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축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2권】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설날이다.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운현궁(雲峴宮)에 문후(問候)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원본】 26책 2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8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설날이다.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운현궁(雲峴宮)에 문후(問候)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노인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렸다.
1월 2일 임인
전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으로 환어(還御)하겠다. 날짜를 이달 20일 전후로 가려서 들이며, 수리하는 절차를 탁지(度支)에서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진전(眞殿)의 어진(御眞)을 직접 나아가 받들어 경복궁(景福宮)으로 옮길 것이니, 날짜를 이달 20일 전후로 가려서 들이고 제반 절차는 위내(衛內)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방금 환어하겠다는 명을 내렸는데 각종 공물(貢物)이 형편상으로 반드시 군색한 것이 많을 것이니, 내하전(內下錢) 10만 냥을 탁지(度支)에서 알맞게 헤아려 나누어 주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김영목(金永穆)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월 4일 갑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우선(尹宇善)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토산현(兎山縣)의 이민(吏民)들이 일으킨 소요는 참으로 이전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읍리(邑吏)가 아무 거리낌 없이 돈과 재물을 마구 독촉하여 긁어 들여 마침내 혹독한 피해를 끼쳤으니 더없이 흉악합니다. 방민(坊民)이 함부로 관아에 들어간 것이 이미 분수를 어긴 것인데, 감히 때리고 불태우는 행동을 하였으니 본성을 모두 잃은 것입니다. 점점 더 격렬하게 난동하고 울분을 쌓아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으니, 비록 먼 지방에 사는 우둔한 무리들이라고는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무섭고 두려운 줄을 알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심상하게 처결하고 말 수 없으니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철희(金喆熙)를 안핵사(按覈使)로 차하(差下)하여 해당 현(縣)에 달려가서 도망간 이속(吏屬)들과 난동을 주동하여 나선 몇 명을 체포하여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사리를 따져서 수계(修啓)하게 하소서. 해당 현감(縣監) 서광목(徐光穆)은 이미 감죄(勘罪)를 청하였으니 유사(攸司)가 응당 적용할 형벌에 대하여 아뢸 것이지만, 이러한 때에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두는 것은 딱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그 후임을 상격(常格)에 구애받지 말고 각별히 가려 차임하고, 이어 그날로 내려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6일 병오
이만직(李萬稙)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영목(金永穆)을 파직(罷職)하였다. 정사(政事)를 행하라는 명이 이미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진즉에 정사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1월 7일 정미
정운익(鄭雲翼)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1월 8일 무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함경북도 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조병직(趙秉稷)의 장계(狀啓)를 보니, 10개 고을 백성들의 황급한 사정에 대하여 자세히 진달하고 나서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쌀 5만 석(石)을 이획(移劃)하여 설진(設賑)하는 사안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작년 가을 관북(關北)의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백성들의 정상을 생각하면 아주 근심스럽습니다. 영남과 호남에 만일 이속(移屬)할 만한 곡식이 있다면 함께 구제하는 의리로 볼 때 무엇을 아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번에 연분(年分)을 복계(覆啓)하여 개시(開市)에 필요한 돈을 가지고 참작하여 구휼하라는 내용으로 통지하였으니, 비록 이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느 정도라도 구휼하기 위하여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안무사가 열읍(列邑)의 수재(守宰)들과 함께 대책을 강구하고 마음을 다해서 도와주어 저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죽을 근심을 면하게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9일 기유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봄철에 알현(謁見)하는 것이다.
공시 당상(貢市堂上)에게 공시인(貢市人)들을 거느리고 월관문(月觀門) 밖에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애로에 대하여 물었다.
