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5권, 고종34년 1897년 2월

싸라리리 2025. 1. 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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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양력

【음력 병신년(1896) 12월 30일】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지내고 조상식(朝上食)을 올렸으며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배참(陪參)하였다.


【원본】 39책 3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지내고 조상식(朝上食)을 올렸으며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태자(王太子)도 배참(陪參)하였다.

 

유학(幼學) 조성훈(趙性薰)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작년 8월에 있은 사변은 이 세상에 없었던 큰 변고입니다. 저 무리들의 흉역의 심보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더니 또다시 단발의 논의를 가지고 위협하였습니다.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의 무리들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못할 짓이 없었으니 귀신과 사람들이 모두 분노합니다.
지난번에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를 써서 러시아〔俄國〕 공사관(公使館)에 나가 계시면서 시원히 주벌을 행하여 조정의 기강을 다시 엄하게 하시니 이것은 성인(聖人)의 능숙한 권도입니다. 그렇지만 두고두고 정상적인 법으로 삼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지난봄부터 겨울까지의 기간이 지났는데도 환궁이 아직도 지체되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걱정과 의구심이 끝이 없습니다. 속히 경운궁(慶運宮)에 환궁하시어 위로는 묵묵히 도와주시는 조종(祖宗)의 영령을 안심시키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위태로운 마음을 진정시켜 주소서. 그리고 또한 왕태자(王太子) 전하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빈전(殯殿)에 성의를 표시하게 한다면 하늘에 계신 대행 왕후의 영령께서 저 지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작년 가을에 있은 역적들의 변란에 대해서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의 말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법부(法部)에서, ‘한선회(韓善會) 등 각 피고(被告)들이 이창렬(李彰烈), 김낙영(金洛榮)의 흉모(凶謀)와 연계된 사건에 대한 검사(檢事)의 공소 심리(公訴審理)에, 「흉모가 건양(建陽) 원년(元年) 10월부터 시작되어 같은 해 11월에 가서 계획이 정해졌는데, 그에 의하면 각 대신(大臣)들을 살해하고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를 모시고 환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군대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뜻밖의 상황을 염려하여 미리 외국인 자객 50명을 고용하여 병정(兵丁)과 순검(巡檢)의 옷으로 바꾸어 입히고 경운궁(慶運宮)에 잠입하여 러시아〔俄國〕 군대나 타인이 그들을 막을 경우에는 그들이 저지하게 하였습니다.
이근용(李根)은 때를 틈타서 군사를 거느리고 입직(入直)하러 가서 상황을 살펴 내응(內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위조 칙서(勅書) 세 통을 미리 작성하였는데, 하나는 환궁한 후 러시아 대사관(大使館)에 보내어 오래 머물러 폐를 끼쳤으니 미안하다는 내용이고, 하나는 각국의 공사관(公使館)에서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보호해 달라는 내용이며, 하나는 환궁한 후의 고시문(告示文) 이었습니다.
처음의 의도는 11월 19일 나라에 일이 있을 때 경운궁으로 옮겨 모시고 이어서 폐하를 위협하여 경복궁(景福宮)으로 환궁하자는 것이었는데 자객의 복장이 마련되지 못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이 때 소문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계책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선수를 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달 20일에 또다시 계책을 꾸몄는데, 그 다음날 독립 협회(獨立協會)의 연회에서 내부 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윤용(李允用),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영환(閔泳煥), 학부 협판(學部協辦) 김홍륙(金鴻陸)과 그 밖의 각부(各部)의 협판(協辦)을 일시에 연회 석상에서 살해하고 다음날 10시에 모두 김낙영(金洛榮)의 집에 모이기로 하였는데 고발인인 유진구(兪鎭九)·유기환(兪起煥)·전인규(田仁圭)도 와서 모였습니다. 한창 의논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이근용과 서정규(徐廷圭) 두 대대장이 잡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창렬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즉시 도망갔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피고 한선회(韓善會)·장윤선(張允善)·김사찬(金思燦)·이용호(李容鎬)는 돈과 재물을 마련하기도 하고 거짓 칙서(勅書)를 짓기도 하였으며 외국인과 함께 일을 의논하기도 하였으니 그가 종범(從犯)임은 확실합니다.
피고 이근용과 이창렬은 예전부터 친근한 사이인데 11월 16일 이창렬이 와서 흉모를 말하고 계속해서 군사들에게 분부하여 흰옷을 입은 사람의 출입을 내버려두고 사격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피고가 「그날 나는 입직 차례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이와 같은 중요한 소식을 제때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사실은 각 증인의 증언과 각 피고의 진술에 비추어 보니 확실합니다. 법조문에 비추어 피고 한선회·장윤선·김사찬·이용호, 이근용은 모두 태(笞) 100대를 치고 유십오년(流十五年)에 의율(擬律)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이용호와 장윤선은 이미 자수한 만큼 참작해서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니 특별히 두 등급을 감하며, 한선회·김사찬·이근용의 죄는 원래 용서할 수 없지만 참작할 만한 점이 있으니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하라."
하였다.

