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갑자
오랑캐 땅에서 회답관(回答官) 박난영(朴蘭英)과 이란(李灤)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의주 부윤(義州府尹) 엄황(嚴愰)과 함께 강을 건너가서 용골대(龍骨大)와 소두리(所頭里) 등 두 장수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두 장수가 화난 기색을 띠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도 그대 나라에서는 도무지 공궤(供饋)할 뜻이 없어서 비바람에 시달리게 하고 군마(軍馬)를 굶주리게 하고 있다. 그러니 두 나라가 서로 잘 지낸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또 들으니 이곳에 온 장사꾼들이 30명도 채 못되며 소는 아예 오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무슨 물화를 가지고 교역하려는 것인가? 먼저 수십 명의 차인(差人)을 의주(義州)와 안주(安州) 및 평양(平壤) 등지에 보내어 이러한 곡절을 상세히 말하겠다. 그런데도 감사나 병사가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선 소 몇 백 마리와 3천 군마가 한 달 동안 먹을 만큼의 군량을 얻은 다음에야 굶어 죽을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장사꾼을 데리고 와서 시장에서 기다렸는데, 너희들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으니, 이는 우리가 날짜를 어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날짜를 어긴 것이다. 다시는 우리 측에다 허물을 돌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배에 오르려 하자 용골대가 30여 기를 거느리고 달려왔습니다. 이에 신들도 배에서 내려 회좌(會坐)하여 다시 교역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는데, 불손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3월 4일 을축
유학(幼學) 임지후(任之後)가 정원에다 고변서를 올렸다. 이때 임지후의 삼형제가, 뜻을 펴지 못해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무리들과 교분을 많이 맺어 그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발각되려 하자 상변(上變)하였다. 그런데 진심은 숨긴 채 뜻을 펴지 못한 사람들을 거짓 끌어대어 공을 세워서 자신들은 벗어나려는 계책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해 하며 욕을 하였다. 그 고변서에,
"신이 영남을 오가면서 우연히 창녕(昌寧)에 사는 선비 이여익(李汝翊)을 만났었는데, 반정(反正) 후에 여익이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고, 이어서 함께 가서 인성군(仁城君)을 만나보고는 역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廣州)에 살고 있어서 흉도들의 얼굴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하며, 최시량(崔始量)을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이제 듣건대, 거사 날짜가 7일로 정하여졌다고 합니다. 김석부(金碩富)가 강도(江都)에 서찰을 주고받은 일과 최관(崔瓘)·조정(趙挺)·장세철(張世哲)·이첨(李憺)·조유도(趙有道) 등이 역모에 참여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 인성군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사규(李士珪)가 역적들의 오주(五柱)를 점쳤다고 하였으며, 최시량은 ‘7일에 동소문 밖에서 기병하여 임금 주위에 있는 나쁜 사람들을 제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울 것이다. 이어서 공신들을 모두 죽이고 광해군을 복위시킨 다음 인성군에게 전할 것인데, 도감군(都監軍)과 어영군(御營軍)이 내응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금부 당상 및 양사 장관을 명초하였다. 대신 이하가 빈청에 모여서 고발당한 자들을 잡아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상이 대신과 추관 및 양사 장관을 인견하여 임지후의 옥사(獄事)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고는 비로소 여러 죄수들을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전 참봉 이종충(李宗忠)이 공초하기를,
"지난해 12월에 구진(具縉)·이승종(李承宗)·윤흥원(尹興元) 등이 와서 ‘정월 25일에 거사하려고 하는데, 장자(長者)들도 많이 참여하였으니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하다. 군사는 각자 20명씩 모집하기로 하였다. 밤을 틈타 성 안으로 들어가면 도감의 군사들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남한 산성의 흉서(兇書)에 대해서는, 임성지(任性之)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전 참봉 박동기(朴東起)가 공초하기를,
"병인년 4월에 임경후(任慶後)와 함께 잤는데, 경후가 말하기를 ‘오늘날 시사(時事)가 이와 같아 전날에 한 차례 서울에다 격서를 던져 넣었는데 이는 내가 주도한 것이다. 광주 산성(廣州山城)에도 격서를 붙였는데, 이는 임유후가 지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흉서는 모두 임가(任哥)가 한 짓입니다."
하였다. 전 권관(權管) 심길원(沈吉元)은 공초하기를,
"일찍이 역적 이괄(李适)의 군관으로 있다가 안현(鞍峴) 전투026) 에서 패한 후 집으로 돌아가 종적을 감추고 있으면서 감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금년 2월에 이종충이 글을 보내 부르기에 즉시 가서 만나보니, 말하기를 ‘너는 임지후를 알고 있는가? 장차 대사를 일으킬 것이다. 반정을 일으킬 때에도 군사가 겨우 2백여 명이었으니 지금의 일에 무슨 어려운 점이 있겠는가. 서울의 장자(長者)들은 지후가 모두 교분을 맺고 있다. 나는 현재 광주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출신(出身) 윤흥원(尹興元)은 공초하기를,
"이종충과 임덕후(任德後)가 지난 겨울부터 밤이면 만났다가 낮이면 흩어진다고 듣고는 언젠가 덕후의 집으로 가보니, 오현(吳玹) 등과 거병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덕후가 저에게 맹서를 시키기를 ‘죽더라도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다.’ 하게 하였습니다. 덕후가 또 두 차례 윤계륜(尹繼倫)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 일은 계획해 온 지 오래 되었다. 죽더라도 같이 죽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역적의 격서(檄書)는 박동기(朴東起)가 짓고 이종충이 쓰고 오현과 이후강(李後崗) 등이 서로 더불어 전파하고 교대로 사람을 보내 몰래 서울로 들어가서 백성들을 현혹하는 말을 퍼트린 다음 호위가 조금 해이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흉서는, 임취정(任就正)이 지휘하고 임경후가 주도한 것입니다. 취정의 아들 임석후(任錫後)가 1월에 세 차례 이종충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일이 성공한 뒤에는 인성군을 추대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모름지기 여러 차례 흉서를 던져 넣어 인심을 동요시켜야 한다. 인심이 동요한 다음에야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초에 관련된 오현·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임취정·임석후 등은 불복하고 죽었다. 조정·장세철은 위리 안치하고 조유도(趙有道)는 배소로 다시 보내고, 조훈(趙塤)·조기(趙圻)·정광택(鄭光澤)·최관(崔瓘)·목서흠(睦敍欽)·목장흠(睦長欽)·목기선(睦嗜善) 등 20여 인은 방송하고, 최시량은 공초한 말이 기망(欺罔)에 관련된다고 하여 사형을 면하는 것으로 조율하도록 명하였다.
