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유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황 호부(黃戶部)가 문안사에게 말하기를 ‘모문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랫동안 귀국에 머무르고 있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피해를 끼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하기에 답하기를 ‘국고가 완전히 고갈되어 계속 접제할 수가 없었으니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지 않으나, 도독이 엄하게 금단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부가 말하기를 ‘나는 군량 운반만 감독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군무를 규찰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하고, 또 ‘국왕께서 문안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예물을 보내시어 후의를 보여주시었으니, 내가 받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만 나의 임무가 어사인데 먼저 예물을 받으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멸시당하게 된다.’고 하면서 굳이 사양하므로 부득이 물러나왔습니다.
그의 기색을 보니, 모문룡을 몹시 미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예물을 사양하고 받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은 없는 듯했습니다. 중군 곽정로(郭定虜)에게 물으니, 흠차 동로 감군(欽差東路監軍)이라고 하였습니다."
5월 2일 임술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조서를 맞이하고 환궁하여 숭정전(崇政殿) 섬돌 아래에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대신과 백관들이 역적 이공(李珙)을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다섯 차례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답하기를,
"공이 설사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선왕의 자식이므로 내가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때부터 매일 다섯 차례씩 아뢰었다.
김상헌(金尙憲)을 부제학으로, 임득열(林得悅)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3일 계해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초봄에 역변이 창졸간에 일어났는데, 신은 불행하게도 고변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처리를 잘못하여 많은 물의가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추관(推官)을 겸하고서는 역적의 치죄가 한창 엄한 중이라 의리상 감히 물러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풍헌의 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신을 탄핵하는 글의 먹물이 채 마르지 않았고 비방하는 말이 아직도 시끄러운데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삼성 국청(三省鞫廳)이 아뢰기를,
"강화(江華)의 아비를 죽인 죄인인 덕신(德信)은 술에 취한 것과 같이 미쳐서 다방면으로 힐문하였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간혹 하는 말도 모두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로 말하면 원정(元情)한 후에 형추하고, 승복한 다음에 정형(正刑)을 가하는 법인데, 이미 공초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가 흉악한 짓을 한 상황이 이미 그의 어미와 누이동생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들어 정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지금 동지춘추 장유(張維)는 신과 상피하여야 할 처지인데, 신은 하위직으로서 당연히 체직되어야 하니 신의 예겸 춘추(例兼春秋)를 체직하소서. 무릇 옥당(玉堂)의 장관은 사국 당상(史局堂上)을 고적(考績)하고 출척하는 일에 모두 참여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관이 승지와 상피하여야 할 경우에는 승지를 체직하고, 춘추와 부제학이 상피해야 할 경우에는 사관을 체직하여 송서(送西)하는 것이 전례요 고사(古事)로, 이는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지금 신 때문에 사국(史局)에 당상 한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조종들께서 창제하신 관제에 관계되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고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관각(館閣)의 중한 자리이겠습니까. 어찌 감히 구차스럽다는 혐의를 무릅쓰면서 가볍게 선왕의 법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속히 신의 본직을 체직하여 공사간에 온당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해조에서 경솔하게 감하(減下)한 것은 실로 예전 규례를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공무를 보라."
하였다.
이조 판서 장유가 차자를 올리기를,
"부제학 김상헌은 법률상 신과 상피하여야 되는데, 하위직에 있는 자를 체직시켜야 한다는 예에 따라 그가 겸임한 춘추관 직을 경솔히 감하하였습니다. 예전의 규례를 두루 물어보니, 전에 이정구(李廷龜)가 춘추관 당상이고 홍이상(洪履祥)이 부제학이었을 때 혼인 관계로 상피하여야 될 처지였었는데, 이정구가 계사를 올려 스스로 춘추관 당상의 직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대개 춘추관 당상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가 있으나 부제학은 수찬관(修撰官)이어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김상헌이 상소한 내용을 보니, 사리가 참으로 그러하고 또 근거할 만한 예전의 규례도 있습니다. 속히 신이 겸대하고 있는 동지춘추관사의 직을 체직하여 관제(官制)에 편케 하소서."
하였는데, 해당 조에 내렸다.
5월 5일 을축
우찬성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의 태조(太祖)·태종·세종께서 앞서 문명(文明)스런 정치를 열어 억만년토록 다함이 없을 복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유교를 높이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기묘 사화(己卯士禍) 이후로 유도(儒道)가 무너져 전하지 않아 인심이 나빠졌습니다. 선비들이 모두 살육당하고 학문의 계통이 끊어진 뒤 이황(李滉)이 떨쳐 일어나 창도(倡導)함으로써 선비들의 기풍이 일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도를 깊이 알고서 돈독하게 좋아한 자는 오로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뿐이었습니다.
