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3권, 고종3년 1866년 10월

싸라리리 2025. 1. 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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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술

전교하기를,
"내가 근일 이래로 고기를 먹어도 맛있는 줄 모르고 잠잘 때에도 포근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편안할 줄 모른다. 자나깨나 마음속에 있는 한 가지 생각은 진실로 중앙과 지방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밤낮으로 밖에서 지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베개 삼아 자며 창과 칼을 차고 쌀을 일고 밥 짓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환히 보이는 듯하다.
아, 사람으로서 누군들 부모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한 해를 넘기도록 고생하면서 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키우는 즐거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생과 온갖 고통을 겪게 되는 까닭을 캐보면 실로 나에게 원인이 있다. 여기까지 말이 미치니 마음이 몹시 슬프다.
그러나 채미(采薇)025)  를 하며 한가로이 지낼 수 없는 것은 대체로 갑자기 오랑캐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너희 적들을 토벌하러 나간 장수들과 군사들은 나랏일을 튼튼히 다지려는 뜻으로 마음을 삼고 임금과 맞서는 적들과 대적하는 것을 의리로 여기고 있는데, 이렇게 널리 타일러주는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고생하면서 추위를 무릅쓰고 투지를 더욱 굳게 다지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두 번째로 아뢰기를,
"이인기(李寅夔) 등에게 빨리 해당되는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실로 참작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아뢰지 마라."
하였다.

 

기정진(奇正鎭)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이휘재(李彙載)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임명하고, 숭령전 참봉(崇靈殿參奉) 박문일(朴文一)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의 가설에 단부(單付)하였다. 모두 학문과 덕행이 훌륭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박제소(朴齊韶)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병정(尹秉鼎)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남성교(南性敎)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한계원(韓啓源)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궁전 건설을 전적으로 백성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차례로 완공되고 있다. 그런데 매번 나라 일을 따르는 의리를 생각할 때마다 실로 몹시 부끄럽다. 나라를 위한 성의는 몹시 가상하므로 표창하고 장려하며 뜻을 표시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다. 자원하여 1만 냥(兩) 이상을 바친 사람들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여라."
하였다.

 

원납인(願納人) 【이도응(李度膺), 백남승(白南升), 김인득(金仁得), 정이건(鄭履健)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 정언(正言) 한영조(韓永祖)는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하고 안시혁(安時赫), 안홍덕(安鴻悳), 정언술(鄭彦述), 김정실(金鼎實), 조윤현(趙胤顯), 윤동민(尹東敏), 김재묵(金在默), 편기진(片沂珍), 백낙선(白樂善), 방효함(方孝涵), 유임(柳恁), 안시윤(安時潤), 김문로(金文輅), 김기형(金箕亨), 이의익(李宜翼), 김한웅(金漢雄), 설병주(薛秉周), 한은국(韓殷國), 김국민(金國民), 김상락(金尙洛), 백동한(白東翰)을 모두 수령(守令)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차송(差送)한다. 이승검(李承儉), 박영주(朴永胄), 김상홍(金相洪), 김영필(金永弼), 안정국(安貞國), 유도(柳燾), 천치관(千致寬), 박상묵(朴尙默), 김규엽(金奎燁), 박양진(朴陽鎭), 황의연(黃義淵), 임재식(林在植), 김순봉(金順鳳), 최우형(崔禹亨), 김우찬(金宇纘), 조경렴(趙景濂), 김경희(金敬熙), 김흥익(金興益), 동극량(董克亮), 임유하(林有廈), 김진수(金震洙), 박종희(朴宗羲), 김동교(金東敎), 안효직(安孝稷), 한상리(韓庠履), 조진구(曺鎭九), 조진억(曺鎭億)을 모두 품계에 상당(相當)하는 벼슬에 제수한다.】 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10월 2일 정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수현(金壽鉉)이 올린 장계(狀啓)에 의하면, ‘본영(本營)에 소속된 금천(金川)의 서쪽과 북쪽의 두 개 창고에 있는 각종 양향(糧餉)과 환곡(還穀) 3,020석(石)은 곧 대흥성(大興城)의 군량인데 지난 계축년(1853)에 거듭 흉년든 것을 특별히 걱정하여 하봉(下捧)하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농사도 괜찮게 되었으니 그전대로 예비분을 미리 갖추는 문제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창고에 있는 양향과 환곡을 전례대로 올려다 바치도록 하는 일을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산성(山城)의 양향을 올려다 바치는 것은 떳떳한 법과 관계되는 것으로써 예비분을 마련하고 군량을 비축하는 것은 중요할 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풍년든 뒤여서 백성들의 생활도 조금 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 가을부터 법식대로 산성에 올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의 진도(珍島)로 말하면 해문(海門)의 요충지에 있는 만큼 수령(守令) 한 사람에게 방어를 잘 하도록 책임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안(泰安)에서 한 전례대로 방어사(防禦使)로 승격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3일 무자

