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경신
우부승지 박정길(朴鼎吉)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공사를 보건대, 바로 봉산(鳳山)에 거주하는 전 만호(萬戶) 김대회(金大淮)의 상소와 관련하여 회계한 일이었습니다. 김대회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그가 상소한 말 또한 하나하나 쓸 만한 것은 못되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정군(正軍)에 충정(充定)되어야 할 자가 군역(軍役)을 모면할 목적으로 청탁하며 빠져 나가려고 꾀한다.’는 등의 말은 그야말로 오늘날의 폐단을 맞춘 것이기에 신이 이를 인하여 추론(推論)해 볼까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은 데다가 군적(軍籍)이 불분명한 탓으로 양민이 군역을 빠져 나가는 폐단이 난리를 치른 뒤로 극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한두 가지 일을 거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대 조정에서는 벌열(閥閱) 자제들도 반드시 소속되는 곳이 있게 하였는데, 선조(先祖)의 훈공(勳功)이 있는 자는 충순위(忠順衛)에 소속되고, 문(文)을 닦는 자는 사학(四學)에 들어갔으며, 무(武)를 닦는 자는 실역(實役)이 있지 않을 경우 과거에 응시할 때 반드시 보인(保人)으로 칭하게 하였으니, 그렇게 법을 제정했던 본래의 의도를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얼 출신 자손들도 도대체 군역이라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사족(士族)의 집안에서 군역을 치르지 않는 평민을 비호하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향사당(鄕射堂)이나 서원(書院)·향교(鄕校)에 투입(投入)하는 자들이 어디고 없는 데가 없는데 양남(兩南)이 더욱 심합니다. 그런가 하면 문이나 무를 닦지도 않고 양민이든 천민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청탁을 하여 훈도(訓導)의 차첩(差帖)035) 을 불법으로 받아내고는 입사(入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조의 서리(書吏)에 관한 규례(規例)를 보면, 무고(無故)한 한량(閑良)으로서 서리 자격이 있는 자, 한 집안에서 향리(鄕吏)로 복무하는 3인 가운데 한 아들, 세공생(歲貢生) 등을 서리로 편입시켜 경중(京中)에서 근무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조가 정해진 수대로 각 아문에 나눠 보낸 이외의 인원에 대해서는 이조가 총괄하기 때문에 호조와 병조가 요포(料布)를 지급하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난리가 발생한 뒤인 계사년036) 연간에 서리가 거의 모두 사망한 관계로 요포를 지급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군역을 치르는 자라고 칭하면서 매번 참상(參上)의 요포를 지급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서리의 안적(案籍)을 그저 하리(下吏)의 손에만 맡겨 두기 때문에 경외(京外)의 한량으로서 서리의 차첩을 받아낸 자는 종신토록 한가롭게 놀면서 몇 필의 목면(木綿)만 납부하면 됩니다. 일찍이 이조에서 선임으로 있던 자로서 서리에 등록되어 있는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지만 금단하여 조사해 낼 길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양의사(兩醫司)037) ·관상감·사역원 생도의 경우는 장래성이 있는 자를 택해 생도라 칭하고는 재주를 연마시켜 입사(入仕)케 할 목적으로 군역을 면제해 주고 있는데, 지금은 꾀를 내어 생도의 증명서를 받아 내고는 경외(京外)에서 한가롭게 노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또 경외에서 산대 부장(山臺部將)이라고 칭하면서 한가롭게 노니는 자들도 많습니다. 병조의 병력수를 대개 듣건대, 평시에는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원수(元數)가 18만인데, 봉족(奉足)까지 합치면 거의 50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가 겨우 6만으로 그 중에 집을 떠나 유망(流亡)하는 자들이 많이 있고, 여기에 각색(各色) 군사와 훈련 도감의 초군(哨軍)과 군호(軍戶)의 봉족 등 도합 1만여 명을 제외하면 평시의 9분의 1에도 차지 않는다 하니, 양민이 군역을 도피하는 폐단을 이에 의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기준대로 각읍(各邑)의 군역을 정한다면 필시 소요가 일어날테지만, 그렇다고 옛날대로만 하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훈도·서리·녹사(錄事)·산대 부장의 차첩(差帖)을 손에 넣는 자가 끝이 없게 되어 절대로 폐단이 고쳐지는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산대 부장 하나의 일을 예로 든다면, 한 번 나례(儺禮)를 행할 때마다 번번이 3백 명씩을 차출하는 등 몇 년 동안 무려 1천 명을 배출했습니다. 그런데 군역에 충정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생 동안 한가롭게 놀 수 있는 밑천이 되기 때문에 이 임무에 차출되려고 꾀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한량들입니다. 앞으로 나례를 행할 경우 이미 차출한 부장들이 본래 있는 이상 어찌 매번 새로 차출하여 간악한 술수 중에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훈도의 경우는 생원이나 진사 외에는 반드시 각읍으로 하여금 초시(初試)에 입격(入格)한 자로서 훈도에 적합한 자를 보거(保擧)038) 하도록 하고, 충순위의 경우는 반드시 그 앞 세대의 승음(承蔭)한 관교(官敎)나 각종 차첩(差帖)들을 조사한 뒤에 봄철과 가을철 양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가 아니면 성급(成給)해 주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리·녹사·삼생(三生)039) 등의 이름이 등록된 장부를 한 본(本)은 본사(本司)에 보관하고, 한 본은 법사(法司)에 보낸 뒤 원액(元額)을 대조하여 간교한 속임수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군역을 도피하는 폐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비변사 및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상의하여 선처하게 하되, 한결같이 《대전(大典)》의 구례(舊例)에 따르도록 할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케 하소서. 이와 함께 외방에 행이(行移)하여 불법으로 차첩을 받은 자들을 색출해서 비변사에 보고토록 하고, 그런 다음 각 해사의 원안(元案)과 서로 맞추어 신역(身役)을 정하거나 가포(價布)를 징수해서, 한편으로는 군액(軍額)을 채우고 한편으로는 나라의 용도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폐단이 두절되게 한다면 국가에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이 해방(該房)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기에 황공한 심정으로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註 035] 차첩(差帖) : 사령장(辭令狀).[註 036] 계사년 : 1593 선조 26년.[註 037] 양의사(兩醫司) : 혜민서와 활인서.[註 038] 보거(保擧) : 보증 추천하는 것.[註 039] 삼생(三生) : 양의사·사역원의 생도를 말함.
"신이 삼가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공사를 보건대, 바로 봉산(鳳山)에 거주하는 전 만호(萬戶) 김대회(金大淮)의 상소와 관련하여 회계한 일이었습니다. 김대회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그가 상소한 말 또한 하나하나 쓸 만한 것은 못되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정군(正軍)에 충정(充定)되어야 할 자가 군역(軍役)을 모면할 목적으로 청탁하며 빠져 나가려고 꾀한다.’는 등의 말은 그야말로 오늘날의 폐단을 맞춘 것이기에 신이 이를 인하여 추론(推論)해 볼까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은 데다가 군적(軍籍)이 불분명한 탓으로 양민이 군역을 빠져 나가는 폐단이 난리를 치른 뒤로 극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한두 가지 일을 거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대 조정에서는 벌열(閥閱) 자제들도 반드시 소속되는 곳이 있게 하였는데, 선조(先祖)의 훈공(勳功)이 있는 자는 충순위(忠順衛)에 소속되고, 문(文)을 닦는 자는 사학(四學)에 들어갔으며, 무(武)를 닦는 자는 실역(實役)이 있지 않을 경우 과거에 응시할 때 반드시 보인(保人)으로 칭하게 하였으니, 그렇게 법을 제정했던 본래의 의도를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얼 출신 자손들도 도대체 군역이라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사족(士族)의 집안에서 군역을 치르지 않는 평민을 비호하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향사당(鄕射堂)이나 서원(書院)·향교(鄕校)에 투입(投入)하는 자들이 어디고 없는 데가 없는데 양남(兩南)이 더욱 심합니다. 그런가 하면 문이나 무를 닦지도 않고 양민이든 천민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청탁을 하여 훈도(訓導)의 차첩(差帖)035) 을 불법으로 받아내고는 입사(入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조의 서리(書吏)에 관한 규례(規例)를 보면, 무고(無故)한 한량(閑良)으로서 서리 자격이 있는 자, 한 집안에서 향리(鄕吏)로 복무하는 3인 가운데 한 아들, 세공생(歲貢生) 등을 서리로 편입시켜 경중(京中)에서 근무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조가 정해진 수대로 각 아문에 나눠 보낸 이외의 인원에 대해서는 이조가 총괄하기 때문에 호조와 병조가 요포(料布)를 지급하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난리가 발생한 뒤인 계사년036) 연간에 서리가 거의 모두 사망한 관계로 요포를 지급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군역을 치르는 자라고 칭하면서 매번 참상(參上)의 요포를 지급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서리의 안적(案籍)을 그저 하리(下吏)의 손에만 맡겨 두기 때문에 경외(京外)의 한량으로서 서리의 차첩을 받아낸 자는 종신토록 한가롭게 놀면서 몇 필의 목면(木綿)만 납부하면 됩니다. 일찍이 이조에서 선임으로 있던 자로서 서리에 등록되어 있는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지만 금단하여 조사해 낼 길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양의사(兩醫司)037) ·관상감·사역원 생도의 경우는 장래성이 있는 자를 택해 생도라 칭하고는 재주를 연마시켜 입사(入仕)케 할 목적으로 군역을 면제해 주고 있는데, 지금은 꾀를 내어 생도의 증명서를 받아 내고는 경외(京外)에서 한가롭게 노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또 경외에서 산대 부장(山臺部將)이라고 칭하면서 한가롭게 노니는 자들도 많습니다.
병조의 병력수를 대개 듣건대, 평시에는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원수(元數)가 18만인데, 봉족(奉足)까지 합치면 거의 50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가 겨우 6만으로 그 중에 집을 떠나 유망(流亡)하는 자들이 많이 있고, 여기에 각색(各色) 군사와 훈련 도감의 초군(哨軍)과 군호(軍戶)의 봉족 등 도합 1만여 명을 제외하면 평시의 9분의 1에도 차지 않는다 하니, 양민이 군역을 도피하는 폐단을 이에 의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기준대로 각읍(各邑)의 군역을 정한다면 필시 소요가 일어날테지만, 그렇다고 옛날대로만 하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훈도·서리·녹사(錄事)·산대 부장의 차첩(差帖)을 손에 넣는 자가 끝이 없게 되어 절대로 폐단이 고쳐지는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산대 부장 하나의 일을 예로 든다면, 한 번 나례(儺禮)를 행할 때마다 번번이 3백 명씩을 차출하는 등 몇 년 동안 무려 1천 명을 배출했습니다. 그런데 군역에 충정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생 동안 한가롭게 놀 수 있는 밑천이 되기 때문에 이 임무에 차출되려고 꾀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한량들입니다. 앞으로 나례를 행할 경우 이미 차출한 부장들이 본래 있는 이상 어찌 매번 새로 차출하여 간악한 술수 중에 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훈도의 경우는 생원이나 진사 외에는 반드시 각읍으로 하여금 초시(初試)에 입격(入格)한 자로서 훈도에 적합한 자를 보거(保擧)038) 하도록 하고, 충순위의 경우는 반드시 그 앞 세대의 승음(承蔭)한 관교(官敎)나 각종 차첩(差帖)들을 조사한 뒤에 봄철과 가을철 양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가 아니면 성급(成給)해 주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리·녹사·삼생(三生)039) 등의 이름이 등록된 장부를 한 본(本)은 본사(本司)에 보관하고, 한 본은 법사(法司)에 보낸 뒤 원액(元額)을 대조하여 간교한 속임수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군역을 도피하는 폐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비변사 및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상의하여 선처하게 하되, 한결같이 《대전(大典)》의 구례(舊例)에 따르도록 할 일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케 하소서. 이와 함께 외방에 행이(行移)하여 불법으로 차첩을 받은 자들을 색출해서 비변사에 보고토록 하고, 그런 다음 각 해사의 원안(元案)과 서로 맞추어 신역(身役)을 정하거나 가포(價布)를 징수해서, 한편으로는 군액(軍額)을 채우고 한편으로는 나라의 용도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폐단이 두절되게 한다면 국가에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이 해방(該房)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기에 황공한 심정으로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 남근이 아뢰기를, "신이 배척당한 대관(臺官)으로서 즉시 인혐했어야 옳은데, 어제 상기증(上氣症)을 앓다가 아침 사이에 조금 나아 이제와서야 피혐하게 되었으니, 잘못이 더욱 커졌습니다.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근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신이 배척당한 대관(臺官)으로서 즉시 인혐했어야 옳은데, 어제 상기증(上氣症)을 앓다가 아침 사이에 조금 나아 이제와서야 피혐하게 되었으니, 잘못이 더욱 커졌습니다.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근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양사에게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3월 2일 신유
예조가 아뢰기를, "친경(親耕)에 따른 별시(別試)를 윤4월 24일에 후원(後苑)에서 행하는 것으로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명묘조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계축년 3월 11일에 친경하시고 12일에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위로하는 주연(酒宴)을 베푸셨으며, 문과(文科)에 대해 출제(出題)하신 다음 모화관(慕華館)으로 거둥하시어 무과(武科)를 친림(親臨)하시고 각각 41인씩 뽑으셨습니다. 대개 친경한 뒤에 인재를 뽑는 선조(先朝)의 규례가 이와 같은데, 전에 별시에 대한 규구(規矩)를 서계(書啓)드릴 때 미처 상고해서 아뢰지 못했기에 감히 추가하여 서계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일체 전례(前例)에 따라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친경(親耕)에 따른 별시(別試)를 윤4월 24일에 후원(後苑)에서 행하는 것으로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명묘조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계축년 3월 11일에 친경하시고 12일에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위로하는 주연(酒宴)을 베푸셨으며, 문과(文科)에 대해 출제(出題)하신 다음 모화관(慕華館)으로 거둥하시어 무과(武科)를 친림(親臨)하시고 각각 41인씩 뽑으셨습니다. 대개 친경한 뒤에 인재를 뽑는 선조(先朝)의 규례가 이와 같은데, 전에 별시에 대한 규구(規矩)를 서계(書啓)드릴 때 미처 상고해서 아뢰지 못했기에 감히 추가하여 서계드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일체 전례(前例)에 따라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친경하고 환궁할 때 좌우의 나례(儺禮)는 보제원(普濟院) 근처에서 영가(迎駕)한 다음, 나례에서 친경에 대해 헌축(獻軸)하는 예행 연습을 세 차례 행하고 나서 그대로 설행(設行)케 하되 내시(內侍)와 승지 그리고 시위하는 장사만 대가(大駕)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친경하고 환궁할 때 좌우의 나례(儺禮)는 보제원(普濟院) 근처에서 영가(迎駕)한 다음, 나례에서 친경에 대해 헌축(獻軸)하는 예행 연습을 세 차례 행하고 나서 그대로 설행(設行)케 하되 내시(內侍)와 승지 그리고 시위하는 장사만 대가(大駕)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 2경(更)에 큰 물이 졸지에 밀어 닥쳐 강 언덕이 모두 물에 잠기는 바람에 낮은 곳에 놔 두었던 재목들이 모두 떠내려가 없어졌기에, 날이 밝은 다음 5계(契)의 방민(坊民)들을 동원하여 배를 타고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만, 밤중에 떠내려간 것은 어떻게 건져 낼 도리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도 경복궁(景福宮)을 영건하는 일이 있었다. 더구나 이 한 그루 나무를 베어 끌고 올 때 민폐가 또한 많았을텐데, 어찌하여 미리 선처하지 못하고 이런 환란을 당하게 했단 말인가. 당해 감역관(監役官)을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지난밤 2경(更)에 큰 물이 졸지에 밀어 닥쳐 강 언덕이 모두 물에 잠기는 바람에 낮은 곳에 놔 두었던 재목들이 모두 떠내려가 없어졌기에, 날이 밝은 다음 5계(契)의 방민(坊民)들을 동원하여 배를 타고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만, 밤중에 떠내려간 것은 어떻게 건져 낼 도리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도 경복궁(景福宮)을 영건하는 일이 있었다. 더구나 이 한 그루 나무를 베어 끌고 올 때 민폐가 또한 많았을텐데, 어찌하여 미리 선처하지 못하고 이런 환란을 당하게 했단 말인가. 당해 감역관(監役官)을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윤두형(尹斗亨)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 전 좌랑 윤영(尹偀)이 정청(庭請)에 불참한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유학 이시척(李時陟)이 상소하여 그의 숙부 이천(李蕆)이 정청에 불참한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전생서 참봉 유산립(柳山立)이 상소하여 자신이 정청에 불참한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유학 황현(黃玹)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 행 사용(行司勇) 황정록(黃庭錄)이 정청에 불참한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3월 3일 임술
전교하였다. "내가 지난해 겨울부터 안질(眼疾)과 감기를 심하게 앓아 몇 번이나 침을 맞았는 데도 증세가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 외에는 어떤 공사(公事)이든 내 병이 좀 덜해질 때까지 조섭할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봉입하지 말도록 하라. 역로(驛路)가 피폐해진 것이나 마관(馬官)040) 이 탐욕스럽게 군 것들에 대해서는, 이를 규핵하는 책임이 본래 감사와 해조에 있다. 그러니 근신(近臣)이 조섭하고 있는 나에게 번거롭게 아뢰어 언관이 인피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다. 선조(先朝)의 경우 침을 맞을 때에는 긴급한 기무(機務)만 제외하고 어떤 공사든지 일체 드나들지 못하게 했었다. 지금 이후로는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급하지 않은 일은 우선 번거롭게 아뢰지 말도록 각별히 살펴서 행하라."
[註 040] 마관(馬官) : 찰방(察訪).
"내가 지난해 겨울부터 안질(眼疾)과 감기를 심하게 앓아 몇 번이나 침을 맞았는 데도 증세가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 외에는 어떤 공사(公事)이든 내 병이 좀 덜해질 때까지 조섭할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봉입하지 말도록 하라. 역로(驛路)가 피폐해진 것이나 마관(馬官)040) 이 탐욕스럽게 군 것들에 대해서는, 이를 규핵하는 책임이 본래 감사와 해조에 있다. 그러니 근신(近臣)이 조섭하고 있는 나에게 번거롭게 아뢰어 언관이 인피하도록 만들 필요는 없다. 선조(先朝)의 경우 침을 맞을 때에는 긴급한 기무(機務)만 제외하고 어떤 공사든지 일체 드나들지 못하게 했었다. 지금 이후로는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급하지 않은 일은 우선 번거롭게 아뢰지 말도록 각별히 살펴서 행하라."
전교하였다. "내가 요즈음 감기를 앓고 있는데, 연일 침을 맞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선 침을 다 맞을 동안만이라도 삼사의 계사와 차자를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도록 하라."
"내가 요즈음 감기를 앓고 있는데, 연일 침을 맞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선 침을 다 맞을 동안만이라도 삼사의 계사와 차자를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내 감기 증세가 중하니 형세상 6일에는 거둥하기가 어렵다. 칙서(敕書)를 지영(祗迎)하는 일은 11일로 물리고 배표(拜表)하는 일은 보름 무렵으로 물려 정하는 일을 모두 일관(日官)에게 문의한 다음 결정해서 부표(付標)하도록 하라."
