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5권, 고종34년 1897년 4월

싸라리리 2025. 1. 2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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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1897) 2월 30일】 조령을 내리기를, "능침(陵寢)의 석의(石儀)는 국초(國初)부터 정한 규례가 있다. 영릉(寧陵) 이후로 하교(下敎)를 받고 준행(遵行)하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년(1851)에 장릉(長陵)과 기유년(1849)에 현륭원(顯隆園)을 천봉(薦奉)할 때 이미 행한 규례가 있다. 이번에 석의도 이 규정에 의거하여 설치한다는 뜻을 산릉도감(山陵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총호사(總護使), 궁내 대신(宮內大臣),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은 산릉(山陵)에 나아가 고쳐서 봉표(封標)하고 오라." 하였다.


【원본】 39책 3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2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조령을 내리기를,
"능침(陵寢)의 석의(石儀)는 국초(國初)부터 정한 규례가 있다. 영릉(寧陵) 이후로 하교(下敎)를 받고 준행(遵行)하게 되었는데 이미 신해년(1851)에 장릉(長陵)과 기유년(1849)에 현륭원(顯隆園)을 천봉(薦奉)할 때 이미 행한 규례가 있다. 이번에 석의도 이 규정에 의거하여 설치한다는 뜻을 산릉도감(山陵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총호사(總護使), 궁내 대신(宮內大臣),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은 산릉(山陵)에 나아가 고쳐서 봉표(封標)하고 오라."
하였다.

 

4월 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4월 3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이다.】  산릉(山陵)에 고쳐서 봉표(封標)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고쳐서 봉표한 곳이 과연 협길(叶吉)한가?"
하니,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이번에 두루 파내고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흙빛이 과연 좋아 협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쳐서 봉표한 곳과 예전에 봉표한 곳과의 거리가 위로는 3척(尺) 5촌(寸)이고 곁으로는 1척 5촌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처음에 볼 때와 비교해 보면 이번에는 판국의 형세가 웅장하고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하였다.

 

4월 5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포달(布達) 제25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을 학사(學士)로, 부시강(副侍講)을 부학사(副學士)로 개칭(改稱)하였다.】


【원본】 39책 3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21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4월 6일 양력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가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예비금(豫備金)으로 증액(增額)된 110만원(元)을 첨가하여 계산하도록 하고, 일본(日本)에서 차관(借款)한 것 가운데 우선적으로 갚아야 할 100만원, 경인선(京仁線) 철도의 계선(界線)인 시흥(始興)에서 제물포(濟物浦)까지의 땅값 1만 2,272원 40전(錢), 고등 재판소(高等裁判所)에서 원년(元年) 12월 옥사(獄事) 때 쓴 경비 494원 52전 4리(釐), 동래부(東萊府)를 폐지한 뒤의 경비 450원 55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문제에 관해 회의를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4월 7일 양력

포달(布達) 제26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장생전(長生殿)에 직원(職員)을 증설한다. 도제조(都提調) 1명은 칙임관(勅任官)으로 하되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이 예겸(例兼)한다. 제조(提調) 3명은 칙임관으로 하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장례원 경(掌禮院卿)이 예겸한다. 낭청(郎廳)은 3명인데 판임관(判任官)으로 하며 영선사 주사(營繕司主事),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 장례원 주사(掌禮院主事)가 예겸한다.】


