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3월

싸라리리 2025. 1. 1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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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해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일곱 번째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일 무자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여러 번에 걸쳐 정사(呈辭)한 것에 대해 안심하고 조리(調理)하라고 비답(批答)한 것이 규례에 의한 대답인 듯하기는 하지만 실제 사정에서 나온 요어(要語)였다. 경에게 영의정(領議政)의 직임을 지우고자 마음먹은 지 몇 달이 되지 않았고, 가유(嘉猷)와 석획(碩劃)은 아직 펴 보지 못하였으며 경사스러운 행사들도 이제 막 끝났는데 갑자기 사임을 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경을 앙성(仰成)하는 것이 어찌 경을 번거롭게 함으로써 힘을 들여 분주히 뛰어다니게 하자는 것이겠는가? 백성과 나라의 형편이 날이 갈수록 황급하여 경에게 한번 착수하게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수습되고 정돈되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은 실병(實病)으로 반드시 체차(遞差)해야 하는데 오래도록 서로 버티는 것이 도리어 예의로 존경하는 뜻이 아니므로 정승벼슬을 지금 우선 사임하도록 윤허한다. 정승은 나라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이상 어찌 시임과 원임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디 모든 힘을 다하여 도와줌으로써 나의 어려운 일을 크게 수습해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3월 3일 기축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을 제배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한계원(韓啓源)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중추부(中樞府)에서 한가롭게 보낸 지 이제 몇 해가 되었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늘 경을 그리며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경의 국가를 생각하는 정성으로도 어찌 가슴 속에 나라를 그리는 생각이 없었겠는가?
더구나 지금 백성들과 나라의 형편이 날로 황급하여 더 말할 나위 없는 만큼 나라를 근본으로 삼는 경의 정성을 우국의 걱정으로 바꾸어 응당 다른 것을 돌아 볼 겨를이 없이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듯 달려 나와 일을 맡아서 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영의정으로 다시 임명하는 것은 사실 조야(朝野)의 대동(大同)한 논의에서 나왔으니, 첫째 경의 충성심은 딴 마음이 없이 확고하며, 둘째 경이 매우 너그러워 포용함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 늘 경을 그리며 생각하던 나의 마음은 충만하게 얻은 듯하여 기뻐 잠이 오지 않는다. 절대로 관례대로 사양하지 말고 즉시 명에 부응함으로써 백성들과 나라를 다행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삼수미(三手米)·전(錢)·포(布)·목(木)에 대하여 종전에 호조(戶曹)에서 봉상(捧上)하여 훈련 도감(訓練都監) 군사들의 생활을 보장하던 것을 모두 본영(本營)의 별고(別庫)에 비치하여 지출하며, 매년의 수조(收租)도 본영(本營)에서 구검(句檢)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이재면(李載冕)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휘중(李彙重)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서광복(徐光復)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3월 6일 임진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중궁전(中宮殿)도 함께 나아갔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궁(世子嬪宮)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묘궁 도제조(廟宮都提調) 이하 관리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동궁(東宮)의 가례(嘉禮) 이후 처음으로 묘궁(廟宮)을 전알(展謁)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순조(鄭順朝)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원하(鄭元夏)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3월 7일 계사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3월 8일 갑오

두 번째로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원임 대신들이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최응(李最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서당보(徐堂輔)이다.】                      올린 연명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지난달 문의관(問議官)이 사폐(辭陛)한 후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전교에 따라 해당 관리에게 통지하는 글이 있었는데, 훈령(訓令)이라는 명목을 달아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서명하여 글을 써서 보내게 한 명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그 중에는 중국과 관계된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결코 우리 나라에서 마음대로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우리나라 조신(朝臣)에게 칙유(飭諭)하더라도 이와 같이 베껴써서 공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명을 받은 날 신들은 서로 여러 번에 걸쳐 토의한 결과 모두 다 ‘불가(不可)하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들만의 공의(公儀)이겠습니까? 바로 여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초본(草本)을 도로 들여오라는 하교를 받고는 신들은 천만 번 우러러 칭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전날에 문의관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연석(筵席)에서 한 이야기 중에서 훈령이 초안을 고쳐 써서 방금 들어갔고 승정원에서는 본 아문(衙門)에 내려 보낸 것입니다. 훈령은 애초에 연석에서 한 이야기 속에 기재할 것이 못됩니다. 연석에서 말한 내용의 소중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런데 지금 10여 일 후에 이와 같이 증개(增改)하였으니, 사필(史筆)의 본래 뜻이 이로부터 소여(掃如)해 지고 앞으로의 폐단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일이 공의에 거슬리면 애초에 해서는 안 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면 후세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극히 신중하게 대해야 하고 또 어렵기가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이 혹 임금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며 한결같이 순종하는 것만 일삼는다면 이는 바로 자신만 있음을 알고 국가가 있음은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상소를 올려 호소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해와 달처럼 명철한 판단을 세워 천지처럼 큰 도량으로 그날 연석에서 말한 내용을 모두 초본대로 두고 뜯어 고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생각하건대 연석에서 한 이야기를 뒤에 고치는 것은 근엄함을 크게 훼손하였고 윤허할 때에 교환(繳還)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기주(記注)의 위치에 있는 관리들은 응당 복역(覆逆)을 해야 하는데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그때 입시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들은 모두 견파(譴罷)하고 법을 시행하여 그만둘 수 없을 듯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을 하기를,
"나는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규례를 무시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결과가 되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하였다.

