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1897) 정월 28일】 영국(英國)·독일〔德國〕·러시아〔俄國〕·이탈리아〔義太利國〕·프랑스〔法國〕·오스트리아〔墺地利〕 주차 특명 전권공사(駐箚特命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을 부영 특명 대사(赴英特命大使)로 삼았다.
【원본】 39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외교-러시아[露] / 외교-독일[德] / 외교-영국(英) / 외교-영국(英) / 외교-이탈리아[伊] / 외교-프랑스[法] / 외교-오스트리아(墺)
영국(英國)·독일〔德國〕·러시아〔俄國〕·이탈리아〔義太利國〕·프랑스〔法國〕·오스트리아〔墺地利〕 주차 특명 전권공사(駐箚特命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을 부영 특명 대사(赴英特命大使)로 삼았다.
3월 2일 양력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 민영소(閔泳韶)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용선(尹容善)에게 홍문관 시강을 겸임(兼任)하게 하였다.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議政) 김병시(金炳始),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종한(金宗漢),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 시강(侍講) 윤용선(尹容善), 겸장례(兼掌禮) 이용선(李容善)이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불러 만나 보는 것은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를 다시 의논하기 위해서이다. 열성조(列聖朝)의 시자(諡字)와 서로 같은 것이 10여 번이나 되지만, 오늘 문성(文成)이라는 두 글자는 정종(正宗)의 시호 글자와 서로 같을 뿐 아니라 대수(代數)가 아주 가깝기 때문에 결국 못마땅한 점이 있다. 다시 부망(副望)으로 정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김병시(金炳始) 등이 아뢰기를, "지금 삼가 하교(下敎)를 받들었는데 이것은 전하의 세심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열성조의 시자가 겹쳐 사용된 것이 비록 대부분 이미 규례가 되었지만 끝내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정(改定)하는 데 대해서 신은 우러러 공경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시자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며 겹쳐 사용한 것이 이미 전례로 되어 버렸지만 전하의 의견이 결국 어떤가에 관련되니, 이렇게 개정함에 우러러 공경함을 더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불러 만나 보는 것은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를 다시 의논하기 위해서이다. 열성조(列聖朝)의 시자(諡字)와 서로 같은 것이 10여 번이나 되지만, 오늘 문성(文成)이라는 두 글자는 정종(正宗)의 시호 글자와 서로 같을 뿐 아니라 대수(代數)가 아주 가깝기 때문에 결국 못마땅한 점이 있다. 다시 부망(副望)으로 정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김병시(金炳始) 등이 아뢰기를,
"지금 삼가 하교(下敎)를 받들었는데 이것은 전하의 세심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열성조의 시자가 겹쳐 사용된 것이 비록 대부분 이미 규례가 되었지만 끝내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정(改定)하는 데 대해서 신은 우러러 공경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시자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며 겹쳐 사용한 것이 이미 전례로 되어 버렸지만 전하의 의견이 결국 어떤가에 관련되니, 이렇게 개정함에 우러러 공경함을 더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定), 예조의 당상(堂上官)에게 물어 보았다.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詩號) 망단자(望單子)를 부망(副望)으로 삼가 정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표석대자전문 서사관(表石大字篆文書寫官)는 총호사(總護使)가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칙지(勅旨)를 받들어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 원단자(原單子) 판부(判付) 중 부망(副望)으로 하는 것에 대한 칙령(勅令)을 받들어 첨서(籤書)하여 들이는 의견을 삼가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諡號)를 ‘명성(明成)’으로 개망(改望)하였다. 【사방을 밝게 내리 비치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예법과 음악을 밝게 갖춘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원본】 39책 3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18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아뢰기를,
"이번에 축하를 올리고 특별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습니다. 유배(流配)되었거나 감금된 죄인은 각각 몇 등급을 낮추며 징역을 진 죄인들도 모두 감등(減等)하였는지의 여부와 어떤 형태의 범죄를 감등하는가에 대해서는 본부(本部)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반역·강도·절도·살인·강간, 속이고 재물을 빼앗은 죄 이외에는 각각 한 등급을 낮추며 미결(未決)로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도 한 등급을 낮추라."
하였다.
3월 3일 양력
내부 협판(內部協辦) 신석희(申奭熙)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대리(代理)하라고 명하였으며, 군부 협판(軍部協辦) 민영기(閔泳綺)에게 대신의 사무를 대리하라고 명하였다.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 심상만(沈相萬)은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임명하여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4일 양력
대행 왕후의 묘지문 제술관(大行王后墓誌文製述官) 민영환(閔泳煥)과 개명정 서사관(改銘旌書寫官) 이재순(李載純)을 서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수신(晬辰)이다. 비서경(祕書卿)으로 하여금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3월 6일 양력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김종한(金宗漢)과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재완(李載完)을 서로 바꾸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3월 7일 양력
칙령(勅令) 제14호, 〈완도군에 속한 비금도와 도초도 두 개 섬을 지도군의 관할에 이속하는데 관한 안건〔莞島郡所屬飛禽都草兩島移屬于智島郡管轄件〕〉과 칙령 제15호, 〈평안북도 관찰부의 위치를 영변으로 개정하는데 관한 안건〔平安北道觀察府位置以寧邊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3월 8일 양력
3품 유기환(兪起煥)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9일 양력
정2품인 김영철(金永哲)과 김명규(金明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임명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민영주(閔泳柱)와 이원일(李源逸)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종한(金宗漢)이 아뢰기를,
"수릉 영(綏陵令) 서상경(徐相璟)이 보고한 것을 보니, ‘본릉(本陵)의 향탄 전답(香炭田畓) 64결(結)이 고양군(高陽郡)에 있는데 감관(監官)이 자주 교체되어 조세 납부가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전답의 형지(形止)는 본 능에서 애초에 답헙(踏驗)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햇수가 오래되도록 그대로 따른다면 위토(位土)는 앞으로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니 조사하여 바르게 정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감관이 자주 교체되면 절로 오래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 힘썼으며 모두 세금 납부를 지체하여 능에서 사용하는 비용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전답의 형지(形止)를 두루 살펴보지 않아 묵밭이 된 것을 제때에 수보(修補)하지 않았으며 몰래 팔아 버린 것도 청맹과니가 된 듯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일들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마침내 유명무실하게 될 것입니다. 일의 소홀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본 능의 관리로 하여금 지방관을 안동(眼同)하여 먼저 가서 창고마다 조사하고 양안(量案)을 고쳐 만들어서 이번 가을의 추수부터는 본 능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0일 양력
의정부(議政府)에서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청의(請義)로 인하여 각 역참(驛站)의 전답을 탁지부(度支部)로 이부(移付)하는 일을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한 다음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궁내부(宮內府)와 군부(軍部)에서 서로 의논하여 군부에 이부하라."
하였다.
3월 11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진전(眞殿)의 열성(列聖) 어진(御眞)을 이 궁궐의 별전(別殿)으로 이봉(移奉)한 것은 참으로 정례(情禮)와 사세(事勢)상 만부득이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임시로 모셔 놓고 있으니 황송함이 더욱 절실하다. 영건(營建)의 역(役)을 며칠 안으로 끝내도록 궁내부(宮內府)와 탁지부(度支部)에 분부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종한(金宗漢)이 아뢰기를,
"각 능(陵)과 원(園)의 위토(位土)를 아직도 미처 획정(劃定)하지 못한 것이 많으며 재궁(齋宮)에 딸린 하인들도 전접(奠接)할 방법이 없어 고장을 떠나 점점 흩어지고 있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늘 정성스럽게 되지 못할까봐 근심됩니다.
