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9권, 고종19년 1882년 1월

싸라리리 2025. 1.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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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자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19권】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관례(冠禮) 주갑(周甲)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고 관리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옥이 장식된 궁궐에서 노(魯) 나라의 산마루와 같이 수(壽)를 누리시기를 기원하였으니 축수하는 간절한 정성의 표현이며, 예복을 갖추어 입고 관례의 의식을 생각하였으니 대왕대비전께서 관례를 치른 지 60번째 해가 돌아온 경사가 있어서였다. 어찌 송축만 하겠는가. 이에 크게 교서를 반포하노라. 생각건대 인자하신 대왕대비전의 연세는 억만년 장수할 터이니 경사가 어디 한두 번에 그치고 말겠는가. 옛 시서(詩書)에 수록된 것과 죽백(竹帛)에 기록된 것을 상고해 보았으나 그 공덕(功德)에 견줄 사람이 없다. 비유컨대 천지가 유구(悠久)하고 해와 달이 정명(貞明)한 것과 같아서 복록이 뻗어나가 한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칭호는 누차 옥첩(玉牒)에 올려도 그 덕을 형용하기에 부족하고 훌륭한 가르침은 항상 청궁(靑宮)을 감싸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인도해 주리라. 옛날의 관계례(冠筓禮)를 치를 때 이미 성대한 예식이 갖추어졌는데, 이에 아름다운 세월이 흘러 다시 그 해가 돌아왔다.  쑥을 뜯어 제사를 받드는 정성이 단정한 위의(威儀)에서 드러나니 몸가짐이 법도에 맞고 북당(北堂)에 망우초(忘憂草)를 심고 긴 세월을 보내니 옥백을 올렸던 해가 다시 돌아왔다. 원량(元良)의 관례를 치를 즈음에 길일(吉日)을 잡았는데 세월의 육갑을 미루어 보니 부절처럼 맞았다. 이로부터 80세에 이르고 100세를 넘어서 큰 경사를 맞이해 모든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깊은 사해(四海)와 높은 오악(五嶽)에 이르더라도 돌아보건대 어찌 나의 정성에 비길 수 있으리오. 전대를 통틀어 드문 경사였고 실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하였던 의전이다. 옥잔에 술을 올려 겸양하는 성충(聖衷)을 체득하고 아름다운 광주리로 예물을 올려 꾸미려는 미곤(微悃)을 드러내어서, 이미 종묘에 정성껏 제사를 드렸고 또 만방에 선포하였다. 요순(堯舜)의 상서로움이 이번 정월 길일을 만났으며,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의 성대함은 천만세를 기원하노라. 따뜻한 봄 만물이 소생할 때 싹들이 움트고 뇌우(雷雨)가 일어나는 것은 해괘(解卦)의 상(象)이니, 죄과들을 모두 씻어 주노라.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형죄(死刑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노라.  아! 해주(海籌)가 길이 보태지고 무녀성(婺女星)은 더욱더 빛나게 되리라. 치도(治道)는 교화를 일으키는 것만 한 것이 없으므로 어버이로서의 자애로움에서 신공(神功)을 포용하며, 왕도 정치는 인(仁)을 베푸는 것이 우선이므로 수(壽)를 내려주신 데에서 큰 복을 넓히노라. 이에 교시하니, 모두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태호(閔台鎬)가 지었다.】


【원본】 23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관례(冠禮) 주갑(周甲)을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하고 관리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옥이 장식된 궁궐에서 노(魯) 나라의 산마루와 같이 수(壽)를 누리시기를 기원하였으니 축수하는 간절한 정성의 표현이며, 예복을 갖추어 입고 관례의 의식을 생각하였으니 대왕대비전께서 관례를 치른 지 60번째 해가 돌아온 경사가 있어서였다. 어찌 송축만 하겠는가. 이에 크게 교서를 반포하노라. 생각건대 인자하신 대왕대비전의 연세는 억만년 장수할 터이니 경사가 어디 한두 번에 그치고 말겠는가. 옛 시서(詩書)에 수록된 것과 죽백(竹帛)에 기록된 것을 상고해 보았으나 그 공덕(功德)에 견줄 사람이 없다. 비유컨대 천지가 유구(悠久)하고 해와 달이 정명(貞明)한 것과 같아서 복록이 뻗어나가 한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칭호는 누차 옥첩(玉牒)에 올려도 그 덕을 형용하기에 부족하고 훌륭한 가르침은 항상 청궁(靑宮)을 감싸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인도해 주리라. 옛날의 관계례(冠筓禮)를 치를 때 이미 성대한 예식이 갖추어졌는데, 이에 아름다운 세월이 흘러 다시 그 해가 돌아왔다.
쑥을 뜯어 제사를 받드는 정성이 단정한 위의(威儀)에서 드러나니 몸가짐이 법도에 맞고 북당(北堂)에 망우초(忘憂草)를 심고 긴 세월을 보내니 옥백을 올렸던 해가 다시 돌아왔다. 원량(元良)의 관례를 치를 즈음에 길일(吉日)을 잡았는데 세월의 육갑을 미루어 보니 부절처럼 맞았다. 이로부터 80세에 이르고 100세를 넘어서 큰 경사를 맞이해 모든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깊은 사해(四海)와 높은 오악(五嶽)에 이르더라도 돌아보건대 어찌 나의 정성에 비길 수 있으리오. 전대를 통틀어 드문 경사였고 실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하였던 의전이다. 옥잔에 술을 올려 겸양하는 성충(聖衷)을 체득하고 아름다운 광주리로 예물을 올려 꾸미려는 미곤(微悃)을 드러내어서, 이미 종묘에 정성껏 제사를 드렸고 또 만방에 선포하였다. 요순(堯舜)의 상서로움이 이번 정월 길일을 만났으며,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의 성대함은 천만세를 기원하노라. 따뜻한 봄 만물이 소생할 때 싹들이 움트고 뇌우(雷雨)가 일어나는 것은 해괘(解卦)의 상(象)이니, 죄과들을 모두 씻어 주노라.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형죄(死刑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노라.
아! 해주(海籌)가 길이 보태지고 무녀성(婺女星)은 더욱더 빛나게 되리라. 치도(治道)는 교화를 일으키는 것만 한 것이 없으므로 어버이로서의 자애로움에서 신공(神功)을 포용하며, 왕도 정치는 인(仁)을 베푸는 것이 우선이므로 수(壽)를 내려주신 데에서 큰 복을 넓히노라. 이에 교시하니, 모두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태호(閔台鎬)가 지었다.】


【원본】 23책 1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진하(進賀)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관리들을 차등 있게 표창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심동신(沈東臣), 대거 승지(對擧承旨)                     서학순(徐鶴淳), 선교관(宣敎官)                     이재윤(李載允)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부호군(副護軍)                     조운섭(趙雲涉)에게 백관가(百官加)를 직접 주었다.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설날이다.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운현궁(雲峴宮)에 문후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노인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다.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렸다.

