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병오
유동수(柳東秀)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여 경성(鏡城)으로 유배시켰다. 당초 윤형각(尹衡覺)이 평소에 유동수와 공을 다투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었는데, 유동수가 이보다 앞서 대옥(對獄)하면서 윤형각의 실수를 많이 지적하였으므로 윤형각이 더욱 불평을 하다가 마침내 사유를 갖추어 상소하였다. 그런데 윤형각이 바야흐로 파주 목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사(出謝)하기도 전에 남을 시켜 정원에 정소(呈疏)하자, 정원이 전례에 의거하여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윤형각이 얼마 후에 뉘우치고 드디어 그 상소를 정지하였었다. 사간 김원립(金元立)이 그 사실을 듣고 이에 아뢰기를,
"윤형각의 상소가 상달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정원에 올렸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유동수가 고변을 금지시키고 억제시킨 일이 만약 정말로 확실한데도 윤형각이 인정에 구애되어 도로 자진해서 중지했다면 사정을 따라 악행을 엄폐한 죄를 면하기 어렵고 만약 분명하지 않은 일로 정소하였다면 무함(誣陷)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잡아다 추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윤형각이 하옥되어 대답하기를,
"당초 유탁(柳濯)이 모반(謀反)한 상황을 유동수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는데도 신이 단지 경내(境內)에 이몽학(李夢鶴)의 변고가 있음을 전하면서 어느 곳을 근거하여 체포해야겠는가라고만 말하였다고 하면서 마치 신이 유탁의 모반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동수의 귀로 들어갔지만 이미 참고가 될 증인이 없으니 유동수가 혹 거짓을 꾸며댈 수도 있겠으나, 그의 사돈 권밀(權謐) 및 서운빙(徐雲騁) 등이 먼저 고변한 것도 끝내 발각하지 않아 역적의 무리들이 멋대로 어지럽히게끔 하였습니다. 유동수는 바로 임천(林川) 사람이며 유탁과 도시천(都是天)은 모두 유동수와 친한 사이였으니, 유동수가 권밀의 편지에 동요되지 않았음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당초 변고를 들었을 적에 유동수는 드러나게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또 감사에게 치보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역적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어느 곳에서 체포할 수 있을까.’라고만 하였고, 또 이웃 고을에다 이문(移文)하지도 않았으며, 또 즉시 정탐(偵探)하도록 하지도 않으므로, 신이 사람을 고용하여 역적이 주둔하고 있는 형지(形止)를 탐지해 오게 하여 이것을 근거로 계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유탁을 체포한 처음에 유동수가 공공연히 포박을 풀게 하므로 신이 하배(下輩)들을 꾸짖으며 서둘러 포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또 역적 집안의 문서를 뒤지게 하였지만 그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동수가 겁을 내고 식견이 없었던 상황은 일마다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김충립(金忠立)의 공과 죄의 경중과, 이석룡(李碩龍)이 기미를 알고 핍박되어 들어온 것은 신이 혐의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으므로 감히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므로, 이에 금부가 유동수를 잡아다 추문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유동수를 윤형각과 면질(面質)하게 하였더니, 유동수의 말이 막히는 데가 많았으므로 상이 또 권밀과 서운빙을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는데, 권밀 등이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밀과 서운빙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가상하게 여길 만하니, 해조로 하여금 실직(實職)에 임명하도록 하고, 유동수를 형추해야 할지를 의계하라."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유동수가 이미 부도한 말을 듣고도 즉시 가두고 다스리지 않았으니 그 죄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또 역적의 무리를 체포한 공로는 없지 않으므로 공과 죄를 비교하여 헤아려보면 더러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으니, 완전히 석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형추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 마침내 장 일백 유 삼천 리로 결단하여 부안현(扶安縣)으로 정배(定配)하였다. 조금 후에 간원의 아룀에 따라 경성부(鏡城府)로 고쳐서 정배하게 하고, 인해서 하교하기를,
"김충립의 죄범(罪犯)은 윤형각이 진달한 것으로 보면 중대하지는 않으니 분간하여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5일 정미
상이 환후(患候)로 열이 치솟아 귀가 막히는 증세가 있었다. 오래되어도 낫지 않자, 약방이 공사 문서(公事文書)를 들이지 말도록 하여 조용히 조섭하기를 계청하니, 상이 일렀다.
