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1권, 현종 6년 1665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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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계미

상이 대신과 의금부·형조의 당상을 인견하고 죄수를 소결하였는데 삼사의 관원은 입시하지 말게 하였다. 판의금부사 홍중보(洪重普)가 나아와 송계종(宋繼宗)의 죄안(罪案)을 아뢰었는데 변장(邊將)으로서 장오죄를 범한 자이다. 상이 이르기를,
"이 죄는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변장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마는 이는 단지 발각된 것일 뿐입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소결하는 일은 가벼운 죄를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오래 갇혀 있어 억울함이 응결된 것을 신리(伸理)시켜 주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성기(劉成奇) 같은 자는 죄가 이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석방되었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장오죄를 범한 자에 대해 전부터 법에 의거 바루지 못하고 오래 가두어두고 형추를 가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결국은 감사(減死)하여 정배시켰었습니다. 신이 조정에 벼슬한 이래 아직 법에 의거 바룬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오래 갇혀 있는 죄수를 소결하여 정배시키는 것은 실로 살리기 좋아하는 덕입니다만, 정배시킨 뒤에는 점차 개석(開釋)시켜 결국은 수서(收叙)하기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이 실로 국가에 기강이 없게 된 소치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과 죄가 같은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박형(朴泂)·유정식(劉廷式)의 죄도 그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석방한다면 서로 다르게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들이 오래 갇혀 있는 것을 딱하게 여겨 특별히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내리시어 절도에 정배시키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아울러 정배시키고 물간 사전(勿揀赦前)053)  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온(李溫)의 죄안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과 죄가 같은 자가 있는가?"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유호(柳濠)가 있는데 그의 죄는 무겁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죄가 이미 다름이 없으면 또한 일체(一體)로 논단(論斷)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또한 모두 정배시키게 하였다. 또 정덕겸(鄭德謙)의 죄안을 아뢰니, 사계(査啓)를 기다려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그 나머지 이정기(李鼎基)·이관하(李觀夏)도 모두 도배(徒配)시키라고 명하였으며 정찬한(鄭粲漢)은 삭직시키고 나서 방송하게 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죄인의 추안을 아뢰니, 5인은 방송시키고 그 나머지 죄가 중한 자는 그대로 가두게 하였으며, 결단하지 않은 사람은 속히 결단하게 하였다. 김여신(金礪臣)·맹호업(孟豪業)은 모두 감사(減死)하여 정배시켰다. 외방의 죄수도 각도에 분부(分付)하여 속히 결단하게 하였다.

 

지평 어진익(魚震翼)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대관(臺官)을 둔 것은 일에 따라 규정(糾正)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접이 있을 적에 입시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고제(古制)를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재상이 일을 아뢰면 반드시 대관을 뒤따라 들어오게 하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소결은 사체가 더욱 중대한 것이어서 대각의 신하들이 참여하여 듣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정원에서 계청했는데도 끝내 입시를 허락하는 명이 없었으니, 신은 삼가 개연(慨然)스러움을 느낍니다. 이는 모두 신처럼 무상(無狀)한 사람이 외람되이 직책을 맡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간 이정(李程)과 함께 모두 인피한 다음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일 갑신

대사간 윤문거(尹文擧),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모두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오지 않았다.

 

원자(元子)가 보양관(輔養官) 조복양(趙復陽)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영동(嶺東) 아홉 고을의 금년 세초(歲抄)와 서북(西北)의 백성을 쇄환시키는 것을 정지하였다. 감사 이준구(李俊耉)가 아홉 고을의 민사(民事)가 급하다는 것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1월 3일 을유

박정(朴挺)을 집의로, 심황(沈榥)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응교로, 심재(沈梓)를 교리로, 정재희(鄭載禧)를 지평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겸 대사성(兼大司成)으로 삼았다.