 

1월 3일 경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예조 당상(禮曹堂上), 관각 당상(館閣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세자(世子)의 자(字)를 정하는 길일입니다. 정할 자의 비삼망(備三望)을 입계하여 낙점 받는 것이 바로 옛 규례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자의 자를 정명(定名)할 때 이미 의정(議定)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올렸습니다. 이번에 만일 다시 삼망(三望)을 갖춘다면 일이 중복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망(單望)으로 계하(啓下)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4일 신묘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 서연관(書筵官)                     이상수(李象秀)를 돈소(敦召)하였다. 원량(元良)의 삼가례(三加禮)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1월 6일 계사

전교하기를,
"이제부터 왕세자(王世子) 동여(動輿) 할 때 전배(前排)하는 일은 두 군영(軍營)에서 거행하라."
하였다.

 

1월 7일 갑오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世子)가 처음으로 전알(展謁)의 예를 행한 것은 매우 아름답고 기쁘다. 경사를 기념하는 거행이 없을 수 없으니 묘궁(廟宮)의 도제조(都提調) 이하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종묘 제조(宗廟提調)                     심순택(沈舜澤)과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                     박제인(朴齊寅)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월 8일 을미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의 전알(展謁)에 세자(世子)가 거동할 때 배종(陪從)하였던 사(師)·부(傅)와 춘방과 계방 이하는 차등 있게 표창하고, 상례(相禮)                     유석(柳)에게 가자(加資)하였다.

 

민창식(閔昌植)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공인(貢人)들의 소회(所懷) 중에 풍저창(豐儲倉)의 공인들의 상품(上品)의 도련지(搗鍊紙)가 가용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옛 규례대로 서로 계산하여 덜어주며, 후백지(厚白紙) 수가(受價)는 저주지(楮注紙)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전생서(典牲暑)의 공인들이 남겨놓은 것은 태상시(太常寺) 공인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며, 내자시(內資寺)의 공가(貢價)는 옛 규례대로 지불하고, 구피계(狗皮契) 공인들의 가용 중 호피(虎皮) 40장, 녹비(鹿皮) 30장에 대해 우선 값을 계산하여 주고, 지의계(地衣契) 공인들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들어온 양을 참작해서 속히 마련하여 지불하고, 빙고(氷庫) 공인들에 대해서는 빙자하여 함부로 책납하는 등의 폐단을 일체 금하도록 하고, 운송비와 수리는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출급(出給)하게 하고, 선공감(繕工監)의 정철계(正鐵契)의 공인들은 장인철계(匠人鐵契) 수가례(受價例)에 따라 마련하게 하소서. 이 내용을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월 9일 병신

생원시(生員試) 회방인(回榜人) 이인기(李寅夔)와 무과(武科) 회방인 최영원(崔榮遠)·정주응(鄭周應)·김인항(金仁恒)과 100살인 박상준(朴尙準)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세자(世子)의 인장(印章)을 만들 때의 승지(承旨)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1월 10일 정유