3월 5일 병인
헌부가 아뢰기를,
"사서(司書) 이경(李坰)은 역적을 추국하는 이러한 때에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은 지가 지금 이미 한 달이나 되었습니다. 힘써 봉공해야 하는 신하의 의리가 전혀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상헌(金尙憲), 사간 조방직(趙邦直), 헌납 김육(金堉), 정언 오달승(吳達升)·심동구(沈東龜)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은 생각건대, 민심이 불안한 것은 적국이 쳐들어오는 화보다 참혹하고 하정(下情)이 억눌리는 것은 흙더미가 무너지는 화보다 심합니다. 인심이 불안한 것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어지럽게 되고, 억눌린 것을 펴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들 중에 자신을 망치고 종묘 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자는 모두가 이것을 살피지 못한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지금 불행히도 나라에 큰 변고가 있어 백성들이 불안해 하고 백료들이 복합(伏閤)하고 있으며, 여러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여기고 있어서, 안위의 기미가 털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강명(講明)한 것이 일에 임하여서는 도리어 현혹되고 전에 살펴보았던 것이 앞에 당해서는 도리어 미혹되어, 사의(私意)만을 견지하면서 오랫동안 공의(公議)를 막고 있습니다. 이에 불안하여 의심하는 자들이 장차 변하여져 난을 따르려 하고 억눌려 있던 자들이 점차 격발하여 이산하게 되어서, 형체조차 없는 화가 바로 앞에 닥쳤고 헤아리지도 못할 변이 조석 사이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 궁궐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서 대신들에게 친히 계책을 상의하지 않고 대간들을 면대하여 유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고는 단지 종이 쪽지에다 글을 써서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이를 난을 막고 화를 해소하는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계시니, 신들은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의 국세가 어떠하며 민심이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바깥으로는 오랑캐의 사신이 번갈아 나와 변방의 걱정이 만단으로 일어나고 있고 모문룡(毛文龍)이 분해 하면서 요언으로 위협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바다가 핏빛으로 변하고 개미들이 서로 싸우는 변괴가 진도(珍島)에서 일어났고 흉도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던 설이 과연 변고로 응답하였습니다. 가깝게는 위리(圍籬) 안에 있는 자들과 서로 통했던 간인들이 혹 대궐 내에 잠복하고 있지나 않나 염려스럽고 크게는 역모를 주도한 역적의 괴수가 혹 법망을 빠져나가지나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애를 태우며 걱정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만은 이를 깊이 살피지 않으십니다. 아아, 전하를 아끼어 돌보아 주는 하늘이 이미 경계를 보였는데도 전하께서는 평소에 방비하지 않으시고, 모르는 가운데 도와주는 조종들의 영령이 이미 간적을 드러내 주었는데도 전하께서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시며, 조정 신하들이 충성스런 말을 이미 다 진달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따르지 아니하십니다. 누가 전하의 밝음을 가리우고 누가 전하의 위엄을 빼앗아서 국가가 끝내 망해도 구원하지 못할 지경으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조종들의 중한 부탁을 생각하시고 가운데로는 여러 신하들의 억눌린 심정을 가엾게 여기시며 아래로는 백성들이 불안하여 의심하는 점을 살피시어, 대신과 대관(臺官)들을 부르신 다음 편전(便殿)에 나아가 성지를 친히 내리소서. 그리하여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크게 통하게 한 다음 속히 처결을 내리시어 위란(危亂)을 내버려두었다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이르지 않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전후로 다 말하였다. 경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용골대(龍骨大)와 박중남(朴仲男) 두 오랑캐가 굳이 개시(開市)하기를 청하므로 부득이하여 쌀 3천 석을 무역하기로 허락하였는데, 그냥 준 것이 2천 석이고 판매한 것이 1천 석인데, 박난영(朴蘭英)과 박경룡(朴景龍)이 용골대와 약속하고 국서를 가지고 갔습니다. 소를 무역하는 일은 본래 약속한 가운데 없었는데 재신(宰臣)이 써 준 가운데 쓰여 있다고 핑계대므로 그 글을 보자고 하니,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봄 가을로 개시하는 것도 이미 약속을 정한 것인데 지금 봄·여름·가을 세 계절로 정하자고 하고 있으며, 장사하는 호인과 수호하는 군병을 공궤하는 것은 애초의 약속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금 몹시 급하게 독촉하고 있으니, 그들의 흉악하고 교활한 계책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미리 운송한 지급할 쌀이 있어서 우선 빼내 주었으나, 이후부터는 도착하는 날부터 쌀을 사서 먹게 하는 것으로 문서를 만들어주어 침탈하는 걱정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장령(將領)들에게 음식물을 보내 주는 것은, 이것은 서로 잘 지내자는 뜻이기는 하나, 결코 전원을 공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국서를 만들어 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서에도 봄 가을로 개시하는 일을 언급하여야 한다."
하였다.
3월 6일 정묘
유성이 각성(角星)위에서 나와 항성(亢星) 아래로 들어갔다.
3월 7일 무진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이이첨(李爾瞻)의 손자 이정식(李廷式)이 공청도(公淸道)에서 자수하였습니다.
전에 아뢴 대로 자수하는 즉시 정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세거(鄭世矩)를 장령으로, 윤지(尹墀)를 부응교로, 이경증(李景曾)을 부수찬으로, 이홍주(李弘胄)를 대사헌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8일 기사
좌승지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부묘(祔廟)할 때의 의주(儀註)를 보니, 모두 친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초상(初喪)·우제(虞祭)·상제(祥祭)·담제(禫祭) 때부터 이미 능원군(綾原君)이 모두 주관하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부묘할 때에만 친행한단 말입니까. 예경으로 헤아려 보아도 전후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상제·담제의 예에 의하여 능원군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상께서 입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다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신경영(辛慶英)·이윤남(李胤男)을 훈적에서 삭제하고 영사 공신(寧社功臣)의 녹훈을 다시 심사하여 감정(戡定)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양사가 몇 달 간을 계속 논열했는데도 상이 따르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참작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귀(李貴)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대제(大祭)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예문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감히 면대를 청하였습니다. 만약 능원군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서 사묘(私廟)에 부묘한다면, 이는 하원군(河原君)의 묘와 차이가 없게 되고 전하께서 다른 사람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미 능원군에게 봉사하게 하였는데 상께서 제사를 주관하시고자 한다면, 이는 예에 있어서도 역시 근거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반드시 별도로 예묘(禰廟)를 세워야만 전하의 정을 다할 수 있고 예에 있어서도 구애되는 바가 없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라건대, 부묘하는 날짜를 조금 늦추고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 및 예관(禮官)을 불러서 상의하여 개정하게 하소서. 신이 전에 올린 차자를 지금까지도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반드시 신이 노망하였다고 여겨서 치지 도외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우선 기다리라."
