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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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진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배표례(拜表禮)를 행하였다.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홍방(洪霶)이 떠나갔다.

 

유성이 항지성(亢池星) 위에서 나와 천문성(天門星) 아래로 들어갔다. 유성이 분묘성(墳墓星) 위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들어갔다.

 

4월 2일 계사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백홍(白虹)이 햇무리를 꿰었다.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4월 3일 갑오

의주 부윤 엄황(嚴愰)이 치계하였다.
"용호(龍胡)032)   등이 파시(罷市)하고 돌아갈 때 신과 속환 차사원(贖還差使員)을 불러 말하기를 ‘전에 상경하였을 때 접대관이 말하기를 「포로를 데리고 오면 사들이겠다.」고 하였으므로 이번에 2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팔린 숫자가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찌 이와 같이 약속을 저버리는가. 우리들 중에 혹 값을 약속하고 포로를 남겨 두었다가 추후에 와서 받아가려는 자가 있을 경우 값을 따져 사들이기로 약속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그들과 더불어 값을 따지면서 몇 차례 흥정을 하여 1인당 청포(靑布) 65필로 정하고는 즉시 문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녀 30인은 값을 정하고 남겨두었으며 그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도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우리 나라 국경을 쳐다보면서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가 하늘까지 닿는 듯했습니다."

 

4월 4일 을미

김기종이 치계하기를,
"신이 사첩(辭帖)을 도독에게 바치고 인하여 4척의 쌀 운반선을 보내는 것을 허락해 준 데 대해 사례하니, 도독이 말하기를 ‘이미 정녕하게 허락하였는데 어찌 감히 약속을 저버리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귀국이 자문(咨文)을 보내 장관들을 죄주기를 청하니, 일이 몹시 놀랍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얼핏 들으니 국왕께서 장차 내가 잘못한 것을 천조(天朝)에 상주하려 한다고 하는데, 말이 너무나도 맹랑하여 내가 믿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우리 나라가 조금은 예의를 아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관향사(管餉使) 성준구와 함께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을 찾아가 쌀 운반선에 대한 일을 언급하자, 중군이 말하기를, ‘섬 안의 논의가 아침 저녁으로 변하고 있다. 내가 극력 주선은 하고 있지만 말이 시행되지 않아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4월 사이에는 결말이 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결말이 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니, 중군이 말하기를 ‘재촉하는 글이 자주 내려오니 진을 옮겨야 하는데, 탄핵하는 글이 계속해서 나오니 오래 머물고자 한들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노야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어서 탄핵하는 글이 있는가?’ 하니, 중군이 말하기를 ‘당초에 주문(奏聞)한 군병(軍兵)의 숫자가 그 실제 인원을 따져보면 10분의 1에도 차지 못했고, 전곡을 낭비하여 헛된 데다 써버렸으며, 거짓으로 모씨(毛氏)라고 칭한 사람은 늠료(廩料)가 후하고 다른 장관들은 몹시 박하게 대우하였다. 그리고 객상(客商)들이 매매할 즈음에도 긁어모아 자기가 차지하였으므로 이쪽 편 장사꾼이나 저쪽 편 장사꾼이나 모두 원통해 하였다.’ 하였습니다.
아문(衙門)이 몹시 엄밀하여 전과는 전혀 달라 비록 특별한 정황이 있더라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한번 사상(私商)들이 섬을 출입한 뒤부터 부상(富商)들은 아문을 출입함에 있어서 전혀 간섭을 받지 않고 있는바, 혹 불량한 무리들이 조정의 사정을 누설하기라도 한다면 관계됨이 몹시 중합니다. 엄밀히 금단하여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내렸다.

 

진성(塡星)이 물러나 태미 동원(太微東垣) 상상성(上相星)을 범하였다.

 

4월 5일 병신

상이 태묘에 행행하여 묘문(廟門) 바깥에서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다.

 

4월 6일 정유

상이 하향 친제(夏享親祭)를 의례(儀禮)대로 행하였다.