"옥에 죄수들이 오래 지체되니 매우 염려스럽다. 죄수들을 추문하는 데 대한 문서는 그전대로 받아 들이도록 하라."
내관 조방벽(趙邦璧)을 길주(吉州)에다 귀양보냈다. 조방벽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빈궁(嬪宮)을 내전(內殿)이라고 일컬은 죄로 봄부터 옥에 갇혀 여러 차례 형신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형을 감(減)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한 것이다.
11월 6일 무신
호조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공물 값은 1결마다 쌀 7두를 수납하게 하는데 그중에 2두는 영영 감해주고 5두만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해읍(海邑)은 본미(本米)를 배로 운반하게 하고 산군(山郡)은 7두 5승마다 면포 1필로 환산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판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우의정 남이웅(南以雄)이 모두 해조의 처리가 적당하므로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7일 기유
해에 겹으로 햇무리가 있었다.
11월 9일 신해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왜사(倭使) 귤성세(橘成稅)와 등지승(籐智繩)이 동래부(東萊府)에 도착하였는데, 표류한 왜인을 압송한 일을 사례하기 위해서였다. 지승이 동래 부사 민응협(閔應協)에게 말하기를,
"강호(江戶)의 집정(執政) 등이, 표류한 왜인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 ‘달단(韃靼)이 이미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표류한 사람을 보내니 이것은 바로 과장하려는 것인데, 조선(朝鮮)이 받아서 보내니 틀림없이 달단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대납언(大納言)이 【 관명(官名)이다. 바로 관백(關伯)의 숙부(叔父)라고 한다.】 남경(南京)에 가서 구원하려고 하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저들의 군병이 백만 명을 밑돌지 않으며, 우리가 백만의 대군을 징발한다 하더라도 평원(平原)과 광야(廣野)에서는 결코 당해낼 수가 없으니 조선에 길을 빌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으며, 도주(島主)는 말하기를 ‘지난해에 조선이 달단 군사의 화를 혹독하게 당하여 인민들이 거의 죽었고 또 부산에서 북경까지는 8 천여 리가 되니 결코 경솔하게 대군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뜻으로 반복해 말하면서 주선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지승이 인해서 말하기를,
"도주가 오랫동안 강호에 머물러 있었고 또 모상(母喪)을 당하였으니, 조문하는 예(禮)는 폐할 수 없을 것이오."
하므로, 민응협이 말하기를,
"모상에 조문하는 일은 전례가 없으니 조정에서 반드시 따를 리가 없을 것이오."
하자, 지승이 말하기를,
"즉시 주문(奏聞)하여 청원을 얻도록 해주시오."
하므로, 민응협이 그의 말대로 아뢰니, 조정에서 접위관(接慰官)을 차견(差遣)하였다.
11월 10일 임자
유성이 허성(虛星) 아래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다.
11월 12일 갑인
김원립(金元立)을 집의로, 이시만(李時萬)을 사간으로, 이래(李崍)·권집(權諿)을 장령으로, 이성항(李性恒)을 지평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정언으로, 김중일(金重鎰)을 수찬으로, 유항(柳恒)을 강원 감사로, 홍명하(洪命夏)를 화순 현감으로 삼았다. 홍명하는 벼슬길에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청현직을 역임하여 인망이 매우 두터웠는데 일찍이 헌납으로 있으면서 김남중(金南重) 등을 논핵했다가 성지(聖旨)를 거스려 체임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외직(外職)에 전보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시의(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11월 13일 을묘
대사간 조경(趙絅)이 고향에 있으면서 부름에도 나오지 않고 상소하기를,
"임금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아 혼자 몸으로 수많은 백성 위에서 명(命)을 제정하니 존귀함이 이보다 더 높을 수 없지만, 팔과 다리의 역할을 의탁한 곳은 대신(大臣)이며, 귀와 눈의 역할을 의탁한 곳은 간관(諫官)입니다. 그러니 팔다리가 굴신을 잘하고 귀와 눈이 총명한 뒤에야 인군이 위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백관이 조정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으며 모든 백성이 전야(田野)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래서 중흥하는 제왕은 간하는 이에게 상을 주고, 쇠미한 세대에서는 간하는 이를 싫어하며, 나라가 망해가는 경우에는 간하는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역대(歷代)의 분명한 증험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즈음 전하께서는 간한 일을 들어주는 도리가 점차로 게을러져 억제시키고 꺾고 내쫓으십니까?
