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1권, 현종 6년 1665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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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자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년에 온천에 행행하려 하니 대신은 멀리 내보낼 수 없다. 사은사(謝恩使)는 종실(宗室)이나 부마(駙馬)로 차송하고 싶은데 갈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부마 가운데 갈 만한 사람은 청평위(靑平尉)가 있고, 종실 가운데는 회원군(檜原君)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평위를 보내라."
하였다.

 

동부(東部)의 관비(館婢)가 한 번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12월 2일 계축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비국과 빈청의 좌기(坐起)나 일차(日次) 이외에 인견하는 거조가 있게 될 경우에는 양사의 입시 여부를 정원이 당연히 계품해야 하는데 어제 빈청에 제재(諸宰)들을 입시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정원에서 양사의 장관은 패초(牌招)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곧바로 계달했으니,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뒤 폐단과도 관계가 되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 청사(淸使)가 모두 왜인의 조총(鳥銃) 2병(柄), 활 2장(張), 통아(筒兒) 2개(箇), 편전(片箭) 10부(部)를 요구했으므로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진계하고서 주었다.

 

12월 3일 갑인

감시(監試)의 유생(儒生) 가운데 가자(加資)받은 것을 쓴 사람은 모두 발방(拔榜)시켰다. 이때 사습(士習)이 투박하여 유학(幼學) 가운데 감시에 응시한 자들이 모두 낭자(郞資)를 썼기 때문에 이에 앞서 예조에서 금단할 것을 청하였고 승전을 받들어 중외에 분부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뒤 유생과 관리들이 이를 준행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감시에 응시한 유생들 가운데 가자(加資)받은 것을 쓴 사람이 참방(參榜)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예조가 다시 신명시켜 조사하여 발방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게 하고 계묘년057)   이후 식년시(式年試) 때의 예조 당상을 추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예조에서 경상도 유생 이명립(李命立)·성호일(成虎日), 전라도의 조경회(趙慶會), 강원도의 최동직(崔東稷)·정규원(鄭奎源) 등 5인을 방목(榜目)에서 발거(拔去)하였다.

 

12월 6일 정사

청사(淸使)가 돌아갔다. 이때 두 사신 이하 대통관(大通官) 등이 청구하는 물건이 끝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거쳐간 주군(州郡)은 그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허모(虛耗)하게 되었다.

 

12월 8일 기미

정원이 아뢰기를,
"죄인의 계복(啓覆)은 의당 연고가 없는 날 거행해야 되므로 오는 11일에는 초복(初覆), 13일에는 재복(再覆), 17일에는 삼복(三覆)을 하도록 날짜를 안배하였습니다만 상께서 방금 조섭중에 계시므로 앙품합니다."
하니, 그날 행하도록 정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0일 신유

이연년(李延年)을 좌부승지로,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조형(趙珩)을 우참찬으로, 송시철(宋時喆)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형조의 공사(公事)를 정원에 유치했다가 잃어버린 것 때문에 그날 입직한 서리(書吏) 문세건(文世健) 등 2인을 수치(囚治)하라고 명하여 모두 정배시켰다. 숙직한 승지 강백년(姜栢年)·이만영(李晩榮)은 소장을 올리고 대죄(待罪)하였다.

 

12월 11일 임술

사간 이정(李程) 등이, 정원이 문서를 잃어버린 일을 가지고 해당 승지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계복일(啓覆日)을 물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잇따라 감기를 앓아 오래도록 낫지 않았으므로 계복을 물려서 행하게 하였는데, 결국은 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달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무지개가 달무리를 가로질러 달을 향하였다.

 

