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고종실록11권, 고종11년 1874년 3월

싸라리리 2025. 1. 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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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계묘

진전(眞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를 행하였다. 강(講)에서는 유학(幼學) 황하흠(黃夏欽)·오광수(吳光洙)·김상익(金商翼), 시(詩)에서는 진사(進士) 김윤식(金允植)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전 지평(持平) 홍찬섭(洪贊燮)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대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가계(家系)가 잘못되어 벼슬길이 막혔다고 하면서 열성조(列聖朝)의 비교(批敎)를 나열하고 여러 이름 있는 신하들의 주의(奏議)를 쭉 열거해 놓았습니다. 대체로 그러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은 대단히 많으며 울분을 품은 지는 500년이나 되는데, 그 법을 가만히 보면 역대로 없었던 것이고 그 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하소연하면서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지금까지 불쌍히 여겨 내린 성지(聖旨)가 정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어느 정도 벼슬길을 열어준 조항이 빠짐없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봉행할 때 인습에 얽매이고 견제를 당해 벼슬길을 열어주자마자 곧 막아버리기 때문에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으로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그저 성세(聖世)에 화기(和氣)를 해치는 일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조정에서 믿음을 보여주는 도리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 온 나라가 경사를 축하하고 어진 정사를 베푸는 시기를 맞아 울분을 풀어주고 화기를 불러오는 정사가 있어야 하는 만큼, 일제히 열성조의 수교(受敎)와 수의(收議) 중에 조례(條例)에 따라 모두 복구하여 차의(差擬)함으로써, 이전처럼 벼슬길을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고 양전(兩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사과(副司果) 최석규(崔奭奎)가 올린 상소의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소본을 가져다 보니, 지난 기사년(1869)과 경오년(1870)에 괴원(槐院)의 문신 10여 인이 억울하게 비방을 당하여 결국 성균관(成均館)으로 강등 조치되었으며, 또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분관(分館)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또한 응당 괴원에 뽑혀야 할 사람이 성균관에서 배척당하고, 성균관에 뽑혀야 할 사람이 운각(芸閣)에서 배척을 당하였으니 특별히 억울함을 풀어주는 은전을 베풀어 승급(陞級)시키는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 이미 분관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나중에야 강등시켜서 갑자기 벼슬길을 막았으니,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말입니다. 몇 해 전에 10여 인이 강등된 것은 사실을 확인하고 벼슬길을 열어주는 정사가 아닐 듯하니, 상소의 내용에 따라 강등 조치된 사람들인 김붕래(金朋來) 등 16인을 종전대로 승급 조치하게 허락하고,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분관한 것이 억울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꺼번에 다 처리할 수 없는 만큼 다시 공의(公議)를 기다려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3일 을사

전 장령(掌令) 박기종(朴淇鍾)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저 재해(災害)를 다스리는 정사는 나라에서 항상 행하는 방도인데, 몇 해 전부터 재결(災結)에 대하여 조세(租稅)를 감하(減下)하는 조치가 전혀 없었습니다. 작년을 보더라도 영남(嶺南)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피해를 동시에 입었고, 호남(湖南) 우도(右道)는 대부분 큰 흉년이 들었으며, 양서(兩西)는 참혹하게 수해를 입었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은혜로운 윤음을 내려 칙유(勅諭)하시고 내탕전(內帑錢)을 풀어서 구휼하시는데, 재해 정사로 말하면 백지(白地)로 징수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찌 민심(民心)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살펴주소서.
대저 감영(監營)과 고을에 별포청(別砲廳)을 설치한 것은 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계책인 만큼, 그 요식(料食)을 베풀고자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공화(公貨) 중에서 구획(區劃)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녹봉(祿俸)을 덜어서 그들의 요식을 대주도록 규정을 세우는 것이 형편으로 보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민전(民田)을 강제로 빼앗아 어려움 없이 거기에 소속시킨단 말입니까?
신은 호남 사람입니다. 신이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하면, 지난해에 영광(靈光)·함평(咸平)·무안(務安) 등 고을에서 본 도 감영의 별포청에 빼앗긴 것이 30여 석(石)의 전결입니다. 신은 법의 원칙이 어떤지 잘 모르긴 하지만, 큰 역적의 처자(妻子)를 노륙(孥戮)하거나 적몰(籍沒)하는 것 외에 민전을 빼앗아서 관청에 소속시킨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사한 백성들이 전토(田土)를 가지고 무리하게 소송(訴訟)을 하는 것을 빼앗아서 별포청에 소속시키면, 별포청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좋으나 그것이 백성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른바 별포 별장(別砲別將) 백낙서(白樂瑞)라는 사람은 사인(私人) 김치경(金致景)으로 하여금 세 고을을 다니면서 지난해에 처음 빼앗은 전토에서 추가로 재작년의 도조(賭租)를 걷어 들이게 하였는데, 값에 맞추어 억지로 거둔 것이 수천 냥(兩)이나 됩니다. 세력을 빌어 감영의 관문(關文)을 내어 농사철의 빈궁한 백성을 다른 고을에 옮겨다 가두고 제멋대로 고문하고 위협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니, 불쌍한 백성들은 감영(監營)과 고을로 뛰어다니지만 송사할 길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집이 망하고 농사를 그만 둔 사람들이 100여 호(戶)나 됩니다. 그런데 열읍(列邑)에서 이런 분위기를 보고 본떠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 별포청을 설치한들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이것은 다 백낙서와 김치경이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이속을 채우려고 교활하게 수단을 쓴 데서 나온 것입니다. 백가와 김가 두 놈은 사람이 보잘것없다고 하여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빨리 해당 법률을 적용하여 남민(南民)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안(扶安) 격포진(格浦津)의 조운창(漕運倉) 문제를 가지고 말하면 해읍(該邑)의 민정(民情)을 이미 보고하였으니, 신이 다시 번독하게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혁파하게 하소서.
대저 호포(戶布)를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점에 대해서는 작년 겨울부터 한두 명의 대간(臺諫)이 이미 상세히 진술하였으니, 신이 구태여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호포 제도가 나오자 명분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어그러뜨리는 일들이 도처에서 있었으니 성명(聖明)께서는 살펴주소서.
대저 과거에서 시(詩)와 부(賦)를 가지고 인재를 뽑는 것은 사실 삼고(三古) 때의 좋은 제도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제도입니다. 이제 갑자기 그 옛 제도를 고칠 수는 없지만 폐단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대과(大科)나 소과(小科)에서 방목(榜目)에 든 사람들을 어전에 불러놓고 친림(親臨)하고 면대하여 시험을 보인다면, 성실한 선비가 그 속에서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것이 대부분 절실하고 적중한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별포청을 설치하고 민전을 빼앗는 것이 과연 이와 같다면 도신(道臣)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격포의 조운창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이미 보고 되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3월 4일 병오

