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오
강원도 횡성(橫城)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이 상변(上變)하기를,
"현에 사는 전 익찬(翊贊) 이인거(李仁居)가 지난달 27일 본도 감사를 만나 소본(疏本)을 바치고 나서 29일 무단히 군사를 일으켜 본현의 군기(軍器)를 탈취하여 ‘창의 중흥 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습니다. 횡성 현감이 원주(原州)로 피신하여 임금께 알리고자 하므로 감히 이렇게 와서 고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대신과 금부 당상을 명초(命招)하라."
하였다.
원주 목사 홍보(洪靌)가 치계하기를,
"이달 26일, 신이 감사 최현(崔晛)을 따라 횡성현에 갔는데 현에 사는 전 익찬 이인거가 와서 감사에게 ‘내가 소를 올리고자 한다.’ 하므로 감사가 ‘상소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 하니, 인거가 ‘조정에서 노적(奴賊)과 화친하므로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향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 한 사람의 머리 베기를 청하고 그대로 서쪽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겠다.’ 하였습니다. 감사가 ‘그렇다면 서쪽으로 간 후에는 곧바로 오랑캐의 소굴을 치겠다는 것인가?’ 하니, 인거가 ‘소굴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자, 감사가 ‘적은 이미 철수해 돌아갔는데, 어느 적을 치고자 하는가?’ 하니, 인거는 답하지 않고 잠시 후 물러갔습니다. 28일 아침에 감사가 홍천(洪川)으로 출발하였는데, 그때 신이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과 같이 인거를 찾아가 보니, 인거가 상소문의 초안을 내 보였는데 고약한 말이 많았습니다. 감사가 ‘군사는 어디에 있으며 몇 명이나 모집하였는가?’ 하니, 인거가 ‘수백여 명을 모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감사가 신과 횡성 현감에게 자세히 탐지하여 치보하도록 하였는데, 신은 즉시 관아로 돌아와 장관(將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모아 변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29일, 횡성 현감 이탁남이 달려와 ‘이인거가 제멋대로 본현의 장관·출신(出身) 등에게 전령하여 군병(軍兵)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으니, 인거가 역모한 형상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탁남과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는 한편 감사가 다른 고을에 순시 중이기에 신이 보고 들은 바를 치계합니다."
하였다. 감사 최현이 인거의 소를 치계하여 올려 보냈는데, 그 소에 이르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이처럼 어렵게 되었는데 신은 천심(天心)이 왜 전하께 노하여 이런 변이 있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적변(賊變) 이래로 몸소 갑옷을 입으시고 바람과 이슬을 피하지 않으면서 조종(祖宗)께서 배양해 놓으신 여러 신하와 더불어 콩죽과 보리밥을 먹고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성껏 하늘에 빌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였다면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도 감격시켰을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그러한 자세로 적을 제압하면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겠으며, 이로써 공을 도모하면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중흥할 수 있는 근본은 오로지 이에 있는데, 이는 하지 않고 안으로는 오랑캐의 사신 접대를 일삼고, 밖으로는 눈치나 살피는 것으로서 계책으로 삼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이 천지와 귀신이 함께 분노하는 바입니다. 대체로 흉노(匈奴)는 스스로 천도를 저버렸기 때문에 천하의 큰 적(賊)입니다. 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아내로 삼으니, 이른바 견융(犬戎)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백 년의 역사를 지닌 예의의 나라가 도리어 견융의 땅이 되었으니, 종사(宗社)는 어디에 의지하고 성묘(聖廟)는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그리고 오랑캐의 풍습을 차마 하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차라리 일찍 죽어서 편안한 것만 못하겠습니다. 신이 비록 몸은 빈천(貧賤)하나 성품은 사람이니 의리를 따져 나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대의(大義)를 앞장서 제창하여 분연히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원하건대 신이 군사 일으킨 것을 망령되다 하시지 말고 특별히 병권(兵權)을 내려 주시어 토적(討賊)의 대의를 펴게 한다면 화친을 주장한 매국(賣國)의 간신을 목베어 전하의 만세(萬世) 수치를 씻은 연후에 숙배(肅拜)하고 서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신은 너무나 강개(慷慨)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빈청(賓廳)이 계청하기를,
"급히 선전관을 보내 그 종적(蹤跡)을 탐지하고, 관찰사 최현을 나문(拿問)하고 새 감사를 차송(差送)하며, 또 대장(大將) 한 사람을 보내어 포수(砲手)와 서울의 군사, 그리고 기내(畿內)의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격멸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군병도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전령(傳令)하여 올라오게 해야 합니다. 저 적이 충청도로 향할 뜻이 있다고 하니, 감사와 병사에게 비밀히 하유하여 힘을 합쳐서 체포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적은 곧 잡히겠지만 혹시라도 연결된 곳이 있을까 싶으니,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히 하유하고, 신경인(申景禋)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양주(楊州)로 가게 하며, 초군(哨軍)은 양주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계청하기를,
"승전색(承傳色)과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여 역적 집안의 문서를 수색하게 하고, 해당 부(府)로 하여금 그 처자를 잡아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드디어 오숙(吳䎘)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성 안의 수위(守衛)를 엄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호위 대장(扈衛大將)으로 하여금 모두 궐문(闕門) 밖에 모이게 하여 각기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직숙(直宿)하게 해야 합니다. 또 동대문(東大門)밖에다 1진(陣)을 두어 성 안의 성세(聲勢)로 삼아야 하니, 송영망(宋英望)으로 하여금 어영군을 거느리고 동 관왕묘(東關王廟)에 진을 치게 해야 합니다.
횡성에서 서울까지는 겨우 며칠간의 거리이니, 호위 대장의 군관 가운데서 20,30명을 차출하여 참(站)마다 파견해서 상황을 전달하도록 하는 전례에 의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고 치보(馳報)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경인·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이 모두 토포사로서 출발하였으니, 도내의 수령(守令)을 모두 지휘하게 하고 만일 군기를 그르친 자가 있으면 모두 군율대로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최현은 엉성한 보고를 단지 두 번 들여보냈으니, 그 일 처리가 형편없는 데다 말투가 꼴이 아니어서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신경인이 이미 내려갔고, 새 감사도 곧 떠나려 하는데, 만일 치계할 일이 있으면 파발(擺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기와 강원 등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발마(撥馬)를 세워 신속하게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이일원은 여주(驪州)·이천(利川)·양근(楊根)·지평(砥平)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림은 양주(楊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게 하며, 이경용(李景容)은 광주(廣州)와 죽산(竹山)에 소속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지키게 하고, 수원 방어사 이시백(李時白)은 본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호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영(右營)과 중영(中營)은 각기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제 위치에서 영을 기다리게 하고, 후영(後營)에 소속된 좌부(左部) 각 관병(官兵) 4백여 명도 들어와 호위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총융사(摠戎使)와 경기 감사에게 전령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기원(沈器遠)과 신경유(申景𥙿)를 호위 대장으로 차출하여 각기 그 군관을 거느리고 입직하게 하였다. 이때에 경유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상이 특명으로 서용한 것이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본도의 장계를 보니, 호서(湖西)의 길을 미리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심기성(沈器成)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가려 뽑아 충주(忠州)로 달려가 형세를 보아가면서 책응(策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체부(體府)의 군관 김영(金瑛)이 정원에 와서 고하였다.
