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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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자

주강에 《중용(中庸)》 서문(序文)을 강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주서 신응망(辛應望)은 괴원(槐院)의 신진(新進)으로 당초 어가(御駕)가 서울을 떠나는 날에 호종하지 않았으며 본직을 제수받고는 말미를 받아 남쪽을 왕래하면서 폐를 끼친 일이 많았으니, 파직을 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와 평조흥(平調興) 등이 보낸 조총(鳥銃)과 초황(硝黃)에 대해 지금 값을 주어야 하는데, 동래(東萊)의 목면(木綿)은 적어서 공무역(公貿易)의 값으로 쳐도 충당할 수 없는데 이번의 조총과 초황의 값이 필시 1백 동(同)은 넘을 것이니, 만약 제때에 주어 보내지 않으면 달래어 팔러 오게 한 뜻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전라 병사의 첩보를 보건대 조총을 무역하는 일로 도군(逃軍)의 속목(贖木) 1백 20동을 부산으로 수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기를 무역하는 밑천이니, 이 목면으로 해조의 절가(折價)에 의하여 주어 보내고 그 나머지는 남겨두어 병기를 무역해 들일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일 을축

영의정 신흠이 상차하기를,
"전 주서 신응망이 어가가 서울을 떠나던 날 호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논핵을 받았습니다. 신이 초봄에 명을 받고 동궁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 본도에서 식량을 모집하고자 하여 계청해서 그 고장 사람으로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자 5인을 대동하고 갔었는데, 응망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는 당시 동행한 대신과 분조(分朝)의 여러 재상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풍문이 잘못되어 이런 논박이 있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호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신하의 대의(大義)와 관계되니 논박받는 것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하의 도리로서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대간의 논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철산 부사(鐵山府使) 안경심(安景深)이 치계하였다.
"정사양(鄭思讓)과 장득현(張得賢)이 일시에 나와 말하기를 ‘등주(登州)의 양선(糧船) 8척이 10일 가도(椵島)에 정박했는데, 그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황제가 7월에 붕서(崩逝)하고 아우가 즉위하였는데 나이 17세며 숭정(崇禎)으로 개원(改元)하였다.」고 하였고, 대소인이 모두 말하기를, 「도독(都督)도 사거(私居)에서는 변복(變服)하고 주육(酒肉)을 먹지 않으며 확실한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 발상(發喪)하려 한다.」고 하였고, 요동 사람 왕지등(王志登)은 노적(奴賊)의 유격(遊擊)으로 바다를 순찰하다가 녹도(鹿島)에 이르렀는데 도독의 군병에게 포위당하자 스스로 귀순하겠다고 말하며 진달(眞㺚) 2명과 함께 나오니 도독이 서로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지등이 말하기를 「이영방(李永芳)은 병사(病死)하고, 서고신(徐孤臣)도 심양(瀋陽)으로부터 도망하여 가도로 돌아왔으며, 유해(劉海)의 가정(家丁) 4인은 편지를 지니고 가도(椵島)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조강에 《중용(中庸)》의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지사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학문을 하는 공부는 이(理)와 성(性)을 구명하는데 있으니 만약 연구하지 않고 범연하게 보아 넘기면 비록 만 권의 책을 읽더라도 위기(爲己)의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아뢰기를,
"심법(心法)의 공부는 단지 계신(戒愼)·공구(恐懼)하는 데 있으니, 반드시 뜻이 전일하여 잡념이 없은 연후에야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외물에 부림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인군(人君)이 참으로 심법의 요체를 착실히 공부하려면 그 뜻을 연구하고 잠심(潛心)·묵계(默契)하여 체행(體行)하는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또 밤중 사물을 접하지 않는 때에 마음을 성찰(省察)하는 것이 학문하는 요체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자 오윤겸이 나아가 아뢰기를,
"개시(開市)하자는 청을 완강히 거절하여 만일 흔단을 야기하고 화를 재촉하게 되면 매우 염려스럽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종 완강히 거절하기만은 어려운 형세이다. 만약 봄 가을로 개시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하나 다만 관서(關西)에 개시한 이후로는 장사치들이 그곳으로만 몰려들어 부산(釜山)의 시장으로 가는 장사치가 많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왜노(倭奴)와의 흔단이 생길까도 염려된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에 성랑(城廊)을 설치하는데 전결(田結)에 따라 백성을 부려 원망과 비난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서쪽 백성들이 혹심한 병화(兵火)의 피해를 입었으니 죽음에서 구원해 주어도 부족한데, 백성을 수고롭혀 쌓인 원망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신이 여러 차례 영장(營將)의 폐단을 말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들으니, 영장의 폐해가 과연 형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일마다 조처함이 이처럼 합당함을 잃고서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사간 정홍명(鄭弘溟)이 아뢰기를,
"변란 때 여러 도감(都監)에 저장된 미포(米布)를 추수 후에 상환하기로 약속하고 원하는 사민(士民)과 서민에게 대여해 주었는데 지금까지 갚을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일일이 거두어 들여 국용(國用)에 보태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이우(李佑)에 대한 논의를 어제 이미 아뢴 대로 하라고 하셨다 하니, 신은 경악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고변자는 죄범(罪犯)이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끝까지 다스려서는 마땅하지 않은데 정광적(鄭光績)의 무리는 단지 공이 있는 이우와 죄 없는 최현(崔晛)만 엄히 다스릴 줄 알았지 역당(逆黨)을 엄히 다스릴 줄은 몰랐습니다. 김유(金裕)는 이인거(李仁居)의 모의에 참여하여 알았고 진주(眞主)의 설도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는 역괴(逆魁)의 심복보다도 더한 자인데 무단히 석방하였습니다. 광적은 장관(長官)으로써 국문에 참여하였는데, 이에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매양 이러한 말을 하는데, 너무나 무의미한 말이다. 이것이 경의 병통이다."
하자, 이귀가 대답하기를,
"신은 충분(忠憤)이 격동하여 말을 조심하지 못합니다. 매양 탑전에서 이렇게 진달하는데 한 번도 쓰이지 못하니, 신은 마땅히 물러나 교외(郊外)에 엎드려 부원군의 녹(祿)이나 받으며 여생을 보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요구가 그칠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광적이 아뢰기를,
"오늘 연중(筵中)에서 이귀가 신에 대해 말하기를 ‘장관으로 국문에 참여하여 역당을 끝까지 다스리지 않고 공이 있는 이우와 애매한 최현만 엄히 다스렸다.’고 하면서 이름을 들어 추악하게 헐뜯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신이 무상하여 거듭 면척(面斥)을 받았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헌납 여이징(呂爾徵), 장령 김지수(金地粹), 집의 한필원(韓必遠), 장령 권집(權潗), 지평 이경의(李景義), 정언 이명웅(李命雄) 등도 이로써 인피하였는데 한필원과 김지수·권집은 아울러 신응망(辛應望)의 일도 언급하여 사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광적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부제학 정경세(鄭經世), 부교리 이행원(李行遠)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최현은 일 처리가 어두워 적을 놓칠 뻔하였으며, 이우의 패악한 정상은 사람들이 모두가 분개하니, 대간이 논열(論列)함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응망은 이미 대신이 계청하여 데리고 갔는데도 호종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논핵했으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정광적·정홍명·여이징·이경의·이명웅은 출사하게 하고, 한필원·김지수·권집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3일 병인

안개가 짙게 끼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안경심(安景深)의 장계를 보건대, 천조(天朝)의 소식이 전번 장괴(張魁)가 써 보낸 쪽지의 내용과 일치하니,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대신의 뜻은 모두 ‘도독(都督)의 아문(衙門)에서 거애(擧哀)하지 않고 있는데 이곳에서 지레 먼저 거애하면 혹 타당하지 못할 듯하니, 마땅히 접반사(接伴使)가 자세히 탐문하여 보고한 후에 거애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장신(張紳)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금년 농사가 가장 흉작인데, 각종의 작미(作米)와 전세(田稅)를 아울러 계산하면 1결(結)에서 내야 할 것이 자그마치 16두(斗)나 됩니다. 겨우 살아남은 잔폐한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금년의 전세와 수미(收米) 중에 한 가지만을 받아들여 군량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해야 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소서."

 

