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양력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37권】 【음력 정유년(1898) 12월 9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연제(練祭) 때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재 실직이 없다 하더라도 곡(哭)하는 반열에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종관(侍從官) 민정식(閔珽植)이 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식(珽植)은 조칙으로 인하여 민영익(閔泳翊)의 후사가 되었는데, 여양(驪陽)과 여성(麗城) 두 부원군(府院君)의 종손(宗孫)이다.
【원본】 41책 3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음력 정유년(1898) 12월 9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연제(練祭) 때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재 실직이 없다 하더라도 곡(哭)하는 반열에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종관(侍從官) 민정식(閔珽植)이 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식(珽植)은 조칙으로 인하여 민영익(閔泳翊)의 후사가 되었는데, 여양(驪陽)과 여성(麗城) 두 부원군(府院君)의 종손(宗孫)이다.
【원본】 41책 3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연제(練祭) 때 문관(文官)과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재 실직이 없다 하더라도 곡(哭)하는 반열에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종관(侍從官) 민정식(閔珽植)이 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식(珽植)은 조칙으로 인하여 민영익(閔泳翊)의 후사가 되었는데, 여양(驪陽)과 여성(麗城) 두 부원군(府院君)의 종손(宗孫)이다.
정2품 이봉의(李鳳儀), 비서원 승(祕書院丞) 민영돈(閔泳敦)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봉의(鳳儀)는 칙임관(勅任官) 2등에, 영돈(泳敦)은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민영달(閔泳達)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월 2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4품(品) 조병갑(趙秉甲)을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1월 3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올리고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으며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연제(練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중추원 주사(中樞院主事) 백남규(白南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폐하(陛下)는 나라가 밝고 화평할 운수를 지니고 하늘이 내리는 명령을 받들게 되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통을 높이 이었고 모든 백성들의 기대를 굽어 따라서 대황제위(大皇帝位)에 오른 지 오늘까지 석 달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훌륭한 정사를 펴고 인(仁)을 베푸심에 문헌을 상고하여 예의를 의논하는 절차에 있어서는 모두 그 규례를 넓히고 징험을 밝히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큰 이름에 걸맞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하늘 아래에서 춤추며 기뻐하였으니 아! 훌륭합니다.
그러나 큰 전례와 큰 제도에 있어서 아직도 거행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조종(祖宗)을 추숭(追崇)하는 예이고, 하나는 신하에게 작위(爵位)를 반포하는 제도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전례와 이 제도는 예로부터 왕업을 창건하고 왕통을 계승해 온 나라가 모두 중요하게 여기고 급선무로 여겼으니,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선조(宣祖)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은혜로운 시책을 넓혀 나라의 체면을 존중하고 후대에 전해 내려오면서 미담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당당한 제국으로서 광휘가 세상에 미치고 있는데 유독 이것만은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까?
오직 요사이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인봉(因封)을 당하여 폐하는 슬픈 회포가 그지없고 만백성은 허전한 마음이 간절하였으므로, 더없이 중하고 엄한 의장 물건을 갖추고 반드시 정성과 조심성을 다하여 정리를 폈습니다.
상하(上下)가 경황없는 중에 겨우 장례만을 치러 이런 의식과 제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 부알례(祔謁禮)를 이미 거행하였고 연제(練祭)도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폐하가 복잡한 정사에 유의하여 상 주는 규례와 관리 임명 및 파면에 관한 절차 역시 이미 차례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종을 추숭하는 큰 예와 작위를 주는 훌륭한 제도는 어찌하여 유독 뒤로 미루면서 시행하지 않습니까?
경서를 상고해 보면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왕으로 추숭하였다.’라고 하였으며, 한(漢)·당(唐)·송(宋)·명대(明代)에 와서도 모두 선대를 높이는 것을 영예로운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 대수(代數)는 많고 적고, 멀고 가까워 비록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종묘의식에 대해서는 빛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역사 기록에 밝게 쓰여 있어 증거로 삼아 믿을 수 있으며 상고하여 시행할 만합니다.
작위를 봉하는 제도에서 삼대(三代)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漢) 나라 때에 와서도 왕(王)과 후(侯)로 등급을 나누고 성(姓)이 다른 사람은 왕으로 하지 않는 제도를 정하였는데, 공신후(功臣侯)·왕자후(王子侯)·은택후(恩澤侯) 등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당 나라의 신하들 역시 공과 후 등의 작위가 있었는데, 큰 공훈이나 큰 덕에 대해서는 성이 다르더라도 왕으로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송 나라 조정에서는 다섯 개 등급으로 나눈 작위를 갖추고 중앙 관리로써 금비(金緋) 이상은 개국(開國)·자작(子爵)·남작(男爵)·공작(公爵)·후작(侯爵)이라는 칭호가 있었으며, 때로는 성(姓)이 다른 왕에 관한 작위도 있었습니다. 명나라에 와서 성이 다른 사람을 왕으로 한 것은 단지 태조(太祖) 때 공신 몇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공작·후작·백작(伯爵)이라는 세 등급으로 나누어주었으며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봉한 것은 없었습니다.
대체로 보면 한 나라의 후작은 토지를 나누어 준 것이 있었으나, 명나라에서는 대대로 내려가며 녹(祿)을 주었으며 모두 철권(鐵券)을 주어 대대로 물려주는 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당 나라와 송 나라 제도는 비록 공훈에 의해서 제정되었지만, 중엽 이후로 높은 반열과 높은 품계는 으레 봉하여 주면서도 녹은 주지 않고 후손들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 법이 가볍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대략적인 것인데, 성(姓)이 같은 왕이 없는 때가 없었으므로 갖추어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즉 조종을 추승하는 예를 거행한 후에야 왕의 업적을 밝히고 효성을 다할 수 있으며, 작위를 봉하는 제도를 시행한 후에야 등급의 위엄을 명백히 하고 근본 원칙을 존중할 수 있게 되니, 전 세대에 부끄러운 것이 없고 여러 나라들에 광휘를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그것을 거행하는 절차가 지극히 중대하니, 지난 시기의 문건을 널리 상고하고 여론을 널리 들어봐서 성상의 총명함에 도움을 주고 성상께서 보시도록 갖추어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칭호를 높이는 데 있어서 몇 실(室)에 그쳐야 하며, 누가 왕으로 될 수 있고 누가 공작, 후작으로 될 수 있다든가 하는 데 대해서는 신하가 감히 외람되게 먼저 청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陛下)는 타고난 총명으로 고금(古今)을 환히 살피고 있으니 이러한 대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극히 정밀하고 결함이 없는 하나의 척도가 있으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큰 조서(詔書)를 반포하고 훌륭한 의식을 속히 거행함으로써 온 나라의 기대에 맞게 할 것이며 한 시대의 의례 제도를 정하소서.