문묘(文廟)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거행하고 이어 춘당대(春塘臺)에서 알성 문무과(謁聖文武科)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고영석(高永錫) 등 3명을 뽑고, 무과에서는 이정필(李正弼) 등 257명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나라에서 관리를 등용할 때는 본래 제한함이 없다. 서북(西北)과 개성(開城)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으로 말하면 역대 선조(先朝) 때부터 내려온 거듭 명한 훌륭한 뜻이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그것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은 유사(有司)에서 뜻을 잘 받들지 못한 탓이다. 더구나 지금 인재가 적은 때에 특별히 널리 선발하여 불러들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양도(兩道)의 감사(監司)와 송도 유수(松都留守)는 시골의 장로(長老)들을 성균관(成均館)에 모아놓고 논의하고 추천하여 보고한다면 높은 벼슬이건 좋은 벼슬이건 아끼지 않겠다. 그러나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만약 사실과 어그러지는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잘못 추천한 죄를 적용할 것이며 적임자를 추천하였을 경우에는 응당 어진 사람을 등용시킨 데 대한 표창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정족 산성 수성장(鼎足山城守城將) 양헌수(梁憲洙)가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이달 초하룻날 저놈들 60여 명이 이 산성에 들어와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는 중들이 쓰는 기명(器皿)만 파괴하고 갔는데 그날 밤에 우리 군사가 잠입한 사실을 저놈들은 사실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지키고 있는 성을 특별히 점령할 계책으로 저들의 두령이 말을 타고 나귀를 끌고 짐바리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동문과 남문 양쪽 문으로 나누어 들어올 때 우리 군사들이 좌우에 매복했다가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습니다. 저들은 죽은 자가 6명이고 아군은 죽은 자는 1명입니다. 적들은 도망치면서 짐바리와 술, 음식, 무기 등을 모두 버리고 갔기 때문에 거두어 보관해두고 있습니다. 훗날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탄알 또한 모두 떨어졌으니 저들이 군사들을 더 보강해서 다시 쳐들어온다면 어떠한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포수를 한 300명 가량 내일 날 밝기 전에 건너보내어 형세를 돕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먼저 북산을 점거한 것은 승산 있다. 지금 정족 산성(鼎足山城)을 도로 회복함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 격려시키고 오직 전진만 하고 퇴각할 줄 모르는 의리를 찾아볼 수 있게 하였으니 아주 훌륭한 일이며 공로 또한 적지 않다. 천총(千總) 양헌수(梁憲洙)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임명하라. 그리고 군사 중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은 치료해줄 것이며 죽은 사람은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도록 정찰하는 기병을 띄워 선봉진에 명을 알리라. 각별히 거행하도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걱정하고 돌봐주는 뜻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특별히 이양화(李亮和)를 제수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삼았다. 이인석(李寅奭)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경순(李景純)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흥민(李興敏)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남성교(南性敎)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송겸수(宋謙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내가 세 죄인에 대하여 무슨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해준 것이 있거나 또한 참작하지 않고 그렇게 했겠는가? 지금 삼사(三司)의 탄핵이 매일 같이 쟁집(爭執)하는 것에서 보니 공론이 갈수록 더욱더 세차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끝까지 계속 내 견해를 고집한다면 이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대하는 의리에 도리어 어긋나는 것이다.
도배(島配)한 죄인 이인기(李寅夔)와 이용회(李龍會)에게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법조문을 추가하여 시행하고, 먼 변방에 귀양보낸 죄인 이공렴(李公濂)에 대해서는 원악도에 안치하라. 이와 같이 참작하여 처리한 다음에도 또 번거롭게 아뢴다면 나와 맞서는 것이 될 것인데 【상위(象魏)】 가 저기에 있으니 내가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우선봉장(右先鋒將)인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선필(金善弼)이 장교 4인과 표하군(標下軍) 35명, 지방 고을의 포를 잘 쏘는 포수 336명을 거느리고 오늘 싸움터에 나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사학을 한 죄인 최수(崔燧), 김인길(金仁吉), 김진(金振), 김진구(金鎭九) 등을 총융진(總戎陣)에 넘겨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을 경계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이는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의 보고를 근거로 해서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기 연해로 파견되었던 위무사(慰撫使)가 다녀온 보고를 하였습니다. 연해의 백성들이 생계로 삼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어물과 소금입니다. 지금은 포구에서 장사하여 이득을 보자고 해도 팔 수 없고 시골에서 돈을 마련하기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러한 때에 규례대로 바치도록 독촉한다면 형편상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조(戶曹), 병조(兵曹), 균역청(均役廳), 선혜청(宣惠廳), 각 군영, 각 관청에 바치는 것 가운데서 지나친 것이 있으면 명년 봄까지 바치는 기한을 연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중앙과 지방들에서 전쟁에 나간 사람들을 놓고 말하더라도 진(陣)에 나가 밖에서 고생하고 있는 만큼 마땅히 수고에 보상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신포(身布)와 환미(還米), 연호 잡역(烟戶雜役)을 특별히 면제시켜 주어 그들을 잘 돌봐주고 고무 격려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평양(平壤)의 전 오위장(五衛將) 조규환(趙奎煥)은 대대로 군공(軍功)이 있으며, 구성(龜城) 출신인 김봉전(金鳳篆)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다같이 전사하였으며, 안주(安州) 출신 박승렴(朴承濂)은 신미년(1811)에 군공을 세운 사람의 아들입니다. 평양 출신 송백원(宋伯源)은 어머니가 늙고 봉양할 사람마저 없어 싸움터에 나가려고 하다가 차마 나가지 못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대의로 나가도록 독촉하였습니다. 모두 신의 군영(軍營)에 도착하여 적과 싸우러 나갈 것을 자원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이므로 응당 우선 표창하여 여러 사람들을 고무하도록 할 것입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여 처리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싸움터에 나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니 실로 충성과 용맹을 대대로 물려받은 집안의 사람들이다. 심지어 송백원의 어머니가 의리로 아들을 깨우쳐준 것은 더욱 보기 드문 일이다.
전 오위장 조규환은 가자(加資)하고, 동지(同知) 벼슬에 가설(加設) 단부(單付)하고, 김봉전, 박승렴, 송백원도 모두 가자하고 오위장 벼슬에 가설 단부하라. 조상들 중에 군공을 세우고 전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한 품계를 추증하여 줄 것이며, 송백원의 어머니는 특별히 정부인(貞夫人) 직첩(職牒)을 주어 조정에서 고무하고 격려해주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10월 4일 기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황해 수사(黃海水使) 오하영(吳夏泳)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군영(軍營)이 있는 고을의 민호는 겨우 2,000호 밖에 안 되는데 환미(還米)의 총수는 2만여 석(石)에 이르므로 가산을 탕진하고 생업을 폐하게 되어 장차 고을이 텅텅 비게 될 형편입니다. 지금에 와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방도로는 환미(還米)를 감해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본 군영에서 매년 은(銀)을 사들이는 데 쓰는 돈이 850냥(兩)인데 10년을 기한으로 해서 사들이는 것을 중지하고 좁쌀 240여 석으로 바꾸어 마련하여 군영의 지출에 쓰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수군(水軍)들의 군량을 보관하고 있는 각 읍에서 모곡(耗穀)을 없애고 본곡만 세워두게 하고 군영이 있는 고을 백성들의 환미(還米)를 매년 아주 면제시켜 준다면 2,400여 석은 10년 사이에 스스로 탕감될 것입니다. 그리고 추포 무사(追捕武士) 20명은 요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1년간의 군량에서 모곡 2,200여 석을 가지고 원래의 지출 2,000석을 계산하여 덜면 나머지 200석이 남습니다. 그 중에서 96석은 추포 무사에게 매달 6두(斗)씩 요(料)로 주는 것으로 설정하고 100여 석은 본곡에 넣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방 방어를 튼튼히 하는 데는 군사들을 양성하고 백성들을 잘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사(水使)의 계책이 진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바라건대 모두 그가 보고한 내용대로 자세히 절목(節目)을 만들도록 윤허하고 본부에 보고한 다음 그에 준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호군(護軍) 이항로(李恒老)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지난번에 노환으로 죽음에 가까워지게 되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는데 다행스럽게도 인자하신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벼슬을 교체시키도록 윤허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의금부(義禁府)의 벼슬에 임명하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은 아주 늙었으나 죽지 않고 세상을 속이면서 헛된 이름만 도적질하고 있으니 본분에 벗어나 외람되이 벼슬을 받음이 이렇듯 심합니다.
신이 질병을 무릅쓰고 나갈 수는 있으나 감히 명을 받들어 응할 수 없다는데 대해서는 역시 이유가 있습니다.
신은 본래 부유(腐儒)로 다른 기이한 모책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에 스승들과 벗들을 따라다니며 경전(經典)들과 선대 어진 선비들의 말을 약간 들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세속에서 이른바 상담사법(常談死法 : 평범한 이야기와 죽은 법)입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평범한 말 가운데도 기묘한 이치가 있고 사법(死法) 가운데도 활법(活法)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교훈을 굳게 믿어왔으며 임금께 말씀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전번에 올린 상소에서 이에 대하여 아뢰었습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편안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전(傳)에, ‘덕은 근본이며 재물은 부차적인 것이다. 근본을 도외시하고 부차적인 것을 중시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재물을 빼앗도록 만든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나라는 이익을 이롭게 여기지 말고 의리를 이로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자는 그 말의 뜻을 미루어서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백성의 신뢰를 얻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자기 몸을 망치면서 재물을 늘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몇 마디의 말을 모든 임금들이 변함없이 지켜야 할 교훈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양이(洋夷)들이 창궐하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추적해 보았는데 실로 우리 백성들의 내응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우리 백성들이 내응하게 된 것은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나라를 배반하게 된 것은 생계를 유지할 재산이 모두 고갈되었기 때문이며 재산이 모두 고갈되게 된 것은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며,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거두어들이게 된 것은 토목 공사를 크게 벌린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대체로 원망을 품고 나라를 배반한 백성들을 군사로 몰아서 물과 불 속에 뛰어들게 하는 것은 진실로 곤란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으면 배 안이 모두 적국민이며 담장 안이 모두 원수입니다. 그러니 어찌 양이들만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신은 몹시 근심하고 탄식한 나머지 자신의 힘도 헤아려보지 않고 그 근본적인 문제를 거슬러서 논했는데 바라건대 토목 공사를 중지하고 백성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중지해야 합니다. 이는 늙은 신이 가슴 가득 피끓는 마음으로 내뱉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명심하겠다는 전교만 내리고 지금까지 시행하였다는 실상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그 세금의 과목들만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미 배반한 백성들은 더욱 배반하게 되고 이미 교만하게 날뛰던 적들은 더욱 교만하게 날뛰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첫째 문제입니다.
《상서》〈고요모(皐陶謨)〉에 이르기를, ‘덕있는 사람은 하늘이 다섯 가지 표창을 하며 죄지은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형벌을 적용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다섯 가지 표창을 한다고 말하였으니 덕이 높고 낮음에 따라서 조금이라고 뒤바꿀 수 없으며 이미 다섯 가지 형벌을 준다고 하였으니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조금도 어긋나게 줄 수 없습니다. 신이 전번에 올린 상소에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자세히 아뢴 것은 대체로 지적할 일이 있어서 아뢴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수백 년 동안 튼튼히 보전해온 지역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중대한 곳입니까? 그런데 그 일대를 방어하는 관리가 하찮은 적들과 한 번 마주치자 성(城)을 버리고 도망쳐 제 목숨만 살려고 꾀하여 나라 형편을 위기일발의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형벌을 적용한다면 죽여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너그럽고 인자한 나머지 먼 변방에 귀양 보내는 벌만을 주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변방을 지키는 관리나 싸움터에 나간 병사들만 자기 몸을 보전하고 처자들을 보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풍성학려(風聲鶴唳)026)  를 도처에서 본받는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이 자신의 힘도 헤아려보지 않고 다시 그 문제를 아뢰어 전하의 마음을 깨우쳐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가 살펴보지 않아 심지어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를 올리고 대신들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전하께서는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예로부터 이단의 교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고 해친 것에 대하여 말하면 어찌 이루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양교(洋敎 : 천주교)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오랑캐들로서 남의 나라에 화란을 끼친 자들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양이(洋夷)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사학(邪學:천주교)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자기의 패거리들을 늘려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함으로써 우리나라의 형편을 탐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우리의 문물 제도를 어지럽히고 우리나라의 재물과 여자들을 약탈함으로써 그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안으로 정사를 잘하며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조치를 마치 근본(根本)과 지엽(枝葉)이 서로 필요하여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음이 명백한 것입니다. 지엽도 비록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근본은 더욱 급한 문제입니다. 이른바 근본은 전하의 한마음이니 자기의 사심이나 사욕을 절제하고 선한 것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전하가 뜻을 세우고 조심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 즉시 시행하기를 사나운 우레나 세찬 바람처럼 용기 있게 해야 합니다. 마땅히 제거할 일이면 즉시 제거하기를 정으로 끊고 쇠를 자르듯이 결단성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지혜는 날로 밝아져 요사스럽고 어지러운 것에 가리는 일이 없을 것이며 전하의 덕은 날로 굳세어져 동요하거나 뜻을 빼앗기는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비들을 수습하여 정학(正學)을 강론하고 염탐꾼들을 처단하여 없애버림으로써 내응의 길을 끊어버리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바탕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근본 문제를 살펴본다면 또한 서양 물건을 철저히 금지시키는 데 있습니다.
대체로 서양 물건이 들어오는 항목은 매우 많습니다. 요컨대 모두가 기이하고 괴이한 것들로써 민생의 일용에 무익할 뿐 아니라 화를 끼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공(召公)이 예물로 받은 큰 개를 경계하던 의리로 놓고 볼 때 바로 양이들이 해마다 바치는 공물로 말하면 이 물건은 예물로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니 또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입고 먹고 하는 데서 근본이 되는 물건을 몰래 빼내 바꾸어가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들의 물건은 손으로 생산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계산해도 여유가 있지만 우리의 물건들은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1년을 단위로 계산해도 부족합니다. 부족한 것으로 남는 물건과 바꾸는데 우리가 어떻게 곤란한 생활을 겪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생산하는 물건을 가지고 한 해에 한 번 생산하는 물건과 바꾸니 저들이 어찌 넉넉하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해마다 제멋대로 때를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왕래하였으며 혹 우리나라의 민간에 섞여 살면서 백성들의 풍속을 해치고 혹은 해변에 침입하여 성읍을 불태우기도 하고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고황(膏肓)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제할 방도는 있습니다. 서양 물건을 사용하는 집과 시장에 나가 파는 자를 모두 중한 죄를 줌으로써 군신과 백성들로 하여금 한 사람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게 한다면 저들의 기대는 허사로 될 것이며 우리에게 물건을 팔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서양 물건을 금지하는 것을 나라 안을 잘 다지는 중요한 요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전하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는다면 이는 말단을 다스려 그 흐름을 막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지난번의 상소에서 전하께서 옷을 입거나 식사를 하거나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서양 물건이라도 있으면 대궐 뜰에 모두 모아놓고 불태워 버림으로써 중외(中外)의 상하에 전하의 마음은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음을 알게 하며 서양의 적이 오는 근원을 끊어버릴 수 있게 할 것을 아뢴 것입니다.
이것은 고원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며 전하께서 극기하여 좋은 일을 따르는 진실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관례대로 비답을 내리면서 아직도 실지로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셋째 문제입니다.
이 외의 말씀드린 문제들에 대하여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들은 지금 일일이 거론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체로 세상의 의리는 무궁하나 한 사람의 총명과 지혜는 한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의 생각 중에 반드시 한 번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의 생각 중에 반드시 한 번은 훌륭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순(堯舜) 같은 성인들도 오히려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상고하여 ‘자기의 견해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평범한 말까지 잘 살피며 나쁜 것은 숨기고 착한 것은 드러내며 양 끝을 잡고 백성들에게 들어맞는 것을 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서경》〈중훼지고(中虺之誥)〉편에서 탕(湯)은 이르기를, ‘묻기를 좋아하면 식견이 넓어지고 자신의 뜻대로만 하면 협소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윤(伊尹)은 태갑(太甲)에게 말하기를, ‘너의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도리에 맞는 것이 있지 않는가를 찾아보며, 너의 비위에 맞추는 겸손한 말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찾아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기뻐하면서도 연역하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가 직접 경연(經筵)에 나가 매일 유신(儒臣)들을 만나 강론하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긴요하게 처리해야 할 부분이 소루하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전하께서 시골에 파묻혀있는 신을 불러올린 것은 무슨 뜻에서였습니까? 아뢰는 말이 채용되지 못하고 그저 벼슬자리만 더럽히는 것은 성조(聖朝)에 있어서는 거조(擧措)의 합당함을 잃은 것이고 신 자신에 있어서도 염치와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아뢰는 것이니 비록 전하의 노여움을 받아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내린 명령을 빨리 철회하도록 함으로써 벼슬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말이 실로 공명정대한 것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5일 경인

