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인
상이 하교하였다.
"전에는 오랑캐 지역으로 사신 가는 자들을 무신으로 차출하여 보냈으므로 융복(戎服)을 입었다. 지금은 문신을 차출하여 보내니 그대로 융복을 착용할 수 없다. 일본 사신의 예에 의하여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가게 하되, 풍속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것이니 모름지기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하라. 이를 회답사에게 말해주라."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홍득일(洪得一)을 동부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사간으로, 김영조(金榮祖)를 장령으로, 이성신(李省身)을 교리로, 심지원(沈之源)을 수찬으로, 정유성(鄭維城)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빙고 제조(氷庫提調) 이직언(李直彦)은 이미 발인(發引)하였는가?"
하니,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발인하지는 않았지만 포폄(褒貶)이 이미 가까왔는데 단 제조(單提調)에 관련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의망(擬望)하였습니다."
하니, 후일의 정사에서 차출하라고 답하였다.
6월 2일 신묘
간원이 아뢰기를,
"한재(旱災)가 있을 경우 반드시 술을 금하였던 것은,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낭비를 줄이고자 해서입니다. 서울에 쌀값이 매우 비싸고 각사(各司)의 전복(典僕)들이 몹시 피폐하였는데, 요즈음 포폄하느라 좌기할 때에 주식(酒食)의 비용을 이들에게서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예전의 규례라고는 하나 흉년에 성대하게 베풀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술을 금하는 예에 의하여 우선 정파하도록 명하소서. 각사의 관원들이 쓰는 초[炬燭]를 간혹 값도 주지 않고 하인들에게 마련하도록 하는데,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일체 금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초는 값을 주어서 사서 쓰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상헌 등이 아뢰기를,
"전후의 기우제에 참가하였던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들이 모두 상을 받았습니다. 이는 상께서 여러 신하들이 분주한 노고를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상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비가 조금 내리다가 곧바로 개어 많은 비가 내리지 않아 온 들판이 바짝 마르고 모든 농작물이 말라 비틀어졌는데, 이러한 때에 갑자기 상을 내리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우선 상을 내리는 것을 중지하고 더욱더 성의를 보여 기어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20일 기우제의 상격을 우선 먼저 거행하도록 하고, 친제하였을 때의 상격은 아직은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3일 임진
수찬 심지원(沈之源)이 상소하기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권도(權濤)에게만 내려졌습니다. 신만 요행히 면하고서 다시 화려한 관직에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 강석기(姜碩期)가 상소하기를,
"전일에 올린 생원 변인길(邊麟吉)의 소 내용이 두서가 없으므로 신이 승지 이민성(李民宬)과 상의한 다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계품한 후에 다시 내주었습니다. 지금 이중형(李重馨)이 뒤이어 와서 바친 상소에 ‘가로막고 들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정원의 죄목을 삼아 멋대로 공격하였습니다. 실로 신들이 가로막은 죄를 지었으니 감히 그대로 승지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잘못한 바가 없다.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라."
하였다. 이때에 변인길 등 몇 사람이 추숭(追崇) 논의에 부회하여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상소까지 하였는데, 그 소 중에
"대원군(大院君)을 전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전하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어찌 추숭하는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른바 말이 패만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 말이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상소하기를,
"신은 성상의 은덕에 감사해 하며 향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이미 외방에 물러나 있는바, 본직과 겸대(兼帶)한 제사(諸司)의 직을 그대로 맡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해조로 하여금 녹봉(祿俸)을 신의 서울집에 실어다 놓도록 하시었습니다. 한때의 특은(特恩)으로 나라의 영원한 법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녹봉을 실어보내는 것은 예전의 규례가 있는 것이다. 경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6월 4일 계사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아뢰기를,
"부사(府使) 정문익(鄭文翼)은 변고를 듣고는 즉시 영장(營將)·파총(把摠)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역적 허유(許逌)와 허규(許逵) 등의 집을 포위하여, 규는 즉시 잡아 정형(正刑)하게 하였고, 또 역적 이양(李暘)이 도망해 온 것도 즉시 잡았습니다. 공로가 몹시 큰데도 혼자만 포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그 사실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감히 덮어두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논상하게 하라."