오늘 이 큰 전례와 큰 제도는 황제 조정의 체통에 있어서 제일 급하다는 것을 신하들치고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처지가 미천하면 혹 엄중한 일로 여겨 아뢰지 않으며, 처지가 귀하거나 가까운 터이면 혹 혐의를 피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일을 지체시키고 의례를 갖추지 못하게 함으로써 예법을 아는 사람들의 비평을 초래하고 이웃 나라 사람들의 조소를 야기하고 있으니, 신은 혼자서 개탄하게 됩니다.
또 생각하건대 신의 관직은 사례소(史禮所)의 일원이므로 비록 현재 직무는 없다 하더라도 명예와 의리를 생각할 때, 응당 나라의 의식 절차에 대하여 갖추어 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한 가지 견해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유의하여 밝게 살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의를 논하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 아니다."
하였다.
5품 최웅(崔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즘 황천이 가만히 도와주고 조종이 보살펴서 우리 황제 폐하(皇帝陛下)가 천명(天命)을 받들고 존호(尊號)를 받게 된 것은 실로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훌륭한 일이며, 억만 년 무궁할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은 비록 병들고 파리한 사람일지라도 춤추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며, 잠시나마 죽지 않고 살아서 덕화가 성대해지는 것을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생각을 가다듬고 선정(善政)을 베풀 것을 도모하시어 공로는 열조(烈祖)를 빛내고 업적이 후세에 미치도록 하심으로써 나라를 세우는 기초를 쌓도록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형편에서 나라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가운데서 시급하여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역적을 쳐서 원수를 갚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군사 지휘 체계를 정하는 것이며, 넷째로는 재물을 절약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일찍이 갑신년(1884) 변고로 명성 황후(明成皇后)와 각 전(殿)과 궁(宮)이 화란을 피해갈 때, 신은 가미메고 가면서 직접 그 황급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조상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옥체를 겨우 보존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되지 못하여 을미년(1895)의 변란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는 큰 변고입니다. 신이 시종일관 왕후를 보호하지 못하여 이런 참화를 당하게 하였으니, 신과 같이 불충한 자는 응당 중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폐하의 더없이 가까운 정의와 황태자(皇太子)의 지극한 효성으로써, 어찌 하루인들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덧없이 3년이 지나가고 인봉(因封)을 방금 지냈는데,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거사는 아직 이렇게 지체되고 있어 신은 은근히 분개하게 됩니다.
현재 역적들은 원수의 나라에 도망쳐 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잔당들은 남모르게 결탁하고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을미년 8월의 변고보다도 더 심한 것이 있을까봐 염려됩니다.
폐하가 마땅히 안으로 반성하고 스스로 힘쓰시고 백성들을 교육하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원수를 갚자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둔다면, 이와 같은 나라와 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역적을 치는 데 복종하지 않겠으며 어떤 원수인들 처벌하지 못하겠습니까? 도망간 역적을 교환해 오고 잔당을 모조리 다스리며 원수의 나라에 죄를 묻는 것을 차례로 집행하게 될 것입니다. 역적을 치고 복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훌륭한 임금과 명철한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았으며 사람이 한미하다고 해서 그 원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옛날 은(殷) 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을 공사장에서 맞이하여 재상으로 등용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업적을 이룩하였고, 진(秦) 나라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를 소 먹이는 곳에서 데려다 재상으로 세움으로써 마침내 성대한 패업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임금이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어찌 귀하고 천한 것에 구애받겠습니까? 이후로,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밑으로는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재목을 얻어 임금의 덕을 백성들에게 펴게 하였고 백성들은 이 때문에 모두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에는 나라가 인재를 쓰는 데서 전적으로 지체와 문벌을 제일의 공의(共議)로 삼습니까? 내적으로는 의정부(議政府)에서부터 외적으로는 수령에 이르기까지 재주와 덕망이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고 단지 문벌이 높고 낮은 것만 비교합니다. 그들의 추천이 인척 관계나 족속 간이 아니면, 또한 겉치장만 좋게 꾸미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을 등용하는 데 불과하니, 이것이 과연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입니까?