각 재관(齋官)들이 획정을 청하는 보고가 날마다 올라오고 있으니 사세를 참작하여 멀리 앞날까지 고려한다면 전답을 획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착실히 뿌리를 내려 신역(身役)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원(本院)에서는 달리 마련할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각 능과 원의 부근에 있는 역토(驛土) 가운데서 적당히 획부(劃付)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영규(閔泳奎)를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정2품 윤용구(尹用求)·김종한(金宗漢)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명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조병직(趙秉稷)에게 법부 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대리(代理)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3월 12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에게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을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대리(代理)하라고 명하였다.
외부 주사(外部主事) 이기(李琦)를 영국(英國)·독일〔德國〕·러시아〔俄國〕·이탈리아〔義國〕·프랑스〔法國〕·오스트리아〔墺國〕 공사관(公使館) 3등 참서관(參書官)에 임명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3월 13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3월 14일 양력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에게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 김상규(金商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태복사 장(太僕司長) 김철희(金喆熙)를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조동면(趙東冕)을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삼았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세 번째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조병호(趙秉鎬)의 사직 상소(辭職上疏)의 대략에,
"신은 이미 한 벼슬을 감당하지 못하여 오늘 이렇게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감히 주제넘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구구한 어리석은 생각에도 적이 근심되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우러러 아뢰는 바입니다.
눈 앞의 급한 형편이 바둑들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온갖 법도가 무너진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진술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요점만 말한다면 법령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직무 태만으로 자기 맡은 일을 수행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여 흔들리는 것이 매달려 있는 깃발 같습니다.
한 사람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벌벌 떠는 것이 마치 아침저녁을 보존하지 못할 것 같으니, 아!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나라를 가진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몸을 가진 것과 같아 남이 나를 사랑하여 주는 것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배고프고 배부르고 춥고 더운 속에서 조양(調養)하는 방도는 내가 스스로 살펴야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급선무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중앙의 모든 집사(執事)와 지방의 각 부군(府郡)에서 모두 적임자를 얻고자 하니 이 역시 폐하(陛下)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 폐하께서는 명철하시니 인물이 어진가 어질지 못한가 하는 것은 일월(日月)이 비추는 앞에서 자취를 숨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잡스러운 무리들은 일과 모임으로 인연을 대고서 요행수로 부귀와 영화를 누려 하루아침에 쾌락을 도모하니 저들이 어찌 나라를 위해 깊이 근심하고 원대하게 생각해야 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도당을 세우고 사리를 영위하며 거짓을 꾸며대고 진실이 적으니 이것은 바로 폐하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충성과 간사함을 가려내고 궁궐을 엄숙하고 깨끗이 한 후에야 현명한 사람을 가려서 얻어서 그의 재능과 힘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이니, 폐하께서 장차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모든 일이 제대로 이르고 모든 공적이 응집될 것입니다. 부(否)가 바뀌어 태(泰)가 되고 위험한 것이 전환하여 편안하게 되는 것도 바로 한 달에 불과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뜻을 굳건히 정하고 결단을 내려 분발하고 가다듬어 빨리 유신(維新)의 정사를 도모하소서. 사람이 한미하다고 말까지 버리지는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러한 때 이 직무를 어떻게 경솔히 체차(遞差)할 수 있겠는가? 사임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진술한 말이 매우 간절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3월 15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이 아뢰기를,
"특지 유칠년 조인(特旨流七年罪人) 이용호(李容鎬)·장윤선(張允善), 유형(流刑) 10년 죄인 한선회(韓善會)·김사찬(金思燦)·이근용(李根) 등을 모두 제주목(濟州牧)으로 배소(配所)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16일 양력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각 부(府)와 부(部)의 대신, 찬정(贊政)·참찬(參贊)을 소견(召見)하였다. 【의정(議政) 김병시(金炳始),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 서리 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 참정(參政)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 찬정(贊政)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 찬정 군부 대신(軍部大臣) 대리(代理)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 찬정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종묵(閔種默), 찬정 법부 대신(法部大臣) 대리 조병직(趙秉稷), 찬정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윤용(李允用), 찬정 박정양(朴定陽)·윤용선(尹容善), 참찬(參贊) 조병호(趙秉鎬)이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 때문이다. 오늘 나라의 형편을 보면 자못 황급하여 그저 두려운 생각만으로 세월을 보낼 수 없으니 바로 위아래가 배로 더 힘써서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도모해야 한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각각 그 직책대로 맡기며 또한 마땅히 의정부(議政府)에 전적으로 위임한다. 짐(朕)은 오직 상을 주고 벌을 가하여 장려하고 징계할 것이다. 이렇게 환히 깨우쳐주니 경들은 모름지기 짐의 뜻을 다 알라." 하니,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근년에 변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 나라의 일이 점점 이와 같이 한심한 형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근심하는 폐하(陛下)의 마음을 누구인들 우러러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신하들이 힘과 마음을 다해서 폐하를 받들지 못한 죄이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각각 그 직책대로 맡는 것이야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았으며 더구나 지금과 같이 간고한 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동안의 변란은 모두 흉악한 역적들이 나라의 권한을 농락질한 소치로 생긴 것이다.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음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구차스레 오늘까지 연명한 것은 실로 완악한 일입니다. 연전의 변란이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또한 징벌이 엄하지 못하여 의리가 막히고 규율이 해이해고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흉악한 역적들 때문입니다. 그 이후 수년 간에 성상께서 누구와 함께 나라의 일을 처리하였는지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밑에 있는 신하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지 못한 것은 비록 신하들의 책임이라 하더라도 폐하께서도 또한 과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겨 놓고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를 내쫓는 데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은 오늘 하교(下敎)를 받고서 더욱 통탄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은 갑오년(1894) 이전에 정승의 벼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그 직임을 다했더라면 어찌 갑오년의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오늘까지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으니 단지 죽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하니,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신 또한 두 정승과 마찬가지로 완악하게 차마 죽지 않고 오늘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음을 보니 통탄하고 한스러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어 우러러 아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지만 지난번에 다른 나라 공사관(公使館)에 있을 때 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만약 다시 세월만 덧없이 보낸다면 나라의 일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모름지기 각각 힘쓰고 가다듬어 부(否)를 돌려 태(泰)가 되게 할 것을 기약하고 도모하여 500년의 왕업을 회복하여 공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크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오늘부터 전적으로 의정부에 위임하노라."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의정부에는 의정부 자체의 일이 있고 각부(各部)는 각 부 자체의 일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가한 여러 신하들은 친히 하교를 받았으니 스스로 마땅히 더욱 정신을 차리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을 선발하여 직무를 맡기어 비어 있는 직사(職事)가 없도록 하는 것이 눈 앞의 실제에 힘쓰는 정사입니다. 그리고 잡스럽게 등용된 무리들을 멀리 배척해 버린 다음에야 나랏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충성스러운 말과 좋은 대책을 폐하 앞에서 날마다 진술하여도 모두 유익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궁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김홍륙(金鴻陸)을 8좌(座)에 등용시켜 품계를 올려 주고 이용익(李容益)이 오래도록 자기 직책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외국말이 통하기 때문에 봐준 것이 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오늘 나라의 형편이 위급하여 자못 아침 저녁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빈말로 깊이 탄식이나 하는 것은 급한 일에 이로운 것이 없습니다. 