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계축
전교하기를,
"올해의 이 달은 바로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복위하신 지 회갑이 되는 달이다. 옛날을 추념하니 슬픔은 한층 더한데, 지금 나라의 경사를 맞은 기회에 더욱 인정과 예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번 12일 명릉(明陵)에 대신을 보내어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난 갑술년(1814)에 장무공(莊武公) 신여철(申汝哲)이 중요한 책임을 맡고 나라를 보위한 충절은 실로 조야(朝野)의 안위(安危)에 대한 기대에서였다. 올해가 갑술년이니,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그의 사판(祠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윤육(尹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4월 3일 을묘
전교하기를,
"지난해 승학시(陞學試)와 공도회시(公都會試)에 입격한 사람은 이번의 감시(監試)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여 경사를 널리 맞는 뜻을 보여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5일 정사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울 때의 규범은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선비들을 배양하고 육성하는 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하였으니, 선비들은 마땅히 몸가짐을 잘하고 공부에 힘쓰며 끊임없이 절차탁마하여 성대한 교화의 경지로 훈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선비들의 취지(趣旨)가 단정하지 못하고 유적(儒籍) 밖의 패류(悖類)들과 혼입되어 곤궁한 것을 견디며 공부하는 데 대해서는 이미 논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 때를 만나면 더없이 중한 과장(科場)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번 과장(科場)의 일만 하더라도 성상의 분부가 그렇게 준엄하였는데도 조금도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숱한 무뢰배들을 모아 과장(科場)에서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심지어 시관(試官)을 핍박하여 스승과 제자 간의 중한 도리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찌 선비의 수치가 아니며 과장의 법규가 날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까지 하게 되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못된 무리의 주모자는 이미 형조(刑曹)에서 수감을 하였으니, 형벌을 적용할 때에 특별히 엄하게 처벌하여 나쁜 행위를 징계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매번 과장을 설치할 때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전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동한 무뢰배들이 마구 뛰어들어 난장을 친 결과에서 초래된 것입니다. 지금 대과 초시(大科初試)가 멀지 않았는데 사전에 신칙하여 일체 엄금하고 만약 함부로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사관소(四館所)와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양사(兩司)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지난번 과장(科場)의 일은 전에 없었던 변고이다. 먼저 들고 일어난 난동자로서 수감된 자에게는 반드시 곱절 엄중한 법을 적용한 뒤에라야 훗날의 폐단을 징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또한 과거 날짜가 멀지 않았으니,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에 있는 각종 군기 수량이 적지 않지만 최근에는 재력이 부족하여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연(鉛), 철(鐵), 동(銅), 석(錫), 화살을 만드는 대와 깃·가죽 등은 모두 사전에 갖추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모두 각 영문에 나누어 주어 완성하게 하여서 결국 성과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성읍(固城邑)을 통영(統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은 먼 장래를 도모한 계책이었습니다. 듣건대, 감영(監營)과 고을 사이에 일들이 장애가 많아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불편하게 여기고 있어 다시 옮기자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심지어 물력을 이미 다 준비하여 조정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으며, 또 옛터가 해로(海路)의 요충지인 만큼 그냥 폐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세(事勢)는 마땅히 지금 옮겨 설치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없애버릴 작정을 했다는 혐의가 있고, 그 형편을 논하는 것은 또한 먼 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도신(道臣)과 통제사(統制使)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타당한지의 여부를 물은 뒤에 온당하게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소 도살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엄하게 신칙하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사설 푸줏간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들리고 있으니, 이것은 기강이 해이해져 생긴 일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원래 정해진 푸줏간 외에는 일체 엄격히 금지하라는 뜻으로 다시 엄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이렇게 거듭 신칙한 뒤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으면, 법사(法司) 당상(堂上)과 도신·수신(守臣)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고 해당 수령(守令)은 엄하게 감처(勘處)할 것이라는 뜻으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엄하게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조정의 명령이 내렸는데, 어찌 이렇게 해이할 수 있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치선(兪致善)이 보고한 바를 보니, ‘후조창(後漕倉)의 조운선(漕運船)이 경강(京江)에 정박한 뒤에 ‘계미(稧米)’라는 명목으로 언제나 상납하기 전에 먼저 빼앗아가기 때문에 원래의 납부량이 줄어들어 결국 선주(船主)에게 억울하게 추징하게 되니, 엄금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 년 전에 뱃사람의 누적된 빚을 ‘계미’라는 명목으로 천만부당하게 사공(沙工)과 곁꾼〔格軍〕에게서 멋대로 빼앗았습니다. 이 때문에 정공(正供)의 양이 줄어들어 그것을 채울 때에는 필경 뱃군들에게 배분한 뒤에라야 해결이 되니, 조운법을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영남(嶺南) 한 지방뿐만 아니라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은 이 폐단이 더욱 고질이 되었습니다. 경조(京兆)와 해당 아문(衙門)에 분부하여 각별히 규찰하여서 적발되는 대로 엄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이런 뜻을 또한 삼남(三南)의 도신에게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삼군부(三軍府)의 직(職)에 있는 사람이 총관(總管)을 겸임할 수 없는 것은 직무상 무엇이 방해되어서 그런가? 