신이 삼가 들으니, 전 대사간 조석윤이 피혐한 말에 이응시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성지(聖旨)를 거스려 파면되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신이 피혐한 사연이 어떤 내용의 글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조석윤의 충성과 청렴, 공정함과 정직함은 오늘날 세대에서 찾아보더라도 몇 사람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무슨 거스르는 사연이 있어 억눌러 물리치기를 이와 같이 급하게 하십니까? 지금 세대에는 인물이 거의 없으니 한 사람의 조석윤 같은 이도 정말 쉽게 구할 수 없는데, 조석윤을 대각(臺閣)에서 물러나게 하고 다시 어떤 사람을 구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십니까? 신은 실로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또 신이 지난번에 상소하여 이응시의 사건을 대략 진달하였습니다만, 소신[竪臣]의 염치(廉恥)에 대해서는 【 조경이 전에 이응시의 비난과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모두 말할 겨를이 없었기에 지금 그 말씀을 다 드리겠습니다. 이응시는 대대로 국록을 받은 집안의 자제로 젊어서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과거에 합격해서는 좌막(佐幕)에서 배회하다가 오래된 뒤에 비로소 현직(顯職)에 통하게 되었으니, 그가 시세를 따라 아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한때의 강개함을 참지 못하여 미치광스럽고 망령된 말을 올렸는데, 전하께서 어찌 처벌하기를 심하게 하여 북방의 불모지로 귀양보내려 하십니까? 당신(唐臣) 육지(陸贄)가 덕종(德宗)에게 대답한 말에 이르기를 ‘간(諫)하는 이가 많은 것은 내가 간언을 좋아함을 표시하는 것이며, 간하는 이가 정직한 것은 내가 그들을 잘 대우해 줌을 보이는 것이며, 간하는 이가 멋대로 덮어씌우는 것은 내가 용서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며, 간하는 이가 말을 흘리는 것은 내가 따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참으로 임금이 간언을 듣는 천고의 귀감입니다.
지금 우레가 한겨울에 크게 진동하였으며, 태백성(太白星)이 여러 번 태양 곁에 나타나고 비와 눈이 내리지 않으며 황무(黃霧)가 낮을 어둡게 하면서 천지의 운행이 막히는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전하께서 천상(天象)을 우러러 관찰하시고 인언(人言)을 굽어 살피시어 조심하는 도리를 더욱 힘쓰고 말이 정직하고 순박한 인사(人士)를 널리 구하여 좌우에 배치시켜 자신의 허물 듣기를 힘쓰며 성상의 국량을 넓혀서 비위를 거스린 죄를 관대하게 처분하신다면 국가와 사직의 복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문형(文衡)을 사면(辭免)한 상소는 거짓 사양함을 꾸미고 세속의 사례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신의 쇠약함이 매우 심한데다 문자 사이의 공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상께서는 본직 및 겸대한 문형을 아울러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병진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11월 15일 무오
간원이, 광주 부윤(廣州府尹) 구오(具鏊)가 궁인을 데리고 사는 데 대한 문제를 다시 논하고 형률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도록 청하고, 그의 아비 구인후(具仁垕)는 교육하지 못한 죄를 모면하기 어려우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 궁인은 출가(出嫁)를 허락한 지 이미 오래이며, 구오가 데리고 살아도 안 될 것이 조금도 없다."
