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6월

싸라리리 2026. 1. 7. 09:18
반응형

6월 1일 갑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남별전(南別殿) 참봉의 첩보에 따라 나아가서 봉심한 결과, 제2실(室)의 영정(影幀) 하변의 화자(靴子) 근처와 어탑(御榻)을 그린 데와 회장(繪粧)의 남단(藍段)에 좀먹은 데가 모두 열한 군데이니, 급급하게 개수해야 하겠습니다. 정축년012)  에 세조 대왕의 영정을 강화(江華)에서 경성으로 옮겨 봉안할 적에 곤룡포와 어탑에 더럽혀지고 파손된 곳이 많자 수보하여 봉안했다고 하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보 도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6월 2일 을미

헌부가 아뢰기를,
"황집(黃緝)이 장오죄(贓汚罪)를 진 적이 있었는데 다시 임용되었으니, 마음을 고쳐 스스로 면려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사의 서계를 보건대 강제로 민간에게 미곡을 징수하고 외람되이 군사들에게 번포(番布)를 징수하였으니, 잡아다가 추문하소서."
하고, 간원이 이를 논하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4일 정유

상이 남별전(南別殿) 참봉에게 3월부터 8월까지 하루씩 걸러 봉심하도록 명하였다.

 

상평청이 아뢰기를,
"본청의 호칭을 이미 상평이라고 칭했으면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흉년에는 값을 올려 베를 사들이고 풍년에는 값을 낮추어 팔게 하소서. 그리고 진휼청의 전규에 의거하여 대신에게 겸하여 관장하게 함으로써 사체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원도에 큰물이 졌다.

 

6월 5일 무술

홍청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소장을 올려 사직했는데, 그 대략에,
"속공(屬公)하는 한 가지 일 때문에 거듭 물의에 죄를 얻었는데, 그들은 꾸짖음이 부족할까 죄악을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하였습니다. 율명(律名)을 적용한 것은 파직에 그쳤습니다만 죄악을 논열한 것은 마치 반드시 죽여야 될 사람인 듯이 했습니다.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고 위태로움에 임하여 난을 피하고 인륜을 범하고 기강을 혼란시킨 자를 논한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한 몸으로 이런 많은 죄명을 졌단 말입니까. 참으로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우니, 직명을 삭제시켜 중론을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실정 밖의 말은 따질 필요가 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7일 경자

전남도(全南道)에 홍수가 져서 산기슭이 무너져 내리고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상이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에게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이는 인후가 바야흐로 모상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8일 신축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6월 9일 임인

원진명(元振溟)을 헌납으로, 이완(李)을 지평으로, 권우(權堣)를 수찬으로, 원숙(元䎘)을 북병사(北兵使)로, 허적(許積)을 전남 감사(全南監司)로, 이해창(李海昌)을 부교리로 삼았다.

 

6월 10일 계묘

함경도에 큰물이 졌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6월 11일 갑진

경상 감사 이만(李曼)이 치계하기를,
"공명 고신(空名告身) 1백 장을 내려보내어 곡물을 모집하여 수재를 당한 기민(飢民)을 진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2일 을사

저승전 수리 도감 제조(儲承殿修理都監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고 저주한 흉물을 가장 많이 파낸 사람은 당상으로 올리게 하였다.

 

6월 13일 병오

유성이 우성(牛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6월 14일 정미

예조가 아뢰기를,
"원손(元孫)의 책례(冊禮) 때의 복색에 대해서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오례의》에도 기재된 것이 없어서 억견으로 정하기가 어려우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김자점, 좌의정 이경석, 우의정 남이웅이 아뢰기를,
"조종조 때 이미 왕세손의 책배례(冊拜禮)가 있었습니다만, 등서하여 온 실록에는 입학의(入學儀)와 강서원(講書院)의 법규만을 상세히 기록하였을 뿐 기타는 드러나 있는 글이 없습니다. 아마도 등서하여 올 적에 너무 자세히 하려다가 잘못되어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사관을 보내어 실록을 등서하여 오게 한 다음 그에 의거하여 강구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무신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6월 16일 기유

