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계사
비국이 아뢰기를,
"만상(灣上)에서 개시(開市)하는 일에 대해 신들은 혹시라도 지체하여 늦어지는 폐단이 있을까 우려한 나머지 선전관을 파견, 평양(平壤) 등 네 고을의 쌀 1천 7백 3석과 안악(安岳) 등 네 고을의 쌀 3천 3백 석을 독촉하여 보내기를 청했었는데, 이미 선박에다 실어 놓았다고 합니다. 해로(海路)의 원근으로 계산하여 보면 순차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만, 앞서 김기종(金起宗)의 보고를 보건대 평양의 쌀 2백 석은 이미 육로로 운반이 되었고 수상(水上) 지역의 쌀 3백 석도 이미 끌어다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황해 감사 장신(張紳)의 장계를 보건대 각 고을에 효유하여 특별히 차사원을 차정하고 그들에게 쌀로 댓가를 지불하고 데려올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고 합니다. 선박의 출발 및 도착의 일시와 속환인(贖還人)·상고(商賈) 등을 들여보내는 데 대한 형지(形止)를 일일이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일 갑오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 역적의 흉모는 하룻밤 사이에 발발할 뻔했는데 다행히 상변(上變)에 힘입어 국가가 망하지 않게 되었으니, 발고한 사람의 공로는 땅을 떼어 봉해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저하게 드러난 사람은 7, 8인에 불과한데 녹훈된 숫자는 32인이나 되니 매우 외람됩니다. 기축 옥사(己丑獄事) 때에는 추관(推官)들도 아울러 녹훈되었는데 이것이 선왕(先王)의 특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공론을 주관하고 있던 사람이 극력 간쟁하면서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허적(許𥛚) 등이 원훈(元勳)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감히 망령되이 진달하여 마치 전례가 있는 것처럼 청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외람되이 녹훈된 자들을 삭제함으로써 녹훈하는 법전을 중하게 하소서.
홍서봉(洪瑞鳳)·심명세(沈命世) 등은 역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아 분부(分付)가 너무 늦어지게 만들었고 따라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주 대한 적을 놓치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훈척(勳戚)인 재신(宰臣)으로 고변했다는 이름을 피하려 하여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그 죄를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무슨 상줄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홍서봉·심명세는 아울러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하고 홍서봉은 훈적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녹훈은 실로 선조(先祖)의 전례에 의한 것으로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다시 논하지 말라. 그리고 홍서봉 등이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말을 꺼린 데서 나온 행위인 듯하다. 그렇다면 잘못이 없지 않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간원도 녹훈이 너무 외람되다는 것으로 다시 조사하여 결정할 것을 논계하니, 답하였다.
"녹공(錄功)할 때 대신과 원훈이 결정하였으니 외람된 일이 없을 것 같다. 추관이 녹공에 참여된 것은 전례가 있었으니 역시 불가할 것이 없다."
녹훈 도감(錄勳都監)이 아뢰기를,
"삼가 이귀(李貴)의 차자를 살펴보건대 전일 고변한 사람과 진극일(陳克一)·최산휘(崔山輝)의 녹훈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우길(成佑吉) 등이 처음에 고변하였으니 추후 죄명을 씻어주는 법전을 내려야 하고 문회(文晦)도 방면시켜야 하며, 역적의 노비는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역변에는 군사를 동원한 경우도 있고 은밀히 모의하다가 발각된 경우도 있는데 이를 발고한 사람을 논상함에 있어서는 위의 두 경우에 따라 그 경중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귀가 고변하는 길을 열기 위해 정성스레 차자를 올려 진달하였는데 유응형(柳應泂)·김인(金仁)·심일민(沈逸民)·진극일(陳克一)은 차자에서 거론한 사람들로서 아울러 녹훈에 참여시켜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녹훈은 중한 일이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여 조처할 수가 없습니다. 성우길·한흔(韓訢)의 실정과 행적에 대해서는 신들이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 고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논하여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이시언(李時言)은 그의 아들이 역적 이괄(李适)을 따르다가 복주(伏誅)되었으니 그 아비의 신설(伸雪)을 또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고, 문회를 방면시키는 것은 마땅히 은전(恩典)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어서 모두 성상의 재결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노비를 나누어 주는 일은 해관(該官)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문회는 석방하고 진극일은 녹공하라."
하였다.
의주(義州) 사람인 전 참봉 한종남(韓宗男) 등이 소장을 올리기를,
"본부에 사는 전 사과(司果) 백광종(白光宗)이 본부의 백성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람 4천여 인을 인솔하고 와서 정봉수(鄭鳳壽)에게 귀속하여 별성(別城)을 축조하고 있으니, 포상(褒賞)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백광종은 차서를 뛰어 서용하되 수령이나 변장을 제수하라."
하였다.
2월 3일 을미
병조가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도망병으로서 정배(定配)되어 있는 자들을 사면령을 인하여 탕척시키게 했기 때문에 서로(西路)에 정배되어 있던 도망병들에게는 이미 석방하여 돌려 보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덕포(德浦)·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정배되어 있는 도망병들도 일체 방면시켜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사(詔使)를 접대하기 위한 잡물들을 이제 분정(分定)하여야 하는데 본조에 저축되어 있던 것은 이미 변란 때에 유실된 데다가 또 호차(胡差)의 접대에 다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도중 일곱 군데에서 맞이하여 위로연을 베푸는 것과 서울에 들어온 뒤에 수요되는 예단(禮單)과 잡물을 모두 백성들에게 책임지워야 하는데 백성들이 이를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양서(兩西)010) 지방은 새로 병란에 극심한 피해를 입어 눈에 보이는 것이 폐허뿐인데 이것은 조사도 직접 본 것입니다. 따라서 조사의 접대가 전의 법규보다 조금 감소되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아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관반사(館伴使)·원접사(遠接使)와 상의하여 번거롭고 하찮은 절문(節文) 가운데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긴하지 않은 잡물 가운데 감할 만한 것은 감하게 하며, 예단의 물목(物目)과 두목(頭目)에게 증여할 것 가운데 감손할 것은 감손하고 도감의 원역(員役)들도 줄일 것은 줄이게 하소서. 접대의 규모를 정한 뒤에야 물목을 분정하는 것도 따라서 가감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여정목(餘丁木)과 장인 가포(匠人價布)011) 를 전부 신의 본조(本曹)에 이송시켜 잡물을 무역할 밑천으로 쓰게 하여 더 분정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받는 은혜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여정목과 장인 가포는 병조로 하여금 헤아려서 이송하게 하라."
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아뢰기를,
"신들이 관반사·원접사와 함께 의논한 결과, 번거롭고 하찮은 절문으로는 윤거 잡상(輪車雜像)이나 결채012) 등의 일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 일은 백년 동안 해 내려온 구규(舊規)인 데다가 중국의 번왕(藩王)들이 조서(詔書)를 맞을 때에는 반드시 채붕(綵棚)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폐할 수는 없습니다. 조사에게 주는 예단과 두목에게 증여할 것은 지금의 물력으로 살펴보건대 참작하여 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사가 나올 적에 반드시 먼저 전일에 나왔던 조사에게 주었던 예단 물목을 알아보았을 터인데 그에 의거 응접의 후박을 가늠하게 되면 불평하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니, 우리의 입장에서 곧바로 먼저 재감(裁減)함으로써 난처한 걱정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 등의 물품 가운데 실제 사용에는 관계되지 않으나 외방에 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은 도감으로 하여금 일에 따라 감손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긴하지 않은 원역도 도감으로 하여금 병합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강(姜)·왕(王) 두 조사는 상당히 청렴 검소하다고 일컬었는데도 7백 근의 인삼이 들어갔고 이 밖에 면포·비단·모시 등의 물품 값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미리 준비해야 될 것이 어찌 여기에 밑돌게 할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해조에 저축된 목면이 1백 동도 못 된다고 하는데 항규(恒規)에 의거해 말한다면 전결(田結)에 따라 면포를 거두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방의 민력이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어 분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병조에서 근래 용도를 준절히 한 탓으로 저축되어 있는 것이 2백 동이 넘는다고 하니 먼저 1백 동을 보내게 하고, 비국에 저축되어 있는 군수목(軍需木) 80동과 여정목·장인 가포 50동도 전부 이송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충장위(忠壯衞)·충순위(忠順衞)·충익위(忠翼衞) 등의 당번자(當番者)들에게 입번을 면제하여주고 대신 포목을 거두어 들이면 그 숫자가 또한 많아서 파격적으로 거두어 쓸 수가 있으니, 백성들에게는 포목을 거두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음식 등의 물품은 전에 이미 감손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감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경의(李景義)를 장령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지평으로, 홍방(洪霶)을 진향사 겸 진위사(進香使兼陳慰使)로, 한여직(韓汝溭)을 등극사(登極使)로 삼았다.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대신들의 계사로 인하여 등극사 권반(權盼)을 이미 개차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정2품 가운데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은 겨우 한두 사람뿐인데 모두 나이가 70에 가까우므로 바다를 건너가는 사행(使行)을 감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난해 등극사 오윤겸(吳允謙)이 갈 적에는 종2품으로 차임하여 보냈었으니 이번에도 이를 전례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특별히 가자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해조에서 감히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조금 변통시키는 조처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진향사 한여직은 이미 정훈 공신(正勳功臣) 2등에 참여되어 있으니 아직 결말이 나지는 않았지만 끝내 전례에 따라 가자하게 될 경우 당연히 정헌 대부가 됩니다. 이제 그를 등극사로 옮겨 차임하고 진향사는 종2품으로 차출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수도 단자(囚徒單子)를 보건대 그 가운데 아비가 도망했다는 것을 이유로 그 아들을 수감한 것이 있으니, 이는 전일 하교한 의의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정원은 어찌하여 살피지 않았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형조가 회계하기를,
"지난해에 과연 그러한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탁(秦倬)·호응상(扈應祥) 등은 고의로 배를 패몰시켜 세미(稅米)를 훔쳐 먹었으니 그의 처자를 가두지 않으면 도로 징수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조처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법전에 의하면 처자에게 징수해야 하지만 아들에게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2월 4일 병신
대사간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제일 먼저 역변(逆變)을 발고한 것은 허적(許𥛚)에게서 나왔지만 직접 대궐에 나아가 발고하지 않고 남에게 서찰을 보내었으니, 허적의 서찰로 인하여 일이 있기 전에 기미를 알린 사람도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동료들과 상의하여 제일 먼저 발고하고 알린 사람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논급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헌부의 계사를 보건대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하면서 훈적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일을 논함에 있어 착오가 나게 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최산휘(崔山輝)의 아비는 적을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현재 사죄에 의율(擬律)하고 있으니, 그의 아들된 자로서는 이수향(李秀香)이 역적 모의를 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마땅히 사생을 불고하고 즉각 달려와 상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튿날에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로 전하게 하자 심명세가 재삼 채촉하여 즉시 직접 고변하게 하였는데도 최산휘는 고변했다는 이름을 피하기 위해 재삼 미루적거림으로써 수향으로 하여금 기미를 눈치채고 도주하게 하였는가 하면 저녁에 이르러 다른 사람이 상변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뒤따라 고변하였으니, 그가 대사(大事)를 그르칠 뻔한 죄는 심명세보다 더합니다. 이제 물의를 듣건대 대간이 즉시 논계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하니, 신은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 최연(崔葕), 헌납 이성신(李省身), 정언 이사상(李士祥)·고부천(高傅川)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답하기를,
