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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2월

12월 1일 신사소대하였다. 오재소(吳載紹)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홍석주(洪奭周)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신대곤(申大坤)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일 임오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삼가 통신 정사 김이교(金履喬)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탁지(度支)는 국가 화폐의 권한을 주관하고, 사신의 일을 개정하는 임무까지 겸하고 있는데, 정지(情志)가 미덥지 못하여 논의가 저지되었다.’라고 하였고, 또 ‘사색(辭色) 사이에 혹 서로의 예우가 결여되어, 거의 사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인정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이교는 바로 신의 지우(知友)인데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의 허물이 너무 심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히 파출(罷黜)하는 것을 어찌 날짜를..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1월

11월 1일 임자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자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하교하기를,"신방(新榜)의 생원 이맹현(李孟玄)은 나이 85세가 넘었으니, 위장(衛將)을 구전(口傳)으로 단부(單付)하라."하였다. 11월 2일 계축주강하였다. 11월 3일 갑인석강하였다. 하교하기를,"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기강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땅을 쓸 듯이 없어졌으니 논할 게 뭐가 있겠는가? 오늘 명경과(明經科)의 문무 시관(文武試官)이 모두 계속 소명(召命)을 어겼다. 비록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밤중까지 수응(酬應)하느라 아직껏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시관은 편안히 집에 있으면서 오만한 자와 같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험 때문에 밤새도록 노고해서 그렇단 말인가? 예로 부린다는 것은..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0월

10월 1일 임오김이도(金履度)를 의정부 좌참찬으로 삼았다. 10월 4일 을유식년 문무과 초시를 베풀었다. 10월 5일 병술교리 홍명주(洪命周)가 상소하여 시장(試場)이 혼잡한 폐단을 논하니, 비답하기를,"과거의 폐단은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다. 이는 크게 기강과 관계되므로, 사정(私情)을 써 불공정한 짓을 한 부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지럽고 혼잡한 것은 사자(士子)들이 정숙하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반드시 문금(門禁)이 해이되어서 그런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하였다. 10월 7일 무자윤익렬(尹益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8일 기축천둥과 번개가 쳤다. 하교하기를,"번개와 천둥이 순음(純陰)이 폐장(閉藏)하는 달에 심하게 쳤으니, 아! 하늘이 왜 이처럼 간곡하게 ..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9월

9월 1일 계축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다. 9월 2일 갑인조득영(趙得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회연(金會淵)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9월 3일 을묘효자로 순창(淳昌)의 고(故) 사인(士人) 김영만(金永萬), 장기(長鬐)의 고 사인 허기(許琦)에게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하고, 허기의 두 자부(子婦) 최씨(崔氏)와 최씨(崔氏)에게는 효행으로 급복(給復)하였다. 효자인 포천(抱川)의 고 첨지(僉知) 조수관(趙守寬)에게는 증직(贈職)하였는데, 예조에서 유생의 건의로 인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5일 정사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이번의 행행 때에 여러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신 것은 잘 거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의 전교 가운데 비록 횃불을 세우지 말라는 명이 계셨으..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8월

8월 5일 정해윤대(輪對)하였다. 조윤대(曹允大)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의주부(義州府) 위유 어사(慰諭御史) 조종영(趙鐘永)이 본부 백성들이 입은 재해의 상황에 대해 치계하니, 하교하기를,"지난번 기백(箕伯)의 장계를 보고 그 광경을 상상한 나머지 지금까지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데, 또 이 장계를 보니 배나 더 불쌍하여 깜짝 놀랐다. 제반 사세가 이와 같으니, 병진년134) 때보다 더 구호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상의하라고 분부하라."하였다. 8월 6일 무자임금이 들 가미건비탕(加味健脾湯)을 오늘부터 한 첩씩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서부(西部)의 유학(幼學) 이도빈(李度彬)이 올린 글에 ‘저희 아버지 이충(李沖)은 정후겸(鄭厚謙)의 처남으로서 병신년13..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7월

