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11월

싸라리리 2025. 1. 1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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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축

유학(幼學) 박대양(朴戴陽)을 전권 대신(全權大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衙門)에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이다.

 

이조(吏曹)에서 ‘대신(大臣)이 아뢴 일로 인하여 역적들의 연좌되어야 할 친족 가운데 관작(官爵)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해조(該曹)에서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을 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김옥균(金玉均)의 아비 부호군(副護軍) 김병기(金炳基)와 본래의 생부(生父) 김병태(金炳台), 박영효(朴泳孝)의 아비 대호군(大護軍) 박원양(朴元陽)과 형 사사(司事) 박영호(朴泳好), 홍영식(洪英植)의 아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과 형 호군(護軍) 홍만식(洪萬植), 서광범(徐光範)의 아비 호군 서상익(徐相翊), 윤영관(尹泳寬)의 아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윤석오(尹錫五), 박응학(朴應學)의 아비 전 목사(前牧使) 박정화(朴鼎和)에 대해서는 모두 삭탈관직을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1월 2일 임인

동지사(冬至使)인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사(正使) 김만식(金晩植), 부사(副使) 남정철(南廷哲), 서장관(書狀官) 윤명식(尹命植)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난리를 평정한 공로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문(咨文)을 올려 아뢰겠지만, 우선 예부(禮部)에 사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만식(金晩植)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부사(副使)는 길을 돌려 보정부(保定府)에 나아가서 문안하고 오되, 〖대원군(大院君)께서〗연로한 연세인데도 오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민망하다. 감히 자문을 통해 번독스럽게 아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마음을 예부에 상세히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남정철(南廷哲)이 아뢰기를,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3일 계묘

후영사(後營使) 이봉구(李鳳九)를 체직(遞職)하고 신정희(申正熙)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갑진

전교하기를,
"이러한 때에는 방어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전영(前營)과 좌영(左營), 강화(江華)의 병정(兵丁)들을 각각 그 중군(中軍)이 대신 영솔하고 나가서 강어귀에 주둔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근수(宋近洙)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이종진(李鍾晉)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이정필(李正弼)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영수(金永壽)를 전환국 관리(典圜局管理)로 차하(差下)하고, 방판(幇辦) 안정옥(安鼎玉)을 총판(總辦)으로,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 정헌시(鄭憲時)를 참의(參議)로 승차(陞差)하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병오

김유연(金有淵)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영광(靈光)의 진결(陳結) 700결(結)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영흥(永興)·함흥(咸興)의 포락(浦落)된 전결(田結) 도합 119결 6부(負)에 대해서는 세금의 징수를 중지하도록 허락하였다. 각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것과 관련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11월 7일 정미

전교하기를,
"전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에서 사영(四營)에 나누어 소속시켰던 자를 합쳐서 하나의 영으로 만들되, 영의 호칭은 친군별영(親軍別營)으로 하라. 제치(制置)에 관한 일 등은 해영(該營)에서 묘당(廟堂)에 나아가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흠차 방판 북양대신(欽差幇辦北洋大臣)이 며칠 안으로 나온다고 한다. 수원 유수(水原留守)는 남양(南陽) 경계로 나가서 기다렸다가 맞이하여 행차를 호위하도록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유지(有旨)로 만들어 내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어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 박정양(朴定陽)을 영접관(迎接官)에 도로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 조병철(趙秉轍)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이교헌(李敎獻)을 별영사(別營使)로, 이경하(李景夏)를 전영사(前營使)로 삼았다.

 

경기(京畿) 열읍(列邑)의 환미(還米)에 대해서는 절반을 정퇴(停退)하도록 허락하였다. 해도(該道)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11월 8일 무신

행 호군(行護軍) 박선수(朴瑄壽)를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영접관(迎接官)이, ‘청(淸) 나라 제독(提督) 정여창(丁汝昌)이 수원(隨員) 6인과 군사 40명을 거느리고 오늘 미시(未時) 쯤에 선인문(宣仁門) 밖 오 통령(吳統領)의 진중(陣中)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마군소(馬軍所)에서 거행할 조례(條例)를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장관(將官)과 교졸(校卒) 등의 요포(料布)를 전에 용호영(龍虎營)에서 지불한 수량을 가지고 마련하자면 미(米) 3,867석(石), 목(木) 55동(同) 13필(疋), 태(太) 2,810석, 소미(小米) 24석, 적두(赤豆) 19석이 부족합니다. 별무사(別武士), 가전별초(駕前別抄), 기사(騎士), 문기수(門旗手) 등은 전에 소속된 각영(各營) 접제조(接濟條)를 가지고 분배(分排)하여 옮겨 와서 수용(受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9일 기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안무사(按撫使) 조병직(趙秉稷)의 장계(狀啓)를 보니, ‘길주(吉州) 등 8개 고을이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한데, 그들을 구휼하고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은 오직 진휼(賑恤)을 설행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관할 도내(道內)에는 이미 조적(糶糴)을 중지시켰으므로 달리 변통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 마련된 사환(社還)은 10개 주(州)를 모두 합해서 2만 석(石)밖에 안 되는데, 작년 가을에 절반을 거두었다가 올봄에 백성들에게 도로 나누었으나 이러한 흉년을 당하여 독촉하여 받아낼 길이 없습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소서.’ 하였습니다.
큰물이 지나가서 이미 침수된 곳이 많은데다가 된서리까지 또 몰아쳐 끝내 수확할 가망이 없습니다. 10개 주 안의 것을 통틀어 계산하여 억지로 3등급으로 나누었지만, 굶주린 백성들의 부황이 든 정상은 아마 저곳이나 이곳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너무나 참혹하고 측은해서 차마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새로 마련된 사환은 지금 백성들의 정황으로는 독촉해서 받아내기가 어려우니 모두 정퇴(停退)해 줄 것입니다. 당장에 구휼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관할하는 원래 환곡(還穀)을 이미 영구히 정지하도록 하였으니 달리 마련하여 획급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전에 개시(開示) 비용으로 사용했다가 현재 각읍(各邑)에서 보유하고 있는 전(錢) 중에서 참작하고 안배해서 속히 구휼할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0일 경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가 보고한 창녕현(昌寧縣)에서 고의로 배를 파손시킨 문제에 대하여 사공(沙工)이 납부할 미(米) 2,379석(石) 남짓 중에 형률을 적용받은 사공의 몫 미와 태(太) 764석은 특별히 상정(詳定)하여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고, 도망 중에 있는 놈들은 기어코 체포해서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라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해도(該道)의 도신(道臣) 조강하(趙康夏)의 보고를 보니, ‘포흠(逋欠)을 낸 사공을 모두 체포하지 못한 관계로 본색(本色)으로 준납(準納)한 방도가 없으니, 상항(上項)의 포흠낸 미와 태 1,614석 남짓을 특별히 수량대로 상정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대납을 허락한 것은 바로 형벌을 받은 놈들이 포흠낸 것이었으니, 더없이 중대한 정공(正供)을 중간에서 빼앗아 간 것과는 결코 같은 예로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법망을 빠져나간 사공들을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으므로 징수할 길이 없으며 장부를 정리할 대책도 없습니다. 그러니 미와 태 1,600여 석을 그 당시의 가격으로 속히 완납하게 하고, 도망 중에 있는 놈들은 기일을 정해 놓고 체포해서 곧바로 효수(梟首)하여 뭇 사람들을 징계시킨 뒤에 치문(馳聞)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1일 신해