"모두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정경세(鄭經世), 장령 김남중(金南重), 지평 이경(李坰)이 아뢰기를,
"신하로서 역변을 알리는 서찰을 얻고서도 덮어두고 발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없이 큰 죄가 되는 것이요, 발고하는 것은 바로 당연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원훈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 제일 먼저 역모를 고변한 공은 허적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은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일 아뢸 적에 홍서봉이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한 것으로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사헌 김상헌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신들이 제일 먼저 역모를 발고한 사람들을 가리켜 죄가 있을 뿐 공은 없다고 했다 하였으니, 일을 논함에 있어 착오를 범한 잘못이 간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최산휘가 즉시 정원에 달려가 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가 향생(鄕生)이어서 일을 잘 모른 소치인 것으로 그 정상은 용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훈척 재신만을 논하고 최산휘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이 이미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긴다고 했으니, 하나는 논하고 하나는 논하지 않는 것 역시 신들의 죄입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권도(權濤)가 아뢰기를,
"역적이 대궐을 침범한다는 기별은 이것이 어떠한 급보인데, 홍서봉은 편안히 집에서 미루적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면서 고변했다는 이름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공이 있다고 한다면 단지 한 장의 편지를 통보한 것뿐인데 이것으로 원훈을 차지한다는 것은 또한 외람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듣건대 심명세는 대궐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서는 밖으로 나아가 모의하고 즉시 들어와 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신하로서 국가의 위급함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이 두 사람은 자신을 위하는 계책만 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으니 법에 있어 당연히 논해야 된다고 여겼기에 회의 석상에서 발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명세가 대궐에 들어왔을 적에 김경(金澃)라는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이조 판서 장유(張維)에게 말하면서 ‘비상한 사태이니 잘 살피게 하라.’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대궐에서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신이 실로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간원이 이 두 가지 사건을 가지고 인피한 사연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홍서봉을 논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경솔하게 제 잘못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산휘는 논하지 않고 심명세만 논한 것에 대해서는 일을 논함에 있어 사실과 어긋나게 한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양사가 녹훈의 가부 문제로 지금 모두 인혐하여 물러나 있고, 홍서봉은 신과는 혼인으로 일가붙이가 된 사람입니다. 공론이 신의 말을 진실이 아니라면서 시비를 가리려하니, 신이 어찌 감히 많은 공무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척(遆斥)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부제학 조익(趙翼), 전한 정홍명(鄭弘溟), 교리 심지원(沈之源), 수찬 이행원(李行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사간 김상헌, 사간 최연, 헌납 이성신, 정언 이사상·고부천, 대사헌 정경세, 장령 김남중, 지평 이경, 집의 권도, 지평 이경증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허적의 고변이 홍서봉을 통하여 알려졌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옛날 한(漢)나라 때 곽우(霍禹) 등이 모반하였을 적에 남자(男子) 장장(張章)이 먼저 발각하여 기문(期門) 동충(董忠)에게 고하자 동충은 다시 좌조(左曹) 양혼(楊惲)에게 고하였고 양혼은 시중(侍中) 김안(金安)에게 고하여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동충 등과 함께 봉후(封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허적의 서찰을 조정에 고하여 그것으로 녹훈에 참여된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간원이 녹훈해야 된다고 한 것은 착오된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최산휘에 관해서는 이수향이 역적 모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김경에게 고하여 그로 하여금 심명세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으니, 이는 장장이 동충에게 고한 것과 다름이 없어서 죄줄 만한 일이 없을 듯하여 논계하지 않았어도 불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하로서 역변에 관한 소식을 듣고 즉시 발고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상세히 살피고 신밀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니, 그다지 탓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홍서봉의 잘못은 단지 공을 논함에 있어 균등하게 하지 못한 데에 있을 뿐, 발고의 지속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드러난 잘못은 논하지 않고 그다지 탓할 것이 못 되는 허물만을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원훈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괜찮지만 훈적에서 삭제시키기를 청하기까지 한 것은 또한 과격한 것 같습니다. 일을 논하는 체모에 있어 정당함을 잃은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들은 소문에 대해 스스로 착오라고 하였으니 일을 논함에 있어 실제와 어긋나게 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한집안의 사람으로서 녹훈의 가부에 대해 혐의를 가져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인정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니, 대사간 김상헌 등은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고 대사헌 정경세 등은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당인(唐人) 남녀 2백 39인을 평양에 유치시키고 각각 식량을 지급하게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이번 중강 개시(中江開市)의 기일이 벌써 정해졌는데 서울의 상고들은 전혀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호인들이 화를 낼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이제 일을 잘 아는 산원(算員)을 차출하여 지지(紙地)·호초(胡椒)·단목(丹木)·청포(靑布) 등의 물품을 가지고 개시하는 곳으로 가서 은냥(銀兩)과 바꾸게 하고 돌아올 적에는 가도(椵島)에 들러서 그 은냥으로 청포를 바꾸어 가지고 오게 하여 호차에게 증여할 용품을 마련하게 하소서. 이리하여 결국 이윤을 얻게 된다면 서울의 상고들 가운데 달려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평안 감사·관향사(管餉使)·의주 부윤에게 행회(行會)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5일 정유
장령 이경의(李景義)도 녹훈에 관한 일로 인피하자 헌부가 동료들이 모두 체직되었는데 사세상 그대로 있게 하기는 어렵다는 것으로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2월 6일 무술
원접사 장유(張維)가 전한 정홍명(鄭弘溟), 이조 좌랑 이소한(李昭漢)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으로 삼았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이형원(李馨遠)을 집의로, 권집(權潗)·임련(林堜)을 장령으로, 임광(任絖)·여이징(呂爾徵)을 지평으로, 심동구(沈東龜)를 정언으로, 김남중(金南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7일 기해
접반사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기를,
"천총 심유덕(沈有德)·유세표(劉世豹) 등이 도독(都督)의 표문(票文)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전했는데, 배를 만드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고, 그 표문에는 숭정(崇禎) 연호를 썼기에 신이 행용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가도에서는 정월 11일부터 처음 사용하였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주청하기를,
"도독 아문에서 이미 숭정 연호를 쓰고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서울은 9일부터 쓰고 외방은 문서가 도착하는 날부터 행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즉시 각사(各司)와 각 아문 및 팔도의 감사와 개성 유수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8일 경자
헌부가 아뢰기를,
"장령 권집(權潗)은 대관으로서 말미를 받아 시골로 내려갔었는데 아무리 병 때문이라고 하지만, 역변의 소식을 들은 뒤에도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양사가 복합(伏閤)하고 있는 이때에 그의 직을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각도에 산재해 있는 각사의 노비에 대해 그 공안(貢案)을 조사하여 3년 동안 가포(價布)를 납입하지 않은 고을은 그 곳의 수령을 파직시키고 색리(色吏)는 도년(徒年)의 정배에 처하며, 1, 2년 동안 납입하지 않은 경우에는 색리를 수금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자,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의 종사관 김반(金槃)이 충청 우도와 전라도를 순심하여 수령들의 현부(賢否)를 사목(事目)에 따라 염탐해서 신에게 첩보하였는데,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은 벼슬살이를 청렴하고 삼가서 하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화순 현감(和順縣監) 정세규(鄭世䂓)는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가 있어서 서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하며, 홍주 목사(洪州牧使) 안응형(安應亨)은 몸가짐이 검소하고 요역(徭役)을 균평하게 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봉급을 덜어서 무기를 넉넉하게 준비하였으며, 공주 목사 민응회(閔應恢)는 일을 주간하는 재주가 있어 치적에 대한 명성이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반면에 담양 부사 조희일(趙希逸)은 일처리가 번거로워서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하며, 익산 군수 김수렴(金守濂)은 처사가 오활하여 아전들이 간사한 짓을 하며, 홍산 현감(鴻山縣監) 심기중(沈器重)은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겨 폐단이 백성들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조희일·김수렴·심기중은 파출시키고 임경업 등 정치를 잘한 수령들은 은상(恩賞)에 관계되므로 삼가 상의 재결을 기다리겠습니다.
호남의 각 고을 수령들 가운데 무기를 수리하고 별도로 준비한 자가 많았습니다. 이는 직분상 당연히 해야 될 일일 뿐만이 아니라 허다한 수령들을 일일이 포상할 수 없기에 이에 아울러 아뢰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임경업 등에게는 각각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라. 그리고 수령들 가운데 무기를 넉넉하게 준비한 사람은 또한 논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원(南原)이 제일이고 전주(全州)가 다음입니다. 그 나머지 각 고을은 그곳의 물력에 따라 준비한 것이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안응형은 정치도 잘하였고 겸하여 무기도 준비하였으므로 별단자(別單子)에 써서 입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주의 영장(營將) 문희성(文希聖)은 군사를 조련시키는 데에 방도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군사들을 잘 돌보아 무휼하였습니다. 여산(礪山)의 영장 김익룡(金翼龍)은 나이가 늙고 재주가 졸렬하여 군사를 거느리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공주의 영장 손필(孫泌)은 형장을 사용하는 데 있어 중도에 어긋나게 하여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치고 있으니, 상벌을 시행하는 거조가 있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양도의 폐단을 별도로 기록하여 입계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신감(申鑑)은 가자하고 원두표(元斗杓)에게는 숙마 1필을, 안응형·민응회·임충간(任忠幹)에게는 반숙마 1필씩을 사급하라. 한흥일(韓興一)·이순명(李順命)·박수홍(朴守弘)·임준백(任俊伯) 등은 모두 승진 서용하라. 영장 문희성에게는 표리 1습을 사급하고, 김익룡 등에게는 전례에 의거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윤지(尹墀)를 사간으로, 김육(金堉)을 헌납으로, 오달승(吳達升)을 정언으로, 이경의(李景義)를 장령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이조 정랑으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삼았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일찍이 체신(體臣)이 보낸 공문을 보건대 ‘새로 설치한 둔전에 종자와 식량이 없어서는 안 되니 피곡 2만 석 가운데 5천 석은 종자로 쓰고 1만 5천 석은 둔전을 경작할 때의 식량으로 쓰게 하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종자와 식량은 이에 따라 계산하여 지급하겠습니다만, 만약 남군(南軍)에게 지급한 전례를 써서 군병을 모집하여 식량을 지급한다면 가을에 둔전에서 생산된 곡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허비되는 식량이 작지 않습니다.