 

2월 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제(朔祭)와 주다례(晝茶禮)를 지내고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왕태자(王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진전(眞殿)과 빈전(殯殿)을 옮겨 봉안한 후에 이제야 이 궁궐에서 밤을 지내니 나와 세자(世子)의 성의를 조금이나마 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겨울 추위를 만나 공사를 끝마치지 못하고서 봄철이 다가오고 있으니 특별히 감독하고 신칙하여 빨리 준공하라."
하였다.

 

2월 5일 양력

종2품 민상호(閔商鎬)를 영국(英國), 독일〔德國〕, 러시아〔俄國〕, 이탈리아〔義國〕, 프랑스〔法國〕, 오스트리아〔墺國〕 주차(駐箚) 공사관(公使館) 1등 참서관(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민사 국장(法部民事局長) 김기룡(金基龍)을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주차 공사관 2등 참서관에 임용하고 주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2월 9일 양력

조서를 내리기를,
"궁궐에서 옮겨온 후 해가 지나도록 환궁하지 못하는 것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대소 신민들이 근심하고 애태울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래 있는 것을 짐(朕) 역시 하고 싶겠는가? 지난번에 겨울 추위를 만나 공사는 중지되었고 전각(殿閣)의 체제도 갖추어지지 못하여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전후에 조정의 신하들이 상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근간에 또 선비들이 대궐에 와서 호소하는 일이 많은데 이것은 나라를 근심하고 사랑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은 짐의 마음을 모르는 처사이다. 진실로 환궁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런 요청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이것으로 뜬소리를 퍼뜨려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의심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이미 승지(承旨)를 시켜 잘 타일러주고 물러가도록 하였다. 현재 봄의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으니 궁궐 공사도 가까운 시일 안에 끝날 것이고 궁궐로 돌아가는 것도 조만간에 이루어질 텐데 어찌 또 다시 의심하겠는가?
이렇게 조서를 내려 연유를 명백히 밝히니 모두 내부(內部)로 하여금 짐의 이런 뜻으로 네 거리에 방(榜)을 붙이도록 하라. 아! 너희 신민들은 잘 알아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전 정위(前正尉) 유동근(柳東根)이 헛소문을 망녕되게 지어내니 그 행동이 해괴하고 패악스러워서 무엄하기 짝이 없다.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법부(法部)에서는 잡아다가 유십오년(流十五年)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한규설(韓圭卨)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새로 입은 재해와 그 전에 재해를 입은 전지(田地)에 세금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경기(京畿) 848결(結), 충청북도(忠淸北道) 445결, 충청남도(忠淸南道) 1,573결, 강원도(江原道) 378결, 전라남도(全羅南道) 5,039결, 전라북도(全羅北道) 6,656결, 경상북도(慶尙北道) 1,641결, 경상남도(慶尙南道) 1,458결, 평안남도(平安南道) 66결, 평안북도(平安北道) 161결, 함경남도(咸鏡南道) 235결, 함경북도(咸鏡北道) 285결이다.