전교하기를,
"숙위(宿衛)하는 군병(軍兵)들에게는 각각 그 영문(營門)에서 건호궤(乾犒饋)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서 위문하게 하라. 양화진(楊花津)과 마포(麻浦)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군병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위문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임자

김인호(金寅浩)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전영(前營)과 후영(後榮)의 군제(軍制)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의 예(例)대로 마련하라. 정령관(正領官)은 병방(兵房)으로, 부령관(副領官)은 영관(領官)으로, 참령관(參領官)은 초관(哨官)으로 고치라."
하였다.

 

11월 13일 계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삼남(三南)과 해서(海西) 지방은 올해 목화 농사가 모두 흉년이 들어 각항(各項)의 목(木)을 본색(本色)으로 독촉해서 바치게 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연이은 도신(道臣)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비록 이미 수량을 나누어서 대납(代納)할 것을 허락하였지만, 당장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사는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및 병조(兵曹)의 각영(各營)에 바쳐야 할 갑신년(1884) 몫 가운데서 꼭 써야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가(時價)로 거두어들이도록 각 해당 아문(衙門) 및 제도(諸道)의 도신들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중국 흠차 대신(欽差大臣)의 행차는 사체(事體)가 각별하니 영접관(迎接官) 박정양(朴定陽)을 지금 우선 감하(減下)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민종묵(閔種默)을 영접사(迎接使)에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들으니, 러시아 배가 우리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제물포(濟物浦)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문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인천 감리 사무(仁川監理事務) 홍순학(洪淳學)으로 하여금 속히 가서 성의를 표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1월 14일 갑인

전교하기를,
"이번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도하(都下)의 인민(人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흉악한 무리들의 화(禍)가 무고한 부녀자들과 아이들에게까지 미쳤으니, 몹시 참혹하고 측은하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한성부(漢城府)에 통지하여 죽은 사람들의 친족을 방문하고 특별히 의논하여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11월 15일 을묘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이봉구(李鳳九)를 체직(遞職)시키고 신정희(申正熙)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6일 병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심상훈(沈相薰)의 등보(謄報)를 보니,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인천(仁川)에 와서 묵고 있다고 합니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엄세영(嚴世永)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차하(差下)하여 하직 인사를 하지 말고 떠나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접사(迎接使)가, ‘흠차(欽差) 오대징(吳大澂)과 속창(續昌) 및 영무처(營務處)의 반자준(潘子駿)과 나풍록(羅豐祿) 이하 관원들이 병정(兵丁) 200명을 거느리고 오늘 신시(申時) 쯤에 남별궁(南別宮)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1월 17일 정사

중국의 오 흠차(吳欽差), 속 흠차(續欽差)를 편전(便殿)에서 접견하였다.

 

전교하기를,
"한강(漢江) 연안에 나아가 주둔하고 있는 장졸을 해산하여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대사(日本大使)가 머물 관소(館所)는 기영(畿營)으로 하고,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은 우선 신영(新營)으로 이접(移接)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에서 보고한 것을 보니, ‘북청(北靑)에서 압송한 가짜 어사(御史) 행세를 한 죄인 이상현(李尙鉉)과 수종(隨從) 하성칠(河星七) 등 11명을 압송해 올리고, 공초한 것을 성책(成冊)하여 첩보(牒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죄수들이 범한 죄는 지난번의 전 남병사(南兵使)의 장본(狀本)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위조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이미 자복하였고, 봉고(封庫)하여 파직시킨 것도 이미 드러났습니다. 정절(情節)이 몹시 흉악하고 행동이 매우 패려한 것이 바로 옛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그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이 형을 받거나 감옥에 갇히고 돈과 재물을 뜯긴 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속한다고 하니, 백 번이라도 죽여야 하고 한 번도 용서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죄인 이상현은 덕원부(德源府)로 압송해서 해당 부사(府使)로 하여금 군민(軍民)들을 대대적으로 모아놓고 효수(梟首)하여 뭇 사람들을 경계시키게 하고, 수종 하성칠 등 7명은 속아서 따라다녔다고 변명하였지만 사주를 받아 함께 악한 짓을 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추조(秋曹)로 이송하여 엄히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할 것입니다. 그밖에 역부(驛夫) 3명과 원통함을 호소한 사람은 달리 무거운 죄를 지었다는 단서가 없으니, 또한 추조로 하여금 징계하고 방송(放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11월 18일 무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소나무의 채벌을 금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더구나 도성(都城)의 사산(四山)에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은 중요함이 더욱 각별하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미련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채벌하니, 듣기만 해도 너무나 놀랍습니다.
만약에 각영(各營)의 자내(字內)에서 철저히 규찰하여 적간하였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해이해질 리가 있겠습니까? 잘 신칙하지 못한 해당 장신(將臣)들은 모두 현고(現告)를 바치게 하고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동시에, 앞으로는 각별히 살피고 금하여 적발하는 대로 조율(照律)하여 엄히 다스리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진휼청(賑恤廳)에서, ‘이번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도하(都下)의 민인(民人)들 가운데 사망한 사람의 친족들을 한성부(漢城府)에서 적간(摘奸)하여 성책(成冊)한 것에 따르면 각부(各部)의 자내(字內)에서 사망한 사람이 도합 50명이므로 이들 친족들에게 목(木) 2필(疋)씩을 나누어 주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1월 19일 기미