유학(幼學) 황학주(黃學周) 등 398인이 상소를 올려, ‘빨리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다시 설치하도록 명을 내리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대의(大義)를 고집한 것은 황묘(皇廟)를 높이 모시자는 데 있었다. 묘우(廟宇)에 이제 이미 다시 제향(祭享)하고 있으니 의리가 이로부터 더욱 밝아졌다. 그러니 송시열의 밝은 영혼도 저승에서 감격하고 다행으로 여길 터인데 서원이 다시 설치되는가의 여부가 송시열의 의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3월 5일 정미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김보현(金輔鉉)이 남병영(南兵營)의 장계(狀啓)를 가져다가 대신(大臣)의 앞에다 놓으니, 하교하기를,
"이 종이는 무슨 공사(公事)인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이것은 남병영의 장계인데 이제 품처(稟處)해야 할 것입니다. 공사는 당상(堂上)이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고사(故事)입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옛 성인들이 백성을 기를 때 모든 사람을 입히고 먹여준 것은 아닙니다. 방도가 백성들의 항산(恒産)을 제정해 주어 위로는 부모를 잘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잘 기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예기(禮記)》에, ‘재용(財用)이 넉넉하기 때문에 온갖 뜻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넉넉하지 못하면 조세(租稅)를 견감(蠲減)하여 징수(徵收)하고 부역(賦役)을 공평하게 하며 재해를 구제하고 아랫사람들에게 후하게 하는 정사를 모두 실시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름 있는 신하들과 현명한 정승들이 임금에게 기대한 것은 오직 재용을 절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하여 우선 청전(淸錢)을 혁파했고 나중에는 막대한 재물을 획하(劃下)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고 삶을 넉넉히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위에서 덜어내어 아래에 보태주는 은택이 온 나라를 흠뻑 적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성인이 백성을 기르는 덕입니다만, 줄곧 탕진만 하여 제한된 수량으로 계속 공급하기가 곤란하면 은혜도 베풀 수 없게 되고 나라의 비용도 따라서 어렵게 될까 저어되니, 묵묵히 교화를 진행하여 반드시 절충하는 사이에서 남고 모자라는 것을 적절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비록 곳집이 차고 넘치는 때일지라도 한결같이 법과 제도를 잘 지켜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지금처럼 안팎의 비용이 고갈되고 나라에 대책이 막연한 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송(宋)나라의 신하 소철(蘇轍)의 말에, ‘이른바 재용을 넉넉히 한다는 것은 재물을 구해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재용을 해치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비용을 절약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진서(陳恕)가 삼사사(三司使)로 임명되었을 때 송 나라 임금이 중외(中外)의 전곡(錢穀)의 대수(大數)를 전부 보고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서는 여러 번 독촉을 받고도 아뢰지 않고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한창 나이인데 만약 곳집이 꽉 찼다는 것을 알면 사치한 마음이 생길까 두렵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우(大禹)의 근검(勤儉)한 덕으로써 공자(孔子)의 절용에 관한 교훈에 힘쓰소서.
이미 창고가 텅 비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각사(各司)에서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다소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 어떻게 사치한 마음이 혹시라도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재정을 맡은 신하 또한 그 대수를 반드시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니, 신이 지난번에 적어올린 급대 별단(給代別單)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는 곡식이 풍년이 들더라도 재화와 부세를 매일 지출할 때마다 오늘의 궁핍함을 생각하고, 절약하고 또 절약하면서 비용을 넉넉하게 하여 온 세상을 풍족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재용을 절약하는 것은 참으로 치세의 근본이다. 아뢴 바가 절실하니 마음속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소철의 말은 재용을 절약하는 뜻을 깊이 체득한 말입니다. 대개 한 가지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진서의 말은 천자의 나이가 한창 때라서 사치한 마음이 쉽게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심히 우려하였던 것입니다. 임금으로서 이것을 거울로 삼아 깊이 생각하고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곳집이 가득 차면 사치한 마음이 쉽게 생긴다는 것은 구실이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여기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습니다. 한(漢) 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자신이 직접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삶을 실천하여 나라의 재정이 넉넉해진 결과 쌀과 돈이 썩도록 남아도는 성대(盛代)를 이루었으나, 무제(武帝)가 뒤를 이어 군사를 전부 풀어서 전쟁을 일삼고 게다가 신선만 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쳤고 한 나라가 점점 쇠퇴해졌던 것입니다. 수(隋) 나라 문제(文帝)는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창고에 저축한 것이 풍족하였지만, 수 양제(隋煬帝)가 뒤를 이으면서 극도로 사치하고 방종하며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이것은 다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점들입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송(宋) 나라로 말하자면 진종(眞宗)이 봉선(封禪)한 것 또한 나이가 한창 때였고 나라에 재물이 넉넉한 결과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에게 설사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매번 절약하고 검박하게 살 것을 힘써 아뢴다면, 임금의 덕은 더욱 수양될 것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재물을 절약하는 방도는 검박함을 숭상하는 데 있습니다. 생산하는 사람이 많고 먹는 사람이 적으며 베와 무명옷을 입고 무늬 있는 비단을 쓰지 않으면, 물가(物價)는 자연히 평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단 나라의 비용이 넉넉해질 뿐 아니라 그 성과가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어찌 절약하고 검박하게 생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재현(金在顯)의 보고를 보니, ‘청전(淸錢)을 혁파한 뒤에 나라의 비용이 곤란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본영(本營)의 지출은 더욱 시급하게 되었습니다. 도내 각읍(各邑)에 저치미(儲置米) 2,060석(石)을 각 해당 고을의 대동 본색(大同本色)으로 영원히 획급(劃給)한 다음 집전(執錢)하여 공적인 비용에 쓰게 한 것은 정식(定式)으로 된 일입니다. 기사년(1869)에 선혜청(宣惠廳)에서 변통(變通)하여 대전(代錢)으로 나누어 주고, 각 고을의 본색(本色)은 바꾸어 받았습니다. 해청(該廳)에서는 특별히 옛 규례대로 본색으로 획하(劃下)하여 만일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크게 변통할 때를 당해서는 보태어 지출하고자 해도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 기내(畿內)의 민정(民情)을 보면 여러 부분의 공전(公錢)을 제대로 상납할 방도가 전혀 없어, 다만 한 해 몫만 부득이하게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정식한 것을 내려 보냈는데도 이런 논보(論報)가 올라왔으니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해당 도신을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내국(內局)에서 쓰는 삼(蔘)·용(茸)·사향(麝香)을 다시 종전대로 봉진(封進)하라는 뜻으로 연석에서 아뢰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전 남병사(南兵使) 구춘희(具春喜)의 장계를 보니, ‘본영에서 봉진한 것 중에서 녹용(鹿茸) 1대(對)와 사향 5부(部)는 원래 후창군(厚昌郡)에서 바친 것인데, 해당 군(郡)이 이미 관서(關西)에 소속되었으니 다른 고을을 이정(移定)하여 수효를 채워 봉진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내국에 바치는 것을 종전대로 회복한 이상 1대나 1부라도 감히 낮추거나 높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후창군이 이미 다른 도에 속한 만큼 이제 봉진하는 고을을 별도로 정한다면 새로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그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을 위하는 전하의 뜻을 체현하여 특별히 견감(蠲減)해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당약재계(唐藥材契)는 모두 복구하였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아직 모두 복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세균(金世均)이 아뢰기를,
"항류전(恒留錢)을 호조에서 분담하여 받는 몫이 4,800냥으로, 이미 본조(本曹)에서 즉시 도로 내주었습니다."
하니,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제인(朴齊寅)  【약원 제조(藥院提調)이다.】 이 아뢰기를,
"항류전은 호조에서 이미 바로 내주었으나 사역원(司譯院)의 혈삼(穴蔘) 200근(斤)에 대한 것은 미처 이획(移劃)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약방(藥房)에서 분부하여 내주도록 하라."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혈삼에 대한 것을 획급하는 것은 마땅히 화매(和賣)하여 값을 받아 비용으로 보태야 합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혈삼에 대해 획급하는 것은 구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빨리 잘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송금(松禁)은 국정(國政)의 하나입니다. 배를 만들거나 기둥이나 들보로 쓰는 데 소나무를 재료로 쓰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요즈음에는 심고 가꾼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이 날로 심하여 산에는 씻은 듯이 나무가 없어졌으니 이것은 다 법령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우선 함부로 찍는 폐단을 금지하며 또한 빈 땅에 옮겨다 심고 기르며, 제도(諸島)나 봉산(封山)에는 들어가 살거나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각 군문(軍門)에 분부하여 감히 태만하는 일이 없게 하며, 일체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소나무를 기르는 것이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 와서 이 정도로 심하게 되었다. 도성 안을 놓고 보더라도 사산(四山)에 소나무를 길러 울창하였기 때문에 그 전에는 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몇 그루인가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어졌다. 이것은 요 몇 해 사이에 있은 일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신은 북산(北山) 아래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 전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았습니다. 창덕궁(昌德宮) 뒷기슭에서부터 응봉(鷹峯)까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지금은 벌거숭이 산 아닌 곳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신이 지난날 헌관(獻官)으로 임명되어 태묘(太廟)에 들어갔는데 나무가 몹시 드물어 전날에 본 바와 아주 달랐습니다. 이런 것은 다만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도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사이사이에 나무를 보식(補植)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태묘에 나무 심는 일은 어디서 거행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영(各營)에서 담당하는 바인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체 나무를 심으라는 뜻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형옥(刑獄)을 관대하게 하는 것은 임금이 백성을 구휼하는 큰 정사입니다. 당(唐) 나라 제도에 죄를 주는 데 대한 문건은 여러 곳을 거쳐서 전하여 보내지만, 사면(赦免)하는 데 대한 문건은 하루에 500리(里)를 갔습니다. 죄수를 신중하게 심의하는 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선유(先儒)들은 당 나라의 좋은 운수가 길어진 것이 사실 이에 기인된다고 하였습니다.
정종(正宗) 경술년(1790)에 죄인을 심리(審理)하는 정사를 행하여 목숨을 보존하게 된 사람이 200인(人)에 가까웠으니, 나이가 70이 지난 사람은 《대명률(大明律)》의 ‘80이 된 사람은 범죄 문건을 작성하지 않는다.’라고 한 조항을 적용하여 그들을 풀어주었으므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젖어들었습니다. 지난번에 죄인을 특별히 용서한다는 전교(傳敎)가 일단 내리자 만백성이 춤추며 기뻐하였고 얼마 안 되어 온 나라에 전하여지는 것이, 하루에 500리를 가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어진 정사를 베푸는 것은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에도 부합됩니다.
각도(各道)의 옥(獄)에 갇힌 죄수에 대해서 이제 하교에 따라 차례로 장문(狀聞)함으로써 처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 가운데서 양양(襄陽)의 죄인 이계순(李啓淳)만은 조관(朝官)으로서 옥에 갇힌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옥안(獄案)을 가져다 보니, 범장(犯葬)한 죄를 다스린 데에 지나지 않았으나, 묘지기가 겁에 질려 독약을 먹은 증거가 명백하게 나타나 의심할 나위도 없고 등문(登聞)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품처(稟處)하지 않았으니, 비단 중론(衆論)이 그의 억울함을 말할 뿐 아니라 화기(和氣)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삼가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니 오래된 죄수로서 나이가 70이상 된 사람은 구별하여 장문하고 품처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 이런 큰 경사 때에는 감등(減等)하여 정배(定配)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옥사의 사체(事體)는 매우 중대한 것이니, 연석(筵席)에 나온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한 후 율문(律文)을 상고하여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당초의 옥안(獄案)은 이미 자기가 직접 범한 것도 아닌데 미결(未決)로 오랫동안 갇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이도 70이 넘었으니, 율문을 상고하여 감등하는 것이 인후(仁厚)한 정사에 부합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율문을 상고하여 참작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아문(衙門)과 각 군문(軍門)에 상납하는 정비(情費)를 마련하는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무술년(1898)에 절목(節目)을 간행하여 확고부동한 규정으로 삼았으나, 최근에는 간사함과 거짓이 점점 늘어나서 경외(京外)의 하속(下屬)들이 서로 결탁하여 암암리에 주고받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서 필경에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야 말 형편입니다. 일제히 무술년의 정식(定式)을 따르고 감히 어기지 말게 해야 합니다. 만일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면 발견되는 대로 직무를 맡은 사람을 형배(刑配)시켜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잘 살피지 못한 죄는 그것대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내용으로 경외의 각 아문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외읍(外邑)의 관리들이 포흠(逋欠)한 것과 백성들의 재산을 거두어들인 것에 대해 말하자면 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 일정한 율례(律例)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재임(在任) 중에 사고를 만난 사람들에 대해 구처하는 일을 가지고 연석에서 아뢴 바가 있으나, 낙사(落仕)한 지 너무 오래된 사람에 대해서는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여 재임 중에 사고를 만난 사람과 낙사한 지 너무 오래된 사람들 가운데 수령을 지내지 못했거나 연한(年限)이 차지 못한 사람은, 간간이 번갈아 차임하여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양전(兩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서류(庶類)들을 청관(淸官)이 되는 벼슬길에 소통시키도록 이미 연석에서 아뢰어 예전대로 복구하였으니, 실로 훌륭하고 덕스러운 일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지위와 문벌을 보고 승문원(承文院)에 승급 조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관서(關西) 사람으로 괴원(槐院)에서 강등 조치된 사람은 이미 원래의 분관(分館)으로 시행하였는데 또한 성균관에서 운각(芸閣)으로 강등된 사람도 있고, 새로 분관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또한 승급되거나 강등된 사람이 있으니, 모두 초기(草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성균관에서 강등 조치된 사람이 이미 괴원으로 승급되었으니, 운각에서 강등 조치된 사람이 또 성균관으로 승급되는 것은 그 상황이 같은 것이다. 모두 초기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유지의(襦紙衣) 문제는 이미 분부하였으니 또한 호조에서 관문(關文)을 띄우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김세균(金世均)이 아뢰기를,
"유지의는 원래 묘당에서 구관(句管)하고 있는 만큼 의정부(議政府)에서 관문을 발송해서 감결(甘結)을 보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의 형편이 매우 군색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청(管稅廳)의 돈으로 예전에는 유지의의 대전(代錢)에 속하는 것은 탁지(度支)에서 올려다가 잘 헤아려 차하〔上下〕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공용(公用)에 부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탁지의 일이 참으로 근심스러우니 반드시 관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수입은 제한되어 있고 지출은 절도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에서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이 10만 냥이나 줄어들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직도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지출할 수 있는가?"
하였다. 김세균이 아뢰기를,
"본조에 해마다 들어오는 돈이 54만 냥(兩)에 지나지 않는데 올해부터 6만 냥이 더 들어왔습니다. 지금 줄어든 바가 10만 냥이니 일 년에 들어와야 할 수입은 대수(大數)로 잡아도 50만 냥에 지나지 않는데 한해의 지출은 40만 냥이나 됩니다. 그 밖에 불시에 차하하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별례방(別例房)에서 쓰는 많은 돈 중에서 비록 기와 한 장이나 서까래 하나에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 정해진 규례 이외의 돈이어서 한 해에 소용되는 것을 미리 가늠할 수 없으니 참으로 걱정됩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불시에 차하하는 것은 미리 가늠할 수 없는 만큼 늘상 들어오는 수량을 가지고 어떻게 기준을 삼겠습니까? 탁지는 나라 비용의 근본을 담당한 곳으로서, 옮겨오고 옮겨감에 있어서 탁지를 거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삼도(三道)에서 환곡(還穀)을 작전(作錢)하는 것이 어느 때 가서야 다 바쳐지게 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4, 5월까지는 끌고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서(關西)의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기꺼이 따르면서 와서 바칩니다."
하였다. 김세균이 아뢰기를,
"청남(淸南) 지방의 돈은 차례로 올라오고 영남(嶺南) 지방의 돈 또한 차례로 와서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 급대(給代)하는 것은 그 완급(緩急)에 따라 차례로 나누어 보내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면 수입을 계산해서 지출할 수 있다."
하였다. 금위대장(禁衛大將) 조영하(趙寧夏)가 아뢰기를,
"본영(本營) 향군(鄕軍)의 총수(總數)는 125초(哨)입니다. 무진년(1868)에 새로 경중초(京中哨) 1초(哨)를 모집한 뒤에는 향군 25초를 제번(除番)하고 해마다 신포(身布)를 거두어 상납하게 하고 경중초에 공급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정축년(1877)에는 경비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향군(鄕軍) 21초 96명(名)을 감번(減番)하고 또한 해마다 수포(收布)하여 상납하게 하였고, 그 나머지 78초 28명은 상번(上番)하기도 하고 정번(停番)하기도 하였는데, 정번할 때에는 상번한 연한(年限)에 따라서 4년에 1차례씩 수포하여 상납하게 하니 정군(正軍)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번하였거나 감번한 군사들은 해마다 수포하고 정번한 군사에게서는 4년에 1차례 수포하는데, 정번한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정리하지 못하여 일이 몹시 뒤죽박죽되었습니다. 그리고 본 영의 군수(軍需)가 넉넉하지 못한 데다가 또 정군 4초를 설치하였으니 향군은 다시 상번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번군에게서 수포하는 것은 제번하였거나 감번한 군사들의 규례대로 해마다 수포하면 신역이 균등해진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새로 모집한 4초의 군사에 대한 공급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석(筵席)에 나온 대신과 병조판서 및 여러 장신(將臣)에게 하문(下問)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과 병판, 장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장신이 아뢴 것은 양쪽에 아주 편리합니다. 이것을 이미 이런 정식(定式)으로 하였다면 어영청(御營廳)도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이하 여러 의견들은 다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어영청도 일체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외읍(外邑)에서 매 결(結)당 미 1석을 거두어 이배(吏輩)에게 주는데, 이것은 그 전에는 없던 규례이고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 되고 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문제는 사실 고을마다 다른데 전하의 하교가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감복됩니다. 이것은 포량미(砲糧米)와는 다릅니다. 백성들이 바친 것이 어찌 이 수량에만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묘당에서 영원히 혁파하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팔도에 행회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자 가운데 육상궁(毓祥宮), 선희궁(宣喜宮)의 본가(本家)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는 모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이야말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나온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수는 이러한 내용으로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가(崔哥) 성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장임(將任)이었고, 이가(李哥) 성을 가진 이도 또한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선천(宣薦)이 되지 못하였으니 사실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상민(常民)이든 천민(賤民)이든 오히려 불차탁용(不次擢用)하는데, 하물며 두 궁(宮)의 사친(私親)의 본가 사람이야 더 말할 게 있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되었으니, 일체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일체로 다시 추천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다시 추천해야 할 사람을 합하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합하면 200여 인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다시 추천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세 성(姓)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추천하고, 그 나머지는 적합한 사람에게 시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신이 아뢸 것이 있습니다. 요즘 탕제(湯劑)를 매번 대내(大內)에서 지어 올리는데, 비록 편의를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사체(事體)는 그렇지 않으며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부디 참작하시어 전부 옛 법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전에는 약방(藥房)의 탕제를 복용하였고 내전(內殿)에도 또한 약방에서 지어 올렸는데 최근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우의정이 아뢴 것은 매우 지당합니다. 탕제를 약방에서 지어 올리지 않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우리 조정에서 나라의 규정을 세운 것은 공명정대하니 매사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들이 이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탕제를 드시는 것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체이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요사이 과연 몸을 조섭하고 보양하는 탕제를 복용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5일마다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재원(李載元)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사손(祀孫) 중에서 휘릉 참봉(徽陵參奉)을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조원식(趙元植)을 하비(下批)하였다.