하였다.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호조의 이문(移文)을 보건대 ‘이현궁(梨峴宮) 소속의 안산(安山)과 양성(陽城)의 전답 35결을 전부터 값을 주고 샀었는데, 반정 후에는 모두 혁파하도록 하였다. 이제 모두를 본궁에 환속시키고 전례에 의하여 면세하라.’ 하였고, 또 내수사의 이문을 보건대 ‘수진궁(壽進宮) 소속의 안산의 어전(漁箭)을 몇 년 전부터 수영(水營)에 소속시켰는데 이제 본궁에 환속하라. 그리고 본부의 노비 역시 전례에 의하여 전결(田結)을 급복(給復)해 주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불현듯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광해조 때에 궁가(宮家)에서 점유한 어전과 전장(田場)을 반정 후에 일체 혁파한 것은 실로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점점 예전대로 회복되니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내수사 노비는 단지 호역만 면제하고 전결에 대해서는 면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갑자년에 대신과 경연관들이 탑전에서 건의하여 정한 사목(事目)이 비국에 갖추어져 있으며 팔도에 통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무단히 이미 정한 규식을 무너뜨려 중외로 하여금 실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수사의 공문은 으레 이조를 경유하여 이조의 의견을 붙여서 시행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문은 해조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본청에 보내었으니, 더욱더 놀랍습니다. 신들은 유사로 있으면서 감히 봉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록 폐조 때에 소속된 전답이라 하더라도 민전을 빼앗은 것이 아니면 전례대로 면세해도 안 될 것이 없다. 안산의 노비를 복호한 일은 선왕조의 규례를 고찰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6월 5일 갑오
비국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의망하여 아뢰어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안눌(李安訥)이 일찍이 본부의 부윤이 되어 능하다는 명성이 있어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으니, 의망하기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죄를 짓고 폐기된 중에 있어서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의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안눌을 서용하여 제수하라."
하였다.
조익(趙翼)을 이조 참판으로, 최명길(崔鳴吉)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6월 6일 을미
간원이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장죄(贓罪)를 범한 수령들은 모두 무부(武夫)인데, 또 무부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뒤에 간 자가 전자보다 못할 경우에는 어사가 지나간 뒤라 더욱더 탐학을 부리면서 꺼리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방어가 중요한 곳은 부득이 무인을 써야하나 산골짜기 작은 고을인 경우 어찌 또 하필 무인을 써서 겨우 살아 남은 백성들을 침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문관들 중에 잘 다스리는 자를 교대로 차임하여 잔폐된 고을을 소복시키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녹훈 도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전후의 등록을 가져다 보니, 회맹제(會盟祭)의 날짜를 정한 후에는 응당 참여하여야 할 인원 중 외방에 있는 자들은 하유하거나 행회(行會)하였으며, 죄를 받아 부처(付處)되었거나 문외 출송되었거나 진탈 고신(盡奪告身)되었거나 영불서용(永不敍用)된 자들은 계품하여 결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와서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양 공신의 회맹제를 이미 날짜를 정하였으니, 차례대로 거행할 절목을 마땅히 계품하여 시행하여야 합니다. 구 공신(舊功臣)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으로 응당 참여하여야 할 인원 중, 외방에 있거나 죄를 받은 자들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일일이 계품하게 한 다음 급히 하유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처 오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상헌이 상소하기를,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헐뜯음을 당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지난번에 변인길(邊麟吉)의 상소에 패만스런 말이 많아서 그때 사유를 갖추어 계품하고서 끝내 봉입(捧入)하지 않았는데, 신은 즉시 나가서 조금도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건대 ‘변인길이 스승을 위하여 신구(伸救)하였는데 말이 승지에 관여되자 정원이 봉입하지 않았다.’ 하였고, 또 ‘가로막고 들이지 않아 언로가 막히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귀가 반드시 그때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찬성은 중신이고 가로막은 것은 큰 죄입니다. 더구나 그가 인용한 도승지를 멀리 찬축하라는 말은 더욱더 불측한 저의가 있는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신을 삭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잘못한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7일 병신
헌부가 아뢰기를,
"의주(義州)는 나라의 서문(西門)으로 위임받은 직임의 중함이 곤수(閫帥)와 다름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지키고 응답함이 평소보다 배는 어렵습니다. 새 부윤 이현달(李顯達)은 일찍이 역임한 관직에서 치적이 없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내수사의 노비를 복호하는 일은 광해조 때에 시작되어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 반정한 뒤에 대신과 경연관들이 탑전에서 아뢰어 호역만 면제하고 전결에 대해서는 면세하지 않기로 법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점차 옛날로 돌아가서 유신(維新)의 교화로 하여금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게 하니, 어찌 몹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내수사의 공문이 반드시 이조를 경유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규례를 어기고서 곧장 보내었으니 더욱 말이 안됩니다. 해당 내수사의 관원을 중한 죄목에 따라 다스리고, 안산(安山) 등의 노비를 복호하는 일은 한결같이 선혜청이 아뢴 대로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선왕조의 옛규례를 본관(本官)에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안 될 것 없다. 내수사의 관원은 추고하라."
