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6월 1일 신축
상이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나는 덕이 없고 어두운 사람으로 외람되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므로 밤낮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서 멋대로 처신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재앙이 거듭 내리고 있다. 곰곰이 그 허물을 생각하노라면 실로 마음에 두렵기만 하다. 아, 5월에 서리가 내렸다니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고, 팔로(八路)에 번진 황재(蝗災)는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었으며, 우박은 해마다 내리고 수한(水旱)이 잇달고 있다. 백성이 살 길이 없게 되었으니 나라가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무지개와 별의 요사스런 변까지 있어 그 화(禍)가 더욱 심한데, 천재(天災)의 참혹함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척 안타깝다. 그 까닭을 생각해 보면 모두 내 탓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옛사람은 임금이 형편없다 하여 나라 일을 무관하게 보지는 않았다. 바라건대 경들은 더욱 다시 마음을 다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 등이 아뢰기를,
"예장(禮葬)에 관한 일이 이미 결정되고 조행(詔行)082) 이 또 다녀갔으니 큰 일이 조금은 완결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상중에 계시면서 절선(節宣)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데다가 민생(民生)이 고생하면서 얼마나 한숨을 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들도 일찍이 머리를 맞대고 걱정하면서 자그마한 힘이나마 만분의 일이라도 성명(聖明)의 큰 덕화(德化)에 도움이 되는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형편없이 용렬하여 하등 인간에 속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4년 동안 수행(隨行)하면서도 내세울 만한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이번에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곡진하게 반복해 말씀해 주시는 따스한 윤음이 지면 가득히 흘러 넘쳐, 받들어 읽는 사이에 감격에 겨워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위에 계신데도 천재가 이와 같고 백성이 이토록 원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명께서 상신(相臣)을 얻지 못해 나온 결과입니다. 신들이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우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한 채 진기시킬 재력(才力)이 없다는 것은 성명께서도 필시 남김없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어느 임금보다도 출중한 자질을 지니시고 한 시대를 다스릴 만한 덕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큰 난리를 치룬 나머지 내외의 모든 일이 한결같이 문란해지고 민심과 풍속도 모두가 나쁜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이 되는 일은 조가(朝家)에서 하는 일이 명분만 있지 실체(實體)가 없다는 점입니다.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풍화(風化)말고 다른 일은 없습니다. 풍화는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명분으로 서로 단속하는 사부(士夫)들 스스로가 또한 실행에 옮겨야만 풍화가 진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위아래가 서로 닦아야 할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사람을 임용(任用)하는 문제입니다. 반드시 실질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을 얻어야만 일의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책임 관원을 뽑을 때는 반드시 사람마다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오래 있도록 하여 그 일을 이루도록 해야만 성명께서 거행하고 싶은 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전조(銓曹)가 책임지고 반드시 실제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아 임용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생각건대 연소한 신진들에게 잘못 말한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관용을 베푸시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청명한 시대로 나아가는 첫 번째 요건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대각(臺閣)을 예우하시어 나라를 위하는 그들의 과감한 기백이 꺾이지 않도록 하소서. 이 또한 제왕의 손지(遜志)하는 실학(實學)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근본을 바르게 하는 노력을 더욱 더하시고 덕을 지닌 현인으로 정승을 바꾸시어 치화(治化)를 돕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들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내용을 살펴보고 경들이 국사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음을 더욱 알겠다. 이른바 실제적일 일에 힘쓰고 적임자를 얻으며 대각을 예우해야 한다는 말 등은 실로 오늘날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다. 내가 감히 유념하지 않겠는가. 다만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전조(銓曹)의 책임이지만, 어진 사람을 추천하여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전적으로 대신(大臣)에게 있으니, 바라건대 경들은 사양하지 말고 계속 각각 인재를 추천하여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이 계사(啓辭)한 뜻을 이조에서 승전(承傳)을 받들게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다시 합계(合啓)하기를,
"신하가 논사(論事)하는 도리에 있어 진정 국가의 안위와 무관한 일이라면, 어찌 감히 해를 넘기고 달이 지나도록 계속 떠들어대면서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까. 전일 합계에서 논한 해택(海澤)·어염(魚鹽)·면세(免稅)·복호(復戶)·사위(寺位)·시장(柴場) 등에 관한 일은 모두가 민생의 큰 병폐요, 왕정(王政)의 큰 하자(瑕疵)로써 곧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인데도 성명께서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시간이 갈수록 물정이 더욱 답답해 합니다. 이 일은 원래부터 시종 일관 강력히 간쟁하여 기필코 성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자 조사(詔使)가 관소(館所)에 있었던 관계상 우선 정계(停啓)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원래 계속 고집부리며 떠들어댄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나온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성명께서는 이에 대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그들이 법을 범하도록 놔두시고 통렬히 혁파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각 아문의 폐단은 이미 거의 혁파되었는데 어찌하여 유독 여러 궁가(宮家)에 대해서만은 이토록 망설이십니까. 한 번 더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저사(儲嗣)가 이미 결정되어 백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몇 년간 지연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다만 민생의 곤궁만을 염려하고 계시니, 이는 실로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들도 그 뜻을 받들어 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국가의 대계(大計)를 민력이 넉넉치 못하다 하여 지연시킬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금번 사신의 행차 편에 급속히 주청토록 하여 나라의 근본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면세 등의 일은 시행되어 온 지 오래 되었으니 갑자기 폐지할 수 없다. 그대들이 지금 또 논계하는 것은 지나친 듯 싶다. 아무리 해를 넘기면서 간쟁한다 하더라도 결코 윤허하여 따르기는 어렵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주청에 대한 일은 전일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호패(號牌)에 관한 법은 오로지 폐단을 줄이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백성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사목(事目)이 계하된 뒤에 곧바로 회계하지 않고 끝내 병판(兵判)이 정고(呈告)했다는 것으로 빌미를 삼고 있으니,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기는 바이다. 해청(該廳)의 유사 당상은 태만하여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잘못을 모면하기 어렵다. 중하게 추고하고 속히 의계하도록 하라."
윤6월 2일 임인
이조가 이뢰기를,
"내수사는 임금의 물품을 관리하는 곳이긴 하나, 모든 공사(公事)에 관계된 문서는 이조를 통해 발송하도록 되었는데, 조종이 이처럼 법을 창제한 뜻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조를 담당한 자가 단지 문서를 봉행하기만 하고 상세히 검토하여 보고하는 일이 없다면 이것이 어찌 또한 법을 제정한 본의이겠습니까.
과거 폐조(廢朝) 때에 내수사가 한없이 부정을 저질러 억울하게 당하고서도 호소할 곳이 없어 목숨을 끊거나 파산한 자가 비일 비재하였는데, 이는 성명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도 유풍(遺風)과 구습이 아직껏 모두 시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내수사의 차지(次知) 인원이 위로 환시(宦寺)로부터 아래로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이익만 알고 의리는 모르기 때문이니, 그들이 멋대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로서 그다지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신 등이 지금 정청(政廳)에 이르러 내수사의 첩정(牒呈) 두어 건을 접하니, 그중에 하나는 전주(全州)의 내비(內婢)가 정소(呈疏)한 것을 인하여 그 남편의 상전이 불법 침탈하였으니 이수(移囚)하여 엄중 치죄하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침탈했는지의 여부와 그 사건의 전후 시비에 대해서 신 등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비 한 사람의 정소로 인하여 사인(士人)을 갑자기 이수하여 엄중 치죄한다는 것은 사리로 미루어 볼 때 결코 타당한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도 내수사가 이수할 것을 계청하여 윤허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못될 듯싶습니다. 해조에서 쉽사리 봉행할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수사는 조사(朝士)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고는 하나 공사(公事)를 이미 계하(啓下)했는데도 이와 같이 침탈하고 모욕을 가한다는 것은 매우 안 될 일이다. 그리고 계사(啓辭) 가운데 이른바 ‘이수하여 치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경 등의 말이 참으로 옳다. 그러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수금은 하지 말고 공정하게 조사 처리해서 피차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과거 혼조(昏朝) 때에 내수사가 한없이 폐단을 일으켜 주현(州縣)을 침해하고 사부(士夫)를 모욕하였는데, 대소인을 막론하고 가슴만 칠 뿐 호소할 곳이 없어 민생의 원망이 극도에 달했다. 이제 새로운 정사를 펼쳐 청명하게 해야 할 때에 또 내비 하나가 정소했다고 하여 사자(士子)를 가두고 욕보이려 하니, 이는 전철을 답습하는 행위와 가깝지 않은가. 해조의 계사는 법을 지켜 올바르게 보고하는 체제를 온전히 갖추었는데, 도리어 부당한 하교를 내리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11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 재정-상공(上供)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과거 혼조(昏朝) 때에 내수사가 한없이 폐단을 일으켜 주현(州縣)을 침해하고 사부(士夫)를 모욕하였는데, 대소인을 막론하고 가슴만 칠 뿐 호소할 곳이 없어 민생의 원망이 극도에 달했다. 이제 새로운 정사를 펼쳐 청명하게 해야 할 때에 또 내비 하나가 정소했다고 하여 사자(士子)를 가두고 욕보이려 하니, 이는 전철을 답습하는 행위와 가깝지 않은가. 해조의 계사는 법을 지켜 올바르게 보고하는 체제를 온전히 갖추었는데, 도리어 부당한 하교를 내리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김여추(金汝秋)가 논핵당한 일에 대해서는 풍문이 허위인지의 여부를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비루한 정상은 사람마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판윤 구굉(具宏)은 감히 거만하게 정소하여 대론(臺論)과 겨루려 하였으니 그것만도 지극히 놀라운 일인데, 잠깐 정소하였다가는 곧바로 취하하려 제멋대로 진퇴하면서 마치 정원(政院)을 지휘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너무도 사체를 모른다 하겠습니다. 대간이 논핵하는데 훈신(勳臣)이 저지한다면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관을 경멸하고 정원을 지휘한 죄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구굉의 파직을 명하소서. 정원은 후설(喉舌)의 위치에 있으면서 왕명의 출납을 진실되게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소장(疏章)의 출입을 그가 하는 대로 내맡겼으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굉의 일에 대해 대간이 논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계사 가운데에도 증거로 든 것이 없다면 구굉의 진소(陳疏)는 잘못이다. 그러나 대간이 허무한 일을 가지고 그 말을 사실화하기 위하여 증거로 삼으려 하였으니, 그때의 당상으로서 어찌 묵묵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대간의 논이 허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으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억제하려는 것이 되니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구굉에게 죄를 준다면 앞으로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간인(奸人)이 있다 하더라도 필시 나라를 위해 말할 자가 없을 것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원이 즉시 봉입(捧入)하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굳이 추고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구굉의 일을 잇따라 아뢰니, 이에 체차를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여추는 시골의 일개 무식한 자이다. 대간이 풍문을 듣고 논한 것이 사실에 지나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구굉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거만스레 그를 변명해 주기 위해 상장(上章)하면서 대관과 쟁변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상은 도리어 구굉의 말이 사실이고 대간의 논을 허탄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천심(天心)이 가려진 바가 있어 그런 것인가 싶다. 더구나 지록(指鹿)에 대한 하교까지 한 것은 듣기에 더욱 놀라운데 이는 공의(公議)를 억누르고 사닐(私昵)을 신임하려는 것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 얼게 되는 법인데, 아, 그 조짐이 두렵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1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김여추는 시골의 일개 무식한 자이다. 대간이 풍문을 듣고 논한 것이 사실에 지나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구굉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거만스레 그를 변명해 주기 위해 상장(上章)하면서 대관과 쟁변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상은 도리어 구굉의 말이 사실이고 대간의 논을 허탄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천심(天心)이 가려진 바가 있어 그런 것인가 싶다. 더구나 지록(指鹿)에 대한 하교까지 한 것은 듣기에 더욱 놀라운데 이는 공의(公議)를 억누르고 사닐(私昵)을 신임하려는 것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 얼게 되는 법인데, 아, 그 조짐이 두렵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독(都督)이 내다 판 물화(物貨)와 우리 나라에서 보내 준 양향(糧餉)에 대해 전후의 양향을 관장하는 신하가 주고 문서를 명백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독이 매번 모자란다는 말을 하게끔 하였습니다. 도독이 체임될 때에 모자란다는 숫자를 과장하여 후임자에게 인계한다면 앞으로 닥칠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즉시 모 도독의 진영에 가서 매년 도독이 내놓은 은화(銀貨)와 우리 나라에서 지급한 양향을 분명히 계산하여 각각 문서를 작성하고, 문안사(問安使) 정립(鄭岦)과 공동으로 대증(對證)하여 극력 주선함으로써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의당합니다. 성준구·정두원(鄭斗源)에게 급히 하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6월 3일 계묘
상이 이조와 병조에 하교하기를,
"지난 갑자년083) 적신(賊臣)이 병란을 일으켰을 때에 인심이 놀라 흩어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충의의 선비 몇 명이 분연히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자원 출정하였다. 그들이 비록 적장(賊將)을 베거나 적기(敵旗)를 빼앗은 공은 세우지 못했으나 그 충용과 의열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었므로 가상하게 여겨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이들은 모두 녹용(錄用)되었는가?"
하니, 복계(覆啓)하기를,
"자원 출정한 14인은 거의 모두 천전(遷轉)되었습니다. 포수(砲手) 50명 가운데 28명은 이미 겸사복(兼司僕)으로 제수되었는데, 그 나머지는 궐원이 생기는 대로 전차(塡差)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자, 답하기를,
"그때 관망만 하던 무리들은 오히려 좋은 벼슬을 얻고 이들은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으니 국가에서 보답하는 도리가 어찌 이렇단 말인가. 본조(本曹)에서 하는 일이 지극히 잘못되었다. 이 14인을 수령이나 변장에 제수하거나 상당직(相當職)에 임명하여 충용을 잊지 않는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상사(上使) 이덕형(李德泂)에게 숙마(熟馬) 1필, 노비(奴婢) 6구, 밭 20결을, 부사(副使) 오숙(吳䎘)에게 숙마 1필, 노비 5구, 밭 15결을, 서장관 홍습(洪霫)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 노비 4구, 밭 10결을 내리고, 당상 역관(堂上譯官)이하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조익(趙翼)을 도승지로, 이민구(李敏求)를 좌부승지로, 이경여(李敬輿)를 사헌부 집의로, 박황(朴潢)을 홍문관 교리로, 최혜길(崔惠吉)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윤6월 4일 갑진
지평 이경의(李景義)가 아뢰기를,
"신이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정성이 하늘에 닿지 못하여 엄한 전교를 자주 내리시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합니다. 엊그제 삼가 성교를 받들건대 ‘사슴을 말이라 하는 간인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말할 자가 없을 것이다.’고 비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천리 밖에서부터 물리치기에 족한 것이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고 두려워하며 개연히 탄식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난의 조짐은 귀척(貴戚)의 교만 방자함과 언로(言路)가 막히는 데에서 빚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전대(前代)를 두루 살펴보면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하니 신의 망언이 아닙니다.
