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자
상이 무덕문(武德門)을 지나 혼궁(魂宮)에 나아가 의식에 따라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유성(流星)이 등사성(騰蛇星) 아래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으로 들어갔다.
이경헌(李景憲)을 장령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헌납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3일 병인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사간 조방직(趙邦直), 정언 오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들으니 김원(金垣)의 상소가 조정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시비를 어지럽혔다고 합니다. 원소(原疏)가 내려오지 않아 어떠한 말을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람에게 퍼져 있는 소문에 따라 말하건대 체신(體臣)들과 약간 명의 명류들이 두루 열거되어 그가 지적한 가운데 들어 있고, 심지어는 ‘국사를 망치면서 자기들끼리 붕당을 만들었다.’고 했다 합니다. 이는 겉으로는 곧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은밀하게 사의(私意)를 펴려고 하는 행위이니 그 간계(奸計)가 얼마나 교묘합니까. 예로부터 국사를 담당하는 신하는 혹 권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고, 뜻을 같이하여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은 혹 붕당을 짓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함을 하려는 자가 꼬투리를 잡을 만한 말이 없으면 반드시 이런 것을 문제삼아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상대를 모함하는 계책을 부리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이런 자들을 철저히 미워하고 통절하게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끝내는 그들의 술수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일단 김원의 상소가 들어오자 체신들이 그 지위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자연 군무(軍務)는 폐추되고 종신(從臣)들이 서로 이어 인책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신들은 삼가 간인들이 모함하는 단서가 이로부터 시작될까 걱정스러워 두려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전하께서 호오를 분명하게 보여주시어 뜬소문이 사라지게 하고 선비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면 크게 국가의 원기를 부지시키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김원의 상소는 내용이 허망해서 죄책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로에 해가 있을까 생각되어 우선 놓아 두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주강에 자정전(資政殿) 행랑에서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김원의 상소에서 윤휘(尹暉)를 끌어들인 것을 김류의 죄목으로 삼고 있으니 신이 그 일의 전말을 아뢰겠습니다. 윤휘의 죄과는 이미 대간들이 논핵하였고 세상 사람들도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주만은 쓸모가 있으므로 정묘 호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김류가 찬획사(贊劃使)에 적합한 자를 얻지 못하여 걱정하기에 신이 윤휘를 극력 추천하였는데, 김류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신이 또 어전에서 다시 천거하여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니, 이는 바로 신의 죄입니다. 그런데 김원은 그 탓을 김류에게 뒤집어씌우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김원의 상소는 절대로 자신의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닐 것입니다. 김원은, 윤휘를 찬획사로 삼았으면 의당 비변사에 두어야 할 것인데 전일 초기(草記)를 올리니 상께서는 아직 천천히 하라고 분부하신 것과 나만갑(羅萬甲)이 아파서 과천(果川)에 누워 있는데 상께서 아직 기운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의 간계가 얼마나 교묘합니까. 예로부터 어떤 신하가 국사를 담당하고 있으면, 모함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그가 권세를 독차지하였다고 지목하기도 하고 뜻이 같아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는 붕당이라고 지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야 상대편을 쉽게 모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남의 비난을 받으면 마음이 불안하게 되고 항간에는 의혹스런 소문이 많이 떠돌게 됩니다. 말한 사람을 죄줄 수는 없으나 그 말의 출처는 기어코 캐어 분명하게 가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김원의 말은 허망해서 따질 것이 없을 뿐더러 말한 사람에게 죄를 줄 수도 없으니, 우선은 그대로 놓아두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요즘 매우 기발한 계책이 많으나 상께서는 독단하지 않고 모두 비변사에 내립니다. 그러나 비변사에는 병무(兵務)를 잘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능히 채택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회계(回啓)의 첫머리마다 의례적으로 찬성한다는 말만 늘어놓고는 단(但)자 이하는 모두 이유를 들어 막아버려 시행할 수 없게 하니 그야말로 이 단자는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최명길(崔鳴吉)이 문사(文辭)에는 능하지만 병무에 대한 사항은 어찌 잘 알겠습니까. 공사(公事)에 있어서는 문사로 잘 꾸미므로 겉모양은 그럴 듯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급무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장신(張紳)은 사리를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자입니다.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는 하나 어찌 병무에 대한 일을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사람에게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는 책임을 맡기자 그는 도리어 거의 죽게 된 지친 백성들을 부역시켜 쓸모없는 성을 쌓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만일 의논할 병무가 있으시면 의당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이수일(李守一) 등을 불러 물으셔야 합니다. 이수일은 노장이라서 병무를 잘 아니 그가 체임되어 오거든 바로 비변사 당상에 차임하소서."
하니, 상이 비변사에 이르라고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적을 물리치는 일은 무사만이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진 왜란 때의 일로 말하더라도 고경명(高敬命) 등은 서생으로서 능히 적을 무찔렀습니다. 지금 양서(兩西)083) 를 회복시키는 방책은 오직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으니, 고을을 합병하여 수령을 줄이고 반드시 자상하고 온화한 사람을 골라 보내는 한편, 어사(御史)를 보내어 능부(能否)를 살피게 하여 백성들을 소생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외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겸 이조 판서 김류가 소장을 올리기를,
"김원이 전후에 걸쳐 올린 소장은 모두 신의 죄과를 논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장을 덮어두고 며칠이 지나도록 회답해 주지 않으니, 아마도 사람들은 전하가 공론을 억누르고 언로를 엄하게 막아 사적으로 한 신하만을 보호한다고 할 것입니다. 또 전하가 이 일을 규명할 경우 사실로 드러나면 신을 죄주기 곤란해서일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론이 들끓고 분노가 날로 격앙되면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세상을 면려시킬 수 있는 것은 염치이며, 선비가 몸을 바르게 세울 수 있는 것은 명절(名節)입니다. 신이 무거운 죄를 졌음에도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아간다면 염치와 명절이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다른 유신의 소장을 유사(有司)에게 내려 득실을 따져 신의 죄를 분명히 밝혀 속히 엄한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전에 이미 유시하였다. 모쪼록 고사하지 말고 속히 나와 행공(行公)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9월 4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회답사 신경호(申景琥)는 일행이 물건을 몰래 갖고가 오랑캐 땅에서 매매하는 것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익을 탐하는 길이 한번 열리면 막기 어려우니 파직시키고 다시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김기종(金起宗)·신경원(申景瑗) 등이 치계하였다.