또 옛 규례에도 없는 일이니, 이제부터는 공무를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거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삼군부에서 초기(草記)로 아뢰어 체직(遞職)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삼군부의 초기는 다시는 하지 말라. 오늘 연석에서의 말 중에서 이 조항을 조보(朝報)에 반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계(狀啓)에서 요청한 것을 인하여 환곡(還穀)의 본곡(本穀)을 떼어내어 쓴 것을 사창(社倉)의 모곡(耗穀)으로 보충하는 일에 대해 비록 허락하는 전교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앙달(仰達)할 것이 있습니다. 신이 전에 도백(道伯)을 역임하였기에 본 도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도신이 다스리는 일은 사세를 따져볼 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장계를 올려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호조(戶曹)의 경비가 부족하여 사창의 모곡으로 변통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해당 도신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6만 석을 책정하여 우선 빌려주고 원래의 장계에 대한 판하(判下)는 특별히 환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판부를 환수하고 편의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만동묘(萬東廟)의 문 이름을 지어 내리는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양추문(陽秋門)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문 이름이 정말 좋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송도(松都)로 행행(幸行)할 때 선죽교(善竹橋)를 지나다가 영묘조(英廟朝)의 어필비각(御筆碑閣)을 봉심(奉審)한 뒤 어필을 모사(模寫)하여 내린 것이 있는데, 그동안 비각 공사가 끝났는지 모르겠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말을 들으니, 일을 끝낸 것을 보고하는 장계를 며칠 안으로 올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성 쌓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송악산(松嶽山)의 높은 등마루에는 아직 쌓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성 쌓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평지에는 모두 이미 성을 쌓았다고 하니, 산꼭대기에는 더 쌓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날 과장(科場)에서 말썽을 일으킨 것은 전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진 데에 원인이 있다. 선비들의 버릇이 고약해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차라리 말하고 싶지가 않다. 대체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은 모두 대대로 녹(祿)을 받아먹던 가문의 후손들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학업을 계승하여 벼슬길에 나서서 임금을 섬기려는 것이다. 그러나 매번 과거 시험을 볼 때마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무뢰배들을 모아서 마구 난입하여 과장(科場)에서 옥신각신 다투고 심지어 말썽을 일으켜 과장에서 사람을 때려 다치게 하여 감히 인재를 뽑는 자리를 불한당이 멋대로 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른바 대대로 녹을 받는 후손들이 다른 무리들과 휩쓸려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분수와 기강을 범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도 그들의 부형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엄히 단속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것이 과연 조상의 가업을 이어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인가? 막중한 나라의 시험이 이러한 고약한 무리들 때문에 이 지경으로 난잡하게 된단 말인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부지불식간에 한심한 생각이 든다. 지금 대과 초시(大科初試)가 며칠 내로 임박하였으니, 과장으로 들어갈 때 또 자리 다툼을 하려고 무뢰배를 대동한 무리가 있으면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와 양사(兩司) 및 좌우 포도청(左右捕盜廳)으로 하여금 일일이 붙잡아 도적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고 응시자들을 인솔하던 사람도 적발하여 조율(照律)하여 엄하게 처벌하며 가장(家長)도 함께 논죄하도록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4월 6일 무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예조(禮曹)에서 올린 초기(草記)에 대하여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이번 감시(監試) 이소(二所)에서 종장(終場)의 시권(試券)의 봉미(封彌)를 바꾼 죄인 안정호(安鼎鎬)가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본 방목(榜目)에서 우선 빼버리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법에 따라 처벌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시관(試官)과 감시관(監試官)도 살펴서 신칙하지 못하여 이런 농간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법적으로 볼 때 응당 처벌받아야 합니다. 과거에 낙방한 김형식(金瀅植)은 원통하다고 하지만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과장이 난잡한 데 대하여 전후로 신칙한 것이 얼마나 엄하였는데, 선비들의 나쁜 버릇이 그칠 줄 모르고 이소에서 시권을 훔쳐 봉미를 바꾸어 쓴 일까지 생겼으니, 문란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안정호는 이미 자복하여 특별히 다시 심문할 것이 없으니, 형조(刑曹)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처벌하도록 하소서. 감찰(監察) 안치원(安致元)은 시험을 감독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고 친족과 호응한 자취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의 죄상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고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다른 시관들로 말하면 사건이 지척에서 일어났는데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파면시키는 처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과거에 낙방한 김형식이 원통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성명이 방목에 기재되지 않았고 게다가 방목을 내붙인 뒤에 첨가하여 넣는 것은 새로운 사례를 만드는 것에 관계되는 만큼 갑자기 의논하기 곤란하니,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7일 기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근수(宋近洙)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승보(李承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익진(金翊鎭)을 안태사(安胎使)002) 로 삼았다.