이황이 죽은 뒤에는 두 사람의 도덕이 더욱 높아져 백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질투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들 경모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못 볼까 염려하였으며, 제자의 예를 갖추고 그의 문하에서 종사한 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늘날 사대부들이 조금이나마 윤리와 예법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이황과 이이·성혼의 공입니다. 불행히도 두 사람이 시론(時論)에 저촉되어 크게 유언(流言)을 입었습니다. 동서(東西)로 당이 나뉘어진 뒤에는 시론에 부회하는 무리들이 처음에는 욕을 하며 헐뜯다가 계속해서 공격하여 사림이 두려워하고 기상이 처참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인물을 진퇴시킬 때에도 반드시 이이와 성혼에 대해 시비한 것을 가지고 취사(取捨)하니 동경(東京) 당고(黨錮)의 화034) 와 남송 위학(僞學)의 화035) 가 가까운 시일 내에 닥쳐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옥당이 예를 의논한 차자를 보건대, 조익(趙翼)이 이른바 스스로 진실로 전하께 충성을 하려던 것이었다고 한 것은 말하는 사이에 실수한 것이고, 그 역시 후회하고 있으니 반드시 따질 것조차 없습니다. 조경(趙絅)에 이르러서는, 경망스런 신진(新進)으로 그의 재학과 덕망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의 공적인 시비를 가지고 원훈과 재신들을 모욕하고 산림의 선비들을 헐뜯었으니,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사림을 멸시한 것이 극심합니다.
박지계(朴知誡)는 어려서부터 몸소 농사지으며 뜻을 독실히 하여 임하(林下)에서 조용히 수양하였으니 그의 곤궁함을 지킨 절조와 학문에 힘쓴 실지는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임하에서 덕망을 길러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자로는 오로지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박지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 세 사람을 예로써 초치하여 사유(師儒)의 자리에 앉히거나 대각(臺閣)에 앉혔으니, 유도를 높이는 전하의 뜻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불행히도 지계가 예를 의논한 것이 시론과 합치되지 않아 직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조경의 무리가 지나치게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이 예에 대하여 의논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들 몇 사람을 시종 권장하시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범으로 삼을 바를 알게 하여 유도를 높이고 국맥(國脈)을 영원토록 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서 논한 것이 심히 타당하다.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5월 6일 병인
돌아온 동지사 변응벽(邊應璧)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장관이 탄 배가 뒤집혀 가라앉았으니, 일이 몹시 놀랍다. 어찌하여 유독 그 배만 파선되었는가?"
하니, 응벽이 아뢰기를,
"연 3일간을 광풍이 몰아쳐서 모든 배가 난파당할 뻔하다가 서장관의 배만 끝내 난파당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동지에 습의(習儀)할 때에 과도관(科道官)이 신들에게 묻기를 ‘모문룡이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데 무슨 해 되는 일이 없는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별로 해 되는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모문룡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던가?"
하니, 응벽이 아뢰기를,
"해 되는 일이 있느냐고만 물었을 뿐 별달리 크게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 천자가 성명(聖明)하다고 하던데 중국 조정의 일이 전과 크게 다르던가?"
하니,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들 황제가 성명하다고 하였으며, 옥하관(玉河館)에서 뇌물을 요구함이 전보다 배는 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장차 오랑캐들을 토벌하려고 하던가, 단지 지키기만 하려고 하던가? 아니면 화친 논의는 없던가?"
하니, 아뢰기를,
"단지 지키기만 할 계책을 세울 뿐 적을 토벌하려는 거동은 없었으며, 화친 논의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지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금년에 삼남(三南)은 비가 충분히 왔으나 양서(兩西)036) 와 기전(畿甸)은 가뭄이 몹시 심한 데다가 우박이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상께서는 반드시 혼자 계실 때 깊이 반성하셔야 합니다. 옛날에 송 인종(宋仁宗)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대궐 뜰에 나가 서 있자 비가 크게 내렸습니다. 태청전(太淸殿)에서 비를 빌 때에 소요연(逍遙輦)을 물리치고 비를 피하지 않았는데,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인 것으로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은 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서의 가뭄이 더욱 혹독하니 몹시 걱정스럽다."
