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정초본]128권, 광해 10년 1618년 5월

싸라리리 2026. 1. 1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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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자

대사헌 남근(南瑾), 대사간 윤인(尹訒), 집의 임건(林健), 사간 신광업(辛光業), 장령 한영(韓詠)·강수(姜𢢝), 지평 이중계(李重繼)·신칙(申恜), 헌납 한희(韓暿), 정언 이원여(李元輿)·서국정(徐國楨)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윤유겸(尹惟謙)의 소를 보건대, 잠꼬대같은 소리를 허다하게 늘어놓아 따질 가치가 없을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벌써 치지도외(置之度外)했는데, 차례로 거론하며 그 말을 깨뜨릴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는 관학(館學) 유생들이 올린 소에까지 ‘삼사(三司)가 이렇게 배척을 받았는 데도 즉시 물러나 피혐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들이 물러나 피혐하는 일도 매우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사체(事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에 큰 일이 발생했을 경우 벼슬하지 않은 선비도 당연히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꼭 자기 의견대로 통쾌하게 행해지기를 바란 나머지 끊이지 않고 소장을 올리면서 마치 언책(言責)을 맡은 자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과 삼사야말로 임금의 팔 다리요, 눈과 귀라고 할 것인데, 비록 신과 같은 사람들이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아오게 하고 물러가게 하며 주고 뺏는 권한이 모두 벼슬하지 않는 선비의 손에서 나오게 된다면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리라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신들이 형편없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들이 어제 윤유겸(尹惟謙)의 소를 보건대, 잠꼬대같은 소리를 허다하게 늘어놓아 따질 가치가 없을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벌써 치지도외(置之度外)했는데, 차례로 거론하며 그 말을 깨뜨릴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는 관학(館學) 유생들이 올린 소에까지 ‘삼사(三司)가 이렇게 배척을 받았는 데도 즉시 물러나 피혐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들이 물러나 피혐하는 일도 매우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사체(事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에 큰 일이 발생했을 경우 벼슬하지 않은 선비도 당연히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꼭 자기 의견대로 통쾌하게 행해지기를 바란 나머지 끊이지 않고 소장을 올리면서 마치 언책(言責)을 맡은 자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과 삼사야말로 임금의 팔 다리요, 눈과 귀라고 할 것인데, 비록 신과 같은 사람들이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아오게 하고 물러가게 하며 주고 뺏는 권한이 모두 벼슬하지 않는 선비의 손에서 나오게 된다면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리라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신들이 형편없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근래 삼사의 관원들을 보면 체차되어 바뀐 자 없이 모두들 오래도록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크든 작든 일을 논할 때면 더러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도 하고 혹은 마음 내키는 대로 경중(輕重)을 정하기도 하곤 하므로 내가 속으로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서궁(西宮)에 관한 일이야 내가 어떻게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처음에는 폐출해야 한다고 논집했다가 중간에는 말을 바꿔 주문(奏聞)해야 한다고 아뢰었고 지금은 또 절목(節目)을 속히 내리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대간의 합계(合啓)와 옥당의 차자가 한꺼번에 답지하고 있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유몽인(柳夢寅)의 시에 나오는 백주(栢舟)·장검(長劍)·노간(老奸) 등의 말061)  을 보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파직 정도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런데 양사에서는 겨우 책임만 메우려 하다가 며칠이 지나자 바로 정계(停啓)하고 말았으니, 어떻게 공론을 주도하고 이목(耳目)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후에 걸쳐 뒤죽박죽으로 일을 논하며 타당성을 잃은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원은 근신(近臣)이니 이런 사정을 모두 알아두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註 061] 유몽인(柳夢寅)의 시에 나오는 백주(栢舟)·장검(長劍)·노간(老奸) 등의 말 : 유몽인이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남산 기슭에서 봄을 즐기다가 추국한다는 기별을 받고 국청(鞫廳)에 들어가서는 취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의 내용이 부도(不道)에 해당된다고 고발되었음. 그 시는 다음과 같음. "성 가득 버들 꽃 봄 나들이 즐기는데 미인이 잔 멈추고 백주장(栢舟章)을 부르누나.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짚고 서서 취중에 노간의 머리 찍으려 하는구나.[滿城花柳擁春遊 玉手停杯唱栢舟 壯士忽持長劍起 醉中當斫老奸頭]"《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태백산본 권126 10년 4월 8일조.
"근래 삼사의 관원들을 보면 체차되어 바뀐 자 없이 모두들 오래도록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크든 작든 일을 논할 때면 더러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도 하고 혹은 마음 내키는 대로 경중(輕重)을 정하기도 하곤 하므로 내가 속으로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서궁(西宮)에 관한 일이야 내가 어떻게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처음에는 폐출해야 한다고 논집했다가 중간에는 말을 바꿔 주문(奏聞)해야 한다고 아뢰었고 지금은 또 절목(節目)을 속히 내리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대간의 합계(合啓)와 옥당의 차자가 한꺼번에 답지하고 있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유몽인(柳夢寅)의 시에 나오는 백주(栢舟)·장검(長劍)·노간(老奸) 등의 말061)  을 보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파직 정도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런데 양사에서는 겨우 책임만 메우려 하다가 며칠이 지나자 바로 정계(停啓)하고 말았으니, 어떻게 공론을 주도하고 이목(耳目)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후에 걸쳐 뒤죽박죽으로 일을 논하며 타당성을 잃은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원은 근신(近臣)이니 이런 사정을 모두 알아두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양사 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스스로 진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다만 서궁(西宮)에 대한 일을 말씀드린다면, 처음에 폐출하도록 청하였고 중간에 말을 바꿔 주문(奏聞)하도록 청하였고, 지금 또 절목(節目)을 속히 내리도록 하였으니, 과연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내용이 일관된 것으로서 문자는 비록 다르지만 그 의도는 모두가 폐출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중간에 주문하도록 청하고 또 절목을 내리도록 청한 것은 모두가 순서대로 거행해야 할 일들로서 똑같이 폐출이라는 목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몽인이 추국청에서 시를 지은 일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그 일이 해괴하기 짝이 없기는 합니다만, 노간(老奸)이라는 말은 혹 지목하는 다른 대상이 없지 않을 듯도 하고 백주(栢舟) 같은 표현의 경우는 더욱 다른 뜻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파직만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로서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소견이 밝지 못한 탓으로 언관의 체통을 크게 잃었으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신들이 삼가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스스로 진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다만 서궁(西宮)에 대한 일을 말씀드린다면, 처음에 폐출하도록 청하였고 중간에 말을 바꿔 주문(奏聞)하도록 청하였고, 지금 또 절목(節目)을 속히 내리도록 하였으니, 과연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내용이 일관된 것으로서 문자는 비록 다르지만 그 의도는 모두가 폐출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중간에 주문하도록 청하고 또 절목을 내리도록 청한 것은 모두가 순서대로 거행해야 할 일들로서 똑같이 폐출이라는 목표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몽인이 추국청에서 시를 지은 일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그 일이 해괴하기 짝이 없기는 합니다만, 노간(老奸)이라는 말은 혹 지목하는 다른 대상이 없지 않을 듯도 하고 백주(栢舟) 같은 표현의 경우는 더욱 다른 뜻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파직만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로서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소견이 밝지 못한 탓으로 언관의 체통을 크게 잃었으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교리 홍요검(洪堯儉), 부수찬 최호(崔濩)가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로서 이렇듯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부당하게 논한 결과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까지 하였으니, 그대로 있으면서 양사를 처치할 수는 없습니다. 신들을 삭직해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로서 이렇듯 차지해서는 안될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부당하게 논한 결과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까지 하였으니, 그대로 있으면서 양사를 처치할 수는 없습니다. 신들을 삭직해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학(幼學) 신상연(申尙淵)이 상소하였다. "큰 판국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때에 서북 변경에 경보(警報)가 있게 되었으니 주문(奏文)을 올려 폐출하는 일이 한 시가 급하게 되었는데, 삼사의 관원들은 황덕부(黃德符)의 위세에 겁을 먹은 나머지 절목(節目)을 내리도록 하라고 재촉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속히 폐출하는 일을 거행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소서."
"큰 판국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때에 서북 변경에 경보(警報)가 있게 되었으니 주문(奏文)을 올려 폐출하는 일이 한 시가 급하게 되었는데, 삼사의 관원들은 황덕부(黃德符)의 위세에 겁을 먹은 나머지 절목(節目)을 내리도록 하라고 재촉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속히 폐출하는 일을 거행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소서."

 

부교리 홍요검, 부수찬 최호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처음에 폐출하도록 청하고 또 주문(奏聞)하도록 청하고 또 절목을 내리도록 청하였던 만큼 앞뒤의 문자가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의도를 끝까지 살펴보면 모두가 폐출하자는 것으로서 단지 차례로 거행해야 할 일들을 아뢴 것일 뿐이니, 어찌 당초의 본래 의도와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국청에서 시를 지은 일이 해괴하기 짝이 없기는 합니다만, 노간(老奸)이라는 말은 혹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백주(栢舟)의 비유 역시 다른 뜻이 개재되어 있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니 당초 파직으로 논했던 것 또한 소견이 있을 듯합니다. 모두 피혐할 일이 없으니 전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처음에 폐출하도록 청하고 또 주문(奏聞)하도록 청하고 또 절목을 내리도록 청하였던 만큼 앞뒤의 문자가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의도를 끝까지 살펴보면 모두가 폐출하자는 것으로서 단지 차례로 거행해야 할 일들을 아뢴 것일 뿐이니, 어찌 당초의 본래 의도와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국청에서 시를 지은 일이 해괴하기 짝이 없기는 합니다만, 노간(老奸)이라는 말은 혹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백주(栢舟)의 비유 역시 다른 뜻이 개재되어 있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니 당초 파직으로 논했던 것 또한 소견이 있을 듯합니다. 모두 피혐할 일이 없으니 전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 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천조에 만약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우리 나라 군신들로서는 국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평소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지 않아 왔으므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집결시키기는 형세상 불가능한데, 이런 사정은 동정(東征)한 여러 대인(大人)들이 일찍부터 환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노추(老酋)062)  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니 결코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왕사(王師)는 단지 병력을 배치하여 무위(武威)를 보여주고 크게 성세(聲勢)를 떨쳐 호랑이가 산속에 웅거하고 있는 형세를 지은 다음에 다시 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기미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만약 깊이 들어가 섣불리 행동하며 진격한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못될 듯하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군병이 잔약한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루 아침에 깊이 들여보낸다면 필시 전진(戰陣)에 임하여 먼저 동요된 나머지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걱정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군(寡君)은 생각하기를 ‘급히 군병 수천 명을 뽑아 천조의 국경과 가까운 의주(義州) 등처에 정비시켜 대기하게 한 뒤 기각(掎角)의 형세를 지어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군병을 조금이라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백 년 동안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입어 왔으므로 밤이나 낮이나 감격하면서도 보답할 길을 얻지 못했는데 또 임진년부터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덕을 중하게 받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국왕이 왕위를 이은 이래로 호소하기만 하면 반드시 들어주면서 전후에 걸쳐 선왕 때보다도 배나 은총을 쏟아주고 있다. 그러므로 혈기를 갖고 이 땅의 곡식을 먹는 우리 나라의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알고 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는 내용으로 잘 말을 만들어 기필코 허락을 얻어내도록 이잠(李埁)에게 상세히 말해 보내라."


[註 062] 노추(老酋) : 누루하치.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 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천조에 만약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우리 나라 군신들로서는 국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평소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지 않아 왔으므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집결시키기는 형세상 불가능한데, 이런 사정은 동정(東征)한 여러 대인(大人)들이 일찍부터 환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노추(老酋)062)  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니 결코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왕사(王師)는 단지 병력을 배치하여 무위(武威)를 보여주고 크게 성세(聲勢)를 떨쳐 호랑이가 산속에 웅거하고 있는 형세를 지은 다음에 다시 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기미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만약 깊이 들어가 섣불리 행동하며 진격한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못될 듯하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군병이 잔약한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루 아침에 깊이 들여보낸다면 필시 전진(戰陣)에 임하여 먼저 동요된 나머지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걱정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군(寡君)은 생각하기를 ‘급히 군병 수천 명을 뽑아 천조의 국경과 가까운 의주(義州) 등처에 정비시켜 대기하게 한 뒤 기각(掎角)의 형세를 지어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군병을 조금이라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백 년 동안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입어 왔으므로 밤이나 낮이나 감격하면서도 보답할 길을 얻지 못했는데 또 임진년부터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덕을 중하게 받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국왕이 왕위를 이은 이래로 호소하기만 하면 반드시 들어주면서 전후에 걸쳐 선왕 때보다도 배나 은총을 쏟아주고 있다. 그러므로 혈기를 갖고 이 땅의 곡식을 먹는 우리 나라의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알고 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는 내용으로 잘 말을 만들어 기필코 허락을 얻어내도록 이잠(李埁)에게 상세히 말해 보내라."

 

전교하였다. "진주사(陳奏使)를 어째서 지금까지 차출하지 않았는가. 속히 엄선해서 의차(擬差)하도록 하라."
"진주사(陳奏使)를 어째서 지금까지 차출하지 않았는가. 속히 엄선해서 의차(擬差)하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토목 공사를 내가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대내(大內)에 사고가 생겼는데 경운궁(慶運宮)에도 요망한 변고가 일어나 옮겨갈 수 없게 되었고 보면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궁궐은 공사가 엄청나게 커서 완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경덕(慶德)의 소궐(小闕)을 부득이 먼저 짓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감의 제조(提調)와 도청(都廳)이 묘궐(廟闕)과 창경궁(昌慶宮) 공사를 진행할 때와는 다르게 으레 늦은 시간에야 출근하는가 하면 종일 감독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제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청까지도 그러하니 장난삼아 공사를 하는 식이 된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리고 제조가 무려 10여 인이나 되는데 날짜 별로 나와야 할 제조도 병을 핑계대고 출근하지 않는 때가 허다하니 날이 갈수록 더욱 해이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또 나무와 돌을 운반해 오는 것도 지극히 완만하고 군정(軍丁)을 모집한 것도 극소수이다. 이처럼 세월만 보내면서 요포(料布)만 낭비하고 있는데, 한 번 징병(徵兵)을 요구하는 자문(咨文)이 나온 뒤부터는 공사를 중지하라고 다투어 청하고들 있다. 만약 노적(奴賊)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다른 일이야 어떻게 꾀하겠는가. 그러나 혹 조금씩이라도 사태가 안정되어 간다면 이미 벌채해 놓은 재목과 이미 모아놓은 미포(米布)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 일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궁실을 짓도록 명한 것은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이니, 외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다시 더 단속하여 속히 공사를 끝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
"토목 공사를 내가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대내(大內)에 사고가 생겼는데 경운궁(慶運宮)에도 요망한 변고가 일어나 옮겨갈 수 없게 되었고 보면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궁궐은 공사가 엄청나게 커서 완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경덕(慶德)의 소궐(小闕)을 부득이 먼저 짓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감의 제조(提調)와 도청(都廳)이 묘궐(廟闕)과 창경궁(昌慶宮) 공사를 진행할 때와는 다르게 으레 늦은 시간에야 출근하는가 하면 종일 감독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제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청까지도 그러하니 장난삼아 공사를 하는 식이 된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리고 제조가 무려 10여 인이나 되는데 날짜 별로 나와야 할 제조도 병을 핑계대고 출근하지 않는 때가 허다하니 날이 갈수록 더욱 해이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또 나무와 돌을 운반해 오는 것도 지극히 완만하고 군정(軍丁)을 모집한 것도 극소수이다. 이처럼 세월만 보내면서 요포(料布)만 낭비하고 있는데, 한 번 징병(徵兵)을 요구하는 자문(咨文)이 나온 뒤부터는 공사를 중지하라고 다투어 청하고들 있다. 만약 노적(奴賊)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다른 일이야 어떻게 꾀하겠는가. 그러나 혹 조금씩이라도 사태가 안정되어 간다면 이미 벌채해 놓은 재목과 이미 모아놓은 미포(米布)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 일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궁실을 짓도록 명한 것은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이니, 외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다시 더 단속하여 속히 공사를 끝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

 

5월 2일 기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상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이야말로 대단히 긴급한 사안으로서 어떻게 요리하는 계책을 세우느냐에 따라 중대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데 대신이 모두 정고(呈告) 중에 있기 때문에 군기(軍機) 일체에 대해 품재(稟裁)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사 당상이 상신(相臣)의 집으로 가서 의논하려 해도 병 때문에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므로 시급한 기무(機務)를 즉시 결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이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막중한 일에 대해서는 유사 당상이 가서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상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이야말로 대단히 긴급한 사안으로서 어떻게 요리하는 계책을 세우느냐에 따라 중대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데 대신이 모두 정고(呈告) 중에 있기 때문에 군기(軍機) 일체에 대해 품재(稟裁)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사 당상이 상신(相臣)의 집으로 가서 의논하려 해도 병 때문에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므로 시급한 기무(機務)를 즉시 결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이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막중한 일에 대해서는 유사 당상이 가서 의논해 처리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군문(軍門)의 격문(檄文)을 보건대 징병(徵兵)하는 일을 그만두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무원(撫院)의 자문(咨文)이 도착한 지 이미 반달이 지났는 데도 군병을 가려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하는 등의 사항에 대해 현재까지 계획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관하는 사람을 아직 차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체찰사와 도원수를 속히 차출하여 때가 늦은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가까운 시일 안에 차출토록 하겠다." 하였다.
"삼가 군문(軍門)의 격문(檄文)을 보건대 징병(徵兵)하는 일을 그만두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무원(撫院)의 자문(咨文)이 도착한 지 이미 반달이 지났는 데도 군병을 가려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하는 등의 사항에 대해 현재까지 계획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관하는 사람을 아직 차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체찰사와 도원수를 속히 차출하여 때가 늦은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가까운 시일 안에 차출토록 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박몽준(朴夢俊)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화근이 아직 남아 있는 데도 공론이 확립되지 않은 탓으로 간악한 무리들이 멋대로 계책을 세워 기필코 큰 일을 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명(沈之溟)은 그 동안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첫날 황덕부(黃德符)의 사주를 받고 갑자기 반궁(泮宮)에 들어와서는 재임(齋任)을 공격하면서 다른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을 끌어대며 사류(士類)를 얽어 모함하였으니, 그 계책이 참혹합니다. 먼저 두 흉도의 목을 베고 속히 큰 계책을 정하시어 폐출하는 일을 완결짓도록 하소서."
"화근이 아직 남아 있는 데도 공론이 확립되지 않은 탓으로 간악한 무리들이 멋대로 계책을 세워 기필코 큰 일을 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명(沈之溟)은 그 동안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첫날 황덕부(黃德符)의 사주를 받고 갑자기 반궁(泮宮)에 들어와서는 재임(齋任)을 공격하면서 다른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을 끌어대며 사류(士類)를 얽어 모함하였으니, 그 계책이 참혹합니다. 먼저 두 흉도의 목을 베고 속히 큰 계책을 정하시어 폐출하는 일을 완결짓도록 하소서."

 

유학 박시준(朴時俊)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삼가 양사의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온 힘을 기울여 위포(韋布)를 비난하며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론(大論)을 처음 내놓은 것도 어찌 삼사가 한 것이겠습니까. 그저 초야의 상소에 기대어 억지로 따라 폐출하기를 청하면서도 세 번이나 주장을 바꿔가며 구차하게 책임이나 메우려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거꾸로 ‘나아오게 하고 물러나게 하고 주고 뺏는 권한이 모두 위포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삼사가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들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큰 판국을 어떻게 완결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양사가 일단 전도되어 타당성을 잃었다고 죄를 승복했고 보면 옥당이 어떻게 감히 상의 유지를 어겨가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신하가 있다니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은 차마 상을 저버릴 수가 없어 한결같이 대의에 입각하여 간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큰 계책을 정하시고 조속히 폐출하는 일을 완결지으심으로써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신들이 삼가 양사의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온 힘을 기울여 위포(韋布)를 비난하며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론(大論)을 처음 내놓은 것도 어찌 삼사가 한 것이겠습니까. 그저 초야의 상소에 기대어 억지로 따라 폐출하기를 청하면서도 세 번이나 주장을 바꿔가며 구차하게 책임이나 메우려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거꾸로 ‘나아오게 하고 물러나게 하고 주고 뺏는 권한이 모두 위포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삼사가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들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큰 판국을 어떻게 완결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양사가 일단 전도되어 타당성을 잃었다고 죄를 승복했고 보면 옥당이 어떻게 감히 상의 유지를 어겨가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신하가 있다니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은 차마 상을 저버릴 수가 없어 한결같이 대의에 입각하여 간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큰 계책을 정하시고 조속히 폐출하는 일을 완결지으심으로써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하소서."

 

전교하기를, "진주사(陳奏使)로 임연(任兗)을 보내라." 하였다. 【임연이 의논드릴 때에 역시 윤휘(尹暉)와 황중윤(黃中允)에게 아부하여 의심많은 쥐가 머리를 내놓고 관망하는 것처럼 두 다리를 걸친 주장을 견지하면서 ‘중국 조정이 필시 일거에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고 말해 왕의 뜻에 영합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보내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진주사(陳奏使)로 임연(任兗)을 보내라."
하였다. 【임연이 의논드릴 때에 역시 윤휘(尹暉)와 황중윤(黃中允)에게 아부하여 의심많은 쥐가 머리를 내놓고 관망하는 것처럼 두 다리를 걸친 주장을 견지하면서 ‘중국 조정이 필시 일거에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고 말해 왕의 뜻에 영합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보내라는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전교하였다. "호위 대장(扈衛大將)은 내보낼 수 없다. 평안도 순변사로는 우치적(禹致績)을 차출해 보내라. "
"호위 대장(扈衛大將)은 내보낼 수 없다. 평안도 순변사로는 우치적(禹致績)을 차출해 보내라. "

 

비변사가 아뢰기를, "‘권반(權盼)과 정조(鄭造)가 의논드린 내용 가운데 호서(胡書)에 대한 한 조목은 지극히 긴급한 일인데 나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당초 호서가 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급히 사유를 갖춰 주문(奏聞)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지체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혹 말하기를 ‘문희현(文希賢)을 먼저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에 급히 주문해도 늦지는 않다.’고 하였으므로 문희현을 먼 지방에서 잡아들여 신문하였는데, 그러는 사이에 시일만 많이 흐른 채 아직 주문하지도 못했으므로 신들이 늘 안타깝게 여기며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원(撫院)에서 징병토록 요구하는 자문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이번의 사태는 전일과 같지 않은 만큼 징병에 대한 회자(回咨)와 호서와 관련된 자문을 한꺼번에 들여보내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한 일로 여겨지기에 도로 중지하도록 계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유신(儒臣)이 의논을 드리자 성상께서 분부하시면서 이 일을 언급하셨는데, 시기가 지나긴 하였어도 사실대로 이자(移咨)하는 것 역시 한 가지 계책이라 할 것이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미 마련케 한 자문을 급히 이잠의 행차에 뒤따라 보내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원이 올린 계사에 따라 다시 의논해서 선처토록 하라." 하였다.
"‘권반(權盼)과 정조(鄭造)가 의논드린 내용 가운데 호서(胡書)에 대한 한 조목은 지극히 긴급한 일인데 나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당초 호서가 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급히 사유를 갖춰 주문(奏聞)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지체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혹 말하기를 ‘문희현(文希賢)을 먼저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에 급히 주문해도 늦지는 않다.’고 하였으므로 문희현을 먼 지방에서 잡아들여 신문하였는데, 그러는 사이에 시일만 많이 흐른 채 아직 주문하지도 못했으므로 신들이 늘 안타깝게 여기며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원(撫院)에서 징병토록 요구하는 자문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이번의 사태는 전일과 같지 않은 만큼 징병에 대한 회자(回咨)와 호서와 관련된 자문을 한꺼번에 들여보내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한 일로 여겨지기에 도로 중지하도록 계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유신(儒臣)이 의논을 드리자 성상께서 분부하시면서 이 일을 언급하셨는데, 시기가 지나긴 하였어도 사실대로 이자(移咨)하는 것 역시 한 가지 계책이라 할 것이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미 마련케 한 자문을 급히 이잠의 행차에 뒤따라 보내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원이 올린 계사에 따라 다시 의논해서 선처토록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박정길(朴鼎吉)이 아뢰기를, "방금 보건대, 비변사에서 호서(胡書)와 관련된 자문을 이잠의 행차에 뒤따라 보내라고 아뢰었는데,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기에 신의 생각을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호서를 보건대, 내용이 흉칙하고 패려스러운 데다 고사(故事)까지 인용하였는데 이는 오랑캐의 문자가 아닌듯이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노적(老賊) 가운데 생각이 깊은 자가 있어 중국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대해 의심을 갖게끔 할 목적으로 고의로 이런 글을 지어서 동태를 살피고 서로 얽어매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즉시로 주문하여 알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한데 반 년 동안이나 시간을 끌면서 곧바로 처치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무원(撫院)의 군문(軍門)이 징병토록 요구해 왔는 데도 징병과 관련한 회자(回咨) 역시 느릿느릿하게 떠나 보낸 상황인데, 이 자문까지 아울러 한꺼번에 싸보낸다면 지극히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전일 호서가 왔을 때 우리 나라 변신(邊臣)이 특별히 회답해준 문서도 없었고 보면 노추(老酋)가 이것을 가지고 이간질하리라는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처음에 이를 감추고 지연시키다가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세는 전일과는 크게 다르니, 이잠이 들어간 뒤에 무원의 군문이 어떤 내용으로 회답을 보내는지 기다렸다가 형세를 보아가며 뒤따라 보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정지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에 대해 묘당의 신하들이 물론 빠뜨림없이 계책을 세우고 있겠습니다마는 미래의 일을 헤아려 본다면 어느 계책이 좋은 것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도 밤낮으로 이 일에 관심을 쏟으시어 누차 수고스럽게 하교하고 계시니 멀리 내다보고 염려하시는 그 지극한 뜻이야말로 정말 보통을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속히 주문사(奏聞使)를 보내야 한다고 하신 조목이야말로 현재 행해야 할 첫번째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왕실에 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제후가 그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분의(分義)로 볼 때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를 재건해 주고 온전히 보살펴 준 은혜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디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회자(回咨)의 사연을 이쪽에서 본다면 난처한 점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기미를 살펴가며 잘 도모하라고 청하고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대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중국 조정이나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나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아문(衙門)에서 경청해 줄는지의 여부를 지금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구탄(丘坦)이 우리 나라에 대해 트집을 잡으려고 계책을 꾸민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만큼 만약 이를 가지고 말꼬리를 잡아 황상(皇上)에게 전주(轉奏)하기라도 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힐책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정의(情義)가 혹 미덥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지극히 염려됩니다. 지금 만약 급히 주문(奏聞)하되, 먼저 ‘천조(天朝)가 국경에서 노적(老賊)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으므로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애를 태우며 뼈 속 깊이 통분해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말을 하고, 또 ‘무원의 군문 등이 이자(移咨)하여 징병토록 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장차 징발하여 떠나 보내려 한다.’고 말을 하고, 또 성상의 하교에 언급된 것처럼 ‘섣불리 군사 작전을 벌여 토벌하지 말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진달하고, 또 ‘황제의 조칙이 오는 대로 즉시 국경을 넘어 적지(敵地)로 가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군사 작전이 전개되기 전에 급히 보낸다면,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의 말을 당연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필시 ‘한 집안처럼 일을 같이 하려 하며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요동(遼東)·광령(廣寧)의 각 아문이 중간에서 모함하는 일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황상께서 우리 나라의 병력이 외롭고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변경이나 스스로 지키면서 울타리 역할을 견고하게 하도록 하시는 한편 요동·광령 등에 칙유(敕諭)하시어 병력을 징집하지 못하게 하실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급히 주문사를 파견한다 해서 별로 해가 될 것은 없는데 성상께서 이를 언급하여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지극히 감동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감히 신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서가 아닙니다. 현재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위급해지고 있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림으로써 성상께서 재량하여 선택하실 여지를 마련해드리고자 함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아뢴 뜻이 매우 타당하니 급히 주문해야 하겠다. 대제학으로 하여금 주문(奏文)을 속히 지어 들이게 하라." 하였다.
"방금 보건대, 비변사에서 호서(胡書)와 관련된 자문을 이잠의 행차에 뒤따라 보내라고 아뢰었는데,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하기에 신의 생각을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호서를 보건대, 내용이 흉칙하고 패려스러운 데다 고사(故事)까지 인용하였는데 이는 오랑캐의 문자가 아닌듯이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노적(老賊) 가운데 생각이 깊은 자가 있어 중국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대해 의심을 갖게끔 할 목적으로 고의로 이런 글을 지어서 동태를 살피고 서로 얽어매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즉시로 주문하여 알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한데 반 년 동안이나 시간을 끌면서 곧바로 처치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무원(撫院)의 군문(軍門)이 징병토록 요구해 왔는 데도 징병과 관련한 회자(回咨) 역시 느릿느릿하게 떠나 보낸 상황인데, 이 자문까지 아울러 한꺼번에 싸보낸다면 지극히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전일 호서가 왔을 때 우리 나라 변신(邊臣)이 특별히 회답해준 문서도 없었고 보면 노추(老酋)가 이것을 가지고 이간질하리라는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처음에 이를 감추고 지연시키다가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세는 전일과는 크게 다르니, 이잠이 들어간 뒤에 무원의 군문이 어떤 내용으로 회답을 보내는지 기다렸다가 형세를 보아가며 뒤따라 보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정지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에 대해 묘당의 신하들이 물론 빠뜨림없이 계책을 세우고 있겠습니다마는 미래의 일을 헤아려 본다면 어느 계책이 좋은 것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도 밤낮으로 이 일에 관심을 쏟으시어 누차 수고스럽게 하교하고 계시니 멀리 내다보고 염려하시는 그 지극한 뜻이야말로 정말 보통을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속히 주문사(奏聞使)를 보내야 한다고 하신 조목이야말로 현재 행해야 할 첫번째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왕실에 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제후가 그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분의(分義)로 볼 때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를 재건해 주고 온전히 보살펴 준 은혜가 있는 데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디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회자(回咨)의 사연을 이쪽에서 본다면 난처한 점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기미를 살펴가며 잘 도모하라고 청하고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대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중국 조정이나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나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아문(衙門)에서 경청해 줄는지의 여부를 지금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구탄(丘坦)이 우리 나라에 대해 트집을 잡으려고 계책을 꾸민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만큼 만약 이를 가지고 말꼬리를 잡아 황상(皇上)에게 전주(轉奏)하기라도 한다면 중국 조정에서 힐책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정의(情義)가 혹 미덥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지극히 염려됩니다.
지금 만약 급히 주문(奏聞)하되, 먼저 ‘천조(天朝)가 국경에서 노적(老賊)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으므로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애를 태우며 뼈 속 깊이 통분해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말을 하고, 또 ‘무원의 군문 등이 이자(移咨)하여 징병토록 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장차 징발하여 떠나 보내려 한다.’고 말을 하고, 또 성상의 하교에 언급된 것처럼 ‘섣불리 군사 작전을 벌여 토벌하지 말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진달하고, 또 ‘황제의 조칙이 오는 대로 즉시 국경을 넘어 적지(敵地)로 가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군사 작전이 전개되기 전에 급히 보낸다면,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의 말을 당연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필시 ‘한 집안처럼 일을 같이 하려 하며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요동(遼東)·광령(廣寧)의 각 아문이 중간에서 모함하는 일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황상께서 우리 나라의 병력이 외롭고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변경이나 스스로 지키면서 울타리 역할을 견고하게 하도록 하시는 한편 요동·광령 등에 칙유(敕諭)하시어 병력을 징집하지 못하게 하실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급히 주문사를 파견한다 해서 별로 해가 될 것은 없는데 성상께서 이를 언급하여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지극히 감동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은 감히 신의 견해가 옳다고 여겨서가 아닙니다. 현재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위급해지고 있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림으로써 성상께서 재량하여 선택하실 여지를 마련해드리고자 함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아뢴 뜻이 매우 타당하니 급히 주문해야 하겠다. 대제학으로 하여금 주문(奏文)을 속히 지어 들이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이잠의 상소 안에 진달된 내용을 보건대, 회자(回咨)가 지체된 것에 대해 각 아문에서 괴이하게 여겨 힐문할까 염려하였는데, 이 점을 신들도 일찍이 걱정하여 속히 보내자고 누차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자문에 첨가해 넣을 내용을 연속적으로 하교하셨기 때문에 논의하여 점검하며 고치는 사이에 자연히 지연되고 말았는데, 우리 사정이 이렇다 해서 그렇게 답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지금 마땅히 ‘우리 나라는 본래 병사(兵事)를 모르고 병(兵)·농(農)을 구분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병력을 징발하는 일을 맞게 되었으니, 군병을 가려 뽑아 약간 두서가 있게 된 뒤에야 노야(老爺)에게 답변할 수 있겠기에 날짜가 조금 지체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다. 황공하기 그지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억지로 꾸며낸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밖에는 더이상 대답할 말이 없으니, 오직 사명(使命)을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대답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수(元帥)의 이름을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어찌 물어보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설령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임기응변으로 답변할 말이야 없겠습니까. 그때에 당하여 물어보는 대로 적절하게 답변하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어떤 일이든 사실에 입각하여 바른 대로 설명해야 한다. 어찌 말을 꾸며서야 되겠는가. 곧장 ‘우리 나라 군병은 본래 병·농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데 뜻밖에도 갑자기 병력을 징집하는 일을 듣게 되었다. 반드시 국내 각처에 방수(防守)하는 군병의 수를 자세히 헤아려 단속한 다음에 회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체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대답하게 하라. 그리고 ‘국왕이 지난해 겨울부터 병환이 들었다가 이제와서야 조금 차도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은(謝恩)하는 막중한 일에 대해 이제야 표문(表文)을 올리게 된 점 역시 황공스럽게 생각하는데, 회답이 조금 지체된 것도 이 때문이므로 두려운 심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말로 임기응변해서 잘 답변할 일을 상세히 의논한 뒤 분부해서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원수에 대한 일은 전해서 이야기해 줄 필요없이 총병관(摠兵官)으로 답변하게 해도 무방할 것이니, 이런 뜻을 상세히 의논한 뒤 말해 보내라. 또 ‘두서가 약간 있게 된 뒤에’라는 말같은 것은 착실하지 못한 듯하니 거론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삼가 이잠의 상소 안에 진달된 내용을 보건대, 회자(回咨)가 지체된 것에 대해 각 아문에서 괴이하게 여겨 힐문할까 염려하였는데, 이 점을 신들도 일찍이 걱정하여 속히 보내자고 누차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자문에 첨가해 넣을 내용을 연속적으로 하교하셨기 때문에 논의하여 점검하며 고치는 사이에 자연히 지연되고 말았는데, 우리 사정이 이렇다 해서 그렇게 답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지금 마땅히 ‘우리 나라는 본래 병사(兵事)를 모르고 병(兵)·농(農)을 구분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병력을 징발하는 일을 맞게 되었으니, 군병을 가려 뽑아 약간 두서가 있게 된 뒤에야 노야(老爺)에게 답변할 수 있겠기에 날짜가 조금 지체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다. 황공하기 그지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책임을 회피하려고 억지로 꾸며낸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밖에는 더이상 대답할 말이 없으니, 오직 사명(使命)을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대답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수(元帥)의 이름을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어찌 물어보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설령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임기응변으로 답변할 말이야 없겠습니까. 그때에 당하여 물어보는 대로 적절하게 답변하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어떤 일이든 사실에 입각하여 바른 대로 설명해야 한다. 어찌 말을 꾸며서야 되겠는가. 곧장 ‘우리 나라 군병은 본래 병·농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데 뜻밖에도 갑자기 병력을 징집하는 일을 듣게 되었다. 반드시 국내 각처에 방수(防守)하는 군병의 수를 자세히 헤아려 단속한 다음에 회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체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대답하게 하라. 그리고 ‘국왕이 지난해 겨울부터 병환이 들었다가 이제와서야 조금 차도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은(謝恩)하는 막중한 일에 대해 이제야 표문(表文)을 올리게 된 점 역시 황공스럽게 생각하는데, 회답이 조금 지체된 것도 이 때문이므로 두려운 심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말로 임기응변해서 잘 답변할 일을 상세히 의논한 뒤 분부해서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원수에 대한 일은 전해서 이야기해 줄 필요없이 총병관(摠兵官)으로 답변하게 해도 무방할 것이니, 이런 뜻을 상세히 의논한 뒤 말해 보내라. 또 ‘두서가 약간 있게 된 뒤에’라는 말같은 것은 착실하지 못한 듯하니 거론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변방의 병사(兵事)가 하루가 다르게 급해지고 있는데 군사를 조발(調發)하는 것 외에도 군량을 조치하는 일을 먼저 강구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해조에서 필시 빠짐없이 계획하고 있겠습니다만 만약 주관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경우에는 일이 혹시 해이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윤수겸(尹守謙)은 전에 조도사(調度使)로 내려가 두 번이나 요리하면서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 백성을 그다지 동요시키지 않고도 가장 넉넉하게 재화(財貨)를 얻었다고 하니, 이 사람을 도로 내려보내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작미(作米)하여 곡식을 얻는 일체의 계책에 대하여 해조로 하여금 착실히 강구하여 급히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서쪽 변방의 병사(兵事)가 하루가 다르게 급해지고 있는데 군사를 조발(調發)하는 것 외에도 군량을 조치하는 일을 먼저 강구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해조에서 필시 빠짐없이 계획하고 있겠습니다만 만약 주관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경우에는 일이 혹시 해이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윤수겸(尹守謙)은 전에 조도사(調度使)로 내려가 두 번이나 요리하면서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 백성을 그다지 동요시키지 않고도 가장 넉넉하게 재화(財貨)를 얻었다고 하니, 이 사람을 도로 내려보내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작미(作米)하여 곡식을 얻는 일체의 계책에 대하여 해조로 하여금 착실히 강구하여 급히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잠이 요광 군문 무원(遼廣軍門撫院)에 보내는 회자(回咨)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오랑캐의 정세에 관한 일을 알려드립니다. 금년 윤4월 12일에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 관비왜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都察院右僉都御史) 이(李)가 전사(前事)에 관해 운운(云云)한 자문(咨文)을 받았습니다. 이에 의정부에 행하(行下)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올린 장계를 받아 보건대, ‘신들이 조사해 보건대, 앞서 만력(萬曆) 43년 3월에 전 무원(撫院) 곽 분수도(郭分守道)의 백자(白咨)를 받았는데 모두 전사에 관한 일로서, 이미 사유를 갖추어 회답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대(撫臺) 아문에서 보내온 자문을 보건대, 또 노추(老酋)가 반역하여 큰 죄를 범한 것을 내용으로 이자(移咨)하면서, 더욱 엄히 대비해 연합작전을 벌여서 노적(老賊)을 섬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헤아려 보건대, 저 오랑캐는 하나의 위(衛)에 소속된 조그마한 부족에 불과했는데, 몇 개의 부락을 병합한 뒤로는 자기 소굴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국의 변경까지 엿보아 온 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다. 계속 흉악한 일을 해 오다가 하늘을 욕하고 태양을 보고 짖으면서 감히 우리 부모의 나라를 범했으니,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동개를 차고서 왕사(王師)의 뒤를 따라 목숨바쳐 보답할 것을 모두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이 적으로 하여금 목숨을 부지하고 정신을 놀리게 하여 뱀이나 멧돼지 같은 독기를 마음대로 부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마땅히 천조(天朝)가 토벌하는 기회에 황제의 신령스러움을 의지해서 태산처럼 묵중한 힘에 일조(一助)를 하여 계란을 짓누르고 푸른 바다처럼 드넓은 물에 한 방울을 더하여 반딧불을 꺼버려야 할 것이니, 바른 것으로 장함을 삼아 있는 힘을 모두 쏟고 의로써 용맹함을 삼는다면 어느 곳을 지킨들 이롭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자문 안의 내용을 가지고 제로(諸路)의 장령(將領)에게 명령하여 기일 내로 엄선하고 부오(部伍)를 단속하게 한 뒤 천병(天兵)이 정벌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약한 대로 함께 거병하도록 하소서. 한편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사면으로 적을 맞아 동쪽과 남쪽은 왜적을 방어하고 서쪽과 북쪽은 오랑캐를 대비하고 있는데 연변(沿邊) 장보(障堡)를 지키는 것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왜란을 겪은 뒤로는 병적(兵籍)이 감축되고 국력도 신장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난해 회자(回咨)하면서 대략 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기수(火器手) 7천을 보내라고 하였습니다만 이 숫자는 우리 나라의 바다를 방어하는 각처 병력의 총수로서 그 때 차견(差遣)했던 배신(陪臣)이 양 아문의 질문을 받고 입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이번에 무원(撫院)이 교활한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히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대군을 일으켜 토벌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 가운데, 우리 나라가 적의 소굴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놀라 동요될 염려도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신중하게 대비하도록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 일을 염려하여 일에 앞서서 대책을 강구해주는 면에 있어서 정말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틈을 살피고 있는 섬 오랑캐가 바다를 건너올 걱정이 없지 않고 위축된 건추(建酋)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들이받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 만약 방수(防守)하는 인원을 모조리 조발(調發)하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각 부대에서 뽑아낸다면 액수(額數)가 많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경영(京營)의 각색(各色) 군사를 취합하고 중외(中外)의 여정(餘丁)을 뭉뚱그려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정예를 뽑지 못한 부끄러움은 있어도 7천의 숫자는 그런대로 채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군대는 본래부터 무르고 약한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은 그중에서도 더욱 능하지 못하니, 만약 단독으로 한 면을 맡겨 협격(挾擊)하는 일을 전담시킨다면 전승을 거둘 훌륭한 계책이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군병을 선발해 국경에 주둔시켜서 성세를 도와 떨치게 하고 상황에 따라 명령을 받으면서 사태의 진전을 살펴 진퇴해야 할 것이며, 작전을 전개하는 시기와 섬멸시킬 방략 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원의 명백한 지휘를 받으면서 서로 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살피건대 보잘것없는 저 적추(賊酋)가 우리의 대방(大邦)을 모욕했으니 제후의 입장에 있는 자로서 그 누가 토벌하기를 청하지 않겠습니까. 관장하는 부서를 신칙하고 인도하여 군병을 선발하게 하는 한편 맹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세력을 의지하고 우레와 같은 위엄을 찬조하면서 속히 출발해 이 흉적을 제거할 수 있게 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귀원(貴院)에서 좋은 꾀를 이루고 형세를 살펴 움직이며 작전을 신중하게 전개하여 만전을 기할 것은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사항들을 살펴 다시 분명하게 교시해 줌으로써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정돈하여 따를 수 있다면, 더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
"조선 국왕은 오랑캐의 정세에 관한 일을 알려드립니다. 금년 윤4월 12일에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 관비왜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都察院右僉都御史) 이(李)가 전사(前事)에 관해 운운(云云)한 자문(咨文)을 받았습니다. 이에 의정부에 행하(行下)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올린 장계를 받아 보건대, ‘신들이 조사해 보건대, 앞서 만력(萬曆) 43년 3월에 전 무원(撫院) 곽 분수도(郭分守道)의 백자(白咨)를 받았는데 모두 전사에 관한 일로서, 이미 사유를 갖추어 회답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대(撫臺) 아문에서 보내온 자문을 보건대, 또 노추(老酋)가 반역하여 큰 죄를 범한 것을 내용으로 이자(移咨)하면서, 더욱 엄히 대비해 연합작전을 벌여서 노적(老賊)을 섬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헤아려 보건대, 저 오랑캐는 하나의 위(衛)에 소속된 조그마한 부족에 불과했는데, 몇 개의 부락을 병합한 뒤로는 자기 소굴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국의 변경까지 엿보아 온 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다. 계속 흉악한 일을 해 오다가 하늘을 욕하고 태양을 보고 짖으면서 감히 우리 부모의 나라를 범했으니,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동개를 차고서 왕사(王師)의 뒤를 따라 목숨바쳐 보답할 것을 모두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이 적으로 하여금 목숨을 부지하고 정신을 놀리게 하여 뱀이나 멧돼지 같은 독기를 마음대로 부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마땅히 천조(天朝)가 토벌하는 기회에 황제의 신령스러움을 의지해서 태산처럼 묵중한 힘에 일조(一助)를 하여 계란을 짓누르고 푸른 바다처럼 드넓은 물에 한 방울을 더하여 반딧불을 꺼버려야 할 것이니, 바른 것으로 장함을 삼아 있는 힘을 모두 쏟고 의로써 용맹함을 삼는다면 어느 곳을 지킨들 이롭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자문 안의 내용을 가지고 제로(諸路)의 장령(將領)에게 명령하여 기일 내로 엄선하고 부오(部伍)를 단속하게 한 뒤 천병(天兵)이 정벌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약한 대로 함께 거병하도록 하소서.
한편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사면으로 적을 맞아 동쪽과 남쪽은 왜적을 방어하고 서쪽과 북쪽은 오랑캐를 대비하고 있는데 연변(沿邊) 장보(障堡)를 지키는 것도 흡족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왜란을 겪은 뒤로는 병적(兵籍)이 감축되고 국력도 신장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난해 회자(回咨)하면서 대략 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기수(火器手) 7천을 보내라고 하였습니다만 이 숫자는 우리 나라의 바다를 방어하는 각처 병력의 총수로서 그 때 차견(差遣)했던 배신(陪臣)이 양 아문의 질문을 받고 입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이번에 무원(撫院)이 교활한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히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대군을 일으켜 토벌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 가운데, 우리 나라가 적의 소굴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놀라 동요될 염려도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신중하게 대비하도록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 일을 염려하여 일에 앞서서 대책을 강구해주는 면에 있어서 정말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틈을 살피고 있는 섬 오랑캐가 바다를 건너올 걱정이 없지 않고 위축된 건추(建酋)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들이받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 만약 방수(防守)하는 인원을 모조리 조발(調發)하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각 부대에서 뽑아낸다면 액수(額數)가 많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경영(京營)의 각색(各色) 군사를 취합하고 중외(中外)의 여정(餘丁)을 뭉뚱그려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정예를 뽑지 못한 부끄러움은 있어도 7천의 숫자는 그런대로 채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군대는 본래부터 무르고 약한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은 그중에서도 더욱 능하지 못하니, 만약 단독으로 한 면을 맡겨 협격(挾擊)하는 일을 전담시킨다면 전승을 거둘 훌륭한 계책이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군병을 선발해 국경에 주둔시켜서 성세를 도와 떨치게 하고 상황에 따라 명령을 받으면서 사태의 진전을 살펴 진퇴해야 할 것이며, 작전을 전개하는 시기와 섬멸시킬 방략 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원의 명백한 지휘를 받으면서 서로 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살피건대 보잘것없는 저 적추(賊酋)가 우리의 대방(大邦)을 모욕했으니 제후의 입장에 있는 자로서 그 누가 토벌하기를 청하지 않겠습니까. 관장하는 부서를 신칙하고 인도하여 군병을 선발하게 하는 한편 맹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세력을 의지하고 우레와 같은 위엄을 찬조하면서 속히 출발해 이 흉적을 제거할 수 있게 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귀원(貴院)에서 좋은 꾀를 이루고 형세를 살펴 움직이며 작전을 신중하게 전개하여 만전을 기할 것은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사항들을 살펴 다시 분명하게 교시해 줌으로써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정돈하여 따를 수 있다면, 더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