이른바 식량을 환자곡[還上穀]으로 나누어 지급하고 병작(倂作)하게 한다면 소출의 반을 차지하게 되어 전부 타작하여 들이는 것만은 못하지만, 식량으로 나누어준 1만 5천 석의 곡식이 가을에는 도로 관곡이 되는데 이것이 둔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병작하게 하는 데에서 온 이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는 목전에 급박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급료를 주기로 하고 모집한 농군(農軍)이 무려 4백여 인이나 되는데 이들이 현재 둔전을 설치한 곳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한 달에 지급해야 할 양식만도 1백 60여 석에 이르므로 앞으로 식량을 이어대기 어려운 것이 또한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종자를 넣을 계절이 이미 박두해 있으니, 황해 감사에게 하유하여 결성(結城)의 창고에 있는 보리 종자를 속히 수송하게 하소서."
2월 11일 계묘
강화(江華)의 위리 안치시킨 곳의 별장 권득수(權得壽)가 치계하기를,
"광해(光海)가 삼시 끼니에 물에 말은 밥을 한두 숟갈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 간혹 벽을 쓸면서 통곡하는데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않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지난달 보름 이후로는 한 번도 빗질을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늘 말하기를 ‘옛날 궁인들 가운데 반드시 생존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을 보내 달라. 생전에 한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다.’ 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글을 보고는 가엾게 여겨 당시의 궁녀 한 사람을 내려보내게 하였다.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지난해 8월 22일 경사(京師)에 도착했는데, 20일에 황제가 붕서하고 황제의 아우 신왕(信王)이 즉위하여 25일에 성복례(成服禮)를 거행하였는데, 중외(中外)의 소장(疏章)이나 주문을 일체 정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4일이 지난 9월 6일에 황상이 직접 황극문(皇極門)에 임어하여 조위(吊慰)를 받았습니다만 그뒤로 잇따라 꺼리는 날을 만나게 되어 주문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일에야 비로소 입계하였고 13일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왔습니다.
새로 등극한 천자는 총명이 뛰어나서 일체의 서찰을 모두 친필로 써서 내렸으며 권병과 기강을 총괄하고 있었으므로 천하가 태평 성대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토색질하는 폐단은 전과 다름이 없어서 가지고 간 노자를 다 바쳤지만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곳에서 출발하려 할 적에 소갑(小甲) 왕유덕(王有德)·주응상(朱應祥) 등이 소첩(小帖)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바로 예부(禮部)에서 우리 나라에 조사(詔使)를 차송한다는 제본(題本)을 올렸는데 황상께서 특명으로 배신(陪臣)이 돌아가는 편에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유숙하고 있는 관소(館所)의 부엌에서 불꽃이 치솟아 맹렬하게 타올랐기 때문에 노자와 관소 1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신들은 간신히 구멍을 뚫고 뛰어나왔습니다. 예부(禮部)의 제독(提督)과 중성(中城)의 찰원(察院)에서 사실을 낱낱이 열거하여 아뢰었는데 황상께서는 관후하고 인자하시어 무심히 저지른 실수로 여겨 특별히 추궁하여 문책하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선황제(先皇帝)를 장사지내는 기일을 처음에는 납월(臘月)로 정했었는데 성모(聖母)의 원역(園役)과 동시에 거행해야 하는 까닭으로 2월로 물려서 정하였습니다.
병부 상서 최정수(崔呈秀)가 간흉을 편들어 권병을 휘둘렀으므로 급사중 양공수(楊孔修)가 맨 먼저 그를 죄줄 것을 청하였고 감찰 어사 양유원(楊維垣)이 잇따라 청하자 최정수는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중도에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의 첩 소씨(蕭氏)도 스스로 목찔러 죽었는데 그의 가산을 모두 적몰하였습니다. 그리고 염명태(閻鳴泰)에게 대신 병부 상서를 맡게 하였습니다.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은 애초에 봉양(鳳陽)에 정배했었는데 떠나가다가 부성(阜城)에 이르러 또한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그의 아들 위양경(魏良卿)도 아울러 목베고 가산은 적몰하였습니다. 그리고 13성(省)의 총독(總督)으로 있던 환시들을 모두 철회시켰기 때문에 호량좌(胡良佐) 등이 모두 파직되었습니다. 태학생 호환유(胡煥猷)가 소장을 올려 각료(閣僚)인 황입극(黃立極)·이봉래(施鳳來)·장서도(張瑞圖)·이국진(李國搢) 등이 위충현에게 부회한 죄를 논하자 네 정승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으므로 칙서에 서명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신의 출발이 열흘이나 더 지체되었습니다. 황상께서 호환유가 본분을 벗어나 망령되이 말했다는 것으로 죄주자 네 정승이 도로 나아와서 시사(視事)하였는데 황입극이 일곱 번이나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자, 허락하였습니다.
풍성후(豐城侯) 이승조(李承祚)가 소장을 올려 모장(毛將)을 포장할 것을 청하면서 그의 공은 큰데 상은 작다는 것을 극언하였는데, 진영(鎭營)을 옮기는 의논을 막으려는 의도가 현저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황상께서는 허망한 말로 은혜를 팔려는 짓이라고 분부하였고 병과(兵科)에서도 그가 함부로 떠들었다고 참핵하였는데 황상의 만 리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둔위(前屯衛)에 불이 나서 군자(軍資)와 군기(軍器)를 전부 태워버렸고 민가에까지 불이 번져 화재를 입은 인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이 전둔위는 바로 산해관 밖의 중진(重鎭)인 영원위(寧遠衛)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하의 불행인 것입니다.
신들은 12월 14일에 출발하여 정월 4일에 등주(登州)에 도착하였고 20일에 배를 타고 2월 8일에 증산(甑山)에 상륙했습니다. 신이 녹도(鹿島)에 도착하니 우리 나라의 인민으로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도망하여 이 섬에 표박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12인을 데리고 나와 배타는 곳에 내려놓고 지방관에게 인계하여 진구(賑救)하여 살리게 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2월 12일 갑진
양사가 합계하기를,
"혼조(昏朝)의 간흉들이 윤리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병들게 하며,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이야말로 온 족속을 주륙시켜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반정한 뒤에 특별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었으므로 지금 그의 무리들이 번성하여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을 고치기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하며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악독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민심을 동요시키는가 하면 더러는 뜻을 잃은 무리들과 연계를 맺고 모의하여 난역(亂逆)을 멋대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처치하지 않으면 국가의 화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역적 이이첨(李爾瞻)·정조(鄭造)·유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의 형제 자손과 죄인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유희발(柳希發)·박정길(朴鼎吉)과 전후 역옥에 관계되어 처형된 자의 자손들은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았더라도 모두 외딴 섬에 위리 안치시키고, 이미 먼 변방으로 정배하여 배소(配所)에 가 있는 자일지라도 위리 안치시켜 내외 사람들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역당 중에 더욱 친절했던 자들은 이미 정배되었다가 사면을 받아 양이(量移)시켰거나 방환시켰더라도 다시 멀리 귀양 보내어 난역의 싹을 두절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들의 형제 자손으로서 노안(奴案)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지금 초출해야 하겠는데 그들의 손자는 더러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본부에서 이들을 알 길이 없습니다. 경외(京外)로 하여금 일일이 색출하게 하여 그의 의거 처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여 본부에서 독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신·양사와 회동하여 의논해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자신(柳自新)의 사위와 손자도 똑같이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유자신의 사위 이덕일(李德一)은 작고한 지 이미 오래고 조국필(趙國弼)은 전에 이미 영일(迎日)로 정배했다가 다시 삼수군(三水郡) 어면보(魚面堡)로 이배(移配)하였고 김시보(金時輔)는 부령(富寧)으로 정배하였는데, 모두 위리 안치시켰습니다. 손자는 유자신의 외손인 것 같은데 감히 독단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서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외손들 가운데 연장자는 역시 정배시켜야 한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죄를 지은 술사(術士)들을 변방 고을에 정배하지 않는 데에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죄인 남응민(南應敏)은 오랫동안 왜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왜인들과 잘 알고 있으니 이제 왜국과 가까운 남쪽 변방에 둘 수 없습니다. 금부로 하여금 다른 도의 궁벽한 고을로 이배시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강화 유수 심기원(沈器遠)이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조가 상이 재결하여 주기를 계청하니, 답하기를,
"개차(改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광해가 여러 날 식사를 하지 않아 기식이 엄엄하여 조석도 보존하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심기원은 훈척 재신으로 친신(親信)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자초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소장을 올려 사직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혼궁(魂宮)에서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 사묘(私廟)에 부묘(附廟)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오례의》의 의주를 조사하여 보니, ‘담제(禫祭)를 지낸 뒤 길제(吉祭) 때에 부묘하는데 길제는 곧 시향(時享)이다.’라고 했습니다. 담제를 지낸뒤 시향 때에 부묘하게 된다면 그 시기가 5월이 되는데 이는 너무 먼 것 같습니다. 담제를 지낸 뒤 특별히 길일을 가려 제사지내고 부묘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3일 을사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이 살던 곳의 수령을 파직시키고 읍호(邑號)를 강등시키는 일에 관해서 금부가 조사하여 기록해서 본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전 충주 목사 이식(李植), 죽산 부사(竹山府使) 정문익(鄭文翼),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일원(李一元),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위국(李緯國), 진천 현감(鎭川縣監) 홍무적(洪茂績),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후배(李厚培) 등은 모두 승전(承傳)에 의거 조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충주목은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시켰는데 죽산부·평산부·용인현도 모두 마땅히 현감으로 강등시켜야 합니다. 또 역적 조헌립(趙憲立)은 양지현 사람이고 임덕발(林德發)은 진천현 사람이니 이 두 고을은 법에 있어 당연히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양지는 일로(一路)의 역참(驛站)이 있는 곳이고 진천은 인물이 많고 지역이 넓어 본디부터 암읍(巖邑)으로 일컬어진 곳이어서 다른 고을과 합병시키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법전에 관계된 일이므로 해조에서 감히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역적들이 우거하고 있던 고장은 전에 공사(公事)를 복계(覆啓)하면서 분간하여 조처해 달라는 뜻으로 진달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배시킨 곳으로 말하면 우거했던 곳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이것도 아울러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양지 등 고을에 대해서는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과 삼공이 모두 아뢰기를,
"양지·진천 두 고을은 혁파할 수 없는 것이 진실로 해조가 아뢴 내용과 같은 것으로서 혁파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충청도를 공청도(公淸道)라고 고치고 감사·병사·수사와 충원 현감의 병부(兵符)를 모두 다시 만들어 내려보냈다.