왕세자(王世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쌍동고(雙童䯻), 공정책(空頂幘),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남여(藍輿)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와 남여에서 내려 연(輦)을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와 문묘(文廟)의 연을 내리는 곳에 이르러 연에서 내려 남여를 타고 편차(便次)에 들어갔다. 세자가 유생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걸어서 동협문(東挾門)을 경유하여 나오니 예모관(禮貌官)이 앞에서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 다음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관세를 마치고 동계(東階)로 올라가 바로 위존소(位尊所)의 서쪽을 향하여 섰다. 공자(孔子) 위패 앞에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을 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그 다음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앞에서 한 의식절차대로 작헌하고 내려와 복위(復位)하니, 집사자(執事者)가 나뉘어서 전내(殿內)와 양무(兩廡)의 종향신위(從享神位) 앞으로 나아가 조전(助奠)하였으며 그것이 끝나자 사배례를 행하고 이어 편차로 돌아왔다. 입학례를 할 때가 되자 왕세자가 이어 유생의 건복을 갖추고 나오니 예모관이 앞에서 인도하여 명륜당(明倫堂) 동쪽문 밖 자리에서 서향하여 서게 하고, 박사(博士)가 공복(公服)을 갖추니 집사자가 인도하여 명륜당 동쪽 섬돌 위에서 서향하여 서게 하였다. 장명자(將命者)가 나와 문 서쪽에 서서 동향하여 아뢰기를, "감히 행사를 청합니다."하니, 왕세자가 조금 앞으로 나서서 말하기를, "모(某)는 선생에게 수업하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장명자가 들어가 고하자 박사가 말하기를, "태호(台鎬)는 덕이 없으니 왕세자께서는 욕보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장명자가 나와서 고하니, 왕세자가 굳이 청하기를, "모는 선생에서 수업하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장명자가 들어와 고하니 박사가 말하기를, "태호는 부덕하나 청컨대 왕세자께서 자리에 나아가면 태호가 감히 만나 뵙겠습니다."하니, 장명자가 나와서 고하자, 왕세자가 말하기를, "감히 빈객(賓客)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만나주기 바랍니다."하였다. 장명자가 들어와서 고하니, 박사가 말하기를, "태호는 사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장명자가 나와서 고하니, 집비자(執篚者)가 광주리를 왕세자에게 주자 왕세자가 광주리를 잡았다. 박사는 동계 아래로 내려와 서향하고 기다리니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돌아 서계(西階)의 남쪽으로 나아가 동향하니 예수(醴脩)를 받든 자가 세자의 서남쪽에 섰다. 왕세자가 꿇어앉아 광주리를 올리니 박사가 재배(再拜)하고 왕세자는 답배(答拜)하였다. 왕세자가 꿇어앉아 광주리를 가져다 드리니 예수를 받든 자가 따라서 박사에게 예수를 올리니 박사는 꿇어앉아서 받았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뜰 사이에 세우고 북향하여 재배하게 하고 편차에 나가 기다리게 하였다. 박사가 상복(常服)으로 갈아입고 당(堂)에 올라 자리에 나아갔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서계로 올라 박사 앞에 나아가 자리로 갔다. 집사가 강서(講書)인 《소학(小學)》을 박사의 앞과 왕세자의 앞에 놓았다. 박사가 글을 읽자 왕세자도 따라 읽었다. 박사가 뜻풀이를 하였고 그것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書案)과 책을 거두었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어가 다시 쌍동고에 공정책을 쓰고 곤룡포로 갈아입고 남여를 타는 장소에 이르러 남여를 탔고 연을 타는 자리에 이르러서는 연을 타고 돈화문(敦化門)            동협문을 경유해서 대내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소학(小學)》을 강하였을 때 왕세자의 나이는 겨우 9살이었으나 몸가짐과 거동이 의젓하여 마치 덕을 완비한 사람과 같았다. 종관(從官)과 많은 선비들 등 다리를 에워싸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3,500여 명이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칭송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원본】 23책 19권 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왕세자가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소학(小學)》을 강하였을 때 왕세자의 나이는 겨우 9살이었으나 몸가짐과 거동이 의젓하여 마치 덕을 완비한 사람과 같았다. 종관(從官)과 많은 선비들 등 다리를 에워싸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3,500여 명이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칭송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창고에 봉입하는 폐단을 바로잡는 일로 초기(草記)를 올려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심도(沁都)의 포량미(砲糧米)를 호남(湖南)의 전세(田稅)로 바꾸어 획급하였기 때문에 선주(船主)들이 곤란한 점들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종전대로 전세는 경선주(京船主)들이 운송하여 들이게 하고 포량미는 심도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할 일로 해조(該曹)와 해영(該營)에 분부하소서. 전세를 받는 곳은 만리창(萬里倉)에 이미 주소(鑄所)를 설치하였으니 군자감(軍資監) 별고(別庫)로 하여금 편의대로 통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1일 무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의 입학과 관련한 경축 행사를 진행하고 하례를 받았으며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자가 있으니 온 나라가 이로써 곧고, 세자가 보위를 계승하는 지위에 임하니 한 가지 일을 행하고도 세 가지 좋은 효과를 모두 얻는다. 세자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겸양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이에 교문을 작성하여 온 나라에 크게 선포함으로써 경사를 함께 하고자 하노라.
열성조에서 세자를 교육하던 방법을 상고해보건대, 대체로 유년기에 태학(太學)에 입학하는 규례가 있었다. 관율(寬栗), 강간(剛簡), 직온(直溫)을 가르친 일은 순(舜) 임금이 기(夔)를 전악(典樂)으로 삼아 주자(冑子)를 가르치던 법이며, 군신(君臣), 부자(父子), 장유(長幼)의 윤리를 서술한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周) 나라의 벽옹(辟雍)에서 본 것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혀 밖으로는 예(禮)를 닦고 안으로는 악(樂)을 닦았으며 어려서부터 깨우쳐 집에 들어가면 보모가 있고 집 밖에는 스승이 꼭 있었다.
돌아보건대, 세자는 천품(天稟)이 훌륭하고 온화하고 문아(文雅)함이 나날이 성취되고 있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중광(重光), 중륜(重輪), 중휘(重輝), 중윤(重潤)의 천문 현상이 예고하는 것은 장기간의 안정과 치세이고, 정도(正道), 정인(正人), 정사(正事), 정언(正言)을 스승이 가르치는 것은 신변에서 보좌하면서 행실을 살피도록 하려는 데 의의가 있다. 주강(晝講)에서 《효경(孝經)》의 뜻을 풀이하여 부귀를 지키고 백성들을 조화롭게 할 만하였으며, 춘방(春坊)에서 세자가 지었다고 반포한 시는 우주와 같이 뜻이 크고 천지와 같이 호연(浩然)하였다. 종묘와 경모궁을 배알하여 예를 준수하였으며, 대궐을 지날 적에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를 지날 때에는 종종걸음으로 공경을 표하였다. 동쪽 섬돌에서 관례를 치를 날을 바르고 좋은 날짜로 받았다. 이에 성인을 배알하고 폐백을 올려 제사를 드리고 스승에게 나아가 경서를 펴 놓고 학습을 하였다. 예는 복유(服儒)에게서 크게 아름다워지니 마땅히 도성으로부터 선행을 시작하며, 의(儀)는 함장(函丈)에게서 보고 느끼는 것이니 향당에 높은 어른이 있는 것과 같았다. 당(堂)에 올라 높은 처마를 바라보면서 나의 소원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것이라 하였고, 서연에 임하여 사단(四端)의 견해를 논하면서 사람은 모두 요(堯)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진퇴(進退)하고 주선(周旋)함에 모두 법도에 맞아 의젓한 것이 덕을 이룬 인재 같았고, 학식과 견해가 뛰어나 완전히 성품의 본원을 따르는 듯하니, 누군들 다리를 에워싸고 구경하지 않겠는가. 이는 곧 책을 펴기만 하면 유익함이 있는 이치이며, 소자(小子)들이 어찌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근본하는 이치이다. 단정한 선비로 하여금 세자와 함께 거처하게 하는 것은 효인예의(孝仁禮義)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태모(太母)에게 만수무강을 축수하는 때에 그 손자를 위한 도모책을 세웠으며 햇수도 또한 선친이 9살에 입학한 것과 똑같으니 우리나라의 본래 있던 예이다. 나 한 사람의 경사를 뭇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원(乾元)을 체득하여 따뜻한 봄이 되니 화기(和氣)가 나타나고 교서를 내리니 은택이 두루 미치리라. 이달 11일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으로서 사형죄(死刑罪) 이하를 모두 사면하노라.
아, 대인이 광명을 계승하니 군자에게 복이 내릴 것이다. 다스림은 인을 행하고 덕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면 태평성대가 삼고(三古) 시대를 초월할 것이며, 도(道)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온 세상에 예의가 충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모두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하노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태호(閔台鎬)가 지었다.】


【원본】 23책 19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신들이 보건대, 세자의 지혜로움은 타고난 것입니다. 오르고 내리며 절하고 꿇어앉는 모든 동작이 엄연하면서도 저절로 다 법도에 맞았습니다. 다리 위나 문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우레와 같아 모두들 종사(宗社)가 무강(無疆)한 반석 같으리라 칭송하였습니다.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대체로 세자의 입학례(入學禮)는 주(周) 나라 때부터 크게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열성조(列聖朝)께서 가법(家法)으로 삼았습니다. 나물을 올려 제사하여 성현(聖賢)을 사모하고 대광주리에 음식을 담아 올려 사도(師道)를 높인 것은 그 몽매함을 정도(正道)로써 길러서 자연히 보고 느낌에 선단(善端)이 발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솔선하여 사물을 대하며 인도하여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은 진실로 전하의 마음에 이미 간절한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가관(加冠)하기로 한 길일이 얼마 남지 않아 성장해가는 일을 기대함에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날마다 빈료(賓僚)들을 접견하여 강독하는 과정을 혹시라도 중단함이 없게 하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을 확충하고 길러야 합니다. 초야에 은둔한 덕 있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우두커니 꼼짝 안 하고 있는데, 더욱 부지런히 간절히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주연(胄筵)에 나오게 하여 바른말과 바른 일로 덕성을 훈도(薰陶)하고 차츰차츰 함영(涵泳)하여 일취월장하도록 하여야 하니, 이것이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근본이 어려서 익히는 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하기를, ‘좌우(左右)의 사람들을 잘 선발하여 일찍부터 가르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다.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좌우의 사람이 바르면 태자(太子)가 바르게 되고, 태자가 바르면 천하는 안정될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만세의 지론입니다. 신들이 끝없이 빌고 바라는 것도 오직 이에 있습니다. 삼가 마음을 맑게 하여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입학할 때의 박사(博士) 이하의 배종관(陪從官)들과 사(師)·부(傅)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박사                     민태호(閔台鎬), 이사(貳師)                     송근수(宋近洙), 좌빈객(左賓客)                     이재면(李載冕), 우빈객(右賓客)                     조영하(趙寧夏), 우부빈객(右副賓客)                     정범조(鄭範朝),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 보덕(輔德)                     서정순(徐正淳), 겸보덕(兼輔德)                     민창식(閔昌植), 대사성(大司成)                     오익영(吳益泳), 진선(進善) 김낙현(金洛鉉)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왕세자가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한 이튿날 권정례(權停例)로 진하할 때의 사(師)·부(傅)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홍만식(洪萬植), 선교관(宣敎官)                     김문현(金文鉉)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이용원(李容元)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12일 기해