친군 별영(親軍別營)에서, ‘전교를 받은 것과 관련하여 본영(本營)에서 제치(制置)에 관한 일 등은 묘당(廟堂)에 나아가 의논한 뒤에 삼가 절목(節目)을 갖추어 들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올린 상소(上疏)의 대략에,
"요즘의 변고를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먼 곳에 살면서 병으로 누워 있다 보니 늦게야 소식을 들었는데, 달려가서 문후하는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예의 없고 성의 없는 신은 사는 게 죽음만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사패(司敗)에게 명하시어 신에게 감처(勘處)할 것을 의논하게 하소서.
아! 오늘날의 일이 어떤 연유로 생긴 것입니까? 신이 생각건대 전하께서 듣고 살피는 것이 주밀(周密)하지 못하였고, 나쁜 사람을 믿고 등용하시어 사랑하는 사람과 역적을 잘못 아시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분간하지 못한 결과 마침내 사나운 악한을 집안에 끌어들이고 간사한 놈들이 가까이에서 활개치게 하였습니다. 부추기고 교묘하게 기만하며 음모를 빚어내고 배포한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러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어루만져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셨으며, 기이한 것을 신기한 완물(翫物)로 삼고 기괴하고 허황된 것을 실속 있는 계책으로 삼아서 숨겨져 있던 음모가 갑자기 튀어 나와 종사(宗社)가 위태로워질 뻔 하였으니 전하께서도 두려워하고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저 젖비린내 나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번갈아 드나들더니, 나라 밖에서는 사전에 모의하고 대궐 안에서는 방자한 짓을 일삼았습니다. 비용을 셀 수 없이 쓰면서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았고, 조치가 지극히 빈번하였으나 단지 대중의 의심만 쌓게 하였습니다. 필경에는 변란이 일어났으니 과연 평소에 지목하여 보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이른바 그림자를 살펴서 형체를 안다고 한 것처럼 그것이 밝게 드러나 징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지나간 일은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병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약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지난 일을 교훈으로 삼는 것은 뒷날을 조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발하시어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잘 다스려 안정되게 하기를 은(殷) 나라 고종(高宗)처럼 하시고, 쇠퇴한 것을 일으키고 문란한 것을 다스리기를 주(周) 나라 선왕(宣王)처럼 하소서. 신은 급히 달려가서 분의(分義)를 펴지 못한 데다 문득 미친 소경처럼 상소를 올려 전하를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또한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 역적의 변란은 실로 내가 부덕하고 어리석은 소치로 일어난 것이다. 올라온 글을 읽어보니 부끄러움과 탄식이 교차한다. 경과 같이 노숙하고 나랏일을 염려하는 충성심을 가진 신하가 아침저녁으로 가르쳐주었다면 간사한 음모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환난을 겪은 뒤라서 도움을 바라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지금은 경이 병을 요양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 추위가 조금 풀리거든 즉시 올라와서 지난 일을 교훈삼아 조심해야 하는 나의 다스림을 도와 달라."
하였다.

 

11월 21일 신유

낙선재(樂善齋)에 나아가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접견(接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국서(國書)를 받았다. 귀국(貴國)의 대황제(大皇帝)가 친선과 우의를 보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대사(大使)를 파견해 보냈는데, 우리나라도 같은 생각이다. 앞으로 의정부(議政府) 외서(外署)가 함께 잘 토의할 것이다."
하니, 이노우에 가오루 곁에 있는 신하들을 나가게 해 달라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제가 우리 대황제를 대신하여 왔는데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신하들은 잠시 물러가게하고 세 대신(大臣)과 독판(督辦), 전어관(傳語官)만 시립(侍立)하였다. 대사에게 앉으라고 명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뢰기를,
"이번에 담판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대군주(大君主)께서 직접 저와 협상하시든지 대신을 시켜 상의 면전에서 협상하도록 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전권 대신(全權大臣)을 임명하여 의정부에서 함께 참가하여 담판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뢰기를,
"저는 본국(本國)에서 공무(公務)로 겨를이 없으나 특별히 두 나라 간의 중대한 문제 때문에 온 만큼 질질 끌 수는 없습니다. 옛날에 강화도(江華島)에서 조약을 맺을 때에 제가 바로 그 때의 판리대신(辦理大臣)이었습니다. 그때에도 담판이 이럭저럭 여러 날을 끌었는데 이번에 상의 면전에서 담판하자고 청하는 것은 속히 결말을 지으려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 1원(員)을 파견하여 편의대로 일을 행하게 하여 속히 해결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뢰기를,
"내일 즉시 담판을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리 하겠다."
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뢰기를,
"비밀리에 아뢰려고 한 것은 이번에 오고간 문건들이 대부분 사실과 어긋나 담판할 때에 기본 취지가 맞지 않는다면 사신은 즉시 논의를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의 일은 매우 불행한 일이어서 피차간에 문건이 자연 맞지 않을 수 있다. 귀국에서 특별히 대사를 파견해 보내어 담판을 짓게 하였으니, 참으로 일 처리가 공정하여 능히 공평하고 정당하게 되리라고 본다."
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뢰기를,
"온화한 전하의 얼굴을 다시 뵙게 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일본 전권 대사(日本全權大使)가 지금 협상을 하자고 하니 사체(事體)가 이전과는 매우 다르다. 전권 대신(全權大臣)을 좌의정(左議政) 김홍집(金弘集)으로 삼아 속히 해결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계해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위급한 때를 만남으로 인하여 대신들이 여러 날을 들어와 숙직하였는데, 지금부터는 잠시 그만두도록 하라. 지금 나라 형편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모쪼록 군신(君臣)이 서로 화합하고 정신을 한데 모은 뒤에야 쓰러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상황을 버텨 나갈 가망이 있을 것이다. 명(明) 나라 이래로 상신(相臣)이 입각(入閣)하여 일을 처리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 그 뜻을 본받아 행해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은 날마다 빈청(賓廳)에 와서 모여 일마다 품처(稟處)하여 재결(裁決)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의정부(議政府) 유사 당상(有司堂上) 4원(員)을 더 차하(差下)해서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응식(閔應植)의 장계(狀啓)를 보니, ‘병대(兵隊) 1,200명을 우선 가려 뽑으려고 하는데, 영(營) 휘하의 친위사(親衛士)와 배지 군관(陪持軍官), 각부(各部)의 긴요치 않은 장관(將官)들을 모두 해임시켜 그들에게 주던 요미(料米) 3,640석(石) 남짓과 전(錢) 2만 9,079냥(兩)을 군수(軍需)에 획부(劃付)하고, 배지(陪持)의 일은 전례대로 군뢰(軍牢)로 거행할 것입니다. 각읍(各邑)의 포군(砲軍)은 가능한 만큼 혁파하고 그들에게 주던 요미를 취해서 비용을 보충하고, 열읍(列邑)에서 납부한 월과전(月課錢) 6,966냥 남짓도 획하(劃下)하여 군기(軍器)를 만들고 수선하는 자금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강계(江界)·자성(慈城)·후창(厚昌) 등 3개 고을에서 받은 기사년(1869)의 가결전(加結錢) 1만 9,653냥 남짓은 본래 항구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데다, 또 동진진(東津鎭)이 혁파되어 그곳에 지방(支放)하던 미(米) 493석 남짓과 전 3,917냥 남짓을 모두 상항(上項)의 강계 등 고을의 가결전과 함께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으로 옮길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여러 조항을 변통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므로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운 만큼 다시 더 헤아려서 이후에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4일 갑자

