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6권, 고종34년 189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 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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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丁酉年) 10월 초7일】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조예석(趙禮錫)을 경기 재판소 수반판사(京畿裁判所首班判事)에, 9품(九品) 윤이병(尹履炳)을 한성재판소 수반판사(漢城裁判所首班判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를 대행 황후 행장제술관(大行皇后行狀製述官)에 임용하였다.


【원본】 40책 3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조예석(趙禮錫)을 경기 재판소 수반판사(京畿裁判所首班判事)에, 9품(九品) 윤이병(尹履炳)을 한성재판소 수반판사(漢城裁判所首班判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를 대행 황후 행장제술관(大行皇后行狀製述官)에 임용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계청과 관련하여 칭호를 높일 때에 여러 가지로 쓰인 것과 각 항목의 비용 5만 원(元), 경운궁(慶運宮) 공사비의 증액한 비용 5만 원, 국장비의 증액한 비용 4만 원, 어보(御寶)를 새로 만드는 데 든 황금 1,000냥 쭝의 대가(代價)로 지급할 4만 5,000원, 한성(漢城) 안과 밖의 도로 수리 비용 5만 원, 인천항(仁川港)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도로 수리 비용 1만 6,000원, 삼화항(三和港)에 새로 설치하는 감리서(監理署)의 집터 안에 있는 묘지를 옮겨 쓰는 데 드는 비용 205원, 일본에 주재한 공사관(公使館)의 수리 비용 350원, 일본의 기동연습 때 파견하는 장관 이하의 여비 4,000원, 일본에서 차관(借款)한 나머지 돈 200만 원 중에서 먼저 상환(償還) 할 돈 100만 원,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주재한 공사(公使) 이하의 봉급 및 경비에서 더 주는 돈 1만 3,370원, 미국 공사관(公使館)에 주재한 서기생(書記生) 이교석(李敎奭)이 돌아오는 데 드는 비용 620원을 예비금(豫備金) 가운데서 지출할 것에 대한 사안과 예비금 120만 원을 증액하여 배정해서 쓰는 문제들을 의논을 거쳐 상주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11월 2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을 외부 대신(外部大臣)에 임용하고, 정2품(正二品)인 민종묵(閔種默)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을 주었다. 외부 대신 조병식에게 임시로 법부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이번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와 인산(因山) 때의 의식 절차에 대해 삼가 역대의 전례를 상고하여 옥책문(玉冊文)은 종전대로 거행하고 금보(金寶)는 옥보(玉寶)로 거행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의물(儀物)건도 역시 역대의 전례대로 준비해 가지고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3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임명하여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의 정사(正使)로, 특진관(特進官) 민영준(閔泳駿)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11월 5일 양력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대행 황후(大行皇后)의 빈전(殯殿)에 올릴 시호(諡號)를 친히 전하였다.

 

11월 6일 양력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어진 황후(皇后)가 하늘을 받들고 도(道)를 따라서 궁내(宮內)에서 바른 자리에 앉아 풍속과 교화의 기틀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온 나라를 교화하여 아름다운 덕이 밝게 나타나 후세까지 가르침을 남기게 된다. 이에 반드시 행적과 공로를 표창하여 한번 시호를 올림으로써 백대에 증거를 남기는 것은 떳떳한 윤리이고 아름다운 법으로서 역대의 큰 전례(典禮)이다.
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후(皇后)가 도와준 성과이다.
하늘의 보살핌이 극진하고 조상들의 음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고 황후도 따라서 높아졌으니, 새로운 천명을 이어받아 선대를 빛내고 후대에 은택을 끼치게 되었다. 훌륭한 공적이 드러났으니 진실로 시호를 올려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어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자세히 법을 상고해서 공경히 천지, 종묘(宗廟), 태사(太社), 태직(太稷)에 고하도록 한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시호(諡號)를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첫째, 재주를 가지고 숨어 있는 선비들로서 현재 쓸 만한 사람들과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들이 사는 곳은 해당 관찰사(觀察使)가 사실에 근거하여 추천하고 해부(該部)에서 다시 조사하여 발탁해서 쓰기에 편리하게 하라.
둘째, 사람의 목숨은 더없이 중하므로 역대로 모두 사형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는 세 번 심리(審理)하고 아뢰는 조목이 있었고, 처벌을 가볍게 하는 것으로 잘못 처리한 데 대한 벌이 중한 편으로 잘못 처리한 경우보다 가벼웠다. 대체로 형벌 맡은 관리들은 제 의견만을 고집하지 말고, 뇌물을 받거나 청탁을 따르지 말며, 사실을 알아내는 데만 힘쓰도록 하라.
셋째, 모반(謀叛), 강도, 살인, 간통, 사기, 절도 등 육범(六犯) 외에는 각각 1등(等)을 감(減)하라.
넷째. 각도(各道)의 백성들 중에서 외롭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로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해당 지방 관리가 유의하여 돌보아 줌으로써 살 곳을 잃지 않도록 하라.
다섯째, 큰 산이나 큰 강의 신주를 두는 사당 중에서 무너진 것들은 해당 지방관이 비용을 계산해서 해부에 보고하여 제때에 수리함으로써 공경하는 도리를 밝힐 것이다.
아, 옥책문(玉冊文)에 훌륭한 존호(尊號)를 새겼으니 멀리 만국(萬國)에 알려질 것이며 역사 기록에 빛이 더해졌으니 영원히 먼 훗날에 가서도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세상에 반포하여 다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은 것이다.】


【원본】 40책 36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비빈(妃嬪) / 건설-건축(建築) / 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의정(議政)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는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을 해임하였다.

 

11월 7일 양력

산릉(山陵)에 금정(金井)을 열 때에 나아갔던 대신(大臣) 이하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다.】 를 소견(召見)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이 산릉에 나아가서 금정을 연 뒤에 흙의 색깔을 간심(看審)하니 자황색에 윤기가 흐르므로 연이어 두세 번 간심해보니 아주 썩 좋았습니다. 지관(地官)들도 상길(上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흙의 색깔이 매우 좋았으며 점점 깊이 파들어 갈수록 윤기 도는 자황색이 처음보다도 더욱 좋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흙의 색깔이 아주 좋다니 매우 다행이다. 인산(因山) 전에는 땅속이 좋은가 나쁜가를 알 수 없어 가장 염려스러웠는데 지금은 조금 마음이 놓인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이 이전에 새 장지(葬地)를 정할 때 참가하지 못하였다가 이번에 비로소 그 산의 판국의 형세와 광중을 직접 보았는데 보통 사람의 눈에도 과연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宋) 나라 때에도 풍수(風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주자(朱子) 또한 지리(地理)에 대하여 힘주어 말하였으니 풍수의 술법에 대해서 전혀 믿지 않을 수는 없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능(陵)에 대한 논의에는 명백한 근거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신이 요즘 병들고 노쇠한 탓으로 특별히 몸조리를 한 다음 정사를 보라는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호(諡號)를 올리고 향을 올리는 의식과 새 능소(陵所)에 나가는 일에 있어서 의리로 놓고 볼 때 병이 있다고 해서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산 날이 머지않기 때문에 지레 물러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지금 의정부(議政府)의 사무가 지체되는 것이 날로 심하니, 역시 모르는 체하면서 그냥 있기가 어렵습니다. 외람되게 감히 우러러 호소하는 바이니, 특별히 신의 병세를 헤아리시어 빨리 체차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인이라 기력이 빠진 것이니 추후에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음력 10월 15일 별전(別奠) 때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서 3품(三品) 이상을 지낸 사람들은 설사 실직(實職)이 없다 하더라도 곡하는 반열에 들어와 참가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議政)이 면대한 자리에서 이와 같이 간절하게 요청하니 관리 임명을 번복하는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의정 서리(議政署理)를 해임하는 칙지를 도로 환수하라."
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김구현(金九鉉)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을 주었으며, 종2품(從二品) 이재정(李在正)·민치희(閔致憙)·민준호(閔俊鎬)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이재정(李在正)은 칙임관(勅任官) 3등, 민치희(悶致憙) 이하는 4등을 주었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정낙용(鄭洛鎔)은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신이 외람되게 이 부(部)를 맡은 지 지금 한 달여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정을 관할하고 문서가 번잡한 이 직책은 신과 같이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일을 가지고 논한다면 외국인을 초빙하는 것은 아주 신중히 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주관하는 부서에서도 오히려 감히 마음대로 결론을 짓지 못하고 교섭하는 부서와 협의한 다음 반드시 의정부의 회의에서 가부(可否)를 결정해서 폐하(陛下)에게 보고하여 윤허를 받은 다음에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정상적인 규례이며 새로운 규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재정에 관한 일로 러시아 사람을 초빙한 것은 원래 본부(本部)에서 요청한 것도 아닐 뿐 아니라 회의에서 협의도 거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외부(外部)에서 지레 조약을 체결해 버렸으니, 꼭 그대로 집행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조약 안에 무슨 조항이 있고 무슨 문구가 있으며 결정한 사람은 누구이고 집행할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신은 비록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여서 같이 의논할 대상이 못 된다고 하더라도 탁지부(度支部)는 바로 온 나라의 재정권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신 때문에 탁지부의 권한이 상실되고 나라의 법규가 문란하게 되었으니, 신 자신의 부끄러움이 깊어질 뿐 아니라 사람들이 앞으로 신을 두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조정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다지도 인재가 없어서 이런 사람을 가지고 이런 자리에 채워 두었을까라고 할 터이니, 신 역시 조금이나마 윤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차마 이대로 눌러 앉아서 벼슬을 탐내고 나라를 그르치는 죄과에 스스로 빠져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실상으로 우러러 숭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바이니, 폐하께서는 잘 굽어 살피시어 신의 벼슬을 체차시키고 아울러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 신의 죄를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처럼 혐의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처럼 간절하게 요청하니, 특별히 그 청을 들어준다. 경은 양해하라."
하였다.