 

4월 8일 기해

간원이 아뢰기를,
"권도가 한 수령을 논한 것은 단지 세시에 선물을 지나치게 많이 보낸 것을 미워한 것으로, 그 사이에는 실로 다른 뜻이 없는데 갑자기 삭출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삼사(三司)가 같은 말로 힘껏 간쟁한 것은 일개 권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간관이 죄를 받는 것은 성덕에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속히 삭출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류가 상소하기를,
"심명세의 상소를 보건대, 명세가 권도에게 말해 준 것이 애당초 아무런 생각없이 말한 것이니, 권도가 신을 치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소 중에, 권도가 보내는 곳을 묻기에 명세가 억지로 물을 필요는 없다고 답하였다고 하였으니, 권도가 단연코 다른 뜻이 없었음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예전의 언관들 중에는 곧바로 대신을 지척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바, 우선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선조 때에 김성일(金誠一)이 옥당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선물 받은 사실을 경연 석상에서 면대하여 공격하였는데도 선왕께서 두 사람 다 용납하여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신에게 허물이 있을 경우 대간이 논하는 것은 직무입니다. 더구나 권도는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데이겠습니까. 만약 실정에 지나친 벌이 언관에게 내려진다면 대신의 기세는 더욱 치솟고 대각(臺閣)의 풍채는 꺾이는 것이 신에게서 시작될 것입니다. 권도를 삭출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권도가 논핵한 것은 속뜻이 없이 한 짓이 아닌 듯하여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경이 이렇게 마음에 불안하게 여기니 경을 위하여 가벼운 벌을 주겠다."
하고, 이어서 외직에 보임하라고 명하였다.

 

부호군 최산휘(崔山輝)가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 최현(崔晛)이 중한 죄에 빠졌는데, 성상께서 곡진히 용서하시어 끝내 목숨을 보전하게 되니 신 부자는 감읍하여 분골쇄신 충성을 바칠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흉도(凶徒)들의 불측한 말이 마침 신의 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신의 아비가 바야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으므로 신이 반드시 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흉계를 알린 것이니, 몹시 통분스럽습니다. 고해온 흉언의 허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미 내일 밤에 거사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의심스러워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핑계되고 급급히 달려가 고하지 않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김수에게 말하고 그로 하여금 훈신과 재신들에 통보하여 여러 대신과 대장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서생이 사체에 어두워 직접 조정에 나아가 고하지 않은 결과 흉도들을 놓쳐 정형(正刑)을 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훈적에 기록되었으니, 속히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적소에서 병든 아비를 귀성(歸省)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는 큰 공이 있어서 이번 공신에 참여한 것이니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전 정(正) 허적이 상소하기를,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건대 ‘허적은 집에 있었던 사람이므로 최산휘의 위에 기록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다시 조사하여 마감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귀의 이 말은 실로 신의 마음에 드는 말이니, 신의 이름을 속히 훈적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시어 외람된 폐단을 없애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종적을 알아서 고변하도록 지시한 자는 으레 원공(元功)에 참록되었다. 이귀는 한갓 달려가 고한 공로가 가상하다는 것만 알고 지휘한 공로가 더욱 크다는 것은 몰랐으니,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다고 하겠다. 그의 말은 따질 것이 없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익녕군(益寧君) 홍서봉(洪瑞鳳)이 상소하여, 훈적에서 삭제하여 공의(公議)에 답하고 분수에 편안하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답하였다.
"이와 같이 굳이 사양하니, 너무 지나치다. 경은 안심하고 공무를 보라."