하였다. 수현이 아뢰기를,
"얼핏 들으니 서쪽 지방 수령들이 가도(椵島)와 무역을 하면서 간혹 불법을 자행하며 폐단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여 징계하여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므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우부승지 윤지경(尹知敬)이 병이 중하다고 하니, 약방(藥房)으로 하여금 약을 조제하여 보내게 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함경도의 전시(殿試)를 치른 후에 승지가 오래도록 변방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를 급히 하송하게 하되, 단지 파발꾼만 보내어 전송(傳送)하게 한다면 지체되거나 잃어버리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별도로 금군(禁軍)을 차정하여 말을 주어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5월 8일 무진
헌부가 아뢰기를,
"승복한 역적은 부대시 참(不待時斬)하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국청(鞫廳)이 이미 이수향(李秀香)을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였고 신들 역시 논하였습니다. 요즈음 이 역적의 행태를 보건대, 이후로 면질할 때에 사실대로 말할 리가 만무합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흉한 목숨을 살려두면서 매번 면질하여 따지게 하는 것은 법에도 어긋나고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에도 크게 손상되는 것입니다. 속히 형을 집행하소서. 역옥(逆獄)을 감독할 즈음에는 날마다 검칙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요즈음 엄하지 않다는 말이 많습니다. 전일에 박수(朴守)를 변핵(辨覈)할 때 국청에서는 단지 수향의 범법 사실만을 물어야 하는 법인데, 다른 말을 제기하여 진위를 어지럽혔습니다. 의심스러운 상황이 없지 않으니 당해 도사(都事)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지원(沈之源)을 교리로, 홍명구(洪命耉)와 김남중(金南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5월 9일 기사
암행 어사 윤황(尹煌)과 이행원(李行遠)을 양서(兩西)에 나누어 보냈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5월 10일 경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5월 11일 신미
간원이 아뢰기를,
"최시량(崔始量)은 임지후(任之後)의 초사(招辭)에서 처음 나왔는데, 시량이 공초한 바에는 지후와는 평생에 한번도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면질할 때에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는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면서 참으로 서로 만나보지 않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서로 힐문할 때에 미쳐서는 지후에게 ‘네가 나를 죄에 빠뜨릴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서로 절친하다는 것은 역적 이종충(李宗忠)의 말을 증거로 삼지 않더라도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듯합니다. 형신을 면한 것만도 이미 은전(恩典)을 받은 것인데, 어찌 심상한 죄를 지은 자처럼 도년 정배(徒年定配)하고 말 수 있겠습니까. 사형을 감하는 율에 의하여 먼 변방에 안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든 죄에는 거기에 합당한 율이 있는 것으로, 미워하고 사랑함에 따라 가감해서는 안 된다.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이조 참판으로, 김상헌(金尙憲)을 도승지로, 강석기(姜碩期)를 우부승지로, 정경세(鄭經世)를 부제학으로, 조방직(趙邦直)을 집의로, 김남중(金南重)을 사간으로 삼았다.
공청도(公淸道) 보은(報恩) 지역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거위알만하였다.
5월 12일 임신
공청도에 사는 진사 이창윤(李昌胤) 등이 상소하기를,
"역적 이공(李珙)은 처음에는 직접 폐모(廢母)하자는 계사를 지어 이 세상에서 용납될 수 없는 적자(賊子)가 되었고, 지금은 불령한 무리들을 불러모아 역모를 꾀하여 고금에 용서한 적이 없는 난신(亂臣)이 되었습니다. 속히 왕법(王法)을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변변찮아 누차 이런 변을 만나니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몹시 부끄러워 곧바로 죽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또 너희들의 상소를 보니 더욱더 부끄럽다. 역적 공이 비록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선왕의 아들이어서 내가 차마 형벌을 주지 못하겠다."
하였다.
5월 13일 계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요즈음 해당 조에서 승전을 받든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데,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는 폐단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안헌징(安獻徵)을 예조 정랑으로 삼았다. 헌징이 혼조(昏朝)에서 과거를 볼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아버지 안응형(安應亨)의 집 문에다 몰래 시를 지어 붙이기를,
양근의 수령이 오가기에 바쁘더니
기백의 문전에 경사에 일어났네
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의 아버지가 경기 관찰사로 있을 때 양근 군수 이재영(李再榮)이 그 집에 왕래하였으므로 이런 시를 써 붙인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문사(文詞)에 뛰어나 다시 중시(重試)에 참방(參榜)되었으니, 사람들의 말은 이같이 믿기 어려운 것이다.