"정탐하기 위하여 평구(平丘)에 달려갔다가 중도에 원주(原州)에서 장계(狀啓)를 가지고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적장(賊將) 이인거(李仁居) 3부자(父子)와 군인 17명을 붙잡았다.’고 하였습니다."
홍보가 또 치계하였다.
"이달 29일 본주의 군병을 모아 중군(中軍) 신경영(辛慶英)을 좌영장(左營將)으로, 전 사과(司果) 원극함(元克咸)을 우영장(右營將)으로, 전 현감 이윤남(李胤男)을 중영장(中營將)으로 삼아 군병을 나누어 주었으며, 신은 계원군(繼援軍)을 이끌고 횡성 현감 이탁남과 함께 30일 일시에 진군하였습니다. 역적의 괴수 이인거의 부하 고찬(高瓚)은 본현의 군사 70여 명을 거느리고 읍내 동쪽 고개에 진을 치고, 고계립(高繼立)과 고대립(高大立)은 현 안의 사람들을 많이 모아 읍내 동북쪽에 진을 치고는 포(砲)와 화살을 쏘며 저항하였습니다. 관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곧바로 진군하자 적이 흩어져 도망쳤으므로 다 붙잡지 못하였으나, 적역의 괴수와 그의 아들 이신백(李新白)·이자백(李自白), 그리고 함께 반역한 장관(將官) 고찬·김득명(金得命)·고계립(高繼立)·고대립(高大立)·김여약(金汝鑰) 등 8인과 군병(軍兵) 윤이(尹已) 등 16인과, 인거의 손자 사위 진광흡(陳光洽)과 고찬의 매부(妹夫) 강몽호(姜夢虎) 등을 함께 잡아 묶어 단단히 가두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이 하교하기를,
"진극일(陳克一)은 어디에서 듣고 상변(上變)했는가? 관가에 들어갔다가 들어 알았는가, 아니면 집에 있으면서 들어 알았는가? 필시 들은 곳이 있을 것이니, 자세히 물어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진극일을 불러 물었더니 말하기를 ‘28일 횡성 읍내로 목사 홍보를 찾아갔더니, 목사가 「이인거를 아느냐?」고 묻기에 「이인거는 사촌(四寸) 진탁(陳鐸)의 사돈이기 때문에 안다.」고 하였더니, 목사가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사에게 많은 망언을 하고 인하여 상소하고자 했다는데, 너도 그간의 일을 아느냐? 인거가 근처에 와 있으니, 너가 가서 물어보거라.」 하였다. 즉시 인거에게 가서 묻기를 「원주 목사에게 들으니 네가 어제 상소하려고 하였다는데 무슨 뜻이냐?」고 하니, 인거가 「근래 아첨하는 신하가 일을 그르치므로 내가 한편으로 상소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 하였다. 또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하는가?」 하니, 인거가 말하기를 「먼저 최명길(崔鳴吉)·김류 등을 베고, 이어 의주(義州)로 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오랑캐의 사신이 나오면 역시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오겠다. 또 임금 옆의 간신을 모조리 제거하여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에 인거가 과연 감사에게 소본(疏本)을 올렸고, 이튿날 군사를 일으켜 그의 전령(傳令)이 도로에 분분하였는데, 그 흉악하고 참혹한 상황을 목견하고 와서 아뢴 것이지 종전에 안 일은 별로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인거의 역적질에는 무리가 20명이 못되었는데도 임금 곁의 악인을 제거하겠다고 방백(方伯)에게 스스로 말하였다. 생각건대 인거의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난역(亂逆)의 죄에 빠진다는 것을 몰랐던 듯하니 참으로 한 번의 웃음 거리도 안 된다. 그런데 홍보는 적병(賊兵)의 형세를 장황하게 치계하고, 이어서 진격해 소탕한다는 말을 하여 생판으로 임금을 속이고, 조정의 대신은 덩달아 그 계책을 도와 끝내 녹훈(錄勳)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29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예로부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인거의 역적질에는 무리가 20명이 못되었는데도 임금 곁의 악인을 제거하겠다고 방백(方伯)에게 스스로 말하였다. 생각건대 인거의 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난역(亂逆)의 죄에 빠진다는 것을 몰랐던 듯하니 참으로 한 번의 웃음 거리도 안 된다. 그런데 홍보는 적병(賊兵)의 형세를 장황하게 치계하고, 이어서 진격해 소탕한다는 말을 하여 생판으로 임금을 속이고, 조정의 대신은 덩달아 그 계책을 도와 끝내 녹훈(錄勳)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상이 하교하였다.
"도망하여 흩어진 역도(逆徒)를 만약 일일이 추적하여 체포한다면 비단 죽일 자가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이 잘못 걸려들 염려도 없지 않다.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뜻을 본도의 감사와 원주 목사에게 하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라."
10월 2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번 강화도에 있을 때 윤황(尹煌) 등이 군주의 죄를 엮어서 원근에 전파하였기 때문에 역적 이인거(李仁居) 등은 인심이 불평하는 것을 틈타 멋대로 흉악한 짓을 하였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문사 낭청(問事郞廳) 유백증(兪伯曾)도 윤황과 같은 무리인데 이제 이런 무리로 하여금 옥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유백증을 개차(改差)하라."
이준건(李俊健)을 당상(堂上)으로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홍보의 장계를 가지고 온 자이다.
10월 4일 정유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척후장(斥候將) 박덕건(朴德健)의 첩보(牒報)에 ‘의주(義州)로부터 강변의 진보(鎭堡)를 낱낱이 살펴 보았는데, 중국인의 방화로 관사와 여염집이 참혹하게 불타 남아 있는 것이 적었고, 창성(昌城)에 이르니, 곡승은(曲承恩)의 병사 6명이 성안에 주둔해 있었는데, 승은은 군사 9백여 명을 이끌고 운두리보(雲頭里堡)에 주둔해 있다고 하였다. 창주(昌洲)의 동문(東門)이 불탔으나 관사는 그대로 있었고, 벽단진(碧團鎭)은 성안의 여염집이 반이나 진달(眞㺚)에 의해 불탔다.’고 하였습니다."
재자관(䝴咨官) 이경(李坰)이 치계하였다.
"신이 감사 김기종(金起宗)과 가도(椵島)로 들어가 어첩(御帖)과 자문(咨文)을 올렸더니, 도독(都督)이 즉시 접견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치사(致辭)하기를 ‘소방(小邦)이 복이 없어 변방 신하가 율(律)을 어기었고 적이 물러간 후 외롭게 남은 유민(流民)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와 모여 편히 살기를 생각하고 있는데, 약간의 무뢰한 무리들이 노야(老爺)의 금령(禁令)을 지키지 않고 연로의 각읍(各邑)에 출몰하면서 침략(侵掠)을 자행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붙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이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으로부터 연속 나와 고향에다 뼈를 묻을까 바랬었는데 겨우 우리 국경에 들어오자마자 문득 살해되는 참혹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임금께서 소관(小官)을 보내 간절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귀국의 일을 나는 실로 가볍게 보지 않는다. 청룡(靑龍)·검산(劒山) 등지에 뒤섞여 사는 한인(漢人)은 이미 모두 철수하도록 하였으니, 이후에 만일 다시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있으면 포정사(布政司)가 이문(移文)하여 보고할 것이다.’하였습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녹봉(祿俸)을 받지 못하면 굶주릴 걱정이 없지 않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매우 측은하다. 호변(胡變) 때 와서 호종(扈從)하지 않은 자는 모두 그 죄를 면제해주고 전례대로 녹을 주라."
