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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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갑오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의례대로 삭제를 몸소 행하였다.

 

세자의 가례를 종묘에 고하고, 삭제도 행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강릉 부사 정운호(鄭雲湖)는 그 첩의 자식들이 온갖 폐단을 일으키게 놓아두어 온 고을의 원성을 샀고, 그리하여 관사가 모두 소실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운호에게 진실로 다스리지 못한 실상이 있다면 파직시킴이 불가할 것은 없겠으나, 지금 관사가 소실된 것만으로 죄를 주면 후폐가 없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어 간계에 빠지지 말라."
하였다.

 

호조가 예조에 이관(移關)하기를,
"갑자년111)   환도(還都)했을 때에 제향과 어공(御供)을 3년간 줄이게 하고, 각도의 공물도 함께 줄이게 하였는데, 작년 10월 대신의 계사(啓辭)에 따라 다시 1년을 연장하였습니다. 갑자년부터 금년까지 이미 4년이 지났으므로 내년 정월부터는 제향과 어공을 마땅히 다시 옛날처럼 해야 할 것이나, 금년 4월 강도(江都)112)  에 있을 때 상공(上供)하는 물건을 갑자년의 예대로 3년간 줄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상공하는 물건은 당연히 기사년113)  까지 갑자년에 줄인 수량대로 올려야 하겠으나, 제향은 이미 4년간의 기한이 지났으므로 다시 아뢰어서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복계하기를,
"상공하는 물건은 금년 4월의 하교를 따라 기사년까지 줄이기로 했으니 제향도 똑같이 시행해야 하겠으나 일이 중대하므로 청하여 대신들에게 수의하도록 하였습니다. 해창군(海昌君)과 삼공이 모두 ‘제향을 4년간이나 줄인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나, 지금의 형편이 갑자년보다도 더 어려우니 해조의 계사대로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한성부 판윤 권반(權盼)이 병으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권반은 등극사(登極使)로 차출된 후로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아 소임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심산이 있었으니,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렇단 말인가.

 

접대소(接待所)가 아뢰었다.
"방금 차관(差官)을 수행하는 역관이 와서 ‘가정(家丁)이 금천(衿川)의 절에 가서 두 아이와 한 여자를 잡아 왔고, 또 마을에서 유민(流民) 1명과 여자 3명을 데리고 관사로 돌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12월 2일 을미

주강에 《중용》의 군자지도비이은장(君子之都費而隱章)을 강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지사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지금 도군(逃軍)을 모두 석방시켜 주면 군정(軍政)이 해이해질 것이며, 모두 충군(充軍)하는 벌을 주면 너무 무거운 듯한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특진관 최명길(崔鳴吉)은 아뢰기를,
"처음에 도군을 처리한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충군하는 벌은 지나치게 무거워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합니다. 군정이 비록 소중하나 군사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미 큰 은혜를 내리셨으니 벌을 받은 도군도 모두 용서하여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군사들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민응형(閔應亨)은 아뢰기를,
"지난번 사대부의 집에서 거둔 옷가지를 서관(西關)에 보내니 군사와 백성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여론이 모두 ‘어고(御庫)의 물건을 풀어서 관서(關西)에 보내어 위로하는 뜻을 보이면, 서관 백성의 감격과 위안이 솜털보다도 따뜻하게 여기어 모두들 나라를 위해 죽으려 할 것이다.’고 합니다."
하였다.

 