5월 14일 갑술
대신과 직관(直官)이 아뢰기를,
"왕자의 법은 역적 토죄(討罪)를 최우선하는 것으로, 대의(大義)가 있는 경우에는 사사로운 은혜는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차마 죽이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법의 시행을 급하게 여기는 것은, 대개 온 천하에 강상(綱常)을 부식시키고 만고에 이륜을 드날리고자 해서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굳건한 군덕(君德)으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왕법으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왕족들 중에 제대로 보전한 자가 드문 것을 몹시 한스럽게 여겨, 예전의 사실을 책으로 읽고 현실을 보면서 길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리석은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국운이 불행하여 역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역적들의 초사 가운데 매번 이공의 이름을 거론하는데도 내가 위로 선왕을 생각하고 아래로 지정(至情)으로 이끌어 용서하여 비호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전날과는 크게 달라져 서로 호응한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난 듯하다. 몇 개월 사이에 큰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 전후로 내린 자전의 전교가 매우 엄하였으며, 백사(百司)가 업무를 폐한 지 반 년이 다되어 간다. 이에 내가 종사를 위하여 부득이 공론을 따라 그로 하여금 자결(自決)하게 한다. 골육 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항상 통탄하였는데, 오늘날 차마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나의 본마음이겠는가. 비통하고 애통하여 곧장 죽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공이 광해조 때에 모후(母后) 폐위를 청한 죄를 지었으나 반정한 처음에 혼조(昏朝) 때에 일어난 골육의 변에 징계되어 내버려두고 죄주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차례 역적의 초사에 언급되자, 정신(廷臣)들이 비로소 선처하라고 계청하여 간성군(杆城郡)에 안치하였다가 얼마 후에 방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여러 역적들의 초사에 나왔는데, 서로 호응한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 의심이 없으므로 대신과 삼사가 비로소 법에 의하여 처치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간이 하루에 일곱 차례 아뢰고 옥당이 다섯 차례 차자를 올리고 대신들도 백관을 거느리고 다섯 차례 아뢰었으며, 왕자인 의창군(義昌君) 광(珖) 등이 여러 종실들을 거느리고 날마다 계청하였고 자전께서 거듭 언서(諺書)로 하교하였으며, 승정원·예문관·시강원·감찰·익위사와 관학(館學)과 양호(兩湖)의 유생들이 모두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려 같이 청하면서 다섯 달이나 되도록 그치지 않자, 상이 부득이하여 따른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제 역적 이공의 적소(謫所)에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낼 것인데, 일이 중대하니 선전관과 함께 표신(標信)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5일 을해
상이 하교하였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상사(喪事)를 검칙하게 하라. 그리고 3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상구(喪柩)가 올라올 때에 경유하는 각 고을로 하여금 각별히 호송하게 하고, 그의 처자들도 말을 주어 올려보내게 하라."
정원이 아뢰기를,
"역적 이공의 처자에게 말을 주어 올려보내게 하라고 전교하시었습니다. 생각건대, 공은 본인이 역적의 괴수여서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주벌(誅伐)할 것을 청하여서 비로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시었습니다. 대신과 백관들이 상의 뜻을 체득하여 법대로 처리하라고 논계하는 것을 정지하였으나, 역적을 토죄하는 대의(大義)를 아직까지 다 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그의 처자로 하여금 상구(喪柩)를 따라 올라오게 한다면, 반드시 여정(輿情)을 크게 거스를 것입니다.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공이 모역(謀逆)한 상황이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상께서 비록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특별히 자결하게 하라고 명하시었습니다만, 율문(律文)에 따라 연좌(緣坐)하고 적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5월 16일 병자
양사가 아뢰기를,
"하늘에까지 사무치는 대역(大逆)의 죄를 지은 이공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자결하게 한 것은, 한때의 관대한 은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자들은 진실로 연좌율(緣坐律)에 해당됩니다. 지금 그들을 도성 안에 모여 살게 하는 것도 이미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에 어긋나 전혀 후일을 염려하는 도리가 아닌데, 말을 주어 올려보내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단 보고 듣기에 놀라울 뿐만 아니라 후세에 본보기를 보일 수도 없으니, 속히 말을 주라는 명을 거두시고 우선 그대로 섬에 안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초 처자를 보낸 것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니 지금 도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한 것이 아니며, 말을 내주라는 명은 바로 내려갈 때의 전례인 것이다. 모두 다시 논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강하게 논하여도 상이 따르지 않다가 오래 지난 뒤에야 비로소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해창 부원군(海昌府院君) 윤방(尹昉), 영의정 신흠(申欽), 우의정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대로 그대로 섬에다 안치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7일 정축
상이 하교하기를,
"막 병란(兵亂)을 겪었는데 또 전에 없는 가뭄과 우박의 재해를 만났다. 며칠 내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침식조차 잊고 만다. 지금 이 재변은 실로 내가 우매한 탓에 일어난 것으로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비를 빌고자 한다. 해당 조에 말하라."
하였다. 예조가 날을 가리지 말고 기우제를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8일 무인
정충신이 관서(關西)에서 올라와 뵈었다. 상이 서로(西路)의 굶주린 상황에 대해서 물으니, 아뢰기를,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몹시 굶주리고 있으면서 밀보리가 익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몹시 심하고 양맥이 익을 가망이 없어서 살아갈 계책이 없습니다.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렸고 살아있는 자들도 얼굴이 누렇게 떠 있어서 보노라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마음을 다해 구휼하고 있습니다마는, 현재 저축해 놓은 곡식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노추(虜酋)037) 는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자세하게는 모르나 그의 아비에게 못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주(安州) 백성들이 되돌아와 사는 것이 전에 비하여 어떠하던가?"