 

2월 11일 양력

종1품 조병식(趙秉式) 등이 올린 상소에,
"해가 바뀌고 설도 어느새 지났으니 삼가 생각건대, 폐하(陛下)의 감회가 더욱 깊어지고 태자(太子)의 슬프게 그리워하는 마음도 새로워질 것이니 신민들이 모두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모두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의 세 반열에 있으면서 임금, 스승, 부모를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의리를 조금 배웠으므로 항상 분수에 벗어난 걱정이 그칠 날이 없으며 늘 성상께 향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이렇게 나라의 운수가 기구하고 시의(時宜)가 안정되지 못하여 정전(正殿)에 폐하(陛下)께서 남면(南面)하시는 옥좌가 비어 있고 신료들이 임시로 마련된 집무처에서 애태우고 있으니 조야에서는 근심하고 의심합니다.
아! 통분합니다. 을미년(1895) 8월의 변고에 대하여 울음소리를 삼키고 원통함을 참고 있으니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으며,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니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러시아〔俄國〕 공사관(公使館)에 거처를 옮겨 두 해가 지났는데 유리창과 분칠한 담장은 문채가 화려하지만 그을음 나는 석탄을 때는 전돌(甎堗)은 전하께서 옥체를 보호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또 생각건대 교린(交隣)의 두터운 우의로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것은 틀림없이 환궁 여부와 관계가 없겠지만, 조신들이 고심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근래에 관리들과 선비들이 전후에 애타게 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윤허는 더디니 모르겠습니다만, 폐하(陛下)께서는 무슨 일에 제약을 받아서 아직도 결단을 늦추십니까? 혹시 서무를 헤아려 보고서 성상의 생각이 결론이 나지 못 하신 것입니까?
지난 음력 그믐날에 경운궁(慶運宮) 새 대궐에 유숙하면서 위로는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殿閣)과 빈전(殯殿)에 정성을 드리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조서(詔書)를 반포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우리 폐하의 거룩한 덕과 대업이 끝없이 중흥할 수 있는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전일에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어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의 실망을 장차 어떻게 달래서 진정시키렵니까?
지금 새해가 돌아와서 만물이 새로워지는 시기이니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빠른 시일 내에 환궁하신다면 대성인께서 시의를 따르고 질서와 합치되는 의리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다음에야 억만 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태로운 상황에서 편안한 상황으로 전환시켜서 삼천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울부짖다가 나중에는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도(八道)의 선비들이 발을 싸매고 먼 길을 와서 대궐에 호소하고 있으며 네 거리의 장사꾼들이 일제히 성상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추종하고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폐하께서 예전 그대로 윤허하시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백성들의 충심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신들이 윤허하는 특지(特旨)를 받고서 이어서 성상께서 환궁하시는 성대한 의식을 보게 된다면 장차 기뻐 춤추며 집집마다 송축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봄 추위는 아직 쌀쌀하여 공사를 끝내기가 어렵지만 먼저 환궁하신 후에 감독하면 빨리 끝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만민의 부모라는 위치를 명심하시고 온 나라 신하들의 심정을 염두에 두시어 간하는 말을 따라 즉일로 환궁하여 끓어오르는 여론에 부응하시고 영원히 누릴 태평의 터전을 공고히 만드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거처를 옮긴 것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즉시 환궁하지 못하는 것 또한 그대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하겠는가? 짐은 경들의 요청에 관계없이 환궁하고 싶지만 지금 공사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경들이 이해하고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용익(李容益)이 사직 상소를 올리고 겸해서 진언(陳言)을 하니, 비답하기를,
"관찰사(觀察使)의 중대한 임무를 어떻게 가볍게 교체할 수 있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마라. 아래 조항에 진술한 것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2일 양력

종1품 조병식(趙秉式)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이어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에 임명하였다. 또한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종묵(閔種默)에게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양력

정2품 이교창(李敎昌)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권응선(權膺善)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조병호(趙秉鎬)와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이정로(李正魯)의 직임을 서로 바꾸었다.