12월 3일 병신

가례 도감이 아뢰기를,
"세자빈의 교명(敎命)과 책보(冊寶)가 지금 완성되었습니다. 전에 어람을 거친 예가 있어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4일 정유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세자빈을 책봉하는 예를 행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간이 암행 어사를 보내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은 지 오래인데, 아직도 성명(成命)이 없습니다. 근래에 듣자니, 양서(兩西)에서 변란을 치른 후로 살아남은 백성의 생활이 궁핍하고 초췌하기가 극심한데, 탐욕스런 수령들이 평상시같이 거두어 들이고 약탈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합니다. 해서(海西)·청남(淸南)에 먼저 암행 어사를 보내소서. 마전 현감(麻全縣監) 남두형(南斗炯)은 본래 성격이 난폭하여 사람들이 천시하는 자인데 본직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아전과 백성의 처를 겁간(劫奸)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암행 어사는 앞으로 발송할 테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정숙 옹주(貞淑翁主)의 예장(禮葬)을 이달 27일로 정했다고 하는데 그날 가례를 행하는 것은 미안하니, 해조로 하여금 택일을 다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의 가례는 나라의 큰 일입니다. 정숙 옹주가 비록 정으로는 지친이지만, 사가(私家)의 상례 때문에 대례(大禮)를 옮길 수는 없습니다. 《예기》 증자문(曾子問)에 ‘신랑이 친영(親迎)하고 신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만약 자최(齊衰)·대공(大功)의 상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남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옷을 바꾸어 입고 여자는 들어가서 안에서 옷을 바꾸어 입은 다음, 자리에 나아가 곡한다.’하였으며, 그 주에 ‘여기서 특별히 자최와 대공의 상만을 물은 것은 소공(小功)과 시마(緦麻)는 가벼우므로 혼례를 폐하지 않고 예를 마친 다음 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정숙 옹주는 세자의 소공친(小功親)이므로 비록 초상(初喪) 중이라도 혼례를 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예기》 잡기(雜記)에 ‘아버지가 소공의 말기(末期)이면 아들의 관례를 할 수 있고, 딸을 시집보낼 수 있고, 며느리를 얻을 수 있다. 자기가 비록 소공복을 입었더라도 졸곡(卒哭)이 지났으면 관례하고, 며느리 얻고, 시집보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국조제례(國朝制禮)에는 소공 이상은 정조시(停朝市)만 하고 복이 없다고 하였으니, 결단코 이 때문에 대례를 미룰 수 없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상가(喪家)에서 장례를 28일로 연기했다 하니 더욱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정한 날에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치계하기를,
"청주 목사(淸州牧師) 심기성(沈器成)은 경솔하고 교만하여 맡은 일은 태만하게 버려두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미복으로 출입하여 관원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관아의 물건을 낭비하여 창고에 남은 물건이 없으며, 죄인을 다스림에 규정을 어기고 곤장 대신 몽둥이를 사용하며, 고을의 계집종을 간통하고서 나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하고 관아에서 데리고 살아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파출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식(全湜)을 이조 참의로, 서성(徐渻)을 지춘추관사로, 이홍주(李弘胄)를 동지춘추관사로, 김상헌(金尙憲)을 지춘추관사로 삼았다. 상헌은 정직하고 신념대로 행동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하게 말하는 것이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으며, 종일 단정히 앉아서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경외(敬畏)하여 당대 제일의 인물로 추대하였다.

 

12월 5일 무술

성절 겸 동지사(聖節兼冬至使) 변응벽(邊應璧)이 치계하기를,
"9월 23일에 등주(登州)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장관이 탄 제2선과 제3선은 14일 광록도(廣鹿島)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종적이 없습니다. 천계 황제(天啓皇帝)가 8월 22일 붕서(崩逝)하고 새 황제가 즉위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장관 윤창립(尹昌立)이 탄 배와 제3선은 표류하여 종적이 없다고 합니다. 두 배에 탄 관원과 선원이 79명이나 되니 지극히 놀랍고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모두 배의 수리를 소홀히 하고, 물건을 정제하지 않고 선원의 품삯을 싸게 하여 모두 구차하게 마련한 소치이니, 양도(兩道) 감사와 선격 정제 차사원(船格整齊差使員)을 모두 중히 추고하소서. 표류한 사람들의 보상은 익사한 것을 자세히 안 다음에 예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중용》 도불원인장(道不遠人章)을 진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빈궁에 수놓은 요가 있다고 들은 것을 감히 경연 중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이 밖에 나가 자세히 들어 보니 수놓은 요가 아니라 비단요였습니다. 이처럼 사실이 아닌 말로써 천청(天廳)에 잘못 아뢰었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진언하는 도리에 해가 되겠는가.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면 되는 것이다. 또 비단요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지나치게 사치스런 물건이다. 대궐 안에 아직 이런 물건이 없었다. 길례(吉禮)라고 하나 이와 같이 해서야 되겠는가. 쓰지 못하게 하라."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나라의 복입니다. 소신이 망령되게 어리석은 말을 진언하였으나 지금 성지를 받드니,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12월 6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동평군(東平君) 신경유(申景𥙿)는 어려울 때 절감하라는 성상의 뜻을 받들지 않고,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켜 큰 집을 지어 법제를 어겼습니다. 조종조로부터 사대부의 집은 법제보다 크게 짓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처럼 어려운 때이겠습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평안 병사 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기를,
"본도에 배속된 충군 1백 명을 의주 부윤에게 딸려 보냈는데, 의주에 이르러 도망한 자가 33명입니다. 조정에서 처음에 도망한 자들을 죽이지 않고 충군한 것은 막대한 은혜인데,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감히 또 도망한 죄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영남의 군사뿐만 아니라 본도에서 도망간 자들도 법률 적용이 엄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몰래 도망쳐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 도망하는 것으로 상책을 삼습니다. 나아가면 죽고 도망가면 사는데, 상벌이 없다면 누가 기꺼이 적지에 가서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재범자는 모두 효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소가 아뢰었다.
"한인(漢人) 중 차관이 있는 곳에 자수한 사람과 접대소가 색출해 낸 사람은 남자 58명, 여자 5명입니다."

