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18권, 효종 8년 1657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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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을해

경상 수사 노정(盧錠)이 사조하니, 직접 만나 효유하여 보냈다.

 

2월 3일 병자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홍명하가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에서 정치를 하는 요점은 오직 관직에 적임자를 고르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인재가 부족한 걱정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어, 목사(牧使)나 부사(府使)도 역시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5품 이상의 관원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빠진 자리에 따라 임명했으나, 이것은 상규(常規)가 아닙니다. 지난번 경시관(京試官)을 차출하던 때에도 병조 낭관으로서 청현직에 쓸 만한 자를 주의하여 임명했는데, 사조(辭朝)한 뒤에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으나 역시 그 적임자가 없었으니,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만드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아도 실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종으로서 파직된 자가 무려 60여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는 죄의 경중(輕重)이나 시기의 구근(久近)에 따라 수시로 변통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이것이 혹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다만 이것은 오직 성상께서 재량껏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또 주군(州郡)에 적합한 인재를 특별히 선발하는 일은 자연 옛 법도가 있으니,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가운데 재국(才局)이 있고 명성과 실적이 가장 뛰어난 자는 그 관질(官秩)의 고하를 따지지 말고,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선발하게 해서 인사(人事)를 할 때 등용해서 쓰는 터전을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4일 정축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5일 무인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산 부사(平山府使) 권제(權躋), 갑산 부사(甲山府使) 정호신(鄭好信), 고부 군수(古阜郡守) 유천주(柳天柱), 영월 군수(寧越郡守) 유창진(柳昌辰), 초계 군수(草溪郡守) 최정해(崔挺海), 예안 현감(禮安縣監) 권윤(權碖), 옥과 현감(玉果縣監) 윤이선(尹以宣), 사천 현감(泗川縣監) 이석로(李碩老), 장흥 현감(長興縣監) 민주면(閔周冕), 해남 현감(海南縣監) 박상질(朴尙質), 홍산 현감(鴻山縣監) 이방진(李邦鎭) 등이 사조하니, 직접 효유하여 보냈다.

 

상이 대신과 비변사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삼남(三南)의 속오군에게 급복(給復)하는 것의 편부를 물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가을을 기다려 시재(試才)하여 입격한 자에게 상을 주면, 비록 급복을 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은 아뢰기를,
"사천(私賤) 가운데 속오군에 편입된 자도 역시 각사 노비의 예에 따라 그 신공(身貢)을 줄여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원두표는 아뢰기를,
"그대로 급복은 계속하다가, 끝내 불편하다는 것을 안 뒤에 그만두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제각기 생각들을 모두 진술하라."
하니, 형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쌀을 거두어 나누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유성은 아뢰기를,
"이제 우선 시험해보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고, 판윤 이완은 아뢰기를,
"가을을 기다려 시재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상을 준다면, 상을 받는 자가 많지 않아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쌀을 거두어 나누어 주는 것이 혹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허적은 아뢰기를,
"뒤에 그것을 변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시행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미 명령을 내렸는데 곧 중지한다면 물론 신의(信義)를 잃어버리는 혐의가 있지만, 여러 해 시행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바꾼다면 그것은 그러면 신의를 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빨리 명령을 내려 가을이 되면 변통을 할 것이란 뜻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홍명하는 아뢰기를,
"쌀을 거두어 나누어 준다는 것도 역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급복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대사헌 채유후는 아뢰기를,
"금방 실시했다가 금방 중지한다면 이는 곧 신의를 잃어버리는 것이니 당초에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부제학 이일상은 아뢰기를,
"국가의 정령은 공평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고, 강화 유수 정치화는 아뢰기를,
"시재하여 상을 주되 점차 모든 사람에게 미쳐가면, 기예도 익숙해지고 사리도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공조 참판 유혁연은 아뢰기를,
"속오군에 편입된 자 가운데는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자가 많은데, 그 오가는 데 따라 급복을 한다면, 반드시 시행될 리가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김좌명은 아뢰기를,
"단지 삼남에만 시행하고 다른 도에는 시행하지 않으니, 조정의 정령이 균평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변통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삼남의 군졸들이 편파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하여 이런 일을 시행했던 것이다. 이제 그 폐단을 구제하는 말에 ‘쌀을 거두어 주자.’고 하는 것은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일이다.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변통하겠다는 뜻을 미리 분부해두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왕자가 자전(慈殿)을 뵈어야 하는데, 지금은 관작(官爵)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권도(權道)로 편의에 따라 불러보는 것도 불가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때 왕자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이 장차 혼인을 하려고 유배된 곳으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관작을 회복시키지 않아 예를 갖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명하가 아뢰기를,
"중시(重試)에 합격한 자 가운데 자궁(資窮)의 경우는 으레 당상관으로 올려주고, 참상(參上)의 경우는 으레 준직으로 올려주는 것이지만, 참하(參下)로 합격한 자는 근고(近古)에는 없던 일이라 전례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비지(碑誌) 가운데는 간혹 ‘6품으로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끌어다가 증거로 삼기 어려울 듯하니, 이번에 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옳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평범한 과거와는 다르니, 6품으로 승진시키라."
하였다.

 

2월 6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황해 병사 정즙(鄭檝)은 황주 향교(黃州鄕校)에서 알성(謁聖)하면서, 스스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후예라 하여, 감히 위판(位版)을 밖으로 내어다가 별도로 배례(拜禮)를 하였으니, 그 식견이 없고 망령된 행동을 한 것이 심합니다. 또 돌아오는 길에 일 때문에 화를 내어 하리(下吏)를 머리채를 잡고 영중(營中)까지 끌고 갔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청컨대 우선 파직시키고, 사람을 죽인 죄는 본도로 하여금 조사한 뒤에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즙을 추고하였다.