시급히 응당 위아래가 분발하고 격려해서 날마다 실제의 일을 마치 다 못할까 두렵게 여긴 다음에야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의정과 각부 대신들을 만나고 정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며 간사한 소인배들을 배척해서 감히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궁궐을 맑고 엄숙하게 하여 여러 사람이 보고 듣는 가운데 고무되게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절실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문제에 따라 각 부의 대신들이 일일이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하고 다음 반드시 의정부를 거쳐 아뢰게 하며 그에 기초해서 적당히 처리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체제를 엄하고 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급선무는 곧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수령(守令)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수령들의 빈 자리가 많은데도 달이 지나도록 보충하지 않으니 이것은 나라의 정사하는 원칙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속히 신중하게 선발해서 차송(差送)하도록 하소서. 백성들의 폐해에 관련된 것은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명백히 보고하게 하소서. 장계(狀啓)로 보고하는 옛 규례는 신속히 회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듣자니 전하께서 직접 명하여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 임무는 지극히 중요하므로 경력이 없거나 인망이 부족한 사람은 조정의 명령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감복시키지 못하니 신속히 소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곳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깊이 살피도록 하였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이런 때의 이런 행차는 조금의 효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단지 백성들과 고을들에서 소요만 더할 뿐입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요즘은 백성들의 실정이 그다지 황급하지 않은 암행어사를 보냈다고 하니 장차 그 해가 백성들의 실정에 미칠 것이므로 매우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납하는 일 때문에 보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갑오년(1894) 이전의 포흠(逋欠)을 탕감(蕩減)해 준 것은 이미 요량이 없이 한 일이었지만 이미 탕감해 준 후이니 이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갑오년 가을 후의 상납에 대해서 말하면 동학(東學) 난을 겪은 다음인데 무슨 공납(貢納)을 거두어들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설령 거두어들인 것이 있어도 모두 관리들이나 아전(衙前)들의 포흠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지금은 관리들이 체차되어 떠났고 아전들이 모두 해산되었으니 책임을 추궁할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법과 규율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져서 옛 법은 폐기되고 새 법은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니 법이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수령이 관청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스리려고 하지 않으니 하물며 관장(官長)이 없는 고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고통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단지 ‘공(公)’과 ‘신(信)’ 두 글자면 됩니다. 공정함을 따르지 않으면 관리를 선발할 수 없고 믿음이 서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웃 나라들과 교섭하는 것은 더욱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공과 신을 가지고 힘껏 일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애쓰는 것, 이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과 ‘신’ 글자가 과연 정사를 하는 요점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수령이 많이 결원되었는데 듣자니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직 차대(差代)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관망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은 내부 대신(內部大臣)이 직책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은 의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제 삼가 각각 맡은 임무를 다하는 것에 대한 하교를 받았습니다. 신은 총호사(總護使)의 임무를 맡고 있기에 우러러 아뢸 것이 있습니다. 능역(陵役)이 이전에 비해 방대하여 기일 안으로 준공을 보고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공사에 쓰이는 비용을 처음에 10만 원(元)을 청하여 이미 결재를 받았는데 이것 또한 넉넉하지 않은 근심이 있으니 송구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절로 일이 잘 되어 나가리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의정(議政)이 이전에 《조선장정(朝鮮章程)》을 간행할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것은 과연 신속히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정(章程)》은 간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은 방금 물러날 것을 아뢰었으니 또한 무슨 직무에 대해서 우러러 아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구한 어리석은 정성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단지 눈 앞에 절박하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적어 올립니다. 비록 등한히 여길 수 있는 것 같지만 또한 치체(治體)에 관계되는 것이니 글을 읽어본 후에 깊이 생각해서 비록 한 조항이라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으면 곧바로 각 부에 내려 보내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이어 소매 속에서 차본(箚本)을 꺼내서 바쳤다.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 고질적인 폐단은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나 그 중에도 가장 크고 가장 심한 것은 조의(朝議)와 항론(巷論)이 서로 모순되어 서동부와(胥動浮訛)하여 나라의 형편이 위급해졌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 것에 편안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옛 규례를 다 회복하려고 하고 공명(空名)과 이욕(利慾)에 급급한 사람들은 반드시 일체 신식을 따르려고 합니다. 옛것을 회복하려는 의견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회복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새것을 따르려는 처사가 반드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따를 만한 것과 따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이른바 경장(更長)이라는 것은 한창 번성한 중에 미약해지는 것이고,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나니 명철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들이 개연히 흥기시켜 기강을 세우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아 선대 임금의 유지(遺志)를 잘 계승하고 한 시대의 규모를 빛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시대를 통달한 논의이며 바로 오늘날에 꼭 맞는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마음을 확고히 정하고 신하들이 도와 나서서 상하가 서로 모름지기 그 근본을 궁구하고 그 실제에 힘써야 합니다. 옛 규례 중 회복할 수 있는 것을 회복한다면 새 규례 중 따를 수 있는 것과 따를 수 없는 것은 의당 단안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분간될 것입니다. 이에 감히 대략 끝에다 붙여서 올립니다. 비록 시대를 알지 못하는 늙은 사람의 범상한 말에 불과하지만 간절한 정성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다음에서 재량하여 가려 쓰소서. 첫째, 믿음이란 것은 나라 정사의 큰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에게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하고 하였습니다. 옛날 제왕들의 치상(治尙)은 더 논할 것이 없지만, 비록 상앙(商鞅)과 같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쓰는 패도(覇道)를 썼어도 먼저 나무를 세워 놓고 신(信)을 받는 것으로 기본을 삼았습니다. 지금 각국(各國)의 권위도 또한 공정한 법을 세워서 신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의 신이 없다면 설사 요(堯) 순(舜)처럼 정사를 잘하더라도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이란 의(義)로 말미암아 따라서 법이 되는 것입니다. 보건대 오늘 제도가 정해지지 못하고 새 법과 옛 법이 마구 뒤섞여 날마다 한 가지 법이 나오니 어느 법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법이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 아! 옛날과 오늘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믿음이 없고 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린 적은 없었습니다.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꼭 믿도록 하려면 신속히 옛날 것과 오늘 것을 상호 서로 참작하고 덜어버릴 것과 보탤 것을 참작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법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 동요하여 고치지 말고 중앙과 지방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가라앉고 나라의 기강이 다시 떨쳐 일어날 것은 날짜를 계산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삼대(三代)가 번성하였던 것은 재주 있는 간관(諫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조정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정사에 대한 바른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漢) 나라 이후로 비로소 간관을 두었는데 이것은 총명을 넓히고 규찰을 온전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간하는 것을 막고 바른말을 못하게 하여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곧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니 후세 사람들이 마땅히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대간(臺諫)을 두고 언로(言路)를 열어 놓아 신하들을 경성(警省)하게 하고 온갖 일이 잘 되어 나가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폐하의 가법(家法)입니다. 그러나 일체 새 법이 나온 이후부터 폐하를 돕는 벼슬이 전부 폐지되어 귀와 눈이 막히고 바른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간고한 때를 당해서는 특히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정직하고 강의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간관(諫官) 몇 사람을 복구해서 위로는 좋은 의견을 제기하고 아래로는 허물을 바로잡게 하면 폐하께서는 널리 받아들여 훌륭한 정사를 베풀게 될 것이고 조정의 신하들은 속임수를 써서 마구 등용되는 버릇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랏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 조종조(祖宗朝)의 선비를 선발한 법은 오직 재주와 덕망을 보고 전적으로 과거를 중요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전적으로 시가(詩歌)와 문장(文章)을 취하여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으며 그 폐단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폐기하고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 과거 시험을 설행하여 선비를 선발하여도 오히려 좋은 인재를 빠뜨리는 탄식이 있는데 하물며 과거 시험 제도를 전부 폐지해 버렸으니 다시 어찌 회복될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어진 사람을 뽑고 준걸한 인재를 널리 부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재주와 덕망이 있더라도 수용할 계단이 없으니 조정을 놓고 볼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그 관계가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그 법을 간략히 하고 그 폐단을 고치소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인재를 취하는 방법은 주(周)의 대비(大比)와 한(漢)의 공거(貢擧) 규례를 참작하여 학부(學部)와 군부(軍部)로 하여금 조례(條例)를 강구(講究)하게 하고 품정(稟定)하여 반포해서 시행한다면 현명하고 덕 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거의 성하게 부쩍 일어날 희망이 있습니다. 