"호차(胡差)가 안주(安州)에 도착하였기에 신들이 관소(館所)로 찾아가 만났더니, 호차가 ‘모장(毛將)084) 이 지금 이곳에 다시 하륙하고 있는데 만일 한 두락의 밭이라도 경작하도록 버려둘 경우, 우리는 결코 화약을 끝까지 지키기 곤란하다. 따라서 귀국은 반드시 병화를 받게 될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는 그들과 싸울 수도 없거니와 또 하륙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닷가에서 한 두락의 밭을 경작하도록 버려둔들 이런 것쯤은 미세한 일인데, 이를 이유로 해서 화약을 어기는 것이 옳겠는가. 그야말로 하늘이 두렵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호인이 모두 성난 얼굴로 ‘경작을 금지시키는 일은 그대들의 조정에서 당연히 흔쾌하게 승락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포정(布政) 총병(摠兵)이 이런 말을 하니 이는 반드시 모장과 사적으로 좋아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일 것이다.’ 하므로, 신들이 답하기를 ‘한 두락의 작은 땅일지라도 모두 우리 나라의 것인데 어찌 한인(漢人)들이 점거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연해 일대는 비어 있는 벌판이니 허다한 한인들이 기회를 엿보아 몰래 경작할 경우,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 있겠는가. 뒷날 이와 같은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호차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또 ‘두 나라가 서로 우호적이어서 머물고 있던 병사들을 철수하려 하니 이는 만세에 무궁한 복이다. 그러나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 나라에서 모장에게 식량을 주었다느니, 혹은 모병(毛兵)들에게 경작을 허락했다느니 하여 귀국에 거짓말을 할 경우, 그 말을 믿겠는가.’ 하자, 두 호차는 ‘머리 위에 하늘이 있는데 어떻게 간인들의 그런 말을 용납하여 두 나라가 더욱 의심하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중남(仲男)이 와서 ‘어젯밤 두 호차들이 서로 「모병들이 하륙하는 것을 이미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혹 해변에서 경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먼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후일 서로 속이지 않겠다는 뜻이니 포정 총병의 말은 진실에서 나온 것 같다.」 했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 두 호차가 찾아와 신들을 보고 ‘어제 포정의 말은 참으로 후환을 깊이 염려하여 가슴속 말을 다하였던 것이니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우리들이 굳이 따지려는 것과 포정이 극력 변명하는 것은 각기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하였습니다."
신흠(申欽)이 군적에 기재된 군인들을 육번(六番)이나 사번(四番)으로 할 것에 대하여 아뢰기를,
"이서(李曙)와 최명길(崔鳴吉)의 의견이 각기 다르나 그들의 말은 모두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하여 깊이 알지 못하여 절충(折衷)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육번으로 하거나 사번으로 하거나 간에 요는 군정(軍情)이 기쁘게 여기고 따라 준 뒤에야 그 법이 오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행했다가도 곧 폐지되는 것인데 이것이 요즘의 보편적인 문제거리입니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행회(行會)하여 어떤 것을 편하게 여기는가를 자상히 물어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우의정이 휴가 중이어서 신 혼자 의논하지 못하겠으니 여러 대신과 병조 판서에게 하문하소서."
하고,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은 아뢰기를,
"사번으로 나누면 사역(事役)이 너무 고되고 육번으로 할 경우에는 수효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나 너무 고된 것보다는 차라리 수효가 부족한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아뢰기를,
"신이 전일 인대(引對)하였을 때 대략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수군의 번차(番次)를 육번이나 사번으로 하는 것 중 어떤 쪽이 편하고 불편한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번마다 있는 기병과 보병의 상번(上番)하는 수효를 계산하여 보니 옛 관례대로 사번으로 할 경우 그 수효가 약간 부족하여도 유지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육번으로 할 경우 부족한 수효가 무려 4천 명이나 되므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이 실로 군정(軍情)을 위로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군정이 기쁘게 여긴다면 상번(上番)의 수효가 부족하더라도 윗사람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아랫사람에게는 편리한 정책이 될 것입니다. 만일 군정이 옛 관례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새 관례를 싫어할 경우 10일이라는 날짜를 감하여 주더라도 반드시 크게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육군으로서 수군의 역사를 하는 사람은 싫어하여 꺼리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마땅히 만나보고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신흠(申欽)을 영의정으로, 오윤겸(吳允謙)을 좌의정으로, 김류(金瑬)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장단(長湍) 사람 성복흥(成復興)이 큰 소 2마리, 술 1백 동이, 간장 1항아리, 콩 몇 섬을 군영에 바쳤으며, 장단과 적성(積城) 등에 사는 사대부 10여 명이 곡식과 소 등으로 군졸들을 먹였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 윤지경(尹知敬)이 포상의 명이 너무 지연되었다고 아뢰자, 병조가 복계(覆啓)하기를,
"가설직(加設職)에 대한 하비(下批)는 벌써 진중으로 보내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성복흥의 경우에 있어서는 납속 당상(納粟堂上)의 체문(帖文)을 받은 적이 있으니 다시 당상관의 실직(實職)을 주면 과중하게 될 것 같고 당하관의 직을 주면 사체에 타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굳이 주어야 한다면 갑자년에 호종 공신에게 내렸던 관례에 따라 당상관의 실직을 주도록 하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성복흥은 당상관 실직에 제수하라. 미처 포상하지 못하였던 자들에 대해서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5일 무진
영의정 신흠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우의정 김류와 함께 사복시 제조로 있습니다. 신들은 다 대신이어서 해조가 포폄함에 있어 사체에 방해됨이 있을 것이니 개체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을 사복시 제조로 삼았던 것은 본래 관례가 있으니 고사하지 말라."