 

격문에 답한 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경력 어왜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經略禦倭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왕(汪)으로부터 ‘우리 대명(大明)의 위령(威靈) 운운’ 하는 격문을 받았습니다. 당직(當職)이 살피건대, 성천자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극한 은택이 멀리까지 퍼지고 신령스러운 교화가 널리 미쳐 하늘에는 요기(妖氣)가 걷히고 바다에는 물결 하나 일지 않게 되면서 삼 면의 변방에 비상을 알리는 조두(刁斗) 소리가 끊어지고 오랑캐 땅에 의관(衣冠)의 풍속이 이루어진 지가 40여 년째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보잘것없는 건이(建夷)063)  가 여진(女眞)의 후손으로서 자기 소굴에 웅거하여 부족들을 병합한 뒤 감히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생성의 덕을 끊어버렸습니다. 유묘(有苗)가 따르지 않았어도 우(虞)의 정벌을 일으키지 않았고 험윤(玁狁)이 온순하게 굴지 않았어도 주(周)의 토벌을 늦춰 왔는데,064)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그들의 악이 하늘에까지 닿도록 쌓여 시기를 틈타 도발해 온 결과 높은 성벽도 저돌적인 공격에 그 험난함을 잃고 장사들도 말가죽에 시체를 싸게끔 되고 말았습니다. 대국을 모욕하고 황제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아직 난에 달려가지 못한 번국(藩國)의 입장에서는 그 누가 소매를 떨치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말을 몰아 들어가 월지(月氐)의 목을 자르고 노상(老上)의 궁궐을 쟁기질하고065)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임진년에 만이(蠻夷)가 독기를 부려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상국을 범하려고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결딴나고 온 나라가 폐허로 변했는데 다행히 중국에서 위급함을 구해주시면서 장수에게 명해 동정(東征)토록 해 주신 은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검이 번쩍이는 곳에 달마다 승첩의 주문이 올라가게 되면서 종묘 사직이 보전되고 나라를 지키며 망하게 될 근심을 잊게 되었으므로 이 나라 군신이 모두 큰 덕을 떠받들고 한 마음으로 감격스러워 하면서 몇 번이라도 목숨을 바쳐 보답할 길을 찾고자 해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상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토벌을 가하려 하는데 왕사(王師)가 빠를 경우 6월에 일어나면 바로 그때 오랑캐의 운세도 백 년만에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때에 왕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진격하면서 우리의 병장기를 시험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니 어찌 감히 기일에 뒤쳐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 나라가 위태로움을 보고 은혜를 생각하며 난에 임해 의기를 떨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전에 무원의 자문을 받고는 이미 그 일을 관장하는 배신(陪臣)으로 하여금 변방에 원래 조련해 두었던 병사를 적당히 뽑게 하는 한편 내지의 병적(兵籍)에 편입된 군졸들을 징집하는 등 편의에 따라 미리 조발해 둠으로써 지휘를 받을 수 있도록 대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 격서(檄書)를 받들고는 재차 신칙하여 기계를 정비토록 하고 시기를 살펴 떠나 보내는데 편리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사면으로 적을 맞고 있는 처지로서 동쪽과 남쪽은 왜적을 방비하고 서쪽과 북쪽은 오랑캐를 대비하고 있는데 연변과 장보(障堡)를 지킬 군사도 충분히 조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왜란을 겪고 난 뒤로는 병적이 감축되어 군사와 물자가 얼마 되지 않는데 바다를 방어하는 곳의 화수(火手)를 보면 병적을 통틀어 모두 7천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지난해 자문으로 회답할 때에도 대개 진달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섬 오랑캐가 틈을 엿보고 있으니 바다를 건너올 걱정이 없지 않고 건추(建酋)가 궁지에 몰렸으니 분명히 필사적으로 저항해 올 가능성이 있는데, 지금 만약 방수(防守)하는 군졸을 모조리 조발한다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각 부대에서 조금씩 뽑아낸다면 인원 수가 많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응당 경영(京營)의 제색군(諸色軍)을 취합하고 중외(中外)의 여정(餘丁)을 뭉뚱그려야 하겠는데, 그러면 수만 군대를 충당하기야 물론 어렵겠지만 7천 병력쯤은 그런대로 뽑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군졸은 실로 정예가 못됩니다. 그리고 병(兵)과 농(農)을 분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조련을 잘 못하고 있으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은 더더욱 장기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정(東征)한 장수들 모두가 실제로 그 모습을 보고 취약하다고 지적했으니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국경에 그대로 주둔하면서 성세(聲勢)를 이루게 하거나 곧장 소굴로 통하는 사잇길을 차단하여 궁지에 몰린 적의 잔당들을 막게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는 그야말로 역량에 관계된 문제라서 그렇지 어찌 감히 용기있게 나서는 것을 사양하려 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생각건대 귀부(貴部)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계요(薊遼)를 총독하고 있는 만큼 우리 나라에 영향력을 끼치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토죄(討罪)하는 일을 당하여 흉적을 제거할 뜻을 더욱 가다듬고 있을텐데 앉은 자리에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손바닥 안에서 적을 요리하면서 기책(奇策)을 내고 만전(萬全)을 기하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가 품고(稟告)한 일에 대해서 영단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거할 작전 개시 일자와 진공(進攻)할 방략 등에 대해 청컨대 귀부에서 자세히 형세를 살펴 명백히 지휘해 줌으로써 우리 나라로 하여금 받들어 수행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


[註 063] 건이(建夷) : 건주위(建州衛)의 여진족.[註 064] 유묘(有苗)가 따르지 않았어도 우(虞)의 정벌을 일으키지 않았고 험윤(玁狁)이 온순하게 굴지 않았어도 주(周)의 토벌을 늦춰 왔는데, : 강공 대신 유화책을 썼다는 말임. 유묘는 남방의 만족(蠻族)으로서 삼묘(三苗)를 말함. 순이 요를 대신해 섭정할 때 그들을 삼위(三危)에 내쫓고 또 우(禹)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음.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험윤은 흉노(匈奴)의 별명으로 주나라 말기에 오랑캐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을 떨쳤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미(采薇)는 험윤을 막기 위해 수자리 사는 병사의 애환을 그리고 있으며, 《맹자(孟子)》 주문공(周文公) 하(下)에 주공(周公)이 융적(戎狄)을 응징했다고 하였음.[註 065] 월지(月氐)의 목을 자르고 노상(老上)의 궁궐을 쟁기질하고 : 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는 뜻임. 《사기(史記)》 대완전(大宛傳)에 "흉노가 월지의 왕을 격파한 뒤에 그 두개골로 음기(飮器)를 삼았다." 하였으며,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하(下)에 "반고(班固)가 그 궁궐을 쟁기질하고 민간 집들을 쓸어버렸다." 하였는데, 노상(老上)은 흉노족 선우(單于)의 이름임.
"조선 국왕은 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경력 어왜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經略禦倭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왕(汪)으로부터 ‘우리 대명(大明)의 위령(威靈) 운운’ 하는 격문을 받았습니다.
당직(當職)이 살피건대, 성천자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극한 은택이 멀리까지 퍼지고 신령스러운 교화가 널리 미쳐 하늘에는 요기(妖氣)가 걷히고 바다에는 물결 하나 일지 않게 되면서 삼 면의 변방에 비상을 알리는 조두(刁斗) 소리가 끊어지고 오랑캐 땅에 의관(衣冠)의 풍속이 이루어진 지가 40여 년째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보잘것없는 건이(建夷)063)  가 여진(女眞)의 후손으로서 자기 소굴에 웅거하여 부족들을 병합한 뒤 감히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생성의 덕을 끊어버렸습니다. 유묘(有苗)가 따르지 않았어도 우(虞)의 정벌을 일으키지 않았고 험윤(玁狁)이 온순하게 굴지 않았어도 주(周)의 토벌을 늦춰 왔는데,064)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그들의 악이 하늘에까지 닿도록 쌓여 시기를 틈타 도발해 온 결과 높은 성벽도 저돌적인 공격에 그 험난함을 잃고 장사들도 말가죽에 시체를 싸게끔 되고 말았습니다. 대국을 모욕하고 황제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아직 난에 달려가지 못한 번국(藩國)의 입장에서는 그 누가 소매를 떨치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말을 몰아 들어가 월지(月氐)의 목을 자르고 노상(老上)의 궁궐을 쟁기질하고065)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임진년에 만이(蠻夷)가 독기를 부려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상국을 범하려고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결딴나고 온 나라가 폐허로 변했는데 다행히 중국에서 위급함을 구해주시면서 장수에게 명해 동정(東征)토록 해 주신 은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검이 번쩍이는 곳에 달마다 승첩의 주문이 올라가게 되면서 종묘 사직이 보전되고 나라를 지키며 망하게 될 근심을 잊게 되었으므로 이 나라 군신이 모두 큰 덕을 떠받들고 한 마음으로 감격스러워 하면서 몇 번이라도 목숨을 바쳐 보답할 길을 찾고자 해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상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토벌을 가하려 하는데 왕사(王師)가 빠를 경우 6월에 일어나면 바로 그때 오랑캐의 운세도 백 년만에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때에 왕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진격하면서 우리의 병장기를 시험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니 어찌 감히 기일에 뒤쳐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 나라가 위태로움을 보고 은혜를 생각하며 난에 임해 의기를 떨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전에 무원의 자문을 받고는 이미 그 일을 관장하는 배신(陪臣)으로 하여금 변방에 원래 조련해 두었던 병사를 적당히 뽑게 하는 한편 내지의 병적(兵籍)에 편입된 군졸들을 징집하는 등 편의에 따라 미리 조발해 둠으로써 지휘를 받을 수 있도록 대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 격서(檄書)를 받들고는 재차 신칙하여 기계를 정비토록 하고 시기를 살펴 떠나 보내는데 편리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사면으로 적을 맞고 있는 처지로서 동쪽과 남쪽은 왜적을 방비하고 서쪽과 북쪽은 오랑캐를 대비하고 있는데 연변과 장보(障堡)를 지킬 군사도 충분히 조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왜란을 겪고 난 뒤로는 병적이 감축되어 군사와 물자가 얼마 되지 않는데 바다를 방어하는 곳의 화수(火手)를 보면 병적을 통틀어 모두 7천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지난해 자문으로 회답할 때에도 대개 진달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섬 오랑캐가 틈을 엿보고 있으니 바다를 건너올 걱정이 없지 않고 건추(建酋)가 궁지에 몰렸으니 분명히 필사적으로 저항해 올 가능성이 있는데, 지금 만약 방수(防守)하는 군졸을 모조리 조발한다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각 부대에서 조금씩 뽑아낸다면 인원 수가 많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응당 경영(京營)의 제색군(諸色軍)을 취합하고 중외(中外)의 여정(餘丁)을 뭉뚱그려야 하겠는데, 그러면 수만 군대를 충당하기야 물론 어렵겠지만 7천 병력쯤은 그런대로 뽑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군졸은 실로 정예가 못됩니다. 그리고 병(兵)과 농(農)을 분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조련을 잘 못하고 있으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은 더더욱 장기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정(東征)한 장수들 모두가 실제로 그 모습을 보고 취약하다고 지적했으니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국경에 그대로 주둔하면서 성세(聲勢)를 이루게 하거나 곧장 소굴로 통하는 사잇길을 차단하여 궁지에 몰린 적의 잔당들을 막게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는 그야말로 역량에 관계된 문제라서 그렇지 어찌 감히 용기있게 나서는 것을 사양하려 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생각건대 귀부(貴部)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계요(薊遼)를 총독하고 있는 만큼 우리 나라에 영향력을 끼치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토죄(討罪)하는 일을 당하여 흉적을 제거할 뜻을 더욱 가다듬고 있을텐데 앉은 자리에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손바닥 안에서 적을 요리하면서 기책(奇策)을 내고 만전(萬全)을 기하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가 품고(稟告)한 일에 대해서 영단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거할 작전 개시 일자와 진공(進攻)할 방략 등에 대해 청컨대 귀부에서 자세히 형세를 살펴 명백히 지휘해 줌으로써 우리 나라로 하여금 받들어 수행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

 

우부승지 이위경(李偉卿)이 아뢰기를, "천하의 형세를 보건대 장차 병란(兵亂)의 단서가 열리려 하는데 우리 나라에까지 재앙이 미칠까 이 점이 염려됩니다. 이번에 군문(軍門)이 이자(移咨)하면서 6월에 작전을 개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만 신은 실제로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갑인년에 요좌(遼左)를 지키는 신하가 노추(老酋)를 정토(征討)하기 어렵다는 주제로 제본(題本)을 올렸는데, 신이 어떤 사람에게 듣건대 ‘요동을 지키는 군사가 2만에도 차지 않고, 변보(邊堡)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를 지키는 군사에 약간의 원액(元額)이 있기는 하지만 본래 이동시킬 수 없는 병력이다.’ 하였습니다. 그런 반면 노추의 경우는 새로 홀적(忽賊)을 멸망시키고 여허(如許) 부족을 몰아내는가 하면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만 리에 걸쳐 연합전선을 펴고 있으니 천하의 정병(精兵)을 동원해도 섬멸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데 2만 명의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찌는 듯한 6월에 그들을 치러가다니 이런 일은 병가(兵家)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산관(山關)은 내와 골짜기로 뒤덮여 있고 호지(胡地)는 험준하기만 한데 초목이 땅에 쌓이고 달을 연이어 장맛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찌는 더위를 무릅쓰고 무리를 동원하여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만, 이쪽에서 범하기 어려운 사정은 마치 저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와 똑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선복(李善復)과 안응형(安應亨) 등이 6월이라는 두 글자를 끄집어내어 작전 시기로 삼고 있으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깜깜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충분히 보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만 치면서 이렇게 도성 백성에게 짐을 지워 대기시켜 놓고는 안될 일을 윽박지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일을 그 누가 침을 찔러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근일 시의(時議)를 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크게 구별됩니다. 한 쪽에서는 ‘임진 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는 등 멸망당하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은혜가 흘러 넘치니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왕사(王師)를 따라 군전(軍前)에서 목숨을 바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7천의 숫자를 반감(半減)해 참혹하게 결딴난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양서(兩西)에서 군병을 뽑아내 군문의 징소(徵召)하는 일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있는데 양 쪽의 주장에 참으로 일리가 있긴 합니다만, 초(楚)나라 태양이 이미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 앉아 이야기만 할 뿐 결말이 날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066) 그런데 지금 떠난 이잠 역시 전말을 모르고 있는데 곧장 군문에 나아갔다가 힐책이라도 받게 되면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신은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원적(源賊)067)  이 새로 국내를 병합하고 남쪽 변방에서 고집세게 굴고 있는데, 우리 나라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요동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쳐들어와 빈 곳을 공격한다면 형세상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 조정이 국내의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이번 흔단에 종사하면서 계속 노추(老酋)의 소굴에 위엄을 가한다면 막다른 골목에 쫓긴 도적이 필시 우리 나라의 변방에서 무너지게 될텐데 이를 어떻게 막고 지켜내겠는가. 소탕에 따른 화를 바로 받게 될 것이다. 입술과 이빨같은 형세를 잃게 되어 다리가 차고 심장이 상하는 지경이 되면 천조에서 비록 한결같은 자세로 사랑해주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우되, 만약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정예 군사를 조발하여 훈련시키고 정비하게 하면서 우리 나라 변경에 대기하게 한 뒤 천조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엔 조금이라도 조력을 하게 하고 노적(老賊)이 궤멸되면서 돌입해 올 형세가 있을 경우엔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하게 한다면, 우리 나라에도 복이 되고 천조에도 이로움이 있게 될 것이다.’는 내용으로 답변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군문으로 하여금 이 사이의 사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조목의 이야기를 토대로 즉시 비국으로 하여금 상세히 글을 만들게 한 다음 이잠에게 내려가는 선전관 편에 급히 부쳐 보내도록 함으로써 뒷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잠은 백면서생으로서 아는 것도 적고 사정에 오활한데, 오늘날 국가의 안위(安危)와 실제로 직결된 이번 걸음에서 공식 모임에 나가 응대할 때 멀거니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근심이라도 있게 된다면 어찌 너무나도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내일 새벽에 선전관을 급히 출발시켰으면 하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전관을 가려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註 066] 초(楚)나라 태양이 이미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 앉아 이야기만 할 뿐 결말이 날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 : 진(秦)이 조(趙)나라 한단(邯鄲)을 공격했을 때 평원군(平原君)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는데, 해가 뜰 때 이야기를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결말을 보지 못했던 고사임. 이때 평원군의 식객이었던 모수(毛遂)가 나서서 일을 통쾌하게 해결하였음. 《사기(史記)》 권76.[註 067] 원적(源賊) : 왜적을 말함. 국왕의 성이 원씨(源氏)였음.
"천하의 형세를 보건대 장차 병란(兵亂)의 단서가 열리려 하는데 우리 나라에까지 재앙이 미칠까 이 점이 염려됩니다. 이번에 군문(軍門)이 이자(移咨)하면서 6월에 작전을 개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만 신은 실제로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갑인년에 요좌(遼左)를 지키는 신하가 노추(老酋)를 정토(征討)하기 어렵다는 주제로 제본(題本)을 올렸는데, 신이 어떤 사람에게 듣건대 ‘요동을 지키는 군사가 2만에도 차지 않고, 변보(邊堡)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를 지키는 군사에 약간의 원액(元額)이 있기는 하지만 본래 이동시킬 수 없는 병력이다.’ 하였습니다. 그런 반면 노추의 경우는 새로 홀적(忽賊)을 멸망시키고 여허(如許) 부족을 몰아내는가 하면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만 리에 걸쳐 연합전선을 펴고 있으니 천하의 정병(精兵)을 동원해도 섬멸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데 2만 명의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찌는 듯한 6월에 그들을 치러가다니 이런 일은 병가(兵家)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산관(山關)은 내와 골짜기로 뒤덮여 있고 호지(胡地)는 험준하기만 한데 초목이 땅에 쌓이고 달을 연이어 장맛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찌는 더위를 무릅쓰고 무리를 동원하여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만, 이쪽에서 범하기 어려운 사정은 마치 저쪽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와 똑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선복(李善復)과 안응형(安應亨) 등이 6월이라는 두 글자를 끄집어내어 작전 시기로 삼고 있으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깜깜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충분히 보복할 수 있다고 큰소리만 치면서 이렇게 도성 백성에게 짐을 지워 대기시켜 놓고는 안될 일을 윽박지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 일을 그 누가 침을 찔러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근일 시의(時議)를 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크게 구별됩니다. 한 쪽에서는 ‘임진 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는 등 멸망당하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은혜가 흘러 넘치니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왕사(王師)를 따라 군전(軍前)에서 목숨을 바쳐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7천의 숫자를 반감(半減)해 참혹하게 결딴난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양서(兩西)에서 군병을 뽑아내 군문의 징소(徵召)하는 일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하고 있는데 양 쪽의 주장에 참으로 일리가 있긴 합니다만, 초(楚)나라 태양이 이미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 앉아 이야기만 할 뿐 결말이 날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066) 그런데 지금 떠난 이잠 역시 전말을 모르고 있는데 곧장 군문에 나아갔다가 힐책이라도 받게 되면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신은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원적(源賊)067)  이 새로 국내를 병합하고 남쪽 변방에서 고집세게 굴고 있는데, 우리 나라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요동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쳐들어와 빈 곳을 공격한다면 형세상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 조정이 국내의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이번 흔단에 종사하면서 계속 노추(老酋)의 소굴에 위엄을 가한다면 막다른 골목에 쫓긴 도적이 필시 우리 나라의 변방에서 무너지게 될텐데 이를 어떻게 막고 지켜내겠는가. 소탕에 따른 화를 바로 받게 될 것이다. 입술과 이빨같은 형세를 잃게 되어 다리가 차고 심장이 상하는 지경이 되면 천조에서 비록 한결같은 자세로 사랑해주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우되, 만약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정예 군사를 조발하여 훈련시키고 정비하게 하면서 우리 나라 변경에 대기하게 한 뒤 천조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엔 조금이라도 조력을 하게 하고 노적(老賊)이 궤멸되면서 돌입해 올 형세가 있을 경우엔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하게 한다면, 우리 나라에도 복이 되고 천조에도 이로움이 있게 될 것이다.’는 내용으로 답변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군문으로 하여금 이 사이의 사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조목의 이야기를 토대로 즉시 비국으로 하여금 상세히 글을 만들게 한 다음 이잠에게 내려가는 선전관 편에 급히 부쳐 보내도록 함으로써 뒷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잠은 백면서생으로서 아는 것도 적고 사정에 오활한데, 오늘날 국가의 안위(安危)와 실제로 직결된 이번 걸음에서 공식 모임에 나가 응대할 때 멀거니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근심이라도 있게 된다면 어찌 너무나도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내일 새벽에 선전관을 급히 출발시켰으면 하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전관을 가려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註 066] 초(楚)나라 태양이 이미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 앉아 이야기만 할 뿐 결말이 날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 : 진(秦)이 조(趙)나라 한단(邯鄲)을 공격했을 때 평원군(平原君)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는데, 해가 뜰 때 이야기를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결말을 보지 못했던 고사임. 이때 평원군의 식객이었던 모수(毛遂)가 나서서 일을 통쾌하게 해결하였음. 《사기(史記)》 권76.[註 067] 원적(源賊) : 왜적을 말함. 국왕의 성이 원씨(源氏)였음.
그런데 지금 떠난 이잠 역시 전말을 모르고 있는데 곧장 군문에 나아갔다가 힐책이라도 받게 되면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신은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원적(源賊)067)  이 새로 국내를 병합하고 남쪽 변방에서 고집세게 굴고 있는데, 우리 나라가 역량을 총동원하여 요동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쳐들어와 빈 곳을 공격한다면 형세상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 조정이 국내의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이번 흔단에 종사하면서 계속 노추(老酋)의 소굴에 위엄을 가한다면 막다른 골목에 쫓긴 도적이 필시 우리 나라의 변방에서 무너지게 될텐데 이를 어떻게 막고 지켜내겠는가. 소탕에 따른 화를 바로 받게 될 것이다. 입술과 이빨같은 형세를 잃게 되어 다리가 차고 심장이 상하는 지경이 되면 천조에서 비록 한결같은 자세로 사랑해주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우되, 만약 우리 나라로 하여금 정예 군사를 조발하여 훈련시키고 정비하게 하면서 우리 나라 변경에 대기하게 한 뒤 천조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엔 조금이라도 조력을 하게 하고 노적(老賊)이 궤멸되면서 돌입해 올 형세가 있을 경우엔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하게 한다면, 우리 나라에도 복이 되고 천조에도 이로움이 있게 될 것이다.’는 내용으로 답변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군문으로 하여금 이 사이의 사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 몇 가지 조목의 이야기를 토대로 즉시 비국으로 하여금 상세히 글을 만들게 한 다음 이잠에게 내려가는 선전관 편에 급히 부쳐 보내도록 함으로써 뒷날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잠은 백면서생으로서 아는 것도 적고 사정에 오활한데, 오늘날 국가의 안위(安危)와 실제로 직결된 이번 걸음에서 공식 모임에 나가 응대할 때 멀거니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근심이라도 있게 된다면 어찌 너무나도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내일 새벽에 선전관을 급히 출발시켰으면 하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전관을 가려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일 경인

천추사(千秋使) 이사경(李士慶)을 파견하였다. 경사(京師)에 가서 절일(節日)을 축하하게 하였다.

 

전교하였다. "날씨가 이러하니 내일 천추절에 배전(拜箋)하는 예는 날이 개기를 기다려 행하라. "
"날씨가 이러하니 내일 천추절에 배전(拜箋)하는 예는 날이 개기를 기다려 행하라. "

 

전교하였다.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는 전일 의망한 유창문(柳昌文)을 차임해 보내라."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으로는 전일 의망한 유창문(柳昌文)을 차임해 보내라."