근래 전하께서는 아랫사람을 대하심에 있어 성실로 하지 않고 오직 헛된 문식만을 일삼으시는데 신이 그 대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장현광(張顯光)이 초야의 석덕(碩德)으로 소(疏)를 올려 사임하고 돌아갈 때에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는 것으로 제일의 의리로 삼았는데, 전하께서도 특별히 예우하여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가자 그의 말을 벌써 잊으셨습니다. 간원이 해조의 낭비하는 폐단을 논계했을 때 전하께서는 도리어 그 말이 원근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유감을 갖게 할까 두려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흡족해진다면 백성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것은 진정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측달(惻怛)한 전교가 빈청(賓廳)에 내려지자 대신이 언관을 예우하고 실질적인 일에 힘써야 된다는 등의 말로 정성껏 상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도 채 못되어 간관을 꺾어버리셨습니다. 전하께서 현자를 대우하고 대신을 대우하고 간관을 대우하심에 있어 모두 성실한 뜻이 없어 밖의 사람이 천심을 엿보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김여추의 비루한 정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말하기 조차 부끄러워 하고 있습니다. 대간이 풍문을 들은 것에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허위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구굉은 외척인 데다가 훈구 대신으로서 감히 조정의 일에 간여하여 아무 거리낌없이 정소(呈疏)하며 구호(救護)하였는데, 그의 기세에 눌려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아, 나랏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젠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간원이 억제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앞으로 임금을 농락하는 간인이 꼭 이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도리어 대간을 염려하고 계시니 이것이 어찌 전하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신은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천정만 쳐다보고 장탄식을 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입을 다물고 자리만 지키는 것은 참으로 신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슨 낯으로 반열에 나아가 청명한 조정에 오점을 남기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된 자는 다만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힘쓸 뿐이니, 백성이 알아주느냐의 여부는 진정 알 바가 아니다. 요(堯)·순(舜)의 백성도 오히려 ‘우리에게 제력(帝力)이 무엇이 있는가.’ 하였으니, 내가 백성의 인정을 받고 싶다 한들 될 일이겠는가. 그대들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해 한갓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대간이 일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실질적인 일에 힘써야 할 것인데 낭설을 헛되이 과장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은 자기들을 학대하는 소굴이라고 여기게 한 뒤에야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지록(指鹿)이란 두 글자는 실로 예사로운 말이 아닌데 그처럼 경솔히 사용한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조익(趙翼)이 사직소를 올리니, 답하였다.
"그대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은 이 직임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니, 사직하지 말라."
간원이 아뢰기를,
"물건을 바친 자에게 벼슬을 주는 것은 난세의 구차스런 정사로서 청명한 조정에서는 행할 일이 아닙니다. 조사(詔使)가 오게 되자 유사가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각 품(品)의 영직(影職)과 노직(老職), 변경 주민의 쇄환(刷還) 면제, 서얼의 허통(許通) 등 여러 방법으로 은(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조사가 청간(淸簡)하였으므로 받아들인 은이 전량 그대로 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은을 바친 자에게 일일이 계산하여 돌려주도록 하고 각종 직첩 및 쇄환 면제, 그리고 허통하는 등의 일을 모두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은을 거둔 것은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용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윤6월 5일 을사
집의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임금이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그 말의 공(公)과 사(私)만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에서 나온 발언이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깊이 미워해야 할 것이고, 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무리 말이 지나치더라도 곡진하게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 등의 오늘날 논한 것에 대해 공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라고 생각하신다면 드러나게 내치셔야 하고, 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따르시는 것이 마땅하니, 그 말을 배척하고 그 사람을 묶어놓으면서 끝내 대간이 억제한다는 말과 지록(指鹿) 등의 말로 억누르고야 말겠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신이 진정 전하의 이 말씀이 오늘날의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단지 뒷날의 폐단을 범연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천하의 의리에 대해서 많이 보셨고 전고(前古)의 득실을 두루 관찰하셨을 터인데, 과연 대각(臺閣)이 논사하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고 제멋대로 억제를 하거나 임금을 농락한 화가 빚어진 경우를 보셨습니까.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훗날을 걱정하는 뜻이 어찌 대각에만 치밀하시고, 다른 방면에는 소홀하시어 근심해서는 안 될 것을 근심하시고 근심해야 할 것은 근심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간언을 받아들이면 뒷날이 걱정된다고까지 염려하시는데, 그렇다면 외척을 대우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는 폐단이 없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삼가 지평 이경의가 피혐한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준엄하게 배척하시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갈수록 심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록(指鹿)이란 두 글자를 경솔하게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까지 하교하셨는데, 신은 참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또한 의혹이 없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예사로운 말이 아니니 경솔히 사람에게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 어떻게 유독 대각의 신하에게만은 살펴주지 않고 그 말을 가하신단 말입니까. 대각에 그 말을 쓰는 것은 당연하고 훈척에게 사용하면 오히려 죄가 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이목(耳目)의 신하를 훈척에 비해 훨씬 형편없이 여기시는 것이 됩니다. 권형(權衡)이란 형세상 이쪽이 가벼우면 저쪽이 무겁게 되는 법입니다. 만약 대각의 입을 다물게 하고 척속(戚屬)의 기세를 돋구어 준다면, 이는 국가의 불행이 될 뿐만 아니라 훈척에게도 복이 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처럼 나약한 인물이 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정성이 위에 이르지 못화고 말이 신용을 얻지 못해 한 마디만 뻥긋하면 잘못되기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한갓 전폐(殿陛) 아래에서 시끄럽게만 할 뿐 간언을 잘 받아들이시는 전하의 미덕을 드러내지 못하여, 중외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고 원근으로 하여금 논란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기는 날로 위축되고 국세(國勢)는 날로 떨어지며 기강은 무너지고 있으니 죄가 큽니다.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현재 상중에 계시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잔치를 벌이고 즐길 수 있겠습니까. 공조 참판 정립(鄭岦)은 황주(黃州)에 연위사(延慰使)로 갔을 때, 며칠을 계속하여 질탕하게 놀면서 풍악을 울리고 주연을 베풀었는가 하면, 잔역(殘驛)에 말을 팔아 값을 받아 수레에 싣고 갔으므로 행로(行路)에서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물의(物議)가 일제히 분개하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자 비로소 체차를 명하였다.
윤6월 6일 병오
대사헌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전일 성비(聖批)에 지록(指鹿)으로 비유하신 것은 곧 뒷날의 폐단을 미루어 극언하신 것일 뿐 오늘날의 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너무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시어 대간을 심히 꺾어 버리셨으니, 이는 너그럽게 포용하지 못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신하를 야박하게 대하게까지 되셨습니까. 신은 동료와 조용히 진차(陳箚)하여 성명께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려 하였는데, 동료가 곧바로 인혐하고 서로 잇따라 피혐하여 물러갔습니다. 따라서 신도 같은 내용으로 체직을 청했어야 마땅한데, 마침 다른 일로 피혐하였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번독하게 되었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좌부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이홍중(李弘重)이 앞장서서 통문(通文)을 돌려 도주(道主)를 배척한 정상이 지극히 무리하니, 중한 법으로 치죄한다 하더라도 진정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다만 먼 시골의 우망(愚妄)한 사람이지만 일단 유자(儒者)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처럼 무더운 때에 혹시 상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의 원정(元情)을 살펴보면 대개는 이미 사실대로 승복하였으니, 법에 의거하여 논단(論斷)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에 소견이 없지는 않다. 다만 그의 범죄 사실이 매우 중하니 경솔히 의논할 수는 없다."
하였다. 예안(禮安)의 유생 이유도(李有道)는 고 관찰사 이해(李瀣)의 손자이고 선현(先賢) 이황(李滉)의 종손(從孫)으로서 도산 서원(陶山書院)의 원장으로 있는 자이다. 경상 감사 원탁(元鐸)이 그의 사송(詞訟) 가운데 도주(道主)를 모욕한 말이 있다고 유도를 가두고 형신(刑訊)하다가 죽게 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이봉(李崶)과 이암(李巖)이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한편, 친척인 이홍중에게 부탁하기를 ‘망부(亡父)가 서원의 장으로서 그의 죄가 아닌데도 죽기까지 하였다. 어찌 여러 고을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한 도의 사람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이홍중이 원중(院中)의 제생(諸生)과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이 방백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원탁이 ‘영남의 사습(士習)이 흉악하여 멋대로 왕인(王人)을 내쫓으려 한다.’고 치계(馳啓)하니, 조정이 수창(首倡)한 유생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홍중이 마침내 붙잡혀와 3차의 형신(刑訊)을 받았다. 상이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상 일체의 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석방하였다. 원탁 역시 이 사건으로 대간의 비판을 받았는데, 얼마 안 되어 다른 일로 파면되어 돌아갔다.
윤6월 7일 정미
모 도독(毛都督) 접반사 정두원(鄭斗源)이 치계하기를,
"도독이 역관 진지남(秦智男)을 불러 말하기를 ‘산해관 군문 차관(山海關軍門差官) 조우(趙祐)란 자가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는 일로 인하여 그대 나라로 나왔다는데, 그대 나라에서 청하여 온 것인가?’ 하기에 진지남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어찌 청하여 올 리가 있겠는가.’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조우가 나의 이진(移鎭)에 관한 일로 석성도(石城島)에 도착하였으나 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막았다. 그가 혹시 외양(外洋)을 통하여 왕경(王京)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급히 알리도록 하라. 또 이 사람은 전에 귀국(貴國)에 도착하여 작폐한 일이 매우 많았다. 이번에 그를 가로막은 것은 오로지 그대 나라를 위해서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황조(皇朝)의 의논이 나의 진영을 여순구(旅順口)로 옮기려 하는데, 그대 나라에서 내가 그곳에 있기를 원한다면 나는 마땅히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대 나라에서 나를 머무르게 할 것인지의 여부를 국왕에게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국왕이 준봉(准封)된 것은 오로지 나의 공인데 준봉이 되고 나서는 나의 큰 덕을 잊고 있다. 또 지금까지 보내온 쌀 4만 석은 은(銀) 8천 냥의 값에 모자란다. 관향사(管餉使)는 속히 들어와서 변상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도독이 진영을 이동한다는 것이 과연 헛소문이 아닙니다. 조우를 가로막은 사실은 매우 놀라온 일입니다. 진주(陳奏)하여 머물기를 청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니 쉽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우선 중신(重臣) 한 사람을 문안드린다고 핑계하고 모영(毛營)으로 파견해서 사기(事機)를 살피게 한 뒤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당시 모 도독 진영의 사인(士人) 예여청(倪汝聽)이란 자가 강(姜), 왕(王) 두 조사(詔使)에게 밀고하기를 ‘모장(毛將)이 오랑캐와 결탁하여 반드시 중조(中朝)를 배반할 것이다.’고 극언하였고, 또 모장의 관하 장관(將官)으로서 선(宣)·철(鐵) 사이를 왕래하는 자 가운데에도 원망하여 배반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모장에 대한 유언비어가 파다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바야흐로 깊이 의심하던 차에 마침 조우를 가로 막았다는 말과 철병(撤兵)하여 진영을 이동한다는 것이 모두 수상쩍은 일이었기 때문에 비국(備局)이 문안사를 보내어 사기(事機)를 아울러 살피도록 요청한 것이다.
호패청(號牌廳)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이번에 시행되는 호패법은 조종조의 2백 년 동안 폐지되었던 법을 거행하여 우리 나라의 흩어진 백여 만의 백성을 결속시키려는 것이므로, 일이 이토록 중난(重難)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명께서 부의(浮議)에 동요되지 않으시고 시종일관 견지하신 덕분에 이제 대략이나마 완결을 보게 되었는데, 패용(佩用)하지 않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체로 숫자가 적을 것입니다. 일단 패용하도록 한 뒤에는 명부에 기록된 대로 대조하여 역(役)을 결정해서 부족한 액수(額數)를 보충시키는 것이야말로 결말이 지어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까지의 잘못된 전철을 바로잡아 쌓인 병폐를 제거하여 시의에 맞도록 힘쓰지 않는다면, 군사를 많이 얻게 될수록 민폐가 더욱 심해져 인심이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국가의 치란과 흥망이 모두 이번의 일에 달려 있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급무는 군사를 얻는 데에 있지 않고 오직 병폐를 제거하는 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병폐를 제거하고 군정(軍情)을 편안하게 하면 아무리 적게 얻더라도 얻는 것들이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겠지만, 병폐를 제거하지 않아 인심이 불안하게 되면 아무리 많이 얻어도 수년 안에 모두 빈 장부(帳簿)가 될 것이고, 도망가거나 물고(物故)에 의한 인족(隣族)의 폐단이 나라 안에 가득차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마시고 병폐를 제거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일을 대략이나마 경장하시어 군정(軍情)를 편하게 하시고 중외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그리고 앞서 아뢴 사목(事目)은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대부분 산정(刪定)한 것인데 현재 정고(呈告) 중이라서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달드린 것은 그저 신 등의 억견(臆見)에서 나온 것이니, 이원익에게 다시 하문하시어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영상에게 가서 문의하도록 하였다. 이원익이 답변드리기를,
"승지를 보내어 병중에 있는 신하에게 자문을 구하시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호패법을 시행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거조입니다. 만약에 조처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혼란을 빚을 것이므로 신이 일찍이 시행이 어렵다는 뜻으로 의논드렸고, 또 여러 차례 동료에게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단행하였으니, 앞으로는 오직 결말을 잘 짓도록 생각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반드시 민심을 얻는 데 있었습니다. 인심을 얻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과거에 시행하지 않았던 중대한 거조를 시행하면서 결말을 지을 무렵에 인정에 순응하지 않는 일이 되고 보면, 인족(隣族)의 침탈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몇 배나 더 침탈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열읍(列邑)이 소란하고 온 나라 안이 흉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고 보면 수습하고 진정하려 해도 다시 방법이 없게 될 것이니 신은 바로 이 점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난을 치른 이후 백성의 수가 평시의 6분의 1이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오늘날의 군정(軍政)은 평시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조치를 하는 데 계책을 세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본청(本廳)에서 지금 참작하여 변통함으로써 군역(軍役)을 수월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역(役)을 수월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없도록 하는 일이며, 새로 보충된 자에게는 별도로 대책을 세워 보전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일로서 천천히 군정(軍情)이 안정되고 군오(軍伍)가 정비되기를 기다려 점차 보완해 나가며 군액(軍額)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계책입니다. 이는 실로 심원한 우려로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계책인데, 신의 대체적인 생각도 본래 이와 같습니다.