하였다. 또 전시(殿試) 독권관(讀券官)을 사직하고자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질병 외에도 또 급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전에 신이 독권관이 되었을 때에 무거운 대간의 논박을 받았으며, 헌부의 계사에도 ‘독권관은 이제부터는 마음이 공정하고 안목이 밝은 사람을 의차(擬差)하여 상의 윤허를 받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찌 이 직임을 두 번이나 맡아 청명한 세상의 지극히 공정한 시취(試取)로 하여금 폐조(廢朝)의 하자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해 헌부가 아뢰었던 것은 경을 지적한 것이 아니니 고사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요즈음은 제대로 학문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문관이라는 자 중에서도 간혹 《소학(小學)》의 대문마저 알지 못하는 이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제대로 학문을 한 선비를 동궁(東宮)에 진강하는 관원으로 삼아 예경(禮經)을 논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요, 한갓 장구(章句)만 익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요즘 과장(科場)에서 사장(辭章)은 잘 짓는 자는 간혹 있으나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사람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사람이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데 간혹 남을 해치고 사물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 있으니,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이들은 마음이 간특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중에는 글도 잘하고 재주도 있으면서 끝내 간특한 짓을 하니, 어째서 그런가?"
하니,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글을 잘한다 하여 반드시 다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덕보다 재주가 넘치는 자는 도리어 소인이 됩니다. 오직 학문에 종사하면서 다시 문화(文華)를 닦아가는 자가 바로 군자입니다."
하였다.
9월 6일 기사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하자가 있는 사람을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곳에 두면 안 됩니다. 이로 인하여 조정이 경시될까 염려스러우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군기시 정(軍器寺正) 이기조(李基祚)가 소장을 올려 자신의 이름이 김원(金垣)의 상소 가운데에 들어 있다 하여 본직 및 시강원 겸관·가례 도감 도청에서 체직시켜 달라고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장유(張維)를 발탁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 전에 상이 참판 가운데에서 적합한 인물을 의망(擬望)하라 명하였는데, 끝내 장유에게 제수하였다.
9월 7일 경오
상이 하교하기를,
"우의정 김류가 첫번째 올렸던 사장(辭狀)은 되돌려 보내고 사관을 보내어 속히 출사하여 내가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유시(諭示)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우의정 김류의 사장을 되돌려 보내라는 명은 실로 속히 출사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장을 되돌려 보내는 것은 상례가 아닌데 더구나 대신을 예우함에는 체모가 자별한 것이니, 출사를 간곡히 권유함에 있어서는 갖추어야 할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장을 되돌려 보내는 것은 아마도 미안한 데에 관계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가 참으로 옳다. 사장을 되돌려 보내지 말라."
하였다.
9월 9일 임신
유의(襦衣) 5백 벌과 낙폭지(落幅紙) 4백 장을 서쪽 변방 군졸들에게 보냈다. 이는 해마다 시행하여 온 관례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요즘 머물고 있던 적들이 모두 철수하려 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우리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야 하는데, 병민(兵民)을 조발하여 들여보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왜냐하면 처자들을 두고 갈 경우 기한(飢寒)에도 서로 구제하지 못하고 사생(死生)에도 서로 알릴 수 없으니, 인정과 사리에 비추어보면 사세가 처자들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들여보내고 나서 그들의 처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급료를 주지 않으면 이는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객병(客兵) 수천 명을 들여 보내는 것보다는 토인(土人) 몇 백 명을 모으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들여보낸 뒤에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을 뿐 아니라 겨우 모였던 백성들이 다시 흩어지는 상황이 될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정충신(鄭忠信)도 이런 뜻으로 치계하였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두 신하의 장계에 따라 군량과 각도에 쌓아둔 피곡(皮穀)을 덜어내어 그들에게 알맞게 나누어 줌으로써 본업을 도로 찾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일 상소한 유생을 불러 상소를 읽혀 보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김원의 상소를 보건대 첫머리에는 사람마다 다 알고 있는 거리에 떠도는 말들이었으며, 그 중간에는 시정(時政)의 잘못된 사실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시비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저의를 따져보면 국사를 맡고 있는 대신들과 일시의 명류들을 동요하고 모함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그 마음이 너무도 흉칙합니다. 이런 점은 성상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인데, 그를 불러 물어보는 것은 사체에 손상될 뿐더러 반드시 뒤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다만 호오를 분명하게 보여주셔야 함은 물론 대신들을 공경하고 군신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어 각기 직분을 다하게 함으로써 음험하고 간사한 자들로 하여금 간계를 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김원의 상소 같은 것은 햇볕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니 그를 불러 물어서 그 말의 잘못을 설파할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이에 구구한 저희 심정을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침에 명을 내린 일인데 종일토록 덮어두었다가 이제서야 아뢰고 있으니, 매우 해괴하다. 선왕조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으니 더 소란스럽게 떠들지 말라."
하고, 이어서 이 일을 바로 거행하지 않은 승지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드디어 김원을 불렀으나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 28일에 김원이 나타나자 정원이 이 사실을 알리니, 상이 다른 사람의 상소를 읽혀 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김원은 구두도 떼지 못하였다. 또 논제(論題)를 내어 글을 짓도록 하였으나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문장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원의 행위는 너무도 해괴하다. 이는 반드시 큰 간인이 이 자를 은밀하게 교사하여 자신들의 흉계를 펴려고 한 것일 것이다."
하고, 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사주한 자를 기어코 밝히도록 명하였다. 이에 금부가 김원을 심문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본래 김설(金卨)과 친하였습니다. 어느날 김설을 찾아가 소초(疏草)를 보이자 김설이 모두 뜯어고쳐 주었으니, 이는 거의 김설이 윤색한 글입니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모든 여론이 김설의 행위라고 의심하니, 김설이 화를 당할까 걱정하여 재소(再疏)에서는 아울러 김설의 이름을 열거하였습니다. 서로 의논해서 지었으나 실은 차작(借作)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금부가 또 김설을 잡아다 문초하니 사실이라고 자복하였다. 금부가 김원과 김설 등의 죄상에 대해 장 일백 유 삼천리에 3년 동안 역사(役事)시킬 것으로 조율(照律)하였다. 상이 ‘김원은 공(功)이 있으니 1등을 감형하고 김설은 계목(啓目)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온성(穩城)에 유배하였으나 그뒤 남해(南海)로 이배되었다.