11월 4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전 주서(注書) 신응망(辛應望)이 호종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는 일은, 본부의 많은 관원이 자세히 듣지 못하고 경솔하게 거론하였다가 모두 사실과 어긋난 것을 거론하였다는 이유로 체직되었습니다. 응망은 비단 이 한 조항뿐만 아니라 남쪽을 왕래하면서 삼가지 않고 폐단을 끼친 일이 많아 과연 물의가 있었으니, 어찌 체차하는데 그치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도 오히려 사실과 다르게 논계하였으니 기타 은밀한 일은 이를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이미 이 일로써 거의가 체직을 당했는데 지금 또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파주(坡州) 초관(哨官) 안신도(安信道)는 호변(胡變)이 나자 흩어져 도망할 것을 앞장서 주창하고서 즉시 도주하였는데 다행히 붙잡았으나 선전관(宣傳官)이 표신(標信)을 가지고 내려가 참형(斬刑)에 처할 즈음에 임하여 본주에서 단단히 가두지 않아 온 집안이 도망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 분통스럽습니다. 색리(色吏)는 전가 사변(全家徙邊)하고, 목사(牧使)는 우선 기한 내에 마음을 다해 추적하여 체포하게 한 후에 중죄수를 도망치게 한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기한 내에 잡지 못하면 목사를 나국(拿鞫)하여 정죄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무신 2품 이하는 두 달을 걸러 2일에 별관사(別觀射)를 하라고 명하셨는데, 다만 시사(試射)한 후에 으뜸을 차지한 자는 혹 가자(加資)함이 은명(恩命)에서 나왔으나 그 나머지 우등(優等)인 자는 관작(官爵)으로 상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목장의 말 수십 필을 내주어 격려하는 터전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목장의 말을 내주는 일은 본시(本寺)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대전(大殿)과 중전(中殿) 양전에 진배(進排)하는 물건은 혹 많고 적음이 같지 않으니 이번 빈궁(嬪宮)의 진배도 마땅히 세자궁의 진배 숫자를 보아 많고 적음을 참작해 계하(啓下)한 연후에 정식을 삼아야 합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례가 있으니 개정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주강에 《중용(中庸)》의 수장(首章) 두 번째 대문을 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이 장(章)은 도(道)를 위주로 말하였으니 도는 사물(事物)의 당연한 이치로서 모두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可離非道也]’라 하였으니 만약 도를 떠나면 솔성(率性)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비록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라도 홀만(忽慢)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데서도 오히려 경외(敬畏)해야 하는데 하물며 보이고 들리는 곳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조용한 가운데도 필요한 것이 있으니 항상 각성하는 법[常惺惺法]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요한 가운데도 필요한 것이 있다 함은 매양 경외(敬畏)를 가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는가?"
하자, 경세가 아뢰기를,
"항상 경외하는 마음을 두어서 고목(枯木)이나 식어버린 재[死灰]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 글에서 말한 바는 후미지고 어두운 데서는 사람이 홀만하기 쉽다는 것인데 미세한 일에도 기미는 이미 동(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자가 말하기를 ‘고요한 물 중간에 한 점(點) 움직이는 곳이 바로 기미가 동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위의 글에서는 존양(存養)095)  의 공부(工夫)를 말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성찰(省察)096)  의 공부를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범인은 은미한 곳이거나 혼자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하여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함부로 하는데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은미한 곳에서의 일이라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으니, 삼가야 할 것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훌륭하십니다. 성상께서 이를 터득하여 확충(擴充)해 나가시면 학문하는 요체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증자(曾子)께서 이른바 ‘신독(愼獨)’이라 한 것은 ‘혼자 있다[獨處]’는 독(獨)이니, 이것이 이른바 신독인데 비록 사람과 서로 접(接)할 때라도 자기만 혼자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화(中和)’의 중(中)자와 ‘중용(中庸)’의 중자는 다름이 있는가?"
하니, 경세가 대답하기를,
"좋은 질문입니다. 중용의 중자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체(體)이며, 중화의 중자는 즉 용(用)으로 두 중자의 뜻은 차이가 있으니, 이 중자는 성(性)의 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중자는 마음의 체(體)를 말하는 것 같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성상의 생각이 아주 합당합니다. 발(發)하기 전은 성(性)이며 발(發)하면 정(情)입니다. 지난번 장유(張維)가 말한 칠정 사단(七情四端)의 설은 선유(先儒)들도 이미 논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단(四端)이 선단(善端)이라고 하였으니 그른 것은 아니겠으나 측은(惻隱)이라고 하여 측은하여서는 안 될 것을 측은히 여기고 수오(羞惡)라 하여 미세한 일로써 자결(自決)해 죽는 것을 선단(善端)이라고 한다면 잘못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양 무제(梁武帝)가 살생(殺生)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사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단 살생뿐만 아니라 죄가 있는 자를 사(赦)하는 것도 잘못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대개 이 대문은 선단(善端)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화(中和)의 화(和)자와 중용(中庸)의 용(庸)자는 같은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이는 중절(中節)의 화를 말한 것이고 중용의 용자는 중화(中和)를 겸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맹자(孟子)가 말한 유하혜(柳下惠)는 성(聖)의 화(和)라고 한 것이 이 화와 같은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유하혜의 화자는 이와 다른 듯합니다. 유하혜는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게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집의 중(中)과 당(堂)의 중(中)이라 한 것은 표현을 잘한 것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중화를 이룩하면 천지가 자리잡히고 만물이 화육된다.’고 한 것은 자사(子思)가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지극한 공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한 집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자(父子)와 처자(妻子)가 각기 즐거움을 얻으면 이는 천지가 자리잡힌 것이고, 상하의 인물(人物)이 각기 제자리를 얻으면 이는 만물이 화육되는 것입니다. 인군이 참으로 정심(正心)을 가져 천지의 기(氣)가 순(順)하면 이는 천지가 자리잡히고, 만물이 화육되어 비록 구중 궁궐에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천지와 더불어 유통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책에서 격치(格致)097)  를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이 책에서 격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공부(工夫)는 그 가운데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초학(初學)의 공부이기 때문에 격치를 말하였고, 이 책은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이 실전(失傳)될까 걱정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중용》과 《대학》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것으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바로 《대학》의 ‘명덕(明德)’이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는 곧 ‘명명덕(明明德)’이며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는 바로 ‘지선(至善)’이고, ‘가리비도(可離非道)’는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입니다."
하고, 경세는 아뢰기를,
"‘희노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한다.[喜怒哀樂未發 謂之中]’는 이 문장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두어 그 중(中)을 기르면 발하는 것이 모두 중절(中節)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마음은 고인 물과 같아서 물이 고요하여 물결이 일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사물을 비출 수 있습니다. 마음이 만약 고요하지 못하면 희노애락이 외물(外物)에 의해 흔들리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이른바 ‘자기가 싫어하는 데 치우친다.[之其所賊惡而辟焉]’와 ‘자기가 좋아하는 데 치우친다.[之其所親愛而辟焉]’고 한 것이 그러한 뜻입니다. 인군이 만기(萬幾)를 수작(酬酢)하는 것도 학문 아님이 없는데 청람(聽覽)에 겨를이 없어 마음이 항상 동요되므로 희로하는 즈음에 더욱 성찰해야 합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자 김상용이 나아가 아뢰기를,
"중국의 소식은, 비록 장괴(張魁)의 글을 한 장 얻기는 하였으나 허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어제 안경심(安景深)의 장계를 보니, 황제가 붕서(崩逝)하였다는 설이 잘못 전해지지 않은 것인 듯한데, 거애(擧哀)하는 절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중대하니, 경솔하게 거애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모진(毛鎭)에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처리해야 합니다. 또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앞으로 반드시 조사(詔使)의 행차가 있을 것인데, 조사가 만약 사포(蛇浦)나 선사포(宣沙浦) 등처에 와 정박하여 관서(關西)의 길로 오게 되면 그 곳은 판탕(板蕩)된 끝이어서 결코 지대(支待)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역관을 보내 바다에서 맞이하고 충분히 설득하여 안악(安岳)이나 해주(海州) 등지로 상륙하게 한다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악에 상륙하는 것은 본디 가망이 없으니, 시험삼아 평양(平壤)으로 청해서 들어 주면 다행이다."
하였다. 상용이 아뢰기를,
"관서의 역로가 형편이 없어서 쇄마(刷馬)도 갖추기가 어려우니 더욱 염려됩니다. 등극 진하사(登極進賀使)·진향사(進香使)·진위사(陳慰使)·사은사(謝恩使) 등 사신의 선박과 방물(方物)을 미리 주선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중국 사신으로는 학사(學士)가 나올 것인가?"
하니,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중국의 일에는 학사이고, 우리 나라 일에는 태감(太監)이 나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중국에서 보내준 면복(冕服)에 혁대(革帶)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면복에 옥혁대(玉革帶)를 쓰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전부터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상방(尙方)에서 혁대를 무역해 왔으나 우선 그냥 두었다."
하니, 상용이 아뢰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를 보면 면복에는 옥혁대를 사용하니, 이는 품대(品帶)입니다. 조관(朝官)에게는 모두 품대가 있는데 면복에 혁대를 사용하지 않음은 참으로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해조(該曹)의 계사를 보니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갖추어 오기 쉽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만약 면복에 옥혁대를 사용한다면 이 역시 명복(命服)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니, 어찌 물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끝내 무역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혁대를 사용하지 않는 데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대신과 의논해서 사신이 중국에 갈 때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5일 무진

상이 하교하기를,
"한필원(韓必遠)이 전에 집의로 있을 때 없는 일을 지어내어 남을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이런 습성은 조장되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논하는 것이 풍문(風聞)에서 많이 나오기 때문에 혹 사실과 어긋나는 일도 있습니다. 이번에 한필원이 신응망(辛應望)을 잘못 논핵한 일로 이미 체직을 당하였는데 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필원이 모함할 생각이 있었다면 참으로 대간(臺諫)이라 하여 용서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처음부터 대신이 계청하여 데리고 간 사유를 모르고 이렇게 논계했다면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자, 답하기를,
"파직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간관(諫官)의 논사(論事)가 비록 사실과 어긋났다 하더라도 깊이 책망해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는 언관이 한 마디만 잘못하여도 문득 엄한 견책을 받는다. 때문에 말로써 죄를 얻은 자가 속출하여 대각(臺閣)이 쓸쓸하게 되었으니, 성덕(聖德)에 누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3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간관(諫官)의 논사(論事)가 비록 사실과 어긋났다 하더라도 깊이 책망해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는 언관이 한 마디만 잘못하여도 문득 엄한 견책을 받는다. 때문에 말로써 죄를 얻은 자가 속출하여 대각(臺閣)이 쓸쓸하게 되었으니, 성덕(聖德)에 누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상이 하교하였다.
"인성군(仁城君)이 녹(祿)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어 반드시 궁색한 근심이 있을 것이니 매우 마음이 쓰인다. 해조로 하여금 미두(米豆)를 넉넉하게 하사하여 내가 진념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사신은 논한다. 이공(李珙)의 불궤(不軌)한 자취가 환히 밝혀져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한결같이 대우하고 시종 돌보는 것이 이처럼 지극한 데 이르렀으니, 친애하는 성덕(聖德)이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235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공(李珙)의 불궤(不軌)한 자취가 환히 밝혀져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한결같이 대우하고 시종 돌보는 것이 이처럼 지극한 데 이르렀으니, 친애하는 성덕(聖德)이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난리를 겪은 후 도내(道內) 각종 군병(軍兵)의 실제 숫자를 성책(成冊)하여 진작 사계(査啓)하였어야 하는데, 적병이 겨우 물러가 유포(流逋)된 자가 모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성책을 독촉해 받아들이면 소란스런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임시로 이웃 고을로 피해 있는 자들을 도망한 것으로 기록한다면 후에는 이로 인해 영원히 도망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고을로 하여금 지속(遲速)을 한정하지 않고 실정에 따라 자세히 조사하게 하여 지금에야 비로소 조사를 마쳤습니다.
청천(淸川) 이남의 각종 군병으로 현재의 합계는 7천 4백 66인이며, 도망치거나 사망한 자 및 포로가 된 자는 2천 4백 97인이므로 분류 성책하여 비국과 병조에 올려 보냈습니다. 안주(安州)의 수비에 필요한 군사는 1만 명이 못되면 안 되는데 현재의 군액(軍額)은 겨우 7천 명이어서 전원이 들어가 지키더라도 오히려 부족한데, 더군다나 그 형세가 결코 12개월이나 장기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곡식도 몇 달을 지탱할 수 없는 데다 군사는 1만이 못되니, 혹시 위급한 일이라도 있게 되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서(海西)의 군사로 차차 증원하여 방어하게 하면 본도의 군사도 장기간 지키면서 변에 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담당 신하로 하여금 기미를 보아가며 변통하거나 다시 품하여 처치하게 하고, 식량은 식량 담당 신하로 하여금 미리 마련하게 하여 끊기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난리 초에 의곡(義穀)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아주 많았는데 실직(實職)의 빈 자리가 매우 적어 골고루 미칠 수 없는 형세였고, 설령 결원된 자리가 여유가 있더라도 모든 관직은 국가의 명기(名器)인데, 현우(賢愚)를 물론하고 제수한다면 관원의 기강이 혼란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전일에 이미 각사(各司)에 감생관(減省官)을 제수한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의곡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 가운데 당상(堂上) 및 생원 진사의 전함(前銜)이 있는 자에게는 궐원이 있기를 기다려 관직을 제수하고, 그 나머지는 각기 바친 곡식의 다소에 따라 각사의 감생관을 제수하되 망(望)을 갖추어 수점(受點)하여 한 번 사은(謝恩)하게 한 후 국가에서 실직과 똑같이 대우하면 편리하고도 합당할 듯합니다. 이로써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과 삼공(三公)이 모두 그럴 듯하게 여기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겸 동지경연(兼同知經筵)으로, 권도(權濤)를 집의로, 엄성(嚴惺)을 응교로, 김성발(金聲發)·김남중(金南重)을 장령으로, 정백형(鄭百亨)을 예문관 봉교로 삼고, 전 주부 김진(金瑱), 전 정(正) 정원경(鄭元卿)은 아울러 통정(通政)의 품계를 더하였는데, 곡식을 모은 데 대한 상이었다.