 

3월 9일 을미

승정원(承政院)에서, ‘시임 대신(時任大臣) 및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이 사정과 형편상 송구스럽고 황송한 일이라며 금오(金吾)의 문 밖에 엎드려 서명(胥命)하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은 그 일을 논한 데 불과할 뿐이니, 노성한 위치에 있는 관리들이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인의(引義)를 하는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사관(史官) 조광우(趙光祐)가, ‘신이 전하의 하유(下諭)를 받들고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최응(李最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과 서당보(徐堂輔)의 서명처(胥命處)에 달려가 유시를 전하니, 「신들이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하여 받은 비지(批旨)에는 신하로서 감히 받들 수 없는 말이 있었으므로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며 머리를 움츠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관이 와서 전하의 하유를 전한 것으로 말하면 비록 매우 드문 일이지만 더욱더 두려워 엎드려서 처벌을 기다리는 바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대신은 체통이 귀중한 만큼 이렇게 지나친 행동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시 집으로 돌아가도록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시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상만(尹相萬)이 묘당(廟堂)에서 올린 차자(箚子)에 견파(譴罷)하도록 청한 일로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論劾)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기주(記注)가 사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교에 따라서 바로잡은 것이다. 그대는 굳이 이처럼 인혐할 것이 없다."
하였다.

 

3월 10일 병신

사관 조광우(趙光祐)가,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계원(韓啓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최응(李最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과 서당보(徐堂輔)가 아뢰기를, 죄상은 사실 용서받을 수 없으며 실정은 갈수록 송구스럽고 황송하니, 오직 속히 엄하게 처벌을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여러 차례 간곡하게 권고하였는데도 아직까지 태도를 고치지 않고 있으니, 체통이 막중한 대신들의 의리상 의론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 중에서 관례를 무시하고 일을 꾸미기 좋아한다는 한마디는 이제 거둘 것이니 경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3월 11일 정유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도제조(都提調) 이하 관리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提調)                     홍종운(洪鍾雲), 예방 승지(禮房承旨)                     성이호(成彛鎬), 대축(大祝) 조충희(趙忠熙), 집례(執禮) 이만도(李晩燾), 상례(相禮)                     민병석(閔丙奭)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민태호(閔台鎬)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성이호(成彛鎬)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서연관(書筵官)                     박성양(朴性陽)이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를 반드시 불러오려는 나의 마음은 갈증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장주(章奏)와 비유(批諭)가 다만 번거롭게 왕래하여 마치 예양(禮讓)을 숭상하는 듯 하나 허문(虛文)으로 꾸미는 것이니, 자신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 아니라 또한 그대에게 개탄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학문에 체용(體用)이 있는 것은 곧 임하(林下)에서 독서하고 나와서는 세상에 쓰여 치군(致君)하고 택민(澤民)하는 것이 바로 수레를 만들 때 합철(合轍)하는 묘용(妙用)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주 물러가 자기 혼자만 지조를 지키고 절개나 지키는 선비가 되어 파묻혀 있으면서 소문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
봄철도 이미 저물어가고 강석(講席)과 서연(書筵)을 열게 되었으니 그대는 결연히 마음을 고쳐먹고 빨리 나오라. 탁지참좌(度支參佐)의 벼슬도 그동안 변통해서 또한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벼슬에 옮기는 것으로 대치했으니 그대는 의례적으로 사양하지 말고 나의 이 지극한 뜻에 부응 하라."
하였다.