또 지금 온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마음이 황황하고 비적(匪賊) 무리의 징조가 간간이 있는데, 만약 청백하고 노련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사람을 수령으로 하지 않는다면, 흉년을 만난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없고 태평한 때에는 백성과 나라의 안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벼슬길의 세력과 잇속만 탐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봐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있고 소란스러울 때에는 몸을 빼서 자신을 보존하며 군부(君父)로 하여금 위험에 빠지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 속에 허덕이게 합니다.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 이래로 역적의 우두머리 박영효(朴泳孝)와 유길준(兪吉濬)은 제 마음대로 자기 심복을 차임(差任)하여, 아직도 중앙과 지방의 신하 반열에 버젓이 있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부끄러워도 하지 않고 속으로 흉한 생각을 감추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잘 살피고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위로는 의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지체가 천하고 사람이 한미하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재주와 덕망을 겸비하고 능력과 충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택하여 곁에 두소서. 이들로 하여금 연이어 천거하게 하여 등용한다면, 상하 내외에서 반드시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재를 선택하여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사란 나라의 울타리이고 임금의 손톱과 어금니입니다. 집에 울타리가 없으면 방어할 계책이 없으며, 사람에게 손톱과 어금니가 없으면 위엄을 보일 권력이 없습니다. 옛날에 군사를 잘 양성하는 사람은 비록 100만의 많은 군사가 있어도 몸으로 팔을 움직이고 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같이하여, 전쟁에서 적과 상대하여 죽을 고비에 나아가는 것도 한결같이 팔과 손톱이 마음에 복종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휘 체계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오를 편성하여 대관(隊官)을 정하고, 대장(大將)에게 총괄하여 거느리게 하되 차례를 나누어 영솔하게 하는 것은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대오를 편성한 명칭은 있지만 병정(兵丁)들이 제 마음대로 대오를 옮기고 있는 것도 심상한 일로 보고 있으며, 그 우두머리로 된 사람들 역시 지휘 체계와 기율(紀律)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갑신년에 폐하가 도성(都城)을 떠나 변란을 피하여 갈 때 한 명의 호위 군사도 없었으며, 갑오년에 일본 군사들이 대궐을 침범하였을 때에도 한 명의 방어하는 군사가 없었으며, 을미년에 대궐에 침범한 역적의 군사들의 화가 황후(皇后)에게 미쳤으나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용단을 내리고 지휘 체계를 엄하게 정하여 장신(將臣) 이하 대장으로부터 편성한 대오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한 제도를 따르게 하소서. 만일 군사 규율을 어길 것 같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마시고 위력으로 제압하고 은혜로 양성하소서. 이렇게 하여 적을 공격하면 승리하고, 이렇게 하여 업신여김을 막는다면 견고해질 것입니다. 군사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재물을 절약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은 임금의 큰 정사입니다. 옛날의 제왕을 하나하나 들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를 놓고 보더라도 나라가 세워진 이래 백성에게서 거두는 세는 단지 해마다 바치는 전세(田稅)에 불과하였으나 나라의 재물은 항상 풍족하였습니다. 근래에 와서 몇 년 사이에 역토(驛土)와 궁장토(宮庄土)를 장부에 올린 것과 무명 잡세(無名雜稅)가 백성에게 폐해를 주는 것은 전보다 몇 갑절 되는데 재물이 늘 부족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절약해서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백성의 고통을 잘 보살펴 모든 각 형태의 잡세에서 백성에게 해를 주는 것이 심한 것은 일체 혁파함으로써 농민과 상인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없도록 한다면, 근본은 튼튼해질 것이고 나라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부세(賦稅)를 거두는 데서 적게 거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광산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산수(山水)의 빈 땅을 개발하는 것이므로 백성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 없으며, 나라의 재정에 도움주는 것은 큽니다. 그러나 광물을 캐내는 자에게 맡겨놓으면 전적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고 공납(公納)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름은 비록 광물을 캔다고 하지만 나라 비용에는 조금도 보탬을 주지 못하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전 관찰사(觀察使) 이용익(李容翊)이 광산을 감독할 때는 조금이나마 나라의 비용에 도움을 주었으니,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변변치 못한 말을 감히 진술하여 함부로 주제넘은 행동을 하였으니 참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미천한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번 살펴주기 바랍니다. 삼가 폐하는 재택(裁擇)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중에서 채택할 만한 것이 없지 않다."
하였다.
1월 4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산릉(山陵)에 표석(表石)을 세운 후 대신(大臣)이 이어 능상(陵上)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침전(寢殿)도 똑같이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연제(練祭) 때 향관(享官) 이하와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 이하, 연주도감(練主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각 차비(差備)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연주 서사관(練主書寫官) 김석진(金奭鎭), 욕주 대축(浴主大祝) 김유제(金有濟), 향관(享官) 이은용(李垠鎔), 종척 집사(宗戚執事) 김용규(金容圭)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월 5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현륭원(顯隆園)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찬정(贊政), 참찬(參贊),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칙임관(勅任官)인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각신(原任閣臣),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황태자시강원(皇太子侍講院)과 황태자익위사(皇太子翊衛司)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연제(練祭) 후 위로하였기 때문이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경효전(景孝殿)의 연제(練祭)가 어느덧 지나갔으니,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聖上)의 슬픈 마음은 더욱 다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월은 흘러 연제(練祭)가 이미 지나갔으나 옛일을 생각하면 어제인 듯 역력하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산릉(山陵)에 나아가 표석(表石) 세운 것을 돌아보고 뒤이어 산릉 위에 올라가 봉심(奉審)하니 안녕하였으며, 침전(寢殿)을 봉심하였으나 안녕하였습니다. 그런데 농대석(籠臺石)과 비석을 세운 곳에 구멍이 좀 좁은데 비석의 크기와 비교해볼 때 두 푼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뚫도록 하였는데, 쪼았을 때 도끼와 못으로 심하게 쪼아 조금 터졌다는 의견이 있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 흠집은 실오리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능위의 병풍석과 경(庚)·신(申)·임(壬) 세 방향의 네 개 돌은 품질이 견고하지 못하여 자못 비늘이 일어난 흠집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심하지는 않지만 신이 장인(匠人)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고 사전에 신칙하지 못하여 이처럼 조심하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매우 황송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차고 돌이 얼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명년 봄을 기다려 본다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동(監董)을 잘하지 못한 산릉의 당상과 낭청에게 경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원역(員役)과 패장(牌將) 역시 엄하게 과치(科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다.
1월 6일 양력
포달(布達) 제37호, 〈궁내부 관제 중 시종원 시어 중에서 판임 두 자리를 주임으로 승작하는 안건〔宮內府官制中侍從院侍御判任二窠陞作奏任件〕〉을 반포하였다.
전 시독(前侍讀) 김석룡(金錫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하건대, 이륜(彝倫)이란 것은 만고로부터 우주를 버티는 큰 원칙입니다. 그것이 혹 하루라도 없으면 천지가 어두워지고 사람의 도리가 없어져 서로 이끌고 짐승이 되어 버립니다.