 

사간 이정(李程) 등이 아뢰기를,
"죄수를 소결하는 것은 억울한 것을 신리(伸理)시키기 위해서인데 그 가운데 죄가 중한 자는 경솔히 의논하여 혼동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박형(朴泂)은 탐장(貪贓)을 범한 것이 낭자하고 이온(李溫)은 살옥(殺獄)임이 환히 드러나서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데도 아직껏 복법(伏法)되지 않았으니 또한 실형(失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울러 감사(減死)시켜 정배하는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박형 등의 실정은 용서할 수 없고 죄는 의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오래 영어(囹圄)에 갇혀 있었다는 것으로 갑자기 사형을 용서함으로써 삼척법(三尺法)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죄가 있는 자를 용서하여 잘못된 은혜를 베풀면서 고식적인 정사만을 힘쓰는 것은 징려(懲礪)시키는 방도에 어긋나는 것이니, 과연 재이(災異)를 없애고 화기(和氣)를 부르는 방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인 박형·이온을 감사시켜 정배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어진익의 계사도 이정의 계사와 같은 내용이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방물(方物)을 임시로 감한 지가 지금까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백성을 진념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막중한 향상례(享上禮)를 오랫동안 폐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또한 매우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내년에 있을 대전(大殿) 탄일(誕日)의 방물과 물선은 외방에 행회(行會)하여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대비전 외에는 내년에도 권감시키게 하라."
하였다.

 

11월 4일 병술

박세성(朴世城)을 우부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지평 어진익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박형(朴泂)·이온(李溫)을 정배시킨 것은 정당한 데에 어긋나는 처사라는 것으로 논집했습니다만, 물의가 모두 송계종(宋繼宗)·유정식(劉廷式)의 탐장과 유호(柳濠)·맹호업(孟豪業)의 살인도 구별하는 것이 부당했다고 했으니, 신이 아울러 논하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최일(崔逸), 사간 이정(李程), 정언 신후재(申厚載)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 김만기(金萬基) 등이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5일 정해

정언 홍만형(洪萬衡)이 대사간 이시술(李時術)과 상피된다는 것으로 체직되었다.

 

경상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였다. 선산(善山)·영천(永川) 등 30여 고을에 전후 죽은 소가 6천 4백여 마리였다.

 

11월 6일 무자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조가석(趙嘉錫)을 정언으로, 이연년(李延年)을 형조 참의로,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좌승지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본조(本曹)의 계사에 의거 오는 11월 15일이 중종 대왕의 기신제(忌辰祭)인데 동지(冬至)의 절일제(節日祭)와 겹쳤기 때문에 단지 기신제만 행하기로 했으므로 축문(祝文)에 이런 내용을 첨입(添入)시킬 것으로 강정(講定)하여 계하(啓下)했습니다. 향실(香室)에 소장된 의궤(儀軌)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과거 계미년054)   2월 17일 세종 대왕의 기신제가 한식(寒食)과 상치되었는데 그때 기신제의 축문에 절일(節日)임을 첨입(添入)시켜 행한 규례가 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납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금부의 죄인 박형(朴泂)·송계종(宋繼宗)·유정식(劉廷式)·이온(李溫)·유호(柳濠)와 형조의 죄인 맹호업(孟豪業) 등을 감사(減死)하여 정배시키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지평 어진익도 이 때문에 잇따라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8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익달(李益達)은 죄루(罪累) 때문에 오랫동안 폐기되었던 사람인데 본직에 제수됨에 이르러서는 정사(政事)에 볼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 몰래 읍비(邑婢)와 간통하다가 기운이 손상되어 병이 생긴 탓으로 관사(官事)를 폐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생(民生)의 원고(怨苦)가 날로 더욱 극심하니, 이익달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잇따라 5일 동안 아뢴 다음에야 따랐다.

 

11월 9일 신묘

해에 양이가 있었는데 좌이(左珥)에는 길이가 1장(丈) 남짓한 창백한 운기(雲氣)가 있었으며 한참만에 소멸되었다.

 

11월 10일 임진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기를,
"도내(道內) 삭주(朔州)·창성(昌城)·벽동(碧潼)·이산(理山)·위원(渭原)·맹산(孟山) 등 여섯 고을의 재이가 더욱 극심합니다. 수세미(收稅米), 노비공(奴婢貢), 진봉리(進封吏) 등 제역(諸役)과 월과 군기(月課軍器) 같은 것은 금년을 기한으로 견감시켜 주시고 그 나머지 여러 고을에도 제역(諸役)을 양감(量減)시켜 주소서."
했는데, 호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여섯 고을의 수미(收米)는 완전히 견감하고 노비공은 반만 견감하고 관조(官糶)는 일체 반만 거두어 들이고 월과·군기·진봉 등의 역(役)은 모두 정파하게 하소서. 의주(義州) 등 열두 고을은 수미 1두(斗)씩을 견감하고 관조는 삼분의 이를 견감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부응교 김만기(金萬基)가 소장을 올려 노모(老母)를 봉양하기에 편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소장을 이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경악의 신하를 외방 고을에 보임시켜 내보내는 것은 사체가 중난(重難)하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하여 쌀을 내리라고 하였다.