비국이 아뢰기를,
"진위현(振威縣)에서 첩보하여온 것을 보건대 진도(珍島)에 정배되어 있던 호인 6명이 도망하여 나온 것을 본현 사람이 체포하였는데 이들은 병인년013) 에 오랑캐로부터 도망하여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당초에 조처하기가 곤란하여 이곳에다 정배하였던 것인데 바다를 건너 도망하여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심중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배소로 되돌려 보내더라도 이들이 북쪽으로 오랑캐에게 도주하거나 서쪽으로 모영(毛營)에 들어간다면 필시 뜻밖의 환란을 야기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도망쳤던 자들이니 법으로 따지면 사형에 해당되는데, 선전관을 보내어 모두 처형하게 하소서. 그리고 정배된 사람을 잘 간수하지 못하여 도주하게 한 것이야말로 매우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진도 군수는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진위 현령과 체포한 사람은 해조로 하여금 논상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왜노를 응접하는 것은 지금 이미 정해진 법이 있는데다가 그들에게 음식을 공궤하고 물품을 증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경상도에 위임되어 있으니 일일이 받아들여 제때에 수응하면 부족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각 고을의 수령이 이를 심상하게 여겨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이 점점 많아졌으므로 공무역의 값도 제때에 채워주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공궤할 때 진열하는 등의 물품까지도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마다 나아오는 선박(船舶)이 기한이 넘도록 더 머물게 되어 이 때문에 소비되는 식량이 그지없이 많으므로 먼 데서 온 사람들로 하여금 늘 유감스런 말을 하게 만드는데, 이는 왕자로서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왜노들은 성질이 교활하고 급하여 뜻밖의 환란을 야기시키며 이를 핑계로 삼을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후로는 각별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왜관에서 수용할 물품을 일일이 동래부로 수납하게 하고 매달 초에 받아들인 숫자를 본도의 감사에게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면, 감사는 삼월·유월·구월·섣달초에 이를 책자로 만들어 해조로 올려 보내게 함으로써 뒤에 빙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하소서. 그리고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이 극심한 고을을 조사해 내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경상 감사와 동래 부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조 참판 홍서봉(洪瑞鳳)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4일 병오
예조가 아뢰기를,
"전례를 상고해 보니, 황제가 등극하고 조서를 반포한 다음날 우리 나라에서는 진하하고 팔방에 교서를 반포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번에 황제가 등극한 것은 바로 천하가 다같이 경사스럽게 여기는 것이니 조서를 반포한 다음날 진하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예절을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서를 반포한 뒤에는 으레 사은사의 행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西路)가 탕잔된 상황이므로 사신들이 타고 갈 선척과 격군(格軍)도 정제하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과거 임술년014) 에 오윤겸(吳允謙)이 등극사로 연경에 갈 적에 사은사의 임무도 겸임시켜 보냈었는데,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 하소서. 대신들도 이렇게 하는 것을 온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금부가 아뢰기를,
"정배된 죄인 가운데 아직도 배소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죄가 중하여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이고 은전을 입어 양이(量移)시켰거나 방환시킨 자들은 아직도 배소에 있는 자들보다 죄가 가벼운 자들입니다. 따라서 내지에 정배된 사람은 본래 위리 안치한 전례가 없고 원도(遠道)로 이배(移配)시킨 뒤에야 위리 안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도에 귀양보낸 자들은 더 먼 변방으로 이배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들의 의견도 이러하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원도에 귀양보낸 사람은 위리 안치시키고 양이한 죄인은 원도에 귀양보내고 이미 방환된 사람은 우선 그대로 두라."
하였다.
우치적(禹致績)을 함경 북도 병사 신감(申鑑)을 강화 유수로, 김경(金坰)을 낭천 현감(狼川縣監)으로 삼았다. 김경은 상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친구이므로 은총이 매우 융숭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삼가 강화의 위리 안치한 곳의 별장 권득수가 치계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위리소 안에 서찰을 통한 정상은 매우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본부에 수금되어 있는 유식(兪湜) 및 자금(自今)·돌금(乭金)과 관비 도난(道難), 사노 정독손(鄭禿孫) 등을 도사(都事)를 보내어 금부로 잡아다가 추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관비 금개(今介)는 포도청으로 하여금 탐문하여 체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권첩(權怗)이 가지고 온 예부의 등황 조서(謄黃昭書)015) 를 살펴보건대 황후(皇后)를 이미 책립하였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아울러 진하하는 예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천계 황후(天啓皇后)016) 에게도 예물이 없을 수 없으니 또한 자성황 태후(慈聖皇太后)의 예에 의하여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새로운 규례에 관계되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과 삼공이 함께 아뢰기를,
"천계 황후는 새로 등극한 천자에게 어머니의 도리가 있으니 의당 자성 황태후의 예에 따라 예물을 진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황후의 책립에 대한 진하는 신들이 전의 법규에 대한 유무를 모르니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세히 조사하여 품지(稟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등록》을 가져다가 조사하여 보니 과거 임술년에 이현영(李顯英)이 성절사(聖節使)로서 동지사·사은사를 겸임하였는데 배표(拜表)하고 떠나간 뒤에 황후 책봉의 진하하는 문서와 예물을 승정원·호조 낭청이 추후 가지고 가서 교부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황후 책봉에 대해 진하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 합당하니, 문서와 예물을 등극사의 편에 가지고 가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기 감사 남이웅(南以雄)이 자신의 이름이 역적들의 입에서 거론되었다는 것으로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기를,
"신이 만상(灣上)에서 필요로 하는 종모(種牟) 9백 87석과 대미(大米) 2천 7백여 석을 선척에 적재시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1척의 배가 풍랑을 만나 패몰되었으니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금부가 정담(鄭湛) 등 멀리 귀양보낼 사람들의 단자를 입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방환시킨 사람은 우선 버려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모호하게 써서 들인단 말인가."
하였다. 회계하기를,
"박익장(朴益章)·박이장(朴以章)은 박홍구(朴弘耉)의 동성 삼촌 조카이고 이감여(李堪輿)는 이이첨의 처 삼촌 조카이고 유진정(柳震楨)은 박홍구의 절친한 친속이고 욱(澳)과 낙(洛)은 박내장(朴來章)의 처남인데다가 자신이 역적의 이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울러 정배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방환시킨 사람들 중에도 이이첨과 절친한 사람이 있으므로 양사가 논계하여 다시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신과 양사의 장관이 회의하여 그들 가운데 역적과 가장 절친한 자들을 초출하기에 이른 것이고 그중 죄명이 더욱 무거운 자는 멀리 귀양보내도록 의율(擬聿)하여 서계(書啓)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전교를 받들었으니 다시 대신과 양사로 하여금 회의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금부가 아뢰기를,
"말세의 인심은 교사스럽기만 하여 나이가 17, 18세에 이르렀어도 거짓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하면서 중죄를 면하려 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나이가 4, 5세가 되어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않은 아이를 먼 지방으로 보내어 그대로 위리 안치시킬 경우 반드시 사망할 걱정이 있게 됩니다. 대신들도 10세 이상은 먼 섬에 위리 안치시키고 9세 이하는 우선 소재지에 그대로 두었다가 나이가 장성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후 정배된 죄인이 한 고을에 10여 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족속이 무리지어 한 곳에 모여 있게 되면 세월이 오래된 뒤에는 관가에서 아무리 엄하게 검칙하더라도 안부를 묻는 서신의 왕래를 모두 잘 살필 수 없는 것은 물론, 이에 따른 뜻밖의 변을 미리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차지 않은 자나 11, 12세가 된 자라 하더라도 위리 안치시켜 출입을 못하도록 금한다면 반드시 말라 죽을 걱정이 있으니, 이들도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정속(定屬)시킬 무리들과 함께 모두 먼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한 고을에 2, 3명씩 두게 한 다음 그대로 본 고을의 노비로 정속시키고 위리 안치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모두 온전히 살 수 있게 되고 또 측은히 여기는 인자함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타당하다. 나이가 차지 않은 자들은 모두 위리 안치시키지 말아서 그들로 하여금 보존되게 하라."
하였다.
접대소가 아뢰기를,
"외방에서 들어온 중국인이 1백 20여 인인데 이들이 여염을 횡행하면서 격투를 벌여 상해를 입히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도 한 명의 중국인이 우리 나라 사람과 싸워 우리 나라 사람이 두개골이 깨어져 죽었는데도 중국인은 도리어 채소를 심는 사람을 잡아가지고 갔으니, 해조로 하여금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후로는 극력 개유하여 이런 걱정이 없게 하라."
하였다.
2월 16일 무신
호조가 아뢰기를,
"각도의 수조안(收租案)이 아직도 본조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전세(田稅)의 미두(米斗)의 실제 수량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만, 우선 연분(年分)의 총 수량을 계산하여 본다면 감축된 전결(田結)의 수가 1만여 결에 이르고 있습니다. 용도는 날로 번다해지는데 세입은 점점 감축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춘등(春等)의 녹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세미의 저축이 1백 석도 채 못되어 앞으로의 경상 비용이 진실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을축년·병인년의 삼세미(三稅米)017) 와 각종 작미(作米) 가운데 미납된 것이 5만여 석이고 경상도의 전세를 작목(作木)한 것도 미수된 것이 많은데 이는 모두 각도 각읍에서 태만하여 독촉해서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도 가운데 미납된 것이 더욱 극심한 고을을 적발하여 파출시킨 뒤에야 태만스런 습관을 경계시킬 수 있습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급급히 명백하게 조사 적발하여 계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한편으로 호서·호남 각 고을의 삼세미 미수분과 경상도의 전세를 작목한 것과 노비의 신공(身貢)을 본도의 도사로 하여금 독책하여 봉납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여 빠짐없이 상납하게 하고, 만일 완만히 하여 즉시 거행하지 않을 경우 도사는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고 해당 감영의 관리는 먼 변방에 정배시키소서. 이런 내용으로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을축년·병인년의 미수분을 일시에 독책하여 받아들인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반은 추수가 끝난 뒤에 거두어 들이게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영해(寧海)의 군사 진홍립(秦弘立)과 사노 산룡(山龍) 등은 30두의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여 금군, 면역첩(免役帖)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체력이 세다고 하지만 당초 아무런 공로가 없고 사천(私賤)을 면역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막중한 상인데 이렇게 경솔하게 시행한다면 공로가 있는 사람은 해이한 마음을 지닐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2월 17일 기유
예조가 아뢰기를,
"과거 만력(萬曆)018) 14년019) 에 하절사(賀節使) 배신(陪臣) 윤자신(尹自新), 하지사(賀至使) 배신 성수익(成壽益) 등이 회동관(會同館)에 묵으면서 불을 냈었는데 그 당시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였습니다. 이번 권첩(權怗)의 사행에서도 관소에다 불을 냈으니, 앞으로 갈 진향사(進香使) 편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강화의 죄인들을 이미 압송하여 왔으니 내일 궐정에서 추국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부로 하여금 추국하게 하라."