 

유학(幼學) 심희경(沈羲慶)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저번에 내린 칙령(勅令)을 삼가 보면, 폐하께서 경운궁(慶運宮)에서 유숙하셨다가 곧바로 또 러시아〔俄國〕 공사관(公使館)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때문에 온 나라 백성들이 날로 더욱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마을과 저자 사이에는 풍색(風色)이 처참합니다. 비록 병들고 쇠잔한 사람이지만 잠깐이나마 죽지 않고 살아서 폐하의 위의(威儀)를 다시 볼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경운궁으로 말하면 바로 우리 선조(宣祖)께서 나라를 중흥시키며 거처하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한 발자국을 지나면 바로 저 외관(外館)의 경계이고 한 발자국을 물러서면 곧 선왕(先王)이 계셨던 옛 전각(殿閣)이므로 한 발자국 사이에 의의(義意)가 현저히 다릅니다.
선왕이 자손들에게 남긴 계책은 우연히 오늘날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되어 영원토록 국운이 이어질 기틀이 되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경운궁으로 옮겨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하고 온 나라 백성들의 의구심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날 이미 비답을 내려 주었고 또 특별 조서를 내렸으니, 그대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인데도 다시 번거롭게 청하는 것은 역시 도리가 아니다.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2월 1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고 석곡(夕哭)을 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복(服)을 벗기 전에는 세 명일(名日)과 각전(各殿)의 탄신일에만 표리(表裏)를 바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음력 정월 22일 왕태후(王太后)의 탄신일에 대내(大內)에서 바치는 표리와 종친(宗親)과 문무(文武) 백관이 바치는 표리는 모두 해사(該司)의 관원이 직접 바치라는 내용으로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지냈다. 뒤이어 조곡(朝哭)을 하고 주다례(晝茶禮)를 지냈으며 석곡(夕哭)을 행하였다.

 

2월 17일 양력

칙령(勅令) 제13호, 〈성균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成均館官制中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궁내부(宮內府)에서 주차(奏差)하였다.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은 윤정구(尹定求)이고, 묘지문 초도 서사관(墓誌文草圖書寫官)은 서병선(徐丙宣)이다.

 

2월 18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모레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還御)하겠다. 고포(告布)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磨鍊)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종한(金宗漢)이 아뢰기를,
"삼가 환궁하겠다는 조칙에 의거하여 천지(天地), 종묘(宗廟), 사직(社稷)에 고하고 조서(詔書)를 반포하며 진하(陳賀)하는 등의 절차는 날을 받아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진전(眞殿)에 환궁을 고유(告由)하는 의식이 없을 수 없으니 내일 전배(展拜)하고 겸해서 사유를 고하겠다. 고유문(告由文)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며 백관들은 들어와 참석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빈전(殯殿)에도 고유별전(告由別奠)을 행해야 하니 주다례(晝茶禮)를 겸해서 지낼 것이다. 백관은 들어와 참석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동궁(東宮)의 효성스러운 생각에 이번 환궁의 시기를 만났으니 당연히 정성을 표시하는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다. 내일 빈전(殯殿)에서 별전(別奠)을 거행할 것이니 저녁 상식(上食)을 겸해서 행하라. 백관들은 들어와 참석하라. 제문은 동궁이 지어 내려 보내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병시(金炳始)를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고, 정2품 조병호(趙秉鎬)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조희일(趙熙一)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고, 종2품 서신보(徐臣輔)·박봉빈(朴鳳彬)·이명재(李命宰)·김유성(金裕成)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에게 하유하기를,
"지난번에 경이 사임하는 청을 들어준 것이 어찌 경을 내버려두려고 그렇게 했겠는가? 예우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론을 들어보고 백성들의 기대를 참작해 보니 결국 경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지금 한 해가 지나도록 거처를 옮겼다가 장차 환궁하려고 하니 의지할 사람도 오직 경뿐이며 나를 보필할 사람도 오직 경뿐이다. 이런 때 이 명을 경이 아니면 누가 받겠는가?
환궁하는 행차의 분부를 이미 내렸고 시위(侍衛)도 이미 준비되었다. 그렇지만 경이 나의 명에 응한 뒤에야 전계(前啓)가 가능하다. 바라건대 경은 빨리 나의 뜻을 이해하여 다시는 전처럼 사임하지 말며 곧 일어나 칙명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들을 기쁘게 하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23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영국(英國), 독일〔德國〕, 러시아〔俄國〕, 이탈리아〔義國〕, 프랑스〔法國〕, 오스트리아〔墺國〕 주차(駐箚) 공사관(公使館) 1등 참서관(參書官) 민상호(閔商鎬)에게 미국 공회(美國公會) 2등 전권 위원(全權委員)의 부임을 명하였다.