"내 감기 증세가 중하니 형세상 6일에는 거둥하기가 어렵다. 칙서(敕書)를 지영(祗迎)하는 일은 11일로 물리고 배표(拜表)하는 일은 보름 무렵으로 물려 정하는 일을 모두 일관(日官)에게 문의한 다음 결정해서 부표(付標)하도록 하라."
유학 지차택(池次擇)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극신(李克信) 등이 무력 시위를 하며 흉역(兇逆)을 꾀한 것이 과연 이국헌(李國獻) 등의 고발 내용과 같다면 이는 실로 천하의 대역(大逆)입니다. 이 일을 안 이상 이 일에 끼어든 셈이니, 말의 출처를 자세히 조사하여 뒷날 대답할 여지를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고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존망(存亡)을 함께 해야 할 신하인데, 재신(宰臣)들이 의논을 바칠 때를 당하여 유독 의논을 드리지 않았으니, 그 죄는 정청(庭請)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양사의 관원이 못들은 척하면서 덮어 두고 말하지 않으며, 그저 ‘가난하고 병든 왕족의 먼 후예’라며 책임이나 메우는 식으로 논계하였으니, 일을 엄하지 못하게 논한 양사의 죄를 속히 다스려 인신(人臣)의 대의를 밝히도록 하소서."
"이극신(李克信) 등이 무력 시위를 하며 흉역(兇逆)을 꾀한 것이 과연 이국헌(李國獻) 등의 고발 내용과 같다면 이는 실로 천하의 대역(大逆)입니다. 이 일을 안 이상 이 일에 끼어든 셈이니, 말의 출처를 자세히 조사하여 뒷날 대답할 여지를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고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존망(存亡)을 함께 해야 할 신하인데, 재신(宰臣)들이 의논을 바칠 때를 당하여 유독 의논을 드리지 않았으니, 그 죄는 정청(庭請)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양사의 관원이 못들은 척하면서 덮어 두고 말하지 않으며, 그저 ‘가난하고 병든 왕족의 먼 후예’라며 책임이나 메우는 식으로 논계하였으니, 일을 엄하지 못하게 논한 양사의 죄를 속히 다스려 인신(人臣)의 대의를 밝히도록 하소서."
충의위(忠義衛) 이란(李欄)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이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유학 허박(許博)이 상소하여 그의 조부 허흔(許昕)과 그의 아비 허평(許坪)이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3월 4일 계해
전교하였다. "경성의 장인(匠人)을 찾아내라고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도감의 담당 제조가 전교를 무시한 채 갈수록 사정(私情)만 따르면서, 그저 외방의 졸렬한 공인(工人)만 다그치는 것으로 책임을 떼울 계책을 삼고 있으니 지극히 잘못되었다. 각별히 추고하고 기일 내로 찾아내도록 하라."
"경성의 장인(匠人)을 찾아내라고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도감의 담당 제조가 전교를 무시한 채 갈수록 사정(私情)만 따르면서, 그저 외방의 졸렬한 공인(工人)만 다그치는 것으로 책임을 떼울 계책을 삼고 있으니 지극히 잘못되었다. 각별히 추고하고 기일 내로 찾아내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서로(西路)의 역마(驛馬) 가운데 제대로 달리는 말이 없어 우전(郵傳)이 장차 끊어질 운명에 놓여 있다 하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필시 마관(馬官)을 엄선하지 않아 그가 수탈하는 대로 내맡겨 두어서 빚어진 일이다. 각역(各驛)의 찰방 가운데 탐욕스럽게 구는 자를 상세히 살펴 조사해 아뢰고, 지금 이후로는 역마를 엄선하여 다수 보충하는 동시에 역졸(驛卒)을 극진히 돌보는 일 등을 각별히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평안·황연 감사에게 하유하라."
"서로(西路)의 역마(驛馬) 가운데 제대로 달리는 말이 없어 우전(郵傳)이 장차 끊어질 운명에 놓여 있다 하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필시 마관(馬官)을 엄선하지 않아 그가 수탈하는 대로 내맡겨 두어서 빚어진 일이다. 각역(各驛)의 찰방 가운데 탐욕스럽게 구는 자를 상세히 살펴 조사해 아뢰고, 지금 이후로는 역마를 엄선하여 다수 보충하는 동시에 역졸(驛卒)을 극진히 돌보는 일 등을 각별히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평안·황연 감사에게 하유하라."
전교하였다. "내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니 20일에 친경(親耕)하기로 한 것을 28일로 물려 정하는 것이 어떨지 일관(日官)에게 문의하여 결정하고, 이를 속히 외방에 행회(行會)하라고 예조에 이르라."
"내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니 20일에 친경(親耕)하기로 한 것을 28일로 물려 정하는 것이 어떨지 일관(日官)에게 문의하여 결정하고, 이를 속히 외방에 행회(行會)하라고 예조에 이르라."
3월 5일 갑자
전교하였다. "김내(金琜)의 집터가 비어 있는가? 전후 역적들의 비어 있는 집터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서계(書啓)하라고 한성부에 이르라."
"김내(金琜)의 집터가 비어 있는가? 전후 역적들의 비어 있는 집터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서계(書啓)하라고 한성부에 이르라."
전교하였다. "표범을 잡아 진상한 함중규(咸仲奎)를 가자(加資)하되, 그에 맞는 자급(資級)이 없으면 당상으로 올리라. 장용천(張用天)은 금군(禁軍)에 제수하라."
"표범을 잡아 진상한 함중규(咸仲奎)를 가자(加資)하되, 그에 맞는 자급(資級)이 없으면 당상으로 올리라. 장용천(張用天)은 금군(禁軍)에 제수하라."
전교하였다. "어떤 관직이든 병에 걸린 지 30일이 차면 체차시키는 것이 관례이다. 심륜(沈倫)이 경운궁(慶運宮)의 가위장(假衛將)으로서 병에 걸린 것으로 기록되어 서계(書啓)로 올라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처치하지 않는 것인지 놀랍기 그지없다. 해조에 문의하라."
"어떤 관직이든 병에 걸린 지 30일이 차면 체차시키는 것이 관례이다. 심륜(沈倫)이 경운궁(慶運宮)의 가위장(假衛將)으로서 병에 걸린 것으로 기록되어 서계(書啓)로 올라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처치하지 않는 것인지 놀랍기 그지없다. 해조에 문의하라."
전교하였다. "대내(大內)에 요괴스러운 변고가 날로 심해지고 있으므로, 전후에 걸쳐 도감에 하교한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고, 안에서도 늘 차지 중사(次知中使)를 신칙하고 있다. 그런데 도감의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지는 가운데 군장(軍匠)이 부족하여 세월만 보내는 식으로 날짜를 허비하고 있기 때문에, 공사를 끝낼 기약이 막연하기만 하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제조(提調)의 수도 많은데 오히려 창경궁(昌慶宮)을 영건(營建)할 때보다도 못하다. 그리고 가령 대수롭지 않은 공사(公事)의 수결(手決)도 제조가 반드시 직접 관장하기 때문에 일이 많이 지체되곤 하는데, 이 또한 전례(前例)가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근무에 충실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검칙을 하고 공사 감독이나 수결 등의 일은 도청(都廳)에게 전담시켜 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날 나와야 할 제조에게 혹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곧바로 대리자가 나와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대내(大內)에 요괴스러운 변고가 날로 심해지고 있으므로, 전후에 걸쳐 도감에 하교한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고, 안에서도 늘 차지 중사(次知中使)를 신칙하고 있다. 그런데 도감의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지는 가운데 군장(軍匠)이 부족하여 세월만 보내는 식으로 날짜를 허비하고 있기 때문에, 공사를 끝낼 기약이 막연하기만 하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제조(提調)의 수도 많은데 오히려 창경궁(昌慶宮)을 영건(營建)할 때보다도 못하다. 그리고 가령 대수롭지 않은 공사(公事)의 수결(手決)도 제조가 반드시 직접 관장하기 때문에 일이 많이 지체되곤 하는데, 이 또한 전례(前例)가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근무에 충실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검칙을 하고 공사 감독이나 수결 등의 일은 도청(都廳)에게 전담시켜 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날 나와야 할 제조에게 혹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곧바로 대리자가 나와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형조의 계목(啓目)에, "남부(南部) 왜관동(倭館洞) 계원(契員) 25인 및 아랫 동네의 계원인 하윤(河允) 등 20명이 연명(聯名)한 등장(等狀)의 내용에 의하면, 그 동네에 사는 사노(私奴) 수남(水男)이 지난달 그믐날 자기 아비집에 돌입해서는 못할 말없이 아비에게 욕을 하다가 긴 몽둥이를 들고 때리기까지 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말리자 ‘내가 죽여버려야겠다.’ 하고는 이윽고 큰 돌을 들어 내리치려 하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간신히 저지시켰는데, 그때 한 마을에 사는 사대부 중에도 눈으로 본 자가 있다고 하며, 수남의 상전인 직강 채승선(蔡承先)은 동리 안의 유사(有司)에게 통서(通書)하기를 ‘이 놈이 작년에는 제 어미를 때리더니 이번에는 또 제 아비를 때렸다. 이런 큰 죄를 지었으니 부대시(不待時)로 죽여야 마땅하다.’ 하였다 합니다. 수남의 죄가 강상(綱常)과 관계 있는 이상 본조에서 추치(推治)하기가 어려우니, 의금부로 이송하여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남부(南部) 왜관동(倭館洞) 계원(契員) 25인 및 아랫 동네의 계원인 하윤(河允) 등 20명이 연명(聯名)한 등장(等狀)의 내용에 의하면, 그 동네에 사는 사노(私奴) 수남(水男)이 지난달 그믐날 자기 아비집에 돌입해서는 못할 말없이 아비에게 욕을 하다가 긴 몽둥이를 들고 때리기까지 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말리자 ‘내가 죽여버려야겠다.’ 하고는 이윽고 큰 돌을 들어 내리치려 하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간신히 저지시켰는데, 그때 한 마을에 사는 사대부 중에도 눈으로 본 자가 있다고 하며, 수남의 상전인 직강 채승선(蔡承先)은 동리 안의 유사(有司)에게 통서(通書)하기를 ‘이 놈이 작년에는 제 어미를 때리더니 이번에는 또 제 아비를 때렸다. 이런 큰 죄를 지었으니 부대시(不待時)로 죽여야 마땅하다.’ 하였다 합니다. 수남의 죄가 강상(綱常)과 관계 있는 이상 본조에서 추치(推治)하기가 어려우니, 의금부로 이송하여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호조의 계목에, "풍저창(豊儲倉) 하인 등이 공문(公文)을 위조해서 쌀을 가마니로 다수 받아내 공공연히 훔쳐 먹는 것을 적발하여 본조에서 각 사람을 수금(囚禁)하였는데, 색리(色吏) 김엇손[金於叱孫]이 탈옥하여 도주하였습니다. 당해 관원을 추고하고 김엇손을 급히 뒤따라 가 체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옥관(獄官)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풍저창(豊儲倉) 하인 등이 공문(公文)을 위조해서 쌀을 가마니로 다수 받아내 공공연히 훔쳐 먹는 것을 적발하여 본조에서 각 사람을 수금(囚禁)하였는데, 색리(色吏) 김엇손[金於叱孫]이 탈옥하여 도주하였습니다. 당해 관원을 추고하고 김엇손을 급히 뒤따라 가 체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옥관(獄官)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금부가 올린 문희현(文希賢)의 원정 공사(元情公事)에 대해 판부하기를, "문희현이 죄를 받아 정배(定配)되었는데, 감사와 병사가 어떻게 감히 그를 군관(軍官)과 별장(別將)으로 삼아 호인(胡人)을 접하게 한단 말인가. 일이 지극히 놀랍다. 전후의 감사와 병사 가운데 생존해 있는 자는 모두 추고하고 죄를 다스리라. 그리고 문희현은 정배된 사람으로서 흔단을 일으킨 일에 대해 엄히 국문하여 사실을 캐 내도록 하라." 하였다. 【문희현이 경성(鏡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가 여진어(女眞語)를 잘하자 병사가 회령(會寧)에 통상하러 온 호인(胡人)을 만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가 귀인(貴人)이 아닌가 하고 호인이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희현에게 글을 보내면서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글에서, 상국(上國)이 자기 조부(祖父)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어 왔다는 것과,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조선이 불쌍히 여겨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을 두루 말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병사로 하여금 ‘문희현 등은 전 병사의 군관으로서 지금은 이미 서울에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편지를 돌려 주도록 하는 동시에 희현을 잡아와 신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누루하치는 실제로 중국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문희현이 죄를 받아 정배(定配)되었는데, 감사와 병사가 어떻게 감히 그를 군관(軍官)과 별장(別將)으로 삼아 호인(胡人)을 접하게 한단 말인가. 일이 지극히 놀랍다. 전후의 감사와 병사 가운데 생존해 있는 자는 모두 추고하고 죄를 다스리라. 그리고 문희현은 정배된 사람으로서 흔단을 일으킨 일에 대해 엄히 국문하여 사실을 캐 내도록 하라."
하였다. 【문희현이 경성(鏡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가 여진어(女眞語)를 잘하자 병사가 회령(會寧)에 통상하러 온 호인(胡人)을 만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가 귀인(貴人)이 아닌가 하고 호인이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희현에게 글을 보내면서 선생(先生)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글에서, 상국(上國)이 자기 조부(祖父)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어 왔다는 것과,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조선이 불쌍히 여겨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을 두루 말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병사로 하여금 ‘문희현 등은 전 병사의 군관으로서 지금은 이미 서울에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편지를 돌려 주도록 하는 동시에 희현을 잡아와 신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누루하치는 실제로 중국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3월 6일 을축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내자시의 여종 난향(蘭香)이 정철(正鐵) 1천 근을, 덕천감(德川監) 이인제(李麟蹄)와 해원감(海原監) 이춘(李椿)이 각각 신철(薪鐵) 1천 근을, 홍인남(洪仁男)이 정철 6백 근을, 역관 변기(邊基)와 연성령(延城令) 이충원(李忠元)과 전 군수 신성(申晟)이 정철 3백 근을 바치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지 만호(草芝萬戶) 오계일(吳繼一)이 신철 1천 근을 올려 보내겠다고 글로 보고하였는데, 임길후(任吉後)와 배홍록(裵弘祿)의 예에 따라 받아 쓰도록 하되, 본포(本浦)는 경기 지방의 지극히 잔폐된 포구이니, 관력(官力)을 허비하지 말고 편의대로 조치해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큰 공사가 진행되는 날을 당하여 국가에 성의를 다하고 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덕천감·해원감·오계일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신성·홍인남은 가자하고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연성령은 가자하고 도정(都正)을 제수하라. 변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논상하라." 하였다.
"내자시의 여종 난향(蘭香)이 정철(正鐵) 1천 근을, 덕천감(德川監) 이인제(李麟蹄)와 해원감(海原監) 이춘(李椿)이 각각 신철(薪鐵) 1천 근을, 홍인남(洪仁男)이 정철 6백 근을, 역관 변기(邊基)와 연성령(延城令) 이충원(李忠元)과 전 군수 신성(申晟)이 정철 3백 근을 바치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지 만호(草芝萬戶) 오계일(吳繼一)이 신철 1천 근을 올려 보내겠다고 글로 보고하였는데, 임길후(任吉後)와 배홍록(裵弘祿)의 예에 따라 받아 쓰도록 하되, 본포(本浦)는 경기 지방의 지극히 잔폐된 포구이니, 관력(官力)을 허비하지 말고 편의대로 조치해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큰 공사가 진행되는 날을 당하여 국가에 성의를 다하고 있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덕천감·해원감·오계일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신성·홍인남은 가자하고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연성령은 가자하고 도정(都正)을 제수하라. 변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논상하라."
하였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운림수(雲林守) 이종윤(李宗胤)이 계석(階石)과 주초(柱礎) 합계 2백 개를, 철산 부령(鐵山副令) 이종윤(李終胤)이 계석과 주초 도합 1백 20개를, 위성령(渭城令) 이효민(李孝閔)이 계석과 주초도합 2백 5개를 바치고 싶다 하는데, 예에 따라 받아 썼으면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운림수는 가자하라. 위성령은 가자하고 도정을 제수하라. 철산 부령은 정직(正職)으로 승진시켜 제수하라." 하였다.
"운림수(雲林守) 이종윤(李宗胤)이 계석(階石)과 주초(柱礎) 합계 2백 개를, 철산 부령(鐵山副令) 이종윤(李終胤)이 계석과 주초 도합 1백 20개를, 위성령(渭城令) 이효민(李孝閔)이 계석과 주초도합 2백 5개를 바치고 싶다 하는데, 예에 따라 받아 썼으면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운림수는 가자하라. 위성령은 가자하고 도정을 제수하라. 철산 부령은 정직(正職)으로 승진시켜 제수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전에 법궁(法宮)을 영건(營建)할 때는 재목 하나도 소중히 여겼었다. 그리고 베어서 끌고 오느라 백성들에게 피해를 너무도 많이 끼쳤다. 대내(大內)에 일이 생겨 부득불 새 궁궐을 영건하게 되었으나, 늘 백성의 고초를 생각하면서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영건 도감은 이런 뜻을 몸받지 못하고 검찰(檢察)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벌목(伐木)의 임무를 맡은 관원조차 태만하여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는데, 관동(關東)에서 올라 올 재목이 이번에 봄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바람에 모조리 떠내려 가 없어졌다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이런 걱정거리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관동에 내려간 감역관(監役官) 및 당해 지방의 수령을 먼저 각별히 추고하고, 떠내려갔는지의 여부에 대해 본도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치계토록 하라. 그리고 도감에서도 곧바로 각도(各道)에 내려가 벌목의 일을 맡고 있는 관원에게 상세히 행회(行會)하여 지금 이후로는 철저히 마음을 쏟아 임무를 수행케 함으로써 이와 같은 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개 본 도감의 일을 보건대,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져 모양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전일 영건할 때와 너무나도 달라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다시 더 마음을 다 쏟아 살펴 처리하고 날마다 새롭게 독려하며 감독함으로써 해이해진 습관을 바로잡아 착실히 거행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전에 법궁(法宮)을 영건(營建)할 때는 재목 하나도 소중히 여겼었다. 그리고 베어서 끌고 오느라 백성들에게 피해를 너무도 많이 끼쳤다. 대내(大內)에 일이 생겨 부득불 새 궁궐을 영건하게 되었으나, 늘 백성의 고초를 생각하면서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영건 도감은 이런 뜻을 몸받지 못하고 검찰(檢察)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벌목(伐木)의 임무를 맡은 관원조차 태만하여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는데, 관동(關東)에서 올라 올 재목이 이번에 봄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바람에 모조리 떠내려 가 없어졌다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이런 걱정거리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관동에 내려간 감역관(監役官) 및 당해 지방의 수령을 먼저 각별히 추고하고, 떠내려갔는지의 여부에 대해 본도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치계토록 하라. 그리고 도감에서도 곧바로 각도(各道)에 내려가 벌목의 일을 맡고 있는 관원에게 상세히 행회(行會)하여 지금 이후로는 철저히 마음을 쏟아 임무를 수행케 함으로써 이와 같은 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개 본 도감의 일을 보건대,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져 모양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전일 영건할 때와 너무나도 달라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다시 더 마음을 다 쏟아 살펴 처리하고 날마다 새롭게 독려하며 감독함으로써 해이해진 습관을 바로잡아 착실히 거행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공홍 감사가 서목(書目)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원(西原)041) 의 김수덕(金粹德)이 인신(印信)을 위조한 것을 적발하였습니다. 인신과 공문(公文)을 감봉(監封)042) 하여 올려 보냅니다."