 

4월 9일 경자

함경도에 정배한 죄인 김설(金卨)에 대해 회계한 금부의 공사에 대해 하교하기를,
"이 회계가 옳은가? 정원은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본원의 검률(檢律)로 하여금 율문을 상고하게 하니, 김설과 김원(金垣) 등의 당초 조율은 무고조(誣告條)의 ‘무고한 사람이 사죄(死罪)에 이르는데 승복하지 않는 경우에는 장 일백 유 삼천리에 도역 3년을 병과한다.’고 한 것으로 조율한 것입니다. 이 율로 논한다면 마땅히 사면을 받는 대상에 들게 됩니다. 다만 본부(本府)가 회계하면서 인용한 보통 일반 사면에 용서하지 않는 조항을 가지고 살펴보면 거기에 ‘간당과 참언(讒言) 등의 모든 진범은 비록 사면할 때를 당해서도 모두 사면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금부가 당초에 대사(大赦)할 때를 당해서 이런 이유로 사면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전후의 사면을 서로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든 죄에는 거기에 따른 율문이 있는 것으로 사면 여부는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설을 유배할 때에 이미 공(功)으로 감면하지 않았다면 지금 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회계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그리고 본도의 감사가 전후에 말을 다르게 하였다는 이유로 잘 살피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본부가 전에는 사면하지 않고서 지금은 사면하려는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본부로 하여금 일일이 회계하도록 이 공사를 내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임금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죄인 김설은 몰래 김원을 사주하여 선류들을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려고 모함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드문 간흉이다. 금부는 임금을 무시하면서 한갓 사사로움만 따를 줄 알아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태연히 회계하여 간악한 김설을 풀어주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감사를 추고하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심보를 자라도록 내버려 둔다면 반드시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경직(李景稷) 이외의 금부 당상을 모두 삭직하고, 그 가운데 회계를 주장한 사람은 잡아다 국문하여 율에 따라 죄를 주라."
하였다. 이경직은 그의 동생 이경석(李景奭)의 이름이 김원의 상소 속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회계할 때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함경 감사 이명(李溟)은 방백의 신분으로 조정에서 위임한 뜻은 생각하지 않고 죄인 김설의 일을 사정에 따라 계문하였으니, 몹시 놀랍다. 지금은 우선 중한 쪽을 따라 추고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요즈음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방의 사정을 듣건대, 마음이 쓰라리고 숨이 막힙니다. 모문룡이 환급한 쌀 운반선은 피곡(皮穀) 천여 석에 불과하여, 이것으로 구활한다는 것은 창해(滄海)의 일속(一粟)에 불과할 뿐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이미 보리를 파종할 철을 잃어 앞으로 살아갈 일이 더욱 어렵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처음에 조정에서 미곡을 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종(耕種)하고 구활할 밑천이 될까 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미곡 운반선이 저지되어 구활할 길이 끊어지자 오가는 도로에 시체가 즐비하다고 합니다. 이후의 수용(需用)을 헤아려야 하나, 굶주린 백성을 구활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듣건대, 결성(結城)의 창고 곡식이 아직 5, 6천 석이 남아 있다고 하니, 1천여 석을 덜어내어 급히 운반해다 골고루 나누어 주어 진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몹시 타당하다.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0일 신축