문묘(文廟)에 나아가 전배(展拜)를 올렸다. 이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참반 유생(參班儒生)의 응제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 유생 이서영(李瑞永), 홍형주(洪瀅周), 신정균(申政均)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좌찬성(左贊成)                     송근수(宋近洙)를 재상에 제배하라고 명하였다.

 

서당보(徐堂輔)를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송근수(宋近洙)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승배(陞拜)하였다.

 

우의정                     송근수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예전 성조(聖祖)께서 융성할 때 경의 선조(先祖)는 도덕의 근원을 접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책임을 지고 임금을 도왔으며, 물과 고기와 같이 밀접한 관계로 일함으로써 그 높은 덕과 큰 위업이 역사에 빛났다. 나도 그 전날 이 사실을 듣고 감복하였다. 이번에 경을 정승으로 임명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경은 바로 그 할아버지의 손자로서 가학(家學)에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고,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두루 역임하여 많은 업적을 나타냄으로써 고가(古家)의 범절과 장자(長子)의 풍모가 우뚝하였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기대가 오래 전부터 절실하였다. 이에 꿈을 빌릴 필요도 없고 점을 칠 필요도 없이 나의 재상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정말 만족하여 기쁜 나머지 잠이 오지 않는다. 관례대로 사양하는 상소를 올릴 것 없이 즉시 하명에 응함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 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태호(閔台鎬)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삼았다.

 

1월 13일 경자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윤허한다는 비답을 내리고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좌의정(左議政)                     서당보(徐堂輔)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승배(陞拜)하고, 우의정(右議政)                     송근수(宋近洙)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승배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관례(冠禮)할 때의 주인(主人)은 흥인군(興寅君)으로 하라."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이번 20일 왕세자(王世子)의 관례(冠禮)를 거행할 때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들의 사체(事體)는 조정 관리들과 다른 만큼 세자를 모시고 전당(殿堂)에 오르고 내리는 것은 일의 규례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조(禮曹)의 의주(儀注)를 가져다 보니, 세자궁의 관리들이 전당으로 올라가 참가하는 절차는 없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세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리들로서 다행히 성대한 예식을 치를 때를 만났는데, 만일 규례에 따라 세자를 모시지 못하게 된다면 인정과 예의로 보아 억울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본원(本院)의 등록을 상고하여 보니, 기묘년(1819)에는 세자궁의 관리 전원과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2원(員)이 검을 차고 다같이 전당으로 올라간 전례도 있습니다. 그대로 준용할 만하니, 전적으로 기묘년(1819)의 전례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최응(李最應)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김병시(金炳始)를 시강원 좌부빈객(侍講院左副賓客)으로 삼았다.

 

1월 14일 신축

영의정(領議政)        서당보(徐堂輔)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새해가 어느덧 이르고 온갖 복록이 모두 몰려들어 우리 대왕대비(大王大妃)는 관례를 치른 지 60돌이 됩니다. 전하의 효성은 대비(大妃)의 연세를 늘 기억하고 있는 데서 더욱 빛났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세자 저하(世子邸下)도 선성(先聖)에게 예를 올리고 성균관에 나아가 배우기 시작하는 입학의 큰 의식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산골짜기와 바닷가의 백성들까지도 모두들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신이 지난날 외람되게 관직제수에 응한 것이 어찌 전혀 헤아려 보지도 않고 그렇게 했던 것이겠습니까. 경사스러운 일이 눈 앞에 닥쳐왔으므로 기쁨과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데다가 돈독히 신칙(申飭)하는 하교가 거듭 내렸으므로 신하의 의리와 명분상 두려워 마침내 염치를 무릅쓰고 달려 나와 숙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옛날 사람들이 이른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임금의 고마운 뜻을 받들 수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성상께 바라는 것은 전하의 앞에 들어가 신의 늙고 병든 정상을 직접 말씀올리고 전하가 하늘과 같은 어진 마음으로 불쌍하게 살펴주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신의 정성이 부족하고 올리는 말이 변변치 못한 관계로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게다가 연이어 경사스러운 행사를 당하고 보니, 더는 감히 번거롭게 의견을 올릴 수 없었으므로 우물쭈물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신이 사임하려는 한 가지 생각은 자나 깨나 밥을 먹을 때나 쉬고 있는 사이에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의정(領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이 연이어 사퇴하자 변변치 못한 신은 계속 승급되어 대뜸 삼상(三相)의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몹시 두렵고 떨리는 신의 마음은 처음 정승으로 임명되었을 때보다 곱절 더 심합니다.
대체로 나라에 있는 세 정승으로 말하면 누군들 그 위치가 매우 중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지위가 높고 나라에서 의지하는 것을 보면 영의정은 각별한데 어찌 품계에 따라 등급이 올라가는 일반 관리와 같이 볼 수 있겠습니까. 아, 벼슬에는 각기 지켜야 할 지조가 있고 직책에는 제각기 힘써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니 만큼 재주를 헤아려 벼슬을 줄 때 혹 사람과 벼슬이 적합지 못하다거나 평정을 잘 못하면 크게 낭패보고 크게 손해 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사를 실시하는 본 관청으로 말하면 만백성이 우러러 쳐다보며 영의정의 자리로 말하면 온갖 책임이 모여 있는 자리입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고 세도(世道)의 득실(得失)에 관계되니 그에 대한 기대는 대단히 중하며 그 임무는 매우 큰 것만큼 위에서는 단 하루라도 경솔히 맡길 수 없고 아래에서는 하루도 군색스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신이 뻔뻔스럽게 제수하라는 명을 받들면 신의 수치일 뿐 아니라 바로 조정의 수치입니다. 성의를 다하여 전하의 뜻을 돌려 세우면 그것이 어찌 신에게만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바로 온 나라의 다행인 것입니다. 만일 신의 재주가 원대한 계책이 있어 조금이라도 전하의 뜻에 맞게 일을 할 수 있다면 성상의 의지와 관심이 그렇게도 융성한데 어찌 이처럼 망설이겠습니까?
더구나 동궁의 관례를 치를 길일을 이미 잡아서 의례를 연습할 일이 지금 있게 되었는데 빈(嬪)을 맡으라는 하교가 신에게 내렸으니, 미천한 신으로서야 어찌 천만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장 황급히 달려가서 성대한 의식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참으로 맡고 있는 직책으로는 사실 달려가 하명에 응하기가 곤란합니다. 이에 감히 우러러 숭엄하신 성상을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하늘과 같이 덮어 주는 은택을 깊이 미루어 주셔서 빨리 신의 직책을 체차하는 명을 내리소서. 그리하여 나라의 일을 다행하게 하고 사사로운 분수가 편해지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에게 영의정의 직책을 맡긴 것이 어찌 사적으로 높고 영예로운 벼슬자리를 주기 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바로 백성과 나라의 일에 크게 관계되기 때문에 경의 노숙한 덕망에 의탁해 나의 모든 신료들에게 의표를 보여 여러 공적을 이룩하고 함께 정책을 닦아 나가 어려운 나라 일을 크게 수습해 나가고자 한 것이 경은 어찌하여 곧장 앞으로 나와 담당할 것은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망설이면서 물러서는 것인가. 더구나 오늘 세자의 관례에 대한 의식 연습은 경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시행하려 하고 있으니, 즉시 수레를 재촉하여 조정에 나옴으로써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문(儀文)을 빛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5일 임인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초간택(初揀擇)을 행하였다.