4월 8일 경신
개성부(開城府) 선죽교(善竹橋)에 어필 각비(御筆刻碑)의 비각(碑閣)을 세울 때 참여한 유수(留守)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형조(刑曹)의 초기(草記)에 대하여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시권(試券)의 봉미(封彌)를 바꾼 죄인 안정호(安鼎鎬)는 사형죄에 관련되는 만큼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서옥(庶獄)의 관계가 어느 것인들 지극히 엄중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 과거와 관련된 옥사는 더욱 엄중한 것이어서 법률에 따라 처단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보여 경사를 널리 펴는 즈음에 이 과거로 인해 이런 법을 적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바입니다. 마땅히 참작할 방도가 있지만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에게 물어보아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과거와 관련된 옥사는 다른 옥사와 다른 만큼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하겠으나, 지금은 여느 때와 다르니, 문제를 확대하여 아래에 물어볼 것 없이 형량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죄인 안정호를 특별히 가벼운 법에 따라 원악도(遠惡島)에 죽을 때까지 유배시키되 당일로 압송하라."
하였다.
4월 9일 신유
공주목(公州牧)의 수재를 당해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4월 10일 임술
전교하기를,
"듣건대,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초장(初場)과 중장(中場)에서 시취(試取)할 때 난잡한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책임은 상시관(上試官)에게 있다. 이것은 예사로이 처리할 수 없으니, 일소 상시관(一所上試官) 홍우길(洪祐吉)과 이소 상시관(二所上試官) 이원명(李源命)은 모두 파면시키는 벌을 시행하라. 시험에 대한 일은 부시관(副試官)으로 하여금 시험을 주관하여 마감하게 하라."
하였다.
조귀하(趙龜夏)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의 계목(啓目)에,
"안치원(安致元)이 친족들을 위하여 호응한 자취가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삼가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상고하여 보니,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서 합격한 사람의 밀봉한 시험지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몰래 지우고 자기의 이름을 써넣음으로써 절과(竊科:이미 합격으로 결정된 시권(試券)의 명의를 바꿔치기 하는 것)한 자는 사형죄로 논하고, 결탁하여 사주한 자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죄수가 범한 죄는 이와 같이 긴중하고 법도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사안이 사형죄에 관계됩니다. 신의 부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명색이 대시(臺試:춘당대시(春塘臺試))인데 이렇게 전에 없던 죄를 범하는 일이 생겼다. 법으로 따져보아도 마땅히 갑절 더 엄중한 법을 적용해야 하나 지금은 특별한 때이므로 안정호를 이미 처분하게 된 것이다. 죄인 안치원도 특별히 한 가닥 은혜를 베풀어 원악도(遠惡島)에 죽을 때까지 유배시키되 당일로 압송하라."
하였다.
4월 12일 갑자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을 소견(召見)하였다. 명릉(明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한 뒤에 봉심(奉審)한 것을 복명(復命)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올해는 여느 해와는 달라서 선침(仙寢)에 예를 행하고 이어 봉심하니 슬픔과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슬픔과 그리운 마음이 정말 비길 데 없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도의 농사 형편이 어떻던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보리는 이미 이삭이 팼고 모내기를 한 곳도 모두 모가 섰습니다. 논은 수근(水根)이 남는 곳이 있으면 빈번히 상당한 정도로 물을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신이 이번 행차에서 연도의 수령(守令)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때마다 백성들의 폐단을 간절히 호소하여 참으로 민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주(楊州)로 말하면 많은 능침(陵寢)을 관리하고 있고 고양(高陽)도 명릉(明陵)이 있는 곳이니, 두 고을은 특별히 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보고를 보니, ‘지난번에 획급(劃給)한 청전(淸錢) 가운데 호조(戶曹)의 몫 3만 냥이면 충분히 안배하여 쓸 수 있으니, 선혜청(宣惠廳)의 몫 5만 냥은 환납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경기 감사의 조치가 아주 타당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 가운데에서 양주목(楊州牧)에 1만 냥을 주고 고양군(高陽郡)에는 5,000냥을 주어 수습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은 것이 3만 5000냥인데, 이것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경기 내의 각 읍에 나누어주게 하여 성상의 은덕을 베풀고 적당히 폐단을 수습하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도신이 비록 공금을 소중히 여겨 이처럼 환납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도로 받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참으로 그렇다. 비록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한 뜻을 받들어 본 영에 떼어 보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서 매달 받아들이고 지불한 회계를 다음달 15일에 수정하여 들이고, 종합 회계는 사맹삭(四孟朔 : 음력 1·4·7·10월) 15일에 역시 수정하여 입계(入啓)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특별히 김동선(金東選)을 발탁(拔擢)하여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總管)으로 삼았다.