하였다. 이른바 죄인이란 광해를 위리시킨 곳에 서로 내통한 자들이다.
2월 18일 경술
헌부가 아뢰기를,
"오늘 추국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본부의 당상관 두 사람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자 명초하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음으로써 옥사의 추국을 지체시켰습니다. 그들 질병의 경중은 알 수는 없지만 사체에 있어 매우 경악스러우니 중한 벌로 추고할 것을 명하소서.
병란을 겪은 뒤에 임시로 관에서 시관(試官)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폐하고 각자 식사를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형편상 일시에 모두 도착하지 못할 뿐더러 문을 자주 여닫게 되므로 서리(胥吏)들이 출입하면서 부정한 짓을 저지를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별시(別試)를 보일 적에 해사로 하여금 시관의 음식 제공을 간략히 마련하게 하고, 또 거느리는 하인의 숫자도 1인을 초과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무기를 마련한 것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직분상 해야 할 일이고 물력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상으로 가자하는 것은 실로 과람스러운 것입니다. 요행을 노리는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감(申鑒)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합사(合司)로 논계하여 공론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때에 비록 작은 병이 걸렸더라도 스스로 조리하면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대각에 있으면서 규찰하여 바로 잡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서로 잇따라 소장을 올려 분분하게 병을 핑계대고 있으니, 태만스런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성천(成川)의 신임 부사 유응형(柳應洞)은 어리석고 패망스러우며, 전에 수사(水使)로 있다가 낭패당한 지 오래지 않았으니 관방의 요새인 중진(重鎭)을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그 대임(代任)은 문관 중에서 각별히 가려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강화의 죄인을 잡아온 지 하루가 지났는데, 추국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것을 지체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판의금부사 서성(徐渻), 동지사 이경직(李景稷)이 모두 병을 핑계대고 사진(仕進)하지 않았는가 하면 명초한 뒤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아울러 추고하소서. 그리고 도망중에 있던 죄인 하영남(河永男)이 이미 체포되었으니 조속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부 당상의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오늘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응형은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했고 또 재주도 있으니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무기를 넉넉히 준비한 자에게 특별히 중한 상을 내리는 것은 본시 전례가 있는 것이니, 환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유응형의 일은 뒤에 따랐다.
상주(尙州)의 정병(正兵) 이유형(李有亨)이 중국인에게 피살되었는데,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고변한 사람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녹과(祿科)가 이미 지났으므로 미처 녹직(祿職)을 부여하지 못했는데, 해조로 하여금 요미(料米)를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아울러 조속히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자신의 이름이 누차 역적의 입에 거론되었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판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이 자신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 거론되었다는 것으로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역적의 괴수 유효립(柳孝立)은 정창연의 처조카이다.
행 사직(行司直) 최관(崔瓘)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뜻밖에 악명(惡名)을 입고 하마터면 불측한 지경에 빠질 뻔하였습니다만 성상의 조감(照鑑)이 너무도 분명하시어 신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불문에 부치라는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가슴속에 다진 한 마음은 목숨을 바쳐 보답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만 죄를 받아야 할 몸으로 감히 복합(伏閤)하고 있는 조정 신하들의 반열에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으니, 신을 삭직시켜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죄가 없는 사람은 벌을 면해주고 억울한 사람은 신설시켜주는 것은 바로 예사로운 일인데 무슨 갚아야 할 은혜가 있단 말인가. 경은 흉적이 국가를 병들게 하기 위한 말에 대해서 개의하지 말고 안심하고서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2월 19일 신해
부제학 조익(趙翼), 수찬 오단(吳端)·이행원(李行遠) 등이 차자를 올려 신경영(辛慶英)과 이윤남(李胤男)을 훈적(勳籍)에서 삭제시키고 영사 공신(寧社功臣)020) 의 녹훈도 매우 외람되니 다시 조사하여 결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였다.
"이미 조사하여 결정했는데 이제 와서 고치기는 어렵다."
비국이 아뢰기를,
"요동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우리 나라에 와서 의식을 제공받으면서 도리어 무리를 지어 멋대로 돌아다니며 인명을 구타하여 살상하기도 하고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므로 경외(京外) 사람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있는 곳에 단속을 엄하게 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은 물론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으면 모두 잡아다가 단죄(斷罪)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런 내용을 그쪽 차관에게 갖추 말하여 사적으로 비호하는 일이 없게 하고 한편으로는 모영(毛營)에 이자(移咨)하여 차관이 잘 단속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금부가 대신 및 양사의 장관과 의논하여 아뢰기를,
"윤이진(尹以震)은 역적 윤인발(尹仁發)의 조카이고 권여경(權餘慶)은 혼조(昏朝) 때 권 숙의(權淑儀)의 아비로 모두 이이첨의 무리와는 철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성상의 분부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나머지 정담(鄭湛) 등 15인은 적당에게 빌붙어 대간이나 시종으로 출입하였으니 모두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최흥선(崔興善)은 혼조에 아첨하여 폐단을 일으켜 해를 끼쳤으므로 제주(濟州)에 정배했었는데 사면을 받고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천은(天恩)은 생각하지 않고 거짓말을 만들어 내어 민심을 동요시켰으니 멀리 귀양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로 전의 배소에다 정배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조방직(趙邦直)을 사간으로, 권도(權濤)를 집의로, 고부천(高傅川)·임효달(任孝達)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0일 임자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역적 이효일(李孝一)의 초사(招辭)에 ‘인성(仁城)이 간성(杆城)으로 귀양가 있을 적에 자전(慈殿)께서 내리신 글에 멀리 떠나가 있으므로 안스럽게 여긴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지난해 호변(胡變)이 있을 적에 인성이 그 글을 영안위에게 전하여 보이고 이어 병판(兵判)에게 보이게 하였는데 전하여 보였는지의 여부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경악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역적 이공(李珙)이 무오년021) 정청(庭請) 때에 의논을 올려 자전을 시해하기를 청하였으니 윤기(倫紀)에 죄를 짓고 자전에게 단절당한 지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자전께서 글을 내렸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것으로서 그가 자전을 가탁하여 거짓말을 만들어 마치 자전께서 죄를 용서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려 했던 것인데, 그의 흉모와 간계가 너무도 간교합니다. 그리고 자전께서 철저히 국문하라고 추국청에 하교하기까지 하였으니 자전께서 공에게 글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변핵할 것도 없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고, 신이 그 글을 보지 못했으니 병판에게 전하여 보이게 했다는 말은 더욱 변명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이름이 이미 흉적의 공초에 나왔으니 어떻게 감히 말이 자전께 저촉된다는 것을 핑계삼아 한마디도 변백하지 않고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사패(司敗)에 내려 역적과 대질하여 변백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병조 판서 이정구(李廷龜)도 소장을 올리기를,
"신의 이름이 이미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를 변백하기 전에는 어떻게 일각인들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을 사패에 내려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상이 아울러 답하기를,
"흉도들이 가탁하여 속이려 한 말에 대해서는 변백할 것도 없으니, 경은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지금 듣건대 역적 이효일의 초사(招辭)에, 광해의 글을 신에게 전하려 했으나 신이 비천하고 소원하기 때문에 끝내 전하여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전하여 보이지 않았다고 했으니 신은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만, 이름이 흉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일각인들 숨을 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사패에 내려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적의 초사에 경의 이름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에게는 조금도 간여된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행공하라."
하였다.
평안 병사 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였다.
"호차(胡差) 고아부(高牙夫)가 수종하는 호인(胡人) 6인을 인솔하고 15일 밤중에 임반(林畔)에 도착하여 발마(撥馬)를 독책해서 타고는 즉시 곽산(郭山)의 동쪽 길에 있는 역참으로 향했는데, 쌀을 사기 위해 나온 당인(唐人) 수십 명이 발막(撥幕) 근처에 모여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호차가 나왔으니 그대들은 삼가 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나, 당인들은 끝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대로 유숙하면서 밥을 짓다가 과연 호차와 마주쳐 피살된 사람이 4인이고 그 나머지는 도피했다고 합니다."
2월 21일 계축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언서(諺書)로 대신과 국청에 하교하였다.
"흉적이 이미 흉참스런 말을 했으므로 철저히 국문하여 말의 출처를 알아내려 했었다. 그런데 이제 또 놀라운 말이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영안위와 병판이 모두 소장을 올려 진달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분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흉서(凶書)가 공에게 있다고 하니 즉시 잡아다가 국문하여 찾아내서 이 말을 통렬히 변핵하려 한다. 국청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대전(大殿)께 아뢰어 조처하게 하라.