【원본】 39책 3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21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방금 고등 재판소(高等裁判所)의 질품서(質稟書)를 받아 보니, ‘피고 이용익(李容翊)은 올해 2월에 조종순(趙鍾純)과 박인환(朴寅煥)이 도망 중인 역적의 무리와 현재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홍륙(金鴻陸), 내부 지방 국장(內部地方局長) 김중환(金重煥), 전 법부 대신(前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을 상소하여 징토할 즈음, 조종순과 박인환으로 하여금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이윤용(李允用)을 무함하여 사죄(死罪)에 걸리도록 하였으며, 같은 달에 또 북도(北道)의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궐문(闕門)에 난입(攔入)하게 하였습니다. 그 죄를 《대명률(大明律)》 〈소송편(訴訟編) 무고조(誣告條)〉의 ‘남을 무고하여 사죄에 이르게 하였는데, 무고를 당한 자가 미결(未決)로 되어 있는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과 동조(同條)의 ‘각 아문(衙門)의 관리들이 밀봉한 상소를 올렸을 때 남을 무고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있는 자는 죄 또한 같다’는 율문과, 〈궁위편(宮衛編) 궁전문천입조(宮殿門擅入條)〉의 ‘제 마음대로 궁전문에 들어갔으나 문 닫는 시간을 넘기지 않은 자는 한 등급을 감(減)한다’는 율문과, 〈사위편(詐僞編) 사교유인범법조(詐敎誘人犯法條)〉의 ‘여러 사람들이 계책을 꾸미는 말을 하여 죄를 범하도록 남을 부추긴 자는 범인과 동죄(同罪)에 처한다’는 율문과, 〈명례편(名例編) 이죄구발이중론조(二罪俱發以重論條)〉의 ‘두 가지 죄 이상이 함께 발로되었을 경우에는 중한 쪽으로 논한다’는 율문에 비추어 처리하겠습니다.
피고 조종순은 왕래하면서 이용익과 박인환의 소개를 받았고 그 연줄로 상소를 올려 등용되기를 꾀하였습니다. 그 죄는 《대명률》 〈의제편(儀制編) 상서진언조(上書陳言條)〉의 ‘막된 무리들이 거짓으로 글을 올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여 등용되기를 바란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에 비추어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이용익은 태(笞) 100대를 쳐서 종신 징역으로 처결하고, 해당 범인 조종순은 태 100대를 쳐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용익은 두 등급을 감하여 유형(流刑) 10년에 처하고, 조종순도 두 등급을 감하라."
하였다.

 

4월 8일 양력

일본 공사(日本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를 접견(接見)하였다.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왕명을 봉명(奉命)한 자는 관리들이 정사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탐지하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이로운 것과 손해되는 것을 살펴야 하므로, 그 직무를 돌아보건대 가볍지 않고 중요하기에 마땅히 우선적으로 신중히 선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삼남(三南)에 나가 있는 암행어사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로 칙명(勅命)을 받들고 나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전해 오는 소리는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원성은 자자하다고 합니다. 만일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이 없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어진 정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속히 소환하고 이어 각도(各道)의 해당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암행어사가 다닐 때 백성들과 고을들에 폐를 끼친 일을 자세히 살펴 조목별로 나열해서 등문(登聞)하게 한 다음 재량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처분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직무가 바쁜지 한가한지를 막론하고 벼슬자리를 자주 명예직으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규례입니다. 이로 인하여 부당한 길이 열리어 관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근래에 중추원(中樞院)의 주사(主事)를 매일 개차(改差)하여 그 수가 매우 많아 복잡할 뿐만 아니라 사체(事體)가 이미 어긋났으니, 듣기에 매우 놀랍습니다. 과도하게 개차한 해당 의관(議官)에게 우선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법을 시행하여, 다시는 돌아가며 개차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민심이 아직도 대부분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길을 막고 노략질하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길손의 갈 길이 막히고 마을들이 소란스럽습니다. 마땅히 각 도 및 나가서 주재하고 있는 대장(隊長)으로 하여금 적발되는 대로 조사하여 잡아들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안일하게 세월만 보낸다면 그와 똑같은 죄로써 다스릴 것이며 힘써 잡아들이는 자에게는 후하게 시상하여, 더 이상 만연되어 가지 못하도록 내부(內部)와 군부(軍部)에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전에 국장(國葬)이 있을 때는 제도(諸道)의 감사(監司)들은 으레 장례(葬禮)에 참석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경기 감사(京畿監司) 외에는 모두 올라오지 말게 하고 품계가 높은 수령(守令)으로 대신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도록 제도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국장에서 발인(發引)할 때 폐하께서 곡림(哭臨)하는 의절(儀節)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신사년(1881)과 정축년(1877)에는 자내(自內)의 예(例)로 곡림하였고 계묘년(1843)에는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곡하고 영결(永訣)하는 것으로 마련하였는데, 곡림할 때가 되어서는 다시 하교(下敎)를 기다리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인화문(仁化門) 밖에서 곡하고 영결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국장에서 영구가 발인(發引)하고 반우(返虞)할 때의 의절(儀節)을 마련해야 하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발인조(發引條)〉에는 폐하(陛下)께서 연(輦)을 타고 시종(侍從)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왕태자(王太子)가 배종(陪從)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삼가 등록을 상고해 보니, 을해년(1875)에는 능소(陵所)에 따라 나아갔고, 신사년에는 궐문(闕門) 밖에서 봉사(奉辭)하고 성문 밖에서 지영(祗迎)하였으며 정축년에는 봉사하고 지영하는 것을 모두 성문 밖에서 하는 것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왕태자가 따라 나아가는 문제와 봉사하고 지영하는 의절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인화문(仁化門) 밖에서 봉사하고 성문 밖에서 지영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추증(追增)할 때는 영의정(領議政)이 이 일을 행하고 재궁(梓宮)을 현궁(玄宮)에 하관(下官)할 때 옥백(玉帛)을 올리고 애책(哀冊)을 드리며 현궁을 봉하는 일을 감동(監董)하는 것은 영의정이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발인 및 현궁에 하관할 때 재궁을 메는 관리를 인솔하는 것은 좌의정(左議政)이 일을 행하고, 찬궁(欑宮)을 열 때 재궁을 닦는 관리와 재궁을 현궁에 하관한 뒤에 흙을 덮는 관리의 일은 우의정(右議政)이 일을 행한다는 것이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관제(官制)가 이미 개정(改正)되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議政)이 하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27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산릉침전 상량문 제술관(山陵寢殿上樑文製述官)에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를, 서사관(書寫官)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조병호(趙秉鎬)를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양력