하였다. 당초 참판 이성길(李成吉)에게 천첩(賤妾) 소생의 딸이 있었다.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또 문자(文字)를 해독하므로 후궁(後宮)으로 뽑혀 들어갔었는데, 일찍이 상의 시중을 든 적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인열 왕후(仁烈王后)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는데, 간혹 그가 이미 승은(承恩)하였다고 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여염집에 거처하는 10여 년 동안 음행이 많았다. 그가 일찍이 구인후의 집에 드나들었다. 구인후의 아들 구오가 그를 보고 좋아하여 자신이 받아들여 첩을 삼으려고 좌우에다 뇌물을 많이 주고 상에게 출가를 허락하도록 청원하게 하였는데,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었다. 당시 상의 종모(從母)인 이씨(李氏)의 며느리가 궁중에 드나들었는데, 말하는 바가 있으면 상이 뜻을 굽혀가며 따라주지 않음이 없었다. 구오가 이에 이씨의 며느리를 사주하여 억지로 청원토록 하였더니, 상이 어쩔 수 없어 허락하였다. 구오가 또 세자 대군(世子大君)에게 품지(稟知)한 연후에 솔축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다. 곽성귀(郭聖龜)가 그 사실을 듣고 놀랍게 여겨 이시만(李時萬)과 상의하여 논계하였다. 평흥군(平興君) 신준(申埈)이 조보(朝報)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궁인(宮人)인 줄 모르고 취(取)했다가 논박을 받았으니 일이 매우 억울하지만, 구오의 이 일은 참으로 황당하다."
하므로, 듣는 이가 비웃었다.
11월 17일 기미
상이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동옷[襦衣]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11월 18일 경신
달이 목성(木星)을 가렸다.
장령 이래(李崍)가 아뢰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우리 선조[宣廟]와 한(漢)의 문제(文帝) 같아야 됩니다. 선묘조에 고신(故臣) 김성일(金誠一)이 탑전(榻前)에서 인대(引對)할 때에 걸·주와 견주는 데 이르자 조정의 신하들이 송구스러워 얼굴빛이 변했으며 외부의 사람들 모두 위태롭게 여겼었지만 선조는 노여워하지 않으셨고, 문제 때 신 부인(愼夫人)이 총애를 받아 황후(皇后)와 좌석을 같이 하자 원앙이 그가 분수를 범한다고 하여 그의 좌석을 끌어다 물리쳤지만 문제가 그를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선조는 선조로서의 손실됨이 없고 문제는 문제로서의 손실됨이 없으며, 저 두 사람의 신하 역시 두 사람의 신하였을 뿐입니다. 이응시의 미치광스럽고 망령된 말이 성덕(聖德)에 무슨 손상이 되기에 관용을 베풀어 사람들에게 넓은 도량을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홍명하(洪命夏)를 외직(外職)에다 보임하라는 명은 일절(一節)에다 일절을 더하는 격으로 보거나 듣고서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고, 인해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응시를 먼 곳에다 귀양보낸 의도는 분수와 의리를 밝히고 간교하고 사특함을 징계하는 데 있고, 내가 오만하고 간하는 것을 싫어하여 언로를 막으려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이 일을 가지고 삼사(三司)가 논의하고 고집하면서 한 해가 다하도록 게을리하지 않고 정지했다가 다시 발설하니 시인(時人)들이 하는 짓도 매우 이상스럽다. 헌부의 계사 가운데 걸·주에 관한 말은 그 당시 무슨 일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는가? 여러 승지들도 들은 바가 있는가?"
하자, 우승지 홍전, 동부승지 남선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나이가 젊은 후진(後進)으로 견문(見聞)이 좁고 학식이 천박하여 선묘조 의 고사(故事)를 간혹 고로(故老)에게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이 말은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이 아닌 일을 저와 같이 말을 늘어놓으니 너무나 미안하다."
하였다. 이래가 마침내 인혐하고 물러나므로,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9일 신유
대사헌 심액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홍명하를 외직에 보임한 잘못을 아뢰었는데, 상소를 아뢰자, 상이 살펴보지 않았다. 심액은 바로 오정일(吳挺一)의 외조부(外祖父)이다. 이행우(李行遇)가 오정일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외조부가 서리 맞은 풀처럼 늙고 위축되어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였다. 홍명하가 외직에 보임된 일을 헌장(憲長)으로서 어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오정일이 그 말을 알리자 심액이 어쩔 수 없어 이 소를 올렸다.