4월 13일 을축
명릉(明陵)에서 작헌례를 진행할 때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재현(金在顯)의 보고를 보니, ‘양근군(楊根郡)의 계유년(1873) 조(條) 세곡과 대동미(大同米)와 균역청(均役廳)에 바칠 것을 지금 납부하도록 독촉해야 하나, 백성들의 생업이 평소 궁핍하여 본색(本色)으로 바칠 형편이 못 되니, 그전 규례대로 특별히 값을 정하여 대납하게 하여 백성과 고을을 보존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공(正供)을 대신 바치도록 청하는 것은 비록 법 밖의 일이기는 하나, 백성들의 일을 염려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지난해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전세(田稅)는 이미 전날에 시행한 바가 아니어서 함께 거론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으니,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14일 병인
전교하기를,
"각 영과 각 사에서 해마다 받아들이는 쌀, 돈, 무명, 베, 그리고 이래조(移來條), 둔세조(屯稅條) 등 각 조목에 대하여 장부에 기록하고 상세히 입계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4월 15일 정묘
경상도(慶尙道) 유생(儒生) 성석후(成錫煦) 등 81명 상소하여, ‘화양서원(華陽書院)을 다시 세우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서 공부나 하라."
하였다.
4월 16일 무진
전 사간(司諫) 송규호(宋奎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 과거 시험에 대하여 여러 번 특별하게 신칙을 내리셨고 그 말씀이 엄중하셨지만, 과장 안이 난장판이 되어 번거롭게 성상에게 보고 되고 심지어는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시관(試官)을 파면하고 부시관(副試官)으로 하여금 시험을 주관하게 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주시관(主試官)들은 모두 대대로 녹(祿)을 받는 후손들이고 영예로운 반열에 있으니, 응당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방안(榜眼)을 보니, 모두 사심에 따른 것이고 공평하게 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방목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들이 모두 난잡한 무리들이어서 여론이 들끓고 선비들의 기상이 꺾였으며, 낙방한 사람들치고 울분을 토로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합격한 자들도 모두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의 거리낌 없는 짓이 어찌 이렇게 극도에 이를 수 있습니까? 빨리 처분을 내려 엄하게 처벌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4월 18일 경오
홍종운(洪鍾雲)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송근수(宋近洙)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조귀하(趙龜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4월 20일 임신
성균관(成均館)에서 아뢰기를,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오늘 석식당(夕食堂)을 설행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여러 유생들을 불러다가 권당(捲堂)하게 된 까닭을 들어보니, 여러 유생들이 소회(所懷)를 올렸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원량(元良)의 탄생은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더없는 경사이고 증광시(增廣試)를 설행하는 것은 선비들이 만나기 드문 기회입니다. 전후하여 신칙한 분부가 정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원자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선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고 사적인 짓을 그만두라는 유시가 연석에서 여러 번 있었고 임금의 말이 한번 선포되자 온 나라가 모두 공경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붓을 잡고 학문을 닦는 선비로서 누구인들 능력을 갖추어 벼슬길에 나설 생각이 없겠습니까? 시험을 주관할 사람을 특별히 중신(重臣)으로 의망(擬望)한 것은 지위와 명망을 보고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고, 상시관(上試官)을 먼저 파직한 것은 난잡함을 우려한 것입니다. 큰 성인(聖人)의 치우침 없는 뜻과 지극히 공정한 마음은 목석(木石)과 돈어(豚魚)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 부시관(副試官)으로 시험을 주관하게 된 사람들도 대대로 권세 있는 집안이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후손들입니다.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욱이 남보다 백배나 충성심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방안(榜眼)이 나옴에 이르러 보니, 합격자를 미리 선정한 흔적을 가리지 못하여 공평하게 선발한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칙교(飭敎)를 무용지물로 보고 국법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자신을 속이는 것도 부족하여 남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도 부족하여 하늘을 속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즈음 분수에 넘치는 상소를 올려 감히 꺼리지 않고 말하였으나, 성상께서는 간하는 말을 훌륭하게 여겨 용납해 주었으며 엄중하게 처벌하는 대신 도리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여러 시관(試官)들에 대하여는 아직도 처분을 내리지 않고 있기에, 신 등은 처음에는 근심하고 한탄하다가 뒤이어 지극히 억울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덕은 세 가지를 받드는 것보다 성대한 것이 없는데 이 무리들은 그 뜻을 받들어 펴는 데에 어둡고, 사람들의 심정은 사방에서 오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는데 이 무리들은 사람들의 향배(向背)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어찌 두렵고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서로 이끌고 나와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온 나라의 한결같은 논의에 따라 속히 여러 시관들에게 해당하는 법을 시행하시어 훌륭한 조정의 청명하고 화평한 교화를 빛내소서. 