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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9월

9월 1일 무오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지난달 15일은 곧 제일실(第一室)의 탄신(誕辰)인데 다례(茶禮)를 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초하루 아침을 당하였고 양성(兩聖)의 유홍(流虹)146) 한 날이 또 이달에 들었으니, 어린 아이처럼 사모하는 정성과 기쁨을 고하는 뜻이 모두 이 예(禮)에 들어 있다. 따라서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라."하였다. 집례(執禮) 서유망(徐有望), 대축(大祝) 김노응(金魯應)·이영로(李永老)·권비응(權丕應), 통례(通禮) 송문술(宋文述)·신의학(愼宜學)에게는 아울러 통정 대부를 가자하였다. 9월 2일 기미원자(元子) 태봉(胎封)의 길지(吉地)를 경기도 영평현(永平縣)으로 정하였..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8월

8월 1일 기축주금(洒禁)을 비로소 시행하였다. 8월 9일 정유【신시(申時)이다.】 원자(元子)가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에서 탄생하였다. 원자궁(元子宮)의 공상(供上)은 경술년129) 의 예(例)에 의거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각신(閣臣)·약원 제조(藥院提調) 및 예당(禮堂)을 소견하였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등이 말하기를,"황천(皇天)·조종(祖宗)의 독우(篤佑)와 음덕(陰德)으로 곤전(坤殿)께서 순산(順産)하시어 원자가 탄강(誕降)하였으니, 이는 실로 억만년토록 끝없이 이어갈 아름다움인 것으로 팔역(八域) 신민(臣民)들이 춤추며 기뻐서 좋아함을 어떻게 형용하여 우러러 아뢸 수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이런 큰 경사(慶事)를 만나 전..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7월

7월 1일 기미밤 4경(更)에 유성(流星)이 하늘 중간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고 빛이 땅에까지 비추었다. 7월 3일 신유평안 감사 서영보(徐榮輔)가, 지난달 23일 폭우(暴雨)가 내려 희천(熙川)·초산(楚山) 두 고을의 민가(民家)가 표퇴(漂頹)된 것이 매우 많아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65명이나 된다고 장계(狀啓)하니, 특별히 돌보아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임술박종경(朴宗京)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집두(李集斗)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5일 계해차대(次對)하였다. 7월 7일 을축소대(召對)하였다. 7월 8일 병인소대하였다. 7월 10일 무진소대하였다. 7월 11일 기사도정(都政)을 행하였다. 【..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6월

6월 1일 경인소대(召對)하였다. 6월 2일 신묘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규벽(圭壁)을 올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장차 다섯 번째에 이르게 되었다. 일전에 내린 비가 아직도 두루 흡족하지 않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히 목마른 듯이 번민하다. 여섯 번째의 기우제는 날짜를 가리지 말고 초3일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침호두(沈虎頭)103) 하고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설행하도록 하라. 청재(淸齋)를 삼가지 않는 것은 제관(祭官)의 책임일 뿐만이 아니라, 하례(下隷)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더욱 척념(惕念)하라는 것으로 제향(祭享)하기 위해 나아가는 근시에게 알리도록 하라."하고, 이어 하교하기를,"삼각산(三角山)의 헌관(獻官)은 우승지를 차임하고 목멱산(木覓山)의 헌관은 좌부승지로, 한강..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5월

5월 1일 경신주강(晝講)하였다. 5월 2일 신유주강하였다. 일찍이 각직(閣職)을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명하고 그의 품질(品秩)에 따라 각함(閣啣)을 겸하도록 허락하며 드러내어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였다.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하였는데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우참찬 오재소(吳載紹), 이조 판서 대제학 남공철(南公轍), 이조 참판 김명순(金明淳), 정랑 김병연(金秉淵)이다.】 4점(點)을 얻은 사람은 홍시제(洪時濟)·서준보(徐俊輔)·홍명주(洪命周)·김기은(金箕殷)·윤일규(尹日逵)·김후(金𨩿)·조종영(趙鍾永)·홍우섭(洪遇燮)·정원용(鄭元容)·정관수(鄭觀綏)·이언순(李彦淳)·조종진(趙琮鎭)·조봉진(曹鳳振)·이지연(李..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4월

4월 1일 경인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태묘(太廟)·영녕전(永寧殿)의 축(祝)에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태묘·영녕전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나서 재숙(齋宿)하였다. 민가(民家) 1백 87호(戶)가 소실(燒失)된 삭녕군(朔寧郡)에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2일 신묘태묘의 하향(夏享)을 거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이번 대향(大享) 때 대축(大祝)이 어휘(御諱)를 읽지 않았다. 선조(先朝) 때부터 또한 정해 놓은 법식이 있는데도 이제 이와 같이 하였으니, 행사(行事)함에 있어 성경(誠敬)에 흠결이 있게 되었다. 때에 임박하여 일일이 하교할 수 없으니, 이 뒤로는 대소 사향(大小祀享)을 막론하고 이런 뜻에 의거 미리 알게 하라."하였..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1809년 3월

3월 1일 신유함흥부 위유사(咸興府慰諭使) 박종훈(朴宗薰)을 소견하였는데,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어제 북백(北伯)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계해년072) 의 실화(失火) 때에 견주어 어떠한가?"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계해년에는 2천 7백 호(戶)였는데, 이번에는 1천 8백 호입니다. 계해년처럼 많지는 않지만, 그 참담하고 딱한 정상은 같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지금의 계책으로는 백성들을 안도시켜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 내려가서 각별히 위유(慰諭)하여 조가(朝家)에서 긍휼(矜恤)히 여기는 생각을 반포토록 하라. 그리고 전접(奠接)시키는 방책에 대해서는 도신(道臣)과 익히 상의하여 복명(復命)할 때 상세히 회주(回奏)토록 하라."하였다. ..