당초 본청이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신에게 가져와 보였는데 이는 바로 신의 뜻과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한 번 훑어보고 무방하다고 생각했을 뿐, 허다한 조건을 처음부터 신이 산정(刪定)한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일일이 검토해 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 이 사목의 가부를 하문하셨는데, 이에 대한 일을 헤아려 신축성 있게 절목을 결정하는 일은 담당한 제신(諸臣)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해서 감히 논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저 대체적인 뜻만 진달드리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정경세(鄭經世), 집의 이경여(李敬輿), 장령 강대진(姜大進)·권확(權鑊), 지평 이경의(李景義)·김육(金堉) 등이 상차(上箚)하였는데, 그 대략에,
"천하의 일이란 진보하지 못하면 반드시 퇴보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날로 진보하고 퇴보가 없게 되는 것은 성(誠)이 있을 뿐입니다. 성이란 진실 무망(眞實无妄)한 것을 의미하고 유구 불식(悠久不息)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고 오래도록 견지하는 공을 쌓아 간다면 무슨 덕인들 닦지 못할 것이며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주역》에 이르기를 ‘충신(忠信)을 통해 덕으로 나아가고, 말을 닦아 그 성(誠)을 세움으로써 업(業)에 거한다.’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덕업(德業)이 장구하고 위대하며 날로 새로워지고 부유하게 되는 이유는 성(誠)이 근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말씀하시는 사이에 억양(抑揚)을 면치 못하고 계십니다. 정령(政令)을 시행하시면서 혹 겉만을 수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진실되고 허위가 없게 하는 데 있어서 옛 성인처럼 하지 못하고 계신 점입니다. 그리고 청명했던 정사의 초기에는 모든 일이 선하게 되도록 강구하시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점점 끝을 맺지 못하고 계시니 이는 전하께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는 공력이 옛 성인처럼 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자사(子思)가 이르기를 ‘성(誠)이란 사물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끝이다. 성이 없으면 사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자사를 성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자사를 성인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어디에도 정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과연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전하께서 이 점에 대해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심각하게 반성하여 성(誠)하게 되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점점 끝을 맺지 못하고 계신다.’고 일단 말의 실마리를 끄집어 내었으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반정(反正) 초기에 특별히 재성청(裁省廳)을 설치하여 국가의 비용 일체를 검약토록 하셨는가 하면, 위에 공어(供御)하는 물품도 감하고 또 감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신들이 너무 고달픈 생활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우려하자 하교하기를 ‘여염(閭閻)에 있을 때에 비교하면 고달프다고 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는 백성을 위하여 재물을 아끼려는 뜻으로서 지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제(喪祭)의 비용이나 빈객의 접대에 풍성하고 사치롭도록 힘쓰고 계시니, 이는 공검(恭儉) 절용(節用)하는 것이 처음과 같지 않은 점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백성의 목숨을 아끼시며 마치 적자(赤子)처럼 사랑하셨으므로, 살인죄를 범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잡아 가두고 엄히 처벌하여 훈신(勳臣)이나 귀근(貴近)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방백이 억울하게 사람을 죽여도 머리카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령이 멋대로 죽여도 자리에 태연히 앉아 계시기만 합니다. 대체로 관하(官下)를 죽였을 경우 일반 살인과 다른 점은 단지 목숨으로 보상하지 않는다는 점 뿐입니다. 어찌 가벼운 죄를 진 사람에게 형신을 중하게 하여 죽였는데도 전혀 문책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가엾어하는 생각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과 같지 않은 점입니다.
그리고 전형(銓衡)을 담당한 부처에 특지(特旨)를 내리시어 작상(爵賞)을 가벼이 쓰심으로써 벼슬길이 혼탁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중하게 선발하는 공도(公道)가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게 되는 점입니다. 또 안에서 말을 내거나 밖의 말을 들일 때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혹 간접적으로 행하고 있으니, 이는 궁금(宮禁)의 엄격한 법도가 점점 처음만 못하게 되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직언(直言)을 포용하시는 아량이 점점 처음보다 못하기 때문에 실수가 더욱 커져 근심이 날고 깊어지는데 이 점에 대해 신 등이 특별히 논의드릴까 합니다. 대간은 국가의 기강이고 공론의 종주(宗主)입니다. 그래서 명철한 임금은 이를 의지하여 이목(耳目)으로 삼고 혼매한 폭군은 이들을 무서워해서 감히 제멋대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영명한 자질이 전대(前代)의 누구보다도 뛰어나시므로 신하들을 굽어 보시면서 모두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십니다. 그래서 논사(論事)하는 신하들 중에 혹 타당하지 못하게 말을 만들거나 풍문이 부정확하여 성상을 불쾌하게 하면 그 논계는 일률적으로 보류되고 마는데, 선뜻 받아들이는 성의(盛意)는 보지 못하고 때로 역린(逆鱗)의 노여움을 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제신(諸臣)들이 자초한 점도 없지 않으나 전하께서 대간을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 세상에 위엄이 떨치더라고 필부에게 자신을 굽히고 누구보다 지혜가 뛰어나더라도 지극히 어리석은 자에게 듣는다.’ 하였으니, 성덕(盛德)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위엄은 뇌정(雷霆)보다 무섭기 때문에 상을 주면서 말을 하게 해도 천안(天顔)을 범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한마디라도 잘못된 말이 있으면 곧바로 힐책(詰責)을 가하며 마치 옥송을 담당한 관원이 어긋난 단서를 찾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심지어 물론(物論)에 따르지 않고 특명으로 교체시키기까지 합니다.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조정에 등심세고 목 힘이 강하여 끝내 좌절되지 않고 국가를 위하여 모두 말할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단정한 선비는 혀를 말아 올린 채 물러나고 나약한 자들이 입을 다문 채 비위나 맞추려 든다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목전에 벌어져도 전하께서는 얻어 들을 길이 없을 것이니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불세출의 자질로 크게 성취하려는 뜻을 품으시고도 위와 같이 처음과 다른 다섯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계시므로 사방의 기대를 잃고 계십니다. 이 점이 바로 신 등이 전하를 위하여 깊이 애석히 여기는 이유입니다.
신 등이 삼가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건대 ‘간원이 해조(該曹)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지도 않고 일장의 낭설(浪說)을 얽어 원근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에 유감이 없지 않게 하였으니 그 잘못이 크지 아니한가.’ 하셨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처럼 경솔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애석하게 여겨집니다. 전하께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성으로 부지런히 돌보신 것이 어찌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단지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천리(天理)의 당연한 것으로서 저절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실한 마음이 속에서부터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구중 궁궐 속에 계시면서 목소리와 얼굴빛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셔도 온 세상의 생령들이 인(仁)에 돌아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성(誠)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끝까지 이런 마음을 지니시고 더욱 그 인(仁)을 돈독히 하신다면 덕화(德化)의 공효가 온 천지에 스며들어 조수(鳥獸)까지도 순응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인(仁)의 경지에서만 논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와 같이 하지 않고 혹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곧 남에게 호감이나 받고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되는 것이니, 성인의 마음 속에 어찌 일각인들 이런 찌꺼기를 남겨둘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나중에 받으라.’고 하였고, 맹자는 ‘일을 해나갈 뿐 공효가 있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동자(董子)는 ‘이익을 꾀하지 말고 공(功)을 따지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들이야말로 마음의 근본 자세를 확립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될 조목으로서, 학자나 제왕이나 똑같이 지녀야 할 심법(心法)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평소에 충분히 강구하여 깊이 체득하지 않으시고 지금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허물을 간관에게 돌리려 하십니까. 그러나 가령 이 말씀이 한때 심기가 불편하시어 생각없이 우연히 하신 것이라면, 이는 일시적인 발언의 병통으므로 그대로 그다지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신 등은 전하의 마음가짐이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어버려, 정사에 시행하는 모든 것이 인(仁)의 이름을 빌리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 등이 전하에게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통렬히 반성하시고 깊이 병근(病根)의 소재를 생각하시어, 동(動)하고 정(靜)할 때마다 항상 발본 색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소서. 그리하여 마음 속에서 한 생각도 성실치 못한 것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하실 때 한 마디도 부실함이 없게 하시고 정사를 시행할 때 한 가지 일이라도 부실함이 없게 하시어 순수하게 스스로 성인을 목표로 하여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면서 오늘도 이와 같이 하고 내일도 이와 같이 하여 세월이 흐르도록 조금도 중단함이 없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시는데도 덕업(德業)이 날로 진보되지 않고 정치의 효과가 날로 나타나지 않으면, 신 등은 망언(妄言)한 죄를 받겠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전하께서 너무도 재기가 발랄하시어 신 등이 논한 것을 부유(腐儒)들의 우활한 말이라고 여기시어 긴절하게 힘쓰지 않을까 하는 점일 뿐입니다.
신 등은 또 생각건대 사람들의 속성은 사람을 대하면 장엄한 체 하다가 혼자 있을 때는 제멋대로 하며 나보다 나은 자와 있게 되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다가 나보다 못한 자와 있을 때는 교만심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옆에 힘써 도와주는 자가 없으면 과오가 있어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하(子夏)와 같은 현인도 오히려 붕우를 떠나 혼자 사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니, 음미해 볼 만한 일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하룻 동안에 훌륭한 사대부를 접하는 때가 기질을 함양하고 덕성을 훈도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신료를 접하지 않으신 지가 이미 반 년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덕성이 이미 완성되어 훈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깊은 궁궐에 홀로 계시다 보면 어찌 허물을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몇 달 사이에 명령을 내리시는 데 있어 대부분 평일과 같지 않으니 이는 너무 오래도록 홀로 떨어져 계신 데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중에 계시므로 매일 경연에 나아가 옥체를 수고롭게 하실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끔 기운이 상쾌한 아침이나 더위가 물러간 저녁에 대신을 나오게 하여 기무(機務)를 상의하여 결정하기도 하고, 유신(儒臣)을 맞아들여 경의(經義)를 강론하신다면 덕성을 진보시키고 공업(功業)을 닦는 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울적한 마음을 풀고 기체(氣體)를 조절하는 방도에 있어서 도움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진작시킬 수 있는 기틀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기에 감히 성(誠)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병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대체로 근본인 것으로서 성의(誠意)가 일단 확립되면 그 나머지는 자연 벼리[綱]를 들면 그물코가 펴지 듯 뜻한 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니, 주자(周子)의 ‘근본을 바르게 하면 만사가 다스려진다.’는 말이나 주자(朱子)의 ‘근본을 다스리는 것이 우활하고 완만한 듯하나 실은 힘쓰기가 쉽다.’는 말이 모두 이런 뜻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조용히 성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모두 살펴보았다. 경 등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의 내용 모두가 격언이고 지론(至論)이니, 내가 감히 두려운 마음으로 고치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요즈음 거상 중이라서 현사(賢士)를 접하지 못한 지 이미 반 년이 지났다. 허물이 날로 쌓이는 것은 정말 이 때문이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차자는 바로 정경세가 지은 것이다. 정경세는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기로 유신(儒臣)중에 첫째로 꼽힌다. 차자의 앞뒤 내용이 조용히 개도(開導)하는 것으로서 간곡하게 우애(憂愛)하는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상이 마음을 쏟아 우대하면서도 끝내 채납(採納)한 실상이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1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재정-국용(國用)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경연(經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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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차자는 바로 정경세가 지은 것이다. 정경세는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기로 유신(儒臣)중에 첫째로 꼽힌다. 차자의 앞뒤 내용이 조용히 개도(開導)하는 것으로서 간곡하게 우애(憂愛)하는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상이 마음을 쏟아 우대하면서도 끝내 채납(採納)한 실상이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윤6월 8일 무신
이상길(李尙吉)을 모 도독(毛都督)의 문안사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장(毛將)이 먼저 병사를 거느리고 상경(上京)한다는 말을 꺼내어 공갈하는 계모로 삼았고, 다음에는 조우(趙祐)를 가로막았다는 말을 하여 거만스런 태도를 보이고 나서 비로소 진영을 옮긴다는 보고를 전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주본(奏本)을 올려 유진(留鎭)하도록 요청하게 하였습니다. 그간 그가 갖가지로 지어낸 작태를 보노라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따른다면 뒷날의 근심이 점점 더해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환란이 두려우니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없습니다. 이번 이상길이 갈 때에 결정적인 말은 하지 말고 다만 ‘국왕께서 천만 뜻밖에 노야(老爺)가 진영을 옮긴다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천조(天朝)에 주본을 올려 옮기는 일을 만류하여서 노야와 끝까지 주선함으로써 위로 황은에 보답하고 아래로 강역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과군(寡君)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만 생각건대 번신(藩臣)의 도리상 거만스레 진주(陳奏)하여 천조를 지휘하며 대장(大將)을 진퇴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노야가 실제로 진영을 옮긴다면 천조에서 본국에 이자(移咨)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전연 소식이 없으니 천조에서 이런 논의만 하고 실제로 결정하지는 않았던 게 아닌가?’ 하게 하소서. 이런 내용으로 꾸며 말하게 하는 한편, 승문원으로 하여금 게첩(揭帖)을 짓게 하고 예단(禮單)을 넉넉히 갖추어 보내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하니, 따랐다. 비국이 또 청하기를,
"조사(詔使)를 대접할 때 쓰고 남은 은(銀)과 삼(蔘)을 넉넉히 주어 보내어 모영(毛營) 관하에 증뢰(贈賂)함으로써 탐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장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의 속마음을 환히 알고 있는데 무슨 알기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국용(國用)이 탕갈된 때에 은화와 인삼을 낭비하는 것은 실로 불가하니, 주어 보내지 말라."
하였다.