 

11월 8일 양력

종1품(從一品) 박정양(朴定陽)을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을 주었으며, 종2품(從二品) 김희수(金喜洙)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을 주었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이 올린 글을 보니, ‘회의에서 가부(可否)를 결정해서 전하에게 보고하여 윤허를 받은 다음에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정상적인 규례이며 새로운 규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과의 교섭은 원래 외부(外部)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구에게 가서 논의한단 말입니까? 고문관(顧問官)을 초빙하여 쓸 때 이전에도 모여서 의논한 예가 없었습니다.
올린 글에서 아뢰기를, ‘원래 본 부에서 청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전권공사(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이 조약에 따라 청해온 것에 관계되니, 한 나라의 정부에서 청해온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유독 탁지부가 청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말이 안 되고 따질 것도 없습니다.
올린 글에서 아뢰기를, ‘외부(外部)에서 지레 조약을 체결해버렸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교섭의 권한은 전적으로 외부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지레 해버렸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여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올린 글에서 아뢰기를, ‘그 조약 안에 무슨 조항이 있고 무슨 문구가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의정부 관원들에게 해당 조약 초안을 공감시켰으므로 그 조항과 문구에 대하여 결코 모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매하게 말하면서 마치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니, 어찌 그렇게 교활합니까?
올린 글에서 아뢰기를, ‘결정한 사람은 누구이고 집행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하였는데, 결정한 사람은 원래 그 권한이 있는 사람이며 집행하는 사람 역시 그 권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각각 그 규례가 있는데 모함하기에 급급하고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가 잔뜩 나열해 놓은 것은 모두 되는 대로 횡설수설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신이 구차스레 변명할 필요는 없지만 신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물러간다면 조약을 정하는 권한이 반드시 탁지부로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외부는 장차 어디다 쓰겠습니까? 신이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았더라면 어찌 이런 뜻밖의 비방이 있었겠습니까?
신은 어리석고 노쇠하여 단 하루도 이 벼슬자리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바삐 간단한 상소를 올리니, 바라건대, 전하는 잘 살펴 헤아리시어 빨리 신의 벼슬을 체차시키고 신의 죄를 처결하여 공정한 법을 소중히 하고 사적인 분의를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어찌 이와 같이 서로 다툴 때인가. 이것이 어찌 이렇게 서로 다툴 때인가? 진실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 될 뿐이고 남의 말을 가지고 다툴 필요는 없다. 경은 잘 헤아리고 다시는 번거롭게 상소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9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별전(別奠)을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황후(皇后)의 복제(服制)에 대해 역대의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바로잡아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이희로(李僖魯)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을 주었으며,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조병호(趙秉鎬),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이호익(李鎬翼),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정로(李正魯),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조병필(趙秉弼)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다 칙임관 3등을 주었으며,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학수(金學洙)를 궁내부 특진관에,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송도순(宋道淳)을 사직서 제조에, 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 심상찬(沈相瓚)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헌경(李軒卿)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고 다 칙임관 4등을 주었다.

 

11월 10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을 명성 황후(明成皇后) 인산(因山) 때의 식재 궁관(拭梓宮官)에 임용하였다.

 

11월 11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반금 내려온 조칙(詔勅) 것을 보니, 황후(皇后)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역대의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바로잡아 고쳐서 들여보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집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으나 신은 본래 배운 것이 적고 아는 것이 부족하여 예설(禮設)에 어둡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전례는 지극히 중대하고 이번 일의 사체는 더없이 엄한 것인데 예법을 맡은 한 신하가 마음대로 마련한다면 소홀하고 간략할 뿐 아니라 이전부터 이번처럼 의심이 있어서 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 대신(大臣)들과 어진 선비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였습니다.
신은 올해 들어 노쇠해지고 고질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한 관계로 무엇을 상고하라면 앞서 본 것을 잊어버리고 뒤에 한 일을 놓쳐 버리곤 합니다. 자신으로서도 스스로의 견해에 믿음을 가지기 곤란하다는 것을 아니, 더없이 큰 예식에 착오가 있을까 우려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히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잘 살피시고 널리 물어보아 옳은 것으로 돌아가게 하시기를 천만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서울에 있는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에게만 문의하라."
하였다.

 

11월 12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종묵(閔種默)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을 주었으며, 종2품(從二品) 이헌경(李軒卿)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종2품(從二品) 이주영(李胄榮)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다 칙임관 4등을 주었으며 부장(副將) 이종건(李鍾健)에게 시종원 총관(侍從院總管)을 겸임시켰다.

 