순무영(巡撫營)에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㘽芝)의 보고에 의하면 당일 진시(辰時)에 갑곶진(甲串津)에 정박하고 있던 크고 작은 이양선(異樣船) 전부가 닻을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 덕적진(德積津) 앞바다를 지나 부평(富平) 일대로 향해 갔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정족산 수성장(鼎足山守城將) 양헌수(梁憲洙)가 올린 보고는 이러합니다.
어제 패배한 적들이 오늘 틀림없이 기승을 부리며 발광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엄하게 경계를 세우고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전투에서 전사한 자는 포수(砲手)인 양근(楊根) 사람 윤흥길(尹興吉)입니다. 부상당한 사람은 선두보 별장(船頭堡別將) 김성표(金聲豹)와 포수인 홍천(洪川) 사람 이방원(李邦元), 춘천(春川) 사람 이장성(李長成)인데 모두 사생(死生)의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유격장(遊擊將) 최경선(崔經善)과 홍석두(洪錫斗)는 평안도 포수 93명을 거느리고, 병조 좌랑 한성근(韓聖根)은 황해도 포수 50명을 거느리고 무사히 진에 도착함으로써 약간이나마 군심(軍心)을 안정시키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중과부족(衆寡不足)의 근심이 있습니다.
어제 노획한 물건들은 일일이 별지 문건에다 기록하여 원물건들과 함께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전투 때에 6명의 적들이 남문 밖에서 죽은 것을 우리 군사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어젯밤 촌민(村民)들이 와서 말하기를, 「저놈들이 행군해가면서 또한 죽은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저놈들이 모두 시체를 묶어서 여러 대의 짐바리에 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저놈들이 죽은 수는 50여 명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성교(趙性敎)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출정한 장졸들이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하고 있는데 질병이 없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위로해 주도록 하며, 순무영(巡撫營)로 하여금 호궤(犒饋)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6일 신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양이(洋夷)들이 더욱더 날뛰는 관계로 중외(中外)가 뒤숭숭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저들이 바깥 바다로 도망쳐 달아난 것이 무슨 간사한 계책을 꾸미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군사들이 허허벌판에 나가 밖에서 일시적으로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우니 양화(楊花), 행주(幸州), 녹번(綠磻) 고개를 방어하고 있는 각 진영은 모두 철수시켜 돌아가도록 할 것이며 대궐문과 성문에 추가한 파수(把守)들도 역시 해제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녹번 고개와 양주(楊州)의 속오군(束伍軍)과 승군(僧軍), 경기 중군(京畿中軍)이 영솔한 경기 속오군들이 여러 날 동안 바람 맞으며 노숙(露宿)하였는데 어찌 앓는 사람들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직접 가서 위로하고 돌아올 것이며 여비도 후하게 나누어주라."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달 5일 해시(亥時)에 강화도(江華島)에 검열하러 나갔던 별군관(別軍官) 박정화(朴鼎和)와 신석범(申錫範)이 돌아와서 보고한 데 의하면 놈들에 의해 약탈과 파괴를 당한 참혹한 정상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고 합니다. 내성(內城)에서는 장녕전(長寧殿)과 만령전(萬寧殿), 객사(客舍)와 공해(公廨)가 다 불에 타 없어지고 아정당(衙政堂)은 단지 세 칸만 남았으며 아전(衙前)들이 일보는 건물은 온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교(鄕校), 충렬사(忠烈祠), 열무당(閱武堂), 중영(中營)과 포청(捕廳)은 온전하였으며 민가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진 호수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은 온전하였고 남문(南門)은 문짝과 현판, 여성(女城)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성위의 좌우에 우리나라 창 12병(柄)을 나누어 벌려놓았다고 합니다. 외성(外城)에는 진해루(鎭海樓) 안의 민가 한 집이 불에 타고 진해사(鎭海寺)와 전 금위영(禁衛營) 창고는 온전하였으며 훈련원(訓練院)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창고는 불에 타 없어졌고 인정종(人定鍾)은 외성 안 길 위에 운반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완구포 6좌(座)를 갑곶포 나룻가에 비치하고 우리나라의 총통 4좌는 외성 안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날 운반해가다가 놈들에게 빼앗겼던 쌀로써 갑곶포(甲串浦)의 민가에 보관해두고 있던 쌀을 어림짐작하니 약 400여 석(石) 되었습니다. 운반선 1척에 실어서 언덕위에 가져다 놓았으며, 또 남아있는 200석에 대해서는 인가들도 텅텅 비어 있고 날도 또한 저물었기 때문에 미처 수량을 따져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군 초관(領軍哨官) 추정욱(秋正旭)으로 하여금 즉시 수습해 가지고 수직(守直)을 서도록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600여 석의 쌀은 세미(稅米)와 관계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선봉(先鋒) 이용희(李容熙)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4일 별군관(別軍官) 이기조(李基祖)로 하여금 별무사(別武士) 최양륜(崔養崙)과 포수 50명, 별파진(別破陣) 3명을 거느리고 덕적포(德積浦)의 나룻가에 매복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진시(辰時)에 큰 이양선(異樣船) 4척이 일제히 오므로 우리 군사들이 한편 총을 쏘아대자 저놈들도 역시 포를 쏘아댔습니다. 이기조는 몸소 탄환을 무릅쓰고 곧바로 들어가 칼을 빼들고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서양배의 4면에는 연기와 화염이 검게 일어났으며 나는 듯 빠르게 도망갔습니다. 적들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우리 군사들은 특별히 부상당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7일 임진

전교하기를,
"강화도(江華島)에 양이(洋夷)들이 침입한 변고는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한창 그놈들이 노략질하며 날뛸 때에 그 곳 백성들이 놀란 고기마냥 몹시 두려워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적들의 발길이 닿은 곳마다 집들과 집물(什物)들이 모두 불타 버리고 들판의 곡식이며 집에 저축해 두었던 곡식마저 모두 약탈당하는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군(我軍)의 대군(大軍)이 먼저 점거함으로써 승산은 결정되고 저 양이(洋夷)들은 바깥 바다로 쫓겨나갔지만 약탈을 겪은 뒤에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또한 장차 어떻게 살아 나가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여러 차례 일어나곤 하였다. 살아있거나 죽은 사람들을 잘 돌봐주는 문제가 급선무이다.
위유사(慰諭使)를 해조(該曹)에 단부(單付)로 구두 추천하도록 해라. 그로 하여금 곳곳에 가서 명령을 선포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 내탕전(內帑錢) 1만 냥(兩)을 내려보내니 화재 입은 각호(各戶)에 일일이 나누어주어 추워지기 전에 집을 짓고 들어가 살도록 하라. 앞으로 잘하도록 하기 위한 방도에 대해서는 유수(留守)와 서로 의논하여 조처하여 한 사람의 백성도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폐단이 없도록 하도록 의정부(議政府)에서 글을 지어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강화도(江華島) 한 섬은 두 선대 임금이 슬기로운 계책을 남긴 곳임에도 불구하고 누각과 성이 불행하게 양이(洋夷)의 침입을 받아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하는 조치까지 취하게 되었다. 아프고 몹시 슬픈 마음은 어찌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장강(長江)과 천연 요새지도 더는 의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전우(殿宇)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로 제자리에 어진(御眞)을 모셔가는 의식을 매우 신중하게 잘해야 할 것이다.
삼가 국조(國朝)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따라 장녕전(長寧殿)을 중건하여 이봉할 필요는 없으며 그냥 남전(南殿)의 해당한 실에 봉안(奉安)하라."
하였다.

 

강로(姜㳣)를 강화도 위유사(江華島慰諭使)로, 신관호(申觀浩)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오취선(吳取善)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이겸희(李兼熙)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청산도(靑山島)에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흥양(興陽)의 3도(島)와 영암(靈巖)의 소안도(所安島)를 모두 소속시키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총융청(總戎廳)이 아뢰기를,
"의정부(議政府)에 비준하여 내려 보낸 공문을 보니 신의 군영(軍營)에서 방어하고 있는 진(陣)을 철수해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적선이 비록 외양(外洋)으로 도망쳐나가고 군졸이 허허 벌판의 밖에서 고생함이 걱정이지만 적들이 경기(京畿)의 연해에서 백 리 이내에 있으므로 멀리 도망쳐 갔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엄한 경계는 오랠수록 더욱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수들과 군사들이 방어 지역에 있는데 이미 집결한 군사들을 어찌 조금이라도 후퇴시킬 수 있으며 갑자기 방비를 늦추자고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우선은 이전대로 방어하여 염려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미 내린 명령을 철회하십시오."
하니, 전교하기를,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총융청(總戎廳)에서 올린 초기(草記)를 보니 적선이 비록 이미 외양(外洋)으로 도망쳐갔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경기(京畿) 연해에서 100리 이내에 있습니다. 이미 집결한 군사들과 말들을 조금이라도 후퇴시키거나 갑자기 철수할 수 없으니 아직은 이전대로 방어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군(中軍) 이원희(李元熙)도 역시 도로 본 진영에 와서 방어하도록 할 것을 아뢰었으며 전하의 비답 명령에서는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적선은 이미 도망쳤으므로 군사들이 밖에서 고생하는 것을 응당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강 연안의 여러 진들을 우선 철수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지금 총융청(總戎廳)의 장수가 치계(馳啓) 한 것도 역시 신중하게 잘 하려는 의도입니다. 양화진(楊花津)의 군사는 아직 그냥 주둔하게 하고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철수하여 본진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선봉(先鋒) 이용희(李容熙)가 이달 6일에 올린 급보에 의하면,「갑곶진(甲串津) 주변에서 빼앗겼던 조운미(漕運米)를 민가에 옮겨다 둔 것과 배 안에 그냥 남겨둔 것들을 다시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나루 주변의 민가에 옮겨다 보관한 것이 699석(石)이며 연안(沿岸)에 매놓은 배 가운데 남겨둔 것이 395석이며 소금이 5석이었는데 해당 선주(船主) 최성재(崔成在)한테 봉하여 맡겼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조세(租稅)를 바치는 곡식과 관계되는 만큼 역시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8일 계사

행 호군(行護軍) 이항로(李恒老)가 상소를 올려 병든 상황에 대하여 진술하고 맡고 있는 벼슬에서 교체시켜 줄 것을 청하고 이와 함께 만동묘(萬東廟)에 다시 제사를 지내자고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각 군영(軍營)의 기병(騎兵)들과 초군(哨軍)중에 말이 없거나 용맹하지도 못한 사람들을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 채워 넣었으니 이것이 과연 군제(軍制)인가? 병조 판서(兵曹判書), 금군 별장(禁軍別將) 각 군영의 장수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에서 지방 군사들이 번(番) 드는 것을 중지한 것은 백성들이 당하는 폐단을 걱정한 것에서 나온 것인데 수도 군영의 군제(軍制)가 이로 인해 허술해졌다. 이제부터 번 드는 대신에 내는 돈을 두 군영에 넘겨주어 몇 초(哨)의 포수들의 인원수를 더 늘여 마련하도록 하라. 요포(料布) 등은 원래 군례(軍例)에 의해 분급(分給)하는 내용으로 분명하게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서양 배가 이미 퇴각하여 갔으니 강화도의 공해(公廨)와 군기(軍器), 전함(戰艦)을 부득불 지금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건하는 역사(役事)와 새로 군사 장비를 마련하는 일은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고 명칭은 강화도 영조 도감(江華島營造都監)으로 합니다. 지종정경(知宗正卿) 이경순(李景純), 좌참찬(左參贊) 신관호(申觀浩), 지종정경(知宗正卿) 이경하(李景夏),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장겸(李章濂), 좌윤(左尹) 정규응(鄭圭應), 우윤(右尹) 양헌수(梁憲洙)를 모두 공사를 감독하는 당상(堂上官)으로 차하(差下)하여 그들로 하여금 재목을 모아들이며 제도를 잘 토의 확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과 재물은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각 군영들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빌어 쓰도록 할 것이며 그들이 일을 보는 처소는 편리한 대로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9일 갑오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조은승(曺殷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강명흠(姜命欽) 등을 총융진(摠戎鎭)에 넘겨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의 보고에 근거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청하였기 때문이다.