 

전교하였다.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이 매우 급한데 아직도 처치하지 않고 있으니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봉상시를 옮겨 설치하는 일이 매우 급한데 아직도 처치하지 않고 있으니 속히 의논해 처치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영건 도감(營建都監)이 아뢰기를, "제천(堤川) 박달산(朴達山)에서 벌채한 재목의 원경단자(圓徑單子)를 인하여 전교하시기를 ‘이 재목의 값이 15동(同)인가 살펴 아뢰어라. 그리고 1천 그루를 더 벌채하여 쓸 일을 상세히 의논해 조처하라.’고 하셨습니다. 재목 값은 안에서 내려주신 목면(木綿) 10동을 주어 보냈습니다만 사공(沙工) 값은 그때에 당해 도감의 포물(布物)로 적당히 지급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1천 그루를 더 벌채할 일로 김흡(金洽)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고장 백성들의 숫자가 적어 끌고 내려오기도 무척 힘들다. 이번에 마련한 1천 6백 그루 외에 더 벌채한다는 것은 형편상 불가능하다.’ 하였는데, 한곳에서 너무 많이 벌채하다 보면 과연 편중된 폐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이천(伊川)의 재목을 영솔해 온 감관(監官) 전 군수 고충경(高忠卿)이 우봉(牛峯)과 곡산(谷山) 등 지역에서 벌목할 계책을 극력 말했으니, 이 사람을 불러다가 가을과 겨울에 벌채하게 함으로써 내년도에 계속 쓸 수 있도록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가을과 겨울에 벌목할 숫자를 미리 계하(啓下)받은 뒤에 분부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제천(堤川) 박달산(朴達山)에서 벌채한 재목의 원경단자(圓徑單子)를 인하여 전교하시기를 ‘이 재목의 값이 15동(同)인가 살펴 아뢰어라. 그리고 1천 그루를 더 벌채하여 쓸 일을 상세히 의논해 조처하라.’고 하셨습니다. 재목 값은 안에서 내려주신 목면(木綿) 10동을 주어 보냈습니다만 사공(沙工) 값은 그때에 당해 도감의 포물(布物)로 적당히 지급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1천 그루를 더 벌채할 일로 김흡(金洽)에게 물어보았더니 ‘이 고장 백성들의 숫자가 적어 끌고 내려오기도 무척 힘들다. 이번에 마련한 1천 6백 그루 외에 더 벌채한다는 것은 형편상 불가능하다.’ 하였는데, 한곳에서 너무 많이 벌채하다 보면 과연 편중된 폐해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이천(伊川)의 재목을 영솔해 온 감관(監官) 전 군수 고충경(高忠卿)이 우봉(牛峯)과 곡산(谷山) 등 지역에서 벌목할 계책을 극력 말했으니, 이 사람을 불러다가 가을과 겨울에 벌채하게 함으로써 내년도에 계속 쓸 수 있도록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가을과 겨울에 벌목할 숫자를 미리 계하(啓下)받은 뒤에 분부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예조의 공사를 보건대, 서궁(西宮)의 단오 물선(端午物膳)을 각도 방물(方物)의 예에 따라 대전(大殿)에 봉진(封進)토록 하라고 청하였는데, 상께서 ‘절목(節目)이 아직 계하(啓下)되지 않았으니 그대로 서궁에 바쳐라. 그리고 해사에서 진상하는 물품 등도 우선 예전대로 그냥 봉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이 의리상 명을 받들 수가 없는데 판부(判付)를 받지 못하였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립니다.  서궁은 신자(臣子)에게 있어서는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단지 성상께서 사은(私恩)에 구애받고 계시는 탓으로 온 나라 신민이 피를 뿌리며 항론(抗論)한 끝에 겨우 폄손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었습니다. 그리하여 폄손하는 절목을 일단 이미 강정(講定)하여 입계하였고 보면 아직 계하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신자가 끊어버리는 뜻은 이미 명백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임금의 신자가 된 입장에서는 스스로 그 절목대로만 거행해야 마땅할 것인데 어떻게 전례에 따라 서궁에 봉헌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가 끊어버렸고 신민이 끊어버렸으니 이는 전하가 비호해 줄 처지가 못되는 것입니다. 해조의 공사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예전처럼 봉진한다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는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지금 예조의 공사를 보건대, 서궁(西宮)의 단오 물선(端午物膳)을 각도 방물(方物)의 예에 따라 대전(大殿)에 봉진(封進)토록 하라고 청하였는데, 상께서 ‘절목(節目)이 아직 계하(啓下)되지 않았으니 그대로 서궁에 바쳐라. 그리고 해사에서 진상하는 물품 등도 우선 예전대로 그냥 봉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이 의리상 명을 받들 수가 없는데 판부(判付)를 받지 못하였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립니다.
서궁은 신자(臣子)에게 있어서는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단지 성상께서 사은(私恩)에 구애받고 계시는 탓으로 온 나라 신민이 피를 뿌리며 항론(抗論)한 끝에 겨우 폄손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었습니다. 그리하여 폄손하는 절목을 일단 이미 강정(講定)하여 입계하였고 보면 아직 계하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신자가 끊어버리는 뜻은 이미 명백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임금의 신자가 된 입장에서는 스스로 그 절목대로만 거행해야 마땅할 것인데 어떻게 전례에 따라 서궁에 봉헌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가 끊어버렸고 신민이 끊어버렸으니 이는 전하가 비호해 줄 처지가 못되는 것입니다. 해조의 공사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예전처럼 봉진한다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는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본사의 계사를 인하여 답하시기를 ‘단지 변무(辨誣)하는 일만 아뢴다면 주문(奏聞)할 필요가 없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태는 지난번에 무함을 당하던 초기와는 사정이 같지 않습니다. 현재 노추(老酋)가 준동하여 변방의 성을 무너뜨리고 있으므로 중국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병력을 징발하여 토벌할 일을 의논하고 있고 요동·광령 일대의 방비 태세가 매우 급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때에 어떻게 감히 축성을 중지하는 일을 자문이나 주문 사이에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서서히 사세를 관찰하면서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본사의 계사를 인하여 답하시기를 ‘단지 변무(辨誣)하는 일만 아뢴다면 주문(奏聞)할 필요가 없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태는 지난번에 무함을 당하던 초기와는 사정이 같지 않습니다. 현재 노추(老酋)가 준동하여 변방의 성을 무너뜨리고 있으므로 중국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병력을 징발하여 토벌할 일을 의논하고 있고 요동·광령 일대의 방비 태세가 매우 급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때에 어떻게 감히 축성을 중지하는 일을 자문이나 주문 사이에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서서히 사세를 관찰하면서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이러한 때에 호지(胡地) 근처를 경유하는 일로(一路)를 철저히 기찰하여 우리 나라의 기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고, 수상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체포한 뒤 아뢰도록 양계(兩界)068)  의 감사·병사에게 급히 하유하라."


[註 068] 양계(兩界) : 함경도·평안도.
"이러한 때에 호지(胡地) 근처를 경유하는 일로(一路)를 철저히 기찰하여 우리 나라의 기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고, 수상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체포한 뒤 아뢰도록 양계(兩界)068)  의 감사·병사에게 급히 하유하라."

 

전교하였다. "박정길(朴鼎吉)과 이위경(李偉卿)의 계사를 보니 내 뜻과 부합된다. 비변사에 말해 각별히 살펴 조처하도록 하고, 대제학에게 말해 주문(奏文)을 지어 올릴 때 이 두 개의 계사를 참조하여 짓도록 하라."
"박정길(朴鼎吉)과 이위경(李偉卿)의 계사를 보니 내 뜻과 부합된다. 비변사에 말해 각별히 살펴 조처하도록 하고, 대제학에게 말해 주문(奏文)을 지어 올릴 때 이 두 개의 계사를 참조하여 짓도록 하라."

 

좌참찬 허균이 상소하기를, "지난해 대론(大論)이 일어났을 때 신의 원수 기자헌(奇自獻)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갔는데, 그 집에서는 신이 남몰래 중상했다고 의심한 나머지 신에 대해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저 자헌이 이런 의논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1백 명이나 된다 할지라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만, 일단 그런 차자를 진달하였고 보면 평소 원수진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를 용서한 채 주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집에서는 그만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069)  이 외람되게 변장(變章)을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양사가 추문하기를 청하고 2품 관원들이 추국하기를 청했는 데도 전하께서 이 모두에 대해 고집하면서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신이 집에서 거적을 깔고 엎디어 죄를 기다리면서 다시 변장(辨章)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소의 내용이 그토록 참독스러울 줄은 몰랐는데, 지난번 곽영(郭瓔)의 옥사(獄事)070)  를 인하여 국청이 그 소를 내려주기를 청한 결과 그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그 소에서 지어낸 말들 가운데 위를 핍박하고 임금을 욕되게 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 없는 일을 날조하며 온갖 계책을 동원해서 신을 모함하려 한 사실이 비로소 전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신 이하가 이 글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하였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한 시각도 지체시키지 않고 신을 추국하여 사실을 캐내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루고자 했던 것이야말로 인신(人臣)의 대의에 입각하여 나온 행동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와 대궐 뜰 아래에서 대질 신문을 벌이게 되리라 여기고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루를 일 년처럼 보내고 있었는데, 현재 판부사도 아직 차임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상께서도 여전히 조섭하시는 중에 계시므로 언제 친문(親問)하시게 될지 그 기약이 또한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자헌의 집과 원수를 맺게 된 그동안의 곡절을 먼저 말씀드린 다음에 상소에 있는 무함한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해드릴까 합니다. 신의 형 집안에서 이홍로(李弘老)와 절혼(絶婚)하자 홍로가 복제(服制)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고 신을 무함했기 때문에 그와 원수가 되었던 정상에 대해서는 신이 첫 번째 상소를 올리면서 이미 상세히 진달드렸고, 홍로가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신도 함께 참여하였다고 한 말은 기자헌 집안에서 납지(蠟紙)로 베껴 올린 서찰071)  에서 거짓임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신이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축년072)  에 신이 해운 판관(海運判官)073)  으로 순시하면서 전주(全州)에 도착했을 때 홍로가 감사로 있으면서 모친상을 당했는데 성복(成服)하기 전에 불법 행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에 대해 신이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자헌이 신을 증인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신이 말하기를 ‘홍로가 나를 상제(喪制)를 잘 지키지 못했다고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을 가지고 그에게 비판을 가한다면 보복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이때부터 자헌이 유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홍로가 서울에 와서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퍼뜨렸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떠들어대었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러 그의 이웃에 간 김에 잠깐 들러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신현(申晛)과 이성경(李晟慶)도 와 있었습니다. 이때 홍로가 무턱대고 신의 말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마침 기자헌의 집에서 문안왔던 노자(奴子)가 이 광경을 보고는 돌아가 일러 바치자 자헌이 마침내 이소(李疏)에 참여하여 관계했다는 말을 지어낸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래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 데도 자헌이 이를 기화로 삼아 위협할 목적으로 글을 모사(摸寫)하여 밀납으로 붙여서 그 속에 흉측한 말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는가 하면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설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며 무함했습니다. 계묘년 4월에 신의 형 허성(許筬)의 집에서 국혼(國婚)074)  을 치르던 날 형의 처의 병이 위중했던 탓으로 날짜를 앞당겨 혼인식을 마쳤는데, 궁인(宮人)들도 병자를 보고 갔으며 그런 뒤 5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비밀에 부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는 설이 궁중에 전파되었는데 이것 역시 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자헌의 무함을 지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봄 꿩이 절로 울어대듯 자헌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기를 ‘이것은 허균이 나를 잡아넣을 목적으로 지어낸 말이니 공의 집에서 직접 대방(大房)에 해명해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헌이 더욱 성을 내면서 헌납 신율(申慄)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이 즉시 강릉(江陵)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헌이 여전히 분풀이를 그치지 않자 신의 형이 이를 걱정한 나머지 신으로 하여금 글을 보내 사과함으로써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서찰을 보내 사과하면서도 다른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자헌이 말하기를 ‘내가 이 편지를 내놓기만 하면 허균은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이 혹시라도 망발한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만 실상은 그 정도의 내용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헌이 전후로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차례차례 비방했을 적에도 신의 이름은 그 속에 끼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실제로 그렇게 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오년075)  에 주사(朱使)076)  가 벽제(碧蹄)에 왔을 때 신이 역관(譯官) 박인상(朴仁詳)으로 하여금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진달하게 하였더니 주사가 즉시 정문(呈文)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에게 말하였더니 적신(賊臣) 유영경(柳永慶)은 달갑지 않게 여긴 반면 자헌과 심희수(沈喜壽)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하여튼 온 나라의 민정(民情)을 조사(詔使)에게 진달함으로써 중국 조정의 천신(薦神)들에게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 영경이 분노와 시기심을 품게 된 결과 자헌 등이 잇달아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바로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과 자헌이 똑같이 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는 자헌이 겉으로 마음을 열고 대해주는 척했습니다만, 신은 자헌이 음험한 마음의 소유자로서 그 속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때때로 만나기는 하면서도 그동안 품어온 개인적인 생각을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상대방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계축년077)   겨울 초에 화근(禍根)078)  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논이 행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4일에 신이 마침 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탐지해 보았더니 자헌이 머리를 흔들며 듣지 않고서 송순(宋諄)의 일079)  을 핑계대고는 결연히 피해버렸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신의 두 번째 소에 들어 있으니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대체로 그의 자질(子姪)이 모두 서양갑(徐羊甲)과 지극히 친한 사이로서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는 데도 요행히 나문(拿問)을 면하였기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워둠으로써 국면을 뒤집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로써 자헌이 끝내는 임금을 등지고 대론(大論)을 저지시키려 할 줄을 알았습니다. 갑인년080)   봄에 자헌이 정승으로 들어오자 삼사(三司)가 일제히 그를 탄핵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時輩)들의 이런 일을 중지시켜달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구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의 아우 기윤헌(奇允獻)이 외설에 관한 일로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는데, 신이 경사(京師)에 간 틈을 타서 그의 형을 속여 말하기를 ‘삼사가 탄핵했을 적에 허균이 극력 저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자헌이 이 말을 믿고 크게 성을 내었습니다. 신이 요동에서 징병(徵兵)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가 곤란하다는 곡절로 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자기를 헐뜯는다고 여겨 공공연히 욕을 마구 해댔으며, 그 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祖宗)의 변무(辨誣)에 대한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면서 대벽(大辟)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신이 자헌을 극력 변호했던 사실을 아는 자가 자헌에게 가서 곡진히 해명하고 이어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3통을 보여주자 자헌이 깨닫긴 하였습니다만 시기하고 저해하려는 마음은 더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 뒤 신이 변무에 대한 일을 완결짓고 돌아오자 그가 늘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뒷날 이것이 필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며 기필코 신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안서(安西)의 옥사081)  가 일어났을 때에는 자헌이 직접 차자를 작성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듣건대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기에 신 역시 상소를 만들어 대질하려 하였으나 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해 오는 바람에 그만둔 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흉격(凶檄)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하면서 은연중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서 신을 무함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릉(江陵)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어도 들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적하였다가 그 뒤에 조정에 돌아왔을 때에는 또한 감히 분명하게는 말하지 못했는데, 성상께서 그의 흉악함을 통촉해 주지 않았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연장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뒤 김진(金珍)의 옥사 때에는 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秦檜)082)  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이 상소를 한번 올려 전일 원한을 맺게 된 상황과 그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배반한 정상을 진달하면서 그와 대질 신문을 벌이게 해 주도록 청하려 하였더니 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李福長)을 보내어 화해하자고 애걸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대례(大禮)가 이미 임박한 상황에서 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나 싶어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나 진달드리면서 해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론(大論)이 곧바로 일어나게 되었고 그가 맨 먼저 죄를 받고 말았는데 그런 기회에 편승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일은 의리상 차마 하지 못하겠기에 지금까지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 중에 사산(蛇山)에 몰래 장지(葬地)를 쓴 일을 가지고 상소하여 그의 죄를 청하려 한 자가 있었습니다. 사산은 곧 신라(新羅) 이래로 장사지내지 못하도록 금해 오던 지역으로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君王)이 날 곳이라고 말해 왔는데 자헌이 거기에 첩을 장사지내었으므로 그가 망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자헌의 집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더욱 극심하게 원망하면서 말하기를 ‘허균이 평소 우리 집에서 대론을 따르려 하지 않는 정상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극력 이런 꼬투리를 집어내어 우리 집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는 것인데 배소(配所)를 여러 차례나 옮기게 된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하고는 부인으로 하여금 곧장 상언(上言)케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성균관 유생의 상소에서도 기준격과 기수발(奇秀發)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었던 정상을 거론했었는데, 윤헌(允獻)이 이사호(李士浩)와 복심(腹心)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그 흉악한 정상을 탐지하고서 혹시라도 그만두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 신만 제거해 버리면 대론도 저절로 와해될 것이고 그의 화도 가벼워질 것이라고 여기고는 준격을 꾀어서 저격(狙擊)할 계책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경망스럽다고는 해도 원수의 자제를 대할 때면 반드시 신중하게 말을 가려서 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처럼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역스러운 난언(亂言)을 했겠습니까. 이런 말은 정신이상자도 감히 하지 못할 것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흉소(兇疏)에서 한 이야기들은 전해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인만큼 하나하나 분석해 깨뜨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에 대해서는 신이 특별히 밝혀보고자 합니다. 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으로 신에게 와서 배우긴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역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가르치긴 했습니다만 일상적인 이야기는 또한 말해 준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나온 기유년과 신해년의 이야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도 없는 말을 글로 옮겨 쓰다니 신은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의창군(義昌君)이 바로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기필코 신의 집안을 결딴낼 목적으로 문득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설을 지어내어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 한 것이니 그 꾀가 너무도 참혹하기만 합니다. 형의 집에서 성혼(成婚)한 지 얼마 안되어 신은 바로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는데 갑진년 8월에 올라와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제수받고 부임했다가 을사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병오년 3월에 의주(義州)에서 저보(邸報)를 보고 비로소 이의(李㼁)가 탄생하여 진하(陳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신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대신이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성상께서 당시 춘궁(春宮)으로 확정되신 상태에서 만백성이 마음 속으로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바로 공성 왕후(恭聖王后)083)  의 촌수에 드는 친척인 만큼 개인적으로 적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른 신하들의 배는 될 것인데 어떻게 감히 흉악한 마음을 계속 품고서 끝내 원수의 집안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해년 겨울에 적소(謫所)에서 사면을 받고 11월 12일에 서울에 들어와 형을 만난 뒤 24일에 도로 부안(扶安)의 장사(庄舍)로 갔다가 임자년 2월 초에야 돌아왔는데 그동안 준격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金悌男)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혼인을 권하는 일 때문에 제남과 함께 윤수겸(尹守謙)의 집에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해 겨울에는 겨우 10여 일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수겸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제남과 신이 서로 만날 길이 없게 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그렇고 그런 일들을 신이 어떻게 제남에게서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양시(兩尸)084)  는 적자(嫡子)가 아니라고 한 말은 모두 그가 스스로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차마 주각(注脚)을 달아 양시를 해석하면서 감히 이토록 기탄없이 성상을 번독케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어온 자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헤아릴 수 없는 모욕을 거꾸로 군상(君上)에게 가하게 된 것인데,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치고 어찌 이처럼 심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마음이 아프고 살이 찢어지는 듯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호곡할 따름입니다. 그가 실제로 이런 흉측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어떻게 온 조정이 모두 그 집안을 질시한다는 이유로 그만둔 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적확하기만 하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그 집안을 미워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며 거꾸로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내놓았다고 한다면 인신으로서는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책을 갖고 와서 1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아비의 두 차례에 걸친 공(功)의 녹권(錄券)과 관련하여 기필코 신에게 글을 짓게 하여 후세에 전하려 했단 말입니까. 이는 따질 것도 없이 저절로 명백한 것입니다. 무신년에 공주(公州)에서 파관(罷官)되고 나서 전사(田舍)를 구해 볼 목적으로 부안에 갔다가 산거(山居)할 만한 곳을 바닷가에서 얻은 뒤 경영하던 중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로 유배될 적에 꼭 함열(咸悅)을 원했던 것은 대체로 그곳이 부안과 가까워 석방되면 곧바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축년 봄에도 부안에 내려갔습니다만 이는 노복과 전토(田土)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심광세(沈光世)와 같이 모의할 목적으로 부안에 내려갔던 것이겠습니까. 신해년에 신의 집이 비어 한가하게 되자 윤수겸이 몇 달 동안 빌려 들어와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 아들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집을 지키고 있던 비자(婢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광세가 ‘동생 집안에서 윤(尹)의 집에 청혼하려 하는데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훌륭한가?’ 하고 물었을 때 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는데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기를 ‘사람들마다 모두 대군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데 사대부 입장에서 어떻게 혼인을 맺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송구(宋耉)와 함께 그 부당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겸과 절친한 친구인 이문란(李文蘭)을 불러 말하기를 ‘광세가 질녀를 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가 모쪼록 이 결혼을 극력 만류하라.’ 하니, 문란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그 말이 옳다.’ 하고는 즉시 수겸에게 말하자, 수겸이 말하기를 ‘그가 원한다 할지라도 내가 어찌 들어주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이튿날 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을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준격이 숙부가 말했다고 하였으므로 송구 역시 허균이 만류했다고 대답해 보내었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송구를 끌어다 증거를 대고 있는데 송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무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문란이 지난해에 상소했었으니 그것을 가져다 상고해 보아도 해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소에 나온 말들을 보면 모두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는데 이 대목만은 유독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겸 등 세 사람이 모두 있으니,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부실하게 지껄여댔다면 그가 혼자 말하고 혼자 들은 이야기들이 허위라는 것을 이를 유추해서 확연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 ‘참서(讖書)를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죄(死罪)를 범한 데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보았다 하더라도 집에 보관해 두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전해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할 일인데, 더구나 원수진 집안의 자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참설(讖說)은 20여 년 전 선조(先朝) 때부터 있던 것으로 세상에 전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천도(遷都)에 관한 설은 임자년 연간에 나왔으니 그가 그럴 듯하게 속여넘기려 한 정상이 이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른바 심우영(沈友英)은 바로 신의 망처(亡妻)의 외서삼촌(外庶三寸)입니다. 문재(文才)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허여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처음부터 허물없이 지내긴 하였습니다만 사람됨이 교만하고 거칠며 적자(嫡子)를 멸시하였으므로 온 집안이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정미년 겨울에 이원형(李元亨)이 와서 말하기를 ‘삼가 우영을 친하게 대하지 말라. 우영이 말 끝에 나보고 임해(臨海)한테 가서 살펴보고 오라 하기에 내가 큰소리로 준열하게 꾸짖었더니 그가 안색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기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으므로 나도 그때부터 절교하였다.’ 하였으므로 신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더니 말하는 즈음에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으며 대군을 애호하는 말을 드러나게 하였으므로 더욱 괴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이의숭(李義崇)이 우영에게 재물을 꾸어주려 하기에 신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이들 무리는 뜻을 두는 바가 수상하니 신중을 기해 교제하지 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朴應犀)라는 자에 대한 것은 이렇습니다. 그의 아비 박순(朴淳)이 신의 아비 허엽(許曄)과 절친했었는데,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의논하는 일 때문에 사죄(死罪)를 받을 운명에 처했을 때 신의 아비가 당국자(當國者)에게 해명하여 면하게 해 주었으므로 박순이 늘 고맙게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박순이 입대(入對)하여 신의 형 허봉(許篈)의 잘못을 극언하는 바람에 형이 멀리 유배가게 되었으므로 신의 어미가 박순을 원망하면서 그대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 서원(花潭書院)에는 신의 아비가 마땅히 배향(配享)되어야 하는데 박순도 함께 배향되려 하였으므로 신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응서가 이 말을 듣고는 원한을 품었는데 이 때문에 심우영이 응서의 편에 서서 갑자기 신의 집과 의숭의 집에 대한 정분을 소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도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박응서와 김비(金祕)가 분명히 범인들이었으므로 신이 의숭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뭐라고 말하던가. 이 어찌 끝내 국가의 대적(大賊)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함께 대장 이문전(李文荃)을 찾아보았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문전이 파직되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에 응서가 은상(銀商) 살인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일이 제때에 해결되지 않자 의숭이 신의 말을 불현듯 깨닫고는 즉시 이이첨(李爾瞻)을 찾아가서 ‘역적임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첨이 바로 한희길(韓希吉)을 불러 입계(入啓)하도록 극력 권한 결과 죄인의 괴수를 끝내 붙잡게 되었고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문전과 이원형(李元亨)이 지난해에 이런 내용으로 모두 소장을 올렸고, 의숭 역시 공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지었다가 미처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 초안이 필시 그의 집에 남아 있을 것이니, 이것들을 모두 가져다가 조사해 보면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용렬하다 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얼족(孼族)을 집우(執友)라고 일컬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정리(情理)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신이 정미년 겨울에 혼자서 보려고 본조(本朝)의 시를 뽑았는데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모두 국초(國初)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여 써넣다 보니 자연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한 나머지 기필코 뽑아내어 앞에다 두려 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의 책을 보아도 국초의 시문에는 도전의 작품이 으레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찌 신이 다른 사람을 팽개친 채 꼭 이 사람을 앞자리에 놓으려 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무술년에 송도(松都)의 포은(圃隱)085)   고택(古宅)을 들러 시편을 지으면서 그 끝 부분에 도전을 극력 배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놓고는 임금 잊고 적자 바꿔 강상(綱常)을 어긴 일을. 계책을 세우자 마자 도전이 죽었으니 다리에서 폭사한 것 사람의 재앙 아니라오[君不見 三軍府前羅劍鋩 忘君易嫡違天常 搆締纔訖道傳死 中橋暴屍非人殃].’라 하였는데 차운로(車雲輅)가 보고 늘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이밖에 또 도전과 권근에 대한 논을 지어 배척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를 트집잡는 것은 정말 아이들 장난같기만 합니다. 그리고 생존자로는 최립(崔岦)과 이달(李達)을 제외하고는 또한 많이 뽑지 않았으니, 어찌 얼족을 위해 그들의 졸렬한 시를 뽑아주려 했겠습니까. 이 책이 지금 박엽의 집에 있으니 가져다 조사해 보면 알 것입니다. 또 신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에는 옥에서 나와 몹시 급한 때였는데 당시 우영의 자취가 이미 신의 집과는 소원해져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상태였고 보면 비록 그가 신을 찾아와 시를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영의 집에 신이 준 시편이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서 이런 말을 지어내어 신을 모함하려 한 것이니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서양갑의 자(字)가 석선(石仙)인 것은 지금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천얼의 자는 지극히 절친한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준격이 혼자서 그 자를 알고는 신에게 마구 덮어씌우며 신이 만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준격이 은밀히 양갑과 결탁하고 매우 밀접하게 사귀어온 사실이 이에 이르러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자신이 양갑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컫고는 거꾸로 신에게 화를 전가시키려는 짓이니 그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흉격(兇檄)에 대한 일은 당시 추안(推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이제 와서 그만 이런 말을 지어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도 못한 채 그저 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격문을 짓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흉역인데 그것을 끌어들여 자기가 지었다고 하면서 원수진 집의 사람에게 말을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한 집안의 제질(諸姪)은 정리가 부자지간과 같은 만큼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타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이런 천만부당한 흉언을 말했겠습니까. 그 말은 이번에 소명국(蘇鳴國)이 은밀히 이대엽(李大燁)086)  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더욱 분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가 ‘법궁(法宮)에 이어(移御)하실 때의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에 관한 설’을 말한 것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것인데 이 어찌 인신(人臣)이 차마 말할 성격의 것이겠습니까. 처음 법궁을 창건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이 밤낮으로 이어하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떠받들고 있었고 시변(時變)과 천재(天災) 역시 걱정할 것이 별로 없었는데 준격이 그만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목적으로 흉설을 스스로 지어내고는 천시와 인사를 끌어대면서 현혹시키고 선동하며 필설(筆舌)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그가 역적 의(㼁)에게 충심으로 붙좇은 정상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으니, 아,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이이첨의 집에 큰 뱀087)  이 있다는 설 역시 무슨 근거로 신에게 떠넘기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기축년부터 이첨과 성균관에서 교분을 맺었는데 나이로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형으로 섬기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리고 무신년 이래로 역적을 토죄하는 일이라면 모두 함께 마음을 합쳐 행동해 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계축년 이후에야 그에게 투탁(投托)한 것이겠습니까. 임자년 겨울에 신이 충주(忠州)로 떠나려 할 즈음에 이첨에게 가서 작별을 고했는데 그 자리에는 한찬남도 있었습니다. 그때 신이 말하기를 ‘의야말로 화의 근본으로서 뜻을 잃은 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관원들이 모두 서인(西人)이니 우리들 편으로 대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더니 좌중이 모두 동의하였는데,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계축년에 적중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군상(君上)을 위해 시종일관 충성을 다 바친 일에 대해서는 동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기꺼이 원수진 집과 함께하며 거꾸로 흉언을 만들어내었겠습니까. 그리고 ‘의를 세운 뒤 수렴 청정을 하겠다.’느니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워야 한다.’느니라고 내가 말했다고 하였습니다만, 이것이 어떤 흉역인데 그에게 그런 말을 분명히 듣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그때 바로 고변을 하지 않고 태연히 까딱도 하지 않은 채 마치 한담하는 것처럼 문답을 했단 말입니까.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인데도 이렇게까지 허위로 고하다니 군상을 우롱한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다고 할 것입니다. 준격이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이렇게 무고하는 상소를 올린 것인데 교묘하게 마음을 쓰긴 하였지만 계책을 세운 것은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그 아비는 늘 신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자헌이 어찌 고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대론(大論) 때문에 패망한 뒤로 신에게 원망을 돌린 나머지 사생 결단을 내려고 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요행수를 바라는 한편, 의논을 달리하는 자가 신을 미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힘을 합쳐 함정에 몰아넣음으로써 혹시라도 신을 다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만,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원수가 원수를 공격하고 있으니 그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유폐(流弊)는 결과적으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원한을 원한으로 서로 갚게 하면서 교묘하게 수식해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을 끝내 그치지 않게 만들고 말 것인데, 원한을 떠맡으면서까지 역적을 토죄한 인신이 결국 모함을 받고 만다면 그 누가 군부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치려 하겠습니까. 조종(祖宗) 선왕(先王)의 변무(辨誣)에 대한 일도 그렇습니다. 신이 이 문제를 꺼내자 자헌이 노하면서 극력 저지시켰는데 대전(大典)을 완결짓고 경사스럽게 돌아오자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될까 몹시 두려워하면서 그 공을 조사하여 정하는 날에 신이 혹시라도 그 말을 꺼낼까 의심한 나머지 기필코 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못하고 말았었습니다. 국가에서 대전에 관한 공을 조사하여 정하는 일에 대해 준격이 어떻게 감히 끼어들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남곤(南袞)과 병칭하면서 신의 원훈(元勳)을 저지시키려 한 것은 뒷날 그의 아비가 이로 인해 죄를 받게 될까 염려해서인데 그렇다고 해도 상소 가운데에 쓸데없이 언급한 것은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대사(大事)가 지지부진하게 연기된 책임을 어찌 꼭 신 한 사람에게만 돌려야 할 것이겠습니까. 본디 성상께서 사은(私恩)을 차마 끊지 못하시고 묘당과 삼사가 때를 기다려 일제히 발론하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한 허다한 곡절을 상께서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으로서 단지 아비를 잡아넣기 위하여 대사를 연기시킨 것이다.’고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속여넘기는 말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이 형조 참의로 있을 때 역적 정협(鄭浹)이 전옥서 주부로 있었는데 범죄인을 하옥시키는 일을 신이 실제로 주관하였으므로 정협이 늘 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승복(承服)하던 날 더러는 원한관계 때문에 허위로 끌어들이지나 않을까 걱정도 하였지만 신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때 이원형(李元亨)은 바야흐로 광주(廣州)에 있었으니 비록 손을 흔들려 했다 한들 어떻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없는 사실들을 짜집기해서 교묘하게 얽어낸 정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끝 부분의 심이기(審食其)에 대한 말088)  은 듣기만 해도 간담이 찢어질 듯하니 기필코 이 적과 상의 앞에서 함께 죽음으로써 스스로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와 같이 극도로 흉악한 이야기를 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미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보면 그 자신이 지어낸 것인데, 스스로 금수와 같은 행동을 익히 보고 인륜을 모독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집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집과 원수를 맺은 탓으로 선왕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였으니 차라리 스스로 가슴을 갈라 천일(天日) 아래에서 통쾌하게 분을 풀고 싶습니다. 저 자헌이 지극히 사소한 일로 의심을 내고 사실이 아닌 말로 원수를 맺어 형적이 없는 일로 죽이려 드니 그 마음의 흉악하고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천지와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는데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여 스스로 죄를 초래하겠습니까. 그리고 준격이 무함한 말들은 승지나 사관(史官)들도 기록할 수 없는 것들인데 소명국이 그만 그 말을 써서 잇달아 사람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흉격(兇檄)의 맹랑한 것이 그와 같았으므로 형적이 이미 패로(敗露)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명국과 준격이 앞뒤로 같이 모의하여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하려 한 것으로서 명국와 준격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셈입니다. 그런데 명국이 이미 형을 받았는 데도 준격이 털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이해하지 못할 점입니다. 자헌이야말로 왕실과 가까운 친족으로서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는 몸이었으니 만약 흉설을 듣고서도 위에 고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역적을 비호한 죄가 있다 할 것이고, 준격이 흉언을 듣고 남의 혼인을 금하기까지 했으면서 그대로 그 사람에게 배우며 끊임없이 왕래했다면 그도 역당(逆黨)이라 할 것입니다. 온 나라가 모두 두 집안이 원수를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패몰된 뒤에 신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감히 증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을 가지고 선왕과 양성(兩聖)을 모독하는가 하면 신을 죽이려고 획책하면서도 스스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떨어지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만큼 죄를 진 사람의 입장에서 입을 놀려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현재 합사(合司)하여 신을 배척한 것 가운데 혹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진달드리고 끝마칠까 합니다. 신은 선왕 때부터 전하만을 떠받들면서 여러 번 피끓는 정성을 바쳤으며 계축년 이전에는 자주 동료와 함께 국가의 일을 걱정하면서 자못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도 또한 신의 충성심에 탄복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조금 경사(經史)에 통하고 고전(古典)에 박식하다 하여 화근을 제거하는 일을 유독 신과 더불어 의논해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재야의 선비들 가운데 혹 신과 친하게 지내던 자들이 다투어 피끓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론(正論)을 일으켜 세웠는데 사람들 중에는 혹 신이 또한 그 상소에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패몰당하여 뜻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는 무리들이 신을 이이첨보다 더 미워한 나머지 초야에서 사람을 공격하며 떼 지어 일어난 상소까지도 모두 신이 사주했다고 하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그 뒤에 올린 최심(崔沁)과 윤해수(尹海壽) 등의 소장은 신의 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데도 시의(時議)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곽영(郭瓔)이 올린 상소에 대해서 황덕부(黃德符)조차도 신을 가리켜 그의 술수에 떨어졌다고까지 하였으나, 급기야 소명국의 일이 밝혀지면서 덕부가 비로소 아무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대론(大論)을 주도한 탓으로 저들에게 미움을 당할 뿐만이 아니라 늦추기를 주장하는 약간의 시배(時輩)들에게까지 질시를 받은 결과 장차 죽을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을 뿐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같이 일하던 제생(諸生)들은 혹 징병(徵兵)할 문제로 소요스러운 때에 자칫 내분이라도 빚게 될까 염려하기도 합니다만, 초야와 관학(館學)에서는 모두 소장을 진달하여 큰 판국을 완결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신에게 와서 상의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토역(討逆)하는 정론(正論)을 의리상 막을 수는 없기에 그들이 다시 청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었습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덕부 한 사람에게 배척을 받은 탓으로 끝내는 원수진 집안의 준격보다도 더 심하게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민인길(閔仁佶)의 상소에는 당초 신이 격서(檄書)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었고, 이홍로와 원수를 맺은 자취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며, 다섯 서찰을 밀납으로 붙였던 것도 모두 허구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원수가 무함하는 이야기들을 주워모아 탄핵문 속에 드러내다니 신은 그 까닭을 또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준격에게 무함을 당한 뒤로는 두려운 심정으로 조사하는 명을 기다리고 있을 뿐, 친우의 집에는 전혀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어두울 때를 이용하여 다른 집으로 옮겨갈 적에도 파리한 말을 타고는 보잘것없는 동복(童僕)이나 데리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달관(達官)인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초헌(軺軒)을 타고 구종(丘從)을 이끌고 다니면서 큰 소리로 벽제(辟除)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억울하기만 합니다. 신은 현재 병고에 시달려 생사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요동(遼東)에 가는 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기에 기필코 윤유겸(尹惟謙)을 사주하여 이런 망론(妄論)을 하도록 했겠습니까. 윤상(倫常)을 어지럽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근(言根)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이런 비방을 들어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추악한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윤(倫)이니 상(常)이니 하는 것도 뭔가 배척할 것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세상의 어진 재상이 지극히 친밀하게 대우해 주어 국가의 대론(大論)에도 참여케 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언관이 흉역이라고 배척하고 윤상을 어지럽혔다고 내쳤으니, 금방 훌륭하다고 했다가 금방 간사하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민인길이 상소한 지 지금 벌써 17개월이 되었고 준격이 무함을 해 온 지도 반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꼼짝않고 가만히 있다가 제유(諸儒)의 직론(直論)이 일제히 나온 뒤에야 신을 역적으로 지목하면서 세 사람을 국문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역적을 토죄하는 일을 이렇게 느슨하게 하다니 국가의 일을 알 만합니다. 대사(大事) 때문에 처음 모였을 때는 신이 과연 그들을 권면한 일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공의(公議)가 일제히 분개하고 있을 뿐더러 제생(諸生)도 모두가 전일 앞장서서 일을 주장한 사람들로서 미리 입을 맞추지 않았는 데도 같은 내용의 말을 하면서 각자 충성을 다 바치고 있고, 관학의 제생도 팔방에서 모여와 공의 때문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신의 술수 가운데 떨어져서 나온 행동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이익을 가지고 유생들을 유혹하겠습니까. 그리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치려 하는 유생들의 입장에서도 이익 때문에 신을 좇으려 하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붙들어드린 것은 선왕 때부터였고 역적 의(㼁)를 걱정한 것은 임자년이었고 대론(大論)을 수립한 것은 계축년이었는데 제생의 소가 나온 것은 지난해 11월이었고 준격이 무고한 것은 12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을 세워서 스스로 면할 여지를 만들려 한다고 신을 지목하는 것 역시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비통한 심정이 들 뿐입니다. 신의 죄악이 이러하니,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전하를 이렇듯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부당한 줄은 압니다만, 양사가 이미 ‘그에게 만약 죄악이 없다면 언관이 국문하도록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청해 옥(獄)으로 나와 기필코 해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 하였는데, 그 양사의 논이 지극히 의리에 합당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진달드리게 된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관심을 기울이어 너그러이 용서해 주소서." 하니, 추국청에 계하하였다.