하니, 아뢰기를,
"본토의 백성은 비록 적으나 유민들 중 구원 받은 자들이 점차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관가에서 다 구제하지 못하자 점차 도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겨울철의 방어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하니, 아뢰기를,
"안주를 불가불 지켜야 합니다. 만약 안주를 지키지 못하면 삼현(三縣)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다만 군사를 더 보태지 않으면 결단코 성을 지킬 수 없으니, 반드시 포수(砲手) 6천, 7천 명을 더 보태야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의 군사를 징발하기란 몹시 어렵다. 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단지 본도의 군사와 신 출신(新出身)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서로의 일은, 비단 오랑캐뿐만이 아니라 모문룡도 반드시 우리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니, 그 지역의 장령(將領)들은 미리 대비하여야만 할 것이다. 혹시라도 모문룡이 변란을 일으킬 경우 본도의 군사만으로 당해낼 수 있겠던가?"
하니, 아뢰기를,
"모문룡의 군사는 우리 나라 군사보다 휠씬 적으니 무슨 막기 어려운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5월 19일 기묘
비국이 아뢰기를,
"어제 정충신의 계사에 따라 관서 지방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그들이 밀보리가 익기 전에 주려 죽을까 염려하여 1천 수백여 석의 양곡을 운송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보낼 곡식이 없습니다. 도내에는 평소에 거두어들인 곡식이 있을 것이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미리 헤아려서 겨우 살아 남은 서도 백성들이 굶어 죽을 걱정에서 헤어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본사(本司)에서도 요량하여 들여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새로 군적(軍籍)을 반포한 뒤에는 중앙과 지방 옛군적에 있던 군사들의 각년(各年)의 궐번(闕番)에 대한 가포(價布)를 일체 탕감하였으며, 병영(兵營)과 수영(水營) 및 각진과 포(浦)에서 시행해야 할 사목(事目)도 정식(定式)을 마련하여 외방에 알렸습니다. 이 이후로 병사·수사·첨사·만호 등이 조정의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전과 마찬가지로 침탈할 경우, 특별히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해 무겁게 다스리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전에 계하한 사목을 베껴서 어사가 떠날 때에 부쳐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홍주(李弘胄)를 형조 판서로, 윤강(尹絳)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0일 경진
황 호부(黃戶部)의 접반사(接伴使) 김수현(金守玄)이 치계하기를,
"황 호부가 ‘임진년의 변란 때에 귀국이 큰 화를 당하자 천조에서 힘을 다하여 구제해 주었다. 지금 오랑캐들이 쳐들어옴에 조정에서 장수를 명해 진을 설치하여 후방을 견제할 계책을 세우고 있는바, 나는 이를 위한 군량 관리와 군무 감독차 이곳에 왔다. 귀국이 새로 병화를 겪었다는 말을 듣고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데 감히 이 예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변변찮은 물건으로 약소하나마 존경하는 정성을 표하는 것인데 노야께서 물리치고 받지 않는다면 배신(陪臣)이 어떻게 복명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호부가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모든 장관들의 예물을 일체 받지 않았는데 어찌 유독 이것만 받겠는가. 그러나 국왕께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간곡한 예를 보이시니 감히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호부가 등주(登州)로 떠나기에 신이 가서 물으니 ‘명을 받은 후로 군량을 재촉해 운반하였으나 지체됨을 면치 못해 조정에서 자못 논의가 있다. 이 때문에 뜻하지 않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5월 21일 신사
상이 기우제를 지내려고 사직단으로 나아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제사를 지낼 때가 임박하였는데 빗줄기가 이와 같다. 만약 옷이 젖어 의식을 그르친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대신에게 물으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물으니 ‘옷이 젖어 의식을 그르칠 경우 제사를 지내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희생(犧牲)과 자성(粢盛)이 이미 갖추어졌고 시각이 임박했는데 정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하다. 상께서는 유막(油幕)을 설치하고 예를 행하고 집사(執事)는 우산을 받치고 절을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를 가리고 예를 행하는 것은 정성이 없는 듯하다. 유막을 설치하지 말고 속히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5월 22일 임오
상이 비를 무릅쓰고 사직단 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생원 변인길(邊麟吉)이 상소하여 추숭(追崇)하라는 논을 진달하였는데, 정원이 말이 패만스럽다고 계품하고서 물리쳤다.