1월 10일 경술
수원 유수(水原留守) 김기석(金箕錫)을 친군 우영사(親軍右營使)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군수(軍需) 물자가 떨어져 참으로 근심스러우니, 해서(海西)의 사환미(社還米) 가운데 5,000석(石)에 한하여 빨리 배로 운반하여 오도록 해당 도신(道臣)에게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戶曹)에서, ‘본조(本曹)에서 관할하는 옛 수어청(守禦廳)에서 지난밤 4경(更)쯤에 우연히 불이 나서 창고 12칸〔間〕과 가건물 14칸이 쌓아둔 목재와 함께 모두 불타버렸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고 한스럽습니다. 해당 계사(計士), 고지기〔庫直〕, 사환(使喚) 등을 사핵(査覈)하여 엄히 처리하겠습니다만, 평소에 제대로 살피고 신칙하지 못하였으니 신이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운수가 두텁지 못하여 아직 제사를 맡길 만한 아들이 없는데 나이는 문득 80세가 가까워오고 있으니 통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2촌 아우인 전(前) 참판(參判) 이유승(李裕承)의 둘째 아들 이석영(李石榮)을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뒷일을 맡길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윤리상의 큰 문제입니다. 국조(國朝)의 진신(縉紳) 간에 이미 시행한 예(禮)를 상고하여 보니, 사람을 골라서 지정하여 대를 잇게 하는 것은 비단 옛날에 많이 있었을 뿐만이 아닙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의견을 내놓기를, ‘남의 대를 잇는 사람은 마땅히 형제의 차례에 따라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정한다.’ 하였습니다. 또 송(宋) 나라의 예법(禮法)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호안국(胡安國)은 친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를 이은 양자(養子)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선조(先祖)인 문경공(文敬公) 신 이세필(李世弼)의 《예론(禮論)》에,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어서 다시 같은 항렬에서 양자를 취하였을 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형을 삼고 종손(宗孫)을 삼으며, 아들의 선후는 중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제현(諸賢)들이 서로 질문하여 미루어서 정론(定論)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여기에서 어떻게 감히 사정을 다 털어놓고 옛사람들이 조정에 명을 청한 의리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아 있는 정신을 수습하여 대궐에 나와 엎드려서 천지 부모 앞에 우러러 호소하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는 은택을 베푸시어 자식이 없는 신으로 하여금 자식을 두게 하고 대가 끊어진 것을 이어서 망하지 않게 하여줄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를 이은 양자의 나이가 친자식보다 많은 경우에 종(宗)으로 삼고 형으로 삼는 것은 참작하여 변통하고 권도(權道)를 취하는 도리에 진실로 부합되는 것이니, 선유(先儒)와 선정(先正)들은 이미 정론이 있었다. 더구나 경의 선조가 쓴 《예론》이 명백한 증거가 되는 만큼 나이순으로 대를 잇는 계통을 정하는 문제는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월 11일 신해
특별히 이헌직(李憲稙)을 발탁하여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로, 이원명(李源命)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월 13일 계축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병필(趙秉弼)에게 부산항 감리통상사무(監理釜山港通商事務)를 겸대(兼帶)하라고 명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남일우(南一祐)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1월 15일 을묘
특별히 신병우(愼炳佑)를 제수하여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노영경(盧泳敬)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전(前)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영목(金永穆)을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다.