[註 069] 그 아들 : 기준격(奇俊格).[註 070] 곽영(郭瓔)의 옥사(獄事) : 곽영이 이이첨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일어난 옥사임. 결국은 곽영이 형신을 받고 하옥된 뒤 천연두에 걸려 옥사하였는데, 그 상소 내용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권127 10년 윤4월 갑자(甲子)에 보임.[註 071] 기자헌 집안에서 납지(蠟紙)로 베껴 올린 서찰 : 이유홍(李惟弘)·허균(許筠)·송언신(宋言愼)·조호(曺浩)·이홍로(李弘老) 등의 서간 4장을 납지(蠟紙)로 모사(摸寫)한 뒤 왕에게 올린 것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권122 9년 12월 병진 예조 좌랑 기준격(禮曹佐郞奇俊格) 비밀 재소(祕密再疏)에 나옴.[註 072] 신축년 : 1601 선조 34년.[註 073] 해운 판관(海運判官) :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운(漕運)을 맡은 군직(軍職).[註 074] 국혼(國婚) : 허성의 딸과 선조(宣祖)의 제8 서자(庶子)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결혼한 것.[註 075] 병오년 : 1606 선조 39년.[註 076] 주사(朱使) :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註 077] 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註 078] 화근(禍根) :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가리킴.[註 079] 송순(宋諄)의 일 : 선조(宣祖) 말년에 왕자 정원군(定遠君)과 하원군 부인(河原君夫人:하원군은 선조의 형) 집안 사이에 말썽이 일어났을 때 대사간으로 있던 송순이 정원군을 탄핵하는 등 이 사건에 개입했다가 선조에 의해 내쫓긴 일이 있었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8 하원군가사(河原君家事).[註 080] 갑인년 : 1614 광해군 6년.[註 081] 안서(安西)의 옥사 : 안서는 해주(海州)의 옛 이름으로서 광해군 8년에 일어난 해주 목사 최기(崔沂)의 옥사를 말함.[註 082] 진회(秦檜) :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간신.[註 083] 공성 왕후(恭聖王后) :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註 084] 양시(兩尸) : 두 구의 시체라는 말로 광해군과 동궁을 가리킨 말임.[註 085] 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註 086] 이대엽(李大燁) : 이이첨의 아들.[註 087] 큰 뱀 : 유영경(柳永慶)과 김직재(金直哉)의 귀신을 가리킴.[註 088] 심이기(審食其)에 대한 말 : 심이기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인 여후(呂后)와 정을 통한 자로 승상이 된 뒤 궁중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처결하였음. 《사기(史記)》 권56. 준격의 소 끝 부분에 "허균이 또 말하기를 ‘내가 권력을 잡고 대비가 수렴 청정을 하면 나 자신이 심이기가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니 원상(院相)이 되어 안에서 온 나라의 일을 처결하겠다.’ 하였다." 하였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권122 9년 12월 기묘.
"지난해 대론(大論)이 일어났을 때 신의 원수 기자헌(奇自獻)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갔는데, 그 집에서는 신이 남몰래 중상했다고 의심한 나머지 신에 대해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저 자헌이 이런 의논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의 원수가 1백 명이나 된다 할지라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만, 일단 그런 차자를 진달하였고 보면 평소 원수진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를 용서한 채 주벌을 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집에서는 그만 신을 원망하여 그 아들069)  이 외람되게 변장(變章)을 올렸는데 그 소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양사가 추문하기를 청하고 2품 관원들이 추국하기를 청했는 데도 전하께서 이 모두에 대해 고집하면서 윤허하지 않으셨으므로 신이 집에서 거적을 깔고 엎디어 죄를 기다리면서 다시 변장(辨章)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소의 내용이 그토록 참독스러울 줄은 몰랐는데, 지난번 곽영(郭瓔)의 옥사(獄事)070)  를 인하여 국청이 그 소를 내려주기를 청한 결과 그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그 소에서 지어낸 말들 가운데 위를 핍박하고 임금을 욕되게 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 없는 일을 날조하며 온갖 계책을 동원해서 신을 모함하려 한 사실이 비로소 전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신 이하가 이 글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하였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한 시각도 지체시키지 않고 신을 추국하여 사실을 캐내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루고자 했던 것이야말로 인신(人臣)의 대의에 입각하여 나온 행동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와 대궐 뜰 아래에서 대질 신문을 벌이게 되리라 여기고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루를 일 년처럼 보내고 있었는데, 현재 판부사도 아직 차임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상께서도 여전히 조섭하시는 중에 계시므로 언제 친문(親問)하시게 될지 그 기약이 또한 막연하기만 합니다.
신이 기자헌의 집과 원수를 맺게 된 그동안의 곡절을 먼저 말씀드린 다음에 상소에 있는 무함한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해드릴까 합니다.
신의 형 집안에서 이홍로(李弘老)와 절혼(絶婚)하자 홍로가 복제(服制)를 삼가 지키지 않았다고 신을 무함했기 때문에 그와 원수가 되었던 정상에 대해서는 신이 첫 번째 상소를 올리면서 이미 상세히 진달드렸고, 홍로가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신도 함께 참여하였다고 한 말은 기자헌 집안에서 납지(蠟紙)로 베껴 올린 서찰071)  에서 거짓임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신이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축년072)  에 신이 해운 판관(海運判官)073)  으로 순시하면서 전주(全州)에 도착했을 때 홍로가 감사로 있으면서 모친상을 당했는데 성복(成服)하기 전에 불법 행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에 대해 신이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하자 자헌이 신을 증인으로 세우려 하였는데, 신이 말하기를 ‘홍로가 나를 상제(喪制)를 잘 지키지 못했다고 무함했는데 내가 또 이것을 가지고 그에게 비판을 가한다면 보복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누가 그 말을 믿어 주겠는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이때부터 자헌이 유감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홍로가 서울에 와서 신이 눈으로 본 일들을 퍼뜨렸는가 의심하여 원망하는 말을 떠들어대었습니다. 신이 조카의 상을 조문하러 그의 이웃에 간 김에 잠깐 들러 스스로 해명하려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신현(申晛)과 이성경(李晟慶)도 와 있었습니다. 이때 홍로가 무턱대고 신의 말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그때 마침 기자헌의 집에서 문안왔던 노자(奴子)가 이 광경을 보고는 돌아가 일러 바치자 자헌이 마침내 이소(李疏)에 참여하여 관계했다는 말을 지어낸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해명한 서찰은 본래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 데도 자헌이 이를 기화로 삼아 위협할 목적으로 글을 모사(摸寫)하여 밀납으로 붙여서 그 속에 흉측한 말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는가 하면 옥사를 일으켜 스스로 해명하려 한다는 설을 신에게 뒤집어씌우며 무함했습니다.
계묘년 4월에 신의 형 허성(許筬)의 집에서 국혼(國婚)074)  을 치르던 날 형의 처의 병이 위중했던 탓으로 날짜를 앞당겨 혼인식을 마쳤는데, 궁인(宮人)들도 병자를 보고 갔으며 그런 뒤 5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비밀에 부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는 설이 궁중에 전파되었는데 이것 역시 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자헌의 무함을 지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봄 꿩이 절로 울어대듯 자헌이 형의 집에 가서 해명하기를 ‘이것은 허균이 나를 잡아넣을 목적으로 지어낸 말이니 공의 집에서 직접 대방(大房)에 해명해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헌이 더욱 성을 내면서 헌납 신율(申慄)을 충동질하여 신을 탄핵케 하였으므로 신이 즉시 강릉(江陵)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헌이 여전히 분풀이를 그치지 않자 신의 형이 이를 걱정한 나머지 신으로 하여금 글을 보내 사과함으로써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서찰을 보내 사과하면서도 다른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자헌이 말하기를 ‘내가 이 편지를 내놓기만 하면 허균은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이 혹시라도 망발한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만 실상은 그 정도의 내용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헌이 전후로 차자를 올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차례차례 비방했을 적에도 신의 이름은 그 속에 끼어 있지 않았는데 이는 실제로 그렇게 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오년075)  에 주사(朱使)076)  가 벽제(碧蹄)에 왔을 때 신이 역관(譯官) 박인상(朴仁詳)으로 하여금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진달하게 하였더니 주사가 즉시 정문(呈文)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에게 말하였더니 적신(賊臣) 유영경(柳永慶)은 달갑지 않게 여긴 반면 자헌과 심희수(沈喜壽)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하여튼 온 나라의 민정(民情)을 조사(詔使)에게 진달함으로써 중국 조정의 천신(薦神)들에게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 영경이 분노와 시기심을 품게 된 결과 자헌 등이 잇달아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바로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과 자헌이 똑같이 영경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는 자헌이 겉으로 마음을 열고 대해주는 척했습니다만, 신은 자헌이 음험한 마음의 소유자로서 그 속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때때로 만나기는 하면서도 그동안 품어온 개인적인 생각을 감히 토로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상대방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계축년077)   겨울 초에 화근(禍根)078)  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논이 행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4일에 신이 마침 자헌을 만나 조용히 물으면서 그의 마음을 탐지해 보았더니 자헌이 머리를 흔들며 듣지 않고서 송순(宋諄)의 일079)  을 핑계대고는 결연히 피해버렸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신의 두 번째 소에 들어 있으니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대체로 그의 자질(子姪)이 모두 서양갑(徐羊甲)과 지극히 친한 사이로서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는 데도 요행히 나문(拿問)을 면하였기 때문에 뒷날 화를 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미리 이런 의논을 세워둠으로써 국면을 뒤집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로써 자헌이 끝내는 임금을 등지고 대론(大論)을 저지시키려 할 줄을 알았습니다.
갑인년080)   봄에 자헌이 정승으로 들어오자 삼사(三司)가 일제히 그를 탄핵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신에게 시배(時輩)들의 이런 일을 중지시켜달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널리 친구들에게 요청하여 그 탄핵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의 아우 기윤헌(奇允獻)이 외설에 관한 일로 신을 의심하여 유감을 품었는데, 신이 경사(京師)에 간 틈을 타서 그의 형을 속여 말하기를 ‘삼사가 탄핵했을 적에 허균이 극력 저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덩달아서 배척하였다.’ 하니, 자헌이 이 말을 믿고 크게 성을 내었습니다. 신이 요동에서 징병(徵兵)에 관한 일은 조처하기가 곤란하다는 곡절로 자헌에게 글을 보냈더니 자기를 헐뜯는다고 여겨 공공연히 욕을 마구 해댔으며, 그 뒤 북경에 도착하여 조종(祖宗)의 변무(辨誣)에 대한 글을 올리자 극도로 추잡한 비난을 가하면서 대벽(大辟)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신이 자헌을 극력 변호했던 사실을 아는 자가 자헌에게 가서 곡진히 해명하고 이어 그의 구원을 요청했던 서찰 3통을 보여주자 자헌이 깨닫긴 하였습니다만 시기하고 저해하려는 마음은 더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 뒤 신이 변무에 대한 일을 완결짓고 돌아오자 그가 늘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뒷날 이것이 필시 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하면서 밤낮으로 획책하며 기필코 신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안서(安西)의 옥사081)  가 일어났을 때에는 자헌이 직접 차자를 작성해 신을 무함했는데, 그 내용을 듣건대 모두가 허위로 날조한 것이었기에 신 역시 상소를 만들어 대질하려 하였으나 자헌이 밖에서 위협을 가해 오는 바람에 그만둔 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흉격(凶檄)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임금을 버리고 도주하면서 은연중 신이 지은 것처럼 말했으며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 짜고서 신을 무함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릉(江陵)의 차자에서는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어도 들으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적하였다가 그 뒤에 조정에 돌아왔을 때에는 또한 감히 분명하게는 말하지 못했는데, 성상께서 그의 흉악함을 통촉해 주지 않았다면 신의 목숨이 어떻게 연장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뒤 김진(金珍)의 옥사 때에는 자헌이 신을 욕하면서 진회(秦檜)082)  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이 상소를 한번 올려 전일 원한을 맺게 된 상황과 그가 역적을 비호하고 임금을 배반한 정상을 진달하면서 그와 대질 신문을 벌이게 해 주도록 청하려 하였더니 자헌이 기겁하여 이복장(李福長)을 보내어 화해하자고 애걸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대례(大禮)가 이미 임박한 상황에서 자헌이 이 때문에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나 싶어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나 진달드리면서 해명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론(大論)이 곧바로 일어나게 되었고 그가 맨 먼저 죄를 받고 말았는데 그런 기회에 편승하여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일은 의리상 차마 하지 못하겠기에 지금까지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남 사람 중에 사산(蛇山)에 몰래 장지(葬地)를 쓴 일을 가지고 상소하여 그의 죄를 청하려 한 자가 있었습니다. 사산은 곧 신라(新羅) 이래로 장사지내지 못하도록 금해 오던 지역으로서 사람들이 모두 만세에 군왕(君王)이 날 곳이라고 말해 왔는데 자헌이 거기에 첩을 장사지내었으므로 그가 망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었습니다. 이 상소를 올리려 하자 기자헌의 집에서는 신이 사주한 것으로 의심하여 더욱 극심하게 원망하면서 말하기를 ‘허균이 평소 우리 집에서 대론을 따르려 하지 않는 정상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극력 이런 꼬투리를 집어내어 우리 집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는 것인데 배소(配所)를 여러 차례나 옮기게 된 것도 모두 그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하고는 부인으로 하여금 곧장 상언(上言)케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성균관 유생의 상소에서도 기준격과 기수발(奇秀發)이 서양갑과 교분을 맺고 있었던 정상을 거론했었는데, 윤헌(允獻)이 이사호(李士浩)와 복심(腹心)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신이 그 흉악한 정상을 탐지하고서 혹시라도 그만두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 신만 제거해 버리면 대론도 저절로 와해될 것이고 그의 화도 가벼워질 것이라고 여기고는 준격을 꾀어서 저격(狙擊)할 계책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경망스럽다고는 해도 원수의 자제를 대할 때면 반드시 신중하게 말을 가려서 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처럼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역스러운 난언(亂言)을 했겠습니까. 이런 말은 정신이상자도 감히 하지 못할 것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흉소(兇疏)에서 한 이야기들은 전해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인만큼 하나하나 분석해 깨뜨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에 대해서는 신이 특별히 밝혀보고자 합니다. 준격이 나이 어릴 적에 그 아비의 명으로 신에게 와서 배우긴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역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가르치긴 했습니다만 일상적인 이야기는 또한 말해 준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나온 기유년과 신해년의 이야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증거도 없는 말을 글로 옮겨 쓰다니 신은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의창군(義昌君)이 바로 신의 형의 사위이기 때문에 기필코 신의 집안을 결딴낼 목적으로 문득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설을 지어내어 그 공을 자기 아비에게 돌리려 한 것이니 그 꾀가 너무도 참혹하기만 합니다.
형의 집에서 성혼(成婚)한 지 얼마 안되어 신은 바로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었는데 갑진년 8월에 올라와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제수받고 부임했다가 을사년 11월에 파직되어 돌아왔습니다. 12월에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병오년 3월에 의주(義州)에서 저보(邸報)를 보고 비로소 이의(李㼁)가 탄생하여 진하(陳賀)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신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대신이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성상께서 당시 춘궁(春宮)으로 확정되신 상태에서 만백성이 마음 속으로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바로 공성 왕후(恭聖王后)083)  의 촌수에 드는 친척인 만큼 개인적으로 적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른 신하들의 배는 될 것인데 어떻게 감히 흉악한 마음을 계속 품고서 끝내 원수의 집안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해년 겨울에 적소(謫所)에서 사면을 받고 11월 12일에 서울에 들어와 형을 만난 뒤 24일에 도로 부안(扶安)의 장사(庄舍)로 갔다가 임자년 2월 초에야 돌아왔는데 그동안 준격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의 형제는 김제남(金悌男)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아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혼인을 권하는 일 때문에 제남과 함께 윤수겸(尹守謙)의 집에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해 겨울에는 겨우 10여 일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수겸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수겸이 지금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제남과 신이 서로 만날 길이 없게 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궁중의 그렇고 그런 일들을 신이 어떻게 제남에게서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양시(兩尸)084)  는 적자(嫡子)가 아니라고 한 말은 모두 그가 스스로 지어낸 것인데, 어떻게 차마 주각(注脚)을 달아 양시를 해석하면서 감히 이토록 기탄없이 성상을 번독케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어온 자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런 문자를 베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헤아릴 수 없는 모욕을 거꾸로 군상(君上)에게 가하게 된 것인데, 고금 천하에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치고 어찌 이처럼 심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마음이 아프고 살이 찢어지는 듯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호곡할 따름입니다.
그가 실제로 이런 흉측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인신(人臣)의 의리로 볼 때 어떻게 온 조정이 모두 그 집안을 질시한다는 이유로 그만둔 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이 적확하기만 하다면 사람들이 아무리 그 집안을 미워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겁박하며 거꾸로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실제로 흉역스러운 말을 내놓았다고 한다면 인신으로서는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책을 갖고 와서 1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신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아비의 두 차례에 걸친 공(功)의 녹권(錄券)과 관련하여 기필코 신에게 글을 짓게 하여 후세에 전하려 했단 말입니까. 이는 따질 것도 없이 저절로 명백한 것입니다.
무신년에 공주(公州)에서 파관(罷官)되고 나서 전사(田舍)를 구해 볼 목적으로 부안에 갔다가 산거(山居)할 만한 곳을 바닷가에서 얻은 뒤 경영하던 중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로 유배될 적에 꼭 함열(咸悅)을 원했던 것은 대체로 그곳이 부안과 가까워 석방되면 곧바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축년 봄에도 부안에 내려갔습니다만 이는 노복과 전토(田土)가 모두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심광세(沈光世)와 같이 모의할 목적으로 부안에 내려갔던 것이겠습니까.
신해년에 신의 집이 비어 한가하게 되자 윤수겸이 몇 달 동안 빌려 들어와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 아들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집을 지키고 있던 비자(婢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광세가 ‘동생 집안에서 윤(尹)의 집에 청혼하려 하는데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훌륭한가?’ 하고 물었을 때 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는데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기를 ‘사람들마다 모두 대군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데 사대부 입장에서 어떻게 혼인을 맺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송구(宋耉)와 함께 그 부당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겸과 절친한 친구인 이문란(李文蘭)을 불러 말하기를 ‘광세가 질녀를 수겸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니 그대가 모쪼록 이 결혼을 극력 만류하라.’ 하니, 문란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그 말이 옳다.’ 하고는 즉시 수겸에게 말하자, 수겸이 말하기를 ‘그가 원한다 할지라도 내가 어찌 들어주겠는가. 나는 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이튿날 준격이 송구에게 찾아가서 이 일을 묻자, 송구가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준격이 숙부가 말했다고 하였으므로 송구 역시 허균이 만류했다고 대답해 보내었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송구를 끌어다 증거를 대고 있는데 송구가 아직 서울에 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무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문란이 지난해에 상소했었으니 그것을 가져다 상고해 보아도 해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소에 나온 말들을 보면 모두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는데 이 대목만은 유독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겸 등 세 사람이 모두 있으니,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부실하게 지껄여댔다면 그가 혼자 말하고 혼자 들은 이야기들이 허위라는 것을 이를 유추해서 확연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 ‘참서(讖書)를 집에 보관해 두는 것은 사죄(死罪)를 범한 데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보았다 하더라도 집에 보관해 두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전해 이야기하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할 일인데, 더구나 원수진 집안의 자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참설(讖說)은 20여 년 전 선조(先朝) 때부터 있던 것으로 세상에 전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천도(遷都)에 관한 설은 임자년 연간에 나왔으니 그가 그럴 듯하게 속여넘기려 한 정상이 이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른바 심우영(沈友英)은 바로 신의 망처(亡妻)의 외서삼촌(外庶三寸)입니다. 문재(文才)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대부들도 허여하였고 신은 가족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처음부터 허물없이 지내긴 하였습니다만 사람됨이 교만하고 거칠며 적자(嫡子)를 멸시하였으므로 온 집안이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정미년 겨울에 이원형(李元亨)이 와서 말하기를 ‘삼가 우영을 친하게 대하지 말라. 우영이 말 끝에 나보고 임해(臨海)한테 가서 살펴보고 오라 하기에 내가 큰소리로 준열하게 꾸짖었더니 그가 안색을 변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기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싶다.」 하였다.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으므로 나도 그때부터 절교하였다.’ 하였으므로 신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더니 말하는 즈음에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특별히 심했으며 대군을 애호하는 말을 드러나게 하였으므로 더욱 괴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이의숭(李義崇)이 우영에게 재물을 꾸어주려 하기에 신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이들 무리는 뜻을 두는 바가 수상하니 신중을 기해 교제하지 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른바 박응서(朴應犀)라는 자에 대한 것은 이렇습니다. 그의 아비 박순(朴淳)이 신의 아비 허엽(許曄)과 절친했었는데,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의논하는 일 때문에 사죄(死罪)를 받을 운명에 처했을 때 신의 아비가 당국자(當國者)에게 해명하여 면하게 해 주었으므로 박순이 늘 고맙게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박순이 입대(入對)하여 신의 형 허봉(許篈)의 잘못을 극언하는 바람에 형이 멀리 유배가게 되었으므로 신의 어미가 박순을 원망하면서 그대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담 서원(花潭書院)에는 신의 아비가 마땅히 배향(配享)되어야 하는데 박순도 함께 배향되려 하였으므로 신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응서가 이 말을 듣고는 원한을 품었는데 이 때문에 심우영이 응서의 편에 서서 갑자기 신의 집과 의숭의 집에 대한 정분을 소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도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박응서와 김비(金祕)가 분명히 범인들이었으므로 신이 의숭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뭐라고 말하던가. 이 어찌 끝내 국가의 대적(大賊)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함께 대장 이문전(李文荃)을 찾아보았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문전이 파직되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에 응서가 은상(銀商) 살인 강도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일이 제때에 해결되지 않자 의숭이 신의 말을 불현듯 깨닫고는 즉시 이이첨(李爾瞻)을 찾아가서 ‘역적임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첨이 바로 한희길(韓希吉)을 불러 입계(入啓)하도록 극력 권한 결과 죄인의 괴수를 끝내 붙잡게 되었고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문전과 이원형(李元亨)이 지난해에 이런 내용으로 모두 소장을 올렸고, 의숭 역시 공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지었다가 미처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죽고 말았는데 그 초안이 필시 그의 집에 남아 있을 것이니, 이것들을 모두 가져다가 조사해 보면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용렬하다 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얼족(孼族)을 집우(執友)라고 일컬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정리(情理)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신이 정미년 겨울에 혼자서 보려고 본조(本朝)의 시를 뽑았는데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모두 국초(國初)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여 써넣다 보니 자연 두 사람의 것을 제일 앞에 수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감히 그 사람들을 사모한 나머지 기필코 뽑아내어 앞에다 두려 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의 책을 보아도 국초의 시문에는 도전의 작품이 으레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찌 신이 다른 사람을 팽개친 채 꼭 이 사람을 앞자리에 놓으려 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무술년에 송도(松都)의 포은(圃隱)085)   고택(古宅)을 들러 시편을 지으면서 그 끝 부분에 도전을 극력 배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삼군부 앞에 무기 벌여놓고는 임금 잊고 적자 바꿔 강상(綱常)을 어긴 일을. 계책을 세우자 마자 도전이 죽었으니 다리에서 폭사한 것 사람의 재앙 아니라오[君不見 三軍府前羅劍鋩 忘君易嫡違天常 搆締纔訖道傳死 中橋暴屍非人殃].’라 하였는데 차운로(車雲輅)가 보고 늘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이밖에 또 도전과 권근에 대한 논을 지어 배척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를 트집잡는 것은 정말 아이들 장난같기만 합니다. 그리고 생존자로는 최립(崔岦)과 이달(李達)을 제외하고는 또한 많이 뽑지 않았으니, 어찌 얼족을 위해 그들의 졸렬한 시를 뽑아주려 했겠습니까. 이 책이 지금 박엽의 집에 있으니 가져다 조사해 보면 알 것입니다. 또 신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에는 옥에서 나와 몹시 급한 때였는데 당시 우영의 자취가 이미 신의 집과는 소원해져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상태였고 보면 비록 그가 신을 찾아와 시를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영의 집에 신이 준 시편이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서 이런 말을 지어내어 신을 모함하려 한 것이니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서양갑의 자(字)가 석선(石仙)인 것은 지금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천얼의 자는 지극히 절친한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준격이 혼자서 그 자를 알고는 신에게 마구 덮어씌우며 신이 만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준격이 은밀히 양갑과 결탁하고 매우 밀접하게 사귀어온 사실이 이에 이르러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자신이 양갑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스스로 영웅이라고 일컫고는 거꾸로 신에게 화를 전가시키려는 짓이니 그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흉격(兇檄)에 대한 일은 당시 추안(推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이제 와서 그만 이런 말을 지어내면서 다른 증거는 세우지도 못한 채 그저 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격문을 짓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흉역인데 그것을 끌어들여 자기가 지었다고 하면서 원수진 집의 사람에게 말을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한 집안의 제질(諸姪)은 정리가 부자지간과 같은 만큼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히 타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이런 천만부당한 흉언을 말했겠습니까. 그 말은 이번에 소명국(蘇鳴國)이 은밀히 이대엽(李大燁)086)  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더욱 분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가 ‘법궁(法宮)에 이어(移御)하실 때의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에 관한 설’을 말한 것은 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것인데 이 어찌 인신(人臣)이 차마 말할 성격의 것이겠습니까. 처음 법궁을 창건했을 때 비길 데 없이 성대하고 화려하여 신민이 밤낮으로 이어하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인심도 모두 우리 임금을 떠받들고 있었고 시변(時變)과 천재(天災) 역시 걱정할 것이 별로 없었는데 준격이 그만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목적으로 흉설을 스스로 지어내고는 천시와 인사를 끌어대면서 현혹시키고 선동하며 필설(筆舌)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그가 역적 의(㼁)에게 충심으로 붙좇은 정상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났으니, 아,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이이첨의 집에 큰 뱀087)  이 있다는 설 역시 무슨 근거로 신에게 떠넘기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기축년부터 이첨과 성균관에서 교분을 맺었는데 나이로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형으로 섬기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리고 무신년 이래로 역적을 토죄하는 일이라면 모두 함께 마음을 합쳐 행동해 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계축년 이후에야 그에게 투탁(投托)한 것이겠습니까. 임자년 겨울에 신이 충주(忠州)로 떠나려 할 즈음에 이첨에게 가서 작별을 고했는데 그 자리에는 한찬남도 있었습니다. 그때 신이 말하기를 ‘의야말로 화의 근본으로서 뜻을 잃은 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관원들이 모두 서인(西人)이니 우리들 편으로 대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더니 좌중이 모두 동의하였는데, 신의 말이 불행하게도 계축년에 적중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군상(君上)을 위해 시종일관 충성을 다 바친 일에 대해서는 동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기꺼이 원수진 집과 함께하며 거꾸로 흉언을 만들어내었겠습니까.
그리고 ‘의를 세운 뒤 수렴 청정을 하겠다.’느니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워야 한다.’느니라고 내가 말했다고 하였습니다만, 이것이 어떤 흉역인데 그에게 그런 말을 분명히 듣게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하여 그때 바로 고변을 하지 않고 태연히 까딱도 하지 않은 채 마치 한담하는 것처럼 문답을 했단 말입니까.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인데도 이렇게까지 허위로 고하다니 군상을 우롱한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다고 할 것입니다. 준격이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이렇게 무고하는 상소를 올린 것인데 교묘하게 마음을 쓰긴 하였지만 계책을 세운 것은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그 아비는 늘 신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자헌이 어찌 고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대론(大論) 때문에 패망한 뒤로 신에게 원망을 돌린 나머지 사생 결단을 내려고 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요행수를 바라는 한편, 의논을 달리하는 자가 신을 미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힘을 합쳐 함정에 몰아넣음으로써 혹시라도 신을 다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만,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원수가 원수를 공격하고 있으니 그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유폐(流弊)는 결과적으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원한을 원한으로 서로 갚게 하면서 교묘하게 수식해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을 끝내 그치지 않게 만들고 말 것인데, 원한을 떠맡으면서까지 역적을 토죄한 인신이 결국 모함을 받고 만다면 그 누가 군부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치려 하겠습니까.
조종(祖宗) 선왕(先王)의 변무(辨誣)에 대한 일도 그렇습니다. 신이 이 문제를 꺼내자 자헌이 노하면서 극력 저지시켰는데 대전(大典)을 완결짓고 경사스럽게 돌아오자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될까 몹시 두려워하면서 그 공을 조사하여 정하는 날에 신이 혹시라도 그 말을 꺼낼까 의심한 나머지 기필코 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못하고 말았었습니다. 국가에서 대전에 관한 공을 조사하여 정하는 일에 대해 준격이 어떻게 감히 끼어들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남곤(南袞)과 병칭하면서 신의 원훈(元勳)을 저지시키려 한 것은 뒷날 그의 아비가 이로 인해 죄를 받게 될까 염려해서인데 그렇다고 해도 상소 가운데에 쓸데없이 언급한 것은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대사(大事)가 지지부진하게 연기된 책임을 어찌 꼭 신 한 사람에게만 돌려야 할 것이겠습니까. 본디 성상께서 사은(私恩)을 차마 끊지 못하시고 묘당과 삼사가 때를 기다려 일제히 발론하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한 허다한 곡절을 상께서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준격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보복을 한 것으로서 단지 아비를 잡아넣기 위하여 대사를 연기시킨 것이다.’고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속여넘기는 말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이 형조 참의로 있을 때 역적 정협(鄭浹)이 전옥서 주부로 있었는데 범죄인을 하옥시키는 일을 신이 실제로 주관하였으므로 정협이 늘 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승복(承服)하던 날 더러는 원한관계 때문에 허위로 끌어들이지나 않을까 걱정도 하였지만 신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때 이원형(李元亨)은 바야흐로 광주(廣州)에 있었으니 비록 손을 흔들려 했다 한들 어떻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없는 사실들을 짜집기해서 교묘하게 얽어낸 정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끝 부분의 심이기(審食其)에 대한 말088)  은 듣기만 해도 간담이 찢어질 듯하니 기필코 이 적과 상의 앞에서 함께 죽음으로써 스스로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와 같이 극도로 흉악한 이야기를 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미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보면 그 자신이 지어낸 것인데, 스스로 금수와 같은 행동을 익히 보고 인륜을 모독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집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집과 원수를 맺은 탓으로 선왕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였으니 차라리 스스로 가슴을 갈라 천일(天日) 아래에서 통쾌하게 분을 풀고 싶습니다.
저 자헌이 지극히 사소한 일로 의심을 내고 사실이 아닌 말로 원수를 맺어 형적이 없는 일로 죽이려 드니 그 마음의 흉악하고 참혹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천지와 귀신이 위에 임하고 곁에 있는데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여 스스로 죄를 초래하겠습니까. 그리고 준격이 무함한 말들은 승지나 사관(史官)들도 기록할 수 없는 것들인데 소명국이 그만 그 말을 써서 잇달아 사람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흉격(兇檄)의 맹랑한 것이 그와 같았으므로 형적이 이미 패로(敗露)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명국과 준격이 앞뒤로 같이 모의하여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하려 한 것으로서 명국와 준격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셈입니다. 그런데 명국이 이미 형을 받았는 데도 준격이 털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이해하지 못할 점입니다.
자헌이야말로 왕실과 가까운 친족으로서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는 몸이었으니 만약 흉설을 듣고서도 위에 고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역적을 비호한 죄가 있다 할 것이고, 준격이 흉언을 듣고 남의 혼인을 금하기까지 했으면서 그대로 그 사람에게 배우며 끊임없이 왕래했다면 그도 역당(逆黨)이라 할 것입니다. 온 나라가 모두 두 집안이 원수를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패몰된 뒤에 신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감히 증거도 없고 형적도 없는 말을 가지고 선왕과 양성(兩聖)을 모독하는가 하면 신을 죽이려고 획책하면서도 스스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에 떨어지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만큼 죄를 진 사람의 입장에서 입을 놀려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현재 합사(合司)하여 신을 배척한 것 가운데 혹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진달드리고 끝마칠까 합니다.
신은 선왕 때부터 전하만을 떠받들면서 여러 번 피끓는 정성을 바쳤으며 계축년 이전에는 자주 동료와 함께 국가의 일을 걱정하면서 자못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이첨도 또한 신의 충성심에 탄복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조금 경사(經史)에 통하고 고전(古典)에 박식하다 하여 화근을 제거하는 일을 유독 신과 더불어 의논해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재야의 선비들 가운데 혹 신과 친하게 지내던 자들이 다투어 피끓는 상소를 올리면서 정론(正論)을 일으켜 세웠는데 사람들 중에는 혹 신이 또한 그 상소에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패몰당하여 뜻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는 무리들이 신을 이이첨보다 더 미워한 나머지 초야에서 사람을 공격하며 떼 지어 일어난 상소까지도 모두 신이 사주했다고 하니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그 뒤에 올린 최심(崔沁)과 윤해수(尹海壽) 등의 소장은 신의 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데도 시의(時議)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곽영(郭瓔)이 올린 상소에 대해서 황덕부(黃德符)조차도 신을 가리켜 그의 술수에 떨어졌다고까지 하였으나, 급기야 소명국의 일이 밝혀지면서 덕부가 비로소 아무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대론(大論)을 주도한 탓으로 저들에게 미움을 당할 뿐만이 아니라 늦추기를 주장하는 약간의 시배(時輩)들에게까지 질시를 받은 결과 장차 죽을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리고 있을 뿐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같이 일하던 제생(諸生)들은 혹 징병(徵兵)할 문제로 소요스러운 때에 자칫 내분이라도 빚게 될까 염려하기도 합니다만, 초야와 관학(館學)에서는 모두 소장을 진달하여 큰 판국을 완결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신에게 와서 상의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토역(討逆)하는 정론(正論)을 의리상 막을 수는 없기에 그들이 다시 청하는 대로 맡겨 둘 뿐이었습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덕부 한 사람에게 배척을 받은 탓으로 끝내는 원수진 집안의 준격보다도 더 심하게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민인길(閔仁佶)의 상소에는 당초 신이 격서(檄書)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었고, 이홍로와 원수를 맺은 자취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며, 다섯 서찰을 밀납으로 붙였던 것도 모두 허구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에서 원수가 무함하는 이야기들을 주워모아 탄핵문 속에 드러내다니 신은 그 까닭을 또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준격에게 무함을 당한 뒤로는 두려운 심정으로 조사하는 명을 기다리고 있을 뿐, 친우의 집에는 전혀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어두울 때를 이용하여 다른 집으로 옮겨갈 적에도 파리한 말을 타고는 보잘것없는 동복(童僕)이나 데리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달관(達官)인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초헌(軺軒)을 타고 구종(丘從)을 이끌고 다니면서 큰 소리로 벽제(辟除)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억울하기만 합니다.
신은 현재 병고에 시달려 생사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요동(遼東)에 가는 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기에 기필코 윤유겸(尹惟謙)을 사주하여 이런 망론(妄論)을 하도록 했겠습니까. 윤상(倫常)을 어지럽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근(言根)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이런 비방을 들어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추악한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윤(倫)이니 상(常)이니 하는 것도 뭔가 배척할 것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세상의 어진 재상이 지극히 친밀하게 대우해 주어 국가의 대론(大論)에도 참여케 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언관이 흉역이라고 배척하고 윤상을 어지럽혔다고 내쳤으니, 금방 훌륭하다고 했다가 금방 간사하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민인길이 상소한 지 지금 벌써 17개월이 되었고 준격이 무함을 해 온 지도 반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꼼짝않고 가만히 있다가 제유(諸儒)의 직론(直論)이 일제히 나온 뒤에야 신을 역적으로 지목하면서 세 사람을 국문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역적을 토죄하는 일을 이렇게 느슨하게 하다니 국가의 일을 알 만합니다.
대사(大事) 때문에 처음 모였을 때는 신이 과연 그들을 권면한 일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공의(公議)가 일제히 분개하고 있을 뿐더러 제생(諸生)도 모두가 전일 앞장서서 일을 주장한 사람들로서 미리 입을 맞추지 않았는 데도 같은 내용의 말을 하면서 각자 충성을 다 바치고 있고, 관학의 제생도 팔방에서 모여와 공의 때문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신의 술수 가운데 떨어져서 나온 행동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이익을 가지고 유생들을 유혹하겠습니까. 그리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치려 하는 유생들의 입장에서도 이익 때문에 신을 좇으려 하겠습니까.
신이 전하를 붙들어드린 것은 선왕 때부터였고 역적 의(㼁)를 걱정한 것은 임자년이었고 대론(大論)을 수립한 것은 계축년이었는데 제생의 소가 나온 것은 지난해 11월이었고 준격이 무고한 것은 12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을 세워서 스스로 면할 여지를 만들려 한다고 신을 지목하는 것 역시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비통한 심정이 들 뿐입니다.
신의 죄악이 이러하니, 조용히 조섭하고 계시는 전하를 이렇듯 귀찮게 해 드리는 것이 부당한 줄은 압니다만, 양사가 이미 ‘그에게 만약 죄악이 없다면 언관이 국문하도록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청해 옥(獄)으로 나와 기필코 해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 하였는데, 그 양사의 논이 지극히 의리에 합당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진달드리게 된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관심을 기울이어 너그러이 용서해 주소서."
하니, 추국청에 계하하였다.