5월 25일 을유
비국이 아뢰기를,
"일찍이 경상 감사 및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장계에 따라 병인년조(丙寅年條) 여정(餘丁)의 가포(價布)를 이미 감면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4도도 모두 한 나라의 백성인데, 감하기도 하고 혹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타당치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장인(匠人)의 가포는 1년에 으레 2필을 받아들이니 3년이면 그 수가 6필이나 됩니다. 그런데 1년 안에 독촉하여 받아들이니 형세상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인년조의 거두어들이지 못한 장인과 여정의 가포는 5도를 모두 탕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명구(洪命耉)를 교리로 삼았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실성(室星) 위로 들어갔다. 검은 기운 한 줄기가 곤방(坤方)에서 일어나 손방(巽方)으로 곧게 뻗쳤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려, 삼사의 장관은 으레 금부(禁府)의 직을 겸대하지 않으니 금부 당상의 직을 체직해 달라고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역옥이 일어난 이후로 경연(經筵)을 오랫동안 폐하여 왔습니다. 본디 문왕(文王)같은 성인이 아니라면 어찌 간함이 없이 일마다 법대로 할 수 있으며 덕성을 닦는데 도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몇 달 전부터 명령이 나오는 것이 대부분 화평(和平)하지 않습니다. 근거 없다고 대신을 배척하고, 멸시한다고 전조(銓曹)를 나무라며, 구차하다고 대간의 기를 꺾는 것과 같은 경우는, 깊은 궁궐 속에서 한가하게 계시면서 존양(存養)한 바가 혹 두텁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까? 현재 옥사가 이미 끝났고 날씨도 그다지 덥지 않으니 신료들을 인접(引接)하는 것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건대,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이 가상하다. 겸대한 직은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김기종이 치계하였다.
"조금 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엄황(嚴愰)의 치보를 보니 ‘호인 50여 기(騎)가 강 저쪽 편에 와서 몹시 급하게 사람을 부르기에 즉시 통사를 시켜 가서 묻게 하니, 오랑캐의 장수 투로세(投老世)가 한(汗)의 글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앞서 중국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다가 우리에게 잡혔는데, 너희 나라는 모문룡과 강화하고서 전혀 금지시키지 않으니,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의 글에서 말한 것을 보니 갖가지로 공갈하고 있으며, 호차(胡差)의 행동거지도 전과는 크게 다릅니다. 모문룡은 우리가 오랑캐와 통호한다고 책하고, 호인들은 모문룡을 두둔한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끼여서 조처하기가 더욱 어려워, 일이 몹시 염려됩니다. 오랑캐의 편지 2통을 올려보냅니다."
5월 26일 병술
비국이 오랑캐의 편지에 회답 보내는 일을 조목 조목 열거하여 아뢰니, 상이 대신과 재신 및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고 묻기를,
"어제 온 오랑캐의 편지에 패만스런 말이 많던데, 그 정상이 어떠하던가?"
하니, 영상 신흠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편지 내용은 전과 대략 같으나 이번 것은 말이 더욱 패만스럽습니다. 맹약(盟約)을 깨뜨리고자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필시 공갈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서신 가운데 집요하게 말하는 것은, 중국을 돕고, 도망한 사람을 쇄환하고, 모문룡과 접촉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회령(會寧)의 개시(開市)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다섯 가지 일입니다. 중국을 돕고, 모문룡과 접촉하며, 성지를 수축한 일에 대해서는 전에 호차(胡差)가 왔을 때 접반사로 하여금 이미 수답(酬答)하게 하였고 국서도 즉시 회보하였으니, 이것은 처리하기가 곤란하지 않습니다. 다만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을 쇄환하는 일은 참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랑캐의 편지 중에 기록된 다섯 사람이라면 값을 쳐서 보상해 줄 수가 있으나, 천여 명이나 될 경우에는 더욱 처리하기가 곤란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회령 개시는 우선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북쪽 사람들은 본디 번호(藩胡)와 교역하면서 살았으므로 그다지 싫어하거나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박난영(朴蘭英)을 보내 이런 사정을 통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오랑캐들의 정세를 보건대,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을 반드시 쇄환해 가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도망해 돌아오는 길을 막으려는 것이다. 전에는 비록 그들이 청하더라도 빈말로 답해 주었으므로 그들이 유감을 품었다. 지금은 반드시 편의상의 조치로 답해 주어야만 화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영중추부사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종묘 사직을 위하여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힘과 형세를 헤아려서 조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선은 예물을 후하게 주고, 답서에는 ‘도망해 돌아온 자의 이름을 알 수 없으며, 또 길에서 죽은 자가 많아 어디에서고 찾아낼 수가 없다.’라고 말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우상 김류는 아뢰기를,
"지금 저들이 공갈하는 것은 필시 병단(兵端)을 야기시키고자 하여 더욱더 심하게 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비록 좋은 말로 회답한다 하더라도 사실이 없다면 반드시 그들의 노여움만 돋울 것입니다. 헛되이 천여 명이라 칭하는 것은 값을 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거론한 5명에 대해서는 값을 주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들이 시종 쇄환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반드시 값을 보내 주어야만 그들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만약 쇄환하는 것을 고집하여 온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막을 수가 없을 것이고 필시 그들의 약탈이 심할 것이요, 지금 약간의 값을 보내 책임 막음을 하려고 한다면 그들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예물을 넉넉하게 보내고 말을 잘 만들어서 회답하되, 이어서 값을 보내겠다는 뜻을 약간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을 묶어 보내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감히 이것으로 값을 따지지는 못하겠다. 