김설은 김덕함(金德諴)의 아들로서 청반(淸班)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명성을 드날렸다. 그러나 유독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은 박황(朴潢) 등보다 뒤졌기 때문에 김설이 은밀하게 김원을 교사하여 박황 등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전조의 의망을 먼저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간계가 드러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1일 갑술
간원이 아뢰기를,
"제로(諸路)의 역참(驛站)이 날로 퇴락되어 가는데 난리를 겪은 뒤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간신히 살아 남은 역졸들이 어떻게 유지해 갈 수 없으니 휴가 가는 관원에게는 역참의 말을 주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신국(金藎國)은 모문룡(毛文龍)의 군량을 매년 거두어 들일 수 없다 하고, 신흠(申欽)은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서쪽 변방에 군량을 잇댈 계책이 전혀 없습니다. 모문룡의 군량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알고 있으므로 예전처럼 거두어 들여 수용(需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둔전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넓게 설치하지 않을 경우 군졸들이 그 식량을 운반해야 하니 실로 좋은 계책이 못 됩니다. 양서(兩西)085) 의 감사에게 둔전 설치에 대하여 계획을 세워 알리고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병 때문에 체직하기 위해 상소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돌봐 주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장유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2일 을해
의주 부윤(義州府尹) 엄황(嚴愰)이 치계하였다.
"호장(胡將) 탁도리(卓道里)가 종호(從胡)들을 데리고 일시에 돌아갔기에 신이 다시 본주(本州)로 돌아왔습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안주성(安州城)을 수축하는 것은 실로 보장(保障)하는 계책이 되기는 하나 본주는 혹독하게 병화를 입었으며 군졸들도 단약하니, 금년 겨울은 병사로 하여금 그대로 들어가 지키게 하소서. 다만, 생각건대 병영에 소속된 사람들이 고토(故土)를 편히 여겨 딴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중난하게 여길 형세가 반드시 오게 될까 염려됩니다. 이귀(李貴)의 말이 견해가 없지 않으니, 이에 절대로 본영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하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 신경진(申景禛)·김신국·구굉(具宏)과 도청(都廳) 이경헌(李景憲)에게는 각기 1급씩 가자하고, 제조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과 도청 정세구(鄭世矩)에게는 각기 숙마(熟馬) 1필, 오윤겸(吳允謙)·정홍명(鄭弘溟)·이윤배(李允培)에게는 각기 아마(兒馬) 1필을 주고, 낭청(郞廳) 김광한(金光漢)·송시길(宋時吉)에게는 직급을 올려 서용하도록 명하고, 여타 사람에게는 차등있게 시상(施賞)하고 화원(畵員)과 서원(書員) 이하에게는 미포(米布)를 헤아려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을 이조 참판으로,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김상헌(金尙憲)을 부제학으로, 이경헌(李景憲)을 집의로,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이경여(李敬輿)를 충청도 관찰사로, 오숙(吳䎘)을 좌승지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체신(體臣)이 서쪽 변방을 순찰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가 중에 있습니다. 현재 적병들이 이미 철수하였으니 변경을 수습하는 일이 매우 급합니다. 그러나 우상만이 출사하고 좌상은 휴가중이므로 삼공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체신이 밖으로 나가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김기종(金起宗)이 체찰 부사를 겸하고 있으니 그에게 일의 형편에 따라 요량하여 계획하도록 하는 한편, 체신은 조정에 있으면서 품단(稟斷)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회답사 신경호(申景琥)는 가자하고, 군관 이형장(李馨長) 등 7인은 6품으로 승진시키고, 역관 권인록(權仁祿)은 본 아문으로 옮겨 승직시키도록 하라."
9월 13일 병자
우의정 김류는 김원의 상소에서 자신이 비난을 입었다 하여 병을 핑계하고 체직하고자 하였으나, 상이 승지를 보내어 간곡히 하유하였다.
겸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4일 정축
헌부가 아뢰기를,
"회답사 신경호(申景琥)는 일행이 오랑캐의 땅에서 몰래 매매하는 것을 단속하지 못하여 전에 없었던 폐단을 만들어 놓았으니 포상하라는 명을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경호의 공로에 대한 포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현재 적을 막을 수 있는 전구(戰具)는 화기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조총을 만들기 위해 각도에다 염초(焰硝)를 구워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사용할 납탄을 미처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함경도 영흥(永興) 지방에 납이 나는 곳이 있는데 채굴하기도 어렵지 않고 품질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본부로 하여금 1국을 별도로 설치하여 많은 수량을 채굴해서 쓸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사 김상용이 아뢰기를,
"요즘 적이 물러갔다 하여 기뻐하기만 하고 다시 경계하며 조심하는 마음을 두지 않으니 뒷날의 일이 더욱 염려됩니다.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난리를 겪은 뒤 민가들이 비어 있으니, 토민들을 안집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만일 이 일을 잘하지 못하여 일단 흩어져 버린 뒤에는 다시 모으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아둔 곡식은 이미 떨어졌고 옮겨올 곡식도 없는데 적중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도로에 쓰러진 채 알몸으로 굶주리고 있어 장차 얼어 죽을 형편이라고 하니, 이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쓰릴 뿐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속바치게 해 주고 포(布)를 거두어 구제하는 방도로 삼자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구차하기는 하나 백성을 위하는 방법이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옛날부터 백성의 원성을 산 것은 그 단서가 여러 가지이다. 사람을 잘못 쓰고 정사를 잘못하고 부역이 지나치게 번다한 것이 모두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는 원인이 된다. 오늘날인들 어찌 이런 유의 일이 없겠는가."