 

3월 6일 무신

충청도(忠淸道)의 유생(儒生)과 유학(幼學) 이고익(李皐翼) 등 184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어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신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대개 황묘(皇廟)를 설치한 것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 의하여 의기(義起)되었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세운 것도 일체로 제사를 올리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황묘만 복구하고 서원(書院)을 복구하지 않으면 사당(祠堂)을 가까이하는 의리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빨리 신들의 요청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며칠 전에 지방에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하유(下諭)하였는데 또 이렇게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3월 7일 기유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가서 전배(展拜)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에 있는 사창(私倉)의 환곡(還穀)은 올해에 특별히 전부 나누어 주고 모곡(耗穀)을 받아서 경비에 보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호조(戶曹)의 형편은 이미 전하께서 환히 알고 계시니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환곡을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은 나누어 주는 것이 본래 정당한 원칙이나, 사창의 곡식은 원래 환곡과는 다른 만큼 이렇게 변통하여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동궐(東闕)을 수개(修改)하자면 나라의 비용이 더욱 군색하게 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호조의 경비가 가장 지출하기 어려우니 이 몫을 넉넉하게 호조에 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급대(給代)하는 몫에 만약 쓰고 여유가 있으면 응당 모두 탁지(度支)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지고 행차 길에서 아뢰는 것이 매우 미안합니다만, 백성들의 사정이 몹시 급하고 빨리 관문(關文)을 띄워야 하겠기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남전(南殿)의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3월 8일 경술

정범조(鄭範朝)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3월 9일 신해

전교하기를,
"과거(科擧)의 폐단의 문란함이 근래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주시관(主試官)이 마음을 다해 집행하지 않고 법을 무시하여 사사로움을 따르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비록 응시자를 들어서 말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훗날 임금을 섬길 사람들인데 발신(發身)하는 처음에 임금을 속이고 공부에는 힘쓰지 않으면서 먼저 청탁(請託)을 도모하고 있다. 막중한 나라의 시험을 가지고 주시관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은혜를 파는 편법으로 쓰고 응시자들은 계책을 써서 이익을 다투는 마당으로 삼아, 매번 과거를 한 번 치르고 나면 해괴한 소문이 들린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런데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다만 이번 시취(試取)가 어떠한가를 보고 마땅히 특별한 처분이 있을 것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이 하교를 가지고 다시 글을 만들어 시험을 관장하는 도신(道臣)들과 북평사(北評事)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경시관(京試官)들을 계판(啓板) 앞에 불러놓고 각별히 타이르도록 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매 식년(式年)마다 성적(成籍)을 한 뒤 오부(五部)의 장적(帳籍)을 강도(江都)에 보관하는 건(件)은 으레 다음해 봄에 신의 부서의 낭청(郎廳)이 강도로 가지고 가서 구 장적은 포쇄(曝曬)하고 새 장적과 함께 보관해둡니다. 계유년(1873) 장적을 본부의 낭청을 파견하여 보관과 포쇄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0일 임자

경기(京畿)의 유생(儒生)과 유학(幼學) 오규선(吳奎善) 등 871명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만동묘(萬東廟) 아래에는 일찍이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었으니, 바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제사(祭祀)하던 곳입니다. 그동안 묘(廟)가 철거됨으로 인하여 서원(書院)도 따라서 폐지(廢止)되었지만 지금 이미 황묘(皇廟)를 다시 건립하였으니 의리상 이 서원도 함께 복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근자에 유학 황학주(黃學周) 등이 올린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린 것을 보니, ‘서원을 다시 세울지의 여부가 의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하늘같은 성상의 분부에 대해 어찌 다시 시끄럽게 굴겠습니까마는, 생각하건대 이 화양서원만은 대의(大義)에 관계되고 중요함이 각별하므로 이에 감히 우러러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화양서원을 다시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어 대의를 빛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의 비답을 보지 못하여 이러는가?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대해 하교(下敎)한 바가 있었다. 요즘 번갈아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상소하는 것들이 허시근실(許施謹悉)에 과연 모두 적당한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비지(批旨)가 내리자마자 봉장(封章)이 때마침 이르니, 이것은 필시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의리와 일의 원칙이 어떻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선비의 풍습이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는 만약 서원(書院)을 복원하라는 등의 상소이 있으면 비록 허시근실이 쓰여 있다 하더라도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다시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이면영(李冕榮)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3월 11일 계축

전교하기를,
"이어(移御)한 뒤 반궁(泮宮)이 매우 가까워졌다. 그리고 원량(元良)이 태어난 기쁨은 실로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시하여 덕을 쌓은 결과에서 생긴 경사이다. 이번 15일에 응당 문묘(文廟)에 가서 전배(展拜)할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문묘에 전배한 뒤에 참반(參班) 유생(儒生)의 응제(應製)를 시취(試取)할 것이다."
하였다.