 

11월 6일 기사

헌부가 아뢰기를,
"전 집의 한필원(韓必遠)이 신응망(辛應望)의 일을 경연(經筵)의 석상에서 발론하였는데, 대신이 데리고 가기를 계청한 것이 어가(御駕)가 서울을 떠나던 창황한 때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본래 형세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단 필원만 모른 것이 아니라 자리에 함께 있던 동료도 모두 몰랐으며, 신들도 대신의 차자를 본 연후에야 비로소 알았으니, 필원의 이 논계는 실로 착인(錯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교(聖敎)에는 없는 일을 꾸몄다는 것으로 죄명을 삼으셨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명을 지면 찬출(竄黜)하더라도 가할 것이니 어찌 파직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나 필원이 논한 바가 당초 착인에서 나온 것인데 꾸며냈다고 죄를 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날 논계한 일이 설혹 꾸미려는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사실이 아닌 일을 논한 것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정광적(鄭光績)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니, 전 집의 한필원이 사실이 아닌 일을 말한 것으로써 파직까지 되었으니 신은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신은 논계하는 처음에 응망이 비단 호종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쪽을 왕래하면서 폐를 끼친 일이 많았다고 하여 함께 의논하여 초안해서 입계했습니다. 그와 함께 참여하였으니, 필원의 죄는 바로 신의 죄인데 발론한 자가 이로써 파직을 당했으니, 사리상 홀로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숙 옹주(貞淑翁主)가 졸서(卒逝)하였으므로 친제(親祭)를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7일 경오

사간 정홍명(鄭弘溟),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이명웅(李命雄)·오달승(吳達升)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니 대개 김유(金裕)를 나문(拿問)하지 않은 것으로 오늘날 삼사(三司)의 죄를 삼았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두려워하고 놀랐으나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국옥(鞫獄)의 사정이 엄중하고 은밀하여 신들은 비록 그 곡절을 자세히 모르지만, 원훈 중신(元勳重臣)으로서 참으로 소견(所見)이 있으면 처음에 진계(陳啓)하지 않고 옥사(獄事)가 끝난 지금에 와서야 별도의 시끄러운 단서를 집어내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함부로 한단 말입니까. 신들은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결코 욕을 참으며 구차히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직을 파척(罷斥)하소서."
하였는데, 집의 권도(權濤), 장령 김남중(金南重), 지평 이경의(李景義) 등도 이로써 인피하였다. 답하기를,
"찬성 이귀의 말은 본래 두서가 없으니, 그대들은 더불어 서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 등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역적을 국문하는 사체는 엄밀하여 밖의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이고, 또 한두 사람이 감히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귀는 천위(天威)의 지척에서 대간을 면대하여 꾸짖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차자를 올려 헐뜯고 배척했으니, 잘못이 이미 그에게 있고, 이쪽에는 피혐할 것이 없습니다. 정홍명(鄭弘溟)·여이징(呂爾徵)·이명웅(李命雄)·오달승(吳達升)·권도(權濤)·김남중(金南重)·이경의(李景義)는 아울러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15일 동지제(冬至祭)에 흥경원(興慶園)098)  은 전부터 헌관(獻官)을 차송하였고, 육경원(毓慶園)099)  은 시원관(侍園官)이 제사를 지내왔는데, 한 정자각(丁字閣)에서 일시에 제사를 지내면서 헌관의 복색(服色)이 같지 않은 것은 참으로 미안합니다. 어떤 사람은 ‘흥경원에 먼저 지낸 뒤 육경원에 지내야 한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장막으로 사이를 막고 일시에 제사지내도 무방하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먼저 지내고 뒤에 지내는 것이나 장막으로 사이를 막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헌관의 복색이 다르더라도 일시에 아울러 지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판중추(判中樞) 조정(趙挺),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김류(金瑬)가 의논드리기를,
"같은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낼 때 헌관의 복색이 같지 않은 것은 미안할 듯하나 일시에 아울러 지내는 것이 신도(神道)로 보아 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복색만 같지 않을 뿐더러 곡(哭)하면서 제사지내는 것도 미안하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지중추부사 박동선(朴東善)이 차자를 올려 동경연(同經筵)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접반사(接伴使)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기를,
"10월 29일, 도독(都督)이 신에게 작은 쪽지를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8월 23일 천계 황제(天啓皇帝)100)  가 붕서(崩逝)하고 황제의 아우가 18세로 본월 24일 등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도독은 백의(白衣)로 공무를 보면서 등황(謄黃)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또 도사(都司) 심세괴(沈世魁)를 통하여 들으니 ‘새 황제가 즉위하여 맨 먼저 위충현(魏忠賢)을 내치고 13 성(省)의 7개 포정(布政)을 교체했으며, 또 초당(貂璫)101)  으로 감군(監軍)이 된 자를 파하였으므로, 천하가 태평 성대가 올 것이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상이 붕서했다는 정확한 보고가 이르렀으니, 거애(擧哀)하는 예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왕세자(王世子)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숭정전(崇政殿) 계단 위에서 거애의 예를 행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품계가 높은 관원을 차출하여 게문(揭文)을 갖추어 모장(毛將)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신이 모영영(毛永盈)을 찾아 갔더니, 상께서 후대해 주셨다는 뜻을 극진히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 사람은 도망하여 돌아온 한인(漢人)에 비할 바가 아니고 바로 저 적(賊)이 보낸 사람인데, 이번 섬으로 들여보낼 때 마침 유해(劉海)의 차인(差人)이 나올 때와 마주치게 되었으니, 노적(虜賊)들이 반드시 이 소식을 들을 것이므로 매우 염려됩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강(姜)·박(朴)이 거느렸던 여인(女人) 등을 처음에 잘 처리하지 못하여 차관(差官)이 데리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개유(開諭)하기를 ‘강홍립(姜弘立)이 비록 죽었으나 박난영(朴蘭英)은 아직 살아 있는데 남편이 있는 여인을 그 남편이 나갈 때를 당하여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것 같다. 우선은 난영이 나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 데리고 가게 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함이 마땅합니다. 이런 뜻으로 하유(下諭)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였다.
"황주(黃州)의 성랑(城廊) 2천 68칸(間) 내에 9백 76칸은 10월 2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본월 26일에 마쳤으며 역군(役軍)은 같은 날 모두 해산하여 보냈습니다. 성랑 위에 흙을 발라 구워 완성하고자 하였으나 날씨가 이미 추워져 우선은 풀을 엮어 덮었습니다. 방패(防牌)를 만드는 데에는 모두 목수(木手)를 써야 하는데 장인(匠人)이 부족하여 쉬이 완료하지 못하겠습니다. 재령(載寧)에 할당한 성랑 93칸은 현재 군(郡)에 장수 산성(長壽山城)을 쌓고 있으니 추후에 역사를 시작하겠습니다."

 