하니,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지난 갑자년086) 에는 변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금년에는 오랑캐들의 전란이 일어나 하루도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의 거조가 잘못되면 신료들이 의당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도 삼가서 각기 직분을 다하면 백성들이 알찬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나 한몸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니, 윤지경이 아뢰기를,
"간언을 듣는 도리란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데 있는데 상께서는 대간들의 의논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대간을 설치하여 간언의 책임을 맡긴 것이 어찌 목적이 없었겠습니까. 대간들을 중하게 여겨 체면을 높여 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대간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논한 일들 중에 충실치 못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 중난하게 여겼던 것이니, 이는 신중을 기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길(李尙吉)이 아뢰기를,
"수령들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온정을 베풀게 하여 상의 덕의를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감복하게 하면, 자연 국사가 다스려지고 외적도 막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매우 훌륭하다. 해조는 수령을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5일 무인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본래 경륜의 재주가 없는 데다가 뜻도 모르고 글줄만 약간 배웠습니다. 중년(中年)부터는 세상사에 마음이 시달려 옛날에 배웠던 것마저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 지나치게 상의 은혜를 받아 문형(文衡)이 되긴 했습니다만 감당하지 못할 직함을 헛되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분에 넘치는 직함을 내리셨는데, 전례에 비추어 보아도 상신으로서 겸직한 적이 없습니다. 신흠(申欽)의 경우도 그러한 관례의 한 실례이니 속히 체면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류는 상신이 되면서부터 문형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상이 선왕조 때에도 상신으로서 이 직임을 겸한 규례가 있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고상(故相) 유성룡(柳成龍)이 선조조에 우의정으로서 이 직함을 겸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유(張維)가 원접사가 되자 김류가 조정에 들어가 차자를 올려 굳게 사양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9월 16일 기묘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였다.
완평군(完平君) 이원익(李元翼)이 소장을 올려 치사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은 덕망이 높은 원로로서 이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그야말로 나라의 안녕과 위태로움이 경의 한몸에 달렸으니 진퇴를 경솔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옛날 경은 여러 차례 ‘나랏일이 조금 안정되면 물러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굳게 믿고 있었는데 경이 이제 다른 일을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갑자기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는 한편 ‘어느 때나 태평한 세상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내 또한 너무 섭섭하다. 그리고 사직도 하지 않고 멋대로 가는 것은 예의에도 잘못된 듯하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나의 참뜻을 깊이 헤아려 병을 조리하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흥경원(興慶園) 천장(遷葬) 때 배행(陪行)한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승지 김상(金尙), 대장 김자점(金自點)·유몽룡(劉夢龍), 감사 남이웅(南以雄)은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하사하고, 위장 이흥국(李興國), 차사원(差使員) 최유해(崔有海) 등은 아마(兒馬) 1필씩을 하사하고,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김상용(金尙容),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이정구, 표석 서사관(標石書寫官) 신익성(申翊聖), 행장 제술관(行狀製述官) 이식(李植)에게는 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종사관 양수진(楊秀津), 초관(哨官) 문건기(文建基), 봉백관(奉帛官) 심경구(沈景龜)·강세웅(姜世雄), 예모관(禮貌官) 장서린(張瑞麟)·여문창(呂文昌), 배설관(排設官) 이자(李澬)·이립(李岦)·유면증(兪勉曾) 등에게는 모두 한 자급씩 가자하되 그 중에 자궁(資窮)된 자는 대가(代加)하게 하였다.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오준(吳竣), 현궁 봉표관(玄宮封標官) 김여추(金汝秋)에게는 한 자급 가자해 주고, 김포 현령 최규(崔珪)는 전후 예장 때 공로가 많다는 것으로 한 자급씩 가자해 주고, 여재관(舁榟官) 이의제(李宜弟)·배명순(裵命純), 식재관(拭梓官) 조극선(趙克善)은 모두 직급을 올려서 서용하게 하고, 내관 박충립(朴忠立)·이대춘(李大春)은 부장궁(不粧弓) 1장을 주되 이미 상을 주었던 자에게는 중복해서 주지 말라 명하였다.
9월 17일 경진
전에 경연관 김상용이 남쪽 지방 미곡을 서쪽 방면으로 옮기는 한편 죄인을 속바치게 하고 거둔 포목을 서쪽 백성들을 구제하는 비용에 보태야 한다고 아뢰었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병화를 입지 않은 고을들로 하여금 미리 남은 곡식을 계속해서 옮기도록 하겠으나, 죄인을 속바치게 하고 포목을 거두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양호(兩湖)087) 의 미곡은 얼음이 풀린 뒤에 들여보내어 구원하게 하라"
하였다.
종친부가 아뢰기를,
"일찍이 폐조(廢朝) 때에 석(石)·터[基]·철(鐵) 등을 바치고 받았던 당상직을 반정 초기에 모두 자급을 낮추었습니다. 갑자년088) 에 이르러 호종했던 자에게는 낮추었던 자급을 다시 돌려주었으나 유독 종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풍릉수 이혼(豐陵守混) 등이 억울하다고 정장(呈狀)하였는데 더구나 순평군 이선봉(順平君善鳳)에게도 되돌려 준 규례가 있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상고해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병조에 문의하니 ‘당초 대신들이 논의해서 결정한 뒤 여론이 타당치 못한 일이라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사리(事理)상으로 보면 폐조 때 물품을 바치고 받은 상가(賞加)는 매우 외람되고 추잡스런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년에 연신(筵臣)들이 아뢴 것에 대해 물의가 지금까지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잘못된 그 규례를 답습하여 또 다시 돌려준다면 이는 더욱 요행을 바라는 문을 여는 것이니 관청의 법도가 날이 갈수록 문란해질 것입니다. 전일 선봉에게 되돌려 주었던 것은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더욱 이를 근거해서 규례로 삼을 수는 없으니, 이 일은 거행하기 곤란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9월 18일 신사
상이 하교하였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봉수(鄭鳳壽)는 충의가 매우 뛰어나니 실로 간성(干城)의 장수이다. 내가 중하게 믿고 있었는데 요즘 불행하게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내가 잠시라도 잊을 수 없으니 해조는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돌봐주고 약을 넉넉히 보내도록 하라."