 

전 장령(掌令) 유영도(柳永燾)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날에 과거제도를 만들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일 때 문필(文筆)이 없는 사람은 입장할 수 없었으니, 당대 명유(名儒)들이 전부 방중(榜中)에 들어갔습니다. 대과(大科)·소과(小科)의 폐단이 근래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비록 갑자기 고칠 수는 없더라도 한결같이 정묘조(正廟朝)의 옛 규정을 준수하여 문(門)에 들어가는 것과 대면하고 시험보이는 것을 반드시 엄하고 정밀하게 하소서. 그러면 거의 인재를 선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은 여항(閭巷)에서 늙어 향촌에 사는 권세가(權勢家)들이 산림을 널리 차지하여 다른 사람이 들어가 묘를 쓰면 금지하지 않아야 하는 곳도 금지하여 가난하고 약한 백성들은 묘소를 쓸 곳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폐단입니다. 도성의 저자에서 놀고먹는 백성들이 함부로 술과 도박을 하다가 파산하여 유랑(流浪)하는 지경에 이르니, 이것이 두 번째 폐단입니다. 백성들의 풍속(風俗)이 순후하지 못하여 청탁이 몹시 심하니, 이것이 세 번째 폐단입니다. 무릇 이 세 가지 폐단을 일체 금지하면 그것이 백성들을 교화(敎化)하고 풍속을 순화하는 정사(政事)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대단히 옳다."
하였다.

 

3월 13일 을묘

전교하기를,
"듣건대, 유생(儒生)들이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있다고 한다. 일전에 하교를 내렸는데도 줄곧 이와 같이 하니, 이 무슨 도리인가? 승정원(承政院)에서 각별히 효유(曉諭)하여 곧바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헌용(鄭憲容)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3월 15일 정사

문묘(文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춘당대(春塘臺)에 환어(還御)하여 참반 유생(參班儒生)의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홍종운(洪鍾運)·박두양(朴斗陽)·홍순형(洪淳馨)에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시취(試取)할 때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마침 경사스러운 때를 만나 이런 성대한 거조가 있었으니, 반열(班列)에 참석한 많은 선비들이 모두 매우 기뻐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 열성조(列聖朝)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할 때에는 식월(式月)이나 한가한 날에 이런 예(禮)를 설행하였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진실로 열성조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던 훌륭한 덕입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공자(孔子)를 존중하고 문(文)을 숭상하던 정사는, 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집안의 과거 급제가 마침 올해 있으니 매우 희귀한 일이다. 직부(直赴)한 박두양(朴斗陽)에게 사악(賜樂)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직부한 홍순형(洪淳馨)에게 사악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6일 무오

백낙정(白樂貞)을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상소하여 정승직을 사임(辭任)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3월 19일 신유