11월 8일 신미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니, 황제의 상(喪)에 내전(內殿)이 변복(變服)한다는 내용이 없고, 지난해 태창 황제(泰昌皇帝)102)  가 붕서했을 때에 궁중의 나인(內人)으로서 목종 황제(穆宗皇帝)가 붕서했을 때의 고사(故事)를 잘 아는 자가 있어 전언(傳言)하기를 ‘내전도 분명히 변복하였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본조가 변복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궁인이 전하는 말을 인용하여 전례를 삼는 것 역시 미안하므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대상례(大喪禮)조를 상고해 보았더니 ‘왕비(王妃)·군왕비(郡王妃)·군주(郡主) 및 안에서 부리는 궁인(宮人)들도 역시 모두 27일 만에 상복을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내전도 마땅히 변복하는 일이 있는 듯합니다. 다만 《오례의》에 근거할 만한 글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전례대로 행례(行禮)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태창 황제 때 변복(變服)한 의주(儀註)는 이미 모두 산실(散失)되었고, 《대명회전》에도 근거할 만한 예가 없어 대신과 상의했더니 모두 ‘본래 《오례의》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모든 예(禮)는 한결같이 《오례의》를 따르는데, 전일 태창 황제 때에 궁중에서 변복하였다는 설이 단지 그 당시 궁인의 구전(口傳)에서 나온 것인데, 그걸 인용하여 전례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따랐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는 무진년 일력(日曆)을 천계(天啓) 8년으로 이미 인출(印出)하여 장정(裝幀)을 하였는데, 이제 도독의 글로 인하여 비로서 사황제(嗣皇帝)가 명년을 숭정(崇禎)으로 개정하였다는 것을 알았으니, 의당 천계란 연호를 삭제하고 숭정으로 고쳐야 하겠으나, 연호는 중요한 일인데 전해온 글만을 근거로 하여 고치기에는 사체가 미안합니다. 우선은 인출한 대로 올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였다.
"신이 섬에 들어갔더니 도독이 전일 무함 입은 것을 가지고 입이 닳도록 변설(辨說)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이 장대추(張大秋)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우리 나라가 갑자기 강적을 만나 형세상 대적하기가 어려워 부득이 거짓으로 강화(講和)하여 싸움을 지연시킬 계책을 삼은 것이다.’ 하였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무방하다. 중국의 병력으로도 오히려 막아내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작은 나라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 적들이 잡아간 남녀를 몰아내면서 몸값을 내고 사가기를 허락하니, 서로 헤어졌던 부자·형제들이 다투어 값을 치르고 데려오려 하는데 지극한 인정의 당연한 것으로서 막지 못할 형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후일 개시(開市)했다는 비방이 있을까 두렵다.’고 했더니, 답하기를 ‘거짓으로 허락하여 우선 화(禍)를 지연시키면서 중국 군대가 대대적으로 집결하기를 기다린 뒤에 협력하여 함께 격파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개시하는 즈음에 많은 사람이 모여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되며, 또 이 일은 아래 백성에게 위임하고 위에 있는 사람은 모른 체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도독이 신의 노병(老病)을 가엾게 여겨 즉시 나가게 하였으므로 배를 타고 선천(宣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11월 9일 임신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였다.
"중남(仲男) 등이 개시(開市)하는 일로 다시 나와서 독촉하니, 시종 막기는 어려울 듯하고, 본도 백성은 부모·처자를 잃은 자가 많은데 몸값을 내면 돌려보낸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팔아 값을 준비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저들에게 지극한 정을 펴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잃었던 백성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개시한 뒤에 부모 처자를 잃은 자들이 모두 많은 비용을 아끼지 않는데 부모와 처자를 만나게 되면 비록 그들이 요구하는 값을 다 치르려 할 것이고, 저들은 그 절박한 정상을 살피고는 다시 값을 올려서 요구하면 반드시 더 준비하여 귀환시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신은 양서(兩西) 지방 백성들은 저 적들의 이용 대상이 되어 병란을 겪지 않는 해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저 적들은 상대방의 정세를 잘 탐지하는데, 이런 길이 열리고 나면 반드시 부모를 붙잡아두고 그 자제로 하여금 우리 나라 사정을 통보하게 하고서야 값을 치르고 데려오기를 허락한다면 이로 인해 나라에 사단이 생길까도 염려됩니다. 꼭 시행하려 한다면 잡혀간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기록해서 책을 만들어 역학(譯學)에게 보내서 그들의 생사여부와 남녀 노소의 값이 얼마인가를 물은 뒤에 몸값 지불을 원하는 자로 하여금 액수에 맞추어 준비해 가게 해야 할 듯합니다."

 

11월 10일 계유

대사헌 정광적(鄭光績)이 아뢰기를,
"신응망(辛應望)을 논계할 때에 그가 호종했는지 여부를 모르고 한갓 경연(經筵)의 석상에서 들은 것만 믿었기 때문에 사실과 틀린 말을 하게 되었는데 수상(首相)의 차사(箚辭)를 본 뒤에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 일로 동료가 체파(遞罷)되었는데, 어찌 신만이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옥당에서는 비록 출사를 청하였으나 병으로 부름에 달려가지 못하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동료가 모두 체직되어 사리상 혼자만 면하기가 어렵고, 부름을 받고 나오지 않은 것도 자연 체직에 해당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진위사(陳慰使)에게 진향사(進香使)를 겸하게 하여 일로의 지공(支供)과 부마(夫馬)·선격(船格)의 폐단을 줄일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모 도독이, 바닷길이 막혀 새 역서(曆書)를 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본국의 역서 2책(冊)을 요구하므로 관상감으로 하여금 찍어 보내게 하였다.

 

11월 11일 갑술

상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대행 황제(大行皇帝)103)  의 성복례(成服禮)를 숭정전(崇政殿) 계단에서 거행하였다.

 

11월 12일 을해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정전 계단에서 거림(擧臨)104)  을 행하였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렸다. 대략에,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王)이 없는 것이 천하의 일정한 이치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진주(眞主)’라는 말이 역괴(逆魁)의 입에서 나온 것을 들은 이상 차마 그대로 듣고 끝까지 캐물으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고 캐묻고자 하는 것을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아주 윤리(倫理)가 없다.’고 말하니 이는 한갓 진주(眞主)가 있다는 김유만 옹호하고 역적을 토멸하는 대의(大義)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유를 신문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신이 윤리가 없는 것입니까, 김유를 신문하고자 하지 않는 대간에게 윤리가 있는 것입니까? 신하로서 그 진주(眞主)의 출처를 캐물으려 하지 않는 대간을 도리어 스스로 순리(順理)이고 윤리가 있다고 하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쓸어버린 듯 없습니다. 이는 신하에게 두 임금이 있고, 나라에 두 왕이 있다는 데 가까운 짓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국청(鞫廳)에서 재삼 김유(金裕)와 한인발(韓仁發)을 국문하기를 청한 것은 군신의 분의(分義)를 안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만약 어리석은 신이 담당했더라면 어찌 두세 번에 그쳤겠습니까. 반드시 죽음으로 간쟁하여 기필코 천청(天聽)을 돌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대간의 체면은 이와는 달라서 재상은 가하다 했더라도 대간은 안 된다고 했으니, 최현(崔晛)의 감사(減死)에 대하여 국청에서 이미 상의 하교가 윤당(允當)하다고 헌의(獻議)하였더라도, 대간은 법률로 따져서 논쟁하는 것이 직분상 당연한 것입니다. 김유 무리의 ‘진주’가 있다고 한 죄는 역적을 토멸하지 않은 최현보다 중한데도 대간은 김유는 버려두고 유독 최현에게만 죄를 주었으니, 과연 무슨 뜻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전번 차자에서 이른바 ‘진주(眞主)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殿下)가 계신 줄은 모른다.’고 한 것은 삼사(三司)가 참으로 그런 실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기를 마지 않으면 그 유폐(流弊)가 마침내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파는 데 이를 것이니, 신의 이 말은 참으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유성(流星)이 기부성(器府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11월 13일 병자

상이 숭정전 계단에 나아가 거림하는 예를 의식(儀式)대로 거행하였다.

 

사간 정홍명(鄭弘溟), 헌납 여이징(呂爾徵), 정언 이명웅(李命雄)·오달승(吳達升)이 아뢰기를,
"중신(重臣)이 다시 차자를 올려 오로지 신들의 전일 피혐한 말을 가지고 조목마다 헐뜯고 배척하기를 더욱 격렬(激烈)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같이 따지자니 분분(紛紛)하기 그지없을 것이고, 묵묵히 모른 체 따르면서 그가 떠들며 배척하는 것을 듣자니 대간의 체면이 신들로부터 떨어지게 되겠기에 부득이 거림하시는 날에 시끄럽게 하오니,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
하고, 지평 이경의(李景義)도 이로써 인피하니, 답하기를,
"전에 하교한 대로 다시는 서로 따지지 말라."
하였다. 집의 권도(權濤), 장령 김남중(金南重)은 모두 정고(呈告)하여 거림하는 예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중신(重臣)의 배척을 받았다 하여 인혐하며 파직을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응교 윤지(尹墀), 부교리 이행원(李行遠), 부수찬 민응형(閔應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중신이 참으로 생각한 바가 있으면 간곡히 진달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으나, 우찬성 이귀는 매양 대간을 헐뜯는 것을 일삼아 잠시도 직에 편안할 수 없게 하니, 잘못이 저쪽에 있다면 이쪽에야 혐의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밖에 있으면서 변을 듣고 옥사(獄事)에 대하여 자세히 몰랐다가 인혐할 때에 실상대로 고했다 하여 죄를 주는 사리는 없습니다. 거림할 때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비록 그러하였다 하더라도 법관의 신분이니만큼 재직하면서 그대로 다른 사람을 규찰(糾察)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사간 정홍명, 헌납 여이징, 정언 이명웅·오달승, 지평 이경의는 출사하게 하고, 집의 권도(權濤), 장령 김남중은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경기 감사 남이웅(南以雄)이 치계하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명한(李明漢)의 첩보에 의하면 ‘경내(境內)의 군민(軍民)들이 이미 수군(水軍)의 번차(番次)를 변통한다는 말을 듣고, 또 수사(水使)의 행문(行文)을 보고는 각자 의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대체로 정군(正軍)은 양반(兩班)의 자손도 면할 수 없으나, 수군(水軍)은 대대로 세습하는 직임으로서 지극한 천역(賤役)인데 일반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니 장차 도망하고 흩어질 형세이다.’고 하였습니다. 크게 군정(軍情)에 관계되니,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변통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11월 14일 정축

상이 숭정전 계단에 나아가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제복(除服)하는 예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11월 15일 무인

동지(冬至)이다. 상이 숭정전 계단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였다.

 

사간 정홍명(鄭弘溟)이 아뢰기를,
"무릇 대간은 말하고 침묵함이 때가 있는 것인데 걸핏하면 군의(群議)에 따르고 격동(激動)하여야 발론(發論)하며 몰아붙인 뒤에야 응한다면 비단 사체가 서로 손상될 뿐만 아니라 실속도 없이 시끄러움만 생기게 됩니다. 어찌 신하로서 시대를 걱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정성이 유독 훈재(勳宰)보다 못해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신과 같은 자는 원래 세상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데 이제 다시 머리를 숙이고 비난을 받아가며 도로에서 호창(呼唱)할 뿐이니, 비록 신은 이로써 영화(榮華)를 삼는다 하더라도 조정이 경시당하고 당세 선비의 수치가 되지 않겠습니까. 구구한 염치를 돌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전후의 정녕한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나 끝내 부끄럽고 위축되어 마음이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어제 소패(召牌)를 받았으나 감히 궐하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실로 스스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신의 직을 삭제하소서."
하고, 헌납 여이징, 정언 이명웅·오달승 등도 인혐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뻔뻔스럽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 않으나 소명(召命)을 받들었으므로 의리상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반열에 나왔었습니다. 지금 정홍명이 인피한 말을 보니, 오로지 염치를 들어서 말을 했습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동료를 처치하겠습니까.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아울러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부응교 윤지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간의 신분으로서 여러 차례 헐뜯음과 배척을 당했으니 체면과 염치에 관련되므로 재차 인피한 것은 불가피한 사세입니다. 그러나 일을 말하는 체모는 당부(當否)만을 논해야지 어찌 남의 독촉을 기다려 발론하겠습니까. 다만 ‘실속도 없이 소란만 일으킨다.’는 등의 말은 구차스러운 데 관계된 듯하며, 또 소명(召命)을 받들고 나오지 않은 것은 책임을 회피하여 태만히 한 잘못을 면치 못합니다. 성교(聖敎)에 정녕하게 ‘따지지 말라.’고 유시하였으며, 처치하면서 출사를 청하여 명을 받고 직에 나왔으니 별로 잘못이 없는데 무슨 피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정홍명은 체차하고 헌납 여이징, 정언 이명웅·오달승, 지평 이경의는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경상도 속오군(束伍軍) 서무생(徐武生)·한산(閑山) 등이 군역(軍役)을 도피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효시(梟示)하였다.