 

3월 12일 무술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두 번째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3월 14일 경자

송병서(宋秉瑞)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순택(沈舜澤)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3월 15일 신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있었던 포도청(捕盜廳)의 사건을 듣고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포도 대장(捕盜大將)은 마을 백성들이 포교(捕校)를 구타하였다고 하여 제집 뜰에 잡아들여 매질하여 5명을 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도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니 법을 어기고 함부로 죽였으니 그 죄상이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날 저녁 후에 의정부(議政府)에다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전부 엄폐하고 그저 군총(軍摠)들이 무리를 지어 일어나 소동을 피우며 해청(該廳)을 파괴하였다고만 하였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                     한규직(韓圭稷)에게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총들도 전례 없는 이런 고약한 행동을 한 것은 크게 법에 관계되는 만큼 그 악습을 조금도 크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수창(首唱)한 여러 놈을 형조(刑曹)로 하여금 엄하게 심문하여 진상을 밝혀낸 다음 군문(軍門)에 넘겨주어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포도 대장의 놀랍고 패악한 행동과 관청 건물을 파괴한 죄행은 천만번 통분할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포도 대장에게는 우선 간삭(刊削)하는 법조문을 시행하고 소란을 피운 자들은 형조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여 진상을 밝혀내게 한 다음 모두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적을 막는 정책이 전후에 내린 칙령에서 거듭하여 엄중히 단속한 것뿐이 아닌데, 최근 들어 더욱 창궐하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골에서 계속 소동이 일어나 백성들이 안착하여 살 수 없고 비록 대궐 아래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이 제멋대로 약탈질을 하고 있는 형편에서 이것을 만일 즉시 무찔러 없애지 않고 심상한 것으로 보며 날을 보낸다면 그것이 심해져서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우려할 만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연석(筵席)에서 물러난 후 두 포도 대장을 불러놓고 직접 마주앉아 특별히 강조하겠습니다. 그리고 각도(各道)의 진영(鎭營)과 관할 하에 있는 읍진(邑鎭)에 이르기까지 적당(賊黨)이 고을 경내에 나타나면 기일 내에 속히 잡아내게 하여 이것을 어기는 날에는 포도 대장은 엄하게 감처(勘處)할 것이며 각 해당 영장(營將)은 먼저 파면시키고 잡아올 것이니, 관할 지역 안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각별히 관문으로 신칙(申飭)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이나 지방에서 포교와 포졸(捕卒)들 중에 많은 수효를 염탐하여 잡아내는 경우에는 해청과 해도에서 논상(論賞)할 것을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여 정상적인 규례를 벗어나 격려하는 방도로 일체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도적을 막을 것에 대하여 전후에 걸쳐 과연 얼마나 신칙하였는가? 그런데 아직까지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안에서 포도청, 밖으로 각 진영들에서 정성을 다해 봉공(奉公)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는가? 모두 상주한 대로 특별히 엄하게 신칙할 것이며 논상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즉시 품처(稟處)하여 격려하고 권하는 방도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의 서보(書報)를 보니, ‘중국 사신 정여창(丁汝昌)과 마건충(馬建忠)이 미국 사신 슈펠트〔薛裴爾 : Shufeldt, R.W.〕                         【수훼르도】                     와 함께 배를 타고 머지않아 도착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경리사(經理事) 조준영(趙準永)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차하(差下)하고 일에 밝은 역관(譯官)을 사역원(司譯院)에서 파견하며, 그들이 묵을 객관(客館)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경강(京江) 부근에 자리를 잡고 속히 수리하게 하며, 음식물을 공급하고 접대하는 일도 호조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참작하여 마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올 때의 연접관(延接官)과 돌아갈 때의 호송관(護送官)은 연로(沿路)의 지방관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6일 임인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생원시(生員試)의 회방인(回榜人) 윤종의(尹宗儀)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전교하기를,
"일찍이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리를 지낸 사람의 회방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파광군(坡光君) 윤종의(尹宗儀)에게 특별히 사악(賜樂)하고, 그의 아들 윤헌(尹瀗)은 수령(守令) 자리가 나면 먼저 의망(擬望)하여 들이라."
하였다. 이어서 선온(宣醞)과 사찬(賜饌)을 명하였고, 세자(世子)도 은병(銀甁)과 은배(銀杯)를 내려 주었다.