1월 16일 병진
이면영(李冕榮)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석근(金晳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정해륜(鄭海崙)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봉구(李鳳九)를 친군 후영사 우변포도대장(親軍後營使右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조영권(趙英權)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근년에 변란이 거듭 일어나고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형세는 위태롭게 되어 근심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변변치 못한 상소를 올려 전하께서 듣고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학교를 진흥시키는 문제이고, 둘째는 병제(兵制)를 증강하는 문제이며, 셋째는 의복 제도를 정하는 문제이며, 넷째는 전폐(錢幣)를 유통시키는 문제이며, 다섯째는 수령(守令)을 선발하는 문제이고, 여섯째는 막책(幕冊)을 중시하는 문제이고, 일곱째는 이속(吏屬)의 정원을 줄이는 문제이고, 여덟째는 여각(旅閣)을 염찰(廉察)하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교화의 근본인데, 근년에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아서 풍속이 퇴폐해지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국도(國都)로부터 밖으로는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중수(重修)하며 그 곁에 무학교(武學校)를 세워, 공부하는 장소가 있게 하고 가르치는 데 각각 차례가 있게 할 것입니다. 향(鄕)에서 천거하고 이(里)에서 추천한 사람들을 모두 경사(京師)에 모아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에 두고 대우를 잘해 주며, 경술(經術)에 밝은 어진 이들과 병서(兵書)에 밝고 지략과 용맹이 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아 학업이 성취된 뒤에는 정사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여 낭서(郎署)를 거쳐 공경(公卿)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농상(農商)·공예(工藝)·의약(醫藥)·산술(算術) 같은 것에도 각각 학교를 두어 재능에 따라 가르친다면 인재의 배양이 거의 삼대(三代)를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는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 군적(軍籍)이 크게 무너졌는데 만일 변경에 경보(警報)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모든 팔도(八道)의 요충지에 각각 군사를 두고 훈련시키되 그 경비는 각 포구의 어전세(漁箭稅)·노전세(蘆田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에서 가져다 쓰게 하고, 동시에 청렴하고 근면한 사람을 선발하여 각처의 광산을 맡아보게 하고 거기에서 가져다 쓰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도 여유 있게 쓰면서 만약의 경우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복이란 것은 몸의 문장(文章)입니다. 선대 임금들이 규정해 놓은 의복 제도는 한 나라 안에 다른 풍속의 옷이 없었습니다. 작년 6월의 하교에 넓은 소매가 달린 의복을 금지시켜 간편하게 하고, 또 10월에 하교하시어 평상시에 입는 옷을 편한 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혹 다시 소매를 넓힌 것도 있고 좁은 소매가 달린 옷이 있어 한 나라 안에 다른 풍속의 옷이 있으니 보기에 흉합니다.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농공상민(農工商民)에 이르기까지 일을 잘하여 공을 세우자고 하는 자들은 좁은 소매의 간편한 옷을 입게 하여 사치를 혁파하고 검소를 따르는 것을 영구히 정식으로 삼아 의복 제도를 통일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전폐(錢幣)는 나라의 중요한 보배입니다. 유통시켜 정체가 없게 한 다음에라야 바로 상용할 수 있습니다. 당오전(當五錢)이 쓰이게 된 다음부터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이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엽전(葉錢)으로 하고 상납(上納)하는 것은 당오전(當五錢)으로 하면서 ‘가계(加計)’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이익은 탐관오리(貪官汚吏)에게 돌아가고 해독은 백성과 나라에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4분(分) 이하는 엽전을 쓰고 5분 이상은 엽전을 쓰는 것을 금지시키며, 이것을 어기는 자에게 형률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라야, 물품에 두 가지 가격이 없고 화폐가 유통되게 될 것입니다.
수령이란 백성들을 가까이 하는 관리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충분히 신중하게 가려야 합니다. 만약 인망(人望)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청현직(淸顯職)이나, 수레와 말, 밭과 집을 줄 수 있을지언정, 수령의 임무는 결코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수령 가운데서 정사를 잘하여 업적이 있는 사람은 구임(久任)하게 하여 승급시키고, 탐오죄를 범하여 파출(罷黜)된 자는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삭제해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청렴한 기풍이 날로 자라나서 선량한 사람들이 배출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막책(幕冊)은 사객(私客)입니다. 그러므로 공로가 있어도 반드시 포상하지는 않고 죄가 있어도 굳이 처벌하지는 않는데, 원래부터 매우 경시하는 까닭에 그저 주인의 눈치만을 살피면서 뇌물질만 일삼고 있으니 백성들이 해를 입는 것은 애초에 여기서 모두 기인되는 것입니다. 