 

자전(慈殿)의 체후가 미령하였으므로 약방(藥房)이 약을 의논하여 올렸다.

 

11월 11일 계사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추감(推勘) 대상자라는 것으로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2일 갑오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오정원(吳挺垣)을 병조 참의로, 조한영(曺漢英)을 대사간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동지의금(同知義禁)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을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훈련 대장 이완은 이미 노쇠하였으므로 포도 대장의 직임을 사세상 겸하여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향(下鄕)한 지 이미 오래인데 병이 생겨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직임을 비운 지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임(代任)시킬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외의(外議)는 모두들 박경지(朴敬祉)가 가합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완을 포도 대장에서 체차시키라. 그리고 파산중(罷散中)에 있는 사람이라도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번 종실(宗室)에 대해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을 탑전에서 강정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이 이른바 감(監) 이하의 대공친(大功親)을 위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것같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당하(堂下)인 종친의 경우에도 대공친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만일 복제(服制)만을 따른다면 당하를 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게 되니, 사체에 있어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실은 직책이 2품이고 대공친이 된 연후에야 바야흐로 2일 동안 조시를 정지할 수 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성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이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은 임기가 이미 찼는데 양주(楊州)의 양전(量田)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당분간 잉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한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내년 봄 온양(溫陽)의 행행이 있을 것이니 내년 봄을 기한으로 잉임시키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박경지(朴敬祉)를 우포도 대장으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이경억(李慶億)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경안군(慶安君)의 상사에 집이 빈궁해서 예(禮)를 제대로 갖출 수 없으니 가가(假家)와 빈청(殯廳)의 역가(役價)를 해청에서 지급하여야 되는데 그 집에서 반드시 기일에 맞추어 주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역가를 지급하지말고 본도에 분부하여 지어서 주게 하였다.

 

호위(扈衛)하는 군관(軍官)들을 시사(試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김두혁(金斗赫)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그 다음인 김세기(金世器)·윤승종(尹承宗)에게는 아울러 변장을 제수하였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공산(公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11월 17일 기해

대사헌 송준길이 병 때문에 사퇴하고 오지 않았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집의 박정(朴烶)이 장원과 숙질(叔姪) 사이므로 상피하여 체직되었다.

 

날씨가 춥다는 것으로 해조에 명하여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내리고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에게는 공석(空石)을 지급하게 하였다.

 

11월 19일 신축

사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유성(柳檉)의 함사(緘辭)를 보건대 대관(臺官)을 침공(侵攻)하는데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상위(相位)와도 서로 읍하면서 경대(敬待)한다는 등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높이는 의도가 현저하니, 그의 무식하고 외람스러움에 대해서는 이미 책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른바 헌부에 간통(簡通)하여 자신의 노예를 잡아갔다고 한 것은 그때 간원에서 본부에 간통을 보내었으므로 본부에서 그의 하인을 잡아다가 곡절을 물었는데 하인의 죄가 아닌 것 같아서 곧바로 방송(放送)시켰습니다. 헌부의 관원은 책임이 규검(糾檢)하는 데 있기 때문에 물어보아야 하고 죄주어야 할 일이 있으면 아무리 존귀한 집안이라도 표신(標信)을 내어 잡아오는 것이 준례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성은 이에 감히 이를 크게 놀라운 거조로 여기면서 은연중 대관을 협제(脅制)할 계책을 세웠으니, 그의 교만하고 방자한 정상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부사 유성을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게 하였다.

 

11월 20일 임인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삼았다.

 

전 집의 윤선거가 소장을 올려 강학청(講學廳) 요속(僚屬)의 직임을 면제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1일 계묘

해에 양이가 있었다.

 

박정(朴烶)을 발탁하여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박정은 일찍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일을 잘 다스린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대신들이 의논하여 천거하였고 초배(超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쇠하고 또 재지(才智)가 없어서 부임한 뒤에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관사(官事)가 날로 폐기되어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양사가 유도(留都)한 사람 및 약방의 관원에게 가자한 것과 사관(史官)을 6품으로 천전시키게 한 명에 대해 아뢰니, 비로소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판윤 오정일이 소장을 올려 인구하고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전후 폐사한 것이 1천 3백여 마리에 이르렀다.