천만 번 간절하게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묘(聖廟)에서 권당한 것은 사세가 지극히 중대하니 즉시 도로 들어가라고 여러 모로 타일렀으나 제생들이 끝내 듣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태학(太學)은 학문을 강론하는 제일가는 곳이고 과거 시험은 바로 조정의 정령(政令)의 일이다. 명색이 선비라는 사람들이 법의 뜻이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감히 조정의 일에 대하여 사론(士論)을 빙자하여 함부로 득실을 논하고 걸핏하면 권당하기를 다반사로 하니, 어찌 이런 무엄한 행동이 있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당장 각별히 엄하게 처분하여 세상의 도의를 안정시키고 선비들의 지취(志趣)를 바로잡아야 하나, 정상을 참작할 점도 있으니, 우선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먼저 잘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도로 들어가게 하라. 만약 다시 번독하는 일이 있게 되면 결단코 크게 징벌하는 조치가 있을 것이다. 그대가 반드시 잘 알아서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삼가 성상의 전교대로 제생들을 불러다가 성지(聖旨)를 전하고 들어올 것을 권하니, 여러 유생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렇듯 정중하시니 감격하여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마땅히 도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곧 식당을 설행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 21일 계유
전교하기를,
"이번 복시(覆試)는 다른 시험과는 다르니, 시권(試券) 머리 부분에 각각 소속한 도(道)의 이름을 쓰고 제주(濟州)와 개성(開城)도 써서 깨끗한 마음으로 왕명을 받들어 거행함으로써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호(鄭泰好)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4월 22일 갑술
전교하기를,
"이번의 생진시(生進試) 초시(初試)에 응시한 사람 중에서 나이가 80세 이상인 자를 특별히 회시(會試)의 방목(榜目) 끝에 붙여서 경사를 널리 함께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병자
전 지평(持平) 임학준(任鶴準)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토호(土豪)들의 행패에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강서(江西)의 전 승지(承旨) 김선주(金善柱)의 죄와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는 김해(金海)의 천한 서자(庶子)로서 본관을 개성(開城)으로 고치고 함부로 유현(儒賢)인 김반(金泮)의 후손이라고 하여, 특별히 성명(聖明)께서 잘못을 씻어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4, 5년 사이에 관직이 정3품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남보다 곱절은 더 돼야 했는데, 타고난 성품이 간특해서 밤낮으로 먹은 마음은 남을 해치는 생각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평소 한 짓이란 전부 제 배를 채울 욕심만 부렸으며 향읍(鄕邑)에 악한 짓을 하면서 오로지 남을 위협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조정의 체통은 아랑곳도 하지 않으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제반 교활한 정상에 대하여 낱낱이 들 수는 없지만, 지난 병인년(1866)에서 계유년(1873)에 이르는 8년 동안 각 지방의 부유한 백성들을 농락하여 사사로이 원납전(願納錢)을 거둬들여서 자기의 창고를 채웠습니다. 수십 년 전에 영구히 팔았던 논밭을 강제로 도로 빼앗았으며 오래된 사채(私債)와 각 연도의 화리(禾利)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친족들에게서 징수하였습니다. 사적으로 형옥(刑獄)을 설치해 놓고 원칙도 없이 함부로 곤장을 쳐서 원성이 자자하였으며, 각종 관전(官錢)을 지방으로부터 사적으로 받아들여 제멋대로 처리하였습니다. 도당(徒黨)과 결탁하여 유향(儒鄕)들을 멋대로 농락하여 뇌물을 받고 끼어 주었으며, 외람되게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감영(監營)과 고을(營邑)을 횡행하였습니다. 사적으로 푸줏간을 만들어 놓고 음란한 음악에 매달려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에 푸줏간을 없애라는 조정의 명에도 끝내 중지할 줄 몰랐고 감영과 고을에 대한 신칙은 보통 일로 여겼습니다.
이 성명한 세상을 만나 온 나라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춤추며 즐기는 이때에 오직 관서(關西)만은 이 탐욕스런 자에 의하여 폐해를 치우치게 받고 있으므로 감히 상소하오니, 처분을 내리어 변방으로 내치는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처분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방금 전 지평(持平) 임학준(任鶴準)의 상소를 보니, 김선주(金善柱)의 허다한 못된 버릇이 실제로 확실히 다 이와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한 일이었다. 만약 이런 일을 범한 것이 없다면 어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겠는가? 김선주에게 우선 간삭(刊削)의 법을 시행하고, 그동안 저지른 불법적인 일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정축
일강(日講)을 마쳤다. 하교하기를,
"요즘 내리는 비는 농사에 해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대농(大農)은 이달 안으로 거의 다 모내기를 하였으니 풍년이 들 수 있고, 이제라도 쾌청하게 갠다면 보리농사도 손실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양덕 현감(陽德縣監) 신홍균(申弘均)의 탐욕이 대단히 많았는데, 지금도 이같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하는 세상에 감히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포장(捕將)이 으레 정부 당상(政府堂上)을 겸임하는 것이 이미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아니니, 문제가 있는 듯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전에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때때로 포장이 겸임한 것은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겠지만, 정부로 말하면 과연 온당치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종전에는 차대(次對)하는 날에 포장은 궐문 밖에서 대령(待令)할 뿐이었는데, 근래에는 으레 당상을 겸하였기 때문에 관례대로 연석(筵席)에 나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신(武臣)으로서 대장(大將)에 제수된 경우가 아니면 정부 당상을 겸해서는 안 되니, 이제부터는 포장이 정부 당상을 겸임하는 것을 감하(減下)하라."