 

2월 20일 양력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왕태자(王太子)가 배환(陪還)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겸해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며 이어 빈전(殯殿)에 가서 고유 별전(告由別奠)을 지냈다. 이어서 석전(夕奠)을 거행하고 석곡(夕哭)을 하였다.
왕태자(王太子)가 따라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별전(別奠)과 석상식(夕上食)을 겸해서 행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거처를 옮긴 후에 덧없이 한 해가 지나게 되니 모든 법도가 무너져서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였다. 짐(朕)이 어찌 밤낮으로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신민(臣民)들이 모두 알 것이다.
이제 의정부(議政府)의 간청에 의하여 경운궁(慶運宮)에 환궁하였으니 중앙과 지방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을 것이다.
아! 내가 정사를 잘못하여 대소 신하들이 안일해져서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야기하고 말았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맡은 관리들은 한결같이 몸과 마음을 다하라. 부(府)와 부(部)의 관리들은 자기의 직무 수행에 힘쓸 것이며 호위하는 장졸도 몸 바쳐 충성을 다하라.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서 건너갈 때 상앗대로 노를 젓는 것에 각각 그 힘을 써야 쉽게 건널 수 있으며 한 사람이라도 해이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존망의 계기가 순식간에 나타나므로 나쁜 상황을 전환시켜 좋게 만들며 위태로운 상황을 전환시켜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오직 이 때에 달렸다.
어찌 나 혼자 밤낮으로 걱정하고 애쓴다고 될 일이겠는가? 나의 신하들 역시 함께 건너는 의리를 생각해서 조금도 해이해지지 말라.
짐은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힘쓸지어다."
하였다.

 