단지 예물 등의 말로 말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박난영을 차관(差官)으로 보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난영이 일의 전말을 잘 알고 있으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혼자만 보낼 수 없으니 문관을 함께 보내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개시하는 일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허락해야 한다고 하니, 각 장수들이 토산물을 교역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뜻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도승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지금 예물을 넉넉하게 보낸다 하더라도 그들의 환심을 얻기는 어렵고 그들의 한없는 욕심만 열어 줄 것이니, 필시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지모가 있는 자를 보내어 그들과 더불어 사리에 의거하여 쟁변해 귀일시킨 다음 편의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저들이 헛된 말을 쓴 종이 한 장으로 무단히 공갈하는데 우리가 많은 물건과 후한 예로 즉시 응한다면, 이로부터 모욕을 당함이 더욱 심해질 것이고 책하는 말만 반드시 배가될 것입니다. 우리의 재력이 다하여서 저들의 끊임없는 욕심을 채우기 어려울 경우 끝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신흠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이공(李珙)의 처자를 조처하는 일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진도(珍島)는 협소하니 제주(濟州)에다 이치(移置)한다면 살아가기에 편할 것이고 보전해 주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섬에다 안치하는 것도 이미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제주에다 이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인심이 좋지 못하여 흉한 격문이 날마다 나붙으니, 이러한 때에 그의 처자들을 그대로 진도에 있게 하는 것은 실로 보전해 주는 도리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비록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보전해 주려고 하신다면 제주에 이치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보전해 주는 도리에 합당하다면 우선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따라서 처리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기미책(羈縻策)에서는 반드시 내치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후한 예물을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힘쓰고 자강(自强)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끝내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사리에 딱 맞는 말이다. 대신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지난날의 역옥(逆獄)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원통하게 죽은 자가 있다면 한재가 어찌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하자, 신흠이 아뢰기를,
"죄를 받은 죄인들은 비록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고는 하나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점은 있을 것입니다. 한재가 어찌 까닭없이 일어나겠습니까. 신들은 옥사를 처리할 때에 항상 신중히 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승지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함경도 지방을 왕래할 때에 원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리도 모르고서 근시(近侍)로 있는 신이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는, 민간의 하소연을 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곳곳에서 글을 올려 고통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그 가운데 상께서 보실 만한 것들을 개록(開錄)하여 진달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성안의(成安義)를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동부승지로, 이성원(李性源)을 지평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27일 정해
도승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호인 요토(要土)가 장검(長劍)을 요구하자 왜도(倭刀)를 보내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랑캐 차인들의 왕래가 줄을 잇고 있는데 만약 사신에게 사사로이 청할 때마다 들어 준다면 제추(諸酋)들이 듣고서 다투어 본받을 것입니다. 뒤폐단을 막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욕심으로 인하여 탐하게 되고 탐함으로 인하여 혐의가 생기고 혐의로 인하여 흔단이 생길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왜도는 다른 나라의 물건으로, 외국에서 구해다 주어야 하는데, 일이 비록 미세하나 끝내는 반드시 후회를 끼칠 것이니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몹시 타당하다. 다만 이 오랑캐는 처음부터 우리 나라에게 호의를 보였으니 한 차례 요구에 응하는 것은 방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공(李珙)의 처자가 지금 제주로 들어갈 것이다. 목사로 하여금 각별히 구휼하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새 황제가 등극하여 조서를 반포한 뒤에는 으레 별시(別試)를 거행하여 인재를 뽑는 규례가 있습니다. 규례에 의하여 과거를 실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정원은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어 조종조 때부터 그 임무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새로 제수된 우부승지 성안의(成安義)는 본디 명망이 가벼워 이 임무에 맞지 않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아뢰니, 따랐다. 성안의는 일찍이 제주 목사를 지내었는데, 탐욕스럽기 그지없으므로 제주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더럽게 여겨 욕하고 있었다. 그가 승지가 되자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현재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정사가 한둘이 아닌데, 그것을 구제하려면 모름지기 먼저 그 폐단의 근원을 없애야 합니다. 근래에 규정 이외의 부세 중에 큰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5결 단위로 포(布)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모문룡 군사의 군량이 그것입니다.