[註 041] 서원(西原) : 청주(淸州).[註 042] 감봉(監封) : 내용을 감사하여 봉인하는 것.
"서원(西原)041) 의 김수덕(金粹德)이 인신(印信)을 위조한 것을 적발하였습니다. 인신과 공문(公文)을 감봉(監封)042) 하여 올려 보냅니다."
전교하였다. "친잠(親蠶)할 날짜를 4월 29일로 물려 정하라.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을 윤달에 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니, 5월 3일이 어떤지 일관(日官)에게 물어본 뒤에 개정하여 부표(付標)하고 팔방(八方)에 하유토록 하라."
"친잠(親蠶)할 날짜를 4월 29일로 물려 정하라.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을 윤달에 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니, 5월 3일이 어떤지 일관(日官)에게 물어본 뒤에 개정하여 부표(付標)하고 팔방(八方)에 하유토록 하라."
3월 7일 병인
병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친경(親耕)하는 대례(大禮)를 행할 때 호위(扈衛)하는 일들을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복병장(伏兵將)·척후장(斥候將)·고훤장(考喧將)043) 역시 많은 수를 조발(調發)해 써야 하는데, 시임(時任) 무신만으로는 태반이 부족합니다. 경중(京中)·경기·개성부(開城府)·황해·강원·공홍도 등의 당상·당하 가운데 한산(閑散)한 무신들을 모두 기일에 맞춰 올라오게 하고, 수원(水原)·강화(江華) 두 부(府)에 소속된 군병들에게 각자 포장(布帳)을 지니게 한 다음, 겸방어사(兼防禦使)와 부사로 하여금 직접 인솔해 와 호위를 엄하게 할 일을 미리 파발마로 알려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수원 부사는 경기 수령으로서 친경할 때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논두렁 사이에 서 있게 될 텐데, 그때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는 일을 어떤 사람에게 대행케 할 것인지 다시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註 043] 고훤장(考喧將) : 임금의 거둥 때 소란을 금지시키는 장수.
"이번에 친경(親耕)하는 대례(大禮)를 행할 때 호위(扈衛)하는 일들을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복병장(伏兵將)·척후장(斥候將)·고훤장(考喧將)043) 역시 많은 수를 조발(調發)해 써야 하는데, 시임(時任) 무신만으로는 태반이 부족합니다. 경중(京中)·경기·개성부(開城府)·황해·강원·공홍도 등의 당상·당하 가운데 한산(閑散)한 무신들을 모두 기일에 맞춰 올라오게 하고, 수원(水原)·강화(江華) 두 부(府)에 소속된 군병들에게 각자 포장(布帳)을 지니게 한 다음, 겸방어사(兼防禦使)와 부사로 하여금 직접 인솔해 와 호위를 엄하게 할 일을 미리 파발마로 알려야 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수원 부사는 경기 수령으로서 친경할 때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논두렁 사이에 서 있게 될 텐데, 그때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는 일을 어떤 사람에게 대행케 할 것인지 다시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행 사맹(行司猛) 이여해(李汝諧)가 상소하여, 급히 주청사(奏請使)를 보내 선후 본말에 대해 광명 정대하게 진주(陳奏)하게 함으로써 화근을 제거하고 인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행 동지(行同知) 심돈(沈惇)이 상차하여 재목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을 대책에 대하여 진달하니, 답하기를, "요즘 들어 도감의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지고 있는데, 심지어는 낭청과 감역관이 더욱 태만하여 강에 나가 수직(守直)도 하지 않은 나머지, 야간에 재목이 떠내려가는 결과를 빚었으므로 부득불 추고하여 경계하고 단속시킨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다시 더 마음을 쏟아 미리부터 선처해 둠으로써 또 이런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차자를 도감에 내려 좋은 방향으로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요즘 들어 도감의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지고 있는데, 심지어는 낭청과 감역관이 더욱 태만하여 강에 나가 수직(守直)도 하지 않은 나머지, 야간에 재목이 떠내려가는 결과를 빚었으므로 부득불 추고하여 경계하고 단속시킨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다시 더 마음을 쏟아 미리부터 선처해 둠으로써 또 이런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차자를 도감에 내려 좋은 방향으로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이영(李泳)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 평림수(平林守) 이지윤(李祉胤)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유학 임선백(任善伯)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 임장(任章)이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3월 8일 정묘
전교하였다. "근일 날짜별로 공상(供上)하는 생물(生物)을 보건대, 빛깔이 나쁘고 부패하여 사람이 입을 댈 수도 없을 정도이다. 사옹원의 색관원을 각별히 추고하라."
"근일 날짜별로 공상(供上)하는 생물(生物)을 보건대, 빛깔이 나쁘고 부패하여 사람이 입을 댈 수도 없을 정도이다. 사옹원의 색관원을 각별히 추고하라."
전교하였다. "위에서 다시 침을 맞으면서까지 억지로라도 11일에 거둥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안질(眼疾)이 지금까지 낫지 않아 부득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침을 맞아야 할 형편이니, 칙서(敕書)를 지영하는 일은 보름 무렵으로 날짜를 물려 정하라고 해조에 이르라."
"위에서 다시 침을 맞으면서까지 억지로라도 11일에 거둥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안질(眼疾)이 지금까지 낫지 않아 부득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침을 맞아야 할 형편이니, 칙서(敕書)를 지영하는 일은 보름 무렵으로 날짜를 물려 정하라고 해조에 이르라."
전교하였다. "근일 오랫동안 추국을 정지했는데, 병이 있는 죄인을 자세히 살펴 우선 보방(保放)하라."
"근일 오랫동안 추국을 정지했는데, 병이 있는 죄인을 자세히 살펴 우선 보방(保放)하라."
이조의 계목에, "경상 감사의 서장(書狀)에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홍사(李弘嗣)의 임기가 만료될 날짜가 임박했는데, 백성들이 아무리 유임시켜 주기를 원해도 개만법(箇滿法)을 또한 어길 수는 없다. 다만 방백(方伯)인 신하의 생각으로는 다른 포상(褒賞)을 행하여 백성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싶다.’고 하였는데, 이는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재결(裁決)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금년을 기한으로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의 서장(書狀)에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홍사(李弘嗣)의 임기가 만료될 날짜가 임박했는데, 백성들이 아무리 유임시켜 주기를 원해도 개만법(箇滿法)을 또한 어길 수는 없다. 다만 방백(方伯)인 신하의 생각으로는 다른 포상(褒賞)을 행하여 백성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싶다.’고 하였는데, 이는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일이니 상께서 재결(裁決)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금년을 기한으로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서궁(西宮)에 공상(供上)하는 종이 및 황밀(黃蜜)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進排)하지 않고 있다 하는데, 여기에는 필시 중간에서 외람되게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
"서궁(西宮)에 공상(供上)하는 종이 및 황밀(黃蜜)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進排)하지 않고 있다 하는데, 여기에는 필시 중간에서 외람되게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
요동 도사가 자문을 보냈는데, 그 자문은 다음과 같다. "흠차 요동 진강 등처 지방 유격 장군 도지휘사(欽差遼東鎭江等處地方遊擊將軍都指揮使) 구(丘)는 억울하게 무함당한 것이 통쾌히 해명된 일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 조선 국왕의 자문(咨文)을 보건대, 이 일에 대한 의정부의 장계를 의거한 것이었는데 본부(本府)에 도착한 것을 잘 받았습니다. 살펴보건대 근래 일어난 일은 본디 어리석은 백성들의 유언비어와 관계된 것으로서, 해(該) 본부에서 전후에 걸쳐 공문을 보내 모두 분명하게 해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극신(李克信)이 본부에서 보낸 표문(票文)의 내용대로 준수하여 즉각 와붕(窩棚)을 철거하고 병마(兵馬)를 철수시켜 돌아갔으므로 본부에서 역시 포정(布政) 아문에 보고하였습니다. 경솔하게 행동한 잘못이 극신에게 있는데, 귀국에서 충성스럽게 따르며 정성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본부가 낱낱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각 상사(上司)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양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에 관한 자문을 받고 추원(推院)·포도(布道) 등 각 아문에 앞으로 물론 보고해 알리려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즉각 배신(陪臣) 남명우(南溟羽)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자문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축성(築城)하는 한 조목은, 해 본부가 41년044) 부임했던 초기에 곧장 ‘성이 작아서 백성을 보호하고 무리를 수용할 수가 없으니 한 번 확장했으면 한다.’ 하였는데 이제 추원의 허락을 받아 공사를 벌이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귀국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문에 회답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이렇게 자문을 갖고 가게 하니 귀국은 살펴 시행하십시오."
[註 044] 41년 : 1613 만력 41년.
"흠차 요동 진강 등처 지방 유격 장군 도지휘사(欽差遼東鎭江等處地方遊擊將軍都指揮使) 구(丘)는 억울하게 무함당한 것이 통쾌히 해명된 일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
조선 국왕의 자문(咨文)을 보건대, 이 일에 대한 의정부의 장계를 의거한 것이었는데 본부(本府)에 도착한 것을 잘 받았습니다.
살펴보건대 근래 일어난 일은 본디 어리석은 백성들의 유언비어와 관계된 것으로서, 해(該) 본부에서 전후에 걸쳐 공문을 보내 모두 분명하게 해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극신(李克信)이 본부에서 보낸 표문(票文)의 내용대로 준수하여 즉각 와붕(窩棚)을 철거하고 병마(兵馬)를 철수시켜 돌아갔으므로 본부에서 역시 포정(布政) 아문에 보고하였습니다. 경솔하게 행동한 잘못이 극신에게 있는데, 귀국에서 충성스럽게 따르며 정성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본부가 낱낱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각 상사(上司)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양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에 관한 자문을 받고 추원(推院)·포도(布道) 등 각 아문에 앞으로 물론 보고해 알리려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즉각 배신(陪臣) 남명우(南溟羽)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자문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축성(築城)하는 한 조목은, 해 본부가 41년044) 부임했던 초기에 곧장 ‘성이 작아서 백성을 보호하고 무리를 수용할 수가 없으니 한 번 확장했으면 한다.’ 하였는데 이제 추원의 허락을 받아 공사를 벌이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귀국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문에 회답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이렇게 자문을 갖고 가게 하니 귀국은 살펴 시행하십시오."
3월 9일 무진
전교하였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분총관(分總管)이 직접 대면하여 교대하지도 않고 지레 앞서서 나간단 말인가. 민형(閔泂)과 입직(入直)했어야 할 관원을 모두 추고하고 치죄하라. 그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다른 분총관을 입직시키도록 하라."
"지금이 어느 때인데 분총관(分總管)이 직접 대면하여 교대하지도 않고 지레 앞서서 나간단 말인가. 민형(閔泂)과 입직(入直)했어야 할 관원을 모두 추고하고 치죄하라. 그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다른 분총관을 입직시키도록 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경운궁(慶運宮)의 총관(總管)·위장(衛將) 등 관원은 빈 자리가 나는 대로 메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전일 분총관 김개(金闓)가 새로 제수된 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는 소에서, 인신(人臣)으로서 그 일에 복무할 수 없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로 인해 체직되자 뭇 사람들이 ‘이후로는 분사(分司)에 궐원이 생겨도 차출하기가 어렵겠다.’고 여겼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일찍이 차출된 관원들이야 혹 그대로 그 임무를 살피게 한다 하더라도, 병이 들거나 탈이 생긴 관원들까지 일일이 본래대로 차임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지는데, 심륜(沈倫)을 제때에 처치하지 못한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황공한 심정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병든 날수가 찬 관원을 본래대로 차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로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경운궁(慶運宮)의 총관(總管)·위장(衛將) 등 관원은 빈 자리가 나는 대로 메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전일 분총관 김개(金闓)가 새로 제수된 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는 소에서, 인신(人臣)으로서 그 일에 복무할 수 없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로 인해 체직되자 뭇 사람들이 ‘이후로는 분사(分司)에 궐원이 생겨도 차출하기가 어렵겠다.’고 여겼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일찍이 차출된 관원들이야 혹 그대로 그 임무를 살피게 한다 하더라도, 병이 들거나 탈이 생긴 관원들까지 일일이 본래대로 차임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지는데, 심륜(沈倫)을 제때에 처치하지 못한 것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황공한 심정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병든 날수가 찬 관원을 본래대로 차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로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도(賊徒)를 체포한 수령 및 중군(中軍) 이하를 개록(開錄)045) 하여 장계하였으니, 논상(論賞)토록 계품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각 사람이 어떻게 체포했으며 공로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토포사(討捕使)가 혹 자세히 알지 못하는 듯도 싶고, 공홍 감사의 장계에 부표(付標)된 수령 역시 이런 점이 거론되지 않았으니, 상세하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라고 3도 감사에게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유비(柳斐)와 조찬한(趙纘韓)은 우선 가자(加資)하고, 기타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상세하게 계문하게 한 뒤에 차례로 시상하라." 하였다.
[註 045] 개록(開錄) : 아뢰는 문서 끝에 열거하는 것.
"적도(賊徒)를 체포한 수령 및 중군(中軍) 이하를 개록(開錄)045) 하여 장계하였으니, 논상(論賞)토록 계품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각 사람이 어떻게 체포했으며 공로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토포사(討捕使)가 혹 자세히 알지 못하는 듯도 싶고, 공홍 감사의 장계에 부표(付標)된 수령 역시 이런 점이 거론되지 않았으니, 상세하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라고 3도 감사에게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유비(柳斐)와 조찬한(趙纘韓)은 우선 가자(加資)하고, 기타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상세하게 계문하게 한 뒤에 차례로 시상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공홍 수사(公洪水使) 신경징(申景澄) 등이 해적선을 통째로 잡았습니다. 각 사람이 해적을 소탕한 공로에 상으로 보답하는 일은 은명(恩命)에 관계되는 만큼 상께서 재결(裁決)하시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신경징은 가자하고 나머지는 예에 비추어 논상하라." 하였다.
"공홍 수사(公洪水使) 신경징(申景澄) 등이 해적선을 통째로 잡았습니다. 각 사람이 해적을 소탕한 공로에 상으로 보답하는 일은 은명(恩命)에 관계되는 만큼 상께서 재결(裁決)하시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신경징은 가자하고 나머지는 예에 비추어 논상하라."
하였다.
3월 10일 기사
사간 신광업(辛光業)이 아뢰기를, "이렇듯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날을 당하여 감히 피혐하는 거조를 취하는 것이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인 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마는, 진정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와 관계가 있는 일이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전하께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8일자 조보(朝報)를 보건대 ‘서궁(西宮)에 공상(供上)하는 종이 및 황밀(黃蜜)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進排)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고 분부하셨는데, 당초 바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해조가 알아서 처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궁의 죄악을 보건대 신민(臣民)의 처지에 끊어 버려야 할 존재로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인데, 폐출하기를 청해도 윤허를 받지 못했을 뿐더러, 절목(節目)을 아뢴 것조차 아직 선뜻 판하(判下)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이의(異議)가 마구 생겨나고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거꾸로 진배(進排)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어떻게 이다지도 전일과 다름없이 공물을 바치도록 채근하신단 말입니까. 이에 보고 듣는 자들이 놀라고 의혹하며 시비가 혼란스럽게 된 결과, 저쪽 편을 드는 자들은 박수를 치는 반면, 정론(正論)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가 꺾이고 군신(君臣)의 대의가 밝혀지려 하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으니 언책(言責)을 담당한 관원이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언지(言地)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침묵 속에 세월을 보내며 그저 삿된 패거리들이 조소하는 것이나 보게 된만큼 구차하게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데, 마침 병에 걸린 탓으로 즉시 인피하지 못했으니, 신의 잘못이 이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업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렇듯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날을 당하여 감히 피혐하는 거조를 취하는 것이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인 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마는, 진정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와 관계가 있는 일이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전하께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삼가 8일자 조보(朝報)를 보건대 ‘서궁(西宮)에 공상(供上)하는 종이 및 황밀(黃蜜)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進排)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고 분부하셨는데, 당초 바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해조가 알아서 처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궁의 죄악을 보건대 신민(臣民)의 처지에 끊어 버려야 할 존재로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인데, 폐출하기를 청해도 윤허를 받지 못했을 뿐더러, 절목(節目)을 아뢴 것조차 아직 선뜻 판하(判下)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이의(異議)가 마구 생겨나고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거꾸로 진배(進排)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어떻게 이다지도 전일과 다름없이 공물을 바치도록 채근하신단 말입니까. 이에 보고 듣는 자들이 놀라고 의혹하며 시비가 혼란스럽게 된 결과, 저쪽 편을 드는 자들은 박수를 치는 반면, 정론(正論)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가 꺾이고 군신(君臣)의 대의가 밝혀지려 하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으니 언책(言責)을 담당한 관원이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언지(言地)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침묵 속에 세월을 보내며 그저 삿된 패거리들이 조소하는 것이나 보게 된만큼 구차하게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데, 마침 병에 걸린 탓으로 즉시 인피하지 못했으니, 신의 잘못이 이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광업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윤인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서궁에 공상하는 종이 및 황밀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는 분부를 보고는 즉시 진달하려 하였습니다만, 마침 상께서 침을 맞으시는 날이기에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전하를 감히 번거롭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동료가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신의 잘못이 드러났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인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신이 삼가 ‘서궁에 공상하는 종이 및 황밀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는 분부를 보고는 즉시 진달하려 하였습니다만, 마침 상께서 침을 맞으시는 날이기에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전하를 감히 번거롭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동료가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신의 잘못이 드러났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인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1일 경오
전교하였다. "불행히 내가 질병에 걸린 탓에 칙서(敕書)를 지영하는 일을 여러 차례나 물렸으므로, 늘 안타깝게 걱정해 왔다. 그런데 근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칙서 등 물건을 보관해 둔 것에 대하여 불을 금하고 잘 지키도록 하는 일 등을 철저히 경계시키라고 사신에게 하유하라."
"불행히 내가 질병에 걸린 탓에 칙서(敕書)를 지영하는 일을 여러 차례나 물렸으므로, 늘 안타깝게 걱정해 왔다. 그런데 근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칙서 등 물건을 보관해 둔 것에 대하여 불을 금하고 잘 지키도록 하는 일 등을 철저히 경계시키라고 사신에게 하유하라."