 

11월 23일 을사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예조 판서 윤강(尹絳)이 이때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대신들이 칙사를 맞이하는 거둥에 종백(宗伯)055)  이 없을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이동직(李東稷)을 정언으로 삼았다.

 

지평 어진익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유성(柳檉)의 함사(緘辭)에 대신과도 서로 읍하면서 경대(敬待)한다고 한 등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른바 서로 읍을 한다는 것은 항례(抗禮)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신은 체면이 존중하여 비국에 나란히 앉아 있을 경우 벼슬이 경재(卿宰)에 이른 사람이 앞으로 나아와 배례를 할 적에도 단지 소매만 들어 답할 뿐입니다. 따라서 유성이 서로 읍한다고 한 것은 매우 외람되기 때문에 대략 논계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서로 읍한다는 한 조항에 대해 중신(重臣)들이, 말에 상세함이 부족했고 또 경솔히 정론(停論)했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고 하니, 신들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나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찬성 송시열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이달 3일에 삼가 유지(有旨)를 받들었는데 신으로 하여금 빨리 조정으로 나오라는 것이었고 또 달려오기 전에 먼저 사실을 갖추어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봉진(封進)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고 놀라고 당황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젊어서 정(程) 주(朱)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재이(災異)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므로 감히 아래에 갖추 열거하겠으니, 전하께서 시험삼아 열람하여 보신다면 총명(聰明)을 열어 넓히고 덕업(德業)을 보익하며 재이를 전이(轉移)시켜 상서로 만드는 방도에 있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송 영종(宋英宗) 때 장마가 들어 재변을 이루었을 적에 정자(程子)가 아버지 태중 대부(太中大夫)를 대신해서 올린 소장과 신종(神宗) 때 혜성(彗星)이 나타났을 적에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해서 올린 소장, 효종(孝宗) 때 겨울 천둥이 치고 영종(寧宗) 때 겨울 천둥이 치고 비가 오래 내린 일에 대해 주자(朱子)가 모두 진계(進戒)하는 차자를 올렸던 것을 인용하여 열서(列書)하여 올렸다. 상이 답하기를,
"인용한 선현(先賢)의 말은 언의(言意)가 요약되어 있어 참으로 시무(時務)에 합당하니, 감히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굳게 사퇴하지 말고 속히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고쳐 지극한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소장을 안에 둔 채 내리지 않았다.

 

11월 24일 병오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청(淸)나라 사신 공부 좌시랑(工部左侍郞) 가랑중석(柯郞中石)이 와서, 청주(淸主)가 내대신(內大臣) 갈포랄(喝布剌)의 딸 묵사리씨(墨舍里氏)를 맞이하여 후(后)로 삼고 가랑중석 등을 보내면서 반조(頒詔)로 명명하였다는 것을 전하였다. 상이 모화관에 행행하여 칙사를 맞이하고 돌아와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칙서(勅書)를 열람하였으며 행례(行禮)를 끝내고 나서 인정전에서 청사를 접견하였다.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날씨가 춥다는 것으로 우선 오늘 밤 관소(館所)의 전어군(傳語軍)을 파하게 하였다.

 

11월 27일 기유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칙사가 돌아간 뒤에는 진하하고 사은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니, 해조로 하여금 사신을 차출하게 하고 방물(方物)의 준비와 문서(文書)를 짓는 등의 일도 해조에 분부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 하라. 사신을 차출하는 일은 등대(登對)할 때 품처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관소(館所)에는 아직 긴급한 일이 없어서 오늘 밤의 전어군도 지난 밤의 예에 의거 우선 파하게 했는데 이 뒤로도 이에 의거 거행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긴급한 일이 없으면 매일 황혼녘에 우선 파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8일 경술