 

송근수(宋近洙)를 가례도감 도제조(嘉禮都監都提調)로, 민겸호(閔謙鎬)·김병시(金炳始)·정범조(鄭範朝)를 제조(提調)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송근수(宋近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길하고 좋은 날짜에 세자(世子)의 입학례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알성례(謁聖禮)를 행하는 일이 훌륭히 시행되어 전하는 기뻐하며 모든 사람들은 즐거워하였습니다. 신은 외람되게 세자궁(世子宮)의 관리로서 세자의 가까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반열에 서서 성대한 의식을 목격하였으니, 서생(書生)의 영광으로서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하루빨리 시골에 돌아가 마을의 노인들과 함께 무강(無疆)한 경사를 축복하고자 하였는데, 천만 뜻밖에 특별 제수(除授)를 갑자기 내려 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의 직함을 제수하였고, 곧이어 좌의정에 올려 주시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몹시 황송하고 떨려 곧장 담장 뒤에 숨어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연이어 은혜로운 유시(諭示)를 받아보니 신의 선조들을 추념(追念)하시는 감동 어린 정성이 행간에 넘치시어 감회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말씀과 얼굴에 흘러 넘쳤으므로 신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꿇어앉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실로 불초하여 욕되게도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려 전하의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자신을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황송하여 더욱 몸 둘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건대, 신의 선조는 세 번이나 복상(卜相)되었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신의 선조가 받지 않았던 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래 학식이 없고 견문 또한 부족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처결해야 할 일이나 백성과 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반열 사이에서 응당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해서도 역시 암둔합니다. 설사 한가하고 긴요하지 않은 일을 맡을 경우에도 일마다 말썽이 생기고 이르는 곳마다 군색한 일이 나타난 데 대해서는 전하도 깊이 통촉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은혜를 잘못 베풀어 마치 심상하게 일반 관리를 임명하듯이 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치고 놀라움과 의혹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의 조정에서 관리를 신중히 선발하는 뜻이겠습니까.
아, 신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공부하여 왔으며 시골의 평범한 선비로 사는 것을 실로 자기의 본분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에 오면서 남달리 두터운 성상의 혜택을 입어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들이 조정 관리로 늘어서게 되는 바람에 영광스러운 제수(除授) 명령이 연이어 이르러서 가문이 빛나게 되었습니다.
일전의 별단에서는 신과 신의 조카가 다같이 품계를 올려 받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품계와 벼슬이 한껏 오른 것으로 인한 두려움은 못가에 선 사람이나 쌓아놓은 통나무 위에 앉은 사람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이 비상한 하교가 내려지니, 신은 정말로 이렇게 된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신이 지금까지 임명받은 직책으로 말하면 외람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명하기만 하면 제때에 응한 것은 그저 달려가서 받는 것을 공경스러운 일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답습하여 끝없이 승진하다 보니 전하로 하여금 오늘날 이 잘못된 선발이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그 첫째로는 신이 전혀 염치없이 행동한 죄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영예와 총애만을 탐낸 죄입니다. 벼슬에 나가고 물러가고 사양하고 받고 하는데 대하여 따져 볼 새도 없이 정신과 혼백이 달아나 여러 날을 두고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실정을 모두 드러내어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이 새로 받은 명을 환수하시어 여론에 답하시는 한편 미천한 신의 분수가 편안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흉금을 툭 털어놓고 거듭 유시하였으므로 경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하교에 응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사양하는 소장이 이르다니, 참으로 성의가 부족하고 말이 변변치 못하여 경을 돌려세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참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가문의 유업(遺業)에 대하여 경은 실추시켰다고 하는데, 나는 시(詩)와 예(禮)를 계승한 집안에는 원래 훌륭한 인재가 날 근원이 있는 것이라고 보며, 의정부의 중요한 직무에 대하여 경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원대한 계책을 도와주고 드러내어 마땅히 매화 열매 익을 때의 단비와 같은 작용을 할 것이라 여긴다. 경에 대한 나의 관심이나 의탁하는 바가 어찌 두텁고 절실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경은 짐을 짊어지고 또한 어찌 용기있게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의리와 온 나라 사람의 논의를 경이 스스로 헤아린다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할 것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많은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1월 17일 갑진

전교하기를,
"문관(文官) 출신 시종관(侍從官)과 무관(武官) 출신 변경 장수 이상 관리, 음관(蔭官) 출신의 목사(牧使)·부사(府使)로서 군직(軍職)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 귀양을 당하였다가 용서를 받고 풀려났거나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자 이하는 죄명을 모두 탕척(蕩滌)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모두 군직(軍職)에 붙이도록 하여 반열에 참가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문관 출신의 시종관, 무관 출신의 변경 장수, 음관 출신의 목사·부사 이상 관리로서 시골에서 올라와 반열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울에 있는 기간은 녹봉(祿俸)을 지급토록 하고 내려갈 때 70살 이상되는 사람에게는 역말, 노자, 양식을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가례도감(嘉禮都監)에서 아뢰기를,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에는 서당보(徐堂輔)를, ‘교명(敎命)’ 두 글자에 대한 전문 서사관(篆文書寫官)에는 한계원(韓啓源)을, 옥인 전문 서사관(玉印篆文書寫官)에는 홍순목(洪淳穆)을, 죽책문 제술관(竹冊文製述官)에는 김상현(金尙鉉)을, 교명문 서사관(敎命文書寫官)에는 민겸호(閔謙鎬)을, 죽책문 서사관(竹冊文書寫官)에는 정기세(鄭基世)를 차임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18일 을사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재간택(再揀擇)을 행하였다.