11월 13일 양력

칙령(勅令) 제40호, 〈외국어 학교 관제 중 개정 안건〔外國語學校官制中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신의 상소로 인하여 황후(皇后)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수도에 있는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들에게 문의하니,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은,
‘신이 삼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 보니, 홍무(洪武) 15년(1382) 고황후(高皇后)의 상복(喪服) 제도를 송(宋) 나라의 제도에 따르자는 청에 근거하여 문무(文武) 관원과 과거에 관직을 받은 적이 있는 관원을 다 참최(斬衰) 27일을 입으며 군사와 백성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소복 3일을 입고 황비(皇妃), 황태자비(皇太子妃), 공주(公主), 종실(宗室) 이하는 상복은 자최(齊衰) 3년을 입는 것으로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영락(永樂) 5년(1407) 문황후(文皇后)의 상복은 다 고황후 때의 의식을 따랐고, 또 여러 왕과 공주들의 복제(服制)를 정하였는데, 세자(世子)와 군주(郡主)는 모두 자최 부장기(齊衰不杖唭)를 입되 성복(成服)한 때부터 27일 만에 벗었습니다. 또 가정(嘉靖) 7년(1528) 효결 황후(孝潔皇后)의 상에는 문무 백관들이 성복한 지 27일 만에 벗었으며, 가정 26년(1547) 효열 황후(孝烈皇后)의 상에는 백관은 모두 참최를 입어 27일 만에 벗고, 군사와 백성들은 소복을 입되 상을 들은 날부터 시작하여 27일 만에 벗었고, 친왕(親王), 군왕(郡王), 세자, 왕비 이하는 참최를 입어 27일 만에 벗었으며 남녀 군민(軍民)은 13일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참최와 자최를 막론하고 날수로 달수를 대체한 제도입니다. 그러니 이번 황후의 복제는 반드시 27개월의 제도에 준해서 하는 것이 명(明) 나라의 의식에 부합되고 이미 우리 왕조에서도 시행한 규례입니다.
신처럼 지식이 천박하고 예학에 어두운 사람이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 오직 널리 물어서 처리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는, ‘신은 지금 병중에 있어 살필 수 없는 데다가 본래 예학에 어두워 지금 문의하는 명이 내려왔으나 널리 상고하여 대답할 수가 없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폐하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칙을 내리기를,
"의정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홍무  고황후의 상례에 따라 신하와 백성들의 복제를 수정하여 상(祥)을 지낸 뒤 벗도록 하라."
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전 러시아주재 전권공사〔前駐俄全權公使〕 민영환(閔泳煥)이 초빙한 러시아의 관리 알렉쎄예브〔戞櫟燮 : Alexeieff〕  【알랙씨에푸】 가 먼저 왔습니다. 그래서 신이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士貝耶 : Speyer, Alexei de〕와 이미 맺은 조약에 따라 하고 탁지부(度支部)의 고문관(顧問官)으로 고용하였으니 해당 주무(主務) 부서로 하여금 기일을 정하고 일을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윤허한다. 탁지부는 재정과 해관(海關)의 세입(稅入)에 대하여 주무 대신(主務大臣)과 함께 공평 타당하게 상의하여 처리하되, 모든 지출에 관계되는 것을 도장을 찍고 증명서를 발급하는 데 대해서 부디 잘못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종1품(從一品) 이헌직(李憲稙)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준(閔泳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우리 폐하(陛下)는 타고난 자질이 거룩하고 문명하며 신기하고 굳세며 용감하고 지혜를 타고나시어 평정하기 어려운 고비가 많은 것을 능히 평정하고 독립의 기초를 세웠으며 새로운 천명을 받아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였습니다. 나라의 큰 왕통을 이루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비로소 우리나라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 4,000여 년간 일찍이 없었던 대업을 비로소 개척하셨습니다. 아, 훌륭하지 않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은 바로 우리나라가 새 출발을 하는 때라고 봅니다. 우리의 신하와 백성들이 흠모하여 우러르고 칭송하며 훌륭한 덕화를 보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천하만국이 눈을 닦으면서 목을 빼고 우리나라가 정력을 기울여 정사를 잘하는 것이 지난날보다 응당 더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가 천하의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를 지고 있는 것이 아주 어렵고 큽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하기에 여념이 없고 정사를 잘 다스려 나갈 것을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으나 정사를 하는 방법이 지극하지 못하고 다스리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위급한 형편과 급박한 정세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다 자나깨나 개탄하고 있는데, 무릇 모든 일을 맡아 보는 신하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분발하기보다 도리어 구차하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마치 잘 다스려져서 일이 없는 태평세월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비유하면 썩은 돛대를 달고 풍랑을 가르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뒤집히고 부서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쪽 언덕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정신과 혼백이 놀라서 달아날 지경인데, 오히려 배 안의 사람들은 그냥 자리를 깔고 꿈이나 꾸면서 마치 재각(齋閣)에나 있는 듯이 위태로움을 잊고 있는데 신은 이 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큰 의리는 삼강 오륜(三綱五倫)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원수를 다 갚지 못하였고 나라의 치욕을 다 씻지 못하였으니 문무(文武)의 모든 관리들은 군사와 정사에 뜻을 가지고 모두 일찍부터 밤까지 독실하게 노력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도 원수를 갚는 조치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장차 세상에 설 수 없게 될 것이니, 이에 대하여 신은 뼈에 사무치도록 통탄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돌아보건대, 오늘의 급선무는 네 가지인데, 법령(法令)에 대한 문제, 재정(財政)에 대한 문제, 군사(軍事) 제도에 대한 문제, 외교(外交)에 대한 문제입니다. 법령(法令)이란 정사와 교화가 실행되게 하는 도구입니다. 정사와 교화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법령이 서지 않는다면 시행될 수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법은 내용과 형식이 모두 지극해서 더할 나위없습니다. 서양법이 아무리 세밀하다 하더라도 원래 우리 것보다 못합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문명하고 우리는 고루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법을 등한히 하여 내팽개쳐 버리고 저들은 자신의 법을 전적으로 따른 데에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곡식을 언덕처럼 쌓아 놓고 부패 변질되었다고 먹지 않으면서 이웃에서 양식을 꾸어 오는 것과 같으며 책을 잔뜩 쌓아놓고 내버리다시피 하여 읽지 않으면서 남에게 책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백만의 군중을 지휘하여 바로 묶어 세우는 것은 오직 법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령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한 집안의 어리석은 아이종이라 하더라도 역시 불러다가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모든 관리들이 일을 맡아하는 데서 혹 능숙한 사람이 있어도 간섭하고 제지하여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며, 그 직무에 알맞지 않은 한갓 녹봉만 허비하고 있어도 쫓아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적인 것에 핑계대고 사적인 것을 모의하며 무지몽매하여 규정 착오를 범해도 내버려 두고 애초에 살피지 않습니다. 신칙은 빈번히 하나 한갓 빈 문서로 전락되고 있으며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그르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죄도 받지 않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벼슬이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폐하께서 아무리 밤낮으로 근심하고 쉴 새 없이 부지런하지만 위에서 혼자 수고하시고 한 가지 일도 장차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한다면 모든 벼슬에 대하여 적당치 않은 사람들은 빨리 교체시키고, 직권을 남용하여 난잡한 짓을 하는 자들은 쫓아내서 죄를 주며 어진 사람들은 상을 주고 표창해야 합니다. 상과 벌을 엄중하게 시행해서 능하지 못한 자가 함부로 벼슬길에 나가거나 죄 있는 자가 요행수로 죄를 모면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관리는 다 적임자들로서 꾸려질 것이며 모든 직무는 잘 수행될 것이나 간사하고 바른 것이 명백해져서 나라의 기강이 떨쳐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을 법령이 시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령이 시행되면 정사와 교화가 바로 실행되고 법령이 시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계책이 있다 하더라도 막연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의 재정은 마치 사람의 혈맥과 같아서 재정이 고갈되면 나라가 병들고 혈맥이 마르면 사람이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한 해 수입을 헤아려 보면 전보다 몇 곱절 되는데도 재물을 쓰는 것이 더욱 궁색하여 많은 차관(借款)을 얻는 것이 계속 그치지 않고 있으니 원금과 이자가 불어나서 종당은 계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그 빚을 갚겠습니까? 비록 백성의 집에서도 재정을 주관하는 사람은 반드시 친근하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며 절대로 고향이 다른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온 나라의 재부를 외국 사람에게 맡기고 그의 명령을 들어 출납하고 있으니, 현재는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에 의거하여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재물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은 오직 어떻게 절약하여 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올해 한 해의 수입을 가지고 제도에 맞게 절약하고 통제를 해서 그 남는 것을 저축한다면 몇 해 안 가서 차관(借款)을 깨끗이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재정이 풍족할 것이고 몇십 만의 군사를 양성한다 하더라도 여유가 있을 것이니, 오직 적임자를 선택해서 맡기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군사는 나라의 예리한 무기이므로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을 빌려와서 권한을 주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손과 발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것입니다. 손과 발을 남에게 빌려 주어 그 동작을 시키는 대로만 듣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면 급할 때에 가서 대처하지 못할까봐 우려되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기예를 배우지 않을 수 없으나 오직 한 가지 기예만을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절제를 받는 것이 오래되어 그대로 동화되어 버린다면 그 군대는 더 이상 우리 군대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칼을 사람에게 주고 그 칼자루마저 넘겨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 사람으로 하여금 각 나라의 기술을 여러 가지로 배워 그 장점을 취하여 통일된 교범(敎範)을 만들게 한 다음 우리나라 구령으로써 가르친다면 그 기술은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자 사람들을 내몰아서 배우게 한다고 해도 다 정예로운 군사가 될 것이며 그 군사는 우리가 쓰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각 나라와 교섭하는 방도는 되도록 조정하는 데 있고 의심하거나 시기해서 말썽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고 풍속과 언어가 다르지만 그들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는 다 동일하게 해야 합니다. 강하고 약하고 멀고 가깝다고 해서 차이 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오직 일체 얽어매서 그들로 하여금 각각 서로 견제하여 아무쪼록 무사하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봅니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병 증세가 변하면 약도 바꾸어 써야 합니다. 한 가지 처방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옛것이 혹 시세에 적합하지 않으면 개혁할 수 있으며 새것이 혹 풍속에 불편하다면 역시 참작해서 수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옛 법이 다 못쓰게 되었고, 그렇다고 새 법이 실행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새 법도 아니고 옛법도 아닌 가운데 법 자체가 실종된 나머지,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것이 지난날보다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인재를 발탁해서 등용하는 데에 원칙이 없다보니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벼슬길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세를 줄이고 덜어준다는 것은 명색뿐이고 긁어드리는 길은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법규는 더욱 번거롭게 되어 있으나 법관들은 법조문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데 교묘하며 여러 가지로 법을 바꾸어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일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계지(租界地)가 국내 여기저기에 두루 있다 보니 다른 풍속과 섞여 살고 있으며 상업의 이권은 외국 사람에게 빼앗겨 백성들의 생산이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풍년은 들어도 곡식은 귀하여 백성들은 부황이 들고 있는 형편이며 화폐가치도 떨어지고 물가는 올라 물자의 유통이 막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잇달아 발생하여 궁지에 몰린 백성들을 이루 다 처벌할 수 없는 지경이고, 소요가 멎지 않고 있으므로 출동한 군사를 철수할 시기가 없습니다.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근심스럽고 걱정거리여서 엉망진창이 되고 있으니 어디에다 손을 댈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관건이 되는 문제를 찾아 한 번만 해결하면 그에 따른 많은 일들이 함께 펴질 것이니 그것도 바로 잠깐 사이에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말한 네 가지가 바로 그 관건이 되는 일입니다. 법령이 서고 재정이 넉넉해지고 군사 제도가 정돈되고 외교가 평화스럽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어찌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원래 어리석어서 애당초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릇되게 특별한 은택을 입었으나 이제까지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근심스러운 일이 날로 심하고 모든 일이 날로 글러지고 있는 때를 당하였으니, 아는 것이 있으면 감히 외람된 죄를 피하느라 그 소견을 감춰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속마음을 다 진술하니 폐하는 살펴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현재의 사태에 대하여 본대로 언급한 것은 명백하고 세밀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바로잡는 방도를 말한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깊은 사려는 나라를 근심하고 짐을 사랑하는 정성이 극진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마음에 새겨 두고 유의하겠다."
하였다.