 

2월 7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8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배릉(拜陵)의 행차를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전 헌납 윤겸(尹㻩)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과 우애를 타고나시고 영명(英明)함이 뛰어나시며, 힘써 지치(至治)를 추구하여 밤낮으로 게으름이 없는데, 어찌해서 비상(非常)한 변괴가 거듭해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태백성과 세성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이미 큰 이변인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괴가 지난 해에 나타나더니 올해에도 또 나타났습니다. 음기(陰氣)가 태양(太陽)을 꿰뚫는 것은 변이(變異) 가운데도 매우 참혹한 것입니다. 지난 시대의 일은 멀어서 미칠 겨를이 없지만, 우선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으로 보아도 그 부험(符驗)이 틀리지 않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 같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 재앙을 구제하는 방책으로 신은 어떤 것이 시급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면 하늘이 위에서 노한다.’ 하였고, 또 ‘원기(冤氣)가 하늘에 이르면 그것이 맺혀서 요기(妖氣)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민생(民生)을 보살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시무(時務)로 삼아, 진실로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바가 있으면 부지런히 강구하고 순서대로 거행하여, 크게 민심을 위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란을 미리 대비하는 일은 국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치병(治兵)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만 가지나 됩니다. 백성은 곧 군사요 군사는 곧 백성이니 군민(軍民)이 자연 일체(一體)인데, 농민을 몰아다가 부리면서 그 백성을 단속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일 년 농사는 10곡(斛)의 곡식을 넘지 못하는데, 그 10곡의 곡식으로 신역(身役)을 갚고 또 부역(賦役)을 갚습니다. 거기에다 비록 포대기에 쌓인 자식이라도 있으면 모두 한정(閑丁)에 편입되어 또 그 자식의 역(役)까지 갚아야 하니, 그 나머지 먹고 입을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집이 텅 비어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합니다. 게다가 군장(軍裝)이 조금이라도 정밀하고 예리하지 못하거나 의복이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영장이 순시를 하다가 낭자하게 매를 칩니다. 이 때문에 혹 우마(牛馬)를 전당잡히거나 혹 전답(田畓)을 팔아서 병장기와 의복과 장속(裝束)과 양식을 마련하며, 길거리에서 피곤하게 돌아왔다 다시 가고는 하여 거의 쉴 때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 영장들이 적임자가 아니라서 오로지 독촉할 줄만 알 뿐 무마할 줄 몰라,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고생하여 그 원망의 하소연이 길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그들이 난을 당해 윗사람을 위해 죽기를 바란다면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영장을 만약 혁파할 수 없다면 영장을 잘 선택하고 다시 절목을 정하여 오로지 무휼에 힘써 백성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이나마 군민(軍民)의 심정을 위안하는 것이 혹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 살펴서 선처하소서.
추쇄하는 일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할 것은 없지만, 원근(遠近)이 시끄럽고 온 나라가 소요스럽습니다. 민심을 이미 잃어버리고도 근심과 원망이 아직 남아 있으며, 국가에서 얻은 것도 이미 많습니다. 도감을 설치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속히 도감을 혁파하고, 비록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것이라도 모두 씻어주어 외방 백성들의 민심을 위로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언(進言)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술한 일들에 대해서는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2월 9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0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1일 갑신

개성 유수 최혜길(崔惠吉)이 치계하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재변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시려는 성상의 지극한 뜻을 삼가 우러러 보게 됩니다. 그러니 신이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허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개성부는 비록 큰 고을이라 하지만, 지방이 작고 논밭이 많지 않아, 백성들이 농사를 일삼지 않고 오직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년이라 해도 매번 먹고 살기 어렵다는 탄식이 있는데, 지난 해에는 한 해 동안에 가뭄과 큰물이 서로 잇달아 쌀값이 매우 비싸서 한 해를 보낼 방법이 없었고, 봄이 되자 기근이 점차 심해져서 곧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비록 마음을 다해 방법을 써서 곧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나, 본부의 형세는 마치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만들려는 격입니다. 이제 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굶주린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감격한 끝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본부는 각도의 주군(州郡)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서, 이미 관청 설립에 대한 규례도 없고 또 창고에 쌓아둔 곡식도 없습니다. 1년의 수입은 단지 전세(田稅) 쌀 2백 6석(石)과 콩 2백 96석, 그리고 공전(公田)에 귀속된 반역자 집안의 땅에서 거두는 잡곡 2백여 석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의 제수(祭需)와 본부 관원의 녹봉과 오가는 관리들의 지공(支供), 그리고 객사(客使)가 올 때 허다한 접대 비용으로 쓰여 항상 부족함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죽음이 가까이 닥쳤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마음은 물론 뼈속까지 서늘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니, 곡식을 옮겨 백성을 살리는 것은 기근에 대처하는 정사 가운데 먼저 힘쓸 바입니다. 황해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은 창고의 곡식이 매우 많으니, 이제 만약 3백, 4백 석의 쌀을 본부로 옮겨준다면, 그것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겠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댓가없이 나누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을을 기다렸다가 도로 징수하도록 한다면, 일의 형세상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살리는 인정(仁政)에도 어긋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상께 아뢰어 시행케 하소서. 또 지난 날 객사(客使)가 왔을 때, 속오군의 수미(收米) 5백여 석을 빌려 썼는데 도감에서 공문(公文)을 보냄으로 인하여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엄하게 징수를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근을 구제하는 때를 당해 한결같이 징수를 독촉한다면, 일의 이치에만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은 비록 살갗을 벗기고 뼈를 부순다 해도 징수할 방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만약 조정의 은혜로 특별히 감면해서 덕의(德意)를 보여준다면, 백성들이 실제적인 은혜를 입음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호조에서 회계하기를,
"본부(本府)는 원래 비축한 곡식이 없어 달리 기근을 구제할 방책이 없습니다. 청컨대 황해도의 비축한 곡식 4백 석을 본부에 옮겨 종자곡으로 나누어주고, 가을이 되거든 이자를 받지 말고 돌려받아, 한편으로는 당장의 기근을 구제하는 정치를 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훗날 비축의 밑천거리로 삼게 하소서. 그러면 공사(公私)에 두루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훈련 도감에서는 회계하기를,
"본부에서 빌려간 군미(軍米) 가운데 지난 해 갚은 것은 단지 2백 50여 석 뿐인데, 본부에서 아뢴 대로 감면해주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2일 을유