10월 5일 무술
죄인 이인거(李仁居)를 잡아왔다. 인거가 공술(供述)하기를,
"신은 슬기롭고 사리에 밝으시다는 성상의 덕을 전해 듣고 회포를 진달하고자 하여 병인년089) 2월에 봉소(封疏)를 올렸더니 상께서 비답하시기를 ‘진달한 10조(條)는 모두가 격언(格言)이니 어찌 마음에 새겨 힘써 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시어 신은 아주 감격하였고, 또 특지(特旨)로 익찬(翊贊)에 제수되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소를 올리어 사직(辭職)하였더니 ‘속히 올라 오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이 원주(原州)에 도착하여 더위를 먹어 감사에게 정장(呈狀)하여 전계(轉啓)하게 하였더니, 상께서 즉시 체직을 허락하시었습니다. 그후 재이(災異)가 계속됨을 인하여 또 상소하였더니, 상께서 답하시기를 ‘내가 너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시고는 그날 즉시 감사에게 전지(傳旨)하시기를 ‘이인거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여러 차례 좋은 말을 진달하였으니, 그 성의가 가상하다.’ 하고는 이어 음식물을 넉넉히 주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신은 더욱 감격하였습니다. 어찌 하루인들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적변(賊變)이 있은 이래 오랑캐의 사신이 끊임없이 왕래하므로 신은 전일 올린 소에서 군사를 일으켜 먼저 서쪽으로 가서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는 뜻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을 오활하다고 여겨 중지시키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신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고는 횡성현으로 나왔는데, 그날 관찰사가 마침 현에 들어오고 원주 목사(原州牧使)도 함께 왔습니다. 신은 ‘감사와 수령이 모여 있을 때 이런 거조를 하면 일이 더욱 명백하게 되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려 하다가 우선은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그대로 보류하고 있으면서 그곳 무사(武士)들과 함께 횡성에 모여 있었는데, 현감이 곧 와볼 것같이 하다가 오지 않고는 원주로 달려갔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초군(哨軍) 4백여 명을 이끌고 신이 머물고 있던 집을 포위하고는 신과 두 아들 이신백(李新白)·이자백(李自白)과 신의 종 원남(元男) 등을 결박하여 원주로 옮겨 가두고는 이어 즉시 치계하였는데, 신의 심정을 밝힐 길이 없어 서울로 송치하라는 명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문하신 전지(傳旨)의 내용 중 ‘창의 중흥 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운운한 것은 오랑캐의 사신이 계속 왕래하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치욕(恥辱)을 씻고자 해서였습니다.
횡성의 군기고(軍器庫)을 파괴한 것과 현감을 붙잡아 오라고 전령(傳令)한 일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다만 전령의 중함을 모르고 장관(將官)에게 전령하여 2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기는 했습니다.
군량을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등지에서 구하려 했던 일은 군기와 군량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호서와 호남에서 구하고자 했는데, 감사가 이 말을 듣고는 불러 묻기에 신은 이상과 같이 답했습니다. 감사가 말하기를 ‘네가 호서와 호남을 간다 하더라도 군기와 군량은 바로 국가에서 비축한 것이어서 수령(守令)이 반드시 주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수령을 참살(斬殺)하려 했다는 일도 모르는 일이며, 이어 경성에 가서 나라를 그르친 간신을 베려고 한 일은, 상소 가운데도 그런 말이 있는데, 신의 뜻은 상께서 그렇게 처리하기를 바랐을 뿐이지 신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관군(官軍)이 토포(討捕)할 때에 포(砲)와 화살을 쏘았다고 한 일은, 군병(軍兵)이 없고 기계(器械)가 없었는데 어찌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최명길(崔鳴吉)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나라 일을 이렇게 그르쳤다.’고 하였기 때문에 전하께 이사람을 참하라고 청한 것이었으며 ‘중흥(中興)’에 관한 설(說)도 신이 전하께서 중흥을 이루기를 바란 것이었으나 글을 잘하지 못하여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으로 이는 과연 신의 죄입니다.
역모(逆謀)를 꾸미고 후원하는 무리와 연결하였다는 일에 있어서는, 한때의 충정과 울분으로 인하여 망령되게 대계(大計)를 냈을 뿐 실로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대개 횡성 현감(橫城縣監)이 형장(刑杖)을 함부로 사용하여 연달아 6명을 죽였으므로, 신이 ‘그대는 백성을 보살피는 관원으로 어찌 이처럼 살인(殺人)을 하는가?’ 하였더니 횡성 현감이 이로 인하여 감정을 품고 이처럼 거짓 보고를 하였으니, 더는 진달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군사를 일으킨 적(賊)은 공초를 받지 않고 바로 사형하는 것이지만 그 무리를 찾아 내고자 하여 물었더니, 이처럼 공초하였습니다. 율(律)대로 사형하소서."
하니, 상이 형추(刑推)하도록 명하였다. 인거가 형을 당하면서 승복(承服)하기를,
"이번 일은 바로 막내아들 이자백(李自白)이 신을 속인 것입니다. 자백이 김득명(金得命)을 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나라에 장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얻었다.’ 하기에 신이 ‘장수라 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였더니, 자백이 ‘서얼 김득명인데, 글을 잘하고 기국이 비범하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변란 후에 자백이 ‘김득명이 신을 대장으로 삼아 요동으로 가서 정벌하고자 하는데, 용병(用兵)하는 일을 그 사람에게 맡기면 1년이 못되어 군사의 수가 5∼6만에 이를 것이니, 요동을 정벌할 수 있고, 제국(諸國)을 도모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비로소 그 말을 따라서 횡성으로 나와 역모(逆謀)을 앞장서서 지휘하고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범하여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국청에 명하기를,
"엄히 형문하여 그 무리를 끝까지 물으라."
하였다. 인거가 한 차례 형을 받고도 오히려 다른 사람을 끌어대어 말하고 끝내 명백하게 실토하지 않았다. 국청이 아뢰기를,
"만약 또 형을 가하면 70세 된 사람이어서 반드시 운명(殞命)할 것이니, 사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의 큰 아들 신백(新白)은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 인거가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오랑캐를 치려고 했으나 수하에 믿을 자가 없으므로 상소하여 병권(兵權) 얻기를 바랐으며, 또 사사로이 모집한 사람은 ‘의(義)’자를 써서 불러모았습니다. 횡성 현감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이미 물러갔는데 이처럼 군사를 일으키니 역모한 형상이 분명하다.’ 하고 원주 목사와 협력하여 와서 체포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국가를 위하여 이 계책을 세웠는데 도리어 악역(惡逆)의 이름을 쓰게 되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차자(次子) 이중백(李重白)은 횡성 옥중에 있으면서 작은 종이에다 써서 현감에게 올려 말하기를,
"막내 동생 자백은 본래 망패(妄悖)한 사람으로서 본현 출신(出身) 김득명(金得命)과 서로 만나 득명이 자백에게 말하기를 ‘내가 홍천(洪川)·원주(原州)·본현(本縣) 세 고을의 호걸(豪傑)들과 사귀어 온 지 오래이다. 만약 이 현의 속오군(束伍軍)을 얻어 한번 일어난다면 성사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니 너는 네 아버지를 권하여 창의(倡義)하도록 말하라’ 하였으니, 득명과 자백의 죄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안국(按鞫)할 때 말하기를,
"신의 아비와 동생 자백, 김득명 등은 의병을 일으킨다고만 말하였는데 의병이란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자백은 공초하기를,
"나라에서 오랑캐와 강화하면 예의(禮義)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이므로 압록강(鴨綠江)을 지켜 격멸할 계책으로 약간 명을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횡성 현감이 도리어 반역(叛逆)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는데, 형을 받고서 승복하기를,
"모든 흉역(兇逆)의 모의는 실로 스스로 주장한 것이며, 창의하여 적을 토멸한다고 가탁하고 감히 군사를 일으켜 역적 모의를 했습니다. 횡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신은 직접 7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초관(哨官)이 되었다가 관군에게 붙잡혔습니다."