 

5월 4일 신묘

정원이 【박정길(朴鼎吉)·이위경(李偉卿)·정규(鄭逵).】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임연(任兗)은 병으로 쇠약해진 데다 몸이 뚱뚱하고 동작이 둔한 까닭에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지고 혈기가 올라와 자신의 몸도 거의 가누지를 못합니다. 이번에 진주(陳奏)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기왕 할 바에는 모름지기 밤을 낮 삼아 급히 말을 달려 요동·광령의 각 아문에서 주문(奏聞)하기 전에 도착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존망과 직결된 일인만큼 한 시각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텐데 임연처럼 전혀 견디지 못할 자를 보낼 경우 중도에 쓰러질 것이 분명하니 제때에 도달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일을 보지 못한 나머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나 중원의 사정에 대해서 그는 필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대소 신민들 모두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즉시 달려가 구원하지 않는다면 장차 중국 조정과 사단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하고, 또 ‘중국 조정과 우리 나라 사이의 정의(情義)가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노추(老酋)가 알게 되면 꺼리는 마음이 없어져 우리 나라 쪽으로 침범해 올 걱정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게 해서 전일 이조가 의망한 자들 가운데 민첩하고 사려가 깊은 자를 엄선하게 한 뒤 1, 2일 안으로 급히 떠나보내도록 하소서. "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삼가 보건대 임연(任兗)은 병으로 쇠약해진 데다 몸이 뚱뚱하고 동작이 둔한 까닭에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지고 혈기가 올라와 자신의 몸도 거의 가누지를 못합니다. 이번에 진주(陳奏)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기왕 할 바에는 모름지기 밤을 낮 삼아 급히 말을 달려 요동·광령의 각 아문에서 주문(奏聞)하기 전에 도착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존망과 직결된 일인만큼 한 시각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텐데 임연처럼 전혀 견디지 못할 자를 보낼 경우 중도에 쓰러질 것이 분명하니 제때에 도달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일을 보지 못한 나머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나 중원의 사정에 대해서 그는 필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대소 신민들 모두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즉시 달려가 구원하지 않는다면 장차 중국 조정과 사단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하고, 또 ‘중국 조정과 우리 나라 사이의 정의(情義)가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노추(老酋)가 알게 되면 꺼리는 마음이 없어져 우리 나라 쪽으로 침범해 올 걱정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게 해서 전일 이조가 의망한 자들 가운데 민첩하고 사려가 깊은 자를 엄선하게 한 뒤 1, 2일 안으로 급히 떠나보내도록 하소서. "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정기광(鄭基廣)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유경종(柳敬宗)을 동지중추부사로, 송방조(宋邦祚)를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유순무(柳舜懋)를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5월 5일 임진

비변사의 비밀 초기(草記)를 인하여 전교하였다. "진주사(陳奏使) 임연을 체차하고 윤휘로 차송하라."
"진주사(陳奏使) 임연을 체차하고 윤휘로 차송하라."

 

승문원의 관원이 대제학 이이첨의 뜻으로 아뢰기를, "군병을 징집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을 온 조정의 재신(宰臣)들이 이미 극진하게 진달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두 신하가 의논드린 데 따라 장차 진주(陳奏)하는 사신을 보낼 예정으로 있는데, 사세를 헤아려보건대 정말 위급하기만 합니다. 신은 물론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중국에 난리가 났을 경우에는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이것이 바로 《춘추(春秋)》의 대의요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소생시켜 준 은혜를 입어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노추(老酋)가 장난을 하자 중국에서 장차 토벌하려 하여 지금 무원(撫院)의 자문과 군문(軍門)의 격서가 교대로 급히 몰려오고 있으니, 늘 잘못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역량껏 군병을 조발(調發)한 뒤 조칙이 오는 대로 국경 밖으로 출동시킬 태세를 갖추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할텐데, 어떻게 먼저 사신을 보내어 요행을 도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혹시라도 즉시 허가를 받지 못한 채 거꾸로 의심만 사게 되어 해과(該科)의 탄핵과 제진(諸鎭)의 질책이 한꺼번에 요란스럽게 터져나올 경우 성상께서 예전부터 사대(事大)해 온 지극한 정성을 무슨 방법으로 드러내 밝힐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국경에 머무르며 기다리겠다.’는 등의 말을 두 자문 가운데에 첨가해 적었는데 지금 또 사신을 보내는 한 조목을 가지고 주문(奏文)을 지으려니 말과 생각이 서로 어긋난 나머지 전혀 글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장 표현상에 있어서 잘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비국의 신하들과 자세히 의논해 지어내게 함으로써 소루하게 될 걱정을 면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전후의 전교에서 빠짐없이 개진하였다. 비국과 의논할 것 없이 일체 전교한 뜻과 박자흥(朴自興)의 의논과 정원의 계사에 따라 빠짐없이 참작해서 속히 지어 바치고 득달같이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군병을 징집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을 온 조정의 재신(宰臣)들이 이미 극진하게 진달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두 신하가 의논드린 데 따라 장차 진주(陳奏)하는 사신을 보낼 예정으로 있는데, 사세를 헤아려보건대 정말 위급하기만 합니다. 신은 물론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중국에 난리가 났을 경우에는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이것이 바로 《춘추(春秋)》의 대의요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소생시켜 준 은혜를 입어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노추(老酋)가 장난을 하자 중국에서 장차 토벌하려 하여 지금 무원(撫院)의 자문과 군문(軍門)의 격서가 교대로 급히 몰려오고 있으니, 늘 잘못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역량껏 군병을 조발(調發)한 뒤 조칙이 오는 대로 국경 밖으로 출동시킬 태세를 갖추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할텐데, 어떻게 먼저 사신을 보내어 요행을 도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혹시라도 즉시 허가를 받지 못한 채 거꾸로 의심만 사게 되어 해과(該科)의 탄핵과 제진(諸鎭)의 질책이 한꺼번에 요란스럽게 터져나올 경우 성상께서 예전부터 사대(事大)해 온 지극한 정성을 무슨 방법으로 드러내 밝힐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국경에 머무르며 기다리겠다.’는 등의 말을 두 자문 가운데에 첨가해 적었는데 지금 또 사신을 보내는 한 조목을 가지고 주문(奏文)을 지으려니 말과 생각이 서로 어긋난 나머지 전혀 글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장 표현상에 있어서 잘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비국의 신하들과 자세히 의논해 지어내게 함으로써 소루하게 될 걱정을 면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전후의 전교에서 빠짐없이 개진하였다. 비국과 의논할 것 없이 일체 전교한 뜻과 박자흥(朴自興)의 의논과 정원의 계사에 따라 빠짐없이 참작해서 속히 지어 바치고 득달같이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이번에 진주사를 보내는 일은 미리 입막음을 하려는 것같은 것이 아니고 단지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니 글만 잘 만들면 조금도 달리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국의 재신(宰臣)들이 시종일관 이 일을 못하게 하려 할 뿐만이 아니라 대제학까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극력 막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나온 미안한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에 내가 비록 어둡고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부득불 한마디 해야 하겠다. 우리 나라의 병력에 과연 조금이라도 중국 군대를 도울 만한 형세가 있다면 온 나라의 병력을 휩쓸어 창을 메고 칼을 쥐어 보내 왕사(王師)의 선봉이 되게 한 다음 발 뒤꿈치를 돌리지 말고 죽게 한다 할지라도 유감이 조금도 없겠다. 그러나 우리 군병이 형편없다고 하는 사실은 온 천하에 알려진 것이라서 내가 늘 한심하게 여겨 오는 바이다. 그런데도 비국의 재신이나 대제학은 마치 노추(老酋)의 머리를 베어 오고 그 궁궐 뜨락을 쟁기질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내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우리의 피폐한 군대를 호랑이 굴 속에 들여보내 토벌하다 보면 훈련받지 못한 백성들이라서 필시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중국 조정에 더욱 큰 죄를 짓게 될텐데 장차 무슨 병력으로 짓쳐 들어오는 철기(鐵騎)를 막아낸단 말인가. 오직 기대하는 것은 ‘병력을 정비하여 국경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사태를 관찰하다 나아가고 물러가면 충분히 기각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는 등의 말로 상세하고 곡진하게 주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미리 입막음을 한다는 견책을 받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제 내가 전후에 걸쳐 전교한 내용 및 정원의 계사 그리고 임연·박자흥 등의 계사 내용에 따라 속히 문서를 작성해서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의논드린 내용은 아래에 있다.】
"이번에 진주사를 보내는 일은 미리 입막음을 하려는 것같은 것이 아니고 단지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니 글만 잘 만들면 조금도 달리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비국의 재신(宰臣)들이 시종일관 이 일을 못하게 하려 할 뿐만이 아니라 대제학까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극력 막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나온 미안한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에 내가 비록 어둡고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부득불 한마디 해야 하겠다.
우리 나라의 병력에 과연 조금이라도 중국 군대를 도울 만한 형세가 있다면 온 나라의 병력을 휩쓸어 창을 메고 칼을 쥐어 보내 왕사(王師)의 선봉이 되게 한 다음 발 뒤꿈치를 돌리지 말고 죽게 한다 할지라도 유감이 조금도 없겠다. 그러나 우리 군병이 형편없다고 하는 사실은 온 천하에 알려진 것이라서 내가 늘 한심하게 여겨 오는 바이다. 그런데도 비국의 재신이나 대제학은 마치 노추(老酋)의 머리를 베어 오고 그 궁궐 뜨락을 쟁기질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내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우리의 피폐한 군대를 호랑이 굴 속에 들여보내 토벌하다 보면 훈련받지 못한 백성들이라서 필시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중국 조정에 더욱 큰 죄를 짓게 될텐데 장차 무슨 병력으로 짓쳐 들어오는 철기(鐵騎)를 막아낸단 말인가.
오직 기대하는 것은 ‘병력을 정비하여 국경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사태를 관찰하다 나아가고 물러가면 충분히 기각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는 등의 말로 상세하고 곡진하게 주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미리 입막음을 한다는 견책을 받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제 내가 전후에 걸쳐 전교한 내용 및 정원의 계사 그리고 임연·박자흥 등의 계사 내용에 따라 속히 문서를 작성해서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의논드린 내용은 아래에 있다.】

 

박자흥이 의논드렸다. "징병(徵兵)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본래 묘당에서 훌륭하게 헤아리고 있을 것이니 신이 감히 섣불리 의논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노추(老酋)가 처음에 용호장(龍虎將)으로 있을 때는 그 세력이 미미했는데 건주(建州)의 왕으로 봉(封)함을 받은 뒤부터는 세력이 점점 커져 동쪽으로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서쪽으로 여허(如許)를 위협하는 등 이미 세력이 극도로 팽창되었습니다. 시험삼아 호서(胡書)를 가지고 말해 보건대 처음에는 녹봉(祿俸)과 담비 값을 요구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중국 조정을 남조(南朝)라고 하면서 얼굴을 바꾸고 땅을 쟁탈하려고까지 하고 있으며 곧바로 또 조위총(趙位寵)089)  의 일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를 유혹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오랑캐가 위총에 대한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여튼 남조는 중국을 가리키고 위총은 우리 나라를 말하는데 이미 중국을 범했고 보면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범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노추가 이미 1만 병력을 채웠는데 장창(長槍)과 화기(火器)를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여기에 또 중국의 기교까지 겸비했으니 만약 불행히도 요광(遼廣)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계책을 할 것입니까. 그리고 가령 노추가 서북 지방을 침범해 온다면 중국 조정에 위급함을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은 속히 요역(徭役)을 견감(蠲減)하고 정비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며, 부적합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은 갈아버리고 미비된 성지(城池)와 기계들을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자(回咨)를 보내면서 ‘우리 나라의 존망은 중국 조정에 달려 있다. 부득이 노추를 토벌하게 된다면 어찌 감히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기하지 않겠는가. 다만 원래부터 우리 나라의 병력은 너무나도 취약한 데다 야전(野戰)을 더욱 못하는 단점이 있으니, 만에 하나 전쟁 마당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면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서북 일대는 노추의 소굴과 서로 맞닿아 있는데 국경에 병마를 주둔시켜 놓고 기각의 형세를 펼쳐 보인다면 그 소문을 듣고 오랑캐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감히 모든 힘을 기울여 천위에 맞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징병을 요구한 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뒷날 할 말이 또한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註 089] 조위총(趙位寵) : 고려의 반신(叛臣)으로 서경(西京)에서 군대를 일으켰다가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목이 잘렸는데, 그 이전에 금(金)에 빌붙으려 하였으나 금 세종(金世宗)이 받아주지 않았음. 《선조실록(宣祖實錄)》 권22 21년 7월 무오, 《세조실록(世祖實錄)》 권43 13년 8월 기해.
"징병(徵兵)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본래 묘당에서 훌륭하게 헤아리고 있을 것이니 신이 감히 섣불리 의논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노추(老酋)가 처음에 용호장(龍虎將)으로 있을 때는 그 세력이 미미했는데 건주(建州)의 왕으로 봉(封)함을 받은 뒤부터는 세력이 점점 커져 동쪽으로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북쪽으로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서쪽으로 여허(如許)를 위협하는 등 이미 세력이 극도로 팽창되었습니다.
시험삼아 호서(胡書)를 가지고 말해 보건대 처음에는 녹봉(祿俸)과 담비 값을 요구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중국 조정을 남조(南朝)라고 하면서 얼굴을 바꾸고 땅을 쟁탈하려고까지 하고 있으며 곧바로 또 조위총(趙位寵)089)  의 일을 제기하여 우리 나라를 유혹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오랑캐가 위총에 대한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여튼 남조는 중국을 가리키고 위총은 우리 나라를 말하는데 이미 중국을 범했고 보면 우리 나라의 변경을 침범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노추가 이미 1만 병력을 채웠는데 장창(長槍)과 화기(火器)를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여기에 또 중국의 기교까지 겸비했으니 만약 불행히도 요광(遼廣)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계책을 할 것입니까. 그리고 가령 노추가 서북 지방을 침범해 온다면 중국 조정에 위급함을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은 속히 요역(徭役)을 견감(蠲減)하고 정비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며, 부적합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은 갈아버리고 미비된 성지(城池)와 기계들을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자(回咨)를 보내면서 ‘우리 나라의 존망은 중국 조정에 달려 있다. 부득이 노추를 토벌하게 된다면 어찌 감히 우리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기하지 않겠는가. 다만 원래부터 우리 나라의 병력은 너무나도 취약한 데다 야전(野戰)을 더욱 못하는 단점이 있으니, 만에 하나 전쟁 마당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면 천위(天威)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서북 일대는 노추의 소굴과 서로 맞닿아 있는데 국경에 병마를 주둔시켜 놓고 기각의 형세를 펼쳐 보인다면 그 소문을 듣고 오랑캐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감히 모든 힘을 기울여 천위에 맞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징병을 요구한 일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뒷날 할 말이 또한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임연이 의논드렸다. "이렇듯 인심이 좋지 못한 때에 대군을 징발해서 멀리 중국으로 보낸다면 뜻밖의 걱정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임진 왜란 때 구원해 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사변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혹시라도 흙이 무너지는 환란과 대처하기 어려운 변고가 있게 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평안·함경 두 지역은 저 적의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이번에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국경으로 내보냈다가 뒤에 만약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과 충동격서(衝東擊西)의 작전을 구사하며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기라도 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떤 계책으로 대응할지 또한 모를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국 조정이 만약 저 적에게 병화(兵禍)를 입어 아랫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일의 이해 따위는 돌아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저 적의 죄를 물으려 하고 있으니 일의 완급(緩急)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 서북 지방의 방비가 급한 것은 중국 조정의 경우나 피차 일반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선 군병을 징발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한편 황제의 조칙이 내려오기 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밤을 낮 삼아 달려가게 해서 빠짐없이 곡절을 진달하며 잘 주선하도록 한다면,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대하는 것은 가인(家人)과 같은 점이 있으니 청한 대로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득이할 경우 원수(元帥)로 반드시 적임자인 신하를 얻어서 잘 임기응변하게 한다면 어찌 대책이 없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신하들이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듯 인심이 좋지 못한 때에 대군을 징발해서 멀리 중국으로 보낸다면 뜻밖의 걱정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임진 왜란 때 구원해 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사변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혹시라도 흙이 무너지는 환란과 대처하기 어려운 변고가 있게 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평안·함경 두 지역은 저 적의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이번에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국경으로 내보냈다가 뒤에 만약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과 충동격서(衝東擊西)의 작전을 구사하며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기라도 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떤 계책으로 대응할지 또한 모를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국 조정이 만약 저 적에게 병화(兵禍)를 입어 아랫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일의 이해 따위는 돌아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저 적의 죄를 물으려 하고 있으니 일의 완급(緩急)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 서북 지방의 방비가 급한 것은 중국 조정의 경우나 피차 일반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선 군병을 징발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한편 황제의 조칙이 내려오기 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밤을 낮 삼아 달려가게 해서 빠짐없이 곡절을 진달하며 잘 주선하도록 한다면,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대하는 것은 가인(家人)과 같은 점이 있으니 청한 대로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득이할 경우 원수(元帥)로 반드시 적임자인 신하를 얻어서 잘 임기응변하게 한다면 어찌 대책이 없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신하들이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윤휘가 의논드렸다.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임진년 이후로 구원해 준 은혜야말로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만분의 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노추(老酋)가 반역 행위를 저지르자 장차 토벌을 가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마(軍馬)를 징발하여 달려오게 하였으니 즉시 선발해 놓고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본디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본래 군대가 없는 나라인데 하루 아침에 농민들을 몰아붙여 멀리 다른 나라로 보낼 경우 아무리 중국 조정의 지휘에 따라 진퇴(進退)한다 할지라도 형편없이 기대에 어긋나리라는 것은 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기강이 씻은 듯 없어지고 인심이 불량하니 징발할 즈음에 온갖 계책을 써서 빠져나가려 할 것이고 천릿길을 행군하다 보면 도망자가 필시 많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졸렬한 모습만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장차 견책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7천의 병력을 뽑다 보면 형세상 자연히 1만 명에 육박하는 결과를 빚을 것인데 여기에 군량을 운송하는 인원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또 전마(戰馬)나 태마(駄馬) 그리고 전량(錢糧)까지 마련해야 할텐데 지금의 재정으로 어떻게 조처해 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1만 병력이 강을 건너 적의 소굴로 몰려들어갈 경우 무사히 갔다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사려가 깊고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을 급히 가려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먼저 징병에 관련된 곡절을 가지고 총대 아문(總臺衙門)에 자문으로 회보토록 하되 싫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말게 하고, 또 병력이 허약해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완곡하게 개진하면서 사태를 관찰해 주선토록 하는 한편, 군문(軍門)에서 용사(用事)하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접근하여 ‘이 7천 병력으로는 본국의 강변이나 지키도록 하게 하라.’고 말하게 한다면, 혹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용병(用兵)은 사술(詐術)에 있고 발병(發兵)은 권도(權道)에 있다.’고 하였는데, 신의 견해도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임진년 이후로 구원해 준 은혜야말로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만분의 일도 갚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노추(老酋)가 반역 행위를 저지르자 장차 토벌을 가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마(軍馬)를 징발하여 달려오게 하였으니 즉시 선발해 놓고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본디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본래 군대가 없는 나라인데 하루 아침에 농민들을 몰아붙여 멀리 다른 나라로 보낼 경우 아무리 중국 조정의 지휘에 따라 진퇴(進退)한다 할지라도 형편없이 기대에 어긋나리라는 것은 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기강이 씻은 듯 없어지고 인심이 불량하니 징발할 즈음에 온갖 계책을 써서 빠져나가려 할 것이고 천릿길을 행군하다 보면 도망자가 필시 많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졸렬한 모습만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장차 견책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7천의 병력을 뽑다 보면 형세상 자연히 1만 명에 육박하는 결과를 빚을 것인데 여기에 군량을 운송하는 인원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또 전마(戰馬)나 태마(駄馬) 그리고 전량(錢糧)까지 마련해야 할텐데 지금의 재정으로 어떻게 조처해 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1만 병력이 강을 건너 적의 소굴로 몰려들어갈 경우 무사히 갔다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사려가 깊고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을 급히 가려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먼저 징병에 관련된 곡절을 가지고 총대 아문(總臺衙門)에 자문으로 회보토록 하되 싫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말게 하고, 또 병력이 허약해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완곡하게 개진하면서 사태를 관찰해 주선토록 하는 한편, 군문(軍門)에서 용사(用事)하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접근하여 ‘이 7천 병력으로는 본국의 강변이나 지키도록 하게 하라.’고 말하게 한다면, 혹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용병(用兵)은 사술(詐術)에 있고 발병(發兵)은 권도(權道)에 있다.’고 하였는데, 신의 견해도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

 

5월 7일 갑오

진주사(陳奏使) 윤휘(尹暉)가 아뢰기를, "일찍이 조정에서 의논드리던 날 지나치게 염려를 한 느낌은 없지 않습니다만 물샐틈없이 주선해야 한다는 뜻은 비국의 계사와 대략 서로 같았는데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탓으로 비방하는 의논이 자자하기만 합니다. 따라서 망언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받기 어려운데 뜻밖에도 이렇게 특별히 보내는 명이 있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직명을 깎은 뒤 망언에 해당되는 율을 적용하시고 사신의 중책을 다시 능력있는 자에게 맡기소서. " 하니, 전교하기를, "계사를 보고 잘 알았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일찍이 조정에서 의논드리던 날 지나치게 염려를 한 느낌은 없지 않습니다만 물샐틈없이 주선해야 한다는 뜻은 비국의 계사와 대략 서로 같았는데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탓으로 비방하는 의논이 자자하기만 합니다. 따라서 망언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받기 어려운데 뜻밖에도 이렇게 특별히 보내는 명이 있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직명을 깎은 뒤 망언에 해당되는 율을 적용하시고 사신의 중책을 다시 능력있는 자에게 맡기소서. "
하니, 전교하기를,
"계사를 보고 잘 알았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윤휘가 오랫동안 직무에서 떠나 있었으니 필시 조정의 논의를 상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시급한 군기(軍機)에 관한 일을 어떻게 상규(常規)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진주사로 박정길(朴鼎吉)을 차임해 보내라."
"윤휘가 오랫동안 직무에서 떠나 있었으니 필시 조정의 논의를 상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시급한 군기(軍機)에 관한 일을 어떻게 상규(常規)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진주사로 박정길(朴鼎吉)을 차임해 보내라."

 

부제학 정조(鄭造)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병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유생 윤유겸(尹惟謙)의 상소를 보건대, 대개 신을 지목하여 ‘삼사가 처음 차자를 올릴 때 폐(廢) 자를 끄집어내지도 않았고 논의할 즈음에는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기만 하였다.’ 하였습니다. 초봄에 대론(大論)이 일어났을 때 양사가 계사의 끝 부분에 나오는 ‘안집에 폐치(廢置)하여 불량한 사람들이 서궁(西宮)을 끼고 난을 일으킬 걱정을 방비하소서.’라는 내용을 가지고 본관(本館)090)  에 간통(簡通)하였더니, 본관의 관원들이 의논을 정한 뒤 천(遷) 자로 고쳐서 답통(答通)해 보내 왔었습니다. 대체로 천 자와 폐 자는 실제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다만 천 자 속에는 휘(諱)하는 뜻이 들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조정의 의논이 곧바로 폐 자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양사가 즉시 인피하였고 이어 폐 자를 써서 아뢰었으며 그 이튿날에는 본관에서도 사유를 갖추어 대죄(待罪)했었는데, 그 사이의 곡절은 대개 이러했었습니다. 더구나 신의 경우는 일찍이 계축년에 앞장서서 서궁의 죄악을 발론하고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히면서 피하지 않고 항론(抗論)하였으니 사람을 따라 행동하는 자라고 한다면 과연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누차 참형에 처하라는 요청을 받고 하마터면 역적을 비호하는 자의 손에 죽을 뻔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이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오늘날 온 나라가 충성심을 떨치며 의기롭게 일어나 모두 폐출하기를 청하는 것도 신이 앞장서서 의논드린 데 말미암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유겸이 어떤 유자(儒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야말로 당시 아무런 형적도 없었던 후생으로서 이렇게까지 극도로 삼사의 장관들을 배척하고 있는데, 같이 따질 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끝내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신이 마침 병으로 정고(呈告) 중이라서 동료와 동시에 대죄하지 못하였으니 잘못이 더욱 큽니다. 신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註 090] 본관(本館) : 홍문관.
"신이 지난번 병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유생 윤유겸(尹惟謙)의 상소를 보건대, 대개 신을 지목하여 ‘삼사가 처음 차자를 올릴 때 폐(廢) 자를 끄집어내지도 않았고 논의할 즈음에는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기만 하였다.’ 하였습니다.
초봄에 대론(大論)이 일어났을 때 양사가 계사의 끝 부분에 나오는 ‘안집에 폐치(廢置)하여 불량한 사람들이 서궁(西宮)을 끼고 난을 일으킬 걱정을 방비하소서.’라는 내용을 가지고 본관(本館)090)  에 간통(簡通)하였더니, 본관의 관원들이 의논을 정한 뒤 천(遷) 자로 고쳐서 답통(答通)해 보내 왔었습니다. 대체로 천 자와 폐 자는 실제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다만 천 자 속에는 휘(諱)하는 뜻이 들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조정의 의논이 곧바로 폐 자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양사가 즉시 인피하였고 이어 폐 자를 써서 아뢰었으며 그 이튿날에는 본관에서도 사유를 갖추어 대죄(待罪)했었는데, 그 사이의 곡절은 대개 이러했었습니다.
더구나 신의 경우는 일찍이 계축년에 앞장서서 서궁의 죄악을 발론하고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히면서 피하지 않고 항론(抗論)하였으니 사람을 따라 행동하는 자라고 한다면 과연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누차 참형에 처하라는 요청을 받고 하마터면 역적을 비호하는 자의 손에 죽을 뻔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이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오늘날 온 나라가 충성심을 떨치며 의기롭게 일어나 모두 폐출하기를 청하는 것도 신이 앞장서서 의논드린 데 말미암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유겸이 어떤 유자(儒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야말로 당시 아무런 형적도 없었던 후생으로서 이렇게까지 극도로 삼사의 장관들을 배척하고 있는데, 같이 따질 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끝내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신이 마침 병으로 정고(呈告) 중이라서 동료와 동시에 대죄하지 못하였으니 잘못이 더욱 큽니다. 신의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8일 을미

비변사가 아뢰었다. "‘이번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긴급하기 그지없는데 이처럼 조용하기만 하니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에 화를 내려주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은 당초 대단히 처리하기 곤란한 것도 아니었는데, 위에서 하교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고 또 정원의 계사(啓辭)에 대해 계하(啓下)한 뒤에까지도 여태 막기만 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모르겠다만 비국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난을 종식시킬 무슨 믿을 만한 계책을 갖고 있는가. 나는 혼미하고 병이 들어 자세히 알지를 못하겠으니 속히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이잠이 가지고 가는 자문(咨文) 역시 칙유 두 자를 빼버리고 그냥 좌상이 차자에서 말한 「우리 나라 군병은 허약하여 형세상 협격(夾擊)하기가 곤란하니 필시 정벌할 때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으면서 꼼짝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군병을 징발하여 국경에 정돈시켜 놓은 뒤 앞으로의 사태를 관찰하여 기미를 엿보아 진퇴할 것이니, 군사 작전 시기 및 소굴을 들이칠 것인지의 여부를 명백히 가르쳐주기 바란다.」는 등의 말로 자문을 고쳐 지어 급히 정서한 다음 보내는 일을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다시 의논해 처리케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이 상국에서 징병을 요청해 올 날을 당하여 기발한 계책 하나 내지 못한 채 오직 성상께서 세우신 계획대로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막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겠습니까. 엄명을 받고서 즉시 승문원으로 하여금 밤낮없이 주문(奏文)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이잠이 갖고 가는 자문 역시 성상의 분부대로 칙유 두 글자를 빼버리고 지금 정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좌상의 차자 내용 가운에 ‘군병이 허약하여 형세상 협격하기 곤란하다.’는 등의 뜻은 이미 전일 회자(回咨)를 마련할 때에 언급되었는데, ‘군사 작전 시기와 소굴을 들이칠 것인지의 여부를 명백히 가르쳐주기 바란다.’는 등의 한 조목은 회자 속에 언급되지 않은 듯하기에 다시 승문원으로 하여금 급히 보태 써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긴급하기 그지없는데 이처럼 조용하기만 하니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에 화를 내려주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은 당초 대단히 처리하기 곤란한 것도 아니었는데, 위에서 하교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고 또 정원의 계사(啓辭)에 대해 계하(啓下)한 뒤에까지도 여태 막기만 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모르겠다만 비국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난을 종식시킬 무슨 믿을 만한 계책을 갖고 있는가. 나는 혼미하고 병이 들어 자세히 알지를 못하겠으니 속히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이잠이 가지고 가는 자문(咨文) 역시 칙유 두 자를 빼버리고 그냥 좌상이 차자에서 말한 「우리 나라 군병은 허약하여 형세상 협격(夾擊)하기가 곤란하니 필시 정벌할 때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으면서 꼼짝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군병을 징발하여 국경에 정돈시켜 놓은 뒤 앞으로의 사태를 관찰하여 기미를 엿보아 진퇴할 것이니, 군사 작전 시기 및 소굴을 들이칠 것인지의 여부를 명백히 가르쳐주기 바란다.」는 등의 말로 자문을 고쳐 지어 급히 정서한 다음 보내는 일을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다시 의논해 처리케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이 상국에서 징병을 요청해 올 날을 당하여 기발한 계책 하나 내지 못한 채 오직 성상께서 세우신 계획대로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막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겠습니까. 엄명을 받고서 즉시 승문원으로 하여금 밤낮없이 주문(奏文)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이잠이 갖고 가는 자문 역시 성상의 분부대로 칙유 두 글자를 빼버리고 지금 정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좌상의 차자 내용 가운에 ‘군병이 허약하여 형세상 협격하기 곤란하다.’는 등의 뜻은 이미 전일 회자(回咨)를 마련할 때에 언급되었는데, ‘군사 작전 시기와 소굴을 들이칠 것인지의 여부를 명백히 가르쳐주기 바란다.’는 등의 한 조목은 회자 속에 언급되지 않은 듯하기에 다시 승문원으로 하여금 급히 보태 써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김치(金緻)를 동부승지로, 이대엽(李大燁)을 병조 참지로, 박정길(朴鼎吉)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5월 9일 병신

관학 유생 이정(李綎) 등이 상소하기를, "황제에게 주문(奏聞)하고 폐(廢)하는 것이나 폐하고 나서 주문하는 것 모두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역적을 토죄하는 정성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견해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론(大論)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은밀히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으니 그 광경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내쫓아 바깥 집으로 옮기는 일, 고복(誥服)091)  을 따로 두는 일, 모녀를 각각 거처하게 하는 일과 궁인(宮人)를 바꾸는 일 등을 정부로 하여금 절목(節目) 안에 첨가해 들인 뒤 조속히 거행하게 함으로써 대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궁(西宮)의 일에 대해서는 내 뜻을 이미 모두 유시하였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하였다.


[註 091] 고복(誥服) : 황제로부터 받은 정복(正服).
"황제에게 주문(奏聞)하고 폐(廢)하는 것이나 폐하고 나서 주문하는 것 모두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역적을 토죄하는 정성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견해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론(大論)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은밀히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으니 그 광경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내쫓아 바깥 집으로 옮기는 일, 고복(誥服)091)  을 따로 두는 일, 모녀를 각각 거처하게 하는 일과 궁인(宮人)를 바꾸는 일 등을 정부로 하여금 절목(節目) 안에 첨가해 들인 뒤 조속히 거행하게 함으로써 대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궁(西宮)의 일에 대해서는 내 뜻을 이미 모두 유시하였다.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첫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전교하였다.

 

5월 10일 정유

전교하였다. "양궁(兩宮)092)  이 거둥할 때 외중문(外中門)·정문(正門) 및 궐문(闕門)과 내금천(內禁川) 다리를 가설하는 곳에 크게 표지판을 세워 위에서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註 092] 양궁(兩宮) : 왕과 세자.
"양궁(兩宮)092)  이 거둥할 때 외중문(外中門)·정문(正門) 및 궐문(闕門)과 내금천(內禁川) 다리를 가설하는 곳에 크게 표지판을 세워 위에서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예로부터 국기일(國忌日)에는 긴요치 않은 잡다한 공사(公事)는 입계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국기일을 살피지도 않고 혼잡스럽게 입계하기에 지극히 부당하다는 뜻을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런데 어제는 대원군의 사기(私忌)인 데다 태종(太宗)의 국기로 재계(齋戒)하는 날인만큼 다른 날과는 정말 같지 않은데, 병 때문에 올린 사직소나 유생의 상소같은 것까지 일일이 봉입(捧入)하였다. 이는 필시 새로 들어온 승지가 구례(舊例)에 익숙치 못해서 그런 것일테니 정원은 벽 위에 써서 붙여두고 새로 들어온 승지로 하여금 잘 살펴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특별히 더 살펴서 조처하도록 하라."
"예로부터 국기일(國忌日)에는 긴요치 않은 잡다한 공사(公事)는 입계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국기일을 살피지도 않고 혼잡스럽게 입계하기에 지극히 부당하다는 뜻을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런데 어제는 대원군의 사기(私忌)인 데다 태종(太宗)의 국기로 재계(齋戒)하는 날인만큼 다른 날과는 정말 같지 않은데, 병 때문에 올린 사직소나 유생의 상소같은 것까지 일일이 봉입(捧入)하였다. 이는 필시 새로 들어온 승지가 구례(舊例)에 익숙치 못해서 그런 것일테니 정원은 벽 위에 써서 붙여두고 새로 들어온 승지로 하여금 잘 살펴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특별히 더 살펴서 조처하도록 하라."

 

5월 11일 무술

조유도(趙有道)를 호조 참의로, 김치(金緻)를 형조 참의로, 양응락(梁應洛)·성시헌(成時憲)을 분승지(分承旨)로, 김질간(金質幹)을 승지로, 박종주(朴宗胄)를 홍문관 부교리로, 이정(李綎)을 예조 정랑으로, 한정국(韓定國)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한희(韓暿)를 이조 좌랑으로, 이원엽(李元燁)을 승지로, 홍효검(洪孝儉)을 헌납으로, 전유형(全有亨)을 분병조 참의로, 정준(鄭遵)을 이조 정랑으로, 조성립(趙誠立)을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정도(鄭道)를 군기시 정으로, 한명욱(韓明勖)을 상의원 정으로 삼았다.