진전 상량문 제술관(眞殿上樑文製述官)에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를, 서사관(書寫官)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윤용구(尹用求)를,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에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 김철희(金喆熙)를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법부(法部)에서, ‘유십년 죄인(流十年罪人) 이용익(李容翊)을 황주군(黃州郡) 철도(鐵島)에 정배(定配)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 10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발인(發引) 및 반우(返虞)할 때 가는 길에 치거〔植炬〕하는 것을 한성부(漢城府) 안에서는 공조(工曹)에서 대령하고 지방에서는 기영(畿營)에서 거행한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해당 공계(貢契)가 지금 이미 폐지되었으니 어떻게 거행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한성부 안에서는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대령하고 지방에서는 내부(內部)로 하여금 각 지방관을 신칙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해 보니, 지석(誌石)은 자기(磁器)로 만든 지석을 쓰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인년(1890)에는 오석(烏石)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이번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반우(返虞) 후에 경효전(景孝殿)에서 초우제(初虞祭)부터 졸곡제(卒哭祭)·사시제(四時祭)·납향제(臘享祭)·삭망제(朔望祭)·속절제(俗節祭)·연제(練祭)·상제(祥祭)까지 제사를 지낼 때 백관(百官)이 배종(陪從)하는 일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따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왕후의 초상이 먼저 있으면 동궁(東宮)이 제사 지낼 때와 섭행(攝行)으로 지낼 때에 상제를 지낸 후 백관이 배종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상례보편》의 소주(小註)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동궁은 제사를 지낼 때 규례대로 참석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사년(1881)과 계묘년(1843)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발인(發引)할 때 배종하는 뭇 관리들은 각사(各司)에서 1원(員), 당상(堂上)을 둔 아문(衙門)에서 당상과 낭청(郎廳) 각 1원, 종친(宗親)의 품계마다 각 2원으로 마련하였는데, 관제(官制)가 이미 개정(改政)되었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각부(各府)·각부(各部)·각원(各院)의 찬정(贊政)·참찬(參贊)·협판(協辦), 일등 의관(一等議官) 이상 가운데서 각 1원, 주임관(奏任官)과 판임관(判任官) 가운데서 각 1원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4월 11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능역(陵役)이 한창이고 봄철도 이미 깊었으니, 민정(憫情)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더욱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특별히 전(錢) 5,000원(元)을 내리니, 훼철된 민호(民戶) 및 급대(給代)된 민전(民田)에 대한 대가를 넉넉하게 제급(題給)하여 각자 안주하고서 농사를 짓게 하여서 농사철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28호, 〈궁내부 관제 중 봉상사 도제조 1명을 칙임관으로 증치할 경우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중에서 겸임하는데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奉常司都提調一人勅任增置時原任議政中兼件〕〉을 반포(頒布)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를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4월 12일 양력