한성 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었다.
〈한성 조약(漢城條約)〉
이번 경성의 사변(事變)은 작은 문제가 아니어서 대일본 대황제는 깊이 생각하고 이에 특별히 전권대사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파견하여 대조선국에 가서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하며, 대조선국 대군주는 돈독한 우호를 진심으로 염원하여 김홍집(金弘集)에게 전권(全權)을 위임하여 토의·처리하도록 임명하고 지난 일을 교훈으로 삼아 뒷날을 조심하게 한다. 양국 대신은 마음을 합하여 상의하여 아래의 약관을 만들어 우의가 완전하다는 것을 밝히며, 또한 장래의 사건 발생을 방지한다. 이에 전권 문빙(文憑)에 근거하여 아래와 같이 각각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다.
제1조
조선국에서는 국서(國書)를 일본에 보내어 사의를 표명한다.
제2조
이번에 살해당한 일본국 인민의 유가족과 부상자를 구제하며, 상인들의 화물을 훼손·약탈한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11만 원(圓)을 지불한다.
제3조
이소바야시[磯林] 대위(大尉)를 살해한 흉악한 무리를 조사·체포하여 종중정형(從重正刑)한다.
제4조
일본 공관(公館)을 새로운 자리로 옮겨서 지으려고 하는데, 조선국에서는 택지와 건물을 공관 및 영사관(領事館)으로 넉넉히 쓸 수 있게 주어야 하며, 그것을 수리하고 중축하는 데에 다시 조선국에서 2만 원을 지불하여 공사 비용으로 충당하게 한다.
제5조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근에 택하여 정하고 임오 속약(壬午續約) 제5관에 의하여 시행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 대신(特派全權大臣) 좌의정(左議政) 김홍집(金弘集)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特派全權大使) 종3위(從三位) 훈1등(勳一等)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별단(另單) 1. 약관 제2조, 제4조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환산하여 3개월 내에 인천(仁川)에서 지불을 끝낸다. 1. 제3조의 흉악한 무리에 대한 처리는 조약을 체결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 대신 좌의정 김홍집(金弘集)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 종3위 훈1등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원본】 25책 21권 8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어문학-문학(文學)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特派全權大使) 종3위(從三位) 훈1등(勳一等)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별단(另單) 1. 약관 제2조, 제4조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환산하여 3개월 내에 인천(仁川)에서 지불을 끝낸다. 1. 제3조의 흉악한 무리에 대한 처리는 조약을 체결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 대신 좌의정 김홍집(金弘集)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 종3위 훈1등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원본】 25책 21권 8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어문학-문학(文學)
별단(另單)
1. 약관 제2조, 제4조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환산하여 3개월 내에 인천(仁川)에서 지불을 끝낸다.
1. 제3조의 흉악한 무리에 대한 처리는 조약을 체결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1월 24일
특파전권 대신 좌의정 김홍집(金弘集)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 종3위 훈1등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원본】 25책 21권 8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어문학-문학(文學)
대일본국 명치(明治) 18년 1월 9일
특파전권대사 종3위 훈1등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원본】 25책 21권 8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78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어문학-문학(文學)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4원(員)을 더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행 상호군(行上護軍) 이호준(李鎬俊), 행 대호군(行大護軍) 이인명(李寅命),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영수(金永壽), 행 도승지(行都承旨) 이교익(李喬翼)을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덕(金炳德)이 자인(自引)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편은 위태롭고 민심은 흩어진 상황인데, 환난이 이미 진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덕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내가 경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너지는 집의 한 기둥과 급히 흐르는 강물에 외로이 떠있는 배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평소에 나라를 걱정하던 경의 충성심으로 또한 어찌 지나간 일을 새삼스럽게 제기하여 인책하고 물러날 명분으로 삼을 수가 있는가? 부디 물러날 생각을 하지 말고 즉시 조정으로 나오라."
하였다.

 

경연관(經筵官) 김낙현(金洛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선무는 윤리를 바로잡고 재물을 절약하며 사심을 억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양혜왕(梁惠王)이 이익〔利〕에 대하여 말한 것을 깊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어진 마음〔仁〕이 있으면서 그 부모를 버려두는 자는 없고, 의리〔義〕가 있으면서 그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는 자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이익만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저버리고 자식으로서 부모를 잊어버리기까지 하여 역적과 도적이 장차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은 장차 훈련시킨 군사가 우리 조정을 위해 쓰여지지 않을까 염려되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또 삼가 듣건대, 이미 긴급하게 종군하는 것도 아닌데 밝으신 성상께서 문득 예법에 어긋나게 기복출사(起復出仕)하게 하시면서 조금도 꺼려하지 않으시니, 또한 어떻게 윤리와 기강을 부지하고 인심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몸소 윤리를 바로잡는 도리를 솔선하소서. 또 반드시 사심을 억누르고 재물을 절약하셔야 할 것이니, 재물과 곡식은 전적으로 유사(有司)에게 맡기시고 정령(政令)은 반드시 노숙한 사람들에게 물으소서. 선왕(先王)의 올바른 법을 고치지 마시고 신진(新進)들의 감언이설을 쓰지 마소서. 천만번 지극히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하는 말이 글은 간략하지만 뜻은 절절하니, 마땅히 명심하고 가슴에 새겨두겠다. 다만 예로부터 글 읽는 선비들은 설사 자신이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조정에 있는 신료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더구나 어려운 때를 당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대는 부디 마음을 돌려서 올라와 과인을 인도하고 보좌해 달라."
하였다.