하였다.
6월 8일 정유
황집(黃緝)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해당 조에 분부하여 이공의 상을 후장(厚葬)하게 하라고 하신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해당 조에서는 이미 예장(禮葬)이 아니니 거행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일에 대신의 의논에 의하여 예장으로 이름하지 말고 모든 상수(喪需)를 지급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상이 또 해당 조에 하교하여 각별히 검칙하게 하고, 또 상구(喪柩)가 동대문 바깥에 도착하였는데 양주(楊州)에서 즉시 호송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도의 감사와 본주의 관리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무술
헌부가 아뢰기를,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정문익(鄭文翼)은 역적을 체포한 공이 있다고 진달하였습니다. 가령 정문익이 과연 상줄 만한 공이 있다면 어찌하여 애초에 말하지 않고 반 년이 지난 후에 장황하게 떠벌리며 성상께 아뢴단 말입니까. 매우 망령되고 외람됩니다. 중한 쪽을 따라 추고하고 문익을 논상하는 것도 거행하지 마소서. 길주 목사(吉州牧使) 윤경득(尹敬得)은 품계가 높은 문관으로 임금이 파천하는 날을 당해서 끝내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직을 제수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분해 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문익 등은 모두 상줄 만한 공이 있으니 허적이 계품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지금 논한 바는 지나친 것 같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윤경득은 체차하라."
하였다.
6월 10일 기해
도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서로(西路)의 수령을 주의(注擬)할 때마다 공도를 무시하고 사정을 따르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재를 잘 알아보지 못하고 문견이 고루하여 전후로 제수한 것이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습니다. 대간이 아는 자도 이러한데 대간이 몰라서 요행히 면한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다른 도의 예에 의하여 해당 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탄핵을 받은 수령이 몹시 많으니 지나치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부에서 추고한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 전례대로 의망하여 차임하라."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을 수찬으로, 이조 판서 장유(張維)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6월 11일 경자
장유가 차자를 올리기를,
"관각(館閣)의 직임은 청선(凊選)이 아닌 것이 없지만 대제학의 경우는 더욱 지극합니다. 문장의 권형(權衡)을 잡고 선비들의 종장(宗匠)이 되는바, 문풍(文風)의 흥쇠와 선비들 취향의 좋고 나쁨과 외교 문서의 득실이 모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재주와 학식이 모두 넉넉하고 명망과 실재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자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아는 데에는 밝은 법입니다. 신은 어려서 문장을 배워 외람되게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간에 폐고(廢錮)되어 칩거해 있으면서 대략 문자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학문에 연원(淵源)이 없고 식견이 고루하며 오경(五經)도 다 읽지 못하여 재주와 생각이 꽉 막혔습니다. 더구나 관각에서 쓰는 변려문(駢儷文)에 이르러서는 전혀 깨치지 못하여 일반 교서를 제술하는 임무도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학이 된 이후로 글을 지을 때마다 군색한 모습이 수없이 나와 항상 시위 소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문형의 중임을 어찌 꿈엔들 생각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곡진히 양찰하시어 속히 새로 제수하는 명을 거두시고 어질고 뛰어난 사람으로 고쳐 제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재주와 학식은 실로 대제학에 합당하니, 모름지기 다시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공청도(公淸道) 청주(淸州)의 민가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앞다리 사이에 또 다리 하나가 있었다. 비상한 변괴여서 본도가 아뢰었다.
이경(李坰)·오달승(吳達升)을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성이 나타났다.
6월 12일 신축
추국청의 추국에 참여한 인원에 대한 단자를 가지고 상이 하교하였다.