헌납 박종주, 정언 이원여·서국정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이달 8일에 내리신 분부를 보건대 ‘서궁에 공상하는 종이 및 황밀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이 일로 인피한 것은 대체로 해사(該司)가 이 분부 때문에 더욱 충실하게 진배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동시에, 절목을 오래도록 판하하시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도 ‘대론(大論)이 귀일된 뒤에 도당(都堂)에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일일이 계품했으니, 즉시 판하하시어 한 나라의 신민으로 하여금 원수를 섬기는 부끄러운 감정을 하나도 느끼지 않게끔 했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절목을 판하하시는 일을 오늘까지 지체하고 계시는 데도, 요즘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탓으로 다시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못했으니, 신들이 너무나도 직분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종주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신들이 삼가 이달 8일에 내리신 분부를 보건대 ‘서궁에 공상하는 종이 및 황밀을 몇 년 동안이나 진배하지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이 일로 인피한 것은 대체로 해사(該司)가 이 분부 때문에 더욱 충실하게 진배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동시에, 절목을 오래도록 판하하시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도 ‘대론(大論)이 귀일된 뒤에 도당(都堂)에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일일이 계품했으니, 즉시 판하하시어 한 나라의 신민으로 하여금 원수를 섬기는 부끄러운 감정을 하나도 느끼지 않게끔 했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절목을 판하하시는 일을 오늘까지 지체하고 계시는 데도, 요즘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탓으로 다시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못했으니, 신들이 너무나도 직분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종주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생원(生員) 이국량(李國亮)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목이 아직 판하되지 않아 인심이 흉흉한데, 위망(危亡)의 환란이 아침 저녁으로 박두해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가 기꺼이 맞서서 쟁집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사간 신광업(辛光業)만은 이것을 가지고 인피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어 간악한 무리들의 흉역스러운 꾀를 잠재우시고, 이와 함께 주문(奏文)을 올리고 폐출하시어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소서."
"절목이 아직 판하되지 않아 인심이 흉흉한데, 위망(危亡)의 환란이 아침 저녁으로 박두해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가 기꺼이 맞서서 쟁집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사간 신광업(辛光業)만은 이것을 가지고 인피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어 간악한 무리들의 흉역스러운 꾀를 잠재우시고, 이와 함께 주문(奏文)을 올리고 폐출하시어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소서."
대사헌 남근, 집의 임건, 장령 한영·강수, 지평 이중계·신칙이 아뢰기를, "어제 사간 신광업이 인피한 연고로 대사간 윤인이 잇달아 물러갔으며, 오늘은 헌납 박종주와 정언 이원여·서국정이 한꺼번에 모두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양사는 일체(一體)인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구차하게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근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어제 사간 신광업이 인피한 연고로 대사간 윤인이 잇달아 물러갔으며, 오늘은 헌납 박종주와 정언 이원여·서국정이 한꺼번에 모두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양사는 일체(一體)인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구차하게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남근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유학 이훤(李萱)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에 대한 절목(節目)을 오래도록 판하하지 않고 계시는 데도 삼사에서는 쟁집하지 않은 채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궤와 김원량을 보방했다 하는데, 이런 역적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까. 먼저 금부 당상이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며, 이어 원궤 등을 구속하여 엄히 국문해서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서궁(西宮)에 대한 절목(節目)을 오래도록 판하하지 않고 계시는 데도 삼사에서는 쟁집하지 않은 채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궤와 김원량을 보방했다 하는데, 이런 역적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까. 먼저 금부 당상이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며, 이어 원궤 등을 구속하여 엄히 국문해서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홍문관이 상차하여 양사 모두에게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3월 12일 신미
전교하였다. "날씨가 이러하니 친경(親耕) 예행 연습을 보름쯤으로 날짜를 미뤄 행하도록 하라."
"날씨가 이러하니 친경(親耕) 예행 연습을 보름쯤으로 날짜를 미뤄 행하도록 하라."
양사가 합계하기를, "전일 정청(庭請)한 것은 실로 충성심을 떨쳐 역적을 토벌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소 신민들이 꾀하지 않고도 같은 말을 하면서 피 끓는 정성으로 소를 올려 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관 중에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감히 다른 마음을 품고서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고, 혹은 의논드릴 때 저쪽 편을 든 자도 있는데,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어떤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창연(鄭昌衍)은 왕실과 가까운 친척으로서 대신의 지위에 오른 만큼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묘 사직과 군부(君父)의 위급함이 호흡간에 박두했는 데도 그는 감히 서궁을 남몰래 보호하려는 계책을 행하면서 뒷날 복을 받으려고 도모하였습니다. 당초 유소(儒疏)를 내리셨을 때 예관(禮官)이 가지고 가서 의논하자 병이 중하여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한 글자도 뜯어 보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의논을 거둘 때 낭청이 여러 차례 청하자 문을 닫아 걸고는 성 내어 욕하면서 끝내 써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론(邪論)을 주창하고 그 아들과 조카를 미혹시키면서 저쪽 편의 우두머리가 기꺼이 되었는데, 대론(大論)이 이미 정해져 백관이 정청을 하기에 이르자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는가 하면, 달을 넘겨 가며 복합 상소(伏閤上疏)를 올렸을 때에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매부 김극효(金克孝)가 죽었을 때는 감히 거만스럽게 교자(轎子)를 타고는 그 집에 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그가 질병을 칭탁하여 일을 회피하면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어찌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근(柳根)은 천부적으로 사특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평소부터 이론(異論)을 주창해 왔는데, 유소(儒疏)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서궁(西宮)을 처치하는 일이 분명히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고서, 재빨리 사직소를 올리고는 묘산(墓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조신(朝臣)에게 말미를 줄 때에는 본래 정해진 기한이 있는 법인데, 대론을 피할 목적으로 기한을 넘기고서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날짜가 너무 늦어지자 병을 핑계로 장계를 올려 겸대한 제조(提調)를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장차 큰 판국이 마무리된 뒤에나 올라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가 교묘하게 꾀를 내어 일을 회피한 자취가 불을 보듯 환하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가 또한 지극히 중하다 하겠습니다. 윤방(尹昉)은 소분(掃墳)046) 하고 올라와 궐내에서 병을 핑계로 수레를 타고 돌아간 뒤로는, 의논을 드리지도 않고 정청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용(金尙容)은 아비 병 때문에 간호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역시 기꺼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정귀(李廷龜)·이시언(李時彦)은 의논을 거둘 때 혹 자기 병세만 진달하고 대론은 언급하지 않는가 하면, 혹 입을 다물고 남에게 떠넘기면서 기꺼이 저쪽 편을 들었으며 백관의 모임에도 따라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병이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남에게 들려서라도 궐하에 나아와 그 직분을 다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속 편하게 집에 있으면서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윤겸(吳允謙)과 송영구(宋英耉)는 의논드린 말이 모두 저쪽 편을 드는 것이었으며, 정청할 때에도 끝내 따라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유근 이하는 모두 서인(西人)인데 김제남(金悌男)이 그 부류에서 나와, 논의와 심지(心志)가 평소부터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제남이 패망한 뒤에까지도 붙잡아 세우려는 뜻을 갖고는 서궁에게 침을 흘리면서 뒷날 판국을 뒤엎어 버릴 소지를 마련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성상을 저버릴지언정 서궁을 차마 등질 수는 없다 하고 있으니 어찌 참혹하지 않습니까. 조국빈(趙國賓)은 의논을 거둘 때 저쪽 편을 들었고 윤형준(尹衡俊)은 의논을 거둘 때 희롱하였으니, 그 죄가 8간(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자 가운데 가령 이시발(李時發)·김류(金瑬)·박자응(朴自凝)·이경직(李景稷)·박동선(朴東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은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가 10간(奸)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모두 멀리 유배보내도록 명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전형(典刑)을 엄하게 하소서.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로서, 늙고 병든 자나 폐질자(廢疾者)에 대해서는 대열에 따르도록 요구할 수는 없을 듯하기도 합니다만, 나라에 대론이 펼쳐지고 있는 마당에 시종일관 물러가 편안하게 있으면서 불참하다니, 그 죄가 조금 덜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무죄라고는 또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에게 삭출을 명하소서. 전일 정청할 때, 종실(宗室)은 의리상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하는 데도 삼가 종친부의 조사 내용을 보건대,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효성(李孝聖)·의원감(義原監) 이역(李櫟)·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평림수(平林守) 이지윤(李祉胤)·의신 부수(義信副守) 이비(李備)·영가 부수(永嘉副守) 이효길(李孝吉)·진원 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선성 부수(先城副守) 이신원(李信元)·계림령(鷄林令) 이광윤(李光胤), 광원령(光原令) 이호(李琥)·명원령(明原令) 이효(李孝)·계양령(桂陽令) 이예길(李禮吉)·수양령(樹陽令) 이충길(李忠吉)·낙성 부령(洛城副令) 이낭(李琅)·우산부령(牛山副令) 이기(李玘)·연창 부령(連昌副令) 이신호(李信虎)·원평 부령(原平副令) 이박(李珀)·원계 부령(原溪副令) 이경(李瓊)·영원 부령(靈原副令) 이작(李晫)·원흥 부령(原興副令) 이거(李琚)·광성 부령(廣城副令) 이제길(李悌吉)·영릉 부령(靈陵副令) 이질(李晊)·신천 부령(信川副令) 이경사(李景獅)·화성감(花城監) 이효천(李孝天)·학성령(鶴城令) 이도(李濤) 등은 시종일관 정청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경우는 소원한 종친과는 처지가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유배를 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공성군(功城君) 이식(李植)·고산 부령(高山副令) 이공(李恭)·덕원 부령 이덕손(德原副李德孫)·덕양도정(德陽都正) 이충윤(李忠胤)·익산도정(益山都正) 이진(李璡)·하성령(夏城令) 이형륜(李炯倫)·한성령(漢城令) 이영(李濘)·덕순령(德純令) 이진충(李鎭忠) 등에 대해서는 종친부에서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했다고 써 보냈는데,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죄가 없지 않으니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註 046] 소분(掃墳) : 조상의 산소에 제사지내는 것.
"전일 정청(庭請)한 것은 실로 충성심을 떨쳐 역적을 토벌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소 신민들이 꾀하지 않고도 같은 말을 하면서 피 끓는 정성으로 소를 올려 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관 중에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감히 다른 마음을 품고서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고, 혹은 의논드릴 때 저쪽 편을 든 자도 있는데,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어떤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창연(鄭昌衍)은 왕실과 가까운 친척으로서 대신의 지위에 오른 만큼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묘 사직과 군부(君父)의 위급함이 호흡간에 박두했는 데도 그는 감히 서궁을 남몰래 보호하려는 계책을 행하면서 뒷날 복을 받으려고 도모하였습니다. 당초 유소(儒疏)를 내리셨을 때 예관(禮官)이 가지고 가서 의논하자 병이 중하여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한 글자도 뜯어 보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의논을 거둘 때 낭청이 여러 차례 청하자 문을 닫아 걸고는 성 내어 욕하면서 끝내 써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론(邪論)을 주창하고 그 아들과 조카를 미혹시키면서 저쪽 편의 우두머리가 기꺼이 되었는데, 대론(大論)이 이미 정해져 백관이 정청을 하기에 이르자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는가 하면, 달을 넘겨 가며 복합 상소(伏閤上疏)를 올렸을 때에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매부 김극효(金克孝)가 죽었을 때는 감히 거만스럽게 교자(轎子)를 타고는 그 집에 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그가 질병을 칭탁하여 일을 회피하면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어찌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근(柳根)은 천부적으로 사특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평소부터 이론(異論)을 주창해 왔는데, 유소(儒疏)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서궁(西宮)을 처치하는 일이 분명히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고서, 재빨리 사직소를 올리고는 묘산(墓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조신(朝臣)에게 말미를 줄 때에는 본래 정해진 기한이 있는 법인데, 대론을 피할 목적으로 기한을 넘기고서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날짜가 너무 늦어지자 병을 핑계로 장계를 올려 겸대한 제조(提調)를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장차 큰 판국이 마무리된 뒤에나 올라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가 교묘하게 꾀를 내어 일을 회피한 자취가 불을 보듯 환하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가 또한 지극히 중하다 하겠습니다.
윤방(尹昉)은 소분(掃墳)046) 하고 올라와 궐내에서 병을 핑계로 수레를 타고 돌아간 뒤로는, 의논을 드리지도 않고 정청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용(金尙容)은 아비 병 때문에 간호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역시 기꺼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정귀(李廷龜)·이시언(李時彦)은 의논을 거둘 때 혹 자기 병세만 진달하고 대론은 언급하지 않는가 하면, 혹 입을 다물고 남에게 떠넘기면서 기꺼이 저쪽 편을 들었으며 백관의 모임에도 따라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병이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남에게 들려서라도 궐하에 나아와 그 직분을 다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속 편하게 집에 있으면서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윤겸(吳允謙)과 송영구(宋英耉)는 의논드린 말이 모두 저쪽 편을 드는 것이었으며, 정청할 때에도 끝내 따라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유근 이하는 모두 서인(西人)인데 김제남(金悌男)이 그 부류에서 나와, 논의와 심지(心志)가 평소부터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제남이 패망한 뒤에까지도 붙잡아 세우려는 뜻을 갖고는 서궁에게 침을 흘리면서 뒷날 판국을 뒤엎어 버릴 소지를 마련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성상을 저버릴지언정 서궁을 차마 등질 수는 없다 하고 있으니 어찌 참혹하지 않습니까.
조국빈(趙國賓)은 의논을 거둘 때 저쪽 편을 들었고 윤형준(尹衡俊)은 의논을 거둘 때 희롱하였으니, 그 죄가 8간(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자 가운데 가령 이시발(李時發)·김류(金瑬)·박자응(朴自凝)·이경직(李景稷)·박동선(朴東善),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은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가 10간(奸)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모두 멀리 유배보내도록 명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전형(典刑)을 엄하게 하소서.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로서, 늙고 병든 자나 폐질자(廢疾者)에 대해서는 대열에 따르도록 요구할 수는 없을 듯하기도 합니다만, 나라에 대론이 펼쳐지고 있는 마당에 시종일관 물러가 편안하게 있으면서 불참하다니, 그 죄가 조금 덜하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무죄라고는 또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에게 삭출을 명하소서.
전일 정청할 때, 종실(宗室)은 의리상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하는 데도 삼가 종친부의 조사 내용을 보건대,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효성(李孝聖)·의원감(義原監) 이역(李櫟)·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평림수(平林守) 이지윤(李祉胤)·의신 부수(義信副守) 이비(李備)·영가 부수(永嘉副守) 이효길(李孝吉)·진원 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선성 부수(先城副守) 이신원(李信元)·계림령(鷄林令) 이광윤(李光胤), 광원령(光原令) 이호(李琥)·명원령(明原令) 이효(李孝)·계양령(桂陽令) 이예길(李禮吉)·수양령(樹陽令) 이충길(李忠吉)·낙성 부령(洛城副令) 이낭(李琅)·우산부령(牛山副令) 이기(李玘)·연창 부령(連昌副令) 이신호(李信虎)·원평 부령(原平副令) 이박(李珀)·원계 부령(原溪副令) 이경(李瓊)·영원 부령(靈原副令) 이작(李晫)·원흥 부령(原興副令) 이거(李琚)·광성 부령(廣城副令) 이제길(李悌吉)·영릉 부령(靈陵副令) 이질(李晊)·신천 부령(信川副令) 이경사(李景獅)·화성감(花城監) 이효천(李孝天)·학성령(鶴城令) 이도(李濤) 등은 시종일관 정청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의 경우는 소원한 종친과는 처지가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유배를 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공성군(功城君) 이식(李植)·고산 부령(高山副令) 이공(李恭)·덕원 부령 이덕손(德原副李德孫)·덕양도정(德陽都正) 이충윤(李忠胤)·익산도정(益山都正) 이진(李璡)·하성령(夏城令) 이형륜(李炯倫)·한성령(漢城令) 이영(李濘)·덕순령(德純令) 이진충(李鎭忠) 등에 대해서는 종친부에서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했다고 써 보냈는데,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죄가 없지 않으니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합사하여 아뢰기를, "서궁은 오늘날 신하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존재인데, 며칠이나 계속 정청(庭請)한 결과 겨우 폄손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사람들의 분노는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감(裁減)하는 절목에 대해서조차 입계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 데도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시므로, 진헌(進獻)하고 내공(內供)하는 것이 예전과 같으며,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호위(扈衛)하게 하는 것 역시 처음과 똑같으니,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이것이 어떻게 된 거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론(正論)이 중도에 저지되고, 삿된 의논이 점점 치성해진 나머지 여씨(呂氏)를 위하는 무리들은 바라는 대로 되었다면서 손뼉을 치고, 왼쪽 어깨를 벗어 제친[左袒] 부류는 기대가 어긋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047) 신들의 의혹이 이에 이르러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어떤 일이든 조속히 성취시키는 것이 소중한 것으로서 늑장을 부리면 군색해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존망(存亡)의 기틀이 호흡간에 결판나게 된 지금과 같은 때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외복(外服)의 이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우리들 멋대로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꼭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곤 하는데, 이것이 어찌 단지 뒷날 할 말이 있게끔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막대하고 막중한 논을 바루어 천하 만세에 보여 줄 길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에 입계했던 절목을 속히 판하하시어 방관하며 틈을 엿보는 자들의 기대를 끊어 버리고 사신에 합당한 자를 엄선한 뒤, 급히 달려가 전후의 곡절을 진달하여 서궁을 폐출케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평안하게 하고 인심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註 047] 여씨(呂氏)를 위하는 무리들은 바라는 대로 되었다면서 손뼉을 치고, 왼쪽 어깨를 벗어 제친[左袒] 부류는 기대가 어긋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 《한서(漢書)》 고후기(高后紀)에,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여씨(呂氏)의 난을 평정하려 하면서 군중(軍中)에 들어가 "여씨를 위하는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劉氏)를 위하는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 보이라." 했는데, 오른쪽 어깨를 벗은 자들을 모조리 죽였던 고사에서 유래된 것임. 그런데 여기서는 여씨를 인목 대비(仁穆大妃)에 비유하고 있음.
"서궁은 오늘날 신하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존재인데, 며칠이나 계속 정청(庭請)한 결과 겨우 폄손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사람들의 분노는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감(裁減)하는 절목에 대해서조차 입계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 데도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시므로, 진헌(進獻)하고 내공(內供)하는 것이 예전과 같으며,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호위(扈衛)하게 하는 것 역시 처음과 똑같으니,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이것이 어떻게 된 거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론(正論)이 중도에 저지되고, 삿된 의논이 점점 치성해진 나머지 여씨(呂氏)를 위하는 무리들은 바라는 대로 되었다면서 손뼉을 치고, 왼쪽 어깨를 벗어 제친[左袒] 부류는 기대가 어긋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047) 신들의 의혹이 이에 이르러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어떤 일이든 조속히 성취시키는 것이 소중한 것으로서 늑장을 부리면 군색해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존망(存亡)의 기틀이 호흡간에 결판나게 된 지금과 같은 때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외복(外服)의 이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우리들 멋대로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꼭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곤 하는데, 이것이 어찌 단지 뒷날 할 말이 있게끔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막대하고 막중한 논을 바루어 천하 만세에 보여 줄 길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에 입계했던 절목을 속히 판하하시어 방관하며 틈을 엿보는 자들의 기대를 끊어 버리고 사신에 합당한 자를 엄선한 뒤, 급히 달려가 전후의 곡절을 진달하여 서궁을 폐출케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평안하게 하고 인심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서서히 결정짓겠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3일 임신
전교하였다. "북쪽 변방의 방어가 소홀하니 병력을 증강하여 응원할 계책을 미리 조치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선조(先朝)의 구례(舊例)에 따라 혹 무사들을 널리 뽑거나 혹 별도로 군사를 모집한 뒤, 부대를 나누어 들여 보낸다면 유비무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비변사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처리케 하라."