공조 판서 이준(李埈)이 소장을 올리기를,
"시운이 바야흐로 비색하여 여론이 매우 답답해 하니 간언은 다 채용하고 선비는 모두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대간들이 간언을 올리면 물리치고 강연(講筵)은 설치만 해 놓고서 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전하의 마음에 혹시나 자신만을 어질다 여겨 남을 무시하거나 안정되었다고 믿고 조금 나태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임금의 위엄은 우레와 같기 때문에 신하로서 능히 곧은 말을 다하여 이 우레와 같은 위엄을 범하는 자는 그야말로 몇 천 명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합니다. 옛날 성왕(聖王)들은 이 한 사람의 의기를 높이 장려하여 나약에 젖은 사람들을 격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간신들을 예우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지난 혼조(昏朝) 때에는 언로가 통하지 않아 그 폐단이 끝내는 모든 법도가 무너지는 데 이르고 말았으니, 당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 언로가 막혔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도 그 폐단이 전대로 남아 있어 사부(士夫)들 사이에는 말없이 따르는 것을 어진 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며칠 전 다행히도 한두 명의 간신들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충성을 다하여 간언을 하였습니다. 그 간언이 지나쳤다 하더라도 다른 뜻은 없었는데 그 말을 꺾어버리고 간신을 오래도록 유배시키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성세(盛世)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곧은 선비를 가상히 여겨 장려하고 충절이 있는 자를 보호하여 전하의 이목이 막히지 않게 하고 당폐(堂陛)에 절도가 있게 하면 국가에 매우 다행스런 일이겠습니다.
외적을 막을 수 있는 계책은 전(戰)·수(守)·화(和)에 불과한데 고수(固守)가 이 세가지의 요점이 됩니다. 국내를 다스리는 계책은 민(民)·병(兵)·재(財)에 불과한데 절용(節用)이 이 세가지의 근본입니다. 만일 고수와 절용을 시행하려 한다면 또 인재를 얻어 책임을 맡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이 이 두어 가지 일에 대하여 하나의 의견이 있으나 적절한 말들이 아니니, 어찌 감히 성상 앞에 낱낱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분발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식량이 넉넉하도록 계책을 서둘러 강구해야 할 것이며,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疏章)을 보니 진술한 내용이 모두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다. 그대의 국가를 위한 충성을 내가 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가슴에 새겨 채용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9월 19일 임오
이날은 서평 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장례일이기 때문에 중전이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도감 낭청(都監郞廳) 김여추(金汝秋)는 5품의 음관(蔭官)으로서 갑자기 당상관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산릉 봉표관(山陵封標官)의 승급을 인용하여 전례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김포 현령(金浦縣令) 최규(崔珪)는 수토관(守土官)으로서 작은 공로가 있었을 뿐입니다. 오준(吳竣) 역시 서사관(書寫官)인데 자급을 올리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아울러 개정하소서."
하고, 여러날 논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 20일 계미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이덕형(李德泂)을 형조 판서로, 정홍명(鄭弘溟)을 홍문관 응교로, 이행원(李行遠)을 교리로,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좌랑으로, 이소한(李昭漢)을 부수찬으로 삼고, 서산 군수(瑞山郡守) 홍영(洪霙)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9월 21일 갑신
간원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능성군 구굉(具宏), 행 호군 오준은 지난해 장례 때에 도감 제조이거나 서사관으로서 당시 이미 가자되었는데, 금년 천장(遷葬) 때에도 전의 직임에 그대로 있으면서 또 가자되었습니다. 1품 숭자(崇資)와 2품 중가(重加)는 덕 있는 자에게 내리는 벼슬인데 이제 한 가지 일로 인해 중복해서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나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원소(園所)와 산릉(山陵)은 차이가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이 지나치게 포상하였으므로 물의가 그르다고 합니다. 서산 군수 홍영은 도적을 잡은 작은 공임에도 불구하고 가계(加階)까지 하였으니, 이것까지 아울러 개정하소서.
찬획사 윤휘(尹暉)는 행실이 보잘것 없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자이어서 당초 이 직에 제수되면서부터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찰사의 일을 대행케 하여 서쪽 지방을 순찰하게 하려 하니 그 책임이 더욱 무겁습니다. 큰 난리를 겪고 난 이때에 인심을 수습하고 군무를 정비할 책임을 어찌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개차하여 대행할 자를 다시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22일 을유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만성(灣城)이 처음 함락될 때에 전 권관 최몽직(崔夢稷)과 본주의 출신 김태암(金泰巖)·김몽송(金夢松) 등은 뛰어난 용기가 있었던 자들인데 충성을 다하여 적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었으며, 또 본주의 출신 한염(韓廉)의 처 홍씨(洪氏)와 한서(韓恕)의 처 백씨(白氏)는 순결을 지키다 죽었습니다."
9월 24일 정해
상이 하교하기를,
"나는 항상 영부사(領府事)는 나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여 옛마음을 변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국가와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니 너무 뜻밖이다. 이는 내가 너무 어리석어 보좌할 수 없기 때문에 떠나가는 것이다. 조용히 생각하여 보건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실로 깊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초교(草敎)를 만들되 거기에 도타이 유시하는 뜻을 더하여 기어코 조정에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승지를 금천(衿川)에 있는 이원익(李元翼)의 집으로 보냈으나 원익이 또 차자를 올려 노병 때문에 사직한다고 하자,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너무 섭섭하다. 경은 마음을 속히 바꾸어 조정에 들어와 나의 진실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일전에 외람스럽게도 사람이 모자란 탓으로 강화도(江華島)를 경리(經理)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지금은 국사가 날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신의 생각에는 참으로 한 가지라도 능한 점을 갖고 있는 자라면 지난날의 하자를 씻어주고 서용하여야 한다고 여겨서 당돌하게 윤휘를 찬획사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옛사람들이 말하였던 ‘자만하는 공신보다는 허물이 있더라도 유능한 자를 기용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지, 절대로 윤휘의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리하여 윤휘와 같이 일한 지 8개월이 지났습니다. 윤휘가 이제 서쪽 지방으로 떠나려 하자 죄과가 있는 사람을 썼다고 하여 대간의 논박이 갑자기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전하는 신의 죄를 속히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경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험한 곳을 의거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적을 물리치는 일이 오늘날에 있어 제일의 급무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지 않고 무고한 패잔병을 시켜 식량과 병기와 지킬 병사도 없는 외로운 성을 쌓아 세차게 밀려오는 적을 막으려 하니, 이를 ‘어려운 시기에 쓸모없는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조정이 적을 막고 근본을 튼튼히 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모두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채택하여 시행하지 않으면서, 유독 안주성(安州城)과 황주성(黃州城)에 대해서는 물력이 얼마나 드는가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금년내에 완성하도록 독촉하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도군(逃軍)이란 장수는 물러서지 않고 적진으로 나아가는데 군졸이 먼저 장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궤졸(潰卒)이란 장수가 먼저 도망치고 나서 군졸도 따라서 무너져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가 먼저 도망치면 장수만을 죄주고 궤졸은 문책하지 않는 것이 군법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평양과 황주의 경우 장수가 먼저 도망쳤으니 궤졸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급히 안주성과 황주성의 부역을 중지시켜 한편으로는 인심을 수습하고 한편으로는 인명을 구제하소서.