송병관(宋秉觀)과 정희(鄭㵙)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정재진(鄭在晉)과 박인수(朴寅壽)를 부교리(副校理)로, 임태오(任泰五)와 강탁(姜鐸)을 수찬(修撰)으로, 이휘림(李彙林)과 조성학(趙性鶴)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모두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이승수(李升洙)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태운(申泰運)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3월 20일 임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신이 여러 번 하교(下敎)를 받고 외람되게 글을 올려 엄한 형벌을 기다렸는데 도리어 총애를 받는 계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다시 일을 번독(煩瀆)하게 하면 이것은 거듭 은총을 요구하는 것으로 신하로서 심한 죄이니, 참으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은 항상 나이가 많다고 하는데 아직도 수십 년은 정승으로 일할 수 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늙기는 하였지만 어찌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의리를 모르겠습니까? 조정을 떠나 있든 남아 있든 충성을 바치는 데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떠나 있든 남아 있든 과연 차이가 없겠지만, 시임 정승(時任政丞)은 더욱 다른 점이 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옛날의 대신은 대부분이 동료 정승들과 수고로운 일을 나누었습니다. 정묘조(正廟祖)에 홍낙성(洪樂性)은 영의정이었고 서명선(徐命善)은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묘당(廟堂)의 업무는 좌의정이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드문 일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에도 명령을 받고 대신하여 품처(稟處)하였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연한 일이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고 상신(故相臣)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이었을 때 신의 선조(先祖)인 문충공(文忠公)이 좌의정이었습니다. 영의정이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체직을 청하였지만 윤허 받지 못하자, 좌의정이 아뢰기를, ‘영의정이 늙고 병들었는데 만약 체직(遞職)을 얻게 되면 병이 차도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묘당의 업무는 신이 담당하겠으니 영의정을 체차하시어 몸조리를 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대신들도 이렇게 한 때가 있었으니, 어찌 미담(美談)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나라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혐의는 피하지 아니한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옛날의 대신들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영의정의 선조 문충공이 바로 이렇게 우러러 간청했던 일이 있었으니, 그가 나라를 위하여 업무를 담당하는 노고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영의정은 아직 늙고 병들지 않았으며 정력도 남보다 왕성한데 이렇게 노고를 나누자는 말을 하니, 문충공의 그 당시의 일과 비교해 볼 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적이 섭섭합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우의정의 말이 훌륭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우의정의 말은 바로 옛날 사람들이 부인하던 의리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의정의 정력은 비록 30년 후라도 이 묘당의 업무를 담당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경이 어찌 맡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을 모르니 더욱 섭섭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렇게 하교하시니 더욱 억울합니다."
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김보현(金輔鉉)이 만동묘(萬東廟)의 도식 첩자(圖式帖子)를 가져다 대신의 앞에 놓았다. 하교하기를,
"이것은 무슨 첩자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만동묘의 도식입니다. 이제 품처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임금의 마음은 백관(百官)들을 비추어 알고 만기(萬機)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거울에 비유하면 한 점의 티끌도 끼지 않은 후라야 그 비춤이 온전할 수 있으니, 이것은 임금에게 안일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활쏘기를 즐기거나 음악과 여색을 좋아함이 없으며, 잠자리도 편치 못한 채 백성들의 일에 애를 태우십니다. 자그마한 것도 환히 꿰뚫어보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저절로 비쳐지는데 어찌 의식적으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경사로 인하여 경연(經筵)을 열 겨를이 없었는데, 신들도 기뻐 축하하며 춤추는 가운데 미처 우러러 권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사이 단비가 때에 맞게 내리고 백성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참으로 우리 전하께 우러러 기대하는 것은 만물이 봄볕을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이치를 궁구한다면 책에서 체득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대궐의 온역(溫繹) 공부가 어떠한지 모르나 날마다 하는 강연을 중지한 지가 이제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는 묶어서 높은 시렁에 올려놓고 강관(講官)은 산반(散班)에 두었습니다. 충고하거나 수양하도록 간하는 말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질 것을 생각하는 의리에 결함이 됩니다. 신이 감히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로 크나큰 은덕에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적임자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채택하는 것만 못하고 그 말을 채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쓰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자상한 은혜를 베풀며 앞뒤로 신을 만류한 것이 다만 그 관직에 갖추어 놓으려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말을 받아들이려는 것이었습니까? 만약 신의 말을 쓸 만하다고 여기신다면 속히 강대(講對)하겠다는 명을 내리소서. 마음을 깨끗이 하여 강론에 열성을 보이고 스스로 광명한 경지에 이르게 되기를 천만 번 빌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가 이와 같이 간절하고 진지하니,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마땅히 빨리 경연을 열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니 신은 진실로 물러가기 어렵습니다."
하니, 또 아뢰기를,
"옛날에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문치(文治)를 하면서도 반드시 무비(武備)를 갖추었습니다. 이는 뜻밖의 사태를 대비한 것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에도 위태로워질 것을 잊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근래에는 무비를 정비하여 연해와 변경의 돈후(墩堠)가 서로 잇닿아 있고 감영(監營)과 고을의 무기가 정비되었으며, 수함(水艦)과 화포에 이르러서도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수 집안의 자제들은 무예에 익숙하지 못하고 진법(陣法)을 전혀 몰라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백보칠찰(百步七札)이 어떤 물건인지도 모릅니다. 채찍을 잡고 말을 모는 일은 전적으로 마부에게 의지하고 깍지와 팔찌를 끼고 활 당기는 것을 도리어 수치로 여깁니다. 재간과 식견이 있는 자가 있더라도 글 쓰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시나 읊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유명무실합니다. 설령 돈후가 있더라도 지켜낼 사람이 없고 설령 무기가 있더라도 다룰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만약 변경에 경보라도 있게 될 경우,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적진에 임해 적과 맞서게 한다면 장차 시를 지어서 적을 물리치겠습니까? 나라를 지켜내고 외적을 막아낼 적임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길러낼 방도가 없어서 만약의 사태를 미리 대비함에 소홀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습니다.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군령을 세우는 데에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만한 책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무사(武事)는 전적으로 이 책에 근거하였으니, 응당 날마다 그 방략(方略)을 강론(講論)하고 때때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서 훗날 나라를 지켜낼 장수의 재목으로 삼아야 진실로 위급한 고비를 지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서울에 있는 군영과 각 도에 신칙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옛 법식대로 각종 기예(技藝)를 익혀 기필코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무비를 연습하는 것은 과연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이것이 어찌 장신(將臣)과 도수(道帥)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옛 법식을 거듭 밝혀 기필코 실제적인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고 연습하는 대로 따라 특별히 수용하여 장려하는 방도로 삼아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사어(射御)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들이 모두 마땅히 익혀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사어는 육예(六藝)에 포함되어 있으니, 문신인들 어찌 익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하교를 받들어 만동묘를 중건하는 일은 옛 제도대로 속히 거행하도록 해도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지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성이호(成彛鎬)가 보고한 바를 보니, 청주 목사(淸州牧使) 조병로(趙秉老)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말하기를, ‘목재·기와·철물이 모두 시급한데, 마련할 물력을 돈 1만 냥에 한하여 지금 즉시 획하(劃下)하여 큰 공사를 준공하도록 해 주소서. 묘우(廟宇)의 칸수는 참작하여 마련해서 도본(圖本)을 작성해서 올려 보내니,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묘(皇廟)의 영건(營建)은 사체(事體)가 중대한 만큼 물력은 마땅히 공곡(公穀)에서 회감(會減)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호서(湖西)의 곡부(穀簿)를 보니, 다른 도에 비하여 더욱 부족한 상황이라서 사실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호조(戶曹)의 상납전(上納錢) 가운데에서 우선 5,000냥을 가져다 쓰고 부족한 몫은 다시 등문(登聞)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도식의 칸수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전하께서 보시고 재결하소서. 그러므로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물력은 아뢴 대로 하라. 묘우의 칸 수를 참작하여 마련하는 것은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만동묘 도식 첩자를 보고서 하교하기를,
"도식이 3본(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새로운 규모와 옛날 규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호위 별장(扈衛別將)이 보고한 바를 보니, ‘본영에는 원래 저축한 베와 무명이 없어서 매년 군막(軍幕)과 군복(軍服)을 다시 마련할 수 없으니, 모양조(某樣條)에서 백목(白木) 4동(同)을 격년으로 지급해 주고 마포(麻布) 1동을 매년 지급해 주도록 영원히 규례로 정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 영을 설치한 것이 비록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지방은 참으로 창피한 것이 많습니다. 보고한 대로 병조(兵曹)에 따로 비치한 것에서 그 수량만큼 떼어 주도록 분부하고 그것을 장부에 등재하여 연례로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병조에 따로 비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상정(徐相鼎)이 아뢰기를,
"매년 말에 목(木)과 포(布)는 각각 10동, 돈은 5,000냥씩 따로 비치하고 있으나 지금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목 70동, 포 82동이고, 전은 청전(淸錢)을 혁파한 후로 아직 저축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훈련대장(訓鍊大將)이 자세히 알 것입니다."
하였다.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일정하지 않게 지급하는 것은 해마다 다릅니다. 적게 쓸 때에는 남기도 하고 많이 쓸 때에는 부족하기도 합니다. 갑자년(1864) 이전에는 매번 군색한 것을 걱정하였는데, 갑자년 이후에는 필요 없는 원역(員役)을 감원하고 비용도 따라서 절약하여 해마다 남는 것이 이전에 비하여 적지 않습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도총부(都總府)의 폐단을 바로잡을 일로 삼가 하교를 받았습니다. 본부는 개국 초기에는 군무를 주관하던 곳으로서 송(宋) 나라의 전전 도지휘(殿前都指揮)의 임무를 본뜬 것이었습니다. 오위(五衛)가 혁파된 뒤로 그저 그 이름만 남아 있어서 한가한 부서가 되어, 시위(侍衛)하는 이외에는 오직 계속 입직(入直)만 할 뿐이어서 몹시 조잔(凋殘)해졌습니다. 일체의 비용을 제공받을 길이 없어 전하의 귀에 들어가 이처럼 물으시는 데 이르게 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만만 번 흠송하게 됩니다. 해마다 지출하는 재물을 갑자기 마련하기는 어려우니, 선혜청(宣惠廳)에 따로 비치하고 있는 중에서 1,500냥을 연례적으로 떼어 보내어 절반이나마 보태어 쓰는 밑천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도총부는 본래 삼군부(三軍府)인데 요즘 한가한 부서가 되었다. 폐단을 바로잡는 일을 정말 잘해야 한다. 형편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하교가 있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총관(總管)은 본래 장병(將兵)을 거느리는 직임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군(大君)이나 왕자(王子)로서 이 직임을 겸임한 사람이 있었으며 대신도 겸임했던 것 같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도총부에는 표기(標旗)가 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표기 안은 약방(藥房)이 수행하고 표기 밖은 백관이 줄을 서서 안팎을 구별합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표기는 뒤에 있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북쪽을 진압하는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바탕에 검은 테두리를 한 것이 그 형상입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현무기(玄武旗) 외에 또 둑기(纛旗)가 있어서 위로 열수(列宿)에 상응하는데 그 색이 검으니 이것도 현무를 닮은 것입니다. 병서(兵書)에, ‘대장이 멈추면 동쪽에 있고 행군하면 서쪽에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나라 《병학지남(兵學指南)》은 바로 《기효신서》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둑기는 열무(閱武)할 때와 시사(試射)할 때 보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서북(西北) 유지의(褕紙衣)를 복구할 일로 지난번 처분을 삼가 받들어 이미 서울과 지방에 행회하였습니다. 소용될 실제 수량을 헤아려보니 북도에 보내는 몫에서 줄일 수 있는 몫을 줄일 것이 13동 38필(疋) 남짓입니다. 올해부터 선혜청에 떼어 두었다가 매년 의정부(議政府)에서 특별히 비치하는 데 첨부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수정(修正)할 때 검서관(檢書官) 등이 수고하였다고 한다. 겸 검서관(兼檢書官) 가운데에서 6품 벼슬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빈 자리가 나면 그 자리에 벼슬을 줌으로써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겸 검서관은 수고에 따라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기응(趙基應)이 아뢰기를,