하니, 이어 하교하기를,
"궐내(闕內)를 수직(守直)하는 군병(軍兵)이 400명 밖에 안 되어 매번 부족하다는 염려를 하였다. 몇 명쯤은 증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반드시 접대할 비용을 마련할 방도를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나라의 경비가 고갈된 것이 지금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우선 늠료(廩料)의 재원을 마련해 놓고 그런 다음에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각영(各營)의 군병 가운데서 몇 명을 차출하여 궐내 가까운 곳에 입직(入直)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신설(新設)하는 것과는 다르니 충분히 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과외의 일 때문에 고통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급료를 더 주거나 본영의 역(役)을 덜어준다면 지장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조(戶曹)의 문서를 상고해 보니, 해당 군병들에게 쓰일 비용으로 부족한 것이 삼수량(三手糧)뿐이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사실인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미(米) 1만 석(石)이 잉여가 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선혜청의 미환(米還)은 본래 부족합니다. 이것은 필시 그 청에서 지출하고 남은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말한 군병이 입직하는 문제는 연석에서 물러간 뒤에 상의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어,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신응조(申應朝)가 올린 장계(狀啓)에,
"양덕 현감(陽德縣監) 신홍균(申弘均)이 백성들의 돈을 빼앗고 향임(鄕任)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런 탐욕스럽고 잔학한 부류를 자목(字牧)의 직임에 두어서는 안 되니, 우선 파출(罷黜)한 뒤에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방금 기백(箕伯)의 장계를 보니, 신홍균의 용서할 수 없는 범죄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사람의 목숨이 이로 인하여 손상되고 백성들의 재물이 이토록 강제로 빼앗겼으니, 탐욕스럽고 잔학하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는 부류는 단지 장률(贓律)로만 논죄해서는 안 된다. 신홍균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우선 나수(拿囚)하게 한 다음 강제로 빼앗은 백성들의 전(錢)은 추조(秋曹)로 하여금 낱낱이 독촉하여 징수해서 본도(本道)로 내려 보내게 하며, 도신(道臣)이 해민(該民)에게 낱낱이 돌려준 뒤에 그 상황을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4월 26일 무인
일강(日講)을 하였다.
4월 27일 기묘
일강(日講)을 하였다.
4월 28일 경진
일강(日講)을 하였다.
4월 29일 신사
일강(日講)을 하였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림을 구하는 요체는 오직 실학에 달려 있으며, 실학(實學)을 구하려면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산림(山林)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불러들여 묻는 것을 모두 부지런히 하였지만, 아직 전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불러들이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정성과 공경의 방도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방도를 날마다 앞에서 진술하는 자가 없습니다. 신같이 학식이 없는 자가 보란 듯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전하의 뜻이 분발되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전하의 공부가 계속 빛나도록 돕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론(講論)을 매일 여는 때를 당하여 지금이야말로 학문이 깊은 선비를 산림에서 얻어서 성명(聖明)의 다스림을 돕게 하여 서로 닦여지는 아름다움에 능히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선발된 사람은 더욱더 부르고, 은거하고 있는 재능 있는 선비들을 다시 찾아내어 예의로 맞아주며, 경연에 출입하면서 전하를 위하여 좋은 의견을 올릴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학문을 강론하는 바탕은 실로 덕망 있는 선비들을 불러들이는 데에 달려 있다. 경이 이미 아침저녁으로 훌륭한 의견을 올리고 있으니, 이것이 다행히도 내가 의지하고 있는 바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비답 하교가 이렇게까지 지극하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무슨 좋은 말을 올린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까지 보도(輔導)한 것이 모두 경의 공로이다. 또 경이 여러 차례 일강(日講)을 권고하였기 때문에 근래에 과연 경연(經筵)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에 있는 군기(軍器)를 빨리 다 만들어 내도록 연석(筵席)에서 여쭌 적이 있는데, 이 일을 구관(句管)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훈장(訓將)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고, 물력(物力)은 이미 봉류(捧留)해 둔 것 중에서 영남(嶺南)의 결두전(結頭錢)으로 적절하게 헤아려 획급(劃給)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군기 중에서 수노(手弩)는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쏜다고 하는데, 멀리도 쏠 수 있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실로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쏠 수 있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노약자(老弱者)나 여병(女兵)일지라도 쏠 수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성을 지키는 데 갖추어 놓아야 할 장비인 것입니다."