 

12월 7일 경자

도체찰사 종사관 이경증(李景曾)이 양서(兩西)를 순찰하고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 아뢰었다. 상이 삼화 현령(三和縣令) 최응수(崔應水), 평양 서윤(平壤庶尹) 이영식(李永式), 해주 목사(海州牧使) 박추(朴簉),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득연(申得淵)에게 각각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였다

 

12월 8일 신축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 자왈순기대효야장(子日舜其大孝也章)을 진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성절사 변응벽이 보고한 것으로 보면, 천계 황제의 애조(哀詔)를 가진 황 차관(黃差官)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붕서했다는 보고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가 가져갈 문서를 승문원이 쓰게 하고, 출발일을 관상감이 택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9일 임인

상이 하교하기를,
"흥경원(興慶園)은 3년 후에 지키는 관리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미리 해조로 하여금 가부를 결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원소(園所)의 일은 능침(陵寢)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원(園)을 지키는 관원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어떤 사람을 차출해야 할지 모두 근거할 만한 예가 없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품정(稟定)케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삼가 한사(漢史)를 살펴 보건대 ‘도황고원(悼皇考園)에 장승(長丞)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흥경원에도 지키는 관원을 두어야 하겠습니다만, 신의 소견이 고루하고, 또 근거할 만한 전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법규를 만드는 것이므로 경솔히 정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전사(前史)를 상고하게 한 후에 대신과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은 작년에 묘호(墓號)를 상고하여 올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전사 중에서 꼭 맞는 증거를 얻지 못하고 다만 한 선제(漢宣帝) 때의 봉명원(奉明園)이란 한 구절로써 서계하였었습니다. 지금 예조가 말하는 ‘원에 장승을 두고 법대로 받들어 지킨다.’는 것이 그것이며 이밖에는 전거가 없습니다. 해창군(海昌君)과 삼공이 모두 ‘이미 원을 두었으므로 받들어 지키는 관원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그 관명을 정하여 차출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원소에 이미 받들어 지키는 관원을 두게 되면 그 임무가 참봉과 다르지 않으나, 다만 참봉이라고 하면 능을 지키는 관원과 관명이 혼동되므로 미안할 것 같습니다. 혹 ‘재랑(齋郞)’이라고 하여 구별하되 그 직책의 등급과 전보하는 규정은 참봉과 같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원과 능의 이름이 이미 다르므로 받들어 지키는 관원을 참봉이라고 하여도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상번(上番)하는 군사가 얼어 죽을 걱정이 없지 않다. 섬거적을 넉넉히 지급하고, 옷을 얇게 입은 자를 조사하여 옷을 지급하라."

 

12월 10일 계묘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 무왕주공달효의장(武王周公達孝矣章)을 진강하였다.

 