윤6월 9일 기유
대사헌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금부 당상으로 참여하였을 때, 판부사 이귀(李貴)가 경상 감사 정온(鄭蘊)의 장계(狀啓) 말단에 율문(律文)을 잘못 인용한 사실을 가지고 조정을 경멸한 행위라 하여 나국(拿鞫)을 청하려 하였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이는 사체(事體)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인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나국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판부사 김류(金瑬)도 그렇게 여겼으므로 추고만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사리상 그 일을 그처럼 처리해야 되었기 때문이지 조금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난번 정원이 아뢴 것은 상규(常規)로 말하면 과연 미안스러운 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사자(士子)가 고문에 목숨을 잃으면 흠휼(欽恤)하시는 성상의 덕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처럼 은미하게 품했던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도리일 수 있습니다. 어찌 시골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정(私情)을 두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어제 저녁에 이귀(李貴)의 계사를 보건대, 첫째는 영남(嶺南)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대간도 감히 지적하여 논란하지 못한다고 말했고, 둘째는 대간이 입 다물고 말하지 않은 것은 후환을 두려워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말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이는 화가 나서 잘못 발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구태여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신이 영남 출신으로서 현재 대관(臺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신(重臣)으로부터 입을 다물고 있다는 배척을 공공연히 당한 이상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신의 직을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이경여(李敬輿) 이하와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이하가 모두 이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出仕)를 청하였다.
윤6월 10일 경술
대사헌 정경세가 또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판의금부사 이귀(李貴)의 계사를 보니 분기(忿氣)가 지면에 가득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정원의 계사에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온(鄭蘊)의 전일의 일을 거론하면서 ‘영남의 일은 아무리 대간이라도 감히 지적하여 논하지 못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대간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것은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의도를 알 수는 없으나 요는 말답지 않기 때문에 신은 애초에 그 일로 인피(引避)하여 그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남 출신이라는 점이 끝내 미안하며 입을 다물고 있다는 배척 또한 꽤 두려웠기 때문에 부득이 인피하여 물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따지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은 본래 그와는 따질 것이 못된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탑전(榻前)에서 얼굴을 맞대고 모욕을 가하면서 노기가 등등하였는데, 그 사이에 증거가 분명치 못한 말이 많았습니다. 신은 당초 생각하기를 ‘그가 말을 다하고 나면 대강 경위를 밝히고 이어 앞서 아뢴 것을 진달하고 물러가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께서 그만하고 나가라고 명하셨으므로 대신 이하가 차례로 모두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이 감히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그와 대면하여 마치 쟁송(爭訟)하는 자처럼 따질 수 없는 일이기에 신 역시 아무 말없이 물러나오고 말았습니다.
기타의 사설(辭說)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모두 통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굳이 쟁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냈다는 한 문제만은 성명께서 사정(私情)에 따라 청탁했다고 오인하실 경우 신이 속죄하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러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홍중(李弘重)이 옥에 갇힌 뒤에 신이 글을 써서 이귀에게 보내기를 ‘예안(禮安)의 선비들이 무지하게도 함부로 행동하여 이렇듯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실로 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방백을 구축하려 했다는 것으로 논죄한다면 실정에 벗어나는 일이다. 이홍중은 다만 죽은 자와 팔촌 손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억지로 수창(首倡)했다고 명칭한 것이지 실제로 수창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절친한 사이에 보고 들은 실상을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공도(公道)에 해가 되지 않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체제에 도움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일을 지적해내어 ‘헌장(憲長)이 된 몸으로 남몰래 청탁했다.’는 죄목으로 배척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헌부의 관원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앞에서 까닭없이 사람의 노여움을 받았으니, 무슨 낯으로 그대로 직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청명한 조정의 염치를 숭상하는 기풍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횡역(橫逆)을 당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렵고 성상의 앞에서 직접 모욕을 가한 책임은 따로 돌아갈 곳이 있으니, 피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부(法府)의 장관인 신분으로 이미 글을 통한 잘못이 있으니 형세상 재직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사헌 정경세를 체차하소서.
조정에서는 예경(禮敬)이 중하고 성상 앞에 있을 때의 사체는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오늘 상께서 대신과 여러 재신을 들라 하시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하문하셨으니, 결백한 마음으로 삼가하여 아뢰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는 사소한 일로 힐난하면서 부당하게 노기를 부려 대관을 거침없이 모욕하였으니, 조정의 체면이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막중한 일 또한 결말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원훈 중신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정원은 후설의 책임을 맡도 있는 이상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흠휼(欽恤)하시는 성상의 덕을 몸받아 억울할 일이 없게 하는 것 또한 하나의 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안옥(按獄)하는 초기에 자백을 받지도 않았는데 바로 정형(停刑)을 청한 것은 사체에 손상되는 점이 있습니다. 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 담당 승지는 이민구(李敏求)이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연평 부원군 이귀는 추고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1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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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연평 부원군 이귀는 추고하라."
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지경연사(知經筵事)·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으로, 서성(徐渻)을 좌참찬으로, 이홍주(李弘胄)를 우참찬으로, 이덕형(李德泂)을 판윤으로 삼았다.
북병사 윤숙(尹璛)이 치계하였다.
"금년 황충(蝗虫)의 재해는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육진(六鎭) 및 경성(鏡城)·명천(明川)·길주(吉州) 등 열읍이 이미 적지(赤地)가 되었습니다."
경상 감사 정온(鄭蘊)이 치계하였다.
"안동(安東)·영해(寧海)의 황충의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입니다. 앞으로 백성에 대한 일이 지극히 염려됩니다."
윤6월 11일 신해
반송사(伴送使)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어제 도독이 차비 역관(差備譯官)을 신 등에게 보내 말을 전하기를, ‘듣건대 양사(兩使)가 의주(義州) 등지에 가서 병사들을 점검하려 하는데, 진강(鎭江)의 옛 성에서 포를 쏘아 달적(㺚賊)의 소식을 알리면 그들의 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의 의도는 일찍이 수하 군병을 변경으로 모두 파송했다고 했으므로, 양사가 허위로 과장한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9일 새벽에는 구성 부사(龜城府使) 조시준(趙時俊) 등이 사포(蛇浦)에서 밤새도록 달려와 모장(毛將)의 사정을 알리는 동시에 요동 유학(遼東儒學) 예여청(倪汝聽)이 양사 앞으로 보내는 밀게(密揭)를 바쳤습니다. 신이 윤훤(尹暄) 등과 의논하기를 ‘양사가 앞으로 도독과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이 게(揭)를 보아야만 방편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여청이 양사에게 직접 보고하려고 자신이 대나무 자리속에 묶이어 이미 본부(本府)에 도착해 잠복하며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양첩(兩帖)을 양사 앞에 올리니, 양사가 이를 훑어보고 얼굴빛이 상당히 달라졌는데 곧 도로 내주며 이르기를 ‘이 글을 십분 비밀로 하여 신중을 기해 누설치 말라.’ 하였습니다.
신 등 역시 이 글을 가벼이 보이기가 매우 난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상서(上書)한 사람이 스스로 와서 직접 설명하겠다고 벼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제출하지 않을 경우 천사가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으리라 여겨져 어쩔 수 없이 올렸습니다. 게(揭)의 내용이 확실한 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망측한 일이라서 신과 감사 등이 어떻게 조치할 계책이 없는 나머지 부근 각읍의 관병을 양사의 호위 군사라 이름하여 즉시 징집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여청(倪汝聽)의 밀게(密揭)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모수(毛帥)가 이미 이달 3일에 대소 장령(將領)들고 약속하고 희생(犧牲)과 서문(誓文)을 갖춰 천지에 맹세하였으며, 후열(候閱)이라는 두 글자를 가탁하여 갑절이나 훈련을 시키면서 함께 대란(大亂)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사형인 양조녕(楊祖寧)이 현재 도사(都司)로 재직하고 있는데 저와는 막연한 사이입니다. 제가 부드러운 말로 간곡하게 모반에 관한 정확한 소식을 캐물었더니, 양조녕이 곧 흉금을 털어놓고 저에게 고하기를 ‘모반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처음에 여인(麗人)이 진공(進貢)할 때, 모수(毛帥)를 참소하였으므로 모수가 화를 내었는데, 동시에 무 순무(武巡撫)와 모수는 원수 사이므로 모수가 미워한 것이다. 그리고 각처에서 끊이지 않고 상소하였으므로 모수가 더욱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마침내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먼저 부근의 고려인을 죽이게 하고, 마필(馬匹)·궁시(弓矢)·기계(器械)·저량(儲粮)·병력 등의 상황을 탐지한 뒤 바로 왕경(王京)으로 쳐들어가 한바탕 시살하여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 모든 군비(軍備)를 정돈해서 산동(山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 곳씩 점령해 나가면서 대사(大事)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가 눈물을 머금고 묻기를 ‘지금 두 대종사(大宗師)가 열병하려 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니, 양조녕이 대답하기를 ‘열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어떻게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열병을 하고 안 하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열병을 하고 안하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가고 못가는 것도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이 계획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형세상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라건대 두 대종사께서는 모관(某館)에 도착하여 병을 핑계하고 머무르면서 급히 이문(移文)하여 여왕(麗王)과 계획하소서. 그리하여 각 변경에 유시하여 병사를 조발해서 방비하도록 할 것이며, 그 부근의 고려인들에게 비밀히 전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를 모아 먼저 내지(內地)로 들어가게 하고 미속(米粟) 등은 전량을 땅에 파묻게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저들이 하루도 먹지 못하게 하면 죽이지 않아도 저절로 죽을 것이며, 백리를 행군해 오다 보면 군사들이 싸우지도 않고도 자연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배고플 때를 틈타 한 번 북을 울려 격파하면 그 화는 평정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 말을 망령되다 하여 조금이라도 방비를 늦출 경우 하루 이틀 사이에 뜻밖에 나와 무방비 상태에 공격을 하게 되면 부근의 고려인이 먼저 그 재앙을 받을 것이고 두 대종사도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알면서 말하지 않으면 곧 불충 불효한 인간이 되겠기에 감히 위급한 밀사(密事)를 기록하여 게(揭)를 올리니, 사기(事機)가 누설되어 분골 쇄신(粉骨碎身) 되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반송사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모장(毛將)이 영호군(迎護軍) 천 여명을 보내 천사(天使)를 맞이하니 부사(副使)가 역관을 시켜 신에게 말하기를, ‘곧 본국(本國) 군사들로 하여금 밤을 호위하여 돌아오게 하라.’ 하였습니다."
정광적(鄭光績)을 대사헌으로, 김기종(金起宗)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윤6월 12일 임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반송사 등의 장계 및 베껴 보낸 게첩을 보건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조사(詔使)의 자위책을 엄밀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반송사로 하여금 조사와 비밀히 협의하여 그대로 본부에 머무르면서 우선 가벼이 나아가지 않게 하거나 다른 일을 가탁하고 물러나 내지로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반역한 정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지만 뜻밖의 변이 일어날 경우 필시 순식간에 발생할 것이니, 반송사 및 감사·병사에게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비밀히 하유하심으로써 적절히 책응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자정전(資政殿) 월랑(月廊)에 나아가 대신·비국 당상·심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궁전에 오를 때에 상이 두 내시에게 부축하여 오르도록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바깥 사람들이 모두 옥체가 몹시 파리해지셨다 하므로 신이 늘 걱정하였는데, 오늘 천안(天顔)을 뵙고 놀라고 염려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 예제(禮制)에 지나치게 거상하고 계시니, 비록 자각은 못하시나 어찌 몸이 계속 상할 우려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우려하는 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쪽에서 온 장계를 보건대 난처한 일이 생겼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조시준(趙時俊)의 간예(干預)와 예여청(倪汝聽)의 고변(告變)은 이 무슨 변고인가?"
하니, 좌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조시준이 감히 허위로 꾸며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곧 예성(倪姓)을 가진 사람이 한 일로서 예여청도 양조녕(楊祖寧)에게 들어서 안 것이지 필시 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두려운 것은 크게 노(虜)에게 투신(投身)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천사(天使)를 인질로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해 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계획이 반드시 우리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가 조사(詔使)를 구류(拘留)하여 반역의 정상을 드러내면 대처하기가 쉽다. 그러나 만일 조사를 잘 대우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변을 일으킨다면 더욱 난처한 일이다."
하니, 이원익이 이뢰기를,
"신이 듣건대 근래 모장 때문에 서로(西路)의 인민이 부자 형제가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대중의 마음이 분개하여 모두들 일전(一戰)을 벌이려 하는데 저자가 만약 모반하여 적이 된다면 우리 나라 군병 한 사람이 열을 감당해 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상(叛狀)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대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조사는 처신을 어떻게 해야 옳은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천사의 수하에는 병력이 없으므로 변이 일어날 경우 대응할 방법이 없으니, 다만 병사를 정돈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아뢰기를,
"앞으로는 다만 방지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금년 가을에 원수(元帥)를 보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유진(留鎭)하면서 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고, 장만(張晩)은 아뢰기를,
"비국(備局)에서 계청하여 신을 장차 서변(西邊)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즉시 출발해야 합니까, 아니면 후보(後報)를 기다려 출발해야 합니까? 그리고 도감(都監)의 포수 3백∼4백 명을 거느리고 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그 일의 완급을 헤아려서 먼저 대계(大計)를 결정한 뒤에 조치해야 할 것이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전부터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조사가 탈출하여 우리에게 온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계책을 세우기가 쉽지만 전쟁을 치르는 일 역시 매우 중난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다. 대체로 예성(倪姓)을 가진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을 통하여 고변하였으니 이 점이 매우 난처하다. 설령 모장(毛將)이 모반할 뜻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간여하지 않았다면 매우 좋았을텐데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너무도 잘못되었다. 장계에 ‘근처의 군병을 소집한다.’고 하였는데, 그곳의 군병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수천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모문룡(毛文龍)과 이완(李莞)이 서로 다투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
"이완은 충의는 대단하나 국량이 부족하여 실수를 한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천사가 잘 돌아가고 모장이 모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군병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황해 감사에게 경솔하게 군병을 동원하지 말고, 모든 일을 정돈하여 임기 응변을 잘 하도록 하라고 하유하라."