하였다. 김득명은 공초하기를,
"인거가 의병 대장이라 일컬으며 전령(傳令)으로 신을 불러 말하기를 ‘오랑캐를 치는 것은 매우 쉬운데도 나라에서 하지 못하기에 내가 상소하여 토벌하기를 청하고자 하니, 너는 나와 함께 일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본현의 장관(將官)으로 있었으므로 현감을 만나 보려고 관문(官門)에 갔더니 현감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지체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즈음에 원주의 군병(軍兵)이 와서 읍내를 포위하여 신도 붙잡혔습니다."
하였는데,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가하자 승복하기를,
"신이 인거와 가장 친근하여 그의 중군(中軍)이 되었고, 모든 포치(布置)에 관계된 것은 하나같이 신의 말을 들었는데, 관군이 토포(討捕)할 때에 붙잡혀 왔습니다."
하였다. 출신 고찬(高纘)은 공초하기를,
"가을에 자백(自白)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장차 의병 대장이 되면 너는 따르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따르겠다.’ 하였습니다. 자백이 말하기를 ‘횡성에서 70여 명의 군사를 얻을 수 있고, 여주(驪州)에 부자인 일가가 있어 군량을 마련할 수 있다. 계속해서 삼남(三南)으로 가서 군병을 불러모으는 한편 상소하여 오랑캐를 토멸하기를 청하고, 또 강화하기를 주장한 사람 참수할 것을 청한 다음 서쪽으로 들어가 오랑캐의 사신을 참살할 것이다. 의병이라 명칭하면 향하는 곳마다 막을 자가 없을 것이요,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즉시 참수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인거가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 신과 고계립(高繼立)·고대립(高大立)·김득명(金得命) 등은 모두 장관(將官)으로 응모(應募)하여 인거의 명령을 받아 횡성 현감을 뒤쫓아 잡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군사 70여 명을 거느리고 진을 쳤습니다. 자백은 초관(哨官)이 되고 신은 군관(軍官)이 되었는데, 군인들이 관군을 보고는 모조리 흩어졌습니다. 신백이 ‘우리들이 칼을 빼어들고 공격하면 당해낼 수 있다.’고 하기에 신이 ‘의병이라고 이름하고서 어찌 서로 싸우겠는가. 마땅히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될 뿐이다.’ 하였고, 김득명도 관군과 서로 대항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했는데, 신백이 칼을 빼어 신들을 찌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관군이 도착해서 마침내 체포되었습니다."
하고, 고계립(高繼立)은 공초하기를,
"고찬·고대립·김득명 등이 군사를 모을 때에 신에게 ‘역모(逆謀)를 같이 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조대인(趙大仁)과 조흥인(趙興仁) 등은 인거와 가장 가까워서 왕래하며 모사(謀事)하였습니다. 인거가 신을 시켜 횡성 현감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하고, 고대립은 공초하기를,
"신의 6촌 조대인이 인거를 찾아가 보고 돌아와 신에게 ‘나라에서 오랑캐와 더불어 강화를 했으니, 어찌 차마 같은 나라에서 살겠는가. 만약 의병을 모집하여 한두 고을을 약탈하면 군사의 형세가 반드시 성대해질 것이다. 그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가고자 하니, 너도 함께 가자.’ 하였습니다. 인거가 과연 전령으로 신을 부르기에 신이 즉시 달려갔더니, 이튿날 아침 원주의 군사가 이미 도착해서 신의 형제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하였다. 진광흡(陳光洽)은 인거의 손서(孫壻)인데, 공초하기를,
"인거의 3부자가 의병을 모집하여 노적(虜賊)을 토벌하고 또 강화를 주장한 사람을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려고 꾀하였는데, 김득명·고찬·고대립 형제와 군사(軍士) 정보춘(丁甫春)·정일보(丁一甫) 등이 모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하고, 김여약(金汝鑰)은 공초하기를,
"자백이 몰래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포악하여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니 심복의 벗을 얻어 의거해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데 너도 따르겠느냐?’ 하였습니다. 그후 신이 인거를 찾아가 만났더니, 인거가 ‘내가 너를 군관으로 삼았으니, 너는 함께 일해야 한다.’라고 하여 신은 그대로 거기 있으면서 그의 하는 바를 살펴보니, 본현 사람 김유(金裕)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는지라 신은 비로소 의심하였으나 빠져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인거가 신을 시켜 고대립 형제를 부르게 하므로 신은 부득이하여 두 사람을 불러 왔습니다. 자백이 말하기를 ‘지금 민심이 이산(離散)되어 우리 아버지가 이미 포수(砲手) 30여 명을 얻어 날짜를 정해 군사를 일으켜서 호서(湖西)로 가서 군수품(軍需品)을 얻고 이어 서울로 가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거가 또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8도에 통문(通文)하여 의병을 모집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모두 전형(典刑)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신백(新白)과 중백(重白)만은 사형하기 전에 미리 죽었고, 사형을 당한 자는 역적의 괴수 이하 모두 10인이며, 이시영(李始榮)과 조대인(趙大仁) 등 8인은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시영은 인거의 손자이다. 김유 등 14인은 먼 곳으로 유배(流配)하고, 허후(許厚) 등 24인은 석방하였으며, 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본도에 갇힌 38인을 조사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전 감사 최현(崔晛)이 공술하기를,
"신은 역적의 괴수 이인거를 평소에 전혀 몰랐으나 제법 고사(高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며 성상께서도 우대하는 예를 가하여 자주 음식을 제급(題給)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기에 신도 찬물(饌物)을 보냈었습니다. 지난해 겨울에 인거가 찾아와서 신에게 사례하므로 신이 비로소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인거가 홍보(洪靌)와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 중에 불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인거의 편지에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라는 등의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신이 ‘나도 괴이쩍게 여긴다.’ 하였으며, 답장에는 대략 안부만 물었을 뿐이니, 그러한 괴이한 말에는 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순심(巡審)하며 횡성에 이르자 홍보도 함께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인거가 사람을 보내어 ‘상소를 하기 위해 어제 읍내에 와 있다.’고 전하기에, 신이 내일 가서 만나보겠다고 답하였습니다. 홍보가 신에게 ‘아침에 인거를 만나 상소하는 까닭을 물었더니, 장차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하는데, 군사 2백여 명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하기에 신이 ‘적이 경내에 없으니 지금은 의병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하니, 홍보는 또 ‘군기와 군량을 어디서 마련하겠는가고 물으니, 인거가 「호서와 호남에 가서 빌리고자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 적을 토멸하려 하는데 수령으로서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따르지 않는 자는 마땅히 참수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과 현에 사는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에게 ‘일찍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답하였습니다. 얼마 후 인거가 들어오기에 신이 ‘너의 상소하고자 하는 바가 무슨 일이냐?’ 하였더니, 인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오랑캐와 강화를 하여 예의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되게 되었으므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해 상소하고 창의하여 적을 토멸하고, 상경하여 숙배한 후에 강화를 주장한 간신 참수하기를 청하고, 이어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적이 이미 물러갔는데 어디서 싸울 것인가?’ 