"해창군 윤방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삼공에게는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씩을 하사하라. 서성(徐渻)·김자점(金自點)·한여직(韓汝溭)과 대사헌 정경세, 대사간 김상헌, 승지 이성구(李聖求), 문사 낭청 이경석(李景奭)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고 그 이하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병으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서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이경여(李敬輿)가 치계하기를,
"홍주 목사(洪州牧使) 안응형(安應亨)이 일로 인해 파직당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잉임(仍任)하기를 원하니 이치상 따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조처하도록 명하시어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백성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이치상 따라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대임(代任)을 이미 차출하였으니 다시 제수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경여는 일의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이미 벌을 준 사람을 잉임하도록 청하였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6월 13일 임인
임득열(林得說)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14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허정준(許廷準)은 본디 행실이 거칠고 교활하여 피폐한 고을을 소복시키는 임무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새로 제수된 수령들이 반드시 다 적임자가 아니지는 않을 것인데 양사가 거의 다 탄핵하여 제거시키니 지나치다고 하겠다. 체찰사가 천거한 것을 가볍게 체직시킬 수 없으니 우선 그대로 시험해 보는 것이 옳다.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 참의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항상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아첨을 하는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밝은 임금이 있는데도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고 권신이 없는데도 국사가 날로 글러져서 위태한 형상이 말세의 혼탁함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은 고개를 들고 그윽이 탄식하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병통에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한갓 자세하게 살피는 것을 밝은 것으로 여기어서 강령(綱領)을 휘어잡지 못하고, 한갓 이기기만을 좋아하는 승벽이 있어서 화평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지 못하며, 절의를 배양하지 않아 언로가 날이 갈수록 막히고, 분발하고 힘쓰지 않아 인애(仁愛)가 지나치며, 치우치는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노여움이 혹 중도를 잃고, 명예를 좋아하는 버릇을 제거하지 못하여 처사가 성실하지 못한 것이 바로 전하의 병통입니다. 고식적인 데 물들어 머뭇거리고 임시방편을 취하는 데 편안해 하며, 본디 풍도(風道)가 없어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하고, 한갓 자신의 몸만 아낄 줄 알아서 국사를 담당하려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마디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몸을 움츠리고 앞뒤를 돌아보며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조정 신하들의 병통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오늘날 인재들이 함께 일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겨서 책임지고 이루도록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전하의 허물입니다. 조정 신하들이 만약 전하께서 책임지고 이루도록 맡기는 실상이 없다고 여겨서 그럭저럭 날짜만 보낸다면 이것은 조정 신하들의 죄입니다. 신은 국세가 날이 갈수록 미약해지는 것이 누구의 허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이래로 정사에는 사정(私情)을 많이 베풀고 일에 있어서는 인순하기만 하며, 서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습속은 갈수록 심해지고 수령들이 침학하는 폐단은 하루하루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막 변란을 겪었는데 군율은 거행되지 않고 혼조(昏朝)를 거울로 삼아야 하는데 장오죄(贓汚罪)를 다스리는 법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신은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궁노(宮奴)를 참수하고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등의 일을 충심으로 결단하시어 날로 새로워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기(志氣)가 꺾여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고 있으므로, 해당 조의 회계는 심상한 형식에 불과하여서 눈을 씻고 볼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리고 관작이 날로 문란해져서 벼슬 자리에 눈이 먼 무리들이 기회를 타고 틈을 노려 갖가지 방법으로 진출하여 청현직(淸顯職) 차지하기를 코 밑의 수염 뽑듯이 쉽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고 명망이 드러나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바라는 청현직에 앉지 못하게 한다면 자연 어질고 사특함이 구분되어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진이를 아끼심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악을 미워함이 철저하지 못하여 선악을 분명하게 가리지 못하고 관작을 아끼지도 않습니다. 준직(準職)이 아닌데 품계를 뛰어넘은 자는 오랫동안 공훈을 쌓아서가 아니며, 직이 없이 당상(堂上)에 오른 자는 등급을 뛰어넘는 정도뿐이 아닙니다. 이에 고관 대작이 도리어 천하게 되고 청현직의 영예로움이 귀하지 않게 되어 사로(仕路)의 혼탁함이 광해조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찬축된 자들은 모두 지난날 광해군을 도와 포학을 부리면서 윤리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좀먹어서 죽여도 시원치 않을 자들입니다. 형벌을 면한 것만도 다행인데 전하께서 전란으로 인하거나 혹은 대사령(大赦令)을 내림으로 인하여 양이(量移)되거나 방환(放還)되었습니다. 