12월 12일 계해

사간 이정(李程)이 아뢰기를,
"사송(詞訟)에 관한 법규는 경외(京外)에 각기 장관이 있으므로 소재에 따라 관에 정소(呈訴)하여 송변(訟辯)하는 것이 본래의 국법입니다. 그런데 근래 엉뚱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곡경(曲逕)을 통하여 하리(下吏)들과 부화 뇌동해서 곧바로 형조에 정소한 다음 주현(州縣)에 이문(移文)하게 함으로써 기필코 자신들의 간계(奸計)를 이루고야 맙니다. 따라서 외방의 백성들이 장차 그 분운(紛紜)스러움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경외의 취송인(就訟人) 가운데 진실로 본관에서 잘못 판결하여 신리(申理)를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면 각각 거처하는 고을에서 판결하여 주게 하소서. 만일 전처럼 단계를 건너뛰어 정소하는 일이 있으면 일체 금단시키고 청리를 허락하지 말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선혜청(宣惠廳)의 강창(江倉)에서 쌀을 받아들일 때 어떤 군사가 쌀말이나 되게 훔쳐내다가 발각이 되자 낭청이 잡아들여 죄를 결단했는데 낮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결박하여 언 땅에 뒤집어 두었더니, 6일이 지나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쌀을 훔친 죄는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만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낭청을 조사해 내어 죄를 매기게 하소서. 병조는 사계(査啓)할 때 그저 범연히 회계(回啓)하였으니 자못 상세히 핵실하는 태도가 부족했으며, 정원은 전연 이를 살피지 않은 채 받아들였으니 또한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병조의 해당 당상과 정원의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선혜 낭청(宣惠郞廳)은 곧 김설(金卨)이다. 그의 아들 김우석(金禹錫)이 방금 승지로 있으면서 그 일을 숨기려 했었는데 대관이 듣고 논계하여 실상을 조사해 내게 된 것이다. 김설은 이 때문에 수금(囚禁)되었으나 마침내는 우연히 살인한 율(律)로 논하여 고신(告身)만 빼앗았다. 쌀말이나 훔친 것은 그 죄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그런데도 중장(重杖)을 가하여 하루 종일 언 땅에 결박하여 두었던 탓으로 6일만에 죽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것이겠는가. 사람을 죽였는데도 죄가 고신만 빼앗는데 그쳤을 뿐이니, 법의 적용이 이러하고서야 국가의 기강이 어떻게 실추되고 폐기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2월 14일 을축

정언 이동직(李東稷)이 아뢰기를,
"대각의 체례는 해사와는 자별하기 때문에 일을 논할 즈음에 품계하는 규례가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본원(本院)의 계사에서 ‘법을 무시하고 단계를 뛰어넘어 정소하는 경우에는 이를 청리하지 말게 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게 하라.’는 한 조항에 대해 ‘여하(如何)’로 결사(結辭)한 것은, 그날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한 내용의 말단에 ‘여하(如何)’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간통을 왕복하다 대각에 나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서둘러 전서(傳書)하느라고 간통의 문자에만 의거해서 잘못 써 넣은 채 이를 미처 산정(刪正)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제 듣건대 물의가 모두 그르다고 하는데, 신이 새로 대각에 들어와 이렇게 규례를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였다. 사간 이정(李程), 헌납 최일(崔逸)도 이 때문에 인피하고 나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화성(火星)이 태미원(太微垣) 왼쪽에 있는 집법성(執法星)으로 들어갔다.

 

12월 15일 병인

지평 어진익(魚震翼) 등이 정언 이동직(李東稷) 등을 처치하기를,
"문자를 잘못 쓴 것은 바쁘고 급한 데서 나온 일이므로 비록 자세함이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본디 대단한 일이 아니니,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했는데, 동직이 이미 잘못을 저질렀는데 뜻밖에 출사를 청하였다는 이유로 사간 이정, 헌납 최일과 함께 모두 다시 인피하였고, 지평 어진익(魚震翼)·정재희(鄭載禧)도 처치한 것이 정당하지 못했다고 또한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응교 이민서(李敏叙) 등이 차자를 올려 아울러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12월 16일 정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7일 무진

고양(高陽)에 사는 백성 최순일(崔順一)이 동생을 찾는다고 핑계하고 호지(胡地)로 들어가서 책문(柵門)에 이르러 체포되었으며, 또 어떤 여인(女人)도 동시에 체포되었는데 봉황성(鳳凰城)의 성장(城將)이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다 하여 아울러 심양(瀋陽)으로 들여보냈다. 동지사(冬至使) 김좌명(金佐明) 등이 이 일을 아뢰었다.

 

12월 18일 기사

홍문관의 신록(新錄)에 대한 권점(圈點)이 있었다. 칠점(七點)을 받은 사람은 이익상(李翊相)·민시중(閔蓍重) 2인이고, 육점을 받은 사람은 이명익(李溟翼)·이동명(李東溟)·김징(金澄)·이관징(李觀徵)·정중휘(鄭重徽)·정재숭(鄭載嵩)·이혜(李嵆)·조성보(趙聖輔)·이규진(李奎鎭)·홍만형(洪萬衡)·신명규(申命圭)·이규령(李奎齡)·김만중(金萬重) 등 13인이었다.