하였다.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일찍이 병인년 봄에 외람되이 차자를 올렸는데, 원호(園號)를 가하고 제후의 예로 제사를 지내고 기년이 지난 후에 소복을 입은 것은 모두 신이 차자에서 진술한 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묘(廟)를 세우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시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성명하신 전하께서 어찌 깨우치지 못할 리가 있어서 거듭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어겨가면서 지연시키겠는가. 반드시 3년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소리 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담제 날짜가 이미 지났는데 육경원(毓慶園)027) 의 신주를 사묘(私廟)에 합부(合祔)하고자 절목을 이미 내렸고 날짜를 이미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신은 실로 놀라워서 할 말을 잊고 크게 탄식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자는 7묘(七廟)로 고조·증조·조·부와 그 위로 다시 삼대(三代)를 제사 지내며, 제후는 5묘로 고조·증조·조·부와 태조(太祖)를 제사지내며, 대부는 3대를 제사지내고, 서인은 부(父)만 제사지낸다고 합니다. 비록 존비(尊卑)가 같지 않고 강쇄(降殺)에 차이가 있으나 친한 곳으로부터 소원한 데로 미쳐가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로 미쳐가는 것은 귀천이 없이 마찬가지 입니다. 오직 지자(支子)만은 천하여서 감히 묘(廟)를 세우지 못하고 종자(宗子)의 집에서 제사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기》에 말하기를 ‘서자(庶子)가 아비를 제사하지 못하는 것은 종(宗)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하였는바, 이는 대개 예묘(禰廟)를 높이고 종법(宗法)을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하여서 감히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는 있으나 자식이 귀하게 되었다 해서 아버지를 지자에게 맡기는 경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아 고조·증조에 미쳐가는 것은 참으로 정상적인 이치인 것으로, 할아버지를 제사지내면서 아버지를 제사지내지 못하는 경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예를 논하는 자들은 모두 ‘조(祖)를 높이는 의리가 중하기 때문에 이치상 아버지는 낮추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삼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위신강·부위자강·부위처강으로, 신하가 임금을 낮추는 예는 없는 것이고 자식이 아비를 낮추는 예는 없는 것이며, 부인이 남편을 낮추는 예는 없는 것입니다. 예란 것은 성인이 삼강을 부식시키고자 하여 만든 것입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은 한갓 임금을 높일 줄만 알고 삼강을 높일 줄은 알지 못하며, 한갓 할아버지를 높일 줄만 알고 아버지를 높이는 예는 알지 못하여, 부모의 상에 있어서 반드시 낮추려고 하여 기년으로 하고 아버지를 제사지내는 예를 반드시 낮추려고 하여 지자에 붙이니, 통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복(服)과 제사를 강쇄하도록 한다면, 어찌하여 아버지라 칭할 수 있는 자리를 별도로 강구하고 흥경원(興慶園)에 대하여 백부나 숙부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참으로 아버지라 칭할 지위가 마련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할 것인 바,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부모의 칭호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방손이 잇는 것과 종손이 잇는 의리가 각각 다르고 부자와 조손의 명분을 바꿀 수 없어서입니다. 이미 그 명분이 있다면 이는 그 실재가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섬기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는 것은 인간의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낮춘다는 한 마디 말을 다른 후손이 없는 부모에게 가한단 말입니까. 한 문제(漢文帝)가 상기(喪期)를 단축한 다음부터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역월제(易月制)028) 를 따랐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연히 일어나 고제(古制)를 따른 임금이 몇 명 있었으나 혹 몇 달이 지나서 최복을 벗고 혹 기년이 되어서 곧바로 길복을 입어서 후세 사람들이 애석해 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덕은 고금을 통하여, 제왕의 높은 자리에 거처하면서 몸소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비록 할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를 낮춘다는 잘못된 논의에 동요되었으나 뒤에는 여러 사람의 말을 물리치고 더욱 굳게 예를 지켜 상복을 벗은 후에는 별전(別殿)에 나아가고 조회에 임해서는 현포(玄袍)를 입고 삭망에는 반드시 친히 제사하셨습니다. 이름은 비록 복을 강쇄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삼년상을 행하셨으니, 참으로 백왕의 법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 유독 한스러운 것은 예묘(禰廟)를 오랫동안 궐하여 사전(祀典)을 바루지 못한 것이니, 신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효자가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애모의 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줄어드나 제사를 지내 보답함은 시종 한결같은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처음에는 신궐(新闕)에 봉안하여 혼궁(魂宮)이라고 칭하였다가 끝내는 낮추어 옛집에다 모시고는 사묘(私廟)라 칭하니, 이것이 어찌 정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원호(園號)를 가할 수 없고 참봉을 둘 수 없으며, 제후의 예로 제사지내는 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는 부(父)라 하고 죽어서는 고(考)라 하며 묘를 예(禰)라 하는바, 이름은 비록 다르나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있으면 아버지가 있고 사당이 있으면 아버지의 사당이 있는 법입니다. 부인데도 낮추어서 부가 되지 못하고 묘인데도 예라 하지 않아 묘가 되지 못하니, 경적(經籍)이 있는 이래로 낮출 수 있는 부와 아버지의 사당이 없는 묘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당초에 예를 의논하는 여러 신하들이 다만 전하께서 계통을 뛰어넘어 조(祖)를 이은 것이 대략 한 선제(漢宣帝)와 같은 것만 보고 직손과 종손(從孫)이 사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정자(程子)의 설을 잘못 인용하여 오늘날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자들이 자세히 그 사정을 강구할 겨를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호응하여 모두들 속론에 휩쓸려 들어감을 면치 못하여 한때의 공론처럼 되고 말았으니, 전하께서 그대로 따름을 면치 못한 것이 마땅합니다.
아, 방손이나 지손이 계통을 이은 것을 인후(人後)가 되었다고 하고, 한결같이 곧게 이은 것을 조후(祖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후가 되었으면 아버지가 백부나 숙부가 되는 것이고, 조후가 되었으면 아버지가 비록 죽었더라도 명분이 바뀌지 않는 것이 고금의 상례입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일은 실로 태손(太孫)이 사위(嗣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종손이 계통을 이은 예를 끌어대어 맞추려 하니,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외간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대부분 추숭하여 입묘(入廟)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으나 신의 견해는 홀로 그와는 다릅니다.
대개 왕으로 추봉하는 예는 주공(周公)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순임금이 고수(瞽瞍)에 대해서나 우임금이 곤(鯀)에 대해서나 탕임금이 계(癸)에 대해서 모두 왕호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임에 있어서는 순임금·우임금·탕임금과 같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사치스럽게 꾸미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합부(合祔)하는 날에 능원군이란 방제(旁題)를 제거하고 별도로 한 묘를 세워 예제(禰祭)를 받들고 원호(園號)의 예를 모방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가하며, 주악(奏樂)은 별도의 악장(樂章)을 만들고 관헌(祼獻)은 조정 신하를 명하여 하며, 사시의 천향(薦享)을 종묘와 같은 날에 하지 말아 차별을 두는 뜻을 표하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를 높이고 어버이를 높이는 도에 있어서 양쪽 다 마땅함을 얻을 것이어서 소목(昭穆)의 법을 어그러뜨리지 않고 이륜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백세 뒤에 성인이 나와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조에 내렸다.