 

영건 도감(營建都監)에서 근정전(勤政殿)의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조두순(趙斗淳)을,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 제술관에 김병학(金炳學)을, 경회루(慶會樓)의 상량문 제술관에 유후조(柳厚祚)를, 근정문(勤政文)의 상량문 제술관에 김병익(金炳翊)을, 홍례문(弘禮門)의 상량문 제술관에 김병국(金炳國)을 계본을 올려 차하(差下)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의 급보를 보니,「덕포 첨사(德浦僉使) 이두현(李斗鉉)의 보고에 의하면 부평 일대에 정박하였던 큰 이양선(異樣船) 5척 가운데서 3척이 오늘 동틀 무렵에 세어도(細於島) 밖을 향해 갔는데 본진에서 감시하였으나 산이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접수한 부평 부사(富平府使) 조병로(趙秉老)의 공문에서는 연통선(烟筒船) 1척이 8일 오시(午時)에 팔미도(八尾島) 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10일 을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이경재(李景在)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장인원(張仁遠)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전 우후(虞候) 신효철(申孝哲)을 유격장(遊擊將)으로 임명하여 관서(關西)의 포수(砲手) 200명을 거느리고 영종진(永宗鎭)으로 내려가도록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순무영(巡撫營)에서 올린 초기(草記)에 대하여 결재한 것을 보니 운산(雲山) 출신(出身)인 안낙풍(安樂豐)은 바로 임신년(1812)에 군공(軍功)을 세웠던 죽은 첨사(僉使) 안여곤(安如坤)의 아들입니다. 집을 팔아 돈을 장만해 본 고을 포수(砲手)들의 식량을 마련하는 기금으로 보태 쓰도록 하였으므로 표창하는 은전(恩典)에 대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공(公)을 위하고 사(私)를 잊음은 실로 그의 아버지의 기풍을 본받은 것입니다. 안낙풍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오위장(五衛將)에 가설(加設) 단부(單付)하며 죽은 그의 아버지 첨사 안여곤에게도 한 등급 증직하여 조정에서 후하게 표창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1일 병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관할인 세청(稅廳)을 설치한 처음에는 책문(柵門)의 물품에 대해서만 세를 받았고 북화(北貨)에 대해서는 애초에 거론하지 않았는데 비록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법의 뜻으로 놓고 볼 때는 응당 다르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역문(曆門)에서 시작하여 북화에 대해서는 의주에서 조목별로 마련하여 특별히 문건을 작성해서 본 의정부에 보고하고 세를 받는 것은 한결같이 책화의 전례대로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청으로 하여금 잘 대조 확인해 보도록 함으로써 숨기거나 누락시키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문(門)마다 비포(比包)027)  해서 문건을 작성해 가지고 역시 본 의정부에 보고하여 정식(定式)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7책 3권 7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국용(國用)


[註 027] 비포(比包) : 조선시대 국경 너머 무역을 하던 상인들의 포(包)를 비교하는 일, 즉 거래액이 국법에 정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지 점검하는 일을 뜻함. 영조 30년(1754)에 정한 비포절목(比包節目)에는 각인이 자신의 포(包)에 든 물종과 국경 너머에서 파는 값을 정하고 또 그 밑에 무역해 올 물종의 값을 적어 서장관에게 바치면 교준(較准)한 뒤에 수결(手決)을 한 후, 돌아와 도강한 뒤에 만윤(灣尹)과 함께 수검(搜檢)하고 만일 은닉하거나 누락시켜 틀리는 것이 있으면 잠상률(潛商律)로 죄를 논한다고 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재용편(財用編) 5 연행팔포(燕行八包) 비포조(比包條).

 

10월 12일 정유

임영수(林永洙)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장렴(李章濂)이 올린 장계(狀啓)의 등보(謄報)를 보니, ‘서양 오랑캐들이 강화부(江華府)를 점거하였을 때 약탈이 장차 산성 안에까지 미치게 되자 서리(書吏) 조희영(趙羲永) 등 7인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깨끗한 곳에 토굴을 파고 선원각(璿源閣)과 사각(史閣)에 보관되어 있던 책궤들을 모두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환안(還安)하는 절차를 감히 제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은 물론 마음대로 여닫을 수 없지만,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권도로 알맞게 처리한 것이니 놀랍고 두렵던 끝에 그래도 천만 다행스럽습니다. 다시 봉안하는 절차는 종정경(宗正卿)과 춘추관(春秋館)에서 응당 거행해야 하겠지만, 이때에 주전(廚傳)의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령(守令)이 이미 지종정경(知宗正卿)의 직책을 띠고 있으니 그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봉안(奉安)하게 하고, 서리 조희영 등 7인에게는 다같이 체가(帖加)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장렴(李章濂)이 올린 장계(狀啓)에서, ‘사직(社稷)과 성묘(聖廟)의 위판(位版)을 받들어 내온 사람들이 매우 가상합니다.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는 절차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위판을 다시 봉안하는 등의 절차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여러 사람들의 일은 매우 가상하니 노고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모두 정신없이 도망가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옮겨 봉안하였으니 표창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분교관(分敎官) 황호덕(黃浩悳)은 6품직이 나기를 기다려 옮기도록 하며, 재임(齋任) 남궁준(南宮浚)은 초사(初仕)에 조용(調用)시키며 청직(廳直) 유석규(劉錫圭)는 특별히 급복(給復)하고 본부(本部)로 하여금 아전(衙前)이나 군교(軍校) 가운데서 좋은 벼슬자리에 그의 원에 따라 차급(差給)하게 할 것입니다. 관노(官奴)인 정수한(鄭秀漢)으로 말하면, 시퍼런 칼날을 목에 들이댔는데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났으니, 더욱 몹시 가상합니다. 역시 급복하고 면천(免賤)하도록 하며, 해영(該營)에서 관할하고 있는 곳의 변장(邊將)의 빈 자리 하나에 우선 차송(差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방금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의 치보(馳報)를 보니, 부평 부사(富平府使)의 첩정(牒呈)에, 「10일 유시(酉時)에 큰 이양선(異樣船) 중에 약간 작은 1척의 배와 연통선(烟筒船) 1척이 팔미도(八尾島)에서 도로 올라와 응도(鷹島)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하였고 덕포 첨사(德浦僉使)의 보고에 「부평 경내에 정박하고 있던 이양선들은 전과 같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10월 13일 무술

전 헌납(獻納) 박주운(朴周雲)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임금은 백성들을 하늘로 삼고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데, 재물을 흩으면 백성들은 모여들며 재물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백성들은 흩어집니다. 지난해에 권분(勸分)028)  한 것은 평상시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구나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또한 만약 마구 거두어들인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대체로 토목 공사를 크게 벌이는 것은 절약하는 것이 아니고, 사치가 과도한 것도 절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약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신은 믿지 않겠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옛적에 위(衛) 나라 임금은 좌씨(左氏)의 땅과 도망간 한 아전(衙前)을 바꾸어 베면서 말하기를, ‘법이 확립되지 않고 처벌이 반드시 시행되지 않는다면 비록 좌씨의 땅이 열 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도움 되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법이 확립되고 처벌이 반드시 시행되지 않으면 열개의 강화부(江華府)를 잃는다고 해도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종친들을 후하게 대해 주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비록 지극한 덕이기는 하지만 여러 장수들이 해체되고 삼군(三軍)을 동원시킬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종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묘사직이 중요합니다. 성명께서 유념하소서.
이번에 역마(驛馬)를 보내 노신(老臣)을 부른 것은 일신을 영화롭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쓰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간절하게 아뢰어도 전혀 들어주지 않아 끝내 한 가지 일도 시행되는 것을 볼 수가 없고 그로 하여금 서둘러 돌아가게 하였을 뿐이었으니, 역마로 부른 당초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언로(言路)가 이제부터 더욱 막힐 까 두렵습니다."
하고, 글의 끝에 아전들이 부당하게 횡렴(橫斂)하는 것을 막으며 규율을 바로 세우며 서양 물건을 금제(禁制)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 첨부하니, 비답하기를,
"정사를 보는 대궐을 짓는 것은 바로 천명을 맞이해 왕업을 지속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아마 내 뜻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여러 죄인들의 일에 대해서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킨 것도 극률(極律)이니, 어찌 법이 확립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밖에 여러 조항에 대해서는 응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송근수(宋近洙)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남종순(南鍾順)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이양선(異樣船)들이 모두 팔미도(八尾島) 밖으로 나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된 뒤로 부(府) 안의 백성들이 혹심한 약탈을 당하여 거의 놀란 짐승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놀란 물고기처럼 놀라고 있다.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 것을 이끌고 집 잃고 길가에서 헤매는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참혹한 정상이 나도 모르게 눈앞에 선하다. 그런데 나라의 군사가 산성에 들어가 점거하자 소와 군량을 바친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많았다. 그들도 모두 피난한 상황에 있고 또한 입에 풀칠할 식량마저 부족할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마련하여 후하게 돕는 것인가.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들던 나머지 진실로 너무나 가상하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백성들은 모두 요(堯) 순(舜) 시대의 백성처럼 훌륭한데 단지 위에 있는 사람이 잘 이끌지 못하여 위태로운 형편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몹시 유감스럽고 한탄스럽다. 이미 잘 보살펴 백성들을 안착하여 살 수 없게 하였고 또 튼튼히 지키고 엄하게 방어하지 못하여 일단 뜻밖의 사태가 있게 되어 마침내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리저리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들이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이번에 이렇게 많은 백성들이 의로운 마음을 내어 군량을 도와준 것은 대그릇에 밥을 담고 병에 마실 것을 담아 군사들을 맞이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위유사(慰諭使) 강로(姜㳣)로 하여금 이 하교를 가지고 일일이 강화도 백성들에게 분명히 유시하게 하라."
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이용래(李龍來) 등을 총융진(總戎鎭)에 넘겨주어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좌우포청(左右捕廳)에서 보고함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0월 14일 기해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스스로 재물(財物)을 마련해 가지고 군기(軍器)를 수리하였기 때문이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용천부(龍川府)에 귀양 보낸 죄인 태성운(太聖云)이 멀리 대진(大陣)에 나아가서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싸움에 따라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가 분발하여 감히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것이 속죄(贖罪)할만한 단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또 본래 죄도 중하지 않고 가벼우니 그가 자원하여 군사에 나간 것은 권장하는 의리로 볼 때 응당 참작하여 용서하는 방도를 있어야 합니다. 태성운을 정배(定配)지에서 특별히 풀어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5일 경자