12월 11일 갑진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이귀(李貴)가 상차하기를 ‘여러 도의 도군(逃軍)을 모두 용서해준다고 하니 이것은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큰 일입니다. 당초에 여러 도의 감사, 병사, 수사가 잘못 처리하여 군사들만 불쾌한 것이 아니라 신들도 마음에 꺼림직하였습니다. 지금 널리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면, 그들이 비록 무식한 자들이기는 하지만 어찌 감격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한 장의 행문(行文)으로 알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사면하는 글을 특별히 지어야 한다는 것이 신들의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먼저, 여러 도의 주장(主將)이 잘못 처리하여 군율이 행해지지 못하고 군정(軍情)이 불쾌하게 되었으니, 우선 벌을 가볍게 하여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국정에 동참하게 한다는 뜻을 말하고, 다음에는 앞으로 군율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인원수의 다소를 불문하고 먼저 참형에 처하고 뒤에 보고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말 것이며 만일 살려주자고 상문(上聞)하면 주장도 군율을 면키 어렵다는 뜻을 밝혀야 하며, 끝으로 변방의 방위가 급하니 죽음을 면해주고 지키게 한 뒤에 봄이 되면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밝혀야 합니다. 선전관으로 하여금 군사들의 앞에 나아가 사서(赦書)를 읽게 하여 군사들이 대사면의 은혜를 알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 애공문정장(哀公問政章)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애공(哀公)이 그 정치만 묻고 그 말은 실천하지 않았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묻기는 하였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魯)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재를 얻어 정사를 하는 것은 부들과 갈대가 쉽게 자라는 것과 비견된다. 만일 인재를 얻으면 정사하기가 진실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인재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닌데 나라의 일이 이와 같은 것은 사실은 신하는 있으나 임금이 없는 소치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여론이 모두, 성명(聖明)이 위에 계신데 나라가 이렇게까지 위축된 것은 아래에 잘 받드는 신하가 없어서 이런 위란(危亂)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오지 않는다.’ 하였는데 한 시대의 인재를 불러 쓰면 한 시대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쓰거나 버릴 때에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라의 위망이 여기에 달렸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의 태도는 반드시 인주(人主)의 마음에 맞춰 아첨하고 순종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가까이하기는 쉽고 소원히하기는 어렵다. 군자는 정직하고 소신껏 행동하여 일마다 원칙대로 하고 비위를 맞추거나 아첨하지 않으므로 가까이하기는 어렵고 소원하기는 쉽다. 임금된 자가 진실로 사욕이 없다면 왜 소인을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미워하겠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성감(聖監)의 밝기가 이와 같으시니 종사의 행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소목(昭穆)의 차례를 자세히 알고 싶은데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왼쪽은 소(昭)이고 오른쪽은 목(穆)입니다. 3소와 3목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한 궁(宮) 안에 7묘(廟)를 벌여 세웁니다. 1세(世)는 스스로 1목이 되며 소는 목을 보지 못하고 목은 소를 보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소와 3목이 모두 동향(東向)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사당은 남향이며 신주는 모두 동향입니다. 소는 왼쪽에 있으며 양명(陽明)을 주로 하므로 소라고 하며, 목은 오른쪽에 있으며 음유(陰幽)를 주로 하므로 목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목의 명칭은 유명(幽明)을 가지고 이름붙인 것인가?"
하니, 경세가 그렇다고 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경세가 진언하기를,
"근래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매일 경연에 임하시니 옥체를 손상하실까 두렵습니다. 3,4일에 한 번씩 경연을 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성구(李聖求), 사간 윤지(尹墀),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오달승(吳達升)·오단(吳端)이 아뢰기를,
"소무 공신(昭武功臣)114)   중 두 영장(營將)을 정훈(正勳)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일을 가지고 여러날 논란하고도 윤허를 받지 못하는 형세를 계속 지속시키기 곤란하므로 서로 상의하여 정계(停啓)하였습니다. 지금 연신(筵臣)이 두 공신의 삭제를 강력히 주장하며 또 정계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으니, 신들이 굳게 고집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조방직(趙邦直), 지평 이경(李坰)·임련(林堜) 등이 또한 이로써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두 영장을 공신으로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국론이 자자하여 모두 삭제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간원이 이미 문제를 제기하였으므로 신들은 간원이 이미 논란한 것을 양사가 함께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물의가 다시 일어나 간원이 정계한 것을 잘못이라고 하니, 신들이 당초에 거론하지 않은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간원을 처치할 수 없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국가에서 공을 상주는 법이 녹훈보다 중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조종조로부터 지극히 신중히 한 것이므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인거(李仁居)를 체포할 때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신경영(辛慶英), 이윤남(李胤男) 등을 정훈에 기록하는 일은 지극히 외람됩니다. 간원이 힘써 간쟁하지 못한 것은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이며, 헌부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논계하지 않은 것은 우유부단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2일 을사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지금 양도(糧道)가 끊어져서 조치할 방법이 없습니다. 향신(餉臣)의 계사대로 당상(堂上)과 가선 대부의 공명첩(空名帖)을 내려보내서 시급한 상황을 구제하소서."

 

날씨가 추우므로 경범 죄인을 전옥에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차하여 원접사를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3일 병오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여 관반사의 직임을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4일 정미

상이 당초 이날 혼궁에서 납향 대제를 친히 거행하려 하였으나, 정원과 예관이 모두 월식이 일식과는 차이가 있으나 거동하기는 미안하므로 정지하라고 하니, 따랐다.

 

의주 부윤 엄황(嚴愰)이 치계하였다.
"도망하여 돌아온 평양 사람 노국남(盧國男)과 노선손(盧先孫)이 와서 말하기를 ‘초봄에 잡혀갔는데, 금년 11월에 한(汗)과 여러 왕이 보병을 데리고 철령성(鐵嶺城)으로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도망왔다. 잡혀 있는 동안 들어보니, 한윤(韓潤)이 기미년115)  과 금년에 잡아간 사람 중 추종자들을 창솔(倡率)하여 연명으로 한에게 정장(呈狀)하기를 「조선이 강화를 맺었으나 약속을 어긴 것이 매우 많으니 다시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두 번 정소(呈訴)하니 한이 말하기를 「지난번 하늘에 맹서하고 강화 조약을 맺은 것 중에 약속을 어기는 것을 본 뒤에 재침해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 심양성(瀋陽城)에 맹수가 자주 나타나고 재앙이 겹쳐 근거지를 옮기려고 철령성을 쌓고 있는데 일을 거의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가평군(加平郡)에서 암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고양이를 닮았고 머리가 둘, 다리가 넷, 눈이 넷, 귀가 둘이었다.

 

월식이 있었다.

 

12월 15일 무신

이홍주(李弘胄)를 대사헌으로, 조익(趙翼)을 대사간으로, 권도(權濤)를 집의로, 최연(崔葕)을 사간으로, 윤지(尹墀)를 부응교로, 여이징(呂爾徵)을 부교리로, 오단(吳端)을 부수찬으로, 이행원(李行遠)을 헌납으로, 심동구(沈東龜)·고부천(高傅川)을 정언으로, 유림(柳琳)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유림은 정릉(靖陵)116)  의 교목(喬木)을 벌목하여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도리어 우수사의 직책을 주었으니, 많은 사람이 다 분노하고 욕하였다.