3월 9일 경오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리기를,
"찬성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건대, 그 차자에 ‘전하께서 계운궁(啓運宮)에 대하여서는 마땅히 삼년상을 행해야 되는데, 그 당시 그릇된 유자(儒者)들이 잘못 「임금의 어머니는 부인이 아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였고, 심지어는 거취 문제를 가지고 다투기까지 하여 끝내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다.’고 하였으며, 또 ‘능원군이 봉사(奉祀)한다고 방제한 것은 크게 예경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며, 또 ‘정신들 중에 의리에 어두운 자가 매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면서 대원군(大院君)을 가리켜 사친(私親)이라 하여 끝내 임금의 아버지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초상 때에는 백관들에게 기년복을 입지 않게 하였고 또 나아가 곡하는 일까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비록 한두 그릇된 유자가 예경의 본의를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나, 그 예경에 어긋난 것을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바로 그 당시에 상례(喪禮)를 강정한 예관인바, 그릇된 유자라는 기롱과 일을 그르쳤다는 지척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본디 학식이 없어서 갑작스런 변례(變禮)를 만나서 감히 마음대로 단정짓지 못하고 모든 것을 대신과 학문과 덕망있는 유자에게 묻고 강구한 다음 실정과 예문을 절충하여 마땅함을 얻고자 하였으나, 끝내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가 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귀와 최명길 등이 올린 차자에 대해서 본조에서 조사하여 아뢰어야 하는데, 신은 이미 일을 그르쳤다는 지척을 당하였으니, 지금 어찌 감히 알지 못하는 예를 억지로 하여 다시 그 사이에서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속히 신을 체직하고 예를 잘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 제수하여 국가의 막중한 예를 속히 강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3월 10일 신미
예조가 아뢰기를,
"이귀와 최명길 등이 차자를 올려 묘를 세우는 일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만, 이는 상례(常禮)가 아니어서 본조에서 의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및 삼공이 모두 아뢰기를,
"예에 있어서 종통(宗統)이 중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곧바로 선조 대왕의 계통을 이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대원군의 제사를 주관하면 대종(大宗)에 혐의스러운 점이 없겠습니까. 이제 별묘(別廟)를 건립하면 전하의 대에 있어서는 예묘(禰廟)가 되고 전하의 뒷대에는 조묘(祖廟)가 되며, 그 후에는 증조묘가 됩니다. 나라에 이미 종묘가 있는데 또 조묘가 있으면 이것은 종묘가 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함에는 반드시 끝에 가서 어떻게 될까를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대원군의 사우(祠宇)를 별묘의 제도와 같이 크고 높게 한 다음 관에서 제향에 쓰는 물품을 지급하고, 제사는 능원군이 주관하되 전하께서 때때로 친제를 행하여 효경(孝敬)의 뜻을 펼 경우, 종통이 중하게 되고 대원군도 백세토록 불천하는 종(宗)이 될 것이라 여깁니다. 신들은 본디 예학에 어두워서 억설을 가지고 헌의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이 헌의는 인정이나 예문에 맞지 않으니, 실로 이것은 근거가 없는 억설이다."
하였다. 헌부와 간원도 이런 내용으로 아뢰고 또 예관이 일찍이 품신하지 않은 잘못을 논하였으며, 옥당 역시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3월 12일 계유
정원이 아뢰기를,
"이안(移安)을 고하는 제사를 지낼 시각이 이미 다 되었는데 양사가 아직도 정계(停啓)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대간이 논한 바는 부제(祔祭)에 대해 논한 것이지 이안을 고하는 일에 대해 논한 것이 아니다."
하고,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이안을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였다.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사간 권도(權濤),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계운궁(啓運宮)의 상을 처음부터 능원군이 주관하였고,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상제(祥祭)·담제(禫祭)를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니 부묘하는 것은 제사의 마지막인바, 변동시켜 둘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당 조에서 이미 친행하는 전지를 받들고는 다시 품신하지 않고 허겁지겁 친행하는 것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신들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서 어제서야 비로소 의주를 가져다 보았으니, 직무를 태만히 한 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사를 지은 후에 오가며 고치느라 날이 저물어서야 입계하여 겨우 비답을 받들자 이미 삼엄(三嚴)029) 을 알렸으며, 거둥하신 후에는 반열에서 논의하고서 거듭 아뢰고 물러나왔습니다. 신들은 밤을 지새며 힘껏 간쟁하지 않아 이안을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최혜길(崔惠吉) 역시 이런 뜻으로 피혐하였는데,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계운궁의 신주를 이안하여 사묘(私廟)로 내갔다. 상이 세자를 거느리고 배종하여 사묘로 갔다.
대사헌 이홍주(李弘胄),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등이 다시 여러 동료들을 거느리고 합계하여 부제(祔祭)를 친행하지 말라고 청하니, 답하기를,
"예관이 이미 강정한 것이다. 이와 같이 소란을 떠는 것은 몹시 잘못하는 일이다. 이미 정한 예를 결단코 다시 고칠 수는 없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두 번째 아뢰고, 세 번째 아뢰고, 네 번째 아뢰고, 다섯 번째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두 번째 차자를 올려 양사의 청을 따를 것을 청하였다. 세 번째 차자를 올릴 때에 제사 절차가 이미 끝났다. 막차(幕次)로 돌아와서 비로소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상을 마친 후 부묘하는 것은 막중한 예인데, 삼사가 논집하는데도 성상께서는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시니,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사의 공론을 흔쾌히 따르시어 사전(祀典)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제례를 강정하던 날에는 삼사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늘 와서 자신들의 견해를 굳게 고집하여 막중한 부제를 제때에 설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비단 일이 극히 괴이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 본의를 모르겠다. 이미 정한 예를 결단코 고칠 수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세자를 거느리고 사묘(私廟)에 부제하는 것을 친행하였다.
대사간 이민구, 사간 권도(權濤),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이번에 부묘할 때에 상께서 제사를 주관하셨습니다. 근거할 바가 없어서 실례하였다는 것을 조정의 대소인이 모두 알고 있으니, 더구나 대간으로 있는 저희들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친행하는 의주를 전혀 살피지 못하여 제때에 논열하지 못한 것이 신들의 첫번째 잘못입니다. 처음 정원의 계사를 보고 또 의주를 본 다음에 처음으로 계사를 작성하였으나 편지를 왕복하느라 날이 저물게 한 것이 신들의 두 번째 잘못입니다. 혼궁(魂宮)에 이르러서는 또 범야(犯夜)하셨는데 성상소(城上所)는 세 번 아뢰지 않고 물러나갔습니다. 고제(告祭) 전에 밤을 지새우며 힘써 간쟁하지 못한 것이 신들의 세 번째 잘못입니다. 일을 논하는 체모는 오직 논쟁하는 대상의 경중만 따질 뿐 사세의 난이(難易)는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력을 다해 간쟁하지 못하고서 가만히 있다가 곧장 물러나온 것이 신들의 네 번째 잘못입니다.
신들은 이미 네 가지 잘못을 저질렀는데다가 성의는 별로 없고 말은 매끄럽지 못하여 성상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전하로 하여금 실례하는 거둥이 있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를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이홍주(李弘胄), 집의 윤지(尹墀), 지평 임광(任絖)도 힘을 다해 간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13일 갑술
부제학 조익(趙翼)이 여러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양사가 모두 인피하였습니다. 본관에서 즉시 처치하여야 하는데, 어제 정원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제례를 강정하는 날에 삼사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고 전교 하시었습니다. 신들의 잘못은 양사와 더불어 차이가 없으니 감히 마음 편히 처치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속히 처치하라."