지평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기를,
"옛날 왕가(王嘉)가 말하기를 ‘하늘에 응답하는 것은 실지로써 해야지 꾸밈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 임금께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에 혹시라도 실답지 못한 것이 있어서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우사 미리 경고를 보이심이 이처럼 간절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일은 오로지 성상께서 실덕(實德)을 닦아 실정(實政)을 펴는 데 달렸습니다. 그런 뒤에야 하늘의 위세와 노여움을 거두게 할 수 있고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며 드러나지 않은 재변을 해소하고 장래의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른바 실덕(實德)이란 진덕 수업(進德修業)하여 나날이 일삼는 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살펴보니, 성상께서는 부지런히 종일토록 지치(至治)를 도모하시니 ‘10년 동안 지치를 바라면서도 전혀 일삼는 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심과 근면함이 절실해도 실다운 효과가 더욱 먼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임금의 한 마음은 온갖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니, 진실로 우뚝하게 미혹되지 않고 먼저 큰 근본을 세우지 않으면 점차 좀먹어드는 해침이 은미한 속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그래서 희로(喜怒)가 간혹 타당하지 못하고 호오(好惡)가 혹 사사로움에 치우쳐, 연락(燕樂)을 즐기는 것이 점차 열리고 습기(習氣)의 폐해가 제거되지 않으며, 공리(功利)의 말들이 이를 틈타 앞다투어 나오고 재물에 대한 생각이 휘감아 더욱 고질이 됩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감정이 이성을 이기게 되면, 끝내는 덕업(德業)은 날로 쇠퇴하고 기강(紀綱)은 날로 문란하여 궁궐은 엄격하지 못하고 토목의 공사가 자주 벌어지고 사치의 풍조가 점차 성하며 형벌은 지나치고 아첨하는 자가 가득차서 백성의 근심과 원망이 하늘을 범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성스러운 전하께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훌륭한 조정에 혹 병폐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경계하는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치해 나가시는 여가에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생각하시어, 시험삼아 앞에서 언급한 이 일들을 반복해서 성찰하신다면, 잠잠한 가운데 어떤 은미한 일이라도 환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상의 몸에 반성해 보고 정사(政事)에서 증험해 보아서 만약 미진한 찌꺼기 비슷한 것이 한두 가지라도 남아있다면, 비록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황극(皇極)과 왕도(王道)를 극론한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형식일 뿐이요 실덕(實德)이 아닐 것이니, 상천(上天)의 신명(神明)이 그것을 내려다 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대처해야겠습니까? 오직 학문으로 이 마음을 기르고 오직 경(敬)으로 이 마음을 보존하며, 오직 군자를 친근히 함으로써 이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대개 의리와 물욕은 상호 소장(消長)하는 것입니다. 학문에 뜻을 돈독히 하면 나날이 성현(聖賢)과 마주 대하게 되어 자득(自得)의 즐거움이 있으며, 몸가짐을 경(敬)으로 하면 늠름하게 신명(神明)이 위에 계신 것 같아서 그릇되고 편벽된 잘못이 없을 것이며, 어진 사대부를 만나는 때가 많으면 경계하고 바로잡는 말을 매일 듣게 되어 비루하고 패악한 것은 날로 멀어지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심(天心)을 깊이 체득하고 사심(私心)을 제거하시어 무릇 마음에 근본하여 몸을 닦는 것들을 반드시 하나라도 실답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여 그 형식적인 것을 제거하소서. 그러면 하늘이 굽어 살펴 반드시 도움을 내려주실 것이니, 국맥(國脈)을 늘이고 넓혀 길이 하늘의 아름다운 상서를 받는 것이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남몰래 이르러 올 것입니다.
실정(實政)에 펴라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국가가 요즈음 세세한 법령을 번거롭게 바꾸어 한 번은 속오군 때문에 곤경을 겪었고 다시 추쇄(推刷)로 곤경을 겪어, 온 나라가 시끄럽고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해 유망(流亡)이 잇따르고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조정의 정령(政令)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민정(民情)으로 보면 조금이나마 안정시켜야 할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기근이 해마다 계속되어 팔도가 모두 같으며, 거기에다 객사(客使)가 장차 오게 되었는데 물자가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흘기며 서로 수근거리고 이맛살을 찡그리며 휩쓸려 다니니, 한 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신은 이미 유리된 민심이 더욱 유리되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근심이 있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고금 천하에 가장 잃기 쉬운 것이 비록 인심이라 해도, 가장 쉽게 감동시킬 수 있는 것 역시 인심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을 바꾸는 기틀은 자못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왕업(王業)을 지키기 어려움과 소민(小民)을 보호하기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매일 보상(輔相)들과 함께 국가를 길이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시고, 스스로를 굽혀 선(善)을 받아들이고 사물을 사랑함에 마음을 두소서. 또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소민을 구제할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계책을 서로 참고하여 속히 변통하시고, 지극한 정성과 애틋한 마음을 가져 잗달고 비천한 말에 마음을 뺏기지 마소서. 이러한 실심(實心)을 미루어 실혜(實惠)를 베풀면, 인심은 나날이 붙좇게 되고 국가의 근본은 나날이 굳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소보(召保)는 경덕(敬德)을 부지런히 닦는 것으로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근본을 삼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으로 하늘에게 국가의 운명이 영원하기를 비는 근본을 삼았으니, 대개 국가의 흥성은 병사를 강하게 하고 재물을 넉넉히 하는 데 있지 않고 임금의 덕에 달렸으며, 국가의 패망은 적국이나 외환에 있지 않고 민심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어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2월 13일 병술