전교하기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각처에 나가 싸우고 있는 장수들과 군사들이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서 고생하고 있으니 실로 불쌍하다. 그리고 적선(賊船)도 이미 앞바다에 나갔으니, 양화진(楊花鎭)에 친 진은 우선 계엄을 풀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서양 배가 먼 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급선무는 간사한 무리들을 다스려서 남김없이 없애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이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양사(兩司), 좌우변 포도청(左右邊捕盜廳)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와 사도(四都) 및 각 진영에서 간사한 무리들과 관계되는 자들을 모두 수색 체포하여 매달 월말에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20인 이상을 잡았을 경우에는 좋은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차송(差送)하며, 만약 허위로 채워서 보고하였거나 진실과 거짓이 뒤섞였거나 또 혹 혐의로 인한 악감을 품고 평민을 잘못 체포하였을 경우에는 해당 군교와 하례들에게는 바로 반좌율(反坐律)을 시행하며, 잘 신칙하지 않은 각 해당 당상(堂上官), 도신(道臣)과 및 토포사(討捕使)를 모두 엄히 논감(論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양 배의 상황을 이미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은 이후로 변경의 상황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 서로 통보하였습니다. 예전 경신년(1860)에는 서양 교인(敎人)들을 철저히 막는 일을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동무(東武)의 뜻에 따라 편지로 우리나라에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이 서양 오랑캐들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출몰하니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통영(統營)의 외양(外洋)에서 출몰하는 배들이 일본에 사단을 끼치는 일이 꼭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 방도에 있어서는 일에 앞서 통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요사이 겪은 일의 전말을 자세히 적어 동래에 있는 왜관(倭館)에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보내며 이어 동무에게 전달되게 함으로써 변방 방어를 튼튼히 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두터이 가지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임면호(任冕鎬)가 일본국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편안히 지낸다니 위안되고 안심된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와 귀국은 좋은 관계를 맺어온 지 300년 동안에 무릇 변방 방어와 관련한 정사나 변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알려주지 않은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그 방도를 내놓는 이유는 경신년(1860)에 귀국의 서계(書契)의 경우는 바로 옛 조약을 거듭 밝히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다.
서양의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이 멀리 겹겹이 가로놓인 넓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무역할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무력을 서로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해가 점점 더 참혹해지고 있다.
올봄에 있었던 사건에 관련된 남종삼(南鍾三)과 홍봉주(洪鳳周)라는 자들은 높은 관리로서 임금 가까이에 있는 반열에 있기도 하였고 대대로 관리 노릇을 한 후손들로서 사교(邪敎)를 전습하며 비적 무리들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서양인들을 끌어들여서 교주(敎主)로 받들어 모셨다. 이미 오래 전에 물들어 갈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간사한 자취가 수색 체포할 때에 발각되어 고약한 무리들이 다같이 법에 의하여 처단당하였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1척의 서양 배가 먼저 호서(湖西)의 해미현(海美縣) 앞바다에 정박하였고 다음에는 경기(京畿)의 강화부(江華府) 근처에 와서 정박해 있으면서 쉴새 없이 왔다갔다하며 무역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엄한 말로 굳게 거절하고 끝끝내 들어주지 않자 저들은 포기하고 물러갔었다.
또 이러한 때에 서양 배 1척이 서해로부터 평양부(平壤府) 양각도(羊角島)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해하고 가축들을 죽였다. 그래서 도신(道臣)이 화공(火攻) 전술을 써서 모두 무찔렀다.
8월 16일에 2척의 서양 배가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경강(京江)에 들어와 사흘 밤을 묵고 돌아갔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사정도 알 수 없었고 거동도 따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제멋대로 오가다가 9월 6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 30여 척이 또 경기 일대에 도착하여 혹 부평부(富平府) 앞바다에 정박하기도 하고 혹은 강화부의 갑곶진(甲串津)으로 곧바로 향하여 망루(望樓)를 파괴하고 공해(公廨)를 불태워 버리고 백성들을 살해하고 소와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사고(史庫)에 있는 책들을 배로 모두 약탈하여 실어갔다.
우리는 순무사(巡撫使) 이경하(李景夏)로 하여금 도성을 엄히 방어하게 하였고,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는 통진부(通津府)에, 좌선봉장(左先鋒將) 정지현(鄭志鉉)은 제물진(濟物鎭)에, 우선봉장(右先鋒將) 김선필(金善弼)은 부평부(富平府)에, 유격장(遊擊將) 한성근(韓聖根)은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유격장 양헌수(梁憲洙)는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유격장 이기조(李基祖)는 광성진(廣城鎭)에, 총융사(總戎使) 신관호(申觀浩)와 소모사(召募使) 이원희(李元熙)는 양화진(楊花津)에, 소모사 정규응(鄭圭應)은 서강(西江) 어귀에, 어영청 중군(御營廳中軍) 권용(權)과 경기 중군 백낙현(白樂賢)은 행주(幸州) 어귀에,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는 여현(礪峴) 어귀에, 초토사(招討使) 한응필(韓應弼)은 연안부(延安府)에, 방어사(防禦使) 유환(柳晥)은 파주목(坡州牧)에, 도호사(都護使) 신숙(申橚)은 장단부(長湍府)에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저들에게 격문을 보내 싸움을 청하고 약속한 날짜에 보니, 적들은 그 무리를 모두 모아서 포구에 집결해 있으면서 서로 맞붙어 싸움할 생각은 없이 우리 연해와 포구의 배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간간이 혹은 몰래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 여러 성을 습격하였는데 번번이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 의해 격퇴당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무기와 의장(儀狀)들을 수리하고 벼리기도 하고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또 삼로(三路)의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공격하게 하였는데 10월 12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들은 이어 즉시 무리를 거두어 외양(外洋)을 향해 물러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적의 침입을 받은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랫동안 태평스럽게 지내 군정(軍政)이 해이해지고 군사 방비가 허술해져 장구한 계책을 써서 놈들을 제압하여 하찮은 배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2, 3차 싸움에서 이기고 다소나마 적들을 섬멸하기는 했지만 진실로 무력을 크게 떨쳐 멀리에서 온 저들을 두렵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오랑캐들의 사정도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있었으므로 목전의 다급함을 늦추고 앞으로의 근심거리를 영원히 없앨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해서 알려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 동남쪽의 해변으로 말하자면 귀국의 여러 주(州)들의 해변과 서로 소와 말도 환히 변별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으며, 두 나라 경계에서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거의 들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여름과 가을에서부터 요사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돛단배들이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해 갔는데 그 배들은 운도(雲島)와 연도(烟島) 사이에서 출몰하고 있어 변경을 지키고 있는 관리들의 급보가 매일 오고 있으니, 저 오랑캐들이 장차 사단을 일으키려는 것인데 귀국에서 방비를 갖추고 변란에 대처하고 있는가? 모르겠거니와 귀국에서 이미 군사 방비를 갖추었으므로 저 오랑캐 놈들이 날뛰다 패배하였는가? 또 저들 쪽에서 방자하고 횡포하게 날뛰면서 몰래 기회를 노리며 이를 갈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침략할 틈을 엿보고 있는데도 귀국에서 혹 그 교묘하고 음흉한 정상을 알아차려 그 기세를 미리 꺾지 못한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몹시 걱정하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에 전말을 들어 써 보내니 위에서 쓴 사유를 동무에게 전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펴주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김병준(金炳駿)이 상소하여 서양 교인들을 철저히 다스릴 것에 대해 아뢰니,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렸다.

 

10월 16일 신축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치선(兪致善)이, ‘남양부(南陽府)의 서쪽 여제면(如堤面) 제부도(濟扶島)의 파수장(把守將)의 수본(手本)에, 「서양 배 7척이 이달 15일 신시(申時)에 서해쪽으로 물러갔는데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방금 경기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적선(敵船)이 이미 먼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이때에 각처에 있는 장수들과 군사들이 한 달 남짓 노숙하여 갑자기 안쓰러운 생각이 드니 모두 계엄을 풀라. 대군(大軍)이 진을 해체하고 돌아오는 날 순무대장(巡撫大將)이 강가에 나가 호궤(犒饋)한 다음 합진(合陣)하여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출정하였던 대진(大陣)의 군사들이 돌아오고 있다.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중도에서 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진(大陣)이 이미 돌아오고 있으니 이번 20일에 친림하여 호궤(犒饋)하고 상을 주어야 하겠다. 장소는 춘당대(春塘臺)에 마련하되 제반 거행은 한결같이 서총대(瑞葱臺)의 예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처음에 사도(四都)를 둔 것은 기보(畿輔)의 관방으로서 좌우에서 도성을 방어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강화(江華)의 경우는 삼남(三南)의 요충지에 있어서 서울로 가는 배들이 모두 이곳을 거치니, 소중함이 더욱더 각별하다.
이제부터는 통영(統營)의 외등단(外登壇)의 예에 따라 시행하며, 군수 물자를 마련하는 방도는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게 하라.
그리고 이밖에 삼도(三都)는 군사 제도가 근래에 매우 소홀하니, 원임 장신(原任將臣)을 간간이 차송(差送)하여 훈련시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으로 확실히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김학성(金學性)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서양 배가 이미 먼 바다로 나갔고 대진(大陣)은 돌아오고 있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에 대한 방비가 따라서 소홀해지는 것에 대해서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무영 중군(巡撫營中軍)을 시켜 향포수(鄕砲手) 500명을 정밀하게 뽑게 하여 각 영의 장교 2명씩이 통솔하여 우선 머물러 방어하게 하며, 음식을 주거나 거처하는 곳을 마련해 주는 데 대해 마음 쓰도록 해당 수신(守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7일 임인

사학 죄인(邪學罪人)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을 순무영(巡撫營)에 넘겨주어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는 포도청(捕盜廳)의 보고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0월 18일 계묘

전교하기를,
"서양 오랑캐들이 전후로 소란을 피우면서 매번 교역을 하자고 말하는데,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서양 물품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때문에 연석에서 아뢰고 연석에서 신칙하여 일체 금단한 것이다. 지금 금지하려고 하는 문제가 어느 때인들 급선무가 아니겠는가마는, 목전의 사세로 보면 더욱 엄히 막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변방의 신하들이 과연 이를 잘 받들어 시행하는지 모르겠다. 삼강(三江)을 수색해서 적발된 자가 있으면 의주부(義州府)에서 먼저 벤 뒤에 아뢰라. 이와 같이 신칙한 뒤에 만에 하나 어물거리며 눈감아 주고 수수방관한다면 의주 부윤(義州府尹)도 엄중한 추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말을 잘 만들어 분부(分付)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장렴(李章濂)과 위유사(慰諭使) 강로(姜㳣)의 장청(狀請)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여 약탈하여 온 성안의 사람들이 다 도망쳐 숨었는데 남문 수장(南門守將) 이춘일(李春日)은 칼을 빼 들고 문을 막고 앞장서서 방어하다가 마침내 적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강화부의 백성 김일후(金日厚)는 적이 성안에 가득 차자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 하여 약을 먹고 죽었으며, 노인석(魯仁石)과 조광보(曺光甫)는 총을 쏘아대며 성으로 접근하다 적에게 도리어 살해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응당 뜻을 보여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니, 유지(有旨)를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셨습니다. 이춘일에게 특별히 2품직을 추증하고, 김일후에게 특별히 3품직을 추증해주며 다같이 정표(旌表)하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노인석과 조광보에게는 다같이 급복(給復)을 시행하고 그들의 처자를 구휼하여 주도록 함으로써 풍속을 세우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강원도(江原道) 포수(砲手) 19명이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이동할 때에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으므로 본 순무영에서 체포하고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켰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10월 19일 갑진

비가 오고 우레가 쳤다.