"한 사람은 그 사이에 이미 구분하여 처리하였습니다. 삼가 차례로 구분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듣건대, 진무영(鎭撫營)의 군제(軍制)를 좌부(左部)와 우부(右部)로 나누고 부에 각 두 사(司)를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경기 군영(京畿軍營)의 제도입니다."
하니,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심영(沁營)의 군제에는 객호(客戶)로 유입된 자들이 역시 대오에 많이 편성되었는데, 본토의 주민으로 원래 정성된 자들이 많으니, 주객(主客)의 형세가 되어 서로 마음이 잘 맞지 않습니다. 이번에 부사(部司)의 제도를 가지고 단속하려고 하지만 갑자기 바로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사들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것은 군사가 없는 것과 같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오직 규정을 세워 단속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3,300명의 군졸들을 만약 착실하게 훈련시키면 금위영(禁衛營)이나 어영청(御營廳)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3,000명의 병마(兵馬)가 한 곳에 집결할 곳으로는 심영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별군직 선전관(別軍職宣傳官)이 적간(摘奸)하고 돌아와 보고한 것을 듣건대, 그곳 군병들이 대부분 완강하게 거부한다고 하니, 어찌 쓸 수 있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처의 사람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니, 훈련하여 화합을 어떻게 하도록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규모가 짜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경기 군영만 못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은 300년이 되지만 아직 규모가 짜이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심영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맞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째서 그런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영호(營號)를 아직 내지 못하고 있으니,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러면 세 영이 다 같은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서울의 각 영은 설치된 지 오래되었고 짜임새도 숙련되어 새로 설치된 영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금위영과 어영청은 세입(歲入)과 군병의 수효가 별로 차이가 없는데 훈련 도감은 두 영에 비하여 백배나 되며 훈련 방법도 자못 더 낫습니다만 아직도 도감으로 불리므로 영호를 정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찍이《통사(通史)》를 보니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다 달랐다. 남북의 군병은 풍토에 따라 익히고 숭상하는 것이 다르므로 군제도 다른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용도는 각각 다릅니다. 대적할 때 전적으로 보병을 쓰고 기병은 후미가 전적으로 돌격할 때에만 씁니다. 산야(山野)의 병력도 용도가 각각 다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협곡에 몰아넣으면 이기지만 좁은 데에서 자란 사람들은 넓은 곳으로 내몰면 패합니다. 그것은 기예(技藝)와 숙련(熟練)에 다 장기(長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병과 보병도 현격히 구별된다. 빨리 가는 데에는 보병이 낫고 돌격하는 데에는 기병이 낫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의주부(義州府)와 동래부(東萊府)의 사정을 들으니 사실 걱정되는 것이 많습니다. 관세청(管稅廳)에서 포삼세(包蔘稅)로 경상비용을 보충하는 것이 거의 100만 냥인데 마련할 방법이 없는 것은 장사꾼들이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동래는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없지만 걱정되는 것은 대단히 많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래는 요즘 과연 어떤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부임지(赴任地)에 도착하였을 뿐, 아직 자세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주어야 할 물품 중에 손상된 것이 많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관(倭館)에는 일본 상인들이 많이 와 있지만 왜관을 지키는 일본인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 상인들이 과연 많이 오는가? 왜관을 지키는 일본인이 장사하는 일본인과 다름이 있는가? 훈도(訓導)는 어떠한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왜관을 지키는 일본인과 장사하는 일본인은 다릅니다. 훈도에 대해서는 동래 부사가 내려갈 때 연석(筵席)에서 분부하는 것을 신도 들었는데 아직까지 죄를 청하는 장계(狀啓)가 없으니, 나타난 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송(差送)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니 우선 개차(改差)하였다가 뒷날에 드러나는 죄과가 있으면 처벌한들 어찌 어려운 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후임은 사역원(司譯院)에서 뽑아야 할 것인데 왜학(倭學)을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차송하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공론(公論)을 모아서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여 차송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동묘(萬東廟) 도식의 제3본은 새로운 제도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본 도의 도신(道臣)이 제도를 강구하여 그림을 그려서 올린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도식을 보니, 새 제도는 옛 제도와 다름없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 중 진덕문(進德門)이라는 칭호는 바꾸는 것이 좋겠다. 진덕(進德)이란 본래 서원(書院)의 진수(進修)의 뜻을 취한 것인데, 지금 묘우를 다시 세운다면 문 이름이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대보단(大報壇)의 열천문(冽泉門)의 칭호와 같이 하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 도식을 보니 진덕문이 한쪽 모퉁이에 있고 정면 지대에 있지 않은 것은 지세(地勢)에 구애받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진덕이라는 칭호는 본래 서원의 문인 듯한데 이제 만약 정면으로 옮겨 지으면 묘(廟)의 외대문(外大門)이 되니, ‘만동묘’라는 석 자는 정묘조(正廟祖)의 어필(御筆)로 본래 어느 문에 걸려 있었는지 신은 알지 못합니다만 이번에 이 편액을 외대문에 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외삼문(外三門)을 옮겨지어서 외대문으로 삼고 2층 문루(門樓)는 그만두고 일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대문(大門)의 제도에 의거하여 짓는다면 존경하는 뜻에 있어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보단의 조종문(朝宗門)은 종묘사직의 문과 같이 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면 존경하는 뜻에 있어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동묘의 현판 글씨는 과연 지나치게 크다. 일찍이 황단(皇壇)에 전배할 때 받들어 보았는데, 혹시 탑본(搨本)이 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현판이 올라올 때 신이 수원 유수(水原留守)로 있으면서 거행하였는데, 제도가 대단히 컸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만동묘의 편액을 옛날에는 어느 문에 걸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그 전에 봉심하지 못하여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편액을 지난번 황단에 옮길 때 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로서 거행하였는데 길이와 너비가 대단히 컸습니다. 만동묘 앞에 순전히 편액을 걸기 위하여 따로 문 하나를 만들었는데 서쪽 교외의 영은문(迎恩門)과 같이 하여 걸었다고 들은 듯합니다. 내문(內門)·중문(中門)·외문(外門) 세 문 가운데 어느 문에다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등연(登筵)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 만약 일찍이 봉심한 사람이 있으면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세균(金世均)이 아뢰기를,
"신이 40년 전에 잠시 봉심하였었는데, 지금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하지만 현판은 묘우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조 판서의 말이 이와 같으니 필경 각 전각(殿閣)의 현판과 같이 걸었을 것 같다. 이번에 새로 세우는 문의 이름을 지어서 내려야 하는데, 어찌 이르고 늦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묘우는 10칸으로 하라. 두 황위(皇位)를 어떻게 5칸에 봉안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 제도가 존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듯합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그 도식을 보니 예경(禮經)의 궁실 제도와 부합됩니다. 대체로 고례(古禮)에 정침(正寢)은 한가운데 실(室)을 만들고 좌우에 방(房)을 만들며, 또 좌우에 협실(夾室)을 만드는데, 앞에 있는 것은 전당(前堂)이라고 부르고 그 좌우를 동서(東序)와 서서(西序)라고 불렀습니다. 처음 묘우를 세울 때 반드시예경에 근거하여 집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협실은 반드시 종묘와 좌우 협실의 제도와 같이 해야 한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묘 안에 설치한 위(位)에는 오직 해와 달을 그린 병풍만 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해와 달은 벽 위에다 그렸다고 합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황위를 봉안한 곳이 실내인 듯하나 일찍이 듣기에 위판(位版)은 아니고 다만 자그마한 판자를 제사 지낼 때 내다가 지방(紙榜)을 써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뒤 지방을 불사르고 그 판자는 도로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보단도 지방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 우의정도 일찍이 서사(書寫)한 적이 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친제(親祭)하실 때 서사를 거행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묘우에는 응당 수복(守僕)들이 수호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니, 간가(間架)를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식이 진실로 매우 자세하게 되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제3본은 옛것에 근거하여 오늘날을 참작한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해당 도신에게 관문을 발송할 때 연석에서 말한 내용으로 행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마땅히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무영(鎭撫營)에서 장계(狀啓)로 청한 일은 본 영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처리하도록 하고 경기 감영에서 처리해야 할 것은 조치해서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기 감영의 문 가운데 어느 영문(營門)의 규제(規制)가 모양을 이루었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금위영의 규제가 제일 낫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처음에 도감(都監)은 호조(戶曹)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삼수량(三手量)의 제도는 지금의 강화 포량(江華砲糧)과 비슷한데 군총(軍總)들이 먹는 것은 진실로 후하지 못하다는 탄식은 없다."
하였다.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수미(三手米)와 무명·베·돈을 다 호조에서 봉상하여 훈련 도감에서 소용되는 비용을 대었던 것은 실상 호조 판서가 또한 훈련 도감 제조를 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수들과 군사들의 지방(支放: 봉급)은 근근히 메꾸고 있지만 그 밖의 비용은 늘 넉넉하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삼수량의 세입은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김세균이 아뢰기를,
"삼수량으로 받아들이는 쌀은 3만 수천여 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돈과 무명으로 봉상되는 것을 참고하여 계산하더라도 훈련 도감의 접제(接濟)는 만약 삼수량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진실로 너무 부족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무영에서 떼어 보내는 것이 12만 냥에 가까운데 그 가운데 10여만 냥은 관세청(管稅廳)의 삼세전(蔘稅錢)을 옮겨간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심영뿐만 아니라 가져가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양향청(糧餉廳)에서 봉상하는 것은 얼마인가?"
하였다. 김세균이 아뢰기를,
"양향청의 토지는 대부분 몰수할 물건인데 최근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 거의 다 돌려주었기 때문에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기치단(旗幟緞) 등은 일찍이 운현궁(雲峴宮)에서 내려보낸 것을 썼습니다. 전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병국(金炳國)이 비용을 절약하여 조처를 해서 둔토(屯土)를 만든 것이 적지 않습니다. 신이 둔토를 만든 것은 옛날에 저축한 것을 합하면 8,000냥이 되지만 지금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예년의 봉상은 만여 냥에 불과하고 곡식은 700여 석에 불과하며 무명은 6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곡식은 비록 겨우 대고 있지만 돈과 무명은 태반이 모자라기 때문에 매번 호조의 돈과 무명을 옮겨다 쓰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양향청의 회계가 들어온 것을 보니, 대단히 부족하여 단지 일개 부속 부서였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기치는 다 준비하였으나 도감과 호조의 부속 부서였기 때문에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를 신과 호조 판서가 겸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용진(龍津) 이하 세 진을 지키기 위하여 포대를 새로 세웠고 병제를 부(部)로 나누고 민병(民兵)을 성정군(城丁軍)으로 하는 것은 모두 옛 제도를 답습하여 적절히 변통하겠습니다. 교동(喬桐)과 통진(通津)에 병력을 더 보충하여 방비하는 것은 응당 강구해야 하겠는데, 판관(判官)을 수성 장수(守城將帥)로 하비(下批)하고 중군(中軍)이 하방(夏防)하는 것의 편의 여부는 창설하는 제도와 관계되는 만큼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를 새로 세우는 것은 적정을 감시하는 데에 중요하고 군졸을 부로 나누는 것은 대오(隊伍)를 편성하는 법이며 민병을 성정군으로 하는 것은 보갑제도(保甲制度)입니다. 옛날을 상고하고 오늘날을 참작해서 좋은 쪽으로 변통하였으니, 반드시 앞날을 고려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판관을 수성 장수로 하비하는 것은 원용할 만한 전례가 많으니 윤허를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중군이 하방하고 교동과 통진에 군사를 보충하여 방어하는 것도 타산이 있을 듯하니,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1일 계해