하니, ‘胡의 사신을 참수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胡의 사신을 참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적이 만약 대거(大擧)하여 나오면 그 2백 명 의병으로 대적해낼 수 있겠는가? 또 간신 참하기를 청한 것이 옛날에는 혹 있었지만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한 일도 있었던가?’ 하니, 인거가 나가버렸습니다. 신이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에게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멸하고 간신 베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이는 임금의 측근에 있는 간악한 무리를 숙청한다는 것을 빌미로 하는 짓과 다름이 없으니, 곧바로 체포하여야 하는데, 그 사람은 중한 명망이 있는 데다 종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문답한 말만으로 잡아 치죄하겠다고 계문(啓聞)하면 조정에서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처사(處士)를 무함하여 죽였다고 할 것이니, 그 실상을 가지고 치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이 홍보·이탁남과 함께 인거를 찾아갔더니, 인거가 상소의 초안을 꺼내어 보여주기에 신이 말하기를 ‘소의 내용 중 군사를 일으켜 간신을 죽인다는 등의 말은 조정에서 들어줄 리가 만무한데, 허락하기 전에는 결단코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중지할 것을 반복하여 말하였습니다. 인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소의 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갈 길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며 은밀히 홍보와 이탁남에게 부탁하기를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즉시 통지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홍천(洪川)에 이르러 시열(試閱)할 때에 인거의 소가 이르렀는데, 그 소의 내용에 현저하게 패역한 말은 없었습니다. 만약 받지 않고 물리치면 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되겠기에 그 소를 받아 보냈습니다. 장계에 이른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그 때가 아닌 듯한데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조정에서 미리 그 정상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횡성현 문보(文報)에 ‘현감이 원주에 가 있는데 인거의 아들이 군기(軍器)와 활 30여 장을 훔쳐 냈으나 금지시키지 못하였다.’고 하였기에 신은 이에 그가 군사 일으킨 것을 알고 비로소 치계(馳啓)하였으며, 얼마 후 홍보와 이탁남 두 사람의 보고를 보고는 또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군관이 와서 ‘인거는 단지 그의 무리 30여 명과 관노 영수(永壽)의 집에 있었는데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 원주의 군사가 그 집에 달려 들어가 일시에 생포하는 것을 목격하고 왔습니다.’ 하기에 신은 또 그러한 내용을 치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홍천에 머물면서 적들을 모조리 다 잡기를 기다려 원주로 이송하였고, 괴수의 처자를 횡성현에 가둔 후에야 춘천으로 나갔습니다.
신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밝지 못하고 지나치게 사람을 믿어 미리 인거의 역모하는 정상을 알아서 사전에 잡아 다스리지 못하였고, 또 제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가서 체포하지 못한 것 등의 죄는 실로 달갑게 받겠습니다. 신이 홍보·이탁남과 서로 밀약(密約)하여 시종 함께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들은 대로 치계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동정을 살피면서 군사를 정돈하고 계책을 세워 기회를 틈타 나아가 소탕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인거가 횡성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이탁남은 원주에 있었고 신은 홍천에 있었는데, 횡성에서 원주의 거리는 40리이고 홍천과는 70리로서, 본현에서 먼저 원주에 보고하여 신에게 전보(轉報)하였으니, 사기(事機)의 완급(緩急)과 장계의 선후는 형세상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신의 실정을 남김없이 밝혔습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상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최현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곧바로 조율하기를 청하고 형신(刑訊)을 청하지 않았다. 상이 처음에는 옥사의 체모를 잃은 것으로써 전교하였으나, 금부에서 사죄로 결단하자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양사에서 해를 넘기도록 고집하여 논란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오랑캐의 서신을 보니, 바로 시장을 개설해서 미곡(米穀)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일이었습니다. 전에 보낸 답서에서 이 일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였는데 이제 또 의주에 비축해 둔 곡식을 판매하라고 이처럼 독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논은 ‘그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사람까지도 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유감을 품을 것이니, 한 명의 사신을 차출하여 약간의 기증하는 물품을 갖고서 먼저 오랑캐의 지역에 들어가서 이런 뜻을 유시하고, 인하여 저들의 실정을 탐지해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정험(李廷馦)을 우부승지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이성석(李聖錫)을 종부시 주부로 삼았는데, 성석은 목마(木馬)와 을래서(乙來書)로 그 재주를 자랑하고자 하여서 세상에서 오활하고 괴이한 자라고 지목하였다. 조속(趙涑)을 덕산 현감으로 삼았는데, 속은 조행이 있어 관에 있으면서 청백하여 사람들이 중하게 여겼다.
10월 6일 기해
정광적(鄭光績)을 대사헌으로, 한필원(韓必遠)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遠)을 지평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수찬으로 삼았다.
김류가 아뢰기를,
"황주성(黃州城)의 역사를 이미 10월에 시작하였는데 순찰사 장신(張紳)이 말하기를 ‘증축(增築)하는 것이 성랑(城廊)만 못하다. 성랑이 비록 속히 썩지만 5∼6년은 지탱할 수 있고, 만약 잘 보수만 하면 족히 10여 년도 보장된다.’고 하였습니다. 일을 담당한 신하가 원망을 들어가며 전담하였고 일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계책을 저지하고 억제하며 사수(死守)하라고 책임지우는 것은 전권을 위임하는 본뜻이 아닙니다. 얼어붙기 전에 속히 그 역사를 완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자모 산성(慈母山城)의 성첩(城堞)이 낮기는 하지만 지세가 매우 험준해 안주성(安州城)을 증축(增築)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그리고 순안(順安)·은산(殷山)·성천(成川)·맹산(孟山)·순천(順川) 등의 고을 백성들이 모두 들어가 지키고자 하니,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서 수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10월 8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신해년 일기를 가져다 상고했더니, 왕세자의 가례(嘉禮) 후에 상께서 백관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고, 중전께서도 명부(命婦)를 모아 내연(內宴)의 예를 베풀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권정(權停)하라고 답하였다.
10월 10일 계묘
역적을 토벌한 것을 종묘에 고하였다.
이명웅(李命雄)을 정언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옥과(玉果) 유학(幼學) 심민겸(沈敏謙)이 와서 봉소(封疏)를 올렸는데, 신들이 그 소의 내용을 보니 내외(內外)·대소(大小)를 가리지 않고 관원을 마음대로 헐뜯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말이 황란(荒亂)하다고 여겨 상의하여 내어주었는데, 지금 민겸이 또 와서 상소하여 언로를 막는다고 말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전번의 소는 받아들이고, 이후로는 모든 소장(疏章)을 마음대로 내주지 말라."