아! 을미년(1895) 8월의 사변은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가 어두워지고 사람의 도리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효경(梟獍)같은 무리들이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하여 우리 동방의 몇 백 년 내려오는 예의(禮義)가 장차 천하 만세(天下萬世)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나라의 운명이 곤란하고 조정에는 바른 논의가 없어 저 역당(逆黨)들로 하여금 아직도 왕도(王都)에서 살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혈기가 있는 사람치고 칼을 어루만지며 주시하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충심(衷心)에 분통을 터트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엄한 명령이 거듭 내려 죄인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를 법률에 비추어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대략 징토(懲討)하였으니 이것은 신인이 분을 조금 풀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제거하는 것은 가라지풀을 제거하는 것과 같아서 종자를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아! 저 두 역적은 이미 그 죄를 명백히 하였건만 황후(皇后)를 폐하자고 내각(內閣)에서 논할 때 서명한 각 부(部)의 대신(大臣)은 유독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 황후를 폐한 것은 큰 변고입니다. 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마땅히 그 몸이 백 조각 되더라도 구원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 무리들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는 자손들로써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라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자신이 대신(大臣)으로 있는 만큼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경중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비록 정쟁(廷爭)하다가 사직(死職)하더라도 이것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편안히 보기만 하면서 일찍부터 유의하지 않고 있다가 혹은 거짓 칙서(勅書)를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였고, 혹은 종묘(宗廟)에 고하는 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혹은 내각 회의에서 서명하고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 역적에게 아첨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면서 이렇게 천고에 없는 변고를 조작하였습니다.
고요한 밤에 스스로 생각해볼 때 이마에 땀이 흐릅니다. 죄명은 비록 묻지 않더라도 죄상을 논한다면 차이가 없습니다. 법에 명백히 있는 만큼 만 번 죽이더라도 죄에 비해 가볍습니다. 이것은 신 한 사람의 견해인 것이 아니라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폐하께서 지극히 인자한 마음과 큰 덕으로써 설사 이 무리들을 용서하여 목숨을 보존하도록 하려고 해도 나쁜 것과 좋은 것이 한 데 섞여 냄새를 풍김이 더욱더 심해질 것이니 그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끓어오름이 어떠하며, 또한 의리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악을 징벌하고 선에 인도하려는 것은 왕정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 소란스러운 때를 만나 다시 임시로 회피하는 정사를 한다면 죄인들이 모두 법망을 빠져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거의 무너지게 된 나라의 위력을 떨쳐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이 한 번 무너지면 가시덤불이 사방에 막히게 되어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말이 이에까지 미치게 되니 날씨가 차지 않아도 몸이 떨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빨리 공의에 따라 엄명을 내리고 변란 초기에 내각 회의에서 서명한 대신을 하나하나 조사하여 유사(攸司)에 넘겨서 되도록 엄하게 처리함으로써 왕법(王法)을 바로잡고 떳떳한 윤리를 밝힐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전후에 걸쳐 역적을 치자고 한 글에 대한 비답을 보지 못했는가?"
하였다.
1월 7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올리고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을 임시 서리하고 있는 외무 대신(外務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고등 재판소에서 심리한 죄인 이세직(李世稙)은 한선회(韓善會) 등의 옥사에 도망친 사람을 잡는다는 핑계를 대고 공적인 돈 2,000원(元)을 거져 가졌으며, 임금 앞에 들어가 대답할 때는 경무사(警務使)의 책임을 홍종우(洪鍾宇)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장차 을미년(1895) 8월보다 더 심한 변고가 닥쳐올 것이라는 위험한 말과 망녕된 일로 지존(至尊)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 죄상은 명백합니다. 계책을 써서 관리를 속이고 사사로이 재물을 가진 법률과 임금에게 불온한 말을 한 법률에 비추어 되도록 한 가지로 단안을 내려 종신토록 유형에 처할 것을 주청 올립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8일 양력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병이 매우 중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의원 소경(太醫院少卿) 조정구(趙鼎九)는 어의(御醫)를 데리고 병이 회복될 때까지 떠나지 말고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하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38호, 〈궁내부 관제 중 장례원에 주임관 소경 1인을 증치하는 안건〔宮內府官制中掌禮院少卿一人奏任增置件〕〉을 반포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상의사장(尙衣司長) 이재곤(李載崑)을 종정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역대의 전례(典禮)를 삼가 상고해 보니, 시일이 지나서 장사를 지냈다는 조목에 연제(練祭)를 지낸 다음 달에 대상(大祥)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대로 마련하되 경효전(景孝殿)의 산릉(山陵) 대상 제사를 음력 무술년(1898) 정월 21일로 추택(推擇)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이 훙서(薨逝)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께서 이번 음력 16일 해시(亥時)에 훙서(薨逝)하였으니 슬프고 절통함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응당 시행해야 할 모든 절차는 장례원(掌禮院)에서 참고하여 마련하도록 하라."
하고, 또 조령을 내리기를,
"거애(擧哀)는 대유재(大猷齋)의 서행각(西行閣)에서 하겠다."
하고, 또 조령을 내리기를,
"특진관(特進官) 조정희(趙定熙)를 보내어 대원군(大院君)을 위로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범찬(李範贊)을 보내어 전 영돈녕부사(前領敦寧府事) 이재면(李載冕)을 위로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에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사(喪事)는 예장청(禮葬廳)이라고 부르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고,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곤(李載崑),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이은용(李垠鎔)이 나가서 호상(護喪)하고 일체의 일이 잘 처리될 수 있도록 각 해사(該司)에 특별히 신칙하여 거행하라."
하고, 또 조령을 내리기를,
"관은 동원(東園)에 있는 것을 운현궁(雲峴宮)에 실어다 드려라."
하였다.