유성(流星)이 북극성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1월 29일 신해

우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올리기를,
"전하께서는 총명(聰明)과 예지(睿智)를 하늘에서 타고 나지 않은 것이 아니고 학문이 고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덕성(德性)이 인후(仁厚)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진려(振勵)하고 분발하는 의지가 부족하십니다. 그리하여 나태하고 더딘 습성이 날로 점점 가중되어 가는 탓으로 경연을 여는 날이 매우 드물고 제신들을 인접하는 때도 적어서 백료(百僚)들이 해이해지고 서무(庶務)가 이완되어 폐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더욱 애석한 것은 온양(溫陽)에 행행한 뒤에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춤추면서 기대한 것이 또 전일에 견줄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럭저럭 진기하는 일이 없이 세월을 보냈으므로 결국은 군하(群下)의 소망에 크게 부합된 점이 있지 못했습니다. 신은 진실로 옥후(玉候)가 자주 미령하여 일이 마음을 따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 사이에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힘써야 되는데도 힘쓰지 않은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않은 것이 이와 같고 성의(聖意)가 강인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헛되이 세월만 보내면서 앉아서 좋은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가다가는 결국 나라가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의 눈과 귀를 통하여 하는 것인데 어찌 몹시 노여워하여 경계를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삼가 듣건대, 조종조로부터 있어 온 궁중(宮中)의 여러 가지 엄한 법식과 아름다운 규례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폐지되고 다시 예전의 관례(貫例)가 없어져 버렸으므로 내시(內侍)와 궁인(宮人) 가운데 전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사로이 탄식하면서 몰래 슬퍼하는 이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또 전하께서 세세한 완호(玩好)에 마음을 두시어 공장(工匠)들이 매양 대내(大內)에 머물러 있고 제반 역사(役事)가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이 사실입니까.
아, 사람의 마음은 두 군데에다 동시에 쓸 수 없는 것이어서 여기에다 쓰면 저기에서는 잘못 놓치게 되고 동쪽에 전념하면 서쪽에는 없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이 이미 다른 일에 사역(使役)되었다면 덕업을 닦고 연마하기 위해 계속 경건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공부가 태만하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원자(元子)께서 지금 어린 나이이시니 표솔(表率)하는 방도가 오로지 전하께 달려 있으므로 한 번의 어묵(語默)과 동정(動靜)을 더욱 하나라도 올바른 데서 나오게 함으로써 보고 본뜨고 취하여 본받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 십분 경계하여 더욱 힘써야 될 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의 차본(箚本)을 살펴보니 저도 모르게 모골(毛骨)이 송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분노하여 한을 품게 된 것이 오로지 헌부의 계사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헌부의 계사는 실로 신에 연유된 것이니, 신이 어떻게 감히 남에게 미룬 채 태연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각의 관원은 일을 당하면 그때마다 논하면서 권귀가(權貴家)도 피하지 않는 것이 본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권귀가에서는 의당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져 법에 의거 허물을 받아들이되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비난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권귀가에서는 오직 겸손하고 낮추고 손순(遜順)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 왔고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상서롭지 못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의 권귀가에서는 이 의의를 깊이 익히지 않고 있습니다.
근일 중외에 서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령 김익렴(金益廉)이 죄를 얻은 것은 실로 전에 올린 소장에서 일컬은 장일(張佚)에 관한 한 조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아,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익렴의 소장에서 이미 신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신이 감히 그 사이에 혀를 놀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또한 어떻게 감히 작은 혐의를 피하여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전하로 하여금 그에 대한 시말(始末)을 들을 수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 보양관(輔養官)을 설치할 적에 신처럼 용렬하고 비루한 사람도 그 직임을 더럽히게 된 점은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고, 물의가 모두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척완(戚畹)의 신하는 이 직임에 참여시킨 적이 없다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책하기도 하고 신이 함께 모사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의자(議者)들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삼사의 관원들이 본디 광규(匡糾)하는 책임이 있으니만큼 동렬(同列)의 요원(僚員)이 말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이 물러나와 돌아온 뒤에 익렴이 이에 운운한 것은 그의 타고난 품성이 가벼워 스스로 과감하게 말할 것을 기약하면서 험난한 길은 조심해서 달려가야 한다는 계책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고, 이것이 화(禍)를 취하는 길이 되고 말았으나, 익렴이 아니었으면 전하께서 어떻게 이런 등등의 말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 오늘날 백성들의 고달픈 일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을 뽑아서 말한다면 신역(身役)에 대한 징포(徵布)와 조적(糶糴)에 대한 포흠(逋欠) 이 두 가지에 불과합니다. 