모문룡 군사의 군량은 우선은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없으나 기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일은 현재의 급선무로 1년 동안이라도 거두어들이는 것을 중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전년에 흉년이 들었는데 금년에 또 가물었으니, 1결에 1두 5승의 쌀을 마련해 내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는 무진년조로 5승을 제하고 1두만 받아들인다면 혹 조그만 혜택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호서(湖西)의 조례미(皂隷米)는 다른 도에는 없는 역이니, 모문룡 군사의 군량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특별히 1두를 감하고 5승만 받아들여 호서로 하여금 치우치게 고통을 받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5결 단위로 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대개 서로(西路)의 물력이 탕패되어 양서(兩西)의 공물(貢物)을 내지에 이정(移定)한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몇년 동안 급한 것을 구제하려 한 것이지 오래도록 시행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형세가 수십 년 안에는 결코 소복될 가망이 없어서 실로 버려진 지역이 되었는데, 서로의 역을 다른 도에다 책임지워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피폐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상공(上供)에 관계되는 것이라 신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장인(匠人)과 여정(餘丁)에게 가포(價布)를 받아들이는 것은, 없던 데서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병인년조로 받아들인 것은 이미 호변(胡變)이 일어났을 때에 다 써버렸으나 정묘년조로 받아들인 것은 군수(軍需)로 써버린 것을 제하고도 남은 것이 수백 동(同)이 되고 아직 거두어 들이지 않은 것도 많으며, 무진년조는 전혀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해 동안 받아 들일 것을 통계하면 천여 동에 밑돌지 않습니다. 5결 포(五結布)의 총수가 1천2백여 동이라 하는데, 만약 장인의 가포를 양서의 공물에 빌려 주고 무진년조의 5결 포를 1년을 한하여 견감하여 5도의 궁한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외방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백성들을 구휼하는 뜻을 조금은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현재 장인들의 가포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진달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는 경의 정성이 가상하다. 아뢴 일은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28일 무자
상이 역적 이공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해조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공은 본인이 역적의 괴수가 되었으니, 스스로 하늘의 주벌(誅伐)을 부른 것입니다.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였으나, 단연코 예장할 수는 없습니다. 대의(大義)가 분명한데 어찌 한때의 사랑하는 은혜 때문에 만세의 상법(常法)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죄를 지은 것은 중하나 선왕의 자식이니 예장하는 것이 불가한 일은 아니다."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박난영의 말을 듣건대, 저들이 간절하게 요구하는 것이 대단(大段)과 노주주(潞州紬) 등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만약 무역해서 보내면 뒤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건대, 개시(開市)할 때 단자(段子)가 무수히 많아도 금하지 않다가 주지 않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화를 낼 것입니다. 대단 10여 필과 노주주 20필, 화사주(花絲紬) 50필을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단과 주(紬) 1백 필과 청포(靑布) 5백 필을 더 마련하라."
하였다.
5월 29일 기축
간원이 아뢰기를,
"이공은 역적의 괴수로서 종사의 적이 되었으므로 온 나라가 토죄하기를 청하여 이미 복죄되었습니다. 예장하라는 명이 비록 전하의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나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성명을 거두소서.
행 사과(行司果) 이란(李灤)은 오랑캐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국가에서 위임한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장사꾼과 같이 몸소 매매를 하였으며, 심지어는 수백 냥의 은을 주고 한 여자를 사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저 적들이 포로가 된 우리 나라 백성을 기화(奇貨)로 여겨 이와 같이 공갈하는 것은 이란이 단서를 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라를 욕되게 하고 흔단을 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의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고, 헌부 역시 예장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란은 추고하라. 공의 죄는 무겁지만 선왕의 자식이니 예장하는 것이 불가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양사가 더욱 힘껏 쟁론하자. 상이 부득이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영의정 신흠, 우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예장이라 이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후장(厚葬)하되 예장이라 이름하지 않으면 전하의 지극한 정을 밝히기에 족하고 국법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김상헌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편지에 답하는 내용에 ‘모문룡이 가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우리 나라에서는 본디 좋아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만드는 체모는 결단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이 한 조항은 반드시 다시 의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조가 마련한 예단(禮單)의 물목 중에 각종의 무늬있는 대단(大段)이 들어 있습니다. 신이 전에 경사에 갔을 때 듣건대 ‘진공하는 서방의 달자(㺚子) 등이 대단을 무역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에서 엄하게 금령을 세워 외국인에게 무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관부(館夫)들이 비록 큰 이익을 탐하면서도 끝내 공공연하게 매매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관들 역시 금령을 무릅쓰고 사가지고 오는데 지금 도리어 오랑캐들에게 준다면 2백 년간 중국 조정의 법령을 잘 지켜온 본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뒷날에 난처하게 될 폐단을 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장차 어떻게 소민(小民)들이 금령을 어기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중대하니 해당 조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게 하여 우리 나라에서 나는 다른 물건으로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충당해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동부승지 이준(李埈) 역시 힘껏 불가함을 아뢰니, 답하기를,
"아침에 김상헌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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