하고, 또 하문하기를,
"가령 불행한 일이 발생할 경우 평안 감사를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앞서 추천할 때에 김기종(金起宗)을 첫째로 하였고, 그 다음을 이시백(李時白)과 심기원(沈器遠)으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이서(李曙)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서는 여기서 관장하는 일이 많으므로 보낼 수 없다. 이밖에 다시 적합한 인물이 없겠는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감사의 재목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어제 비변사에서 와서 원탁(元鐸)이 적합하다고 하기에 신의 생각에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미안스런 하교를 내리셨으니 신의 실수도 이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원탁의 실수는 매우 작고 그의 재능은 임용할 만하기 때문에 비국이 추천한 것이니 이조의 과오는 아닙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김시양(金時讓)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력이 없으니 안 된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이경직(李景稷)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이경직은 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노친이 있으니 보낼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윤이지(尹履之)도 괜찮을 듯합니다. 김기종·윤이지 두 사람 중에서 가려 임용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심기원이 상중(喪中)에 있긴 하지만 기복(起復)시켜 임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명(李溟)은 어떠한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재주는 쓸 만하나 눈병이 매우 심합니다."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김자점(金自點)은 어떠합니까?"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현재 죄를 지어 폐출되어 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지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에 급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로(海路)에 익숙한 자를 모집하여 빠른 배로 대양을 건너면 은밀히 등주(登州)에 이를 수가 있는데, 이 뜻을 제신(諸臣)에게 하문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서가 아뢰기를,
"백령도(白翎島)에서 배를 출발시키면 순편(順便)할 듯싶습니다. 미리 결정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역사(役事)와 양향(糧餉)의 비축 등의 일을 하문하고 파하였다.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탁한 기운 속으로 들어갔다.
윤6월 13일 계축
도체찰사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어제 탑전(榻前)에서 내려가라는 명을 친히 받았으므로 오늘 배사(拜辭)하려고 궐하(闕下)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서변(西邊)의 소식을 듣건대 현재 긴급한 사태는 없는 듯하니 우선 며칠간 보류하여 다시 서보(西報)를 접한 뒤 진퇴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다시 형세를 보아 내려가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에 한재(旱災)와 황재(蝗災)가 있었다.
윤6월 14일 갑인
신시에 햇무리가 지고 좌이(左珥)가 있었다. 흰구름과 같은 운기 한가닥이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곧게 손방(巽方)의 하늘가까지 뻗쳤는데, 길이는 5∼6장(丈)쯤 되고 폭은 한 자쯤 되었으며 한참 후에 사라졌다.
반송사(伴送使) 김류(金瑬)가 치계하기를,
"9일 양사(兩使)가 밀게(密揭)를 보고 나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상의하더니 말을 달려 사포(蛇浦)로 들어갔는데, 변에 대처하는 그들의 방법이 진정 적절했다 하겠습니다. 조사(詔使)를 호송하는 군마는 장문(場門) 밖에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이 관례이나, 금번에는 신이 ‘군민(軍民)이 모두 양사의 은혜에 감복하여 차마 뒤처져 있으려 하지 않고 모두들 해안까지 호송하기를 원하고 있다.’ 핑계대고 날랜 병사를 정선하여 주야로 긴밀히 호위하고 있습니다. 예성(倪姓)을 가진 자가 비밀히 구성 부사(龜城府使) 조시준(趙時俊)에게 말하기를 ‘이번에는 본국에서 방비를 하고 있으니 우선은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향은(餉銀)이 일체 도착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것인데, 나도 구성으로 진영을 옮겨 횡액을 면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조사가 신에게 말하기를 ‘사포에 3∼4일 정도 머무르겠다.’ 하였는데, 정확한 날짜는 분부하지 않고 있으니 필시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성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양사가 짐짓 놓아 보내면서 뒤쫓지 말게 하는 한편, 새어 나가지 않도록 비밀을 지켜 난처한 일이 없게 하라고 재삼 당부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중하게 변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모수(毛帥)에 대해서도 끝내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철산(鐵山)에 있을 때에는 인심이 매우 의혹에 쌓여 있었으나 여기에 와서부터는 태연하여 걱정할 만한 것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도독이 노적(奴賊)이 보낸 패문(牌文)을 내보이고는 그것을 가져온 가달(假㺚)을 불러 들여 문답을 주고받았으나 문금(門禁)이 매우 엄격하여 청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독이 또 역관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래 성격이 조급한 데다가 지난번 마음이 심란하였기에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후회가 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밤 1경에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윤6월 15일 을묘
상이 혼궁(魂宮)에 거동하여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상이 자정전(資政殿) 월랑(月廊)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예여청(倪汝聽)의 일로 너무도 염려하였는데 조사가 선처한 덕택에 현재 눈앞의 위급함은 없어졌다. 그러나 끝내는 필시 변란이 있을 것인데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앞으로 더욱 난처한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도독이 그대로 머물면서 가지 않고 우리에게 양향(粮餉)을 요구한다면 처리하기가 더욱 어려습니다. 우선 양향을 점검하여 대응하도록 하고 병사를 정돈해서 변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중신(重臣)을 모영(毛營)에 파견하여 1년 동안 지급할 숫자를 의정(議定)케 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약자를 내지(內地)로 이동시켜 급식(給食)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만약 도독이 이번 일을 알고 묻는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조정에 돌아가면 이 말이 반드시 전파될 것이고, 그러면 모장(毛將)도 우리 나라에서 고했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그가 물어온다면 응답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당초 이 일에 간여된 것부터가 매우 사기(事機)를 그르친 일인데, 앞으로의 일이 무척 우려됩니다."
하고, 윤방은 아뢰기를,
"그 고변(告變)에 관한 일이 구성 부사 조시준(趙時俊), 태천 현감(泰川縣監) 최대윤(崔大允)에게서 나온 듯하나, 지금 와서는 모른다고 응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장만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모장이 필시 끝까지 묻지는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물어온다 해도 응답할 말이 없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나라에 절박한 문제라서 저절로 전파되어 조사가 듣게 되었다고 한다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말한다 해도 그가 어찌 화를 내지 않겠는가. 계획을 세워 변에 대처함에 있어서는 치밀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에게 덕을 베풀었는데, 그대들은 도리어 나를 모함하였다.’고 한다면 응답하기가 정말 어렵다. 내 생각에는 지금 선처하지 않다가 그가 물은 연후에 응답한다면 그가 필시 믿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차라리 지금 먼저 조시준과 최대윤의 죄를 묻는 것만 못하다. 나중에 그가 고변한 일을 알고 힐책한다면 ‘국왕께서 이 말을 듣고 당초에 이미 그 사람에게 죄를 주었다.’고 응답하면 될 것이다."
하자, 윤방·신흠·장만 등이 모두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지극히 윤당합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우리가 모른다고 해도 그는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또 조사가 그 고문(告文)을 모장에게 보이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명분없이 조시준 등에게 죄를 주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예성(倪姓)을 가진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조사가 이미 모문룡(毛文龍)를 의심하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은 필시 끝내 드러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조시준 등을 심상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모두 나국(拿鞫)하도록 하라."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슨 죄목으로 나국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건으로 잡아와도 가하다. 그러나 꼭 그 죄목을 붙여야만 하겠는가. 반드시 그들이 알기 전에 잡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이현영(李顯英)과 최명길·장만이 아뢰기를,
"조시준의 입장에서도 일단 그런 말을 듣고서 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문(拿問)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간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좋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도독이 혹시라도 오랑캐에 투항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서 대우해야 합니다. 옛날 촉(蜀)나라 선주(先主)가 오(吳)나라에 패하였을 때 어찌 분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후주(後主)가 즉위하고 나서 제갈량(諸葛亮)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니, 이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요즈음 모장이 양향이 떨어져 한창 곤란을 겪고 있으니, 이런 때에 반드시 양식을 대주어 환심을 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서(兩西)의 공세(貢稅)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김신국이 아뢰기를,
"노비(奴婢) 신공(身貢)이 도합 11만 석이고, 해주(海州)에서 운송한 것이 거의 2만 3백여 석에 이르며, 계해·갑자년에 미수(未收)된 것이 4만∼5만 석입니다. 근년에 고을의 창곡(倉穀)을 모두 모장에게 내주었는데, 전일에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갈 때에 신이 이 미수된 것을 거둬들이는 대로 공급해 주라고 말했습니다."
하고, 장만이 아뢰기를,
"모장이 양식을 마련할 길이 없어 매번 우리에게 책징(責徵)하고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마땅히 정세를 살피며 대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긴 하나, 우리의 국토는 한계가 있는데 그의 요구는 끝이 없으니, 우리 형편이 대주지 못하는 데야 어찌 하겠는가. 금년 공급량을 보면 아직 반년도 못되는데 10만 석이나 된다. 가령 실제로 그가 진영을 옮긴다 하더라도 필시 수만 명의 남녀를 한꺼번에 옮기기는 어려울텐데, 삼남(三南)에서 운송할 쌀은 3만∼4만 석에 불과하니, 앞으로 어떻게 양식을 대주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산동(山東)의 양향을 운송할 것을 진주(陳奏)하지는 못하더라도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군문(軍門)에 이자(移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방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군정 사목(軍政事目)을 이미 작정하여 들였습니다만 그 중에는 아직도 미진한 곳이 있습니다. 낙강(落講)한 사자(士子)에게 먼저 수포(收布)해야 한다는 것은 영상과 좌상의 의논이고, 곧바로 군역(軍役)에 충정해야 한다는 것은 우상과 장만·이서(李曙)의 의논입니다. 교생(校生) 4만여 인 중에 낙강이 된 자가 3분의 2인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군역에 충정한다면 모두들 윗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교생은 도태시키지 말고 자체적으로 급보(給保)케 하고, 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정로위(定虜衛)도 시재(試才)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급보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 낙강생을 군역에 충정하는 규정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또한 구차스럽지 않겠는가."
하자, 장만이 아뢰기를,
"교생이 어찌 꼭 사족(士族)이겠습니까. 낙강했을 경우 정장(丁壯)은 군역에 충정하고 연로한 자는 수포(收布)하도록 되어 있으니, 법전(法典)에 있는 대로 집행하면 그만입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조시준(趙時俊) 등을 잡아오는 일이야말로 크나큰 실책입니다. 모문룡(毛文龍)은 중국 조정에 대해서 결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신하가 아닙니다. 그의 행위에 놀라운 일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서변(西邊)의 대소 인심이 의심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예여청(倪汝聽)의 밀게를 보면, 모반 계획이 이미 결정되어 중국 사신을 해치고 우리 나라를 해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이 위급한 말을 들었고, 또 예여청이 직접 조사에게 말할 수 없는 처지였고 보면, 중국 사신에게 전달하여 환란을 예방할 계책을 신하된 의리상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죄를 주어야 할 일이겠습니까. 성상께서 반드시 잡아오게 하려고 하시는 의도는, 후일 모문룡이 이 일을 알게 될 경우 ‘조시준이 예여청의 게를 진달하였기 때문에 이미 가두고 죄를 주었다.’고 답변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모문룡이 실제로 모반할 계획을 하였다면 우리의 도리로서는 오히려 급히 토벌해야 마땅한데, 그 게를 전달했다고 해서 어떻게 죄를 줄 수 있습니까. 그가 모반하는 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토벌하지는 못하고 또 전달해 알린 사람을 죄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약점만 보이고 모문룡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설령 그가 그 일을 알게 되어 힐문하더라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답변만 하면 될 것이고, 끝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사실대로 말한다면 의리가 떳떳하여 우리 입장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지금 갑자기 조시준 등을 잡아온다면 도내(道內)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필시 게문을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할 것인데 어쩌면 이 일로 인하여 널리 전파되어 그 일이 더욱 드러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때에 서로(西路)의 잘 다스리는 수령과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체직한다는 것도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또 앞으로 위급한 일이 있더라도 서변(西邊)의 장리(將吏)들이 조시준의 일을 경계삼아 감히 알리지 못함으로써 큰 환란을 빚게 될까 두렵습니다. 또 예여청은 필시 천하의 의사(義士)일텐데 이로 인하여 그의 정체가 드러나 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듭 생각해 보아도 끝내 잘못된 계책인 듯하니,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으로는 권도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잡아와 다스리는 것도 전달했다 하여 죄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도 무방하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이번에 조시준 등을 잡아오라고 하신 것은 실제로 조시준 등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일시적인 임기 응변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정원의 논계를 보건대, 거듭 분명하고 간절합니다.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모시는 신하도 오히려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데, 더구나 먼 변방의 지역이겠습니까. 필시 서로 의아해 하며 해이해지는 우려마저 없지 않으니, 그저 들었더라도 못들은 체하고 가만히 기다려봐야 합니다.
그리고 뒷날 혹시 일이 누설되더라도 그냥 모른다고 답변하면 될 것이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대로 답변하기를 ‘변신(邊臣)으로서 비밀히 고하는 말을 듣고 허위이든 사실이든 간에 그냥 나둘 수 없는 것이 그의 직분이다. 더구나 이 말이 노야(老爺)의 휘하에서 나왔고 보면 그렇게 알려준 자에게 죄가 있지 변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로서는 말이 순하고 사리가 곧아 저쪽에서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정원에 계사대로 우선 보류하고 다시 사기(事機)를 관망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러나 임기 응변하지 않으면 필시 뒷날 걱정이 심각해질 것이다. 어제 의정(議定)한 대로 나추(拿推)하도록 하라. 그리고 조시준 등을 나문(拿問)한 뒤에는 파직하고 놓아주도록 하라."
윤6월 16일 병진
월식(月食)이 있었다.
윤6월 17일 정사
접반사 정두원(鄭斗源)이 역관(譯官)이 탐지한 내용으로 치계하였다.