하였다. 조익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하가 간언을 올리는 도리는 오로지 정성과 공경을 다할 뿐으로, 들어주느냐 안들어주느냐의 여부는 신하가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섯 차례나 아뢰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날이 이미 저물어 장차 제사를 폐하게 될 것이므로 형세가 실로 미안한 점이 있어 아무 말없이 곧장 물러나왔으니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결과 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관원을 가볍게 체직하여서는 안되니 모두 출사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풍녕군(豐寧君) 홍보(洪靌)가 아뢰기를,
"녹훈을 감정한 후에 물의가 거듭 일어나서 다시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신은 명을 받고 대궐에 나와 한결같이 진을 친 실상에 따라서 단지 나아가 체포한 사실에 대해서만 진달하였을 뿐입니다. 이를 대신이 재량하여 두세 번 계품하였는데도 끝내 이윤남(李胤男)을 감하지 말라고 명하시었습니다. 두 영장(營將)을 감하고 감하지 않는 것이 신에게 무슨 이로움이 있다고 감히 그 사이에 일호라도 사심을 품어서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져들겠습니까. 지금 대신이 또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분부로 인하여 명초하라고 입계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임금을 속인 죄를 지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녹훈을 감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지 말고 안심하고 나와 참여하라."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이번 이 녹훈을 감정하는 일은, 만약 적을 포박한 것으로 공을 삼는다면 이는 한 사람의 일이니 홍보와 이탁남(李擢男)은 모두 녹훈할 수 없으며, 군사를 모아 나아가서 친 자들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다섯 사람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애당초 원훈의 말에 의하여 감정하였습니다. 다시 감정할 때에 미쳐서 실상을 상세히 물으니, 이윤남이 적과 서로 만난 것이 신경영(辛慶英)보다 조금 떨어지는 듯하므로 윤남을 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그대로 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감정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을 뿐이니, 이미 원훈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마땅히 그 말에 따라서 참록하여야 할 듯합니다. 만약 국외자가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주워모은 것을 중시한다면 뒤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진극일(陳克一)은 상교대로 추가로 녹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이홍주, 대사간 이민구 등이 친제를 멈추도록 힘써 간쟁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두 번째 피혐하였다. 홍문관이 이를 처치하여 아뢰기를,
"어가(御駕)가 사묘(私廟)에 나아갔을 때에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끝까지 간쟁하였다면 반드시 제사를 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도(權道)에 따라 논의를 정지한 것은 형세가 부득이해서였습니다. 모두 출사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성신(李省身)을 장령으로, 정효성(鄭孝成)을 청주 목사로 삼았다. 효성은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았는데 지나치게 거두어들였다. 여이징(呂爾徵)을 수찬으로, 김종일(金宗一)·오달승(吳達升)을 정언으로, 김남중(金南重)을 교리로 삼았다.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무지개 같은 백기(白氣)가 간방(艮方)에서 손방(巽方)을 향하여 길게 하늘을 가로질러 뻔쳤다.
3월 14일 을해
상이 하교하였다.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은 어려운 시기에 명을 받아 조금도 싫어서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으며, 무사히 조서를 받들고 돌아와 반포하였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서장관 이하를 모두 가자하라."
군자 정(軍資正) 허적(許𥛚)이 상소하기를,
"신은 녹훈을 감정할 때에 취사(取捨)에 어두워 경중을 잃어서 시끄럽게 물의를 일으켰으니, 어찌 감히 다시 감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소명을 거두고 단지 묘당으로 하여금 고쳐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날에 하교한 뜻은 단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감정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마음 편히 나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허적이 다시 상소하기를,
"당초 고변할 때에 신은 단지 동생인 허계(許禊)와 비밀히 의논하고는 그의 아들인 허선(許選)을 시켜 달려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성원(黃性元)은 그의 아들인 황진(黃縉)을 보내어 허선과 함께 가게 하고 사위 김득성(金得聲)을 보내어 역적의 형세를 탐지하여 고하게 하였는바, 허계와 성원의 공이 신에 비해 조금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허선 등이 중간에서 고단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 이후배(李厚培)·이후원(李厚源)이 때맞춰 달려와서 홍서봉(洪瑞鳳)과 김류(金瑬)에게 통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망령되이 그들의 공이 황진이나 허선보다 아래가 아니라고 여겼으므로 경솔하게 녹훈하였습니다.
고변할 때에 황진과 허선이 이후배 형제와 함께 홍서봉의 집에 모였었는데, 김진성(金振聲)·득성(得聖)과 신서회(申瑞檜)도 왔었습니다. 이의배(李義培)를 시켜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에게 통보하여 즉시 이계선(李繼先)을 체포하게 하고, 다음으로 군사를 보내어 군기(軍器)를 거두어들여 흉모를 깨뜨림으로써 종사가 다시 안정되게 한 것은 모두 홍서봉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홍서봉을 원훈삼기를 청하고 그와 함께 감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조부터 추국청의 추관은 모두 녹공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홍서봉과 함께 추국청의 신하들을 녹공하도록 여쭌 것입니다. 최산휘(崔山輝)에 이르러서는, 신이 전혀 모르겠기에 대신들에게 물으니, 최산휘의 고변이 가장 늦었다고 하므로 맨 끝에다 쓴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공론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녹훈을 감정하는 데 참여하여 뭇 비방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참여하라."
하였다.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장대추(張大秋)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귀국에서 만약 내가 이곳에 머무는 것이 폐단만 끼칠 뿐 조금도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다면 나는 즉시 떠나겠다. 그러나 만약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하다고 여겨 마음을 합해 협력하여 기어코 적을 섬멸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 피차간에 서로 간격이 없은 다음에야 대사를 이룰 수 있다. 내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오로지 귀국의 성의 여부에 달렸는데 배신(陪臣)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습니다. 신은 답하기를 ‘소방이 믿고 있는 것은 오직 천조에서 구원해 주는 것뿐인데 구원해 주는 책임은 노야에게 있다. 군신 상하 중에 누가 감히 노야가 떠나기를 바라겠는가.’ 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모름지기 이런 내용을 속히 계문하여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3월 15일 병자
상이 영사 훈적(寧社勳籍)을 다시 감정하여 허적을 1등으로, 홍서봉·황성원·허계·황진·허선을 2등으로, 김득성·김진성·신서회·최산휘·이두견(李斗堅) 등을 3등으로 하였으며, 이들 11인의 훈호(勳號)는 갈충 효성 병기 익명 영사 공신(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은 본래 천얼로 외람되이 본읍에 제수되었는데, 수단이 추하고 교활하며 오로지 윗사람 잘 섬기기만 일삼아 세시(歲時)에 선물을 보낸 것이 20가지나 됩니다. 일이 몹시 놀라우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경업은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이러한 때에 수령을 가벼이 체직할 수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조에 명하여 부묘할 때의 상을 내린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을 3년이 지난 뒤에 태묘(太廟)에 올려 부묘하면 으레 상을 내렸는데, 이는 도감의 등록 중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의 사묘(私廟)에 합사(合祀)한 제사는 사체가 그것과 달라서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본조에서 비록 이와 같이 멸시하나 나에게 있어서는 부모이다. 전례에 의하여 상을 베풀고자 한다."