독일 사람 워르터〔花爾德〕  【워르터】 에게 광산 채굴권(鑛山採掘權)을 허락하였다. 【이날부터 시작하여 2년 이내에 적당한 광구(鑛區) 한 곳을 선정하고 나서 그 채굴을 허락하기로 약속하였다.】


【원본】 39책 35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22면
【분류】외교-독일[德] / 광업-광산(鑛山)

 

4월 13일 양력

포달(布達) 제29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頒布)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의 교서(校書) 2인(人)을 직각(直閣)과 대제(待制)로 개정하며 장례원 장례(掌禮院掌禮) 3인 중에서 2인을 좌장례(左掌禮)와 우장례(右掌禮)로 개칭한다. 찬의(贊儀) 1인을 주임관(奏任官)으로 증설하고, 주사(主事) 18인 중에서 1인을 장의(掌儀)로 개정한다.】


【원본】 39책 35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22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 민형식(閔亨植)을 궁내부 특진관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김완수(金完秀)를 경모궁 제조에, 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 이은용(李垠鎔)을 사직서 제조에, 종2품 송도순(宋道淳)을 태자궁 시강원 첨사(太子宮侍講院詹事)에, 종2품 김영목(金永穆)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3품 주석면(朱錫冕)을 법부 형사 국장(法部刑事局長)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전 가주서(前假注書) 오연근(吳年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하늘의 해와 같은 의표(儀表)로 간고한 때를 당하여 한 번 난관을 헤쳤으며 재차 종방(宗祊)을 편안히 하셨습니다. 연호(年號)를 세워 자주권(自主權)을 지켰고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 무궁한 기반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서 미처 이룩하지 못하였던 업적이며 억조창생이 성취되기를 바라던 마음이므로 진실로 춤추고 기뻐하면서 마음에 흐뭇할 것입니다.
비록 짧은 문안(文案)이나 장부일지라도 응당 건양(建陽) 연호를 써야 하는데, 부(府)의 명령이나 군(郡)의 문첩(文牒)에는 대부분이 연호를 쓰지 않는 폐단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송사(訟事)나 개별적인 문서에도 연호를 쓰는 사람이 없는데,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성상(聖上)의 뜻이 아닐 뿐 다른 이유는 없다고들 합니다.
지난번 나라가 몹시 급작스런 일을 겪어 망극한 변고가 생겨서 온 천하 사람들은 모두 분해 하는 마음이 절절한데 공교롭게 이러한 즈음에 연호를 세웠으니 선포하는 것이 소홀하게 이루어져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상께서 큰 왕업을 이룩하려는 의도가 온 나라 신하나 백성들에게 환히 알려지지 못하였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고 보니 개탄과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어 노둔한 신의 자질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하찮은 정성을 바쳐 외람되이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하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펴 주소서.
대체로 연호를 선포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널리 밝혀 보게 하려는 것이므로 한편으로는 화폐에 새기고 한편으로는 역서(曆書)에 기록하여 날마다 사용하고 늘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급한가를 따져 보면 역서보다 화폐가 더 급합니다. 역서는 몇 집에 한 책(冊)씩 주니 집집마다 알려주고 전할 수 없지만 화폐는 어리석은 부인이나 어린아이들이라도 모두 손으로 쓸 줄 알고 입으로 외울 줄 알기에 장부나 계약서로 말하면 바로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漢) 나라의 건원(建元), 당(唐) 나라의 개원(開元), 송(宋) 나라의 가우(嘉祐), 명(明) 나라의 홍무(洪武), 청(淸) 나라 열조(列祖)의 통보(通寶), 일본의 관영(寬永)·명치(明治)는 신이 통용되는 화폐에서 직접 본 것들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역서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화폐에는 ‘상평(常平)’이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주권을 일찍이 밝히지 못하였고, 연호를 세우는 법 또한 미처 세울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자적으로 기원(紀元)을 세운 뒤에 역서에만 연호를 쓰고 끝내 화폐에는 새기지 않는다면 자주권을 이웃 나라에 나타내기 어려울 것이며 연대를 기록하는 연호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니, 자주적으로 연호를 기록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살피시어 속히 신의 장계를 내려보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널리 수집하여 연호를 새기는 일에 대한 명을 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개성부(開城府) 유학(幼學) 양석수(梁錫綏) 등이 상소를 올려, ‘개성부를 관찰부(觀察府)로 승격시켜 주소서.’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관제(官制)는 이미 정리하여 개정하였으나, 그대들이 번거롭게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홍석범(洪錫範)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살고 있는 정주(定州)는 본래 큰 길의 웅주(雄州)라고 불렸으며 일찍이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도회지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오년(1894)에 병란을 겪은 이후로 가옥이 불타 버리고 살고 있던 백성들이 흩어져 고을이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방의 제도를 고쳐 정할 때 북도의 관찰부(觀察府)를 본군(本郡)에 설치하였는데 흩어졌던 백성들이 점점 모여들어 다시 큰 도회지를 이루었으니, 몇 년만 지나면 모양이 갖추어짐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삼가 듣건대 영변(寧邊)에 사는 전 군수(前郡守) 오승태(吳承泰)가 상소를 올려 해군(該郡)으로 관찰부를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시행하도록 허락한다는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사세를 가지고 헤아려보고 형편으로 논해 보더라도 하나의 이익도 없는 반면에 다섯 가지의 불편한 점만 있습니다.