"북쪽 변방의 방어가 소홀하니 병력을 증강하여 응원할 계책을 미리 조치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선조(先朝)의 구례(舊例)에 따라 혹 무사들을 널리 뽑거나 혹 별도로 군사를 모집한 뒤, 부대를 나누어 들여 보낸다면 유비무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비변사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처리케 하라."
진사 이건원(李乾元) 등이 상소하였다. "진강(鎭江)의 유격(遊擊) 구탄(丘坦)이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에 화를 내고 있는만큼 뒷날 반드시 우리를 무함할 소지가 있겠기에, 신들이 작년에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를 이자(移咨)하자고 극력 진달드렸었습니다. 이번에 대론(大論)이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극신(李克信)이 또 변방에서 흔단을 일으키는 바람에, 진강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우리 나라의 일에 대비케 하였으니, 뒷날의 화란은 필시 이보다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궁(西宮)에 대해 분조(分朝)를 폐지하고 대비의 명호(名號)를 제거하며, 공헌(貢獻)을 폐지하라고 분부하신 것을 대신이 즉각 봉행하지는 않고 절목을 조항별로 올린다고 칭탁하면서, 이미 윤허하신 일까지 품달드리며 가능한 한 시일을 지연시킴으로써 서궁에게 충성을 다 바치려 하고 있으니, 그 꾀가 참혹하기도 합니다. 속히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이미 윤허한 절목까지 써서 입계한 대신의 죄를 꾸짖으소서. 그리고 이와 함께 변무(辨誣)하는 임무를 사은사(謝恩使) 일행에게 부쳐 속히 진강에서 성 쌓는 일을 폐지하게 함으로써 중국인들이 그 성을 두고 ‘몇 년도에 조선이 배반하려 하자 이 성을 쌓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고, 중신(重臣)을 잇달아 보내 서궁의 죄악을 천자에게 주달해 알림으로써, 뒷날 억울하게 무함을 당할 소지가 없어지도록 하시고, 시정(市井)의 무리들이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함부로 중국에 들어가는 것을 일체 금단함으로써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퍼지지 못하도록 하소서."
"진강(鎭江)의 유격(遊擊) 구탄(丘坦)이 중강(中江)에 개시(開市)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에 화를 내고 있는만큼 뒷날 반드시 우리를 무함할 소지가 있겠기에, 신들이 작년에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를 이자(移咨)하자고 극력 진달드렸었습니다. 이번에 대론(大論)이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극신(李克信)이 또 변방에서 흔단을 일으키는 바람에, 진강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우리 나라의 일에 대비케 하였으니, 뒷날의 화란은 필시 이보다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궁(西宮)에 대해 분조(分朝)를 폐지하고 대비의 명호(名號)를 제거하며, 공헌(貢獻)을 폐지하라고 분부하신 것을 대신이 즉각 봉행하지는 않고 절목을 조항별로 올린다고 칭탁하면서, 이미 윤허하신 일까지 품달드리며 가능한 한 시일을 지연시킴으로써 서궁에게 충성을 다 바치려 하고 있으니, 그 꾀가 참혹하기도 합니다. 속히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이미 윤허한 절목까지 써서 입계한 대신의 죄를 꾸짖으소서. 그리고 이와 함께 변무(辨誣)하는 임무를 사은사(謝恩使) 일행에게 부쳐 속히 진강에서 성 쌓는 일을 폐지하게 함으로써 중국인들이 그 성을 두고 ‘몇 년도에 조선이 배반하려 하자 이 성을 쌓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시고, 중신(重臣)을 잇달아 보내 서궁의 죄악을 천자에게 주달해 알림으로써, 뒷날 억울하게 무함을 당할 소지가 없어지도록 하시고, 시정(市井)의 무리들이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함부로 중국에 들어가는 것을 일체 금단함으로써 비방하는 유언비어가 퍼지지 못하도록 하소서."
합계로 연계하기를, "전일 정청(庭請)했을 때 종실은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으니 더욱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효성(李孝聖) 등은 시종일관 정청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의창군 이광의 경우는 소원한 종친과는 입장이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 이현 등이 비록 늙고 병들었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불참한 것은 그 죄가 없지 않으니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정창연(鄭昌衍)은 왕실과 가까운 친척으로서 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만큼 국가와 휴척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묘 사직과 군부의 위급함이 호흡간에 박두했는 데도 그는 감히 남몰래 서궁을 보호하려는 계책을 행하면서 뒷날 복을 받으려 도모하였습니다. 당초 유소(儒疏)가 내려졌을 때 예관(禮官)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의논하자 병이 중해서 해득하지 못하겠다고 핑계대며 한 글자도 뜯어 보지 않았고, 정부에서 의논을 거둘 때 낭청이 누차 청하자 문을 닫아 걸고는 욕하고 성 내면서 끝내 써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론(邪論)을 주창하여 그의 아들과 조카들을 미혹시키면서 기꺼이 저쪽 편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대론이 이미 정해져 백관이 정청할 때에도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고, 달을 넘겨 가며 복합 상소를 올릴 때에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의 매부 김극효(金克孝)가 죽었을 때에는 감히 거만스럽게 교자(轎子)를 타고 그 집에 가서 조문하였습니다. 병을 칭탁하여 일을 회피하면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어떻게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근(柳根)은 천성적으로 사특하여 평소부터 이론(異論)을 주창했는데, 유소(儒疏)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서궁을 처치하는 일이 반드시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고 재빨리 사직 단자를 올린 뒤 묘산(墓山)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무릇 조신(朝臣)이 말미를 받으면 자연히 정해진 기한이 있는 법인데, 대론(大論)을 피할 목적으로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날짜가 너무 늦어지자 병을 핑계로 장계를 올려 겸대한 직책을 체차시켜 달라고 청하면서, 큰 판국이 마무리된 뒤에야 올라오려고 꾀하였습니다. 그가 교묘하게 꾀를 내어 일을 회피하려 한 자취가 불을 보듯 환하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의 죄가 또한 지극히 중하다 하겠습니다. 윤방은 소분(掃墳)하고 올라와 궐내에서 병을 핑계로 수레를 타고 돌아간 뒤로는 의논을 올리지도 않았고 정청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용은 아비 병 때문에 간호해야 한다고 칭탁하면서 역시 기꺼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정귀·이시언은 의논을 거둘 때 혹 자기 병에 대해서만 진달하고 대론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혹 입을 꾹 다물고 남에게만 떠밀면서 기꺼이 저쪽 편이 되었는데, 백관이 모일 때에도 역시 따라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병들어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남에게 들려져 궐하에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직분을 극진히 수행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마음 편히 집에 있으면서 태연하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윤겸·송영구는 의논드린 말이 모두 저쪽 편을 든 것이었으며 정청할 때에도 끝내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 유근 이하는 모두 서인(西人)인데 김제남(金悌男)이 그 부류에서 나와 논의하는 것이나 마음 씀씀이가 평소부터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제남이 일단 패망하고 난 뒤에도 붙잡아 일으키려는 뜻을 가지고 서궁에게 침을 흘리면서 뒷날 판국을 뒤엎을 소지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성상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서궁을 저버리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참혹하지 않습니까. 조국빈(趙國賓)은 의논을 거둘 때 저쪽 편을 들었고 윤형준(尹衡俊)은 의논을 거둘 때 희롱하였으니, 그 죄가 8간(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은 대론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말미를 받아 시골에 내려간 뒤 고의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며,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머리를 내밀지 않다가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된 뒤에야 곧장 배사(拜辭)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교묘하게 피한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김류는 아무 일 없이 서울에 있으면서 끝까지 자기 견해를 고수한만큼 그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불을 보듯 환하니, 그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돌아볼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경악에 있는 신분으로서, 대론을 피해보려고 꾀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려 즉시 체직되었으며, 그 뒤 전적(典籍)을 제수받고도 오래도록 사은 숙배하지 않은 채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가 전후로 교묘하게 회피한 정상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경직(李景稷)은 대론이 일단 발동된 뒤에 시골로 피해 내려갔는데, 그의 본심을 살펴보면 그 죄가 정청에 불참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으니, 전후의 심적(心迹)이 김류와 완전히 일치된다고 하겠습니다. 박동선(朴東善)은 본래 이의(異議)를 제기했던 사람인데,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리(下吏)가 ‘나왔다[進]’고 글자를 잘못 썼을 때 나가지 않았었다고 스스로 해명하면서 절개를 세우려는 자처럼 행동했으니,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그 정도가 더 심한 자라고 할 것입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은 모두 연소한 자로서, 병이 없는 데도 시종일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들만 유독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효성(鄭孝成)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자로서 본래 심사(心事)가 정론(正論)과는 모순되어 있었고, 또 정백창(鄭百昌)의 아비로서 조정에서 하는 일 모두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조롱하였으니, 그 죄가 정청에 불참한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단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함으로써 역적을 토벌하는 전형(典刑)을 엄하게 하소서. 그리고 대중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 늙고 병든 자와 폐질자에 대해서는 대열을 따르라고 요구할 수 없을 듯도 합니다만, 나라에 대론이 전개되고 있는 때에 시종일관 불참한 것은 죄가 덜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죄라고 할 수는 없으니, 한결같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에게 삭출을 명하소서. 이밖에 누락된 사람이 꼭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듣는 것에 선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에 부득불 듣는 대로 추론(追論)해야 할 입장인데, 오늘 아뢴 정효성도 그 하나의 예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전일 정청(庭請)했을 때 종실은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으니 더욱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효성(李孝聖) 등은 시종일관 정청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의창군 이광의 경우는 소원한 종친과는 입장이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 이현 등이 비록 늙고 병들었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불참한 것은 그 죄가 없지 않으니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정창연(鄭昌衍)은 왕실과 가까운 친척으로서 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만큼 국가와 휴척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묘 사직과 군부의 위급함이 호흡간에 박두했는 데도 그는 감히 남몰래 서궁을 보호하려는 계책을 행하면서 뒷날 복을 받으려 도모하였습니다. 당초 유소(儒疏)가 내려졌을 때 예관(禮官)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의논하자 병이 중해서 해득하지 못하겠다고 핑계대며 한 글자도 뜯어 보지 않았고, 정부에서 의논을 거둘 때 낭청이 누차 청하자 문을 닫아 걸고는 욕하고 성 내면서 끝내 써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론(邪論)을 주창하여 그의 아들과 조카들을 미혹시키면서 기꺼이 저쪽 편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대론이 이미 정해져 백관이 정청할 때에도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고, 달을 넘겨 가며 복합 상소를 올릴 때에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의 매부 김극효(金克孝)가 죽었을 때에는 감히 거만스럽게 교자(轎子)를 타고 그 집에 가서 조문하였습니다. 병을 칭탁하여 일을 회피하면서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어떻게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근(柳根)은 천성적으로 사특하여 평소부터 이론(異論)을 주창했는데, 유소(儒疏)가 처음 들어왔을 때 서궁을 처치하는 일이 반드시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고 재빨리 사직 단자를 올린 뒤 묘산(墓山)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무릇 조신(朝臣)이 말미를 받으면 자연히 정해진 기한이 있는 법인데, 대론(大論)을 피할 목적으로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날짜가 너무 늦어지자 병을 핑계로 장계를 올려 겸대한 직책을 체차시켜 달라고 청하면서, 큰 판국이 마무리된 뒤에야 올라오려고 꾀하였습니다. 그가 교묘하게 꾀를 내어 일을 회피하려 한 자취가 불을 보듯 환하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의 죄가 또한 지극히 중하다 하겠습니다.
윤방은 소분(掃墳)하고 올라와 궐내에서 병을 핑계로 수레를 타고 돌아간 뒤로는 의논을 올리지도 않았고 정청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용은 아비 병 때문에 간호해야 한다고 칭탁하면서 역시 기꺼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정귀·이시언은 의논을 거둘 때 혹 자기 병에 대해서만 진달하고 대론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혹 입을 꾹 다물고 남에게만 떠밀면서 기꺼이 저쪽 편이 되었는데, 백관이 모일 때에도 역시 따라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병들어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남에게 들려져 궐하에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직분을 극진히 수행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마음 편히 집에 있으면서 태연하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윤겸·송영구는 의논드린 말이 모두 저쪽 편을 든 것이었으며 정청할 때에도 끝내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개 유근 이하는 모두 서인(西人)인데 김제남(金悌男)이 그 부류에서 나와 논의하는 것이나 마음 씀씀이가 평소부터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제남이 일단 패망하고 난 뒤에도 붙잡아 일으키려는 뜻을 가지고 서궁에게 침을 흘리면서 뒷날 판국을 뒤엎을 소지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차라리 성상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서궁을 저버리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참혹하지 않습니까.
조국빈(趙國賓)은 의논을 거둘 때 저쪽 편을 들었고 윤형준(尹衡俊)은 의논을 거둘 때 희롱하였으니, 그 죄가 8간(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은 대론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말미를 받아 시골에 내려간 뒤 고의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며,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머리를 내밀지 않다가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된 뒤에야 곧장 배사(拜辭)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교묘하게 피한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김류는 아무 일 없이 서울에 있으면서 끝까지 자기 견해를 고수한만큼 그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불을 보듯 환하니, 그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돌아볼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경악에 있는 신분으로서, 대론을 피해보려고 꾀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려 즉시 체직되었으며, 그 뒤 전적(典籍)을 제수받고도 오래도록 사은 숙배하지 않은 채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가 전후로 교묘하게 회피한 정상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경직(李景稷)은 대론이 일단 발동된 뒤에 시골로 피해 내려갔는데, 그의 본심을 살펴보면 그 죄가 정청에 불참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으니, 전후의 심적(心迹)이 김류와 완전히 일치된다고 하겠습니다. 박동선(朴東善)은 본래 이의(異議)를 제기했던 사람인데,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리(下吏)가 ‘나왔다[進]’고 글자를 잘못 썼을 때 나가지 않았었다고 스스로 해명하면서 절개를 세우려는 자처럼 행동했으니,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그 정도가 더 심한 자라고 할 것입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은 모두 연소한 자로서, 병이 없는 데도 시종일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들만 유독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효성(鄭孝成)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자로서 본래 심사(心事)가 정론(正論)과는 모순되어 있었고, 또 정백창(鄭百昌)의 아비로서 조정에서 하는 일 모두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조롱하였으니, 그 죄가 정청에 불참한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단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함으로써 역적을 토벌하는 전형(典刑)을 엄하게 하소서.
그리고 대중이 공통적으로 아는 바 늙고 병든 자와 폐질자에 대해서는 대열을 따르라고 요구할 수 없을 듯도 합니다만, 나라에 대론이 전개되고 있는 때에 시종일관 불참한 것은 죄가 덜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죄라고 할 수는 없으니, 한결같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에게 삭출을 명하소서.
이밖에 누락된 사람이 꼭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듣는 것에 선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에 부득불 듣는 대로 추론(追論)해야 할 입장인데, 오늘 아뢴 정효성도 그 하나의 예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사하여 연계하기를, "국가가 망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화란이 눈썹이 탈 정도로 박두했으므로, 뭇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놀라고 있는데, 간악한 패거리들은 속으로 웃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지연시키면서 그냥 놔 둔 채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그렇게 해서 흉도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현재 조섭하고 계시는데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을 신들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국가를 위하는 지극한 계책을 조정에서 의논해 이미 정했는데, 그 폄삭하는 절목을 살펴 보고 나서 도로 내리시는 것쯤이야 단지 눈 한 번 깜짝하는 시간이면 충분할 뿐 번쇄한 업무와 같은 것은 아니니, 수고스럽지만 성상께서 들어 주시는 것은 경중을 다는 정도의 것이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무엇을 애석하게 여기시어 이렇듯 주저하시면서 오래도록 판하하지 않으심으로써, 계속 사람들이 의심하게 만들고 흉도가 계책을 도모하도록 길을 열어주신단 말입니까. 성상께서 명위(名位)에 따른 보통 관례에 구애된 나머지, 차마 사은(私恩)을 끊고 폐출하는 일을 하지 못해 굳게 거절하며 따르지 않으셨으므로, 백관이 성상의 뜻에 순종하면서 우선 말감(末減)하는 법을 적용하여 겨우 폄삭하는 전형(典刑)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주려 하신 생각이야 극진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춘추(春秋)》의 토역(討逆)하는 대의(大義)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절목을 입계했어도 그냥 놔 둔 채 시행을 못하게 하고 계시니, 인주(人主)의 세력은 날로 고단해지는 반면, 괴이한 논의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어 판국이 뒤집혀지는 화란이 호흡간에 닥쳐올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나라는 상국과 쉴 새 없이 왕래하니 기밀이 누설되기가 쉽습니다. 만약 중국인이 대론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구탄(丘坦)이 이를 문제 삼아 참소를 행하여 마지않는다면, 우리가 주문(奏聞)하기 전에 필시 조(趙)·이(李)의 무함과 같은 사건이 있게 될 것이니, 앞으로의 화란이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어 틈을 엿보며 역모를 이루려 하는 간악한 흉도의 꾀를 막으시고, 이어 사정을 잘 알고 전대(專對)하기에 합당한 신하를 택한 뒤, 급히 중국에 달려가 악한 역모의 진상을 진달하게 하여 폐출하는 전형이 행해지도록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평안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국가가 망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화란이 눈썹이 탈 정도로 박두했으므로, 뭇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놀라고 있는데, 간악한 패거리들은 속으로 웃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지연시키면서 그냥 놔 둔 채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그렇게 해서 흉도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현재 조섭하고 계시는데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을 신들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국가를 위하는 지극한 계책을 조정에서 의논해 이미 정했는데, 그 폄삭하는 절목을 살펴 보고 나서 도로 내리시는 것쯤이야 단지 눈 한 번 깜짝하는 시간이면 충분할 뿐 번쇄한 업무와 같은 것은 아니니, 수고스럽지만 성상께서 들어 주시는 것은 경중을 다는 정도의 것이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무엇을 애석하게 여기시어 이렇듯 주저하시면서 오래도록 판하하지 않으심으로써, 계속 사람들이 의심하게 만들고 흉도가 계책을 도모하도록 길을 열어주신단 말입니까.