7월 1일 계축하교하기를,"오랫동안 성묘[省謁]하지 못해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제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에 힘입어 농사가 다행히 흉작을 면하였으므로, 나의 정을 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이번에는 8월 안에 〈성묘할〉 것이다. 그런데 초하루 이후부터 열흘 전까지는 이미 재계(齋戒)할 날이 적으니, 건릉(健陵)·현륭원(顯隆園)의 거둥은 5일로 가려서 들이라."하였다. 대호군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여 서능보(徐能輔)가 상소한 말을 변명하니, 비답하기를,"경은 중신(重臣)인데 그가 한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기에 스스로 체모를 손상한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벌을 준 것은 또한 경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경의 본심을 알아서 그런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7월 2일 갑인인..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6월

6월 1일 갑신평안 감사 이만수(李晩秀)를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경의 재망(才望)과 성적(聲績)을 볼 때 격려할 필요가 없으나, 기영(箕營)103) 은 본래 방어의 중요한 지대이므로 다른 도에 비하여 더욱 다르다. 내려간 후에 성심으로 선양하여 기어코 피폐를 소생시키도록 하라."하였다. 김희순(金羲淳)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6월 2일 을유박종래(朴宗來)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4일 정해이면긍(李勉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경(柳畊)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면응(李冕膺)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6월 5일 무자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일전에 승선(承宣) 및 원리(院吏)에 대한 처분은 과분한 듯 싶습니다. 옛날 숙묘조(肅廟朝) 때에 한 헌리(憲吏)를 치죄하고 나서 하..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5월

5월 1일 갑인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부주(附奏)하여 말하기를,"대소 신료가 잘못을 부지런히 지적해 주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좋은 일이며, 관료들끼리 서로 규계하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규례입니다. 신이 비록 우매하다 하더라도 어찌 옥당의 상소가 규계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신이 불초하여 있어서는 안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신의 마음이 동료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해 먼저 하찮은 일에서 의심과 노여움이 일어나 거의 남김없이 종이 한 장에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간여하지 않은 의금부 당상으로 하여금 신 대신 벌을 받게 하였고, 의정부에 전에 없던 치욕이 신으로부터 시작되게 하였습니다. 대개 이 일은 지극히 사소하기 때문..

카테고리 없음 2025.06.18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4월

4월 1일 갑신태묘(太廟)·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핀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4월 2일 을유태묘에 여름 제사를 지냈다. 소대하여 《맹자(孟子)》 호용장(好勇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맹자가 제 선왕(齊宣王)에게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용맹을 좋아하시니, 또한 한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오직 왕께서 용맹을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제 선왕의 용맹은 이미 혈기(血氣)에서 나온 소용(小勇)이어서 큰 의리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니, 맹자의 말을 듣고서 대지(大旨)를 이해하여 하나의 ‘노(怒)’ 자가 천하의 요도(要道)가 됨을 알았겠는가?"하니, 시독관 정원용(鄭元容)이 말하기를,"제 선왕은 학문의 바..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3월

3월 1일 을묘일식(日食)이 있었다. 【사시(巳時) 초부터 사시 정각까지 먹혔는데, 정남(正南)에서 심하게 먹혔다가 동남부터 다시 둥글어졌다.】【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53면【분류】과학(科學) 김이도(金履度)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후상(任厚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4일 무오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과 선전관(宣傳官)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3월 5일 기미반궁(泮宮)069) 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실시하였다. 3월 7일 신유대사헌 김이도(金履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근래 여항(閭巷)에 전파된 말을 듣건대, 비록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 무예청(武藝廳)의 군병(軍兵)을 뽑아들이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어떤 곳..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2월