어떻게 이를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점차로 모여들었던 백성들이 곧 고였던 물이 말라 버린 수레바퀴 자국에 있는 물고기 신세로 전락될 것이고 또 장차 사방으로 흩어져 도로에 쓰러진다 해도 보살펴 줄 수 없을 것이니 불쌍한 일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로 불편한 점입니다.
옮겨 설치할 즈음에 관아(官衙)가 마련되지 못한 것은 새로 건설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백성들에게 수고로움을 끼칠 뿐만 아니라 또한 재물을 축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작년에 설치한 것을 몇 달이 안 되어 또 옮겨 설치한다면, 내년에는 또 어느 곳으로 옮겨 설치하게 될지 모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점점 의혹을 가지게 되어 마음을 안착시키기 곤란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한 개 부(府)를 설치하거나 폐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한 사람이 상소하여 청한 것으로 인하여 번번이 폐지하는 것은 정령(政令)에 크게 관계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로 불편한 점입니다.
본 군의 위치는 각군(各郡)의 중앙에 있어서 공문(公文)을 전달하기에 매우 편리하고 가까운 영변의 위치는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서 수령(守令)이 왕래하기에 매우 멉니다. 가깝고 편리한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로 불편한 점입니다.
설사 이익에 관계되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설치한 부를 실로 대번에 폐지하기는 곤란한 것인데, 더구나 다섯 가지의 크게 불편한 점이 있는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정주의 백성이나 영변의 백성은 똑같이 우리 폐하께서 인애(仁愛)하는 마음으로 돌보는 어린 아이와 같으니 은택을 편향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명(命)이 어찌 영변에 대해서는 후하고 정주에 대해서는 박하여 정주에 이미 설치한 것을 영변으로 옮기려 하십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이 때문에 황급해져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이렇게 감히 천 리의 먼 길을 걸어와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일제히 한 목소리로 슬피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관찰부를 옮겨 설치하도록 한 명을 속히 도로 취소해 주시고 이전대로 본 군에 그대로 둠으로써 이 부르짖는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근심을 면하게 하고 모두 살려주는 혜택을 입도록 하여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이익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관제(官制)는 이미 정리하여 개정하였으니, 그대들이 번거롭게 청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4월 14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국장(國葬)에 대한 각항(各項)의 길일(吉日)은 다시 회의하여 택일(擇日)해서 들이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16일에 친히 진향(進香)하고 제문도 친히 짓겠다."
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금정(金井)을 여는 일이 내일 있습니다. 신은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와 함께 규례대로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겠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비서원 경(祕書院卿)도 같이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왕태자궁 시강원 첨사(王太子宮侍講院詹事) 송도순(宋道淳)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이은용(李垠鎔)을 태자궁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1품 서상우(徐相雨)를 사직서 제조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사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4월 15일 양력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김가진(金嘉鎭), 법부 협판(法部協辦) 권재형(權在衡), 외부 협판(外部協辦) 고영희(高永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이채연(李采淵), 회계원 경(會計院卿) 성기운(成岐運), 의정부 총무 국장(議政府總務局長) 이상재(李商在),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윤치호(尹致昊)를 교전소 지사원(校典所知事員)에 임명하였다.
내부 지방 국장(內部地方局長) 김중환(金重煥), 학부 학무 국장(學部學務局長) 한창수(韓昌洙), 탁지부 재무관(度支部財務官) 김규희(金奎熙), 농상공부 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 서정직(徐廷稷), 외부 번역관(外部繙譯官) 박용규(朴鎔奎), 6품 권유섭(權柔燮), 9품 고희경(高羲敬)을 교전소 기사원(校典所記事員)에 임명하였다.