하니, 행 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쇠뇌에는 기아(機牙)가 있는데 통에다 작은 화살을 많이 넣고 그 기아를 움직여서 발사하면 많은 화살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며, 또한 능히 멀리까지 나갑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박규수가 아뢰기를,
"쇠뇌에는 기노(機弩)가 있고 수노도 있는데 그 제작이 아주 묘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병기 가운데 수노만큼 강한 활은 없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회시(會試)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먼 도(道)의 유생(儒生)들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각항(各項)의 날짜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잡게 하고, 생진시(生進試)의 방방(放榜)을 뒤로 물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의 수리를 공연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지금은 물자를 갖출 방도가 없어 즉시 구획(區劃)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재는 반드시 미리 마련해 놓아야 필요한 때에 쓸 수 있으니, 호조(戶曹)에 분부하여 목재가 있는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 통지하고, 감영(監營)과 고을의 아전들이 혹시 그것을 빙자하여 함부로 벌목하면서 민간(民間)에 소요를 일으키면 문책을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리하는 일이 과연 시급하다. 그렇지만 지금 목재를 준비하는 것은 농사철에 방해가 되니, 관문을 보내는 것은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조정 신하들의 상견례(相見禮)는 등급에 따라 엄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조정의 체통을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 법과 기강이 날로 무너져서 조정에서 읍양(揖讓)을 할 때나 거리에서 만났을 때 서로 공경하는 예의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경사(京司)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이 뒤섞여 구분이 없고 나라의 법전(法典)을 하찮게 보고 있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각 해사(該司)에 감결(甘結)을 보내 옛 규례를 다시 밝히도록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의 체통이 있어야 할 곳에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각별히 신칙하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시험 규례는 본래 법식(法式)이 있어 감히 어길 수 없으니, 이는 사체(事體)를 중하게 여기고 간사한 것을 엄하게 막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공폐(貢弊)로 인하여 시관(試官)에게 스스로 밥을 지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일시적인 변통에 지나지 않고 영구히 행할 수 있는 규례가 아닙니다. 이번에 경과(慶科)는 어려운 일이 많아서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대과(大科)나 소과(小科)를 막론하고 옛날 규례를 참작하여 제반 일들을 응판소(應辦所)에서 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아전의 정원을 줄이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에서 수교(受敎)하여 정식(定式)을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외읍(外邑)의 이안(吏案)이 너무 문란하게 되었습니다. 법전에 실려 있는 규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정원을 늘려 거의 정해진 수효가 없으므로 먹이고 입히는 방도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우지 못합니다. 밤낮 노력은 하지마는 필경 백성들을 병들게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비록 조정에서 신칙을 하여도 바로잡을 수 없어서 정원 밖의 사람들로 따로 하나의 안(案)을 만들고는, 시골의 풍속대로 그 칭호를 부르면서 제각기 두기 때문에 작은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서로 옥신각신하고 큰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살인을 빚어냅니다. 그러니 마을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장(官長)도 도리어 그 폐해를 입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읍(各邑)의 이안을 각 순영(巡營)에서 적절히 참작해서 정하여 부(府)에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에 근거하여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각도(各道)에서 녹계(錄啓)하지 않은 옥수(獄囚)들에 대하여 낱낱이 수계(修啓)하도록 관문을 보냈었고, 지금 이미 일제히 보고가 도착하여 모두 묘당(廟堂)에서 좋은 쪽으로 심리(審理)하게 하도록 판하(判下)하셨습니다. 계본(啓本) 중에 제도(諸道)의 옥수들에 대하여 근거를 들 만한 것이 있는 것만 대략 이름 아래에 적어 넣었으나, 애초에 옥사(獄事)의 실정에 대해 문안(文案)을 갖추어 올려 보낸 것이 아닌 만큼 심리하는 절차로 보아 다시 각 해도의 도신(道臣)에게 관문을 보내 신칙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규례대로 죄를 심의하여 속히 문안을 만들어 추조(秋曹)로 올려 보내게 해서 복심(覆審)하여 처결해야 합니다. 또 이미 녹계한 자에 대해서도 추조로 하여금 낱낱이 다시 심리하여 소결(疏決)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미 녹계한 자에 대해서는 본래 해당 문건이 있으니 옥사의 실정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녹계한 문안이 추조에 있으니, 거기에 근거하여 심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도에 대해서는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 기한을 정하여 관문을 보내면 제때에 만들어 올려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옥수에 대하여 녹계할 때 도신은 발사(跋辭)에서 옥사의 실정을 자세히 논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전에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심리 문건을 보니 과연 살려 준 자가 많았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정묘조(正廟祖) 때의 심리 문안에는 어제(御題)로 판부하여 내려 보낸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묘조 때의 어제에는 심리록(審理錄)이 과연 수십 권이나 된다."
하니, 이어 하교하기를,
"이번 심리는 경사(慶事)스러운 때를 맞이하여 시행하는 것이니 속히 마감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법이 준엄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수령(守令)들이 오히려 중지할 줄 모르니 몹시 한탄할 일이다. 이제부터 범장(犯贓)한 자는 5년, 10년의 금고형에 처하는 것을 법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장률(贓律)에 대한 법조문은 《대명률(大明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금부(禁府)에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일전에 하교한 파수군(把守軍)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각 영에서 자체 훈련은 이미 다하였으나 파수군의 수효는 지금 품정(稟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떻게 의정(議定)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이경하가 아뢰기를,
"하교를 받은 다음에 거행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궐내(闕內)에 입번(入番)하는 파수군의 정원은 무예청(武藝廳)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액속(掖屬) 중에서 오직 무예청만 위급한 경우에 믿을 수 있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파수군은 신원을 상세히 알아본 다음 뽑아서 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를 실로 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경하가 아뢰기를,
"영문(營門)의 군액(軍額)은 원래 모두 신원이 확실한 자들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입번군(入番軍)의 수에 대하여 장신(將臣)이 이미 대략 계산한 것이 있는 듯한데, 내가 각영의 군안(軍案) 가운데서 인원을 정하여 판하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어떻겠는가?"