비록 대간이 논계하여 혹 배소(配所)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였으나 그중에는 고향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 자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니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무릇 임금은 위엄이 신과 같고 존귀함이 하늘과 같아서 면류(冕旒)로 가리우고 옷깃을 열어놓고 말을 받아 들이더라도 오히려 신하들이 감히 항언(抗言)하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꺾어버리고 녹여버리는 데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부형은 입다물고 아무말 하지 말라는 것으로 자제들을 경계시키고, 벗들간에는 시세에 따라 적당히 살라는 것으로 친한 자들을 면려하고 있습니다. 강개하여 시국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는 어리석다고 하고 관청의 비리를 탄핵하는 것을 보고는 경망하다고 합니다. 양사는 일을 논하다가 오래도록 윤허받지 못하면 서로 버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면서 문득 정계하고, 전조(銓曺)는 의망하였다가 오래도록 윤허받지 못하면 매번 의망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핑계대면서 외직에 보임합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국사 중에 다시 말할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고 여기십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리나 보전하면서 그저 나오고 물러가고 할 뿐입니다. 오늘날 이른바 사류(士類)라고 하는 자들은 도리어 예전의 시골에서 잘난 체하는 사람만도 못하니, 입다물고 아무말 않고 지내는 것이 풍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조종조 때에는 신하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혹 편전에서 소대(召對)하거나 침실 안으로 불러들이거나 그의 집에 친히 나아가서 마음을 터놓고 강론하여, 한 집안의 부자 사이보다 더 친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 벌을 내릴 경우에는, 아무리 귀하고 가까운 신하라고 하더라도 결단코 용서하지 않았으며, 채용할 만한 말이 있을 경우에는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후하게 상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하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예모가 몹시 엄격하여 아래에서는 좋은 계책을 진달하였다고 듣지 못하였고, 위에서는 직언을 받아 들였다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신 사이의 정의가 미덥지 못한데 더구나 천지 음양이 조화를 이루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아, 만나기 어려운 것이 시기이고 놓치기 쉬운 것이 기회입니다. 옛날에는 한 부대의 군사나 한 구역의 땅만으로 중흥을 이룩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은 양서(兩西)가 병란을 입었다고는 하나 6도가 어느 정도 완전하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법이 아직 살아 있는 데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본원(本源)을 함양하여 기질을 변화시키고, 큰 뜻을 분발하여 다스림을 도모함에 예의(銳意)하고, 쾌히 공론을 따라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보이고, 대신들에게 책임을 지워 사업을 일으키도록 면려하고, 호령(號令)을 발함에 우레나 바람처럼 엄하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분발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는데도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백성들이 보전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상소에서 진달한 것은 실로 옳은 말이다. 내가 가슴 속에 담아두고 나 자신을 경계하겠다."
하였다.
태백성이 주현하였다.
6월 15일 갑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요즈음 중국 사람 접대하는 것을 보니 몹시 소홀하다. 그들이 비천한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상국(上國) 사람들이라 후대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각별히 검칙하라."
6월 16일 을사
월식이 있었다.
경평군(慶平君) 이늑(李玏)이 아뢰기를,
"어제 헌부의 이졸(吏卒)들이 신의 종을 잡아갔습니다. 비록 그 이유를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신의 직을 삭직하여 보전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평군이 아뢴 말을 보건대 헌부가 한 일이 매우 부당하다. 헌부에 물으라."
하였다. 지평 이성원(李性源)이 아뢰기를,
"경평군의 집에서 그 집 여종이 보물을 훔쳐내어 고부(古阜)에 사는 유생 정대길(鄭大吉)에게 팔았다고 칭하고서 그의 아비 정성(鄭晟)을 잡아왔는데, 대길이 이 때문에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고 울면서 와서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평군의 집 종을 잡아다 가두고서 치죄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말은 반드시 사실이 아닐 것이니, 속히 그 종을 풀어주라. 지금부터는 절대로 왕자들의 집 종을 경솔히 가두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신흠이 병으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행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듣건대, 경평군이 보물을 훔쳐다 감추었다고 칭하면서 형구(刑具)를 마당에다 차려놓고 마구 매질을 가하여 가산을 다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 법관(法官)으로 있으면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런데 차마 죄없는 외방의 유생이 궁가(宮家)의 사옥(私獄)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서도 구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을 잡아다 가둔 것은 그를 통해 추문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 역시 예에 따라 규정(糾正)한 일이지, 애당초 상규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경평군이 아뢴 말을 보건대, 말이 조리에 맞지 않습니다.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한 궁노(宮奴)를 잡아 가두었다가 상께서 진노하시게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노둔한 탓입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집의 조방직(趙邦直), 장령 김영조(金榮祖)·고부천(高傅川), 지평 이성원(李性源)·오단(吳端)도 이로써 피혐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궁가에서 죄 없는 자를 잡아다가 원한을 품게 했다면, 억울함을 당한 자의 호소에 따라, 종을 잡아 가두고 추문하는 것은 법부(法府)의 체통에 아주 합당한 일입니다. 모두 피혐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대사헌 홍서봉 이하를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9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가뭄이 갈수록 심하여지니, 내가 몹시 민망하다. 친히 남교(南郊)에서 비를 빌고자 하니 해조에 말하라."