금일 강화하는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생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몇 년 동안 기한을 정해 두고서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부역을 모두 감해 주어 양서(兩西)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 뒤에야 그곳에서 살던 자들은 안정할 수가 있고 피난갔던 자들도 즐거이 옛터로 돌아올 것은 물론 몇 년 안 되어 안전한 지방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근본이고 성을 쌓는 것은 말단인 것입니다. 이제 온 도의 힘을 합하여 오로지 안주성만을 지킨다 하더라도 병량과 병기는 절대로 전일만 못할 것입니다. 병량과 병기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성패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굳게 지킬 수 있다 하더라도 기전(畿甸)에 있는 성들은 어떻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적이 여러 곳의 백성들을 멋대로 죽인다면 남한 산성을 보존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강도(江都)도 보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은 벌써 수축이 끝났으니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수어장(守禦將)으로 삼고 그 고을 병민들을 다 주어 이 성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여야 합니다. 만일 한 고을의 병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면 난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경상도 병사가 거느리고 있는 병졸들을 떼서 주는 한편, 병사를 수성 대장으로 삼아 험한 곳을 의거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강도를 응원하는 계책을 삼는다면 오히려 강탄(江灘)을 쓸모없이 지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있는 아홉 가지의 장점과 우리의 아홉 가지 단점을 비교해 보면 결코 저들과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첫째 험한 곳을 의거하고 들판의 곡식을 치우는 것, 둘째 말 위에서 삼혈총(三穴銃)을 사용하는 것, 셋째 도끼 등을 들고 밤에 습격하는 것 등의 세 가지 계책을 얻었을 뿐입니다. 이를 군무를 잘 아는 노장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이 세 가지의 계책이 아니면 능히 적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은 굳게 믿고 조목별로 올렸었는데, 비변사에서 ‘험한 곳을 의거하는 일은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삼혈총은 화력이 세지 못하여 거리가 조금만 멀어도 갑옷을 뚫을 수 없고, 우리 나라 말들은 훈련이 되지 않아 쉽게 놀라 달아나려고 하므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회계(回啓)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병법을 모르고 그저 남의 말만 막으려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조종조에서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설치할 때에 어찌 무반들로만 수령을 삼았겠습니까. 문관과 음관으로 차정한다 하더라도 각 고을에 중군 대장(中軍代將)이 있으니 이 중군 대장을 무인으로 차정한다면 병졸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갈 때에는 각도의 병사가 통솔하고 싸우러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병졸들을 정선하지 못한 것, 병기를 정비하지 못한 것, 군량을 넉넉히 잇대지 못한 것, 훈련을 잘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수령을 문책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령이 무반이 아니더라도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에 대한 책임이 다 자신에 달려있기 때문에 간혹 국사에는 소홀히 하는 자일지라도 군무의 일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군율을 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주 산성(幸州山城)은 권율(權慄)이 목책을 쳐서 능히 왜구들을 막아 승리했던 곳입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수어장을 삼아 본 고을의 병민들을 이끌고 방어하게 하소서. 물론 한 고을 백성들의 힘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만, 만일 급한 일이 생기면 강을 지키는 삼남(三南)의 병사를 나누어주고 장수를 정해서 이 성에 더 들여보내어 강도(江都)를 응원하는 계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곤란한 일이 없을 것인데, 도리어 ‘서서히 사세를 살펴가면서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겠다.’ 하실 수 있습니까. 신이 변경의 일에 대하여 조목별로 진달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닌데 하나도 시행되고 있지 않으니, 민망스럽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9월 25일 무자
상이 하교하였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봉수(鄭鳳壽)는 여러 성들이 이미 함락되고 인심도 흩어지고 난 때를 당해서 의병을 규합하여 외로운 성을 지켰으며,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은 적이 밀려온다는 소식이 매우 급하여 사람들이 싸우려는 뜻이 없는 때를 당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서 용감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적과 싸웠다. 그들의 충용(忠勇)과 의열(義烈)은 모두 예전에도 드물었던 일이니 참으로 가상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모두 신병이 있는데 이제 날씨가 점점 추워져 더 아프게 될 것이니 매우 염려된다. 해조는 겨울옷을 만들 수 있는 옷감을 넉넉히 보내도록 하라. 또 감사 김기종(金起宗),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 의병장 지득남(智得男)·김여기(金勵己) 등도 공로가 있으니 이들에게도 아울러 옷감을 보내어 주어 내가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윤휘(尹暉)를 거론한 것은 서쪽 변경의 일이 너무 중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상신이 자신의 허물이라 인책하여 차자를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이 망령되게 논란한 죄가 크니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수현 등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윤휘에게 죄과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체신이 천용(薦用)한 것은 유능하면 허물이 있는 자일지라도 쓸 수 있다는 뜻에서 나왔으나 서쪽 변경의 일을 대임함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만족하게 여기지 않아 참으로 의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금도 망론한 잘못이 없으니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광성(鄭廣成)을 도승지로, 김지수(金地粹)를 장령으로, 임광(任絖)을 정언으로, 이소한(李昭漢)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상이 영의정 신흠(申欽), 우의정 김류(金瑬),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군정청 당상 이서(李曙)·최명길(崔鳴吉), 승지 김시국(金蓍國)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군적(軍籍)에 대한 일을 다시 의논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는가?"