 

10월 19일 갑진

전교하기를,
"보잘 것 없는 과인이 외람되게 큰 왕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는데, 지금 우레가 친 이변이 바로 거두고 감추어야 할 절기에 있으니 어질고 자애로운 하늘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적들은 방금 물러갔으나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 나의 허물이고 재화가 점점 부족해져서 백성들의 재력이 고갈된 것도 나의 허물이다. 탐관오리가 제거되지 않아 백성들의 산업이 모두 궤멸된 것이 나의 허물이며, 법령이 시행되지 않아 민정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 나의 허물이다. 이 가운데서 하나만 있어도 재앙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한데, 더구나 여러 가지 일이 번잡하여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마음이 온통 놀랍고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오늘부터 3일 간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여 스스로 책망하는 뜻을 부치려고 하니, 대소 신료들은 모두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연명계사(聯名啓辭)를  【도승지(都承旨) 윤병정(尹秉鼎), 좌승지(左承旨) 정기회(鄭基會), 우승지(右承旨) 신정희(申正熙), 좌부승지(左副承旨) 송희정(宋熙正),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원규(李源珪), 동부승지(同副承旨) 신도희(申道熙)이다.】 올려, 우레의 이변에 대해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하늘이 경고하니 몹시 놀랍고 두렵다. 얼마간 부연하여 진달하였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출정한 장수들과 군사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어 호궤(犒饋)한 다음 합진(合陣)하여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이다.】  올려, 우레가 친 이변과 관련하여 권면하고, 이어 물리쳐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우레가 친 이변은 어진 하늘이 간곡하게 경계를 내린 것이다. 지금 우레의 이변에 대해 진달한 것이 절실하고 간절하니 응당 가슴속에 잘 새겨두겠다. 재앙을 초래한 것은 허물이 과인에게 있으니 경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대사간(大司諫) 남종순(南鍾順), 사간(司諫) 김병주(金秉周), 헌납(獻納) 홍우창(洪祐昌), 정언(正言) 박홍수(朴弘壽)이다.】 올려, 우레의 이변과 관련하여 진면하고, 이어 세 죄인에게 형률을 추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진 하늘이 이처럼 간곡하게 경계를 보이므로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니 실로 과인에게 있었다. 진달한 여러 조항은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검교 부제학(檢校副提學) 이재원(李載元)·김병필(金炳弼)·정건조(鄭健朝)·김병시(金炳始)·이호준(李鎬俊)·조영하(趙寧夏), 부제학(副提學) 이재면(李載冕), 검교 전한(檢校典翰) 민승호(閔升鎬)·이명응(李明應)·이면광(李冕光)·이근수(李根秀), 전한(典翰) 김규홍(金奎弘), 응교(應敎) 신헌구(申獻求), 부응교(副應敎) 이창호(李昌鎬), 교리(校理) 정현유(鄭顯裕)·조만화(趙晩和), 부교리(副校理) 조정섭(趙定燮)·홍대종(洪大鍾), 수찬(修撰) 이유승(李裕承)·엄세영(嚴世永)이다.】 올려 우레의 이변과 관련하여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하늘에서 경고한 것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런 것이겠는가? 진달한 내용들은 응당 유념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20일 을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전투에 나갔던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고 이어 상을 베풀었다.
하교하기를,
"선전관(宣傳官)들은 각 장수들과 군사들이 있는 곳에 각각 나누어 나가서 위문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승지(承旨)는 자원하여 전투에 나갔던 사람들을 위문해 주어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전투에 나갈 때 자원하여 나간 보부(褓負)들의 공이 많다고 하니, 두목들에게 다같이 체가(帖加)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싸운 군사들 중에 자원하여 나간 자에게는 집을 하사하며, 향군의 포수(砲手)들은 다같이 각 해당 고을에서 잡역(雜役)을 면제해주게 하라. 자원하여 전투에 나간 반민(泮民)의 두목과 3명의 소임(所任)에게 다같이 체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강화도(江華島)에 서양 오랑캐들이 침입한 것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해사(廨舍)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조그마한 비축마저 모두 약탈당하여 관청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슬프고 처참한 것뿐이니, 한바탕 큰 액운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나 한 몸을 바친 군사들은 첫째도 나라를 위하여 죽었고 둘째도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이다. 오직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지 자기 몸은 생각할 줄 몰랐으니, 떳떳한 양심을 다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령들이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측은하니, 어떻게 위로해야 하겠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에게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같이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議政府)의 당상(堂上官), 순무사(巡撫使)를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달 남짓이나 진을 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오고갔는가?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 뒤에, 군졸들도 또한 병을 앓지는 않았는가?"
하니, 순무사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탈 없이 오갔으며, 군병들도 병 없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서양 배들은 돛을 돌려 퇴각했고 관군(官軍)도 방금 철수하여 위아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 때일수록 위태로운 때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비단 이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방어하는 대책을 힘을 다하여 강구하여야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병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잘 수리하고 마련하여 대비해 놓고 군사 대오를 단속하여 때가 닥쳐 군색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인(聖人)은 반드시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비용을 절약하지 않으면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들이게 되며, 무겁게 거두어들이면 백성들을 해치게 되고, 백성들을 해치게 되면 나라의 근본이 든든하지 못하게 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군영(軍營)에서 일상 쓰는 물품들에 대해 어찌 부족하게 될까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절실하니, 응당 명심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서양 배가 퇴각하자마자 마침 우레가 치는 이재가 뒤따라 나타났으니,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외적을 물리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안을 잘 닦는 것은 근본입니다. 안은 닦는 것의 근본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은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건대 병은 조금 나아졌다고 안심하는 데에서 덧나고 전쟁은 승리했다고 자만하는 데에서 버릇이 되니,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경계하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경계하고 반성하소서. 재앙을 돌려 복으로 만들고 위험을 편안하도록 전환시키는 것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삼사(三事)에 있은 지 지금까지 이미 몇 년이 되었습니다. 요즘 서양 적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신이 의정부(議政府)에서 일을 보기 시작한 초기부터인데 지금까지도 시종 그러합니다. 위에서는 수고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지고 있는데도 신은 위로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주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의정부에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의 말이나, 한 가지의 일도 도움을 준 것이 없습니다. 이것만도 벌써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속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적들이 물러간 뒤에 뚫어진 배를 수리하고 무기들을 정리하는 것은 신과 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그 허물이 보좌하는 정승에게 있습니다. 빨리 신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 사직하는 말은 너무 지나치다. 다시는 이 일을 가지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는 왕도의 배경(陪京)인데 약탈을 겪은 뒤에 남은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령(守令)에게 분부하여 안착하여 모여 살도록 잘 위문하는 데 관계되는 방도를 마음을 다하여 계획하여 조치하도록 하되, 편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낱낱이 장문(狀聞)하여 실제의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급선무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해당 수령에게 관문(關問)하여 좋은 쪽으로 계획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군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하며 무기들이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은 외적을 물리치기는 데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안을 닦는 요점은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인데, 또한 오직 전하가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가 안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신료들을 자주 만나 정사의 잘잘못을 토론한다면 하늘의 이치는 저절로 밝아지고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양의 좀도적들도 감히 다시는 그들의 흉악함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을 닦아 외적을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서양 배가 멀리 도망친 것은 실로 지금에 있어서는 다행이지만 적들의 실정은 예측할 수 없어서 후환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사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조금 늦출 수 없는 만큼, 방어를 엄격히 하고 군사들을 뽑으며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저축하여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사설(邪說)을 다스리는 방도는 그 근본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외적들이 침입해 올 경우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길 것이므로 더욱더 엄격히 신칙하여 수색하고 체포해야 합니다. 이어서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 그러나 사직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실로 이러한 때에 말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순무영(巡撫營)을 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군량을 도운 선비들과 백성들에 대하여 기록한 문건을 올렸다.
【유학(幼學) 이중윤(李重允)이 소 3척(隻), 이해조(李海祚)가 돈 1만 냥(兩), 이용하(李容夏)가 소 2척, 이석주(李錫柱)가 소 1척과 짚 2파(把), 민승진(閔升鎭)이 소 1척, 소임(所任) 탁성종(卓聖宗)이 땔나무 4태(駄) 3부(負)와 말먹이 콩 1태(駄)와 마초(馬草) 1태, 한량(閑良) 조인갑(趙仁甲)이 땔나무 300속(束), 유학(幼學) 민덕용(閔德容)이 썬담배 2두(斗)와 짚 20파(把)와 홍시 12첩(貼)과 곶감 1첩과 삶은 밤 1두(斗)와 소 1마리, 소임 김영업(金永業)이 땔나무 7태와 말먹이 콩 25속과 짚 14파, 고잠위(高潛位)가 땔나무 8태와 말먹이 콩 1태와 마초 1태와 남초(南草) 8파, 출신(出身) 박인영(朴麟英)이 백미(白米) 1석(石)과 소 2척과 짚 5파, 유학(幼學) 김사훈(金思薰)이 소 1마리, 정대주(丁大柱)가 말먹이 콩 3두와 짚 2파, 김정현(金定鉉)이 말먹이 콩 3두와 짚 5파, 심능태(沈能泰)가 소 5척과 짚 5파, 이지영(李枝榮)이 소 3척, 이상봉(李相鳳)이 소 1척, 장영규(張永奎)가 생밤 15두와 짚 5파, 장한운(張漢雲)이 쌀 3두와 장(醬) 1독과 땔나무 1태, 김순쇠(金順釗)가 짚 3파, 최흥상(崔興商)이 짚 3파, 김용대(金用大)가 짚 17파와 땔나무 5태와 썬 담배 3석과 콩 3속, 이한형(李漢衡)이 백미 2석과 소 1척, 한상혁(韓橡爀)이 말먹이 2석과 말먹이 콩 15속과 짚 10파, 김호복(金好福)이 땔나무 200속과 곡초(穀草) 100속과 푸른콩 70속, 백남승(白南升)이 소 2척, 백남항(白南恒)이 소 2척, 정중검(鄭重儉)이 관솔 3,000자루〔柄〕과 민어 10마리〔尾〕, 김윤칠(金允七)이 관솔 2,000자루, 이복현(李福賢)이 백하 젓〔白鰕醢〕 5옹(甕)과 토장(土醬) 1옹, 이승준(李承準)이 갑옷과 투구 1건(件), 홍종연(洪鍾淵)이 돈 10냥, 김용구(金龍九)와 김홍구(金鴻九)가 각각 쌀 20석씩, 김명구(金命九)가 쌀 5석, 노희호(盧羲鎬)가 돈 200냥, 정용혁(鄭龍爀)이 콩 5석, 김순주(金舜柱)가 돈 100냥, 이석범(李錫範)이 돈 100냥, 임봉장(林鳳章)이 소 2척, 이의상(李義祥)이 굴젓 3옹과 백하젓 반옹과 조기 3속(束)과 육장 2옹과 청주 10분(盆)과 삶은 고기 10근(斤)과 짚 10근, 현제승(玄濟昇)이 돈 500냥과 쌀 10석, 김기석(金基碩)이 쌀 1석, 이성선(李性善)이 소 5척, 현탁(玄鐸)이 돈 100냥, 김인성(金麟性)이 정육(正肉) 300근과 절편 2,400개(介)와 탕(湯) 3옹과 청주 30분, 하정일(河靖一)이 황소 2척, 종친부(宗親府)의 서리(書吏) 등이 황소 3척, 권두(權頭) 등이 소 1척, 사령(使令) 등이 소 2척, 정덕환(鄭德煥)이 백미 5석,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고직(庫直) 김도익(金道瀷)이 백미 10석, 의정부(議政府) 서리 등이 백미 10석과 황두(黃豆) 10석, 사령 등이 황두 10석, 안응환(安膺煥)이 소 2척, 장순규(張淳奎)가 백미 30석, 김진유(金鎭裕)가 소 10척, 이복현(李福賢)이 백미 20석, 권영두(權永斗)가 소 1척과 짚 6파, 신재학(申在學)이 소 4척과 간장(艮醬) 3분과 짚 50파, 봉성리(奉城里) 백성들이 흰 절편〔白餠〕 34기(器)와 소 1척과 장(醬) 70완(椀), 차윤행(車允行)이 돈 100냥, 김중효(金重孝)가 쌀 10석, 조인식(曺仁植)이 돈 100냥, 박계환(朴啓煥)이 돈 100냥, 천의현(千義賢)이 돈 300냥, 이석엽(李碩燁)이 돈 300냥, 이병제(李秉悌)가 돈 200냥, 이흡(李洽)이 소 1척과 침시(浸枾) 3접과 홍시 1접, 박명각(朴命珏)이 땔나무 820동(同), 전류리(顚流里) 백성들이 쌀 3석과 마초와 콩 4태, 등산리(登山里) 백성들이 말먹이 마른 짚 4석과 청절태(靑絶太)콩 2석, 이익수(李益秀)가 땔나무 1태와 짚 2파, 김홍윤(金弘潤)이 땔나무 300동, 서명동(西明洞) 백성들이 말먹이 푸른콩 161속과 땔나무 170속과 짚 5파, 김명손(金命孫)이 땔나무 3태, 염진옥(廉振玉)이 땔나무 248동, 이용한(李龍漢)이 쌀 1석과 소 1척, 이삼현(李參鉉)이 소 1척, 안기선(安起善)이 땔나무 1태, 유치종(兪致宗)이 땔나무 1태, 김판손(金判孫)이 땔나무 104동, 김재석(金才石)이 땔나무 84속, 한재두(韓在斗)가 소금 6석과 박 2개와 짚 3파, 심규지(沈奎之)가 땔나무 22동, 조한영(趙漢永)이 땔나무 30속, 양인영(梁仁榮)이 땔나무 1태, 박연쇠(朴連釗)가 땔나무 1태, 오응주(吳應周)가 땔나무 1태, 이재택(李在澤)이 소 1척, 최호대(崔虎大)가 소 1척, 이해두(李海斗)가 소 1척과 돼지 2구(口), 김학준(金學準)이 돈 200냥, 김완조(金完祖)가 돈 200냥 김우정(金禹鼎)이 돈 100냥, 유재소(劉在韶)가 쌀 5석, 김진한(金鎭漢)이 돈 100냥, 김응상(金應相)이 소금 5석, 홍장현(洪璋炫)이 소 1척과 절편 1,000개, 김귀성(金貴星)과 이예숭(李禮崇)이 각각 소 1척씩, 정헌교(鄭憲敎)가 쌀 5석, 김재수(金在洙)가 쌀 3석과 콩 2석, 천상호(千相鎬)가 돈 50냥, 사간원(司諫院) 서리 등이 쌀 5석, 문의설(文義說)이 쌀 10석, 호리(戶吏) 김두식(金斗植)이 쌀 5석, 최석우(崔錫祐)가 쌀 5석, 통진(通津)의 권봉헌(權鳳憲)이 술 5옹과 소 2척과 홍시 4접과 지게미와 쌀겨 4석, 조한영(趙漢永)이 재차 소 1척과 말먹이 콩 10속, 이상석(李相錫)과 이규영(李圭永)이 각각 소 1척씩, 민용식(閔龍植)이 땔나무 70속, 김상욱(金相郁)이 땔나무 70속, 이종헌(李宗憲)이 땔나무 70속, 양존리(陽存里) 백성들이 땔나무 180속과 마초 20속, 대파리(大坡里) 백성들이 땔나무 200속, 장한운(張漢雲)이 지게미와 쌀겨 6석과 땔나무 1태, 이길원(李吉遠)이 민어 12미와 조기 5속과 준치 2속 3미, 이기원(李紀遠)이 민어 12미와 조기 5속과 준치 2속 3미, 최광윤(崔光潤)이 땔나무 3태, 최우영(崔遇永) 침채(沈菜) 10통(桶)과 콩 3태, 김득연(金得淵)이 말먹이 콩 4속과 지게미와 쌀겨 3두, 이돌이(李乭伊)가 말먹이 콩 22속, 이상석(李相錫)이 소 1척과 짚 17파, 이규영(李圭永)이 소 1척, 사초리(沙草里) 백성들이 탁주 19분, 하은동(霞隱洞) 백성들이 탁주 24분, 민희복(閔羲復) 콩 2태, 황진원(黃進源)이 침시(沈枾) 1,000개와 굴젓 1분, 박한영(朴漢英) 쌀 10석, 백지연(白之延)이 쌀 3석과 토장 3분, 이응수(李膺秀)가 32명의 장수와 군사들의 군량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으며, 오전(五廛) 시민(市民)들이 돈 1,000냥, 염재진(廉在鎭)이 소 2척, 정재흔(鄭在昕)이 돈 100냥, 이준수(李俊壽)와 이정우(李鼎禹)가 돈 100냥, 강태현(姜泰鉉)이 쌀 5석, 이인석(李仁石)이 쌀 5석, 승정원(承政院) 서리들이 소 2척, 사령들이 소 2척, 선혜청(宣惠廳) 서리 오도열(吳道烈) 등이 쌀 20석과 황두 20석, 고지기〔庫直〕 고진대(高鎭垈) 등이 쌀 20석과 황두 20석, 사령 윤창엽(尹昌燁) 등이 쌀 10석과 황두 10석, 수진궁 장무(壽進宮掌務) 이승업(李承業)이 돈 200냥, 마서리동(麻西里洞) 백성들이 땔나무 59속과 푸른 콩 20속과 지게미와 쌀겨 2석, 절과리(折過里)에서 탁주 29동이, 권병두(權炳斗)가 말먹이 콩 1태, 권병헌(權秉憲)이 말먹이 콩 1태, 박치서(朴致西)가 말먹이 콩 1태, 박태삼(朴太三)이 말먹이 콩 1태, 이준영(李俊永)이 말먹이 콩 1부와 담배 4파, 민희달(閔羲達)과 임윤득(林允得)이 껍질 콩〔及太〕 10속과 마초 6속과 지게미와 쌀겨 1석, 당포동(唐浦洞) 백성들이 말먹이 콩 1석과 지게미와 쌀겨 3석과 땔나무 10태, 진계환(秦繼煥), 강화순(姜和淳), 차윤행(車允行)이 각각 돈 100냥씩, 손형수(孫瀅洙)가 소 2척과 민어 10미(尾), 이종철(李宗哲)이 간장 1옹과 백하젓 1분, 백낙선(白樂善)이 돈 100냥과 쌀 5석과 소 2척, 진계환(秦繼煥), 김경수(金景遂), 강화순(姜和淳)이 각각 돈 100냥씩, 박민호(朴敏浩)가 돈 100냥, 박대영(朴大永)이 돈 300냥, 백목전(白木廛) 시민(市民)이 돈 2,000냥, 유연철(劉淵哲)이 돈 100냥, 홍취원(洪就源)이 쌀 5석과 황두 2석, 규장각 사령(奎章閣使令)들이 소 1척, 의금부 나장(義禁府羅將)들이 황두 10석, 김득헌(金得憲)이 쌀 5석과 돈 100냥, 최치두(崔致斗)가 돈 100냥, 이승간(李承幹)이 소 10척, 이운상(李雲祥)이 소 4척, 이소영(李紹榮)이 북어(北魚) 20쾌(快)와 진장(眞醬) 1분 10완, 소기름으로 만든 초〔肉燭〕 500병(柄), 동을산리(冬乙山里)에서 탁주 11분, 천암회(千巖回)가 땔나무 700동, 심능예(沈能藝)가 침시 600개와 소금 12두, 이동성(李東成)이 쌀 2석과 소 1척, 윤무성(尹茂性)이 황두 10석, 송응준(宋應駿)이 황두 10석, 선혜청 서리(宣惠廳胥吏) 윤의석(尹義錫)이 황두 10석, 병조(兵曹) 서리 석찬영(石燦永)이 쌀 5석, 윤영삼(尹營參)이 소 1척과 당미(唐米) 1석과 짚 5파, 정계성(鄭繼聖)이 쌀 5석, 윤영호(尹營浩)가 소 1척과 좁쌀 1석과 짚 10파, 김인풍(金仁豐)이 돈 100냥, 전기홍(田基弘)이 돈 20냥, 온수동(溫水洞) 백성들이 소 1척과 짚 54파, 고계철(高啓哲)이 송아지 1마리, 양충환(梁忠煥)이 소 1마리와 짚 100근과 소기름으로 만든 초 2,000병과 배 200개, 김영효(金永孝)가 소 1척과 짚 20근, 이군옥(李群玉)이 조기 5속과 어란(魚卵) 5부(五部), 박효진(朴孝鎭)이 조기 2속과 우유(牛油) 1분, 유진여(劉振汝)가 가는 젓〔細醢〕 1분이, 강재일(姜在逸)이 소 1척과 탁주 1옹, 송아리(松牙里)에서 지게미와 쌀겨 10석과 콩 10두, 늑동리(勒洞里)에서 콩 2석과 지게미와 쌀겨 4석, 총융청(總戎廳)의 백남승(白南升)이 재차 소 3척, 이복현(李福賢)이 재차 백하젓 3옹, 어물전(魚物廛)의 시민(市民)이 민어 100미와 미역 100동, 전 수문장(守門將) 이제현(李濟鉉)이 쌀 30석과 소 2척, 전 오위장(五衛將) 박시전(朴時銓)과 유학(幼學) 권기주(權基周)가 쌀 100석을 바쳤다.】