이행진(李行進)을 도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부응교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수찬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14일 정해

상은 천성이 우애스러워 인평 대군(麟坪大君)이 궁궐을 출입할 때는 마치 집안 사람처럼 예우하여, 일찍 들어가 늦게 나오는 것이 매일의 일상이었다. 상이 일찍이 함께 자전을 뵙고는 이어 시절(時節)에 희귀한 물건으로 내기를 걸고 승부를 겨루곤 하였다. 예를 들어 생과(生瓜)나 생조(生棗) 같은 것도 구해오지 못하는 것이 없었는데, 그 줄거리와 잎이 신선하기가 마치 갓 동산에서 따온 것 같았다. 궁궐의 하인들이 사사롭게 서로 다투어 민간에서 얻으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그 사실을 알았다.

 

2월 15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오늘 감시(監試) 일소(一所)에 입장할 때, 한 유생(儒生)이 사람에게 밀려 밟혀 죽었으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합니다. 대개 금란관(禁亂官)이 애초 외문(外門)을 활짝 열어놓지 않아서 유생들이 다투어 들어오도록 만들었고 심지어 넘어져 죽게까지 하였으니, 금란관은 그 죄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6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우연히 대궐 아래를 지나다가 서장(西墻)을 수축하는 공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혼자 생각하기에, 재변의 참혹함이 오늘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는 마땅히 군신 상하가 마음을 고치고 자신을 반성하여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경계를 받들어야 할 때인데, 토목 공사를 하필이면 이런 때 하는가 하였습니다. 비록 그것이 성상의 효성스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부모에게 검소하게 봉양하는 지극한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해와 올해가 무지개의 변괴가 있는 것은 다르지 않은데, 작년에는 공사를 그만 두었다가 올해에는 계속하여 행동이 같지 않으니, 여기에서 성상의 마음이 지난 해의 천변에 별탈이 없었던 것에서 태만해져 점차 재이를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고 여기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보존하느냐 버리느냐 하는 갈림을 천지 신명께서 어찌 내려다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이미 새로 증축하는 것이 없고 공사도 장차 끝나가니, 비단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간언해도 지난 일에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신하된 사람의 정리로도 빨리 큰 공사를 완성하여 대비를 받들어 궁침(宮寢)의 위의를 약간이나마 바로잡고 삼조(三朝)의 뜻을 조금이나마 편안케 해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서원(西苑)의 공사를 오늘날 다시 시작한 것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그 시기가 아닙니다. 지세(地勢)가 높은데다 공사가 적지 않으니 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누군들 놀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인심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천의(天意)가 순하게 보아주지 않는 법입니다. 우러러보면 하늘은 바야흐로 노여움과 경고를 보이고 있으며, 굽어보면 백성들은 기근으로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때 갑자기 인부가 산을 덮을 정도로 동원되어 힘쓰는 소리가 땅을 울리고, 긴 담장을 둘러쳐 산봉우리를 감싸 이어지니, 하늘이 굽어보시고 반드시 내 노여움에 경건하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고, 백성들이 보고 듣고서 반드시 우리들의 죽음을 불쌍히 여긴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과 모습을 어찌 공구(恐懼)하는 도리이며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는 뜻이라 하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신하들은 간혹 그 부득이한 실정을 우러러 이해한다고 해도, 백성들이 보거나 먼 외방에서 들을 때 과연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이제 승도(僧徒)들이 모두 모여 판축(板築)을 방금 시작했으니, 어떤 사람은 혹 이미 해놓은 일이 아깝고 많은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비상한 재변이 있으면 반드시 비상한 거조가 있어야, 이에 조금이나마 하늘과 백성들의 소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와 같이 결정하기 어려운 곳을 시원하게 결단하여 공구 수성의 실다운 노력을 다해야 하니, 자잘한 이유들은 논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에 그날로 즉시 중지시키기를 요청하자는 뜻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여 의논하였는데, 의논이 대개 한 가지로 통일되었으나 집의 심세정(沈世鼎)은 시종 성상을 직접 만나뵙고 의논드리자고 답하였습니다. 이해(利害)나 가부(可否)를 애초부터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틀이나 왕복하면서 머뭇거리며 미루기를 두세 차례나 하여 끝내 지연되었으니, 이 모든 일은 모두 신의 말이 신뢰받지 못한 데서 초래된 것입니다. 계속 직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심세정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그제와 어제 잇따라 지평 이민적의 간통(簡通)을 보았는데, 당장 건축을 중지하도록 요청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재변이 잇따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시기를 당해 담장을 수리하는 공사를 하는 것은 진실로 적당한 때가 아니지만, 이 공사는 부득이한 데서 나왔고 공사도 곧 완공될 것이며 인부들도 모두 모였으니, 담장을 쌓는 것은 단지 잗달은 일일 뿐입니다. 