 

11월 16일 기묘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진해(鎭海) 백성들의 소장(訴狀)에 따라 치계하기를,
"진해의 고을은 남정(男丁)이 겨우 8백 인이고 전결(田結)이 겨우 2백 결이며, 향리(鄕吏)는 단지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지난해 다시 현(縣)을 설치하였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전과 같이 창원부(昌原府)에 합병하여 수화(水火)의 재난에 처한 듯한 한 고을의 위급함을 구해주소서."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진해는 잔패(殘敗)되어 모양을 이루지 못해 방백(方伯)이 그곳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계청한 것이나 연혁(沿革)의 중대한 일을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과 좌상·우상은 모두 의논드리기를,
"합병한 지 오래지 않아 도로 설치하기를 청하여 합병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는 것이 아이들 장난과 비슷하니 이런 습성은 좋지 않습니다. 다만 그처럼 잔폐하니, 비록 현으로 삼고자 해도 될 수가 없을 것인데 방백이 필시 소견이 있을 터이니, 장계대로 시행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조방직(趙邦直)을 집의로, 임광(任絖)을 지평으로, 권집(權潗)을 장령으로, 권반(權盼)을 등극 상사(登極上使)로, 민성징(閔聖徵)을 부사(副使)로, 김성발(金聲發)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한여직(韓汝溭)을 진향 겸 진위사(進香兼陳慰使)로, 김상빈(金尙賓)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11월 17일 경진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옛날 둔전(屯田)의 법을 모두 시행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우선 쉬운 것만 시험삼아 해보면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그 이익이 많을 것입니다. 백규(白圭)가 지력(地力)을 잘 이용하여 마침내 부강(富强)에 이른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양서(兩西) 지방의 둔전은 이미 감사(監司)로 하여금 형편을 살피게 하여 현재 요리하고 있습니다. 경기(京畿)와 양호(兩湖) 지방도 둔전을 널리 개척하여야 하는데 기름진 원전(原田)은 모조리 주인(主人)이 있는 곳이므로 설행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강도(江都)의 덕물도(德物島)와 장단(長湍)의 무지곶(無知串) 같은 곳은 땅이 비옥(肥沃)하고 또 강도의 앞뒤를 호위하는 곳으로서 실로 개간하기에 합당합니다. 기타 태안(泰安)의 액산(厄山)과, 호남의 황원(黃原) 및 완도(莞島)·지도(智島)·고금도(古今島)·의도(義島)·위도(蝟島)·고군산(古群山)도 모두 기름진 땅인데 태복시(太僕寺)에서 거두는 것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지역의 곳곳에 둔전을 두면 그 비용이 적을 뿐만이 아니라 수확이 많을 것이며, 또 이는 연변(沿邊)의 섬이므로 운송할 때의 고충을 줄일 수 있으니, 곡식을 얻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별도로 둔장(屯將)을 보내고, 3도의 감사에게 알려서 속히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은 옳다. 다만 내지(內地)의 둔전은 전부터 이익됨은 적고 끼친 폐단만 많았으니, 충분히 헤아려서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의 도리는 단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일 뿐입니다. 옛날의 소인은 구별하기가 쉬웠으나 지금의 소인은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임금으로서는 쓰고 버림을 삼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자와 소인이 어찌 고금이 다르겠는가."
하자, 지경이 대답하기를,
"옛날의 소인은 비록 참소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 정적(情跡)이 쉽게 드러나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소인은 겉으로는 충신(忠信)한 듯하나 참소하고 아첨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며 계책이 교묘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쉽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흥망과 치란은 현사(賢邪)에 달려 있는 것이니 등용할 때에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토관 민응형(閔應亨)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초기의 정사를 보면 정신을 가다듬어 치적을 이루고자 하셨으므로 중고(中古)의 어진 임금을 능가하여 태평성대가 올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4∼5년 이래 점차 처음과 같지 못하여 정무(政務)가 고식적(姑息的)이고, 안일에 젖어 날짜만 보내어 국가의 위란(危亂)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비록 아래에 봉행(奉行)하는 훌륭한 신하가 없다지만, 외부의 의논은 모두 ‘상께서도 실덕(失德)한 일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쇠약해져 난망(亂亡)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가다듬어 회복하는 계책에 분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부 의논이 무슨 일을 가지고 내가 실덕했다고 하는가? 들어서 고치고 싶다."
하니, 응형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성인(聖人)으로 자처하는 성벽(性癖)이 많아 매양 공의(公議)를 거스르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습성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곧바른 논의를 싫어하고 부드러운 말 듣기를 좋아하여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자가 전후로 잇따르고 있어 이 때문에 곧은 기개가 꺾이고 언로(言路)가 막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덕(聖德)의 큰 흠이며 위망(危亡)의 화를 부르기에 족한 것입니다. 기타 정사(政事)하는 사이에 실덕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려워 감히 누누이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정유성(鄭維城)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어제 명을 받들고 선릉(宣陵)·정릉(靖陵)에 가서 삼가 정릉 안에 유림(柳琳)이 나무를 벤 곳을 살펴보니 곡장(曲墻) 뒤 10보(步) 안에, 큰나무 30여 그루와 내외 청룡(靑龍)·백호(白虎)에 크고 작은 나무 4천여 그루를 모두 베었었습니다. 또 정자각(丁字閣) 앞 10보 안에 네 그루의 잣나무가 좌우로 심어져 있는데 이는 백년 된 교목(喬木)입니다. 그런데 이들 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도 모두 쳐버려 단지 네 그루 원주(元株)만 우뚝하니 정자각 앞에 서 있어 보기에 매우 참혹하였습니다. 신이 봉심(奉審)하고 서계(書啓)하였으나, 오늘 입시(入侍)하였으므로 감히 목도한 참상을 다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평안 감사가 성천 부사(成川府使) 안경심(安景深)이 죽었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성천 부사 안경심은 이번 변란에 공로가 많았는데 출륙(出陸)한 지 오래지 않아 불행히 병사했으니 매우 불쌍하다. 그의 상구(喪柩)가 나올 때에 연로(沿路)의 각 고을은 각별히 호송하도록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가례(嘉禮) 후에는 으레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온 나라 백성들과 경사를 함께하는 뜻이었습니다. 저번 왕세자의 관례와 책례 때에 모두 과거를 보였으니, 이번 가례 후에도 전례대로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의주 부윤(義州府尹) 엄황(嚴愰)의 장계를 보건대 강이 이미 얼어붙었다고 하니 우리로서 미리 계책을 세우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삼도(下三道) 병사(兵使)로 하여금 지난해의 예에 의하여 수하(手下)의 친병(親兵) 약간 명과 추종들만을 거느리고 계면(界面)에 가 주둔하게 하고, 도내의 군병은 각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미리 먼저 약속(約束)하여 혹시 사변(事變)이 있으면 조정의 분부를 기다려 각기 거느리고 신속히 달려 올라오도록 하여 착오를 빚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하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8일 신사