그가 이미 인륜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인심이 열복하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이 글을 가탁하여 마치 내가 이미 저에 대해 모든 것을 풀어버린 것처럼 하여 흉도들에게 들려주려 한 것이니, 매우 통분스럽다. 내가, 골육을 보전시키려는 대왕의 마음을 몸받아 강상죄를 다스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공주(公主)022) 가 10년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비로소 밖으로 나왔는데도 이공(李珙)과 이제(李瑅) 등은 끝내 찾아와서 만나보지 않기에 나는 늘 저들이 이미 죄를 졌기 때문에 가서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미망인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다시 밝은 태양을 보게 되었고 이미 부형의 수모를 씻었으니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계신 부형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으나 스스로 자결하지 못한 채 모진 목숨을 아직껏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역적의 입에 거론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뼈가 녹는 것만 같아 공을 잡아다가 국문하고 그의 앞에서 자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나의 모친(母親)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지난날의 원통함을 잊고 애써 모친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 늘 즐거운 모습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데 나의 소원이 이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단지 주상이 평안하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삼사(三司)와 백관이 복합(伏閤)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주상께서는 소절(小節)만을 돌아보면서 아직도 윤허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미안스럽다. 원컨대 경들은 극력 진달하여 기어이 주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익산 군수(益山郡守) 이유경(李有慶)은 나이 70이 넘어 정력이 쇠잔하였으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직임을 맡기기 어렵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대신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변이 잇따라 일어났으나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아 역도들이 자복하였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걱정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역적의 자손들과 잔당들을 처치한 일은 실로 어진 사람이라야 죄인을 멀리 내칠 수 있다는 의리에 부합되는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외손(外孫)을 아울러 연좌시키는 것은 법전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광해 때에 최기(崔沂)의 외손을 귀양보내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것을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일 죄줄 만한 일이 있으면 그 자신의 죄로 처벌해야지 외손이라는 것으로 연좌시킨다면 비단 백성들이 듣기에 당혹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이는 법전 외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이처럼 앙품(仰稟)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차지 않은 자들은 위리 안치시키지 말 것을 금부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으니, 하늘 같은 성덕(聖德)에 미물들도 보존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부류로서 멀리 귀양보낼 자의 숫자가 상당히 많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해관(該官)의 명부 가운데 나이가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없지 않을 것인데 만약에 나이의 착오로 멀리 귀양가게 되는 자가 있을 경우 이에 대해 또한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금부로 하여금 일일이 탐문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최기의 옥사는 오늘날의 일과는 다르니 최기의 외손에다 비교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대신의 의견이 이러하니 정배할 것은 없다."
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삼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계미년023) 에 북도(北道)에 오랑캐의 변란이 있은 이후로 조정이 여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강원도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를 이곳으로 운반하는 일에 대해서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 무오년에 조정의 계책이 북도에 대해 깊이 우려하여 마치 조석 사이에 병란이 있을 것같이 여겼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삼도(下三道)의 군사들은 교대로 북도에 수자리 살게 하였는데 그 숫자가 이루 셀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군량을 계속 잇대기가 어려워 이에 영동 아홉 고을의 전세를 운송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사세가 전과 달라서 북도는 대체로 평안하고 조용한 지역이 된 반면 양서(兩西) 지방은 말할 수 없이 판탕되었습니다.
경창(京倉)의 곡식이 바닥이 났는데, 동래(東萊) 왜인에게 물품값으로 지급해야 할 포목(布木)이 1천 동뿐만이 아닙니다. 정묘년 조의 전세를 포목으로 바꾸어 전 수량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부족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되면 해조에서 경비로 쓸 포목은 또 어디에서 판출(辦出)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량미(唐糧米)는 오로지 모병(毛兵)을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더더욱 북도로 운송하여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1, 2년을 기한으로 영동 아홉 고을의 삼세미(三稅米)와 당량미를 북도로 운송하는 것을 우선 정지하고 전 수량을 포목과 바꾸어 경창에 납입케 하고서 절반을 쌀로 바꾸어 서쪽으로 운송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2일 갑인
비국이 아뢰기를,
"역변이 괴산(槐山)과 충주(忠州)에서 일어나자 이들을 체포할 적에 극도로 소란스러웠었는데, 이제 조희맹(趙希孟)의 상소에 따라 또 체포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섬멸되지 않은 잔당들이 반드시 불안하게 여길 것이고 무지한 백성들도 반드시 놀라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효유하여 편안히 업무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농시(農時)를 잃지 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루 탐문하여 죄없는 사람이 횡액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부수찬 김남중(金南重)은 소장을 잇따라 올리는 이때를 당하여 병이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소장을 올려 휴가를 청하기까지 하였고 온화한 비답을 받들고도 출사(出仕)하지 않았습니다. 연소배들의 태만스런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금 고변인들에게 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본조가 금부에 물어보았더니, 고변한 사람은 신서회(申瑞檜)·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황진(黃縉)·허선(許選)·이두견(李斗堅)·최산휘(崔山輝) 등 7인인데 황진은 전에 이미 직을 제수받았고 허선·최산휘·김진성은 학생(學生)이고 신서회·김득성은 서얼이고 이두견은 사천(私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직을 제수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6품의 실직을 아울러 먼저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유배된 사람들이 멋대로 배소를 이탈하고 있는데도 방백과 수령들이 전혀 검칙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다. 이후로는 각 고을로 하여금 자주 점검하여 멋대로 배소를 이탈한 자가 있으면 그 즉시 치계하여 중률(重律)로 논하게 하고, 수령들 가운데 사정(私情)에 따라 보고하지 않는 자도 모두 적발하여 계문하라."
신경원(申景瑗)이 고아부(高牙夫)가 가지고 온 금(金)나라 한(汗)의 글을 치계하였는데, 그 글에,
"금국의 한은 조선 국왕(朝鮮國王) 아우에게 글을 보냅니다. 이제 두 나라가 이미 한 나라를 이루어 중강(中江)에다가 크게 개시(開市)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우리의 동쪽 변방 백성들이 원래는 회령(會寧)에다 개시했었는데 이제 이곳에 개시한 것을 보고 모두 회령으로 가서 무역하려 하지만, 왕명(王命)이 없으면 회령의 관리가 어떻게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유를 갖추어 미리 알리니 윤당하다고 여기면 명을 내려 회령의 관리로 하여금 속히 준행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제 호서(胡書)를 보건대 ‘회령에다 개시하였다.’ ‘윤당하다고 여긴다면’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긴요하게 여겨 기필코 해야겠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아부가 신경원에게 말하기를 ‘중남(仲男)이 자기의 부모를 만나보려고 자로(者老)와 함께 회령으로 갔다’고 하니, 이런 것으로 헤아려 본다면 한(汗)의 본의가 아닌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속히 승문원으로 하여금 답서를 짓게 하되 그 내용은 ‘전에는 육진(六鎭)에 살고 있는 번호(藩胡)가 매우 많았으므로 온 나라의 장사치들이 그 곳에 많이 모여들어 물화가 폭주(輻輳)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임진 왜란을 겪고 나서 번호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매매를 행하지 못한 지가 오래이다. 그런데 동쪽의 호인들이 이곳에다 개시하기를 청하는 것은 필시 옛일만 알고 지금의 상황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중강에 개시를 허락한 이상 어찌 이곳에는 허락하면서 저곳에는 허락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양서(兩西) 지방이 새로 병화를 겪어 재화의 저축이 아주 없는 상황이므로 중강의 개시도 제대로 모양을 이룰 수 없을까 싶은데, 더구나 회령의 텅빈 곳이야 어떠한 사람과 물화로 시장을 이루어 매매할 수 있겠는가. 자로와 중남 등이 이미 회령으로 갔다고 하니 필시 그런 상황을 직접 보고 와서 입으로 말할 것이고 수다스런 변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반드시 시장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을 만드는 데 있어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답서를 지을 적에 상의하여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소장을 올리기를,
"모역이란 것이야말로 어떠한 죄명이겠습니까. 따라서 그것에 관련된 자들은 법에 있어 당연히 복주되어야 하고 복주되지 않으면 국문을 해야 하는데 성은(聖恩)이 한결같이 비호하여 처음에는 불문에 부치라는 분부를 내렸고 다시 윤음(綸音)을 내려 총애롭게 타이르셨으니, 신은 놀랍고 황송하여 감격한 나머지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신하의 분의로서 진정 다시 사퇴하는 소장을 올려 엄한 질책을 간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임무를 받들어 수행해 온 지가 이미 2년이 지났건만 털끝만큼도 보익한 것이 없고, 근력이 이미 쇠진하여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가슴에 뛰는 기맥일 뿐입니다. 병으로 몹시 아플 적에는 반드시 부모를 외쳐 부르기 마련이니 신을 파직시키시어 공적이나 사적이나 모두 온편하게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재주가 많고 청렴하므로 이런 때에 중임을 맡기기에 실로 합당하기 때문에 내가 늘 적임자를 얻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경이 지금 굳이 사퇴하려 드니 내가 실로 서운하게 여긴다. 역적의 흉언에 대해 개의하지 말고 병이 있더라도 조리하면서 직무를 수행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충의위 이원(李源)에게 직장(直長)의 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는 도망중에 있던 역적 하영남(河永男)을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2월 23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종묘 령(宗廟令) 채형(蔡衡)은 일찍이 ‘은을 뇌물로 받은 대간[受銀臺諫]’이라는 비난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었는데, 사판(仕版)에 끼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본직에 제수되자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채형에게 그러한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 이미 오명을 씻었다. 그리고 종묘 령은 청요직(淸要職)도 아니니 너무 심하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대간이 다음날 잇따라 아뢰니 상이 이에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역적을 전정(殿庭)에서 국문하는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겨서일 뿐만이 아니라 국문하고 옥사를 품의할 적에 왕명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고 죄인이 실정을 자백하는 데 있어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옥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면 긴하지 않은 죄인은 금부에서 국문하는 것도 하나의 전례입니다. 지금 강화의 위리시킨 곳에 서찰을 내통한 죄인 8인, 괴산(槐山)의 죄인 10인, 안우선(安友善) 등 3인이 있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안우선 등은 괴수인 것 같은데 금부에서 심상하게 추국함으로써 자백을 지연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우선 등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궐내에다 국청을 옮겨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였다.
"궐정 추국이 있고 나서는 각사가 오랫동안 개좌(開坐)하지 않고 있는데 이후로는 추국을 일찍 파한 날에는 각사(各司)로 하여금 개좌하게 하라."
2월 24일 병진
비국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 신감(申鑑)의 치계에 의하면 ‘통진(通津)·김포(金浦)·부평(富平)·인천(仁川)·풍덕(豊德) 등 고을의 군병을 모두 본부(本府)에 예속시켜 똑같이 조련시키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체신(體臣)이 총융사(摠戎使)와 이미 의논하여 결정한 것으로서 단지 품하여 시행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신감의 의견도 이와 상부되니 이에 의거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고을은 모두 큰강에 가로막혀 있는데 예속시킨 뒤에 조련하는 일로 늘상 소집할 경우, 강을 건너 왕래하게 되어 군사들의 원망과 고통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각 고을의 장관(將官)들로 하여금 각자 조련시키게 하고 강화의 중군(中軍)이 농한기에 순찰하면서 검칙하고 교련시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면 장관과 군졸들이 통속되어 있는 장수를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급할 때 조발하여 쓰는 데에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총융사와 강화 유수에게 행회(行會)하소서."
하였다. 상이 따랐다.