 

12월 16일 기유

상이 작년의 예에 따라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의 집에 쌀과 콩을 하사하라고 해조에 명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12월 17일 경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12월 18일 신해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안구(鞍具)를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연신(筵臣)의 말을 따른 것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울 안에 모인 요민(遼民)은 1백 60여 명인데 시가지를 약탈하는 정상은 비록 미우나, 굶주려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형세입니다. 적이 침입했을 때에 소위포(少爲浦) 등에 사는 본국의 주린 백성을 도독(都督)이 구휼하였었고, 더구나 이들은 중국의 백성이니 어찌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해당 조로 하여금 차관(差官)이 있는 곳에 쌀가마를 보내서 요민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사상(李士祥)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영서 찰방(迎曙察訪) 심지명(沈之溟)은 흉적 이이첨(李爾瞻)의 일가로서 은혜를 입어 사국(史局)을 점령하였으니, 병출(屛黜)을 면한 것도 다행입니다. 다시 벼슬을 허용하여 맑은 조정을 더럽혀서는 안 되니,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심지명은 특별히 큰 죄악을 지은 것이 없으니, 이 관직을 제수한 것이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12월 19일 임자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시강관 윤지가 글의 뜻을 진강할 때 상이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았으니, 이는 강관이 주해를 진달할 뿐이고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20일 계축

헌부가 아뢰기를,
"녹훈(錄勳)은 중전(重典)이니 반드시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야만 봉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번 창졸간에 일어난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즉각 박멸하는 데는 불과 한두 신하가 참여하였습니다. 저 이윤남(李胤男)·신경영(辛慶英)은 병사를 거느린 장관(將官)으로서 적도를 포박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도 상줄 만한 공로가 없는데도 정훈(正勳)에 참여되었습니다. 대신과 원훈(元勳)에게 다시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녹훈하는 일은 중대하여 고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세 영장의 공로가 경중이 없는 것 같으므로, 전에 논계할 때에 따를 수가 없었다. 지금 또 다시 논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간원도 이를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강론이 끝나고 선온(宣醞)하였다. 참찬관 정경세가 아뢰기를,
"성명(聖明)의 아래에서 인재가 어찌 감히 국사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반드시 한 직책에 오래 있게 한 뒤에야 그 성과를 물을 수 있는 것이니, 오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분명히 밝혀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가 주서는 그 직책에 오래 있게 되면 혹 헐뜯는 자가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싫어하여 수시로 바뀝니다. 이후로는 가 주서를 자주 바꾸지 말고 그 일을 잘하면 임시직을 실직으로 승진시켜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가 주서를 자주 바꾸면 안 된다는 하교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1일 갑인

양사가 이윤남·신경영의 일을 가지고 계속 논란하니, 상이 대신과 다시 상의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가 아뢰기를,
"녹훈할 때 상이 반드시 원훈을 불러 감정케 한 것은 그 일이 중대할 뿐만 아니라 원훈이 그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인데, 홍보(洪靌)가 명을 받고 입궐하여 이탁남(李擢男)과 상의하고자 하므로 신들이 계청하여 탁남을 불렀습니다. 탁남이 도착하자 홍보가 탁남과 함께 의논하여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신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신들이 묻기를 ‘세 영장이 녹훈할 만한 공로가 있는가?’ 하니, 홍보가 대답하기를 ‘체포할 때에 우영(右營)이 정면에 있었고 양영(兩營)이 포위하였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원훈이 그 현장을 목격하였으므로 이론이 없을 것으로 여겨 입계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원훈을 불러 조사하여 품지(稟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호란(胡亂)이 일어났을 때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자의 부모와 처자에게 쌀과 콩·반찬거리를 하사하여 내가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주라. 해조는 장돈(張暾)·송도남(宋圖南)·권이고(權頤古)·이완(李莞)·기협(奇協) 등의 부모 처자에게 쌀 2섬과 콩·소금 각 1섬을 주라. 그 밖에 지방에 있는 김준(金浚)·김양언(金良彦)·전상의(全尙毅)·남이흥(南以興)·김언수(金彦秀)·이상안(李尙安)·이희건(李希建)·김유성(金有聲)·최몽량(崔夢亮)·여영원(呂榮元)·김제정(金濟鼎)·양함(梁涵) 등의 부모 처자에게는 각각 거주지의 관원이 제급토록 하라."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있어 이수일(李守一)을 형조 판서로, 이경여(李慶餘)를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호차(胡差) 2인과 수행원 50인이 벌써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번 호차가 돌아갈 때 필요한 인마는 1백여 필이 못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주(安州)로부터 의주(義州)까지 대동할 인마도 오히려 준비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이번에는 반드시 심양까지 그 비용을 담당하여 들여보내야 할 형편입니다. 심양의 말 한 필 값은 많게는 무명 30필이나 되니, 한 도(道)의 힘을 다하여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정탈하게 하소서."