하였다.
10월 11일 갑진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각성(角星) 위로 들어갔다.
10월 12일 을사
유성이 낭장성(郞將星) 아래에서 나와 대리성(大理星) 아래로 들어갔다.
10월 15일 무신
삼공이 아뢰기를,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할 우레가 제철도 아닌데 발생하니, 이는 천도가 차서를 잃은 것으로서,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현명하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고 어진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한데 그 징조에 대한 허물을 따져 보면 오로지 상신(相臣)이 제구실을 못하는 때문입니다. 신들은 모두 용렬한 자질을 지닌 자로서 외람되이 상신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일을 계획하면 이내 물의를 불러 일으키고, 모의를 내면 문득 시의(時宜)에 어긋나니, 신들은 전하의 국사가 제대로 될 날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다잡아 힘쓰시는 법을 익히시어 덕이 있는 어진 사람으로 고쳐 임명하여 하늘의 견고(譴告)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래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들의 원망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나는 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실로 깊다.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사퇴하지 말고 각기 나의 잘못을 말하여 하늘의 견고에 답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기유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천둥의 변을 보건대 이는 실로 비상한 재변입니다. 《춘추(春秋)》에도 천둥과 우박은 반드시 기록했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정사를 하심이 부지런하다고 할 만한데도 실적이 드러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심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실제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강이 서지 않고 혜택이 미치지 못해서 징렴(徵斂)을 감해 주어도 백성들은 감해준 것을 모르고 요역(徭役)을 줄여주어도 백성들은 줄여준 줄을 모르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받들어 시행하지 않아서입니다. 삼가 군하(群下)를 깨우쳐 신칙하여 각기 분발하게 하고, 실제에 힘쓰기를 책임지우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스스로를 경계하시어 마음의 근본을 세우고 몸소 본을 보여주시고 좋은 방도를 자문하시고 직언을 받아들이시며, 겉치레를 일삼지 마시고 오로지 실덕(實德)에 힘쓰시면 백성들의 원망을 조금은 늦추고 하늘의 재앙을 소멸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즉위하면서부터 하늘이 노하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고 하룻밤도 편안히 잔 적이 없다. 그런데도 시속은 사당(邪黨)을 만들고 아첨을 하며 태만하고 염치없음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는 모두 어두운 내가 기강을 세우지 못한 소치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하겠는가. 자신을 책망할 뿐이다. 진달한 겉치레를 버리고 실제에 힘쓰라는 등의 말은 모두가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니 의당 가슴에 새겨 행하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가례 후에는 종묘를 배알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한데 《오례의(五禮儀)》나 전례에는 그런 규정이 없으니 《대명집례(大明集禮)》와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의하여 종묘 배알의 예를 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김수현(金壽賢)을 도승지로, 이경의(李景義)를 지평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18일 신해
병조가 아뢰기를,
"전라도의 궤군(潰軍)이 중로에서 방황한 지 수개월에 이르렀고 중도에 도주한 자도 17명에 이르는데, 체부(體府)에서 본도에 이문(移文)해서 체포하여 아뢰도록 하였습니다. 궤군 9백 명은 모두 점검하여 출발시켰고, 그중 1백여 명은 아직까지 길에 떼 지어 모여서 한사코 원통함을 호소하면서 가려 하지 않으니 매우 놀랍고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한두 사람을 효시(梟示)하여 여러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9일 임자
상이 하교하였다.
"치제관(致祭官) 정원석(鄭元奭)의 계사에 ‘절사(節死)한 최몽량(崔夢亮)의 자녀가 굶주린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본도로 하여금 식량을 대주어 사망의 환란을 면하게 하도록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이미 강화도를 보루로 삼았는데, 연안(延安)·배천(白川) 두 고을의 경우는 단지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어 실로 관서(關西)의 관문이 되고 강도의 울타리가 됩니다. 연안의 각산(角山)과 강화도의 교동(喬桐)은 한번 조수(潮水)에 왕래할 수 있으며 배의 왕래가 겨울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배를 많이 배치하여서 적의 진로를 방어하기에는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곳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쌀을 비축해서 책응(策應)하는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주사(舟師)를 더 증파하여 본읍 부사로 하여금 전력으로 관장하게 하여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으면 배천과 함께 합세하여 한편으로는 해구(海口)를 방어할 계책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내지와 호응(呼應)하는 곳으로 삼게 한다면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원주 목사(原州牧使) 홍보(洪靌) 등은 역적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즉시 토벌하여 체포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다. 의당 훈적(勳籍)에 기록하여 그 충성을 포상하여야 한다. 또 옆에 있는 고을로서 즉시 군사를 내어 토벌하지 않은 수령은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니, 역시 참작하여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대신이 회계하기를,
"역적 이인거가 의병을 사칭하여 사중(士衆)을 유혹하여 반역할 계책을 하였는데, 방백(方伯)이 된 자는 옆 고을로 도망하여 피하였으나 홍보 등은 제때에 토벌하였으니 녹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령으로서 즉시 군사를 내지 않은 자는 조정에서 그 실정을 알아낼 길이 없으니, 본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홍보에게 물어서 참고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성발(金聲發)을 장령으로, 김여옥(金汝鈺)을 검열로, 정백형(鄭百亨)을 대교로, 심동귀(沈東龜)를 봉교로 삼았다.
10월 20일 계축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국구(國舅)의 3년상 안에 녹(祿)을 주는 예가 없는가?"
하니, 승지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본조(本曹)에 물었더니, 본조도 문서가 없어 고사와 근래의 예를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고, 광흥창(廣興倉)에 물었더니, 오래된 아전이 말하기를 ‘폐조(廢朝) 때에 3년을 한정하여 녹을 준 일이 있으나 역시 근거할 만한 옛 규례는 없고 한때의 명에 의해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폐조 때 3년을 한정하여 녹을 준 것은 필시 전례에 의거한 것일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3년을 한정하여 녹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지금 차관(差官)이 소식을 전해오기를 ‘강홍립(姜弘立)의 첩은 바로 그의 족인(族人)이어서 데리고 가고자 한다.’ 하였는데 가고자 하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국(備局)에 말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비록 강홍립이 거느린 바라 하더라도 한인(漢人)이 데리고 가고자 한다면 막기 어려운 형세이니, 데리고 가도록 맡겨두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집의 신(臣) 권도(權濤)가 천안(天安)에 이르러 들으니, 전 군수(郡守) 윤명지(尹命之)가 받아들인 임술년 공물가(貢物價)가 끝내 둔 곳이 없다고 하니, 잡아다 추고하여 율에 의해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혼조(昏朝) 때 흉도(兇徒)에게 빌붙어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대론(大論)090) 을 빚어내어 윤기(倫紀)를 멸절시킨 것은 경중(輕重)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죄는 같습니다. 임성지(任性之)·박광선(朴光先)·조존도(趙存道)·채승선(蔡承先)·김륜(金崙)·이청(李淸)·곽천성(郭天成)은 형벌을 면하였고 이어서 방환(放還)되었으며 또 직첩을 주었으니, 이것이 어떠한 은전인데 이런 무리들에게 함부로 베풀겠습니까.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이우(李佑)는 흉악하고 인륜의 기강을 어지럽혔습니다. 어미를 팔아 적자(嫡子)가 되기를 도모하였고, 살인과 겁략(劫掠)을 자행했으니, 직첩을 다시 주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성지(任性之) 등의 죄목은 무겁지 않은데 여러 차례 대사(大赦)를 겪었으니, 직첩을 다시 주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이우는 공이 있는 사람인데 이제 직첩을 돌려 주는 것도 늦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이인거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반사(頒赦)가 있어 임성지 등과 이우에게 직첩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다. 간원에서도 논란하였는데, 오랜 후에야 비로소 따랐다.