 

11월 1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시종원(侍從院) 호위군(扈衛軍)을 호위대(扈衛隊)로 칭하고 총관(總管)에게 편제(編制)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호위 총관(扈衛總管) 이종건(李鍾健)이 아뢰기를,
"조칙(詔勅)을 받고서 호위군(扈衛軍)을 호위대(扈衛隊)로 개칭하고 그 위관(尉官) 이하 편제를 삼가 별단(別單)에 갖추어 써서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별단에 의하면, 호위대의 정원은 총관(總管) 1인(人), 정위(正尉) 2인, 부위(副尉) 4인, 향관(餉官) 1인, 정군관(正軍官) 6인, 부군관(副軍官) 6인, 참군관(參軍官) 12인, 상등병(上等兵) 16명(名), 병졸(兵卒) 584명이었다.】


【원본】 40책 36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7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서운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일 태묘(太廟)에 가서 전알(展謁)하겠다. 긴요하지 않은 시위(侍衛)는 그만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발인(發引) 때와 하현궁(下玄宮) 때에 각 국의 공사(公使)와 영사(領事)들이 조문할 것이니,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 외부 협판(外部協辦) 유기환(兪箕煥), 학부 협판(學部協辦) 고영희(高永喜), 궁내부 고문관(宮內府顧問官) 르 장드르〔李善得 : Le Gendre, Charles William〕를 시켜 영접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양력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종1품 조경호(趙慶鎬), 종2품 이용익(李容翊)·김종규(金宗圭)·이교준(李敎駿)·심상찬(沈相瓚)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되 조경호(趙慶鎬)는 2등에, 이용익(李容益)은 3등에, 김종규(金宗圭) 이하는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인산(因山) 때의 도로와 교량 수축비 및 각 항목으로 쓰일 비용 1만 2,612원(元), 인장(印章)에 들어가는 황금과 천은(天銀)의 대가(代價) 1만 9,680원, 장생전(長生殿) 내에 있는 이전의 수어청(守禦廳) 창고를 이건하는 비용 및 물종(物種) 운반비와 길을 닦는 비용 8,000원, 경인(京仁) 철도 경계선의 경성(京城)으로부터 강 머리까지 땅값 5만 6,786원, 경기 재판소(京畿裁判所)를 신설하는 비용 1,261원 남짓, 무안부(務安府)와 삼화부(三和府) 두 항구의 경비 및 경무서(警務署)의 경비, 제주군(濟州郡)의 신설 경비, 제주목(濟州牧)의 주사(主事) 봉급, 대정군(大靜郡)과 정의군(旌義郡)의 향장(鄕長) 설치와 지방의 별순교(別巡校) 청사(廳使)를 설치하는 비용 8,969원 남짓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전(前) 무안군·삼화군의 본 년도 경비의 나머지 액수 1,471원 남짓을 다시 국고에 넣는 사안, 예비금 가운데서 20만 원을 첨가 계산해서 분배하여 쓰는 것에 대한 사안을 토의를 거친 뒤에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11월 1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황후(皇后)의 인봉(因封) 때 의식은 사체(事體)로 보아 특별하니, 짐이 장차 황당(皇堂)에 나가서 곡하며 영결해야겠다. 응당 행해야 하는 의절(儀節)을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역대의 전례(典禮)를 참고해서 마련(磨鍊)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어찌 동궁(東宮)과 같은 심사가 있겠는가? 성의를 다하고 예를 다하기를 지극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원통해하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다. 짐이 경인년(1890)에 실행하지 못한 것을 돌이켜 보면 마음이 아프니,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행해진 전례라는 이유로 동궁을 막을 수 없다. 동궁은 하현궁(下玄宮) 때 맞춰 나갔다가 신련(神輦)을 따라 환궁(還宮)할 것이다."
하였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빈전(殯殿)의 각 제전(祭奠)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고, 이어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빈전 제조(殯殿提調) 김규홍(金奎弘), 국장 제조(國葬提調) 홍순형(洪淳馨)이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세월이 빠르게 흘러 산릉(山陵)의 금정(金井)을 이미 열고 발인(發引)할 시기가 가까워졌으니, 성상께서는 슬픔이 더욱 크실 줄로 압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슬픔을 억제하기 어렵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삼가 조칙(詔勅)이 내린 것을 보니, 황당(皇堂)에 친림(親臨)하겠다고 명(命)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추운 계절에 원교(遠郊)에 나간다면 옥체에 필경 손상이 많을 것입니다. 이 점을 신들이 몹시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을 거두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리로 볼 때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11월 18일 양력

천지(天地),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사직(社稷), 경모궁(景慕宮)에 대행 황후(大行皇后)의 발인(發引)과 관련하여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황당(皇堂)에 친림(親臨)하겠다고 한 명(命)을 도로 거두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장례를 치르는 마당에 황당에 나아가 곡하고 영결하려는 것은 정리로 볼 때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경들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황당(皇堂)에 친림(親臨)하겠다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짐과 동궁(東宮)의 오늘날 정리는 천하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슬픈 생각과 동궁의 원통한 마음을 그나마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것은 이 한 가지 일뿐이다. 설사 국조(國朝)에서 드물게 거행하던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경들이 이러한 정리를 생각한다면 아마 이처럼 번거롭게 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들은 잘 헤아리라."
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동희(趙同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서상조(徐相祖)를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1월 19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을 지내고 겸하여 빈소(殯所)를 여는 제사를 지냈다. 미시(未時)에 찬궁(攢宮)을 열었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재차 구주(口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전 비답과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나의 의도를 다 말하였으니 경들은 응당 이해했을 텐데 이어 다시 두 번이나 번거롭게 구니 실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어찌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거스르려고 굳이 이처럼 하겠는가? 경들은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마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재차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거듭 아뢰며 간청을 그치지 않는 것이 짐이 어찌 그것이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겠는가마는 지극한 정리는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다를 것이 없으니, 노성(老成)한 경들은 아마 지극한 정리를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그러니 다시 제기하여 짐이 번거롭게 답변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를 인산(因山) 때의 대련(大轝)의 별배종(別陪從)에,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종건(李鍾健)을 별시위(別侍衛)에 임용하였다.

 

정2품(正二品) 김영철(金永哲)과 종2품(從二品) 민병승(閔丙承)·이승우(李勝宇)·민영국(閔泳國)·이용한(李用漢)·구연욱(具然郁)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김영철은 2등에, 민병승 이하는 4등에 서임하였다.

 

황태자가 하령(下令)하기를,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지금까지 살아있으면서 복수할 의리를 펴지 못하고 인산일(因山日)을 어느덧 당하게 되니 하늘땅을 우러러 보고 굽어보면서 슬픈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다만 생각건대, 힘을 내서 나라 일을 돕는 것은 바로 백성이 되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본다. 그러나 옛날에 대행 황후(大行皇后)가 평상시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는 데 대해 간곡한 가르침을 나에게 주신 것을 기억하니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애통한 와중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뜻을 받들어 백성들의 힘이 펴지도록 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여사군(轝士軍)이 이 첫 추위를 만나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으니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돈 6만 냥(兩)을 내려 보내니 총호사(總護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배왕대장(陪往大將)이 적당히 나누어 주어 백성들을 돌보는 뜻을 보여 주어라."
하였다.

 

11월 20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빈전(殯殿)의 각 제전(祭奠)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빈전에 나아가 사전(辭奠)을 행하였다. 뒤이어 조전(祖奠)을 행하였는데, 황태자(皇太子)가 따라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세 번째 구주(口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잠시 다녀오는 것에 불과하니 우려할 것이 없다. 경들은 짐의 슬픈 마음을 양해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명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노정(路程)이 10리(里)에 불과하고 소요 시간도 하루가 안 되니, 짐이 직접 가서 영결하고 슬픈 마음을 펴고자 하는 것은 인정으로써 헤아려 볼 때 결코 억지로 만류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경들은 노성한 사람들이니 헤아려 주리라 믿는다."
하였다.

 

정2품(正二品) 김병익(金炳翊)·김학진(金鶴鎭)·이용익(李容益), 종2품(從二品) 황기연(黃耆淵)·남치원(南致源)·홍병덕(洪秉悳)·구연창(具然昌)·백낙윤(白樂倫)·구종서(具鍾書)를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김병익 이하는 2등에, 황기연 이하는 4등에 서임하였다.

 

11월 21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해사제(解謝祭)를 지내고 나서 견전(遣奠)을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대행 황후(大行皇后)의 영가(靈駕)가 산릉(山陵)으로 떠났다.

 

인화문(仁化門) 밖에 나아가 곡하고 영결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따라가 하직하였다. 이어 산릉(山陵)에 나아가 경숙(經宿)하였는데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경숙하였다.

 

11월 22일 양력

진시(辰時)에 천전(遷奠)과 하현궁(下玄宮)을 행하고, 이어 입주전(立主奠)을 지내고 반우(返虞)를 행하였다.