김상용(金尙容)을 판의금부사로, 홍서봉(洪瑞鳳)을 갈충 효성 병기 영사 공신(竭忠效誠炳幾寧社功臣)        익녕군(益寧君)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허적(許𥛚)을 갈충 효성 병기 익명 영사 공신(竭忠效誠炳幾翊命寧社功臣) 가의 대부(嘉義大夫)        양릉군(陽陵君)으로, 허계(許禊)를 갈충 효성 병기 영사 공신 행 부사과(行副司果)로, 황성원(黃性元)을 갈충 효성 병기 영사 공신 행 부사용(行副司勇)으로 삼았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달이 태미 동원 안으로 들어갔다.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소무 공신(昭武功臣)과 영사 공신(寧社功臣) 두 훈적을 감정한 것에 대해 공론이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훈이 감정한 것이라는 핑계로 끝내 고치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몹시 답답합니다. 신경영(辛慶英)과 이윤남(李胤男)이 공도 없이 녹훈에 참여된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홍보(洪靌)가 속인 것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적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안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황진(黃縉) 등이 고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한 장의 서찰을 써서 황진과 허선(許選)에게 부쳐 보냈습니다. 황진 등은 이미 김진성(金振聲) 등과 군사를 일으킬 날을 약속하고서 고변하려 하였으니, 비록 허적의 서찰이 없더라도 고변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허적이 병을 핑계대고 즉시 자신이 고변하지 않고 단지 한 장의 서찰을 부쳐 보냈으니, 법으로 따진다면 역모를 알고서도 고변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탑전에서 고변한 자인 최산휘(崔山輝)와 황진을 수공(首功)으로 삼고 김진성 등 5인을 다음으로 삼으며, 허적이 서찰을 부쳐 보낸 공은 그 다음에 기록하여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쳐 감정하는 날에는 도리어 허적을 수공으로 삼고 최산휘를 3등의 끝에다 기록하였으며, 또 홍서봉은 허적의 서찰을 본 공으로 2등의 위에다 놓았으며, 황진의 아비 성원을 제3등으로 삼았고 허선의 아비 계를 제4등으로 삼았습니다. 황성원과 허계가 고변한 자의 아비라고는 하나 모두 자기 집에 있으면서 즉시 고변하지 않은 것은 허적과 차이가 없으니, 전도되고 착란됨이 심합니다.
그리고 고변한 자 외에 만약 변을 듣고 주선한 공으로 말한다면 김류(金瑬)와 홍서봉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김류는 이미 공훈을 사양하여 허락을 얻었으니, 홍서봉도 마땅히 극력 사양하여 공훈을 차지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허적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았으니, 염치가 너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황성원과 허계·최현(崔晛)은 모두 고변한 자의 아비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황성원과 허계는 봉군(封君)되기까지 이른 반면, 최현만은 훈적에 참록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먼 변방에 쫓겨나 있으니, 어찌하여 공에 보답하는 법의 후하고 박함이 현격하게 다르단 말입니까.
임금이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를 보고 취사하는 것이며, 모든 일은 타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니, 진실로 타당하지 않다면 열 번을 고치더라도 해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지 않다고 여긴다면 다시 대신과 원훈으로 하여금 정사 공신(靖社功臣)을 감정할 때와 같이 탑전에서 다시 감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되면 성상께서 살펴보는 아래에서 어찌 사정(私情)을 따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간절한 정성을 애처롭게 여기어 속히 다시 사핵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시비를 분명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상벌을 공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번 세 번 감정한 일을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하니, 몹시 타당하지 않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귀가 매번 녹훈을 감정한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여러 차례 차자를 올리니, 일이 몹시 소란스럽다.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회계하여 그의 의심스런 마음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흠(申欽)과 김류는 모두 이름이 차자 속에 들어 있어서 감히 회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과 원훈이 회의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감정한 것으로, 그때 등급을 정하고 숫자를 가감한 곡절에 대해서는 전후의 차자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바, 지금 다시 별도로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상께서 전에 감정한 것이 미진하다고 여기시어 다시 고하를 정하고 원수(元數)를 증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막중한 일이어서 신 한 사람이 회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귀가 따진다는 이유만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의혹을 풀어 주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체에 있어서 아마도 온당치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4월 11일 임인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오랑캐들의 글을 보건대, 봄·여름·가을에 개시(開市)하고자 하였습니다. 봄과 가을로 개시한다고 하더라도 물화를 마련하기 어려울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세 계절에 개시할 경우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6월은 농삿일이 바쁘고 또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러니 개시하기 어렵다는 것과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을 미처 쇄출(刷出)하지 못한 곡절 및 이 부마(李駙馬)의 행차가 무인 지경을 통과하여 미처 탐문하지 못하였다는 뜻을 언급하고, 승문원으로 하여금 급히 글을 짓게 한 다음 호역(胡譯) 한 사람을 보내 전해 주고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2일 계묘

상이 하교하였다.
"회답사 이란(李灤)·박난영(朴蘭英) 등은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개시 등에 관한 일을 완료시켰으니, 해당 조로 하여금 논상하게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내수사가 자전(慈殿)의 분부에 따라 공문을 만들어 보내 흥양현(興陽縣)의 범죄인을 체포하게 하였는데, 현감은 도리어 차인(差人)을 가두었다 한다. 본읍의 현감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왕명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라."