 

12월 22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은 나라의 근본인데, 여름부터 가을 동안에 바람·비·해충의 3재(災)가 근래에 없이 커서 금년 공부(貢賦)도 오히려 내기 어렵습니다. 호서(湖西) 일대에는 그간 거두지 못한 것이 많은 경우는 5,6년 분이나 됩니다. 해당 조는 경비가 고갈된 것에 급급하여 풍흉을 불문하고 이문(移文)하여 독촉하고 수령은 지시를 받드는 데만 힘써서 잡아들인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니, 이는 거북이 등에서 털을 긁어 모으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나라에도 무익하고 백성에게는 원성만 살 것입니다. 여러해 동안 거두지 못한 하삼도의 공물을 일단 독촉하지 말고 내년 가을에 점차 가두어 들여 약간의 은혜라도 베푸소서."
하니, 해당 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케 하라고 답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공물은 이미 줄여 주었고 다른 부역은 털끝만큼도 없었는데, 매년 당연히 내야 할 공물을 여러해 동안 내지 않은 관아가 많습니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백성의 원성을 사는 까닭을 신들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헌부의 계사가 실로 관용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본조로서는 당연히 빨리 실행해야 할 것이나, 다만 여러해 동안 거두지 못한 것 중에는 백성들은 이미 냈는데 혹 본관(本官)에 유체되었거나 혹 양호(養戶)와 방납인(防納人)이 받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 만일 똑같이 관용을 베풀면 그 형세가 금년 분을 독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모리배들의 요행이 될 뿐, 일반 서민은 더욱 곤궁해질 것입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각 관아에서 공물을 내었는가 안 내었는가를 조사하게 해서, 임술년117)   이후에 미납한 공물은 1년 분을 먼저 보내도록 독촉하고, 정묘년118)   분으로서 무진년119)   2월에 상납해야 할 것은 일단 추수를 기다리게 하며, 만일 병인년120)   이전에 미납한 것이 없는 관아는 정묘년의 공물을 전례대로 상납하게 하면, 일시에 여러해의 공물을 거두어 들이는 걱정을 면할 수 있으며, 또한 중간에 소모되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녹훈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원훈이 충분히 생각하여 넣거나 뺄 것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인데, 대신이 훈신을 감정(勘定)할 때, 말을 얼버무려 경중과 선후를 가리지 않아서 뒤늦게 도착한 영장(營將)을 모두 훈적에 기록되게 하였습니다. 풍녕군(豐寧君) 홍보(洪靌), 오천군(鰲川君) 이탁남(李擢男)을 모두 무거운 율로 추고하소서."
하니, 잘못이 없는 것 같으니 추고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 아뢰었다.
"여러 도의 도군(逃軍)을 즉시 모아 놓고, 탕척(蕩滌)하는 사문(赦文)을 한번 읽어 주면서 일렀더니, 껑충껑충 춤을 추고 우레 같은 환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의주·거련(車輦)·임반(林畔) 등처에 보낸 도군은 도로 즉시 도망한 자가 많아 본도 병사로 하여금 색출해서 계문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재차 도망한 율을 범하여 정상이 매우 미우니, 사면 이전의 일이라 하여 이들까지 탕척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회답사 박난영(朴蘭英)이 치계하였다.
"신이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대해(大海) 등이 잔치를 베풀고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한(汗)은 지금 나가서 사냥중이다. 말에 올라탄 뒤에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우리들에게 사신을 접대하라고 하였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사냥터에 알리려고 한다.’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하나는 의주에서 철군한 것을 사례드리는 것이다. 하나는 진강(鎭江)의 개시(開市) 문제이다. 양서(兩西)가 탕진되어 진강에 개시하는 일이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건이 다 상국(上國)에서 나오는데 상국에서 교역을 일체 끊고 있으니 개시하여도 무익하다. 하나는 포로를 쇄환하는 일이다. 병화(兵禍)가 끝난 후에 가계가 탕진되어 인력이 모자란다. 하나는 쌀을 팔아 가는 일이다. 병화가 끝난 후에 한 곳도 경작한 곳이 없어 대처하기 곤란하다.’ 하였더니, 대해가 사신의 말을 즉시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한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서 제장을 모아 예단(禮單)을 나누어 준 뒤에 다례만을 행하였습니다. 아질월개(阿叱月介) 8인이 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대해(大海)·능시(能詩) 등이 한의 뜻을 전하기를 ‘조선과 강화를 맺은 것은 정성과 믿음으로 상대하면서 유무(有無)를 교환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양서에 사람과 물건이 모두 없어서 개시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국서에도 있으니, 사신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우선 호시(互市)로 나라 안을 왕래하면서 유무를 교역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한(先汗)이 천조(天朝)를 매우 공손히 섬겼는데 10여 년 전에 남조(南朝)의 변신(邊臣)이 우리를 곤충같이 보면서 지극히 업신여겼다. 선한이 친히 무순(撫順)에 가서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문서를 감추고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선한이 분격하여 하늘에 맹세하고 군사를 일으켜 곳곳에서 이기니, 실로 하늘의 뜻이었다. 조선과는 전부터 원한이 없었는데, 기미년121)  에 남병(南兵)122)  과 길을 나눠 우리를 침범하였으므로 원수가 되었다. 선한이 너그러워서 장관(將官)을 죽이지는 않았고 사신을 보내 조선과 왕래하고 모장(毛將)123)  을 가도(椵島)에 가까이 두기까지 하였으며, 화친한다고 하면서 차사(差使)를 보내온 일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선한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였다. ‘또 신왕(新王)124)  이 반정(反正)한 후에는 모장과 합심하여 폐관(閉關)하고 사신을 끊었으므로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신왕과 강화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으며, 그후에 왕의 아우를 보내 호의를 보이기에 신왕의 어짊에 탄복하여 즉시 회병하게 하고 정주(定州) 등에서 잡은 인민은 그대로 놓아두고 의주에 머물러 있는 병사들을 철수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지극히 경모하였으나 조선은 우리를 몹시 비천하게 보았으므로 원한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후의 분노를 다 삭이고 이미 한 집안과 같이 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으니 어려울 때 서로 구원하는 것이 사람의 떳떳한 도리이다. 모병(毛兵)은 돈도 안 주고 양식을 요구한다고 들었으나, 나는 이런 기근을 당하여 돈을 주고 매매하려는 것이다. 만일 서로 구원하지 않으면 유감이 없을 수 없다. 양서(兩西) 한 편이 보전되고 6도(道)도 역시 완전하니 서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양서는 탕진되고 6도는 실농(失農)하여 지금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람이 많다. 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양식을 무역하는 일은 저들이 몹시 갈망하는 것인데 지금 호차가 온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입니다. 후하게 접대해서 마음을 달래소서."