 

11월 26일 병인

우의정(右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 정승의 인사는 황급한 때에 나온 것이어서 미처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경은 즉시 사양하지 않고 나와서 간고(艱苦)한 형편에서 일을 주선하였다. 그런데 이제 교외의 보루가 막 철수되자 사임을 청하는 소장이 갑자기 이르렀으니 경의 고충을 알 만하다.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부리는 도의상 형식적인 문구로 버리기 어려운 만큼 사직하는 의정의 직함을 이제 우선 따라 주겠으니, 경도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자리에 있거나 떠나갔거나 관계없이 매일 나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기 바란다."
하였다.

 

김병시(金炳始)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이세재(李世宰)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이두현(李斗鉉)이 상소하여 5명의 흉도를 성토하고, 운봉(雲峯)·문경(聞慶)·철령(鐵嶺)의 방비를 잘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할 계책을 겸해서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공분(公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논한 내용에도 취할 만한 것이 있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송백옥(宋伯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오늘날의 급선무에는 10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여러 역적들을 성토하고 추국(推鞫)하여 노륙(孥戮)의 형벌을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대체로 위급한 때에는 반드시 먼저 기강을 바로잡고 조치가 합당해야 하니, 그렇게 하면 민심이 기꺼이 복종하고 나라가 융성하게 됩니다. 《춘추(春秋)》의 법에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있으면 누구나 다 죽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여러 역적의 경우는 극히 흉악하고 더없이 패려하니, 그 죄가 진(晉)의 왕돈(王敦)이나 당(唐)의 주자(朱泚)보다 더 큽니다. 그들을 국문하여 철저히 조사하시고 속히 노륙하고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률을 시행하여 하늘의 신명과 땅의 사람이 다 같이 분하게 여기는 마음을 풀어주소서.
두 번째는 각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정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은 청하건대 우선 속히 중국 조정에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사변(事變)이 일어난 이유와 원세개(袁世凱) 장수가 구원해 준 공적에 대하여 상세히 진달하소서.
그리고 일본 공사(日本公使)로 말한다면, 객관(客館)을 열고 항구를 개방하며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을 진행한 뒤로 마땅히 규정을 잘 지키고 조약을 위반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우리나라의 역적들과 함께 임금을 협박하고 정승을 살해하였습니다. 저들이 기만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롭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것이고, 저들과 공모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질지도 의롭지도 못한 것이니, 저 일본 공사는 반드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은 설사 강하다 해도 사리에 어긋나는 만큼 그들은 석 자 주둥이를 놀릴 수 없을 것이며 온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청하건대 각국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잘잘못의 사정을 널리 알리소서. 그렇게 하면 위태로운 국면을 안전한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크게 윤음(綸音)을 내리시고 전철을 밟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우(夏禹)와 성탕(成湯)은 자신을 책망하시더니, 그 흥성함이 힘찼습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윤대(輪臺)를 침략한 것을 후회하고 방사(方士)와 선인(仙人)들을 모두 내쳐서 보냈으며, 〖명 태조의〗 천명을 따르겠다는 조서에 씩씩한 장수와 사나운 군사들이 감동하여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종이 한 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이 도리어 백만의 군사보다도 낫습니다. 임오년(1882) 7월에 내리신 윤음을 생각해 보면, 늙은이와 부녀자, 어린아이들까지 윤음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외우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흠모하고 감탄하면서 그저 잠시라도 죽지 않고 훌륭한 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신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사이에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불행하게도 또 오늘의 변란을 만났으니, 신은 덕스러운 윤음을 내려서 먼저 자신을 책망하여 후회하고 애통해 하는 깊은 뜻을 속시원히 보이시고 공허하게 형식만 갖추는 전철을 밟지 마소서.
네 번째는 대궐을 엄숙하고 청백하게 해서 사사로운 알현을 근절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대궐 안부터 장엄하고 엄숙하게 하고, 아래로는 좌우에서 모시는 가까운 신하들이 감히 은총을 믿고 법도를 어지럽히며 뇌물을 받고 알현을 청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그 임금에게 고했던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말을 잘 체득하시어 힘써 시행하시되, 한 마디 말씀이라도 바른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하시고,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일도 바른 데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도록 하소서.
귀척(貴戚)이나 근신(近臣)들은 15일에 한 번씩 문후를 받들도록 하시고 내시(內侍)와 여알(女謁)들은 각기 자신의 직책을 잘 수행하여 문을 지키고 명령을 전하며, 의복이나 음식만 의논하도록 하소서. 대궐문을 열고 닫을 때를 정해 두고, 대전에서는 조알(朝謁)하는 예를 근엄하게 하시어 임금의 문이 하늘과 같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조정의 체통은 날로 높아질 것이고 사사로이 알현하고 난잡하게 등용되는 길이 없어질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정사는 유사(有司)에게 맡기시고 서하(書下)는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임금이 총좌(叢脞)하면 중신(重臣)들이 게을러져서 온갖 일이 폐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총좌’라는 것은 자질구레하다는 말입니다. 임금이 신하의 직무를 수행하면 신하들이 게을러지고 정사는 실추됩니다. 그리하여 저울로 문서를 달아서 정해 놓은 양을 반드시 처리하고 위사(衛士)가 밥을 전달할 정도로 정사에 매우 부지런히 애쓰신다 하더라도 고인(古人)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실효를 거둔 데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직접 글을 써서 내려 보내어 지휘한 것은 바로 송(宋) 나라 말기의 잘못된 정사였습니다. 만약에 중비(中批)와 서하(書下)에 제수(除授)의 명단이 발표되기 전에 이름이 먼저 퍼져 나간다면 훌륭한 조정에서 밝게 관리를 임용하는 데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중용(中庸)》의 구경(九經)에 이르기를, ‘관리를 많이 두어 부릴 사람을 마음대로 맡기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도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보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하루에 만 가지 정사를 살피시는 임금께서 몸소 작은 문제까지 수많은 집사들이 하는 것처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문서를 봉행(奉行)하고 규례대로 명령을 받드는 것은 일개 서리(胥吏)로도 충분한데 어찌 이조(吏曹)의 관리를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은 청하건대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행할 때에 마땅히 유사에게 책임을 맡기셔서 지공무사(至公無私)에 힘쓰시고 나라의 큰 정치를 총괄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임금은 편안하고 신하는 수고하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관작(官爵)을 삼가고 아끼며 사사로이 재물을 바치는 것을 영원히 막는 것입니다. 무릇 작록(爵祿)이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려서 세상을 독려하고 우둔한 자를 연마하여 제어하고 고무하는 수단입니다.