모영(毛營)의 회례관(回禮官) 황감(黃㦿)이 치계하였다.
"신이 표하인(標下人)을 통하여 들으니, 도독이 승질(陞秩)되어 요동 백(遼東伯)에 봉해져서 제장(諸將)의 아문(衙門)이 모두 치하(致賀)한다고 하므로 신이 차를 마실 때 축하의 뜻을 전했더니, 도독이 우리 나라가 두 손자를 후대해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습니다. 그리고 신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였는데 말이 지난번의 일에 미치자 ’귀국은 변관(邊官)을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의심받지 않아도 될 일을 의심받아 나라 일을 그르쳤다. 강(姜)·왕(王) 두 조사(詔使)가 왔을 때 구성 태수(龜城太守)와 다른 변관(邊官)이 형편없는 짓을 한 일이 매우 분하다.’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 때 죄를 얻은 변관은 이미 파직(罷職)되었거나 적에게 죽었는데 노야(老爺)의 기량(器量)으로 어찌 용납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제기하는가?’ 하니, 도독이 친히 지필(紙筆)을 들고 신에게 ‘대국(大國)은 소국(小國)을 돌보고 소방(小邦)은 대방(大邦)을 섬기는데, 돌보는 자는 관용으로 포용하고, 섬기는 자는 정성으로 공경하는 것이다.’고 써 주고는 이어 말하기를 ‘협동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함께 적노(賊奴)를 멸하자는 뜻이 모두 이 문자 속에 있으니, 모름지기 아뢰어 알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중국은 우리 나라에는 부모의 나라여서 2백 년 이래 충순(忠順)으로 사대한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일이고, 우리 임금이 황조(皇朝)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노야를 위해 마음을 다한 것은 천지 신명에게 질정할 수가 있다. 더구나 아비는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효도해야 하는 것은 천리(天理)의 당연한 바로서 남의 권면(勸勉)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야가 분부하니 즉시 치계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3일을 머물고 사첩(辭帖)을 올리니 도독이 재차 만나기를 청하고 다시 지난번 변신(邊臣)의 일을 말하면서 윤훤(尹暄)·이완(李莞)에 대해서는 온갖 욕을 다하고는 ‘귀국에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간언(奸言)만을 들음으로써 나로 하여금 명장이 되지 못하게 하고, 귀국은 충신이 되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분하다.’ 하고 또 ‘지난해 청야(淸野)하라고 했던 것은 실로 충고였는데도 믿어주지 않고 부질없이 곡식을 쌓아두었다가 도리어 약탈만 당했는데, 지금 또 식량을 운반하여 적들을 먹이려고 하면서도 우리의 군량은 돕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라의 저축이 탕갈되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만약 저장된 것이 있으면 어찌 노야를 돕지 않겠는가.’ 하니, 도독이 또 말하기를 ‘귀국에서 중국에 보내는 사신들은 품질 좋은 인삼(人蔘)을 가지고 가서 모조리 중국 문신(文臣)들에게 바치는데,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귀국에 많은 힘이 되고 있는데도 준 적이 없으니, 이 역시 섭섭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물력이 탕갈되었으니,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이익을 탐내는 하배(下輩)들이 하는 짓이니 우리 임금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도독의 사람됨을 보건대 자기의 선(善)을 드러내주면 기뻐하고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았습니다. 또 장대추(張大秋)에게 물었더니, 황상(皇上)이 붕서(崩逝)했다는 확실한 보고가 이미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도독은 풍악을 갖추어 연회를 베푸는 등 조금도 변례(變禮)하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臺諫)도 남의 잘못한 점을 숨겨주고 잘한 점을 드러내주어야 하는가?"
하니, 윤지(尹墀)가 답하기를,
"여기에서 말하는 악을 숨겨주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임금이 잘못을 포용하여 관대한 도량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언관(言官)의 직을 맡은 자가 참으로 악을 숨겨주려는 마음으로 관원의 사특함을 규찰하지 않아서 아첨하고 말 잘하는 무리로 하여금 조정에 발을 붙이게 하여 국가에 화를 끼친다면 어찌 그 직책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시국(金蓍國)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성인으로 자처하는 병통이 있어 강직한 선비를 싫어하여 물리치십니다. 지난날 윤황(尹煌)의 말은 더러 중도를 잃은 점이 있기는 했지만 충분(忠憤)에 격동된 것으로 모두가 정론(正論)이었는데 여러 차례 엄한 전지를 내리시어 크게 기를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주의할 적마다 낙점(落點)을 받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심지어 수령으로 의망한 것까지도 낙점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성상의 마음을 엿보고는 말하기를 ‘필시 천오(賤惡)한 데 치우친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민응형(閔應亨)은 아뢰기를,
"김시국이 중론(衆論)을 듣지 못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그때 외부 의논은 모두 말하기를 ‘사인(舍人)은 낙점(落點)하고, 수령(守令)은 낙점을 받지 못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임금의 마음이 그의 강직함을 아름답게 여겨 멀리 보내고자 하지 않고 내직에 두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시국이 아뢰기를,
"신의 말은 본디 천근(淺近)한 데 속하고 민응형의 말이 성상의 마음을 잘 안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혹 그의 임금을 걸(桀)·주(紂)에 비한 자도 있었으나 당시에 죄를 주지 않고 도리어 너그러이 용납하였다. 비록 걸·주로 그 임금을 책하더라도 걸·주 같은 사실이 없으면 모두 그 말이 지나친 것을 알게 되어 믿지 않는 때문이다. 그러나 윤황의 말은 이와는 다르다. 오랑캐와 강화를 맺어 인심이 의아해 하는 즈음에 갑자기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다는 설을 원근에 전파시켜 상하의 사람들이 필시 내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록 하였으므로 이를 내가 매우 싫어한 것이다."
하였다.

 

11월 19일 임오

이보다 앞서 나주(羅州) 출신(出身) 전대복(全大福)이 많은 무명을 본도 궤군(潰軍)에게서 받아들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금부에 가두어 국문(鞫問)하도록 명하였다. 대복이 말하기를 ‘병조의 서리 최축(崔軸)이 영장(領將)과 나를 꾀어 말하기를 「영장은 충군(充軍)이 3년이고, 군병(軍兵)은 벌방(罰防)이 3개월인데, 만약 나에게 뇌물을 쓰면 도모해 주겠다.」 하였기 때문에 6동(同)의 무명을 준 것이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병조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처단하게 하고, 아울러 그 뇌물을 돌려주게 하였다.

 

충청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도내 죄인의 방록(放錄)과 미방록(未放錄)을 가지고서 아뢰기를,
"부여(扶餘)에 정배된 장만(張晩)과 문의(文義)에 정배된 이안직(李安直)은 의당 사면하는 데 들어야 할 듯하나 감히 마음대로 결단할 수가 없으니, 금부로 하여금 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금부가 회계하기를,
"이안직의 죄는 남기(濫騎)105)  이니 사면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장만은 죄목이 무겁기는 하지만 실수로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으로서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에 해당되니 역시 사면을 받아야 합니다. 삼가 예재(睿裁)를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두 회계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장만은 일개 탐욕스럽고 교활한 사람일 뿐이다. 지난번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수(元帥)의 신분으로서 관망만 하고 머뭇거리어 끝내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하고 적이 도성(都城)을 점거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여러 장수의 협력으로 다행히 토평(討平)하게 되어 훈적(勳籍)에 모록(冒錄)되고 헛되이 상등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적노(賊奴)가 동쪽을 침략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나가 방어하라는 명을 받고도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었으니, 전후 임금을 잊고 일을 그르친 죄는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는데도 부처(付處)의 형을 대충 시행하였다가 몇 달이 못되어 바로 사면의 명이 내렸으니, 군율에 죽은 윤훤(尹暄)만 억울하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239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역사-편사(編史)


[註 105] 남기(濫騎) : 역말을 함부로 탄 죄.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장만은 일개 탐욕스럽고 교활한 사람일 뿐이다. 지난번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수(元帥)의 신분으로서 관망만 하고 머뭇거리어 끝내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하고 적이 도성(都城)을 점거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여러 장수의 협력으로 다행히 토평(討平)하게 되어 훈적(勳籍)에 모록(冒錄)되고 헛되이 상등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적노(賊奴)가 동쪽을 침략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나가 방어하라는 명을 받고도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었으니, 전후 임금을 잊고 일을 그르친 죄는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는데도 부처(付處)의 형을 대충 시행하였다가 몇 달이 못되어 바로 사면의 명이 내렸으니, 군율에 죽은 윤훤(尹暄)만 억울하지 않겠는가.

 

선전관을 강원도로 보내어 최정일(崔精一)·윤연생(尹連生)·진계봉(陳戒奉) 등을 주벌하였는데, 이들은 이인거(李仁居)의 무리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사간으로, 임련(林堜)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0일 계미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빈(王世子嬪)의 납징례(納徵禮)를 거행하였다.

 

11월 21일 갑신

왕세자빈의 고기례(告期禮)를 숭정전에서 거행하였다. 정사(正使) 김류(金瑬)와 부사(副使) 이홍주(李弘胄)가 뜰에 들어와 사배(四拜)를 하니, 승지 김시국(金蓍國)이 끊어앉아 전교(傳敎)를 청하였다. 예를 마친 후 김시국이 아뢰기를,
"정사와 부사가 전교를 받들어 왕세자빈의 고기례(告期禮)를 행한 후 복명(復命)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영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등극 사신(登極使臣)을 1품(品)으로 차견하라고 명하셨다 하는데, 생각하건대 좌상 오윤겸(吳允謙)은 일찍이 다녀왔고 우상 김류는 지금 총융(摠戎)의 중임을 맡고 있으므로, 오직 신만이 무고(無故)하니, 비록 노쇠하다고는 하지만 차출되어 갈 만합니다. 다른 재상을 대신 보낸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신의 마음이 편치 못하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급하고, 대신은 모두 늙고 병들어 만리 험한 바닷길을 결코 갈 수가 없다. 이번에 대신 가게 하는 것도 근례(近例)가 있으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대사간 정온(鄭蘊)을 불렀으나 오지 않고 인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나아갈 수 없는 정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신의 어미 나이가 몇 달 후면 91세가 되는데, 법전(法典)에 ‘어버이의 나이 90이 되면 자식은 돌아가 봉양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종군(從軍)하는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종군하는 자도 오히려 돌아가 봉양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하물며 조신(朝紳)이겠습니까. 신이 은총을 탐내어 미련을 갖더라도 어머니를 버리고 임금에게 나가면 비루하고 야박하다는 물의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나아가기 어려운 한 가지입니다.
신은 발언하는 것이 경솔하고 일 처리가 전도되어 하는 일마다 걸핏하면 비방을 받습니다. 증삼(曾參)같은 아들을 두고도 오히려 세 번 와서 고하자 북[杍]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106)  ,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 신을 믿으심이 증삼의 어머니만 못하니 일마다 흠을 잡아내어 세 번이 아니라 계속하여 고한다면 아무리 전하께서 아끼고 돌보신다 하더라도 어찌 시종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어려움을 지니고 있어 오직 물러갈 수 밖에 없으니, 바라건대 신의 직명을 삭제하여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도록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으니, 내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경은 훼방(毁謗)을 개의치 말고 속히 올라와 내 바람에 부응하라. 그리고 본직에 대해서는 우선 경의 요청을 따르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22일 을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하 국가는 균평(均平)하게 할수 있지만 중용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당 태종(唐太宗)의 치평(治平)은 삼대(三代)에 비해 부끄럼이 없는데도 그 행실을 보면 큰 참덕(慚德)이 있으니107)  , 중용에 능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니,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지금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평소 현신(賢臣)이라 일컫는 이들이 아래에 포진해 있는데도 국가가 이토록 쇠미해졌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당 태종의 행실을 경계하시고 치평하는 도리로 법을 삼으소서."
하였다.

