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유
약방이 문안하니, 답하였다.
"종기의 증후가 날로 심해가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의원(醫員)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니, 부기(浮氣)가 점점 심하였다. 의관(醫官) 유후성(柳後聖)이 아뢰기를,
"독기(毒氣)가 안포(眼胞)에 모여 있으니 의당 산침(散鍼)을 놓아서 배설시켜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저녁에 또 산침을 맞았다.
5월 2일 임술
전남도 순창군(淳昌郡)의 민가에서 병아리를 깠는데, 앞뒤로 다리가 네 개가 달렸고 꼬리 부분에 또 두 개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5월 3일 계해
원만석(元萬石)·오정원(吳挺垣)을 승지로 삼았다.
상의 병이 위독하여 편전(便殿)에 나아갈 수 없었다. 약방이 대조전(大造殿)에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산침을 맞았다. 저녁에 약방이 또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입시한 의관들에게 진맥해 보라고 명한 뒤에 인하여 종기 증후의 경중을 하문하였다. 의관들이 감히 분명히 말하지 못하니,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5월 4일 갑자
상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홍명하(洪命夏), 도승지 조형(趙珩) 등이 대조전의 영외(楹外)에 입시하고 의관 유후성(柳後聖)·신가귀(申可貴) 등은 【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闕門)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膿症)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殿內)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史官)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복(復)을 불렀다.
대신(大臣)이 백관을 거느리고 협양문(協陽門) 밖에서 거애(擧哀)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도감(都監)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다.
염습(斂襲)을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예조 판서 윤강(尹絳),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우참찬 송준길(宋浚吉), 대사헌 이응시(李應蓍), 대사간 이상진(李尙眞), 승지·사관·옥당이 입시하였다.
반함(飯含)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빈전(殯殿)에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정원이, 입시했던 의관 유후성(柳後聖)·신가귀(申可貴)·조징규(趙徵奎)·박군(朴頵)·이후담(李後聃)·최곤(崔梱) 등을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원상(院相)으로서 정원에서 숙직하였다.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좌의정 심지원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세 도감(都監)의 제조 이하의 관원을 차출하였다.
5월 6일 병인
소렴을 하였다. 대신 이하가 습례(襲禮) 때처럼 입시하였다. 소렴은 정묘일(丁卯日)에 행해야 하는데, 이때 한더위여서 뜻밖의 걱정이 있을까 우려하여 왕세자가 기축년008) 의 전례에 의거하여 이날 행하도록 하령(下令)하였다.
5월 8일 무진
대렴(大斂)을 하였다. 대신 이하가 소렴례(小斂禮) 때처럼 입시하였다.
예조가 즉위 절목(卽位節目)을 올리니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것이 어떠한 거조인데 분명히 계품하지 않은 채 감히 택일(擇日)하여 들인단 말인가."
하고, 도로 물리쳤다. 백관과 삼사(三司)가 청하기를,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여 온 예법은 성복(成服)하는 날 사위(嗣位)하였으니, 이를 준행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예법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정(情)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나의 망극한 회포를 돌아보지 않는가. 결코 억지로 정리(情理)를 억제하면서 이를 거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백관과 삼사가 극력 청하여 마지 않으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위로는 자지(慈旨)를 받들고 아래로 군청(群請)을 따라 억지로 망극한 정을 억제하고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하유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5월 9일 기사
성복(成服)하였다. 왕세자가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사면령을 내리고, 중외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대신(大臣)·육경(六卿)·관각 당상(館閣堂上)·삼사 장관(三司長官)이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여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으로, 시호(諡號)를 선문 장무 신성 현인(宣文章武神聖賢仁)으로, 전호(殿號)를 경모(敬慕)로, 능호(陵號)를 영릉(寧陵)으로 올렸다.
10월 병진일(丙辰日)에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2월 (0) | 2025.12.26 |
|---|---|
|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1월 (0) | 2025.12.26 |
|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12월 (2) | 2025.12.25 |
|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11월 (0) | 2025.12.25 |
| 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627년 10월 (0) | 2025.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