일의 형세로 살펴보면 깊이 따져보는 것도 무방할 것 같아서 전후로 보낸 글에 직접 만나서 의논하자고 답하였던 것인데, 마침 국기(國忌)를 당하여 개좌(開坐)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민적의 피혐하는 글을 보건대 신이 머뭇거리며 미루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겨 태연히 직책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지평 정식(鄭植)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제 수리하는 공사는 진실로 부득이한 상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지만, 담장을 쌓는 것은 원래 급한 공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혹 중지하도록 명해 재변을 당하여 불안해 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누군들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뜻이 이러하므로 어제 동료의 간찰에 대해 잘 알았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료가 이 때문에 피혐하였으니, 신이 어찌 홀로 태연하게 모른 체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박세성은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제 서장(西墻)의 공사는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늘이 노여워하시고 백성이 원망하는 날을 당하여 공사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 중지를 요청하는 동료의 의견은 진실로 불가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리하는 장소는 지세(地勢)가 좁고 얕아 서로 빤히 보이는 곳이라 담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도감(都監)의 관원으로서 그 형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반을 살피고 역군(役軍)을 점검하는 일을 제가 직접 담당했으니, 태연히 거기에 따라 동참하여 국외(局外)에서 방관하는 사람과 같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어렵게 여긴 까닭입니다만, 일을 미룬다는 배척을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장령 오두인(吳斗寅)도 역시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민적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니, 간원이 아뢰기를,
"공사가 부득이하고 많은 사람을 해산시키기 어렵지만, 마침 재변을 당한 때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에 어긋남을 보고 공구하는 실다운 모습을 다하기를 바랐으니, 이민적이 국가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동료들이 머뭇거리고 미룬 것이야 그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심세정은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것을 한 마디로 결정할 수 있었는 데 두세 차례나 머뭇거리고 미루었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정식은 간통(簡通)에 대해 잘 알았다고 답하여 의견의 차이가 없음을 표시했으니, 동료가 피혐한 이상 형세상 가만히 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박세성은 이 일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아 그 일의 형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 억지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니, 역시 자신의 소견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평 이민적·정식, 장령 박세성·오두인은 출사하게 하고, 집의 심세정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서장(西墻)을 쌓는 것은 결코 알맞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지혜롭고 어리석음은 달라도 인심에는 자연 같은 것이 있으니, 우러러 보면 하늘은 바야흐로 경고를 하고 굽어보면 백성은 굶주림에 위태로우니, 이 때 이 공사를 하는 것이 어찌 성상의 마음에 편안하시겠습니까. 마음에 불안한 것으로 하늘에 호응해서야 그것이 어찌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까. 궁내(宮內)의 공사는 비록 부득이하더라도 또한 성상께 바라는 것은 소박함을 힘써서 하늘의 경계를 받드는 것인데, 하물며 외원(外苑)을 쌓는 것은 중지할 수 있는 것인데도 오히려 중지하지 않고 계십니다. 아, 이미 형체를 드러낸 하늘의 꾸짖음이 나날이 절박하고 재변을 구제하지 못한 근심이 다달이 이어지며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심정이 모두 애통하고 근심스러운데, 바로 이 때에 크게 궁원(宮苑)을 쌓아 산등성이를 이어가고 영차 소리가 땅을 흔들고 판자와 삽이 산에 가득하니, 그 공비(功費)의 다소를 막론하고 이런 행동과 모습이 어찌 공구 수성하는 뜻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난 해에는 비록 부득이했는데도 특명으로 중지했는데, 올해는 비록 그만둘 수 있는데도 또 중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바라건대 정관(貞觀) 초년(初年)으로 모범을 삼으라.’ 하였으니, 10년 사이에 앞뒤가 서로 다른 것은 옛 사람도 오히려 깊이 경계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지난 해와 올해가 얼마나 되는 세월이기에, 성상의 마음을 보존하느냐 버리느냐 하는 사이에 경건함과 소홀함이 어찌 이처럼 서로 다른 것입니까. 이것이 신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깊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깊이 성상의 생각을 더하여 빨리 담장을 쌓는 공사를 중지해 하늘의 노여움에 대응하고 백성들의 원망을 해소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0일 계사

윤강(尹絳)을 대사헌으로, 권시(權諰)를 집의로, 권대운(權大運)을 사간으로, 이증(李曾)을 장령으로, 민유중(閔維重)·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삼았다. 전 대사간 민응형(閔應亨)과 전 참판 한필원(韓必遠)에게 모두 가의(嘉義)의 자급을 더해 주었는데, 나이가 80이 되었기 때문이다.

 

2월 21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절도(竊盜) 이광필(李光弼)이 옥중에서 상변(上變)하니, 대신과 금부 당상 및 양사의 장관을 명소하여 궐내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당초 광필이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의 금병풍(金屛風)과 연갑(硯匣)과 홍전(紅氈) 등의 물건을 훔치니, 대군의 집에서 포도청에 신고하여 잡았다. 죄가 사형에 해당되자, 광필이 상변을 가탁하여 유사종(柳士宗)과 김기현(金己賢) 및 자기의 얼제(孼弟)인 광헌(光憲) 등 여러 사람을 거짓으로 끌어들였다. 드디어 모두 붙잡아다 물으니, 과연 모두 날조한 것이었다. 이에 명하여 광필을 엄하게 심문하자, 광필이 자복하니 드디어 무고죄(誣告罪)로 처형하였다.