 

김상헌(金尙憲)을 대사간으로, 임광(任絖)을 정언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13일 갑진

충훈부가 아뢰기를,
"종실의 자손과 구 공신(舊功臣)의 중자(衆子)인 충의위(忠義衛) 체아(遞兒)는 지난해 변란 이후로 비국의 계사에 따라 1년간 임시로 감하였으나, 금년에는 부록(付祿)하여야 할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군량을 계속 대기가 어려우니, 불필요한 입을 줄이고 헛된 낭비를 없애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춘등(春等)을 부록할 때에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충의위 등은 모두 가난한데 주야로 수고하고 있으면서 녹을 받지 못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정상이 딱합니다. 4월등(四月等)부터는 전대로 부록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기를,
"호차(胡差) 5인과 호송하는 당차(唐差) 1인이 가벼운 짐 4, 5바리를 가지고 사도(蛇島)로부터 나와 곧장 의주 길로 향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에게 물으니 감추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데 모문룡이 오랑캐와 서로 통하면서 뒷날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것이 명백한 듯합니다. 황 호부(黃戶部)가 현재 섬 안에 있으니 불가불 호부에게 비밀히 실정을 통하여서 그로 하여금 변란에 대처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 뜻을 접반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황 호부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며, 모문룡의 자취 역시 정확히 알기 어려우니 쉽사리 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4월 14일 을사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였다.
"도독의 차관(差官)        모영후(毛永後)가 호차(胡差)를 대동하고 심양(瀋陽)에서 돌아온 후에 금한(金汗)033)                  의 답서를 베껴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계 황제(天啓皇帝)가 붕서하였다는 애통한 조서가 이달 6일에 도착하여 오늘 거애(擧哀)하느라 집무하지 않아 서로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에 장대추(張大秋)로 하여금 탐문하게 하였는데, 도독이 장대추를 불러 비밀히 말하기를 ‘2월 사이에 오랑캐들이 정병 3천 명을 뽑아 서달(西㺚)을 공격하였는데, 영원(寧遠)의 주장이 미리 화기를 갖추고 있다가 귀로에서 요격, 크게 격파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30여 명뿐이다. 그리고 기근으로 이곳에 와서 강화를 애걸하고 있는데, 강화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전에 온  왕자증(王子登)의 아들있는 처가 아직까지 오랑캐들의 수중에 있는데 왕자가 아내를 사오려고 하기에 내가 단자(段子) 30필, 사탕(砂糖) 30근, 대추[大棗] 50근을 주고 또 차인(差人)을 보내었다. 너는 이 뜻을 조선의 배신(陪臣)으로 하여금 조정에 계문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4월 15일 병오

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기를,
"오랑캐 장사치가 심양으로 철수하여 도착하기 하루 전인데, 의주(義州)·철산(鐵山)·곽산(郭山)의 포로가 되었던 여인 4명이 도망하여 돌아와서는 ‘오랑캐 장사치들이, 조선이 속환(贖還)하기를 청하고서도 즉시 사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로들로 하여금 도망하여 달아나게 한다고 하면서 몹시 분해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용골대 역시 도망하여 돌아간 자들을 하나도 쇄환하지 않는다고 매번 위협했습니다. 호차가 가까운 시일 내에 나올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4월 18일 기유

성준구가 곽산의 창고 곡식 2천여 석으로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방의 기민을 구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경술