2월 2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원임 의정(原任議政), 정부(政府) 대신(大臣), 규장각(奎章閣), 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대유재(大猷齋)에서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정범조(鄭範朝),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 찬정(贊政) 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윤용선(尹容善),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영환(閔泳煥),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심상훈(沈相薰),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종묵(閔種默), 법부 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 외부 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윤용(李允用), 특진관(特進官) 조종필(趙鍾弼), 태의원 경(太醫院卿) 김규홍(金奎弘),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 시종원 경(侍從院卿) 민병석(閔丙奭),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종한(金宗漢), 회계원 경(會計院卿) 성기운(成岐運),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조정희(趙定熙),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민영준(閔泳駿), 원임 직각(原任直閣)            이호익(李鎬翼), 직학사(直學士)            김종규(金宗圭), 원임 대교(原任待敎)            김영덕(金永悳)·김석규(金錫圭), 원임 직각            이용태(李容泰), 첨사(詹事) 김승규(金昇圭), 부첨사(副詹事) 이은용(李垠鎔), 시독(侍讀)            신필희(申弼熙)·윤덕영(尹德榮), 시독관(侍讀官)            김영기(金永冀)·이범석(李範錫), 시종관(侍從官) 김용범(金容範)·이정렬(李正烈)·서채순(徐采淳)·이범교(李範喬)·이선규(李宣珪)이다.】 대궐로 돌아온 후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대궐로 돌아와 만사가 편안하니 여러 사람들의 경축하는 마음이 어찌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위로는 척강(陟降)하는 조종(祖宗)의 영(靈)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굽어보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대하는 정성으로 기뻐하며 송축(頌祝)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형세를 위기가 바뀌어 편안해졌으니 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신(維新)하여 천만 년 끝없이 이어짐은 실로 오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를 이어 자리를 옮겨 앉았다가 오늘 행차를 돌린 거조(擧措)는 특히 성충(聖衷)을 결연히 행하신 것이니 더욱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정령(政令)을 시행할 때에는 지혜와 용맹을 분발하여 강의(强毅)하게 집행하소서. 이것이 신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까지 이차(移次)하였던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여러 차례 애써 간하기 때문에 오늘 대궐로 돌아왔다. 천만 번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한 해가 지나도록 이차하였다가 이제 대궐로 돌아왔으므로 위로는 높은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군사와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기뻐하면서 서로 축하를 드리고 경사로 여기니 온 나라의 심정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백성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고 기울어져 가던 나라의 형세가 다시 공고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적이 빛나고 업적이 이루어지는 기회입니다. 이제부터 성상의 심려를 분발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수성(修省)하여 모든 정령(政令)을 오늘 결연히 궁궐로 돌아온 것처럼 행한다면 모든 법도가 다 부흥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해지는 것은 실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니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 시책과 조처에 대해서 더욱 크게 반성하고 척념(惕念)하겠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 궁궐은 바로 선조(宣祖) 대왕께서 15년간 임어(臨御)하던 곳입니다. 다스리는 법과 정사의 규모가 300년을 거쳐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규모와 모범을 따라서 행한다면 선대 임금을 계술(繼術)하는 도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오늘부터 다시 온돌에 거처하게 되어 절기에 따라 몸을 조리함이 알맞고 마땅하니 더욱 경축할 일입니다. 태자(太子)가 빈전(殯殿)을 우러르며 효성을 다하고 있으니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1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대궐로 돌아온 후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대궐로 돌아와 만사가 편안하니 여러 사람들의 경축하는 마음이 어찌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위로는 척강(陟降)하는 조종(祖宗)의 영(靈)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굽어보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대하는 정성으로 기뻐하며 송축(頌祝)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형세를 위기가 바뀌어 편안해졌으니 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신(維新)하여 천만 년 끝없이 이어짐은 실로 오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를 이어 자리를 옮겨 앉았다가 오늘 행차를 돌린 거조(擧措)는 특히 성충(聖衷)을 결연히 행하신 것이니 더욱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정령(政令)을 시행할 때에는 지혜와 용맹을 분발하여 강의(强毅)하게 집행하소서. 이것이 신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까지 이차(移次)하였던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여러 대신들이 여러 차례 애써 간하기 때문에 오늘 대궐로 돌아왔다. 천만 번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한 해가 지나도록 이차하였다가 이제 대궐로 돌아왔으므로 위로는 높은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군사와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기뻐하면서 서로 축하를 드리고 경사로 여기니 온 나라의 심정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백성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고 기울어져 가던 나라의 형세가 다시 공고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적이 빛나고 업적이 이루어지는 기회입니다.
이제부터 성상의 심려를 분발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수성(修省)하여 모든 정령(政令)을 오늘 결연히 궁궐로 돌아온 것처럼 행한다면 모든 법도가 다 부흥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해지는 것은 실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니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부터 시책과 조처에 대해서 더욱 크게 반성하고 척념(惕念)하겠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 궁궐은 바로 선조(宣祖) 대왕께서 15년간 임어(臨御)하던 곳입니다. 다스리는 법과 정사의 규모가 300년을 거쳐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규모와 모범을 따라서 행한다면 선대 임금을 계술(繼術)하는 도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오늘부터 다시 온돌에 거처하게 되어 절기에 따라 몸을 조리함이 알맞고 마땅하니 더욱 경축할 일입니다. 태자(太子)가 빈전(殯殿)을 우러르며 효성을 다하고 있으니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각국 공사(各國公使)와 영사(領事)를 접견(接見)하였다.