 

고부(古阜)의 유학(幼學) 김양기(金良器) 등이 상소하기를,
"충신(忠臣)과 절사(節士)에 대해 그 고향에 사당(祠堂)을 세워주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이며, 사액(賜額)하여 포장(褒奬)하는 것은 국가의 법도입니다. 충신(忠臣) 증 이조 판서 송상현(宋象賢)과 증 형조 판서 신호(申浩)와 증 우찬성 김준(金浚)은 본군 사람입니다. 이 세 신하는 행적이 없어지지 않았고 국가에 좋은 사책이 있어서 사람들이 누구나 보고 듣는 바이니, 실로 신들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송상현은 대간과 시종 출신으로 동래(東萊)를 맡아 다스리고 있다가 임진년 난리에 가장 먼저 왜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조복(朝服)을 입고 걸상에 앉아 몸소 적을 쏘면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는 무겁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혜는 가볍다 하여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죽을 때까지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적들도 그를 의롭게 여겨 곧 그를 해친 자를 죽이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나무를 세워 표시하였습니다.
신호는 젊은 나이에 붓을 던지고 나라를 위할 뿐 죽음도 잊고서 두 번이나 해전(海戰)에 나가 문득 기이한 계책을 내더니, 끝내는 명나라 장수와 함께 남원(南原)을 지킬 때 미리 이름을 써서 의대(衣帶) 속에 넣어 자기 집 사람에게 보내고, 그 성이 함락될 때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김준은 혼조(昏朝) 10년 동안 전야(田野)에 숨어 지내다가 역적 이괄(李适)의 역변에 적은 군대로 홀로 전진하여 안주(安州)를 방어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닥쳐오자 성에 이르러 한 마디 말을 하니 항복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으며, 힘껏 싸우다 화살이 다하자 불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습니다. 그 아비는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죽었으며, 첩은 남편을 위해 죽었으니, 한 집안에 삼강(三綱)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아, 이 세 신하가 나고 자란 땅에 어찌 한 고을에서 보답하는 제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재목을 모으고 장인(匠人)을 모아 사우(祠宇)를 완성하였으니, 봄 가을로 향불을 피울 때 제사할 장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호남(湖南)의 여러 군에서 임진 왜란과 정유 재란 때 의리를 세워 적병을 토벌하고 몸을 던져 나라에 보답한 사람으로 고경명(高敬命) 부자와 김천일(金千鎰)·조헌(趙憲) 등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소재지에 따라 사당이 세워져 제사를 받으며 모두 사액(賜額)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청컨대 해조에 명하여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 상소를 예조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대신들이 모두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사액을 명하여 ‘정충(旌忠)’이라 하였다.

 

2월 22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3일 병신

이해(李澥)를 판의금부사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5일 무술

서울에 큰 바람이 불었다.

 