하였다.
이조가, 역적 이종충(李宗忠)·박동기(朴東起) 등이 모두 광주(廣州)에 산다는 이유로 목사 이경용(李景容)을 파직하기를 청하고, 읍호는 선왕의 능침이 본주에 있으므로 강호(降號)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흥주(宋興周)를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삼았다. 흥주는 재주도 학식도 없는 일개 추하고 교활한 사람일 뿐이다. 훈신에게 잘 보여 갑자기 발탁되어서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았으나 치적이 없었다. 송극인(宋克訒)을 동지사(冬至使)로, 신열도(申悅道)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학생 김경항(金慶恒)을 역적을 체포한 공으로 통정 대부에 가자하였다.
3월 16일 정축
상이 하교하였다.
"이상길(李尙吉)은 모문룡(毛文龍)의 진영에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모든 일을 허락받아 왔으니 성의가 몹시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숙마(熟馬) 1필을 내려 주어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이조 판서 장유(張維), 참의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어제 상께서 부묘(祔廟)하였을 때 상을 내린 전례를 고찰하여 아뢰라고 명하시었습니다. 신들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이는 장차 사묘(私廟)에 대해 상을 내리고자 하여 부묘하였을 때의 상격을 고찰하여 아뢰라고 명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체가 차이가 있어서 감히 원용하여 전례로 삼을 수가 없어서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는 실로 유사가 법을 지키는 정상적인 일이나 삼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숨기지 않는 의리에 스스로 부친 것입니다. 그런데 성비(聖批)를 받드니, 몹시 엄하여, 심지어는 멸시한다고까지 전교하시었습니다.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어버이를 멸시하였으니, 만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신들이 이미 전교를 받들고는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함경 감사 이명(李溟)이 치계하기를,
"오랑캐의 기병 가응개(加應介)·낙지(落只)·동신사(童信沙) 등 3인이 회령(會寧)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박중남(朴仲男)과 자로(者老)가 각각 오랑캐 10여 인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으로부터 나올 것이니, 미리 중남의 부모 형제를 불러서 그가 오는 즉시 서로 만나보게 하라. 회패(回貝)·라패(羅貝)·니응고태(尼應古太) 등 3부(部)의 50여 인도 교역하고자 나올 것인데 내일 아침에 회령에 도착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備局)에 내렸다.
3월 17일 무인
헌부가 아뢰기를,
"녹훈하는 것은 막중한 상전(賞典)으로 반드시 상이 공에 합당한 다음에야 영구히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영사 공신(寧社功臣) 황성원(黃性元)과 허계(許禊) 등은 고변서 중에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데 모두 정훈(正勳)에 기록되었습니다. 물의가 시끄럽게 일어나고 있으니, 삭제하도록 명하여 외람된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과 원훈이 두세 번 감정한 것이다. 그대들이 원훈의 말을 믿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다시 논하니,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인거(李仁居)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뒤에 도착한 영장(營將)들은 조금도 포획한 공이 없고, 또 수십 명의 역적을 체포할 때에 군사를 연합하여 서로 호응했다는 설도 지나치게 장황하게 떠벌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을 친 실상 역시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경영(辛慶英)·이윤남(李胤男)을 훈적에서 삭제하소서. 영사 공신에 뒤섞여 함부로 녹훈된 황성원과 허계 등은 고변서 중에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데도 원훈과 일가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다 기록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성원과 허계 등을 훈적에서 삭제하소서. 원훈 역시 사정을 따른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허적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경영·황성원 등의 일은, 대신과 원훈이 두세 번 감정하여서 조금도 미진한 일이 없는데 지금 또 다시 논하니, 너무 지나치다. 허적은 잘못한 것이 없는 듯하다.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허적을 초배(超拜)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 양릉군(陽陵君)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홍서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초배하고, 도사 황진(黃縉), 주부 허선(許選), 학생 황성원·허계, 무학(武學) 김득성(金得聲), 김진성(金振聲), 충익위(忠翊衛) 신서회(申瑞檜), 주부 최산휘(崔山輝), 보인 이두견(李斗堅) 등 9인을 모두 통정 대부에 초자하였는데, 특별 전교가 있어서였다.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18일 기묘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국청(鞫廳)에 있으면서 분발(分撥)030) 을 보니, 바로 간원에서 낙안 군수(樂安郡守) 임경업(林慶業)의 파직을 청한 것이었고, 그 가운데 ‘세시에 선물을 수십 가지나 보내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그 자리에서 좌중에다 말하기를 ‘임경업은 바로 나의 군관이었는데, 세시에 으레 보내는 선물조차도 나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누구에게 이와 같이 많이 보냈는지 모르겠다.’ 하였으며, 국청이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국청에서 말한 것을 온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집안 사람들이 비로소 세시에 보내온 선물이 있었는데 신이 국청에 있어서 미처 알리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서 비로소 간원이 아뢴 것이 반드시 신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내온 물목(物目)은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수의 다소에 대해서는 신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마음을 깨끗이 가져 뇌물이 들어 오는 길을 끊지 못하였고, 또 말을 늘어놓아 스스로 흔적을 가리려는 것처럼 하였으니, 뇌물을 받은 죄를 신이 어찌 감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청명한 세상에 살면서 조정에 가득찬 모든 신하들이 모두 명예와 절조를 닦으면서 청렴한 덕을 지키고 있는데, 신만은 아래로는 사람들의 비방을 불러들이고 위로는 청명한 다스림에 누를 끼쳤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선물을 준 자가 이미 파직을 당하였으니 그것을 받은 자에게도 죄를 가하여야 합니다. 신을 유사에게 내리어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세시에 선물을 보내는 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것이다. 경은 또 선물을 보내온 것을 몰랐으니 더욱 혐의할 것이 없다. 경은 마음 편히 공무를 보라."
하였다.
3월 20일 신사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낙안 군수 임경업이 세시에 보낸 선물이 20여 가지나 된다고 듣고 이로써 논계하였는데,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는 몰랐었습니다. 지금 우의정 김류의 차자를 보건대 ‘간원이 아뢴 것은 반드시 신을 두고 한 말이다. 물목을 기록한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일찍이 물목을 기록한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 선물을 보낸 곳이 어느 곳인지도 모르면서 아뢰었으니, 일을 논하면서 상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들은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조방직(趙邦直)을 사간으로 삼았다. 예조 참판 한여직(韓汝溭)에게 자헌 대부를, 판결사 권첩(權怗)에게 가의 대부를, 사옹원 정(正) 정세거(鄭世矩)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이는 수로(水路)로 경사(京師)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득연(申得淵)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는데, 별도로 쌀 1천 석을 준비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21일 임오
정충신이 치계하기를,
"정탐하러 보낸 자가 돌아와서 쪽지를 바쳤는데, 거기에 ‘호차(胡差) 곡호(曲虎)가 말하기를 「모문룡이 연전에 중국 사람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새 천자가 즉위한 이래로 화친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고 모문룡이 혹 다른 음모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중국 사람을 목베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에 모문룡이 또 왕씨(王氏) 성을 가진 자를 보내어 화친하자고 하였는데, 앞뒤가 서로 부합되어 조금도 어긋난 단서가 없었다. 이에 한(汗)이 비로소 마음을 돌리어 나로 하여금 왕씨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가도로 가서 모문룡을 만나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본 다음 속이지 않는 것 같으면 화약(和約)을 맺고 돌아오라고 했다.」 하였다. 곡호는 호인 7명을 거느리고 왕씨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모문룡의 군영으로 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3월 22일 계미
우의정 김류가 또 차자를 올려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답하였다.