황태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시독관(侍讀官) 이우만(李愚萬)을 보내어 대원군(大院君)을 위로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대유재(大猷齋)의 서행각(西行閣)에 나아가 거애(擧哀)하였다.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議政府)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칙임관(勅任官),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황태자시강원(皇太子侍講院), 황태자익위사(皇太子翊衛司)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위로하였기 때문이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천만뜻밖에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사(喪事)를 당했으니 그지없는 슬픔을 무슨 말을 우러러 올리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거처를 옮긴 다음 슬픈 일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몸에 손상을 받게 되었을 것이므로 우려되는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슬프고 안타깝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모든 의식 절차는 장례원(掌禮院)에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장예원 경(掌隷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오늘 여흥(驪興)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사(喪事)와 관련하여 4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시장을 열지 말도록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월 9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아뢰기를,
"이러한 때 몸을 보호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들이 의원을 데리고 전례대로 윤직(輪直)을 서며 속미음(粟米飮)을 가지고 와서 명령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로 봉하여 들이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성복일(成服日)에 마땅히 왕림하여 곡하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태의원 소경(太醫院少卿) 이범찬(李範贊)을 운현궁(雲峴宮)에 나아가 2전중(錢重)되는 인삼을 넣은 좁쌀미음을 매일 한 첩씩 상복을 입는 날까지 끓여서 대원군(大院君)에게 올려라."
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두 번째로 아뢰기를,
"이 때 몸을 보호하고 아끼는 방도는 미음을 자주 드는 데 있습니다. 신 등은 구구한 근심을 이길 수 없어 감히 이렇게 미음을 올리니 힘써 드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로 봉하여 들이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차자에,
"삼가 신이 방금 조칙(詔勅)이 내린 것을 보니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성복일에 운현궁에 왕림하여 곡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우리 황상(皇上)의 지극한 이륜으로서 비통하고 절박한 마음 더할 나위 없으니 응당 이런 거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날씨가 몹시 차고 얼음이 얼어붙었으니, 또다시 잠깐 사이에도 기후가 조화롭지 못합니다. 이 때에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로이 움직이는 것은 몸을 조심하는 방법에 해로울 듯합니다. 더구나 연일 슬퍼하던 뒤끝이 아니겠습니까? 정리(情理)상 비록 그만둘 수 없다 하더라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황황하고 답답하여 이에 감히 차자를 올리니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온 나라의 한결같은 소원을 굽어 따르시어 빨리 내린 명을 취소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인정과 예의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뿐인데 어찌 날씨가 차다고 해서 응당 집행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겠는가? 경은 노숙한 만큼 마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월 1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성빈(成殯)한 후 대내망곡(大內望哭)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또 조령을 내리기를,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범찬(李範贊)을 운현궁(雲峴宮)에 보내어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두 번째 차자에,
"운현궁에 왕림하여 곡하는 것에 대한 명을 빨리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내가 오늘 사적으로 얼마나 비통해 하는가를 어째서 생각하지 않는가? 경이 간절히 말린다 하더라도 억제하기 어려운 것은 정이다. 경은 그것을 이해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운현궁에 왕림하여 곡하는 것에 대한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인정과 예의상 당연한 것이므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다."
하였다. 두 번째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여러 비답에서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서리(署理) 외부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운현궁에 왕림하여 곡하는 것에 대한 명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승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경 등도 이해해야 할 것인데, 또다시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니 그것이 예절상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두 번째로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진실로 나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이와 같이 거듭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아뢰기를,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성복일에 모여서 운현궁에 왕림하여 곡을 한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황상(皇上)의 윤리를 두터이하고 예의를 다하는 성념(聖念)에 대해서 신들은 저절로 우러러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일 슬퍼하는 가운데 이미 몸이 많이 상하였고, 요즘 몸이 편안치 못한 나머지 몸을 더욱더 조심하고 아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현재 날씨가 찬데 이러한 때 수고로이 움직이는 임금이 철에 따라 몸을 조심하는 방도가 아닐 듯합니다.
신들의 직무는 보호하는 것인 만큼 우려됨이 갑절이나 간절하여 이렇게 감히 서로 이끌고 우러러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널리 굽어 살펴 명을 빨리 취소하기를 천만 번 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왕림하여 곡하는 것은 인정과 예의를 조금 펴자는 것인 만큼 역시 그만둘 수 없다. 경 등은 그것을 이해하라."
하였다. 두 번째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지극히 비통한 사사로운 심정은 끝이 없다. 경 등도 이해할 것인데, 정성스럽게 간청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할 수 없이 따른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내일 동가(動駕)는 성지(聖旨)가 내릴 때까지 기다려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내일 성복(成服)할 때 마땅히 대내(大內)에서 망곡(望哭)하겠다."
하고, 또 조령을 내리기를,
"내일 성복(成服) 할 때에 이미 왕림하여 곡하지 못하니, 인정상이나 예의상 매우 섭섭하다. 내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재완(李載完)을 보내서 부대부인(付大夫人)의 영전에 제사 드리는 것을 섭행(攝行)하게 하라."
하였다.
1월 1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성복(成服) 후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범찬(李範贊)은 운현궁(雲峴宮)에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황태자(皇太子) 역시 시독관(侍讀官) 이우만(李愚萬)을 보내어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복제를 별단(別單)으로 올리기를,
"‘황제는 제최복(齊衰服)을 1년 동안 입되 부장기(不杖朞)하고, 대원군(大院君)은 제최복에 장기(杖朞)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유재(大猷齋) 서행각(西行閣)에 나아가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빈소(殯所)를 차리고 성복을 행하고 망곡(望哭)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대내(大內)에서 망곡(朢哭)하였다.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의정부(議政府)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칙임관(勅任官)인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황태자시강원(皇太子侍講院)과 황태자익위사(皇太子翊衛司)등을 인견(引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성복(成服)이 어느덧 지나갔으니 성상(聖上)의 마음은 더욱더 슬플 것입니다. 여러 날 슬퍼하던 끝에 성체(聖體)는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의 요청으로 왕림하여 곡하는 절차를 일시 중지하였기 때문에 인정과 예의를 펴지 못하다 보니 더욱더 슬프고 안타깝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오늘 왕림하여 곡하는 절차를 아직 진행하지 못하여 비록 슬픈 마음은 더하다 하더라도 폐하의 몸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중한 부탁이 있고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는 큽니다. 이 추운 때에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로이 움직인다면 몸이 손상될 우려가 있습니다. 반드시 인정과 예의를 펴자면 어찌 다른 날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아뢰기를,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성복일이 어느덧 지났으니 비통한 마음 더욱 간절한데 이 때에 차마 이 청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두 번째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이어 철직(撤直)을 명하였다.