2월 25일 정사
예조가 영조(迎詔)에 대한 의주(儀註)를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천사(天使)가 나왔을 때의 의주와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의 의주는 한결같이 《오례의》에 따라 마련한 것으로서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와 다른 것은 단지 교외에서 영조할 때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하는 것과 조사에게 머무르기를 청하는 두 조항입니다. 그러나 오배 삼고두의 예절은 본디 《오례의》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조종조 때 어떤 조사가 강제로 오배 삼고두의 예절을 거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모두 《오례의》를 적용하여 국궁만을 행하였는데, 성헌(成憲)이 조사로 나왔을 적에 전일 본국에서 행한 의주를 보이자 그가 전례에 따라 행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또한 억지로 오배 삼고두의 예절을 행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 사신이 조서를 받들고 왔으니 조사가 가지고 왔을 때의 행례와는 다릅니다. 때문에 이렇게 마련한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초토신(草土臣) 김신국(金藎國)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반정(反正) 초기에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중직(重職)을 제수받았고 돌보아 대우해주심이 날로 깊었으므로 수년 사이에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 직무에 마음을 다하여 성은(聖恩)에 보답할 것을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신의 성명이 누차 흉적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거적을 깔고 대죄하고 있은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엄한 명은 내리지 않고 끝내는 안심하라는 분부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크고 넓은 성은은 천지와 같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신하의 분의에 있어 이미 흉적에게 이름이 거론되었으면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왔더라도 경에게는 조금도 간여된 것이 없으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독부(督府)의 차관인 모사대(毛士玳) 등이, 강홍립(姜弘立)이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임무를 띠고 나온 것 때문에 경성(京城)으로 가야겠다고 하여 신이 말을 만들어 만류시켰습니다. 그들의 표문(票文)을 등서하여 올립니다."
했는데, 이를 비변사에 내렸다.
호조가 아뢰기를,
"강화 유수 신감(申鑑)이 일찍이 탑전에서, 공청 우도(公淸右道)의 쌀을 강도로 운송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했다가 겨울이 지난 뒤에는 이를 경창(京倉)으로 운송하여 들이도록 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세로 보아 가장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경창에 있는 미곡은 수개월의 비축도 없으므로 핍절될 걱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그리고 백관들의 봉록과 군병들의 양향(糧餉)을 전적으로 양호(兩湖)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인데, 우도의 미곡에 대한 조운(漕運)을 삭제시킨다면 장차 무엇으로 일용의 경비를 잇댈 수 있겠습니까. 우도의 미곡은 결단코 강도로 운송해서는 안 되고 서서히 금년 가을의 사세를 살펴보아 경창의 미곡으로도 비용을 잇댈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양호의 어떠한 작미(作米)를 본부(本府)에 적당히 유치(留置)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신감에게 의논하였더니 신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기종·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안주(安州)·숙천(肅川) 사이에 돌림병이 치성하여 출신(出身)인 경 포수(京砲手) 중에 사망자가 매우 많은데, 경 초관(京哨官) 김인박(金仁博)도 사망했습니다. 연하(輦下)의 친위병은 다른 군대와는 동등하지 않은 것인데 멀리 변방에서 수자리 살다가 잇따라 병으로 죽었으니, 매우 가련합니다.
그리고 안주에는 군량이 현재 핍절되었는데 앞으로 결코 이어댈 만한 길이 없습니다. 듣건대 도감에서 교대시키기 위해 행장을 꾸리게 하여 경 포수 2초(哨)를 교체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안주에 머물러 방수하고 있는 경 포수 5초 가운데 2초는 우선 그대로 머물러 두었다가 교대자들이 도착한 뒤에 방송(放送)시키고 그 나머지 3초는 곧바로 먼저 방송시키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군량이 모자라는 폐단을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목전의 다급한 상황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2월 26일 무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영조(迎詔)하고 숭정전 뜰에 돌아와서 영조례(迎詔禮)와 반조례(頒詔禮)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상이 부묘(袝廟)할 때의 의주에 대해 하교하기를,
"부묘제를 대원군(大院君)에게만 거행한다면 부묘제라고 할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마련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예문을 상고하여 보니, 부(祔)한다는 것은 옮겨다 모신다[附]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의 묘제(廟制)는 소목(昭穆)의 자리가 있어 비(妣)의 신위(神位)는 증조비(曾祖妣)의 신위 아래 모시게 되어 있는데 지금의 묘제는 옛날과 같지 않아 이미 소목의 자리가 없습니다.
평상시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옛날의 예를 따라서 부묘제를 지내는데 단지 부묘하게 되는 망인(亡人)의 조고(祖考)·조비(祖妣)의 신위에만 지낼 뿐 선대(先代)의 여러 신위가 있더라도 다른 신위에는 모두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지금 혼궁(魂宮)의 신주는 이미 부묘해야 할 소목의 자리가 없고 단지 대원군의 신위에만 부제할 수 있으므로 합쳐서 부제를 지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빈(仁嬪)의 신위에는 이미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부제를 아울러 거행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제를 지낼 때 대원군의 신위를 청사(廳事)로 모셔 내어 혼궁의 신위와 합동으로 부제를 지내는 것이라면 인빈의 신위에 함께 부제를 지내는 것은 더욱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정례(正禮)가 아닌 변례(變禮)에 관계되는 것이니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좌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김류(金瑬)가 의논드리기를,
"해조의 계사가 옳습니다."
하니, 상이 한결같이 《오례의》에 의거하여 행례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인빈의 신위에 함께 부제를 지내는 것은 예문(禮文)의 본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니, 절목 단자(節目單子) 가운데 다시 고쳐야 할 곳을 부표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등극 조서(登極詔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천 승운(奉天承運) 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린다.
짐(朕)은 하늘의 돌보심과 열성(列聖)의 비호해 주심을 입고 대행 황제(大行皇帝)의 유조(遺詔)와 내외 문무 신민들이 입을 모아 권하는 말을 따라 윤서(倫序)를 잇고 대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8월 24일 천지·종묘·사직에 공경히 고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내년을 숭정(崇禎) 원년으로 삼는다.
깊이 생각건대 일인(一人)이 보위를 잇는 처음에는 천하 사방을 똑같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대 조선국(朝鮮國)은 정성스럽게 성교(聲敎)를 준행하였고 대대로 충정(忠貞)을 지켰으며, 밖으로 큰 변란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안으로 천조(天朝)를 향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였으니 짐은 이를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 오랑캐의 분란이 평정되지 않아 마구 포효하며 독을 부리고 있는데, 짐과 국왕은 똑같이 설치(雪恥)하지 못한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마음을 다지고 있어서 마치 수레의 바퀴와 덧바퀴가 서로 의지하듯이 하는 우의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사전에 미리 대비를 철저히 하여 이어온 강토를 평안하게 하고 마음을 합치고 힘을 다해 나의 새로운 계책을 도움으로써 적을 몰아내고 평안을 되찾아 병석에 누워 있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일어나게 하고 적을 영원히 물리쳐 막아 태산이 숫돌처럼 닳고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도록 공고함을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법전을 상고하여 조서로 알리는 데 있어서 의당 특별히 사신을 보내야 하는 것이지만 접대와 비용 때문에 후인(侯人)에게 수고로움을 끼치게 될까 우려하여 이 한 장의 조서를 배신이 들어가는 편에 보내어 선시(宣示)하노니, 모두 알도록 하라."
접반사 남이공(南以恭), 문안사 이상길(李尙吉) 등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견관례(見官禮)를 거행하고 이어 연향례(宴餉禮)에 참석하였다가 물러나온 뒤에 도독이 장대추(張大秋)를 시켜 귀엣말로 전하기를 ‘통보할 일이 있어서 간첩(簡帖)으로 심복의 신하를 보내줄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두 분 배신은 모두 중신이니 감히 끝내 숨길 수가 없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한심스러워 차마 들을 수가 없었고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청하기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본의를 알고 나서야 주상께 아뢸 수가 있다. 그 내용을 기록하여 보여주기 바란다.’ 하였더니, 이 기록을 주었습니다. 신들은 그것이 믿을 수 없는 허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감히 방치할 수가 없어 원본을 동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그 수첩(手帖)에,
"밤에 천문(天文)을 관찰해보니 고려국(高麗國)의 군신(君臣)에게 매우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 있는데 모름지기 긴급한 방비가 있어야 될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한 말을 거듭 따르지 않으면 국왕에게 마침내 종묘 사직이 멸망하는 화가 있게 될 듯싶다. 본진(本鎭)은 일편단심으로 천조(天朝)의 사직을 위하고 고려국을 무마하며 반적(叛賊)들을 사로잡으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간신 윤훤(尹喧)·이완(李莞) 등이 서로 저해한 탓으로 국왕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본진과 국왕은 골육과 같기를 맹세한 사이인데 어찌 알면서 말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7일 기미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기를 의식에 따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예조에서 권첩(權怗)이 올려보낸 등황 조서에 황후가 이미 책봉되었으니 아울러 진하하는 예가 있어야 할 듯하다고 했기 때문에 이에 천계(天啓) 때의 구례에 따라 마련하여 아뢰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계 황제는 즉위한 다음해에 황후를 책립하였으니 그때 본국에서 특별히 위하례(慰賀禮)를 행한 것은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황후를 책봉한 것은 천계 때의 경우와 같지 않기 때문에 등극을 축하하는 문서와 방물(方物)을 어전(御前)·중궁(中宮)·천계 황후(天啓皇后)의 세 전(殿)에 이미 일례로 진정(進呈)하였으니, 다시 추후 책립한 천계 황후의 구례를 인용하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서 특별히 중궁전에 진하하기 위해 거듭 방물을 바치는 것은 예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미안한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이번 황후를 책립한 것이 즉위한 처음에 있었고 등극을 진하하는 방물을 어전과 중궁전에 아울러 마련했으니 책립에 대해 진하하는 뜻은 이미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중국의 책립을 진하하는 것은 역시 중첩된 것 같습니다. 정원의 계사가 소견이 없지 않으니, 계사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8일 경신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용골대(龍骨大)는 개시(開市)에 참여하기 위한 호인(胡人)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소두리(所豆里)는 수호군(守護軍) 3백 명을 거느리고 진강(鎭江)과 의주(義州)에 나왔는데 성중에는 본래 옮겨온 식량이 없으므로 1천 3백여 명을 공궤할 경비를 결코 수응할 길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이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체부(都體府) 종사관 김반(金槃)이 서계하였는데 모두 아홉 조항입니다. 