각영(各營)의 비장(裨將)과 웅부(雄府)의 책객(冊客)에 대하여 옛날의 승(丞)·좌(佐)·부(簿)·위(尉)의 예에 따라 임기가 만료되면 천전(遷轉)시켜 영예로운 이름을 즐기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면, 점점 청렴한 마음을 키우게 되어 백성들이 입는 피해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리(下吏)는 백성들을 갉아먹는 좀입니다. 애초에 요포(料布)의 규정이 없으므로 화속(火粟)이나 은결(隱結) 창색(倉色)의 낙장미(落場米), 서원(書員)의 필채(筆債), 형리의 송채(訟債), 이속(吏屬)의 분방채(分房債) 등의 각종 명목으로 순전히 백성들을 침학하여 먹고 사는데, 이것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 것이니 사실 깊이 책망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액수(額數)가 많아진 이후 서로 알력이 생겨 비록 10만 냥을 포흠(逋欠)했다 하더라도 종신토록 안락하고 부유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포흠을 많이 한 자는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책하고, 적게 한 자는 영원히 이안(吏案)에서 삭제하여, 그 액수를 줄이고 별도로 월급을 정해주어 일하게 하면 포흠하는 우환이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여각(旅閣)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유숙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놀고먹는 무뢰배들이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우선 여기에 의탁하게 되는데, 혹은 벼슬자리를 구한다고 하면서 번개같이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흩어지면 잡류(雜類)가 되고 모이면 도적이 되는 만큼 모두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입니다. 안으로는 오부(五部)의 각방(各坊)과 밖으로는 시장과 길가에 있는 여각에서 매일 유숙하는 사람들의 거주지, 성명, 나이 및 무슨 일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것을 장부에 기록하고 담당하는 관리에게 보고하여 검열할 때 증거로 삼게 하며, 수상한 사람에 대해서는 계속 유숙하지 못하게 하면 난동을 부리고 도적질하는 우환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재량해서 채택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문제들에 채택할 만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前) 지평(持平) 윤호섭(尹皞燮)이 상소하여 첫째, 사적(四賊)이 체포되지 않아 형법(刑法)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둘째, 중국 사신이 원호(援護)한 공로에 대해서 응당 사당(祠堂)을 세워야 한다는 것, 셋째, 전화(錢貨)가 폐단으로 되어 인심이 험악하다고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세 가지 문제를 통하여 여론을 알 만하나, 전폐에 대한 문제는 갑자기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김상권(金象權)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일본과의 통상(通商)은 임오년(1882)부터 조약을 정하고 시작하였는데, 인심이 크게 흔들려서 마침내 10월의 변란이 일어나 위로는 임금이 피난하시는 욕을 당하고 아래로는 살육을 당하는 화를 입어서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었습니다. 대궐에 다시 돌아온 것은 실로 하늘의 운수를 다시 만난 것이지만 저 사람들이 품고 있는 흉악한 마음이 여기에서 명백해졌습니다. 지난번의 변란이 저들 왜인에게 근원이 있지 않았다면 비록 반역심을 가지고 있는 김옥균(金玉均)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변란이 일어나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변란 때 일본 사람이 우리편을 해친 것은 모두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재상들이었지만 우리가 일본 사람을 해친 것은 단지 하찮은 행상(行商)이나 이소바야시〔磯林〕 대위(大尉)일 따름이니. 피차간의 경중이 판이한데, 이제 삼가 전권 대신(全權大臣)이 조약을 정한 것을 보니 아직도 4명의 흉악한 역적을 체포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재신을 상해한 죄를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구구하게 조약을 성립시키고 그저 저들이 원하는 대로 20일 안으로 이소바야시를 살해한 자를 체포하기로 기약하였으니 그래 우리 6, 7명의 재신들이 도리어 일개 이소바야시만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우리가 이처럼 약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사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우리의 약점을 업수이 보고는 화란을 조장할 것이며 종종 김옥균과 같은 무리들이 우리에게 죄를 짓고 저들에게로 도망쳐 갈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신이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대대로 벼슬과 녹봉(祿俸)을 받고 있는 자들의 친척 관리들이 더러는 시골에 물러가 엎드려 있기도 하고 더러는 꺼리어 감히 직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정되면 스스로 재상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높은 벼슬을 할 것을 기대하고, 위태하게 되면 도망하여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바르고 충성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낱낱이 찾아내어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근심과 울분이 격하여 나온 것이니 명심하겠다."
하였다.