 

대행 황후(大行皇后) 지문(誌文)의 어제 행록(御製行錄)을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 황후의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 향은 여흥(驪興)이다. 시조는 칭도(稱道)인데 고려(高麗) 때 상의 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 3대(三代)는 영모(令謨)인데 벼슬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상주국 대사(上柱國大師)이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었다. 4대는 종유(宗儒)인데 벼슬은 중대광 찬성사(重大匡贊成事)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문경과 충순은 고려사(高麗史)에 전한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심언(審言)은 개성 부유수(開城副留守)이고, 충원(沖源)은 은일로 집의(執義)를 하였다. 3대(三代)인 제인(齊仁)에 이르러 호(號)는 입암(立巖)이고 좌찬성(左贊成)이었다. 또 4대인 광훈(光勳)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로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유중(維重)은 호를 둔촌(屯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낳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을 봉하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로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으며 효종(孝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다.
진후(鎭厚)의 호는 지재(趾齋)인데 좌참찬(左參贊)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사려가 깊고 계책이 많아 나라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경종(景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는데 이가 황후의 5대 조상이다.
고조(高祖) 익수(翼洙)는 은일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선비들에게 도를 강론하여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었는데 학자(學者)는 숙야재(夙夜齋)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曾祖) 백분(百奮)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받았는데 강의하고 과감하여 바른 말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조부(祖父) 기현(耆顯)의 호는 이송(二松)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효우(孝友)와 청검(淸儉)으로 당대에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 치록(致祿)은 호가 서하(棲霞)인데 첨정(僉正) 벼슬을 지냈으며 여성부원군(麗城府院君)        영의정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순간(純簡)이었다. 학식(學識)이 많고 연원(淵源)이 있었다.
원배(元配)인 해령부부인(海寧府夫人)        오씨(吳氏)는 은일로서 찬선(贊善)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은 문원공(文元公) 희상(熙常)의 딸이었으며, 계배(繼配)인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는 이조 판서로 추증 받은 규년(圭年)의 딸인데 이조 판서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정공(忠貞公)으로서 호가 창곡(蒼谷)인 현영(顯英)의 후손이다.
한창부부인이 신해년(1851)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 자시(子時)에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의 사제(私第)에서 황후를 낳았다. 이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었다.
황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떳떳하였으며 과격하게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다. 처녀들이 꽃을 꺾어서 벌레를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이 새끼를 부리고 숨쉬게 하고 잘 기르는 것은 너희 부모가 너희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순간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만 듣거나 보면 빠짐없이 모두 알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 정사에 대한 득실(得失)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 혹은 《사승(史乘)》이나 《보감(寶鑑)》에 실려 있지 않은 것까지도 황후는 능히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정의 견문이 본래 있었기 때문이니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라서 도운 것이 많은 것은 평상시에 공부한 힘이다. 9세 때 순간공의 초상을 당해 곡읍(哭泣)의 초상 범절은 마치 성인(成人)과 다름없었다. 염할 때에 집안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양례(襄禮) 때에도 일을 끝마치고 곡을 실컷 한 다음에야 물러갔다. 부부인(府夫人)의 초상 때에도 장례와 관련한 모든 자재들을 집안에서 마련하였고 도가 넘도록 슬퍼하였으며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초상 때에도 마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황후의 효성과 우애는 대체로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을축년(1865)에 안국동(安國洞) 사제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 성모가 옥규(玉圭) 하나를 주면서 하교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역시 같았다. 성모가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가묘(家廟) 앞에 소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었는데 이 해에 묵은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났고 옥매화가 다시 피었다. 황후의 집은 바로 인현 성모의 집이다. 대청이 있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하였다. 옛날 우리 영조(英祖)가 여기에 와서 우러러보고 절한 다음 친필로 현판을 써서 성모가 일찍이 있던 곳에다 걸어놓았다. 덕 있는 가문에 경사가 나고 상서로움을 보여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병인년(1866)에 선발되어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의 책을 공부하는데 밤이 깊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천성(天性)이었다.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왕비로 책봉되고 다음 날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왕후(王后)가 입궁하여 우리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환히 알아서 반드시 먼저 문의한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성모가 늘 말하기를, ‘곤전(坤殿)은 효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성모가 나이 많아지자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것 외에도 일상생활과 접대하는 절차를 반드시 적절하게 하였다.
경인년(1890) 환후(患候) 때에도 황후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안마하였다. 성모가 그의 수고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돌아가 쉬라고 말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침전(寢殿)의 탕제(湯劑)와 수라(水剌)를 황후가 권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올리는 시간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성모가 손을 잡고 하교하기를, ‘나는 늙고 또 병이 심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백성들과 나라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있고 안의 일에 대해서는 곤전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모의 초상을 당하자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일을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였고 궤전(饋奠)을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다. 또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더없이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힘썼다. 일찍이 성모가 좋아하는 것을 얻었을 때에는 반드시 효모전(孝慕殿)에 올렸다. 부묘(祔廟) 때에 휘장도 황후 자신이 손수 만들었다.
늙은 궁인(宮人)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눈앞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슬프다.’라고 하였다. 황후는 성모를 종신토록 사모하였다. 묘궁(廟宮)과 능원(陵園), 여러 산천(山川)에 제기(祭器)가 모자라고 제수(祭需)가 넉넉하지 않으면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것을 내서 보충하였다. 기신제(忌辰祭)에도 반드시 성복(盛服)을 갖추고 밤을 지새웠으며 개인 제사에도 그렇게 하였다.
매해 음력 2월 달에는 북원(北苑)에서 친잠(親蠶)한 것을 제명(齊明)하여 바쳤다. 북원에 과일이 처음 익으면 햇것을 먼저 올려 제사에 쓰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친척들을 사랑하니 멀고 가까움이 없이 모두 다 기뻐하였다. 혹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하라.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주겠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황후가 화목할 것을 숭상한 것이다.
계유년(1873)에 황후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자시에 열리더니 오색구름이 영롱하였다. 하늘에서 글을 내려 보내서 말하기를, ‘만년토록 태평하라.’고 하므로 황후는 절하고 받았다. 다음해 황태자(皇太子)가 태어났다. 황후는 황태자에게 온정과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면서 옳은 방도로 가르치는 것이 엄하기가 스승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책을 주었고 글을 터득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다. 황후는 매번 강론한 문의(文義)를 물었으며 날마다 통상으로 행하는 일로써 비유를 설정하여 그 뜻을 명백히 깨닫게 하였다. 반드시 이해하고 분석하게 할 때에는 다시 그와 관련된 뜻을 더 찾아 토론하게 해서 되도록 자세히 알고 공고히 기억하기에 힘썼다. 오늘 훌륭한 학문을 성취하게 된 것은 황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고 궁중을 인도하는 데 있어서 화목하고 임금을 도와주는 그 덕화는 애애하기가 봄날의 화기와 같았다. 자기 소생이 있게 되자 은혜가 갖추어져 더 지극하였다.
온 나라에 수재와 한재의 재변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너그럽게 돌봐주기에 힘썼고,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에는 수도의 빈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을 해마다 떳떳한 일로 여겼다. 빈한하여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돌봐주었다.
병자년(1876)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세를 감면해 주었고 경비가 궁색하면 돈과 곡식을 내주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호위 군사들이 고통을 겪고 밖에 나가 있는 군사들이 한지에서 지낼 때에는 특별히 호궤(犒饋)하여 수고로움을 위문하였는데, 사자(使者)가 연이으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늘 액례(掖隷)들에게 불을 조심하게 하였으며 진기한 물품이 없어져도 한 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진전(眞殿)과 남전(南殿) 은그릇을 잃어버렸는데도 곧 안에서 주조해 주도록 하고 사람들을 따져서 신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고한 사람이 걸려들까봐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엄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이니 궁중에서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이 황후의 인자하고 두터운 혜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집안에서 대대로 의리를 강론하니 황후가 어려서부터 배운 점이 있어서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으므로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짐을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하니 각 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한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짐을 도와서 말한 것이 있는데 근년에 지내면서 보니 모두 황후가 일찍이 말한 것이 일마다 다 징험되어 딱딱 들어맞았다.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에 대한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통달한 지식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으며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황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환어(還御)하자 혹자가 아뢰기를 군란을 일으킨 군사에 대해서는 깡그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황후가 이르기를, ‘내가 덕이 없고 또한 운수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 무리들이 한 짓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크게 포용하면 덕은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황후의 덕이 그러한 것이다.
갑신년(1884) 적신(賊臣)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가 난리를 일으켜 변란이 일어났다 거짓말을 하여 전궁(殿宮)이 파천(播遷)하고 나라 형편이 위급하기가 호흡 사이에 있었다. 이보다 먼저 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는데 그 세력이 확대되자 여러 역적들이 각자 서로 서로 의심하며 도망쳤으므로 난리가 곧 평정되었다. 황후는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世子)를 보호하였는데 황급한 와중에도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황후가 평상시 은혜로 돌봐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용감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1894)에 외국 군사가 대궐에 들어오므로 짐이 황후와 태자에게 건청궁(乾淸宮)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함화당(咸和堂)에 돌아와 말하기를, ‘한 궁궐 안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칼자루를 잃어서 이미 역적의 머리를 베지 못할 바에야 우선 포용해서 그 흉악한 칼날을 늦추어 놓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역적들이 이어 헌장(憲章)과 제도를 고치고 크고 작은 제사도 다 줄였다. 황후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줄이거나 늘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역적들은 이미 하늘과 귀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가득하다.’고 하면서 진전(眞殿)에 제사지내는 물품을 한결같이 옛 규례대로 하였는데 황후가 액례를 신칙하여 여러 역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언급하여 거듭 신칙하면서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편안하고 위험에 처하는 것은 오직 인재를 잘 쓰는가 못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전적으로 임명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체로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하는 것 같으므로 이 때문에 요(堯) 순(舜)도 사람을 아는 것을 어려워하였으며 심지어 그 간사한 것을 의심하면서도 우선 임용(任用)하게 되면 이것은 화를 빚어내는 원인이다.’라고 하였다.
짐이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정병하(鄭秉夏)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외국 군사를 몰래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대를 남모르게 사주하여 을미년(1895)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一念)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景福宮)의 곤녕합(坤寧閤)에서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 묘시(卯時)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과 황후가 곤녕합 북쪽의 소헌(小軒)에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 안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 ‘원컨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위급한 중에도 종묘 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이번 장례와 관련하여 의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물과 휘장 등속은 대내(大內)에서 마련하여 쓰고 탁지부(度支部)의 재물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황후가 그 전에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한 지극한 뜻을 체득하게 하라.
김홍집과 정병하 두 역적은 사형(死刑)을 하였으나 유길준과 조희연 두 역적은 다 도망쳐서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황태자가 복수하려는 심정이 참으로 보기 안타깝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무덤 자리는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아래 간방(艮方)의 언덕에 정하고 광무 원년(光武元年) 정유년(1897) 10월 28일 갑신일(甲申日) 진시(辰時)에 장례를 지냈다. 석물을 세우는 공사는 우선 오른쪽을 비워 놓는 제도를 쓰지 않았지만 짐의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이다. 재궁(梓宮) 위의 글자는 황태자가 공경히 썼고 하현궁 명정(銘旌)은 짐이 직접 썼다. 이렇게 해서 효성스런 생각을 펴고 슬픔을 다소나마 풀 수 있을 것이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조신(朝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효자(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존호(尊號)를 더 올려 ‘원성 정화 합천(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에는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명(明) 나라 이후에 천하의 예악(禮樂)이 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과 선비들, 백성들과 군사들, 저자 사람들이 일치한 말과 같은 목소리로 수십 통의 상소를 올리기에 짐이 사양을 여러 차례 하였으나 더 할 수가 없어서 바로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아 사직(社稷)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고쳐 쓰고 금보(金寶)와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명(命)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황태자는 둘째 아들이다. 좌찬성으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문공 민태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맏아들과 셋째 대군(大君), 넷째 대군, 그리고 딸 하나 공주(公主)는 모두 일찍 죽었다. 완화군 선(完和君瑄)은 장가도 못 들고 죽었고, 의화군 강(義和君堈)은 지금 군수(郡守)        김사준(金思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옹주(翁主) 둘이 있었으나 다 죽었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萬代)에 훈계로 삼을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와중이라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황태자가 지은 행록(行錄)이 있는데 거기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백대(百代)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