 

5월 13일 경자

전교하였다. "세자궁의 소훈(昭訓)을 간택해야 하겠으니 11세에서 19세까지의 처녀 단자를 봉입하라. "
"세자궁의 소훈(昭訓)을 간택해야 하겠으니 11세에서 19세까지의 처녀 단자를 봉입하라. "

 

전교하였다. "처녀는 숨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선조(先朝) 때 숙의(淑儀) 처녀를 들이라고 누차 명을 내렸는데 숨기는 자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라의 기강이 형편없어지고 사람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탓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기어이 숨기고야 마니 놀랍기 그지없다. 지금 이후로 처녀를 숨겨두고 내놓지 않는 자에게는 중률(重律)을 적용하고 아무리 1품의 재신(宰臣)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서용(敘用)치 않으리라는 것을 상세히 알려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처녀는 숨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선조(先朝) 때 숙의(淑儀) 처녀를 들이라고 누차 명을 내렸는데 숨기는 자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라의 기강이 형편없어지고 사람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탓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기어이 숨기고야 마니 놀랍기 그지없다. 지금 이후로 처녀를 숨겨두고 내놓지 않는 자에게는 중률(重律)을 적용하고 아무리 1품의 재신(宰臣)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서용(敘用)치 않으리라는 것을 상세히 알려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전라도 진사 이해(李垓)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 그 죄악이 흘러 넘치므로 초야에서 항장(抗章)을 올리고 삼사가 잇달아 발론하고 있으며 백관들이 조정에서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데도 끊지 않으시고 폄손하는 절목에 대해서조차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의논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문(奏聞)한 뒤에 폐출하는 것이고 하나는 폐출한 뒤에 주문하는 것인데, 이 둘 중에서 택하여 좋은 쪽으로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서궁이 있는 곳은 바로 선왕의 법전인데 아직도 태연히 그 속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바깥 집으로 옮겨놓은 뒤 숙위(宿衛)와 시어(侍御)와 공헌(貢獻)과 문안(問安) 등의 일을 모두 정지시키고, 고복(誥服)은 천자가 하사한 것인만큼 속히 내어 따로 보관해두고 황명(皇命)을 기다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합니다. 신들의 소를 속히 정부에 내리시어 급급히 거행토록 하시고, 이와 함께 상소하는 유생들을 막고 다른 고을로 내쫓은 함평 현감(咸平縣監) 박정원(朴鼎元)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멀리 와서 소장을 진달하다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기만 하다. 서궁의 일은 내가 차마 듣지 못하겠는데, 절목을 행하는 일은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 수령을 지방의 소장 때문에 그냥 처치해 버린다면 뒷날 폐단이 생길 듯도 하다. 이런 뜻을 잘 알고 물러가 자신의 공부나 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궁(西宮)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 그 죄악이 흘러 넘치므로 초야에서 항장(抗章)을 올리고 삼사가 잇달아 발론하고 있으며 백관들이 조정에서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데도 끊지 않으시고 폄손하는 절목에 대해서조차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의논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문(奏聞)한 뒤에 폐출하는 것이고 하나는 폐출한 뒤에 주문하는 것인데, 이 둘 중에서 택하여 좋은 쪽으로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서궁이 있는 곳은 바로 선왕의 법전인데 아직도 태연히 그 속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바깥 집으로 옮겨놓은 뒤 숙위(宿衛)와 시어(侍御)와 공헌(貢獻)과 문안(問安) 등의 일을 모두 정지시키고, 고복(誥服)은 천자가 하사한 것인만큼 속히 내어 따로 보관해두고 황명(皇命)을 기다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합니다. 신들의 소를 속히 정부에 내리시어 급급히 거행토록 하시고, 이와 함께 상소하는 유생들을 막고 다른 고을로 내쫓은 함평 현감(咸平縣監) 박정원(朴鼎元)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멀리 와서 소장을 진달하다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기만 하다. 서궁의 일은 내가 차마 듣지 못하겠는데, 절목을 행하는 일은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 수령을 지방의 소장 때문에 그냥 처치해 버린다면 뒷날 폐단이 생길 듯도 하다. 이런 뜻을 잘 알고 물러가 자신의 공부나 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위경(李偉卿)이 아뢰기를, "옛날 나라의 대신이 죽을 때에는 그에게 마음 속의 생각을 꼭 물어보곤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대신을 대우하는 예인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우의정 민몽룡(閔夢龍)의 병이 중하여 구하기 어렵다고 하니, 즉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그의 생각을 물어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옛날 나라의 대신이 죽을 때에는 그에게 마음 속의 생각을 꼭 물어보곤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대신을 대우하는 예인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우의정 민몽룡(閔夢龍)의 병이 중하여 구하기 어렵다고 하니, 즉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그의 생각을 물어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민몽룡(閔夢龍)이 죽었다. 몽룡은 용렬한 비부(鄙夫)로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오래도록 서위(西衛)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이 한 번 보고는 남명(南冥)093)  의 기절(氣節)이 있다고 하여 극력 천거하였다. 그러다가 대론(大論)이 나오자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면서 이이첨과 합동으로 한마음이 된 결과 갑자기 전부(銓部)로 들어가게 되었고 곧바로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폄손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할 적에 뻐기면서 의정부에 앉아 턱으로 지시하고 입으로 부르는 등 의기양양했었는데 그 모임이 파하기도 전에 갑자기 뻐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부축받아 나갔다.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사람들이 천벌을 받았다고들 하였다. 그 아내와 장자 민준철(閔濬哲)도 잇달아 죽었다.






[註 093] 남명(南冥) : 조식(曹植)의 호.

 

전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이항복은 호상(豪爽)하고 풍도(風度)가 있어 어려서부터 이덕형(李德馨)과 명성을 더불었으며, 과거에도 함께 합격했다. 문학으로 현달하여 정철(鄭澈)과 항상 기린과 봉황에 비유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병조참판으로 발탁되는데 이르렀고, 공로가 가장 컸다. 평생 청탁하는 글을 짓지 않았으며 뇌물을 받지 않았는데 지위가 재상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가난하여 한사(寒士)와 같았다. 무신년(1608년) 초정(初政)에 민간에는 임해군(臨海君)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그 후 일찌기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伸冤)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그는 편당을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세류를 따르다 화를 만났으니 사론 중 혹자는 그의 익살과 구용(苟容)을 그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대론(大論)을 수의(收議)할 때에는 마침 교외에서 대죄할 때이고 국사를 듣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의견을 적어 내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큰 절개를 빼앗을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5월 14일 신축

성절사 박정길(朴鼎吉)이 아뢰기를, "전일 호서(胡書)가 왔을 때 즉시 치보했어야 마땅한데, 지금은 이미 미루어 오다가 이렇듯 징병하는 때를 만났으니 사태가 전과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이에 관한 이야기를 약간이나마 주문(奏文)에서 넌지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제학이 주문을 만들면서 대략 몇 조목의 말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러자 중의(衆議)가 또 ‘전일에 이런 내용을 한 번도 중국 조정에 자문으로 알리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냥 몇 조목의 말을 주문 가운데에 거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그대 나라에서는 왜국과 오랑캐의 사정에 대해서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들은 대로 보고해야 마땅한데, 무슨 연유로 덮어둔 채 자문으로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고 힐문하면서 호서의 본문을 보자고 요구해 온다면, 이에 대해 응수하기가 지극히 낭패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이 하나의 일 때문에 의심을 자아내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일 처리가 갖가지로 잘못될 것이니, 차라리 빼버리는 것이 편리하겠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 역시 처음부터 이와 같았는데, 지금 가지고 가는 일이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승문원과 비변사로 하여금 급히 상의해 확정해서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전일 호서(胡書)가 왔을 때 즉시 치보했어야 마땅한데, 지금은 이미 미루어 오다가 이렇듯 징병하는 때를 만났으니 사태가 전과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이에 관한 이야기를 약간이나마 주문(奏文)에서 넌지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제학이 주문을 만들면서 대략 몇 조목의 말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러자 중의(衆議)가 또 ‘전일에 이런 내용을 한 번도 중국 조정에 자문으로 알리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냥 몇 조목의 말을 주문 가운데에 거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 중국 조정에서 만약 「그대 나라에서는 왜국과 오랑캐의 사정에 대해서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들은 대로 보고해야 마땅한데, 무슨 연유로 덮어둔 채 자문으로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고 힐문하면서 호서의 본문을 보자고 요구해 온다면, 이에 대해 응수하기가 지극히 낭패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이 하나의 일 때문에 의심을 자아내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일 처리가 갖가지로 잘못될 것이니, 차라리 빼버리는 것이 편리하겠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 역시 처음부터 이와 같았는데, 지금 가지고 가는 일이 지극히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승문원과 비변사로 하여금 급히 상의해 확정해서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근일 징병하는 일 때문에 필시 유언비어가 나돌텐데 중외의 백성들이 혹 놀라 동요할 염려가 있으니 사정을 분명히 유시하여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급무라 할 것이다. 본사(本司)는 나의 뜻을 제대로 체득하여 외방에 포고하거나 서울에 방(榜)을 내걸어 널리 유시함으로써 소요스럽게 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근일 징병하는 일 때문에 필시 유언비어가 나돌텐데 중외의 백성들이 혹 놀라 동요할 염려가 있으니 사정을 분명히 유시하여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급무라 할 것이다. 본사(本司)는 나의 뜻을 제대로 체득하여 외방에 포고하거나 서울에 방(榜)을 내걸어 널리 유시함으로써 소요스럽게 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군문(軍門)이 이자(移咨)하였다. "장관(將官)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근에서 조발한 영병장(領兵將)으로 총병관(總兵官) 두송(杜松)·유정(劉綎)·시국주(柴國柱)·왕국동(王國棟)·낭병충(郞秉忠)이 함께 10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데 아직 관(關)을 나오지 않았으나 10일 이내에 관을 나와 도착할 것입니다. 요양(遼陽)의 유격(遊擊) 양차(楊)의 병마(兵馬) 3천이 변영(邊營)에서 심양(瀋陽)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왕호(王浩)의 병마 3천이 변영에서 철령(鐵嶺)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이천주(李天柱)의 병마 3천이 변영에서 요양(遼陽)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장패(張珮)의 병마 4천이 변영에서 요양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습니다. 또 4월 22일에는 복건(福建)·절강(浙江)·광동(廣東)·사천(泗川)·섬서(陝西)·산동(山東)·산서(山西)·귀주(貴州)에 성지(聖旨)를 내려 성(省)마다 정병(精兵) 5만씩 조발토록 하였습니다."
"장관(將官)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근에서 조발한 영병장(領兵將)으로 총병관(總兵官) 두송(杜松)·유정(劉綎)·시국주(柴國柱)·왕국동(王國棟)·낭병충(郞秉忠)이 함께 10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데 아직 관(關)을 나오지 않았으나 10일 이내에 관을 나와 도착할 것입니다. 요양(遼陽)의 유격(遊擊) 양차(楊)의 병마(兵馬) 3천이 변영(邊營)에서 심양(瀋陽)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왕호(王浩)의 병마 3천이 변영에서 철령(鐵嶺)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이천주(李天柱)의 병마 3천이 변영에서 요양(遼陽)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고, 유격 장패(張珮)의 병마 4천이 변영에서 요양에 머물러 방어하고 있습니다. 또 4월 22일에는 복건(福建)·절강(浙江)·광동(廣東)·사천(泗川)·섬서(陝西)·산동(山東)·산서(山西)·귀주(貴州)에 성지(聖旨)를 내려 성(省)마다 정병(精兵) 5만씩 조발토록 하였습니다."

 

5월 15일 임인

전교하였다. "근일 대내(大內)에 요망스러운 변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입직(入直)한 상하 인원이 잇달아 병으로 죽고 있다. 구례(舊例)를 가지고 말한다면 조종조에서는 즉각 이어(移御)했었고 민간의 사대부들 집에서도 조금만 사고가 생기면 모두 백성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피하는 장소로 삼아 점유하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군상(君上)으로서 불안한 장소에 고집부리며 있어야 하는가. 사정이 온당치 못하다.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자니 그곳도 깨끗하지가 않아 옮겨 갈 수가 없다. 그런데 경덕궁(慶德宮)의 공사가 반 이상 진행되었으니 잘 감독만 하면 올해는 완공을 못하더라도 내년에는 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대내와 동궁(東宮)을 각 아문에서 각별히 감독하여 조속히 끝내도록 하라. 그리고 제조와 도청은 일찍 출근해 종일 감독하고 일찍 퇴근하지 말도록 한 일을 각별히 더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근일 대내(大內)에 요망스러운 변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 입직(入直)한 상하 인원이 잇달아 병으로 죽고 있다. 구례(舊例)를 가지고 말한다면 조종조에서는 즉각 이어(移御)했었고 민간의 사대부들 집에서도 조금만 사고가 생기면 모두 백성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피하는 장소로 삼아 점유하곤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군상(君上)으로서 불안한 장소에 고집부리며 있어야 하는가. 사정이 온당치 못하다.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자니 그곳도 깨끗하지가 않아 옮겨 갈 수가 없다. 그런데 경덕궁(慶德宮)의 공사가 반 이상 진행되었으니 잘 감독만 하면 올해는 완공을 못하더라도 내년에는 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대내와 동궁(東宮)을 각 아문에서 각별히 감독하여 조속히 끝내도록 하라. 그리고 제조와 도청은 일찍 출근해 종일 감독하고 일찍 퇴근하지 말도록 한 일을 각별히 더 착실하게 거행하라고 도감에 말하라."

 

전교하였다. "이번의 궁궐 공사는 형세상 정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뭐가 있기에 수의(收議)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면 성실하게 근무하려는 자세는 없고 그저 말 듣기 싫어 공사를 정지시키려는 생각만 있는 듯한데, 이는 대내에 변고가 생겨 급히 이어(移御)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노적(老賊)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는 우선 공사 정지시킬 생각을 내지 말고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더라도 내년 안으로 양궁(兩宮)의 공사를 끝내는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
"이번의 궁궐 공사는 형세상 정지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뭐가 있기에 수의(收議)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사를 진행하는 것을 보면 성실하게 근무하려는 자세는 없고 그저 말 듣기 싫어 공사를 정지시키려는 생각만 있는 듯한데, 이는 대내에 변고가 생겨 급히 이어(移御)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노적(老賊)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는 우선 공사 정지시킬 생각을 내지 말고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더라도 내년 안으로 양궁(兩宮)의 공사를 끝내는 일을 착실히 거행하라."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당초 전결목(田結木)을 거두어들일 때에 함경·평안도의 강변 7읍을 제외하고 내게 한 목면(木綿)의 합계가 4천여 동(同)이었습니다. 그리고 양호(兩湖) 연해와 황연(黃延)095)  ·경기 지방의 물가에 위치한 각 고을에서는 모두 작미(作米)토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미곡을 활용하는 이익이 목면을 활용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비축한 목포(木布)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3월부터 처음으로 결목(結木)을 방출하여 이제 4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만, 봄 초의 계산으로는 1개월에 지출하는 목면의 수가 2백여 동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나가면 10여 개월은 지탱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3월 이후로는 역군(役軍)과 장인(匠人)을 고용하는 수가 날로 늘어나 1개월의 비용이 무려 3백 8, 90동에 이르고 있는데, 남아 있는 포목이래야 기껏 1천여 동밖에는 되지 않으니 모쪼록 지금부터 조치해야만 공사가 정지되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중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이 마침 이런 때에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군사 작전이 언제 개시될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요컨대 8, 9월 사이를 벗어나지는 않을텐데 이렇듯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날을 당해서는 더 세금을 걷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재정이 고갈되어 큰 공사가 중단되기라도 하면 이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책임이 돌아오게 마련일텐데 신 충(沖), 신 장만(張晩), 신 관(瓘)이 이 일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비변사 및 육경·삼사로 하여금 의논해 미리 조치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는 중단시킬 공사가 아니다. 지금 하유하더라도 8, 9월 사이에는 면포를 거두기가 형세상 어려울 것이니 적당량을 다시 거두는 수밖에는 없다. 장인의 세포(稅布)도 아울러 자세히 살펴서 거두어 쓰도록 하고, 이밖에 백관이 경외(京外)에서 공사를 돕는 등의 일도 다시 의논해 참작해서 거두도록 하라. 안에서는 비축해놓은 목포(木布)를 내주겠다. 육경과 삼사에게 무슨 특별한 의논이 있겠는가.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착실히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註 095] 황연(黃延) : 황해도임.
"당초 전결목(田結木)을 거두어들일 때에 함경·평안도의 강변 7읍을 제외하고 내게 한 목면(木綿)의 합계가 4천여 동(同)이었습니다. 그리고 양호(兩湖) 연해와 황연(黃延)095)  ·경기 지방의 물가에 위치한 각 고을에서는 모두 작미(作米)토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미곡을 활용하는 이익이 목면을 활용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비축한 목포(木布)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3월부터 처음으로 결목(結木)을 방출하여 이제 4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만, 봄 초의 계산으로는 1개월에 지출하는 목면의 수가 2백여 동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나가면 10여 개월은 지탱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3월 이후로는 역군(役軍)과 장인(匠人)을 고용하는 수가 날로 늘어나 1개월의 비용이 무려 3백 8, 90동에 이르고 있는데, 남아 있는 포목이래야 기껏 1천여 동밖에는 되지 않으니 모쪼록 지금부터 조치해야만 공사가 정지되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중국에서 징병토록 한 일이 마침 이런 때에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군사 작전이 언제 개시될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요컨대 8, 9월 사이를 벗어나지는 않을텐데 이렇듯 전쟁터로 떠나보내는 날을 당해서는 더 세금을 걷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재정이 고갈되어 큰 공사가 중단되기라도 하면 이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책임이 돌아오게 마련일텐데 신 충(沖), 신 장만(張晩), 신 관(瓘)이 이 일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비변사 및 육경·삼사로 하여금 의논해 미리 조치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는 중단시킬 공사가 아니다. 지금 하유하더라도 8, 9월 사이에는 면포를 거두기가 형세상 어려울 것이니 적당량을 다시 거두는 수밖에는 없다. 장인의 세포(稅布)도 아울러 자세히 살펴서 거두어 쓰도록 하고, 이밖에 백관이 경외(京外)에서 공사를 돕는 등의 일도 다시 의논해 참작해서 거두도록 하라. 안에서는 비축해놓은 목포(木布)를 내주겠다. 육경과 삼사에게 무슨 특별한 의논이 있겠는가.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착실히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5월 16일 계묘

검열 이점(李蒧)이 서계하기를, "신이 이 달 3일에 합천(陜川) 땅에 이르러서 영의정 정인홍(鄭仁弘)에게 전유(傳諭)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요즘 현기증이 재발한 탓으로 일어나 절하지 못한 채 무릎꿇고 성지(聖旨)를 받들게 되었으니 땅에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징병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현재 사직 중이니 감히 거만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다.’ 하고, 단지 신에게 말하기를 ‘상국에 일이 있으면 바삐 움직이며 정성을 다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징병하는 일이 있음이겠는가. 그러나 병사(兵事)는 멀리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체찰사를 파견해 국경에 가서 머물게 한 뒤 분부를 듣고 급히 병사를 조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군병의 수를 약속대로 다 채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를 가지고 서로 통하면서 나라의 피폐한 상황을 두루 개진한다면 중국 장수 역시 이와 같은 우리 나라의 사정을 필시 양해할테니 어쩌면 징병의 숫자를 감해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신이 이 달 3일에 합천(陜川) 땅에 이르러서 영의정 정인홍(鄭仁弘)에게 전유(傳諭)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요즘 현기증이 재발한 탓으로 일어나 절하지 못한 채 무릎꿇고 성지(聖旨)를 받들게 되었으니 땅에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징병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현재 사직 중이니 감히 거만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다.’ 하고, 단지 신에게 말하기를 ‘상국에 일이 있으면 바삐 움직이며 정성을 다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징병하는 일이 있음이겠는가. 그러나 병사(兵事)는 멀리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체찰사를 파견해 국경에 가서 머물게 한 뒤 분부를 듣고 급히 병사를 조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군병의 수를 약속대로 다 채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를 가지고 서로 통하면서 나라의 피폐한 상황을 두루 개진한다면 중국 장수 역시 이와 같은 우리 나라의 사정을 필시 양해할테니 어쩌면 징병의 숫자를 감해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형조 판서 조정(趙挺)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 군졸을 가려 훈련시켜서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리고 신의 본직(本職) 및 겸대한 영건 도감 당상의 직책을 체차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다만 경이 내간(內間)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운궁에 변고가 생겨 억지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피해 갈 곳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창경궁(昌慶宮)을 수선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 동궁(東宮)에 또 요괴스러운 변고가 일어났는데 옮길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자(臣子)의 의리상 어떻게 감히 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무와 돌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공사도 반 이상 진척되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뒷날 다시 짓는다면 그 폐단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 우선 편한 대로 공사를 마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군기(軍機)에 대한 일의 경우도 그렇다. 경 또한 비국 당상 가운데 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강구하지 않는 것인가. 오직 헛된 말만 개진한다면 실효가 없을 듯하다. 다시 더 마음을 쏟아 계책을 마련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경이 누차 쇠약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있는데 매번 억지로 바쁜 업무를 수행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허문(虛文)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영건 도감의 제조만은 체차해 주겠으니, 본직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늘 요괴스러운 변고를 가지고 유지를 내려 공사를 중단하라는 논을 막음으로써 신하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게 하였다. 그때 세 궁궐을 지키는 장졸(將卒)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요괴스러운 변고가 있다면 우리도 그 사이에서 잠을 잤는데 어찌하여 한 번도 꿈에 악귀가 나타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다. 그런데 경덕궁(慶德宮) 별당(別堂)의 누각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경궁에 비하면 조금 덜했기 때문에 말을 꾸며 이렇게 간언(諫言)을 막은 것이었다.】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 군졸을 가려 훈련시켜서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리고 신의 본직(本職) 및 겸대한 영건 도감 당상의 직책을 체차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다만 경이 내간(內間)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운궁에 변고가 생겨 억지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피해 갈 곳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창경궁(昌慶宮)을 수선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 동궁(東宮)에 또 요괴스러운 변고가 일어났는데 옮길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자(臣子)의 의리상 어떻게 감히 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무와 돌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공사도 반 이상 진척되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뒷날 다시 짓는다면 그 폐단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 우선 편한 대로 공사를 마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군기(軍機)에 대한 일의 경우도 그렇다. 경 또한 비국 당상 가운데 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강구하지 않는 것인가. 오직 헛된 말만 개진한다면 실효가 없을 듯하다. 다시 더 마음을 쏟아 계책을 마련함으로써 국가를 안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경이 누차 쇠약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있는데 매번 억지로 바쁜 업무를 수행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허문(虛文)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영건 도감의 제조만은 체차해 주겠으니, 본직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늘 요괴스러운 변고를 가지고 유지를 내려 공사를 중단하라는 논을 막음으로써 신하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게 하였다. 그때 세 궁궐을 지키는 장졸(將卒)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요괴스러운 변고가 있다면 우리도 그 사이에서 잠을 잤는데 어찌하여 한 번도 꿈에 악귀가 나타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다. 그런데 경덕궁(慶德宮) 별당(別堂)의 누각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경궁에 비하면 조금 덜했기 때문에 말을 꾸며 이렇게 간언(諫言)을 막은 것이었다.】

 

5월 17일 갑진

좌의정 한효순(韓孝純)이 두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불윤 비답을 내리라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박정길(朴鼎吉)이 근시(近侍)로서 특명을 받고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으니 응당 상으로 가자(加資)해 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 등급 위로 가자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하라. 그리고 이렇듯 나랏일이 위급한 날을 당하여 대신의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둘 수 없으니 영상과 좌상에게 문의하여 복상(卜相)해서 아뢰도록 하라. 대사성 박정길은 지금 가선 대부로 가자하라."
"박정길(朴鼎吉)이 근시(近侍)로서 특명을 받고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으니 응당 상으로 가자(加資)해 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 등급 위로 가자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하라. 그리고 이렇듯 나랏일이 위급한 날을 당하여 대신의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둘 수 없으니 영상과 좌상에게 문의하여 복상(卜相)해서 아뢰도록 하라. 대사성 박정길은 지금 가선 대부로 가자하라."
전교하였다. "강도(江都)야말로 서울과 근접한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니 미리 완전하게 정비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밖에 가령 양남(兩南)의 안동(安東)·경주(慶州)·전주(全州)·나주(羅州)·남원(南原)·순천(順天) 등 지역도 요리해 조처함으로써 급할 때 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더 십분 착실하게 의논해서 하라. "
"강도(江都)야말로 서울과 근접한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니 미리 완전하게 정비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밖에 가령 양남(兩南)의 안동(安東)·경주(慶州)·전주(全州)·나주(羅州)·남원(南原)·순천(順天) 등 지역도 요리해 조처함으로써 급할 때 대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더 십분 착실하게 의논해서 하라. "


 

 

 

전교하였다. "노적(奴賊)이 배를 만들어 도망할 계책을 꾸미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 정상을 헤아리기 어렵다. 우선 양서(兩西)의 군사들을 관서(關西)의 강변 일대에 들여보내 지키게 하고, 평안 방어사(平安防禦使)와 우후(虞候) 송안정(宋安廷) 및 본도 병사가 합동으로 지키면서 오르내리고, 의주(義州)에도 군병을 적당히 들여보내 엄히 지키면서 진퇴케 할 일을 각별히 의논해 처리하라."
"노적(奴賊)이 배를 만들어 도망할 계책을 꾸미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 정상을 헤아리기 어렵다. 우선 양서(兩西)의 군사들을 관서(關西)의 강변 일대에 들여보내 지키게 하고, 평안 방어사(平安防禦使)와 우후(虞候) 송안정(宋安廷) 및 본도 병사가 합동으로 지키면서 오르내리고, 의주(義州)에도 군병을 적당히 들여보내 엄히 지키면서 진퇴케 할 일을 각별히 의논해 처리하라."
비변사가 아뢰었다. "강화도야말로 경성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서로(西路)와 직통되고 남방을 제압하고 있는데 고려조(高麗朝)의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수십 년 간에 걸쳐 관심을 두고 조치했으나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거듭 밝혀 계획을 강구함으로써 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남의 안동은 험준한 요새지가 될 뿐만 아니라, 의탁할 만한 사민(士民)이 있으니, 고려 말에 이곳으로 병란을 피해 온 것도 실로 우연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또 호남의 나주 같은 곳은 물자도 풍부하고 지역도 넓은 데다 선박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호우(湖右)와 기전(畿甸)을 제압하고 있으니 형세가 매우 좋습니다. 이 두 곳을 별도로 더 조치하여 성지(城池)를 완전히 정비하고 군량을 비축하고 기계를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힘을 얻을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보장책(保障策)을 강구함에 있어서는 백성의 힘을 아끼고 기르는 것을 힘써야 하는데 백성을 아끼는 근본은 오로지 적임자를 얻는 데에 있습니다. 사려가 깊고 직질(職秩)이 높은 사람을 엄선하여 안동과 나주의 수령으로 임명한 뒤 조치하는 책임을 부여하시고 본도의 감사와 함께 상의해 요리하면서 기필코 완전히 정비해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타 성상의 분부 가운데에 언급된 경주·전주·남원·순천 등 지방은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하는만큼 일일이 조치해 둘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이들 지역은 모두가 남방의 거진(巨鎭)들이니 또한 힘이 닿는 대로 정비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모두 양남(兩南)과 경기 관찰사에게 각별히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강화도야말로 경성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서로(西路)와 직통되고 남방을 제압하고 있는데 고려조(高麗朝)의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수십 년 간에 걸쳐 관심을 두고 조치했으나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거듭 밝혀 계획을 강구함으로써 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남의 안동은 험준한 요새지가 될 뿐만 아니라, 의탁할 만한 사민(士民)이 있으니, 고려 말에 이곳으로 병란을 피해 온 것도 실로 우연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또 호남의 나주 같은 곳은 물자도 풍부하고 지역도 넓은 데다 선박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호우(湖右)와 기전(畿甸)을 제압하고 있으니 형세가 매우 좋습니다. 이 두 곳을 별도로 더 조치하여 성지(城池)를 완전히 정비하고 군량을 비축하고 기계를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힘을 얻을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보장책(保障策)을 강구함에 있어서는 백성의 힘을 아끼고 기르는 것을 힘써야 하는데 백성을 아끼는 근본은 오로지 적임자를 얻는 데에 있습니다. 사려가 깊고 직질(職秩)이 높은 사람을 엄선하여 안동과 나주의 수령으로 임명한 뒤 조치하는 책임을 부여하시고 본도의 감사와 함께 상의해 요리하면서 기필코 완전히 정비해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타 성상의 분부 가운데에 언급된 경주·전주·남원·순천 등 지방은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하는만큼 일일이 조치해 둘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이들 지역은 모두가 남방의 거진(巨鎭)들이니 또한 힘이 닿는 대로 정비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모두 양남(兩南)과 경기 관찰사에게 각별히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5월 18일 을사

정원이 아뢰기를, "영상과 좌상에게 물어서 복상(卜相)해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좌상은 명초(命招)해야 하겠습니다만, 영상은 외방에 있는데 본부(本府)의 낭청을 보내어 물어서 아뢰어야 합니까, 사관(史官)을 보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관을 보내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영상과 좌상에게 물어서 복상(卜相)해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좌상은 명초(命招)해야 하겠습니다만, 영상은 외방에 있는데 본부(本府)의 낭청을 보내어 물어서 아뢰어야 합니까, 사관(史官)을 보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관을 보내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배소(配所)에서 죽었는데 이 사람은 공이 있는 대신이니 이덕형(李德馨)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관례대로 예장(禮葬)할 것이며 상구(喪柩)를 일로(一路)에서 호송하라고 하유하라."
"이항복(李恒福)이 배소(配所)에서 죽었는데 이 사람은 공이 있는 대신이니 이덕형(李德馨)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관례대로 예장(禮葬)할 것이며 상구(喪柩)를 일로(一路)에서 호송하라고 하유하라."


 

 

 

전교하였다. "전 찬성 박승종(朴承宗)은 훈구(勳舊)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에 비중이 크니, 지금 상국에서 징병을 요청해 오는 등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날을 당하여서는 전시 체제(戰時體制)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발인(發引)은 끝냈을 테니 즉시 기복(起復)시켜 비변사 당상으로 계하(啓下)받은 뒤 그로 하여금 변방에서 책응할 일을 강구토록 하라."
"전 찬성 박승종(朴承宗)은 훈구(勳舊)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에 비중이 크니, 지금 상국에서 징병을 요청해 오는 등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날을 당하여서는 전시 체제(戰時體制)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발인(發引)은 끝냈을 테니 즉시 기복(起復)시켜 비변사 당상으로 계하(啓下)받은 뒤 그로 하여금 변방에서 책응할 일을 강구토록 하라."
검열 이점(李蒧)이 서계하기를, "신이 좌의정에게 가서 비망기를 전했더니, 명을 듣고는 바로 복상(卜相)에 따른 천거 명단을 써서 감봉(監封)하고 아울러 비밀 계사 한 통을 신에게 주면서 서계하도록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신이 좌의정에게 가서 비망기를 전했더니, 명을 듣고는 바로 복상(卜相)에 따른 천거 명단을 써서 감봉(監封)하고 아울러 비밀 계사 한 통을 신에게 주면서 서계하도록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안응형(安應亨)이 장계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선복(李善復)이 들여보내 변방의 정세를 탐지하게 한 소통사(小通事) 이계생(李戒生)이 요동(遼東)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분수도 포정(分守道布政) 고이(顧頤)가 이 달 3일에 막 병으로 죽었으므로 도사(都司)가 분수도의 직책을 대신 수행하고 있는데 관내(關內)의 병마(兵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성지(聖旨)에 따라 전마(戰馬) 2만 필(匹)을 사서 지원병에게 나누어주고 있는데 응모자가 많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사가 계생을 불러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 병마가 정비되었는가.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편전(片箭)과 화기(火器)인데 이것도 준비되었는가. 노적(奴賊)이 작은 배를 만들어 달아날 계책을 꾸미려 하니 너희 나라의 강변 일대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하자, 계생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병마는 응당 정비될 것이다. 다만 노적을 정벌할 시기를 상세히 알려줘 보고하기에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이렇게 수목이 울창한 때에는 형세상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렵다. 작전 시기는 필시 8, 9월 사이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도사의 표문(票文)을 보건대 ‘노적을 정벌할 시기는 조정의 계책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일에 앞서 직접 비밀히 자문을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병마를 미리 의주로 들여보낼 경우 군량을 잇대기 어려워 낭패를 당할 걱정이 전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병은 이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조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위 노적이 작은 배를 만들어 도망치려 한다고 한 것은 중국의 위세를 보이면서 우리 나라를 단속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도 미리 방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노적을 정벌하는 일과 관계된 것은 급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즉시 치계하라. 병마가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헤아려 분부하겠다.’고 하는 사연으로 본도에 행이(行移)하소서." 하니, 따랐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선복(李善復)이 들여보내 변방의 정세를 탐지하게 한 소통사(小通事) 이계생(李戒生)이 요동(遼東)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분수도 포정(分守道布政) 고이(顧頤)가 이 달 3일에 막 병으로 죽었으므로 도사(都司)가 분수도의 직책을 대신 수행하고 있는데 관내(關內)의 병마(兵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성지(聖旨)에 따라 전마(戰馬) 2만 필(匹)을 사서 지원병에게 나누어주고 있는데 응모자가 많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사가 계생을 불러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 병마가 정비되었는가.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편전(片箭)과 화기(火器)인데 이것도 준비되었는가. 노적(奴賊)이 작은 배를 만들어 달아날 계책을 꾸미려 하니 너희 나라의 강변 일대를 잘 지켜야 한다.’고 하자, 계생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병마는 응당 정비될 것이다. 다만 노적을 정벌할 시기를 상세히 알려줘 보고하기에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이렇게 수목이 울창한 때에는 형세상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렵다. 작전 시기는 필시 8, 9월 사이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도사의 표문(票文)을 보건대 ‘노적을 정벌할 시기는 조정의 계책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일에 앞서 직접 비밀히 자문을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병마를 미리 의주로 들여보낼 경우 군량을 잇대기 어려워 낭패를 당할 걱정이 전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병은 이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조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위 노적이 작은 배를 만들어 도망치려 한다고 한 것은 중국의 위세를 보이면서 우리 나라를 단속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인데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도 미리 방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노적을 정벌하는 일과 관계된 것은 급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즉시 치계하라. 병마가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헤아려 분부하겠다.’고 하는 사연으로 본도에 행이(行移)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였다. "황연(黃延) 등 도(道)의 분호조 참의 종사관 강홍중(姜弘重)은 바로 관서(關西)의 벌목 어사(伐木御史)이니, 다른 사람으로 다시 차임해 보내도록 하라."
"황연(黃延) 등 도(道)의 분호조 참의 종사관 강홍중(姜弘重)은 바로 관서(關西)의 벌목 어사(伐木御史)이니, 다른 사람으로 다시 차임해 보내도록 하라."


 

 

 

정규(鄭逵)를 동부승지로, 신광업(辛光業)을 겸보덕으로, 채승선(蔡承先)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19일 병오

전교하였다. "비가 이처럼 오니 경덕궁(慶德宮)에 거둥하는 일은 다시 택일하여 물려 정하고 호위 군병들은 속히 내려보내도록 하라."
"비가 이처럼 오니 경덕궁(慶德宮)에 거둥하는 일은 다시 택일하여 물려 정하고 호위 군병들은 속히 내려보내도록 하라."
도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현즙(玄楫)이 장계를 올리면서 죄인 이항복(李恒福)의 죽음을 졸서(卒逝)라고 표현해 써넣었습니다. 대개 졸서라는 두 글자는 아무 탈이 없는 대신의 죽음에나 쓰는 것인데 현즙이 태연히 졸서라고 써서 아뢰었으니 너무나도 사리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남병사(南兵使) 현즙(玄楫)이 장계를 올리면서 죄인 이항복(李恒福)의 죽음을 졸서(卒逝)라고 표현해 써넣었습니다. 대개 졸서라는 두 글자는 아무 탈이 없는 대신의 죽음에나 쓰는 것인데 현즙이 태연히 졸서라고 써서 아뢰었으니 너무나도 사리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전교하였다. "도감의 미포(米布)가 거의 떨어져 간다고 하니, 미리 의논해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전결세(田結稅)로 받는 포목을 결전을 헤아려서 받아들이되 반절은 금년에 받아서 쓰도록 하고 반절은 내년 봄에 받도록 의논해 처리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도감의 미포(米布)가 거의 떨어져 간다고 하니, 미리 의논해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전결세(田結稅)로 받는 포목을 결전을 헤아려서 받아들이되 반절은 금년에 받아서 쓰도록 하고 반절은 내년 봄에 받도록 의논해 처리하라고 도감에 이르라."
전교하였다. "형조와 사헌부의 속목(贖木)이 매우 많으니,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공사를 끝낼 때까지 모두 도감에 이송하여 보태 쓰게 하더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본 도감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케 하라."
"형조와 사헌부의 속목(贖木)이 매우 많으니, 영건 도감(營建都監)의 공사를 끝낼 때까지 모두 도감에 이송하여 보태 쓰게 하더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본 도감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케 하라."


 

 

 

행 대사성 박정길(朴鼎吉)이 상소하여 가자(加資)를 사양하니, 답하기를, "주문(奏聞)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근시(近侍)를 특별히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자는 응당 받게끔 되어 있는데 관례에 비추어 먼저 상격(賞格)을 베푼 것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더욱더 정성을 다해 주선해서 나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문(奏聞)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근시(近侍)를 특별히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자는 응당 받게끔 되어 있는데 관례에 비추어 먼저 상격(賞格)을 베푼 것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더욱더 정성을 다해 주선해서 나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정미

전교하였다. "외방의 교생(校生)이 지극히 많은데 강서(講書) 시험을 면제받으려 하는 자도 필시 많을 것이다. 이런 자들을 모조리 군역(軍役)에 충정(充定)시킨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참작해서 포목을 바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그 수가 수천 동(同)에 밑돌지는 않을 것이다. 급히 어떤 식으로든지 선처하라. "
"외방의 교생(校生)이 지극히 많은데 강서(講書) 시험을 면제받으려 하는 자도 필시 많을 것이다. 이런 자들을 모조리 군역(軍役)에 충정(充定)시킨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참작해서 포목을 바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그 수가 수천 동(同)에 밑돌지는 않을 것이다. 급히 어떤 식으로든지 선처하라. "


 

대사간 윤인(尹訒), 사간 신광업(辛光業), 헌납 홍요검(洪堯儉), 정언 이원여(李元輿)·서국정(徐國楨), 집의 임건(林健), 장령 강수(姜燧)·한영(韓詠), 지평 신칙(申恜)이 아뢰기를, "서궁(西宮)에 대한 대론(大論)은 의리상 한 시각도 늦출 수가 없는데, 요즘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이라서 잠시 며칠 동안 중지했었습니다. 이에 역적의 토죄를 엄히 하지 못한다고 물의가 비난하고 있으니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항복(李恒福)의 경우, 서궁을 비호한 나머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는 데도 멀리 유배보내는 정도로 죄가 그쳤으니 그것 역시 형(刑)을 잘못 적용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에 갑자기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내렸으니 신들로서는 즉각 이에 대해 아뢰었어야 마땅한데, 마침 거둥하시는 일이 임박한 탓으로 미처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예조의 공사를 보건대 심지어는 정조시(停朝市)하라고 입계하였으므로 물의가 더욱 격화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신이 일을 논하는 일을 지체시켜서 빚어진 것입니다.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서궁(西宮)에 대한 대론(大論)은 의리상 한 시각도 늦출 수가 없는데, 요즘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이라서 잠시 며칠 동안 중지했었습니다. 이에 역적의 토죄를 엄히 하지 못한다고 물의가 비난하고 있으니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항복(李恒福)의 경우, 서궁을 비호한 나머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는 데도 멀리 유배보내는 정도로 죄가 그쳤으니 그것 역시 형(刑)을 잘못 적용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에 갑자기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내렸으니 신들로서는 즉각 이에 대해 아뢰었어야 마땅한데, 마침 거둥하시는 일이 임박한 탓으로 미처 논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예조의 공사를 보건대 심지어는 정조시(停朝市)하라고 입계하였으므로 물의가 더욱 격화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신이 일을 논하는 일을 지체시켜서 빚어진 것입니다.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항복의 죽음에 따른 정조시 공사를 예조가 입계했는데 대간이 바야흐로 논계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일단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한 이상 정조시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하라." 하였다.
"이항복의 죽음에 따른 정조시 공사를 예조가 입계했는데 대간이 바야흐로 논계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일단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한 이상 정조시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동지사(冬至使)로 윤휘(尹暉)를 차임해 보내라."
"동지사(冬至使)로 윤휘(尹暉)를 차임해 보내라."