"12일 도독이 조사에게 와서 인사하였는데, 도독이 말하기를 ‘1년에 양미(粮米) 수십만 포(包)를 보내주면 병마를 기아에서 구할 수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지(麗地)의 변신(邊臣)이 오랑캐와 통하는 자가 있다.’ 하니, 조사가 말하기를 ‘국왕이 아는가?’ 하자, 도독이 말하기를 ‘모른다. 안다면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왕의 책봉(冊封)은 실은 내가 힘써 준 덕택이다.’ 하였습니다. 나머지 말들은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모 도독(毛都督)이 게첩(揭帖)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나는 천성이 솔직해서 거짓말을 못합니다. 지난번 현왕이 충순(忠順)하다는 것을 알고 힘써 책봉(冊封)을 청하였으니, 이런 나의 정성 하나만은 끝까지 이해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간신이 위를 속이고 공을 내세워 책봉을 청하는 데에 금전 수십 만을 소비하였다고 하면서 나도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불량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동안의 양미(粮米)는 모두 돈을 주고 무역한 것이니, 날짜별로 문서를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관향사(管餉使)는 말로는 정납(呈納)했다고 하지만 실제의 수량에 차지 못하여 병민(兵民)이 헤아릴 수 없이 아사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나는 진정 성실하게 사람을 대했는데 끝내는 사람에게 이처럼 우롱을 당한 듯하여 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현왕을 뵙고 장하(帳下)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다만 생각건대 천사(天使)가 도착하여 벌써 공억(供億)의 번거로움이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다시 수레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뒤 다시 군사들의 소요가 있었던 데다가 내지에서 군량 운송이 계속되지 않아 조제(調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병을 이유로 후임자를 청하면서 마침내 중지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왕께서는 절의가 있으시고 겸손하시므로 평소부터 존경해 오던 바입니다. 군하(羣下)에게 가리워지지만 않는다면 끝내는 서로의 정분이 과거처럼 회복될 것이고, 나의 솔직한 점도 현왕에게 다시 인정받게 될 것이며, 현왕의 충근(忠勤)한 점도 전에 비해 조금도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외람되게도 후한 선물을 받고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유성(流星)이 천변성(天弁星) 위에서 나와 맥국성(貊國星) 위로 들어갔다.
윤6월 18일 무오
동지사(冬至使) 남이웅(南以雄), 성절사(聖節使)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지금 해로(海路)가 전일과 다른데, 더구나 끝없이 변고가 일어나는 때이겠습니까. 군관(軍官)을 각각 4인씩 더 대동하고, 화기(火器)와 궁전(弓箭)도 적당히 지니고 가는 한편, 호송선(護送船) 1척을 평안도로 하여금 더 배정해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척을 배정하는 문제는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묘당이 호송선을 더 배정해 주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용전(用錢)084) 에 관한 일은 이미 지난해 겨울에 묘당에서 논의하여 입계(入啓)해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장인(匠人)의 수가 적어 주조(鑄造)한 것이 많지 않은 데다가 연이어 예장(禮葬)·연접(延接) 등 두 도감(都監)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진행할 겨를이 없어 몇 개월 동안 정폐(停廢)했다가 이제야 비로소 장인을 불러 주조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숙종(肅宗) 2년에 처음으로 주전관(鑄錢官)을 두었고, 7년 12월에 주전(鑄錢) 1만 5천 관(貫)을 재추(宰樞)·문무 양반(文武兩班)·군인(軍人)에게 나누어 주고 권여전(權輿錢)이라 하였으며, 이어 경성(京城)에 좌우 주무(左右酒務)를 두고는 거리 양쪽에 존비(尊卑)를 막론하고 각각 점포(店舖)를 내게 하여 주전을 사용함으로 인한 이익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9년에는 또 주현(州縣)에 명하여 미곡(米穀)을 바치고 주식점(酒食店)을 내게 하여 백성에게 무역을 허용함으로써 돈의 편리함을 알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어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에서 전화(錢貨)의 사용을 폐지한 지가 2백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돈이 뭐하는 물건이며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른 나머지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물건으로 여겨,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처음 사용할 때에는 통화량이 많지 않으므로 집이나 토지,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데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돈으로 술이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가 1전(錢)만 가지고 시장에 들어가면 곧바로 취하고 배부를 수 있게 되는 이익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르면서 돈을 사용하는 묘리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안에서 밖으로 확대 적용해 가면, 양식을 싸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고 곡물(穀物)을 흘려버리는 일도 없어 온 나라에 통행되는 화폐가 될 것이니, 여조(麗朝)에서 화폐를 통용시킬 때 먼저 주식점(酒食店)을 설치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지금 주조가 완료된 돈은 겨우 6백 관이므로 통용시키기에는 너무도 양이 부족하나, 건축의 설계도를 보면 한눈에 천만 간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신 등은 경복궁(景福宮) 앞길의 좌우 행랑(行廊)에 사람을 모집하여 점포를 열게 하고, 주식(酒食)에 소요되는 양을 관아에서 지급하여 그들에게 음식점을 배설하고,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상대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요포(料布)를 받아야 할 자에게 전문(錢文)을 나누어 주어, 그 돈으로 바꿔 먹게 하여 정가가 얼마인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점포 주인에게 다른 물화(物貨)는 받지 말고 오직 돈으로만 교역(交易)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전(本錢)은 도로 관부(官府)에 바치고 남은 이익을 먹게 함으로써 시험삼아 돈을 유통시키는 장소로 삼는 것이 편리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새로 시행하는 제도라서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는 판서 김신국(金藎國)의 계책이었다.
윤6월 20일 경신
합계(合啓)하여 잇따라 아뢰기를,
"모든 궁가(宮家)의 어염(魚鹽)·면세(免稅) 등에 관한 일을 혁파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든 궁가의 어염·면세 등에 관한 일은 오늘 처음 시작된 일이 아니다. 사리로 따져 말하더라도 조종(祖宗)께서 내리신 것을 하루 아침에 빼앗는 것은 너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구족(九族)을 친히 함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근본으로서 요(堯)·순(舜)이 정치할 때에도 우선으로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그대들은 늘 존망과 안위가 달려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계속 간쟁하고 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중에 우려할 만한 점이 진정 많겠지만 이것 때문에 위망의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혁파한다 하더라도 그 이익이 관사(官司)에 모두 들어온다고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끝내는 권세가(權勢家)에게로 흩어져 들어갈텐데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항상 위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므로 대략 나의 뜻을 말했다. 앞으로는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괴기한 것을 좋아하여 이단이 마구 일어나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겨온 지 오래입니다. 항산군(恒山君) 이정(李楨)은 품질(品秩)이 높은 종실로서, 지난번 회암사(檜巖寺)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벌였을 때 스스로 시주(施主)가 되었는데, 교자(轎子)에 금을 입혀 연(輦)이라 이름하고는 갓을 벗고 합장(合掌)한 채 그 뒤를 따르니, 사녀(士女)들이 앞을 다투어 흠모하여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했습니다. 혹세 무민하고 풍속을 무너뜨린 일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니, 삭탈 관직 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재차 아뢰니 이에 파직을 명하였다.
반송사(伴送使)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신은 도독(都督)이 ‘변신(邊臣)이 오랑캐와 통하고 있다.’는 말을 양사(兩使)에게 말한 것은 우리 나라를 무함하려는 계획인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조사가 출발하려고 할 즈음에 역관들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기를 ‘비직(卑職)이 문관(門館)에 사후(伺候)한 지 벌써 몇 달이 되었지만 감히 우리 나라의 사정을 곧바로 대하(臺下)에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떠나는 자리에서 심정을 피력하려 한다. 과거 폐군(廢君)이 정도에 벗어난 행동을 하자 한두 간신(奸臣)이 활개를 치며 영합하고 조장시키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리하여 위로 우리 나라가 2백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해 온 예를 무너뜨리고,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50년 동안 사랑하시고 재조(再造)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는 노적(奴賊)과 사신의 왕래가 잇달았고 도독부(都督府)를 위태한 지경에 빠뜨릴 뻔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모비(母妃)를 유폐시켜 화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어 우리 수천리 강토가 장차 금수의 지경이 되려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신민이 죽을 각오를 하고 모비의 명을 받들어 과군(寡君)을 추대해서 혼란을 평정하고 정상을 회복한 뒤, 성천자께서 책봉해 주시는 은전을 받아 신명(神命)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준동하는 저 노적(奴賊)이 아직까지 천주(天誅)를 면하고 있으므로, 군신 상하가 절치 부심하며 이 도적을 멸망시킨 뒤에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군사를 일으킨 뒤로 힘이 부치고 재물이 다하여 흉적을 제거하고 복수하는 공적을 세우지 못하였다. 구구한 이 심정을 대인께서는 살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에 양사가 말하기를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우리가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말하면 길어질 것 같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나라의 풍속은 예로부터 오직 예를 숭상해 왔는데, 훌륭한 국왕께서 정성을 다해 정치에 힘쓰시고 현능(賢能)한 이가 직위에 있으니, 성천자의 위엄을 힘입어 같이 이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본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귀국의 충의와 지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바라건대 훌륭하신 국왕을 힘써 보필하여 원수를 함께 무찌르는 의리가 변함이 없게 하라.’ 하였는데, 신이 바로 말하기를 ‘대인이 간곡하게 이끌어 주시는 말씀을 들으니 감격스러운 심정을 가눌 수 없다.’ 하고는, 술 석 잔을 돌리고 일어났습니다. 신은 철산(鐵山)으로 돌아와 조사가 배를 타고 국경을 떠났다는 보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 강왈광(姜曰廣)이 게첩(揭帖)을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규장(珪璋)같은 인품을 쌓아 천성을 이루시고, 난혜(蘭蕙)같은 미덕을 길러 도량이 한이 없습니다. 내가 직접 전하를 뵙고 우러러 살피건대, 군부(君父)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시고 모든 행동이 예의에 맞으셨으며 선한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선양하시고 심성의 이치에 투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번 뵙는 즉시 도를 터득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신명(神明)이 이미 교류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문안해 주시고 덕음(德音)을 자주 내려 주셨으니, 너무나도 아름답고 곡진하게 보살펴 주셨다 하겠습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유비 군자(有斐君子)085) 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만백성이 마음에 간직하고 군현(群賢)이 충성을 다 바치는 것이 실로 당연합니다. 하늘이 강후(康侯)086) 를 돈독히 보살펴 성천자를 돕게 하신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위의(威儀)가 성대한 전하 곁을 떠나왔으니, 사모하여 바라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제 스스로 생각하건대, 삼생(三生)의 기이한 인연으로 천추(千秋)의 두터우신 정의(情誼)를 입고 이제 이별을 하였는데, 만나고 헤어지는 그 사이에 어찌 감개스럽기만 하겠습니까. 또한 혼령이 서로 만나 꿈속에서 속절없이 어울릴 것입니다. 부절을 받들고 중국에 돌아온 뒤로 오직 전하의 밝은 덕을 선양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고 있습니다.
지금 오랑캐들이 안정을 찾지 못해 잠시 행동을 멈추고 있지만, 아직도 산돼지처럼 달려들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한(三韓)은 그들과 겨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독기를 뿜게 되면 살이 깎이는 화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주(周)나라 때 한후(韓侯)에게 석명(錫命)한 글에 ‘입조(入朝)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네 임금을 돕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오늘날 하셔야 될 일로서 천조에 충성하는 전하의 직분이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상을 당한 슬픔을 조금 억제하시고 대업을 이루도록 노력하시어, 영예가 드러나고 더욱 빛나는 공적을 이룩하십시오. 대체로 왕후(王后)의 효(孝)는 사서인(士庶人)과는 다른 법이니, 마땅히 그 대체적인 것만 행해야 할 것입니다."
윤6월 21일 신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여섯 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윤6월 22일 임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영(毛營)에 계속 양향(粮餉)을 공급할 대책에 대해 다시 논의하여 품재(稟裁)할 것을 이미 입계했습니다. 신 등이 여러 신하들과 회의한 결과 각각 병폐를 제거하고 이롭게 할 대책을 말하였으나, 논의가 통일되지 못하여 가부를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우선은 지난해의 예에 따라 전결(田結)에서 미곡을 징수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삼도(下三道)의 감사 및 통제사의 각 영문에 비축되어 있는 재곡(財穀)은 뜻밖의 변에 대처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남쪽의 근심은 약간 해소되고 서쪽의 일이 정작 급해졌으니, 그 양이 많고 적든 간에 양곡을 서쪽 변방에 수송하는 것 또한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뜻을 미리 하유하여 알리는 것이 타당한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민전(民田) 40결을 겁탈하여 스스로 그 세금을 징수하다가 반정(反正) 이후에 본주(本主)에게 모두 변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절반을 면세(免稅)한다는 핑계로 전과 같이 하려고 여러 가지로 침해를 끼치고 있으니, 백성이 살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설령 미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왕자의 잘못에 대해서는 경솔히 논해서는 안 된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호패청(號牌廳)이 아뢰기를,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것은 조정에서 행하는 막대한 사업인데, 이런 때에 방백의 임무는 지극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경상 감사 정온(鄭蘊)은 중한 명망이 있기는 하나 행정 능력에 있어서는 별로 잘하는 것이 없는 데다가, 본도 출신이라서 서로 구애되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이니, 개차하고 그 후임을 해조로 하여금 정선하여 차송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윤6월 24일 갑자
예조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의장(儀章)과 문물(文物)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에 있어서는 더욱 중국의 성헌(成憲)에 따라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신 등이 삼가 문묘의 사전(祀典)을 고찰해 보건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린 것과 위호(位號)나 모시고 모시지 않는 것이 크게 다릅니다. 조사해 보건대, 안하(顔何)·순황(筍況)·공백료(公伯寮)·진염(秦冉)·유향(劉向)·대성(戴聖)·가규(賈逵)·왕숙(王肅)·마융(馬融)·두예(杜預)·하휴(何休)·왕필(王弼)을 중국에서는 문묘에 들였고, 거백옥(蘧伯玉)·임방(林放)·정현(鄭玄)·정중(鄭衆)·노식(盧植)·복건(服虔)·범녕(范寧)·오징(吳澄)은 중국에서 문묘에 모시지 않고 그 고향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그대로 두었으며, 후창(后蒼)·양시(楊時)·왕통(王通)·구양수(歐陽修)·호원(胡瑗)·설선(薛瑄)·호거인(胡居仁)·왕수인(王守仁)·진헌장(陳獻章)을 천조에서는 추가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지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장(申棖)과 신당(申黨)은 본래 같은 사람인데, 《가어(家語)》와 《사기(史記)》에 번갈아 기재하였기 때문에 잘못 알고 다 같이 제사지내다가, 중국에서는 이미 신당을 없애고 신장만 모시고 있는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하(顔何)와 진염(秦冉)은 《사기》에 모두 보이지 않고, 또 《가어》에 나오는 칠십자(七十子)의 수에도 끼어 있지 않습니다. 정돈황(程墩篁)은 ‘명자(名字)가 잘못 유전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신당과 신장이 한 사람이면서도 두 이름이 있게 된 경우와 같다 하겠습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해외의 편방(偏邦)이라서 중국 고대(古代) 인물의 행적을 고증할 길이 없는데, 현재 정한 사전(祀典)은 중국의 옛 제도를 참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전(會典)》이 반강(頒降)되기 이전이라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은 《회전》이 이미 개정되어 천하에 반포되었는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단지 개정하기를 꺼려 미뤄오면서 미처 거행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호(號)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선비들 가운데에도 타당하지 못하다는 논란이 많습니다. 공자의 시호는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었는데, 당나라 개원(開元) 때에 비로소 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이라 하였으며 호원(胡元) 때에 와서 대성(大聖) 두 글자를 추가하였습니다. 대저 하늘이 대성을 내어 만세 도덕의 종주(宗主)가 되게 하셨는데, 어떻게 한 자의 시호나 관작을 가지고 부자(夫子)의 위대함을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서 사용하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호칭이야말로 매우 크고 존귀하기 그지없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의 위호나 모시고 모시지 않는 것을 모두 중국에서 정한 제도대로 따르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중국에서 모시고 모시지 않는 것 가운데에는 논의할 만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후창(后蒼)·양시(楊時)·왕통(王通)·구양수(歐陽修)·호원(胡瑗)·설선(薛瑄)·호거인(胡居仁)은 받들어 제사지내야 옳습니다. 그러나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진헌장(陳獻章)은 그 식견이 뛰어나고 논의가 호매(豪邁)하다는 점에서는 실로 한(漢)·진(晉)의 여러 선비 위에 높이 솟아 있다 하겠으나, 그 견해가 너무 높기만 하고 지키는 것이 지나치게 고집스러워서 주자(朱子)의 학문을 홍수(洪水)나 맹수(猛獸)의 해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로(門路)가 어긋나 이단으로 흘렀으니, 성묘(聖廟)에 존숭함으로써 사람들의 지향하는 바를 그르치게 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칠십자(七十子)를 모두 선현(先賢)이라 하고, 주(周)·정(程)·장(張)·주(朱)를 모두 선유(先儒)라 하여 별로 구별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정·장·주는 천년 동안 전해지지 않던 도학의 계통을 이었으니 그 공이 결코 맹자(孟子)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데, 다만 연대상으로 늦다고 하여 멀리 양무(兩廡)의 끝에 모신다는 것은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할 것입니다. 성묘는 도덕을 위주로 모시는 곳이니 시대를 가지고 선후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절목(節目)까지 굳이 중국의 제도를 따를 것은 없으니, 선현(先賢)으로 칭하여 전상(殿上)에 모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장소가 협착하여 어려움이 있다면 양무의 가장 위에 모시는 것이 합리적인 듯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신의 예조에서 지난 경술년에도 의정하여 입계한 바 있으나, 천천히 논의하여 시행하라는 하교가 계셨으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교가 중흥되는 시기를 맞이하여 감히 구구한 생각을 아뢰니, 대신들로 하여금 상의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민여임(閔汝任)을 공조 참판으로, 최현(崔晛)을 좌부승지로, 김시양(金時讓)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윤6월 25일 을축
예조가 아뢰기를,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어찌하여 지금까지 제진(製進)하지 않느냐고 하교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작년 가을에 연신(筵臣) 오윤겸(吳允謙)의 계사에 따라 본조가 복계하였습니다. 그때 세종(世宗) 이하 열성(列聖)의 묘악(廟樂)은 난리를 겪은 이후 서적이 없어져 상고할 곳이 없으니,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고 그래도 기록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대제학·제학으로 하여금 제진하여 사용하도록 계하하였습니다.