 

이종승(李鍾承)을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성이호(成彛鎬)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경호(趙慶鎬)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영수(金永壽)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석근(金晳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영철(金永哲)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병정(尹秉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김명진(金明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창렴(李昌濂)을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3월 18일 갑진

경우궁(景祐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남연군(南延君) 사당을 역배(歷拜)한 다음 본궁에 들어갔다. 중궁전(中宮殿)도 함께 갔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궁(世子嬪宮)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동궁이 처음으로 전배하는 예를 행하니 옛날에 대한 추억을 더욱 금할 수 없다. 행 호군(行護軍)                     박제관(朴齊寬)을 도총관(都摠管)에 제수하라."
하였다.

 

3월 20일 병오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중궁전(中宮殿)도 함께 갔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궁(世子嬪宮)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청(淸) 나라 사신과 미국 사신이 묵을 객관(客館)을 다시 편리한 데에 따라 인천(仁川) 관사(官舍)로 정하라는 뜻을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분부하였으며, 반접관(伴接官)과 반접낭청(伴接郎廳)은 오늘 중으로 하직인사는 그만두고 인천으로 하송(下送)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3월 21일 정미

정범조(鄭範朝)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3월 22일 무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경과 별시(慶科別試)의 전시(殿試)를 행하였다. 문과(文科)에서는 윤영식(尹榮植) 등 15인, 무과(武科)에서는 이민한(李敏漢) 등을 뽑았다.

 

영건소(營建所)에서 아뢰기를,
"함녕전(咸寧殿)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민태호(閔台鎬), 서사관(書寫官)에 김영수(金永壽),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에 서정순(徐正淳)이고, 연복당(衍福堂)                     상량문 제술관에 윤자덕(尹滋悳), 서사관에 이재면(李載冕), 현판 서사관에 조병호(趙秉鎬)이고, 정선당(正善堂)                     상량문 제술관에 김병시(金炳始), 서사관에 심이택(沈履澤), 현판 서사관에 이세재(李世宰)입니다."
하니, 계하(啓下)하였다.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가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사직을 청하는 글이 또 이르렀으니 실망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대는 백성과 나라를 위한 계책이 급선무라고 했는데 나는 유자(儒者)를 숭상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양(敎養)하고 보좌하게 하자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적임자를 얻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바로 그대가 그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학식이 많은 산림의 선비로서 보좌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곧바로 나와서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지내려 하면서 마치 시사(時事)에 대해 범론(汎論)하는 것이 남의 일을 지적하듯이 하는가? 참으로 여러 모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벼슬을 준 것은 사실 마음 속에서 선발한 것이고 경사를 맞이하여 반사(頒賜)한 것도 옛 규례를 따른 것이니 그대는 이렇듯 한사코 거절할 것이 없다. 이 화창한 봄날을 맞아 속히 길에 올라 간절히 기다리며 생각하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3월 23일 기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                        【동지 정사(冬至正使)                           홍종헌(洪鍾軒), 부사(副使)                           김익용(金益容), 서장관(書狀官)                           조인승(曺寅承)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조경호(趙慶鎬)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제관(朴齊寬)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3월 24일 경술

경리사(經理事) 신헌(申櫶)을 전권 대관(全權大官)으로, 경리사                     김홍집(金弘集)을 부관(副官)으로, 부주사(副主事)                     서상우(徐相雨)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여 인천부(仁川府)에 가서 미국 사신과 회동하여 사무를 토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 26일 임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내고 서계(誓戒)를 받았다.

 

3월 27일 계축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청(淸) 나라 사신과 미국 사신이 오는데 우리 나라의 대관(大官)과 부관(副官)이 그들에게 예물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품들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준비하여 하송(下送)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태호(閔台鎬)의 아내 정경 부인(貞敬夫人)                     송씨(宋氏)가 죽었다. 상장(喪葬)에 쓰일 물품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후하게 수송하고 구재(柩材)도 골라서 보내라."
하였다.

 

대교(待敎)                     민영소(閔泳韶)를 세자빈궁(世子嬪宮)에 별입직(別入直)하라고 명하였다.

 

세자빈(世子嬪) 생모의 상(喪)에 거애(擧哀)하는 의식을 자내(自內)에서 하라고 명하였다.