11월 21일 계해
상이 내년부터 백관(百官)에게 반록(頒祿)하도록 명하였다. 정축년045) 이후부터 반록하는 규정을 폐지하고 매월 요(料)를 지급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공(御供)으로 재감(裁減)한 물품을 이미 모두 평상시대로 회복하게 하고 백관의 관복(冠服)도 구제(舊制)대로 회복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내년부터 반록(頒祿)하도록 하시면 1년에 응당 써야 할 미두(米斗)를 먼저 계산하여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병술년046) 조(條)의 세입(稅入)인 경우 각도 전결(田結)의 총수 계본(摠數啓本)이 아직 일제히 도착되지 않아 그것이 얼마인가는 상세하게 모른다 하더라도 각 창고의 현재 남아 있는 곡물 가운데서 12월 분의 반료(頒料) 숫자를 계산하여 덜어내면 나머지가 쌀은 5만 1천 1백 79석이고, 소미(小米)는 1만 3천 7백 8석이며, 콩은 3만 5천 6백 29석입니다. 을해년047) 1년 4과(四科)048) 에 반록한 숫자를 가져다 상고하면 쌀이 3만 6천 9백 28석이고 콩은 1만 6천 5백 4석인데, 군병(軍兵) 등 제색(諸色)의 산료(散料)인 쌀과 콩은 원래 이 숫자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4과에 응당 지급해야 할 원수(元數)를 가지고 그 한 과(科)에 지급하는 수를 계산하면 쌀이 9천 2백 32석이고 콩이 4천 1백 26석입니다. 때문에 이 한 과의 수 및 정월 이후 석 달 간의 훈국(訓局)의 출신(出身)과 군병(軍兵), 각 아문의 장관(將官)과 군관(軍官), 그리고 대궐 안의 하인과 제색 공장(諸色工匠), 서리(書吏) 등의 산료를 아울러서 계산하면, 쌀이 2만 4천 1백 78석이고 콩이 5천 6백 23석입니다.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각곡(各穀)의 수를 가지고 을해년에 쓴 것과 비교하여 짐작해서 마련한다면, 반록은 정월·4월 양과(兩科)는 겨우 지탱하겠고 산료는 6월까지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소미(大小米)의 남은 수는 1만 6천 5백 석 남짓하고 콩은 2만 4천 3백 80석 남짓하여 추등(秋等) 및 잡색 산료(雜色散料)를 나누어 주려고 하면 그래도 나누어 쓸 수 있겠지만, 그 사이 뜻밖에 쓰일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각 창고에 저축된 것은 다 써버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대개 한 과에 반록하는 수를 통틀어 계산하면 쌀이 9천 6백 50석이고 콩이 7백 13석인데, 반료(頒料) 때에는 보태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훈국 출신 1천 20여 명에게 1년에 방출하는 쌀과 콩이 1만 4백 50여 석에 이르니, 이것은 을해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매년의 경비가 전년에 비교하여 점차로 많아지니, 이는 모두 이러한 군병이 늘어나기는 해도 줄어듦이 없어서입니다. 지금 을해년 해품(該品)에 반록한 수를 모방하여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였습니다만, 이 숫자 역시 매우 많지 않으니 또 보태거나 줄이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이 예(例)에 의거하여 소미(小米)를 섞어 마련하여 나누어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1월 22일 갑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다.