금년 3월 춘추관 당상이 강도(江都)에 가서 《실록》을 상고해 본 뒤에 서계하기를 ‘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공정 대왕(恭靖大王)·태종(太宗)·세종(世宗) 등 7실(室)의 악장만 있다.’ 하였는데, 이는 부묘(袝廟)할 때의 악장인 듯합니다. 그러나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린 각실(各室)의 악장과 길고 짧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악장의 내용 역시 전연 같지 않은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악학궤범》은 성종 말년에 완성된 것인데도 세종 이상의 묘악만 실려 있을 뿐, 문종(文宗)·세조(世祖)·예종(睿宗) 이하의 묘악은 실려 있지 않고, 그 뒤로 중종에서부터 우리 선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악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모두 소홀히 다루어 빠뜨린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묘악이란 가장 높은 이를 따르는 법이라서 태조와 태종의 공덕만 찬양하고 그 아래는 따로 악장을 지어 각실에 통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혁정(赫整)은 바로 세종의 묘악인데 내용을 보면 도이(島夷)를 감정(戡定)한 공을 전적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역시 묘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세종 이상은 묘악을 사용하고 나서 대유(大猷)·역성(繹成)·영관(永觀) 등 악장이 이어집니다. 그 내용을 보면 ‘열성(列聖)이 중광(重光)을 선양하였다.’ 하고 또 ‘세덕(世德)을 짝하여 안정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하고, 또 ‘위대한 열성께서 대대로 무공(武功)이 있으셨다.’ 하였는데, 이것이 각실에 통용된 악장인 듯싶습니다. 다만 선묘(宣廟)의 경우는 광국 중흥(光國中興)하신 공이 있으니 별도로 있어야 할 듯한데, 다만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목조·익조·도조·환조의 묘악의 경우는 그분들이 영녕전(永寧殿)으로 이안(移安)되었으니, 종묘에서 거듭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은 까닭에 사조(四祖) 및 삼실(三室)의 묘악이 차례로 8∼9실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앞으로 사조의 악장은 영녕전에서만 사용하고 종묘에서는 희문(熙文)·융화(隆化)에서부터 사용한다면 문란하게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각실의 악장을 추가로 제술하여 보충해서 사용하는 일은 신 등의 식견이 비루하여 쉽사리 의계(議啓)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다시 논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논의토록 하니, 좌의정 윤방(尹昉)은 의논드리기를,
"《실록》에 실려 있는 7실(室)의 악장이 꼭 부묘(袝廟)할 때에 사용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학궤범》에 실려 오늘날 사용하는 등가(登歌)와 전연 같지 않고 보면, 태묘(太廟)의 악장은 아마도 그 존귀한 이에 따라서 태조 대왕·태종 대왕의 신위에 사용한 것 같고, 그 아래 열성(列聖)의 경우는 별도로 제술하여 통용했던 듯싶다는 말은 근거가 없지 않은 것으로서, 창업(創業)한 임금이 아니더라도 백성에게 큰 공덕이 있을 때는 또 별도로 제술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선제(漢宣帝) 때에 조정이 세종(世宗)의 묘악을 논의하여 하후승(夏侯勝)이 제술한 적도 있으니, 이것을 본다면 또한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선조(宣祖)께 광국 중흥의 공이 있으시니 세조묘(世祖廟)의 예에 따라 별도로 제술해야 마땅할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막중한 대례(大禮)를 갑자기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 모두가 실례(失禮)에 해당됩니다. 일단 결정해 놓고 나서 합당하지 못하다면 앞으로 처리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역대의 묘악에 관한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사조의 악장을 조천(祧遷)한 이후까지 그대로 태묘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미안한 일입니다. 이는 필시 처음에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아서 생긴 과오일 것입니다. 이것부터 개정하여 희문(熙文)·융화(隆化)를 태조의 위차(位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예의 뜻에 맞을 듯싶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작년 가을에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전석(前席)에 입시하였을 때, 오윤겸이 사조의 악장을 그대로 종묘에 사용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것과 각실(各室)에 모두 악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달하는 말을 들었는데, 신의 생각도 그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지금 예조의 계사를 보고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는 종묘 제악조(宗廟祭樂條)를 상고해 보건대 그 강령과 절목이 무척 자세하였습니다. 영신(迎神)에서 전폐(奠幣)까지는 주(奏)와 무(舞) 모두 보태평(保太平)을 쓰고, 진찬(進饌)에는 풍안(豊安)의 악장을 쓰며, 초헌(初獻)에는 또 보태평 11성(聲)을 연주합니다.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은 사조의 악장이고, 융화(隆化)는 태종 대왕의 악장입니다. 희문의 대유(大猷)·역성(繹成)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열성을 가리킨 것으로서, 곧 종묘에 통용한 말인 듯싶습니다. 아헌과 종헌에는 정대업(定大業) 11성을 연주하는데, 소무(昭武)·독경(篤慶)·탁정(濯征)·선위(宣威)·신정(神定)·분웅(奮雄)·순응(順應)·총수(寵綬)·정세(靖世)·혁정(赫整)·영관(永觀)입니다. 독경과 탁정은 목조와 환조의 악장이고, 선위·신정·분웅·순응·총수는 태조 대왕의 악장이고, 정세는 태종 대왕의 악장이고, 혁정은 세종 대왕의 악장입니다. 소무와 영관은 역시 일반적으로 열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유·역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11장(章)을 11성에 연결시키면 곡(曲)과 무(舞)가 상응되니, 당시 제작할 때 그 뜻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에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영녕전에서도 사용했습니다. 종묘의 경우에는 사조의 악장을 태조 이하에 사용해도 서차(序次)가 문란되지 않을 듯한데, 영녕전의 경우는 태조·태종·세종 대왕의 악장을 올려 쓰는 것은 또한 부당합니다. 상정(常情)으로 미루어 말하면 각실에 각각 악장이 있어야 하고, 사조의 악장을 종묘에 사용하여서는 안 될 듯한데, 수백년 동안 내려오면서 고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해조에서 말한 바 ‘묘악은 가장 높은 이에 따라야 한다.’고 한 말이 근사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각실의 악장을 고쳐 지을 경우 소위 11성이란 것과 상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진정 흠전(欠典)이라고도 하겠으나, 그 이유를 자세히 따져 보지도 않고 갑자기 고친다면 그것 또한 난처하게 여겨집니다. 신과 같은 자가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역대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각실에 악장이 있어야 할지의 여부와 종묘의 악가(樂歌)는 가장 높은 이에게 비중을 두어야 할지 등의 일을 절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주송(周頌)은 종묘의 악가로서 성덕(盛德)을 형용하여 그 성공을 신명(神明)에 고하는 것입니다. 청묘(淸廟) 등의 장(章)은 곧 문왕(文王)을 제사지내는 가사(歌詞)이고, 집경(執競) 한 장은 곧 무왕(武王)에게 제사지내는 가사로서 성왕(成王)·강왕(康王)에게 통용하는 시(詩)입니다. 그뒤 동한(東漢) 초기에 이르러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논의하기를 ‘한나라 제도의 구전(舊典)을 보건대, 종묘에는 그에 해당되는 악가를 연주하고 한 악가는 답습하지 않음으로써 각자의 공덕을 밝혔다. 고 황제(高皇帝)는 잔적(殘賊)을 제거하고 천하를 소유하였으므로, 무덕(武德)의 무(舞)를 지었고, 효문(孝文)은 몸소 절검을 행하고 번거로운 형벌을 제거하여 은택을 베풀었으므로, 경제(景帝)가 소덕(昭德)의 무를 제정하였으며, 효무(孝武)는 국토를 개척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위엄을 해외에 떨쳤으므로, 선제(宣帝)가 성덕의 무를 제정하였다. 따라서 광무(光武)는 천명을 받고 중흥하여 공덕이 높이 뛰어났으니, 악명(樂名)을 대무(大武)의 무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제(宣帝) 때에 조서를 내리기를 ‘효무(孝武)는 인의를 실천하고 위무(威武)를 떨쳐 공덕이 찬란한데도 이에 걸맞는 묘악이 없으니, 열후(列侯)·2천 석 박사와 논의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하후승(夏侯勝)이 말하기를 ‘무제가 비록 사이(四夷)를 물리치고 국토를 넓힌 공은 있으나 군사를 많이 죽이고 절도없이 사치하였으니, 묘악을 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서한(西漢)의 종묘에는 각각 그 묘악을 연주하였으나, 혜제(惠帝)·소제(昭帝)의 제묘(諸廟)처럼 사용하는 묘악이 맞지 않을 경우, 단지 훌륭한 공덕이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만 악가를 제정하여 연주했음은 의심이 없는 듯합니다.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태위(太尉) 조희(趙憙)가 아뢰기를 ‘효명 황제(孝明皇帝)는 공덕이 성대하니 세조묘(世祖廟)에 협식(祫食)케 하고, 무덕(武德)·문치(文治)·오행(五行)의 무(舞)를 연주해야 마땅하다.’ 하였는데, 동평왕 유창이 상언(上言)하기를, ‘옛날 효문(孝文)의 묘악을 소덕(昭德)의 무라 하고, 효무(孝武)의 묘악을 성덕(盛德)의 무라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고묘(高廟)에 협식하고 있는 관계로, 소덕의 무는 연주하지 않고 고묘의 묘악으로 대신하고 있다. 지금 효명 황제가 세조묘에 있게 되면 세조의 묘악을 같이 해야하니, 성덕의 묘악을 연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차라리 묘(廟)를 각기 세워 무덕(武德)의 무를 짓게 하는 것이 낫다.’ 하니, 이를 따랐습니다. 화제(和帝)가 즉위하자 유사가 장제(章帝)의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으로 하고 무덕의 무를 같이 연주할 것을 아뢰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진대(晉代)에 내려와서는 실(室)마다 각각 묘악을 연주했는데, 선경(宣景)으로부터 효무(孝武)까지 뚜렷이 상고할 수 있습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이르러서는 진씨(晋氏)의 제도를 따랐으니, 인용하여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당(唐)나라 때에 그대로 이 제도를 사용했으니, 헌조(獻祖)의 실에 광대(光大)의 무를 연주하고, 의조(懿祖)의 실에 장발(長發)의 무를 연주하고, 태조(太祖)의 실에 대정(大政)의 무를 연주하고, 세조(世祖)의 실에 대성(大成)의 무를 연주하고, 고조(高祖)의 실에 대명(大明)의 무를 연주하고, 태종(太宗)의 실에 숭덕(崇德)의 무를 연주하고, 고종(高宗)의 실에 균천(勻天)의 무를 연주하고, 중종(中宗)의 실에 태화(太和)의 무를 연주하고, 예종(睿宗)의 실에 경운(景雲)의 무를 연주하고, 현종(玄宗)의 실에는 대운(大運)의 무를 연주하고, 숙종(肅宗)의 실에는 유신(維新)의 무를 연주하는 등 희종(僖宗)·소종(昭宗)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송조(宋朝) 역시 당나라 제도를 따라 희조(禧祖)의 실에 대선(大善)을 연주하고, 순조(順祖)의 실에 대녕(大寧)을 연주하고, 익조(翼祖)의 실에 대순(大順)을 연주하고, 태조(太祖)의 실에 대정(大定)을 연주하고, 태종(太宗)의 실에 대성(大盛)을 연주하고, 진종(眞宗)의 실에 대명(大明) 등의 무(舞)를 연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남송(南宋)의 효종조(孝宗朝)에 이르러 교묘(郊廟)의 악장을 고종조(高宗朝)에 제술한 것을 모두 준용하였는데, 흠종(欽宗)을 높여 부묘(袝廟)할 때에 묘악을 제술하여 소흥(紹興) 말년에 비로소 묘에서 연주하였다 하니, 역시 실마다 각각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조(光宗朝)의 악장은 모두 효종조에 사용하였던 것을 준용하였으니, 효종과 광종때는 각각 연주하지 않고 통용했음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원조(元朝)에서는 각자 악장을 연주하였던 것과 여조(麗朝)에서 통용하지 않았던 것들도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황명(皇明)의 묘향(廟享) 제도를 살피건대 태조와 태종의 실에는 각각 연주하는 악장이 있으나, 인묘(仁廟)의 악장에 있어서는 선묘(宣廟)·영묘(英廟)·헌묘(憲廟)에 두루 통용하였으며, 효묘(孝廟) 이하 예묘(睿廟)·무묘(武廟)에 이르기까지는 실마다 각각 악장이 있고, 태묘(太廟)에 있어서의 악장의 제도는 각각 연주하기도 하고 통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적(文籍)에 실려 있는 역대의 가감된 규범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이르기를,
"각실의 악장을 추가로 제술하여 보충해서 사용하도록 한 일에 대해서는 신들의 견해가 천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일 계사 가운데 ‘묘악(廟樂)은 마땅히 가장 높은 이에 따라야 하므로 조종(祖宗)의 공덕만을 찬양해야 하고, 이하 대유(大猷)·역성(繹成)이나 소무(昭武)·영관(永觀) 등 악장은 열성(列聖)에게 통용해야 한다.’고 대략 진품(陳稟)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은 바로 사조(四祖)의 악장(樂章)이니, 상정(常情)으로 살피건대 사조를 영녕전으로 이안(移安)한 이상 영녕전에서만 연주해야 마땅할 듯싶었으므로, 체천(遞遷)한 뒤에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아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자세히 살펴보건대, 태묘의 악장은 《악학궤범》에만 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오례의(五禮儀)》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종묘의 악장 중에 영신(迎神)·전폐(奠幣)·진찬(進饌)·철변두(徹籩豆)·송신(送神)할 때의 것은 열성(列聖)에 두루 통용됩니다. 그리고 초헌(初獻)에는 희문(熙文)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고, 기명(基命) 이하 8장 및 대유(大猷)·역성(繹成)으로 인도하여 나가 한 곡무(曲舞)를 이루고, 아헌과 종헌 때에는 소무(昭武)로 인도하여 들어가고, 독경(篤慶) 이하 9장 및 영관(永觀)으로 인도하여 나가 한 곡무를 이룹니다. 또 영녕전의 경우는 악무(樂舞)가 종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조(四祖)를 조천(祧遷)한 이후 태묘에서 사조의 악장을 그대로 연주하고, 영녕전에서도 태조·태종의 악장을 연주하는 것이 분명하니, 방심하여 지나친 것도 아니고 그대로 따라서 잘못된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문종으로부터 성종의 실(室)에 이르기까지는 악장이 《악학궤범》과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는 대체로 각실(各室)의 전헌(奠獻) 때에 반드시 그 실마다 악장을 연주할 경우 악장은 길고 전헌은 간단해서 악장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전헌은 끝나버립니다. 따라서 형세상 곡이 연주되자마자 바로 중지하게 되어 곡무(曲舞)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덕(先德)을 찬양하고 끝에 열성을 찬양하는 한 악장을 만들어 통용하게 한 것이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선덕(先德)을 칭송한 노래로 열성의 실에 연주하면 정문(情文)이 잘 조화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주송(周頌) 집경(執競)의 전해진 뜻이라 하겠습니다.