 

3월 29일 을묘

좌의정(左議政)                     송근수(宋近洙)가 사직을 청한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사직을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형편에 어떻게 감히 다른 이야기들을 언급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국사가 많은 면에서 황급한 형편을 보고서 매우 두려워 스스로 그만두고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만다면 이것은 위로는 우리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요, 아래로는 신하의 양심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크고 급하게 관계되는 문제만 들어 조항별로 진술하겠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금이나마 살펴주기 바랍니다.
성학(聖學)에 힘쓰는 문제입니다.
신하들이 상에게 권고할 때면 반드시 강학(講學)에 힘쓸 것을 말하다보니 ‘강학’ 두 자(字)가 마침내 일상적이고 예사로운 말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실 이에서 더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가 학문을 버리고서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주자(朱子)도 송(宋) 나라 효종(孝宗)에게, ‘폐하의 총명은 타고 났지만 도리를 배워 자신을 수양하는 근본과 세상 사람들을 다스려서 옳은 풍속으로 이끄는 요령에 대해서는 학문을 연구하여 밝히지 않고는 안 됩니다. 만일 학문이 없으면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경사가 잘되고 못된 자취와 존망의 계기를 찾아볼 수 없으며 간사하고 사치한 마음도 여기서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고했습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강학(講學)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자저하(世子邸下)는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났고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널리 퍼지고 있으니 좌우에서 이끌어줄 사람을 선발하여 일찍부터 가르쳐 주는 것은 더욱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 전하께서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 보다는 못합니다.
만일 세자께서 공부에 힘쓰게 하려면 먼저 전하부터 자주 경연(經筵)을 열어야 하고, 세자에게 덕을 성취시키게 하자면 먼저 전하부터 덕업(德業)을 닦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마디의 말이나 한가지의 거조(擧措)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수하게 정(正)에서 나옴으로써 어린 세자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여 점차 감화되고 연마하여 밖으로는 스승들과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들이 격언(格言)이나 지극히 정당한 의논〔至論〕을 조석(朝夕)으로 이야기해 올리면 자연히 그런 습성이 지각과 더불어 자라나고 덕화가 마음과 더불어 훌륭히 이루어져 뒷날 요순(堯舜)과 같이 되는 것을 신들이 앞으로 친히 보게 될 것이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며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절검(節儉)을 숭상하여 재용을 절약하는 문제입니다.
재용을 절약할 것에 대해 정신(廷臣)들이 전후도 많이 권고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몹시 안타깝고 크게 근심되는 문제입니다. 신이 다시 진술해 보겠습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재물은 천지간에 그 수량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절약하는가, 절약하지 않는가에 따라 넉넉함과 궁핍함이 바로 나눠지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아무리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사용하면서 절약하지 않으면 어느덧 저절로 미려(尾閭)로 돌아가게 되므로 부득불 검박한 생활을 고수하고 절약하면서 조절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약과 검박함은 하나로 연결된 이치입니다. 검박하면 자연히 절약하게 되고 절약하면 스스로 검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堯)임금은 흙으로 섬돌을 만들고 우(禹)임금은 변변치 못한 옷을 입어도 오히려 삼고(三古)에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漢)과 당(唐)을 중흥시킨 군주의 경우에도 모두 절약과 검박으로 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매우 적으므로 조세 수입으로는 겨우 나라의 재정이나 충당할 뿐입니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는 검박한 것을 장려하고 비용을 절약하는 것을 대대로 가법(家法)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수재와 한재의 근심이 있어도 나라의 재정이 궁박한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최근에 이르러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봉해놓은 양곡마저 고갈되고 각영(各營)과 각사(各司)도 모두 비어서 이예(吏隷)와 군졸(軍卒)들에게 녹봉(祿俸)을 모두 지급할 수 없게 되고 각 공계(貢契)에게 지불하지 못한 돈도 수십만 냥이나 될 정도로 많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목전(目前)의 황급한 근심거리입니다.
전하께서 몹시 걱정하고 근심하는 하교를 자주 내리고 있으나 세상에 유안(劉晏)001)                                             이나 진서(陳恕)002)                                             와 같은 인재가 없다 보니 전하의 근심을 만 분의 일도 부합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노둔한 사람은 정승 자리나 채우고 있으면서 멍하니 사방만 돌아볼 뿐이며 수습할 방책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말로 우러러 권고하고 싶은 것은 바로 검박한 것을 앞세우고 쓰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사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한 가지 비용을 절약하고 내일은 한 가지 일을 줄여 세월을 두고 쌓아간다면 그 효과는 스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시행하고 오랜 세월이 경과해도 바꾸지 않는다면 자연히 재부(財賦)가 넉넉해져서 곡식과 비단이 창고에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비에 대해서 무슨 우려할 것이 있으며 수재와 한재에 대해서 걱정하겠습니까?