【원본】 7책 3권 8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5면
【분류】외교-프랑스[法] / 재정-역(役) / 왕실-사급(賜給) / 군사-휼병(恤兵) / 정론-간쟁(諫諍) / 군사-전쟁(戰爭)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참(兵站)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서양 물품을 금지하는 일은 얼마 전에 경연에서 아뢰어 의주(義州)에 행회(行會)하였는데 어제 내린 전교(傳敎)는 또 다시 매우 엄격했으니 응당 마음에 새기고 명령을 잘 받드는 효과가 있도록 해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물품이 동래부(東萊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또한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금지시키는데 응당 차이가 없어야 하는 만큼 똑같이 해부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특별히 조사하고 살펴서 감히 전과 같이 서로 교역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하며, 만약 혹시라도 덮어둔 사실이 보고 되는 경우에는 해당 부사(府使)를 엄하게 논감(論勘)하겠다는 뜻을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1일 병오

이응하(李應夏)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서당보(徐堂輔)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정구(尹正求)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종서(洪鍾序)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0월 21일 병오

부호군(副護軍) 박규서(朴奎瑞)가 상소하여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공충 수사(公忠水使)가, ‘잠수군(潛水軍)으로 뽑아 올린 천산길(千山吉)이 중도에서 도주하여 체포하여 효수(梟首)해서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켰다.’라고 아뢰었다.