성상께서 명위(名位)에 따른 보통 관례에 구애된 나머지, 차마 사은(私恩)을 끊고 폐출하는 일을 하지 못해 굳게 거절하며 따르지 않으셨으므로, 백관이 성상의 뜻에 순종하면서 우선 말감(末減)하는 법을 적용하여 겨우 폄삭하는 전형(典刑)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주려 하신 생각이야 극진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춘추(春秋)》의 토역(討逆)하는 대의(大義)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절목을 입계했어도 그냥 놔 둔 채 시행을 못하게 하고 계시니, 인주(人主)의 세력은 날로 고단해지는 반면, 괴이한 논의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어 판국이 뒤집혀지는 화란이 호흡간에 닥쳐올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나라는 상국과 쉴 새 없이 왕래하니 기밀이 누설되기가 쉽습니다. 만약 중국인이 대론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구탄(丘坦)이 이를 문제 삼아 참소를 행하여 마지않는다면, 우리가 주문(奏聞)하기 전에 필시 조(趙)·이(李)의 무함과 같은 사건이 있게 될 것이니, 앞으로의 화란이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어 틈을 엿보며 역모를 이루려 하는 간악한 흉도의 꾀를 막으시고, 이어 사정을 잘 알고 전대(專對)하기에 합당한 신하를 택한 뒤, 급히 중국에 달려가 악한 역모의 진상을 진달하게 하여 폐출하는 전형이 행해지도록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평안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합사해 합계한 대로 공론을 쾌히 따를 것을 청하니, 이미 양사에 유시했다고 답하였다.
3월 14일 계유
전교하였다. "침을 맞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데, 안약(眼藥)이 효과가 없는 데다 대례(大禮)를 여러 차례나 날짜를 물려 무척 안타깝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번에 걸쳐 침을 맞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조섭하여, 기필코 조금이라도 효과를 본 뒤에 대례를 억지로라도 행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삼사의 계사와 차자 역시 특이하게 새로운 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미 들었던 여론(餘論)을 진달하는 것일 뿐 별로 긴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주문(奏聞)하는 일에 대해서는 영상에게 물어보러 간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는데, 이 일은 위에서도 십분 참작하여 처리할 생각이다. 정청(庭請)에 불참한 사람의 문제도 그렇다. 어찌 꼭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이처럼 서두르면서 번거롭게 해야만 하는가. 며칠 전부터 안질(眼疾)이 더욱 심해진 탓으로 대례조차 어쩔 수 없이 또 물리게 되었으니 말할 수도 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선 침을 맞으며 조섭하는 기간만이라도 억지를 부려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양사의 성상소(城上所)를 명초(命招)하여 이르라."
"침을 맞는 것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데, 안약(眼藥)이 효과가 없는 데다 대례(大禮)를 여러 차례나 날짜를 물려 무척 안타깝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번에 걸쳐 침을 맞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조섭하여, 기필코 조금이라도 효과를 본 뒤에 대례를 억지로라도 행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삼사의 계사와 차자 역시 특이하게 새로운 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미 들었던 여론(餘論)을 진달하는 것일 뿐 별로 긴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주문(奏聞)하는 일에 대해서는 영상에게 물어보러 간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는데, 이 일은 위에서도 십분 참작하여 처리할 생각이다. 정청(庭請)에 불참한 사람의 문제도 그렇다. 어찌 꼭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이처럼 서두르면서 번거롭게 해야만 하는가. 며칠 전부터 안질(眼疾)이 더욱 심해진 탓으로 대례조차 어쩔 수 없이 또 물리게 되었으니 말할 수도 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선 침을 맞으며 조섭하는 기간만이라도 억지를 부려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양사의 성상소(城上所)를 명초(命招)하여 이르라."
3월 15일 갑술
유학(幼學) 김옥장(金玉章)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을 폐출시키는 전형과 관련하여 백관과 삼사가 10개월 동안이나 맞서 쟁집하였는데, 겨우 폄손하라는 분부를 얻자 즉시 정지하였으니, 그것만도 이미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광업(辛光業)이 인혐한 뒤로 대론(大論)이 다시 펼쳐졌으니, 남근 이하 관원으로서는 폐출하자고 계속해서 청했어야 마땅한데, 그저 절목(節目)을 속히 판하해 주실 것만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의 근본을 제거하는 일이 어찌 폄삭하는 데에 있겠습니까. 먼저 대신과 삼사를 주벌(誅罰)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불충(不忠)하고 불의(不義)한 죄를 성토하고, 어진 정승을 다시 뽑고 이목(耳目)의 관원을 엄선하여 널리 구제하도록 책임지우는 동시에, 폐출하는 전형을 행하여 서궁을 바깥집에 옮겨 두고, 속히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여 종묘 사직을 편케 하소서."
"서궁(西宮)을 폐출시키는 전형과 관련하여 백관과 삼사가 10개월 동안이나 맞서 쟁집하였는데, 겨우 폄손하라는 분부를 얻자 즉시 정지하였으니, 그것만도 이미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광업(辛光業)이 인혐한 뒤로 대론(大論)이 다시 펼쳐졌으니, 남근 이하 관원으로서는 폐출하자고 계속해서 청했어야 마땅한데, 그저 절목(節目)을 속히 판하해 주실 것만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의 근본을 제거하는 일이 어찌 폄삭하는 데에 있겠습니까. 먼저 대신과 삼사를 주벌(誅罰)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불충(不忠)하고 불의(不義)한 죄를 성토하고, 어진 정승을 다시 뽑고 이목(耳目)의 관원을 엄선하여 널리 구제하도록 책임지우는 동시에, 폐출하는 전형을 행하여 서궁을 바깥집에 옮겨 두고, 속히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여 종묘 사직을 편케 하소서."
전라 감사 이홍주(李弘胄)가 익명서(匿名書)를 얻어 위에 올리니, 전교하기를, "대신 및 금부 당상과 양사 장관을 명초하라." 하였다. 【이때 익명서로 인한 옥사(獄事)와 흉서(凶書)로 인한 옥사가 4개월 간격으로 발생하여 오래도록 국청을 설치하였는데, 추안(推案) 문서가 많이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한다.】
"대신 및 금부 당상과 양사 장관을 명초하라."
하였다. 【이때 익명서로 인한 옥사(獄事)와 흉서(凶書)로 인한 옥사가 4개월 간격으로 발생하여 오래도록 국청을 설치하였는데, 추안(推案) 문서가 많이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한다.】
3월 16일 을해
비밀 전교를 내려 사관(史官) 이점(李蒧)을 파견하여 우의정 민몽룡(閔夢龍)에게 돈유(敦諭)케 하고 속히 출사하도록 하였다.
동부승지 이위경(李偉卿)이 서계하였다. "신이 10여 일 걸려 영상 정인홍(鄭仁弘)의 집에 도착해서 선교(宣敎)하였더니,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신이 유시하기를 ‘명을 받들고 멀리 왔는데 복명(復命)할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이미 차자를 올려 병고(病苦) 때문에 명을 따를 수 없는 정상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신은 더 조리를 해야만 할 형편이다. 만약 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끝내 성상을 저버리겠는가…….’ 하였습니다. 예조의 공사(公事)에 대해서 의논드리기를 ‘서궁(西宮)의 일과 관련,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기를 청한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이다. 우리 나라는 황상의 조정과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으며, 조빙(朝聘)하는 예(禮)도 기내(畿內)와 다름없이 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거조이든간에 주문을 하고 나서 행해야 하는데, 혹 먼저 거조를 취하고 나서 뒤에 보고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행한 뒤에는 반드시 주문을 해야 한다. 신이 전에 이런 뜻을 가지고 대략 탑전에서 진달드렸었다. 그런데 이번에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에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유독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조 판서를 추천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조(銓曹) 장관이 될 만한 인재로는 신이 일찍이 이이첨을 거론하며 직접 진달드렸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조목에 대한 말들을 모두 종이 석 장에 손으로 써서 주었기에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신이 10여 일 걸려 영상 정인홍(鄭仁弘)의 집에 도착해서 선교(宣敎)하였더니,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신이 유시하기를 ‘명을 받들고 멀리 왔는데 복명(復命)할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이미 차자를 올려 병고(病苦) 때문에 명을 따를 수 없는 정상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신은 더 조리를 해야만 할 형편이다. 만약 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끝내 성상을 저버리겠는가…….’ 하였습니다.
예조의 공사(公事)에 대해서 의논드리기를 ‘서궁(西宮)의 일과 관련,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기를 청한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이다. 우리 나라는 황상의 조정과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으며, 조빙(朝聘)하는 예(禮)도 기내(畿內)와 다름없이 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거조이든간에 주문을 하고 나서 행해야 하는데, 혹 먼저 거조를 취하고 나서 뒤에 보고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행한 뒤에는 반드시 주문을 해야 한다. 신이 전에 이런 뜻을 가지고 대략 탑전에서 진달드렸었다. 그런데 이번에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에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유독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조 판서를 추천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조(銓曹) 장관이 될 만한 인재로는 신이 일찍이 이이첨을 거론하며 직접 진달드렸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조목에 대한 말들을 모두 종이 석 장에 손으로 써서 주었기에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좌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누차 유소(儒疏)에 의해 배척을 받았으니 속히 신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늙고 병든 대신의 몸으로 내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날마다 수고하고 있으니 매우 미안하오. 이런 때에 유생들이 하는 말이야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또 대신들이 다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 일이 어려워지기만 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다시 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누차 유소(儒疏)에 의해 배척을 받았으니 속히 신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늙고 병든 대신의 몸으로 내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날마다 수고하고 있으니 매우 미안하오. 이런 때에 유생들이 하는 말이야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또 대신들이 다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 일이 어려워지기만 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다시 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분병조(分兵曹)가 경운궁(慶運宮) 안에서 취득한 언서(諺書)와 진서(眞書)를 입계하니, 【입번(入番)한 당상은 이성길(李成吉)이었다.】 전교하기를, "대신 및 금부 당상과 양사 장관을 명초하라." 하였다.
"대신 및 금부 당상과 양사 장관을 명초하라."
하였다.
좌·우 포도 대장이 유문(留門)된 상황에서 전교를 듣고 나갔다.
판의금 박승종(朴承宗)이 세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의 변고가 또 일어났으므로, 내가 병중에 있으면서 너무도 고뇌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경이 이런 때에 한결같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나의 뜻을 외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속히 나와 직무를 살피면서 옥사(獄事)에 관계된 일체의 사항을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한 뒤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의 변고가 또 일어났으므로, 내가 병중에 있으면서 너무도 고뇌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경이 이런 때에 한결같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나의 뜻을 외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속히 나와 직무를 살피면서 옥사(獄事)에 관계된 일체의 사항을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한 뒤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가도사(假都事) 1인과 선전관이 전교를 듣고 나갔다.
3월 17일 병자
의주(義州)의 유학(幼學) 장의범(張懿範)이 상소하여, 서궁(西宮)에 대한 일을 속히 중국 조정에 아뢴 뒤 폐출하여 종묘 사직을 평안케 하고, 다시 중강 개시(中江開市)를 설치하여 참소하는 말을 종식시킬 것을 청하였다.
비밀 전교를 내려 서궁(西宮)을 규검(糾檢)할 일로 헌부의 성상소(城上所)에 명패(命牌)를 내었다.
유학 이송수(李松壽) 등이 상소하였다. "서궁을 처치하는 대책으로는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제일인데, 수상(首相)의 의논이 다행히도 이 점을 언급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시행케 함으로써 종묘 사직이 편안해지도록 하소서."
"서궁을 처치하는 대책으로는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제일인데, 수상(首相)의 의논이 다행히도 이 점을 언급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시행케 함으로써 종묘 사직이 편안해지도록 하소서."
유학 김대립(金大立)이 상소하였다. "대론이 이미 이루어지고 절목(節目)이 이미 정해졌다 하더라도 결말짓는 논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보면, 지금이야말로 인신(人臣)이 피를 뿌리며 쟁론하여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모두 떠맡으려 하지 않으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위에 돌리려 하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인신의 의리가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오늘날 결말을 짓는 계책으로는 서궁(西宮) 안에 구석지고 틈 보기 좋은 한 곳을 골라 《강목(綱目)》에 나오는 내택(內宅)의 논에 따라서 그곳으로 옮기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면 서궁을 끼고 난리를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가 다시 정청(庭請)을 하여 절목을 판하하도록 청해야 마땅함에도 서로들 모르겠다는 식으로 놔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사의 경우는 구차하게 피혐이나 하고 뒷마무리를 흐지부지하게 처리하는 계사나 올리면서, 금방 아뢰었다가는 금방 정지하는 등 마치 심상하게 일을 논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속히 정부와 삼사를 다스려서 판국을 마무리짓는 일을 지체시키고 있는 죄를 바로 잡도록 하소서."
"대론이 이미 이루어지고 절목(節目)이 이미 정해졌다 하더라도 결말짓는 논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보면, 지금이야말로 인신(人臣)이 피를 뿌리며 쟁론하여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모두 떠맡으려 하지 않으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위에 돌리려 하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인신의 의리가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오늘날 결말을 짓는 계책으로는 서궁(西宮) 안에 구석지고 틈 보기 좋은 한 곳을 골라 《강목(綱目)》에 나오는 내택(內宅)의 논에 따라서 그곳으로 옮기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면 서궁을 끼고 난리를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가 다시 정청(庭請)을 하여 절목을 판하하도록 청해야 마땅함에도 서로들 모르겠다는 식으로 놔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사의 경우는 구차하게 피혐이나 하고 뒷마무리를 흐지부지하게 처리하는 계사나 올리면서, 금방 아뢰었다가는 금방 정지하는 등 마치 심상하게 일을 논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속히 정부와 삼사를 다스려서 판국을 마무리짓는 일을 지체시키고 있는 죄를 바로 잡도록 하소서."
3월 18일 정축
박승종(朴承宗)이 상차하여 사직하면서 【박치의(朴致毅)가 도망 중인 정상을 겸하여 진달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잘 보았다. 경의 의견은 실로 나의 뜻과 부합된다. 박적(朴賊)이 어찌 스스로 죽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인심이 좋지 못하고 기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서울이나 지방이나 똑같다. 그래서 대적(大賊)이 법망을 빠져 나가 아직껏 하늘의 주벌(誅罰)을 받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내가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체포할 모든 대책을 십분 헤아려 아뢰는 동시에 마음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도록 하라." 하였다.
"차자를 잘 보았다. 경의 의견은 실로 나의 뜻과 부합된다. 박적(朴賊)이 어찌 스스로 죽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인심이 좋지 못하고 기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서울이나 지방이나 똑같다. 그래서 대적(大賊)이 법망을 빠져 나가 아직껏 하늘의 주벌(誅罰)을 받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내가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체포할 모든 대책을 십분 헤아려 아뢰는 동시에 마음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윤인, 집의 임건, 사간 신광업, 장령 강수·한영, 지평 이중계·신칙, 헌납 박종주, 정언 서국정·이원여가 아뢰기를, "대론(大論)이 국가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남의 신자(臣子)가 된 자가 군부(君父)를 위하여 그 직책을 수행하다 죽지 않겠습니까. 절목을 이미 입계했는 데도 지금까지 판하하지 않고 계시는데, 주문(奏聞)하는 일이 이로 인해 또한 지체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전일 인피한 것은 실로 이 때문에 나온 것이었는데, 늘 조용히 조섭하시는 때를 만나 번번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소회를 다 털어 놓지 못한 채 안타깝게 입을 다물고 물러나오곤 하였으니, 김대립(金大立)이 신들을 두고 ‘금방 아뢰었다가 금방 두는 자들’이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송수(李松壽) 등이 상소하여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수상의 의논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삼가 수상이 의논드린 것을 보건대,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으로서 ‘중국 조정에서 명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는 것은 반드시 중국 조정의 처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뜻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인(善人)이 한 말이 매번 흉인(兇人)에게 악용당하는 자료가 되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폄손하는 절목은 신자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고, 중국 조정에 주문하는 것 역시 우리 나라가 감히 멋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성상께서 보전해 주려는 사은(私恩)을 극진히 하실 수 있고, 신자가 역적을 토벌하는 대법(大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 후세에 다른 의논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괴이한 논의가 갖가지로 반목을 야기시키고 있는데 뭇 사람들의 소가 번갈아 나와 그 성세(聲勢)를 이루어 줌으로써 삼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한 채 서로 잇달아 사피하게 만들었으니, 오늘날 대간이 된 자들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 모두가 신들이 무기력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남을 따라 옮겨 다닌 데에서 나온 죄이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피혐할 일이 있더라도 나은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윤인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론(大論)이 국가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남의 신자(臣子)가 된 자가 군부(君父)를 위하여 그 직책을 수행하다 죽지 않겠습니까. 절목을 이미 입계했는 데도 지금까지 판하하지 않고 계시는데, 주문(奏聞)하는 일이 이로 인해 또한 지체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전일 인피한 것은 실로 이 때문에 나온 것이었는데, 늘 조용히 조섭하시는 때를 만나 번번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소회를 다 털어 놓지 못한 채 안타깝게 입을 다물고 물러나오곤 하였으니, 김대립(金大立)이 신들을 두고 ‘금방 아뢰었다가 금방 두는 자들’이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송수(李松壽) 등이 상소하여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수상의 의논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삼가 수상이 의논드린 것을 보건대,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으로서 ‘중국 조정에서 명하였으니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는 것은 반드시 중국 조정의 처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뜻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인(善人)이 한 말이 매번 흉인(兇人)에게 악용당하는 자료가 되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폄손하는 절목은 신자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고, 중국 조정에 주문하는 것 역시 우리 나라가 감히 멋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성상께서 보전해 주려는 사은(私恩)을 극진히 하실 수 있고, 신자가 역적을 토벌하는 대법(大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 후세에 다른 의논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괴이한 논의가 갖가지로 반목을 야기시키고 있는데 뭇 사람들의 소가 번갈아 나와 그 성세(聲勢)를 이루어 줌으로써 삼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한 채 서로 잇달아 사피하게 만들었으니, 오늘날 대간이 된 자들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 모두가 신들이 무기력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남을 따라 옮겨 다닌 데에서 나온 죄이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현재 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피혐할 일이 있더라도 나은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윤인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전교하였다. "안질(眼疾)이 아직도 낫지 않고 있으니 이번의 친경은 내년 봄으로 물려 행하되 준비해 둔 기구들을 잘 보관해 두어 다시 장만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안질(眼疾)이 아직도 낫지 않고 있으니 이번의 친경은 내년 봄으로 물려 행하되 준비해 둔 기구들을 잘 보관해 두어 다시 장만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3월 19일 무인
부제학 정조(鄭造), 부교리 한희(韓暿), 부수찬 윤성임(尹聖任)이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서궁(西宮)에 대한 죄를 청하여 일단 폄삭하라는 윤허를 받았는데,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을 지금까지 판하하지 않고 계시므로 변고가 중첩해서 나오는가 하면, 주문(奏聞)하는 일 역시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묘 사직과 신민이 아직도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고 유식한 이들은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데, 대간이 누차 인피할 적마다 엄한 분부만 내리고 계십니다. 전하의 처지에서 사은(私恩)을 온전히 한다는 뜻에서는 혹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신하의 의리로 볼 때는 어찌 분노를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폄삭하는 정도로만 끝난다면 그래도 본조(本朝)가 알아서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폐출을 하는 경우 어찌 천자에게 고하지 않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의정의 의논을 보건대, 주고 빼앗는 일은 반드시 중국 조정으로부터 나와야지, 본조에서 멋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이송수(李松壽)란 자가 어떤 유자(儒者)이기에 감히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수상의 의논이라고 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외람되게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주문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이미 말도 못한 데다 또 절목을 속히 판하하시라고 청하지도 못한 채, 범범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누차 유소(儒疏)에 의해 배척을 받았으니, 무기력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양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들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서궁(西宮)에 대한 죄를 청하여 일단 폄삭하라는 윤허를 받았는데,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을 지금까지 판하하지 않고 계시므로 변고가 중첩해서 나오는가 하면, 주문(奏聞)하는 일 역시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묘 사직과 신민이 아직도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고 유식한 이들은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데, 대간이 누차 인피할 적마다 엄한 분부만 내리고 계십니다. 전하의 처지에서 사은(私恩)을 온전히 한다는 뜻에서는 혹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적을 토벌해야 하는 신하의 의리로 볼 때는 어찌 분노를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폄삭하는 정도로만 끝난다면 그래도 본조(本朝)가 알아서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폐출을 하는 경우 어찌 천자에게 고하지 않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의정의 의논을 보건대, 주고 빼앗는 일은 반드시 중국 조정으로부터 나와야지, 본조에서 멋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이송수(李松壽)란 자가 어떤 유자(儒者)이기에 감히 폐출한 뒤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수상의 의논이라고 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외람되게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주문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이미 말도 못한 데다 또 절목을 속히 판하하시라고 청하지도 못한 채, 범범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누차 유소(儒疏)에 의해 배척을 받았으니, 무기력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양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들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학 이송수 등이 상소하였다. "신들이 간절한 뜻으로 임금을 사랑한 나머지 기필코 화근을 속히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져 왔는데, 주문(奏聞)하면서 왕복하다 보면 큰 난리가 졸지에 일어날 듯하므로 폐출한 뒤에 주문해야 한다는 의논을 늘 옳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수상(首相)의 의논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먼저 일을 시작한 뒤에 주문한다.[先發後聞]’는 말이 신들의 소견과 암암리에 합치된다고 함부로 생각하고는 선생과 장자(長者)에게 의논하지도 않고서 소를 갖추어 올렸습니다. 지금 대간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수상의 뜻은 과연 ‘주문하여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게 해야 한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으니, 신들이 얼핏 보고 함부로 생각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글뜻을 이해하지 못한 신의 잘못을 다스려 현상(賢相)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그리고 속히 서궁을 별도의 가옥으로 옮겨 모녀(母女)를 따로 있게 하고, 고명과 관복을 다른 곳에 옮겨 둔 뒤에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 가는 것을 기다리게 하여 폐출하는 전형을 완결하도록 하소서."
