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묘
일식이 있었고, 금성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10월 2일 갑진
도승지 한형길(韓亨吉)을 보내 광해군에게 치제하였다.
10월 3일 을사
평안도로 하여금 말 1천 90필을 세내어 금주의 군량을 운송하게 하였다.
10월 4일 병오
지진이 있었다. 공청도(公淸道) 충주(忠州)와 경상도 안동(安東) 등의 고을에도 지진이 있었다.
10월 6일 무신
조수익(趙壽益)을 사간으로, 이상일(李尙逸)을 지평으로, 성초객(成楚客)을 정언으로, 박종부(朴宗阜)을 이조 좌랑으로, 윤강(尹絳)을 응교로, 조중려(趙重呂)를 부교리로, 박의(朴漪)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부제학 이명한(李明漢)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요즈음 홍문관의 관원들이 계속 사직하여 체직되고, 숙직하는 처소를 마치 하나의 여관처럼 여겨 전혀 관중(館中)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니, 신은 삼가 탄식합니다. 과거에는 입직하는 신하가 반드시 미리 진독(進讀)할 글을 가지고 조석으로 강마하고 여러 설을 참고하여 뜻하지 않은 질문에 대비하였으며, 사람들이 다 입시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잘못 대답할까 두려워 하였습니다. 영광으로 여기면 더 분발하고 두려워하면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분발하고 또 조심하게 되면 태만한 마음은 자연히 생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옥후(玉候)가 오랫동안 미령하시고 시세가 곤란하기 때문에 경연을 중지한 지 오래되고 나아가 알현하는 때가 일정하지 않아 입직하는 신하들이 다 한가하고 태만하게 처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처신하고 있는데 어떻게 분발하고 경계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별도로 경연을 열지는 않더라도 묘당을 인견할 때마다 유신(儒臣)도 함께 참석할 수 있게 하여 고금의 치란을 물어보아 그 학식을 살펴보기도 하고, 혹은 글제를 내어 작문을 하게 하여 그 우열을 시험한다면 사심(士心)이 분발하여 일어나고 신료들이 자극을 받아서 움직일 것이니, 격려되고 감동하는 효과가 문교(文敎)를 높이는 한 가지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신은 수년 전부터 줄곧 비국의 일원이 되어 묘당의 논의에 참여하였습니다. 삼건(三件)018) 을 쇄환해 보내던 당초에 성상의 애달픈 분부가 중외에 전파되자 그것을 읽은 자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신은 그때의 일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그때 도신(道臣)과 수령들이 우리 나라 사람을 다그쳐 쇄출(刷出)하면서 마음을 위안해 줄 도리가 없어 성상의 뜻을 헤아려 임시방편으로 둘러대고 회유하기도 하며, 심지어 조정이 장차 속바치고 다시 데려오는 조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떠나는 자가 그 말을 듣고 각기 만에 하나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을 뿐 아니라 이쪽에 떨어져 남은 부모와 처자들도 다 그 말을 믿고 그날이 오기만을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를 소민(小民)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요즈음 청국이 속바치는 것을 금하는 정도가 전일에 비해 조금 느슨해졌으니, 이러한 때에 한번 이와 같은 곡절을 말해 본다면 차마 약속을 어기지 못한다는 뜻에서 혹시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반드시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고 조정이 소민들을 돌보아 주는 사랑은 충분히 인심을 감격시킬 수 있을 것이니, 요청하였다가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백성이 또한 어찌 유감을 갖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는 묘당에 물어서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잘 알았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 진달한 말은 내가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우부승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삼가 보니 이명한(李明漢)의 소에는 비국을 인견하실 때 입직(入直)한 옥당의 관원도 아울러 입대(入對)하도록 허락하여 물으심에 대비하라고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할 때 이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들어가 참여할 것인지 여부를 다시 해조로 하여금 복계(覆啓)하게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곧장 옥당에 분부를 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장관(長官)이 이미 들어와 참여하였으면 입직한 관원까지 아울러 들어 올 것은 없다."
하였다. 응형이 또 연석에서 자주 유신(儒臣)을 접견할 것을 극력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국을 인견할 때는 자연스럽지 못할 듯하므로 수시로 소대(召對)하려고 한다."
하였다. 상이 병자년 이후로 옥체가 미령하여 경연을 완전히 폐하였으므로 신진 유신 중에는 천안(天顔)을 모르는 자도 있었다.
10월 8일 경술
유림(柳琳)이 금주(錦州)에서 돌아왔다. 상이 불러 접견하고 묻기를,
"그곳의 형세는 어떠하던가?"
하니, 유림이 대답하기를,
"청인이 금성(錦城)을 포위하고 있는데 성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주위 둘레가 60리입니다. 서북쪽에는 큰 산이 있고 산의 동서를 큰 냇물이 끼고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남쪽에는 연대(烟臺)가 있는데 바로 몽고 지방이었습니다. 팔왕(八王)019) 이 그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곳은 청과 한(漢)이 반드시 차지하려고 다투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천조의 원병이 그 산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나 청인이 그 사실을 알고 성을 쌓고 수비하여 한인이 싸울 때마다 계속 불리하였습니다. 원병은 도합 12만 명인데 여덟 총병(摠兵)이 나누어 거느리고 연이어 나와 모두 송산(松山)을 근간으로 진을 쳤으며, 그 뒤에 남산성(南山城) 밖으로부터 대군(大軍)이 계속 당도하여 병세를 크게 확장하고서 참호를 파고 성을 쌓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구왕(九王)은 한진(漢陣)의 동쪽에 진을 치고 곧장 한진을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물러났는데 청인의 병마 중에 사상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뒤에 한(汗)이 대군을 거느리고 송산에 이르러 즉시 나아가 포위하였으며, 구왕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한이 ‘지구전을 펴 식량이 바닥날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많은 군인이 손상을 입은 것 때문에 나성(羅城)의 밖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토성을 쌓았는데, 성벽이 높고 주위 둘레가 몇 리쯤 되었습니다."
