에게 시무에 대해 자문(咨問)하라고 하유했는데 옥당의 말을 따른 것이다.

 

원자가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와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10월 25일 정축

전라도 곳곳에서 도적이 몰래 일어나 사람을 겁략하고 살해하였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해서 토포사(討捕使)에게 분부(分付)하여 계교를 내어 소탕하게 하였다.

 

별시(別試)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임상원(任相元) 등 13인에게는 문과 출신(文科出身)을 내렸고 이례길(李禮吉) 등 30인에게는 무과 출신(武科出身)을 내렸다.

 

10월 26일 무인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안쪽의 햇무리에는 양이가 있었으며 위에는 관(冠)이 있었는데 색깔은 모두 안쪽은 적색이고 바깥쪽은 청색이었다.

 

훈련 대장 이완이 말미를 받아 연풍(延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오다가 음죽(陰竹)에 이르러 병이 위독하여졌다. 상이 어의(御醫) 한도창(韓道昌)을 보내어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구료하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27일 기묘

정원에 하교하기를,
"형조의 시수 죄인(時囚罪人)에 대한 문서를 조사하여 품고하라는 일로 하명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 판서 정지화, 참판 김시진은 제배된 지 여러날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나와서 숙배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부당하다. 아울러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신사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 체통이 엄하지 않아서 무부(武夫)들이 교만 방자하기 그지없습니다. 신(臣) 홍만형(洪萬衡)이 어제 노상(路上)에서 융복(戎服)을 입고 말을 탄 사람을 만났는데 전도(前導)가 가금(呵禁)했는데도 끝내 회피하지 않고 말을 달려 마구 지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을 묻기 위해 하인을 시켜 그를 따라가는 사람을 불렀더니 사람을 보내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불공한 말을 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또 사람을 시켜 물었더니 전 부사 유성(柳檉)이었습니다. 아, 대관이 비록 낮은 직책이기는 하지만 재상과 대등한 위치이므로 조정에서 대우하는 체면이 또한 자별합니다. 대소 인원을 막론하고 전도(前導)가 없는 경우에 그때마다 즉시 은피하는 것은 바로 국체(國體)를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유성은 무인이니 품계가 당상(堂上)일지라도 의당 회피해야 하는데 흘겨보면서 마구 지나갔습니다. 국가에 기강이 확립되었다면 이들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유성을 파직시켜 무부들의 교만하고 거친 습성을 징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게 하였다.

 

정치화(鄭致和)를 정리사(整理使)로 삼았다.

 

10월 30일 임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하였다. 옥당 조복양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복양이 아뢰기를,
"본관(本館)의 요원(僚員)이 근래 고르지 않아서 체직(替直)할 사람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근일 잇따라 소대하는 거조가 있는데 본관의 구간스러움이 이러하니 변통시키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파산(罷散)되어 있는 박세당(朴世堂)·심재(沈梓)이 두 사람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승지 김우석(金禹錫)에게 이르기를,
"형조 시수(時囚)의 문서를 아직도 수정하지 못했는가."
하니, 김우석이 아뢰기를,
"이미 수정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일 소결(疏決)하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륜(鄭錀)과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의 치계를 살펴보건대 칙사의 패문(牌文)이 이미 나아왔는데 압록강을 건널 시기가 다음달 8, 9일에 있게 되었으니, 일이 매우 급박합니다. 원접사(遠接使)와 문례관(問禮官)을 해조로 하여금 차출하여 급속히 출발시키게 하소서. 관반(館伴) 이하 도감의 관원도 속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원접사로, 김석주(金錫胄)를 문례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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