한(韓) 나라 소후(昭侯)의 정사는 한 번 찡그리거나 웃는 것조차도 아꼈으며, 당(唐) 나라 선종(宣宗)의 정사는 자주색 관복을 영예롭게 여겨서 오직 뛰어난 공로가 있는 사람만 파격적인 벼슬로 대우하였습니다. 지금은 작위와 상이 자질구레하고 넘쳐나며 자급과 품계가 건너뛰고 남발되어 받는 사람이 도리어 영예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껄이고 비웃는 소리가 온 세상에 넘쳐나서 엽관(獵官)하는 짓이 풍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경(詩經)》에서〗 ‘붉은 관복을 입은 자가 삼백’이라 한 것은 실제로는 시인이 저들의 옷이 걸맞지 않음을 비난한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온 나라에서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은 당연히 정규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백성들의 생계가 위축될까 걱정입니다. 옛날에 천자가 열국(列國)에 금을 요구하고 수레를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춘추(春秋)》에서는 그 사적으로 요구한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무릇 재물이란 본래 하늘이 내려주고 땅이 실어다 준 것이 아닙니다. 형편상 반드시 불쌍한 백성들의 등가죽을 깎아내고 잘라내며 채찍으로 후려친 뒤에야 크고 작은 고을에서 사적으로 바치는 수량을 충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차마 백성들의 고혈을 사치를 부리는 데 낭비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탐오하는 관리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 유폐(流弊)는 필경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하여 도적이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할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더욱 잘 살펴보소서.
일곱 번째는 군과 현에 책임자를 잘 골라서 백성을 안정시키고 도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지금 백만의 백성들은 마치 물이 새는 배 가운데 있는 것과 같아서 언제 잘못될지 모를 형편이니, 그 잘못은 전적으로 수령(守令)이 진실한 마음으로 전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펴지 못하며 실제 혜택으로 안정시키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혹 굶주림과 추위에 몰리기도 하고 혹 가렴주구에 고통 받기도 하여, 백성들이 용과 뱀 같이 위험한 무리로 변화되어 반란을 일으키고 도적질을 하면서도 완강히 두려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청렴하고 현명하며 착한 인재를 신중히 선발해서 먼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무마하도록 하시고, 또 이웃 간에 10가구나 5가구씩 서로 통제하는 법과 도적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체포해 오거나 목을 베어 오면 상을 내리는 제도를 거듭 엄히 하신다면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처럼 모여든다고 해도 무엇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여덟 번째는 관방(官方)과 군제(軍制)에서 긴요치 않은 것은 없애고 예전대로 회복시키자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서울로부터 밖으로는 주와 현에 이르기까지 긴요치 않은 관리들과 아전(衙前)들이 모두 앉아서 녹봉(祿俸)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연전에 축소한 이후로 새로 둔 관리가 도리어 축소하기 전의 인원수보다 더 많으니 득보다 실이 많으며, 5군영(軍營)을 4군영으로 만들었으나 병정은 저잣거리의 무뢰배를 많이 취하였으니 그들이 배운 기예가 겉으로는 새롭고 특이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더러 교만하고 게으릅니다. 그뿐 아니라 제도와 통제에 익숙하지 못해서 무위영(武衛營)의 친군은 이미 임오년(1882) 변란 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였으며 4군영으로 만든 새 편제도 이번의 변란 때에 실효를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군사는 소수 정예를 귀하게 여기고 사람이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기술은 전문으로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형식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청하건대 관방을 이미 축소한 이상 번거롭게 고치지 말아야 하며 군제의 경우는 예전 군영의 제도를 참작하고 새로 배우는 기예를 연습하게 하시며, 또 다만 장수는 적임자로 얻어서 군사들과 동고동락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군율이 서고 상관을 친근하게 여기고 윗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먼 곳의 물건을 보배로 여겨서 유익한 것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돈과 곡식과 무명은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것으로써 마치 콩이나 좁쌀, 물이나 불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해외의 먼 곳에 있는 왜증(倭繒)과 양단(洋緞) 및 시계 등 신기한 물건들은 값만 비싸고 물건도 치밀하지 못한 것들인데, 그것으로 이런 것과 바꾼다면 한 치를 얻는 대신 한 자를 잃게 될 것이니, 참으로 나라의 재정에 크게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심지어 연경(燕京)의 시장에서 패물 등 노리개 같은 물건들을 특별히 구해오고 멀리서 사오는 일은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치하게 만들어, 위에서 행함에 아래에서 본받아서 나라와 개인들의 재물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을 본받아 구슬과 비단을 대궐 앞에서 불태우시고 검소한 옷차림으로 무익한 보석과 노리개를 먼저 배척하신다면 누가 감히 간사하게 아첨을 하며 음탕하고 교묘한 짓을 하여 성상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겠습니까? 또 후원(後苑)의 연못과 누대에서 오락을 벌리는 것과 긴급하지 않은 토목공사를 벌이는 일을 아울러 더 이상 행하지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비용이 저절로 절약되고 재물이 저절로 여유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부역(賦役)에는 일정함이 있어서 농사짓는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될 것이고, 공물의 값은 정체되는 일이 없어서 도시는 생업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더없이 급한 정사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국사(國史)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 기재되어 외국까지 퍼지고 후세에까지 전해진다면 누군들 선(善)을 따르고 검소한 것을 밝게 드러냄이 모든 임금들보다 특출한 전하의 다스림에 대하여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열 번째는 일을 하는 데는 순차가 있게 하고 명령을 내린 것은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년 이후로 전하께서 고심하고 헤아려보신 뒤에 많은 제도가 바뀌어 낡은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였으니, 참으로 우리 전하의 제때에 합당하게 처리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하려는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신하된 사람으로 그 누가 흠모하고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근심되는 것은 일을 하는 데에 순서가 없고 명령을 내렸다가 바로 뒤집는 것이니, 일을 시작하기는 크게 하지만 성공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옛것을 본받고 오늘의 것을 참작하시면 저것을 통하여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백성과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어떤 법을 막론하고 반드시 먼저 묘당에 자문을 구하고 일반 신하와 서민들과도 의논하셔야 하니, 의견이 일치된 다음에야 아주 안전한 계책이 되는 것입니다. 상하가 같은 마음이 되고 안팎에서 힘을 다하며, 명령을 내리신 다음에는 오직 시행하여 뒤집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한 가지 일을 시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시행한다면 차례로 점차 쌓이게 될 것입니다. 비근한 일에 서둘지 마시고 오직 실질적인 일을 추구하소서. 작은 손해를 돌아보지 마시고 오직 큰 계책에 나아가셔서 용기로써 결단을 내리시고 믿음으로 보이소서. 그리하면 나라의 근본은 공고해질 것이며 안이 다스려지고 밖이 화평해지는 계책에 있어서도 선후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들이 오늘날의 병통에 아주 적중하다. 그대는 경연(經筵)의 근신으로서 이런 충직한 말을 올렸으니 매우 가상하다. 한 통을 써서 곁에 두도록 하겠다."
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김영선(金榮善)이 상소하여 진달하기를,
"적을 막는 방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주장(主將)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군사를 정예롭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대오를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사로이 총애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들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이희봉(李羲鳳)이 상소하여, 밖으로는 외적을 방어하고 안으로는 잘 다스리며, 큰 역적을 토죄(討罪)하고 인심을 진정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에 채택할 만한 것이 많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 장교준(張敎駿)이 상소하여, 다섯 역적과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죄를 성토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에 의당 참작할 것이 있다."
하였다.