하였다. 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 조영하(趙寧夏)가 아뢰기를,
"그렇게 판하하시면 매우 타당합니다. 만약 특별히 처분을 내리시지 않으면 어떻게 감히 아래에서 제멋대로 정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총수를 군안에 판하하는 것은 바로 정원(政院)이 출납하는 공사(公事)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군수(軍數)는 반드시 간편한 쪽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인원수가 너무 많게 되면 각 영도 모양을 갖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내문(內門)은 무예청에서 파수하게 하고 외문(外門)은 군병들이 파수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각 영의 군병은 무예청 군병과 달라서 좌번(左番), 우번(右番)의 규례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무예청의 군병은 집이 통(統) 안에 있지만 각 영의 군병은 집이 각처(各處)에 있으며, 또한 이익이 되는 일을 하여 살아가는 자가 있으니, 자연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다. 무감(武監)도 오히려 군료(軍料)가 박한 것이 걱정인데, 더구나 각 영의 군료가 더욱 적은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이 또한 번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서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훈장(訓將)은 노숙한 장수이니 그로 하여금 참작해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마땅히 군안에 판하할 것이다. 훈장이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파수할 처소(處所)에 대해 어느 문에 몇 명, 어느 문에 몇 명이라고 써서 내려 보내야 그 사람들을 계산해서 들여보낼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파수할 처소는 인원수를 정한 후의 문제이다. 군안을 판하하면 대신(大臣)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영문의 제학(提學)을 겸임하고 있으니 자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입번군(入番軍)에게는 교대로 식사를 하게 하는 규례가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입번하는 무예청의 군량미(軍糧米)는 그 청에서 회계한 몫의 전(錢) 중에서 균역청(均役廳)의 쌀을 사오고 각 영의 군병들도 군량미를 마련한 다음에야 번을 들 수 있다."
하였다. 이경하가 아뢰기를,
"궐내 각 처에 입번(入番)하는 군병이 매일 아침 문을 열면 반을 나누어 나가니, 이는 바로 먼저 식사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다시 들어오면, 매일 나가서 식사를 하는 것은 한 차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무예청이 외영의 군사가 처소를 합하면 뜻밖의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잘 단속하면 이런 폐단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군심(軍心)은 억지로 단속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합치된 뒤라야 폐단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또한 통솔하는 사람이 조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현재 금군(禁軍)과 호위군관(扈衛軍官)은 번장(番將)과 별장(別將)이 통솔하고 각처에 입번하는 군병은 모두 초관(哨官)이 통솔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직(軍職)에 있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통솔자를 삼으면 궐내의 일을 알고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대내의 일을 자세히 아는 데는 무예청만한 곳이 없습니다. 만약 통장(統長)이 통솔하게 하면 틀림없이 잘 거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통장이 무예청의 군병 100명을 통솔하는 것도 오히려 어려울 것인데, 만약 더 보태서 통솔하게 하면 더욱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대체로 군제(軍制)는 군수가 아무리 많아도 대장이 단속하는 자는 영장(營將) 5명에 지나지 않고 영장이 단속하는 자는 파총(把總) 5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총 이하 초관, 기총(旗總), 대장(隊長)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으로 단속하니, 마치 몸이 팔을 쓰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예청에는 영문에 대한 제도가 많이 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무감은 본래 훈국(訓局)의 군병이였으므로 훈장(訓將)을 통존위(統尊位)라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연 도감(都監)의 군제와 비슷하지만 군료는 도감에서 지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액속 중에서 무예(武藝)가 무예청만한 곳이 없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임진전란(壬辰戰亂) 후에 훈국을 설치하고 유성룡(柳成龍)을 도제조(都提調)로 삼았는데, 척계광(戚繼光)의 왜적 방어법으로 군병을 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군병을 선발하는 방법으로 십팔반무기(十八般武技)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예청은 인조조(仁祖朝) 때에 비로소 설치하였는데 그때에는 30명이었다. 옛날의 무예청에는 날래고 건장한 군사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약하고 용렬한 사람들이다. 궐문에 옛날에는 파수하는 일이 없었으나 서쪽 역적(逆賊)의 침략이 있고부터 처음 시행하였다. 파수하는 제도는 실로 좋은 것이다. 새로 정하는 입번하는 파수군에 대한 제반 조치는 훈장이 주관해서 하라."
하였다.
김재현(金在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오취선(吳取善) 을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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