"신들이 간절한 뜻으로 임금을 사랑한 나머지 기필코 화근을 속히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져 왔는데, 주문(奏聞)하면서 왕복하다 보면 큰 난리가 졸지에 일어날 듯하므로 폐출한 뒤에 주문해야 한다는 의논을 늘 옳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수상(首相)의 의논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먼저 일을 시작한 뒤에 주문한다.[先發後聞]’는 말이 신들의 소견과 암암리에 합치된다고 함부로 생각하고는 선생과 장자(長者)에게 의논하지도 않고서 소를 갖추어 올렸습니다. 지금 대간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수상의 뜻은 과연 ‘주문하여 고명과 관복을 환수하게 해야 한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으니, 신들이 얼핏 보고 함부로 생각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글뜻을 이해하지 못한 신의 잘못을 다스려 현상(賢相)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그리고 속히 서궁을 별도의 가옥으로 옮겨 모녀(母女)를 따로 있게 하고, 고명과 관복을 다른 곳에 옮겨 둔 뒤에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 가는 것을 기다리게 하여 폐출하는 전형을 완결하도록 하소서."
옥당이 상차하기를, "양사가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서궁에 관계되는 대론(大論)을 가지고 양사가 복합(伏閤)하다가 일단 폄삭하라는 명을 받고는 곧바로 폐출에 대한 요청을 중지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반드시 천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으로서, 본국이 감히 멋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상이 의논드린 것을 보건대, 하나는 ‘중국 조정에서 명한 것이니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서궁의 폐출과 고명·관복의 환수를 지칭한 것으로서, 중국 조정에 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행하고 나서 뒤에 주문한다.’고 한 말은, 대체로 중국 조정과 약간 관계가 있는 우리 나라의 거조 가운데 일이 급할 경우에는 혹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서궁에 관계되는 한 일을 꼭 행한 다음에 주문하려고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이송수가 어떤 사람의 사주를 받았기에 그만 감히 영상의 한 마디 말을 훔쳐 대론(大論)을 가탁하면서 이토록까지 언관(言官)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전날 양사가 주문에 대한 일을 연계하고 또 절목을 속히 판하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니, 그 직분을 극진히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옥체가 불편하신 탓으로 잇달아 침을 맞는 거조가 계셨는데, 이런 때에 번거롭게 진달해 아뢰는 것은 조용히 조섭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 듯하여 굳이 논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것이 어찌 본심이었겠습니까. 아뢰었다가 곧바로 정지한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니, 양사 모두에게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폐모론(廢母論)이 이이첨으로부터 나오긴 하였지만, 그의 뜻은 그저 역적을 토벌한다고 자처하며 준엄하게 논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폐모론이 일단 행해지게 되자 이첨 스스로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나쁜 이름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고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또 그렇게 되면 무엇을 빙자하여 총애를 굳힐 길이 없게 될 듯하자, 마침내 주문(奏聞)한 뒤에 영원히 폐출해야 한다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반면 허균은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곧장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의논이 마침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왕의 뜻은 허균의 의논을 따라 폐출한 뒤 민가에 놔 두고 이진(李珒)048) 과 이의(李㼁)049) 를 처치했던 방식으로 처치하려 하였는데, 올린 폄손 절목을 보니 그저 후궁(後宮)의 예를 모방한 것으로서 명호(名號)는 낮추었어도 봉양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화를 내고 사목을 판하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때 대비를 옆에서 모시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선조(宣祖)의 시희(侍姬)가 많았으므로 마음속으로 분개하며 정성을 다해 받들며 호위하였다. 또 문에 자물쇠를 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아 내외(內外)를 동떨어지게 한 다음, 아침 저녁으로 진공(進供)하는 것도 구멍 틈새를 통해 하였으므로, 허균과 같은 간악한 역도(逆徒)들도 감히 흉계를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는데, 대비가 시종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註 048] 이진(李珒) : 임해군(臨海君).[註 049] 이의(李㼁) : 영창 대군(永昌大君).
"양사가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서궁에 관계되는 대론(大論)을 가지고 양사가 복합(伏閤)하다가 일단 폄삭하라는 명을 받고는 곧바로 폐출에 대한 요청을 중지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반드시 천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으로서, 본국이 감히 멋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상이 의논드린 것을 보건대, 하나는 ‘중국 조정에서 명한 것이니 중국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서궁의 폐출과 고명·관복의 환수를 지칭한 것으로서, 중국 조정에 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행하고 나서 뒤에 주문한다.’고 한 말은, 대체로 중국 조정과 약간 관계가 있는 우리 나라의 거조 가운데 일이 급할 경우에는 혹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서궁에 관계되는 한 일을 꼭 행한 다음에 주문하려고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만 이송수가 어떤 사람의 사주를 받았기에 그만 감히 영상의 한 마디 말을 훔쳐 대론(大論)을 가탁하면서 이토록까지 언관(言官)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전날 양사가 주문에 대한 일을 연계하고 또 절목을 속히 판하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니, 그 직분을 극진히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옥체가 불편하신 탓으로 잇달아 침을 맞는 거조가 계셨는데, 이런 때에 번거롭게 진달해 아뢰는 것은 조용히 조섭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 듯하여 굳이 논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것이 어찌 본심이었겠습니까. 아뢰었다가 곧바로 정지한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니, 양사 모두에게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폐모론(廢母論)이 이이첨으로부터 나오긴 하였지만, 그의 뜻은 그저 역적을 토벌한다고 자처하며 준엄하게 논하여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폐모론이 일단 행해지게 되자 이첨 스스로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나쁜 이름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고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또 그렇게 되면 무엇을 빙자하여 총애를 굳힐 길이 없게 될 듯하자, 마침내 주문(奏聞)한 뒤에 영원히 폐출해야 한다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반면 허균은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곧장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의논이 마침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왕의 뜻은 허균의 의논을 따라 폐출한 뒤 민가에 놔 두고 이진(李珒)048) 과 이의(李㼁)049) 를 처치했던 방식으로 처치하려 하였는데, 올린 폄손 절목을 보니 그저 후궁(後宮)의 예를 모방한 것으로서 명호(名號)는 낮추었어도 봉양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화를 내고 사목을 판하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때 대비를 옆에서 모시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선조(宣祖)의 시희(侍姬)가 많았으므로 마음속으로 분개하며 정성을 다해 받들며 호위하였다. 또 문에 자물쇠를 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아 내외(內外)를 동떨어지게 한 다음, 아침 저녁으로 진공(進供)하는 것도 구멍 틈새를 통해 하였으므로, 허균과 같은 간악한 역도(逆徒)들도 감히 흉계를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는데, 대비가 시종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3월 20일 기묘
전교하였다. "근일 국가에 일이 많아 사신을 내보낼 곳이 매우 많다. 무신 겸 선전관 10인을 더 차출하라고 병조에 이르라."
"근일 국가에 일이 많아 사신을 내보낼 곳이 매우 많다. 무신 겸 선전관 10인을 더 차출하라고 병조에 이르라."
생원 김상하(金尙夏)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의 일을 마무리짓는 것은 주문(奏聞)을 한 번 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지금까지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수상(首相)의 의논 역시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니,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고 사신을 빨리 택하여 허황한 의논을 진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소서."
"서궁(西宮)의 일을 마무리짓는 것은 주문(奏聞)을 한 번 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지금까지 통쾌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수상(首相)의 의논 역시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니,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고 사신을 빨리 택하여 허황한 의논을 진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소서."
3월 21일 경진
유학(幼學) 최심(崔沁)이 상소하여, 주장하는 신하와 한두 명의 충성스럽고 바른 신하에게 돈유(敦諭)한 뒤 군신간에 서로 공경하는 자세로 협력하여 대론(大論)을 성사시킴으로써 종묘 사직을 평안케 할 것을 청하였다.
중사(中使)·선전관·도사(都事)가 각각 한 사람씩 전교를 듣고 나갔다.
죄인 박익(朴翼)·영례(英禮)·무생(戊生)을 나수(拿囚)하였다.
3월 22일 신사
중사·선전관·가도사(假都事)가 각각 1인씩 광주(廣州)에 가서 죄인 박득이(朴得伊)를 붙잡아 왔다. 【득이는 역적 박치의(朴致毅)의 아들인데 나이가 겨우 7, 8세밖에 안되었다. 그 아비가 길에 내 버린 것을 광주에 사는 이경남(李景男)이 데려다 길렀다 하는데, 박치의의 처남 임연(任兗)이 위에 고하여 발각되었다.】
3월 23일 임오
정원이 아뢰기를, "우상과 판의금을 명초했으나 병 때문에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집에 있으면서 의논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우상과 판의금을 명초했으나 병 때문에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집에 있으면서 의논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좌상이 밥을 먹고 나서 갑자기 괴질이 생겨 몸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극히 중하므로, 의관(醫官) 신득일(申得一)이 현재 약을 써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직접 써서 하인을 보내어 전해 왔는데, 오늘 의논하여 아뢰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집에 있으면서 헌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상이 밥을 먹고 나서 갑자기 괴질이 생겨 몸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극히 중하므로, 의관(醫官) 신득일(申得一)이 현재 약을 써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직접 써서 하인을 보내어 전해 왔는데, 오늘 의논하여 아뢰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집에 있으면서 헌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4일 계미
금호문(金虎門) 문틈으로 흉서(兇書)가 투입되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평상시 궐문을 닫은 뒤에 공사(公事)나 장계(狀啓)를 가지고 와서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수문장(守門將)이 군사를 시켜 으레 문틈으로 팔을 묶고 대령케 함으로써 간악한 속임수를 막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흉서를 집어 넣었을 때에는 수문장이 심상하게 놔 둔 채 그가 달아나도록 방임하였고, 요령장(搖鈴將)은 문 밖에 있으면서 흉서를 집어 넣은 사람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문 안에서 수문장이 흉서를 보고 그를 체포하도록 한 뒤에야 비로소 추격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심이 불측한 때를 당하여 기찰(譏察)하고 수직(守直)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니, 통분스럽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수문장과 요령장 모두를 각별히 살펴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잡아다 추국하라고 전교하였다.
"평상시 궐문을 닫은 뒤에 공사(公事)나 장계(狀啓)를 가지고 와서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수문장(守門將)이 군사를 시켜 으레 문틈으로 팔을 묶고 대령케 함으로써 간악한 속임수를 막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흉서를 집어 넣었을 때에는 수문장이 심상하게 놔 둔 채 그가 달아나도록 방임하였고, 요령장(搖鈴將)은 문 밖에 있으면서 흉서를 집어 넣은 사람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문 안에서 수문장이 흉서를 보고 그를 체포하도록 한 뒤에야 비로소 추격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심이 불측한 때를 당하여 기찰(譏察)하고 수직(守直)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니, 통분스럽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수문장과 요령장 모두를 각별히 살펴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잡아다 추국하라고 전교하였다.
3월 25일 갑신
전교하였다. "나라 일이 어렵고 위태로운데 대신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조리하고 속히 나와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라고 우상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라."
"나라 일이 어렵고 위태로운데 대신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조리하고 속히 나와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라고 우상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라."
전교하였다. "이런 때에 어찌 상규(常規)에 구애받아 즉시 추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부 당상과 양사가 군기시에 모여 추국한 뒤 아뢰도록 하라."
"이런 때에 어찌 상규(常規)에 구애받아 즉시 추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부 당상과 양사가 군기시에 모여 추국한 뒤 아뢰도록 하라."
예조 판서 이이첨이 아뢰기를, "신이 용렬한 재주로 누차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를 역임한 만큼, 감히 묵묵히 물러갈 수는 없기에 스스로 탄핵하는 말을 진달할까 합니다. 서궁(西宮)의 큰 변이야말로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입장에서 할 일로 이미 절목(節目)을 폄손키로 하였습니다만, 중국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해야만 폐출하는 전형이 완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괴이한 논의가 요즘 이루어져 어진 정승의 바른 의논을 무함해 끌어다 써서 굴절시키고 성상을 속이려 하였는데, 그도 후회할 줄을 알아서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삼사가 극력 변호한 것은 형세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고, 유생들이 소장을 올린 것 역시 다 함께 마음속으로 분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최심(崔沁)은 어떤 물건이기에 그만 다시 삿된 논의를 도습하여 주문(奏聞)하는 일을 떠넘기는 행동이라고 지칭하고, 대각(臺閣)이 피혐하는 것을 비위 맞추는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하나의 함정을 파서 사람들을 빠뜨리려 한단 말입니까. 당당한 대론(大論)은 묘당이 알아서 처리할텐데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한단 말입니까. 관복(冠服)을 하사하고 칙서를 내리는 명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나왔으니, 우리 쪽에서 사은(謝恩)하는 일도 두 번 행해야 할 듯한데, 앞장 서서 주문하자고 의논드린 것도 아직 완전히 결정을 못보았고, 당초 병행시키자고 청했던 사은사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는만큼, 전례(典禮)를 담당하는 직책상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종실과 조관(朝官)으로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언관이 법을 적용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다 아는 늙고 병든 자와 무록인(無祿人)·체아직(遞兒職)에 속하는 사람, 어버이의 병세가 절박했던 사람, 부자간이라 해도 벌을 달리 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죄를 씻어 주어 관대하게 용서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미를 받고 외방에 가 있었거나 병 때문에 숙배(肅拜)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가벼운 율을 적용해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충분히 법을 행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경외(京外) 유생의 경우를 보건대, 소청(疏請)에 참여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이론(異論)을 끄집어 낸 뒤 끝까지 교묘하게 피하다가 유벌(儒罰)을 당한 자들이야 본래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만, 삭적(削籍)된 숫자가 무려 2백 인에 이르고 있는데, 아무리 인심이 맑지 못하다 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많기야 하겠습니까. 혹은 혐의 때문에 함정에 빠뜨렸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초시(初試)를 못보게 하려고 쫓아냈다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비방하는 이야기들이야 이치에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이 나름대로 두려운 생각이 들기에 선비의 수치를 씻어 줄 목적으로 순제(旬製)050) 를 실시하는 날에 태학(太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관학(館學)의 재임(齋任)을 앞에 불러 놓은 뒤 그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너무 심한 자들만 남겨 놓도록 하고, 또 신의 말을 써서 유생들에게 두루 보이게 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일치되지는 않고 의기(義氣)만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 결과 시험 기일이 이미 박두했는 데도 처치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은 채, 유생들을 타이른 말조차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생을 관장하는 직책에 있는 몸으로서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익명서(匿名書)는 전하지 못하게끔 나라의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고, 무고(誣告)했을 때는 반좌(反坐)시키는 율이 또한 있습니다. 근래 익명서 때문이기도 하고 혹 무고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흉서(兇書)에 기록되기만 하면 모두 잡아들이고 고발하기만 하면 모조리 신국(訊鞫)을 행하고 있으므로,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해도 이런 식으로 보복하고, 구속된 자들이 서로들 물고 늘어져 국옥(鞫獄)이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누차 분부를 내리시고 옥사가 완전하게 되도록 한창 수고스럽게 요구하고 계시는 데도, 유사(有司)가 이 뜻을 몸받지 못하고 경중을 분변하지 못하고 있으니, 죄가 있는 자는 그래도 괜찮지만 죄 없는 자들이야 얼마나 애처롭습니까. 박적(朴賊)051) 이 도망 중에 있는 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그런데 흉서와 무고가 이를 가탁하여 서로 잇달으고 있는데, 이번에 호남에서 상변(上變)한 것도 익명서였습니다. 빈청(賓廳)에서 의논을 드린 것 가운데 신문해 보고 싶어하는 자로서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1백 인이니, 지금 만약 모두 체포할 경우에는 1천 명도 되고 1만 명도 될 텐데, 뒤에 가서 또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더구나 제왕이 역옥을 다스릴 때에는 명확하고 신중하게 하도록 힘써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오히려 다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바람 잡는 식으로 사실을 캐내려고 하는 것은 옥을 다스리는 체례(體例)에 어긋나는 것일 듯한데, 그래도 잡아 들여 신문할 경우에는 아무리 날짜를 많이 잡아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끝내는 간악한 술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지금 이 옥사를 당하여 직분을 뛰어넘어서 감히 번거롭게 해 드렸으니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궁궐의 건축 공사는 이어(移御)하시기 위함이니, 내외의 신하들로서는 그 뜻을 몸받아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제조(提調)가 너무 많음은 물론 관장하는 일이 각각 다르고, 각종 차관(差官)들은 가는 곳마다 마구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 공연히 미포(米布)의 숫자를 부풀려 작상(爵賞)을 바라고 있으므로, 강원·황해 양 도로부터 호서(湖西)·기전(畿甸)에 이르기까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으며, 닭이나 돼지까지 해침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승군(僧軍)이 무리를 지어 민간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가운데, 기와를 나르고 숯을 싣는 등 방민(坊民)의 부역은 끊일 날이 없으며, 돌을 헌납하고 철을 바치느라 명기(名器)가 오욕(汚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사(術士)들이 각기 이견을 제시하며 어지럽게 다투고 있는데, 이미 두 궁궐을 경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들 길(吉)하니 흉(凶)하니 따지면서, 그저 상대방을 함정에 몰아 넣으려고만 하고 나라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만약 효시(梟示)하지 않으면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명색이 제조이면서 제대로 감독하지 못해 이토록 구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하였으니, 참으로 죄를 면하기 어렵겠습니다. 사대(事大)하는 일이야말로 중대한 것이고, 교린(交鄰)도 그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의주(義州)·동래(東萊)·강계(江界)·회령(會寧)에 반드시 재주가 온전한 자를 가려 관문을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와붕(窩棚)으로 인해 틈이 벌어지면서 요동(遼東)과 광령(廣寧)에서 의아하게 여기고 있으며, 오랑캐가 서찰을 보내 오면서 변방 사태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동래 부사의 임기가 만료되었는 데도 후임자를 아직 내지 않은 탓으로 왜놈들의 욕이 또한 조정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비국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남을 따라 진퇴하며 일이 발생한 뒤에야 말씀을 드리니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다섯 조목의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큰 폐단들인데, 주문(奏聞)하는 일과 영건(營建)에 대해서는 수상이 의논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그 밖에 세 가지 폐단도 온 나라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아, 신은 기력이 쇠했는데 책임은 막중하고 그릇이 작아 담은 것이 넘쳐 흐릅니다. 겸대하여 관장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폐기하고 있는데, 복이 지나치면 재난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신의 본직 및 여러 겸대한 직책들을 모두 체면토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를 보고 모두 잘 알았으니 명심하도록 하겠다. 이런 때에 어찌 사퇴할 수 있는가. 조리하며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註 050] 순제(旬製) : 10일마다 실시하는 성균관 유생의 제술 시험.[註 051] 박적(朴賊) : 박치의(朴致毅).