하였다.
황태자가 행록(行錄)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슬프고 슬프다. 사람으로서 누군들 부모가 없으며 부모로서 누군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지극히 자애로운 은정은 어머니가 소자에게 베푼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지극히 비통한 슬픔은 소자가 어머니에 대한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소자가 이미 성장하였으나 여전히 어루만져 주는 것은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하였다. 주리거나 배부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할 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먼저 알았으며, 병이 있으면 음식을 들고 잠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소자가 극심한 통증이 아니면 억지로 밥을 먹였으며 밤에는 풋잠을 자면서도 나의 근심어린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몰래 살펴보면 밤에도 방 안의 불빛이 환희 비쳤고 말소리가 낭랑하였다.
소자가 천연두를 앓을 때에 어머니가 밤에 꼭꼭 밖에 나가 하늘에 빌었으므로 이내 다시 회복되었으며, 소자가 일찍이 옆구리의 담핵(痰核)으로 고통을 겪을 때 몹시 아프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먹는 데에 방해되자 어머니는 오래되면 혹 종기가 터질 까 늘 걱정하면서 침을 바르라고 가르쳐 주어 딱딱했던 것이 가라앉아 마침내 평상시와 같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보지 못하였다. 소자가 겨우 젖니를 갈 때 어린 궁인(宮人)과 뜰에서 놀이를 하는데 어머니가 이르기를, ‘너는 이 놀이를 즐기는가?’라고 하고는 또 ‘이보다 즐거운 것이 있다.’라고 하면서 문득 글자를 써서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공부할 나이가 된 후부터 서연(書筵)에서 강론한 것을 어머니가 매번 그 문의(文義)를 찾아서 풀어 주었으며, 비근한 일을 들어 반복 비유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깨달아서 마음으로 기뻐할 때 비로소 다음에 배울 단계로 넘어 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나라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정교(政敎)와 모훈(謀訓)을 가르쳐 주기에 힘썼으므로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여 곁에서 듣는 것 같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꾸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요령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체로 몸에 배고 골수에 젖어 몸소 체득하여 실행하기에 절실하였으며 더욱이 운수를 찾는데 힘을 써서 터득하였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효성스러워서 선조를 받드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외조부 순간공(純簡公)의 묘지를 옮길 때에 상지관(相地官)들이 아뢰기를, ‘아무 곳에 좋은 묘(墓) 자리가 있는데 남의 무덤을 옮겨야 합니다.’고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같은데 어찌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을 해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좋은 묘(墓) 자리를 보령(保寧)에 정했을 때 길이 너무 멀어서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도 타산하지 않고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재력을 내서 마련하였으며 공물(公物)과 백성들의 노력은 하나도 참여시키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안의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영구가 지나가는 길의 논밭 곡식이 손상되는 것과 조각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반드시 다 해당한 값을 넉넉히 주었으니, 백성들의 생계를 돌보는 어머니의 훌륭한 생각은 어디에나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소자에게 가르치기를, ‘나라가 있는 것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나라를 영위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혹시 위에서 백성을 돌보지 못한 관계로 곤궁해져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백성은 우리의 백성이 아니니 비록 백성이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백성에 대한 문제로 마음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릴 때여서 그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래도 가르친 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이 훈계를 더욱 깨닫게 되니 만대(萬代)의 귀감으로 여길 만하다.
어머니의 공로와 덕은 천지(天地)처럼 이름할 수 없으니 책봉하는 글로 찬양하고 성대한 의식을 빌려 기뻐하는 것은 우리 왕실의 떳떳한 법이다. 소자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하였고 심지어 조정의 관리들을 인솔하고 삼가 요청하였으나 매번 백성들이 현재 곤궁하기 때문에 이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었다. 겸손한 그 덕은 공경히 우러르게 되고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자식으로서 이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 여한은 일생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은 옛 규례이다. 소자가 일찍이 안에서 여러 차례 간곡하게 청하여 대체로 장수한 사람을 데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년 장수를 빌었다.
계사년(1893)에 영조(英祖)가 이미 실행한 전례를 따라 내외에 잔치를 차리고 노인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춤을 추며 만수를 축원하였다. 그 때 이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넓고 큰 은택을 입고 살아있는데 오직 우리 어머니만이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임오년(1882) 6월에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창황한 가운데 행차가 길을 잃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지 한 달이 되었으나 의심과 위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서 감히 이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서상조(徐相祖)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누추한 곳에 숨어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충주(忠州) 장후원(長厚院)에 있는 충문공(忠文公)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가서 맞이하여 8월 1일에 환어(還御)하였다.
갑신년(1884) 역적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의 무리들이 변란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니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하고 위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소자가 신정 왕후(神貞王后)와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동성(東城) 밖으로 피난 갔는데 어머니가 소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진실로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의심한다. 이 무리들을 죽이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역적이 과연 평정되었다.
갑오년(1894)에 여러 흉적들이 조정을 뒤엎고 조종(祖宗)들이 이루어놓은 법을 다시 남겨두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줄였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때에 따라서 가감하는 것은 시대에 적절하게 하려는 것이며 일부러 바꾸어서 전과 다르게 하자는 것은 아닌데 지금 일체 변역하였으니 어찌 모두 실행하겠는가? 또한 제사는 천지(天地)와 조종을 섬기는 것이다. 흉악한 무리들의 악행이 이미 가득 찼다. 원통하고 원통하다.’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8월 20일 사변은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것이다. 아! 저 김홍집(金弘集)은 실로 우두머리 군흉(群凶)이며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은 한 패거리로서 결탁하여 흉악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는데 형적(形跡)이 상세히 폭로되었다. 어머니가 급히 피하려고 하니, 정병하가 길을 막으며 피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외국의 군대가 대궐에 난입하였는데 정병하가 이렇게 주청한 것은 우리의 난군(亂軍)을 중지시키려 한 것뿐이었다. 아! 네 흉적의 심보는 모두 한결같지만 그 중에서도 정병하는 더욱 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자이다. 외국 군대가 와서 호위했다는 거짓 조서(詔書)를 22일에 자기가 써서 임금에게 강제로 반포하게 하였으니 조서는 다 네 역적이 만든 것이다. 네 역적의 죄는 그 잔당을 남김없이 씨를 말린다 한들 어찌 소자의 끝없는 통한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는가? 김홍집과 정병하는 이미 처단하여 형률을 바로 적용하였지만 유길준과 조희연은 법망에서 새어나갔다. 내가 거상 중에 있으면서 군사와 나라를 위하여 흉적을 처단하지 못했으니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다 같이 이에 종사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만약 혈기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리도 같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황제 폐하의 높은 공훈과 훌륭한 덕은 하늘의 운수와 배합되어 능히 대업(大業)을 넓혔고 자주권(自主權)을 행사하였다. 모든 백관(白官)과 군민(軍民)들이 한 목소리로 황제 폐하에 오르기를 우러러 청하였는데 굳이 사양하다가 사람들의 여정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빈전(殯殿)의 의장과 기물은 다 황색을 써서 법도대로 하였으나 황후 폐하 자신이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끝없는 나의 비통함은 더욱 망극함이 간절하다.
황제 폐하가 친히 지은 행록에서 지극하고 극진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자애로움과 소자의 지극히 비통함을 더 자세히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중복됨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또한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역시 감히 그만둘 수 없었다. 생각건대, 우리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다."
하였다.
묘지문의 행록(行錄)에,
"신 민영소(閔泳韶)는 삼가 대행 황후 지문 제술관(大行皇后誌文製述官)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공하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조지(詔旨)를 받드니, 이르기를, ‘행록을 짓고 이어 지문을 짓는 것은 명릉(明陵)은 신사년(1881), 홍릉(弘陵)은 정축년(1877)의 전례에 이미 있다. 지금 행록을 내려 보내니, 지문에는 동궁(東宮)이 몹시 슬퍼하는 것을 쓰겠지만, 또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을 거두어 모아 더욱 상세하게 쓸 것이다. 백대(百代) 후에 가서도 반드시 그 뜻을 슬퍼하고 그 효성을 탄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일체를 지문의 뒤에다 새기도록 하고 역시 제술관을 시켜서 그 사실을 밑에다 첨부하여 자세히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히 받아 읽어보고 칭송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으며 계속하여 눈물이 흘러 두 볼을 적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제 폐하가 간곡히 돌보며 슬퍼하는 생각은 장례까지 극진하게 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며 심지어 광중에 들여 놓는 글에서까지 해와 별처럼 밝게 비쳐 주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황태자의 효성은 타고난 천성으로서 끝없는 비통한 생각을 품고 원통함을 생각하면서 격려하는 뜻이 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 이미 짓고 또 지었으니 그 훌륭한 글이 간결하면서도 실속이 있어 마치 천지가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가까운 시일에 친밀하게 명령을 받은 것과 수십 년 동안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모범이 장차 역사에 기록되고 내세에 명령이 될 것에 의하여 귀와 눈으로 직접 본 것만 해도 그 만 분의 일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때문에 신은 한 자(字) 한 구(句)가 친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감탄합니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큰 덕은 반드시 얻는다.〔大德必得者〕’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성현(聖賢)이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황후의 인자하고 착한 공로와 덕은 마땅히 하늘이 도와주어 영원히 늙지 않도록 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복록과 은택을 영원히 받게 해야 할 것인데 이어 위험한 구렁텅이에 빠져 간고한 시련과 위험한 고비를 겪더니 심지어 만고천하(萬古天下)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더없이 흉악한 참변까지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이 마당에서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바로 하늘인데 하늘 역시 때에 따라서 비운과 암흑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체 세상의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 재앙과 복을주재하지 못하고 괴이하고 간사한 것을 반드시 쳐 없애지 못하니 하늘도 과연 믿을 수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예로부터 흉악한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을미년(1895)의 여러 역적들과 같은 큰 역적이 있었겠습니까? 을미년의 변란은 갑신년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구차하게 그럭저럭 살아가다보니 능히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성토하여 남김없이 처단하지 못한 까닭에 마침내 가장 흉악하고 포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서로 은밀히 결탁하여 선왕(先王)들의 법도를 변경시켜 하나의 큰 사변을 무르익게 하였습니다.
무릇 신하된 사람치고 누가 감히 그 죄에서 빠져 나가겠습니까? 두 역적은 이미 처단했지만 절대로 나라의 법을 통쾌하게 적용하고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괴수가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가 아직도 천지간에 숨 쉬고 있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 그의 피를 마시기를 원하는 것은 먼 데나 가까운 사람이 구별이 없고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오직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참고 견디면서 저 푸른 하늘을 함께 이고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치는 이미 없어졌고 의리도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여 무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나라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라의 규칙이 무너진 것이고 형벌에 관한 정사가 폐지된 것입니다. 설사 나라가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입니다.
황태자가 일찍이 조정에서 신하들을 면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라를 나라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뜰에 가득 찼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몸 둘 바를 몰라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소문이 구역에 두루 퍼져서 거리의 아이들까지 무시로 일을 따르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며 역시 《춘추》의 법을 능히 말하였습니다. 신은 반드시 여러 역적들을 앞으로 나라에서 처단하여 그 죄를 똑바로 밝히고 큰 의리를 천하에 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나라의 큰일이며 황태자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남긴 뜻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행 황후는 평상시에 좋은 계책과 좋은 훈계로 충효(忠孝)를 숭상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젖어 있으니, 우리나라 만대의 왕업에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황제는 용맹과 지략은 하늘이 내놓은 것으로서 큰 국난을 평정하고 비로소 자주권을 세웠으므로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왕위를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습니다. 황후는 실로 보배로운 존호를 받았으니 이것은 큰 덕을 지닌 분에게 하늘이 보답한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고 또 감히 외람되다고 해서 스스로 막고 나서면서 빠질 수도 없습니다. 신이 편벽되게 은혜를 입어 친필로 ‘한 마음으로 폐하(陛下)를 섬기라.’는 글을 써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많이 입었으나 우러러 생각할 때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아! 슬픕니다."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소(閔泳韶)가 지어 올린 것이다.】