2월 26일 기해

김수항(金壽恒)을 승지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악(經幄)과 서연(書筵)은 그 직분이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이니, 입직한 관원은 그 자리를 감히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된 규례(規例)로 말미암아 간혹 계품(啓稟)할 일이 있어서 낮에 출사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만약 두 명이 모두 겸하여 주간하는 일이 있다면 하루씩 교대로 행공하고 함께 나가버리지 못하는 것이 역시 요즈음에 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과거의 방목(榜目)이 대궐에 도착했을 때 춘방(春坊)에 입직인 두 관원이 모두 낮에 출사한다고 나가버려서 방목을 그대로 머물려두고 세자궁에 들이지를 못했으니, 일의 체모로 따져보건대 매우 놀랍고 해괴합니다. 당일 입직인 두 관원을 모두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7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지사(冬至使) 윤강, 부사 이석(李晳), 서장관 곽제화(郭齊華)가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부수찬 민정중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달 촌백성에게 들으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을 모두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얼마 뒤에 저보(邸報)를 얻어보니 과연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해란 것은 모든 양(陽)의 종주이고 정월(正月)은 한 해의 으뜸인데, 사특한 요기(妖氣)의 침범이 해마다 이와 같으니, 그 재변의 참혹함과 근심과 두려움의 깊음은 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들으니, 조정에서 놀라는 것은 크게 전과 같지 않습니다. 신이 하나하나 들어서 낱낱이 진술하지 않아도 진실로 전하께서 스스로 안으로 반성하고 밖으로 살펴보시면, 반드시 그 전과 같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지난 해에 놀라서 삼간 것이 과연 재변을 눌러 해소시켰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혹 그렇지 못한 점이 있을 듯한데 이제 또 천연스럽게 소홀히 보아 도리어 지난 해에 했던 대응보다도 못하니,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 고쳐 도모할 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어제만 못하고 올해는 지난 해만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을 끌어간 뒤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리켜 상서(祥瑞)라 하여 축하를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천심(天心)이 한 번 끊어지면 멍에를 풀 곳이 없을까 두려우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곧 통곡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 태양이 사기(邪氣)의 침범을 당해서는 안됨은 무릇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하찮은 백성들도 모두 놀라서 말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우리 전하처럼 성명(聖明)하신 분이 한 나라의 주인이 되고 만 백성의 위에 계시면서 유독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실 리 있겠습니까. 만약 지난해 증험이 없었으니 지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마음으로 소홀히 여기는 것이 곧 재앙이 생겨나는 곳입니다. 실로 하늘이 우리 전하의 마음을 유인하여 여기에 이르게 하고 장차 우리 국가의 운명을 끊어버리려는 것이니, 오히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아, 우리 전하께서 어찌 이렇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는 마음속으로 상심하고 놀라고 계시면서 단지 정사와 호령에 드러내지 않고 계실 따름임을 잘 압니다.
신은 한 마디 말을 아뢰어 우러러 전하께서 수성(修省)하시는 데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언로가 열렸느냐 닫혔느냐는 그대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현들의 훈계가 경사(經史)에 실려 있어 그 사실을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는 것이라 신은 번거롭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말씀으로 《효경》에 보이는 것이 가장 분명하고 절실한데, 그 말에 ‘천자에게 간쟁하는 신하 7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해도 그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해도 그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대개 간쟁하는 신하가 그 국가의 전복이나 위기를 구제할 수 있으며 임금은 그 간언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비록 간쟁하는 신하가 있더라도 간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용봉(龍逢)이나 비간(比干) 같은 직신(直臣)인들 어찌 걸(桀) 주(紂)의 멸망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7인, 5인이란 숫자는 이 정도면 족하다는 말이 아니니, 임금이 되어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자가 어찌 온 나라가 모두 간쟁하는 신하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우선 간략히 줄여 말하여, 그 숫자가 만약 7인이나 5인이 되지 않으면 역시 그 나라를 잃고 그 천하를 잃어버림을 구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 따름입니다. 오직 저 한 사람으로 만 백성에게 오만하여, 능히 스스로를 똑똑하다 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한 명의 선비를 용납하거나 한 마디 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미치광이나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임금의 덕에 있어서 간언을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진언(進言)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매양 그 임금으로 하여금 선(善)을 갖고 허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선을 칭송하지 않고 곧바로 그 허물을 들어 임금이 고치기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는 자는 그 신하가 자신의 허물을 열거하는 것을 보고는 혹 비방한다고 여기고 혹 원망한다고 여기며, 혹 그 악을 소문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혹 자신을 능멸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혹 그 명예를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그리하여 그 말을 써주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이어 그 몸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대저 그 임금에게 여러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허물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지극히 충성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는 자가 많은 것은 사의(私意)가 가려 상정(常情)이 쉽게 의혹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비유가 경문(經文)에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말한 것이 꼭 귀에 듣기 좋고 마음에 기쁘다면, 어찌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습니까. 오직 그것은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도에서 구해 보는 것인데, 자신의 마음을 텅 비운 뒤에야 그의 마음의 충성스러움을 살펴볼 수 있고 그의 말의 곧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비록 망녕되고 과격한 자도 있지만 이 역시 그 사람의 기질의 병통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본 마음을 따져보면 모두 충성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찌 소박하고 어리석으며 꾸밈새가 적은 아들이 쌀밥과 고기를 가져다 그 부모를 봉양할 때, 약간 걸음걸이가 넓거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잘못이 있다 하여 성급히 그 마음에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저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만난 것으로는 요순 시대보다 더 성대한 때가 없었으니 마땅히 중도를 벗어나는 말이 없어야 될 텐데, 도리어 ‘단주(丹朱)처럼 거만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또 ‘안일(安逸)과 욕망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으니, 이 어찌 고의로 과격하고 사실에 가깝지 않은 말로 임금된 사람을 심하게 핍박하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이치로 보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 절실하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듣는 사람이 스스로 ‘내 어찌 단주와 같으며, 내 어찌 안일과 욕망을 가르치겠는가.’ 하여, 성낸 얼굴로 거슬려 하며 ‘그렇다[兪]’ 하지 않고 절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오만하고 안일한 것입니다. 어찌 이렇대서야 순우(舜禹)의 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또 비록 그 중에는 이익을 생각하거나 명예를 팔려는 자가 있더라도 마땅히 그 말의 시비를 살펴 옳으면 쓰고 그르면 내버려 둘 뿐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명예를 팔려고 한다 의심하여, 스스로 먼저 좁은 마음으로 사람들의 간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예전에 전문(田文)이 그 집 문판(門板)에 쓰기를 ‘내가 잘못 사사로이 밖에서 보물을 얻는 것을 그칠 수 있는 사람은 빨리 들어와 간언하라.’005)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천고 제왕(帝王)의 지혜가 계명 구도(鷄鳴狗盜)의 우두머리에게도 못미치는 것입니까.