유신(儒臣)이 널리 상고한 것 가운데 이른바 ‘서한(西漢)은 단지 공덕이 훌륭했던 부분에 대해 악장을 제술하였다.’고 한 것은 하후승(夏侯勝)의 논의만 가지고도 충분히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송조(宋朝)·원조(元朝)에서도 각실마다 악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사용한 제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황조(皇朝)의 경우는 태조·태종에게 각각 악장이 있고 인묘(仁廟) 이하는 통용하였는데, 어쩌면 《악학궤범》은 이러한 전례(典禮)들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묘악(廟樂)과 같은 막중한 예를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다시 논의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좌의정 윤방(尹昉)은 의논드리기를,
"신의 소견은 전일 의논드릴 때에 대강 진달하였습니다만 이제 해조가 복계(覆啓)한 내용을 보니 매우 자세합니다. 주송(周頌) 집경(執競)의 대의와 서한 하후승이 논한 것을 가지고 보건대, 단지 공덕이 가장 훌륭한 위(位)에만 따로 악장(樂章)을 제술하였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본조(本朝)에서 2백 년 동안 지켜 내려온 전례(典禮)를 갑자기 바꾼다는 것도 과연 미안한 일이니, 해조의 계사대로 모두 구제(舊制)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의논드리기를,
"신의 의견은 이미 전일 의논드릴 때에 모두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해조의 복계를 보니 매우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전대 묘악의 경우도 대부분 시조(始祖)의 공덕을 칭송하여 그대로 여러 임금에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본조(本朝)의 태묘 악장의 경우도 혹시 이 전례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지금에 와서 창시한 본래의 뜻을 자세히 모른 채 갑자기 개혁한다는 것은 곡무(曲舞)가 이루어지지 않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신은 그대로 구제(舊制)를 존속시키는 것이 신중을 기하는 의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상의 재가를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선조묘(宣祖廟)에도 따로 악장이 있어야 할 듯하니,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대신과 의논한 결과 좌의정 윤방, 우의정 신흠이 의논드리기를,
"전대의 제왕은 창업주가 아니라도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묘악에 있어서 별도의 악장이 있었습니다. 선조 대왕의 악장은 상의 분부대로 찬술하여 쓰는 것이 의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무(樂舞)에 맞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해조와 악사(樂師) 등이 강구하여 시행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실의 악장을 각각 제술하지 않을 것인지의 여부는 전일 이미 예제(禮制)를 상고하여 결정할 것으로 계하하였습니다. 선조 대왕에게는 광국 중흥(光國中興)하신 공덕이 있으므로 따로 악장을 제술하여 묘향(廟享)에 쓰는 것이 신인(神人)의 소망에 부합될 것이니, 상의 분부대로 대제학으로 하여금 찬술하게 하여 쓰는 것이 의당합니다. 다만 악무에 맞게 될지의 여부에 대해서 이원(梨園)의 노악사(老樂師)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악보(樂譜)만을 익혀 등가(登歌)로 연주할 뿐, 새 악장을 어느 음률(音律)에 맞추고 무(舞)에 맞게 하는 것은 자세히 몰랐습니다. 그저 길면 빠르게 하고 짧으면 느리게 할 수 있다고만 하니, 그들에게 질정해서 의심이 없도록 하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삼가 《주례(周禮)》를 상고하건대, ‘구덕(九德)의 음악과 구경(九磬)의 춤을 종묘에서 연주하니, 악장이 아홉 번 변하면 사람이나 신명 모두 예(禮)를 얻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시 《악학궤범》을 상고해 보건대, 초헌에 쓰는 보태평(保太平)의 악장은 희문(熙文)으로 인도해 들여 기명(基命) 등 9장으로 한 악무(樂舞)를 이룬 뒤 역성(繹成)으로 인도해 나가고, 아헌과 종헌에 쓰는 정대업(定大業)의 악장은 소무(昭武)로 인도해 들여 독경(篤慶) 등 9장으로 한 악무를 이룬 뒤 영관(永觀)으로 인도해 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주례》에서 말한 바 ‘악장이 아홉번 변한다.’고 한 것은 곧 이 뜻인 듯싶습니다. 따라서 역성(繹成)의 악장에서 ‘왼쪽에 약(籥), 오른쪽에 적(翟)을 들고 춤을 추니 아홉 번 곡조가 변했다.’고 한 말 역시 이 뜻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초헌 및 아헌과 종헌이 9장이 모두 구비되었으니 첨가할 악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구수(句數)와 자수(字數)를 상고해 보건대, 초헌은 모두 72구의 3백 8자인데, 아헌과 종헌은 87구에 3백 28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당시 사신(詞臣)이 찬술할 때에 우연히 자구에 차이가 났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까닭에 악사(樂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초헌은 악장이 약간 짧으므로 다른 성곡(聲曲)을 끌어내어 복주(覆奏)한다.’고 합니다. 지금 새로 찬술한 악장을 초헌 때 정명(貞明) 아래에 첨가시키면 구수와 자수가 아헌·종헌 때와 서로 같아지니 마땅할 듯 싶습니다."
하니, 따랐다.
윤6월 26일 병인
이경헌(李景憲)을 장령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지평으로 삼았다.
윤6월 28일 무진
춘성군(春城君) 남이웅(南以雄), 동지중추부사 김상헌(金尙憲), 서장관 김지수(金地粹)를 경사(京師)에 파견하였다.
윤6월 29일 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은 모두 나타나는 시기가 있는 것으로서 추산하여 알 수 있으니 통상적인 일로 여길 법한데도 옛 사람들은 이를 변고로 여겼습니다. 그 까닭은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는 기운이 화평스러워 음(陰)이 양(陽)을 이기지 못하는 관계로 식(食)이 있어야 할 때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데 반해 쇠미한 시대에는 인사(人事)에 잘못이 있어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하게 된 나머지 그때가 되면 반드시 그런 현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식과 월식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큰 변고인 것입니다.
오는 7월 초하루 아침은 일식이 있게 되는 날인데 혼궁(魂宮)의 삭제(朔祭)를 친행(親行)하겠다는 명이 계셨습니다. 대저 임금의 일거 일동은 모두가 하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공자(孔子)는 왕위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천둥 번개가 치고 심한 비바람이 칠 때에는 반드시 자세를 엄숙히 하고 밤중에도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의관(衣冠)을 갖추고 앉아 있었으니, 이는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서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늘이 크게 경고를 보이는 일식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리고 일식이 일어날 시각이 바로 삭제를 행하는 때와 일치되는데, 일식에 대처해야 할 바로 그때에 친림(親臨)하여 일을 행한다면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써 매우 미안한 일인 듯싶습니다. 혼궁의 삭제를 이번에는 상주(喪主)만 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친제를 조금 일찍 행하여 시각이 일치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윤6월 30일 경오
헌부가 아뢰기를,
"혼궁의 삭망제(朔望祭)를 한달도 거르지 않고 성상께서 친히 행하려 하시니, 신들은 실로 성상의 효성이 뛰어나시고 애모하는 정이 지극함을 알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임금은 한 사람의 몸으로 복잡한 만기(萬機)를 처리해야 하므로 상중이 아닌 때라 해도 온갖 일을 조처하느라 절선(節宣)하는 도(道)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상께서는 초상(初喪) 때에 너무 무리하신 나머지 말할 수 없이 수척해지셨으니, 신민의 애타는 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요즘 듣건대 성후(聖候)가 편치 않으시다 하는데, 전하께서는 비록 스스로를 가벼이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조종이 맡겨주신 대업을 어쩌시렵니까.
그리고 일식의 변고를 당하게 된 이때 두려운 마음으로 수성(修省)하시기에 겨를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공경해야 하는 경계를 소홀히 하고 사사로운 인정에만 얽매여 슬퍼하시면서 후설(喉舌)의 신하가 누누이 진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시간을 앞당겨 반드시 친행(親行)하려고 하시니, 임금의 동정이 이처럼 구간(苟簡)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행할 수는 없을 듯싶습니다. 정원의 계사대로 이번 삭제는 친행하지 마소서."
하니, 힘써 따르겠다고 답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이경석(李景奭), 수찬 김광현(金光炫), 부수찬 홍명구(洪命耉)·민응회(閔應恢)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삼가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일식이 있는 날 혼궁(魂宮)에 친제하시는 것은 미안스런 일이라고 반복되어 진달하였는데, 성비(聖批)에 ‘조금 일찍 거행하여 시각이 일치되지 않도록 하라.’고 전교하시니, 신들은 전하께서 깊이 생각지 않으시고 이처럼 분부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일식의 변에 대해서는 정원이 이미 자세히 아뢰었으므로 지금 굳이 다시 논계하지 않고 수성(修省)하여 변에 응하는 도리를 대체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가져 정성이 쌓인 뒤에야 비로소 감응이 있게 되는 것이니, 어찌 재이(災異)가 드러난 뒤에 비로소 마음에 두려운 생각을 갖는 것이 변에 응하는 방법이겠습니까. 송(宋)나라 신하 주희(朱熹)는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덕을 닦아 정치를 행하면서 현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여, 양(陽)으로 하여금 왕성하게 하여 음(陰)를 이길 수 있게 하고 음이 쇠하여 양을 침범할 수 없게 하면, 달이 항상 해를 피하게 되기 때문에 일식이 있어야 할 때에도 일식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덕을 닦아 정치를 시행해 양이 성해져 음을 이기게 하는 도가 어찌 한때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변고가 있기 전에 변에 대응하는 뜻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은 계세(季世)의 평범한 군주에 지나지 않는데도 일식이 있을 때마다 소복(素服)하고 변을 기다렸습니다. 이른바 변을 기다린다는 것은 미리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아무리 일찍 친제를 거행한다 하더라도 시각이 일치되지 않을지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가령 시각이 일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변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헤아려 본다면 너무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오늘부터 엄숙한 자세로 재계(齋戒)하시는 것은 일식을 위해서입니까, 삭제를 위해서입니까? 대개 성(誠)이란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삭제를 위해 재계를 한다면, 재이를 만나 수성하는 정성은 어떻게 됩니까. 만약 일식에 대한 것도 겸해서 하신다면, 과연 양쪽에 정성을 다 쏟을 수 있겠습니까. 일식을 만나 친제를 정지한다 해도 그것은 진정 어버이 섬기는 효에 해가 되지 않지만, 친제 때문에 일식을 소홀히 한다면 실제로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깊이 생각하여 대처하지 않으십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일식에 정해진 도수가 있는데 성인께서 《춘추(春秋)》에 반드시 기록했던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수성케 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의 구구한 뜻도 사실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친제하시는 일을 속히 중지하시어 수성하는 도를 다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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