 

12월 20일 신미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헌납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소두산(蘇斗山)·최관(崔寬)을 지평으로, 조한영(曺漢英)을 호조 참의로 삼고,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만기는 문학(文學)이 약간 있어서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사리에 밝지 못했으며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공벌(攻伐)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이경억(李慶億)을 발탁하여 우윤으로 삼았다.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 안으로 들어갔다.

 

12월 21일 임신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헌납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근래 백관들이 직무 수행에 태만하여 일을 하리(下吏)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후사(喉司)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오로지 관장하고 있어 직임의 중함이 타사(他司)에 견줄 정도가 아니므로 대소 문서(文書)를 직접 스스로 간검(看檢)하는 것이 그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입계한 문서를 잃어버린 것은 전에는 없었던 큰 사건으로, 근간이 되는 정원이 이러하니 다른 것이야 책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뒷날의 폐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승지를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납향 대제(臘享大祭) 때 축사(祝史)인 견창령(甄昌令) 이직(李㮨)은 자신의 아우인 안창령(安昌令) 이억(李檍)을 대신 보냈고 봉조관(奉俎官)인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심시현(沈時顯)은 향(香)을 받은 뒤 날이 저물어서야 뒤늦게 도착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형이 사사로이 대신 보내고 아우가 감히 대신 행한 데 이르러서는 모두 너무도 근거 없는 작태였으니, 보통으로 조처해서는 안 됩니다. 견창령 직과 안창령 억은 잡아다가 추문한 다음 정죄하고 심시현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제도의 군민(軍民) 가운데 징수할 데가 없는 조적(糶糴)과 신역(身役)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계문하라는 명이 있었다. 충청도의 전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냈는데 그 숫자가 매우 소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다시 정밀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진은 이미 체직되고 임의백(任義伯)이 대임으로 부임하여 치계하기를,
"조사하여 감면한 것이 너무 많게 되면 백성들은 혜택을 받지만 국가의 저축은 감축되니 전후 조사하여 책자를 만드는 것을 아울러 우선 정지하고, 온 도내 54고을의 원곡(元穀)의 원수(元數)와 해조에서 으레 받아들이는 십분(十分)의 모곡(耗穀)과 상평청·진휼청에 회부(會付)된 원곡(元穀)은 모두 탕감시키지 마소서. 그리고 단지 상평·진휼의 금년 모곡을 덜어내어 일도(一道)의 도망갔거나 죽은 자와 빈궁하여 상납할 수 없는 자들의 미수된 환자(還上)에 충당시킨다면 국가의 손해는 매우 적고 백성들이 받는 혜택은 실로 많게 됩니다. 만일 포흠(逋欠)의 숫자가 많아서 양청(兩廳)의 1년 모곡으로 충당시키기에 부족하다면 또 신의 감영(監營)에 치부(置簿)되어 있는 곡식과 통영(統營)의 모곡을 옮겨서 그 숫자에 충당시켜 휴흠(虧欠)이 없게 하고 나면 어찌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일이 비국에 내려졌다. 회계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계유

이상일(李尙逸)을 우승지로, 송시철(宋時喆)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12월 23일 갑술

공산(公山)·전의(全義)·이산(尼山)·문의(文義)·천안(天安)·연기(燕岐)·은진(恩津)·석성(石城)·회인(懷仁) 등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12월 25일 병자