 

영의정        서당보(徐堂輔)와 좌의정(左議政)        송근수(宋近洙)를 소견(召見)하였다. 서당보가 아뢰기를,
"왕세자 저하(王世子邸下)의 입학례를 방금 거행하고 관례하는 경사스러운 의식을 장차 진행하게 되었으니, 기쁨에 넘쳐 송축하고 싶은 마음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세자의 슬기로운 기질은 덕이 완성된 사람처럼 의젓하고 나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때가 이미 지나서 지각과 생각이 점차 트이는 것이 한창 솟아오르는 해와 같습니다. 바르게 양성하여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공부와 나날이 새로워지는 학업은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때문에 정자(程子)는 보도(輔導)하는 방법을 논할 때면 반드시 말하기를, ‘미리 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급한 것은 먼저 주입하는 내용에 있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연(胄筵)에서 강연(講筵)을 연 것을 돌아보면 때로 강연을 폐지하는 경우가 있고, 빈료(賓僚)가 찾아 뵈어도 더러 만나주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몸을 조심하고 보호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오히려 소략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덕성을 훈도하여 세자의 학문을 성취하겠습니까. 이제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학문이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서연(書筵)에 출입하게 하고 좌우에서 보좌하게 하며, 해가 점차 길어가는 이 봄을 맞이하여 날마다 강연을 열고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혹 중지하거나 그만두어야 할 때를 만난 경우에는 예식절차를 간략하게 하여 자주 빈객(賓客)들을 불러들여 접견함을 허락하게 하소서. 요컨대 하루 동안에 서적을 마주하거나 세자궁의 관리를 만나는 시간이 언제나 한가하게 지내거나 거닐며 휴식하는 때 보다 많게 한다면 덕있는 품성을 키워나가고 학문을 성취하는 효과가 오로지 여기에 있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깊은 궁궐 속에서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데서 물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친절한 방법입니다. 선유(先儒)가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태자(太子)를 가르친 것에 대하여 논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여 깨우쳐 주는 것은 몸으로 깨우쳐 주는 것만 못하다.〔遇物而誨 不若以躬而誨〕’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신의 구구한 정성은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동궁(東宮)의 입학 행사가 순조롭게 시행된 데다가 관례(冠禮)도 장차 거행하게 되었으니 매우 가상하고 기쁘다. 진달한 교육방법은 실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송근수가 아뢰기를,
"춘궁의 경사스러운 의식을 차례로 거행하게 되었으니, 전하의 마음은 더욱 가상하고 기쁠 것입니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기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억만년 무궁할 복입니다. 전번에 입학하는 날에 삼가 보건대, 세자가 나이는 어리지만 행동거지가 의젓하였으니, 반교(泮橋)에서 둘러서서 본 사람치고 축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마침 사부(師傅)의 반열에 끼여 있었으므로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남들보다 배나 간절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기쁨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가 되었을 듯하다. 입학하는 의식이 순조롭게 지나갔으니,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다행스럽다."
하였다.

 