 

이행원(李行遠)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3일 병진

당차 접대소(唐差接待所)가 아뢰기를,
"어제 아침에 차관이, 흩어져 사는 한인(漢人)으로부터 호차가 온다는 말을 듣고 역관에게 물었는데, 역관이, 비국에서 분부한 대로 말하기를 ‘백여 명의 호차가 무슨 일로 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믐 안으로 경성에 도착할 것이다.’ 하니, 차관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서 호차와 만나면 곤란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미 양남(兩南)의 한인을 찾으려 왔으니 호차가 도착하기 전에 전주(全州) 등지로 가는 것이 피차에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차관의 생각이 어제와 달라져서 많은 불평을 하고, 또 남하할 뜻도 없는 듯합니다."
하니, 잘 타이르라고 답하였다.

 

12월 24일 정사

비국이 아뢰기를,
"호차가 왔을 때에 본도 감사는 당연히 먼저 한인(漢人)에게 알려서 미리 피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결국은 거련(車輦)에 사는 한인이 피살되는 사건이 생겼으니, 지극히 경악할 일입니다. 돌아가는 날에는 완전하게 잘 처리하여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황해·평안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고 평안 감사는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차를 접대하는 일이 전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음식 접대와 대화 중에 혹 실수를 하면 관계되는 일이 가볍지 않습니다. 호조 참판 이경직(李景稷)이 비록 복제(服制) 중에 있으나 오늘 출사케 하여 접대를 맡겨 몹시 군색한 걱정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5일 무오