넷째, 부(府)와 군(郡)을 제재하고 다스리는 것은 인재를 선발하여 위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대개 수령(守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관찰사(觀察使)는 수령의 잘잘못을 가려 출척(黜陟)을 하는데 그 법이 갖추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법(新法)은 외직(外職)을 너무 경시하기 때문에 수령과 관찰사들이 곧 각 부의 속관(屬官)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일마다 통제하고 부딪치는 곳마다 장애를 주니, 비록 한기(韓冀)와 범중엄(范仲淹), 공수(龔遂)와 황패(黃霸)가 있더라도 자기의 포부대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펼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잡아다 대질까지 시킵니다. 관리와 백성의 명분과 의리가 없어졌으니 관리에게 명하여 위임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옛 제도를 다시 명백히 하여 반드시 수령과 관찰사로 하여금 전적으로 위임하여 책성(責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고을에 관장(官長)이 없으면 아전(衙前)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현재 빈 자리가 매우 많은데 모두 전대(塡代)하지 않으니 무슨 고망(顧望)할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해부(該部)에 엄격히 신칙하여 별도로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빠른 시일 안에 임명해 보내어 자리가 비어 발생하는 폐단의 단서를 없게 하소서. 다섯째, 신이 듣건대 군사는 그 수가 많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예한 데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군사 제도는 모두 다른 나라의 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전일하게 숭상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와 군졸들은 한갓 각기 사사로이 도당을 만들어 서로 그 기예를 자랑하여 점점 시기하는 마음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윗사람이 보는 것 또한 후하고 박한 구별이 없지 않습니다. 후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교만해지고 박하게 한 사람은 원망을 품기 쉽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한 마음으로 그 힘을 전일하게 함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규율을 엄격히 세우고 돌봐주는 것을 고르게 하여 사사로운 데 치우치는 것이 없게 한 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저 장수는 나라의 사명(司命)이니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무술에 밝고 생각이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권한을 전적으로 맡기고 성과를 거두도록 채근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친부(親附)하여 손발처럼 막아 주고 자식처럼 호위할 것입니다. 여섯째, 임금이 대공(大公)한 도리에 존성(存省)하지 않고 모름지기 한 가지 생각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사사로이 친근한 자들이 쐐기를 박고 아첨을 해댈 것이며 해치려고 하는 무리들이 은근히 자라나 조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나라 체면에 손상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일치하게 제기되는 우환거리입니다. 만약 일찍이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분간하고 기미를 명백히 살펴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들에게 의혹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궐을 옮기고 거듭 새로이 하는 때를 즈음하여 더욱 마땅히 궁궐을 엄숙히 하며 벼슬을 올려 주는 절차를 엄하게 하고 재상들을 자주 만나서 정사 원칙을 힘써 요구하며 위아래가 서로 믿고 덕업이 날로 전진하여 느슨해지던 사유(四維)가 베풀어질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성상께서 한 번 읽어본 다음 이르기를, "지금 이것을 대략 보니 모두 채용(採用)해야 할 긴급하고도 중요한 것들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우선 이 조항들을 신속히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각 부의 대신들에게 내려주었으니 상세한 절목을 만들어 반포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각 부의 대신들에게 돌려 보이고 실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지 못한 것이 4년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의 마음에도 아마 섭섭한 생각이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신은 이왕의 규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때에 종묘에 전하는 예를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왕의 규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장례원에 애당초 주본(奏本)이 없다. 마땅히 자세히 찾아보게 하겠다."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9면
【분류】변란-정변(政變)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법-법제(法制)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정(軍政)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 때문이다. 오늘 나라의 형편을 보면 자못 황급하여 그저 두려운 생각만으로 세월을 보낼 수 없으니 바로 위아래가 배로 더 힘써서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도모해야 한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각각 그 직책대로 맡기며 또한 마땅히 의정부(議政府)에 전적으로 위임한다. 짐(朕)은 오직 상을 주고 벌을 가하여 장려하고 징계할 것이다. 이렇게 환히 깨우쳐주니 경들은 모름지기 짐의 뜻을 다 알라."
하니,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근년에 변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 나라의 일이 점점 이와 같이 한심한 형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근심하는 폐하(陛下)의 마음을 누구인들 우러러 헤아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신하들이 힘과 마음을 다해서 폐하를 받들지 못한 죄이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각각 그 직책대로 맡는 것이야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았으며 더구나 지금과 같이 간고한 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동안의 변란은 모두 흉악한 역적들이 나라의 권한을 농락질한 소치로 생긴 것이다.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음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구차스레 오늘까지 연명한 것은 실로 완악한 일입니다. 연전의 변란이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또한 징벌이 엄하지 못하여 의리가 막히고 규율이 해이해고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흉악한 역적들 때문입니다.
그 이후 수년 간에 성상께서 누구와 함께 나라의 일을 처리하였는지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밑에 있는 신하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지 못한 것은 비록 신하들의 책임이라 하더라도 폐하께서도 또한 과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겨 놓고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를 내쫓는 데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은 오늘 하교(下敎)를 받고서 더욱 통탄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은 갑오년(1894) 이전에 정승의 벼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그 직임을 다했더라면 어찌 갑오년의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오늘까지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으니 단지 죽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하니,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신 또한 두 정승과 마찬가지로 완악하게 차마 죽지 않고 오늘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음을 보니 통탄하고 한스러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어 우러러 아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지만 지난번에 다른 나라 공사관(公使館)에 있을 때 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만약 다시 세월만 덧없이 보낸다면 나라의 일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모름지기 각각 힘쓰고 가다듬어 부(否)를 돌려 태(泰)가 되게 할 것을 기약하고 도모하여 500년의 왕업을 회복하여 공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크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오늘부터 전적으로 의정부에 위임하노라."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의정부에는 의정부 자체의 일이 있고 각부(各部)는 각 부 자체의 일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가한 여러 신하들은 친히 하교를 받았으니 스스로 마땅히 더욱 정신을 차리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을 선발하여 직무를 맡기어 비어 있는 직사(職事)가 없도록 하는 것이 눈 앞의 실제에 힘쓰는 정사입니다. 그리고 잡스럽게 등용된 무리들을 멀리 배척해 버린 다음에야 나랏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충성스러운 말과 좋은 대책을 폐하 앞에서 날마다 진술하여도 모두 유익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궁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김홍륙(金鴻陸)을 8좌(座)에 등용시켜 품계를 올려 주고 이용익(李容益)이 오래도록 자기 직책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외국말이 통하기 때문에 봐준 것이 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오늘 나라의 형편이 위급하여 자못 아침 저녁을 보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빈말로 깊이 탄식이나 하는 것은 급한 일에 이로운 것이 없습니다. 시급히 응당 위아래가 분발하고 격려해서 날마다 실제의 일을 마치 다 못할까 두렵게 여긴 다음에야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의정과 각부 대신들을 만나고 정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며 간사한 소인배들을 배척해서 감히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궁궐을 맑고 엄숙하게 하여 여러 사람이 보고 듣는 가운데 고무되게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절실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문제에 따라 각 부의 대신들이 일일이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하고 다음 반드시 의정부를 거쳐 아뢰게 하며 그에 기초해서 적당히 처리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체제를 엄하고 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급선무는 곧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수령(守令)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수령들의 빈 자리가 많은데도 달이 지나도록 보충하지 않으니 이것은 나라의 정사하는 원칙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속히 신중하게 선발해서 차송(差送)하도록 하소서.