 

부호군 홍보(洪靌)가 상소하여 녹훈(錄勳)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병술

상이 소대를 명하여《중용》을 강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나와 아뢰기를,
"10장(章)은 오로지 용(勇)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자로(子路)가 용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강(强)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가 자로의 혈기(血氣)의 용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남방(南方)의 강(强)이 본디 북방(北方)의 강보다는 낫지마는 역시 군자(君子)의 덕의(德義)의 용은 아니므로 군자의 강을 말한 것입니다. 화(和)하되 유(流)하지 않은 자가 어찌 강하지 않겠으며, 현달하지 못했을 때 지키던 바를 변치 않은 자가 어찌 강하지 않겠으며, 색(塞)했을 때를 변치 않은 자가 어찌 강하지 않겠습니까. 중립(中立)하여 치우치지 않음은 역시 오직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중립이란 편벽되지 않고 기울지도 않는다는 것인가?"
하자, 경세가 그렇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도 남방 사람인데, 남방의 습성은 과연 공손하고 온순한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남방이라 하여 어찌 모조리 온순하겠으며, 북방 역시 어찌 모조리 과감하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남방의 풍습을 알고자 하시니,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남(嶺南)은 풍속이 제법 순박하였습니다만, 정인홍(鄭仁弘)이 그곳에서 태어나 인물 해치는 것을 일삼았는데 이 점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세속에서 이른바 별종(別種)이란 것이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지난번 정인홍의 문객(門客)으로 풍헌 유사(風憲有司)라고 자칭한 자가 있었는데, 그곳의 토주(土主)108)  도 그들의 뜻을 거스르면 사방 이웃을 사주하여, 온 도(道)에 통문(通文)까지 돌렸습니다. 그러나 상주(尙州) 사람은 받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같은 남방인데도 양남(兩南)의 습성이 같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진주(晉州) 이하는 지역이 서로 연접해 있어 두 도의 습속이 상당히 서로 비슷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湖南)은 지나치게 강한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수령(守令)과 방백(方伯)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곳 풍속을 살펴보니 비록 하리(下吏)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강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자주 만나지 못하므로 현명한지 여부를 알기가 본디 어렵지만, 친한 벗 사이는 현명 여부를 알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공자(孔子)같은 성인도 당시 중국에서 쓰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비난하고 배척한 자가 있었던 것은 왜 그런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곡량전(穀梁傳)》에 이르기를 ‘학문(學文)이 성취되었는데도 명예(名譽)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벗의 잘못이다.’ 하였고 《중용(中庸)》에는 ‘붕우(朋友)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위의 신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붕우에게 믿음을 받는 사람이라면 신임을 받을 법도 한데, 말세의 일은 사리로만 미루어 알 수가 없습니다. 붕당(朋黨)의 설이 한번 나오자 호오(好惡)가 정해지지 않으니, 사람들의 시비(是非)가 어찌 모두 공평하다고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는 불선(不善)함을 덮어주어 보호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이에는 그 선행(善行)을 숨기고서 배척하니, 그 폐해가 어찌 적겠는가. 옛날의 붕당은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벗이 되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벗이 되었는데, 지금은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이 집안 대대로 전하고 지켜서 현명한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피차간에 서로 뒤섞여 더욱 나라에 해가 된다."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송(宋) 원우(元祐) 때 사람들은109)   모두 정인(正人)이었는데도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가 소인(小人)인 줄만 알았지 자기와 같은 자 중에도 소인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원우 때 사람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지금도 한두 사람이 성상의 뜻을 본받아 힘써 공도(公道)를 행하는 이가 어찌 없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 마음이 내 마음과 달라 내가 비록 공평되게 하고자 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형세상 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이징(李澄)을 불러 입궐시킨 지가 여러 날이라고 하는데 그리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군은 잡기(雜技)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의당 복수(復讐)에 마음을 써야지 잗단 잡기에 마음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경세는 아뢰기를,
"신도 그런 말을 들은 지 오랩니다. 옛사람이 임금의 욕심에 대해서 논하기를 ‘서화(書畵)를 좋아하는 것은 비록 토목(土木)이나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마음을 쓰는 것은 한가지이다.’ 하였으니, 이제 이징을 내보낸다면 역시 광명(光明)의 도입니다. 신은 또 들으니, 상께서 강석기(姜碩期)로 하여금 세자빈(世子嬪)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치게 했다는데, 석기가 들어가면 수놓은 요에 석기를 앉히므로 석기가 감히 앉지 못하고 치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안에서 숭검(崇儉)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경이 필시 잘못 들었을 것이다. 강석기를 만나 물어 보라.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어찌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일찍이 들으니, 궁중에서는 모두 거친 자리를 깐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말을 마침 들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징은, 그가 마침 서울에 들어왔다고 하기 때문에 불러서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지금 경들의 말을 들으니, 과연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현달하지 못했을 때 지키던 바를 변하지 않는 것은 본디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옛 사람이 왜 어렵게 여겼는가?"
하니, 경세가 아뢰기를,
"참으로 강한 자가 아니면 어찌 능히 지키던 바를 변하지 않겠습니까. 선비가 궁하여 아래에 있을 때는 반드시 지조가 있다가도 벼슬이 현달해지면 변하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일로 보건대 혼조(昏朝) 때 궁하던 사대부들이 그 누군들 백성에게 혜택을 입힐 뜻이 없었겠는가만 오늘날 와서는 그가 지키던 바를 변한 자가 없지 않다. 이로써 말하자면 과연 어려운 것이다."
하자, 경세가 아뢰기를,
"상께서 혼조 때에 참으신 것이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만 반정(反正)한 후에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욱더 가지신다면 이는 편안한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11월 24일 정해

빈청(賓廳) 대신이 아뢰기를,
"오늘 녹훈(錄勳)을 마감할 때에 홍보(洪靌)가 이탁남(李擢男)과 함께 의논하여 마감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빈청이 또 아뢰기를,
"변란 초에 유생(儒生)이 곧바로 경성(京城)에 와서 고변(告變)한 자가 있으므로 홍보 등이 조사하여 마감하지 못한다고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답하였다. 빈청이 또 아뢰기를,
"진극일(陳克一)은 스스로 역적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서울로 와서 장계(狀啓)가 도착하기 전에 상변(上變)하였으니, 나라를 위해 바친 정성이 많습니다. 상으로 보답하는 전례(典禮)가 본디 없을 수 없는데, 전례를 상고해 보니 고변하여 훈적(勳籍)에 참여한 자가 있었고, 실직(實職)으로 보답한 자도 있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육품(六品)의 실직을 제수하고, 원종(原從) 1등에 녹훈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서너 명의 적을 잡은 공은 일개 역사(力士)의 일일 뿐이니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그러나 홍보 등이 군사를 주둔시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고 과장하여 마치 크게 훈로(勳勞)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원훈(元勳)을 함부로 차지하였다. 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두 영장(營將)에게도 아울러 중전(重典)인 훈적에 기록하게 하여 자기가 은혜를 베푸는 계기로 삼았으니, 홍보 등은 임금을 속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240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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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두서너 명의 적을 잡은 공은 일개 역사(力士)의 일일 뿐이니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그러나 홍보 등이 군사를 주둔시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고 과장하여 마치 크게 훈로(勳勞)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조정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원훈(元勳)을 함부로 차지하였다. 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두 영장(營將)에게도 아울러 중전(重典)인 훈적에 기록하게 하여 자기가 은혜를 베푸는 계기로 삼았으니, 홍보 등은 임금을 속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가례(嘉禮)로 인한 별시 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는 신해년의 예에 의하여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여 3소(所)로 나누어 각기 2백 인을 뽑되 초장(初場)에는 논부(論賦)로서 편(篇)을 갖추도록 하고 종장(終場)에는 책문(策問) 1도(道)로 하고, 강경(講經)은 《사서(四書)》 중에서는 1책을 찌를 뽑아 하고 《삼경(三經)》 중에서는 자원하는 1경(經)으로 하여 조(粗) 이상을 뽑아 시취(試取)하소서."
하니, 따랐다.

 

밤에 상이 이서(李曙)와 구굉(具宏)을 인견하고 인하여 사주(賜酒)하였다.

 

정봉수(鄭鳳壽)에게 약물(藥物)을 보내라 명하고, 또 인편에 부송해서 일로에서 위전(委傳)하는 폐단을 줄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5일 무자

헌부가 아뢰기를,
"정원은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대체로 소장(疏章)의 내용이 본인에게 관계되는 것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데도 지난번 첨지(僉知) 송영망(宋英望)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의전(李義傳)은 그 직에서 사퇴하기를 원하는 것으로서 모두 외람된 데 관계되었는데도 정원이 분간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계했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더구나 수령은 감사에게 올려 위에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상규(常規)인데도 지금은 규례를 무시하고 받아들였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색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호패(號牌)를 혁파한 이후 경외(京外)에 사는 백성들이 마음대로 옮겨다니는데, 한 곳에 억지로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은 사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거지는 산새나 들짐승과는 달라 친척으로는 부형(父兄)과 인족(姻族)이 있고, 거주지에는 인당(隣黨)과 보오(保伍)가 있어 각기 서로 도우며 의지하니 거처를 모를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근래 외방(外方)의 문보(文報)를 보면, 수령으로서 마음을 다해 봉공(奉公)하는 자는 새로 정한 군사 및 장인(匠人) 등이 모두 현존(現存)해 있습니다만, 혹 용렬하고 사리에 어두워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자상(慈祥)하여 지나치게 백성을 비호하는 자는 허물을 호패의 혁파(革罷)로 돌려 모든 경내의 백성이 으레 도망하고 이사갔다고 칭하니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지금 청도 군수(淸道郡守) 유진(柳袗)의 첩보를 보건대, 본군의 수포 장인(收布匠人) 51인이 모두 도망하여 간 곳을 모른다고 하였으니, 그가 사사로이 고을 백성을 비호하고 조정에 속여서 보고한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외방의 각 고을이 모두 유진처럼 한다면 군적(軍籍)과 장안(匠案)이 모조리 헛된 문서가 될 것이니, 유진을 우선 중벌로 추고(推考)하고 다시 조사하여 첩보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각조(各朝)의 실록(實錄) 등초(謄抄)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가례(嘉禮) 후에 진하(陳賀)·반사(頒赦)하는 절목(節目)이 있는데 이번 가례 후에도 이에 의거하여 계품하였으나 상께서 중묘조(中廟朝)의 예에 의하여 하례만 하고 반사는 하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팔방(八方)에 반교(頒敎)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기축

병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도총부 당상(都摠府堂上)과 함께 신적(新籍)의 일번 군사(一番軍士)를 점고 검열했더니, 기병(騎兵)의 원래 숫자 1천 8백 77호(戶) 중에 공탈(公頉)110)  이 1백 67호, 도망(逃亡)과 절호(絶戶)가 3호, 도목(都目) 후에 궐점(闕點)이 2호로서 실입(實入)은 1천 7백 5호이며, 충순위(忠順衛)의 원래 숫자 80인 중에 공탈이 12인, 궐점이 1인으로서 실입은 68인이며, 충찬위(忠贊衞) 39인 중에 공탈이 5인으로서 실입은 34인이며, 정로위(定虜衞) 90호 중에 공탈이 5호로 실입은 85호이며, 갑사(甲士)는 실입이 24호이고, 취라치(吹螺赤)는 실입이 18호입니다. 그중에 노잔(老殘)은 45인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정장(精壯)으로서 쓸 만합니다. 신적 군사에 관계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나라에 경사가 있어 진하(陳賀)하면 내전(內殿)은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의 예에 의하여 명부(命婦)들의 하례를 받는 예가 있습니다. 이번 왕세자의 가례도 더없는 경사인데, 명부들의 진하도 아울러 마련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
하였다.