전교하기를,
"이번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의 시관(試官)은 참판(參判)으로 의망(擬望)하여 들이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하교한 바가 있었다. 대체로 과거 폐단의 원인은 첫째는 시관이 공평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응시하는 선비들이 염치가 없어서이다. 공평하지 못한 마음은 임금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고, 염치가 없는 버릇은 부형(父兄)이 단속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문란하고 해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심지어는 공공연히 뇌물이 성행하여 앞 다투어 청탁을 함으로써 당당한 나라의 과거가 거간꾼들의 마당이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아! 이것이 어찌 조종조(祖宗朝)에서 과거제도를 만들어 선비를 선발하던 뜻이겠는가? 오늘날 신하 노릇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옛날에 청백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조상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마음에 두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번의 생원 진사 초시(生員進士初試)가 다만 하루를 남겨두고 있는데, 필경 시취(試取)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특별히 신칙한 뒤에도 보통 때와 같이 여기면서 받들어 행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에 관계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들은 사람의 도리와 신하의 분의로 요구할 수 없으니, 왕부(王府)의 법에는 자연히 해당되는 형전이 있을 것이다. 비록 응시하는 선비를 놓고 말하더라도 만약 청탁하다가 발각되는 자가 있으면 응당 그 가장(家長)을 논죄할 것이니, 묘당(廟堂)에서는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의 시관(試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일소 시관(一所試官)은 심순택(沈舜澤)·이면영(李冕榮)·윤조영(尹祖榮)이고, 이소 시관(二所試官)은 서신보(徐臣輔)·이건하(李乾夏)·오인영(吳麟泳)이다.】  시험에 대하여 칙유(飭諭)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관할하는 도류안(徒流案) 중에서 연좌(緣坐)되어 재령군(載寧郡)의 종이 된 죄인 춘갑(春甲) 등 27명을 모두 석방하는 일로 내린 명을 속히 중지시키는 일로 인하여 승정원(承政院)에서 세 번 계사(啓辭)를 올리고, 삼사(三司)에서 세 번의 연명 차자(聯名箚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연명 차자를 올렸으나, 모두 다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황해도(黃海道)의 지방(支放)을 환곡(還穀)에서 가져다 쓴 것은 사창(社倉)의 모곡(耗穀)을 쓰고 대전(代錢)으로 옮겨다 채우도록 허락하였다.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로 인한 것이다.