이때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던 검은 소 14두(頭)가 병으로 죽었고, 충청도에서 기르던 소 2두도 죽었다. 예조가 본서(本署)의 첩보(牒報)를 인하여 아뢰기를,
"제주(濟州)에 있는 소 16두는 급속히 올려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팔도가 모두 그러했는데 제주가 더욱 극심하여 희생(犧牲)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12월 26일 정축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이후산(李後山)을 승지로, 이세장(李世長)을 정언으로, 이민발(李敏發)을 전라 좌수사로, 김우석(金禹錫)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흰무지개가 발생한 변은 참으로 매우 놀랍고도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삼가 기억하건대 금년 2월 초하루에 흰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일이 있었는데 이날 사직에 대제를 지내는 날이었으며, 이번 21일에 있었던 것은 또 사직에 행사(行社)가 있은 뒤였으니, 전후의 변이 모두 사직에 제사가 있을 때 있었습니다. 신의 혼모한 우견(愚見)으로는 감히 한유(漢儒)들처럼 부회(傅會)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천지(天地)와 삼광(三光)의 변이 한 해에 중첩되게 발생하였고 강상(綱常)과 윤기(倫紀)의 문란이 거의 금수(禽獸)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팔로(八路) 군민(軍民)들의 가슴에는 원기(怨氣)가 가득 찼으니, 하늘이 견책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이미 써늘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큰 변이가 잇따라 중첩되게 나타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 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호미를 무기로 삼아 떼 지어 반역하는 것은 원망이 누적된 데서 연유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숲속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조짐이 이미 보였으니, 이를 좀도둑으로 여겨 하찮게 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융정(戎政)은 외관상으로는 잘 수거(修擧)된 것 같지만 그 근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말에 백성이 모두 군병(軍兵)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삼군(三軍)의 무리를 모두 제대로 쓸 수가 있는 것이지만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백만의 무리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근본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인데, 인(仁)이란 것이 어찌 구구한 작은 혜택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인정을 행하여 은택을 베풀고 호오(好惡)를 똑같이 함으로써 민심을 얻고 일이 있을 때는 상벌(賞罰)을 공평하게 하고 호령(號令)을 엄숙하게 하여, 윗사람을 친애하는 백성을 몰고 나아가 나를 위하여 쓰이게 한다면 어찌 무너져 흩어질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백성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추워도 옷을 입지 못하고 굶주려도 밥을 먹지 못하며 공사(公私)의 부채를 있는 힘을 다해도 갚을 수가 없는가 하면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으로 피를 빨리고 살을 도려내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모두들 떠나 흩어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어떻게 급할 때 백성의 힘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여러 창고(倉庫)를 중첩되게 건립하였는데 거기에 미곡(米穀)이 모두 가득차 있었고 병조·호조의 포목(布木) 또한 가득차 있었지만 이것이 토목의 역사(役事)로 들어간 것이 많았는데,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여 전야(田野) 가운데서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적현(赤縣)058)  과 대부(大府)에는 죄수가 옥에 가득차 있는데 세시(歲時)가 박두한 지금 울부짖는 원망이 길에 가득한 실정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어찌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봉행하는 자들이 우러러 부합되게 하지는 못하고 오직 뒷날의 죄책(罪責)만 면하려 도모하고 있으니, 백성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나설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아, 죄가 있어 뇌옥(牢獄)에 오래 갇혀 있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위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게 된다고 했는데 더구나 이 호소할 데 없는 곤궁한 백성이 굶주린 나머지 수화(水火)에 빠져 허덕이는데도 따라서 질곡(桎梏)과 침학(侵虐)을 가하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에는 위에서 특별히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내려 속히 제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곤궁하여 굶주리는 자, 의지할 데 없는 노약자, 인족으로서 침징을 당하는 자들은 아울러 즉시 탕감시키고 그 헛된 장부(帳簿)는 불사른 다음 유사(有司)에게 송부하는 일이 없게 건강(乾剛)으로 결단한다면 이것이 또한 재이를 없애고 화기를 부르게 하는 데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날 성철(聖哲)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방법은 검소하게 하고 근면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검소하지 않으면 용도가 과분하여 재물을 손상하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복완(服玩)을 사치하는 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하며, 근면하지 않으면 마음이 게을러져 일을 폐기하고 안일만을 취택하게 되니 궁첩(宮妾)과 환시(宦寺)를 친하는 때는 많고 훌륭한 사대부(士大夫)들을 인접하는 때는 적게 되어 점차 온갖 일이 추폐(墜廢)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실로 임금이 크게 경계해야 될 점인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뜻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국사가 날로 잘못되고 조정이 존엄해지지 않음은 물론 궁가(宮家)의 복식(服飾)에 이르러서는 옷깃과 소매를 희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찬품(饌品)도 전에 제공하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여항(閭巷)에서도 이렇게 하면서 전하기를 ‘이는 궁중에서 하는 것을 본받은 것이다.’