"지금은 대신이 사퇴할 때가 아니다.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공무를 보라."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김남중(金南重)을 장령으로, 여이징(呂爾徵)을 지평으로, 장현광(張顯光)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3일 갑신
북병사(北兵使) 윤숙(尹璛)가 치계하기를,
"박중남(朴仲男)의 아비 응삼(應參)과 형 인현(仁賢)으로 하여금 가서 개시(開市)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달래게 하였는데,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중남이 자호(者胡)와 더불어 성깔을 부리면서 날마다 협박하고 있는데, 회령 부사(會寧府使) 황직(黃溭)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에 신이 회령으로 달려가서 또 뇌물을 주고 종일토록 쟁변(爭辯)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리어 화를 내면서 ‘이러한 내용으로 한(汗)이 있는 곳에 통보하고 본인은 이 길을 따라서 상경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 것을 신이 겨우 저지시켰습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오랑캐에게 하루에 지급하는 쌀과 콩이 수십 석이나 되고 소와 돼지도 두세 마리나 되는바, 열흘도 못 되어 회령이 장차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랑캐의 기병 20명이 연속해서 나올지도 모른다 하니, 앞으로 닥칠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만약 끝까지 굳게 거절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개시하는 것을 허락하여 빨리 돌아가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속히 지휘를 내려주어 어긋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국에 내렸다.
3월 25일 병술
상이 대신과 추관 및 양사 장관을 인견하고 임지후(任之後) 등의 옥사에 대해 물으니, 대사간 이민구(李敏求)가 임지후의 정상을 숨긴 것을 국문하라고 아뢰었다. 대신 이하가 나아가 아뢰기를,
"역적 이공(李珙)의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윤허하소서."
하고, 이민구와 대사헌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역적 공이 저지른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찬출만 하고 말 수 있겠습니까. 비록 해를 넘긴다 해도 윤허를 받지 못하면 논의를 정지할 리가 만무합니다. 속히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이미 정을 굽혀 법을 적용했으니 결단코 죄를 더하기는 곤란하다. 그리고 조종조에는 군사를 일으킨 역적까지도 용서해준 때가 있었다. 이것이 어찌 본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선왕의 자식인데 어찌 차마 법을 가하겠는가. 경들이 고집부리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집에 선물을 보낸 것을 대관(臺官)이 적발하여 논계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 각박하다. 발론한 자가 누구인가? 우상이 이 때문에 불안하여 정고(呈告)하고 나오지 않으니, 발론한 대관을 벌주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민구가 자리를 피하면서,
"성상의 전교가 지엄하니 물러가서 대죄하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나갔다. 대사헌 이홍주가 전에 아뢴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을 절도에 위리 안치하는 일과 역적 공의 노복을 법에 따라 처리하여 이속(移屬)시키는 일을 탑전에서 계속해서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인흥군이 참여한 흔적이 조금도 없는데 이와 같이 굳게 고집하니, 너무 지나치다. 더구나 한번 아뢰면서 두 왕자를 죄주기를 청하다니, 보고 듣기에 더욱 아름답지 못하다. 속히 논의를 정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노비를 이속시키라는 청도 전혀 이속시킬 만한 근거가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홍주가 또 황성원과 허계 두 사람의 훈적을 삭거하는 일을 계속해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원훈이 거듭 헤아려서 정한 것이니, 반드시 외람된 일이 없을 것이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승지 윤지경(尹知敬)을 불러 이르기를,
"대간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경솔하게 와서 논계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자리를 불안하게 하니, 일이 몹시 놀랍다. 반드시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서 이렇게 논핵한 것이다. 논핵을 주도한 자를 적발하여 삭출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홍주, 지평 여이징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백료(百僚)와 삼사가 한갓 조정에서 청하는 예전의 규례를 따르기만 할 뿐, 복합하는 간절한 성의를 보였다고는 듣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로 드러나게 정신(廷臣)들을 비방하면서 죄주기를 청한 지 이미 3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대궐 뜰에 나아가 날마다 호소하는 것이 바로 복합하는 것인 줄만 알았지 별다른 규례가 있는 줄은 몰랐으니, 일을 논하는 체모를 너무나 모른 것입니다.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나친 상소를 가지고 서로 따질 것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玉堂)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일을 논하는 체모는 거기에 따른 순서가 있는 것으로, 합사(合司)하여 허락받지 못하였을 경우 복합하는 것입니다. 합사하여 삼계(三啓)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질질 끌면서 감히 재촉하지 못한 것은, 성상께서 깨우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피혐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하건대, 대간이 비록 잘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남을 모함하고자 해서 발론한 것이 아닌데 중한 율을 적용하는 것은, 성상께서 대간을 너그럽게 포용해 주는 성덕(盛德)이 아닐 듯하며 대신도 반드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상께서는 노여움을 조금 푸시어 속히 논핵을 주도한 대관을 적발해 내라는 명을 거두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름답지 못한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경들은 두둔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본원에 물으니, 원리(院吏)가 대사간 이민구, 헌납 심지원, 정언 오달승(吳達升)·김종일(金宗一)이 모두 현고(現告)하였다고 합니다. 허다한 대관을 모두 다 승전을 받들 수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우선 이름은 거명하지 말고 승전만 받들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사묘 부제(私廟祔祭)를 친행할 때의 종헌관(終獻官)인 의창군(義昌君)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전사관(典祀官)과 묘사(廟司)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라. 대축(大祝) 윤지(尹墀)는 가자하고, 재랑(齋郞) 서정리(徐貞履)는 6품에 천전(遷轉)하고, 축사(祝史) 심장세(沈長世)와 봉향(奉香)·봉로(奉爐)·집준(執樽)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가자하라. 입시한 승지 김수현(金壽賢)·이성구(李聖求)와 좌우 통례(左右通禮)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하사하고, 대교(待敎) 전극항(全克恒), 검열 정유성(鄭維誠), 가주서 김원립(金元立)은 한 자급씩 가자하라."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앞장서서 논핵한 대관을 적발해 내어 삭출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듣고는, 신은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일에 따라 논핵하는 것은 바로 대간의 풍채이며, 더구나 신에게는 논박할 만한 죄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신의 탓으로 언관들을 죄주게 된다면 이후로는 대신들이 범법하는 일이 있더라도 입을 봉한 채 감히 발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죄가 중해질 뿐만 아니라 국가의 복이 아닐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먼저 신의 죄를 다스리어 언관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밝히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관들은 사정(私情)을 따르다가 죄를 받은 것으로, 경이 조금도 미안해 할 일이 아니다.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3월 26일 정해
정언 김종일(金宗一)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어제 임경업의 일로 인하여 상께서 발론한 대관을 삭출하라는 전교를 내리시자 대사간 이민구가 탑전에서 대죄하고서 나가 정원이 현재 발론한 사람을 사핵하고 있습니다. 신 역시 사핵받는 중에 들어 있는데, 감히 수참(隨參)한 것은 다르다는 이유로 곧바로 피혐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패초(牌招)의 명을 받으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무릇 발론한 것과 수참한 것은 그 죄가 같으니, 결단코 직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삭출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간원이 임경업을 논핵한 것은 단지 그가 세시에 보낸 선물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논한 것이지 애당초 대신을 논핵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에서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는 설사 맞지 않는 논핵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해야 하는 법인데, 갑자기 발론한 대관을 삭출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명이 한번 내려지자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니, 삭출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원이 탄핵한 것은 공평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닌 듯하니, 지금 이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숙 옹주(貞淑翁主)의 묘 아래 아주 가까운 곳에 봉안역(奉安驛)의 위전(位田) 1결이 있다고 한다. 그 집에 사급(賜給)하고 둔전으로 본역에 절급(折給)하라."