2월 1일 을유전 황해 감사 이희갑(李羲甲)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곡식을 옮기는 일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하니, 이희갑이 말하기를,"호서(湖西)019) 일로(一路)가 참혹한 흉년을 입어서 진휼을 앞두고 착수할 길이 없으니, 묘당에서 곡식을 옮기자고 청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본도(本道)는 작년의 농사가 큰 흉작이 되자, 곡식을 사들이는 각처의 상인들이 이미 작년 가을부터 구름과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곡(穀)’이라고 이름 붙은 것은 그 값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무지한 무리들이 단지 목전의 많은 이익만 취할 뿐 후일의 곤란은 생각하지 않은 채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 전화(錢貨)로 바꾸었으므로 한 달 사이에 항아리가 다 비고 말았습니다. 현재 춘분(春分)..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1월

1월 1일 병진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농사를 권장하는 유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농자(農者)는 천하의 근본이다. 내가 듣건대, 왕이 농사를 명포(命布)하면 전사(田舍)001) 와 동교(東郊)002) 에 명하여 구릉(邱陵)·판험(阪險)·원습(原隰)과 그 토지에 오곡 중 어떤 것을 심어야 알맞은가를 잘 살펴 백성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나라에서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이 농사를 믿는 것이 여기에 말미암으니, 어찌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사시(四時)의 차례는 봄이 첫머리이니, 봄에 농사를 밝혀야만 가을의 수확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순탁(循鐸)003) 을 하고 들에서는 쟁기질을 한다. 우리의 전답에 이미 저장이 있으면 농부들의 경사이다. 천 가마 만 가마의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곡식이 다 갖추..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12월

12월 2일 정해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최석(崔昔) 등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일본국(日本國)에는 팔도(八道)가 있는데, 도(道)에는 66주(州)가 있고 주에는 6백 32군(郡)이 있으며, 군(郡) 이외에는 3도(島)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관백(關白)의 명령을 따릅니다. 관백은 무장주(武藏州)에 있고 왜황(倭皇)은 대화주(大和州)에 있습니다. 대저 축인방(丑寅方)에서 시작되어 손사방(巽巳方)에까지 뻗쳤으며, 대마도(對馬島) 남쪽에서 섭진주(攝津州)의 대판성(大坡城)에 이르기까지의 수로(水路)가 모두 합계하면 2천 4백 30리(里)입니다.1. 대마도는 남북이 3백 50리이고, 동서는 7, 80리가 ..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11월

11월 1일 정사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장신(將臣)·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의 별시사(別試射)를 행하였다. 호조 판서와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청(郞廳)을 소견하였다. 11월 2일 무오소대(召對)하였다. 《시전(詩傳)》의 판장(板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이 장(章)은 동렬(同列)들이 서로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깊이 책하고 간절히 경계하는 것이 상장(上章)에 견주어 더욱 더하다. 말장(末章)의 ‘하늘의 노여움을 조심하여 감히 놀거나 장난하는 일이 없으라.[敬天之怒無敢戱豫]’고 한 여덟 글자는 대월(對越)하는 공부에 있어 과연 좋다. 어떻게 하면 대월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여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로 삼을 수 있겠는가?"하니, 시독관(侍讀官) 박효성(朴孝成)이 말하기를,"경외(敬..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10월

10월 1일 무자태묘(太廟)에 나아가 영녕전(永寧殿)에 전배(展拜)하고 생기(牲器)를 살펴본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10월 2일 기축태묘(太廟)의 동향(冬享)을 행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오영(五營)의 장신(將臣)과 별군직(別軍職)의 별시사(別試射)를 행하였다. 10월 3일 경인김희(金羲)를 함경남도 절도사로, 조기(趙岐)를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최조악(崔朝岳)을 공충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4일 신묘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대륜차(大輪次)를 행하여 시취(試取)했는데, 표(表)의 으뜸인 윤경진(尹景鎭)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고, 시(詩)·부(賦)에 선발된 경외(京外)의 유학(幼學) 60인에게는 감시(監試) 이소(二所)의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박종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