헌부가 아뢰기를,
"수리 도감에 대해 논상한 일도 이미 과중한 듯한데, 지금 저승전의 영조 때문에 다시 제조 이하에게 가자할 것과 6품의 준직(準職)에 천전(遷轉)시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지금 수리하는 역사가 한때에 아울러 거행한 것은 아니지만 대전(大殿)과 저승전은 같은 궁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가지 일로 나누어 중복되게 상을 줄 수 있겠습니까. 성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흉물을 파낸 것은 모두 새로 영조하는 곳에서 있은 일이다. 따라서 그 노고를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간원도 이것을 가지고 한 달이 넘도록 논하니, 다른 것으로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유황(兪榥)을 우승지로, 정유성(鄭維城)을 대사성으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이조 좌랑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17일 경술

유성이 천원성(天苑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경상 감사 이만(李曼)이 부산(釜山)의 동왜관(東倭館)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했다가 농한기를 기다려 다시 짓게 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대마도에서 우리 나라의 표류인 6구(口)를 돌려보냈다.

 

6월 18일 신해

유성이 저성(氐星) 위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종부시의 낭청을 보내어 선원록각(璿源錄閣)을 봉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어떤 도적이 적상 산성(赤裳山城)의 선원록각에 들어가 봉한 자물쇠를 뽑아내고 궤 속에 들어 있는 복대(袱帒)를 죄다 훔쳐갔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종부시가 낭청을 보내어 봉심한 다음 봉표(封標)를 정돈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른 것이다.

 

지중추부사 이명(李溟)이 졸하였다. 이명은 기국이 있었으나 너무 혹독하고 난폭하였다. 호조 판서로 있던 7년 동안에 상당히 능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취렴(聚斂)했다는 것으로 비난했다.

 

6월 19일 임자

유성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6월 20일 계축

예조가 날짜를 가려 원손(元孫)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을 행하고 또 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실록을 등서해 오기를 기다려 다시 품신하여 정하라고 명하였다.

 

6월 21일 갑인

오위 장(五衛將) 송립(宋岦)·진극일(陳克一)·윤겸선(尹兼善) 등 14인이 죄를 지어 파직되었다. 송립 등은 사사로이 자신들의 사후군(伺候軍)을 부려 땔감을 베게 하고 면포를 자기 집으로 거두어 들이기도 했는데, 병조에서 적발하여 계문하고 아울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른 것이다.

 

6월 22일 을묘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상이 이조와 병조에 하교하기를,
"수령과 처음 입사하는 사람은 극도로 잘 가려 의망하고 전후 승전을 각별히 거행하라."
하였다. 이때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전관(銓官)이 사람을 기용하는 것이 거의가 사의(私意)를 따랐는데, 이것이 누적되어 폐습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있어도 아래에서 봉행하는 실상이 없었다.

 

윤득열(尹得說)을 좌승지로,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사인으로, 양만용(梁曼容)을 집의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정언벽(丁彦璧)을 지평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이조 좌랑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수찬으로, 목행선(睦行善)·홍명하(洪命夏)를 부수찬으로, 이회(李禬)를 부교리로, 조경(趙絅)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신시호(申時豪)·염원준(廉元俊)에게 통정의 품계를 가자했는데 도적을 체포한 공 때문이었다. 이때 원준이 음죽 현감(陰竹縣監)으로 있었다. 고을의 어떤 백성이 가을걷이 때 들판에서 자기의 노적가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에 강도가 행인을 겁박하여 노획한 재물을 가까운 곳에서 나누고 있었다. 그 백성이 이를 깨닫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몰래 그들의 전후로 달려나가면서 서로 호응하여 외치면서 마치 포위하여 체포할 것 같이 하자 강도들이 재물을 죄다 버리고 도주하였다. 백성들이 그것을 다 가지고 돌아와서는 관아에 고하지 않았는데, 그 백성과 원한을 가진 집에서 은밀히 염원준에게 그 백성을 강도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원준이 그 백성 부자와 몇 사람을 체포하고 또 강도의 장물(贓物)을 찾아내 조사하였으나, 백성이 자복하지 않았다. 원준이 공을 세우기 위해 자복을 받아내고자 잔혹한 형신을 가하였으나, 백성은 원통하다고 하였다. 이에 칼날로 그의 양쪽 정강이를 뚫고 큰 새끼줄을 꿴 다음 두 군졸로 하여금 톱질하듯이 서로 잡아당기게 하니, 백성이 그 혹독함을 견뎌 내지 못하고 무복하였다. 이에 원준이 드디어 그 공으로 통정의 품계로 뛰어 오른 것이다.