백성들의 폐해에 관련된 것은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명백히 보고하게 하소서. 장계(狀啓)로 보고하는 옛 규례는 신속히 회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듣자니 전하께서 직접 명하여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 임무는 지극히 중요하므로 경력이 없거나 인망이 부족한 사람은 조정의 명령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감복시키지 못하니 신속히 소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곳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깊이 살피도록 하였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이런 때의 이런 행차는 조금의 효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단지 백성들과 고을들에서 소요만 더할 뿐입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요즘은 백성들의 실정이 그다지 황급하지 않은 암행어사를 보냈다고 하니 장차 그 해가 백성들의 실정에 미칠 것이므로 매우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납하는 일 때문에 보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갑오년(1894) 이전의 포흠(逋欠)을 탕감(蕩減)해 준 것은 이미 요량이 없이 한 일이었지만 이미 탕감해 준 후이니 이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갑오년 가을 후의 상납에 대해서 말하면 동학(東學) 난을 겪은 다음인데 무슨 공납(貢納)을 거두어들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설령 거두어들인 것이 있어도 모두 관리들이나 아전(衙前)들의 포흠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지금은 관리들이 체차되어 떠났고 아전들이 모두 해산되었으니 책임을 추궁할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법과 규율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져서 옛 법은 폐기되고 새 법은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니 법이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수령이 관청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스리려고 하지 않으니 하물며 관장(官長)이 없는 고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고통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단지 ‘공(公)’과 ‘신(信)’ 두 글자면 됩니다. 공정함을 따르지 않으면 관리를 선발할 수 없고 믿음이 서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웃 나라들과 교섭하는 것은 더욱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반드시 공과 신을 가지고 힘껏 일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애쓰는 것, 이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과 ‘신’ 글자가 과연 정사를 하는 요점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수령이 많이 결원되었는데 듣자니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직 차대(差代)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관망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이것은 내부 대신(內部大臣)이 직책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은 의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제 삼가 각각 맡은 임무를 다하는 것에 대한 하교를 받았습니다. 신은 총호사(總護使)의 임무를 맡고 있기에 우러러 아뢸 것이 있습니다. 능역(陵役)이 이전에 비해 방대하여 기일 안으로 준공을 보고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공사에 쓰이는 비용을 처음에 10만 원(元)을 청하여 이미 결재를 받았는데 이것 또한 넉넉하지 않은 근심이 있으니 송구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절로 일이 잘 되어 나가리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의정(議政)이 이전에 《조선장정(朝鮮章程)》을 간행할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것은 과연 신속히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정(章程)》은 간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은 방금 물러날 것을 아뢰었으니 또한 무슨 직무에 대해서 우러러 아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구한 어리석은 정성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단지 눈 앞에 절박하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적어 올립니다. 비록 등한히 여길 수 있는 것 같지만 또한 치체(治體)에 관계되는 것이니 글을 읽어본 후에 깊이 생각해서 비록 한 조항이라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으면 곧바로 각 부에 내려 보내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이어 소매 속에서 차본(箚本)을 꺼내서 바쳤다.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 고질적인 폐단은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나 그 중에도 가장 크고 가장 심한 것은 조의(朝議)와 항론(巷論)이 서로 모순되어 서동부와(胥動浮訛)하여 나라의 형편이 위급해졌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 것에 편안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옛 규례를 다 회복하려고 하고 공명(空名)과 이욕(利慾)에 급급한 사람들은 반드시 일체 신식을 따르려고 합니다. 옛것을 회복하려는 의견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회복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새것을 따르려는 처사가 반드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따를 만한 것과 따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이른바 경장(更長)이라는 것은 한창 번성한 중에 미약해지는 것이고,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나니 명철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들이 개연히 흥기시켜 기강을 세우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아 선대 임금의 유지(遺志)를 잘 계승하고 한 시대의 규모를 빛나고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시대를 통달한 논의이며 바로 오늘날에 꼭 맞는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마음을 확고히 정하고 신하들이 도와 나서서 상하가 서로 모름지기 그 근본을 궁구하고 그 실제에 힘써야 합니다. 옛 규례 중 회복할 수 있는 것을 회복한다면 새 규례 중 따를 수 있는 것과 따를 수 없는 것은 의당 단안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분간될 것입니다. 이에 감히 대략 끝에다 붙여서 올립니다. 비록 시대를 알지 못하는 늙은 사람의 범상한 말에 불과하지만 간절한 정성은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다음에서 재량하여 가려 쓰소서. 첫째, 믿음이란 것은 나라 정사의 큰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에게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하고 하였습니다. 옛날 제왕들의 치상(治尙)은 더 논할 것이 없지만, 비록 상앙(商鞅)과 같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쓰는 패도(覇道)를 썼어도 먼저 나무를 세워 놓고 신(信)을 받는 것으로 기본을 삼았습니다. 지금 각국(各國)의 권위도 또한 공정한 법을 세워서 신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의 신이 없다면 설사 요(堯) 순(舜)처럼 정사를 잘하더라도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이란 의(義)로 말미암아 따라서 법이 되는 것입니다. 보건대 오늘 제도가 정해지지 못하고 새 법과 옛 법이 마구 뒤섞여 날마다 한 가지 법이 나오니 어느 법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법이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 아! 옛날과 오늘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믿음이 없고 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린 적은 없었습니다.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꼭 믿도록 하려면 신속히 옛날 것과 오늘 것을 상호 서로 참작하고 덜어버릴 것과 보탤 것을 참작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법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 동요하여 고치지 말고 중앙과 지방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가라앉고 나라의 기강이 다시 떨쳐 일어날 것은 날짜를 계산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삼대(三代)가 번성하였던 것은 재주 있는 간관(諫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조정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정사에 대한 바른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漢) 나라 이후로 비로소 간관을 두었는데 이것은 총명을 넓히고 규찰을 온전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간하는 것을 막고 바른말을 못하게 하여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곧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니 후세 사람들이 마땅히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대간(臺諫)을 두고 언로(言路)를 열어 놓아 신하들을 경성(警省)하게 하고 온갖 일이 잘 되어 나가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폐하의 가법(家法)입니다. 그러나 일체 새 법이 나온 이후부터 폐하를 돕는 벼슬이 전부 폐지되어 귀와 눈이 막히고 바른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간고한 때를 당해서는 특히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정직하고 강의한 선비들을 선발하여 간관(諫官) 몇 사람을 복구해서 위로는 좋은 의견을 제기하고 아래로는 허물을 바로잡게 하면 폐하께서는 널리 받아들여 훌륭한 정사를 베풀게 될 것이고 조정의 신하들은 속임수를 써서 마구 등용되는 버릇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랏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 조종조(祖宗朝)의 선비를 선발한 법은 오직 재주와 덕망을 보고 전적으로 과거를 중요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전적으로 시가(詩歌)와 문장(文章)을 취하여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으며 그 폐단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폐기하고 돌아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 과거 시험을 설행하여 선비를 선발하여도 오히려 좋은 인재를 빠뜨리는 탄식이 있는데 하물며 과거 시험 제도를 전부 폐지해 버렸으니 다시 어찌 회복될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어진 사람을 뽑고 준걸한 인재를 널리 부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재주와 덕망이 있더라도 수용할 계단이 없으니 조정을 놓고 볼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그 관계가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그 법을 간략히 하고 그 폐단을 고치소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인재를 취하는 방법은 주(周)의 대비(大比)와 한(漢)의 공거(貢擧) 규례를 참작하여 학부(學部)와 군부(軍部)로 하여금 조례(條例)를 강구(講究)하게 하고 품정(稟定)하여 반포해서 시행한다면 현명하고 덕 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거의 성하게 부쩍 일어날 희망이 있습니다. 넷째, 부(府)와 군(郡)을 제재하고 다스리는 것은 인재를 선발하여 위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대개 수령(守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관찰사(觀察使)는 수령의 잘잘못을 가려 출척(黜陟)을 하는데 그 법이 갖추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신법(新法)은 외직(外職)을 너무 경시하기 때문에 수령과 관찰사들이 곧 각 부의 속관(屬官)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일마다 통제하고 부딪치는 곳마다 장애를 주니, 비록 한기(韓冀)와 범중엄(范仲淹), 공수(龔遂)와 황패(黃霸)가 있더라도 자기의 포부대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을 펼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잡아다 대질까지 시킵니다. 