부정자(副正字) 김영선(金榮善)이 상소하여 첫째,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경연(經筵)을 열 것, 둘째, 기강을 세우고 상벌(賞罰)을 밝힐 것, 셋째, 군자(君子)를 등용하고 소인(小人)을 물리칠 것, 넷째, 민심을 안정시키고 재물을 절약할 것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가지 문제가 시의(時宜)에 딱 맞는다. 명심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조문(趙汶)이 상소하여 양전(量田)을 고치도록 청하니, 비답하기를,
"양전 문제는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오래 전부터 강구하여 실행하려고 했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하였다.
유학(幼學) 홍필후(洪弼厚)가 상소하여, ‘민태호(閔台鎬) 등 6명의 신하들에게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사당(祠堂)을 세워주며, 청(淸) 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의 공로를 갚기 위하여 사당을 세워주고, 여러 서원(書院)들도 다시 설치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데서 여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원을 다시 설치하는 문제는 갑자기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1월 17일 정사
경복궁(景福宮)으로 환어(還御)하고, 뒤이어 광화문(光化門) 안에서 대왕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王大妃)가 환어할 때 지영(祗迎)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와 예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과 세자빈(世子嬪)도 환어하였다.
동궁(東宮)이 동여(動輿)할 때 사(師), 빈객(賓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1월 18일 무오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열성(列聖)의 어진(御眞)을 경복궁(景福宮) 선원전(璿源殿)에 배봉(陪奉)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어(移御) 후 문안하였기 때문이다.
1월 19일 기미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강하(趙康夏)가, ‘밀양부(密陽府)에서는 세미(稅米)를 전(錢)으로 대봉(代捧)하여 나이(挪移)하고, 도로 바꿔서 상납(上納)하는 기한을 지체하게 하였습니다. 조운(漕運)의 제도로 헤아리건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전(前) 부사(府使) 권인국(權仁國)의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1월 20일 경신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삼가 입진(入診)한 의관(醫官)이 전하는 말을 듣건대 세자궁(世子宮)이 감기와 체증으로 편안치 못하다고 하니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빨리 신들이 의관을 거느리고 입진하여 탕제(湯劑)를 의논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이미 차도가 있으니 입시(入侍)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재차 계사(啓辭)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이, ‘화적 박봉준(朴鳳俊) 등 10명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월 22일 임술
충주 목사(忠州牧使) 정태호(鄭泰好)를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것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제배(除拜)한 뒤에 끝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권응선(權膺善)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월 23일 계해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세자궁(世子宮)의 홍역이 지금 이미 겉으로 나타났으니 빨리 신들이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여 탕제를 의논하도록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이 함께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도제조(都提調)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홍역 증세가 아주 순하기는 하지만 신들이 오늘부터 모두 본원(本院)에서 수직(守直)하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직숙(直宿)하는 문제는 이미 처분을 받았으나 홍역을 앓을 때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는 것은 전례가 많이 있으니, 신들이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차비문(差備門) 근처로 옮겨 수직하도록 빨리 허락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경들이 본원에서 직숙할 때 궁관(宮官) 1원(員)이 함께 직숙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5일 을축
약원(藥院)에서 아뢰기를,
"세자궁(世子宮)의 병 증세를 입진(入診)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증세가 어제보다 퍽 나으니 입대(入對)하는 것은 그만두고, 입진하는 의관으로 하여금 탕제(湯劑)를 의정(議定)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6일 병인
전교하기를,
"의약청(議藥廳)을 오늘부터 철파(撤罷)하고 본원(本院)에 물러가 수직(守直)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약원(藥院)의 세 제조(提調)가 교대로 입직(入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건강이 회복된 것과 관련하여 문안하였기 때문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의 건강이 회복된 것은 종묘 사직에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종묘에 고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며 진하(陳賀)하는 등의 절차를 날을 가려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7일 정묘
의약청(議藥廳) 도제조(都提調) 이하, 사(師)와 빈객(賓客),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를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도제조 김홍집(金弘集)은 아들·사위·아우·조카 가운데서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도록 하고, 제조(提調) 이인명(李寅命), 부제조(副提調) 민병석(閔丙奭), 겸보덕(兼輔德) 민영환(閔泳煥)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월 28일 무진
전교하기를,
"이번에 사전(赦典)을 어찌 제도(諸道)에서 풀어 줄 부류와 풀어 주지 않을 부류를 보고한 성책(成冊)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 뒤에 용서하겠는가? 반사(頒赦)하는 날 즉시 처분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해당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유지(有旨)를 지수(祗受)한 날에 해사(該司)의 관문(關文)이 올 때가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즉시 거행하고 전말을 장계(狀啓)로 보고하게 하라고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게 하라.