10월 22일 을묘
상이 하교하기를,
"이인거는 군사를 일으킨 적이므로 보통 법규로 논단(論斷)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형장 아래 죽은 죄인도 아울러 율문(律文)대로 연좌하고 적몰(籍沒)하라."
하니, 금부가 회계하기를,
"추안(推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승복하지 않았지만 연좌하고 적몰할 자가 8인인데, 그중에는 율문대로 처치할 자도 있고, 단지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나 감사(減死)로 분간(分揀)해야 할 것과 같은 유도 있습니다. 율문에는 모반 대역(謀反大逆)과 대악 부도(大惡不道) 두 가지 율이 있습니다. 신들은 법을 집행하는 관원인데 상의 하교에 의하여 일체로 시행하면 혹 후일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른바 형장 아래 죽은 자는 바로 군사에게 붙잡힌 유(類)이다."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영상 신흠(申欽), 좌상 오윤겸(吳允謙), 우상 김류(金瑬) 등은 ‘군사에게 붙잡혀 온 자는 모두 역적인데 다시 신문을 가한 것은 특별히 그 당여(黨與)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으니, 율문에 의해 연좌하고 적몰하라는 전교는 참으로 매우 합당하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관원은 율문을 중히 여겨야 한다. 다만 대악 부도는 율문에 본래 이런 율이 없고 단지 악역(惡逆)과 부도(不道)의 율만 있으나, 역적에 관한 율이 아니다. 금부로 하여금 다시 율문을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문에 모 대역 부도가 있기 때문에 고사(古史)에 혹 대역 부도로 죄를 준 자도 있었습니다. 신(臣) 서성(徐渻)이 【 이때 서성이 판의금(判義禁)이었다.】 반정(反正)의 초두에도 차율(次律)인 모 대역 부도를 적용하여 경연에서 아뢰어 연좌하고 적몰하는 것을 면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로써 품신하였습니다. 《대명률(大明律)》에는 ‘모반에는 차율을 쓰지 않는다.’고만 되어 있어 더는 상고할 곳이 없습니다. 아울러 밝으신 판단을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역적이 형장 아래 죽었다 하여 연좌법을 쓰지 않았으니, 판부(判付)한 후에 대악(大惡)의 율을 적용하고자 한다. 또 후폐(後弊)가 있을까 싶다.’고 말하는데 염려하는 것이 어떠한 폐단이며, 집행한 것이 무슨 법인지 모르겠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러하니, 전일 판부한 공사(公事)는 아울러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강몽호(姜夢虎)와 삼룡(三龍)은 비록 군사에게 붙잡힌 것은 아니지만 장계 내용에 긴히 나왔으니, 석금춘(石今春) 등 3인을 제외하고는 아울러 연좌하고 적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경헌(李景憲)을 승지로, 이행원(李行遠)을 헌납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부교리로, 여이징(呂爾徵)을 부수찬으로, 전극항(全克恒)을 검열로 삼았다.
10월 23일 병진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소하여 우빈객(右賓客)의 체직을 빌었는데, 이는 처부(妻父) 김상용(金尙容)은 좌빈객(左賓客)이 되었고, 처 숙부(妻叔父) 김상헌(金尙憲)은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어 한 집안에 3인이 아울러 이 선(選)에 들었으므로, 실로 영화가 지나치기 때문이었다. 답하였다.
"경은 덕과 조행이 있고 학식과 재능이 있어 실로 이 직임에 합당하니, 혐의하지 말고 안심하고 공무를 수행하라."
삼공이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번 등대하였을 때에 육조는 대신이 검칙하고, 작은 각 관사는 육조에서 검칙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가 임진년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변란을 겪어 마치 오래 된 고옥(古屋)이 기둥에서 들보 서까래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개수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장인이라 하더라도 쉽게 손을 댈 수가 없는데 더구나 신들같이 용렬한 재주와 낮은 식견으로 삼공의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망연하여 실로 조처할 바를 모르는 자이겠습니까.
다스리는 요체는 오직 적임자를 얻어 오래도록 맡겨서 실적을 이루도록 책임지우는 데 있습니다. 지금 각사(各司)의 관원을 보면 모두 적임자를 얻었다고 보기가 어렵고, 또 사무가 번다하고 중요한 곳으로 말하자면 호조와 병조의 낭청만한 것이 없으니, 가장 오래도록 맡겨야 하는데도 자주 이동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대시(臺侍)091) 를 자주 체직시키는 것으로 인하여 궐원이 되는 대로 차출해 채우다 보니 형세상 자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어서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주의할 때 호조와 병조의 낭관은 반드시 적임자로 하되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일체 이동하지 말고, 기타 여러 조(曹)의 관원도 모두 오래도록 맡겨서 실효를 거두도록 책임지워야 합니다. 육조에는 각기 소속된 사(司)가 있는데, 소속된 사의 관원 중에 만일 직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해조에서 각기 자체적으로 살피고 신칙해서 입계하여 죄를 청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부가 회좌(會坐)하는 규례가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은 지 이미 백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방물(方物)을 봉과(封裹)하거나 한림(翰林)을 뽑을 때에만 합좌(合坐)하는데 불과할 뿐으로, 육조와 정부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그 동안 어찌 훌륭한 재상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전해오는 구규(舊規)를 갑자기 변경시키기가 어려운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제 변경하고자 하니 온편하지 못한 점이 있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나 시사(時事)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성상의 하교가 이처럼 정녕하시니 신들이 상의하여 매월 두세 번 정부에서 개좌(開坐)하고 육조 당상으로 하여금 모두 참석하게 하여 사무를 헤아려 결정해서 조종조의 고사(古事)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래 폐지된 일에 관계되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일 하교한 일은 정부의 합좌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10월 24일 정사
이보다 앞서 상이 강원 감사(江原監司) 오숙(吳䎘)에게 하유하기를,
"본도에 가두어 둔 죄인 최대형(崔大衡) 등은 의당 잡아와서 끝까지 신문해야 할 듯하나 선왕조 병신년092) 에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몽학(李夢鶴)의 잔당을 국문할 때 죄의 경중을 분리하여 계문해서 죽이거나 혹은 귀양을 보내거나 또는 석방을 하였었다. 경은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하라."
하였는데, 숙이 치계하기를,
"외방의 옥사는 비록 대역(大逆)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옥사를 조사하는 것은 반드시 조정에서 해야 하는데, 사나운 적이면 시종신(侍從臣)을 보내기도 하고 살인한 도적이면 반드시 경차관(敬差官)을 보내 추고하는 것은 국법을 엄중히 하고 사체를 존중해서였습니다. 이번 이 최대형 등 십수 명은 모두 이인거(李仁居)의 도당으로서 죄명이 매우 중한데 신이 어찌 감히 담당하여 국법을 어기겠습니까. 그리고 원수(元帥)의 임무는 지방관과는 다르기 마련인데, 그것을 전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재량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강원도 고성(高城)에 비바람이 크게 불고 천둥과 번개가 뒤섞여 쳐서 큰 나무가 뽑히고 선박이 파괴되었으며, 떠내려가고 무너진 촌가(村家)가 매우 많았다.