 

3월 22일 갑자

격포(格浦) 조창(漕倉)을 혁파하고 세봉(稅捧)은 각 해당 고을에서 운반하라고 명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조사하여 아뢰었기 때문이다.

 

고성군(高城郡)의 소호(燒戶)와 화재를 당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3월 24일 병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과장(科場)에 대한 신칙이 얼마나 엄격하였는데, 감시(監試) 일소(一所)의 종장(終場)에서 불량한 유생(儒生)들이 소란을 일으켰으니, 이 소문을 듣고 만만 번 놀랐습니다. 주동한 유생을 형조(刑曹)로 하여금 잡아다 가두게 하고 법에 따라 엄하게 처리하도록 하소서. 비록 시관(試官)으로 말하더라도 제대로 신칙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과거가 끝난 뒤 모두 파직의 견책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선비들의 버릇이 있단 말인가? 형조로 하여금 각별히 잡아다 조사하여 조율(照律)하도록 하고, 시관도 응당 처분을 내려야 하지만 나라의 시험이 특별히 중하니 우선은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5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김병덕(金炳德)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임명하였다.

 

3월 26일 무진

전교하기를,
"일소(一所) 과장(科場)의 일을 가지고 며칠 전에 묘당(廟堂)에서 시관(試官)을 논죄하였는데, 사실 원칙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라의 과거가 특별히 중하여 우선은 죄명을 진 채 거행하게 하였다. 패악한 무리들이 까닭 없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이미 몹시 놀라운 일이라서 이로 인하여 또 시관까지 죄를 준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 방목(榜目)을 이미 내었으니, 일소 시관을 견책하여 파직시키자는 요청은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영에서 관할하는 오른쪽 연해 각진(各鎭)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비용으로 쓸 돈으로 3만 냥에 한하여 지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무기 등의 물품도 지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의 설치를 시작하는 것은 긴급한 일로서 해당 장수가 오늘날에 이르러 옮겨다 쌓는 데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일 것이니, 본 영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비용에 있어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실로 손쓸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포세(包稅)의 원획(元劃) 중 1만 냥을 이미 실어 보냈으니, 우선 이것을 배정하여 쓰고, 나머지 비용은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해서 기일에 맞추어 모두 수송하도록 하며, 무기는 신의 부(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30일 임신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는 정건조(鄭健朝), 부사(副使)는 홍원식(洪遠植), 서장관(書狀官)은 이호익(李鎬翼)이다.】


【원본】 15책 11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5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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