 

4월 16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들이 빈청(賓廳)에 일제히 모여 산릉(山陵)의 각항(各項)에 필요한 길일(吉日)을 여러 일관(日官)을 불러다가 다시 잘 택일(擇日)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입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별단(別單)
홍릉(洪陵)은, 주맥(主脈)이 왼쪽으로 돌아가는 형국인데, 지맥이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 내려와 축간방(丑艮方)에서 한 번 뒤틀고, 감계방(坎癸方)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다 해방(亥方)에서 봉우리가 솟아오르고, 갑묘방(甲卯方)에서 절벽을 이루어 방향을 바꾸어서 간방(艮方)에서 돌출하고 인방(寅方)으로 입수(入首)한 간방을 등지고 곤방(坤方)을 향하여 들어앉았다.
대행 왕후(大行王后)는 신해년(1791)에 태어났으므로 화일(火日)을 꺼린다. 공사는 정유년(1897) 1월 25일 묘시(卯時)에 시작하고, 풀을 베고 흙을 파는 것은 3월 4일 미시(未時)에 먼저 남방(南方)에서 시작하되, 후토신(后土神)에 대한 제사는 같은 날 새벽에 먼저 행한다. 옹가(甕家)를 짓는 것은 같은 달 11일 묘시에 하고, 금정(金井)은 4월 20일 미시에 열며, 혈(穴)의 깊이는 4척(尺) 5촌(寸)으로 하되,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한다. 외재궁(外梓宮)을 배진(陪進)하는 것은 같은 달 29일 손시(巽時)에 하며, 외재궁을 내리는 것은 5월 3일 인시(寅時)에 한다. 찬궁(欑宮)을 여는 것은 같은 달 5일 진시(辰時)에 먼저 북방에서부터 열되, 주당(周堂)은 없다. 발인(發引)은 같은 달 6일 축시(丑時)에 하고, 상여를 모시고 갈 때 꺼리는 방위는 병방(丙方)이다. 빈소(殯所)를 차리는 것은 대여(大轝)가 능소(陵所)에 도착한 후 적당한 때에 하고, 상여를 놓을 때 꺼리는 방위는 간방과 곤방이다. 능소에서 찬궁을 여는 것은 같은 달 같은 날 유시(酉時)에 먼저 북방에서부터 열고, 출발은 찬궁을 연 후에 적당한 때에 한다. 재궁을 현궁(玄宮)에 하관하는 것은 같은 달 7일 인시에 한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재차 상소하여 체차(遞差)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4월 17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지내고 나서 진향(進香)하였다.

 

4월 18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지내고 이어 왕태자(王太子)가 진향(進香)하였다.