영의정 신흠이 재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지금 이 재변은 내가 어리석은 탓에 일어난 것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6월 20일 기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상이 병조에 하교하기를,
"남교에 거둥할 때 많은 부장(部將)을 선정, 구역을 나누어 주어 곡식을 밟아 손상시키는 자를 엄히 금하게 하라."
하고, 또 훈련 도감에 하교하기를,
"포장(鋪帳)을 배설할 때 곡식을 밟아 손상시키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도로를 닦을 때 곡식을 손상시켜야 할 곳이 있는가? 넓게 닦지 말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오윤겸, 우의정 김류 등이 차자를 올려 전날의 말을 하사하라는 명을 사양하고 이어서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지난번에 경들이 지성으로 비를 빌어 하늘을 감응시킴에 힘입어 즉시 단비를 얻었다. 말을 주는 것은 실로 기쁨을 표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지금 이 재변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으니,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6월 21일 경술
상이 남교의 산단(山壇)에 나아가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호차(胡差) 박중남(朴仲男)이 서울로 들어왔다.
6월 22일 신해
삼성 추국청(三省推鞫廳)이 아뢰기를,
"죄인 권동(權同)이 손수 몽둥이로 어미를 죽인 정상은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동생 등을 잡아다가 증거를 찾아 결안(結案)한 다음 정형(正刑)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지사(冬至使) 송극인(宋克訒)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지금부터는 부경(赴京)하는 사신은 대동강(大同江)에서 배를 타는 것을 영구한 법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육로로는 평양에서 석다산(石多山)까지가 하룻길에 불과하나, 수로(水路)로는 대동강을 경유하여 바다로 돌아갈 경우 몹시 험하고 또한 멉니다. 이번의 등극사(登極使)가 대동강에서 배에 올라 10여 일 후에야 비로소 증산(甑山)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신의 행차가 혹 몇십 일 지체되면 철이 늦어지고 바람이 높아져 형세상 배를 띄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전례에 의하여 석다산에서 배를 타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3일 임자
상이 대신과 구관소 당상(句管所堂上) 및 삼사 장관(三司長官)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 차인의 말이나 표정이 어떠하던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말이나 표정이 화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맡고 온 일은 도망해 온 자를 쇄환하는 일과 강(姜)·박(朴)의 딸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다 쇄환하지 않더라도 7∼8인을 쇄환해 보내면 금나라 한(汗)의 노여움을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강·박의 딸은 박난영이 지금 들어갈 것이니, 그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5∼6인을 쇄환해 보내어 충돌의 화를 면할 수 있다면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으나 의리로 말하면 온 나라가 병화를 입는다 하더라도 결단코 쇄환해 보낼 수 없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일이 존망에 관계됩니다. 이미 강화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어찌 이로 인하여 흔단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서봉은 아뢰기를,
"당나라 때 실달모(悉怛謀)가 토번(吐蕃) 지역을 바치면서 와서 항복하였는데, 당시의 재상이 이덕유(李德裕)와 틈이 있었습니다. 이에 드디어 묶어보내어 국경에서 목베도록 하였는데, 당시에도 가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도망해온 우리 나라 사람을 어찌 차마 다시 호랑이 입에다 던져 넣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경세는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매우 좋습니다. 어찌 눈앞의 걱정을 면하려고 그들을 차마 쇄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목은 아뢰기를,
"이제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그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인심을 얻기에 힘쓰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우선 후하게 예물을 보내고 개유(開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경직(李景稷)은 아뢰기를,
"성상의 뜻은 매우 지당하나 사기(事機)로 말한다면 형세상 부득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서쪽 국경 방어 계책을 논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평산 산성(平山山城)은 수축하기가 조금 쉽습니다. 한 도에서 두 성을 지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니 황주(黃州)를 버려두고 평산을 지키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다 쌓은 성을 버려 두고 새로 성을 수축하려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올해의 가뭄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주금(酒禁)을 엄하게 하고 있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지금 바야흐로 신칙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6월 26일 을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비국이 쇄환하는 일에 대해 진달하니,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혹은 옳다고 하고 혹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물으라고 명하였는데, 원익이 아뢰기를,
"정문익이 한(汗)과 약조를 맺은 뒤 회보하거든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차 박중남(朴仲男)이 강(姜)·박(朴)의 딸 및 오신남(吳信男)·김진(金搢)·박유건(朴惟健)을 만나보기를 청하는 일로 구관소(句管所)에 여러 차례 말하니, 상이 김진과 박유건으로 하여금 서로(西路)에서 만나보도록 하고 오신남은 갇혀 있기는 하나 우선 그로 하여금 나가서 만나보도록 하였다. 이때에 김진과 박유건은 관서(關西)에 유배 중이었다.