하였다.
10월 10일 임자
경상도 동래부(東萊府) 지방에 하루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
좌우상을 명초(命招)하여 복상(卜相)하였다. 이성구(李聖求)를 영의정으로 삼고, 이경증(李景曾)을 예조 판서로, 정치화(鄭致和)를 응교로, 허적(許積)을 수찬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수찬으로, 이무(李袤)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11일 계축
밤에 천둥이 있었다.
10월 13일 을묘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금년은 흉년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서도(西道)가 더욱 심한데 일정한 부세(賦稅) 이외의 요역이 매일같이 번다하게 생기니, 애처로운 우리 민생이 어떻게 지탱해 나가겠는가."
하니,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팔도 중에서도 황주(黃州)·봉산(鳳山) 등의 고을이 더욱 심합니다. 그곳의 토속은 목화로 생업을 꾸려가고 있는데 금년에는 목화가 또 전부 말라 손상되었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흉년이 이와 같이 들었는데 식량을 운송해 가는 일이 중지될 기약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석기가 아뢰기를,
"운송해 간 수량이 이미 1천 9백 석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정한 양을 대지 못하니, 앞으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화병(火兵)은 저쪽에서 긴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정조(正朝) 사신의 행차 때 그 수효를 줄여달라고 청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석기가 아뢰기를,
"일식과 지진은 재변 중에서도 큰 것인데 동시에 같이 발생하였으니, 이는 필시 황천 후토(皇天后土)가 우리 나라를 노엽게 보아 돕지 않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사가 이와 같으니 반드시 인재를 등용한 뒤에야 나라를 부지할 수 있다. 대신은 아무쪼록 사람을 가려 벼슬을 맡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정사
큰 바람이 불었다.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집의로, 심대부(沈大孚)를 이조 좌랑으로, 김상(金尙)을 좌승지로 삼았다.
10월 18일 경신
청나라 차사(差使) 양서지(楊恕之), 노(盧)·시(施) 두 박씨(博氏)와 정명수 등 12인이 의주(義州)에 당도하였다고 부윤(府尹)이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문학(文學) 남노성(南老星)도 함께 왔는데 명수 등이 우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상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강을 건너는 날에야 비로소 청의 차사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10월 19일 신유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위성(危星) 위로 들어갔다.
10월 20일 임술
목성선(睦性善)을 좌승지로, 권임중(權任中)을 사간으로, 신유(申濡)를 이조 좌랑으로, 이도장(李道長)을 부응교로, 정유성(鄭維城)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1일 계해
울산부(蔚山府)에서 어떤 바위가 바닷가에서 육지의 암석 위로 자리를 옮겼다.
10월 22일 갑자
이명한(李明漢)을 도승지로, 정시성(鄭始成)을 봉교로 삼았다.
평안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청인이 가지고 온 칙서를 등사하여 비국에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제왕(諸王)이 아뢴 바에 의하면, 이번 금주(錦州)를 포위할 때 조선국 병사(兵使) 유림(柳琳)은 부하 병사들이 말을 잘 타지 못하고 걸어다녀 적진을 공격하여 깨뜨리지는 못했으나, 부하들을 훈련하고 사기를 고취시켰으며 진영에 파견하였을 때에도 착오를 범한 적이 없었으며, 또 화기(火器)를 쏘는 기술도 올바른 법을 터득하였다고 하였다. 짐은 생각건대 유림이 과거에 짐의 분부를 어긴 죄가 있었으나 이제 이미 왕사(王事)에 심력을 다하였으니, 또한 가상하다.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울러 품계를 올려 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하 관병(官兵)에 대해서는 유림에게 물어서 공과 죄를 자세히 살펴 공이 있는 자는 승진시키고 상을 주어 권장하는 뜻을 보이고 죄가 있는 자는 견책하고 벌을 내려 징계하는 뜻을 보이되 다만 진실과 거짓이 분명하지 않아 서로 속이는 일이 없게 하라. 혹시 속이는 일이 풍조를 이루어 사람마다 본받는다면 뒷사람을 징계하고 권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별히 유시한다."
하였다. 그 뒤에 마침내 유림을 총융사(摠戎使)로 삼고 금주 전투에서의 공로자를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유림은 청국의 칙서를 얻은 뒤부터 득의양양하게 스스로 과시하는 빛이 있었고 공로자를 조사할 때 제 마음대로 올리고 내렸으므로 식견이 있는 자는 그와 사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10월 24일 병인
유성이 섭제성(攝提星) 아래에서 나와 진성(軫星) 위로 들어갔다.
청나라 차사들이 입경하여 상이 편전(便殿)에서 접견하였다. 이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박씨(博氏) 등이 띠고 온 임무가 무슨 일인지 몰라 상하가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박씨가 좌우를 물리치고 품안에서 작은 종이를 내보이므로 보니, 의주인(義州人) 최효일(崔孝一)의 일과 잠상(潛商)020) 에 관한 두 건의 일이었다.
10월 26일 무진
충청도 예산현(禮山縣)에 지진이 있었다.
10월 27일 기사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전익희(全益禧)를 지평으로, 박서(朴遾)를 교리로, 구굉(具宏)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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