 

4월 19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병시(金炳始)가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체직(遞職)해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전후로 진심을 다하여 유시한 것에서 마음을 거의 다 털어놓았는데 경의 고집은 갈수록 더욱 완강해지니, 어찌하여 사정(私情)과 의지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 이 정도까지 되었단 말인가? 임금을 높이고 백성들을 비호하며 내수(內修)와 외교(外交)가 현 시기에 중요한 급선무라는 것은 진실로 경의 말과 같은데 내가 밤낮으로 근심하는 것도 백성들과 나라에 대한 문제뿐이다. 나의 걱정을 근심스럽게 여기고 걱정하는 사람이 경이 아니고 누구이기에 곧 나를 버리고 떠나가려고 하는가? 그렇지만 경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절히 청하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하였는데 계속해서 버티고 있는 것은 도리어 예로 공경하는 의리가 아니므로 의정(議政)의 직임은 지금 그대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겠다. 경은 벼슬자리에 있든 떠나든 차이를 두지 말고 날마다 좋은 의견을 올려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1품 김병시(金炳始)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이어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지금 이 정유년(1897)이 되었으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음력 3월 20일에 경릉(景陵)에 김 특진관(金特進官 : 김병시(金炳始))을 보내서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음력 3월 23일은 바로 우리 철인 왕후(哲仁王后)의 60회 탄신일(誕辰日)이다. 옛날을 회상하고 지금을 슬퍼하는 마음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예릉(睿陵)에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보내서 봉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4월 20일 양력

학부(學部)에서 관립 한성 사범 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의 속성과(速成科) 졸업 시험을 행하였다. 우등(優等) 15인(人), 급제(及第) 29인을 뽑았다.

 

4월 21일 양력

정2품 김병익(金炳翊)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후릉(厚陵)의 나무뿌리가 베어졌다는 소문이 자자하기에, 자세히 사실을 조사하여 치보(馳報)하라는 뜻으로 본부(本府)에다 신칙하였습니다. 방금 본릉(本陵)의 참봉(參奉)인 구영회(具英會)의 보고를 받아 보니, ‘전 영(前令) 설효석(薛孝錫)과 전 참봉(前參奉) 김종진(金鍾振)이 도벌(盜伐)해서 내다 팔았으며 서원(書員) 전천석(田千石)도 도벌해서 내다 팔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더없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대하여야 할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벌해서 팔아먹는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놀랍고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해당 재관(齋官)과 서원(書員)을 법부(法部)로 하여금 나핵(拿覈)하고 엄히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유학(幼學) 김운락(金雲洛)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근래 들어 사특한 말과 난폭한 행동이 성상의 교화 속에서 자라나서 이른바 사물을 열어 주고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것은 한두 가지 거조(擧措)에 불과한 반면에 예방(禮防)이 크게 무너지게 하였고 전형(典刑)도 다 없어지게 하였습니다. 왕후(王后)를 죽이는 흉악한 변고가 생긴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흉한 음모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그 무리들을 사주하고 목숨을 보존하려고 도망친 자는 박영효(朴泳孝)이고, 자신이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왕후를 죽이는 흉악한 음모를 은밀히 도모하기를 조조(曹操)나 동탁(董卓)보다 뛰어나게 한 자는 김홍집(金弘集)이며, 사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흉기를 함부로 사용한 자는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이고, 앞장서서 군사를 거느리고 외부(外部)에서 도운 자는 일본 사람 미우라〔三浦〕이며, 창황하게 해(害)를 피할 때 어로(御路)를 막고서 적의 칼을 눈짓으로 맞아들인 자는 정병하(鄭秉夏)이고, 총리(總理)로 하여금 재결(裁決)하게 하라는 거짓 조서(詔書)와 왕후를 폐위하라는 거짓 조서를 내리도록 한 자는 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김윤식(金允植)·권형진(權瀅鎭)·정병하(鄭秉夏)·이범래(李範來)·전준기(全晙基)·장박(張博) 등이며, 각관(各館)에 통지하여 왕후를 폐위한다고 선포한 자는 김윤식(金允植)이고, 왕후를 폐위하고 고묘문(告廟文)을 지어 올린 자는 이승오(李承五)이며, 박선(朴銑)을 단장시켜 내보내어 역적의 우두머리를 부르게 하고 김홍집(金弘集) 등을 엄호한 자는 옥관(獄官) 허진(許璡)과 조중응(趙重應)이고, 임최수(林㝡洙)와 이도철(李道徹)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던 날에 폭로하고 선동하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해치기를 도모한 자는 이진호(李軫鎬)입니다.
전후에 걸쳐 역적의 무리들이 한결같이 을미년(1895) 12월 이후부터 혹은 죽음을 당했으나 죄명이 확정되지 않았거나, 혹은 목숨을 보전하여 도망갔으나 죄안이 완성되지 않았거나, 혹은 집에 있는데도 죄에 대한 처벌이 아직 가해지지 않기도 하였으니, 만국에 보인 수치는 더욱 심해지고 신인(神人)의 분노도 갈수록 성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옳게 적용하지 못한 데서 온 큰 잘못입니다.
속히 정부(政府)로 하여금 전후에 걸쳐 왕비(王妃)를 죽인 음모에 가담한 사람에 대해서는 명분을 바로잡아 죄를 줄 것이며 여러 역적들이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간 사람에 대해서는 일일이 잡아와서 남김없이 저자에서 죽임으로써 왕후의 원수를 갚고 조정의 전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충성스러운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형(五刑)과 오례(五禮)에 대해서는 원래 조정의 법전이 있는 만큼 번거롭게 청할 필요가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4월 22일 양력