정원이 아뢰기를,
"대사간 이민구, 헌납 심지원, 정언 오달승을 명초하니, 현재 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어서 비록 소명(召命)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언 김종일이 다시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동료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는데 신만 감히 소명을 받고 나왔습니다. 대죄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혼자만 명을 받들기에 정신이 없었으니 심하게 언관의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결단코 뻔뻔스럽게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속히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소란스럽게 하다니, 너무 지나치다. 사직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당초에 논의에 참여한 것은 잘못이 없는 것이며, 명을 받고 나온 것은 군신간의 의리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처치한 후에 다시 군명(君命)에 따라 나오는 것은 전혀 염치없는 일이 아니니,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들이 유고하여 오랫동안 추국을 하지 못하여 죄인들이 지레 죽을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간원의 대부분의 관원들이 대죄하고 있다는 핑계로 소명이 문 앞에 이르러도 나올 생각을 않고 있으니, 일이 몹시 온당치 않다.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고부천(高傅川)을 장령으로, 이행원(李行遠)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유성이 견우성(牽牛星) 위에서 나와 남두성(南斗星) 아래로 들어갔다.
3월 27일 무자
부제학 조익(趙翼)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낙안 군수 임경업이 윗사람에게 아부하려 한 죄에 대해 간원이 논핵한 것을 보건대, 세시에 보낸 선물이 20여 가지나 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우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자 상께서 발론한 대관을 삭출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무릇 대관은 말하는 것으로 직분을 삼는바, 비록 논한 바가 잘못 들은 데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죄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20가지나 된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세시에 선물을 보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며, 그리고 이른바 20가지나 된다고 하는 것도 토산물에 불과하여 값비싼 물건이 아니었으니, 임경업이 체찰부(體察府)의 군관으로 출신하여 한갓 주장에게 정성을 바칠 줄만 알아서 선물의 가짓수를 많게 하여 자신을 과시하려고 힘쓴 것입니다. 대간들이 이를 듣고서 미워하여 죄를 주기를 청한 것은 직분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추호라도 대신을 죄에 빠뜨리려는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요즈음 아무 말 않고 지내는 것이 풍조가 되어 곧은 말이 들리지 않으며, 혹 조금이나마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죄를 주니, 이것이 어찌 성명한 시대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속히 발론한 대관을 삭출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권도(權濤)의 잘못은, 무심히 한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경들이 이와 같이 두둔하다니, 그 본의를 모르겠다."
하였다.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기를,
"지난 설에 임경업이 사대부들의 집에 세찬(歲饌)을 보냈었는데, 신의 집 종이 낙안군(樂安郡)의 가리(假吏)031) 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가리가 시골 사람이어서 선물을 줄 사대부들이 어디에 사는지 몰라 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신이 우연히 그 문서를 보니, 온 조정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었는데, 가짓수가 잡다하여 많은 경우는 20가지나 되었으나 물건은 매우 미미한 것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원임 대신에게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은 속으로 그가 일의 체모를 알지 못하고 시세(時勢)만을 살피는 것을 미워하였습니다. 보덕(輔德) 권도가 마침 신의 집을 들렀기에 신이 이를 말해 주었습니다. 지난번에 간원이 이 일에 대해 논하여 상신이 인책하기까지 하였는데, 신이 어찌 말하는 사이에 아무런 뜻없이 한 말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경솔함으로 말미암아 권도가 중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권도에게 내릴 죄를 신에게 내리어 함부로 말하는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라."
하였다.
경상도 웅천현(熊川縣) 민가의 말이 망아지를 낳았는데, 오른쪽 앞다리 아랫 마디가 둘로 갈라졌으며 양쪽 다 말굽이 있었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간으로, 김육(金堉)을 헌납으로, 윤강(尹絳)·최혜길(崔惠吉)을 정언으로, 심지원(沈之源)을 교리로, 이경증(李景曾)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유성이 천부성(天掊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또 유성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3월 28일 기축
부호군 이민구, 교리 심지원, 전적 오달승(吳達升), 부사과 김종일(金宗一) 등이 상소하여 권도와 함께 죄를 받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크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라."
3월 29일 경인
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기를,
"의주(義州)의 치보를 보니 ‘피로인(被擄人)을 매매하는 날에 가도(椵島)에 들어간 호인(胡人) 2명이 모문룡의 차인(差人) 2명과 함께 도착하자 즉시 철시하고 진강(鎭江)으로 들어갔다. 그 사정을 듣건대, 대개 곡호(曲胡)와 수행한 호인 2인이 가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강정(講定)하는 일로 이 두 사람과 모문룡의 차인 두 사람을 함께 보내어 급히 달려가는 것이라고 한다. 용골대(龍骨大) 등이 강화의 말을 듣고는 몹시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備局)에 내렸다.
3월 30일 신묘
예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태묘(太廟)에 친제한 뒤에는 으레 선성(先聖)에 전알(展謁)하는 예가 있습니다. 감히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을 사이에 예를 거행하라."
하였다.
남이공(南以恭)·김기종(金起宗)·성준구(成俊耉) 등이 치계하기를,
"수비(守備) 김여수(金汝綬)는 신(臣) 기종과 절친한 자입니다. 신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도독(都督)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쌀 운반선에 대한 일을 언급하자, 제장들이 모두 「쌀을 싣고 가서 적들에게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요행히 쌀 운반선 10여 척을 포획하였으니, 이것을 조정에 보고하고 그대로 쌀 운반선을 빼앗아 군사들을 먹인다면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에 찬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나머지 진 중군(陳中軍)이하 제장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랫동안 조선 땅에 머물고 있는바, 이미 서로 도와야 할 도리가 있으며, 또 같은 배를 탄 처지인데 어찌 이런 명분이 없는 거동을 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하자, 도독이 「이미 많은 관원들과 의정한 일이어서 다시 고치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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