 

2월 25일 양력

종2품 이도재(李道宰)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2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대유재(大猷齋)에 진하(陳賀)를 행하였다. 권정례(權停例)였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보위에 올랐으니 영원토록 더욱 공고하도록 선열(先烈)에 비추어 아름다운 업적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 난필(鑾蹕)이 옛 궁궐에 임어하였으니 욕의(縟儀)를 베풀어 경하하노라. 이에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꼭 명심하여 들으라.
돌아보건대 부족하고 어두운 내가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지키는데 어찌하여 나라가 여러 차례 어려움을 당하는가? 지난 선갑후갑(先甲後甲)의 해에 이미 임오년(1882) 흉도의 모의가 가까이 다가와 통탄하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왕궁 안에서 일어난 을미년(1895) 가을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천인(天人)의 윤상(倫常)이 이미 없어졌으니 진실로 어떤 세상인가? 나라와 백성의 위태로움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과연 편안하게 될 날은 언제란 말인가?
난맹 역절(亂萌逆節)이 오랫동안 신인(神人)의 분하고 원통한 마음이 쌓여 있어서 천토(天討)와 왕장(王章)이 아직《춘추(春秋)》의 엄정함을 펴지 않았다. 아. 군려(軍旅)들은 숙위(宿衛)에게 경고하고 전궁(殿宮)에서는 황화(皇華)로 파월(播越)하였으나 일이 빨리 수습되지 못한 탓으로 세월이 덧없이 흘러 두 번째의 봄철을 맞이하였다. 시절의 어려움이 아직 구제되지 않아 일념으로 밤낮 근심하고 있다.
누누이 회란(回鑾)을 청한 것은 경사(卿士)와 서민(庶民)들의 기축(蘄祝)이고 오랫동안 청조(請詔)를 우러르는 것은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두들 발돋움하여 기다린 것이다.
이 경운궁(慶運宮)은 예전에 기거하던 궁으로 우리나라에 이미 행하였던 거조가 있었다. 예전에 선조(宣祖)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서 거처하던 곳으로 홍업(弘業)을 중흥하여 번성하였고 원릉(元陵)도 이곳에서 경사를 꾸몄으니 의전(懿典)의 지극한 성대함에 비로소 알맞게 되었다. 나라의 기업(基業)을 태산 반석처럼 견고한 경지에 올려놓게 되었다. 아! 잊지 않으리라. 후세 자손의 표본이 되게 하고 풍기(豐芑)의 죄를 남겨주어 아름다움이 지금에 이르렀도다. 거리낌 없이 큰 책임을 맡고 그 뜻을 이어서 명지(明旨)를 내리니오직 결단하여 이룬 것이다.
빈전(殯殿)과 어진(御眞)을 이안(移安)하니 다행히 가까워져 성례(誠禮)를 펴게 되었고, 별전(別殿)의 침재(寢齋)를 새로 건립하니 이에 도모하기를 시작하자마자 그치는 때가 되었다. 전날의 규모보다 사치함이 없는 것은 하우(夏禹)가 궁전을 검소하게 차린 것을 본받은 것이고, 허물하지도 않고 옛 법을 따른 것은 주(周) 나라에서 전각(殿閣)의 규모를 적게 하던 뜻에 부친 것이었다. 천장(天仗)이 돌아오니 날씨도 화창하고, 궁궐이 엄숙해지면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용의 문장에 봉황의 바탕이니 모든 곳에 질서가 바로잡히고 일마다 광채가 솟아오르는 듯하며, 학 같은 수레에 닭이 욺이니 성해(星海)와 같이 찬란하고 막중한 경사로다. 서울에 상서로운 구름이 모인 속에 모든 관리들은 달려와서 절하고, 온 나라에 기뻐서 부르짖는 소리가 요란한 속에 백성이란 백성들은 다 함께 뛰고 춤춘다. 혜택을 베풀기 위해서 이 조서를 반포하는 것이니,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하늘땅과 종묘 사직(宗廟社稷) 등 응당 제사를 지내야 할 곳은 전례를 참작해서 제사를 거행하라. 2. 중앙이나 지방의 6품 이하의 관리들은 한 품계씩 올려라. 3. 조관(朝官)중에 나이 80이고 2품(二品) 이상에게는 관례에 따라 쌀을 하사하고, 3품(三品) 이하, 사서(士庶)로 나이 90이상은 유사(有司)가 때때로 존문(存問)하여 뜻을 보이라. 4. 