유성(流星)이 패고성(敗苽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소하기를,
"흥양 현감(興陽縣監) 정홍임(鄭弘任)을 내수사의 차인을 가두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군명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라고 명하시었는데, 성명한 시대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내수사의 공사(公事)는 으레 반드시 이조를 경유하여 감사에게 이문(移文)한 다음에야 주현에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곧바로 내수사에서 공문을 보내고 차인을 파견하거나, 혹은 해당 조의 공문이 있더라도 감사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본현에 내리는 것은 크게 법식에 어긋나는 일이며, 무궁한 폐단을 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수령들이 어찌 마음 편히 봉행(奉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봉행하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차인을 가두기까지 한 것은 참으로 지나친 것입니다. 다만 그 차인이 매우 형편없는 자여서 그대로 앉아서 볼 수만은 없어 부득이 가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단지 내수사가 말하는 것만 믿고서 조용히 강구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사인(私人)에게는 후하게 대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는 박하게 하는 것으로, 성덕(聖德)에 손상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정홍임이 한 짓을 실로 옳지 않다고 여기신다 하더라도 먼저 조사를 하여 실상을 안 다음에 죄를 주어야지, 차인의 하소연만 듣고서 급급히 중한 죄를 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무릇 하인만을 두둔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비루한 습속에 물든 자나 하는 것으로, 향당(鄕黨)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조차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로써 성명께 누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된다면 어찌 크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전하의 이번 거조는 반드시 일이 자전께 관계되어서 이렇게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의혹은 더욱 깊어집니다.
필부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도 오히려 조용히 말로 깨우쳐 어버이를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명을 따르기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제왕의 효도가 어찌 구구하게 도로써 깨우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명을 따르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전께서 몹시 화를 내신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역시 간절하게 비유를 들어 깨우쳐서 기어이 들어주시도록 하여 깊이 생각하는 덕에 허물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생각을 고치시어 속히 정홍임을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시고, 이어 전교를 내리시어 지금부터는 내수사의 공사가 사리에 맞지 않을 경우 감사와 수령들로 하여금 일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여 전하의 평명(平明)한 다스림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정홍임의 일은 간단한 벌을 준다고 해도 불가한 것이 없다."
하였다.

 

4월 20일 신해

행 대사간 김상헌이 상소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 있어서는 예로써 나오게 하고 예로써 물러가게 해야 하는 법으로, 귀하게도 해 줄 수 있고 천하게도 해 줄 수 있으며,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나, 신하로 하여금 치욕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신하를 이와 같이 대우했으므로 신하들 역시 스스로 염치를 닦고 스스로 명절(名節)을 중하게 여겨서, 차라리 충직하게 하다가 죄를 얻을지언정 구차하게 영합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세상을 다스리면서 예로써 신하를 부리니 아랫사람들이 감격하면서 모두들 자신을 단속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즘은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도리가 점점 처음 같지 않아 그들의 본심을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노여움을 가한단 말입니까. 직책상 과감하게 말하는 자를 들추어내기 좋아한다고 미워하기도 하고, 공무에 임하여 마음을 다하는 자를 도리어 마음대로 한다고 의심하며, 뜻에 영합하는 자는 상을 주고 뜻을 거스르는 자는 반드시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단 잘 살핀다는 뜻에 어그러지는 것일 뿐만 아니니, 또한 어찌 임금의 너그럽게 포용해주고 예로써 부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서성(徐渻)을 하옥한 것과 권도(權濤)를 삭출한 것은 특히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모두가 그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이겠습니까. 권도의 심사를 알 수는 없으나 그가 사사로운 감정을 품은 흔적은 드러나지 않았는데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말로 인해 삭출을 당했으니, 티끌까지도 받아들이는 넓은 도량에 흠이 될까 저어합니다. 더구나 서성은 김설(金卨)을 몹시 미워하여 그의 말이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회계한 내용에 어긋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임금을 깔보았다고 한다면 실정에 지나친 듯합니다. 옥당의 여러 신하들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이미 정한 공론을 밝혀서 한 사람의 편벽된 사견(私見)을 배척하는 것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는 자의 당연한 직분입니다. 비록 중도에 맞지 않는 과격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잘못 듣고서 잘못 말한 허물은 돌아갈 곳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음흉하고 조급하다고 지목하시니, 치우침이 없어야 하는 도리에 손상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지나간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할 것을 생각하며, 성신(誠信)하는 도리를 더욱 넓히고 예로써 부리는 아름다움을 다하소서. 그리하여 이로써 신하들의 염치를 배양하고 이로써 성조(盛朝)의 청명한 다스림을 이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4월 21일 임자

이조 참판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따뜻하게 하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2일 계축

합사(合司)하여 역적 이공(李珙)을 율에 따라 죄줄 것을 청하였다. 일곱 번째 아뢰자, 답하였다.
"나의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의 논집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내가 몹시 괴롭다. 너희들이 비록 이와 같이 고집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따라 줄 리가 없으니 다시 말하지 말아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라."