고 합니다. 이런 재이를 만난 때를 당하여 위에서 다시 더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날로 더욱 면려하실 것은 물론 육책(六責)059)  으로 자책하시고, 조금만 옥후가 회복되면 부지런히 강연(講筵)을 열으시고 하루에 세 번씩 강관(講官)을 접견하시어 부지런히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시면서 군신(群臣)들에게 솔선하신다면, 위에서 이렇게 하는데 아래에서 스스로 새롭게 하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에 경계한 것이 간절하여 내가 감탄하고 있다. 마땅히 유념하여 삼가도록 하겠다. 의논하여 조처할 일은 묘당(廟堂)과 함께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27일 무인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정랑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거듭 발생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어서 1년에 흰무지개가 두 번이나 태양을 가로지르는 변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 민역(民役)을 견감하고 원옥(冤獄)을 신리시키는 등의 일을 이미 다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들을 책면시킨다면 하늘에 응하는 도리에 가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위에서 재변을 없애는 방도가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재이가 거듭 이르고 있으니, 그 허물은 전적으로 신들에게 있습니다. 신들을 파척시키고 훌륭한 덕을 가진 사람을 다시 임명하시면 재이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 일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것이 없었으니, 오늘날의 재이를 어떻게 경들에게 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원자(元子)께서 점점 장성하고 있습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위에서 항상 원자를 교회(敎誨)하여 제반 행사에 있어 원자가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일 경우 위에서도 하지 않으시면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은 실로 예전에 드물던 일입니다. 대신이 책면시켜 달라고 한 말이 진실로 겉치레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의당 배전의 경구심(警懼心)을 가지고 대신을 책려하여야 하고 대신도 의당 스스로 힘써 위에다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진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군신 상하가 서로 책면한다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않은 것이 가장 걱정스러운 일이다."
하자, 복양이 아뢰기를,
"이른바 기강이라고 하는 것은 엄한 형벌과 까다로운 법으로 진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처사가 합당하면 기강은 저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이단하의 소장에 대해 아뢰기를,
"이는 정문부(鄭文孚)를 포장하여 증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임진 왜란 때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왕자와 대신을 잡아가지고 주군(州郡)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켜 왜적에게 항복했을 적에 문부가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창도하여 역적을 치고 주군을 회복시켰고, 그 공으로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초배되었는데, 당로자(當路者)의 비위에 거슬려 끝까지 쓰여지지 못했습니다. 혼조(昏朝)에 이르러서는 주현(州縣)에 은거하고 있다가 반정(反正)한 뒤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배되었으나 얼마 후 모상(母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때 어느 훈신이 조문을 갔다가 그 여막의 벽에 쓰여져 있는 전에 지은 영사시(詠史詩)를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전설(傳說)했는데 급기야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석방되려 할 즈음 대간(臺諫)에서 그 시의 뜻이 지적한 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형신할 것을 청하였고 드디어 장하(杖下)에서 죽었습니다. 고 상신 조익(趙翼)이 당시 문사 낭청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항상 억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문부가 혼조 때 한찬남(韓纘男) 등에게 빌붙지 않았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반정한 뒤 박홍구(朴弘耉)의 옥사에 그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와 체포되었는데, 홍구의 아들 박지장(朴知章) 등의 공사(供辭)에 ‘문부는 장재(將才)가 있기 때문에 뜻을 두고 찾아가 만났으나 말을 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 익(翼)이 문사 낭청으로 있으면서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위관(委官)에게 극력 말을 하여 일이 거의 풀리다가 그만 시어(詩語)에 좌죄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신의 아비가 매양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말하였으므로 신도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문부(文孚)의 공렬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살아 있고 임진년과의 사이가 머지 않기 때문에 신들도 모두 듣고서 매양 상이 공에 걸맞지 않은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그 시는 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 지은 것인데 그가 스스로 회포를 읊은 것으로 국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문을 받다가 죽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시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