 

전교하였다. "징병해서 들어갈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중국 조정에서 실제로 정벌하는 일을 행한다면 저 적이 좌충우돌해 올 걱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성(昌城) 일로(一路)야말로 적이 들어오는 지름길인만큼 평상시에도 방비를 엄히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지금 중국에서 그 소굴을 토벌하려고 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점이 바로 우리 나라 서쪽 변방의 강변 일대에 장병을 주둔시켜 급할 때 대응토록 하는 방책을 속히 요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도성의 경우 역시 근본이 되는 지역인만큼 미리부터 조치해두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화란을 방지하고 아직 위태롭지 않을 때 안정을 도모하는 기틀인 것이다. 따라서 장수 선발과 군사 훈련과 군량 비축과 기계 제조 등의 일에 대해서 비변사에서는 필시 벌써부터 요리해두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근일의 기상을 보건대 마치 진(晉)나라 때 안석(安石)이 진물(鎭物)했던 것096)  처럼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가 한밤중에 이 일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 벌떡 일어나곤 한다. 내 생각으로는 중국 조정에서 장차 토벌을 할 경우 우리 나라의 징병 여부와는 관계없이 형세상 적이 좌충우돌해 올 걱정이 있으니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서 선처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적이 선박을 만드는 계책이야말로 지극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더욱 급급히 의논해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강구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이렇게 조용하기만 하니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이 뜻을 비변사에 말해 속히 상의해서 선처토록 하라."


[註 096] 진(晉)나라 때 안석(安石)이 진물(鎭物)했던 것 : 안석은 사안(謝安)의 자(字). 부견(符堅)의 백만 군사를 회비(淮肥)에서 크게 깨뜨렸는데 이때 사안이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 보고를 받고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계속 바둑을 두었다는 고사로서 이때의 사안의 풍도를 《진서(晉書)》 권79에서는 "감정을 억누르고 분위기를 제압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其矯情鎭物如此]"라 하였음.
"징병해서 들어갈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중국 조정에서 실제로 정벌하는 일을 행한다면 저 적이 좌충우돌해 올 걱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성(昌城) 일로(一路)야말로 적이 들어오는 지름길인만큼 평상시에도 방비를 엄히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지금 중국에서 그 소굴을 토벌하려고 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점이 바로 우리 나라 서쪽 변방의 강변 일대에 장병을 주둔시켜 급할 때 대응토록 하는 방책을 속히 요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도성의 경우 역시 근본이 되는 지역인만큼 미리부터 조치해두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화란을 방지하고 아직 위태롭지 않을 때 안정을 도모하는 기틀인 것이다.
따라서 장수 선발과 군사 훈련과 군량 비축과 기계 제조 등의 일에 대해서 비변사에서는 필시 벌써부터 요리해두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근일의 기상을 보건대 마치 진(晉)나라 때 안석(安石)이 진물(鎭物)했던 것096)  처럼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가 한밤중에 이 일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 벌떡 일어나곤 한다. 내 생각으로는 중국 조정에서 장차 토벌을 할 경우 우리 나라의 징병 여부와는 관계없이 형세상 적이 좌충우돌해 올 걱정이 있으니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서 선처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적이 선박을 만드는 계책이야말로 지극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더욱 급급히 의논해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강구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이렇게 조용하기만 하니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이 뜻을 비변사에 말해 속히 상의해서 선처토록 하라."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의 종사관 윤시용(尹是勇)을 평안·황연(黃延) 등 도(道)에 보내고 참의 이창정(李昌庭)의 종사관 홍헌(洪憲)을 공홍(公洪)·전라 등 도에 보냈다. 【군사 작전에 소요되는 재물이 모자라자 이렇게 파견해 조달토록 한 것인데, 실제로는 궁궐 공사에 전용(轉用)한 것이 많았다.】


 

5월 21일 무신

좌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세 번째 사직소를 올렸다.

 

 

 

대사헌 남근(南瑾)이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부터 가래로 가슴이 답답하여 자리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는데, 어제 전에 합사(合司)하여 합계(合啓)한 것과 이항복(李恒福)에 대한 일을 가지고 동료가 간통(簡通)하여 청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관원들이 인혐(引嫌)하게 하고 논계를 하루 늦추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병이 빌미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항복이 죽었다는 장계가 들어온 그 이튿날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내리자 미시(未時)와 신시(申時) 사이에 양사와 성상소(城上所)가 서로 잇달아 신을 찾아와 말하기를 ‘일단 관작을 회복시켜 준 이상 정조시(停朝市)하는 일이 있을 듯하니 서둘러 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였는데, 신이 대답하기를 ‘이항복이 급제(及第)의 신분으로 배소(配所)에서 죽었고 지금 또 날이 지났으니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더라도 필시 추급해서 정조시하게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날이 저물어가고 또 전에 합사하여 합계한 것이 있으니 써서 들일 여유가 없을 듯하다. 합사하여 다시 시작하는 날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논계하지 않았던 것인데 예조가 공사를 작성하여 추급해 정조시하게 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잘못 판단한 탓으로 낭패를 당하게 하였는데, 양사에서 뭐라고 비난하지는 않지만 전후로 잘못되게 한 것은 모두가 신의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병세가 가라앉지 않아 이런 곡절을 밝히는 일 역시 동료 관원의 뒤에야 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신을 속히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신이 그저께부터 가래로 가슴이 답답하여 자리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는데, 어제 전에 합사(合司)하여 합계(合啓)한 것과 이항복(李恒福)에 대한 일을 가지고 동료가 간통(簡通)하여 청하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관원들이 인혐(引嫌)하게 하고 논계를 하루 늦추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병이 빌미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항복이 죽었다는 장계가 들어온 그 이튿날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내리자 미시(未時)와 신시(申時) 사이에 양사와 성상소(城上所)가 서로 잇달아 신을 찾아와 말하기를 ‘일단 관작을 회복시켜 준 이상 정조시(停朝市)하는 일이 있을 듯하니 서둘러 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였는데, 신이 대답하기를 ‘이항복이 급제(及第)의 신분으로 배소(配所)에서 죽었고 지금 또 날이 지났으니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더라도 필시 추급해서 정조시하게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날이 저물어가고 또 전에 합사하여 합계한 것이 있으니 써서 들일 여유가 없을 듯하다. 합사하여 다시 시작하는 날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논계하지 않았던 것인데 예조가 공사를 작성하여 추급해 정조시하게 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잘못 판단한 탓으로 낭패를 당하게 하였는데, 양사에서 뭐라고 비난하지는 않지만 전후로 잘못되게 한 것은 모두가 신의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병세가 가라앉지 않아 이런 곡절을 밝히는 일 역시 동료 관원의 뒤에야 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더욱 큽니다. 신을 속히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전교하였다. "경덕궁(慶德宮)에 친림(親臨)할 날짜를 28일로 잡고 인경궁(仁慶宮)은 29일로 해도 무방한데, 29일이 평길(平吉)097)  한지 어떤지 일관(日官)에게 물어서 정하라."


[註 097] 평길(平吉) : 별다른 화복 없이 무난한 것.
"경덕궁(慶德宮)에 친림(親臨)할 날짜를 28일로 잡고 인경궁(仁慶宮)은 29일로 해도 무방한데, 29일이 평길(平吉)097)  한지 어떤지 일관(日官)에게 물어서 정하라."


 

 

 

옥당이 상차하여 양사 모두에게 출사를 명하도록 청했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5월 22일 기유

성절 겸 진주사 박정길을 파견,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했다.
합사하여 연계(連啓)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변고를 만난 이상 전에 없던 처치를 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평상시의 법도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다른 의논을 염려하고 꺼려서도 안되는데, 역적을 토죄하는 대론(大論)을 늦춘 결과 화의 근본이 아직도 남아 있어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므로 오늘날 여정(輿情)을 보면 스스로들 죽음을 바쳐서라도 일을 마무리지을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인 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변방의 사태가 날로 악화되어 인심이 더욱 불안해하고 있으니 대론을 마무리짓는 일이 하루가 급합니다. 속히 절목(節目)을 내리시어 늘려 정하도록 하고 차례차례 거행케 하심으로써 폐출하는 전형(典刑)이 완결되게끔 하소서.  기준격(奇俊格)의 소를 보면 못할 말없이 허균의 악행을 드러내 놓았고, 민인길(閔仁佶)의 소를 보면 서궁(西宮)의 묶인 화살의 변고는 허균의 짓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였으니, 엄히 국문하여 밝혀내지 않는 한 준격과 인길과 허균 등은 하루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나국을 명한 뒤 죄인을 잡아내어 국가의 형전(刑典)을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절목을 서둘러 내리는 일이 어찌 그다지도 대단한 일인가.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합사까지 하면서 꼭 귀찮게 할 일이 아니다. 허균 등의 일도 그렇다. 대신도 없이 이 옥사를 추핵한단 말인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나라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변고를 만난 이상 전에 없던 처치를 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평상시의 법도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다른 의논을 염려하고 꺼려서도 안되는데, 역적을 토죄하는 대론(大論)을 늦춘 결과 화의 근본이 아직도 남아 있어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므로 오늘날 여정(輿情)을 보면 스스로들 죽음을 바쳐서라도 일을 마무리지을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인 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변방의 사태가 날로 악화되어 인심이 더욱 불안해하고 있으니 대론을 마무리짓는 일이 하루가 급합니다. 속히 절목(節目)을 내리시어 늘려 정하도록 하고 차례차례 거행케 하심으로써 폐출하는 전형(典刑)이 완결되게끔 하소서.
기준격(奇俊格)의 소를 보면 못할 말없이 허균의 악행을 드러내 놓았고, 민인길(閔仁佶)의 소를 보면 서궁(西宮)의 묶인 화살의 변고는 허균의 짓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였으니, 엄히 국문하여 밝혀내지 않는 한 준격과 인길과 허균 등은 하루도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나국을 명한 뒤 죄인을 잡아내어 국가의 형전(刑典)을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절목을 서둘러 내리는 일이 어찌 그다지도 대단한 일인가. 조용히 조섭하고 있는 때에 합사까지 하면서 꼭 귀찮게 할 일이 아니다. 허균 등의 일도 그렇다. 대신도 없이 이 옥사를 추핵한단 말인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사하여 연계하기를, "전일 정청(庭請)한 것이야말로 충성심에 북받쳐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소 신민들이 상의한 일이 없는 데도 같은 말을 하면서 피를 뿌리며 진달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관 가운데 도깨비같은 무리들은 감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데, 혹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고 혹 의논드리면서 서궁(西宮)을 편드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어떤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창연(鄭昌衍)·유근(柳根)·윤방(尹昉)·김상용(金尙容)·이정귀(李廷龜)·이시언(李時彦)·오윤겸(吳允謙)·송영구(宋英耉)·윤형준(尹衡俊)·이시발(李時發)·김류(金瑬)·박자응(朴自凝)·이경직(李景稷)·박동선(朴東善)·정효성(鄭孝成)·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단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하여 역적을 토죄하는 형전을 엄히 하소서.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 늙고 병들어 폐인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의논을 마무리할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나라에 대론(大論)이 일어난 때에 뒷전에 물러앉은 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상대적으로 볼 때 죄가 적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일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전일 정청했을 때 종실(宗室)의 경우는 행 불행을 같이해야 하는 의리가 있는만큼 더욱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종친부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건대,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희성(李希聖) 등은 시종일관 정청하는 대열에 끼지 않았고, 심지어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은 소원한 종실과는 입장이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 한번 드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 등에 대해서는 종친부가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했다고 써보냈습니다만, 아무리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참한 것은 죄가 없지 않으니 아울러 삭출을 명하소서.  이항복이 서궁을 비호하며 감히 반기를 들었으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에 비추어 본다면 귀양보낸 것도 오히려 가볍다고 해야 할 것인데 천하가 다 아는 그 죄인을 어찌 이제 죽었다고 해서 다르게 대우해 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대론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서궁을 편든 자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다니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여정이 모두 분개하고 괴이한 의논이 더욱 기승을 부리니 속히 내리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처치하기를 기다리고 다시 귀찮게 하지 말라. 내가 병을 요양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마는 일을 논하는 것을 보면 공의(公議)에 차지 않으니 약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오늘날 조정에 있는 대신과 대관(大官) 중에서 서궁을 비호한 자들이 어찌 유독 항복 한 사람뿐이기에 삼사에서는 이미 죽은 항복만 편파적으로 공격하고 있는가. 항복에게 혼이 있다면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이는 그야말로 ‘무른 땅에 나무 꽂는다.’는 속담과 같은 격이라 할 것이다. 이목(耳目)의 역할을 수행하는 관원들은 이 시대에 제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며 남의 원망을 도맡고 피하지 않는 그런 자를 과연 볼 수 있었는가. 나는 보지 못하였다. 너무 심하게 논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조롱받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전일 정청(庭請)한 것이야말로 충성심에 북받쳐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소 신민들이 상의한 일이 없는 데도 같은 말을 하면서 피를 뿌리며 진달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관 가운데 도깨비같은 무리들은 감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데, 혹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은 자도 있고 혹 의논드리면서 서궁(西宮)을 편드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어떤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창연(鄭昌衍)·유근(柳根)·윤방(尹昉)·김상용(金尙容)·이정귀(李廷龜)·이시언(李時彦)·오윤겸(吳允謙)·송영구(宋英耉)·윤형준(尹衡俊)·이시발(李時發)·김류(金瑬)·박자응(朴自凝)·이경직(李景稷)·박동선(朴東善)·정효성(鄭孝成)·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등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단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하여 역적을 토죄하는 형전을 엄히 하소서.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 늙고 병들어 폐인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의논을 마무리할 책임을 지울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나라에 대론(大論)이 일어난 때에 뒷전에 물러앉은 채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상대적으로 볼 때 죄가 적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일체 정부의 거안(擧案)에 따라 모두 삭출하라고 명하소서.
전일 정청했을 때 종실(宗室)의 경우는 행 불행을 같이해야 하는 의리가 있는만큼 더욱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종친부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건대, 서성도정(西城都正) 이희성(李希聖) 등은 시종일관 정청하는 대열에 끼지 않았고, 심지어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은 소원한 종실과는 입장이 크게 다른 데도 끝내 의논 한번 드리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보내라고 명하소서. 그리고 한음군(漢陰君) 이현(李俔) 등에 대해서는 종친부가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했다고 써보냈습니다만, 아무리 늙고 병들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참한 것은 죄가 없지 않으니 아울러 삭출을 명하소서.
이항복이 서궁을 비호하며 감히 반기를 들었으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에 비추어 본다면 귀양보낸 것도 오히려 가볍다고 해야 할 것인데 천하가 다 아는 그 죄인을 어찌 이제 죽었다고 해서 다르게 대우해 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대론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서궁을 편든 자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다니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여정이 모두 분개하고 괴이한 의논이 더욱 기승을 부리니 속히 내리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처치하기를 기다리고 다시 귀찮게 하지 말라. 내가 병을 요양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마는 일을 논하는 것을 보면 공의(公議)에 차지 않으니 약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오늘날 조정에 있는 대신과 대관(大官) 중에서 서궁을 비호한 자들이 어찌 유독 항복 한 사람뿐이기에 삼사에서는 이미 죽은 항복만 편파적으로 공격하고 있는가. 항복에게 혼이 있다면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이는 그야말로 ‘무른 땅에 나무 꽂는다.’는 속담과 같은 격이라 할 것이다. 이목(耳目)의 역할을 수행하는 관원들은 이 시대에 제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며 남의 원망을 도맡고 피하지 않는 그런 자를 과연 볼 수 있었는가. 나는 보지 못하였다. 너무 심하게 논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조롱받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통쾌히 공론을 따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양사에 유시하였다.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귀찮게 하지 말라." 하였다.
"내 뜻은 이미 양사에 유시하였다.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귀찮게 하지 말라."
하였다.

 

 

 

중국 조정에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신 성(姓) 모(某)는 ‘귀순한 오랑캐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자 천토(天討)를 가하려 하는 이때 거듭 총독과 순무의 자문(咨文)과 격문(檄文)을 받고 소방의 군병을 조발(調發)하고 정비하면서 공손히 명지(明旨)를 기다리는 일’에 관하여 삼가 주문(奏文)을 올립니다. 금년 윤4월 12일에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 관비왜(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 도찰원 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 이유한(李維翰)의 자문을 받았고, 잇달아 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경략 어왜(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經略禦倭)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왕가수(汪可受)의 격문을 받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저 준동하는 노추(老酋)는 여진족(女眞族) 떨거지로서 슬그머니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는 남몰래 흉악한 계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처음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가 건주주(建州主)로 바꿔 부르고는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군대가 벌써 1만 명에 차고 있습니다. 소방이 불행하게도 이 적과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탓으로 이 적이 충돌해와 횡포를 부릴 꾀를 낼 때면 언제고 소방을 대상으로 삼곤 하였는데, 단지 소방이 주문을 올려 보고하기만 하면 늘 적에게 선유(宣諭)하며 엄히 단속해 주셨으므로 대개 이런 이유 때문에 승냥이가 이빨만 갈아댈 뿐 독기를 부리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감히 대국을 업신여기면서 곧장 변경을 침범해 성보(城堡)를 무너뜨리고 장리(將吏)를 해쳤으니, 이는 곧 오랑캐의 운세가 장차 다하게 되어 스스로 멸망을 부르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삼묘(三苗)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순 임금의 덕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098) 험윤(玁狁)이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니 주(周)나라의 정벌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099)   소방의 군신(君臣)들은 요동에 경보(警報)가 있었다는 말을 한 번 들은 뒤로부터는 모두 통분해하면서 곧장 그 고깃점을 씹고 가죽을 벗겨 자리로 만들고 싶었으며 아침에 멸망시키고 나서 저녁에 밥을 먹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황상께서 한 번 크게 노하시어 창끝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셨다 합니다. 이에 무대(撫臺)에서 자문을 보내오고 총독이 격문을 전하면서 소방으로 하여금 방비 태세를 재점검하고 병력을 정비한 뒤 작전 날짜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소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라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개심에 불타는 용기를 떨치고 물러나면 죽는다는 뜻을 가다듬고서 그런대로 구벌(九伐)100)  의 위엄을 도와 삼첩(三捷)101)  의 공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변방을 지키는 나라의 직분이요 상국을 보위하는 대의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임진년 난리 때 섬 오랑캐가 멋대로 재앙을 일으키면서 소방에 길을 빌려 상국을 침범하려고 꾀하는 바람에 삼도(三都)가 잿더미로 변하고 팔로(八路)가 결딴이 났으며 군신이 모진 고생을 하며 피난길에 올라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요동에 건너가고 싶다고 애원하면서 부모의 나라에서 죽을 작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 소방의 흥망에 관심을 쏟으시고 인자하게 보살펴 주시어 곧장 군대를 동원해서 흉악한 왜적을 섬멸해 주신 덕택으로 나라가 재건되고 국맥(國脈)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니, 생성(生成)시켜 준 그 큰 덕이야말로 고금에 듣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선왕의 뜻을 계승하려고 생각하며 더욱 제후의 법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신이 호소하기만 하면 번번이 유지를 내려 꼭 따라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독하게 무고를 당한 것도 풀어주시고 추급해 봉전(封典)을 내려주시는 등 은총을 거듭 부어 주시어 영광스럽게 해 주신 일이 한 가지가 아니었는데, 스스로 이 몸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 수천 리 강토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각골명심(刻骨銘心)하며,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사(王師)가 정벌하는 때를 만나 대병력을 운용하고 있으니 병장기를 잡고 선봉이 되는 일을 명하시지 않아도 수행해야 할텐데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환란을 구하러 달려가는 일을 어찌 부름을 받고도 감히 어기겠습니까. 만 분의 일이라도 은혜를 갚는 일이 바로 오늘날의 일에 달려 있기에 자문과 격문의 내용대로 제로(諸路)의 장령(將領)에게 영을 내려 기한 내로 정예를 선발해서 부오(部伍)를 단속토록 하였습니다. 한편 생각하건대 소방은 사면으로 적을 맞고 있습니다. 경상·전라·황해·충청 등 4도(道) 일대의 지방은 모두 왜적을 막는 데에 소속되어 있고 평안의 강계(江界) 이남과 함경의 갑산(甲山) 이북은 모두 북방 오랑캐를 막는 임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천조에서도 소방에 관심을 쏟으시어 늘 파수하는 일을 태만히 하지 말라고 경계시키고 경비하는 일을 엄히 단속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명분과 사정을 고려하다 보니 등재(登載)된 병력도 많지 않아 변방의 관문을 지키도록 파견하는 인원마저 늘 부족한 실정에 있습니다. 게다가 왜란을 겪은 뒤로 인구도 얼마 불어나지 않았는데 병(兵)·농(農)을 구분치 않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앉는 제식(制式) 동작에도 익숙하지 못하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같은 일은 더더욱 장기(長技)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동정(東征)했던 장수들이 그 취약한 것을 책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실상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중황(中黃)102)  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태백성이 달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버마재비[螳蜋]가 어떻게 팔뚝 하나로 수레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개미떼들이 그 소굴을 결국에는 보전하기 어려워 필경 소방의 변방으로 무너져 내려올텐데 만약 과거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던 때와 같이 된다면 쇠잔한 군대를 가지고 장차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동 아문에서 의주(義州)의 역관(譯官)에게 분부한 것을 보건대 ‘저 적이 바야흐로 파저강(波瀦江) 상류에서 배를 많이 만들고 있으니 너희 나라의 강변 각처를 잘 경비하라.’고 하였으니 소방이 대비해야 할 일이 이에 이르러 더욱 급해졌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 부산진(釜山鎭)의 신하가 보내온 당보(搪報)를 보건대 ‘마도(馬島)에서 무역하러 온 왜인들이 약조를 준수하지 않고 책정된 액수 이외의 선박을 다수 내보내는가 하면 해관(該館)에 오는 각 왜인을 보아도 걸핏하면 숫자가 천 명에 이르곤 하는데 교역이나 상격(賞格)이 그들의 욕심에 차지 않으면 번번이 칼을 뽑아들고 눈초리를 매섭게 하면서 불손한 말을 마구 지껄이곤 한다.’고 하였습니다. 북쪽 오랑캐의 걱정이 저와 같고 왜적의 정상이 이와 같아 남쪽과 북쪽의 근심거리를 앞뒤로 맞이하여 꼼짝 못하게 되었으니 현재 관방(關防)에 관한 일이 비상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현재 수비하고 있는 인원을 모조리 조발한다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각 부대에서 얼마씩 뽑아낸다면 그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인데, 병력이 쇠잔한 것을 스스로 한탄할 뿐 어떻게 군용(軍容)을 웅장하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단지 기대하는 것은 황령(皇靈)에 힘입어 천벌(天罰)을 수행해서 노(魯)나라 사람이 목을 찌른 쾌거103)  를 이룩하고 노나라가 헌괵(獻馘)104)  하는 정성을 바치는 것처럼 하는 것인데 그러면 소방의 통분스러운 심정과 숙원이 이에 이르러 어느 정도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이 적이 혹시라도 소방의 강토를 침범하여 의주 일대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천조의 관전(寬奠) 이남으로부터 진강(鎭江) 등에 이르는 지역 모두가 적이 엿보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 뜻밖에 소란을 피울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병(天兵) 1개 부대로 하여금 앞에서 말한 지역에 와 주둔하면서 침범해 올 길목을 차단하게 한다면 병가(兵家)의 제압하는 방략에 도움이 될 듯도 싶습니다. 신이 또 삼가 조사해 보건대, 과거 성화(成化) 2년105)  에 소방이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로부터 ‘건주위(建州衛) 이 만주(李滿住)를 협격(夾擊)하라.’는 조칙을 받고 배신(陪臣)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으며, 또 성화 15년106)  에 황제의 조칙을 받고 배신 윤필상(尹弼商)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건주위 오랑캐를 섬멸토록 했었습니다. 예전부터 천조에서 소방의 군병을 조발할 때에는 반드시 조칙을 내리는 예가 있었으니 지금 역시 칙유를 공손히 기다렸다가 봉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러는 한편 전항(前項)의 조발 대상 군병 1만을 속히 조치해서 의주 등 지역으로 내보내 진퇴에 대해서 지휘를 받도록 하였는데,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해부(該部)에 명하시어 소방의 사정을 상량(商量)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혹 홍무(洪武)·성화 연간에 행했던 구례(舊例)에 따라 조칙을 내려 소방으로 하여금 연강(沿江) 상하 지역을 파수하면서 성원(聲援)을 함과 동시에 변방을 견고하게 하도록 해 주시거나 혹 군진(軍陣) 앞으로 징발해내어 지휘를 받거나 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언제쯤 작전이 개시되고 정벌하는 방략은 무엇인지 명백하게 가르쳐 줌으로써 잘못됨이 없게 해 주신다면 더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면서 성지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註 098] 삼묘(三苗)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순 임금의 덕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30일 동안 묘(苗) 땅 백성들이 명을 어겼다." 하였음.[註 099] 험윤(玁狁)이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니 주(周)나라의 정벌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험윤이 쳐들어오자 윤길보(尹吉甫)에게 정벌을 명하여 격파하게 했음. 《시경(詩經)》 소아(小雅) 6월.[註 100] 구벌(九伐) : 죄악을 징계하는 아홉 가지의 토벌로서 《주례(周禮)》 하관(夏官) 대사마(大司馬)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음.[註 101] 삼첩(三捷) : 삼전 삼첩(三戰三捷)의 준말로서 《송사(宋史)》 우고전(牛皐傳)에 "우고가 극악한 적 양진(揚進)을 노산(魯山)에서 토벌하였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자 적당이 무너져 흩어졌다." 하였음.[註 102] 중황(中黃) : 용력지사(勇力之士)가 많은 나라 이름.[註 103] 노(魯)나라 사람이 목을 찌른 쾌거 : 북적(北狄) 수만(鄋瞞)이 제(齊)나라를 침범하고 노나라에 쳐들어오자 노나라 대부 부부종생(富父終甥)이 그의 목을 창으로 찔러 죽인 뒤 머리를 자구(子駒)의 북문에 묻었던 고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1년. 원문의 진인(晉人)은 노인(魯人)의 착오인 듯함.[註 104] 헌괵(獻馘) : 헌괵이란 전쟁터에 나가 적의 왼쪽 귀를 베어 와 반궁(泮宮)에 바치며 고하는 것을 말함.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註 105] 성화(成化) 2년 : 1466 세조 12년.[註 106] 성화 15년 : 1479 성종 10년.
"조선 국왕 신 성(姓) 모(某)는 ‘귀순한 오랑캐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자 천토(天討)를 가하려 하는 이때 거듭 총독과 순무의 자문(咨文)과 격문(檄文)을 받고 소방의 군병을 조발(調發)하고 정비하면서 공손히 명지(明旨)를 기다리는 일’에 관하여 삼가 주문(奏文)을 올립니다.
금년 윤4월 12일에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 관비왜(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管備倭) 도찰원 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 이유한(李維翰)의 자문을 받았고, 잇달아 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경략 어왜(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糧餉經略禦倭)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왕가수(汪可受)의 격문을 받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저 준동하는 노추(老酋)는 여진족(女眞族) 떨거지로서 슬그머니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는 남몰래 흉악한 계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처음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가 건주주(建州主)로 바꿔 부르고는 홀온(忽溫)을 병탄하고 몽고(蒙古)와 혼인관계를 맺는가 하면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군대가 벌써 1만 명에 차고 있습니다.
소방이 불행하게도 이 적과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탓으로 이 적이 충돌해와 횡포를 부릴 꾀를 낼 때면 언제고 소방을 대상으로 삼곤 하였는데, 단지 소방이 주문을 올려 보고하기만 하면 늘 적에게 선유(宣諭)하며 엄히 단속해 주셨으므로 대개 이런 이유 때문에 승냥이가 이빨만 갈아댈 뿐 독기를 부리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감히 대국을 업신여기면서 곧장 변경을 침범해 성보(城堡)를 무너뜨리고 장리(將吏)를 해쳤으니, 이는 곧 오랑캐의 운세가 장차 다하게 되어 스스로 멸망을 부르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삼묘(三苗)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순 임금의 덕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098) 험윤(玁狁)이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니 주(周)나라의 정벌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099)   소방의 군신(君臣)들은 요동에 경보(警報)가 있었다는 말을 한 번 들은 뒤로부터는 모두 통분해하면서 곧장 그 고깃점을 씹고 가죽을 벗겨 자리로 만들고 싶었으며 아침에 멸망시키고 나서 저녁에 밥을 먹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황상께서 한 번 크게 노하시어 창끝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셨다 합니다. 이에 무대(撫臺)에서 자문을 보내오고 총독이 격문을 전하면서 소방으로 하여금 방비 태세를 재점검하고 병력을 정비한 뒤 작전 날짜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소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라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개심에 불타는 용기를 떨치고 물러나면 죽는다는 뜻을 가다듬고서 그런대로 구벌(九伐)100)  의 위엄을 도와 삼첩(三捷)101)  의 공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변방을 지키는 나라의 직분이요 상국을 보위하는 대의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임진년 난리 때 섬 오랑캐가 멋대로 재앙을 일으키면서 소방에 길을 빌려 상국을 침범하려고 꾀하는 바람에 삼도(三都)가 잿더미로 변하고 팔로(八路)가 결딴이 났으며 군신이 모진 고생을 하며 피난길에 올라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요동에 건너가고 싶다고 애원하면서 부모의 나라에서 죽을 작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 소방의 흥망에 관심을 쏟으시고 인자하게 보살펴 주시어 곧장 군대를 동원해서 흉악한 왜적을 섬멸해 주신 덕택으로 나라가 재건되고 국맥(國脈)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니, 생성(生成)시켜 준 그 큰 덕이야말로 고금에 듣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선왕의 뜻을 계승하려고 생각하며 더욱 제후의 법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신이 호소하기만 하면 번번이 유지를 내려 꼭 따라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독하게 무고를 당한 것도 풀어주시고 추급해 봉전(封典)을 내려주시는 등 은총을 거듭 부어 주시어 영광스럽게 해 주신 일이 한 가지가 아니었는데, 스스로 이 몸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 수천 리 강토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각골명심(刻骨銘心)하며,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사(王師)가 정벌하는 때를 만나 대병력을 운용하고 있으니 병장기를 잡고 선봉이 되는 일을 명하시지 않아도 수행해야 할텐데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환란을 구하러 달려가는 일을 어찌 부름을 받고도 감히 어기겠습니까. 만 분의 일이라도 은혜를 갚는 일이 바로 오늘날의 일에 달려 있기에 자문과 격문의 내용대로 제로(諸路)의 장령(將領)에게 영을 내려 기한 내로 정예를 선발해서 부오(部伍)를 단속토록 하였습니다.
한편 생각하건대 소방은 사면으로 적을 맞고 있습니다. 경상·전라·황해·충청 등 4도(道) 일대의 지방은 모두 왜적을 막는 데에 소속되어 있고 평안의 강계(江界) 이남과 함경의 갑산(甲山) 이북은 모두 북방 오랑캐를 막는 임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천조에서도 소방에 관심을 쏟으시어 늘 파수하는 일을 태만히 하지 말라고 경계시키고 경비하는 일을 엄히 단속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명분과 사정을 고려하다 보니 등재(登載)된 병력도 많지 않아 변방의 관문을 지키도록 파견하는 인원마저 늘 부족한 실정에 있습니다. 게다가 왜란을 겪은 뒤로 인구도 얼마 불어나지 않았는데 병(兵)·농(農)을 구분치 않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앉는 제식(制式) 동작에도 익숙하지 못하며 야전(野戰)이나 공성(攻城)같은 일은 더더욱 장기(長技)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동정(東征)했던 장수들이 그 취약한 것을 책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실상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중황(中黃)102)  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태백성이 달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버마재비[螳蜋]가 어떻게 팔뚝 하나로 수레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개미떼들이 그 소굴을 결국에는 보전하기 어려워 필경 소방의 변방으로 무너져 내려올텐데 만약 과거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던 때와 같이 된다면 쇠잔한 군대를 가지고 장차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동 아문에서 의주(義州)의 역관(譯官)에게 분부한 것을 보건대 ‘저 적이 바야흐로 파저강(波瀦江) 상류에서 배를 많이 만들고 있으니 너희 나라의 강변 각처를 잘 경비하라.’고 하였으니 소방이 대비해야 할 일이 이에 이르러 더욱 급해졌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 부산진(釜山鎭)의 신하가 보내온 당보(搪報)를 보건대 ‘마도(馬島)에서 무역하러 온 왜인들이 약조를 준수하지 않고 책정된 액수 이외의 선박을 다수 내보내는가 하면 해관(該館)에 오는 각 왜인을 보아도 걸핏하면 숫자가 천 명에 이르곤 하는데 교역이나 상격(賞格)이 그들의 욕심에 차지 않으면 번번이 칼을 뽑아들고 눈초리를 매섭게 하면서 불손한 말을 마구 지껄이곤 한다.’고 하였습니다. 북쪽 오랑캐의 걱정이 저와 같고 왜적의 정상이 이와 같아 남쪽과 북쪽의 근심거리를 앞뒤로 맞이하여 꼼짝 못하게 되었으니 현재 관방(關防)에 관한 일이 비상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현재 수비하고 있는 인원을 모조리 조발한다면 지키는 곳이 허술해질 것이고 각 부대에서 얼마씩 뽑아낸다면 그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인데, 병력이 쇠잔한 것을 스스로 한탄할 뿐 어떻게 군용(軍容)을 웅장하게 할 방도가 없습니다. 단지 기대하는 것은 황령(皇靈)에 힘입어 천벌(天罰)을 수행해서 노(魯)나라 사람이 목을 찌른 쾌거103)  를 이룩하고 노나라가 헌괵(獻馘)104)  하는 정성을 바치는 것처럼 하는 것인데 그러면 소방의 통분스러운 심정과 숙원이 이에 이르러 어느 정도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이 적이 혹시라도 소방의 강토를 침범하여 의주 일대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천조의 관전(寬奠) 이남으로부터 진강(鎭江) 등에 이르는 지역 모두가 적이 엿보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 뜻밖에 소란을 피울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병(天兵) 1개 부대로 하여금 앞에서 말한 지역에 와 주둔하면서 침범해 올 길목을 차단하게 한다면 병가(兵家)의 제압하는 방략에 도움이 될 듯도 싶습니다.
신이 또 삼가 조사해 보건대, 과거 성화(成化) 2년105)  에 소방이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로부터 ‘건주위(建州衛) 이 만주(李滿住)를 협격(夾擊)하라.’는 조칙을 받고 배신(陪臣) 어유소(魚有沼)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으며, 또 성화 15년106)  에 황제의 조칙을 받고 배신 윤필상(尹弼商)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건주위 오랑캐를 섬멸토록 했었습니다. 예전부터 천조에서 소방의 군병을 조발할 때에는 반드시 조칙을 내리는 예가 있었으니 지금 역시 칙유를 공손히 기다렸다가 봉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러는 한편 전항(前項)의 조발 대상 군병 1만을 속히 조치해서 의주 등 지역으로 내보내 진퇴에 대해서 지휘를 받도록 하였는데,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해부(該部)에 명하시어 소방의 사정을 상량(商量)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혹 홍무(洪武)·성화 연간에 행했던 구례(舊例)에 따라 조칙을 내려 소방으로 하여금 연강(沿江) 상하 지역을 파수하면서 성원(聲援)을 함과 동시에 변방을 견고하게 하도록 해 주시거나 혹 군진(軍陣) 앞으로 징발해내어 지휘를 받거나 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언제쯤 작전이 개시되고 정벌하는 방략은 무엇인지 명백하게 가르쳐 줌으로써 잘못됨이 없게 해 주신다면 더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면서 성지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5월 23일 경술