상이 숭정전에서 당 차관(唐差官) 김승충(金承忠)을 접견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능(陵)과 원(園)을 이미 차별하였으므로 원을 지키는 관원도 명칭을 다르게 하는 것이 당연한데, 흥경원(興慶園)을 봉수(奉守)하는 관원을 능전(陵殿)과 같이 참봉이라고 하면 능과 원을 차별하는 뜻이 없어서 부당합니다. 해당 조의 계사대로 관명을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원을 지키는 관원을 참봉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간이 여러 날 논란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철산(鐵山)의 요민(遼民) 15명이 호차에게 피살당한 것은 지극히 경악할 일입니다. 도독이 이를 들으면 필시 진노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신(邊臣)이 잘못하여 이런 변고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독부(督府)에 보고하고 철산 부사를 잡아다가 치죄하여 도독의 진노를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행 사직 김상헌이 상차하기를,
"오늘날 국가가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니, 중국에서 이를 들으면 반드시 부득이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면 부득이한 것 가운데 부득이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이미 화친하였다고 하면 사신이 왕래하며 통관(通關)하고 호시(互市)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지만, 국가가 증여하는 것과 상인이 매매하는 것을 중국의 물건으로 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관시(關市)하는 도는 모두 토산물을 가지고 있는 물건을 없는 물건과 바꾸는 것이었지, 어찌 외국의 기이한 물건을 사다가 오랑캐의 욕심을 채워주고 무궁한 폐단을 야기시키는 일이었겠습니까. 더구나 대의가 지엄하고 후환이 지중(至重)한데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사(虜使)에게 증여하는 것과 변방에서 교역하는 것을 모두 토산물로써 하고 중국 물건을 파는 것을 일절 금하여서 뒤폐단을 막고 후환을 끊으면, 중국이 우리 나라의 기미책을 듣고 그 부득이한 사세를 알아서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나라가 중국 물건을 가지고 오랑캐와 호시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대노하여 절교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번 모 도독(毛都督)이 무고했던 말과 일치하니, 신은 조정이 무슨 말로 변명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설령 중국이 너그러워서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에서 가져다가 원수인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비춰볼 때 어떠합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흉적은 가까워서 그 세력이 두렵고 중국은 관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부모의 자애를 믿고 공경하기를 태만히 하며, 도적의 침략만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잘못하여 법제가 엄하지 않으므로 장사치들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여 중국의 물건이 왜관(倭館)에 낭자하니 그 소문이 점점 퍼져서 천하가 이를 알고 있으며, 국가가 왜와 결혼했다고까지 말하니, 그 모욕을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처음에 막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막기 어렵게 된 소치입니다. 신은 오직 뒷날 받는 모욕이 왜와 결혼했다는 말보다 심한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차를 보고 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차자의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27일 경신

상이 숭정전에서 왕세자 초례(醮禮)를 행하고, 가례(嘉禮)도 행하였다.
다음날 진하(陳賀)와 반교(頒敎)를 모두 권정례로 행하였다.

 

중외의 대소 신료와 기로(耆老)·군민(軍民)·한량(閑良) 등에게 교서를 내렸다.
"왕은 이른다. 한 나라의 마음이 세자에게 매여 있다는 것은 이미 교서하였고 대혼(大昏)은 만세를 잇는 것이므로 삼가 성혼하였으니, 그 빛이 빛나지 않는가. 이에 성심으로 널리 고한다. 왕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 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태사(太姒)가 지중씨(摯仲氏)의 아름다운 덕을 이으니125)                          주(周)의 국운이 이루어졌고 명덕(明德)이 음후(陰后)를 예법으로 받드니126)                          후한(後漢)이 이에 흥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태자를 세움에 먼저 배필 구하는 것을 급하게 여겼다. 선인의 교훈대로 덕을 기준으로 하여 유순한 이를 힘써 구하였고, 조정에서 세신(世臣)에게 물어서 명문가의 출신을 얻었다. 드디어 지난 4일 정유에 병조 참지        강석기(姜碩期)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고, 27일 경신에 세자에게 초계(醮戒)하고 친영을 마쳤다. 육례를 이미 갖춤은 만복의 근원이며, 이것은 종사의 큰복이니, 신민과 함께 경복하기를 원한다. 아, 가정을 바로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찌 감히 나의 몸 닦기를 게을리하겠는가. 복을 거두어 백성에게 펴노니 내가 종사를 보존하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상이 하교하였다.
"호차가 들어온 뒤에는 병기(兵器)를 절대로 팔지 마라."

 

12월 28일 신유

박난영이 치계하였다.
"호차가 신에게 말하기를 ‘그날 봉산(鳳山)에서 말을 탔을 때 어떤 조선인이 나를 가리키면서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욕하였다. 전에는 비록 적이었지만 양국이 이미 강화하였는데 이들이 면전에서 이렇게 욕하였으니 치죄하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봉산에 이문(移文)하여 박응립(朴應立)·황하수(黃河水) 등을 체포하여 평산(平山)에 가두고, 호차가 경유하는 각 고을에 잡인을 엄금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12월 29일 임술

상이 하교하기를,
"명년 대연호(大年號)는 천계(天啓)를 그대로 쓰기도 미안하고 새 대연호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쓰는 것도 미안할 듯한데,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연호는 마땅히 신황제의 연호를 써야 합니다만, 각처에서 보고한 신황제의 연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김기종(金起宗)이 보고한 것은 숭진(崇鎭), 남이공(南以恭)이 보고해온 도독(都督)이 써준 소지(小紙)에는 숭정(崇禎), 동지사 변응벽(邊應璧)의 단련사(團練使)가 보고한 것은 총정(寵禎)으로, 세 곳의 보고가 같지 않습니다. 확실한 연호를 알지 못하고 쓰는 것은 천계를 그대로 쓰는 것보다도 더 미안합니다. 등황(謄黃)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도독 아문에서는 반드시 확실히 알아서 쓸 것이니, 천천히 도독 아문의 문서에 쓰여진 연호를 본 뒤에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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