일본 공사(日本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를 접견(接見)하였다. 국서(國書)와 훈장(勳章)을 바쳤기 때문이다.          【대훈위(大勳位)는 국화대수장(菊花大綬章)이다.】


【원본】 39책 35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24면
【분류】외교-일본(日本) / 왕실-국왕(國王)

 

칙령(勅令) 제20호, 〈국내 전보 규정 중 개정에 관한 안건〔國內電報規則中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4월 23일 양력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과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상소를 올려, ‘역적을 징토하고 복수하소서.’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이 한 말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엊그제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각각 그 뜻을 잘 알고 물러가라."
하였다.

 

4월 24일 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예릉(睿陵)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해에 선희궁(宣禧宮)을 육상궁(毓祥宮)에 이봉(移奉)한 것은 대체로 임시 대책에서 나온 것인데 그 사체(事體)로 볼 때 참으로 온당치 못하다. 사우(祠宇)를 옮겨 세우는 등의 일은 궁내부(宮內府)에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박제억(朴齊億)을 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이명상(李明翔)을 철도(鐵島)에 유십년(流十年)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법부(法部)의 관리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아먹은 데 대하여 종신 징역에 처하자고 상주(上奏)하니, 특교(特敎)로 두 등급을 감(減)하여 유배로 바꾸라고 하였다.

 

4월 25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행록(行錄)을 그대로 지문(誌文)으로 만든 것은, 명릉(明陵)은 신사년(1881), 홍릉(弘陵)은 정축년(1877)의 전례가 있었다. 지금 행록을 내려 보내 지문에 써서 넣으려고 하는데, 동궁(東宮)이 매우 슬퍼한다. 또 다 기록하지 못한 자료들을 모아 실어서 더욱 자세하게 한다면, 백 대를 지낸 후에도 반드시 그 뜻을 슬퍼하고 그 효성을 탄복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지문에 새기고 나서 또 제술관(製述官)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자세히 기재하여 아래에 덧붙여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6일 양력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유기환(兪箕煥)을 법부 형사 국장(法部刑事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민영준(閔泳駿)을 교전소 부총재대원(校典所副總裁大員)에 임명하였다.

 

4월 27일 양력

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온 대사(大使) 이하영(李夏榮)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4월 28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예릉(睿陵)과 그 왕후릉(王后陵)에 설치한 석물(石物)이 결함이 있는 곳을 수개(修改)하는 일을 장례원에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수개할 길일(吉日)을 4월 9일로 정하여 행하려는데 정부(政府) 이하가 규례대로 나아가서 감동(監董)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정 특진관(鄭特進官 : 정범조(鄭範朝))이 나아가라고 명하였다.

 

4월 29일 양력

구준서(具駿書)를 백령도(白翎島)에 종신토록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군부(軍部)에서, ‘술에 취해 법을 어지럽히고는 장관(將官)의 통제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욕질을 한 데 대하여 죄가 군율(軍律)에 관계되는 만큼 포형(砲刑)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특교(特敎)로 한 등급을 감(減)하라고 하였다.

 

4월 30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선희궁(宣禧宮)을 옮겨 세울 때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전적으로 관할하되, 검사 과장(檢査課長) 이인우(李寅祐)로 하여금 감동(監董)하게 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에게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겸임(兼任)하라고 명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권재형(權在衡)을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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