이귀(李貴)를 우부빈객으로,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엄성(嚴惺)을 집의로, 김지수(金地粹)와 권집(權潗)을 장령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사간으로, 권도(權濤)를 교리로, 송시길(宋時吉)과 이경(李坰)을 지평으로, 오달승(吳達升)을 정언으로, 이경의(李景義)를 부수찬으로, 정유성(鄭維城)을 검열로 삼았다.
10월 25일 무오
헌부가 아뢰기를,
"전 고원 군수(高原郡守) 김광욱(金光煜)은 비록 안병(眼病)이 있으나 물건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정도는 아닌데 상경한 지 몇 달이 되도록 돌아갈 뜻이 없이 파직되기를 도모하여 임기 채우는 것을 면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다해 공무를 보지 않고 변방의 고을을 싫어하여 피하는 형상이 드러났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이달 23일에 유격(遊擊) 장괴(張魁)가 안주(安州)로부터 와서 신을 만났는데 작은 종이에 ‘천계 황제(天啓皇帝)093) 가 7월에 승하하고 친아우가 16세로 등극하여 숭정(崇禎)으로 연호를 고쳤다.’고 써서 주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황조(皇朝)에 상(喪)이 나면 반드시 요동에서 등황(謄黃)094) 이 오기를 기다려 비로소 거애(擧哀)하였습니다. 지금은 요동과의 길이 막혀 비록 등황하는 사례가 없지만,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모영(毛營)에서 반드시 문서가 왔을 것입니다. 그간의 진위를 확실하게 모르니, 역관을 모진(毛鎭)에 보내서 정확한 정보를 알아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우부빈객(右副賓客)을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7일 경신
체부(體府)가 아뢰기를,
"지금 전라 궤군 영장(全羅潰軍領將) 김상중(金尙重)의 치보를 보니 ‘도중에 도망한 자가 속출하여 겨우 개성부에 도착하였는데 도망자가 자그마치 1백 50명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중률(重律)을 쓰지 않는다면 궤군(潰軍)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지 않겠으며, 군법(軍法)이 어디를 말미암아 행해지겠습니까. 본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즉시 빠짐없이 체포해서 먼저 참(斬)하고 후에 계문하게 하고, 그 머리를 서변(西邊)에 조리돌려 군사들의 마음을 경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속히 체포하고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동지중추부사 이현영(李顯英)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헌부(憲府)에 있을 때 ‘고원 군수(高原郡守) 김광욱(金光煜)이 병으로 임지에 돌아가지 않으니, 논계(論啓)해야 마땅할 듯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수령(守令)에게 병이 있으면 감사가 마땅히 계문할 것이니, 경솔히 논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중지시켰었습니다. 그런데 간직(諫職)을 제수받고나서 들으니, 또 ‘광욱의 병이 점차 심중(深重)해지는데 감사가 아직 처치하지 않고 있고, 대간도 논하지 않는다면 고원(高原)의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하는 말이 있기에 신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동료와 상의하여 파직을 청하였었습니다. 그후 동료의 간통(簡通)을 얻어보니 ‘광욱의 일로 헌부(憲府)에서 논의가 있었다.’고 하였기에 신은 즉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헌부의 많은 관원이 인혐(引嫌)한 말을 보니, 지난날의 습성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온갖 계책으로 피하기를 도모하였다 했으며 또는 그의 병이 대단한 데에 이른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변변치 못한 소신이 외람되이 적임도 아닌 자리에 있으면서 병이 없는 사람을 병이 있다 하였고 사사로운 부탁을 은근히 받아들여 싫어하고 피하는 자를 위하여 임기 안에 사면(辭免)을 도모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 것처럼 되었으니, 성명의 아래에 다시 혼조(昏朝)의 습성을 답습했다 해도 신 역시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속히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계(啓)자를 찍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현영의 상소에 ‘속히 신의 죄를 바루소서.’라고 하였는데 계자를 찍어 내렸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해조에 내려 회계하게 하라."
하였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대간의 한때 들은 바가 비록 사실과 어긋났다 하더라도 이미 그 일로 하여 체직시켜 중추부(中樞府)로 보냈으니, 벌을 내린 것입니다. 매양 전의 일을 거론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한필원(韓必遠)을 집의로, 여이징(呂爾徵)을 헌납으로, 오단(吳端)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8일 신유
상이 면복(冕服)을 입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세자빈(世子嬪)의 납채례(納采禮)를 의례(儀禮)대로 행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엄황(嚴愰)이 치계하기를,
"호차(胡差) 중남(仲男)과 고아부(高牙夫)가 종호(從胡) 8기(騎)를 거느리고 도망한 달인(㺚人) 5명을 붙잡아가지고 본부(本府)에 도착하였습니다. 온 이유를 물었더니 ‘근래에 진달(眞㺚)·가달(假㺚) 모두 3백여 명이 도망쳐서 한(汗)이 우리 두 사람을 불러 먼저 조선에 가서 의주 부윤에게 글을 전하고 다시 소식을 탐문하라 하기에 이로 인해 왔는데, 중도에서 도망한 달인 12명과 한인(漢人) 남녀 15인을 잡아 모조리 죽이고 5인만은 묶어가지고 왔다. 그러나 도망한 자가 매우 많으니 낱낱이 쇄송(刷送)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지난번 도망한 달인 3인을 잡아 가둬놓고 지금 막 박난영(朴蘭英)의 편에 딸려 보내려고 하였다. 네가 이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더니, 중남이 ‘개시(開市)의 기한이 이미 박두하였는데도 아직 회답이 없다. 통화(通貨)하는 뜻이 이처럼 늦어지고 장사꾼들이 오는 것도 이처럼 오지 않고 조용한 것은 왜 그런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회답(回答)이 오고가는 사이에 자연 지연되는 것이다. 거리가 멀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그리고 장사치가 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말하였는데 네가 너희 한(汗)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냐. 조정에서 이를 위해 막 박난영을 보냈다.’ 하였습니다. 중남이 말하기를 ‘한의 말에 「장사치의 왕래는 유무(有無)를 서로 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왕제(王弟)가 가지고 간 글의 뜻이 그것이다. 약화(約和)한 후 조선이 그 말을 지키지 않으니 우호의 뜻이 어디 있는가. 조정에서 만약 날짜가 너무 촉박하다고 한다면 11월 1일로 물려 정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중남이 개시(開市)하는 일로 다시 와서 독촉하니, 난영이 가더라도 들어줄 이치가 없을 듯합니다. 근래에 해서(海西) 사람들이 그 부모 처자를 속(贖)하기를 원해 본사(本司)에 정장(呈狀)하고, 심지어 상소까지 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에게 소원대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여 속환(贖還)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모장(毛將)에게 이자(移咨)하여 그 실상을 진술하면 정리(情理)로 헤아려 보아 반드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속하고자 하는 자의 지극한 정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며 오랑캐들의 욕심도 조금은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함경도 문천군(文川郡)에 큰 천둥이 치고 폭풍이 불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려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는데, 육진(六鎭)도 그러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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