"신이 용렬한 재주로 누차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를 역임한 만큼, 감히 묵묵히 물러갈 수는 없기에 스스로 탄핵하는 말을 진달할까 합니다.
서궁(西宮)의 큰 변이야말로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입장에서 할 일로 이미 절목(節目)을 폄손키로 하였습니다만, 중국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해야만 폐출하는 전형이 완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의 괴이한 논의가 요즘 이루어져 어진 정승의 바른 의논을 무함해 끌어다 써서 굴절시키고 성상을 속이려 하였는데, 그도 후회할 줄을 알아서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삼사가 극력 변호한 것은 형세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고, 유생들이 소장을 올린 것 역시 다 함께 마음속으로 분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최심(崔沁)은 어떤 물건이기에 그만 다시 삿된 논의를 도습하여 주문(奏聞)하는 일을 떠넘기는 행동이라고 지칭하고, 대각(臺閣)이 피혐하는 것을 비위 맞추는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하나의 함정을 파서 사람들을 빠뜨리려 한단 말입니까. 당당한 대론(大論)은 묘당이 알아서 처리할텐데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한단 말입니까. 관복(冠服)을 하사하고 칙서를 내리는 명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나왔으니, 우리 쪽에서 사은(謝恩)하는 일도 두 번 행해야 할 듯한데, 앞장 서서 주문하자고 의논드린 것도 아직 완전히 결정을 못보았고, 당초 병행시키자고 청했던 사은사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는만큼, 전례(典禮)를 담당하는 직책상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종실과 조관(朝官)으로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언관이 법을 적용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다 아는 늙고 병든 자와 무록인(無祿人)·체아직(遞兒職)에 속하는 사람, 어버이의 병세가 절박했던 사람, 부자간이라 해도 벌을 달리 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죄를 씻어 주어 관대하게 용서하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미를 받고 외방에 가 있었거나 병 때문에 숙배(肅拜)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가벼운 율을 적용해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충분히 법을 행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경외(京外) 유생의 경우를 보건대, 소청(疏請)에 참여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이론(異論)을 끄집어 낸 뒤 끝까지 교묘하게 피하다가 유벌(儒罰)을 당한 자들이야 본래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만, 삭적(削籍)된 숫자가 무려 2백 인에 이르고 있는데, 아무리 인심이 맑지 못하다 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많기야 하겠습니까. 혹은 혐의 때문에 함정에 빠뜨렸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초시(初試)를 못보게 하려고 쫓아냈다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비방하는 이야기들이야 이치에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이 나름대로 두려운 생각이 들기에 선비의 수치를 씻어 줄 목적으로 순제(旬製)050) 를 실시하는 날에 태학(太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관학(館學)의 재임(齋任)을 앞에 불러 놓은 뒤 그로 하여금 다시 조사해 너무 심한 자들만 남겨 놓도록 하고, 또 신의 말을 써서 유생들에게 두루 보이게 하였는데, 사론(士論)이 일치되지는 않고 의기(義氣)만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 결과 시험 기일이 이미 박두했는 데도 처치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은 채, 유생들을 타이른 말조차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생을 관장하는 직책에 있는 몸으로서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익명서(匿名書)는 전하지 못하게끔 나라의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고, 무고(誣告)했을 때는 반좌(反坐)시키는 율이 또한 있습니다. 근래 익명서 때문이기도 하고 혹 무고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흉서(兇書)에 기록되기만 하면 모두 잡아들이고 고발하기만 하면 모조리 신국(訊鞫)을 행하고 있으므로,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해도 이런 식으로 보복하고, 구속된 자들이 서로들 물고 늘어져 국옥(鞫獄)이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성상께서 누차 분부를 내리시고 옥사가 완전하게 되도록 한창 수고스럽게 요구하고 계시는 데도, 유사(有司)가 이 뜻을 몸받지 못하고 경중을 분변하지 못하고 있으니, 죄가 있는 자는 그래도 괜찮지만 죄 없는 자들이야 얼마나 애처롭습니까.
박적(朴賊)051) 이 도망 중에 있는 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그런데 흉서와 무고가 이를 가탁하여 서로 잇달으고 있는데, 이번에 호남에서 상변(上變)한 것도 익명서였습니다. 빈청(賓廳)에서 의논을 드린 것 가운데 신문해 보고 싶어하는 자로서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1백 인이니, 지금 만약 모두 체포할 경우에는 1천 명도 되고 1만 명도 될 텐데, 뒤에 가서 또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더구나 제왕이 역옥을 다스릴 때에는 명확하고 신중하게 하도록 힘써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오히려 다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바람 잡는 식으로 사실을 캐내려고 하는 것은 옥을 다스리는 체례(體例)에 어긋나는 것일 듯한데, 그래도 잡아 들여 신문할 경우에는 아무리 날짜를 많이 잡아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끝내는 간악한 술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지금 이 옥사를 당하여 직분을 뛰어넘어서 감히 번거롭게 해 드렸으니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궁궐의 건축 공사는 이어(移御)하시기 위함이니, 내외의 신하들로서는 그 뜻을 몸받아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제조(提調)가 너무 많음은 물론 관장하는 일이 각각 다르고, 각종 차관(差官)들은 가는 곳마다 마구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 공연히 미포(米布)의 숫자를 부풀려 작상(爵賞)을 바라고 있으므로, 강원·황해 양 도로부터 호서(湖西)·기전(畿甸)에 이르기까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으며, 닭이나 돼지까지 해침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승군(僧軍)이 무리를 지어 민간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가운데, 기와를 나르고 숯을 싣는 등 방민(坊民)의 부역은 끊일 날이 없으며, 돌을 헌납하고 철을 바치느라 명기(名器)가 오욕(汚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사(術士)들이 각기 이견을 제시하며 어지럽게 다투고 있는데, 이미 두 궁궐을 경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들 길(吉)하니 흉(凶)하니 따지면서, 그저 상대방을 함정에 몰아 넣으려고만 하고 나라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만약 효시(梟示)하지 않으면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명색이 제조이면서 제대로 감독하지 못해 이토록 구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하였으니, 참으로 죄를 면하기 어렵겠습니다.
사대(事大)하는 일이야말로 중대한 것이고, 교린(交鄰)도 그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의주(義州)·동래(東萊)·강계(江界)·회령(會寧)에 반드시 재주가 온전한 자를 가려 관문을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와붕(窩棚)으로 인해 틈이 벌어지면서 요동(遼東)과 광령(廣寧)에서 의아하게 여기고 있으며, 오랑캐가 서찰을 보내 오면서 변방 사태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동래 부사의 임기가 만료되었는 데도 후임자를 아직 내지 않은 탓으로 왜놈들의 욕이 또한 조정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비국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남을 따라 진퇴하며 일이 발생한 뒤에야 말씀을 드리니 실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다섯 조목의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큰 폐단들인데, 주문(奏聞)하는 일과 영건(營建)에 대해서는 수상이 의논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그 밖에 세 가지 폐단도 온 나라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아, 신은 기력이 쇠했는데 책임은 막중하고 그릇이 작아 담은 것이 넘쳐 흐릅니다. 겸대하여 관장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대부분 폐기하고 있는데, 복이 지나치면 재난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신의 본직 및 여러 겸대한 직책들을 모두 체면토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를 보고 모두 잘 알았으니 명심하도록 하겠다. 이런 때에 어찌 사퇴할 수 있는가. 조리하며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가도사(假都事) 이해(李垓)가 용담(龍潭)의 죄인 황대훈(黃大勳) 등 14명을 잡아 왔다. 도사 이길원(李吉元)이 장수(長水)의 죄인 한응기(韓應祺) 등 14명과 전주(全州)의 죄인 득룡(得龍) 등 4명을 잡아 왔다. 이들은 모두 익명서에 이름이 나온 자들이었다.
이 때 잇달아 국청을 설치했는데, 추안(推案) 문서가 모두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한다. 대개는 흉당이 익명서와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를 만들어 낸 다음, 조정을 위협하여 대비를 폐하려고 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3월 26일 을유
영의정 정인홍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충성심을 모두 잘 알았다. 참으로 가상하게 생각한다. 나라 일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온갖 변고가 발생하고 있다.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밤을 낮 삼아 올라와서 전화위복의 계책을 강구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가 그리워하며 한 번 보고 싶어하는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사관을 보내 이 비답을 가지고 유시하게 하라." 하였다.
"차자를 보고 충성심을 모두 잘 알았다. 참으로 가상하게 생각한다. 나라 일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온갖 변고가 발생하고 있다.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밤을 낮 삼아 올라와서 전화위복의 계책을 강구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가 그리워하며 한 번 보고 싶어하는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사관을 보내 이 비답을 가지고 유시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위에서 안질이 아직 낫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신도 한 사람 출사하는 자가 없으니 형세상 거둥하기 어렵다. 칙서를 지영하는 일은 다음 달 초승으로 물려 정하라고 해조에 이르라."
"위에서 안질이 아직 낫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신도 한 사람 출사하는 자가 없으니 형세상 거둥하기 어렵다. 칙서를 지영하는 일은 다음 달 초승으로 물려 정하라고 해조에 이르라."
생원 곽유도(郭有道)가 상소하여, 최심(崔沁)이 공의(公議)를 빙자하고서 거꾸로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배척한 죄를 다스리고, 속히 4건(件)의 일을 판하하여 빨리 주청(奏請)토록 하여 신인(神人)의 분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관학 유생 임기지(任器之) 등이 상소하기를, "속히 절목(節目)을 판하하시어 먼저 폄손하는 뜻을 보이시고, 빨리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여 폐출하는 전형(典刑)을 마무리짓도록 하소서. 이런 다음에 이송수(李松壽)와 최심 등이 남의 은밀한 사주를 듣고서 잇달아 흉소(兇疏)를 올린 죄를 다스림으로써,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날조해 모함하는 길이 두절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알아서 참작해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속히 절목(節目)을 판하하시어 먼저 폄손하는 뜻을 보이시고, 빨리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여 폐출하는 전형(典刑)을 마무리짓도록 하소서. 이런 다음에 이송수(李松壽)와 최심 등이 남의 은밀한 사주를 듣고서 잇달아 흉소(兇疏)를 올린 죄를 다스림으로써,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날조해 모함하는 길이 두절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알아서 참작해 처리할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민몽룡(閔夢龍)이 세 번째 상소를 올리니, 불윤 비답을 내리라고 전교하였다.
3월 27일 병술
전교하였다. "능침(陵寢)의 나무들을 멋대로 베어 내니 이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놀랍기 그지없다. 감년(甘年)을 잡아 국문하여 중하게 다스려라. 그리고 벌목한 곳에 즉시 다른 나무들을 가지고 가서 해조 낭청이 참봉과 동행하여 심도록 하라. 그런데 참봉은 어디에 갔기에 즉시 금지해 쫓아 보내고 첩보하지 않았단 말인가. 참봉을 국문해야 마땅하겠다마는 지금은 우선 추고하라."
"능침(陵寢)의 나무들을 멋대로 베어 내니 이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놀랍기 그지없다. 감년(甘年)을 잡아 국문하여 중하게 다스려라. 그리고 벌목한 곳에 즉시 다른 나무들을 가지고 가서 해조 낭청이 참봉과 동행하여 심도록 하라. 그런데 참봉은 어디에 갔기에 즉시 금지해 쫓아 보내고 첩보하지 않았단 말인가. 참봉을 국문해야 마땅하겠다마는 지금은 우선 추고하라."
전교하였다. "칙서를 지영하는 일은 병을 무릅쓰고라도 행해야 하겠지만 고묘제(告廟祭)는 결단코 직접 행하기가 어렵다. 윤4월 초순에서 보름 사이의 날짜를 다시 택하여, 물려 행한다는 뜻을 급히 외방에 하유하라고 해조에 일러라."
"칙서를 지영하는 일은 병을 무릅쓰고라도 행해야 하겠지만 고묘제(告廟祭)는 결단코 직접 행하기가 어렵다. 윤4월 초순에서 보름 사이의 날짜를 다시 택하여, 물려 행한다는 뜻을 급히 외방에 하유하라고 해조에 일러라."
요동 안찰사(遼東按察使)가 봉황성(鳳凰城)을 경유하고 진강(鎭江)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연위사(延慰使)가 관원을 볼 수 없었다고, 의주 부윤과 연위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3월 28일 정해
전교하였다. "죄인이 많이 들어왔으니 추관들은 일찍 모여 추국토록 하라. 다만 대신과 판의금의 병세가 어찌 마찬가지이겠는가. 종일토록 잇달아 명패를 내어 불러서 기필코 참석케 하라."
"죄인이 많이 들어왔으니 추관들은 일찍 모여 추국토록 하라. 다만 대신과 판의금의 병세가 어찌 마찬가지이겠는가. 종일토록 잇달아 명패를 내어 불러서 기필코 참석케 하라."
추국청이 아뢰기를, "죄인이 옥에 가득하여 공초 받는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문사 낭청인 사인(舍人) 정광경(鄭廣敬)이 병으로 임무를 살피지 못하니 그 대임자(代任者)를 내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대신 두 사람이 모두 병이 든 탓으로 공사(公事) 일체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으니, 이조로 하여금 즉각 파격적으로 차출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죄인이 옥에 가득하여 공초 받는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문사 낭청인 사인(舍人) 정광경(鄭廣敬)이 병으로 임무를 살피지 못하니 그 대임자(代任者)를 내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대신 두 사람이 모두 병이 든 탓으로 공사(公事) 일체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으니, 이조로 하여금 즉각 파격적으로 차출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가도사(假都事) 정연수(鄭兗岫)가 장수(長水)의 죄인 유계상(兪繼尙) 등 29명을 잡아 왔는데, 이는 익명서에 이름이 나온 자들이었다.
3월 29일 무자
정원이 아뢰기를, "오늘 좌상·우상과 판의금이 병으로 오지 않았는데, 추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내일은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국기(國忌)이므로 추국을 행하지 않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추국하라고 전교하였다.
"오늘 좌상·우상과 판의금이 병으로 오지 않았는데, 추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내일은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국기(國忌)이므로 추국을 행하지 않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그대로 추국하라고 전교하였다.
생원 이건원(李乾元) 등이 상소하였다. "주문(奏聞)하고 나서 폐출하자는 주장을 당초부터 누차 진달했는데 수상(首相)이 의논드린 것이 다행히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악한 무리들이 서궁(西宮)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송수(李松壽)가 함부로 상소한 틈을 타서 감히 얽어 모함해 보려는 꾀를 낸 나머지, 최심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동시에 논의를 주도하는 신하를 이간시키려 하고는, 그대로 도망쳐 나오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고 빨리 사신을 차출하시는 한편, 유사(有司)로 하여금 최심을 찾아내어 그가 소장을 올리고 도망친 죄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익명서로 인한 옥사가 통쾌하게 풀어지고 여정(輿情)이 위로받게 되도록 하소서."
"주문(奏聞)하고 나서 폐출하자는 주장을 당초부터 누차 진달했는데 수상(首相)이 의논드린 것이 다행히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악한 무리들이 서궁(西宮)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송수(李松壽)가 함부로 상소한 틈을 타서 감히 얽어 모함해 보려는 꾀를 낸 나머지, 최심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동시에 논의를 주도하는 신하를 이간시키려 하고는, 그대로 도망쳐 나오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속히 절목을 판하하시고 빨리 사신을 차출하시는 한편, 유사(有司)로 하여금 최심을 찾아내어 그가 소장을 올리고 도망친 죄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익명서로 인한 옥사가 통쾌하게 풀어지고 여정(輿情)이 위로받게 되도록 하소서."
3월 30일 기축
분병조(分兵曹)가 아뢰기를, "오늘 오시(午時)에 집의 임건(林健)이 순검(巡檢)할 때, 수직(守直)하는 군사들을 부장(部將)이 이끌고 와서 점검을 받았어야 마땅한데, 북소(北所)의 부장은 재삼 불러도 물러간 채 오지 않았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당해 부장을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오늘 오시(午時)에 집의 임건(林健)이 순검(巡檢)할 때, 수직(守直)하는 군사들을 부장(部將)이 이끌고 와서 점검을 받았어야 마땅한데, 북소(北所)의 부장은 재삼 불러도 물러간 채 오지 않았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당해 부장을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광해군일기[정초본]127권, 광해 10년 1618년 윤4월 (0) | 2026.01.14 |
|---|---|
| 광해군일기[정초본]126권, 광해 10년 1618년 4월 (0) | 2026.01.13 |
| 광해군일기[정초본]124권, 광해 10년 1618년 2월 (0) | 2026.01.13 |
| 광해군일기[정초본]123권, 광해 10년 1618년 1월 (0) | 2026.01.13 |
| 광해군일기[정초본]122권, 광해 9년 1617년 12월 (0) | 2026.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