서울의 도류안(徒流案) 가운데서 혹은 누락되어 미처 똑같이 석방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한 혹 배소(配所)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자로서 누락된 자도 있을 수 있으니, 도내(道內)에 정배(定配)된 자들과 옥에 갇혀있으나 미처 등록되지 않은 자와 함께 해당 각 도 도신으로 하여금 한 명도 빠짐없이 자세히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고 또한 분부하라."
하였다.
김기수(金綺秀)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군수 물자를 자원하여 도운한 사람 가운데서 부사과(副司果) 장용환(張龍煥)은 돈 2만 5,000냥을 바쳤고, 전 참봉(前參奉) 양린(梁), 전 가주서(前假注書) 박성근(朴聖根), 전 직장(前直長) 최한주(崔翰周)는 각각 돈 2만 냥을 바쳤습니다. 정성을 다하였고 그 수량도 가장 많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당한 수령(守令)의 자리가 나는 대로 차송(差送)하여 조정에서 보답하고 시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9일 기사
약원(藥院)의 윤직(輪直)을 철파(撤罷)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王世子)의 건강이 회복된 것과 관련하여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교문(敎文)에,
"《주역(周易)》에서 말한 ‘뜻밖의 우환〔无妄之憂〕’을 세자(世子)가 우연히 만났다가 《상서(尙書)》에서 말한 ‘병이 나은 기쁨〔乃瘳之喜〕’으로 대궐 뜰에서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교문을 반포하여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경축하게 하는 바이다.
생각하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외람되게 무거운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다행히 세자에게 존귀한 이 자리를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타고난 슬기와 총명으로 일찍이 성인(聖人)이 될 자질을 나타내었으며, 날로 학문이 발전하고 공순하며 검박한 덕을 지녀 세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미 나이가 차서 또 관례(冠禮)와 혼례(婚禮)를 치르니 엄연히 성장하였고, 《효경(孝經)》을 거쳐 《소학(小學)》까지 공부하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일에 힘썼다. 어려서 사물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 언제나 은덕에 보답하고 공경하기에 힘을 다했으며, 절기에 맞추어 섭생할 때는 언제나 자신의 몸이 건강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홍역(紅疫)이 돌아 마침내 세자궁(世子宮)에까지 침범하였다.
물론 깊고 엄숙한 대궐 안에 온갖 신령이 호위하고 부지하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천지가 운행하는 데서 한 기운이 조화롭지 못하여 지난겨울 잠깐 병을 앓다가 곧 나았다. 그렇지만 조금 나은 뒤이므로 그 여독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더구나 오늘 그 병에 대한 자전(慈殿)의 걱정이 지극히 간절하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굽어 살핀 덕택으로 얼마 안 가 조화롭게 되어 얼굴에 빛이 나고 팔다리에 뻗쳐서 윤택한 기운이 펼쳐져 절로 두루 미치고 구름이 걷히듯 눈이 녹듯 상처가 아물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나았다. 기쁜 소식이 자전에게 먼저 전하여져서 대궐에 상서로운 화기(和氣)가 넘쳐나고 문후하는 반열이 약원(藥院)에서 철수하니 온 나라에 경축하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세자의 건강이 회복된 것은 실로 영원한 행복의 근본이 되니 아버지의 병이 나은 뒤에 큰 복이 찾아온 것에 부합되고, 기묘년(1879)에 천연두를 앓았을 때 좋은 기회가 모여든 것과 같은 것이다. 세자가 아침 문안을 하니 삼전(三殿)이 기뻐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서연(書筵)을 여니 하루 종일 강론이 계속되었다. 밤에 잠 못 이루던 근심이 없어지자 잠자리가 편안하게 되었고 하늘이 주는 큰 경사를 맞이하니 세자궁이 더 돋보인다.