영건 도감(營建都監)이 아뢰기를, "남아있는 미포(米布)가 거의 다해 가는데,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는 엄청나게 크고 대내(大內)의 요괴스러운 변고는 날로 심해지는만큼 경덕궁(慶德宮)의 공사를 하루 빨리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니, 경덕궁에 모든 힘을 쏟고 포목을 거두는 일은 우선 중단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공목(助工木)의 경우 외방에서 혹 갖추어 보낸다 하더라도 모두 민력(民力)에서 나올 것이니 차라리 민결(民結)에서 곧장 취하는 것이 낫겠고, 서울의 백관에게서 거두는 것은 적당히 헤아려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백관에게서 거두는 포목은 단지 간략하게 받아서 쓰도록 하라. 그런데 다만 도감이 어떤 때는 두 궁궐의 공사를 모두 정지하라고 청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경궁의 공사만 중단하자고 청하면서 감독할 뜻은 하나도 없이 오히려 공사 중단을 극력 쟁집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니 내가 또한 병되게 여긴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경박해서 조금만 무슨 기별이 있으면 으레 먼저 동요되곤 하는데 한번 징병에 관한 자문과 격문이 온 뒤로 소장과 차자가 어지러이 답지하면서 다투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하고 있으니 인심이 참혹하다고 할 만하다. 설혹 중단해야 한다 하더라도 어찌 경동(驚動)시켜야 하겠는가. 노잔(老殘)의 가포(價布)와 교생(校生)의 강(講)을 면제한 뒤 받는 포목과 해조 및 헌부의 속목(贖木)과 장인(匠人)의 세포(稅布) 등을 어떻게 해서든 다방면으로 거두어들여 기한 내로 독촉해 짓게 하되, 가을과 겨울에 서쪽에서 오는 기별을 다시 보아가며 별도로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남아있는 미포(米布)가 거의 다해 가는데,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는 엄청나게 크고 대내(大內)의 요괴스러운 변고는 날로 심해지는만큼 경덕궁(慶德宮)의 공사를 하루 빨리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니, 경덕궁에 모든 힘을 쏟고 포목을 거두는 일은 우선 중단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공목(助工木)의 경우 외방에서 혹 갖추어 보낸다 하더라도 모두 민력(民力)에서 나올 것이니 차라리 민결(民結)에서 곧장 취하는 것이 낫겠고, 서울의 백관에게서 거두는 것은 적당히 헤아려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백관에게서 거두는 포목은 단지 간략하게 받아서 쓰도록 하라. 그런데 다만 도감이 어떤 때는 두 궁궐의 공사를 모두 정지하라고 청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경궁의 공사만 중단하자고 청하면서 감독할 뜻은 하나도 없이 오히려 공사 중단을 극력 쟁집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니 내가 또한 병되게 여긴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경박해서 조금만 무슨 기별이 있으면 으레 먼저 동요되곤 하는데 한번 징병에 관한 자문과 격문이 온 뒤로 소장과 차자가 어지러이 답지하면서 다투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하고 있으니 인심이 참혹하다고 할 만하다. 설혹 중단해야 한다 하더라도 어찌 경동(驚動)시켜야 하겠는가. 노잔(老殘)의 가포(價布)와 교생(校生)의 강(講)을 면제한 뒤 받는 포목과 해조 및 헌부의 속목(贖木)과 장인(匠人)의 세포(稅布) 등을 어떻게 해서든 다방면으로 거두어들여 기한 내로 독촉해 짓게 하되, 가을과 겨울에 서쪽에서 오는 기별을 다시 보아가며 별도로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구 참장(丘參將)이 재자관 이잠에게 표문(票文)을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회자(回咨)를 받아보건대, 병력이 7천이라는 말만 했지 마병(馬兵)이 얼마이고 보병(步兵)이 얼마이며 통령(統領)하는 장관(將官)은 몇 사람이고 성명은 무엇이며 현재 인마(人馬)는 어디에 주둔하고 있고 무슨 조련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 회보(回報)하는 데에 애로점이 있다. 본관(本官)이 일단 자문을 갖고 가서 군문(軍門)과 무원(撫院) 아문에 올리게 된 이상 반드시 상세한 내용을 알아야만 하니, 앞에 거론한 사항들을 상세히 갖추어 본부에 회답함으로써 회보하기에 편하도록 하라. 급히 본국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라. 표문이 잘 도착되기를 빈다."
"국왕의 회자(回咨)를 받아보건대, 병력이 7천이라는 말만 했지 마병(馬兵)이 얼마이고 보병(步兵)이 얼마이며 통령(統領)하는 장관(將官)은 몇 사람이고 성명은 무엇이며 현재 인마(人馬)는 어디에 주둔하고 있고 무슨 조련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 회보(回報)하는 데에 애로점이 있다. 본관(本官)이 일단 자문을 갖고 가서 군문(軍門)과 무원(撫院) 아문에 올리게 된 이상 반드시 상세한 내용을 알아야만 하니, 앞에 거론한 사항들을 상세히 갖추어 본부에 회답함으로써 회보하기에 편하도록 하라. 급히 본국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라. 표문이 잘 도착되기를 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서장(書狀)을 올렸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관 최흘(崔屹)이 진강(鎭江)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참장 군하(軍下)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병마는 이미 정비되었는가. 천조에서 천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노추(奴酋)의 소굴을 짓밟으면 혹 너희 나라 지방으로 무너져 들어올 염려도 없지 않으니, 너희 나라 병마는 요동으로 건너올 필요없이 강변 일대를 방어하며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왕 군문(汪軍門)은 이미 출관(出關)하였고 두 총병(杜總兵) 이하는 아직 출관하지 않았다. 구 참장은 해주위(海州衛)의 참장에서 체차되기를 원하는데 그대로 본진(本鎭)을 맡으면서 현재 상사(上司)를 도모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역관 최흘(崔屹)이 진강(鎭江)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참장 군하(軍下)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병마는 이미 정비되었는가. 천조에서 천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노추(奴酋)의 소굴을 짓밟으면 혹 너희 나라 지방으로 무너져 들어올 염려도 없지 않으니, 너희 나라 병마는 요동으로 건너올 필요없이 강변 일대를 방어하며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왕 군문(汪軍門)은 이미 출관(出關)하였고 두 총병(杜總兵) 이하는 아직 출관하지 않았다. 구 참장은 해주위(海州衛)의 참장에서 체차되기를 원하는데 그대로 본진(本鎭)을 맡으면서 현재 상사(上司)를 도모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5월 24일 신해

전교하였다. "도감의 미포(米布)가 거의 다 떨어져 가니 포목을 얻고 미곡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을 다방면으로 상세히 의논해 급히 잘 조치해야 하겠다. 가령 노직(老職)을 준다거나 허통(許通)시킨다거나 혹은 이밖에 공모(公募)해서 얻을 수 있는 길을 다시 더 상세히 강구해서 좋은 방향으로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라."
"도감의 미포(米布)가 거의 다 떨어져 가니 포목을 얻고 미곡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을 다방면으로 상세히 의논해 급히 잘 조치해야 하겠다. 가령 노직(老職)을 준다거나 허통(許通)시킨다거나 혹은 이밖에 공모(公募)해서 얻을 수 있는 길을 다시 더 상세히 강구해서 좋은 방향으로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라."

 

5월 25일 임자

양사 전원이 아뢰기를, "서궁(西宮)에 관한 절목(節目)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합사(合司)하지 않고서 빨리 내리시도록 청한단 말입니까. 천하의 대역(大逆)을 토죄하고 한 나라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 도대체 대단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더구나 절목이 일단 내려져야만 폐출하는 형전(刑典)을 차례로 거행하게 될 것인데, 절목이 내려지지 않고서야 장차 어떻게 역적을 다스리겠습니까. 조섭하시는 중에도 들고 나는 공사(公事)가 한 둘이 아닌데, 유독 절목을 내리기를 청하는 이 계사(啓辭)에 대해서만 끝내 들이지 못하게 하신다면 신들이 헛되이 직명(職名)만 띤 채 소리높이 외치면서 세월만 보내라는 말입니까.  서궁을 비호한 자로는 이항복(李恒福)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가 패만(悖慢)하게 의논을 드리자 신들이 맨 먼저 논했으나 겨우 유배보내 쫓아내는 정도로 그쳤는데 집을 사서 음식을 대접한 것을 보면 인심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운세가 다행스럽게 되어 하늘이 그를 죽여버렸는데 성명께서는 그가 이미 죽었으니 관작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날 과연 항복처럼 역적을 비호한 대신이나 대관이 있다면 신들이 어찌 덮어둘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바야흐로 의논드리면서 서궁 편을 든 자들과 정청(庭請)에 불참한 자들의 죄를 청하고 있는 때에 신식(申湜)을 먼저 풀어주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시더니 이제는 또 항복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려 하십니다. 이러고서야 신들이 아무리 원망을 도맡아 피하지 않으려 한다 해도 어떻게 왕법(王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義)가 돈독해야만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고 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직무를 형편없이 수행했으니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나라 사람들의 기롱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서궁(西宮)에 관한 절목(節目)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합사(合司)하지 않고서 빨리 내리시도록 청한단 말입니까. 천하의 대역(大逆)을 토죄하고 한 나라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 도대체 대단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까. 더구나 절목이 일단 내려져야만 폐출하는 형전(刑典)을 차례로 거행하게 될 것인데, 절목이 내려지지 않고서야 장차 어떻게 역적을 다스리겠습니까. 조섭하시는 중에도 들고 나는 공사(公事)가 한 둘이 아닌데, 유독 절목을 내리기를 청하는 이 계사(啓辭)에 대해서만 끝내 들이지 못하게 하신다면 신들이 헛되이 직명(職名)만 띤 채 소리높이 외치면서 세월만 보내라는 말입니까.
서궁을 비호한 자로는 이항복(李恒福)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가 패만(悖慢)하게 의논을 드리자 신들이 맨 먼저 논했으나 겨우 유배보내 쫓아내는 정도로 그쳤는데 집을 사서 음식을 대접한 것을 보면 인심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운세가 다행스럽게 되어 하늘이 그를 죽여버렸는데 성명께서는 그가 이미 죽었으니 관작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날 과연 항복처럼 역적을 비호한 대신이나 대관이 있다면 신들이 어찌 덮어둘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바야흐로 의논드리면서 서궁 편을 든 자들과 정청(庭請)에 불참한 자들의 죄를 청하고 있는 때에 신식(申湜)을 먼저 풀어주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시더니 이제는 또 항복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려 하십니다. 이러고서야 신들이 아무리 원망을 도맡아 피하지 않으려 한다 해도 어떻게 왕법(王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義)가 돈독해야만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고 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직무를 형편없이 수행했으니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나라 사람들의 기롱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합사하여 연계해서 서궁(西宮)에 대한 절목(節目)을 속히 내릴 것을 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합사하여 연계해서 서궁(西宮)에 대한 절목(節目)을 속히 내릴 것을 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요즘 들어 나라에 공의(公議)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수원 부사 최응허(崔應虛)는 본래 비루한 인간으로서 부자가 되려고 급급한 나머지 본부(本府)의 지역에서 널리 전장(田庄)을 점유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모여들어 하나의 큰 취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하여 남의 노비를 빼앗아 관아 속에 많이 모아놓고는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것인 양 꾸미면서 법사(法司)에 정장(呈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관아 안에서 최근 규방(閨房)의 변고가 있었는 데도 제대로 잘 처리하지를 못해 나라에 말이 자자합니다. 영원히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강원 감사 이욱은 몹시 주사를 부리는데 취하기만 하면 직접 장구를 치는 등 크게 체면을 잃어 온 도내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령의 아비(衙婢)를 공공연히 사유(私有)하고는 짐바리를 싣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그 계집 종의 주인을 포장(褒奬)하기도 하였는데 가자(加資)되는 명까지 받았으니 더욱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요즘 들어 나라에 공의(公議)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수원 부사 최응허(崔應虛)는 본래 비루한 인간으로서 부자가 되려고 급급한 나머지 본부(本府)의 지역에서 널리 전장(田庄)을 점유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모여들어 하나의 큰 취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하여 남의 노비를 빼앗아 관아 속에 많이 모아놓고는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것인 양 꾸미면서 법사(法司)에 정장(呈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관아 안에서 최근 규방(閨房)의 변고가 있었는 데도 제대로 잘 처리하지를 못해 나라에 말이 자자합니다. 영원히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강원 감사 이욱은 몹시 주사를 부리는데 취하기만 하면 직접 장구를 치는 등 크게 체면을 잃어 온 도내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령의 아비(衙婢)를 공공연히 사유(私有)하고는 짐바리를 싣고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그 계집 종의 주인을 포장(褒奬)하기도 하였는데 가자(加資)되는 명까지 받았으니 더욱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수원 부사 최응허는 본래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인데 본직을 제수받자 오로지 자기 살찌울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욕심을 부리며 백성의 전토(田土)를 탈취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시키고는 그 집안으로 운반해 들이는가 하면 초군(哨軍)을 많이 동원하여 이웃 경계에 제방을 쌓고는 자기의 소유로 하고 있으므로 온 경내가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천창(賤娼)을 많이 데려와 음란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 그 투기(妬忌)로 말미암아 조카에게 칼질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라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해 버리라고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수원 부사 최응허는 본래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인데 본직을 제수받자 오로지 자기 살찌울 일만 하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욕심을 부리며 백성의 전토(田土)를 탈취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시키고는 그 집안으로 운반해 들이는가 하면 초군(哨軍)을 많이 동원하여 이웃 경계에 제방을 쌓고는 자기의 소유로 하고 있으므로 온 경내가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천창(賤娼)을 많이 데려와 음란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 그 투기(妬忌)로 말미암아 조카에게 칼질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라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해 버리라고 명하소서."
하니,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26일 계축

전교하였다. "대전(大殿)과 동궁(東宮)의 안자(鞍子)를 경술년에 새로 만들었었는데 10년도 채 못되어 모두 너덜너덜해졌다. 함부로 보관하는 등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정상이 놀랍기 그지없으니, 경술년 이후 내승(內乘)의 담당 관리를 모두 추고하고, 해조로 하여금 급히 다시 만들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단속하여 여연(輿輦)의 안자를 철저히 잘 간수하도록 하라."
"대전(大殿)과 동궁(東宮)의 안자(鞍子)를 경술년에 새로 만들었었는데 10년도 채 못되어 모두 너덜너덜해졌다. 함부로 보관하는 등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정상이 놀랍기 그지없으니, 경술년 이후 내승(內乘)의 담당 관리를 모두 추고하고, 해조로 하여금 급히 다시 만들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단속하여 여연(輿輦)의 안자를 철저히 잘 간수하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영건 도감(營建都監)에 재목과 돌을 상납하러 물 위에 띄워 들여올 때 간사한 생각을 품고 농간을 부리는 일이 많이 있고, 공장(工匠)을 사사로이 민가에 빌려주는 날도 꽤 많다 하니,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단속을 엄히 해 이런 폐단이 없게끔 하라. "
"영건 도감(營建都監)에 재목과 돌을 상납하러 물 위에 띄워 들여올 때 간사한 생각을 품고 농간을 부리는 일이 많이 있고, 공장(工匠)을 사사로이 민가에 빌려주는 날도 꽤 많다 하니, 지금 이후로는 각별히 단속을 엄히 해 이런 폐단이 없게끔 하라. "

 

전교하였다. "근일 각 해사(該司)가 날이 갈수록 태만해지고 있다. 내사(內司)에 바칠 북도(北道)의 노비 신공(身貢)과 고을 창고에 들였다가 상납할 대역세(代役稅)인 가포(價布)를 병조는 이미 바쳤는데, 해조의 공사를 이미 오래 전에 계하(啓下)했는 데도 사섬시에서는 오래도록 바치지 않고 있으니, 당해 관리를 중하게 추고하라."
"근일 각 해사(該司)가 날이 갈수록 태만해지고 있다. 내사(內司)에 바칠 북도(北道)의 노비 신공(身貢)과 고을 창고에 들였다가 상납할 대역세(代役稅)인 가포(價布)를 병조는 이미 바쳤는데, 해조의 공사를 이미 오래 전에 계하(啓下)했는 데도 사섬시에서는 오래도록 바치지 않고 있으니, 당해 관리를 중하게 추고하라."

 

5월 27일 갑인

분병조 참의 전유형(全有亨)이 상소하여, 인경궁(仁慶宮) 공사를 중단할 것과 오로지 방비책에 뜻을 둘 것을 청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도 내에는 좌·우 방어사가 있고 또 강화(江華) 등 중요한 방어 지역이 있으니, 서(西)·북(北)·양남(兩南) 감사의 예에 따라 순찰사를 겸하도록 계하(啓下)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경기도 내에는 좌·우 방어사가 있고 또 강화(江華) 등 중요한 방어 지역이 있으니, 서(西)·북(北)·양남(兩南) 감사의 예에 따라 순찰사를 겸하도록 계하(啓下)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전유형의 상소에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의논해 처리토록 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상소 가운데 궁궐에 관한 일은 빼고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케 하라." 하였다.
"상소를 보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의논해 처리토록 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상소 가운데 궁궐에 관한 일은 빼고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케 하라."
하였다.

 

5월 28일 을묘

전교하였다. "대간도 하나의 인신(人臣)일 뿐이다. 나는 안질(眼疾)로 여태 고생하고 있는데 요즘 국가에 일이 많은 탓으로 조용히 조섭하지를 못해 지금까지 쾌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매번 전일 이미 진달했던 급하지도 않은 여론(餘論)을 가지고 조용히 조섭하는 때에 번거롭게 소란을 떨면서 마치 당장 해결해야 할 큰 일인 것처럼 하고 있으니 지극히 부당하다. 내가 병이 나을 동안만이라도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고 삼사에 말하라. 그리고 봉입(捧入)하지 말라. "
"대간도 하나의 인신(人臣)일 뿐이다. 나는 안질(眼疾)로 여태 고생하고 있는데 요즘 국가에 일이 많은 탓으로 조용히 조섭하지를 못해 지금까지 쾌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매번 전일 이미 진달했던 급하지도 않은 여론(餘論)을 가지고 조용히 조섭하는 때에 번거롭게 소란을 떨면서 마치 당장 해결해야 할 큰 일인 것처럼 하고 있으니 지극히 부당하다. 내가 병이 나을 동안만이라도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고 삼사에 말하라. 그리고 봉입(捧入)하지 말라. "

 

양사 전원이 아뢰기를, "합사하여 아뢰는 것은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해 취하는 거조이니만큼 윤허를 받지 못하면 공가(公家)의 대사가 있다 하더라도 하루도 정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께와 어제는 국기(國忌)에 따른 재계일(齋戒日)이었고 또 정일(正日)107)  이었기 때문에 감히 연계(連啓)를 하지 못했고, 오늘은 신들이 모두 궐하에 가서 당연히 아뢰려 하였는데 곧 이어 엄한 분부를 받고 말았습니다. 물러가려 하니 예전부터 대간이 대궐에 갔다가 헛되이 나온 예가 없고 그렇다고 연계하자니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십니다. 신들의 진퇴가 낭패스럽기 그지없게 되었으니 그 정상이 또한 애처롭지 않습니까. 서궁(西宮)에 대한 대론(大論)을 시일만 끈 결과 삿된 의논이 마구 일어나고 인심이 더욱 위구스럽게 여기니 이는 국가의 복이 못될 듯싶습니다.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피혐을 할지라도 병이 나을 동안만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註 107] 정일(正日) : 기일.
"합사하여 아뢰는 것은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해 취하는 거조이니만큼 윤허를 받지 못하면 공가(公家)의 대사가 있다 하더라도 하루도 정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께와 어제는 국기(國忌)에 따른 재계일(齋戒日)이었고 또 정일(正日)107)  이었기 때문에 감히 연계(連啓)를 하지 못했고, 오늘은 신들이 모두 궐하에 가서 당연히 아뢰려 하였는데 곧 이어 엄한 분부를 받고 말았습니다. 물러가려 하니 예전부터 대간이 대궐에 갔다가 헛되이 나온 예가 없고 그렇다고 연계하자니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십니다. 신들의 진퇴가 낭패스럽기 그지없게 되었으니 그 정상이 또한 애처롭지 않습니까. 서궁(西宮)에 대한 대론(大論)을 시일만 끈 결과 삿된 의논이 마구 일어나고 인심이 더욱 위구스럽게 여기니 이는 국가의 복이 못될 듯싶습니다.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피혐을 할지라도 병이 나을 동안만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사피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판돈녕 민형남의 차자를 보건대 그 속에 ‘수상(首相)이 영우(嶺右)에 고와(高臥)108)  하고 있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渠]가 수상의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의 의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물러나 전야(田野)에 있어도 일찍이 백성의 행 불행과 종묘 사직의 흥망에 대해 잠시도 가슴 속에서 잊지 않고 있는 이것이야말로 나오거나 물러나거나 변함없는 현자의 근심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수상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밥 한 그릇을 대할 때에도 잊지 않는 정성의 소유자로서 온갖 걱정거리가 총집결되는 날을 당하여 어찌 집에서 생활할 때와 조정에 있는 그 사이에 임금을 염려하는 생각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일월(日月)을 꿰뚫는 충성심의 소유자라고 일컬어졌던 이를 고와(高臥)하고 있는 하나의 처사(處士)에 비유하였고 보면 그가 너무나도 수상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일을 잊은 자에 대해서 ‘고와’라는 표현을 쓴다면 모르겠습니다만, 한 시대의 모범이 되고 그 몸에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자에 대해 ‘고와’라는 표현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애석한 일입니다. 삼가며 자신을 기르는 형남조차도 같은 패거리를 편들어 다른 편 사람을 씹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하북(河北)의 적(賊)을 제거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에 신임이 갑니다. 신들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는 이상 구구한 소회를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고와’라는 표현이 타당하지 않은 듯도 싶다마는 1품인 훈재(勳宰)에게 그[渠]라고 칭하다니 이 또한 온당하지 못한 일이니, 서로 실수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註 108] 고와(高臥) : 마음을 고상하게 가지고 세상일을 피하여 벼슬도 마다 한 채 은거하고 있는 것을 말함.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에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사안을 사마(司馬)로 삼기를 청하자 그가 이에 응하여 신정(新亭)을 떠나려 할 때 조사(朝士)가 모두 전송하였으나 중승(中丞) 고숭(高崧)이 희롱하기를 ‘그대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동산에 높이 누워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안석(安石:사안의 자(字))이 나오려 하지 않으니 장차 창생을 어찌할꼬.」라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창생이 또한 경같은 자를 어찌할 것인가.’ 하니 사안이 매우 부끄러워 하였다." 하였음.
"지금 판돈녕 민형남의 차자를 보건대 그 속에 ‘수상(首相)이 영우(嶺右)에 고와(高臥)108)  하고 있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渠]가 수상의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의 의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물러나 전야(田野)에 있어도 일찍이 백성의 행 불행과 종묘 사직의 흥망에 대해 잠시도 가슴 속에서 잊지 않고 있는 이것이야말로 나오거나 물러나거나 변함없는 현자의 근심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수상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밥 한 그릇을 대할 때에도 잊지 않는 정성의 소유자로서 온갖 걱정거리가 총집결되는 날을 당하여 어찌 집에서 생활할 때와 조정에 있는 그 사이에 임금을 염려하는 생각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일월(日月)을 꿰뚫는 충성심의 소유자라고 일컬어졌던 이를 고와(高臥)하고 있는 하나의 처사(處士)에 비유하였고 보면 그가 너무나도 수상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일을 잊은 자에 대해서 ‘고와’라는 표현을 쓴다면 모르겠습니다만, 한 시대의 모범이 되고 그 몸에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자에 대해 ‘고와’라는 표현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애석한 일입니다. 삼가며 자신을 기르는 형남조차도 같은 패거리를 편들어 다른 편 사람을 씹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하북(河北)의 적(賊)을 제거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에 신임이 갑니다. 신들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는 이상 구구한 소회를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고와’라는 표현이 타당하지 않은 듯도 싶다마는 1품인 훈재(勳宰)에게 그[渠]라고 칭하다니 이 또한 온당하지 못한 일이니, 서로 실수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5월 29일 병진

전교하였다. "호서(胡書)가 들어와 나라 일이 더욱 급해졌으니, 좌상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돈독한 말로 유시해서 속히 출사하여 마음을 다해 대책을 강구토록 하라."
"호서(胡書)가 들어와 나라 일이 더욱 급해졌으니, 좌상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돈독한 말로 유시해서 속히 출사하여 마음을 다해 대책을 강구토록 하라."

 

왕이 경덕궁(慶德宮)에 거둥하여 공사를 살펴본 뒤 해가 지자 환궁하였다.

 

평안도 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장계하기를, "만포 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이 치보(馳報)하기를 ‘이번 5월 16일에 말을 탄 호인(胡人) 12명이 국경 건너편에 와서 통사(通事)를 부르기에 즉시 통사를 시켜 물어보게 하였더니 갖고 온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져다가 겉봉을 보건대 「조선 국왕은 뜯어보라.」고 제목을 달았기에 너무나도 한심해서 통사를 시켜 개유(開諭)하기를 「우리 나라는 너희 장수와는 사체가 같지 않다. 예전부터 문서를 서로 통하는 규례(規例)를 보면 곧장 조정에 전달하는 예(禮)가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무척 곤란하다.」고 하면서 반복해서 타이르고 전후의 문서를 모두 내주었더니 차호(差胡)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편지를 갖고 나왔을 뿐이다. 사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구박하며 되돌려 준다는 것이 형세상 어렵기에 우선 호관(胡館)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술과 고기를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여진 훈도(女眞訓導) 방응두(房應斗)와 향통사(鄕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을 시켜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차호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바야흐로 군대를 모아 중국 장수와 싸우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서로들 드나들다 보면 군기(軍機)가 누설되는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일체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이번에 군대를 일으키게 된 것은 요동(遼東)에서 우리 장수의 조부(祖父)를 죽였고 또 여허성(如許城) 안에 중국 장수를 보내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를 원망하며 수년 간 군사를 훈련시켜 오다가 지난 4월 15일에 우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무순(撫順) 등 4진(鎭)을 한꺼번에 격멸하였다. 그런 뒤에 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노획한 우마(牛馬)·포물(布物)·궁전(弓箭) 및 포로로 잡은 중국인을 점검해 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무순을 지키던 장수는 투항해서 생포되었는데, 우리 장수의 막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현재 우리 성안에서 같이 살게 하고 있다. 또 5월 그믐이나 6월 초승께 여허에 가서 격파한 뒤에 그대로 요동과 광령(廣寧)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날씨가 무덥고 장맛비가 오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기 때문에 현재 확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중국인 1천여 명은 즉각 머리를 깎고 우리 복장을 갖추게 한 뒤 선봉으로 삼고 있다. 조선은 우리 조정과 신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에서 조선에 청병(請兵)할 경우에는 회령(會寧)·삼수(三水)·만포(滿浦) 등의 곳에 우리 장수가 한 부대의 병마를 보내 공격하도록 할 것이다. 조선은 우리 장수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삼가 강토나 지키면서 군대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하기에, 대답하기를 「중국 조정이 2백 년 동안 쌓아온 국력을 가지고 너희 소추(小酋)를 상대하는 것은 태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외국을 불러 구조를 청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문답하는 사이에 어투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관(關)에 들어올 때 성에 비치된 기계의 허실을 유심히 살피는 듯하였습니다. 호서(胡書) 본문은 호관(胡館)에 놔두고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 적이 중국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 이해 관계를 따지게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침략해 올 염려가 중국 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변경 역시 어느 때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군사 대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미 뽑은 황연도(黃延道)의 군병은 숙천(肅川) 등 지역에 내보내 주둔시키고, 본도 군병의 경우는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 등을 본도 수령으로 겸차(兼差)시킨 뒤 각각 병력을 인솔하고 맡은 지역에 가 주둔케 하면서 조련하며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즉각 달려가 구원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도내의 물력(物力)이 여유있는 고을 및 강변의 수령도 무반(武班)으로 바꿔 차임한 뒤 군병을 단속하고 있다가 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는 대로 달려가 구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비책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胡書)를 잇달아 두 번이나 위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보면 필시 뜻밖의 환란이 있게 될 것인데, 호인(胡人)에 대한 방비책으로는 성을 지키며 청야(淸野)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변 일대를 말하건대 강계(江界)·만포(滿浦)·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 등 약간의 성이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성이라고 해야 한 길 남짓한데 불과하고 해자(垓字)라고 해야 몇 자를 넘지 않으니 결코 들어가서 수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지(內地)의 용강(龍岡)·안주(安州)·평양(平壤)의 성들은 모두 지킬 만한 곳입니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폐기된 상태에 있어 창졸간에 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영변(寧邊)의 한 성만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면의 산이 높아 사수(死守)할 만한 곳인 데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 수선해 쌓자면 적이 이르기 전에 백성이 먼저 농사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군병을 뽑아 내보내 주둔시키는 일과 성들을 수축하는 일 등에 대해 묘당을 시켜 비변사에 계하해서 속히 지휘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번의 호서 및 만포에서 문답한 이야기는 흉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7종(宗)이 고뇌하며 한스럽게 여겨 중국 조정과 원수를 맺었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시어 뜻을 이루도록 해 주었다고 하는 등 한편으로는 뜻을 얻은 것을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변방을 겁주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 온 호인의 행동이 거친 것 또한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서 침범당할 근심이 오늘날 박두했으니 본도의 일을 속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황연도의 군병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이미 부대별로 들어가 방어하도록 분부하셨는데,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순찰사와 자세히 의논하여 진퇴해야 하겠습니다. 방어사와 조방장을 수령으로 겸차(兼差)하는 일과 도내의 수령을 무반으로 바꿔 임명하는 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안주성의 수비에 대한 일은 본사에서 ‘하유하시어 제때에 수리를 해서 꼭 지킬 수 있도록 하라.’고 청한 결과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곽산(郭山)의 성은 안주와 멀지 않아 성원(聲援)할 수 있고 형세가 가장 좋으니 먼저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평양과 영변 등 지역은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논이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도의 근본이 되는 지역을 또한 헛되이 버려둘 수는 없으니 도내의 물력을 참작해서 혹시라도 세월만 보내며 고식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추진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개 흉봉(兇鋒)이 일단 중국 조정으로 돌입한만큼 다음에는 우리 나라로 군대를 돌릴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점을 십분 유념해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적기(賊騎)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감사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만포 첨사(滿浦僉使) 장후완(蔣後琬)이 치보(馳報)하기를 ‘이번 5월 16일에 말을 탄 호인(胡人) 12명이 국경 건너편에 와서 통사(通事)를 부르기에 즉시 통사를 시켜 물어보게 하였더니 갖고 온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가져다가 겉봉을 보건대 「조선 국왕은 뜯어보라.」고 제목을 달았기에 너무나도 한심해서 통사를 시켜 개유(開諭)하기를 「우리 나라는 너희 장수와는 사체가 같지 않다. 예전부터 문서를 서로 통하는 규례(規例)를 보면 곧장 조정에 전달하는 예(禮)가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무척 곤란하다.」고 하면서 반복해서 타이르고 전후의 문서를 모두 내주었더니 차호(差胡)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편지를 갖고 나왔을 뿐이다. 사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구박하며 되돌려 준다는 것이 형세상 어렵기에 우선 호관(胡館)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술과 고기를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여진 훈도(女眞訓導) 방응두(房應斗)와 향통사(鄕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을 시켜 오랑캐의 내부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차호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바야흐로 군대를 모아 중국 장수와 싸우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서로들 드나들다 보면 군기(軍機)가 누설되는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일체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이번에 군대를 일으키게 된 것은 요동(遼東)에서 우리 장수의 조부(祖父)를 죽였고 또 여허성(如許城) 안에 중국 장수를 보내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를 원망하며 수년 간 군사를 훈련시켜 오다가 지난 4월 15일에 우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무순(撫順) 등 4진(鎭)을 한꺼번에 격멸하였다. 그런 뒤에 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노획한 우마(牛馬)·포물(布物)·궁전(弓箭) 및 포로로 잡은 중국인을 점검해 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무순을 지키던 장수는 투항해서 생포되었는데, 우리 장수의 막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현재 우리 성안에서 같이 살게 하고 있다. 또 5월 그믐이나 6월 초승께 여허에 가서 격파한 뒤에 그대로 요동과 광령(廣寧)으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날씨가 무덥고 장맛비가 오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기 때문에 현재 확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중국인 1천여 명은 즉각 머리를 깎고 우리 복장을 갖추게 한 뒤 선봉으로 삼고 있다. 조선은 우리 조정과 신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만약 요동에서 조선에 청병(請兵)할 경우에는 회령(會寧)·삼수(三水)·만포(滿浦) 등의 곳에 우리 장수가 한 부대의 병마를 보내 공격하도록 할 것이다. 조선은 우리 장수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삼가 강토나 지키면서 군대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 하기에, 대답하기를 「중국 조정이 2백 년 동안 쌓아온 국력을 가지고 너희 소추(小酋)를 상대하는 것은 태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외국을 불러 구조를 청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문답하는 사이에 어투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런데 관(關)에 들어올 때 성에 비치된 기계의 허실을 유심히 살피는 듯하였습니다. 호서(胡書) 본문은 호관(胡館)에 놔두고 등서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 적이 중국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 이해 관계를 따지게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침략해 올 염려가 중국 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변경 역시 어느 때 침략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군사 대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미 뽑은 황연도(黃延道)의 군병은 숙천(肅川) 등 지역에 내보내 주둔시키고, 본도 군병의 경우는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 등을 본도 수령으로 겸차(兼差)시킨 뒤 각각 병력을 인솔하고 맡은 지역에 가 주둔케 하면서 조련하며 변방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즉각 달려가 구원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도내의 물력(物力)이 여유있는 고을 및 강변의 수령도 무반(武班)으로 바꿔 차임한 뒤 군병을 단속하고 있다가 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는 대로 달려가 구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비책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胡書)를 잇달아 두 번이나 위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보면 필시 뜻밖의 환란이 있게 될 것인데, 호인(胡人)에 대한 방비책으로는 성을 지키며 청야(淸野)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변 일대를 말하건대 강계(江界)·만포(滿浦)·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 등 약간의 성이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성이라고 해야 한 길 남짓한데 불과하고 해자(垓字)라고 해야 몇 자를 넘지 않으니 결코 들어가서 수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내지(內地)의 용강(龍岡)·안주(安州)·평양(平壤)의 성들은 모두 지킬 만한 곳입니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폐기된 상태에 있어 창졸간에 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영변(寧邊)의 한 성만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면의 산이 높아 사수(死守)할 만한 곳인 데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 수선해 쌓자면 적이 이르기 전에 백성이 먼저 농사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군병을 뽑아 내보내 주둔시키는 일과 성들을 수축하는 일 등에 대해 묘당을 시켜 비변사에 계하해서 속히 지휘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번의 호서 및 만포에서 문답한 이야기는 흉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7종(宗)이 고뇌하며 한스럽게 여겨 중국 조정과 원수를 맺었다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시어 뜻을 이루도록 해 주었다고 하는 등 한편으로는 뜻을 얻은 것을 과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변방을 겁주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 온 호인의 행동이 거친 것 또한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서 침범당할 근심이 오늘날 박두했으니 본도의 일을 속히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황연도의 군병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이미 부대별로 들어가 방어하도록 분부하셨는데, 주둔할 곳에 대해서는 순찰사와 자세히 의논하여 진퇴해야 하겠습니다. 방어사와 조방장을 수령으로 겸차(兼差)하는 일과 도내의 수령을 무반으로 바꿔 임명하는 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안주성의 수비에 대한 일은 본사에서 ‘하유하시어 제때에 수리를 해서 꼭 지킬 수 있도록 하라.’고 청한 결과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곽산(郭山)의 성은 안주와 멀지 않아 성원(聲援)할 수 있고 형세가 가장 좋으니 먼저 수축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평양과 영변 등 지역은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논이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도의 근본이 되는 지역을 또한 헛되이 버려둘 수는 없으니 도내의 물력을 참작해서 혹시라도 세월만 보내며 고식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추진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개 흉봉(兇鋒)이 일단 중국 조정으로 돌입한만큼 다음에는 우리 나라로 군대를 돌릴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이 점을 십분 유념해 정비해 둠으로써 뒷날 적기(賊騎)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감사에게 아울러 행이(行移)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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