 

10월 22일 정미

정해륜(鄭海崙)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치선(兪致善)의 〖장계 등본을〗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㦳芝)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지난달 9일 서양 오랑캐가 쳐 들어와 약탈을 감행하며 남의 신주(新主)를 불태울 때에 당장(堂掌) 이동학(李東學)은 화가 성묘(聖廟)에 미칠까 염려하여 오성(五聖)의 위판(位版)을 여금산(如金山) 석실(石室) 안에 임시로 모셔두었습니다. 지금 환안(還安)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위안제(慰安祭)에 쓸 향과 축문을 속히 내려보내고, 이동학에게 낭관의 품계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4일 기유

동지사 세 사신 【정사(正使) 이풍익(李豐翼), 부사(副使) 이세기(李世器), 서장관(書狀官) 엄세영(嚴世永)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경하(李景夏)를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신관호(申觀浩)를 훈련 대장(訓練大將)으로, 신명순(申命淳)을 총융사(總戎使)로 삼았다.

 

10월 25일 경술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중관(中官) 한용묵(韓容默)이 시골에서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숙위(宿衛)에 용감하게 나갔으니, 뜻과 기개가 가상하다. 특별히 가자(加資)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서양 오랑캐들이 침입하였을 때에 통진(通津) 역시 그 피해를 받아 공화(公貨)를 약탈당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당한 것은 큰 액운이었다. 그런데도 40일 동안 대진(大陣)의 군사들을 도와준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갖은 고초를 겪은 실상이 눈에 선하여 한밤중에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자주 일어나곤 한다.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예에 따라 돌봐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영에 바치는 포(布) 가운데서 통진은 금년분 전량을 탕감해 주고, 김포(金浦), 양천(陽川), 고양(高陽), 시흥(始興)에 대해서는 3분의 1을 특별히 탕감해 주어서 조정에서 후하게 구휼해주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교전할 때에 참가한 장관(將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별군관(別軍官) 이기조(李基祖)는 방어사(防禦使)의 이력을 허용(許用)하고, 별군관 박용화(朴鏞和)·이현규(李鉉奎), 파총(把總) 이병숙(李秉淑), 초관(哨官) 김기명(金淇明), 향도관(鄕導官) 이기혁(李基爀)에게 다같이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였다. 절충(折衝) 이대흥(李大興), 별무사(別武士) 신도언(申道彦), 차재준(車載俊), 무사(武士) 허간(許侃)·김경후(金景厚)·김인화(金仁華)에게 다같이 상가(賞加)하고 오위장(五衛將)에 가설(加設)로 단부(單付)하였으며, 별장(別將) 신도혁(申道赫)·이해진(李海晉)·지홍관(池弘寬)·김성표(金聲豹)·최경선(崔慶善)·홍석두(洪錫斗)는 다같이 변장(邊將)으로 차송(差送)하였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이승간(李承幹), 배정로(裵定魯), 이중윤(李重允), 이만규(李晩奎), 윤흥대(尹興大), 이규한(李奎漢) , 권용성(權龍星) 등은 다같이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였다. 출전한 사졸 480인에게는 모두 무과 전시(武科殿試) 직부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체가(帖加)하고 겸사복(兼司僕)으로 승부(陞付)하였다.

 

10월 26일 신해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최우형(崔遇亨)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한정교(韓正敎)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포수영장(砲手領將) 오처렴(吳處濂)은 바로 신미년(1817)에 군공을 세운 오명회(吳命恢)의 손자입니다. 서양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싸움터로 달려가 공(公)을 위하여 사사로움을 잊었으니, 그 뜻과 기개가 가상합니다. 그가 충성과 의리는 〖조상에게서〗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죽은 위곡 첨사(委曲僉使) 오명회에게 한 품계를 높여주고 벼슬을 추증하여 죽은 다음에 권장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7일 임자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서상익(徐相翊)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천안(天安)과 석성(石城) 등 고을에서 화재당한 호(戶)들과 불에 타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10월 28일 계축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황주(黃州)의 철도(鐵島)에 새로 진(鎭)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변지(邊地) 자리로 만들며, 위라(位羅)와 동리(東里) 두 진은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도(道)에서 조사한 것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10월 29일 갑인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유진오(兪鎭五)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0월 30일 을묘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準折)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當十錢)이나 당오전(當五錢)을 쪼개어 당이전(當二錢)이나 당삼전(當三錢)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신이 화폐 문제에 대하여 방금 진달하였습니다만, 재물이란 백성들에게서 나와서 나라에 쓰이는 것이므로 절약하지 않으면 형편상 반드시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이른바 ‘쓰기를 절도 있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원칙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 성인들의 교훈을 따라 우선 대궐과 관청에서부터 절약하고 비용을 줄인다면,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 검소하게 지내는 덕은 더욱 밝아지고 백성들의 산업은 저절로 풍족해질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강화(江華)는 통영(統營)의 규례대로 외등단(外登壇)으로 시행했습니다. 절목은 별단(別單)으로 올려 계하(啓下) 받도록 하겠습니다. 유수(留守)는 진무사 겸 강화부유수 삼도수군통어사(鎭撫使兼江華府留守三道水軍統禦使)로 하비(下批)하고, 중군(中軍)은 아장(亞將)을 역임한 사람을 선택하여 차하(差下)하여 내려보낸다는 뜻을 정식(定式)으로 만들었습니다. 통영도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도수군통어사는 이미 진무영(鎭撫營)에 소속되었습니다. 교동 수사(喬桐水使)와 중군(中軍)은 모두 감하(減下)하고 그대로 방어영(防禦營)으로 만들어 부사(府使)로 차출(差出)하소서. 영종 첨사(永宗僉使)는 탄알만큼 작은 섬에 군민(軍民)이 쇠잔하여 방어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고 이미 그 실속이 없게 되었습니다. 변장과(邊將窠)로 고쳐서 진무영에서 자벽(自辟)하도록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용상(李容象)이 지난번 수해를 당했을 때에 자기의 녹봉(祿俸)을 내놓아 구휼하여 온 경내의 사람들이 그 덕에 살게 된 것을 이미 위유사(慰諭使)의 보고를 통하여 대략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포수(砲手)들을 징발할 때에도 물자와 행장들을 스스로 마련하여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훌륭한 공적에 대해서는 응당 포상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특별히 한 품계를 가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한 이시원(李是遠)에게 죽은 것을 측은하게 여기는 은전을 베푼 것은 참으로 전에 없이 융숭하였습니다만, 그의 뛰어난 절개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없어져서는 안 됩니다.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모임이 있을 때에 시호를 주어서 풍교를 세우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죽은 목사(牧使) 황준량(黃俊良)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훌륭한 제자로서 일찍이 도를 배웠고 실천도 독실하게 하였으며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고 회암(晦庵)의 책들을 간행하여 반포하였습니다. 영남의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높이 우러르고 있습니다. 품계를 뛰어 넘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하여 유학자를 높이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선비 신유(申愈)는 바로 효의공(孝義公) 신만(申曼)의 손자로서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스승의 칭찬과 사우(士友)들의 존경이 당대에 제일 높아서 그의 기풍과 품행을 울연히 사림(士林)들이 존경하여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응당 포상하여 드러내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품계를 뛰어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추증하여 덕을 숭상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호군(大護軍) 홍순목(洪淳穆)과 동지(同知) 신응조(申應朝)를 다같이 강관(講官)으로 차하(差下)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사고(史庫)에 있는 실록(實錄)을 도로 가져다 봉안한 다음 응당 봉심(奉審)하고 포쇄(曝曬)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날씨가 몹시 추우므로 내년 봄에 좋은 날을 받아서 거행하라는 뜻을 춘추관(春秋館)에 분부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 한 지역에 대해서는 서양 오랑캐의 난리를 겪은 지금 상황에서 환곡(還穀)을 규례대로 납부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니, 환곡의 3분의 1은 탕감해 주고 3분의 1은 내년 가을까지 정퇴(停退)하여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녕전(長寧殿) 위토(位土)에서 거둔 조세는 지금 귀속시킬 곳이 없습니다. 제사 때 쓸 비용으로 거둔 것 외에 또 다소나마 바친 조세는 다 진무영(鎭撫營)에 넘겨줄 것입니다. 그리고 오궁(五宮)과 내사(內司)와 삼영(三營)에서 현재 내주고 거두고 하는 곡식을 처음에 시행한 뜻은 바로 뜻밖의 사변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에 규례대로 환곡을 내라고 할 길이 실로 없습니다. 또한 혁파하고 본영에 부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의 초관(哨官) 40과(窠)는 본래 향군(鄕軍)을 거느리는 자인데, 정번(停番)한 뒤부터는 쓸모없는 벼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두 영은 정원 이외에 더 뽑은 집사(執事)와 별무사(別武士)가 매우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두 영의 초관(哨官) 각 10과는 비는 경우에도 보충해 넣지 말고 그대로 집사와 별무사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불의의 사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에 대해 아뢴 바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의 장신(將臣)들을 엄격히 신칙하여 매일 포수(砲手)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도록 하며, 그 기예를 살펴서 상벌을 준다면 저절로 날래고 용맹스러워져 설령 불의의 사변이 있더라도 대적하여 싸울 방도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은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문제이다. 장신(將臣)의 자리는 그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허다한 기예를 하나도 연습시키지 않고 있으니, 일이 소홀하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여러 장신들에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의 장계(狀啓)를 보니, ‘명천(明川)의 연진(囦津)에 표류해 온 외국인 2명과 선창진(船蒼津)에 표류해 온 외국인 3명에게 자세히 내막을 물어보았더니, 모두 개시(開市)했을 때에 무역을 하던 청나라 사람들로서 풍랑을 만나 표류해 온 자들이었습니다. 보호해 주고 먹여주고 있으니, 돌려보내는 절차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표류해 온 사람들을 육지에 내리게 하고 고을로 들여온 것이 비록 후하게 돌봐주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경솔한 행동임을 면할 수 없으니, 해당 부사(府使) 이낙희(李樂熙)의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임지(任地)에서 배에서 내리게 하고 저 사람들을 이끌어 고을 안으로 들어온 것은 변방의 정사로 헤아려 볼 때 매우 경솔한 행동입니다만, 먼 곳의 사람들을 후대해야 하는 의리로 볼 때 우선 구제해 주는 것이 마땅하니 해당 부사의 죄상은 용서하고, 저 사람들을 수로나 육로로 돌려보내는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며,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절차는 모두 착실하게 거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표류해 온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에 수로로 보낼 것인가 육로로 보낼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규례인데, 지금 이 장계는 아주 모호합니다. 해당 도신(道臣)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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