관리와 백성의 명분과 의리가 없어졌으니 관리에게 명하여 위임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옛 제도를 다시 명백히 하여 반드시 수령과 관찰사로 하여금 전적으로 위임하여 책성(責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고을에 관장(官長)이 없으면 아전(衙前)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현재 빈 자리가 매우 많은데 모두 전대(塡代)하지 않으니 무슨 고망(顧望)할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해부(該部)에 엄격히 신칙하여 별도로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빠른 시일 안에 임명해 보내어 자리가 비어 발생하는 폐단의 단서를 없게 하소서. 다섯째, 신이 듣건대 군사는 그 수가 많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예한 데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군사 제도는 모두 다른 나라의 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전일하게 숭상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수와 군졸들은 한갓 각기 사사로이 도당을 만들어 서로 그 기예를 자랑하여 점점 시기하는 마음만 부추기고 있습니다. 윗사람이 보는 것 또한 후하고 박한 구별이 없지 않습니다. 후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교만해지고 박하게 한 사람은 원망을 품기 쉽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한 마음으로 그 힘을 전일하게 함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규율을 엄격히 세우고 돌봐주는 것을 고르게 하여 사사로운 데 치우치는 것이 없게 한 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저 장수는 나라의 사명(司命)이니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무술에 밝고 생각이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권한을 전적으로 맡기고 성과를 거두도록 채근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친부(親附)하여 손발처럼 막아 주고 자식처럼 호위할 것입니다. 여섯째, 임금이 대공(大公)한 도리에 존성(存省)하지 않고 모름지기 한 가지 생각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사사로이 친근한 자들이 쐐기를 박고 아첨을 해댈 것이며 해치려고 하는 무리들이 은근히 자라나 조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나라 체면에 손상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일치하게 제기되는 우환거리입니다. 만약 일찍이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분간하고 기미를 명백히 살펴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들에게 의혹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궐을 옮기고 거듭 새로이 하는 때를 즈음하여 더욱 마땅히 궁궐을 엄숙히 하며 벼슬을 올려 주는 절차를 엄하게 하고 재상들을 자주 만나서 정사 원칙을 힘써 요구하며 위아래가 서로 믿고 덕업이 날로 전진하여 느슨해지던 사유(四維)가 베풀어질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성상께서 한 번 읽어본 다음 이르기를, "지금 이것을 대략 보니 모두 채용(採用)해야 할 긴급하고도 중요한 것들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우선 이 조항들을 신속히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각 부의 대신들에게 내려주었으니 상세한 절목을 만들어 반포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각 부의 대신들에게 돌려 보이고 실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지 못한 것이 4년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의 마음에도 아마 섭섭한 생각이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신은 이왕의 규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때에 종묘에 전하는 예를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왕의 규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장례원에 애당초 주본(奏本)이 없다. 마땅히 자세히 찾아보게 하겠다."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9면
【분류】변란-정변(政變)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법-법제(法制)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정(軍政)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성상께서 한 번 읽어본 다음 이르기를,
"지금 이것을 대략 보니 모두 채용(採用)해야 할 긴급하고도 중요한 것들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우선 이 조항들을 신속히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각 부의 대신들에게 내려주었으니 상세한 절목을 만들어 반포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각 부의 대신들에게 돌려 보이고 실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지 못한 것이 4년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폐하의 마음에도 아마 섭섭한 생각이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신은 이왕의 규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때에 종묘에 전하는 예를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왕의 규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장례원에 애당초 주본(奏本)이 없다. 마땅히 자세히 찾아보게 하겠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오늘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고 이미 직접 타이른 것이 있다. 모든 정사에서 실질적인 성과가 없는 것은 대개 관제(官制)가 많이 변경된 것으로 인해 규정이 아직도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진실로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도모하면 나라의 위급한 형편과 백성들의 급박한 사정이 어찌 이와 같이 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정사를 경장(更張)해야 할 하나의 기회이다.
오늘부터 별도로 하나의 부서를 설치하여 옛 규정과 새 규정을 절충해 모든 법규를 일통(一通)으로 만들어 각별하게 준수하는 수단으로 삼고, 의정(議政)할 인원을 별도로 선정해서 그 명단을 들여보내라."
하였다.
칙령(勅令) 제16호, 〈국내 우체 규정(國內郵遞規則)〉을 반포(頒布)하였다.
종1품 강윤(姜潤)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17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을 지내고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3월 18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한 번 폭도들이 소동을 피우기 시작한 이후부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모두 정처 없이 흩어졌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놀랍다. 그 중에도 화재를 당해 영락된 호구(戶口)가 매우 많다고 하니 이 한 가지 생각을 할 때마다 비단옷을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편안치 않다.
도신(道臣)과 수재(守宰)들이 과연 모두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보살핀다면 한 사람도 살 곳을 잃는 것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돈 4,000원(元)을 내리니 내부(內部)로 하여금 각도(各道)에서 보고한 것을 자세히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게 하라.
지난해 관북(關北)의 큰 수해를 입은 호구에도 똑같이 떼 주어 구제하여, 짐(朕)이 가슴아파하면서 돌보아주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또한 각 도의 도신과 해당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적당히 잘 헤아려서 특별히 구제하게 하여 줌으로써 각기 집을 짓고 편안히 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대구(大邱)·북청(北靑)·청주(淸州)·강화(江華) 지방의 군사 비용 5만 9,179원(元) 남짓, 만국 우체 공회 전권 위원(萬國郵遞公會全權委員) 파견비 1,000원, 러시아〔俄國〕 군악기(軍樂器) 구매비(購買費) 3,096원을 모두 예비금(豫備金)에서 지출할 일에 대한 문제를 토의를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
하였다.
3월 19일 양력
전 관찰사(前觀察使) 이건창(李建昌)에 대해 특별히 징계를 사면하라고 명하였다.
3월 20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각 능(陵)과 원(園)에 새로 부치는 전답은 부근 역토(驛土) 중에서 마땅히 획부(劃付)해야 하니 인원을 파견하여 획정(劃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주사(前主事) 장제영(張濟英)을 특별히 위원(委員)으로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앞서 가서 조사하고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1일 양력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김종규(金宗圭)를 태자궁 시강원 첨사(太子宮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22일 양력
일본 판리공사(日本辦理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를 소견(召見)하였다.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되어 국서(國書)를 봉정(奉呈)하였기 때문이다.
주차 미국 전권공사(駐箚美國全權公使) 이범진(李範晉)을 부미 통우 공회 일등 전권 위원(赴美統郵公會一等全權委員)에 임명하였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민영철(閔泳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가만히 생각건대, 해부(該府)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대략 현재 특별한 것만 진술합니다.
대저 결총(結總)은 나라에 있어서 큰 정사이며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해변가의 지방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진결(陳結)·허결(虛結)·천포(川浦) 등속, 유토(有土)이면서 소금기가 있어서 경작하기에 부적당한 토지, 무토(無土)이면서 전세(田稅)를 지나치게 징수하는 대상들은 모두 갑오년(1894)에 증가시킨 총수량에 포함되었습니다. 비록 정해진 수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장부를 조사해 보면 원래 실제가 없는 빈 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이후 고을의 보고와 백성들의 신소(伸訴)가 날마다 꼬리를 물고 제기되어 도무지 처리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니 나라에 손실을 주는가, 백성에게 손실을 주는가 하는 사이에서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지리상 가까운 도(道)이고 칙령(勅令)을 내려 기한을 정해 놓은 날짜가 이미 지나갔는데도 조세를 다 받아들이고 장부를 청산할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새로운 법이 백성들에게 편리하다는 것은 백성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갑오년에 도적의 우두머리와 추종자는 모두 사형(死刑)에 처해야 합당합니다. 그러나 폐하(陛下)의 덕이 하늘처럼 커서 백성들이 모르고 하였다는 것으로 용서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두 잘못을 고치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잡세를 다 없애고 아전(衙前)들과 하인들에게 봉급을 주어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모두 제거하여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중앙의 정부와 밖으로는 목백(牧伯)나 수재(守宰)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감히 이 밝고 훌륭한 정사를 받들어 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펴 주는데도 소요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말하기를, ‘개화 이전에도 또한 살아날 수 있었다.’라고 하니, 단지 새로운 법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맞지 않고 관리와 백성 사이에 서로 모순이 생겨 경장(更張)의 교화는 전혀 전진이 없습니다.