아, 사람으로써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정직하고 진실한 벗을 구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되, 오직 그 허물을 자세히 듣지 못해 그것을 모두 고치지 못할까를 두려워합니다. 이 때문에 고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아 허물이 없는 경지에 이릅니다. 반면에 불선(不善)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편파적이고 아첨하는 무리들만 찾아서 그들의 아첨을 좋아하되, 오직 그가 혹시라도 자신의 허물을 들추어낼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스스로의 허물을 가리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감추어 악(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는 허물을 들어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하나는 허물을 가려 스스로를 덮어둡니다. 덮어두면 더욱 드러나고 들어 고치면 더욱 빛이 나니, 그 궁극에 있어서는 천리(千里)의 차이가 날 뿐이 아닙니다. 이것이 계로(季路)가 허물을 듣기를 좋아한 이유이며, 정자(程子)가 그를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높인 이유입니다. 한낱 필부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임금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이 이상에서 범범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성상께서 오늘날 잘못하고 있는 일을 들어 실증하겠습니다. 신이 밖으로 멀리 나와 요즈음 일을 듣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지난 겨울에 전하는 말을 듣건대, 성상께서 경연에 나와 이르시기를 ‘수리(修理)할 때가 아님은 나도 역시 알지만 진실로 정신(廷臣)의 말과 같이 나도 부득이한 점이 있다.’고 하셨다니, 만약 과연 그러셨다면 어쩌면 성상께서는 그리도 생각이 없으신 것입니까. 신이 들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어(法語)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부드럽게 인도하는 말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의미를 깊이 사색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기뻐하기만 하고 사색해 보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셨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거나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 혹 깨달았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고치거나 사색할 수 있는 것인데, 따르고 좋아하면서도 고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끝내 고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아, 무릇 사람의 허물은 모두 모르거나 살피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로 혹 알거나 살피고서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 어찌 다만 허물이 되는 데서 그치겠습니까. 한 가지 일에서 조짐이 생겨 백 가지 일이 다 그렇게 되고, 한 생각에서 싹이 터서 백 가지 생각에 모두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신은 실로 수리(修理)를 하는 것이 때가 맞지 않음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성심(聖心)이 가려진 것을 근심합니다.
신이 또 전해들은 바로는, 간언하는 신하가 올린 글에 열무(閱武)를 해서는 안된다고 한 말이 있자, 성상께서 경연에 나가 이르시기를 ‘이것은 반드시 그 형(兄)이 유도한 것일 것이다.’ 하셨다니, 만약 과연 그런 말을 하셨다면 성상의 말씀이 어쩌면 이처럼 잘못된 것입니까. 이것은 장차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부형(父兄)들이 가르치고 권면한 일에 대해서 입을 봉하고 모두 한 마디 말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쇠퇴한 시대의 사람들은 풍절(風節)이 적어, 비록 임금이 너그럽게 포용하고 말을 하도록 인도해도 오히려 정직한 의논을 듣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더구나 감옥에 넣고 연좌하는 법을 더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전하의 이 말씀은 매우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나아가 대신(大臣)의 차자에 대해 비답하신 것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모두 놀랍고 두려워 얼굴색이 변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차마 듣고 싶어하지 않게 하였으니, 또 얼굴 빛이 변했을 따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노 정공(魯定公)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임금노릇하는 데 즐거움이 없지만, 다만 말을 하면 아무도 어기는 사람이 없는 게 즐겁다.」는 말이 거의 나라를 잃기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아, 성상께서 신민들에 대해 만약 불평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말이 있으시면 때때로 임금노릇하는 데 즐거움이 없다는 뜻을 사명(辭命)에 드러내 거부하시면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니, 어쩌면 성상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공자께서 지적하신 것에 이처럼 가까운 것입니까. 신은 실로 간언을 받아들이심이 편협한 것이 걱정이 아니라, 성상의 마음에 누가 있는 것이 걱정입니다.
아, 이 세 가지로 보건대, 오늘날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원인은 아득하여 알 수 없는 이치나 잗달은 사무의 말단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 마음의 은미한 생각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뉘우치고 힘써 극복하여 마음을 크게 갖고 깨끗이 하여, 모든 일의 근본을 확립하고 여러 사람의 선을 채택하소서.
아, 오늘날 언로가 막혔으니,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는 것을 누가 아뢰고자 하겠으며, 전하께서 완강히 거절하시는 것을 누가 저촉하려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생각을 너그럽게 가지고 부드러운 얼굴로 받아들이신다면 사람들이 모두 전하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할 것이요, 전하께서 계산하면 사람들이 늘 언행을 삼가서 말을 아니하려 할 것입니다. 재변이 거듭 발생하고 망할 조짐이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바르고 곧은 말로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막힌 마음을 진달하여 사방에 알려서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 쟁론하는 기풍이 있고 성상께는 간언에 따르는 미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서, 백성들이 보고 감격하며 희망을 걸 터전을 삼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한두 구절의 차자가 측근들에게서 나와 옛 법도나 따르고 관직의 책임이나 메꿀 따름이니, 신은 감히 이것이 실로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천심(天心)에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심지어는 관직의 책임조차 내버리고 고사(故事)도 따르지 않고서 묵묵히 있으면서, 그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해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양하니, 이 어찌 관직을 설치하여 간하는 말을 하도록 한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맹자 말에 ‘인의(仁義)로 왕에게 말을 하지 않는 자는 불경(不敬)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는 간쟁하는 신하와 곧은 말이 없으니 어찌 전하를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그 부드럽게 하는 말만을 좋은 얼굴로 받아들이며 노여워하지 않으시니,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자신을 이처럼 박하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나라를 다스리면서 선비들로 하여금 말을 겸손히 하게 한다면,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고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시어 크게 총명을 여시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키시며, 지난 날 간언을 드렸다가 죄를 얻은 신하들을 모두 거두어 수용하여 사방(四方)의 간언을 불러들여 치도(治道)에 통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충직한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여기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8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9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안후열(安後說)을 지평으로, 박세성(朴世城)을 필선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겸문학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사서로 삼았다.

 

2월 30일 계묘

상이 대신과 원접사 허적(許積)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염초(焰硝)의 금법(禁法)을 범한 일 때문에 청나라가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이제 북사(北使) 네 명이 온다니, 매우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해서 사신을 네 사람씩이나 보내는 것인가?"
하자, 우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전부터 그 일이 중요하면, 이와 같이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사문할 때, 죄인 가운데 난언(亂言)을 하는 자가 없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무리들은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해 제각기 끌어들인 자가 매우 많습니다. 반드시 한편으로 유혹하고 한편으로 협박하여 선처(善處)를 받을 수 있는 바탕으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비단 염초에 관한 한 가지 일뿐 아니라, 저들은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주관한 대신에게 죄를 돌려 무겁게 벌을 주기를 마치 심양(瀋陽)에 있을 때 일처럼 한다면, 어찌 크게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용도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죄인들도 역시 은장(銀匠)과 가죽을 삶는 데 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기관(機關)을 잘 이용하여 일에 따라 응변하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들은 마음이 탐욕스러워 뇌물의 다소에 따라 희로가 달라지니 만약 큰 뇌물을 써서 추문(推問)을 할 즈음에 주선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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