【원본】 40책 36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8면
【분류】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신련(神輦)이 떠나갈 때 동궁(東宮)이 마땅히 위내(衛內)에서 배봉할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지금 대례(大禮)는 거행하였으나 여러 해 동안 토목 공사를 방대하게 진행하였기 때문에 설사 도감(都監)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거행하고 백성들의 노력을 쓰지 않도록 하였지만 부근의 경기(京畿)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친 것이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내부(內部)에 통지하여 해당 관찰사(觀察使)와 양주 군수(楊州郡守)에게 알아보게 하고, 무릇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돌봐주는 정사와 관계되는 것은 충분히 강구하여 실제 혜택이 있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백성을 보호해 주는 지극한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에 여사군(轝士軍)이 정성을 다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지난번에 동궁이 뜻을 표시하기는 하였으나 지금 곤란한 정상을 놓고 보면 필시 폐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니, 더욱 생각되는 바가 있다. 의정부에서 시혜(施惠)를 하고 폐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쪽으로 아뢰어 돌봐주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도로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고 석상식(夕上食)을 올리고 나서 첫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재실(齋室)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 총호사(總護使) 조병세(趙秉世), 빈전 제조(殯殿提調) 김규홍(金奎弘), 국장 제조(國葬提調) 홍순형(洪淳馨), 산릉 제조(山陵提調) 김종한(金宗漢),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오익영(吳益泳), 양주 군수(楊州郡守) 임원호(任原鎬)이다.】  인산한 뒤에 위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국 특파공사(特派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신임장(信任狀)을 봉정(奉呈)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인봉(因封) 때문이었다. 그 전문(全文)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움을 받아 대대로 몰려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대일본국 대황제는 위엄과 덕이 높은 좋은 벗인 대한국(大韓國) 대황제 폐하에게 공손히 말씀드립니다. 짐(朕)은 폐하(陛下)가 대황후 폐하의 인산을 거행하는 때를 당해서 특별히 귀국에 주차(駐箚)하는 판리공사(辦理公使) 정5위(正五位) 훈5등(勳五等)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에게 특파공사로서 장의(葬儀)에 참가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습니다. 또한 짐이 가토 마스오를 특파공사로 임명한 것은 그를 통해서 짐의 더없이 슬픈 마음을 전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는 이 뜻을 받아 주기 바라며 이런 때를 당해서 폐하께서도 강녕(康寧)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신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한 기원 2557년 명치(明治) 30년 11월 8일 동경 궁성(東京宮城)에서 직접 서명하고 아울러 어명(御名)이 있는 국새(國璽)를 찍었으며 외무 대신(外務大臣) 남작(男爵) 사이토쿠 지로〔西德二郞〕가 검새(鈐璽)하였다.