속오(束伍)024) 에 편입된 군병들이 기예를 익히지 않고 무기가 정예롭지 못한 것은 호우(湖右)만 그러할 뿐 아니라 곳곳이 그러합니다. 군병에 이르러서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반반인데 그들에게는 본래의 신역(身役) 이외에 연습을 해야 하는 고통이 겹쳤기 때문에 도망하여 흩어질 폐단은 사세로 보아 필연적인 것이니, 보호하고 구휼하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호패(號牌)를 이미 파하여 통속된 데가 없는데다가 재력이 탕갈되어 은혜를 베풀 계책이 없습니다. 지금 이 점에 대해 우려하여 양반(兩班)들이 거느리는 노복과 연로한 자들을 면제시켜 주고 그들에게 미포(米布)를 거두어 군병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군병이 정예롭고 건장한 자들로 될 수 없음은 물론 군역(軍役)을 면하기 위해 권세가에게 귀속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급복(給復)하려면 팔도에 편성된 속오군이 거의 10만에 이르고 있는데 한 사람에게 수십 부(負)씩 주더라도 수만 결(結)이 됩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해조의 경비를 어떻게 조달하여 쓸 수가 있겠습니까. 당초 영장 사목(營將事目) 안에, 반드시 재예(才藝)를 완전히 익힌 뒤에야 계문하여 급복하게 한다고 한 것은 이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사목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여정(餘丁)에게 포목을 거두어 편성된 군병에게 지급하려고 했던 것은 그 의의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이미 거둔 것은 해조에 수납케 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지금까지 거두지 못한 것은 필시 도망하여 흩어진 사람들일 것인데, 지금 옮겨다가 지급하게 한다면 반드시 분요스러운 걱정이 있게 되어 시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을의 군병의 다소는 의당 인구의 중과(衆寡)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나주(羅州)·영광(靈光) 두 고을은 인민이 많은데 군병은 적고 진도(珍島)·능성(綾城) 등 여섯 고을은 인민이 적은데 군병은 많으므로 혹은 구차스럽게 충원시키기도 하고 탈루되는 폐단을 면치 못하기도 하여 군액(軍額)이 고르지 못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경상도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도내(道內)의 군액 상황이 이런 것을 보고는 변통시키기를 계문하고, 호패의 숫자에 의해 10분의 1을 뽑아 속오군에 편입시키자고 했는데 이것이 실로 군액을 충당시키는 좋은 계책입니다. 본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가부를 상의하게 하여 인민이 적은 데는 군액을 감하고 인민이 많은 데는 군액을 증가시켜 소요스런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수군(水軍)들의 고역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날로 유산(流散)되며 죽기를 작정하고 도피하는 것은 실로 그들을 침학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국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은 반드시 감사의 분정(分定)을 거쳐 각 고을에 알려서 수송해 오게 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따라서 군병들의 번가(番價)도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 본 고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차(營差)를 보내기 때문에 과외(科外)에 외람되이 징수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각 고을의 점사(店舍)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하게 침학하고 있는데 군관과 색리들이 일을 빙자하여 폐단을 부리는 정상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는 전부터 점인(店人)들이 감내하기 어려웠던 고충이었습니다. 지금 각도의 감사에게 행회하여 일체 통렬히 금단하게 하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계문하게 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양호(兩湖) 연해 지방의 선군과 격군은 새로 군적을 만들 때 이미 액수를 정하여 반포 시행했으니, 반드시 전일처럼 급박할 무렵에 조발했던 것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도(江都)의 일은 일시의 불행스러운 데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주(全州)의 고을은 보장(保障)이 될 뿐만 아니라 풍패(豐沛)의 고향이니 진실로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이 있으면 특별히 감면을 허락해야 됩니다. 말을 모는 일은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돌려가며 하도록 분정한 것은 그 역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각도가 다 그러하여 지금에 와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운 것인데, 혼조(昏朝) 때의 일은 지금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적을 새로 작성하는 일에 있어서 전주·무장(茂長)·홍주(洪州)·결성(結城) 등 고을은 군민(軍民)의 폐단을 이런 때에 변통시켜야 하는데, 군적청(軍籍廳)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시행케 하소서.
그리고 여산(礪山)은 일로(一路)의 곁에 있는 계수관(界首官)으로 주전(廚傳)의 공궤가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됩니다. 그런데 임진년 이후 후영(後營)을 설치하고 영장(營將)이 항상 머물러 있는가 하면 병사(兵使)도 매년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는데 한 고을에 두 장수를 머물게 하는 것은 사세상 감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중영(中營)으로 이속시키려 한 것은 소견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남은 고을이 많고 인민도 많은데 이미 전영(前營)을 혁파하고 또 후영을 줄인다면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겸하여 통솔하기가 불편합니다. 그러나 본도의 감사·병사에게 문의하고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도(珍島)와 영암(靈巖)은 백성은 적고 부역은 무거운데다가 흉년이 겹쳤습니다. 진도는 지금 역적 이공(李珙)이 유배되어 있는 곳으로 파수하고 순라하는 고통이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으로 사세가 전과는 아주 다르니, 사리상 특별히 구휼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상납하는 각종 미포(米布)와 영암의 미수된 쌀과 패선(敗船)된 쌀 등에 대해서는 해조로 하여금 복계하여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별도로 마련한 단자(單子)를 도로 올려서 성상의 재결에 대비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회답사 이란(李灤)·박난영(朴蘭英) 등이 의주(義州)에 돌아와서 치계하기를,
"신들이 용골대(龍骨大)·유대해(劉大海) 등과 1천 석의 쌀을 발매(發賣)하는 일에 대해 상의했는데,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화친을 맺었으니 말하는 것은 모두 따라야 하는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서로 버틸 수 있겠는가.’ 하므로, 누차 쟁변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유대해 등에게 말하기를 ‘화친하는 일을 이미 완결하였으니 사신의 왕래와 개시(開市)의 교역에 있어 당연히 일정한 법식이 있어야 한다.’ 하니, 유대해 등이 말하기를 ‘사신의 왕래는 1년에 몇 번으로 하고 개시의 교역은 1년에 몇 달로 정해야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답하기를 ‘사신의 왕래는 1년에 한번으로 하고 개시의 교역은 봄·가을에 두 달씩으로 하면 괜찮다.’ 하니, 유대해 등이 말하기를, ‘마땅히 한(汗)에게 품하여 정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한의 뜻으로 회답하기를 ‘사신의 왕래는 가을과 겨울에 각각 한 번씩하고 개시의 교역은 봄·여름·가을의 끝달로 세 번 하되 부득이 서로 통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이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고 교역할 때 값의 고하는 양국에서 각각 시장을 관리하는 사람을 보내어 서로 상의해 결정함으로써 피차에 억울한 일이 없게 한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또 유대해 등에게 말하기를 ‘귀국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 1백∼2백명을 되돌려 보내는 데 대해서 1천 석의 쌀로 사례하는 대가로 친다면 귀국에서는 보내기가 매우 쉽고 우리 나라에서는 소득이 매우 많은 것은 물론 우리들의 입장도 매우 영광스럽겠다 ’고 하니, 유대해 등이 즉시 한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포로가 된 사람들은 이미 갑군(甲軍)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매매하게 하였으니, 이제 와서 도로 빼앗기는 사세상 매우 곤란하다. 각기 그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사가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신들이 우거하고 있는 곳에 몰려와서 날마다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는데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이 사사로이 가지고 간 말과 한에게서 받은 인삼을 팔아 각각 두 명을 샀고 또 일행의 원역(員役)들로 하여금 각각 한 사람씩을 사게 하여 모두 22명을 사서 동행하여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혹 부모 형제가 없어 귀의할 데가 없다고 하므로 우선 사가지고 온 사람에게 맡겨놓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속환인(贖還人)들이 개시하는 곳에 도착한 자가 4백∼5백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는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이 많아 사올 수 없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헛되이 도로 돌아가게 한다면 이는 보기에만 참담하고 측은할 뿐만이 아니라 쇄환하는 길이 이로부터 끊기게 되고, 개시의 본의도 또한 허망한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용골대 등이 8명의 장관을 거느리고 와서 개시를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고 데리고 온 사람도 1천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 군병과 말먹이에 대해 말하기를 ‘오로지 귀국에서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하므로, 신들이 답변하기를 ‘양서(兩西) 지방이 말할 수 없이 판탕되었으므로 그대들도 알다시피 3천 석의 쌀도 준비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허다한 군병과 말먹이를 어떻게 갑자기 판출해 낼 수가 있겠는가?’ 하니, 용골대 등이 답하기를 ‘과거에 귀국에서 중원(中原)과 개시를 할 적에는 소·돼지와 증여한 물품의 숫자가 매우 많았었는데 그렇게 해주기는 바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람과 말의 먹을 것뿐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어 저들 나라의 정세에 대해 들었는데, 한이 직접 수만의 병마를 거느리고 서쪽을 향하여 출발했는데 새로 항복한 몽고의 장수를 향도(向導)로 삼아 몽고 지방을 경유하여 곧바로 영원(寧遠)의 북쪽 길로 달려가 엄습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권인록(權仁祿)과 박경룡(朴景龍)은 돌아가지 않을 뜻을 가지고 있기에 신들이 수일 동안 강력히 쟁변하여 가까스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한의 글과 예물 단자의 물목(物目)을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이를 비국에 내렸다.
2월 29일 신유
상이 하교하기를,
"듣건대 지난 밤에 대비전(大妃殿)의 내인(內人)이 동북쪽 안팎 담장 사이에 세워놓은 판자를 넘어 나갔다고 하는데, 순경위(巡更衛)의 부장(部長)이 정원에 와서 말하지 않던가?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병조가 아뢰기를,
"동소위(東所衛) 부장과 순경위 부장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넘어갈 적에 서로 마주 치지 않았으므로 사세상 알기 어려웠다.’고 했고, 바깥 여막에서 지키고 있던 군졸들도 모두 모른다고 했습니다. 내인이 도망쳐 나간 것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인데 제때에 발각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해당 순라위 부장과 요령장(搖鈴將)은 중벌로 추고하소서. 내인이 판자를 넘어 도망쳐 나간 데에는 반드시 외인과 내통이 있었을 것이니, 포도청으로 하여금 추적해서 체포하여 철저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잡아다가 추국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새로 황제가 즉위한 초기인데도 각 아문(衙門)의 토색질은 아직도 전일과 같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진향사(進香使)가 갔을 적에도 능(陵)을 지키는 내관들이 요구하는 물품이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홍방(洪霶)이 별도의 인정(人情)025) 을 가지고 가게 해 줄 것을 계청하였는데 해조에서는 단지 은자(銀子) 30냥만 지급하였으니 진실로 너무도 약소합니다. 다시 넉넉하게 지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곤란을 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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