서당보(徐堂輔)를 가례 정사(嘉禮正使)로, 민겸호(閔謙鎬)를 부사(副使)로, 한장석(韓章錫)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19일 병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빈(王世子嬪)의 공상 물종(物種)과 소속 나인(內人) 등의 선반(宣飯), 의전(衣纏)의 각종을 정례에 의거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간택일(揀擇日)로부터 시작하여 이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각 해사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0일 정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빈(賓)과 찬(贊)에게 명하여 왕세자 관례(王世子冠禮)를 중희당(重熙堂)에서 거행하게 하였다. 이어 중희당에 나아가 왕세자의 조알례(朝謁禮)를 받았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어 입고 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빈(賓) 이하 관리들은 동문을 경유하여 뜰로 들어와 예를 행하였다. 전교관(傳敎官)이 교서(敎書)를 선포하기를, "오늘 세자(世子)에게 관(冠)을 씌우니 경들은 이 일을 받들어 시행하라." 하였다. 빈(賓) 이하 관리들이 예를 행하였다. 선교관(宣敎官)이 교서함(敎書函)을 가져다 빈에게 주니 빈이 꿇어앉아서 받았다. 빈과 찬은 동문을 경유하여 나갔다가 예가 끝나자 대내로 돌아갔다. ○왕세자 관례를 중희당에서 거행하였다. 왕세자는 공정책(空頂幘)을 쓰고 곧은 깃의 아청(鵝靑) 빛깔의 옷에 땋은 띠를 띠고 올라와 앉았다. 예모관(禮貌官)이 왕세자에게 일어나서 좌석 앞에 설 것을 청하였다. 종친(宗親)들과 2품 이상의 문무(文武) 관리들이 전당(殿堂) 안에 나아가 재배를 하였다. 왕세자가 올라가 앉았다. 종친들과 3품 이하의 문무 관리들이 자리에 나가서 재배를 하였다. 사(師), 부(傅), 빈객(賓客)이 들어와 자리에 나아갔다. 왕세자는 동쪽 섬돌로 내려와 뜰 동쪽의 절하는 자리에 가서 재배를 하였다. 사, 부, 빈객이 답례로 재배를 하였다. 왕세자 주인(王世子主人)이 뜰 서쪽 절하는 자리에 나아가 재배를 하였다. 왕세자가 답례로 재배를 하였다. 주인은 궁문 밖에 나가서 빈을 맞이하였다. 빈과 주인은 읍하고 문으로 들어왔다. 빈은 교서함을 받들어 안(案) 위에 놓았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교서(敎書)를 받는 자리에 나가 북쪽을 향하여 서서 사배(四拜)를 하였다. 빈이 교서가 있다고 하자, 왕세자는 무릎을 꿇었는데, 빈이 교서를 선포하기를, "왕세자에게는 좋은 날 선대의 규례를 따를 것을 하교하며, 영의정            서당보(徐堂輔)에게는 궁전에 나가 의식을 거행할 것을 명하노라." 하였다. 교서 선포가 끝나자 왕세자는 사배를 하였고 빈객은 빈의 앞에 나가서 꿇어앉아 교서를 받아서 물러나와 왕세자에게 주었다. 왕세자는 꿇어앉아 교서를 받아가지고 예모관에게 주었다. 예모관은 꿇어앉아 받아서 함(函)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다. 왕세자는 동쪽 섬돌로 올라가서 동쪽채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사, 부와 빈객은 전당 윗자리로 각각 들어갔다. 빈은 서쪽 섬돌로 올라가고 주인(主人)은 동쪽 섬돌로 올라갔다. 주인과 찬관(贊冠)은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와서 관석(冠席)에 섰다. 빈과 찬관이 사와 빗 두 상자를 관석(冠席) 남쪽에 놓았다. 빈이 읍하자, 세자가 자리에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앉았다. 빈과 찬관이 자리 앞에 들어와 빗을 올리니 왕세자가 쥐었다. 첫번째로 관(冠)을 씌우는 사람은 서쪽 섬돌로 올라오고, 빈은 한 등급 내려가 받아가지고 왕세자 자리 앞에 들어가서 축하하기를, "좋은 달 좋은 날에 비로소 관을 씌우는 의식을 거행하니, 어릴 때의 생각은 버리고 덕을 완성하는데 삼가할 것이며 장수하여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빈은 꿇어앉아서 익선관(翼善冠)을 씌워주었다. 왕세자가 일어나자 빈이 읍하였다. 왕세자 주인과 찬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장막 안에서 곤룡포(袞龍袍) 차림을 하고 나오니, 빈이 읍하였다. 왕세자가 자리에 올라갔다. 두 번째로 관(冠)을 씌우는 관리가 서쪽 섬돌로 올라갔다. 빈이 두 계단을 내려와서 받아가지고 왕세자의 자리 앞에 가져갔다. 축하하기를, "좋은 달 좋은 날에 훌륭한 옷차림을 하였으니, 몸가짐은 공경스럽고 의젓하여 덕을 밝혀 만년을 장수하고 영원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빈과 찬관이 자리 앞으로 나아가 첫 번째로 썼던 관을 벗겼다. 빈은 이어 꿇어앉아서 원유관(遠遊冠)을 씌워주었다. 왕세자가 일어나자 빈이 읍하였다. 왕세자 주인과 찬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장막 안에 가서 강사포 차림을 하고 규를 잡고 나왔다. 빈이 읍하였다. 왕세자가 자리에 올라가자 세 번째 관을 든 사람은 서쪽 섬돌로 올라오고 빈은 세 계단을 내려가서 받아가지고 세자의 자리 앞에 올렸다. 축하하기를, "올해의 정월에 관을 씌우는 의식을 모두 하였으니, 덕을 완성시키고 만수무강하여 하늘이 내린 경사를 받기 바랍니다." 하였다. 빈과 찬관이 자리 앞에 나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서 두 번째 관을 벗겼다. 빈은 꿇어앉아서 면류관(冕旒冠)을 씌웠다. 왕세자가 일어나자 빈이 읍하였다. 왕세자 주인과 찬관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채의 장막 안에 가서 면복(冕服)차림을 하고 규를 잡고 나왔다. 자리에 가서 남쪽을 향하여 앉았다.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가 술을 따르니 빈이 술을 받아서 왕세자 자리 앞에 올렸다. 축하하기를, "단술을 드리니 절을 하고 받아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서(祥瑞)를 정하고 하늘의 뜻을 이어 잊지 말며 장수할 것입니다." 하였다. 축하가 끝나자 꿇어앉아 술을 드리니, 왕세자가 술을 받았다. 빈과 찬관이 음식을 받들어다가 대자리 앞에 차려 놓았다. 왕세자가 제사술을 맛보았다. 빈과 찬관이 음식상을 내갔다. 왕세자가 자리에서 내려와 남쪽을 향하여 재배를 하였다. 빈이 답례로 재배를 하였다. 예모관이 세자를 인도하여 서쪽 섬돌로 내려와 남쪽을 향하여 섰다. 빈이 ‘자(字)’를 조금 올리면서, "의식절차가 이미 갖추어 졌습니다. 좋은 달과 훌륭한 날에 ‘자’를 고하였으니, 군자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응당 받아서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하교를 받은 자(字)는 아무입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재배를 하고, "내가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어찌 받들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재배를 하였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쪽 섬돌로 내려와 서쪽을 향하여 서서 재배를 하였다. 사, 부와 빈객이 답례로 재배를 하였다. 세자가 동쪽 섬돌로 올라가 절하는 자리로 나갔다. 종친들과 2품 이상의 문무 관리들이 전당(殿堂) 안에 올라가서 재배를 하였다. 왕세자가 올라가 앉자 종친들과 3품 이하의 문무 관리들이 절하는 자리에서 재배를 하였다. 예가 끝나자 왕세자는 자리에서 내려와 대내로 돌아갔다. 상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자리에 올라갔다. ○왕세자가 면복차림으로 소차(小次)로 나왔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으로 들어가 전당 앞자리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섰다. 예모관이 허리를 굽히고 사배할 것을 청하자 왕세자가 사배를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김경균(金敬均)이 경계할 내용에 대한 교문을 선포하기를,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사랑으로 아랫사람들을 대하며 사람들을 의롭게 부리며 사랑으로 키울 것이다." 하였다. 교문 선포가 끝나자 왕세자가 사배를 하고 조금 앞으로 나서서, "신이 변변치 못하지만 어찌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자리로 돌아와 사배를 하였다. 예모관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가자 임금은 대내로 들어갔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왕세자 관례(冠禮) 때의 원임 및 시임 대신, 봉조하(奉朝賀), 종친(宗親), 의빈, 경리사(經理事), 승지(承旨), 사관(史官), 규장각(奎章閣) 신하들도 들어와 참가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무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서와 학례(學禮)를 지도하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한 번 있는 경사인데, 이제 좋은 날을 택하고 어진 사람을 가려서 세자(世子)의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그래서 널리 포고하여 기쁨을 함께하는 뜻을 보이노라.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근본은 세자에게 달려 있고, 성인으로서의 예의 시작은 관례가 될 것이다.《예기(禮記)》의 처음에 ‘관례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삼왕(三王)은 반드시 아들에게 정당한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정당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도록 하였으며, 일헌(一獻)으로 빈(賓)에게 술을 올려 스승을 존중하였으니 바로 선조를 존경하는 일이다.
세자가 걷고 달림에 난(鸞)과 화(和)의 방울소리와 어울리더니 드디어 노인을 봉양하고 좋은 말을 청하는 예를 행하였으며, 세자의 머리에 세 차례의 관을 모두 씌웠으니 장차 대를 이을 것임을 드러내고 그 뜻을 깨우쳐준 것이었다. 돌아보건대, 우리 세자가 막중한 왕통을 계승하니 진실로 신민들의 목을 빼고 기다리는 여망에 부응할 것이다. 명철한 제왕이 자손에게 명하는 처음에 반드시 관유자혜(寬裕慈惠)를 요구하며, 제왕의 공부는 바름으로써 길러지니 그 공부가 성취되면 공경온문(恭敬溫文)할 것이다. 악장(樂章)은 사중(四重)의 가요를 불렀으니 대인으로서 명철함을 계승하여 사방을 비출 것이고, 《효경(孝敬)》에서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으로 여겼으니 문왕(文王)은 하루에 세 번씩 부왕께 문안을 드렸다. 드디어 아름다운 소문이 하늘의 뜻에 능히 맞아 성대한 의식을 연초에 아울러 거행하게 되었다. 묘궁(廟宮)에서의 화락하고 경건한 자세는 단면(端冕)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을 본뜬 것이었으며, 나라 사람들에게 장장친친(長長親親)의 도리를 보여 주어 다리에서 에워싸고 구경하던 사대부들이 놀라고 기뻐하였다. 어린 나이에 성인의 복장을 감당해 내는 꽃다운 자질이 이미 성취되어 경건하게 관을 씌우는 아름다운 의식을 적절히 거행하였다.
영왕(寧王)께서 관례를 치르던 나이와 똑같은 나이니 계책을 남겨 주어 자손을 보호해 주는 것이요. 대왕대비께서 관례를 치른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니 이미 받은 복을 자손에게 미루어 주는 것이다. 드디어 상서로운 날을 잡고 차차 존귀한 관을 씌워 주는 관례를 상고하여, 이미 이달 20일에 머리에 관을 씌우는 예를 치렀다. 찬자(贊者)는 문에 있고 빈자(擯者)는 방에 있으니 물채(物采)는 매우 빛나고, 사(史)는 시를 외우고 공(工)은 잠(箴)을 외우니 절문(節文)이 모두 갖추어졌다. 근엄한 안색과 단정한 거동을 하여 의젓한 성인으로서 대부들에게 예를 올렸고, 은대(殷代)의 관(冠)인 장보(章甫)와 주대(周代)의 관인 위모(委貌)를 쓰고 고귀한 세자로서 오히려 선비의 예를 사용하였다. 축도(祝禱)하기를, ‘큰 복을 받을 것이니, 백성을 가까이하고 연령은 장구하라.’ 하였으며, 자(字)를 지어 주어 이름을 존중하는 뜻을 보이고는 너의 의표를 깨끗이 하고 너의 덕을 삼가라.’ 하였다.
사방에서 모두 모여들어 축하하는 때를 맞이하여 진실로 사면하는 교서를 크게 선포하노니, 슬기로운 덕은 화창한 봄날과 함께 갖추어져 복록이 이를 것이며, 성대한 은택은 뇌우(雷雨)가 두루 흡족히 적셔 주는 것과 같아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리라. 이달 21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 모두 사면하노라.
아, 면복(冕服)의 일곱 가지 장식은 매우 밝았고 효제충순(孝弟忠順)의 네 가지 행실은 능히 드러났다. 효인예의(孝仁禮義)로써 학습하니 뭇 별들이 존엄한 장래의 북극성을 감싸고 돌 것이며, 고명박후(高明博厚)가 무궁하니 역수(歷數)는 만년의 복을 맞이하리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모두 잘 알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제학(大提學) 민태호(閔台鎬)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규장각(奎章閣)과 성균관(成均館)에서 올린 전문(箋文)을 받았다.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의 주인(主人), 빈(賓)과 찬관(贊冠) 이하, 축하를 올린 관리들과 전당에 앉아서 축하를 받을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 관리들을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관(贊冠) 이용원(李容元), 예모관(禮貌官) 한장석(韓章錫), 전교관(傳敎官)이자 작례관(酌醴官)인 김경균(金敬均),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원일(李源逸), 선교관(宣敎官)                     조종필(趙鍾弼), 선전관(宣箋官)                     엄주한(嚴柱漢), 상례(相禮)                     조중필(趙重弼)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이번 경과(慶科)는 별시(別試)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박성양(朴性陽)과 이상수(李象秀)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삼았다. 남대(南臺)로 제수한 것이다.