비단이나 주옥(珠玉)같은 먼 나라에서 온 진귀한 물건은 눈 앞의 기호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인이 이르기를, ‘진귀한 물건은 사람을 미혹시킨다.〔尤物移人〕’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시킨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물건에 의해 빼앗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앞으로 이런 물건이 나타나게 되면 티끌처럼 보고 즉시 물리쳐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단 전하의 덕이 크게 빛나게 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세자 저하의 거울이 될 것이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또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으니, 대체로 아랫사람들에게 사여(賜與)하는 것은 혹 경사를 맞이하였다든가 아니면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도에 지나치는 경우에는 바지를 아낀 뜻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우리 백성들의 피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삼가 듣건대 근일 경례(慶禮) 뒤 사여한 것이 혹 너무 과람(過濫)하여 아래로 세자를 호위한 조례(皂隷)들까지도 지고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신은 이러한 처사가 경사를 맞아 전하의 기쁜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절검의 정사에는 큰 흠이 되는 것입니다. 신도 아무 공로 없이 여러 번에 걸쳐 자주 예물을 받는 혜택을 입었으므로 갈수록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깊이 유념하시어 모두 절제하여 절약하기 바랍니다.
아, 재물은 백성에게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물이 고갈되면 백성들이 곤궁해지며 백성들이 곤궁해지면 흩어져서 도적으로 되니, 이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요즘 백주에 도적들이 횡행하고 여러 가지 놀라운 변란이 있는 것은 사실 심상한 도적에 대한 우려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구명해 보면 재물이 고갈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재물이 고갈된 까닭은 또한 쓰는 것을 절약하지 않은 데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같이 큰 성인도 나라를 운영하는 방도를 논할 때 반드시 ‘재물을 아껴쓰고 백성을 사랑하라.〔節用而愛民〕’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역(周易)》에서도 ‘재물을 축내지 말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마라.〔不傷財不害民〕’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의 숨은 고통을 근심하여 밥 먹을 겨를도 없으며 한 알의 쌀을 소비하여도 백성들의 신고(辛苦)를 잊지 않고 한 올의 실을 쓰면서도 우리 백성들의 남루한 옷차림을 생각한다면 비록 절약하지 않으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래까지 실제 혜택이 미치게 되고 은혜가 골수에 스며들며 사랑이 폐간(肺肝)에 맺히게 되어 저 간사한 무리들 역시 막지 않아도 스스로 그만둘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사람들이 재정을 절약하여 쓰는 것이 나라의 근본을 굳게 다지는 것이라고 여겼던 까닭입니다. 그러니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으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주(政注)에 관한 일입니다.
벼슬자리를 만들고 직책을 분담하여 각기 유사(有司)가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나라를 운영하는 기본 원칙이며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그리하여 임금이 위엄 있게 위에 앉아서 강령(綱領)을 잡고 이끌면 백공(百工)이 받들어 시행하여 각종 일들이 다 옳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사의 각종 일에 대해서 모두 성상의 재결을 받다보니 벼슬은 다 빈자리가 되었습니다. 중앙과 지방 벼슬을 차제(差除)하는 것은 그 책임이 전조(銓曹)에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정관(政官)이 부름을 받고 모임에 이르면 정리(政吏)가 언제나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내놓으면서 ‘서하(書下)’라고 말하기 때문에 정관은 감히 좋다 나쁘다 하는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빈 자리에 따라 써넣고는 일이 끝나면 물러갑니다. 이것은 한 명의 정리가 충분히 거행할 수 있다면 정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무리 요 임금과 같이 명철하고 순 임금과 같이 총명한들 그 사람의 우열과 선함의 여부를 어떻게 일일이 환히 살필 수 있으며 나아가서 관리를 다 적임자로 얻고 사람마다 모두 그 재능이 해당 벼슬에 알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의역(醫譯)의 과제(科第)나 서리(胥吏)들을 쓰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전하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너무 문란하여 요행수를 바라는 문이 날로 크게 열리니, 가까이 모시는 내시(內侍)들이 연줄을 끼고 사욕을 채우는 일이 또한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승니(僧尼)와 부상(負商)같은 천한 사람들도 흔히 전하의 위엄을 믿고 다니면서 폐단을 일으키며 마을에 걱정을 끼칩니다. 그럼에도 관장(官長)의 위엄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모두 전하의 정사에 누를 끼치고 세교(世敎)를 훼손시키는 만큼 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삼 숙고하시어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며 국체(國體)를 높이소서.
군제(軍制)에 대한 문제입니다.