 

원임 제학(原任提學) 민영준(閔泳駿)에게 산릉(山陵)에 달려가서 봉심(奉審)하고 나서 그대로 머물러 안릉제(安陵祭)를 지낸 후 복명(復命)하라고 명하였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친히 경효전(景孝殿)의 재우제(再虞祭) 축문(祝文)을 친압(親押)하였다. 이어 경효전에 나아가 신백(神帛)을 지송(祗送)하였다.

 

11월 23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두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각 제전(祭奠)을 지냈다.

 

11월 24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세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각 제전(祭奠)을 지냈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11월 25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네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현직(李玄稙)을 향관(享官)으로 추가하여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네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태의원(太醫院)에서 올린 구주(口奏)에, 상선(常膳)을 빨리 드시고, 황태자(皇太子)와 황태자비(皇太子妃)에게도 상선을 회복하도록 권유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권유하겠으며 짐도 억지로나마 들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27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다섯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11월 28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다섯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사세국장(司稅局長) 이해만(李海萬)을 탁지부 회계국장(度支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3품(正三品) 오상규(吳相奎)를 탁지부(度支部) 사세국장에 임용하고 주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니 황후(皇后)의 졸곡(卒哭) 후에 부묘(祔廟)의 예식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마련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부제사(祔祭祀)의 의절(儀節)을 마련해야 하겠는데 삼가 역대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졸곡 다음날 신주를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부알례(祔謁禮)를 행하고 나서 제사를 시향(時享)의 의식과 같이 하였습니다. 예식이 끝나면 신주를 모시고 신주를 안치하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부알례 때 친림(親臨)하여 의식을 거행하고 친제(親祭)하는 절차와 황태자(皇太子)의 아헌례(亞獻禮) 절차를 규례대로 마련하였습니다. 종묘(宗廟)와 혼전(魂殿)에 고유제(告由祭)를 먼저 진행해야 하니, 제문은 시독관(侍讀官)을 시켜 짓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11월 29일 양력

오시(午時)에 산릉(山陵)에서 안릉제(安陵祭)를 지냈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육우제(六虞祭) 축문(祝文)을 친압(親押)하고, 이어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김종한(金宗漢)을 소견(召見)하였다. 능역(陵役)을 끝낸 뒤에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전 역사를 상고해 보니, 역서(曆書)에 대한 정사를 중시한 이유가 천체(天體)의 운행을 관측하여 사람들에게 시절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년부터는 역서에 응당 이름이 있어야 하겠으니 의정(議政), 대학사(大學士), 학부 대신(學部大臣),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은 두루 상고하여 의정(議定)하라."
하였다.

 

인산(因山) 때 총호사(總護使), 세 도감(都監)의 제조(提調) 이하와 각차비(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김종한(金宗漢)·민영규(閔泳奎)·이정로(李正魯)·이헌직(李憲稙)·조병호(趙秉鎬)·서정순(徐正淳)·김병익(金炳翊)·조병식(趙秉式)·김규홍(金奎弘), 도청(都廳) 조중구(趙重九),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홍순형(洪淳馨), 도청(都廳) 이시재(李蓍宰)·이문영(李文榮),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재완(李載完)·이호익(李鎬翼)·조동면(趙東冕), 도청(都廳) 이필용(李弼鎔)·정문섭(丁文燮), 금정(金井)을 열 때 흙을 떠온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동희(趙同熙), 옥백(玉帛)을 줄 때 겸장례(兼掌禮) 비서원승(祕書院丞) 정세원(鄭世源), 대거(對擧)인 비서원 경(祕書院卿) 서상조(徐相祖), 예모관(禮貌官)인 이주영(李胄榮), 상례(相禮) 서상교(徐相喬), 배종(陪從) 비서원승(祕書院丞) 정일영(鄭日永), 부첨사(副詹事) 이용선(李容善), 섭장례(攝掌禮) 이기일(李起鎰)·이용필(李容弼), 집례(執禮) 김병옥(金炳玉), 봉폐관(封閉官) 김병용(金秉庸),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윤용선(尹容善), 우주 서사관(虞主書寫官) 윤정구(尹定求), 돈체사(頓遞使) 남정철(南廷哲), 종척 집사(宗戚執事) 조동윤(趙東潤)·민영찬(閔泳瓚)·이성열(李聖烈), 찬의(贊儀) 민재덕(閔載德), 청도 한성판윤(淸道漢城判尹) 이채연(李采淵), 장례(掌禮) 이희상(李熙相), 시종(侍從) 장봉환(張鳳煥), 별군직(別軍職) 이민긍(李敏兢)·윤창근(尹昌根)·이종림(李鍾林)·이한창(李漢昌)·김동만(金東萬)·백명기(白命基), 시어(侍御) 윤석천(尹錫天), 각 국 공영사(公領事)의 반접관(伴接官) 유기환(兪箕煥)·이학균(李學均)·김명제(金明濟)·박용규(朴容奎)·이무영(李懋榮), 참령(參領) 신성균(申性均), 별간역(別看役) 강건(姜湕)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종2품(從二品) 이용익(李容翊)을 탁지부 전원국장(度支部典園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협판(軍部協辦) 주석면(朱錫冕)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지금 면직(免職)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현재의 직무를 감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지만 구구한 속마음을 드러내놓지 않을 수 없어 삼가 본부(本部)의 일을 갖추어 아래와 같이 말씀드립니다.
수년간에 장관과 동료들을 체개(遞改)한 것이 6, 7차례나 되는 관계로 부(部)의 사무가 이로 인해서 적체되고, 군졸의 대오가 이로 인해서 결속되지 않으며 명령이 집행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단합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장수로 있는 사람은 그 부를 마치 한때 머무는 여관처럼 여겨 원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옛 습관에 젖어 되는 대로 지내니 장수가 있고 군졸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적임자를 신중히 선발하여 그 임무를 전담시키고 그 직책에 오래 두어 권세 있는 관리 집에 드나드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부에서는 그 직무를 나누어 각기 그 맡은 일을 수행하게 하였으나 최근에 와서 자기 권한 밖의 일에 간섭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데도 막고 제한하는 데가 없습니다. 이에 상호 시기하고 의심하는 통에 온갖 폐단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엄격히 규정을 세워 각기 자기 일에 충실하게 하고 서로 남의 일을 침해하고 월권하는 행위를 못하게 함으로써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가게 하기 바랍니다.
군사는 수가 많지 않더라도 오직 정예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약자와 병든 사람들은 다 면제해주고 다시 나이 젊고 건장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대오(隊伍)를 보충할 것입니다. 특별히 무관 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총기 있고 준수한 젊은이로서 시세(時勢)도 밝고 경서(經書)와 역사에도 익숙한 사람을 뽑아 사관(士官)의 벼슬을 주어 교육하고 연습시켜 문무(文武)를 겸비하게 할 것입니다.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더 설치하여 해당 지방에서 뽑게 한다면 풍속에 익숙하고 노정에 익숙하여 만약 급한 사변이 있을 때에도 방어와 수비가 편리할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노략질하는 부류들에 대해서도 잡아치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에 관한 정사에서 가장 급선무는 재정과 군량입니다. 경비는 애초에 확정된 금액이 없이 매달 탁지부(度支部)에서 지급받아서 구차하게 쓰고 있으니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갑자기 우환이 생겨서 뜻하지 않는 사변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군수(軍需)를 공급하겠습니까? 규칙(規則)을 개정하여 탁지부에서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경비를 본 부에 계산하여 떼 주면 거의 궁박한 상태에서 벗어나 애로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인재 등용하는 데는 어진 사람을 쓰는 것에 전혀 편벽되거나 치우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정부에서 습관과 풍속에 구애되어 인재를 쓰는 데 재주를 묻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품계가 높은가 낮은가를 보고 문벌이 있는가 없는가만 보다 보니, 어진 사람들이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되어 충의(忠義)를 장려하고 권면할 길이 없습니다. 급히 이런 현상을 고치고 재주에 따라 가려 등용하여 온 세상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애초의 공정한 원칙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책임을 맡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갑자기 해임시키겠는가? 진술한 여섯 가지 조목은 시기에 꼭 맞는 문제를 아뢴 것이니, 매우 가상히 여겨 유의하겠다. 사직(辭職)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11월 3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여섯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손히 칙지(勅旨)를 받고서 역서(曆書)의 이름을 토의하여 ‘명시 일원(明時一元)’이라고 의정(議政)하여 들입니다. 삼가 폐하(陛下)께서 결재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역서에 《명시(明時)》 두 글자로 이름을 지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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