 

4월 23일 갑인

정충신이 상소하여 가을이 되기 전에 상경하여 병을 조리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김광현(金光炫)을 교리로, 이사상(李士祥)을 정언으로, 오단(吳端)을 부수찬으로, 조빈(趙贇)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25일 병진

상이 등극한 데 대한 배표례(拜表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사간으로, 이현영(李顯英)을 강원 감사로,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 우찬성 이직언(李直彦)이 졸하였다. 직언은 강직 방정하고 근면 민첩하였으며,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엄격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청백리 4명을 뽑았는데 이직언이 뽑혔었다. 광해 때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직언은 항의하며 변하지 않았다. 반정 후에 상이 그의 깨끗한 절조를 가상하게 여겨 찬성으로 발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4월 27일 무오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중국의 기병과 보병 2천여 명이 선천(宣川) 길을 경유하여 의주로 향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구련성(九連城)으로 경작하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섬 안의 형세에 대해 말하면, 장수와 막료들이 이탈할 생각을 품고 원망을 쌓은 것이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 오늘의 거동은 진강(鎭江)에 약간의 땅을 얻어서 뒷날을 위한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인 듯합니다. 어떤 자는 이르기를 ‘황 호부(黃戶部)가 현재 섬 안에 있으면서 도독이 위축되어 절도에 머물고 있는 것을 그르다고 하므로 도독이 구련성에 나아가 진을 쳐서 기각(猗角)의 형세를 보이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4월 28일 기미

양사가 모두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어제는 국기일(國忌日)이어서 합사하여 논계하는 것을 잠시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조묘(祧廟)의 국기일에는 본디 정계(停啓)하는 예가 없는데 규식 이외에 갑자기 정계한 것은 그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하루 동안 역적을 내버려 둔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역적을 다스리자고 청하는 일은 하루가 시급하고, 조묘의 국기일에는 재계(齋戒)하지 않는 법인데, 합사까지 하던 중대한 논계를 어찌 갑자기 정지할 수 있겠는가. 모두 체차해야 한다."
고 하니, 상이 따랐다.

 

원옥(寃獄)을 심리한 형조의 별 단자(別單子)를 가지고 하교하였다.
"원옥을 심리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명이 중하더라도 억울한 사정이 있는가를 심리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는 것을 말한다."

 

상이 하교하였다.
"의거(義擧)하고 힘껏 싸우고 호종한 자들에게 모두 직을 제수하라고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요즈음 이조에서는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뜻인가. 일이 몹시 온당치 않다."

 

예조가 아뢰기를,
"여름철이 거의 반이나 지났는데, 가뭄이 몹시 심합니다. 삼각산과 목멱산(木覔山) 및 한강·풍운 뇌우(風雲雷雨)·산천 우사(山川雩祀) 등처에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설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권도를 흥양 현감에 제수하라."

 

태백성이 나타났다.

 

4월 29일 경신

금부 리(禁府吏) 정사남(鄭士男)이 도망한 역적 이수향(李秀香)을 체포하였는데, 상이 논상하라고 명하였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나인(內人) 업이(業伊)가 이수향의 초사에 나왔으니 국청에다 넘기소서. 그리고 수향이 끌어 들인 오세장(吳世長)·정삭(鄭汋)·정준(鄭浚)·윤휘(尹暉)·최관(崔瓘)·박자전(朴自全)·박자천(朴自天)과 죄인 이낙(李洛) 등을 모두 잡아와 추국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고부천(高傅川)을 장령으로, 오단(吳端)·최혜길(崔惠吉)을 지평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헌납으로, 김종일(金宗一)을 정언으로, 김육(金堉)을 부교리로, 여이징(呂爾徵)을 수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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