요즘 군제의 변통은, 신은 물론 시세에 부합되게 하려는 전하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5군영(五軍營)의 설치는 선후가 있는 것이고 모두 선대 임금들의 전성시대에 장점과 손익을 참작하여 정연한 체계를 세우고, 연하(輦下)의 숙위(宿衛)의 중책을 맡은 지가 벌써 수백 년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갑자기 고치시며 조신(朝臣)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전하의 생각대로 처리하였습니다. 신은 시골 사람이어서 나누었다 합쳤다 하는 이해관계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여론이 분분하고 어느 누구도 편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만큼 십분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백배의 효과가 없으면 항상적인 것을 고치지 않는다.〔功不百者 不變其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눈앞의 작은 이득을 보고 갑자기 구장(舊章)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5군영(軍營)의 제도에 대하여 특별히 복구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기예(技藝) 문제입니다.
근년 이래로 일본인들의 내왕이 계속되고 있으며 가지 않고 오래 머무는 자가 있고 나중에 더 온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경성(京城) 내외에 괴이한 모양에 망측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우리 사람들과 뒤섞여 있으니, 호(胡)와 월(鉞)이 한 집안 사람이 되고 사람과 귀신이 뒤섞여 있는 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강화(講和)’에 대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몇 백 년 사이에 일찍이 관(關)을 닫고 약조를 끊은 적이 있습니까? 명분은 강화라고 하나 마음은 사실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용사(龍蛇)를 나라 밖으로 내쫓지 못하고 또 따라서 따르기 어려운 말을 굽혀 따름으로써 소리를 내고 세력이 자라는데 이르러 점점 더 거리낌 없이 거리를 싸다니게 하였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거슬리면 대뜸 칼을 뽑아 들지만 줄곧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망측한 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은 술렁거리고 소요는 날로 심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깊은 대궐 안에 있어 밖의 일은 모두 보고 되지 않고 있으니, 목전(目前)의 우려가 참으로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양 종교의 화(禍)는 홍수나 맹수보다도 심합니다. 법을 세우고 금령을 만들어 코를 베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새끼를 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른바 왜는 바로 하나의 양이(洋夷)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자들에게 유혹되어 빠져 들어가는 폐단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건장한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예를 배우게 하여 지목하여 왜별기(倭別技)라 하니, 그 명칭만 들어도 벌써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무인 집안의 자제들에게 번져가고 또 소년 유생들에게 번져가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어깨를 드러낸 무리들과 함께 뒤섞여 있으면서 누린내 나는 무리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고 있으니, 그것은 수치를 참게 하고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시행하려고 하여도 시행할 수 없고 해 나갈 수가 없는 일이니,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기예가 어떤 특별한 기술인지 알지 못하지만, 가령 그 기술을 모두 배운다고 한들 적과 대적하여 이길 수 있으며, 그 기술을 믿고 두려울 것이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우문(右文)의 나라이고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되어 군사에 관한 정사가 점차 해이해져 척적(尺籍)은 대부분 허액(虛額)이고 무기는 쓸 만한 것이 없으므로 도리어 패상(覇上)의 구멍뚫린 문(門)보다도 못하게 된 지 오랩니다. 그렇지만 시(矢)와 환(丸)의 두 가지 기술은 바로 우리의 장점입니다. 각각 장령(將領)으로 하여금 달마다 계절마다 연습시키고 성과에 따라서 혜택을 베풀어 우대하며, 규율을 세움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으로 성(城)을 만들어 용감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한다면 설사 진(秦)나라와 초(楚) 나라의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무기라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니, 자강(自强)의 방법이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기예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모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대로 침략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결국 무슨 유익한 점이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기예를 학습하는 한 가지 문제는 빨리 철폐하게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일체 조약 밖의 일로서 따를 수 없는 문제는 일체 의리에 근거하여 배격하되 말이 사리에 합당하다면 저들이 아무리 교활하여도 자기의 계책을 실현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재처(裁處)하시어 국사를 다행하게 하소서.
영선사(領選使)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은 지난 겨울에 영선사가 천진(天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사유는 멀리에 나가 있어 자세히 알지 못하다가 서울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먼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003)                                             이 있었고 뒤이어 전개(專价)가 갔으며 또 학도(學徒)와 공도(工徒)를 몇 명씩 데리고 갔다 합니다.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안팎으로 어떤 기밀이 있었는지 신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들은 것에 의하면 가서 저들의 언어와 기술을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전적으로 이 일 때문이라 한다면 이 조치가 크게 지나치지 않습니까? 