순조실록12권 순조9년 1809년 2월

2월 2일 임진문형(文衡)의 회권(會圈)을 행하였는데,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예조 판서 한만유(韓晩裕), 호조 판서 전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좌참찬 김문순(金文淳), 한성 판윤 한용택(翰用鐸)이다.】 5점(點)을 받은 사람은 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심상규(沈象奎)이고, 4점(點)을 받은 사람은 김조순(金祖淳)·이만수(李晩秀)이다. 2월 2일 임진서영보(徐榮輔)를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으로, 이경운(李庚運)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3일 계사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차자(箚子)를 올려 관서(關西)의 민사(民事)가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정상에 대해 진달하고 나서 전 감사 서영보(徐榮輔)를 유임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이제 경이 진달한 내용이 바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

순조실록12권 순조9년 1809년 1월

1월 1일 신유노인(老人)들에게 특별한 세찬(歲饌)을 반사하고 이어 존문(存問)하라고 명하였는데, 매년 하는 관례이다. 1월 2일 임술송상렴(宋祥濂)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응당 가자(加資)할 노인으로 1백 세가 된 43인에 대해 하비(下批)하였다. 1월 6일 병인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세수(歲首)의 호궤(犒饋)를 행하였다. 윤노동(尹魯東)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1월 7일 정묘태묘(太廟)·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殿拜)하고 환궁하였다. 병조 판서 이시원(李始源)이 방장(放仗)001) 할 것을 품(稟)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병으로 수레를 타고 돌아가서는 졸(卒)하였다. 1월 8일 무진특별히 전 도정(都正) 홍낙윤(洪樂倫)을 동지돈녕부사에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승후(..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12월

12월 1일 임진소대하였다. 예조 판서 이면긍(李勉兢), 참판 윤치성(尹致性)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명년은 곧 우리 자궁께서 관례(冠禮)를 치른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다. 존호(尊號)를 올리고 경사를 치르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데, 자심(慈心)이 매번 겸양(謙讓)을 고집하시니, 그 뜻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서 우선 또 받들어 따랐었다. 정월 22일은 곧 관례를 치른 회갑이 되는 달과 날이 되므로, 바야흐로 궐내에서 소작(小酌)을 베풀어 잔치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선조(先朝) 을묘년135) 의 고사(古事)를 돌이켜 생각하건대, 또한 이미 전례가..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11월

11월 2일 계해소대하였다. 11월 3일 갑자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죄인 이심도(李審度)를 국문(鞫問)한 다음, 친국(親鞫)은 철파하고 추국(推鞫)하도록 명하였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위관(委官)으로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의금 이만수(李晩秀), 동의금 구태현(具泰賢)·이상황(李相璜)·권상신(權常愼)이다.】【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12면【분류】왕실(王室) 11..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10월

10월 1일 계사일식(日食)이 있었다. 【사시(巳時) 초부터 오시(午時) 초까지 12분 17초 동안 일식하였는데, 처음에는 서북쪽에서 이지러져 정북쪽에서 심하게 진행되다가, 동북쪽에서 다시 둥그렇게 되었다.】【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10면【분류】과학(科學) 10월 2일 갑오태묘·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 재숙(齋宿)하였다. 10월 3일 을미태묘의 동향제(冬享祭)를 행하였다. 김회연(金會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5일 정유차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전 대사간 이심도(李審度)가 상소하여 감히 말할 수 없고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색목(色目)에 대해 말하기에 ..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9월

9월 1일 갑자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을 면례(緬禮)하려고 출구(出柩)하는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9월 2일 을축춘당대에 나아가 문신에게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행하였다. 헌부 【지평 이덕승(李德升)이다.】 에서 아뢰기를,"양주 목사(楊州牧使) 송면재(宋冕載)의 처 심씨(沈氏)는 부녀자의 약질(弱質)로 흉한(凶漢)이 돌입한 때를 당하여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날카로운 칼날을 무릅쓰고 범하여 지아비 생명을 구하였으나, 난자(亂刺)당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특별히 정포(旌褒)하는 은전..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8월

8월 1일 갑오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를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지난번에 바친 책자를 지금 바야흐로 고람(考覽)하고 있는데, 그 나머지는 언제쯤 공역을 마칠 것이며, 장차 몇 권이나 되겠는가?"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바야흐로 정서(正書)를 시작하였는데, 권수는 10책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연행(燕行) 때 급포(給包)한다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당초에 정례(定例)는 삼(蔘)으로 포(包)를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은포(銀包)로 대신하고, 더러 잡물(雜物)을 섞어 쓰기 때문에 또한 잡포(雜包)라고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공신(功臣)에게 사패(賜牌)하는 전결(田結..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7월

7월 2일 병인한치응(韓致應)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7월 3일 정묘주강하였다. 7월 4일 무진공충좌도 암행 어사 홍희준(洪羲俊)이 서계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의복(李義福),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환(金鋎),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기헌(金箕憲), 전 괴산 현감(槐山縣監) 박종형(朴宗珩),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희연(李羲淵), 연원 찰방(連原察訪) 이용주(李龍柱) 및 병사 장현택(張鉉宅) 등이 잘 다스리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