이 때 수령으로 있는 사람이 빨리 집행하려고 하면 마치 곡식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 같은 근심을 받게 되고 조금 더디게 하려고 하면 오랜 병에 3년 된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이 느린 것으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 지내는 사이에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 둘째 문제입니다.
이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신이 어떻게 능히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난국을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준순(浚巡)하고 완게(翫愒)하여 마치 평소에 아무 일이 없을 때처럼 하는 것은 또한 신의 소망도 아닙니다.
신이 삼가 조정의 관보(官報)를 보고 봉산(鳳山)의 백성 최중립(崔中立)과 해주(海州) 백성 이원하(李源夏) 등이 대궐문에 와서 부르짖으므로 비지(批旨)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두 사람의 상소문 내용이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돌아보건대, 이원하(李源夏)는 겨울이 지나도록 부(府)에 있었다는 것을 신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어느 겨를에 몸소 서울 가서 이런 상소문을 만드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여기에 만일 이름을 쓰지 않고 거짓말로 아뢰었다면 필시 지방에 있으면서 봉장(封章)한 것입니다.
성상께 아뢰는 더없이 중요한 글에서도 오히려 이렇게 거리낌이 없는 당돌한 행동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더구나 부와 군에 있어서야 이와 같이 농간을 부리는 무리들을 손을 꼽아서 다 셀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마침 신의 지방에서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을 덧붙입니다.
신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과거의 일을 소급하여 앞으로의 일을 헤아려볼 때 하루의 일을 보면 하루의 잘못이 있을 것이니 장차 깨끗한 조정에 구신(具臣)의 수치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신속히 신의 벼슬을 체차(遞差)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요를 겪은 후라 백성들의 일에 곤란한 것이 많은데 어찌 사적인 문제를 말하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고 백성들을 안착시키는 방도에 대하여 더욱 힘써라. 최중립과 이원하의 일은 이미 법부(法部)로 하여금 재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의 무엄한 버릇은 재판할 때 똑같이 엄중히 징계를 더하라."
하였다.
3월 23일 양력
주차(駐箚) 영국(英國)·독일〔德國〕·러시아〔俄國〕·이탈리아〔義國〕·프랑스〔法國〕·오스트리아〔墺國〕 전권공사(公使) 민영환(閔泳煥)을 소견(召見)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이 아뢰기를,
"이달 16일에 삼가 조칙(詔勅)을 받아 보니 이제부터 별도로 1개 부서를 설치하고 새 규정과 옛 규정을 절충한 제반의 법규를 한 통으로 만들고 의정(議定)할 인원을 별도로 선발해서 들이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처소는 중추원(中樞院)에 설치하고 교전소(校典所)라고 부르며 위원(委員)은 별도로 선발해서 들이겠습니다. 각 부(府), 부(部), 원(院)의 규정은 각각 해당 부와 부, 원으로 하여금 고쳐서 교전소로 보내어 작성하는 데 참작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정범조(鄭範朝)를 교전소 총재대원(校典所總裁大員)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영수(金永壽)·박정양(朴定陽)·윤용선(尹容善), 의정부 찬정 외부 대신(議政府贊政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을 교전소 부총재대원(校典所副總裁大員)에, 고문관(顧問官) 르 장드르〔李善得 : Le Gendre, Charles William〕, 그레이트하우스〔具禮 : Greathouse〕, 브라운 〔柏卓安 : J. McLeavy Brown〕, 서재필(徐載弼)을 교전소 위원(校典所委員)에 임명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을 부장(副將)에 임용하였다.
칙령(勅令) 제17호, 〈우체사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郵遞司官制改正件〕〉과 칙령(勅令) 제18호, 〈우체사 직원 봉급령 개정에 관한 안건〔郵遞司職員俸給令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3월 25일 양력
법부 협판(法部協辦) 권재형(權在衡)에게 고등 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을 겸임(兼任)시켰다. 3품(三品) 김기룡(金基龍)을 법부 민사 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26일 양력
영국 공사(英國公使) 맥도날드〔竇納樂〕 【맥도날드】 을 접견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3월 27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전에는 정자각(丁字閣), 정전(正殿), 배위청(拜位廳)을 합해서 8칸이거나 5칸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하기를,
"정자각(丁字閣)은 《오례의(五禮儀)》대로 ‘침전(寢殿)’이라고 부르고 규모는 5칸으로 정하며, 배위청(拜位廳)은 전각(殿閣) 안에 두도록 마련하라."
하였다.
3월 29일 양력
조령(詔令)하기를,
"지금 산릉 제조(山陵提調)의 장계(狀啓)를 보니, 능역(陵役) 공사의 기초를 닦을 때 해골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것이 나온 형편에 대하여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총호사(總護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장례원 경(掌禮院卿)이 함께 돌아보고 오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달(閔泳達)을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에 정2품 조동면(趙東冕)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에,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용익(李容益)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종2품 박제억(朴齊億)을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월 30일 양력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 산릉 제조(山陵提調) 김종한(金宗漢)이다.】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산릉(山陵)에서 들어왔는데 일이 뜻밖에 벌어져 놀라움과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에 와서 신속히 좋은 강(岡)을 다시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주본(奏本)한 것이 있지만 산릉에서 뜻밖에 생긴 일에 대하여 놀라움과 두려움이 어찌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신이 살피지 못한 잘못은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하겠지만 나랏일을 위하여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신속히 명하여 다시 길지(吉地)를 선택해서 큰일을 완성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일이 뜻밖에 발생되어 놀랍고 두려워서 우러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살펴보게 한 것은 그 원근(遠近)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해서였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해골이 발굴된 곳은 바로 남쪽 방향인데 난간석(欄干石) 안으로 들어가 있었으며 봉표(封標)한 곳으로부터는 13척(尺) 남짓 됩니다. 어찌 천만 번 황송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전에 혹 이와 같은 때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순조(純祖) 경인년(1830)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계속 공사를 하라는 뜻으로 하교(下敎)가 있었습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경인년(1830)에 도장골〔道藏谷〕에 터를 팔 때 과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4, 5차 아뢴 뒤에 마침내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 거리는 얼마나 되었다고 하던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 때는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전례에도 또한 당국(當局)을 추이(推移)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 문제를 어찌 한갓 지나간 규례에만 의거하겠습니까? 결국 못마땅한 것 같으니 다시 정결한 곳을 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혈국(穴局)을 추이할 방도가 없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지관(地官)들의 말을 들어보니 푯말을 꽂은 북쪽으로 3척(尺) 5촌(寸) 올라가고 서쪽으로 1척 5촌 물러나서 이와 같이 추이하면 본래 팠던 곳으로부터 17척 1촌쯤 먼 거리가 되며 난간석 밖으로 물러서게 됩니다. 풍수설(風水說)로 말하면 좌향(坐向)과 분금(分金)이 관의 위치가 위아래로 약간 올라가고 내려가는 차이가 조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당에는 못마땅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비록 추이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어찌 다시 정결한 땅을 정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비록 위 아래로 조금 추이하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신들은 본래 풍수설(風水說)에 어두우니 어찌 감히 물음에 대답하겠습니까? 상지관에게 명하여 자세히 아뢰게 하소서." 