하였다. 태화가 그의 시(詩)인 ‘초나라가 삼호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楚雖三戶亦秦亡]’ 한 구(句)를 외니, 상이 이르기를,
"시어(詩語)에 중대한 뜻은 없는 것 같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은 이미 추증(追贈)되었으니 이 사람에게도 특별한 은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함께 일을 한 사람이 이미 2품에 증직(贈職)되었으니, 이 사람은 1품을 추증해도 됩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또한 그의 자손을 수록(收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품계를 뛰어 증직시키고 자손들을 녹용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서필원(徐必遠)이 품달한 일은 의당 구관(句管)할 대신을 차출하기를 기다려 함께 의논하여 품처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원이 당초 품정할 때 신이 교생(校生)의 일은 부당하다고 했기 때문에 필원이 진실로 이미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급기야 이완이 조정에 돌아옴에 이르러 ‘선조(先朝) 때 품정한 내용과 크게 서로 틀린다.’고 했기 때문에 필원이 이를 이유로 인혐하여 사면하기에 이르렀으니, 강도(江都)의 일은 다시 이완에게 하문하소서."
하니, 상이 이완에게 하문하였다. 이완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필원이 진달한 내용이 신의 의견과 같지 않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좌상(左相)에게 말하기를 ‘그가 건의한 30개의 조항 가운데 4, 5 건은 불가한 것 같은데 다시 변론하게 되면 마치 서로 다투는 것 같아진다. 구관(句管)하는 직임을 체차시켜 주지 않는다면 사세상 방관하기 어렵다.’ 했는데, 필원이 과연 인혐하였으니, 신이 신의 의견을 진달하겠습니다.
선조(先朝) 때 정한 제도에 중군(中軍)은 그곳 사람을 쓰지 말고 곤수(閫帥)를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을 차송하고 군정(軍政)을 일체 중군에게 위임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기필코 이를 파기하려 하니, 이것이 첫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필원은 기필코 별파진(別破陣)을 다 파기하고 속오(束伍)로 정하여 단지 약간 인만 남겨 포(砲)를 쏘는 데 쓰려고 하나, 강도에 장치해 놓은 대포는 소포(小砲)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포 하나에 탄약을 장진할 때 5, 6 인을 써야 하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별파진을 강도로 내려보내어 도표(圖表)에 의거 교습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이제 이미 연습시켜 재기(才技)를 완성시키지 못하고서 도리어 쓸데없다고 하면서 파기시킬 것을 청하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포진(井浦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는데 교동의 형세는 신이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본디 시초(柴草)가 없고 또 매우 좁은 데다가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니 진(鎭)을 옮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 강도의 방어를 철수하여 공지(空地)에다 진을 옮기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모르겠습니다. 월곶(月串)·용진(龍津)·초지(草芝)이 세 진은 선조(先朝) 때 처음 수군 첨만호(水軍僉萬戶)를 두었는데 지금 병마 첨만호(兵馬僉萬戶)로 고치려고 하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중군·별파진과 진을 옮기는 등의 일은 과연 고쳐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완과 서필원이 서로 인혐하고 있으니 이것이 가장 곤란한 점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국사는 한 사람의 사삿일이 아니니 단지 공의(公議)에 따라야 할 것이요, 각기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필원과 이완을 불러 서로 가부에 대해 의논하여 익히 강론해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내어 보이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소장은 오로지 신역(身役)을 견감시키고 포흠을 탕척시키자는 것이 골자입니다. 갑진년060)   이전의 미수된 숫자를 지금 이미 조사하여 왔는데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각도(各道) 사계(査啓)에 다과가 같지 않아서 경상도는 9백 동(同), 전라도는 2백 동, 충청도는 1백 50여 동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이는 감사의 능부(能否)에 관계된 것입니다. 김시진(金始振)이 이 일로 논박을 받기는 했어도 각 고을에서 감히 헛되이 숫자를 증가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숫자가 가장 적은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9백 동을 우선 먼저 탕척시켜야 합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이 숫자에 의거 탕척시킨다면 타도(他道)에 견주어 몇 배가 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너무도 고르지 못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조(年條)를 따지지 않고 탕척시켜야 된다. 갑진년 이전으로 한정한다면 병오년 이전의 것도 다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타도의 것은 장계(狀啓)에 의거 모두 탕척시키게 하고 경상도는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관조(官糶)의 포흠이 경상도는 4만여 석(石), 전라도는 3만여 석, 경기는 1천 2백여 석, 강화(江華)는 5천여 석으로 도합 12만 석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이미 신역(身役)을 조처하였으니 사계(査啓)가 장차 올라올 것입니다. 이 소장에서 진달한 것은 그 사계를 기다려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강릉(江陵)의 강상(綱常)에 관한 옥사는 아직 실정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안문(按問)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정만화(鄭萬和)가 아뢰기를,