해당 일로 말하면 원래 하찮은 일인데 겉으로 보기에 일을 요란하게 벌려 저들에게 수치를 받고 사방에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또한 왕래하고 체류하는 비용도 적지 않으니 어찌 지금 가장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모로 생각하고 헤아려 보아도 조금도 이로움이 없는 일이고 훼손시키고 나라의 재정을 허비할 뿐입니다. 이것은 신이 천려일득(千慮一得)내용이니, 전하께서는 신의 이 말을 중앙과 지방의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보고 만일 신의 말이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영선사 일행을 속히 돌아오게 함을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건대 이번에 문의관(問議官)의 행차로 말하더라도 국가 안위의 기틀과 관계되는 일인 만큼 응당 중론(衆論)을 널리 구하고, 옛 어진이를 본받으며 큰 계책을 원칙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독단하고 명이 내리자마자 사신의 수레가 출발하니, 궁전 밖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애초에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설령 그 계획이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일의 체면을 중시하고 널리 물어보아야 하는 도리에 어긋나므로 신은 전하를 위하여 이 조치에 대해 아쉽게 여깁니다.
아! 양이들이 침략해 들어와 소란을 일으키며 노략질을 한 것이 오랜 일이 아닌데 어떻게 나라의 형세가 약하다고 대뜸 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일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진(晉) 나라에 저족(氐族)과 강족(羌族)이 뒤섞여 사는 것을 배척하지 않은 결과 결국 5호(五胡)의 난리를 빚어내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처음에 일시적인 미봉책을 써가며 그럭저럭 지내왔는데 결국에 가서는 이쪽 저쪽에서 사단거리가 생겨나 그 해독이 온 나라에 미쳤습니다. 이것이 어찌 경계하여야 할 지난날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명(使命)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신은 우리 나라의 사람으로서 저 나라 내부의 문제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제가 국가 대계와 관계되는 만큼 침묵을 지킬 수 없습니다. 처음에 비록 형세상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머리를 숙이고 통분한 마음을 참아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그렇게 해온 지도 벌써 200여 년이나 됩니다. 지금 하루 아침에 갑자기 다른 의론이 있다고 사신의 왕래를 중지시키자고 한다면 실제 형편이 그에 따라 궁색하고 외면상 자못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인이 와서 머물러 뒤섞여 있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저들이 혹시 그 부추김 때문일 것이라. 의심하는 것도 하나의 염려되는 단서입니다. 이와 같은 일의 득실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데, 현명한 전하께서 어떻게 실수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 나라의 신하 구양수(歐陽修)도 자기의 임금에게 고하기를, ‘삼가 선대 임금 때의 사적을 보니, 대체로 나라의 큰 정사와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백관들을 다 모아놓고 합의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성인들이 일을 신중히 대하고 감히 전임하거나 독단하지 않으며 공론을 받아들여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도움 받으려는 뜻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나라를 위한 아주 긴요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자기의 뜻만을 쓰면 작아진다.’라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독단한 일은 쉽게 뒤에 가서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문제는 반드시 조정에 공개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서 그 중에 좋은 의견을 선택하여 시행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본래 시골 출신의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아무 지식도 없으며 그저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이 타고난 성품에 기초한 것으로 감히 좁은 소견으로 근폭(芹曝)을 바친 것을 본받아 망령되게 아뢰는 바이니, 전하께서 사람을 보고 그 의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작은 개똥벌레 불빛과 같은 하찮은 빛도 해와 달빛에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날에 스쳐가는 이야기를 대략 들은 것에 의하면 대신들의 연명 차자(聯名箚子)가 성심(聖心)을 몹시 격하게 만들어 그 처분이 매우 온당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무슨 일 때문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그 대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은 걱정과 개탄으로 주자처럼 눈물을 흘릴 뻔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만약 서울에 있었더라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엄한 견책을 받았을 것인데 어떻게 지방에 있었다고 하여 견책에서 벗어나 태연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 논한 문제도 더구나 전하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처분을 내림으로써 나라의 법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비지(批旨)에서 벌써 나의 속생각을 모두 털어놓았는데 지금 이 사임을 청하는 글은 무엇 때문에 거듭 아뢰는가? 진술한 여러 조항의 말과 글들에는 대체로 구체적이거나 소략한 차이가 있기는 하다. 지난날 연석(筵席)에 나왔을 때 무엇 때문에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는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옳거니 그르거니 하며 서로 의논하는 문제는 대궐에 들어와 서로 마주앉은 다음에 할 일이다. 그러니 정승의 소임을 어찌하여 그만두려고 하며 또한 사양하려고 하는가? 경은 빨리 올라와서 훌륭한 계책을 모두 진술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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