홍문관 부학사(弘文館副學士) 윤정구(尹定求)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때에 어찌 이런 청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두 번째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약원(藥院)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칙유(勅諭)하였다."
하였다.
1월 12일 양력
칙령(勅令) 제1호, 〈칙임관, 주임관의 봉급을 반납하는 예를 계속 시행하는 건〔勅奏任官捐俸例繼續施行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칙령 제2호, 〈강화부, 양주, 강릉, 봉화, 무주 등 군에 있는 사고의 수호건〔江華府楊州江陵奉化茂朱等郡所在史庫守護件〕〉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칙령 제3호, 〈감옥 규칙(監獄規則)〉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국내 철도와 광산을 외국인과 합동함을 승인하지 말 것에 대하여 토의를 거쳐 상주(上奏)하였다.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예장청(禮葬廳)에서 주청(奏請)하여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에 이재완(李載完)을, 서사관(書寫官)에 박창서(朴昌緖)를, 서상자 서사관(書上字書寫官)에 조정구(趙鼎九)를, 광중 명정 서사관(壙中銘旌書寫官)에 조경호(趙慶鎬)를, 제각 상량문 제술관(祭閣上樑文製述官)에 남정철(南廷哲)을, 서사관(書寫官)에 김교헌(金敎獻)을 차출하였다.
1월 1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대원군(大院君)의 생신이다. 비서승(祕書丞)에게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4일 양력
의정부(議政府)에서는 탁지부(度支部)에서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도로와 교량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 2,500원(元), 산릉(山陵)의 해자(垓字) 안의 민가의 이장(移葬) 비용 4,500원, 시위대(侍衛隊) 비용 증가액 5만 1,570원, 위관(尉官)의 예복과 평복 비용 423원 남짓, 인천항(仁川港)과 제주(濟州)에 표류한 백성 구휼할 비용 33원 남짓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도록 토의를 거쳐 상주(上奏)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1월 16일 양력
종2품(從二品) 이재현(李載現)을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박용대(朴容大)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월 18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본 즉, 세모(歲暮)에 제사를 설행(設行)한 예가 있습니다. 경효전(景孝殿) 산릉(山陵)에서 올해부터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장청 당상(禮葬廳堂上) 이재곤(李載崑)이 아뢰기를,
"서서(西署)의 공덕리(孔德里) 본궁(本宮)의 봉표(封標)한 곳을 재차 돌아보고 산에 관한 의논을 이미 치주(馳奏)하였습니다. 예장(禮葬) 택일(擇日)은 무술년(1898) 3월 10일 이전은 모두 아주 길한 날이 없으므로 부득이 열흘 후로 미루어 선택하였습니다. 각 항목의 길일(吉日)은 삼가 별단(別單)에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재결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별단(別單)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묘소는 오른쪽으로 돌아 축간(丑艮)으로 뻗은 용맥(龍脈)이 감계(坎癸)방에서 기복(起伏)하고 갑묘(甲卯)방에서 개장(開帳)하고, 인(寅)방에서 속인(束咽)하고 간방에서 뇌두(腦頭)를 이루고, 인방에서 입수(入首)하고, 간좌곤향(艮坐坤向)입니다.
묘의 나무와 풀을 베고 흙을 파는 일은 무술년(1898) 3월 1일 미시(未時)에 하되 남방에서부터 시작하며, 금정(金井)을 파는 것은 적당한 일시(日時)에 하되 구덩이 깊이는 지세에 따라서 하며, 계빈(啓殯)은 3월 12일 묘시(卯時)에 하되 남쪽부터 먼저 헐며, 발인(發靷)은 적당한 일시에 하고, 안장은 같은 달 13일 진시(辰時)에 할 것입니다.
1월 19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대신(大臣)이 아뢴 것을 들으니, 장사지내는 곳에 대해서는 얼마나 공경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가? 만일 성의를 다하여 공사를 감독하였더라면 어찌 석물이 이렇게 될 리가 있겠는가? 너무나 놀랍고 분개하여 차라리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만큼 산릉 제조(山陵提調)에게는 모두 간삭(刊削)의 법을 시행할 것이며 해당 별간역(別間役)에 대해서는 법부(法部)에서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고 처리하도록 하라."
하니, 조령을 내리기를,
"산릉(山陵)의 석물은 개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는데, 봄이 되기를 기다려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납향 대제(臘享大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조상식(朝上食)을 올리고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유인(李裕寅)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1월 21일 양력
경효전(景孝殿) 재실(齋室)에 나아가 세모제(歲暮祭)의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고, 이어 세모제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모두 친행(親行)하였다.
정3품(正三品) 유정수(柳正秀)를 탁지부 사계국장(度支部司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1월 22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정조제(正朝祭)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비서원 승(祕書院丞) 조중목(趙重穆)을 운현궁(雲峴宮)에 보내어 문안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양력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이재현(李載現)을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에, 의관(議官) 조동만(趙東萬)을 사직서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월 25일 양력
6품(六品) 박의병(朴義秉)을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德源監理兼德源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1월 2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외(京外)의 각 부대를 군부(軍部)로 하여금 여단(旅團)으로 편제(編制)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의관(議官) 이명상(李明翔)을 주차(駐箚)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관 3등참서관(公使館三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유인(李裕寅)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일찍이 듣건대, 법이란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을 귀중히 여겼는데 나누면 갈래가 생기기 때문이며, 법이란 간소한 것을 귀중히 여겼는데 번잡하면 이탈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법관(法官)의 직무는 민사(民事)와 형사(刑事) 뿐입니다. 지방에는 13부(府)의 관찰사(觀察使)가 있고, 중앙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있는데, 곧 옛날의 방백(方伯)과 태수(太守)이며 맡고 있는 것은 오직 이 두 가지일 뿐입니다. 이것을 버린다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수도 안에 두 개의 관청을 특별히 설치하였으니, 하나는 경기 재판소(京畿裁判所)라고 하는데 35개 군(郡)의 민사와 형사를 관할하며, 하나는 한성 재판소(漢城裁判所)라고 하는데 5부(部)의 민사와 형사를 관할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관찰사와 판윤이 맡고 있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민사’라고 하는 것과 ‘형사’라고 하는 것을 감히 하나로 신문하지 못하니 어리석은 자와 귀먹은 자와 같이 앉아서 월봉(月俸)만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직무를 어디다 쓰겠습니까?