 

이성구(李聖求)를 대사간으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소무 공신(昭武功臣) 1등 홍보(洪靌)를 풍녕군(豐寧君)으로, 2등 이탁남(李擢男)을 오산군(鰲山君)으로 삼았다. 원극함(元克咸)은 자급(資級) 미준(未準)으로 봉군(封君)되지 못했고, 3등 신경영(辛慶英)·이윤남(李胤男) 등은 아울러 정훈(正勳)에 기록되었으나 역시 자급 미준으로 수봉(受封)되지 못하였다.

 

11월 27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역적을 초멸한 공은 홍보 등 한두 사람이 마음을 다한 데서 말미암았는데, 진격하여 적을 잡은 우영장(右營將)은 오히려 녹훈에 참여해도 되지만 다른 영장은 적괴(賊魁)를 잡을 때 모두 도착하지 않았었는데 무슨 합동으로 작전한 공로가 있다고 모두 정훈에 참여시키겠습니까. 다시 감정(勘定)하도록 명하소서. 정사(靖社)와 진무(振武) 두 공신의 원종(原從)을 감록(勘錄)할 때 각사(各司)의 전복(典僕)들이 본역(本役)을 면하고자 도모하여 하리(下吏)와 제색(諸色) 장인(匠人)에게 뇌물을 써서 뜻대로 된 자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것이지만 중요한 훈적(勳籍)의 일을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각사가 잔폐(殘弊)한 것도 실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니, 녹훈 도감(錄勳都監)으로 하여금 종전의 폐습을 답습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과 원훈(元勳)이 참작하여 감정하였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 어렵다. 원종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대체로 차관(差官)을 연향(宴享)할 때에는 으레 악(樂)을 사용합니다만, 지금은 이미 황상(皇上)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니 등황(謄黃)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풍악을 울려서는 안 될 듯한데,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관(禮官)이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예관이 회계하기를,
"황상의 붕서(崩逝)는 8월에 있었으니, 생각건대 중국 조정에서 이미 제복(除服)하였을 것이고 우리 나라도 이미 거애하고 제복하였으니, 연향(宴饗)에 악을 사용하는 것이 피차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李坰)을 지평으로, 오단(吳端)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8일 신묘

김류가 아뢰기를,
"신의 종사관 이경증(李景曾)이 양서(兩西) 지방의 형세를 살피고 돌아왔습니다. 성(城)의 도형(圖形)과 그가 보고 들은 것이 별단(別單)에 기록되어 있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그리고 가산 군수(嘉山郡守) 이극일(李克一), 곽산 군수(郭山郡守) 안철(安澈)은 관의 일을 포기하고 수습하려는 뜻이 없다고 하니, 먼저 파출(罷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만호(萬戶) 박춘양(朴春陽)이 흑각궁(黑角弓) 30장을 비국에 바쳤는데, 비국이 해조로 하여금 논상(論賞)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도군(逃軍)의 범죄가 지극히 중한 줄 모르는 것이 아니나 당초의 처치가 모두 합당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항상 겸연쩍습니다. 이번 김기종(金起宗)이 치계에 ‘도군은 의당 사면을 받아야 할 듯하다.’고 하였는데, 신들도 그렇게 여깁니다. 상께서 강변(江邊)에 정배(定配)하여 물간 사전(勿揀赦前)하라고 전교하심은 실로 군법을 중하게 여긴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이로써 행회(行會)해야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금의 안주(安州)는 바로 전일의 의주(義州)로서 방군(防軍)이 매우 긴요한데도 병세(兵勢)가 단약(單弱)합니다. 부득이 각도의 도군(逃軍)을 조발(調發)하여 적수(謫戍)하게 한 것은 오로지 안주의 방어를 위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강변으로 정배한다면 그 무리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안주의 방수도 필시 허술해질 것이니, 강변에 정배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전번에 정병(精兵)을 뽑아 내어 단병(短兵)의 기예를 연습시키라고 전교하셨기 때문에 지금 정장(精壯)을 뽑아 놓았는데 언월도(偃月刀)와 철추(鐵椎), 편곤(鞭棍) 등의 기예는 반드시 교사(敎師)가 있어야 학습할 수가 있습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교사 6인을 본청에 배속시켜 그들로 하여금 서로 교대하면서 훈련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차관(差官) 등이 말하기를 ‘유민(流民)들이 만약 궁벽한 곳에 살면 필시 우리가 쇄환하기 위하여 나온 뜻을 모를 터이니, 동·남 두 대문에 방(榜)을 붙여주기를 바란다.’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찾아온 유민이 이미 30여 인이나 된다. 아무리 외진 곳에 살더라도 다 알 것으로 생각되니, 방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1월 29일 임진

병조가 아뢰기를,
"신적(新籍)을 이미 시행하였으니,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인족(隣族)에 대힌 폐단을 아울러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백성들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때인데 서울에 상번(上番)하는 각종 군사(軍士)로서 궐번(闕番)에 대한 가포(價布)를 바치지 않은 자가 아직도 많습니다. 이제 만약 전례대로 독촉하여 징수한다면 인족이 침해를 받는 걱정이 오히려 모두 제거되지 않을 것이니, 소득은 심히 적고 폐단은 매우 많습니다. 금년 11월 이전의 본조의 궐포(闕布)와 퇴립(退立), 외방(外方)의 병영(兵營)·수영(水營) 및 각포(各浦)에 속한 군사의 궐포와 퇴립 등의 일을 아울러 탕척해 준다면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뜻을 각도에 이문(移文)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안주(安州)에 여역(厲疫)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많았는데,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여 약물(藥物)을 급히 내려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11월 30일 계사

비국이 아뢰기를,
"체신(體臣)이 여러 곳에 둔전(屯田)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만약 전례대로 관리자를 차송(差送)한다면 끼치는 폐단은 필시 많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고(故) 수신(帥臣) 이순신(李舜臣)이 수사(水使)로 있을 때 여러 섬에다 둔전을 널리 설치하였는데, 이 섬들은 모두 방수(防守)하는 곳이어서 입방(入防)하는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농사를 짓되, 경작과 수비 또는 망을 보는 것도 모두 군사들을 이용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는 털끝만큼도 폐해는 없으면서 소득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선책(善策)이라 말한답니다.
이제 둔전을 설치한 전라도 해변도 우수사(右水使)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고자 하는데 이응순(李應順)은 나이가 노쇠할 뿐만 아니라 재주도 없어 이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전 병사(兵使) 유림(柳琳)은 원래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사람이니, 해조로 하여금 차송하여 겨울 이전에 때맞춰 요리하게 하되 이순신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농사짓는 일을 수사(水使)에게 책임지우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고, 또 이 둔전은 반드시 해만 있고 이익은 없을 듯하니, 서서히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기광(鄭基廣)이 청포(靑布)·사주(絲紬)·피전(皮氈)의 금령(禁令)을 설치하여 경상(京商)이 동래로 모여들게 하고 왜관(倭館)과 통화(通貨)를 편리하게 하여 더 머무는 폐단이 없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모 도독(毛都督)이 장례충(張禮忠)에게 유첩(諭帖)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진(本鎭)에서 천자에게 상소하여 국왕(國王)을 봉(封)해주기를 청한 것은 실로 국왕이 본진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적을 무찌르기를 바라서였다. 중국과는 바다가 막혀 풍파를 예측할 수 없어 군량을 보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국왕이 은근히 도와주기를 아울러 바라는 마음에서 전에 귀관(貴官)을 만나 설명하여 국왕에게 아뢰어 알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국왕이, 간신(奸臣)이 엄폐하는 것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군민(軍民)이 굶주리어 괴로움을 슬피 호소하는데도 한 톨의 곡식도 응해주지 않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인하여 변신(邊臣)이 적을 인도해 갑자기 동쪽을 습격해서 옥백(玉帛)과 자녀(子女)를 적이 끌어가고 저장해둔 식량이 적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리고 본진에서 개시(開市)하여 무역(貿易)을 한 뒤로는 조선 백성들의 의식(衣食)이 풍족하고 집집마다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 잔파된 뒤로는 백골(白骨)이 즐비하고 살아 남은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니 너무나 불쌍하다. 이는 모두 본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응낙하면서도 속으로는 배반하였으며 심지어는 도리어 본진을 의심하고 비밀히 제방(隄防)까지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작년 본진이 이 일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역시 성심을 다하여 공도를 폈는데 끝내 우리를 믿지 않고 참혹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났으니, 이른바 문을 열고 이리를 맞아들인 격이다. 그러나 오랑캐의 본성은 아주 탐욕스러워서 한번 재미를 붙이면 끊기가 어려울 것인데 얼마 전에는 노적(奴賊)과 강화를 하였으니, 결국 온당한 것이 아니다.
이제 듣건대 그대 나라에 아직도 두세 간사한 자가 있어 몰래 권세를 천단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 하니, 다만 염려되는 것은 그 소문이 이웃에 전파되어 틈을 엿보아 헛점을 이용하여 왜적과 오랑캐가 번갈아 침략한다면 어찌할 수 없을까 하는 점이다. 본진은 항상 조선이 2백 년 동안의 충순(忠順)한 이름을 등질까 염려하는 바이니 국왕은 요컨대 평소의 절조(節操)를 더욱 굳게 하여 선인(先人)의 훌륭한 전통을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종전의 일은 잘못됨이 많으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금후부터 과연 본진의 말을 잘 들어 모든 일을 한마음으로 상량(商量)하면 본진도 의당 힘을 다하여 완벽하게 하여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귀관(貴官)이 지난번 수고롭게 힘써준 일에 대하여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인편에 비단 2단(端)을 부친다. 아울러 귀관은 이상 유시한 바를 일일이 국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스스로 맹성(猛省)하여 도모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특별히 유시(諭示)한다."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관향사(管餉使) 종사관(從事官) 맹세형(孟世衡)이 통영(統營)과 시비를 하여 합심하여 협조하지 못하고 소요스런 단서를 야기시켰으며, 또 임의로 차사원(差使員)을 차정(差定)하여 통제사(統制使) 이항(李沆)으로 하여금 치계하여 사직하게 하였으니,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접대소가 아뢰기를,
"차관(差官)의 하인이 이제 고마곡(苦麻谷)으로 출발하려 하는데 이미 경유할 각 고을에 전통(傳通)은 하였지만 놀라 소란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차인에게 말하여 혹 쇄환하더라도 소란을 피우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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