 

전 충의(前忠義) 김동석(金東錫)이 상소하여 시무책(時務策) 세 가지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문무(文武)의 신하로서 노숙하고 재주와 덕망 있는 사람을 많이 등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군사들을 거느리는 직임에 의기가 있고 지혜롭고 용맹이 있는 선비를 많이 쓰는 것이며, 셋째는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재주와 행실을 보며 벌열(閥閱)에 따라 등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위를 생각하는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양성(陽城)의 의병(義兵) 주창자 이교석(李敎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적신(賊臣)이 무함하고 선동해서 외적이 창궐하고 지존을 협박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가 닥쳤다는 보고를 전해 듣고는, 정신이 싸늘해지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한 번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위급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중국의 장신(將臣)이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대가(大駕)를 구원하여 편안하게 대궐로 돌아오셨으니, 신은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외적의 침입이 당장에 닥칠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방어할 계책을 강구하시고, 도망 중인 여러 역적들을 염탐하고 체포하여 죄를 다스려서 나랏법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의병을 모집해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일이 매우 가상하다. 이제는 물러가서 고향 마을을 보위하라."
하였다.

 

전 오위장(前五衛將) 이경렬(李京烈)이 상소하여 일본과 강화할 것과 울릉도(鬱陵島)를 개간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에 상당히 채용할 만한 것들이 있다."
하였다.

 

예안(禮安)의 진사(進士) 이중찬(李中瓚)이 상소하여 일본과 수호(修好)하지 말 것을 청하고, 또 변란이 있은 뒤에 향장(鄕庄)으로 옮겨 간 조정 신하들을 파면시키고 조적(朝籍)에 두지 말 것에 대해 아뢰니, 비답하기를,
"의분에 격앙되어 있으니, 적개심이 타오른 것을 볼 수 있다. 끝에 첨부한 말은 조정 신료들을 경계시킬 만하다."
하였다.

 

11월 27일 정묘

승정원(承政院)에서,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이경하(李景夏)와 친군후영사(親軍後營使)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신정희(申正熙)가 궐 밖에서 봉패(奉牌)한 채 끝내 명을 받들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군무(軍務)가 한창 많고 조사하는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끝내 명을 받들지 않고 있으니, 명분과 도리상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모두 경기(京畿) 연해(沿海)에 투비(投畀)하는 법을 시행하라. 전영사(前營使) 좌포장(左捕將)은 별영사(別營使)가 겸찰(兼察)하고 후영사(後營使) 우포장(右捕將)은 좌영사(左營使)가 겸찰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홍집(金弘集)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임명된 이래로 환난 중에 두루 다니고 교섭하는 일에 힘을 다하다 보니 하루도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교외의 보루가 막 철수되었지만 걱정되고 근심스런 일이 아직도 많으니, 영원히 군색한 국면을 생각하여 경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예우해야 할 처지에서 오래도록 어진 사람을 고생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직하려는 의정의 직임을 우선 따라주는 것이니, 경은 나의 마음을 헤아려 책임을 벗었다고 마음을 놓지 말고 날마다 나와서 영의정(領議政)과 함께 의논하고 도와서 간고한 시국을 구제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윤자승(尹滋承)을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으로, 이호준(李鎬俊)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남일우(南一祐)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11월 28일 무진

심상만(沈相萬)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이경하(李景夏)를 부평부(富平府)에, 신정희(申正熙)를 인천부(仁川府)에 모두 투비(投畀)하라고 명하였다가 의금부(義禁府)에서 계품(啓稟)한 것과 관련하여 곧바로 모두 용서하여 이전 직책에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9일 기사