종묘(宗廟)에 공경스럽게 제사 지내고 강가에 이르러 교문을 반포하니 온 나라가 노래 소리로 들끓어 어디나 없이 기뻐하며, 사면(赦免)을 내리는 뜻을 취하여 온갖 죄와 허물을 씻게 되었다. 이에 온갖 복이 모여드는 터에 춤추며 좋아하는 만백성들에게 보답해야 할 것이니, 이달 29일 새벽 이전에 범한 잡범(雜犯) 가운데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
아! 나와 세자의 병이 연이어 나았으니 온갖 상서로운 복이 찾아오게 되었다. 힘들고 근심스럽던 끝에 생각이 백성들의 병을 고치고 나라의 병을 고치는 데 미치게 되었으니 은덕을 노래하는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효성스럽고 어진 덕이 흥기하게 하여 교화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시하는 것이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원명(李源命)이 지었다.】
【원본】 26책 2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88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왕실-의식(儀式)
전교하기를,
"지금 동궁(東宮)의 병이 다시 회복된 것은 실상 보기드문 경사이다. 만약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와주고 남모르게 배려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에는 하늘이 복을 내려준 것에 대하여 보답하고 백성들의 실정을 위로하기 위하여 은전(恩典)을 베푸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그러니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다 방송(放送)하라.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어 완전히 석방시키기 곤란한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道臣)과 수신(守臣)이 문안(文案)을 살펴 분류한 뒤 녹계(錄啓)하여 재량해서 처리하도록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해방 승지(該房承旨)는 의금부(義禁府)와 전옥서(典獄署)에 급히 달려가서 옥문을 활짝 열고 모두 다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포도청(捕盜廳) 죄수 가운데서 강상(綱常)을 범한 자를 제외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다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황천과 조종이 묵묵히 도와주고 남모르게 배려하여 동궁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었다. 우러러 자성 전하(慈聖殿下)의 마음을 체현하고 굽어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는 심정을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경사를 넓히는 은혜를 보여주려면, 오직 백성들에게 실제로 혜택을 베풀어주는 길 밖에 없다. 제도(諸道)의 묵은 환곡(還穀)과 증열미(拯劣米)·미증미(未拯米)를 있는 대로 모두 다 탕감(蕩減)하며, 시민(市民)들의 요역(徭役)은 2달에 한하여 탕감하고, 현방(懸房)의 수속(收贖)은 30일에 한하여 역시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진하(陳賀) 때의 각 차비(差備) 이하와 병세를 진찰할 때 궐내(闕內)에 입직(入直)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만직(李萬稙), 좌통례(左通禮) 정현영(鄭顯英), 우통례(右通禮) 정광연(鄭光淵), 선교관(宣敎官) 김승규(金昇圭), 선전관(宣箋官) 이우면(李愚冕), 사서(司書) 이헌경(李軒卿), 직각(直閣) 이범진(李範晉), 좌영사(左營使) 이규석(李奎奭)에게 가자(加資)하였으며, 호군(護軍) 이교익(李喬翼)과 장석룡(張錫龍), 부호군(副護軍) 장세용(張世容)에게는 백관가(百官加)를 친수(親授)하였다.
정순조(鄭順朝)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석근(金晳根)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1월 30일 경오
약원(藥院)에서 올린 구계(口啓)에,
"삼가 입진(入診)한 의관(醫官)이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의 건강이 감기 증세로 해서 편안치 못하고 중궁전(中宮殿)도 감기 증세로 편안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여 탕제(湯劑)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빨리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탕제는 대내(大內)에서 의논하여 정할 것이니 경들은 입시(入侍)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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