몇 명의 식구가 단촐하게 사는 백성의 집에서 경작하는 전지(田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년 내내 부지런히 힘써서 풍년을 만나더라도 빚을 갚고 부세를 내고 나면 곡식은 벌써 바닥이 나기 때문에 부득불 다시 전택(田宅)을 팔아서 신포(身布)를 바치고 있습니다. 전택을 팔고 나면 다시는 지탱할 길이 없어 처자식을 이끌고 울부짖으면서 떠돌게 되는데도 친척은 감히 만류하지 못하고 이웃도 머물러 살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의지가지 없이 도로(道路)에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상납(上納)할 때가 되면 여러 상사(上司)와 각 아문에서 문부(文簿)를 조사하여 신포(身布)를 징수하게 되는데 그 명령의 엄함이 호랑이 같아서 수령으로서는 어떻게 계책을 세울 길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잘못된 전례를 따라 매질을 낭자하게 하면서 오직 독봉(督捧)만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거북의 등에서 털을 뽑아 털옷을 만들려 하면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 등껍질만 뚫리고 만다는 격인 것입니다.
신이 근래 듣건대, 어떤 시골 여인이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또 하나는 손에 잡고서 어느 외로운 무덤 앞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것이 마치 영결(永訣)하는 듯했는데 그 울음 소리가 가슴을 찢는듯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곳을 지나던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사연을 물었더니, 그 여인의 말이 ‘나의 남편이 병들어 죽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도 대정(代定)을 하지 못하여 아직도 백골(白骨)의 신포를 바치고 있는데 지난해 일곱 살 난 아이가 세초(歲抄)에 들어갔고 등에 있는 네 살 난 아이도 올해 세초에 들었습니다. 종래 기필코 본토(本土)에 보존하고 있으려 했던 것은 단지 죽은 남편의 외로운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결코 감당할 수 있는 형세가 없어졌습니다. 장차 유망(流亡)을 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남편의 무덤에 와서 영결을 고하는 것입니다.’ 하고서 하늘을 부르면서 통곡하므로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은 딱하게 여겨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도 이 말을 들으시면 슬퍼서 마음을 상하시리라 여겨집니다. 궁벽한 시골에 이런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노약자(老弱者)는 죽어서 구렁에 나뒹굴고 건장한 자들은 모여서 도둑이 되어 곳곳에서 절발(竊發)하고 있는 것이 좀도둑의 부류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외구(外寇)가 오기를 기다릴 것 없이 반드시 흙더미가 무너지듯 하는 환란이 있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황건(黃巾)·갈영(葛嬰)의 무리도 어찌 기곤(飢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마는 결국에는 남의 나라를 망치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제때에 방도를 강구하지 않았다가 하루아침에 변이 발생하게 된다면 군신 상하가 피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괴로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견책이 잇따라 이르는 것은 의혹스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조용히 국사를 생각하여 보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조정의 사부(士夫)들 사이에 의논과 사상이 백갈래 천갈래여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낼 뿐 지성을 다하여 담당하고 나서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다 외방에는 백성이 탄식하고 군대가 원망하는가 하면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반드시 망할 형세임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을 것이라고는 성상의 자질이 인자하고 현명하여 결코 망국(亡國)의 임금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뿐입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이 마음을 확립시켜 분발하여 큰일을 하시고 구병(舊病)을 혁거(革去)하여 새로운 공력을 더욱 힘쓰소서. 그리하여 천수(天數)로 돌리지 마시고 시세(時勢)라 핑계하지도 마시고 의연한 자세로 방본(邦本)056)  을 공고하게 하시며 세도(世道)를 만회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소서. 잗단 오락 때문에 원대한 계획을 잊지 마시고 헛된 겉치레 때문에 진실히 하는 공부를 폐하지 마시어 계속 더욱 면려하여 날로 증진되고 달마다 새로워지게 된다면 대본(大本)이 이미 확립되어 온갖 일이 잘 수거(修擧)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민심도 저절로 열복하게 되고 천의(天意)도 또한 기뻐하게 될 것이니, 오늘날의 재변을 없앨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장차 국운(國運)이 무궁히 이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장 내용이 근간(懃懇)한 것을 열람하고 나니 경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충(誠忠)을 알 수 있었다. 띠에 써서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익렴의 말이 중외에 서로 전파된 것이 이러하니 세도가 한심스럽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민생이 곤궁하여 지쳤다는 등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어의(語意)가 더욱 간절하다. 의당 묘당과 상의하여 조처하겠으니, 경은 정사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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