전교하기를,
"내일 마땅히 편전(便殿)에 나아가 나의 마음을 펼치는 유지(諭旨)를 포고할 것이니,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하 관리들은 상참(常參)의 예대로 와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한경원(韓敬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재경(李在敬)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의 변란은 바로 내가 덕이 부족한 탓에 생긴 것인데, 어찌 경이 인혐할 단서가 되겠는가? 무릇 정승의 임무가 중대함이 어느 때고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더구나 간고(艱苦)한 때를 당하여 위태로운 형편에서 버텨 나가고 흩어지는 민심을 보합(保合)하려면 덕량(德量)과 재유(才猷)가 있어서 일찍부터 조야(朝野)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내가 경을 정승으로 임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탁하여 영의정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지금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이 연달아 사임하여 정승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내가 경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깊고 전일(專一)하니, 경은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헤아려 나라를 위하여 애쓰는 도리에 더욱 힘쓰고, 다시는 사직을 고하지 말아서 나랏일을 다행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30일 경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이 상참(常參)의 예대로 입시하였다. 이때 임금이 마음을 펴는 별유(別諭)를 반포하였다. 별유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만백성의 위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어진 사람을 등용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으나 인재를 알아보는 식견이 밝지 못하였고 잘 다스리고 싶은 마음은 품고 있으나 다스림의 요체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른 때로부터 21년 동안 밤낮으로 국사에 부지런히 애쓰며 휴식할 겨를이 없었으나 여러 가지 정무가 번잡하고 모든 관리들이 해체되어, 위임함은 전일(專一)하지 못하고 공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기회로 끼어 들어와 총명을 현혹시켜 변란의 형세가 날로 드러났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여 점차 10월의 변란을 초래하여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다.
아! 변란이 생겨남은 것은 저절로 하늘에서 내려진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 6, 7명의 정승과 수많은 백성들과 중국의 용사(勇士), 이웃 나라의 상인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참혹하게 억울한 화를 당했는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갈수록 더 마음이 슬프고 애통하다. 앞으로 내가 징계할 바를 알았기에, 이에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다 펼쳐서 너희들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널리 고하노라.
무릇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서 한 사람을 돕는다 해도 오히려 부족함을 걱정할 것인데, 하물며 한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백관의 일을 대신하니 어찌 어지럽지 않겠는가? 앞으로 너희들 만백성들과 약속하노니, 나는 감히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나는 감히 여러 가지 사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간사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개인 재산을 모으지 않으며 오직 공적인 것만 들을 것이다.
임금의 책임은 정승을 잘 선발하는 데 있으며, 정승의 직무는 오직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데 있다. 앞으로 나라의 치란에 대해 나는 모르니, 전적으로 의정부에 책임을 지워 맡긴 직임에 대해 성공을 바랄 뿐이다. 너희들 의정부에서는 합심해서 정사를 보좌하며 알고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고, 머뭇거리며 관망하고 구차하게 영합하다가 전날의 잘못을 답습하지 말도록 하라. 너희 모든 관리들은 각기 직책을 맡아보면서 거리낌도 없고 흔들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일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무릇 사람을 쓰거나 무슨 문제를 제정할 때에 반드시 공론이 정해진 뒤에 나에게 결재를 청하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아! 너희들 모든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 및 온 나라의 신사(紳士)들은 모두 다 나의 말을 들으라. 환란 끝에 천심(天心)이 화를 준 것을 뉘우치고 있으니, 만약 오늘에 와서 일을 잘 거행하여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화란(禍亂)이 생겨남은 아직 그치지 않은 것이다. 너희 의정부에서 크게 공정한 마음을 기울인다면 내 들어주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나의 공정한 마음이 진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면서 사심(私心)에 영합하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대신의 체모가 아닌 것이니, 오직 너희 의정부에 죄가 있는 것이다.
아! 내 이 서약의 말을 하노니, 나는 말로 너희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중외(中外)의 모든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은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지금 나라의 형편이 말이 아니고 백성들의 사정이 황급하며 무슨 일이든지 폐단이 극도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이유를 따져보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습속을〗인습하고 편안하게만 지내다가 마침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변란을 겪은 뒤로 군신과 상하가 더욱 경계하고 분발하여 바로잡고 수습할 방도를 도모해야 하는데도 변변치 못한 신은 아직까지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도 전하께서 밤낮으로 국사를 걱정하며 애쓰실 때 보탬이 된 적이 없어서 부끄럽고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에 친히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반포하였습니다. 내용이 간절하고 자신을 책망하며 잘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말씀을 간곡하게 반복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위태로운 것을 안전하게 전환시킬 기회입니다. 그러니 모든 신료들치고 누군들 절대적으로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편 생각할 때에 정사를 잘하는 요체는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정사를 행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니, 법령을 한결같이 해서 백성들의 뜻으로 하여금 지향할 바를 알게 하고, 간사하고 바른 것을 분간해서 나라의 체통이 혹 혼란스럽고 문란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법령이 미덥지 못하면 어진 정사를 베풀 수 없으며, 간사한 자와 바른 자가 뒤섞여 등용되면 여러 일이 자연히 난잡하게 될 것이니, 지금 진실한 윤음을 날마다 아래에 펴시고 충직한 말을 날마다 전하 앞에서 진달하더라도 결국엔 장황하게 형식만 갖추는 것이 되고 말뿐입니다. 존망의 계기는 오늘날 실질적인 데 힘쓰느냐의 여부에 달렸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생각하고 생각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전에 유음(諭音)을 반포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갓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므로 나는 매우 후회한다. 그래서 이번에 이렇게 마음을 크게 펼치는 일이 있게 된 것은 경들과 함께 지켜나가며 변치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경이 이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감히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마음을 터놓은 유음에 대해 의당 잘 알고 있겠지만, 예로부터 정사의 요체는 강하고 엄한 뒤에는 관대함을 숭상하였으며, 관대하고 유순한 뒤에는 엄격함을 숭상하였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군신과 상하가 마땅히 떨쳐 일어나서 분발하고 이전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아야만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니, 경들은 부디 이러한 뜻을 체득하고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개혁하는 정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내가 크게 기대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부터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사무를 의정부에 위임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반드시 먼저 신용을 보이고 각별히 감독하고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제 유음을 받았으니 대소 신민들이 응당 갑절 더 조심하고 경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상의 마음이 확고해서 매번 아랫사람들이 바른말을 올릴 때마다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받아들인 연후에야 반드시 받아들여 널리 시행한 성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무릇 정령(政令)과 시행에 있어 한결같이 조종(祖宗)의 법을 준수해 나간다면 팔짱을 끼고 무위(無爲)의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날 임금과 신하가 함께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법에는 특별히 신기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원래 좋은 법과 훌륭한 규정이 있는데, 이미 준수하지 않아서 마침내 법이 오래됨에 따라 폐단이 더욱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선유(宣諭)한 내용도 새 법이 아니고 실로 옛 법을 거듭 밝힌 것입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시(金炳始)를 제배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이도재(李道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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