이조 판서 장유가 차자를 올리기를,
"쇄환하는 일은 참으로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오랑캐들은 교활하고 간사하며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주었다가 계속해서 오는 자가 이보다 곤란한 것을 요구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럴 경우 일일이 따라 줄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한두 사람만 보낸다 하더라도 천 명 백 명을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민심이 떠나가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어찌 오랑캐가 쳐들어 와야만 망하겠습니까. 전일에 정문익이 출발할 때에 정한 계책대로 호차에게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이원익의 의논대로 하라."
하였다.
6월 29일 무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영의정 신흠이 졸하였다.
신흠의 자는 경숙(敬叔)이고 호는 상촌(象村)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흠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간결하며 문장에 뛰어나 어려서부터 유림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선조의 인정을 받아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하라는 유교(遺敎)를 받았는데, 광해군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이것으로 죄안을 삼아 춘천(春川)에 유배하였다. 반정 초에 먼저 서용되어 이조 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으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그런데도 더욱 근신하여 왕실과 혼인을 맺고서도 청빈함을 그대로 지켰다.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주 변경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조를 본받으면 다스리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저술로 《상촌집(象村集)》 60권이 세상에 전한다. 조정에 있은 지 40년 동안에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으나 일찍이 헐뜯는 말이 없었으며, 위란(危亂)을 겪으면서도 명의(名義)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이 때문에 중하게 여겼다. 증시(贈諡)는 문정(文貞)이고 신묘년038) 에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왕세자가 사부나 이사(貳師)를 위하여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이번 신흠의 상이 이 예를 행하기에 맞습니다."
하니, 상이 근례(近例)를 고찰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김명원(金命元)이 좌의정으로 있다가 졸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궁관을 보내어 조문하였을 뿐, 직접 문상한 의례(儀禮)는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례가 없으니 강정(講定)하여 거행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영상(領相)은 선조의 구신(舊臣)으로 성심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다. 국운이 불행하여 이런 어진 보필을 잃게 되니, 내가 몹시 애통스럽다. 상장(喪葬)에 쓰일 물품을 해조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라."
양사가 쇄환해 보내는 일에 대해 합사하여 아뢰니, 답하였다.
"묘당(廟堂)이 강정한 것은 영원히 쇄환해 주자는 것이 아니라 속환(贖還)해 오려는 것인데 너희들이 필시 그 본의를 자세히 몰라서일 것이다."
6월 30일 기미
비국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인정을 크게 거스르고도 천하의 대사를 이룬 자는 없었습니다. 장유가 진달한 쇄환해 보낼 수 없다는 말은 실로 신들의 뜻과 부합되는 것으로, 이미 정문익이 싸가지고 간 국서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박중남에게 말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난해 박중남이 그 형에게 하급 관직이라도 제수해 주기를 원하였는데, 이번에 와서도 또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변장(邊將)에 제수하여 그의 마음을 달래 주소서. 그리고 박경룡(朴景龍)도 오랑캐 땅에 오가느라 그 노고가 박난영(朴蘭英)과 차이가 없으니, 이 예에 의하여 상가(賞加)하여 수고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19권, 인조 6년 1628년 8월 (0) | 2025.12.26 |
|---|---|
| 인조실록19권, 인조 6년 1628년 7월 (1) | 2025.12.26 |
|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5월 (0) | 2025.12.26 |
|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4월 (0) | 2025.12.26 |
| 인조실록18권, 인조 6년 1628년 3월 (0) | 2025.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