군부(軍部) 각 부대의 병졸(兵卒)들은 관례에 따라 음식을 먹여 위로하라. 5. 각 지방의 아내가 없는 홀아비, 남편이 없는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고질병을 앓으면서도 하소할 데 없는 사람들은 유사(有司)가 마음을 두고 때때로 따라 보살펴 주어서 의지할 곳을 잃게 하지 마라. 6. 중앙과 지방의 관원(官員)중 공사로 인하여 벼슬이 내려갔거나 떨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해부(該部)에서 조사하여 밝혀서 면계(免戒)를 주청(奏請)하라. 7. 각도(各道)에 유배(流配) 이하의 죄인들은 모두 감등(減等)을 발락(發落)하노라. 8. 중앙과 지방에 감금된 사람들도 범죄 내용을 구별하여 감등을 발락하며 그 중에서도 정상이 가벼워 용서해줄 만한 사람들은 해부(該部)에서 조사하여 밝혀서 청지(請旨)를 정탈(定奪)하라.】 아! 좋은 운수가 온 누리에 열리니 성대한 복록은 해와 달처럼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후대에게 오복(五福)을 물려주려고 모든 힘을 다하는 터이니 만 대를 내려가도록 펼쳐질 태평 성대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중앙과 지방에 포고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17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군사-휼병(恤兵)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어문학-문학(文學)
아! 좋은 운수가 온 누리에 열리니 성대한 복록은 해와 달처럼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후대에게 오복(五福)을 물려주려고 모든 힘을 다하는 터이니 만 대를 내려가도록 펼쳐질 태평 성대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중앙과 지방에 포고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

 

법부 검사(法部檢事) 이세직(李世稙)을 법부 형사(法部刑事)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월 27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음력 2월 3일은 곧 부대부인(府大夫人)의 팔순 수신(睟辰)이다. 축하하고 싶은 사적인 마음이야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 때 비록 연회는 차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정의를 표시하는 물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은전(銀錢) 1,000원(元)을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본궁(本宮)에 수송(輸送)하게 하라."
하였다.

 

진하(陳賀) 시의 각 차비원(差備員)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비서승 겸장례(祕書丞兼掌禮) 심상만(沈相萬)에게 가자(加資)하였다.

 

민병석(閔丙奭)을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에, 이재완(李載完)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에 임명하였다.

 

2월 28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대영국(大英國)의 대군주(大君主)이며 오인도(五印度)의 후제(后帝)가 즉위한 지 6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날이 멀지 않으므로 짐(朕)이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을 특별히 대사(大使)로 임명하니 때를 맞춰 가서 축하하는 의식에 참석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비서승(祕書丞) 김홍륙(金鴻陸)이 공적을 세운 것이 이미 많으니 특별히 정2품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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