"본원(本院)이, 현재 정원이 공사(公事)를 유실했다는 것으로 승지를 파직시키라고 청하고 있는데 신도 그때 승지로 있었으니 사세가 의논에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만화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대사간 정만화가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만, 본원에서는 해당 승지만을 논하였으니 타방(他房) 승지는 별로 피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두인이 아뢰기를,
"지금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변이는 매우 흉참스러운 것인데 천변(天變)은 백성의 원망에서 연유되는 것이니 대단하게 변통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늘의 견책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호남(湖南)에 사명을 받들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담양(潭陽)에 허위로 기록된 노비의 숫자가 매우 많았는데 일찍이 민유중(閔維重)의 진계(陳啓)로 인하여 이미 탕감시켜주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기타의 여러 고을은 아직 두루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왕자(王者)가 천하를 똑같이 보아 고루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니, 각 고을도 일체 똑같이 탕척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마땅히 다시 추쇄(推刷)한 연후에 행해야 된다."
하였다. 두인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치의 폐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하다고 했습니다. 삼가 듣건대 근래 어느 궁가(宮家)가 옥교(屋轎)에 표피(豹皮)로 모장(毛帳)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니,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외간(外間)의 말은 모두 대내(大內)에서도 이와 같이 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검덕(儉德)을 잘 밝혀 도솔(導率)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헌관(憲官)은 규핵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대군(大君) 이하에 대해 모두 죄주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여러 궁가에도 모두 가장(家長)이 있으니 적발하여 죄를 다스림으로써 세도(世道)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의 적용은 귀근(貴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인은 헌관이 된 몸으로 어떻게 상달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公主)의 옥교(屋轎)는 으레 상방(尙方)에서 만들어 주는데 표장(豹帳)도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일은 그렇게 해 온 지가 이미 오래인 것으로 지금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하자, 두인이 아뢰기를,
"이 뒤로는 궁가를 엄히 경계시켜 이미 지급된 것일지라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호남(湖南) 산군(山郡)의 대동미(大同米)의 설행을 파기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호남에 대동미를 설행하고 나자 소민(小民)들은 모두 편하게 여겼으나 부가(富家)·대호(大戶)에서만 한때에 쌀을 내는 것이 곤란하다고 모두 불편하게 여겼는데 조정의 의논이 그 말을 믿고 모두 파기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상이 본도의 감사 민유중(閔維重)에게 민정(民情)을 상세히 물어서 장문(狀聞)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유중이 백성들에게 두루 묻지 않고 호우(豪右)의 말만을 믿고서 드디어 민정이 불편하게 여긴다고 성대히 진달한 다음 산해(山海) 여러 고을의 대동미를 모두 파기시킬 것을 청하였다. 상이 제신들에게 다시 하문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유중의 장계를 살펴보면 산해의 고을까지도 아울러 파기하려고 하는데, 해읍(海邑)은 폐단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산군(山郡)에는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과 비국의 제신들도 모두 파기해야 된다고 했으므로 상이 파기하라고 명한 것이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대동미를 파하고 난 뒤에 법식을 정하지 않으면 각 고을에서 옛 법을 그대로 행하는 즈음에 반드시 외람된 폐단이 많게 될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감사에게 분부하여 법식을 정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기장(機張) 사람 박시귀(朴蓍龜)가 소장을 올려 시폐(時弊)를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불러서 뵙게 해 주시면 구궁진(九宮陣)의 거전법(車戰法)을 진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리고 어영청(御營廳)으로 하여금 불러서 만나보고 그 진법(陣法)을 시험하여 보게 하였다. 그리고 훈련 대장에게도 명하여 같이 가서 시험하게 하였다.

 

12월 29일 경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오후에는 사방이 캄캄하여져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다.

 

12월 30일 신사

햇무리가 졌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근래 뇌물주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곤수(閫帥)의 무리가 꺼리는 것이 없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황해 병사 홍순민(洪舜民)은 세시(歲時)에 으레 보내는 선물을 인하여 감히 중한 물건을 거실(巨室)에 보냈는데 그 집에서 깜짝 놀라 즉시 퇴출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잡아다가 추문하여 정죄하소서. 도민(都民)의 생업은 오로지 공물에 있는데 방납(防納)의 이익이 궁가로 돌아간다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내사(內司)에 바치는 용천(龍川)의 포(布)와 공물 수백 석(石)의 이익을 멋대로 빼앗았다고 하니,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자들이 불쌍할 뿐만 아니라 뒷날의 폐단을 더욱 엄히 방지해야 됩니다. 복창군 정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정(楨)은 추고하라고 명하고 순민의 일은 윤허하지 않다가 다시 아뢰니,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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