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아뢰기를, "박석(礡石)을 덮은 터를 미리 팔 때 이것이 노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수 백 년 된 옛 무덤으로서 뭉개져서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자로 거리를 계산한다면 13척이 됩니다." 하였다. 상지관 박인근(朴寅根)과 오성근(吳聖根) 등이 아뢰기를, "봉표할 때 처음에는 약간 위나 아래로 하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지금과 같이 약간 아래로 내려다 봉표 하였습니다. 만약 북쪽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물러난다면 이것은 처음에 조금 올려 잡았던 곳입니다. 구덩이는 정결하고 흙빛은 위아래가 같은데 오늘 비록 고쳐서 봉표하여도 추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와서 도리어 천만다행이 되는 것은 애초에 약간 올라간 곳에 푯말을 꽂았더라면 불결한 물건이 어떻게 노출되어 파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혈법(穴法)은 분촌(分寸)과 관계된다고 하였다. 몇 척 추이해도 구애되는 점이 없는가?" 하니, 박인근 등이 아뢰기를, "국장(國葬)은 광(壙)을 만들 때 넓고도 깊이 파기 때문에 몇 척쯤은 애당초 상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수 삼백 년간 사찰(寺刹) 땅인데 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몇 백 년이나 오래되었는지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아래의 차이가 없고 게다가 서로의 거리가 조금 머니 약간 위에다 다시 정하면 비록 내일 봉표 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상지관들이 아뢴 것이 이미 이와 같고 또한 서로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비록 추이하라는 성상의 하교가 있으나 결국 못마땅한 점이 있습니다. 봉표 때문에 천연(遷延)하니 참으로 하루가 절박합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아래 사람들의 심정으로서는 매우 거북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으로 인하여 이미 해를 넘긴 만큼 이번에는 우선 이와 같이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들은 나가서 고쳐서 봉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2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주생활-택지(宅地)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산릉(山陵)에서 들어왔는데 일이 뜻밖에 벌어져 놀라움과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에 와서 신속히 좋은 강(岡)을 다시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주본(奏本)한 것이 있지만 산릉에서 뜻밖에 생긴 일에 대하여 놀라움과 두려움이 어찌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신이 살피지 못한 잘못은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하겠지만 나랏일을 위하여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신속히 명하여 다시 길지(吉地)를 선택해서 큰일을 완성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일이 뜻밖에 발생되어 놀랍고 두려워서 우러러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살펴보게 한 것은 그 원근(遠近)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해서였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해골이 발굴된 곳은 바로 남쪽 방향인데 난간석(欄干石) 안으로 들어가 있었으며 봉표(封標)한 곳으로부터는 13척(尺) 남짓 됩니다. 어찌 천만 번 황송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전에 혹 이와 같은 때는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순조(純祖) 경인년(1830)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계속 공사를 하라는 뜻으로 하교(下敎)가 있었습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경인년(1830)에 도장골〔道藏谷〕에 터를 팔 때 과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4, 5차 아뢴 뒤에 마침내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 거리는 얼마나 되었다고 하던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 때는 매우 가까웠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전례에도 또한 당국(當局)을 추이(推移)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 문제를 어찌 한갓 지나간 규례에만 의거하겠습니까? 결국 못마땅한 것 같으니 다시 정결한 곳을 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혈국(穴局)을 추이할 방도가 없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지관(地官)들의 말을 들어보니 푯말을 꽂은 북쪽으로 3척(尺) 5촌(寸) 올라가고 서쪽으로 1척 5촌 물러나서 이와 같이 추이하면 본래 팠던 곳으로부터 17척 1촌쯤 먼 거리가 되며 난간석 밖으로 물러서게 됩니다. 풍수설(風水說)로 말하면 좌향(坐向)과 분금(分金)이 관의 위치가 위아래로 약간 올라가고 내려가는 차이가 조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당에는 못마땅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비록 추이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어찌 다시 정결한 땅을 정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비록 위 아래로 조금 추이하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신들은 본래 풍수설(風水說)에 어두우니 어찌 감히 물음에 대답하겠습니까? 상지관에게 명하여 자세히 아뢰게 하소서."
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아뢰기를,
"박석(礡石)을 덮은 터를 미리 팔 때 이것이 노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수 백 년 된 옛 무덤으로서 뭉개져서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자로 거리를 계산한다면 13척이 됩니다."
하였다. 상지관 박인근(朴寅根)과 오성근(吳聖根) 등이 아뢰기를,
"봉표할 때 처음에는 약간 위나 아래로 하자는 의론이 있었으나 지금과 같이 약간 아래로 내려다 봉표 하였습니다. 만약 북쪽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물러난다면 이것은 처음에 조금 올려 잡았던 곳입니다. 구덩이는 정결하고 흙빛은 위아래가 같은데 오늘 비록 고쳐서 봉표하여도 추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와서 도리어 천만다행이 되는 것은 애초에 약간 올라간 곳에 푯말을 꽂았더라면 불결한 물건이 어떻게 노출되어 파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혈법(穴法)은 분촌(分寸)과 관계된다고 하였다. 몇 척 추이해도 구애되는 점이 없는가?"
하니, 박인근 등이 아뢰기를,
"국장(國葬)은 광(壙)을 만들 때 넓고도 깊이 파기 때문에 몇 척쯤은 애당초 상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수 삼백 년간 사찰(寺刹) 땅인데 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몇 백 년이나 오래되었는지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아래의 차이가 없고 게다가 서로의 거리가 조금 머니 약간 위에다 다시 정하면 비록 내일 봉표 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상지관들이 아뢴 것이 이미 이와 같고 또한 서로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비록 추이하라는 성상의 하교가 있으나 결국 못마땅한 점이 있습니다. 봉표 때문에 천연(遷延)하니 참으로 하루가 절박합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아래 사람들의 심정으로서는 매우 거북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으로 인하여 이미 해를 넘긴 만큼 이번에는 우선 이와 같이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경들은 나가서 고쳐서 봉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늘 산릉(山陵)을 돌아보고 온 후에 회주(回奏)를 들었는데 이것은 괴이할 것이 없는 일이며 또한 가까운 지점이 아닌 만큼 사실 구애될 것이 없다. 그러나 신중히 살펴보아야 하는 일이니 이미 파낸 곳의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다시 다 파내고 자세히 살피도록 한 후에 그 형지(形止)를 등문(登聞)할 것을 산릉도감(山陵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3월 31일 양력
포달(布達) 제24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태자궁 시강원 첨사(太子宮侍講院詹事) 주임(主任)을 칙임(勅任) 3등 혹은 4등으로 개정하였다.】
【원본】 39책 3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21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혼전(魂殿)은 경소전(景昭殿)으로 할 일에 대하여 조령(詔令)이 내렸습니다. 삼가등록(謄錄)을 상고하여 궁전 안의 당가(唐家)는 도감(都監)에서 옛날에 지어 놓은 중에 규례대로 편리를 따라 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원래 지어 놓은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새로 마련해야 하는데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처마, 계단과 행각(行閣)의 여러 곳은 규례대로 도감에서 거행해야 하니 이안청(移安廳), 어재실(御齋室), 태자궁(太子宮) 재실, 곡림청(哭臨廳), 안향청(安香廳), 제기고(祭器庫), 전관직소(殿官直所), 헌관(獻官) 이하의 각종 처소까지 일일이 품정(稟定)한 후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당가는 문경전(文慶殿)에 설치해 놓은 것을 수리하여 옮겨 쓸 것이며 각 처소는 마땅히 써서 내려 보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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