 

전교하기를,
"70세 이상인 조관(朝官), 80세 이상인 사서인(士庶人)으로서 아직 비옥(緋玉)에 이르지 못한 자는 모두 한 자급을 가자해 주고, 여려 도의 상환 기일이 지난 환곡 10만 석, 공인(貢人)들이 청산하지 못한 1만섬과 시민(市民)들의 요역(徭役)은 3개월치, 반인(泮人)의 요역(徭役)은 30일을 탕감해 주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을 보여 주라."
하였다.

 

특별히 김낙현(金洛鉉)을 제수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성양(朴性陽)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삼았다.

 

1월 22일 기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학 유생의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는 유학(幼學) 유백원(劉百源), 홍종찬(洪鍾燦), 장기주(張基周), 이회영(李會英), 홍수인(洪秀寅)을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병덕(金炳德)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1월 23일 경술

하교하기를,
"이번에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70살이 되어 가자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과 오위장 가설(五衛將加設)에 단부하라."
하였다.

 

1월 24일 신해

이헌직(李憲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월 26일 계축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혼사를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집으로 정하려고 한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신인(神人)의 소망에 부합하니, 이는 바로 종사(宗社)와 백성들의 복입니다. 신들은 더 없는 기쁨으로 축하하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삼간택(三揀擇) 후 승후(承候)하였기 때문이다.

 

왕세자(王世子)가 친영(親迎)하는 길일은 다음달 20일 쯤으로 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가례(嘉禮)때 동뢰연(同牢宴)의 행례 처소는 중희당(重熙堂)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육례(六禮)를 행할 길일(吉日)을 가려서 아뢰기를,
"납채(納采)는 2월 3일 손시(巽時)에, 납징(納徵)은 같은 달 7일 오시(午時)에, 고기(告期)는 같은 달 9일 손시에, 책빈(冊嬪)은 같은 달 19일 오시에, 친영(親迎)은 같은 달 21일 손시에, 동뢰연(同牢宴)은 같은 달 같은 날 오시로 택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29일 병진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였다. 시(詩)에서 유학(幼學) 여규형(呂圭亨)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예법에 관한 문헌에는 왕세자(王世子)가 빈(嬪)을 맞이한〔親迎〕 이튿날은 조현례(朝見禮)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신묘년(1651) 현종조(顯宗朝)의 혼례 때에는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단지 선후로 사배례만을 행하였고, 신해년(1671) 숙종조(肅宗朝)의 혼례 때에도 역시 신묘년(1651)의 전례대로 예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기묘년(1819) 익종조(翼宗朝)의 혼례 때에는 왕대비전(王大妃殿)을 찾아 뵙는 의식은 단수(腶脩)를 가지고 예를 행하였습니다.
이번에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조현례(朝見禮)를 거행할 때 대왕대비에게 예를 행하는 것은 마땅히 기묘년(1819)의 규례대로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왕대비전에게 예를 행하는 절차는 각해의 빈궁 조견 의절(嬪宮朝見儀節)을 참고해 보아도 이미 부합하는 예가 없습니다. 본조(本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단지 선후로 사배례만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승오(李承五)의 장계(狀啓)에 보니, ‘비인현(庇仁縣)                     마량진(馬梁鎭)에 중국 사람 15명과 화란 사람[紅毛國人] 1명이 표류되어 왔는데 육로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주도(濟州島)에서부터 표류되어 충청도(忠淸道)에 와 닿은 사람들입니다. 든든한 배를 특별히 골라 별도로 차원(差員)을 정해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떠나보내며 식량은 될수록 넉넉히 갖추어 지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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