11월 23일 을축
사모(紗帽)와 이엄(耳掩)을 재신(宰臣) 및 대신(臺臣)과 시종(侍從)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사헌 심액이 아뢰기를,
"이응시를 멀리 귀양보낸 처분을 도로 거두도록 한 주청은 실제로 공공(公共)의 의논에서 나왔는데, 다만 생각건대, 상하가 서로 버티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더구나 이미 정지한 뒤에 다시 제기하여 조용히 조섭하시고 계신데 번거롭게 하고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장령 이래가 새로 은명(恩命)에 사례하면서 문득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니, 신의 사리에 어둡고 일을 그르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파면시켜 배척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오정일(吳挺一)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 계초(啓草)를 보고 외조부(外祖父)가 앞으로 이조 판서가 될 것이라고 말하므로 듣는 자가 한바탕 웃었었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조용히 조섭하고 계신데 번거롭게 하고 소란을 피울까 염려하여 이미 정지한 의논을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니, 노성(老成)한 신하 역시 소견이 있는 것입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4일 병인
사간 이시만(李時萬)이 아뢰는 자리에 빠졌다가 체임되었다.
영국 원종 공신(寧國原從功臣) 2천 6백 55인을 녹훈하였다. 상이 녹훈 도감(錄勳都監)이 마련한 원종 공신 단자를 가지고 하교하기를,
"대신(大臣) 이하 근수 하인(跟隨下人) 및 수청 하인(隨廳下人)도 모두 훈록에 참여시켰으니 너무나 외람되다."
하자, 도감이 아뢰기를,
"소무 영사 등록(昭武寧社謄錄)에 추관(推官)은 1등, 하인은 3등이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諸司)에 이문(移文)하고 참작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고 황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근수 하인과 수청 하인 등의 이름에는 아울러 부표(付標)할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이 뒤로는 이것으로 예(例)를 삼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11월 25일 정묘
대사헌 심액을 패초(牌招)하니 심액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정원이 전례에 따라 파직하도록 주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관으로 패초하여도 나오지 않는 자는 파직하는가?"
하자, 좌부승지 이원진(李元鎭)이 아뢰기를,
"을유년049) 여름에 양사의 장관으로 패초하여도 나오지 않은 자는 일체 파직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심액의 당초 의도는 오로지 영합하고 아첨하는 데서 나왔었는데, 다시 물의가 비웃고 손가락질할까 싶어 감히 출사하지 못하였고, 상의 뜻도 억지로 출사하게 하고 싶었으나 근래의 규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직하였다.
정언 이무가 부름을 받고 들어와서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 천변(天變)이 일어나고 적정(敵情)은 헤아리기 어려우며 백성과 군사들은 곤궁하고 공사(公私)간의 재물은 모조리 없어졌으니, 지금은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뒷수습을 잘하도록 도모해야 마땅한데, 상하가 서로 격렬하게 반년을 버티며 사론이 다투어 들끓으면서 안정될 기약이 없고, 직절(直截)한 인사는 처벌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니, 크게 경계하고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같은 경우는 보잘것없고 식견도 텅비었습니다. 다만 신이 이미 채택하여 시행하라는 명을 들었기에 덕음(德音)이 펴지기를 날마다 바랐었습니다. 지성(至誠)은 감통(感通)하는 법이므로 조용히 기다리는데, 바야흐로 정론(正論)이 다시 일어나는 때에 마음은 같으면서 행동이 달라 아뢰는 좌석에 빠지고 거기다 기한을 넘기는 실수까지 범했으니 결단코 잠시도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관직을 체임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6일 무진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좌부승지로, 이만영(李晩榮)을 사간으로, 김중일(金重鎰)을 부교리로, 정유(鄭攸)를 수찬으로, 홍전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11월 27일 기사
영의정 김자점이 약방 도제조로 입시하니, 상이 하문하기를,
"식견이 있는 이들은 왜정(倭情)이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적정(敵情)을 헤아릴 수 없지만 서울 지방이 대단하게 소동입니다. 지금 재앙과 이변이 겹쳐 나타나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며 두려워하니 어찌 기필코 화환(禍患)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금년 안으로는 군사를 동원할 리가 없을 것 같지만, 내년 봄이 매우 우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길을 빌리겠다는 말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허세를 부리며 위협하는 것인데, 그것은 대체로 치조(致吊)하라는 청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하자,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러한 왜정(倭情)을 북경에다 알리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1월 30일 임신
햇무리가 지고 좌이(左珥)가 있었으며, 무리 위에는 배(背)가 있었다. 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는데 빛깔이 모두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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