관찰사와 판윤은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없고 오직 수반 판사(首班判事)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신(道臣)과 판윤〔京兆〕은 폐하(陛下)께서 얼마나 신중히 선발하였으며, 맡긴 책임의 중요함이 어떠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믿는 것이 일반 관리와 하급관료로서 갑자기 칙임관(勅任官)으로 발탁된 사람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가만히 듣건대, 두 재판소에 두는 인원은 매우 많고 쓰는 비용도 점점 많아진다고 하는데, 만일 세력 있는 신하가 문생(門生)이나 고리(故吏)에게 은혜를 베푸는 밑천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민사, 형사에 보탬을 주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신은 그것이 털끝만치도 이익이 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겠습니다. 아! 변란은 이미 지나갔지만 상처가 매우 깊으며, 나라의 비용은 원칙에 어긋나게 써버려 창고가 비고 고을이 말랐으므로 필요없는 관리를 응당히 없애버리고 필요없이 낭비하는 것을 절약하여 단지 실속이 있도록 힘쓰고 헛된 것을 절약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성과가 없을까 두려운데, 더구나 정해진 관리 외에 관리를 더 두고 허비한 데다 더 허비하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을 휘두르면서 당면한 일을 알기 때문에 천하의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스스로 뽐내고 있으니, 이런 자에 대해서 신은 통탄하게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경기에 관찰사가 있고 한성부에 판윤이 있는데 그대로 두고서 폐지할 수 없다고 하니, 경기의 재판은 응당히 관찰사에게 맡기고 한성부의 재판은 마땅히 판윤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리하되 두 개 재판소의 재판에서 만일 중요한 데 관계되어 죄를 더 주면 주었지 덜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관찰사와 판윤 역시 모두 두 재판소에 부탁하여, 법을 시행하는 권한으로 하여금 한곳에 집중시키고 분산됨이 없게 하며 간소화하여 번잡한 것을 제압한다면 중앙과 지방의 더없는 다행이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재결을 내려 빨리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신은 부서의 일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지 못했으나, 이 한 가지 일을 통해서도 나머지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신과 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받은 은혜는 하늘땅에 가득 차고 있으나 보답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진실로 한 가지 지식과 절반이라도 아는 것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정사에 보탬을 줄 수 있다면, 비록 죽은 날이라도 오히려 살아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현 시기의 공론을 거슬리고 비방을 초래하는 것 때문에 우물쭈물하며 우리 천지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단지 사태가 저렇게 어렵고 재간이 이렇게 부족하니, 가령 이 벼슬자리에 그냥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은혜에 허물을 남기고 마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므로 감히 시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이렇게 번잡하게 상소를 올립니다. 성은으로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에 비답한 것이 있는데 어째서 다시 사임하겠다고 하는가? 사임할 때가 아니니 직무에 힘써라. 아래 항목에서 진술한 것은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일이 관제를 개정하는 것과 관계되는 만큼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아뢰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월 2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형법(刑法)이란 천하에 공평한 것이다. 죄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사건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있는데, 만물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울과 자를 가지고 각각 공평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규정과 조항이 자연히 있으니, 항상 죄수를 신중히 돌봐 준다면 어찌 심리(審理)하고 명변(明辨)하는 뜻에 어긋날 수 있겠는가? 지극히 신중히 해야 한다.
또한 송사(訟事)가 오래되면 반드시 간사한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요즘 사건을 지체시킨 것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겨울을 넘기기까지 하였다. 그들에게 혹시 원통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담보할 수 없는데 옥중에서 울부짖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불쌍하다. 처결하지 못한 모든 죄수들은 법부 대신(法部大臣)에게 여러 판사(判事)들과 모여서 의논하고 며칠 안으로 추려서 처결하여 공정하게 되도록 하라.
반역, 강도, 살인, 간통과 재물을 속여 빼앗은 것과 절도의 육범(六犯) 외에 나이가 70세 이상 되었거나 15세 이하로, 병이 든 사람은 죄상에서 참작해서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면 특별히 놓아 주어라. 그중에서 혹 전염병을 한창 앓고 있는 사람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전염되지 말아야 하는 만큼 특별히 다시 살펴 모두 용서해 주라."
하였다.
의정부의정 서리 외부 대신(議政府議政署理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방금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유인(李裕寅)의 소본(疏本)을 보니, 그가 한 말은 두 재판소를 구실로 삼고 신을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몰아넣었습니다. 혹은 요직에 있는 신하라고 지목하고, 혹은 낭비하였다는 것으로써 지적하였으며, 심하게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을 흔들면서 당면한 일을 알기 때문에 천하의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을 한다고 논한 것입니다. 온 종이장에 나열해 놓은 것은 모두 신의 죄상이고 신을 모함한 것입니다. 오래 전의 소소한 죄목을 모아 가지고 신하로써 용서받기 어려운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신은 본래 변변하지 못하여 조처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였습니다. 간서(簡書)가 오면 본디 자신을 돌이켜 보아서 경장(更張)을 실시한 데는 자연히 처음과 끝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전전 대신(前前大臣) 한규설(韓圭卨)이 청의(請議)한 것을 재가 받은 것입니다. 대체로 그 논의에서 편리하고 편리하지 못한 점을 들어보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은 이미 지방에 대한 사무가 있는 데다가 죄인이나 소송에 대한 복잡한 심리까지 겸해서 하게 되면 혹시 서로 방해가 있을 듯하다는 것이며,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는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어 민읍(民邑)과 서로 떨어져 있고 거리도 고르지 않은 즉, 나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실로 편리하다고 합니다. 이미 각부(各部)의 대신(大臣)이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같았습니다. 신은 그때 벼슬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의 반열에 있었던 관계로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여, 그 의논에 함께 하지 않은 만큼 두 재판소를 설치한 문제에 대해서는 신과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은 이미 법부를 맡고 있는 이상, 신이 무슨 의견으로 여러 사람의 일치한 의견을 홀로 배척하고 감히 재가하신 조령을 막아 나서면서 망령되게 두 가지 견해를 만들어 가지고 이미 이루어 놓은 안(案)을 헐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받들어 반포하고 거행했을 뿐입니다.