 

6월 23일 병진

도목정이 파하려고 할 적에 조 소의(趙昭儀)가 주찬(酒饌)을 이조 좌랑 김식에게 보냈는데, 이를 본 사람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6월 25일 무오

지평 정언벽(丁彦璧)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홍청 감사 조계원의 추함(推緘) 내용에 장황한 말로 꾸며서 늘어놓았는데, 그때 파직시키자는 의논은 실로 공공(公共)의 의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고 곧이어 소장을 올려 있는 힘을 다하여 대간을 공격하였습니다. 신이 간원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동참한 적이 있으니, 어떻게 감히 남의 공척을 받고서도 묵묵히 직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율문을 잘못 적용했고 함사(緘辭)를 삼가지 않았으니, 규핵하는 거조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반성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분한 마음만 품어 있는 힘을 다하여 언관을 비난하면서 공격하였습니다. 그의 전후의 소위를 살펴보면 모두가 근거할 데가 없는 행위로 서로 따질 가치조차도 없는데, 무슨 피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평 정언벽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임술

상이 이형익(李馨益) 등을 불러서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계해일인 내일 밤에 요안혈(腰眼穴)에 뜸을 뜨라고 명하였다. 약방 제조 조경, 도승지 김남중(金南重) 등이 물러나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약방일기(藥房日記)를 상고하여 보니 일찍이 을유년013)  에 위에서 형익에게 요안혈에 뜸을 뜨는 것에 대해 하문하신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주효하였는지의 여부는 외정(外廷)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오늘날 성상의 증상에 합치되는 것입니까. 임금이 뜸을 뜨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이런 무더운 때를 당해서는 여염의 사람들도 침구(鍼灸)를 금하고 있는데, 더구나 옥체가 바야흐로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는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단지 한 의관의 말만 듣고 밤중에 뜸을 뜬다는 것에 대해 신들은 우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형익이 상에게 아뢰기를,
"6월 계해일에 요안혈(腰眼穴)에 뜸을 뜨면 모든 병이 치료되고 사수(邪祟)를 다스리는 데는 더욱 신묘합니다. 내년 6월 계해일에 요안혈에다 뜸을 뜨면 상의 병환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으므로 신하들이 간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약방의 계사를 살펴 보고서야 비로소 뜸을 뜬다는 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임금이 침구를 맞는 것이 얼마나 중한 일입니까. 반드시 여러 의관들에게 두루 하문하여 논의가 귀일된 다음에 시술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 의관에게는 묻지 않은 채 경솔하게 한 의관의 황당무계한 말만을 믿고 옥체를 수고롭게 하면서 밤중에 뜸을 뜰 수 있겠습니까. 다시 약방에 하문하여 보호하는 방책을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30일 계해

한밤중에 상이 요안혈에 뜸을 떴다. 이형익(李馨益)이 아뢰기를,
"요안혈에 뜸을 뜨는 것은 비밀스럽게 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했기 때문에, 한밤중이 된 뒤에 상이 은밀히 형익 등을 불러 좌우의 요안혈에 뜸을 뜨게 하여 정원에서 모르게 하였다. 형익은 인품이 어리석고 외람되며 행동거지가 추솔하였으므로 상의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았는데, 상도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금년의 제도(諸道)의 삭선(朔膳)과 삼명일 방물(三名日方物)을 그대로 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잇따라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제도에 하교하여 삭선과 삼명일 방물을 아울러 진상하지 말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에는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신하가 위에 바치는 예법을 해마다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도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하여 봉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가뭄을 만나 삭선과 방물을 정지시키는 것은 성주(聖主)가 재앙을 삼가고 백성을 돌보는 성대한 마음인 것이다. 금년의 농사가 지난해에 비해 조금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풍년이라고 하면서 파하라고 한 방물을 회복시킬 것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부시(婦寺)의 충성인 것으로 군자가 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애석함을 금치 못하겠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27면
【분류】재정-진상(進上) / 역사-사학(史學) / 농업-농작(農作)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가뭄을 만나 삭선과 방물을 정지시키는 것은 성주(聖主)가 재앙을 삼가고 백성을 돌보는 성대한 마음인 것이다. 금년의 농사가 지난해에 비해 조금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풍년이라고 하면서 파하라고 한 방물을 회복시킬 것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부시(婦寺)의 충성인 것으로 군자가 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애석함을 금치 못하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