하니, 신흠이 아뢰기를,
"수군을 번(番)을 나누는 일에 대하여는 전일 의논을 드렸으나 그 이해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각도에 물어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명길은 ‘봉족(奉足)을 정해 주는 것이 쉽지 않으니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이서는 ‘봉족을 채워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군정(軍情)이 반드시 예전대로 하는 것을 편하게 여길 것이라고 봅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봉족을 준다고 하더라도 오래 머물게 되면 고생스럽다고 원망할 것이니 단정(單丁)을 주더라도 속히 교대하는 것을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쪽의 말들이 다 옳아서 선택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없겠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봉족이 없더라도 1년에 1개월씩 입번(立番)하게 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서와 최명길이 마음을 다하여 마련하였으나 소신은 이해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대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수군들에 대하여 전대로 하게 한다면 병영(兵營)에 있는 군졸들의 수효에 대해서도 의논해서 정해야 합니다."
하고, 이서는 아뢰기를,
"만일 단정(單丁)으로 정하여 준하면 노약자들을 처리하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전대로 시행하다가 폐단이 생기면 점차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경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전후에 걸쳐 경장(更張)한 일이 매우 많았으나 끝내는 결론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당연히 경장해야 할 일이라도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기면 옛 관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나머지 절목에 있어서는 군적청에서 서서히 의정(議定)하겠지만 서쪽에 있던 적들이 물러갔으니 선후책이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이는 양서(兩西) 사이에 대장 한 사람을 차정해서 보내고 각도의 속오군(束伍軍)을 더 들여보내어 주둔할 곳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군무는 당사자에게 맡겨야 하니 이제 두 도의 관찰사에게 위임하여 그 뒷일을 마무리 짓도록 책임지우고, 잘못된 조치에 대해서만 조정에서 때때로 헤아려 지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는 국가에서 이미 그러한 임무를 맡긴 자들이다. 서방의 일에 대해서는 그들이 소신껏 처리해야 할 것이요 별도의 지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뭇 의논들이 모두 서로(西路)에 대장을 두어야 한다느니 혹은 감사에게 전임해야 한다느니 하고 말한다. 그러나 장수에 있어서만은 정충신(鄭忠信)을 부원수로 임명하였으니, 적합한 장수가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감사만은 다 적합한 인물들이지만 믿을 만한 군졸들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인데 군량을 모으는 일이 더욱 급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황해도에 있는 여러 궁가(宮家)들의 갈대밭을 혁파하면 군량을 모으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영구히 혁파한다고 허락할 수는 없더라도 몇 년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고 허락하면 군국(軍國)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언관들이 같대밭의 일에 대하여 여러날 논란하였음에도 허락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신들도 그러한 줄을 알고 있지만 연한을 두고라도 허락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요즘 오신남(吳信男)의 말을 듣건대, 노적(奴賊)이 우리 나라에 다시 차인(差人)을 보내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우리측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저들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오고 싶은 뜻이 있다면 어찌 우리측에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러나 정탐도 겸하여 보내는 것이 무방하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해도 감사 장신(張紳)은 나이가 어려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대신들은 어떻다고 소문을 들었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위임받은 뒤 그 직임을 잘 수행한다고 하니 적합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장의 말들은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고, 이정구(李廷龜)는 아뢰기를,
"쓸 만한 것을 골라서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에서도 전마(戰馬)에 합당한 것을 골라 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6일 기축
영의정 신흠이 차자를 올려 병 때문에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9월 27일 경인
상이 하교하였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 위에 놓여 있는 사대석(莎臺石)이 넘어졌고 잔디풀이 말라 죽었다고 하니 해사는 좋은 날을 골라 수축하라. 그리고 제기(祭器)는 사옹원(司饔院)으로 하여금 보내도록 하라."
훈련 도감에서 편곤군(鞭棍軍) 3백 44인을 신설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용감하고 건장한 자를 골라 먼저 갑옷과 투구를 주었다.
9월 28일 신묘
헌부가 아뢰기를,
"요즘 작상(爵賞)의 외람됨이 날로 더해 가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매우 한심해 합니다. 폐조(廢朝) 때에 종실들이 물품을 바쳤다고 가자(加資)했다가 강자(降資)한 자들에 대하여 지난번 변란 때 호종(扈從)했던 것을 이유로 모두 되돌려주려 하자 해조가 사리에 의거하여 막았습니다. 그러나 상께서는 따르지 않고 도리어 의논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체로 물품을 바쳤다고 하여 상가(賞加)하는 것은 당초부터 외람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잘못된 규례를 따라 다시 그 가자를 회복시켜 준다면 요행을 바라는 문이 크게 열리게 될 뿐 아니라 관청의 법도도 문란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로부터 젖어 온 더러운 풍습을 씻어버릴 수가 없게 되니 종신(宗臣)들에게 강자했던 것을 돌려준다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번의 상가는 중복되는 것 같으나 모두 옛 규례가 있다. 강자를 돌려주는 것도 전일의 규례가 있으니 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튿날 대간들이 계속해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인거(李仁居)의 역옥이 일어난 탓으로 그만 정계(停啓)하였다.
9월 29일 임진
상이 빈청(賓廳)에 하교하기를,
"국혼을 승지 강석기(姜碩期)의 집과 정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삼가 성교를 받들건대 진실로 신민들의 소망에 흡족하니 실로 종묘와 사직에 무궁한 복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이달 28일 야간에 7, 8인이나 되는 도적들이 칼을 들고 거침없이 전의감(典醫監)으로 들어오면서 수직하던 군졸을 칼로 찔러 곧 절명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너무 해괴하니 좌우 포도 대장들을 추고하고, 그들에게 추적하여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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