지금 그 사람의 말은 마치 신이 권력을 잡고서 이것을 빼앗아 저것에 주면서 관제를 훼손한 듯이 여기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기에 급급해서 그 말이 사실과 다른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신은 본래 어리석어서 원수가 많고 동료가 적으며 허수아비처럼 자리지킴만 한다〔尸位素餐〕는 책망은 어느 관직에서도 듣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에게 시비(是非)하는 논의가 어찌 전과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함부로 있으면서 편안히 어느덧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교섭하는 권한이 중요하기가 어느 때인들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오랫동안 맡아왔지만 전에 이미 많은 잘못을 범하였는데, 이제 어떻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의정(議政)의 일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완급(緩急)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비록 임시 서리(臨時署理)라고 하지만, 나아가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야 어찌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등골에 땀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직무는 과연 얼마나 중대하며 그 담당은 또한 얼마나 무겁습니까?
신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중요한 벼슬자리에 선발되어 더럽히게 되니,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일념은 자나깨나 가슴에 맺힙니다. 하지만 복을 지나치게 받으면 화가 된다는 것은 그 이치가 명백한 것입니다. 인재를 모아 들일 근심은 한 가슴에 차고 넘쳐 누를 길이 없으나, 응당 물러나야 할 처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영화를 탐내며 주저앉아 있으니 모두 신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과 같이 기대를 저버리고 잘못을 범하고서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일을 볼 수 있으며, 부끄러움이 없는 듯이 편안히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시끄럽게 상소를 올립니다.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굽어보고 이해하여 빨리 신이 맡고 있는 본직과 겸직의 두 벼슬을 빼앗은 다음, 이어 신을 엄중한 율(律)로 감처(勘處)하여 공법(公法)을 엄히 하고 사적인 분의를 편안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당시의 조치는 본래 마땅한 것이 있었고, 사람들의 견해는 반드시 같을 수가 없는 만큼 너그러이 용서해 줄 수 있으나, 경이 이렇게 간절히 요구하니 의정(議政)의 서리는 특별히 청한 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한성부(漢城府)와 경기(京畿)의 두 재판소를 폐지하고, 한성부와 경기(京畿) 관찰부(觀察府)에서 구관(句管)하는 일에 대하여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유인(李裕寅)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일이 관제를 고쳐 정하는 데 관계되는 만큼 의정부에서 모여서 의논하고 품재(稟裁)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상소대로 시행할 뜻으로 모여서 의논하고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9일 양력
재전(齋殿)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1월 3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춘향 대제(春享大祭)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1월 31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이도재(李道宰)를 외부 대신(外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신은 죄를 범하여 아직 처결을 받지 못한 몸으로 어전(御前)에서 삼가 여쭈면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고, 짧은 차자로 자신을 탄핵함에 있어서도 정성이 위에까지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비답이 융중(隆重)히 내리시고 용서해주는 것을 널리 하여 주셨으니 신과 같이 죄를 지은 몸이 어떻게 이런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황송하고 떨리어 몸 둘 바를 몰라 시골집에 엎드려 처벌이 내릴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삼가 1월 19일에 내린 조칙(詔勅)을 보니 산릉 제조(山陵提調)의 벼슬을 간삭(刊削)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처분이 엄정하여 모든 동료들에게 경계가 되었지만, 그 죄를 따져 본다면 신이 실로 첫째입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처분을 기다리던 끝에 생각하던 바와는 크게 어긋났습니다. 능에 석물을 설치하는 것은 더없이 공손히 해야 하고 더없이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인 만큼 한 가지라도 착오가 있으면 천고에 한이 될 것이니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모든 크고 작은 제사에 대하여 혹 잘못을 범하였더라도 곧 응당한 처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만년토록 전해갈 능에 대한 공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보통 지내는 제사에서 잘못을 범한 것과 나란히 하여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여러 당상(堂上)들의 우두머리로서 그 죄가 균등해야 하는데 여러 당상들의 죄는 처리하면서도 신만은 홀로 빼놓았으니 일의 체모가 무너지고 형정(刑政)이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또다시 두려움을 무릅쓰고 거듭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빨리 엄한 벌을 내려 함께 감처(勘處)하는 율(律)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능역(陵役)을 한이 없도록 하려고 한 것이 어찌 다만 나의 슬픈 생각을 펴려고만 하는 것이겠으며, 여러 당상들이 맡은 일은 또 무슨 일인가?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자 이런 처분을 내린 것이다. 총호사(總護使)의 책임은 여러 당상들과는 다른 것인데, 오늘 경이 이와 같이 거듭 인혐(引嫌)하는 것은 매우 지나친 일이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전 정언(前正言) 백남도(白南道)가 상소하여 다섯 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첫째, 추숭(追崇)을 논의하여 조상의 아름다운 공적을 드러내는 것, 둘째, 대의(大義)를 밝혀서 천하에 보이는 것, 셋째, 과거 제도를 회복하여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는 것, 넷째, 관제(官制)를 정하여 백관(百官)을 바로잡는 것, 다섯째,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밝혀서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다섯 가지 조목은 그대가 본분을 벗어나서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경효전(景孝殿) 산릉(山陵)의 상제(祥祭)를 지낸 후 조상식(朝上食)과 석상식(夕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마땅히 그만두어야 하겠으나, 역대의 전례에는 3년 동안 계속 의식을 행하였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해서 8월 기신일(忌辰日)까지 계속 설행(設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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